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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369 불교 (금칠십론/金七十論) 상권

by Kay/케이 202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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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금칠십론(金七十論) 상권

 

금칠십론(金七十論) 상권


진제(眞諦) 한역


세 가지 괴로움의 핍박이 있기 때문에 三苦所逼故
이를 소멸하는 원인에 대해 알기 원한다. 欲知滅此因
이미 알려져 있어 쓸모없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으니, 見無用不然
그것은 궁극적이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1)  不定不極故

먼저 이러한 게송을 짓게 된 연기(緣龍)에 대해 논설하리라.
옛날 가비라(迦毘羅, Kapila)라고 이름하는 어떤 한 선인(仙人)이 있었는데, 허공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네 가지 공덕을 갖추고 있었는데, 첫째는 법(法)이며, 둘째는 지혜[慧]이며, 셋째는 이욕(離欲)이며, 넷째는 자재(自在)로서2),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모아 몸을 삼았다. 그는 이 세간이 무지의 어둠[盲間]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크나큰 자비심을 일으켰다.
‘아, 생사의 괴로움이 어둠 속에 있구나.’
그리고 세간을 두루 관찰하매, 아수리(阿修利, Āsuri)라고 하는 어떤 한 바라문의 종성이 천 년의 하늘[千年天]에 제사지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몸을 감추고서 그에게 다가가서 말하기를, “아수리여, 그대는 재가(在家)의 법을 희롱하는구나”라고 말하고는 바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천 년이 지난 후 다시 와 거듭 앞에서와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그 바라문이 선인에게 바로 답하여 말하기를, “세간의 존귀한 분이시여, 저는 실로 재가의 법을 희롱하며 즐기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선인은 그 말을 듣고 다시 되돌아갔다. 그 후 다시와 앞에서와 같이 거듭 말하자, 그 바라문은 그에 대해 답하기를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이에 선인이 묻기를, “그대는 능히 범행(梵行)에 청정하게 머물 수 있는 것인가, 머물 수 없는 것인가?”라고 하자, 바라문은 능히 그와 같이 청정하게 머물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나서 바로 재가, 즉 세속의 법[家法]을 버리고 출가의 행을 닦아 가비라의 제자가 되었다.
외도가 물었다.
“이 바라문이 알고자 하였던 바는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인가?”
“세 가지 괴로움에 의한 핍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세 가지 괴로움이라 한 것인가?
첫째는 내적 조건에 의한 괴로움[依內苦]이며, 둘째는 외적 조건에 의한 괴로움[依外苦]이며, 셋째는 하늘에 의한 괴로움[依天苦]이다.
여기서 내적 조건에 의한 괴로움이란, 이를테면 풍기[風]와 열기[熱]와 수분[淡]의 균형이 깨어져 능히 병의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즉 『의방(醫方:의학서)』에서도 말하기를, “배꼽으로부터 그 이하를 풍기가 머무는 곳이라 하고, 심장으로부터 그 이하를 열기가 머무는 곳이라 하며, 심장으로부터 그 이상은 모두 수분에 속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어떤 경우는 풍대(風大)가 증장하여 수분과 열기를 핍박할 때에는 풍병이 일어나게 되며, 수분과 열기가 증대하는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니, 이것을 육체적인 괴로움[身苦]이라고 한다. 정신적 괴로움[心苦]이란, 참으로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可愛別離], 원수지고 증오하는 이와 만나며[怨憎聚集],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所求不得]으로, 이 세 가지를 분별함으로써 정신적 괴로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육체적ㆍ정신적 괴로움을 내적인 조건에 의하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외적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괴로움이란, 세상 사람들에서 핍박당하고, 짐승이나 독사에 물리며, 산이 무너지고 절벽이 갈라짐으로써 생겨나는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외적 조건에 의한 괴로움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늘에 의한 괴로움이란, 이를테면 추위나 더위ㆍ바람ㆍ비ㆍ번개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천재지변으로 인해 번뇌하여 상심하게 되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하늘에 의한 괴로움이라고 한다.
즉 이 같은 세 가지 괴로움의 핍박이 있기 때문에 이를 소멸하는 원인에 대해 알기 원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의 괴로움을 능히 소멸시키는 원인은 이미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가? 즉 첫째로는 『팔분의방(八分醫方)』에서 말하는 바로서, 그것은 능히 육체적인 괴로움을 소멸한다. 둘째로는 참으로 애호할 만한 여섯 가지 대상[六塵]을 획득하는 것이니, 이는 능히 정신적인 괴로움을 소멸한다. 이렇듯 괴로움을 소멸하는 원인이 이미 밝혀져 있는데, 무엇 때문에 또다시 알기를 원하는 것인가?”
“이 또한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두 가지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원인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의 과실이란, 그것들은, 첫째 궁극적이지 않으며[無定], 둘째 절대적이지 않다[無極]는 것이다.”
“만약 『팔분의방』 등에 두 가지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을 소멸할 만한 원인으로 삼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면, 네 가지 『베다[皮陀, Veda]』중에 괴로움을 소멸할 만한 또 다른 원인이 있으니, 그러한 원인으로 능히 결과(괴로움의 소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바로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대가 괴로움을 소멸하는 원인에 대해 알기 원한다고 함은 부질없는 일인 것이다. 즉 네 가지 『베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 수마미(須摩味:不死藥)를 마셨기 때문에 불사(不死)를 얻고, 광천(光天)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여러 하늘을 식견(識見)하였다. 그러니 어찌 이같이 괴롭고 원망스러운 일이 다시 내게 일어날 것이며, 죽음이 어찌 다시 나에게 찾아올 것인가?’”
답하여 말하겠다.

네가 보았듯이 전승된 것도 역시 그러하니, 汝見隨聞雨
그것에도 더러움과 상실과 우열이 있기 때문이다. 有濁失優劣
이러한 두 원인과 반대되는 것이 보다 뛰어난 것으로, 翻此二因勝
변이와 자성과 자아에 대해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3) 變性我知故

‘알려진 것’이란 바로 『의방』 중에 설해진 바로서 거기에는 궁극적이지 못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과실이 있다. ‘전승된 것[隨聞]’이란, 범왕(梵王) 내지는 선인으로부터 전해 들어 획득한 바로서 바로 네 가지 『베다』를 전승된 것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베다에도 역시 두 가지의 과실이 있으니, 바로 『의방』에 대해 언급한 바(궁극적이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은 과실)와 같다. 또한 이것에는 다시 세 가지의 과실이 있다.
첫째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니, 『베다』중에서 설명하기를, “짐승들이여, 그대의 부모와 권속은 모두 그대와 함께 기뻐하리니, 그대가 지금 몸을 버리게 되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리라”라고 한 것과 같다. 또한 마사(馬祠, ásvamedha:말의 희생제)와 같은 것에 대해서도, “모두 합하여 600마리를 죽여라. 600마리에서 세 마리가 적어 채워지지 않을 경우, 하늘에 태어나 희락(戱樂) 등의 다섯 가지의 일을 누리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거짓말로 말하였더라도 제천(諸天)과 선인은 이것(희생)을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죄가 전승된 것의 원인 가운데 존재한다. 따라서 청정하지 못한 것이다.
둘째는 물러남(상실)의 과실이 있으니, 『베다』중에서 “제석(帝釋)이나 아수라왕(阿修羅王)이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시절로 인해 소멸하는 것이니, 시간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마사의 법이 혹 멸진하게 되면, 제사에 공물을 바친 이[施主]도 하늘에서 물러나게 되므로 전승된 원인에는 물러남의 과실이 있는 것이다.
셋째는 우열의 과실이 있다. 비유컨대 빈궁한 자가 부자를 보고 근심하고 번민하며, 못생긴 자가 잘생긴 자를 보고,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이를 보고 역시 또한 근심하고 번민하듯이 하늘의 세계에서도 역시 그러하여 하품( 下品)의 하늘은 그 위 하늘의 뛰어난 이를 보고 점차로 근심과 번민을 낳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승된 원인에는 우열의 과실이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세 가지 과실과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과실 등 다섯 가지 과실로 말미암아 『베다』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원인이 괴로움을 소멸할 만한 가장 뛰어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두 가지 원인과 반대되는 것이 보다 뛰어난 원인이다.”
여기서 두 가지 원인이란, 첫째는 『의방』에서 말한 것이며, 둘째는 『베다』에서 말한 것이니,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원인과는 다른 괴로움의 소멸을 획득할 만한 것을 알기 원하는 것이다. 곧 이러한 원인에는 다섯 가지의 공덕이 있으니, 첫째는 궁극적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절대적이라는 것이며, 셋째는 청정하다는 것이며, 넷째는 물러남이 없다는 것이며, 다섯째는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두 가지 원인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러한 원인은 무엇에 의해 획득되었기 때문인가?”
“변이[變]와 자성[性]과 자아[我]에 대해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이란 자성에 의해 지어진 것[所作]으로, 첫째는 대(大)이며, 둘째는 아만(我慢)이며, 셋째는 5진(塵:唯의 다른 역어)이며, 넷째는 5근(根:作根,즉 행동기관)이며, 다섯째는 5지근(知根:지각기관)이며, 여섯째는 마음[心]이며, 일곱째는 5대(大)이니, 이러한 일곱 가지를 변이라고 한다. 자성이란 변이함이 없는 것으로, 근본원인[本因]이다. 자아란 지자(知者)를 말한다. 모든 이가 이러한 스물다섯 가지의 진실된 경계야말로 부증불감(不增不減)임을 안다면 세 가지의 괴로움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게 될 것이니, 이는 바로 『해탈』4) 중에서 말하고 있는 게송의 뜻과도 같다.

