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대장경 금칠십론(金七十論) 하권
금칠십론 하권
진제 한역
‘이와 반대되는 것이 기쁨과 성취이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지혜의 장해는 아홉 종류의 기쁨과 여덟 가지 종류의 성취와 반대된다는 말이니, 이러한 열일곱 가지와 반대되는 것을 일컬어 지혜의 장해(障害)라고 한다.
그래서 이 같은 11근의 손괴와 열일곱 가지 지혜의 장해를 일컬어 스물여덟가지의 무능이라고 한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기쁨에 아홉 가지의 구분이 있다고 하는가?
게송으로 해석하여 말하겠다.
내적인 것에 근거하는 네 가지 기쁨이 있으니, 依內有四喜
자성과 취득과 시절과 감응이 바로 그것이며, 自性取時感
외적인 것에 근거하는 기쁨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依外喜有五
대상을 떠났기 때문으로, 합하여 아홉 가지이다.1) 離塵故合九
‘내적인 것에 근거하는 네 가지 기쁨이 있으니, 자성(自性)과 취득[取]과 시절[時]과 감응[感]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함에 있어서, ‘내적인 것에 근거한다’고함은 각(覺)과 아만과 마음에 근거하여 네 가지 기쁨이 생겨난다는 말이니, 첫째는 자성에 의한 기쁨이며, 둘째는 희구하여 취득함에 의한 기쁨이며, 넷째는 시절에 의한 기쁨이며, 넷째는 감응의 획득에 의한 기쁨이다. 이러한 네 가지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보겠다.
이를테면 여러 바라문들이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알았기에 출가하는 것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자성이 바로 3세간의 진실된 원인임을 알았기 때문에 출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이 사람은 오로지 자성이 바로 3세간의 원인이라는 사실만을 알 뿐, 이것의 항상함과 무상함, 유지(有智)와 무지(無智), 유속성과 무속성, 편재성과 비편재성을 알지 못한다. 단지 자성이 존재한다거나 3세간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만을 알았기 때문에 환희가 생겨나게 되었지만, 이러한 사람에게 해탈은 없다.
이러한 기쁨을 자성에 의한 기쁨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두 번째 바라문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알았기에 출가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이미 자성이 바로 세간의 원인임을 알았으며, 내가 이미 취득한 물건[取]이 바로 해탈의 근거가 되는 것임을 안다. 즉 자성은 실재하며, 이것이 세간의 참다운 원인이라 할지라도, 만약 취득한 물건이 없다면 해탈은 끝내 이룰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취득한 물건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여기서 취득한 물건이란 모든 출가자들이 도를 닦을 때 사용하는 도구로서, 그러한 도구에는 네 종류가 있는데, 3장(杖)과 물단지와 가사(袈裟)와 길상(吉祥)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다시 길상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재 주머니[灰囊]이며, 둘째는 천목주(天目珠)이며, 셋째는 세 가닥의 실로 꼬아 몸에 걸치는 목걸이[三縷纓身]이며, 넷째는 여러 가지 주술장구(呪術章句)이며, 다섯째는 한 가닥의 긴 풀로서 정수리의 상투(頂髻] 위에 안치하는 길상초를 말한다.2) 이러한 다섯 가지야말로 도를 배우는 도구로서, 능히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길상이라고 한 것이다. 즉 앞의 세 가지와 합하여 여덟 가지의 도구가 되는데, 이에 따라 해탈을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취득한 이 같은 물건이 바로 해탈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이 같은 이유로 민해 출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의 기쁨을 취득함에 의한 기쁨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에 의해서는 해탈을 획득할 수 없으니, 단지 자성이 세간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 그 밖의 사실에 대해서는 능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세 번째 바라문에게 물어 말하기를, “그대는 무엇을 알았기에 출가하는 것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자성에 대한 앎이나 네 가지 취득물로서 그 무엇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으로는 바로 해탈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출가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3) 그러나 이러한 세 번째 바라문에게도 해탈은 없을 것이니, 왜냐 하면 25구의(句義)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 번째 기쁨을 시절에 의한 기쁨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네 번째 바라문에게 물어 말하기를, “그대는 무엇을 알았기에 출가하는 것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자성에 대한 앎과 취득물과 시절로서 그 무엇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감응에 의해 획득[感得]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해탈은 있을 수 없다. 나는 이미 감응의 획득에 의해 해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출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네 번째 바라문에게도 역시 해탈은 없을 것이니, 왜냐 하면 25구의에 대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 번째 기쁨을 감응의 획득에 의한 기쁨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상의 네 가지 기쁨은 내적인 작구에 근거하여 성취될 수 있는 기쁨이다’
외적인 것에 근거하는 기쁨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대상을 떠났기 때문으로, 합하여 아홉 가지이다. ‘즉 외적인 기쁨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다섯 가지의 대상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으로,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다섯 명의 바라문이 출가하는 것을 보고 순서대로 가서 물어본 바와 같다.
먼저 첫 번째 사람에게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알았기에 출가하는 것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세간에는 다섯 가지의 대상이 있는데, 이러한 대상을 획득하기 위해 하기 어려운 여러 일을 하니, 이를테면 혹 어떤 이는 밭을 갈고, 혹 어떤 이는 짐승을 기르며, 혹 어떤 이는 왕을 섬기고, 혹 어떤 이는 장사를 하며, 혹은 이러한 네 가지 일을 하지 않을 경우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대상을 추구하는 일[求塵]로서, 자신이나 남을 핍박하고 고달프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사정을 알았기 때문에 출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 번째 사람에게도 해탈은 없을 것이니, 그에게는 진실지(眞實智)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두 번째 사람에게 묻기를, “그대는 어떠한 법을 알았기에 출가하는 것인가?”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밭을 가는 등의 방편으로 다섯 가지 대상을 추구하여 획득할 수 있어, 획득한 여러 대상을 수호(守護)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 하면 5가(五家)가 함께 싸우기 때문으로, 이러한 대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땅히 자신과 남을 핍박하게 된다. 즉 나는 획득한 대상을 수호할 때 야기되는 괴로움을 보았기 때문에 대상을 떠나 출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섯 번째 사람에게도 역시 해탈은 없을 것이니, 그에게는 진실지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세 번째 사람에게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알았기에 출가하는 것인가?”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아직 획득하지 않은 것을 획득할 수 있고, 이미 획득한 것을 수호하여 상실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 가지 대상은 스스로가 수용하고 있는 바(그 본성)에 따라 자연적으로 상실되며, 만약 상실될 때에는 크나큰 괴로움을 낳게 된다. 나는 바로 이러한 대상이 상실되는[失塵] 과실을 보았기 때문에 출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곱 번째 사람도 역시 해탈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니, 그에게는 진실지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네 번째 사람에게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알았기에 출가하는 것인가?”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아직 획득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고, 획득할 수 있으며, 이미 획득한 것을 수호할 수 있고, 이미 상실해 버린 것도 역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다시 그에게 묻기를,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하는 것인가?”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5근은 세간을 실로 만족함이 없이[無厭足]항상 전전(展轉)하며 뛰어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러한 감관의 과실을 보았기 때문에 출가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여덟 번째 사람도 역시 해탈할 수 없을 것이니, 그에게는 진실지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 사람에게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알았기에 출가하는 것인가?”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아직 획득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고, 획득할 수 있으며, 이미 획득한 것을 수호하여 상실되지 않게 할 수도 있으며, 그 작용이 다하여 상실되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가장 뛰어난 것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것 역시 취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다시 그에게 묻기를,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하는 것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대상은 네 가지 일로 말미암아 성취되기 때문이니, 마땅히 남을 죽이거나 해쳐야 한다. 