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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05 불교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1권

by Kay/케이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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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1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제1권


송(宋)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최윤옥 번역


1.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품[一切佛語心 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갖가지 보배 꽃으로 장엄한 남쪽 해안가 능가산(楞伽山) 꼭대기에서 대비구승(大比丘僧)과 여러 다른 불국토에서 찾아온 대보살(大菩薩) 무리와 함께 계셨다. 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삼매(三昧)와 자재력(自在力)과 신통력(神通力)으로 유희(遊戱)하였으며, 대혜보살마하살(大慧菩薩摩訶薩)을 우두머리로 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손수 그들의 정수리에 물을 부어 주시니, 스스로 마음에 나타난 경계에 대해서 그 뜻을 잘 알게 되었으며, 온갖 중생의 갖가지 심색(心色)과 한량없이 많은 해탈의 문[度門]이 근기에 따라 두루 나타났다. 그리고 다섯 가지 법과 자성(自性)과 식(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를 구경(究竟)까지 통달하였다.
이때 대혜보살이 마제(摩帝)보살과 함께 모든 불국토를 지나와서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이어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한 채 공경히 게송(偈頌)으로 찬탄하였다.

세상은 생멸(生滅)을 벗어나
허공에 핀 꽃과 같아
지혜로 보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데
대비심(大悲心)을 일으키시네.

모든 법 환(幻)과 같아
마음과 식(識)을 멀리 벗어나
지혜로 보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데
대비심을 일으키시네.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멀리 벗어나
세상은 항상 꿈과 같아
지혜로 보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데
대비심을 일으키시네.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알고
번뇌와 이염(爾炎)을 아시어
항상 청정해 상(相)이 없건만
대비심을 일으키시네.

일체 어디에도 열반은 없고
열반에 든 부처님도 없으며
부처님이 열반에 드는 일도 없으니
깨닫고, 깨달을 대상을 멀리 벗어나셨네.

있다거나 또는 없다거나

이 두 가지 모두 다 벗어나고
석가모니[牟尼]께선 적정(寂靜)히 관찰하시니
이것이 곧 생사를 멀리 벗어난 것일세.
이를 취(取)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니
금세(今世)에도 후세(後世)에도 청정하리라.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을 게송으로 찬탄하고 나서 스스로 성명(姓名)을 말하였다.

제 이름은 대혜(大慧)이니
대승(大乘)을 통달하고자
이제 백여덟 가지 뜻을
가장 높으신 분께 우러러 여쭙니다.

세상을 잘 아시는 분
말한 게송을 들으시고는
모든 대중을 관찰하시고
모든 불자(佛子)에게 말씀하셨네.

모든 불자들아
지금 모두 마음껏 물어라.
내가 너희를 위해
자각(自覺)의 경계를 말하리라.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허락을 받들어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한 후 합장한 채 공경히 게송으로 여쭈었다.

어떻게 그 생각[念]을 깨끗이 하며
왜 생각이 증장(增長)합니까?
어떻게 어리석은 의혹을 보며
왜 의혹이 커집니까?

무슨 까닭으로 국토 안에는
상(相)과 모든 외도(外道)가 화생(化生)합니까?
무엇이 욕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무슨 까닭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 합니까?

왜 불자(佛子)라고 하며
어디에 이르면 해탈입니까?
누가 얽매고 누가 해탈하며
무엇이 선(禪)의 경계입니까?
왜 3승(乘)이 있는지
바라옵건대 말씀해 주십시오.

연기(緣起)는 어디에서 생기며
무엇이 짓는 자이며 지어진 것입니까?
무엇이 구설(俱說)과 이설(異說)이며
무엇을 증장이라 합니까?

무엇이 무색정(無色定)이고
또 멸정수(滅正受)입니까?
어떻게 생각이 없어지며
어떤 인연으로 정(定)에서 깨어납니까?

무엇이 지어진 생(生)이며
진거(進去)이며 지신(持身)입니까?
어떻게 분별이 나타나며
어떻게 모든 경지[地]가 생깁니까?

3유(有)를 깨뜨리는 사람은 누구이며
하처신(何處身)이란 무엇입니까?
왕생(往生)하면 어느 곳에 이르며
어떤 이가 최승자(最勝子)입니까?

어떤 인연으로 신통(神通)을 얻고
자재(自在)와 삼매(三昧)를 얻으며
무엇이 삼매심(三昧心)인지
가장 훌륭하신 분이시여,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을 장(藏)이라 하고
무엇을 의(意)와 식(識)이라 하며
무엇을 생(生)과 멸(滅)이라 하고
무엇이 이미 돌아온 것을 보는 것입니까?

무엇을 종성(種姓)이라 하고
종성이 아니라 하며, 심량(心量)이라 합니까?
무엇이 상(相)을 건립하고
비아(非我)의 이치를 건립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중생이 없는 것이며
무엇이 세속의 말입니까?
무엇을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 생기지 않는 것이라 합니까?

왜 부처님과 외도(外道)가
그 모습이 서로 어긋나지 않으며
어찌하여 미래에는
온갖 이부(異部)가 생깁니까?