만약 스물다섯 가지의 진리를 안다면
어떠한 처소에 머물든, 어떠한 도를 닦든,
변발하든, 상투를 틀어올리든, 삭발을 하든
해탈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외도가 말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본성과 변이와, 그리고 지자를 분별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답하여 말하겠다.

본성은 변이함이 없는 것이고, 本性無變異
대(大) 둥은 근본이자 변이이며, 大等亦本變
열여섯 가지는 다만 변이일 뿐이지만 十六但變異
지자는 근본도 아니고 변이도 아니다.5) 知者非本變

‘본성(本性, mūla-prakṛti)’이란 능히 일체를 낳는 것으로서,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본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곧 본성은 능히 대(大) 등을 낳으니, 그래서 그것의 근본이라고도 이름할 수 있으며,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으니, 그래서 변이가 아닌 것[非變異]이다.
‘대(大)와 아만과 5진(塵), 이 일곱 가지는 근본이자 변이이다.’ 즉 ‘대’는 본성에서 생겨났으므로 변이이며, 능히 아만을 낳는 것이므로 근본이다. 아만은 대로부터 생겨났으므로 변이이며, 능히 5유(唯)를 낳는 것이므로 근본이다. 5유의 종(種)은 아만으로부터 생겨났으므로 변이이며, 능히 5대와 11근을 낳는 것이므로 근본이다. 즉 성유종(聲唯種)은 공[空大]과 이근(耳根)을 낳기 때문에 근본이며, 나아가 향유종(香唯種)은 지[地大]와 비근(鼻根)을 낳기 때문에 근본이다. 이렇듯 일곱 가지는 근본이기도 하며, 또한 변이이기도 한 것이다.
‘열여섯 가지는 다만 변이일 뿐이다’라고 한 것은 공(空) 등의 5대와 이(耳)등의 5지근과 설(舌:발성기관) 등의 근과 그리고 마음, 이러한 열여섯 가지의 법은 다만 다른 것(5유)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며, 다른 것을 낳지 않기 때문에 다만 변이일 뿐이다.
그리고 ‘지자(知者, puruṣa)는 근본도 아니고 변이도 아니다’라고 함은, 지자란 앎을 본질로 삼기 때문에 바로 자아[我]를 일컫는 말로서, 이러한 자아는 능히 다른 것을 낳을 수도 없으며,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날 수도 없다. 즉 앞의 세 유형과 다르기 때문에 근본도 아니고 변이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본과 변이 그리고 근본도 아니고 변이도 아닌 세 가지 존재는 어떠한 인식수단[量, pramāṇa]에 의해 알려지는 것인가? 세간에는 인식수단이 있어 능히 알게 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저울이나 자 등이 있어 길고 짧음과 가볍고 무거움을 아는 것이다.”
답하여 말하겠다.

지각과 추리와 믿을 만한 이의 말씀에 의해 證比及聖言
일체의 인식대상에 대해 능통하게 되기 때문에 能通一切境
세 가지의 인식수단을 설정하는 것으로, 故立量有三
지식의 대상[境]이 성립하는 것은 이러한 수단에
의해서이다.6) 境成立從量

이 논의 중에서 ‘세 가지의 인식수단[量, pramāṇa]을 설정한다’고 하였는데, 그 첫째가 직접지각[證量, dṛṣṭa-pramāṇa)이다. 직접지각이란 바로 감관[根]과 대상[塵]에 의해 생겨난 지식으로, 바로 나타날 수 없는 것[不可顯現]이며,결정적인 것이며[非不定], 무차별의 지식[無二]이다. 그래서 직접지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7)
두 번째는 추리[比量, anumāṇa-pramāṇa]이다. 추리란 직접지각을 선행조건으로 삼는 것으로, 여기에는 유전(有前)ㆍ유여(有餘)ㆍ평등(平等)의 세 가지가 있다.8)
세 번째는 믿을 만한 이의 말씀, 즉 증언[聖言量, āptavacana-pramāṇa]이다. 증언이란, 만약 직접지각이나 추리를 취하더라도 통하지 않는 것은 증언에 의해 바로 통할 수가 있으니, 이를테면 천상(天上)이나 북울단월(北鬱單越, uttarakuru:수미산 북방의 세계)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 즉 이것은 직접지각이나 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말씀[聖語]을 믿음으로써 비로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증언이란 바로 게송 중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아함(阿含)은 바로 성자의 말씀으로,
성자는 모든 의혹을 소멸한 분이로다.
의혹이 없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럴 만한 원인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체의 인식대상에 대해 능통하게 된다 함은 혹 그 밖의 인식수단이나 알려질 만한 것이 있더라도 이러한 세 가지 인식수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평등의 여섯 가지 인식수단9)은 믿을 만한 이의 말씀, 즉 증언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지식의 대상[境]이 성립하는 것은 이러한 인식수단에 의해서이다’라고 함에 있어서, 지식의 대상이란 스물다섯 가지의 존재를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일체를 포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립한다’고 함은 이러한 스물다섯 가지의 존재가 밝혀진다[明]는 말이다.
스물다섯 가지의 존재를 어떻게 대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인가?
지식의 인식 근거[智景]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에 대상으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직접지각과 추리와 증언에 의해 간략하게는 세 가지 존재(근본ㆍ변이ㆍ근본도 아니고 변이도 아닌 것)를 설정할 수가 있으며, 넓게는 스물다섯 가지 존재를 건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인식수단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인식수단의 구체적 특징은 어떠한가?”
답하여 말하겠다.

대상에 대한 확인과 이해가 직접지각이며, 對塵解證景
추리에는 세 가지가 있어 개별적으로 알려지고 比景三別知
징표[相]와 징표를 지닌 것[有相]을 근거로 하며 相有相爲先
증언이란 믿을 만한 이의 말씀을 말한다.10) 聖敎名聖言

‘대상에 대한 확인과 이해[解, adhyavasāya]가 직접지각이다’라고 함은, 귀[耳根]는 소리[聲]에 대해 확인과 이해를 낳으며, 나아가 코[鼻根]는 향에 대해 확인과 이해를 낳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로지 확인과 이해만으로는 능히 알지 못하는데, 이것을 직접지각이라고 한다.11)
‘추리에는 세 가지가 있어 개별적으로 알려진다’고 함은, 첫째가 유전(有前, pūrvavat)이고, 둘째가 유여(有餘, śeṣavat)이며, 셋째가 평등(平等, sāmānyato-dṛṣṭa)이다. 이 세 종류의 지식은 직접지각에 근거하기 때문에 능히 이러한 세 가지 지식의 대상과 3세를 식별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추리라고 한다. 즉 어떤 사람은 먹구름을 보고 마땅히 비가 올 것을 알며, 또한 강에 어제 없던 새로운 탁한 물이 가득 찬 것을 보고 마땅히 상류에 비가 왔음을 알며, 또한 파타라국(巴吒羅國, Pāṭaliputta)에 암라나무의 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마땅히 교살라국(憍薩羅國, Kosalā)에도 역시 그러함을 아는 것과 같다.12) 그리고 ‘징표[相, liṅga:예컨대 먹구름]와 징표를 지닌 것[有相, 1iṅgin,예컨대 비]을 근거로 삼는다’고 함은, 징표와 징표를 지닌 것은 상응하여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이러한 징표를 증거로 삼기 때문에 추리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13)
'증언[聖敎]이란 믿을 만한 말씀을 말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범천(梵天)이나 마누왕(摩㝹王, Manu,인간의 시조왕)이 설한 네 가지 베다와 정론(正論)과 같은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추리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세 가지 중 어떠한 인식수단에 의해 어떠한 경계 대상[境界]에 능히 통달할 수 있는 것인가?”
답하여 말하겠다.

평등추리에 의거하여 依平等比量
초감각적 대상을 성취할 수 있으며, 過根境得成
만약 추리에 의해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면, 若依比不顯
증언에 따를 경우 바로 드러나게 된다.14) 隨聖言則現

‘평등추리에 의거하여서’라고 함은, 이를테면 추리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을 일러 평등추리라고 한다. 자성과 자아, 이러한 대상은 감관을 초월한 것[過根]이기 때문에 평등에 의해 능히 식별될 수 있다. 즉 대(大) 등의 온갖 지말[末:변이 즉 전개물]은 모두 세 가지 속성[三德, try-guṇa]을 갖는데, 첫째가 즐거움[樂, sattva]이며, 둘째가 괴로움[苦, rajas]이며, 셋째가 어둠[癡暗, tamas]으로, 이는 지말의 속성[末德]이다. 그런데 지말의 속성은 근본의 속성[本德]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근본은 지말에 의거하여 추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성은 평등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대(大) 등의 변이는 타자(他者)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아는 마땅히 결정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15) 그러므로 자아도 역시 평등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지식 밖의 것이어서 직접지각과 추리에 의해서도 그 뜻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증언에 의해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니, 이를테면 상천(上天)의 제석과 북울단월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자성과 자아는 볼 수 없는 것[不可見]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직접지각되지않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할 수 없으니, 그것은 마치 자재신(自在神)이 아니면서 머리가 두 개이고 팔이 세 개인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실재하는 온갖 것도 여덟 가지 경우에는 볼 수가 없다.”
무엇이 여덟 가지의 경우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너무 멀거나, 혹은 너무 가깝거나, 最遠及最近
감관이 손상되었거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거나, 根壞心不定
미세하거나, 혹은 은폐되어 있거나, 細徵及覆障
압도되어 있거나, 유사한 것과 섞여 있는 경우이다.16) 伏逼相似聚