즉 만약 남을 해치지 않고서는 그러한 일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밭을 갈려면 마땅히 풀을 잘라야 하고, 나무를 베어야 한다. 혹은 왕을 섬겨 전쟁을 할 때에는 마땅히 사람을 죽여야 한다. 혹은 남의 제물을 겁탈할 때에는 남을 손상시켜야 하며, 혹은 입으로 거짓말을 해야 한다. 나아가 일체 세간의 과실은 모두 이러한 대상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된다. 나는 바로 이러한 과실을 알았기 때문에 출가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홉 번째 사람도 역시 해탈할 수 없을 것이니, 외적 대상을 싫어하는 것[外厭]에만 따랐기 때문이며, 진실지를 닦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 앞의 네 가지 기쁨은 내적인 것에 근거한 기쁨이고, 뒤의 다섯 가지는 외적인 것에 근거한 기쁨으로, 그래서 합하여 아홉 가지 기쁨이 있다고 말한 것이 다. 그런데 선인들은 이러한 아홉 가지 종류의 기쁨을 아홉 가지 명칭으로 설정하기도 하였는데, 기쁨은 대상의 더러움[塵汚]을 능히 청정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홉 가지의 기쁨을 일컬어 물[水]로 설명하였다. 즉 첫 번째 기쁨을 윤습수(潤濕水:자성의 변재함은 물의 습윤성과 같기 때문에)라고 하였으며, 두 번째 기쁨을 심천수(深淺水:취득한 도구에 의한 기쁨을 버림은 말은 물을 쏟아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라고 하였으며, 세 번째 기백을 유수(流水:시절의 무상함은 흐르는 강물과 같기 때문에)라고 하였으며, 네 번째 기쁨을 호수(湖水:감응하여 밝음은 호수에 비친 그림자와 같기 때문에)라고 하였으며, 다섯 번째 기쁨을 선입수(善入水:대상의 추구를 버림은 마른 땅에 물을 대는 것과 같기 때문에)라고 하였으며,4) 여섯 번째 기쁨을 선도수(善渡水)라고 하였으며, 일곱 번째 기쁨을 선출수(善出水)라고 하였으며, 여덟 번째 기쁨을 광명수(光明水)라고 하였으며, 아홉 번째 기쁨을 뛰어난 청정수[勝淸淨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아홉 가지 기쁨에 반대되는 것을 아홉 가지 무능이라고 하니, 말하자면 윤습수가 아닌 것에서부터 뛰어난 청정수가 아닌 것이 바로 그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법(의혹ㆍ무능 기쁨)은 성취와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 어떠한 법을 일컬어 성취라고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사유[思量]와 청문과 독송과, 思量聞讀誦
3고를 떠나는 세 가지와 도반의 얻음과 離苦三友得
보시에 의한 성취가 성취의 여덟 가지인데, 因施成就八
앞의 세 가지 법은 성취의 갈고리이다.5) 前三成就鉤
‘사유와 청문과 독송과 나아가 보시에 의한 성취가 성취의 여덟 가지이다’라고 함은, 이러한 여덟 가지 성취의 능력은 6행(行)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어떤 바라문이 출가하여 도를 배움에 있어 생각하였기를, ‘어떠한 것이 가장 뛰어난 것이며, 무엇이 진실인가? 무엇이 최후의 구경(究竟)이며, 무엇을 지어야 지혜를 성취하여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사유함으로써 바로 지혜를 얻게 되었다. 즉 ‘자성이 다르고, 각(覺)이 다르고, 아만이 다르고, 5유가 다르고, 11근이 다르고, 5대가 다르고, 참된 자아[眞我]가 다르다’고 하는 이 같은 스물다섯 가지 진실의(眞實義) 가운데 지혜가 일어났던 것이다.6)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지혜에 의해 여섯 종류의 관찰[六種觀]을 일으키게 되었다.
첫째로는 5대의 과실을 관찰하는 것으로, 그러한 과실을 보고 싫어함[厭]을 낳아 바로 5대를 떠나게 되니, 이를 일컬어 사량위(思量位)라고 한다.
둘째로는 11근의 과실을 관찰하는 것으로, 그러한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낳아 바로 11근을 떠나게 되니, 이를 일컬어 지위(持位)라고 한다.
셋째로는 이러한 지혜에 의해 5유의 과실을 관찰하는 것으로, 그러한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낳아 바로 5유를 떠나게 되니, 이를 일컬어 입여위(入如位)라고 한다.
넷째로는 아만의 과실과 여덟 가지 자재를 관찰하는 것으로, 그러한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남아 바로 아만 등을 떠나게 되니, 이를 일컬어 지위(至位)라고 한다.
다섯째로는 각(覺)의 과실을 관찰하는 것으로, 그러한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낳아 바로 각에서 떠날 수 있게 되니, 이를 일컬어 축위(縮位)라고 한다.
여섯째로는 자성의 과실을 관찰하는 것으로, 그러한 과실을 보고 싫어함을 낳아 바로 자성을 떠나게 되니, 이러한 단계를 일컬어 독존(獨存)이라고 한다.
이 바라문은 바로 이 같은 사유[思量]로 말미암아 해탈을 획득할 수 있었다. 곧 이러한 성취는 사유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유에 의한 성취[思量成]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상 사유에 의한 성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청문에 의한 성취[聞成]에 대해 논설하리라. 청문에 의한 성취란, 이를테면 어떤 바라문이 “자성이 다르고, 각이 다르고, 나아가 참된 자아가 다르다”고 하는 다른 이가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서 지혜를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독송의 소리를 듣고 나서 스물다섯 가지의 진실의를 지각하여 바로 사량위에 들어 5대를 떠나며, 지위(持位)에 들어 11근을 떠나며, 입여위에 들어 5유를 떠나며, 지위(至位)에 들어 아만 등을 떠나며, 축위(縮位)에 들어 각을 떠나며, 독존위에 들어 자성을 떠나게 되니, 이것을 일컬어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 청문에 의한 성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독송에 의한 성취에 대해 논설하리라. 지혜는 8단계[分]로 성취될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바라문이 스승의 집으로 가, 첫 번째 단계에서는 청문하기를 원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마음을 다하여 살펴 들으며, 세 번째 단계에서는 섭수(攝受)하고, 네 번째 단계에서는 기억하며,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구의(句義:25제)를 알며, 여섯 번째 단계에서는 사유하며, 일곱 번째 단계에서는 간택(簡擇)하며, 여덟 번째 단계에서는 참답게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지혜의 여덟 단계라고 한다. 즉 이러한 지혜의 단계에 따라 스물다섯 가지의 진실의를 획득하고, 6행(行)의 관찰에 들어 해탈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3고를 떠나는 세 가지 성취’의 첫 번째는 내적인 괴로움[內苦]을 떠나는 것으로, 이를테면 어떤 바라문이 두통 등의 내적 괴로움에 핍박되어 의사의 처소에가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성취이다. 즉 이러한 내적 괴로움으로 인해 그 같은 괴로움을 소멸할 만한 원인을 알기 원하니, 의사의 처소로 가 여덟 가지 지혜의 단계를 분별하고, 나아가 스물다섯 가지의 진실의를 획득하고, 6행의 관찰에 들어감으로써 해탈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취가 바로 내적 괴로움에 의한 성취로서 육체적 괴로움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괴로움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두 번째는 외적인 괴로움[外苦]을 떠나는 것으로, 이를테면 어떤 바라문이 예컨대 사람이나 짐승ㆍ새로부터, 혹은 산이 무너지고, 나무가 넘어지며, 돌이 떨어지는 등의 외적 괴로움에 정박되어 고달프고 괴로워 도저히 참지 못할 경우, 그 같은 괴로움을 소멸할 만한 인연을 알기 원하여 스승의 처소로 가 여덟 가지 지혜의 단계를 분별하고, 나아가 스물다섯 가지의 진실의를 획득하고, 6행의 관찰에 들어감으로써 해탈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취가 바로 외적 괴로움에 의해 획득되는 성취이다.
세 번째는 하늘에 의한 괴로움[天苦]을 떠나는 것으로, 이를테면 어떤 바라문이 추위나 더위ㆍ비 등의 하늘에 의한 괴로움에 핍박되어 그것을 능히 참아내지 못할 경우, 스승에게로 가 여덟 가지 지혜의 단계를 분별하고, 나아가 스물 다섯가지의 진실의를 획득하고, 6행의 관찰에 들어감으로써 해탈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일곱 번째로 좋은 도반을 얻음에 의한 성취란, 여덟 가지 지혜의 단계에 의해 지혜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 다만 좋은 도반에 의해서도 지혜를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지혜의 궁극에 이르게 되면 바로 해탈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여덟 번째 보시에 의한 성취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어떤 바라문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증오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출가하였다. 그러나 출가하여서도 스승과 벗들이 역시 증오하고 지혜를 일깨워주지 않자, 스스로 박복함을 알고 마을 근처로 가서 머물렀다. 그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곳에는 바라문이 없으니, 편안히 거주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 머물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많이 시여하여 먹다가 남은 것은 친한 도반 내지는 여인이나 가축 키우는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애념(愛念)하게 되었다. 그가 안거(安居)를 마치려고 하자 모든 사람들이 다 3장(杖)과 물단지와 여러 가지 옷 등의 물건을 시여하였다. 제석회(帝釋會:제석천에 대한 제사)가 가까워졌을 때,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누가 능히 나와 더불어 본향인 대국으로 돌아가 이 제석회를 볼 것인가? 만약 가기를 원한다면 그대들은 재물을 챙겨 나와 함께 가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본국으로 가 스승의 집에 이르러 좋은 물건을 가리어 스승에게 공양하고, 나머지 물건은 순서대로 동학(同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스승과 도반 및 여러 사람이 그를 애념하게 되었으며, 스승은 바로 그의 지혜를 베풀어 주었다. 이러한 지혜에 의해 궁극의 지혜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해탈을 획득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보시에 의한 성취인 것이다.