세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비유하자면 강 저편 언덕에 떨어져 있는 것은 여기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너무 가까이 있는 것도 볼 수 없으니, 이를테면 눈 안에 들어온 티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감관이 손상되어도 볼 수 없으니, 이를테면 귀머거리나 맹인은 소리나 색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경우에도 볼 수 없으니, 이를테면 마음이 인연을 달리함으로써 이러한 경계대상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미세하여도 볼 수 없으니, 이를테면 연기나 열ㆍ먼지ㆍ공기가 허공에 흩어지면 미세하여 능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은폐되어 있어도 볼 수 없으니, 비유하자면 벽 바깥의 사물은 격리되고 감추어져 알 수 없는 것이다. 압도되어 있는 것도 볼 수 없으니, 이를테면 햇볕이 나면 별과 달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서로 유사한 것과 섞여 있는 것도 볼 수 없으니, 예컨대 한 알의 콩이 콩더미에 섞여 있을 경우 동일한 종류이기 때문에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여덟 가지의 경우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無物]에도 네 가지의 유형이 있는데, 역시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다. 첫째, 생겨나기 이전에는 볼 수가 없으니, 이를테면 진흙이 아직 그릇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그릇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둘째, 파괴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도 볼 수 없으니, 이를테면 병이 파괴되어 버렸으면 다시는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서로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도 볼 수 없으니, 이를테면 소 안에서는 말을 볼 수 없으며, 말 안에서는 소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넷째,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도 볼 수 없으니, 이를테면 자재신이 아니면서 머리가 두 개이고 팔이 세 개인 자가 그러하다.17)
이와 같은 열두 가지 종류는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 같이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성과 자아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자성과 자아가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이는 이상의 열두 가지 볼 수 없는 종류 가운데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
“한 가지의 원인으로 인해 볼 수가 없다.”
무엇이 한 가지의 원인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성은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으로, 性細故不見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능히 볼 수 있으니, 非無緣可見
대(大) 등이 바로 그러한 결과로서, 大等是其事
자성과 유사하지 않은 점도 있고 유사한 점도 있다.18) 與性不似似

‘자성은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능히 볼 수 있다’고 함은, 자성은 실재하지만 미세하기 때문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연기 등이 공중에 흩어지면 너무나 미세해져 볼 수 없게 되듯이 자성도 역시 그러하다. 즉 머리가 두 개이고 팔이 세 개인 자의 두 번째 머리와 세 번째 팔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기[畢竟無] 때문에 볼 수 없다고 하는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경험적 현상[事:결과]에 근거하여 원인을 보는 것이니, 경험적 현상이란 바로 원인인 자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곧 평등추리에 의해 자성이 실재함을 아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바로 그 같은 경험적 현상인가?”
“대(大) 등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즉 자성으로부터 대가 낳아지며, 대로부터 아만이 낳아지며, 아만으로부터 5유가 낳아지며, 5유로부터 열여섯 가지 경험적 현상(11근과 5대)이 낳아진다.19) 곧 볼 수 있는 대 등의 경험적 현상은 세 가지 속성[三德]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성도 세 가지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성과 유사하지 않은 점도 있고 유사한 점도 있다’고 함이란, 이러한 경험적 현상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과 서로 유사하지 않은 것이고, 둘째는 자성과 서로 유사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두 명의 자식을 낳았을 경우, 한 명은 아버지와 담았고, 다른 한 명은 아버지와 닮지 않은 것과 같다. 즉 이러한 근본 원인(자성)이 경험적 현상을 전개함에 있어 근본과 유사하게 전개하는 경우도 있고, 유사하지 않게 전개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제10송)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 등에는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날 수 있다. 즉 나이 어린 제자들은, 자성 등이 실재한다거나,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실재하고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그럴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성인들의 주장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모든 성인들은 ‘진흙 등에는 이미 항아리 등이 내재해 있다’고 주장하지만, 와이세시카(䘙世師:勝論師] 등에서는 ‘항아리는 생겨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생겨난 후에 존재한다[先無後有]’고 주장한다. 그리고 석가(釋迦)는 ‘진흙 가운데 항아리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不有不無]’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세 가지의 학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중간을 취할 것이다.20)
먼저 석가의 주장부터 비판하고 난 다음에 와이세시카를 비판하기로 한다. 석가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 하면 그 자체가 상호 모순되기 때문이다. 즉 만약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非有] 그것은 바로 없다[無]는 것이며, 만약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非無] 그것은 바로 있다[有]는 것이다. 이렇듯 있고 없음이 동일물에 적용될 경우 상호 모순되기 때문에 그것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이가 ‘이 사람은 또한 죽을 것이고, 또한 살 것이다’라고 말할 경우, 이 말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석가의 말 또한 역시 그러한 것이다.
삼장(三藏)은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옳지 않다. 왜냐 하면 석가는 그같이 주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혹 석가가 있지 않음[非有]을 주장하였다면 없음[無]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고, 없지 않음[非無]을 주장하였다면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다. 즉 석가의 주장은 있고 없음에 대한 집착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비판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21)
이제 와이세시카의 그릇된 논의를 비판하도록 하겠다. 와이세시카여, 우리의 교의 중에서는 다섯 가지 이유로 인해 원인 가운데 결정적으로 결과가 존재함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 이유인가?

비존재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無不可作故
결과는 반드시 원인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必須取因故
일체의 결과는 동시에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一切不生故
능력을 갖는 것이 만들어지는 것을 만들기 때문에, 能作所作故
원인에 따라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니, 隨因有果故
그래서 원인에는 결과가 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故說因有果

첫째, ‘비존재[無]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 즉 세간 중에 원인이 되는 어떤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조작(造作)은 이루어질 수 없으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예컨대 모래로부터도 기름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원인이 되는 사물이 존재한다면 조작될 수 있으니, 호마(胡麻:참깨)가 압축되어 기름이 나오는 것과 같다. 즉 원인이 되는 사물이 만약 이 세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으로부터는 어떠한 것도 유출될 수 없을 것이지만, 지금 대(大) 등은 자성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하는 사실을 관찰하였으므로 자성에 대 등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결과는 반드시 원인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물건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물건의 원인을 취해야 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내일 바라문을 따라 우리 집에 와 타락죽[酪酥:우유로 만든 죽]을 먹기로 하였으므로 내가 지금 우유를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만약 우유 중에 타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찌 우유 대신 물을 취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물건을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 원인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성 중에는 대(大) 등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일체의 결과는 동시에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 가운데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물은 능히 일체의 결과를 낳을 수가 있어 풀이나 모래나 돌 따위도 능히 금이나 은 등의 물건을 낳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원인 가운데 결과가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넷째, ‘능력을 갖는 것이 만들어지는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 비유하자면 도공은 도구를 갖추어 진흙으로 항아리나 화분 등을 만들지만 풀이나 나무 따위로는 항아리나 화분 등을 만들지 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성이 능히 대 등을 지으므로[作] 자성에 대 등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원인에 따라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를테면 원인의 종류에 따라 결과의 종류도 역시 그와 같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보리의 싹은 반드시 보리의 씨앗에 따라 생겨나는 것과 같다. 만약 원인 가운데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결과는 반드시 원인과 유사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즉 보리의 씨앗에서 마땅히 콩 등의 싹도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원인 가운데 결과가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와이세시카 등에서는 ‘원인 가운데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因中無果]’고 주장하니, 이러한 교의는 옳지 않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 결과가 결정적으로 존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 중간에 제기된 물음에 대해 모두 답하였다. 이제 다시 앞(제8송)에서 설하던 내용으로 되돌아가 계속 논의하리라. ‘경험적 현상은 자성과 유사하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하였는데, 유사하지 않은 점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

원인을 갖으며, 무상하며, 다수이며, 有因無常多
편재하지 않으며, 현상의 운동[事]을 갖으며, 귀몰하며, 不遍有事沒
부분을 갖으며, 다른 것에 의존하고 종속된다는 점에서 有分依屬他
변이는 자성과 다른 것이다.22) 變異異自性


첫째, ‘원인을 갖는다’고 함은, 대(大) 등과 나아가 5대(大)는 모두 원인을 갖는다는 것이니, 자성은 대의 원인이며, 아만은 대를 원인으로 삼는다. 또한 5유(唯)는 아만을 원인으로 삼고, 근(根) 등의 열여섯 가지는 5유를 그 원인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자성은 그렇지가 않으니,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유사하지 않다고 한 것이다.
둘째, ‘무장하다’고 함은, 대 등은 자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무상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잠시 지속하는 무상[暫性無常]이며, 두 번째가 찰나무상[念念無常]이다. 잠시 지속하는 무상이란 서로 상위하는 인연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을 경우, 이 때 잠시 동안 지속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산의 나무 등이 아직 화재를 만나지 않았을 경우, 이 때 잠시 정지하여 지속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화재를 만나게 되면, 이 때 5대 등은 바로 5유 중으로 귀몰하고, 5유는 아만으로 귀몰하고, 아만은 대로 귀몰하고, 대는 자성 중으로 귀몰하게 된다. 따라서 대 등은 무상하고, 자성은 그렇지가 않으니, 그것은 항상하여 귀몰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다수’라는 것은, 이를테면 대 등이 다양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각각의 자아[人人]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으로, 아만 등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자성은 오로지 단일한 것이니, 다수의 자아[多人]에 공통된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편재하지 않는다’고 함은, 자성과 자아[我]는 이를테면 땅과 허공과 하늘의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지만, 대 등의 모든 전개물은 모든 것에 두루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대 등은 자성과 다르다는 것이다.
다섯째, ‘현상의 운동[事]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대 등의 모든 전개물은 생사를 일으키고자 할 때면 이러한 열세 가지 작구(作具)에 의해 능히 미세신(微細身)으로 하여금 생사를 윤전하게 하고, 신축왕환(伸縮往還)하게 하기 때문이다.23) 그러나 자성은 그렇지가 않으니, 신축함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 ‘귀몰(歸沒)한다’고 함은, 대 등의 모든 전개물은 지말[末]에서 전이하여 근본으로 돌아가면 볼 수 없으니, 이것을 귀몰이라고 한다. 예컨대 5대 등은 전이하여 5유 중에 귀몰하면 다시는 5대 등을 보지 못하며, 내지는 대(大, mahat)가 자성 가운데로 귀몰하면 대 역시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자성은 그렇지가 않으니, 전이하여 귀몰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 ‘부분24)을 갖는다’고 함은, 대 등은 모두 부분을 갖는데, 각각의 부분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성은 그러하지 않으니, 항상하며 각각의 부분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째, ‘다른 것에 의존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대 등은 자성에 의존하고, 아만은 대에 의존하고, 5유는 아만에 의존하고, 5대 등 열여섯 가지 전개물은 모두 5유에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자성은 그렇지가 않으니,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홉째, ‘다른 것에 종속된다’고 함은, 대 등은 근본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그러한 지말은 스스로 존재[自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아들은 자립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자성은 그렇지가 않으니, 근본이 다른 것에 종속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아홉 가지의 이유에서 근본과 지말은 다 같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유사하지 않은 점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서로 유사하지 않은 점에 대해 이미 설명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서로 유사한 점에 대하여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성과 서로 유사한 점을 게송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세 가지 속성을 갖추고,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三德不相離
지식의 대상이 되고, 평등하고, 무지하며, 塵平等無知
능생자이니, 이것이 근본과 지말의 유사한 점이다. 能生本末似
자아는 이 같은 유사함과 유사하지 않음에 반대된다.25) 我翻似不似

유사한 점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변이도 ‘세 가지 속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변이란 이른바 대(大)ㆍ아만에서부터 5대(大) 등을 말하니, 이러한 스물세 가지는 모두 즐거움[樂, sattva]과 괴로움[苦, rajas]과 어둠[癡闇, tamas]의 세 가지 속성을 갖고 있다. 즉 지말이 세 가지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근본에도 세 가지 속성이 있음을 아는 것으로, 지말은 근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검은 색의 옷감(결과로서의 지말)은 검은 실에서 생겨난 것으로 지말과 근본이 서로 유사한 것과 같다. 따라서 변이는 세 가지 속성을 갖고 있으며, 변이는 근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자성도 세 가지 속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근본과 지말이 서로 유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 ‘세 가지 속성과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함은, 변이와 세 가지 속성은 불가불리의 관계에 있기 매문이다. 이를테면 소와 말의 본질이 동일하지 않듯이 세 가지 속성과 변이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자성도 세 가지 속성을 가졌으며, 그 관계 또한 역시 그러하다. 이렇듯 다 같이 세 가지 속성과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근본과 지말이 바로 유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셋째, ‘지식의 대상[塵]이 된다’고 함은, 이러한 대 등의 변이는 자아[我]에 의해 수용되기 때문에 대상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자성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자아가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평등하다’고 함은, 이러한 대 등의 변이는 일체의 자아에 공용(共用)되고 있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한 명의 계집종에게 많은 주인이 있어 그들 모두를 섬기고 있는 것과 같다. 자성도 역시 그러하여 모든 자아에게 공용되고 있다. 그래서 서로 유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다섯째, ‘무지하다’고 함은, 이러한 대 등의 변이는 즐거움과 괴로움과 어둠을 능히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지혜[知]는 자아만이 홀로 획득하기 때문에 자아를 제외한 모든 존재[諸法]는 지혜를 갖는 일이 없으니, 자성도 역시 그러하다. 즉 근본과 지말이 다 같이 무지하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서로 유사한 것이다.
여섯째, ‘능생자라는 점에서 근본과 지말은 서로 유사하다’고 함은, 대는 능히 아만을 낳으며, 아만은 5유를 낳고, 나아가 5대 등을 낳는데, 자성도 역시 능히 대를 낳기 때문에 근본과 지말이 다 같이 유사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자아는 이 같은 유사함과 유사하지 않음에 반대된다’고 함은, 변이와자성은 여섯 가지의 점에서 유사하지만, 자아와 자성 사이에는 이 같은 상호 유사성이 없다. 그래서 유사함에 반대된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유사하지 않음에도 반대된다고 함은, 변이와 자성은 아홉 가지 점에서 서로 유사하지 않지만, 자아와 자성은 반대로 여덟 가지 점에서 유사하기 때문에 유사하지 않음에도 반대된다고 말한 것이다.26) 그러나 자아는 다수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자성과 서로 유사하지 않다.
외도가 말하였다.
“변이와 자성은 세 가지의 속성[三德]을 갖는다고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 가지 속성은 어떠한 특징을 갖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기쁨과 근심과 어둠을 본질로 하고, 喜憂闇爲體
비춤과 조작과 속박을 작용으로 하며, 照造縛爲事
상호간에 억제하며, 의존하며, 낳으며, 更互伏依生
동반하며, 일으키는 것, 이것이 세 속성의 특징이다.27) 雙起三德法

이러한 세 가지 속성은 ‘기쁨[喜]과 근심[憂]과 어둠[闇]을 본질로 한다’고 함에 있어 먼저 이 같은 세 가지 속성이란, 첫째가 살타(薩埵, sattva:純質)이며, 둘째가 라사(羅闍, rajas:動質)이며, 셋째가 다마(多磨, tamas:暗質)인데, 기쁨은 살타의 본질이고, 근심은 라자스의 본질이며, 어둠은 다마의 본질이다. 이는 바로 세 가지 속성의 본질적 특상[體相]을 나타낸 것이다.
‘비춤[照]과 조작[造]과 속박[縛]財刻을 작용[事]으로 한다’고 함은, 이러한 세 가지 속성이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에 대한 논의로서, 첫 번째의 속성은 능히 비추는 것(光照)이고, 다음의 속성은 능히 생기(逃)하게 하는 것이며, 마지막 속성은 능히 계박(繫練)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세 가지 속성의 현실적 작용[家事]을 나타낸 것이다.
‘상호간에 억제하며, 의존하며, 낳으며, 동반하며, 일으키는 것, 이것이 세속성의 특상이다’라고 함은, 그러한 세 속성의 특상이 무엇인가 하면 그러한 특상에 다섯 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첫 번째는 ‘상호간에 억제하는 것’으로, 만약 기쁨이 증가하여 많아지면 능히 근심과 어둠을 억제하니, 비유하자면 햇빛이 강성해지면 능히 달빛과 별빛을 억제하는 것과 같다. 만약 근심이 증가하여 많아지면 능히 기쁨과 어둠을 억제하니, 역시 밝은 햇빛이 능히 달빛과 별빛을 억제하는 것과 같다. 만약 어둠이 증가하여 많아지면 능히 근심과 즐거움을 억제하니, 역시 또한 햇빛이 강성해지면 별빛과 달빛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두 번째 ‘상호간에 의존하는 것’이란, 이러한 세 가지 속성은 서로 의존하여 능히 일체의 현상[事]을 짓는 것이니, 이를테면 세 개의 막대기가 서로 의존하여 능히 세면대 등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 ‘상호간에 서로를 낳는다’고 함이란, 이를테면 어떤 때에는 기쁨이 근심과 어둠을 낳고, 어떤 때에는 근심이 기쁨과 어둠을 낳으며, 어떤 때에는 어둠이 근심과 기쁨을 낳는다는 것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세 사람이 서로 믿고 의지하여 어떤 하나의 일을 도모하는 것처럼 이와 같은 세 가지 속성이 대(大) 등에 존재하면서 상호간에 서로 의지하여 다 함께 생사를 짓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상호간에 서로 동반한다’고 함은, 이러한 기쁨은 어떤 때에는 근심과 더불어 동반되고, 어떤 때에는 어둠과 더불어 동반되며, 이러한 근심은 어떤 때에는 기쁨과 더불어 동반되고, 어떤 때에는 어둠과 더불어 동반되며, 어둠도 역시 이와 같아 어떤 때에는 기쁨과 더불어 동반되고, 어떤 때에는 근심과 더불어 동반되는 것을 말하니, 이를테면 바사선인(婆娑仙人)도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쁨은 근심과 동반되고,
근심은 기쁨과 동반되며,
어떤 때의 기쁨과 근심은
어둠과 동반되기도 한다.