그런데 옛날의 선인들은 이러한 여덟 가지의 성취에 대해 다시 별도의 명칭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즉 첫 번째 성취를 자도성(自度成)이라고 하였으며, 두 번째 성취를 선도성(善度成)이라고 하였으며, 세 번째 성취를 전도성(全度戒)이라고 하였으며, 네 번째 성취를 희도성(喜度成)이라고 하였으며, 다섯 번째 성취를 중희도성(重喜度成)이라고 하였으며, 여섯 번째 성취를 만희도성(滿喜度成)이라고 하였으며, 일곱 번째 성취를 애성(愛成)이라고 하였으며, 여덟 번째 성취를 변애성(遍愛成)이라고 하였다.
[옛날의 선인들이 별도의 명칭을 설정하였던 근거는 이러하다.
첫 번째 자도성이란, 이러한 성취를 획득하는 사람은 가장 예리한 근기를 지닌 자[最利]로서, 스스로 사유함으로써 반야[波若, prajñā]를 획득하여 해탈을 성취하였으니,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도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즉 스스로 사유하여 획득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도이니, 도는 바로 반야의 뜻이다. 이를테면 반야는 능히 이곳[此]을 면하여 저 편[彼]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度)라고 칭한 것이다. 그리고 저편에 건너 이를 때를 해탈이라고 하는데, 해탈을 바로 성(成)이라고 하였다. 즉 원인을 일컬어 도라고 하고, 결과를 일컬어 성이라고 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도성은 스스로의 사유에 의해 획득되었기 때문에 자도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뒤의 일곱 가지 도성의 뜻도 이와 다르지 않으며, 다만 그 별명이 동일하지 않을 뿐이다.
두 번째 선도성이란 스스로에 의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하여 반야를 획득하여 해탈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신근(神根:변이의 주체가 되는 내적 작구 또는 각을 말함)이 작고 열등하고 박덕하여 다른 이의 가르침에 따르기는 하지만, 자신의 뜻[自義]이 많아 능히 반야의 해탈[度脫]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선도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세 번째 전도성이란 한결같이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해 해탈을 회득하기 때문에 전(全)이라고 칭한 것으로, 이러한 이의 신근도 역시 열등하다.
네 번째는 희도성이니, 이러한 사람은 이를테면 두통 등의 내적인 괴로움에 핍박되어 스승에게로 가 치료함으로써 점차 내적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기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탈은 바로 영원한 해탈[永脫]이 아니라고 사유하며, 독존(獨存)의 순간이 바로 영원한 해탈임을 알기 때문에 상캬[僧佉]의 스승에게로 가 반야를 배우고 해탈의 성취를 추구하여 다시 환희를 획득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기쁨[喜]을 성취의 명칭으로 삼았기에 희도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다섯 번째는 중희도성이다. 이러한 사람은 내적이고 외적인 두 가지 괴로움에 핍박되어 스승에게로 가 두 가지 괴로움을 처치해 주기를 요청하고, 두 가지의 괴로움이 점차 종식되면 이것이 바로 두 가지의 기쁨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기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시 스승을 구하여 도성(度成 .즉 반야의 해탈)을 배워 환희를 획득하니, 그래서 중희(重喜)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여섯 번째는 만희도성이다. 이러한 사람은 세 가지 괴로움에 모두 핍박됨이 있다. 즉 첫째는 두통 등의 내적인 괴로움이며, 둘째는 칼이나 막대기 등에 의한 외적인 괴로움이며, 셋째는 바람이나 비ㆍ추위ㆍ더위 등의 하늘에 의한 괴로움이다. 이러한 사람은 스승에게로 가 그 대치를 요청하여 그것을 대치한다. 그래서 차도가 있게 되면 이를 만희(滿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해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스승에게로 나아가 다시 수학함으로써 도성(度成)을 획득하니, 이를 성취의 명칭으로 삼았기 때문에 만희도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일곱 번째 애도성이란 스승의 연민의 사랑[憐愛]이 그에게 도성(度成)을 가르친 것으로, 스승에 따라 이러한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여덟 번째는 변애도성이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이로부터 증오를 당하였으나, 재물을 얻어 보시함으로써 마침내 모든 이로부터 사랑받게 되었고, 모든 이가 아울러 그가 해탈을 획득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래서 변애도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7)
그리고 만약 이러한 여덟 가지 성취에 반대되는 것이면 이를 여덟 가지 무능(無能)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자도가 아닌 무능[非度無能] 내지 변애가 아닌 무능[非遍愛無能]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에서 논설한 바와 같은 11근에 포섭되는 무능과 열일곱 가지의 지혜의 장해에 의한 무능을 스물여덟 가지 무능이라고 하는 것이다.8)
의혹과 무능과 기쁨과 성취가 전전하여 쉰 가지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처럼 기관이 손괴된 무능에 열한 가지가 있고, 지혜의 장해에 열일곱 가지가 있어 합하면 스물 여덟 가지가 되는 것으로, 여기에 다섯 가지의 의혹과 아홉 가지의 기쁨과 여덟 가지의 성취를 합한 쉰 가지에 대해 이미 다 논설하였다.]
‘앞의 세 가지는 성취의 갈고리이다’라고 함은, 비유하자면 술에 취한 코끼리가 갈고리에 제압되어 마음대로 자재를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간은 이러한 다섯 가지의 의혹과 스물여덟 가지의 무능과 아홉 가지의 기쁨에 제압되어 진실지를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즉 진실지를 떠나서 여덟 가지의 성취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앞의 세 가지는 바로 성취의 갈고리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모름지기 의혹과 무능과 기쁨을 버리고, 여덟 가지의 성취를 부지런히 닦아야 하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는 성취의 갈고리이다’라고 함은, 다섯 가지의 의혹과 스물여덟가지의 무능, 그리고 아홉 가지의 기쁨은 바로 뒤에 설명한 여덟 가지를 성취하는 이에게 갈고리가 된다는 말이다. 즉 여덟 종류의 성취는 마땅히 해탈을 성취하여 회득하게 하는 것이지만 이 세 가지로 말미암아 획득할 수 없게 되니, 마치 술에 취한 코끼리는 응당 자재해야 함에도 갈고리에 묶여 자재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덟 가지의 성취도 역시 그러하여 반드시 진실지에 의하여 여덟 가지의 성취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 갈고리에 속박되었기 때문에 진실지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반드시 앞의 세 가지를 버리고 뒤의 여덟 가지를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온갖 형태의 유[諸有, bhāva]가 훈습된 체상(禮相, linga:細身)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윤전한다’고 이미 앞(제40송)에서 논설하였다. 체상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가 미세한 상으로서, 태초의 생[初生]에 존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부모에 의해 낳아진 몸과 11근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함께 상응하는 것으로, 여덟 가지의 유(有)가 훈습되었기 때문에 생사를 윤전한다. 여기에 의문이 있다. 즉 무엇이 먼저 생겨난 것인가? 체상이 먼저 생겨난 것인가, 온갖 형태의 유가 먼저 생겨난 것인가?”
외도가 말하였다.
“이하 다음에서 먼저 앞에서 언급한 게송의 뜻을 밝힌 후 선후를 물을 것이다. ‘온갖 형태의 유가 훈습된 체상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윤전한다’고 함은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온갖 형태의 유란 여덟 가지의 존재를 말하니, 이를테면 네 가지의 법과 네 가지의 비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네 가지 법이란, 첫째가 법이며, 둘째가 지혜이며, 셋째가 이욕이며, 넷째가 자재이며, 이러한 네 가지 병의 반대가 바로 비법이다. 이러한 여덟 가지 존재를 일컬어 유라고 한 것은, 앞의 네 가지 법이 훈습되어 능히 천도(天道)를 획득하게 되며, 뒤의 네 가지 비법이 훈습되어 능히 인간과 축생[人獸]의 두 가지 도를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훈습된 것[所薰]이 바로 체상이다. 체상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자성과 각과 5유를 미세한 체상이라고 이름하며, 5유로부터 생겨난 11근과 상응하여 일어난 것을 거친 체상이라고 이름한다.