다섯 번째 ‘상호간에 일으킨다’고 함은, 이러한 세 가지의 속성은 상호간에 다른 속성의 작용을 짓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왕가의 어떤 한 여인의 얼굴이 매우 예쁘면, 이를 기쁨의 속성[喜德]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이러한 기쁨이 전이하여 요염함[色]을 도모하며, 남편이나 권속에게도 기쁨을 도모하게 되니, 이는 자신의 작용을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같은 왕가의 다른 모든 여인들로 하여금 근심을 낳게 하니, 이는 자신과는 다른 속성의 작용을 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어둠도 낳을 수 있다. 이를테면 노비 등은 항상 그녀의 부림에 괴로워하면서도 벗어날 길이 없어 그들의 마음은 어둠으로 바뀌게 되니, 이것도 역시 자신과는 다른 속성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기쁨의 속성이 능히 자신의 속성과 다른 속성의 작용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
근심이 자신의 속성과 다른 속성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란, 이를테면 도적이 왕가의 여인을 묶어 납치할 때, 창을 든 왕의 종성[王種]이 말을 타고 와 구출해 주면 근성이 전이하여 기쁨이 되는 것과 같다.28) 즉 왕의 종성은 두려워할만한 존재이지만 그녀는 마땅히 도적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여 환희를 낳을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자신의 속성과는 다른 속성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도적은 죽임을 당하게 되므로 그 도적에게는 능히 근심이 생겨나니, 이는 자신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도적들은 왕을 보고 나무 그루터기처럼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므로 이는 자신의 속성과는 다른 어둠을 낳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근심의 속성이 능히 자신의 속성과 다른 속성의 작용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어둠이 자신의 속성과 다른 속성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란, 이를테면 커다란 먹장구름이 능히 번개 등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즉 어둠이 전이하여 구름을 만들면 증자를 파종하는 모든 농부들은 다 환희하게 되니, 이는 자신의 속성과는 다른 속성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능히 어둠을 낳을 수도 있으니, 이를테면 정숙한 여인이 남편과 서로 헤어져 있을 경우 이 같은 번개를 보고 남편이 돌아올 수 없을까 근심하는 것과 같다. 즉 이 경우 먹장구름의 어둠은 능히 아내에게 어둠을 낳게 하므로, 이는 자신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능히 근심[憂惱]도 낳을 수 있으니, 비유하자면 장사꾼이 장삿길에 나선 경우, 등짐이 차거나 젖게 되면 그것을 능히 질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근심하게 되니, 이것도 자신과는 다른 속성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가 바로 세 가지 속성의 특징이다. 그런데 세 가지 속성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기쁨[喜:純質]은 가벼움과 빛남을 특징으로 하고, 喜者輕光相
근심[憂:動質]은 유지와 운동을 특징으로 하며, 憂者持動相
어둠[闇:暗質]은 무거움과 은폐ㆍ장애를 특징으로 하는데,
 闇者重覆相
서로 모순되는 것임에도 화합하니, 마치 등불과도 같다.29)
 相違合如燈

‘기쁨은 가벼움과 빛남을 특징으로 한다’고 함은, 경미(輕微)하여 빛나는 것, 그것을 일컬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기쁨이 증장되면 일체의 감관은 가볍고 빛나며 부드러워 능히 모든 대상을 파악[執]하게 되니, 이 때에 마땅히 기쁨의 속성이 증장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근심은 유지와 운동을 특징으로 한다’고 함에 있어, 유지란 마음이 거만해져 다른 이를 헤아리지 않는 것을 말하니, 마치 술취한 코끼리가 싸우려고 하여 적군의 코끼리가 오면 서로를 막고 버티어 서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만약 근심이 증장하게 되면, 이러한 이는 항상 싸우려고 한다. 즉 그의 마음이 항상 조급하고 망령되이 움직여서 능히 한 곳에 안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 때에 마땅히 근심의 속성이 증장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둠은 무거움과 은폐ㆍ장애를 특징으로 한다’고 함은, 만약 어둠의 속성이 증장하게 되면 신체의 모든 부분이 다 같이 무거워지고, 모든 감관은 장애되기 때문에 능히 모든 대상을 파악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말하니, 이 때에 마땅히 어둠의 속성이 증장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마치 원수진 이들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속성이 이렇듯 상호 모순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들이 함께 더불어 도모할 수 있는 것인가?”
“사실은 이러하다. 세 가지 속성은 상호 모순되지만, 동일한 자아[我]에 소속되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불어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서로 모순되는 것임에도 화합하는 것이 마치 등불과도 같다. 즉 세 가지(불ㆍ기름ㆍ심지)가 화합하여 등불이 되는 것으로, 이 때 불은 기름이나 심지와는 다르고, 기름은 또한 불이나 심지와는 다르다. 이처럼 서로 모순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을 위하여 등불이라고 하는 것을 도모하는 것이니, 세 가지의 속성도 역시 그러하다. 그 특징은 비록 서로 모순되지만 자아를 위하여 능히 함께 더불어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제11송) 근본과 지말에는 여섯 가지의 상호 유사성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나는 이미 한 종류(세 가지 속성)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그 밖에 나머지 다섯 가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지 못한다. 이미 세 가지 속성에 대해 성취하였으니, 나머지 다섯 가지도 역시 마땅히 그러한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등이 이루어질 수 있으니, 不相離等成
속성으로 말미암아 반대되는 것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由德翻無故
지말의 속성은 근본의 속성에 따르기 때문에 末德隨本德
비변이(非變異)도 그러함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30) 非變異成得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등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함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변이에 있어서도 이미 성립하였다는 말이다. 즉 이러한 지말에 세 가지 속성이 있다는 사실이 성립함에 따라 자성 중에 세 가지 속성이 있다는 사실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속성으로 말미암아 반대되는 것(자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함은, 이러한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따위의 다섯 가지 사실이 변이 등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성 중에도 반드시 존재함을 안다고 하는 또 다른 논거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세 가지 속성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만약 세 가지 속성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獨住]이 아니라고 한다면 변이와 속성 상호간에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만약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지식의 대상[塵]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만약 이미 지식의 대상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마땅히 그것을 수용하는 자아에 대해 평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만약 평등하게 수용되는 것이면, 이로 인해 이것이 무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의 대상이 되고, 혹은 평등하고, 혹은 무지한 것이라면, 이로 인해 능히 낳는 것임을 역시 알 수 있으며, 나아가 만약 변이 중에 이러한 여섯 가지 뜻이 담겨있다면 자성 중에도 역시 이러한 여섯 가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와 같이 알 수 있는 것인가?
‘반대되는 것(자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31) 만약 근본이 되는 자성을 배제할 경우, 지말에는 여섯 가지의 뜻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비유하자면 실을 떠나 별도의 옷감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옷감에는 바로 실이 존재하며, 실과 옷감은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말은 반드시 근본에 따르는 것으로, 근본과 지말은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말의 속성은 근본의 속성에 따르기 때문에 비변이(근본인 자성)도 그러함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함은, 이 세간의 모든 지말의 속성은 반드시 근본의 속성에 따른다는 것이다. 예컨대 붉은 실로 짠 옷감이면, 그 옷감은 반드시 실의 붉은 색을 띠듯이 변이 등도 역시 그러하다. 즉 세 가지 속성에 따르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다섯 가지의 뜻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말의 여섯 가지 뜻에 의해 비변이 가운데에도 여섯 가지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세간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어떤 사물에 대해 그와 같은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머리가 두 개 달린 이의 두 번째 머리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성도 역시 드러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히말라야[雪山]의 무게는, 그 양을 알 수 없다 하여 양이 없다고 하지는 않으니, 자성도 역시 이와 같다.”
그렇다면 어떠한 논거로서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인가?

각각의 개별적 존재는 양을 지였기 때문이며, 別類有量故
동일한 성질이고, 능력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며, 同性能生故

원인과 결과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因果差別故
변상(遍相), 즉 만물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32)
 遍相無別故

자성의 실재성[實有]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각각의 개별적 존재는 양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세간 중에 만약 만들어진 머떤 사물이 있다면 이러한 사물은 수량을 지니니, 비유하자면 도공이 어떤 양의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면 그 그릇은 수량을 갖는 것과 같다. 만약 이러한 그릇에 근본이 되는 진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릇은 마땅히 수량을 갖지 않을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릇이 생겨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릇은 수량을 지니며, 그렇기 때문에 근본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이 옷감을 성취한다고 하는 등의 비유도 그 뜻에 있어 역시 그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법(25제) 가운데 대(大) 등의 변이도 역시 수량을 지니는 것이다.
무엇을 수량이라고 한 것인가?
대에는 한 가지가 있으며, 아만에도 한 가지가 있으며, 5유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며, 감관[根]에는 열한 가지가 있으며, 5대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이렇듯 우리는 변이한 것에 수량이 존재함을 바로 볼 수 있으며, 평등추리에 의해 그것의 근본인 자성이 존재함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이다. 만약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변이는 수량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또한 마땅히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동일한 성질을 지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전단나무[檀本]를 쪼개면 그 조각은 비록 다수가 되겠지만 전단나무의 성질은 동일하듯이 변이도 역시 그러하다. 즉 대(大) 등의 변이는 비록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세 가지 속성의 성질만은 동일하며, 이러한 동일한 성질에 의해 그것들은 모두 그러한 성질의 근본을 가겼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자성이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
‘능력(śakti), 즉 힘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것이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낳을 수 있다. 비유하자면 도공은 기와나 그릇을 만드는 능력이 있어 능히 기와나 그릇을 생산할 수 있지만 옷 등은 생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여기서 그릇의 생산은 능력에 의존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능력은 반드시 의지처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도공에 의지하여야 하는 것이다. 변이도 역시 그러하다. 즉 변이는 생겨난 것으로, 이러한 생기는 어떤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러한 능력은 의지처가 있어야 하는데, 자성이 바로 그것의 의지처이다. 그리고 바로 대 등의 변이는 이러한 능력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자성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간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차별로서도 역시 관찰될 수 있다. 이를테면 진흙은 원인이고, 항아리 등은 결과인데, 결과인 그릇은 물이나 기름 등을 담을 수 있지만 원인인 진흙은 담을 수 없으니, 이것이 원인과 결과의 차별이다. 그리고 실과 옷감의 관계도 역시 이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 등의 변이는 결정코 결과이며, 이러한 결과로서 관찰하건대 이것과 서로 유사하지 않은 별도의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변이의 원인으로서 자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변상(遍相), 즉 만물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변상과는 다른 별도의 원인이 있어 자성이 존재함을 안다는 말이다. 여기서 변상이란 땅[地]과 공중[空]과 하늘[天]의 세 종류의 세간으로, 근본으로 환원되는 실재의 시간[實時]에 이르게 되면 일체의 세간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어지게 된다. 즉 5대와 11근은 5유 중으로 귀몰(歸沒)하여 어떠한 차별도 없어지며, 나아가 대(大)는 자성 중에 귀몰하여 역시 어떠한 차별도 없어 이것은 변이이고, 이것은 자성이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실재의 시간에는 변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성 역시 마땅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자성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사도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렇지가 않다. 이러한 자성은 실재한다. 왜냐 하면 그것은 후에 다시 능히 세 종류의 세간을 낳기 때문으로, 그렇기 때문에 자성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같은 다섯 가지 논거로서 자성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자성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변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니, 동반자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한 사람만으로는 자식을 낳을 수 없으며, 한 가닥의 실로는 옷감을 잘 수 없는 것처럼 자성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게송으로 답하겠다.