그럴 때 이 같은 여덟 가지 형태의 유와 그것이 훈습된 두 가지 체상 중에서 무엇이 먼저 생겨난 것인가? 여덟 가지 유가 먼저 존재하는 것인가, 두 가지 체상이 먼저 존재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유(有)를 떠나 별도의 체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離有無別相
미세상을 떠나서도 온갖 형태의 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離細相無有
체상이라고도 이름하고, 유라고도 이름하니, 相名及有名
그래서 생(生)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이다.9) 故空有二種
‘유(有)를 떠나 별도의 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은, 온갖 형태의 유를 배제하고서 체상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비유하자면 뜨거움을 떠나 불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미세한 체상을 떠나서도 온갖 형태의 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은, 만약 이러한 상을 배제할 경우 온갖 형태의 유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비유하자면 불을 떠나 뜨거움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이러한 두 존재가 서로 의존하는 것은 마치 불과 뜨거움의 관계와 같지만, 이러한 두 존재가 함께 생기하는 것은 마치 소의 두 뿔과도 같다.
‘체상이라고도 이름하고, 유라고도 이름하니, 그래서 생(生)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함은, 자성의 변이에는 두 가지의 명칭이 있으니, 첫째는 체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낳으며, 둘째는 유라고 이름하는 것을 낳는데, 최초로 생사를 낳을 때에는 바로 이러한 두 종류를 갖춘다는 것이다.
답하여 말하였다.
“두 가지로 해석하여 밝혀야 하리라. 여덟 가지 유와 체상은 선후가 없이 서로 상응하며 동시에 생기한다. 이를테면 불과 뜨거움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소의 두 뿔은 반드시 함께 생겨나는 것처럼 여덟 가지 유와 체상의 관계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자성과 각과 아만과 5유의 미세한 상으로 존재할 때에는 반드시 여덟 가지 유중의 네 가지 법이나 비법을 갖는다. 즉 네 가지 법을 갖지 않는다면, 네 가지 비법을 갖으니, 양자(체상과 유)는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에 의해 생겨난 거친 몸도 역시 이와 같다. 이렇듯 상은 여덟 가지의 유와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렇듯 생(生)에는 오로지 두 가지의 생(유와 상)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름의 생도 있는 것인가?”
“네 가지 유의 세 번째 생을 함식생(含識生)이라고 이름하는데, 게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10)
천도(天道)에 여덟 가지 갈래가 있고, 天道有八分
수도(獸道)에 다섯 가지 갈래가 있으며, 獸道有五分
인도(人道)에는 오직 한 생(生)만이 있으니, 人道唯一生
이를 간략히 말해 함식생이라고 한다.11) 畧名含識生
‘천도(天道)에 여덟 가지 갈래가 있다 함은, 첫 번째는 법왕(法王, brāhma)의 생이며, 두 번째는 세주(世主, prājaptya)의 생이며, 세 번째는 천제(天帝, aindra)의 생이며, 네 번째는 건달바(乾闥婆, gāndharva)의 생이며, 다섯번째는 아수라(阿修羅, paitra)의 생이며, 여섯 번째는 야차(夜叉, yākṣa)의 생이며, 일곱 번째는 나찰(羅刹, rākṣasa)의 생이며, 여덟 번째는 사신(沙神, paiṣāca)의 생이다.
‘수도(獸道)에 다섯 가지 갈래가 있다’고 함은, 첫 번째는 네 발 달린 것[四足]의 생이며, 두 번째는 날아다니는 것[飛行]의 생이며, 세 번째는 배로 기어다니는 것[胸行]의 생이며, 네 번째는 몸이 옆으로 되어 있는 것[傍形]의 생이며, 다섯 번째는 가지 못하는 것[不行]의 생이다.12)
‘인도(人道)는 오직 한 생만이 있다’는 것은 인간세계에는 오로지 한 종류의 생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 함식(含識)의 세 종류에 대해 논설하였는데, 이를테면 하늘[天]과 축생[獸]과 인간[人]의 세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함식생과 아울러 체상과 유를 세 가지의 생(生)이라고 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3세간(천ㆍ수ㆍ인도) 중에서 어떠한 속성이 어디에서 증가하여 많아지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위로 향할수록 희락(喜樂)이 많고, 向上喜樂多
감각적인 생[根生]에는 치암(癡闇)이 많으며, 根生多癡闇
그 중간의 생에는 우고(憂苦)가 많으니, 中生多憂苦
범왕에서 세간의 버팀목[柱]까지이다.13) 梵初柱爲後
‘위로 향할수록 희락이 많다’ 범왕이 태어나는 처소 등에는 희락(사트바)이 가장 많다. 여기에도 물론 우고(라자스)와 치암(타마스)이 존재하지만 희락에 제압되었기 때문에 범왕 등의 온갖 하늘은 가락(歌樂)을 많이 향수하는 것이다.
‘감각적인 생[根生]에는 치암이 많다’고 함은, 이를테면 짐승이나 날짐승 내지 세간의 버팀목 따위인 가지 못하는 것[不行]의 생에는 세 속성 가운데 치암이 많다는 말이다. 여기에도 우고와 희락이 존재하지만 치암에 제압되었기 때문에 짐승 등에는 치암이 많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감각적인 생’이라고 함은 세 가지(天ㆍ人ㆍ獸) 생 중에서 가장 하위의 생이기 때문에 ‘감각적[根]’이라고 한 것이다.
‘중간의 생에는 우고가 많다’고 함은, 중간의 생인 인간에게는 우고가 많다는 말이다. 여기에도 역시 희락과 치암이 존재하지만 우고가 많기 때문에 희락과 치암을 제압하였기 때문으로, 그래서 인간의 생 중에는 우고가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인도(人道)를 중간이라고 이름한 것은 세 가지 세계의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세 가지 생 중의 최후의 생을 버팀목[柱]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버팀목이란, 이를테면 풀이나 나무ㆍ산ㆍ돌 따위를 말하는 것으로, 3세간은 이에 따라 유지되기 때문에 버팀목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상 체상의 생(生)과 유의 생, 그리고 함식의 생에 대해 이미 다 논설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세 가지 생은 바로 자성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의 작용[事]에 대해서도 이미 만족되었다. 즉 그것은 세간을 남는 것이고, 아울러 해탈을 획득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인간과 하늘, 그리고 축생의 3세간 중에서는 누가 고락을 향수하는 것인가? 자성이 향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각과 아만과 5유 내지 11근 등이 향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바로 자아[人我]가 향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이 가운데 늙고 죽는 괴로움은 此中老死苦
오로지 지자인 자아만이 향수(享受)할 뿐으로, 唯智人能受
이 때는 체상이 아직 떠나지 않았을 때이니, 體相未離時
그래서 간략히 ‘이는 바로 괴로움이다’라고 설하는 것이다.14)
故畧說是苦
‘이 가운데 늙고 죽는 괴로움은 오로지 지자인 자아[智人]만이 향수할 뿐이다’ 3세간 중에는 괴로움이 존재하니, 바로 늙음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즉 피부가 쭈그러지며, 머리카락이 희고 빠지며, 호흡이 가빠지고, 지팡이에 의지하게 되고, 친구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 같은 괴로움은 모두 늙음에 의한 것이다. 죽음의 괴로움이란, 어떤 이가 여덟 가지 자재를 획득하였든지, 혹은 다섯 가지 미미한 대상[微塵:하늘의 인식대상인 5유]을 획득하였든지, 혹은 거친 대상(5대)을 획득하였을 경우, 이 같은 사람은 죽음에 임하여 염라에 기록되는데, 여기서 받는 괴로움을 죽음의 괴로움이라고 한다.
또한 중간의 시절(태어나 늙고 죽는 중간의 시기)에는 세 가지 괴로움(내적ㆍ외적 조건과 하늘에 의한 괴로움)이 있는데, 지자인 자아만이 능히 이러한 세 가지의 괴로움을 향수한다. 즉 자성이나 거친 몸(각 내지 11근을 체상으로 하는 몸)은 무지하기 때문에 향수할 수 없으며, 그래서 자아[人]가 괴로운 것이지 자성 등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시절에 자아는 이러한 괴로움을 받는 것인가?”