자성은 변이를 낳는 원인으로, 性變異生因
세 가지 속성이 화합하여 변이를 낳으니, 三德合生變
전변하기 때문이며, 마치 물과도 같으며, 轉故猶如水
각각의 속성이 다르기 때문이다.33) 各各德異故

‘자성은 변이를 낳는 원인이다’라는 말은, 자성은 세 가지의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능히 변이를 낳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만약 자성이 이러한 속성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대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 가지의 속성을 가겼다고 한다면 그대의 말은 진리와 일치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변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 하면 ‘세 가지 속성이 화합하여 변이를 낳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치 다수의 실이 화합하여 능히 옷감을 낳는 것처럼 세 가지 속성도 역시 그러하여 서로가 서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자성이 변이를 낳을 수 있는 까닭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세간의 생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우유 등이 낙(酪) 등을 낳는 것과 같은 전변(轉變, pariṇāma)의 생기이며, 둘째는 이를테면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과 같은 전변이 아닌 생기가 그것이다. 만약 자성이 변이를 낳는다면, 어떠한 형태의 생기라고 해야 할 것인가?”
“우유와 낙의 관계처럼 전변하기 때문이다. 즉 자성이 전변하여 변이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변이의 본질은 바로 자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원인과는 다른 개별적 존재의 생기는 여기서 논의되지 않는 것이다.”
단일한 하나의 원인은 능히 다양한 종류의 결과를 낳을 수 없다. 여기서 논의하는 자성도 바로 단일한 것인데, 어떻게 세 종류의 세간을 낳을 수 있는 것인가? 나아가 하늘에 태어나면 환락(歡樂)이며, 인간으로 태어나면 근심과 괴로움[憂苦]이며, 짐승으로 태어나면 어둠의 어리석음[闇癡]이다. 만약 변상, 즉 만물이 단일한 하나의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면, 어떻게 세 가지 품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인가?”
“마치 물과도 같으며, 각각의 속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의 물은 처음에는 한맛이지만,
땅에 이르는 즉시 바로 변이되니,
전변하여 여러 가지의 맛이 되는 것은
각각의 그릇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은 금으로 만들어진 그릇에 담겨 있을 때 그 맛이 가장 좋을 것이지만, 지상에 이르게 되면, 땅의 기운에 따라 그 맛이 여러 가지로 동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세 종류의 세간도 역시 이와 같으니, 하나의 자성으로부터 낳아졌더라도 세 가지의 속성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천상에는 살타(薩埵:純質)의 속성이 많기 때문에 여러 하늘은 항상 환락을 누리는 것이고, 인간세계에는 라사(羅闍:動質)의 속성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많은 근심과 괴로움을 향수하는 것이며, 짐승의 세계에는 다마(多摩:暗質)가 많기 때문에 짐승들은 항상 어둠의 미혹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여러 세계 중에서는 세 가지속성과 항상 상응하지만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많아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단일한 하나의 자성이 능히 세 종류의 세간을 낳지만, 세 가지의 속성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뛰어나고 열등함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성(自性, prakṛti)에 대해서는 이미 다 논설하였으므로 이제 마땅히 자아[我, puruṣa]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아란 자성과 마찬가지로 미세한 것인데, 자아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자아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하리라.

취집(聚集)은 타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聚集爲他故
세 가지 속성과 다르고,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며, 異三德依故
먹는 자이며, 홀로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 食者獨離故
이러한 다섯 가지 이유에서 자아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34)
 五因立我有

첫째, ‘취집은 타자(他者)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첫머리의 게송(제2송)에서 ‘자성과 변이와 지자(知者:자아)에 대해 아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을 획득한다고 논설하였으며, 또한 다섯 가지의 논거를 말하여 자성과 변이에 대해서도 모두 성립시켰다(제9송).
자아[我人]는 가장 미세한 것이니,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이에 대해 성립시켜보리라.
자아[人我]는 실재한다. 왜냐 하면 ‘취집은 타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간을 살펴보건대 모든 것은 취집되어 있으며, 아울러 그것은 타자를 위한 것이다. 이를테면 의자나 침대 등의 취집은 자신이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그것들은 모두 사람을 위해 설치된 것으로, 다른 이가 있어야 능히 그것을 수용하니, 그를 위해 취집되었기 때문이다. 집 등도 역시 그러하며, 대(大) 등의 변이도 역시 그러하다. 5대의 취합을 신체라고 하는데, 이러한 신체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것임을 결정코 알아야 할 것인데, 여기서 타자란 바로 자아를 말한다. 따라서 자아가 실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세 가지 속성과 다르기 때문이다.’ 자성과 변이에는 여섯 가지의 유사한 점이 있다고 앞(제11송)에서 이미 게송으로 말한 바 있다.

세 가지 속성을 갖추고,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지식의 대상이 되고, 평등하며, 무지하며,
능생자이니, 이것이 근본과 지말의 유사한 점이다.
그리고 자아는 이 같은 유사함과 유사하지 않음에 반대된다.

자아는 바로 이러한 여섯 가지 유사한 점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세 번째,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人]가 이러한 신체의 의지처가 되면 신체는 작용하게 되지만, 만약 자아라는 의지처가 존재하지 않으면 신체는 작용할 수 없으니, 『육십과론(六十科論)』35) 중에서 “자성은 자아에 의지하기 때문에 능히 변이를 낳는다”고 말한 바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네 번째, ‘먹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간 중에는 여섯 가지 맛의 음식이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능히 먹는 자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 등의 변이를 먹히는 것[所食]으로 보면, 여기에는 반드시 그것과는 다른 능히 먹는 자[能食者]가 마땅히 존재함을 알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홀로 백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오로지 신체만이 존재한다면 성인이 설한 해탈의 방편은 어떠한 소용도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옛날 어떤 선인이 바라문들의 처소에 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모든 이가 『베다』에 능통하고,
모든 이가 수마(須摩)를 마시며,
모든 이가 아면(兒面)을 보았으니,
원하건대 후에 비구가 되리라.36)

만약 오로지 신체만이 존재한다면, 이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따라서 신체를 떠나 스스로 존재하는 별도의 자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별도의 자아가 없고 오로지 신체만이 존재한다면, 부모나 스승이 죽은 후 그들의 시신을 태우는 등의 이 같은 공양은 마땅히 죄를 얻게 될 것이고, 어떠한 복덕도 없게 될 것이니,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자성과는 다른 별도의 자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성자의 말씀이 있다.

근육과 뼈를 밧줄과 기둥으로 삼고,
피와 살을 물과 진흙으로 삼았으니,
청정하지 못하고, 무상하며, 괴로운 것이지만
자아는 마땅히 이러한 것의 화합을 떠난 것이로다.

그대는 법과 비법을 버려야 하고,
허와 실(변이와 자성)도 마땅히 버려야 하며,
버린다고 하는 것도 역시 마땅히 버릴 때
청정한 그것은 홀로 스스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홀로 존재한다[獨存, kaivalya]’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니, 이러한 성인의 말씀, 즉 증언에 의해서도 자아가 결정적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상의 다섯 가지 이유에 의해 자아가 실재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자아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가? 다수의 신체에 공히 하나의 단일한 자아가 존재하는 것인가, 신체마다 각기 하나의 자아가 존재하는 것인가? 어떻게 이 같은 의문이 생겨난 것인가 하면, 여러 스승들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이는 단일한 자아가 일체의 신체에 두루 충만[遍滿]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구슬을 궤는 실의 경우처럼, 구슬은 다수이지만 실은 하나인 것과 같다. 또는 비세천(毘細天, Viṣṇu:최고의 자재신)이 1만 6천의 부인과 동시에 욕락을 즐기듯이 단일한 자아도 역시 그러하여 능히 일체의 신체에 두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학파의 스승은 각각의 신체마다 각각의 자아가 있다고 주장하니, 그래서 나에게 의심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37)
“자아는 다수이며, 각각의 신체마다 각각의 자아가 존재한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게송으로써 해석하여 말하리다.

태어남과 죽음과 감관이 다르기 때문에, 生死根別故
짓는 일[作事]이 공통되지 않기 때문에, 作事不共故
세 가지의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三德別異故
각각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성립할 수 있다.38) 各我義成立

개인마다 ‘태어남과 죽음과 감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가 단일하다면, 한 사람이 태어날 때 모든 이가 함께 태어나게 될 것으로 곳곳의 여인이 모두 다 같이 임신하게 될 것이며, 또한 마땅히 바로 출산하게 될 것이며, 또한 마땅히 남자 애기를 갖게 될 것이며, 또한 마땅히 여자 애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각기 다른 일로서 한날 한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아가 단일하다면, 한 사람이 죽을 때, 모든 사람이 함께 죽을 것이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아는 단일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이의 감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人]가 단일하다면 한 사람이 귀머거미가 될 때, 모든 이도 다 함께 귀머거리가 되어야 할 것이며, 앞을 못 보거나 말하지 못하는 것도, 여러 질병 등이 생겨나는 것도 다 같이 한날 한시에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자아가 다수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개인마다 ‘짓는 일이 공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가 단일하다면, 한 사람이 업을 지을 때 모든 이도 마땅히 업을 지을 것이며, 한 사람이 과보를 받으면, 모든 이도 마땅히 과보를 받을 것이며, 한 사람이 해탈하면 모든 이도 마땅히 해탈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그래서 각각의 자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39)
또한 다음으로 개인마다 각기 ‘세 가지의 속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가 단일하다면, 세 가지의 속성에는 마땅히 어떠한 차이도 없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어떤 바라문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총명하여 기쁨에 차 있고[聰明歡樂], 둘째는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며[可畏困苦], 셋째는 무지하며 우둔하다[暗黑愚癡]고 하자, 그런데 만약 자아가 단일하다면, 한 사람이 기뻐하면 다른이도 모두 기뻐해야 할 것이고, 괴로워하고 어리석어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구슬을 꿰는 실과 비세천의 비유로써 자아는 단일하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다섯 가지 이유로써 자아가 다수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도 의심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자아를 작자(作者:행위의 주체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작자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여 이 같은 의문이 생겨나게 되었던가 하면, 자아는 세간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세간에서는 ‘내[人]가 간다’고 하고, ‘내가 왔다’라고 하며, ‘내가 지었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캬[僧法]에서는 나, 즉 자아[人]는 작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와이세시카(衛世師)에서는 자아는 바로 작자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에게 의심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자아는 작자가 아니다.”
어떻게 그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해석하리라.

자성과 변이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翻性變異故
자아가 증인이라는 사실이 성립하니, 我證義成立
홀로 존재하는 것이며, 중립 이며, 獨存及中直
보는 자이지, 작자가 아닌 것이다.40) 見者非作者

‘자성과 변이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함은, 앞의 두 게송(제11송과 제17송)에서 ‘자아는 자성과 다르고, 변이와도 역시 다르다’고 설명하였는데, 자아는 두 가지 특징(자성과 변이는 유사하지 않은 점도 있고 유사한 점도 있다는 두 가지 특징)과 반대되기 때문에, 두 가지(세 가지 속성으로 이루어진 자성와변이)와 비교할 때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즉 세 가지 속성은 바로 능히 짓는 것[能作]이지만, 자아는 이러한 세 가지 속성과 다르기 때문으로, 그렇기 때문에 작자가 아니다.
외도가 물었다.
“만약 자아가 작자가 아니라면, 이를 설정한 것은 무엇을 하려 함인가?”
“증인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즉 ‘자아는 바로 증인이라는 사실이 성립하니’, 그 밖의 다른 존재는 그렇지 않지만 자아는 바로 지자(知者)이기 때문이다.”41)
‘홀로 존재하는 것[獨存, kaivalya]’이란, 만약 자아가 자성과 변이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중립(中直, mādhyasthya]’이라고 함은, 세 가지 속성과 다르기 때문이다. 즉 세 가지 속성은 신축(伸縮:어떤 세계에 태어나고 귀몰하는 것, 제10송 장행 참조)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으로, 그래서 중립이라고 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한 도인이 홀로 한 곳에 머물면서 남을 따라가거나 오지 않으며, 오로지 다른 이들이 가고 오는 것만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의 속성은 생과 사로 신축하지만, 자아는 다만 이와 같은 일만을 능히 볼 뿐이다. 그래서 중립이라고 한 것이니, 자성이나 변이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지(知)를 갖으며, 그래서 ‘보는 자’라고 일컬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로 인해 ‘자아는 보는 자이지 작자(作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제 가지 속성은 능히 짓는 자[能作者]’라는 뜻이 성립하며, ‘자아는 실재하고 다수이며, 작자가 아니다’라는 뜻도 역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자아가 작자가 아니라면, 판단[決意]은 누가 하는 것인가? ‘나는 지금 마땅히 법을 닦고 악을 떠나 원(願)을 성취하리라’고 하는 이러한 결의는 누가 짓는 것인가? 만약 세 가지 속성이 이러한 결의를 짓는다고 한다면, 이러한 결의는 앎[智]이기 때문에 세 속성은 지(知)를 갖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앞에서(제11송) 세 가지 속성은 무지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만약 자아가 결의를 짓는다고 하면, 자아는 바로 작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자아는 작자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자아가 작자가 아니라 지자라고 할 경우 이중의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게송으로 답하겠다.

세 가지의 속성이 자아와 화합함으로써 三德合人故
무지(無知)는 지자(知者)처 럼 보이며, 無知如知者
세 가지의 속성이 능히 조작(造作)함으로써 三德能作故
중립의 자아는 작자처럼 보이는 것이다.42) 中直如作者

‘세 가지의 속성이 자아와 화합함으로써’라는 말은, 이러한 세 가지 속성은 무지한 것이면서 능작자이며, 자아는 지자(知者)이면서 작자가 아니지만,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이 서로 상응함으로써 세 가지의 속성은 마치 지식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구워진 그릇[燒器]이 불과 상응하면 뜨겁고, 물과 상응하면 차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속성이 지자와 상응함으로써 지식을 갖게 되어 능히 판단ㆍ결의할 수 있다. 그래서 ‘무지는 지자처럼 보인다’고 말한 것이다.
그대는 또한 세간에서 일상적으로 유통되는 말에 따를 경우 자아가 바로 능작자라고 하였는데(제19송), 나는 여기서 이 점에 대해 대답할까 한다. 즉 ‘세 가지의 속성이 능히 조작(造作)함으로써 중립의 자아는 작자처럼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같은 양자의 화합에 따라 작자가 아닌 것을 능히 작자라고 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어떤 한 바라문이 잘못하여 도적의 무리 중에 들어가 있을 경우, 도적이 죽임을 당할 때 그 역시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도적의 무리와 함께 있었기[相隨] 때문으로, 그래서 도적의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자아의 경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여서 작자와 함께 있음으로 해서 세간에서 일상적으로 유통되는 말로 ‘자아는 작자이다’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세 가지 속성으로 이루어진 자성과 자아는 어떠한 인연에 의해 화합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써 답하겠다.

자아는 세 가지 속성을 보려고 하여, 我求見三德
자성은 자아의 독존을 위해 화합하는 것으로, 自性爲獨存
이는 마치 앉은뱅이와 맹인이 결합하는 것과 같으니, 如跛盲人合
이로 인해 세간을 낳게 되는 것이다.43)  由義生世間

‘자아는 세 가지 속성을 보려고 한다’고 함은, 자아에는 이와 같은 뜻이 있다는 말이다. 즉 자아는 여기서 마땅히 세 가지 속성의 자성을 보는 것으로, 그래서 자아와 자성은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자성은 자아의 독존을 위해서’라고 함은, 바로 이러한 괴로움을 당하는 자아만이 능히 그 같은 괴로움을 지견(知見)할 수 있기 때문으로, 자성은 지금 마땅히 그것을 위해 독존을 얻게 하니, 이러한 뜻에서 자성과 자아는 화합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국왕(자아)은 인민(자성)과 화합하여야 마땅히 인민을 부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44) 인민도 역시 국왕과 화합하여야 국왕이 마땅히 우리의 생활을 베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왕과 인민의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자아와 자성의 화합도 역시 또한 이와 같으니, 자아는 자성을 보기위해, 자성은 타자(자아)의 독존을 위해 화합하는 것이다.
‘마치 앉은뱅이와 맹인이 결합하는 것과 같다’는 말에는 어떤 비유되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떤 상인의 무리가 우선니(優禪尼)라는 곳에 머물렀는데, 도적떼로 말미암아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게 되었다. 그런데 상인들 무리 중에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보는 맹인 한 명과 앉은뱅이 한 명이 있었는데, 여러 상인들이 버리고 달아났으므로 맹인은 우왕좌왕하였고, 앉은뱅이는 앉아서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때 앉은뱅이가 물었다.
“그대는 어떠한 사람인가?”
맹인이 대답하였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자로서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맹인이 물었다.
“그대는 또한 누구인가?”
앉은뱅이가 대답하였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서 다만 길은 볼 수는 있지만 갈 수는 없다. 그러니 그대가 지금 나를 어깨 위에 올려주면 내가 길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가 나를 지고 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서로 결합하여 마침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이러한 화합은 각자의 뜻에 따라 성취되는 것으로, 목적지에 이르러서는 서로 헤어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는 자성을 볼 때 바로 해탈을 획득하며, 이러한 자성 역시 자아로 하여금 독존하게 하여 각기 서로에게서 벗어나게[捨離]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세간을 낳게 되는 것이다’라고 함은, 자아는 타자를 보기 위해, 자성은 타자의 독존을 위한다고 하는 이러한 두 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화합할 수 있으며, 이러한 화합이 능히 세간을 낳는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남녀가 서로 화합함으로써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자아와 자성도 화합함으로써 능히 대(大) 등의 세간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외도가 물었다.
“이미 자아와 자성의 화합이 능히 세간을 낳는다고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세간이 생겨나는 순서는 어떠한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자성은 순서대로 自性次第生
대(大)와 아만과 열여섯 가지를 낳으니, 大我慢十六
열여섯 가지에는 5유(唯)가 있어 十六內有五
이것으로부터 5대(大)가 낳아진다.45)  從此生五大