체상이 아직 떠나지 않았을 때이니, 그래서 간락히 ‘이(체상)는 바로 괴로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대 등의 거친 체상과 미세한 몸[細身]이 아직 서로를 떠나지 않았다면 이러한 거친 음도 세간 중에서 윤전하며 아직 서로를 떠나지 않게 되는데, 이러한 때에 자아는 괴로움을 향수한다. 그러나 만약 미세한 체상과 거친 체상이 서로를 떠났을 경우 자아는 바로 해탈한다. 그리고 만약 해탈하였다면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등의 괴로움은 더 이상 받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아직 미세한 체상과 거친 체상을 떠나지 않았으면 자아는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없다. 그래서 미세한 체상과 거친 체상을 간략히 괴로움이라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자성의 작용[事]은 오로지 이것(세계를 전개시켜 자아로 하여금 괴로움을 향수하게 하는 것)뿐인가? 또 다른 작용도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자성의 작용은 이와 같으니, 自性事如此
각(覺) 등과 5대를 전개하고, 覺等及五大
세 처소의 자아를 해탈시키기 위한 것으로, 爲脫三處人
타자를 위한 작용은 자신을 위한 것과 같다.15) 爲他如自事
‘자성의 작용은 이와 같으니, 각(覺) 등과 5대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 게송은 어떠한 내용을 말한 것인가?
이를테면 이것은 본 논의 일곱 가지 게송의 내용과 그 특성을 이미 원만히 성취하고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자성의 두 가지 작용이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의 첫 번째 작용은 차례로 생사를 일으켜 자아로 하여금 3세간의 대상과 상응하게 하여 차례대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즉 처음에 각을 일으키고, 각으로부터 아만을 일으키며, 아만으로부터 5유를 일으키고, 5유로부터 11근과 5대를 일으키니, 이러한 스물세 가지 전변[事]과 몸은 각을 최초의 원리로 삼고, 5대를 최후의 원리로 삼는 것이다.
두 번째 작용은 제 처소의 자아[人]를 해탈시키기 위한 것으로, 타자를 위한작용은 자신을 위한 것과 같다. ‘즉 하늘 세계[天道]의 자아와 인간 세계[人道]ㆍ축생 세계[獸道]의 자아를 해탈시키기 위해 차례로 여덟 가지의 성취(제51송 참조)를 짓는 것[作]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성과 자아의 중간(각에서 유출된 스물세 가지 원리와 거친 몸)과 비교해 보면, 이 두 가지(자성과 자아)는 다만 타자를 위해 작용할 뿐 자신을 위해 작용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친구의 일만을 해주고, 자신의 일은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성은 다만 타자를 위해 작용하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16)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자성이 자아를 위한 작용을 이미 지었다면 바로 자아를 떠날 수 있다고 논설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자성은 지식을 갖지 않으며 오로지 자아만이 지식을 갖는데, 어떻게 타자(자아)로 하여금 대상과 상응하여 3세간을 윤전하게하며, 뒤에 해탈을 획득하도록 작의(作意)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러한 뜻을 가졌다면, 그것은 지식을 갖지 않은 것[無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식을 갖지 않는 것도 예컨대 사물과 결합하는 경우가 있고, 분리되는 경우가 있음을 볼 수 있으니, 게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송아지를 키우기 위해 爲增長犢子
지식[知]을 갖지 않은 것이 전변하여 우유가 되며, 無知轉爲乳
자아를 해탈시키기 위해 爲解脫人我
지식을 갖지 않은 자성도 역시 그렇게 한다.17) 無知性亦爾
‘송아지를 키우기 위해 지식을 갖지 않은 것이 전변하여 우유가 된다’고 함이란, 세간 중에 지식을 갖지 않은 수초(水草)가 ‘소에게 먹히어 마땅히 송아지를 키워야지’라고 하는 것과 같은 분별[計]을 짓게 되면 1년 동안 능히 전변하여 우유가 된다. 그러나 송아지가 이미 성장하여 풀을 뜯어먹을 수 있게 되면, 소가 다시 수초를 먹더라도 더 이상 변이하여 우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자아를 해탈시키기 위해 지식을 갖지 않은 자성도 역시 그렇게 한다’고 함은 이와 마찬가지로 무지의 자성도 자아를 위해 작용하여 해탈을 얻게 하니, 어떤 경우에는 결합(전개)하고, 어떤 경우에는 분리(귀몰)된다. 그리고 분리되고 나면 다시는 결합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안정을 떠나기 위해 爲離不安定
세상 사람들이 일을 도모하듯이 如世間作事
자아가 해탈하도록 하기 위해 爲令我解脫
알지 못하는 것[不了]도 역시 그렇게 작용하는 것이다.18) 不了事亦爾
‘불안정을 떠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일을 도모하듯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세상 사람들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데, 이는 그 같은 불안정을 떠나기 위한 까닭에서이다.
‘자아가 해탈하도록 하기 위해 알지 못하는 것도 역시 그렇게 작용한다’는 것은 자성은 자아로 말미암아 불안정을 갖게 되는 것으로, 그 같은 불안정을 떠나기 위해 자아를 위해 마땅히 작용하는 것이니, 첫째가 소리 등의 대상을 취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 가지 속성과 자아의 중간(中間)을 취하여 불안정을 제거하고, 마지막으로 자아와 서로 분리됨[相離]을 획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알지 못하는 것[不了]’이란 바로 자성의 다른 이름으로, 자성은 이미 근(根)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니, 그래서 또한 명(冥)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앞(제15송)에서 설한 바와 같다.
각각의 개별적 존재는 양을 지였기 때문이며,
동일한 성질이고, 능력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며,
원인과 결과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변상(遍相), 즉 만물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도리로 인해 자성은 바로 실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배우가 무대에 나와 如伎出舞堂
관중들에게 몸을 나타내고는 다시 숨어버리듯이 現他還更隱
자성이 자아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令我顯自身
떠나가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19) 自性離亦爾
‘마치 배우가 무대에 나와 다른 몸을 나타내고는 다시 숨어버리듯이’라고 함은, 어떤 한 배우가 노래와 춤 등의 즐거움을 짓기 위해 몸을 나타내어 관중에게 보인다. 그리고 그들 관중간들이 자기를 이미 보았고, 노래와 춤을 이미 다 마쳤으면 장막 속으로 돌아가 숨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성도 역시 그러하다는 말이다. 즉 어떤 경우에는 각에 근거하여 몸을 나타내며, 혹 어떤 경우에는 아만에 근거하여 몸을 나타내며, 혹 어떤 경우에는 5유ㆍ5지근ㆍ5작근ㆍ5대에 근거하여 몸을 나타내며, 혹 어떤 경우에는 기쁨[喜]과 근심[憂]과 암치(闇癡)의 세 가지 속성이나 3세간 등에 근거하여 몸을 나타낸다. 그리고 몸을 이미 나타내었으면, 그 후에는 바로 원리(遠離)하여 다시는 세 가지 괴로움[三熱]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자성이 자아에게 자신(自身, Ātman)을 드러내고, 떠나가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자성이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데에는 몇 종류의 방편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여러 가지의 방편으로써 以種種方便
은혜가 없는 이에게 은혜를 주고, 作恩於無恩
속성을 갖지 않은 타자를 위해 속성을 갖는 자가 有德於無德
작용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20) 爲他事無用
‘여러 가지의 방편으로써 은혜가 없는 이에게 은혜를 준다’고 함은, 성(聲) ㆍ촉(觸)ㆍ색(色)ㆍ미(味)ㆍ향(香) 등의 대상을 능히 자아에게 현현시킨다는 뜻으로서, 자아가 능히 은혜를 수용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것들을 현현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곧 자아와 그것은 서로 다르다. 자아는 자성의 은혜를 수용하지만 어떠한 은혜도 자성에게 갚는 일이 없다.