‘자성은 순서대로 낳는다 함에 있어, ‘자성’이란 혹은 승인(勝因, pradhāna:‘구극의 원인)이라고도 하며, 혹은 브라흐만(梵, brahman)이라고도 하며, 혹은 중지(衆侍, bahudhātatmaka)라고도 한다.46) 또한 ‘순서대로 낳는다’고 함은, 자성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本有]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 라는 말이다.
자성은 먼저 대(大)를 낳는다. 대란 혹은 각(覺, buddhi)이라고도 하며, 혹은 상(想, saṃvṛttī)이라고도 하며, 혹은 변만(邊滿)이라고도 하며, 혹은 지(智, mati)라고도 하며, 혹은 혜(慧, prajñā)라고도 한다. 즉 이러한 대는 지와 일치하기 때문에 대를 지(智)라고도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대는 다음으로 아만(我慢)을 낳는다. 아만이란 혹은 5대의 근원, 즉 대초(大初, bhūtādi)라고도 하며, 혹은 전이(轉異, vaikṛta)라고도 하며, 혹은 염치(炎熾, taijasa)라고도 한다.47)
아만 다음으로 열여섯 가지를 낳는다. 여기서 열여섯 가지라고 함은, 첫 번째가 5유(五唯, tanmātra)이다. 5유는 첫째가 성(聲)이며, 둘째가 촉(觸)이며, 셋째가 색(色)이며, 넷째가 미(味)이며, 다섯째가 향(香)인데, 이러한 향 따위는 물질계를 구성하는 거친 원소인 5대의 미세한 본질[唯體]이며, 미세한 능력[唯能]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는 5지근(知根:감각기관)이다. 5지근이란, 첫째가 이근(耳根:청각기관)이며, 둘째가 피근(皮根:촉각기관)이며, 넷째가 안근(眼根:시각기관)이며, 넷째가 설근(舌根:미각기관)이며, 다섯째가 비근(鼻根:후각기관)이다.
다음으로 세 번째는 5작근(作根:행동기관)이다. 5작근이란 첫째가 설근(舌根:발성기관)이며, 둘째가 수근(手根:파지기관)이며, 셋째가 족근(足根:보행기관)이며, 넷째가 남녀근(男女根:생식기관)이며, 다섯째가 대유근(大遺根:배설기관)이다.
다음으로 네 번째는 심근(心根:사유기관), 즉 마음이다. 즉 이상의 열여섯 가지는 아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그래서 ‘대와 아만과 열여섯 가지를 낳는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 ‘열여섯 가지에는 5유가 있으니, 이것으로부터 5대가 낳아진다’ 함은, 열여섯 가지 안에 5유가 있고, 이러한 5유가 5대를 낳는다는 것이니, 성유(聲唯)는 공대(空大)를 낳고, 촉유(觸唯)는 풍대(風大)를 낳고, 색유(色唯)는 화대(火大)를 낳고, 미유(味唯)는 수대(水大)를 낳고, 향유(香唯)는 지대(地大)를 낳는다.
바로 이상과 같은 자성과 변이와 자아를 본다면 해탈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이제 이에 대해 이미 다 논설하였다.
외도가 말하였다.
“앞에서 자성으로부터 대가 생겨난다고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대(mahat)란 무엇을 특징으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결지(決智)를 일컬어 대라고 하는데, 決智名爲大
법과 지혜와 이욕(離欲)과 자재(自在), 法智慧離欲
이것은 살타의 특징이며, 自在薩埵相
이와 반대되는 것은 다마의 특징이다.48) 翻此是多摩

‘결지를 일컬어 대라고 한다.’
무엇을 일컬어 결지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이것은 장애물이다’, ‘이것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지각(知覺)을 바로 결지라고 한다.
이 같은 대에는 여덟 가지 종류[八分]가 있는데, 네 가지는 기쁨의 속성[喜, 즉 sattva]에 속하는 것이고, 네 가지는 어둠의 속성[暗癡, 즉 tamas)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쁨의 속성에 속하는 것이란, 말하자면 법(dharma)과 지혜(jñāna)와 이욕(vairāgya)과 자재(aiśvarya)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야마(夜摩, yama)와 니야마(尼夜摩, niyama)이다. 야마에는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미워하지 않는 것[無瞋恚]이며, 둘째는 스승을 공경하는 것[恭敬尊師]이며, 셋째는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內外淸淨]이며, 넷째는 음식을 줄이는 것[減損飮食]이며, 다섯째는 게으르지 않는 것[不放逸]이다. 니야마에도 역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것[不殺]이며, 둘째는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不盜]이며, 셋째는 진실만을 말하는것[實語]이며, 넷째는 청정한 행위를 하는 것[梵行]이며, 다섯째는 아첨하지 않는 것[無諂曲]이다. 즉 이상의 열 종류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49)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외적인 지혜[外智]이며, 둘째는 내적인 지혜[內智]이다. 외적인 지혜란 여섯 가지 베다 보조학[皮陀分, vedāṅga)으로서, 첫째는 식차론(式叉論, śikṣā:음운학)이며, 둘째는 비가라론(毘伽羅論, vyākaraṇa:문법학)이며, 셋째는 겁파론(劫波論, kalpaㆍ즉 제사학)이며, 넷째는 수제론(樹提論:iyotiṣa:즉 천문학)이며, 다섯째는 천타론(闡陀論, chanda:음률학)이며, 여섯째는 니록다론(尼祿多淪, nirukta:어원학)을 말하니, 이러한 여섯 가지 갈래의 지식을 일컬어 외적인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내적인 지혜란, 말하자면 세 가지 속성과 자아, 이 두 가지의 중간을 아는 것이다.50) 그리고 외적인 지혜에 의해 세간을 회득하며,51) 내적인 지혜에 의해 해탈을 획득하게 된다.
이욕이란 무엇인가?
이욕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외적인 이욕이며, 둘째는 내적인 이욕이다. 외적인 이욕이란, 온갖 재물에서 3시(時), 즉 그것을 추구할 때와 지킬 때와 상실할 때에 초래되는 괴로움과 번뇌를 이미 관찰한 것을 말한다. 또는 재물에 서로 집착함으로 인해 죽이고 해치게 되는 등의 두 가지 과실을 이미 관찰한 것을 말하니, 이러한 관찰에 의해 이욕ㆍ출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욕으로는 아직 해탈을 획득하지 못하는데, 이러한 이욕은 외적인 지혜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 내적인 이욕이란, 이미 자아와 세 가지 속성의 다름을 식별하였기 때문에 출가하기를 희구하는 것으로, 먼저 내적 지혜를 획득하고 난 다음에 이러한 이욕을 획득하게 되니, 이러한 이욕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해탈을 획득할 수 있다. 즉 외적인 이욕에 따를 경우 여전히 생사에 머물게 되지만, 내적인 이욕에 따를 경우 해탈할 수 있는 것이다.
자재란 무엇인가?
자재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미세하기가 인허(隣虛:극미의 구역으로 원자를 말함)만큼 지극한 것이며, 둘째는 가볍고 미묘하기가 심신(心神) 정도로 지극한 것이며, 셋째는 두루 충만하기[遍滿]가 허공만큼 지극한 것이며, 넷째는 이르려고 하면 뜻하는 바대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며, 다섯째는 모든 곳에서 다른 이를 이기기 때문에 세간의 본주(本主)이며, 여섯째는 원하는 대로 모든 대상을 일시에 능히 수용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더 이상 다른 이에게 속박되지 않으며, 능히 삼세간의 중생으로 하여금 자아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마음대로 머무는 것이다. 즉 시간과 장소에 관계 없이 마음대로 머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의 법은 바로 살타의 특상이다. 즉 살타가 증장하면 라사와 다마를 억제하며, 이 때 자아는 기쁨의 속성[喜樂]이 많아지기 때문에 법 등의 네 가지 공덕을 획득할 수 있으니, 이것을 살타의 특상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바로 다마의 특징이다’라고 함은, 법 등과 반대되는 네 종류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가 비법(非法)이며, 둘째가 비지(非智)이며, 셋째가 애욕이며, 넷째가 자재하지 않음이니, 이러한 네 가지 법을 다마의 특징이라고 한다.
즉 이와 같은 네 가지 기쁨의 속성[喜]에 속하는 것과 네 가지 어두움의 속성[癡]에 속하는 것이 만약 대와 상응할 경우, 대는 여덟 갈래를 갖게 되며, 변이할 때 바로 선행한 것으로부터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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