‘속성을 갖지 않은 타자를 위해 속성을 갖는 자가 작용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고 함에 있어, 자성은 이를테면 기쁨과 근심과 암치의 세 가지 속성을 갖지만 자아에게는 이러한 속성이 없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친구의 이익만을 도모할 뿐 그 자신의 이익은 돌아보지 않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자성은 처음부터 자아를 위해 뜻에 따라 세간의 작용을 조작하며(세계를 전개시키며), 나아가 해탈을 도모하지만, 자아는 한시라도 그것의 은혜를 갚는 일이 없다. 그래서 ‘타자를 위해 작용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자아가 자성을 올바르고 두루 관찰[正遍觀]한 후에 해탈을 획득한다고 함은 비슷하게 관찰한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지극히 섬세하고 유연한 자성, 太極濡自性
그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자아는 생각한다. 我計更無物
나(자성)는 지금 이미 보여졌으니, 我今已被見
이로 인해 감추어져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21) 因此藏不見
‘지극히 섬세하고 유연[濡, sukumāra]한 자성, 그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자아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세간 중의 어떤 사람이 매우 뛰어난 덕을 지닌 여인을 보고,22) 또한 다시 두 번째 여인의 덕도 대단히 뛰어난 것을 보고 생각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여인은 매우 뛰어나 여기에 미칠 만한 이는 아무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자성도 역시 이와 같아서 스물네 가지 진실의[二十四義] 중에서 그만큼 유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인가?
다른 이가 보는 것을 참아 감수(感受)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자아의 독존은 자성을 관찰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재신을 세간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논사[執自在因師, Īśvara lāraṇa-vādin]’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는 어리석고 자성은 존재하지 않아
저절로 즐거움과 괴로움 중에 안주하니,
자재천(自在天)이 천상이나 지옥으로
가게 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주장에 따를 것 같으면 설혹 자아가 자성을 보더라도 자성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성의 유연함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이 세간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논사[執自然因師, svabhāva kāraṇa-vādin: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노카야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3) “자성을 보고 해탈을 획득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해탈은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으로, 이미 앞(제27송)에서 설한 바와 같다.
능히 거위로 하여금 희 색이게 하고,
앵무새로 하여금 청색이게 하는 것,
이러한 원인이 능히 자아를 낳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공작의 색을 조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세간은 자연을 원인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해탈하는 것이지, 자성을 보고 해탈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자성을 보고 해탈을 획득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아[人我, puruṣa)에 따라 해탈하기 때문으로, 게송 중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4베다의 찬가에서 과거에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한다는 자아[人]는
죽음과 삶 등에 자재하고,
행이 편재하며 거듭하여 행하지 않는다.
즉 이와 같은 자아 때문에 해탈하는 것이지 자성을 보기 때문에 해탈하는 것이 아니다.“24)
“그대는 ‘자재천이 세간의 원인이다’라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어째서 그러한가?
자재천은 속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자재천은 세 가지 속성을 갖는 일이 없지만 세간에는 세 가지의 속성이 있으니, 자재천이 세간의 원인이라고 할 경우 인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재천은 세간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오로지 자성만이 세 가지 속성을 지니며, 나아가 세간에도 세 가지속성이 있기 때문에 자성이 능히 세간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속성을 갖지 않은 자아[人我]도 역시 세간의 원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 세간의 원인이라고 하는 주장도 옳지 않다. 왜냐 하면 그것은 지각[證量]과 추리[比量]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각이라는 것은 일찍이 지어진 원인[先作因]을 보고 난 후에 결과를 아는 것이고, 추리에 의한 지식이란 이 같은 지각의 관찰[證見]에 따라 거래(去來)를 비교 판단[比度]하여 그와 같음을 역시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그대는 성인의 말씀에 근거하였기 때문으로, 그래서 그 같은 지식을 얻었다고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 하면 그것은 전도된 학설이기 때문이니, 그렇기 때문에 그 같은 성인의 말씀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또한 이를테면 시절(時節, kāla:시간)이 세간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온갖 학설이 있는데, 게송으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시절이 중생을 성숙시키고,
아울러 중생을 감소ㆍ파멸시키며,
세간이 잠든 것을 시절이 깨우니,
누가 시절을 속일 수 있을 것인가?
일체의 현상은 다 시절에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자성을 보는 것과는 관계 없이 해탈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시절이 세간의 원인이라고 하는 주장은 옳지 않으니, 세 가지 원리 가운데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성과 변이와 자아가 모든 존재를 다 포섭하니, 이 세 가지를 떠난 별도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세 가지 가운데시절은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시절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변이의 본질[體]을 시절이라고 이름한 것일 뿐으로, 과거의 변이를 과거의 시절이라 이름하고, 미래ㆍ현재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따라서 시절이란 바로 변이의 다른 이름임을 알아야 한다.25)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볼 때 자성이 바로 세간의 원인이다. 그리고 만약 자아[人]가 이와 같은 정지(正智)를 획득하면, 이 때 바로 올바르게 두루[正遍]자성을 관찰할 수 있고, 그럴 때 자성은 바로 활동을 멈추고 떠나게 된다. 그리고 자성을 떠남으로써 자아는 해탈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극히 섬세하고 유연한 자성, 그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자아는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자성이 만약 보여졌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아로부터 떠날 수 있는 것인가?”
“‘나(자성)는 지금 이미 보여졌으며, 이로 인해 감추어져[藏]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귀한 집의 여인으로서 그 성품이 착한 이와 같다. 즉 어떤 사람이 갑자기 와서 보게 되면 이 여인은 바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자성도 역시 이와 같아서 만약 자아가 올바르게 두루 관찰하게 되면 바로 자아를 떠나 숨어버리며, 오로지 자아만이 홀로 스스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세간에서 총명한 이는 다 같이 말하기를, ‘자아[人]가 속박되고, 자아가 해탈하며, 자아가 생사를 윤전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은 사실인가, 사실이 아닌가?”
“이러한 말은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그러함을 안 것인가?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자아에게는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人無縛無脫
생사를 윤전하는 일도 없으니, 無輸轉生死
생사를 윤전하거나 계박되며 輪轉及繫縛
해탈하는 것은 오로지 자성뿐이다.26) 解脫唯自性
‘자아[人]에게는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고 함은, 자아는 속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세 가지 속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며, 변만(遍滿:遍在)하기 때문이며, 변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작용[事]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즉 계박되는 것은 세 가지 속성이 있기 때문인데, 자아는 세 가지 속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자성에 의한 속박[自性縛]이 없는 것이다.
‘편만하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이러하다. 속박의 뜻에는 저것과 이것의 차별이 있어, 여기(이를테면 생사)에 있으면 저것(해탈)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그래서 속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편만하여 이것과 저것의 차별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속박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변이하는 일이 없다 함은, 각으로부터 5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변이는 모두 자성에 속하며, 자아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에는 변이에 의한 속박[變異縛]이 없는 것이다.
‘작용을 갖지 않는다’고 함은, 자아는 작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용을 지을 수 없으며, 보시 등의 모든 작용은 다 자성에 속하기 때문에 자아는 보시에 의해서도 속박[施縛]되지 않는 것이다.27)
그리고 속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탈하지도 않으니, 이치상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해탈을 획득하는 것이다.
‘생사를 윤전하는 일도 없다.’ 일체의 곳에서 편만한데 어떻게 윤전할 수 있겠는가? 아직 일찍이 이르지 못한 곳에 가는 것을 ‘윤전한다’고 일컫는 것으로, 자아는 두루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윤전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이러한 진실의를 알지 못한다면, 자아는 속박되고 또한 윤전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누가 속박되고 또한 윤전하는 것인가?”
“‘생사를 윤전하거나 계박되며, 해탈하는 것은 오로지 자성뿐이다.’ 자성은 자성과 변이와 보시 등에 의해 능히 스스로의 몸(미세신ㆍ추신을 말함)을 속박한다. 즉 이러한 5유의 세신과 열세 가지 근이 상응하게 되면 세 가지 속박에 결박되고, 3세간의 생을 윤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변지(正遍智)의 생을 획득하게 되면, 능히 세 가지 속박을 풀고 윤전에서 벗어나 바로 해탈한다. 그래서 ‘3세간은 자성에 의해 능히 경험적 현상[事:윤전하고 계박되고 해탈하는 일]을 짓는다’고 말한 것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만약 ‘자아[人]는 세간에 속박되고, 생사를 해탈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와 같이 진실의(眞實義)를 如是眞實義
자주 익혀 더 이상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數習無餘故
자성과 변이는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라는 無我及我所
전도됨이 없는 청정한 독존의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28) 無到淨獨智
‘이와 같이 진실의’란, 이를테면 앞에서 이미 설하였던 스물다섯 가지의 원리[義]를 말한다.
‘자주 익혀 더 이상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라고 하는 것은 6행(行)의 관찰(제50송 장행 참조)을 반복하여 수습하였기 때문에, ‘남은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수습하여 구경(究竟)에 이르렀기 때문에 지혜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로 말미암아 집착[執]과 아집(我執)과 아소집(我所執)이 없어지며, 나아가 이러한 세 가지 집착과 아울러 다섯 가지 의혹(제47송 참조)도 모두 멸진한다. 즉 일체의 현상[事]과 신체는 모두 자성이 지은 바로서, 비존재[無]도 아니지만 나[我]도 아니고 나의 것[我所]도 아니니, 그것들은 모두 자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에 의해 지혜를 닦으면 청정한 독존을 낳을 수 있다. 즉 이러한 지혜에 의해 자아는 해탈을 획득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자아는 이러한 지혜에 의해 무엇을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지혜에 의해 자성은 더 이상 낳지 않으니, 由智不更生
자아의 뜻은 마침내 경험적 현상을 버리는 것이다. 我意竟捨事
즉 자아가 자성을 바라보는 것은 人我見自性
마치 고요히 안주하며 무대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29) 如靜住觀舞
‘지혜에 의해 자성은 더 이상 낳지 않는다’고 함은, 이러한 진실지(眞實智)로 말미암아 자성은 더 이상 각과 아만과 5유 등을 낳지 않는다는 말이니, 이를테면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곡식이 수분과 토양을 가졌더라도
껍질을 갖지 않았으면 싹을 틔울 수 없듯이
지혜의 힘이 제압하였기 때문에
자성이 현상을 낳지 못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자아의 뜻[我意]은 마침내 경험적 현상[事]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함은, 자아를 위해 짓는 두 가지의 일을 이미 완전히 끝마쳤다는 말이다. 즉 첫 번째로는 대상을 수용하였고, 두 번째로는 자성과 자아의 중간(中間:분별)을 보았기 때문에 자성은 자아를 위해 일체의 경험적 현상을 떠나는 것이다.
‘자아가 자성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고요히 안주하며 무대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함은, 마치 배우를 바라보는 관객[人]들이 편안히 않아 올바로 머무는 것[直佐]과 마찬가지로 자아도 역시 이와 같다는 말이다. 즉 여러 가지 현상 중에서 이 같은 자성을 관찰하지만 자아는 끝내 움직이지 않는다. 이는 이를테면 ‘이것(자성과 자아)들은 다 같이 모든 이들을 속박하지만(자아의 관조에 의해 자성이 전개할 경우), 그 후에 역시 모든 이들을 능히 해탈하게 한다. 진실지를 획득하였을 경우’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지혜는 자성과 자아에 대해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자아는 이미 보았으므로 무관심하게 머물고, 我見已捨住
자성은 자아에게 보여졌으므로 떠나 숨으니, 我被見離藏
자성은 자아와 비록 화합하더라도 自性我雖合
작용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낳지 않는다.30) 無用故不生
‘자아는 이미 보았으므로 무관심하게 머문다[捨住, upekṣaka]’ 함은, 예컨대 세간 사람들은 여러 배우[侍女]들이 행하는 온갖 종류의 춤과 노래를 보았을 경우 생각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미 충분히 보았으므로 다시 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捨心] 안주하리라”고 하며, 배우들도 생각하기를, ‘나의 춤과 노래가 이미 보여졌으므로 이곳에서 물러나 떠나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자아[人我]도 역시 이와 같아서 자성을 이미 보았으므로 바로 무관심하게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자성 역시 이와 같으니, 이미 보여졌기 때문에 바로 작용을 떠나 무관심하게 머물게 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자아는 변만(遍滿)하며, 자성 역시 편만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화합은 항상 이루어지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화합에 의해 몸을 낳아야할 것인데, 어떻게 더 이상 몸을 낳지 않는 것인가?”
“‘자성은 자아와 비록 화합하더라도 작용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낳지 않는다.’ 그대는 자아와 자성은 편만하기 때문에 항상 화합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러하다. 만약 그럴 경우 어떻게 더 이상 몸을 낳지 않는 것인가 하면, 낳는 작용[生用]이 없기 때문이다. 낳는 작용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자아로 하여금 대상과 상응하게 하는 것(세계 전변으로서의 속박)이며, 둘째는 자아로 하여금 자성의 차별을 보게 하는 것(세계 귀몰로서의 해탈)이다. 이러한 두 가지 작용이 이미 완전히 다 보여졌기 때문에 더 이상 몸을 낳지 않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작용은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니, 화합을 원인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변지(正遍知)의 힘 때문에 더 이상 낳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지혜에 의해 자아는 자성을 보더라도 완전히 염리(厭離)한 채로 보며, 비록 다시 화합하더라도 역시 낳을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돈을 꾸어준 채권자와 채무인은 이전에는 채무의 관계 때문에 서로 상응하지만, 채무를 갚고 나면 다시 화합하더라도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자아와 자성의 관계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지혜로 말미암아 해탈을 획득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대에게도 역시 지혜가 있을 것이고, 나에게도 역시 지혜가 있을 것인데, 어떻게 우리 두 사람은 다 같이 해탈하지 못한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정변지로 말미암아 由正邊知故
법 등은 원인은 되지 않지만 法等不成因
윤전하고 나서 올바로 머물 것이니, 輪轉已直住
마치 물레바퀴가 제어된 것과 같다.31) 如輪身被制
‘정변지로 말미암아 법 등은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함에 있어, ‘정지(正知)’란 스물다섯 가지 진실의를 참답게 아는 것을 말하며, ‘변지’란 스물다섯 가지 진실의가 이보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지혜(정변지)의 힘에 의해, 첫째 법, 둘째 비법, 셋째 비지(非智), 넷째 이욕(離欲), 다섯째 비이욕, 여섯째 자재, 일곱째 부자재의 일곱 가지가 태워지고 허물어졌기 때문에 그것들은 능히 몸을 짓는 원인이 되지 않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씨앗이 이미 불에 태워졌으면 다시는 싹을 틔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렇듯 일곱 가지 상은 지혜로 인해 그 소멸이 획득되었기 때문에 몸을 짓는 원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사람(지혜를 획득한 사람)들은 여전히 오고 가며 윤전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빗날 이러한 법 등의 숙세(宿世)의 원인에 의해 7처(축생의 다섯 가지와 인간과 하늘)의 윤전을 획득하였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지혜로 인해 이러한 윤전의 원인과 원인에 근거한 것(依因:윤전)을 능히 낳지 않게 되었으니, 비유하자면 양산이 없으면 그 그림자도 역시 따라올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숙세의 원인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신체도 역시 더 이상 조작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혜자[智人]는 숙세에 조작한 원인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윤전하고 나서’ 올바로 머물 것[直住]이니, 마치 도공의 물레바퀴가 제어된 것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지혜를 획득하고 나서 언제 해탈을 획득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신체를 버릴 때 목적이 달성되니, 捨身時事顯
자성이 원리(遠離)할 때, 自性遠離時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決定及畢竟
두 가지의 독존(獨存)이 성취될 수 있다.32) 二獨存得成
‘신체를 버릴 때’란 일찍이 지은 법과 비법이 소멸할 때이다. 이러한 신체를 올바로 버릴 때이면, 내적인 신체에 존재하는 지대(技大)는 외계의 지대로 돌아가 상응하며, 나아가 내적인 공대(空大)도 역시 외계의 공대로 돌아간다. 또한 5근은 5유로 돌아가며, 나아가 마음[心根]도 역시 5유로 돌아간다.
‘목적이 달성[事顯]되니, 자성이 원리(遠離)할 때’라는 것은, 일체의 생사(변이)를 낳으려는 목적과 해탈하려는 목적이 이미 만족되었기 때문에 이 때 자성은 자아를 멀리 떠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때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두 가지의 독존이 성취될 수 있다’ 여기서 ‘궁극적인 독존’이란, 참다운 지혜에 의할 뿐 의방(醫方)이나 온갖 다른 도의 주장[異執]을 떠난 것을 말하며, ‘절대적 독존’이란 네 가지 베다의 과보와 지혜에 의하지 않은 이욕의 과보를 떠난 것을 말하지만, 이러한 독존은 결코 두 가지가 아니다. 즉 여기서 ‘절대적[畢竟]’이라 함은 더 이상 이를 곳[邊際]이 없다는 말이다. 나아가 이 같은 두 가지의 독존은 두 가지 시간[二時] 중에 독존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 같은 정변지(正遍知)는 어떠한 목적에 이용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이러한 지혜는 자아의 목적을 위한 是智魏我用
비밀로서 대선(大仙)이 설한 것인데, 秘密大仙說
세간의 생기와 지속과 소멸은 世間生住滅
이 중에서 모색될 수 있다.33) 此中得思量
‘이러한 지혜는 자아의 목적[我用, puruṣārtha)을 위한 것이다’라고 함에 있어, ‘이러한 지혜’란 스물다섯 가지 진실의에 대한 정변지를 말하며, ‘자아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함은 독존의 해탈을 말한다.
‘비밀로서 대선이 설한 것이다’라고 함에 있어, ‘비밀기란 여러 가지 사설(邪說)에 의해 뜻이 감추어져 나타날 수 없는 것으로서, 올바른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획득할 수 없기 때문에 비밀이다. 즉 마땅히 다섯 가지의 공덕을 갖춘 바라문에게만 베풀고, 그 밖의 다른 이들에게는 베풀지 않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여기서 다섯 가지 공덕이란, 첫째 태어난 곳이 좋으며[生地好], 둘째 족성이 좋으며[姓族好], 셋째 행이 뛰어나며[行好], 넷째 능력이 있으며[有能], 다섯째 원하여 얻는 것[欲得]을 말하니, 이러한 지혜를 갖출 자라면 법을 베풀기에 주저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베풀지 않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리고 ’대선이 설하였다’고 함은 가비라(迦毘羅,Kapila)선인에 의해 차례대로 설해졌음을 말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지혜 중에서 무엇을 모색[思量]하는 것인가?”
“‘세간의 생기와 지속과 소멸은 이 중에서 모색될 수 있다.’ 여기서 ‘세간’이란 브라만[梵]을 비롯하여 버팀목[柱:초목 등의 무생물, 제54송 참조]에 이르기까지를 말하니, 그것들은 모두 이 중에서 생기하고, 지속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기’란 자성으로부터 각이 생겨나고, 나아가 5대가 생겨나는 것을 말하고, ‘지속’이란 미세신이 여러 유형의 유(有)에 훈습됨에 따라 3세간 중에 윤전하는 것을 말하며, ‘소멸’이란 여덟 가지의 성취(제51송 참조)에 의해 독존을 영원히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세 가지 법은 바로 이러한 지혜 중에서 현현하고, 이 세 가지를 떠난 그 밖의 다른 법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지혜야말로 궁극의 지혜[究竟智]인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혜는 누구로부터 획득된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이러한 지혜는 수승한 길상(吉祥)으로, 是智勝吉祥
모니(牟尼)께서 자비의 마음으로 설하신 것이니, 牟尼依悲說
먼저 아수리를 위해 설하셨고, 先爲阿修利
다음에 반시하에게 설하셨다.34) 次與般尸訶
‘이러한 지혜는 수승한 길상(吉祥)이다’라고 함은, 이러한 지혜는 그 옛날 네 가지 베다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을 때 최초로 성취되었는데, 이러한 지혜에 의해 네 가지 베다와 여러 가지의 도(道)가 그 후에 성취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一切最勝]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자아는 이러한 지혜로 말미암아 세 가지 괴로움과 스물네 가지 근본 괴로움, 그리고 세 가지 속박의 원리(遠離)를 획득하고,35) 독존 해탈한다. 그래서 이러한 지혜를 ‘가장 수승한 길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모니(牟尼, mum)께서 자비의 마음으로 설하셨다.’ 즉 누가 처음으로 이러한 지혜를 획득하였던 것인가 하면, 바로 가비라 대선인(大仙人)이다. 앞(제1송)에서 설하였듯이 가비라선인은 처음 출현하면서부터 네 가지 공덕을 갖추고 있었는데, 첫째가 법이며, 둘째가 지혜이며, 셋째가 이욕이며, 넷째가 자재이다. 즉 그는 이러한 지혜를 얻고 나서 크나큰 자비심에 따라 그것을 설하셨던 것인데, 이러한 지혜를 수호하여 지니고, 다른 이를 제도하고자 하는 자비심으로 인해 ‘먼저 아수리를 위해 설하셨다.’
그리고 아수리선인은 ‘다음에 반시하(般尸訶, Pañcaśikha)를 위해 설하셨다’ 이 반시하는 이 논을 자세히 설하였는데, 6십천(十千) 게송이나 되었다. 일찍이 가비라선인이 아수리를 위해 간략히 설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최초에는 오로지 어둠[闇]만이 생겨났다. 이러한 어둠 중에 지혜의 밭[智田]이 있었다. 지혜의 밭이 바로 자아[人]이다. 즉 자아가 존재하여도 아직 지혜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밭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다음으로 회전 변이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전변의 생[轉生]이다. 나아가 해탈한다.”
아수리선인이 반시하를 위해 간략히 설한 것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었지만, 반시하가 이러한 지혜를 자세히 설하여 6십천 게송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순서대로 계승되어 마침내 성(姓)은 구식(狗式, Kusala)이고, 이름은 자재흑(自在黑, Īśvarakṛṣṇa)이라고 하는 바라문이 이를 70게송으로 가려 취하게 되었으니, 게송으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제자들이 차례대로 출현하여 弟子次第來
위대한 스승의 지혜를 전수하였는데, 傳受大師智
자재흑이 간략히 설하였던 것은 自在黑略說
이미 진실의의 근본을 알았기 때문이다.36) 已知實義本
‘제자들이 차례대로 출현하여 위대한 스승의 지혜를 전수하였다’고 함은, 이러한 지혜는 가비라로부터 비롯되어 아수리에 이르고, 아수리는 반시하에게 전하였으며, 반시하는 갈가(褐伽, Garga)에게 전하였으며, 갈가는 우루거(優樓佉, Ulūka)에게 전하였으며, 우루거는 발바리(跋婆利)에게 전하였으며, 발바리는 자재흑에게 전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순서로 자재흑은 이러한 지혜를 획득하였는데, 대론(大論)은 수지(受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70게송으로 간략하게 줄였으니,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세 가지 괴로움에 의한 핍박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소멸하는 원인에 대해 알기 원한다.37)
위의 게송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자재흑이 간략히 설하였던 것은 이미 진실의의 근본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제자 중에 어떤 총명한 이가 있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이 70게송의 논의는
6만의 내용을 모두 포섭하니,
여기서는 연생(緣生) 내지
쉰 가지의 진실의를 모두 설하고 있다.
즉 그 같은 6만 게송의 내용은 이 70게송에 나오지 않으니, 본 논의 내용은 이를테면 앞의 게송(제46송)에서 설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생(生)은 원인인 각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의혹[疑]과 무능(無能)과 성취[成]와 기쁨[喜]이니,
속성을 사량(思量)함에 불평등하면
각은 쉰 가지의 구분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38)
그리고 다시 열 가지의 진실의가 있으니, 게송으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존재성과 단일성과 목적성의 진실의와
자성과 자아의 다섯 가지 진실의와 이미 독존한다는 것과
결합과 분리와 자아의 다수성과
신체의 지속이니, 이것이 열 가지 진실의이다.
‘존재성[有]’이 진실의란 ‘원인 가운데 결과가 존재한다[因中有果]’는 진실의(제9송 장행 참조)이고, ‘단일성’의 진실의란 자성은 단일하지만 다수의 자아[人]에 따라 작용하여 윤전한다는 진실의이며. ‘목적성[意用]’의 진실의란 자아로 하여금 여러 대상과 상응하게 하고, 그 후 중간을 보게 한다는 진실의(제42송 참조)이다.
‘다섯 가지 진실의’란 다섯 가지의 이유에서 자성의 존재가 입증되며, 다섯 가지의 이유에서 자아의 존재가 입증되는 것을 말하니, 앞(제15송과 제17송)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
‘독존한다’고 함이란 정변지에 의한 궁극적[定]이고도 절대적[極]으로 독존하는 것을 말한다.
‘화합과 분리’란 편만(遍滿)하기 때문에 화합하고(제66송 장행 참조), 목적이 달성되었기[事顯] 때문에 서로 분리되는 것(제59송 참조)을 말한다.
‘자아의 다수성’이란 태어남과 죽음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러한 진실의에 대해서는 앞(제18송 참조)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
‘신체의 지속’이란 세신에 의해, 나아가 아직 지혜를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신체가 지속하는 것, 다시 말해 생사를 윤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열 가지 진실의와 쉰 가지의 진실의를 합한 것이 바로 6만 게송에서 설하는 바로서, 그렇기 때문에 『금칠십론』과 『육만 게송』은 진실의에 있어 동등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대론(판차시카의 6만 게송)』과 『금칠십론』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대론』에서는 옛날 성인의 전승[聖傳]이나 다른 이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지만 『금칠십른』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양자의 차이점이다.”
이와 같이 하여 논의를 모두 다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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