무엇이 공(空)이고 무엇이 인(因)이며
찰나(刹那)에 무너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태장(胎藏)에서 생긴다는 것이며
세상에서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슨 까닭으로 환(幻)이나 꿈과 같고
건달바성(揵闥婆城)과 같으며
세상은 더운 날 아지랑이 같고
물에 비친 달빛과 같습니까?

어떤 인연으로 각지(覺支)와
보리분(菩提分)을 말씀하십니까?
국토가 어지럽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있다는 견해를 짓습니까?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아
세상은 허공에 핀 꽃과 같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말씀이 글자를 벗어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망상(妄想)을 벗어난 자는 누구이며
왜 허공에 비유합니까?
여실한 것이 몇 종류나 있으며
바라밀(波羅蜜)의 마음은 몇이나 됩니까?

어떤 인연으로 모든 경지[地]를 건너며
누가 받아들임이 없는 경지에 이릅니까?
무엇이 두 가지 무아(無我)이며
이염(爾炎)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지혜는 몇 종류나 있으며
중생성(衆生性)을 단속하는 금계는 몇입니까?
누가 마니(摩尼)와 진주(眞珠) 같은
모든 보배 성품[寶性]을 낳습니까?

누가 모든 언어와
중생의 갖가지 성품을 낳습니까?
명처(明處)와 기술(伎術)은
누가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까?

가타(伽陀)는 몇 종류나 있으며
긴 게송과 짧은 게송은
몇 종류나 되며
무엇을 논(論)이라 합니까?

어떻게 음식이 생기며
모든 애욕(愛欲)이 생깁니까?
왜 왕이라 하며
전륜왕(轉輪王)과 소왕(小王)이라 합니까?

국가를 수호(守護)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모든 하늘[天]은 몇 종류나 되며
무엇을 땅이라 하고
별과 해와 달이라고 합니까?

해탈을 수행하는 자는
각기 몇 종류나 있고
제자는 몇 종류가 있으며
아사리(阿闍梨)란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또 몇 분이나 계시며
또 어떤 종성에서 태어납니까?
악마와 모든 이학(異學)은
각기 몇 종류나 있습니까?

자성(自性)과 마음[心]은
또 각기 몇 종류나 있으며
어떻게 양(量)을 시설하시는지
가장 훌륭하신 분이시여,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 허공과 바람과 구름이고
무엇이 기억이 총명한 것입니까?
무엇을 숲이나 나무라 하며
무엇을 덩굴풀이라고 합니까?

무엇이 코끼리와 말과 사슴이고

어떻게 붙들어 잡습니까?
무엇을 비루(卑陋)하다 하며
어떤 인연으로 비루해집니까?

무엇이 6사(師)에 소속된 것이며
무엇이 일천제(一闡提)입니까?
남자와 여자와 불남(不男)은
모두 어떻게 생깁니까?

어떻게 수행(修行)에서 물러서며
어떻게 수행이 생깁니까?
선사(禪師)는 어떤 법으로
어떤 사람들을 건립(建立)합니까?

중생이 태어나는 모든 세계[趣]는
어떤 모습[相]이며 어떤 상(像)의 종류입니까?
어떤 이를 부자라 하고
어떤 인연으로 부자가 됩니까?

어떤 이를 석가종(釋迦種)이라 하고
어떤 인연으로 석가종이 있습니까?
어떤 이를 감자종(甘蔗種)이라 하는지
무상존(無上尊)이시여,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이를 오래도록 고행하는 선인[長苦仙]이라 하며
그는 어떻게 가르칩니까?
여래께서는 어떻게
일체시(一切時)에 모든 국토에서
여러 가지 명색(名色)으로 나타나며
최승자(最勝子)에게 에워싸입니까?

왜 고기를 먹지 않고
왜 고기를 끊도록 제정하셨으며
고기를 먹는 경우는 몇 종류나 되고
무슨 까닭에 고기를 먹습니까?

어찌하여 해와 달의 모습과
수미산(須彌山)과
연화사자승상(蓮花師子勝相)의 국토가
가로놓여 세계를 덮되
인다라망(因陀羅網) 같습니까?

혹 모든 진기한 보배와
공후(箜篌)와 허리 잘록한 장고와
온갖 모습의 모든 꽃들과
혹 해와 달빛을 가리는 등
이와 같이 무량(無量)합니까?

무엇이 화불(化佛)이고
무엇이 보생불(報生佛)이며
무엇이 여여불(如如佛)이고
무엇이 지혜불(智慧佛)입니까?

왜 욕계(欲界)에서는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지 못하며
왜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욕심을 벗어나고 보리를 얻습니까?

선서(善逝)께서 열반(涅槃)에 드시면
누가 정법(正法)을 지닐 것이며
천사(天師)께서는 얼마나 오래 머무시며
정법은 얼마 동안 머뭅니까?

실단(悉檀)과 견(見)은
각기 또 몇 종류나 있으며
비구의 비니(毘尼)는
무엇이며, 무슨 인연입니까?

저 모든 최승자와
연각(緣覺)과 성문은
무슨 인연으로 백 번을 변하며
어찌하여 백 번을 받음[受]이 없습니까?

세속에 통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세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7지(地)라고 하는지
저희를 위해 연설하여 주십시오.

승가는 몇 종류가 있으며
승가를 파괴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의방론(醫方論)이라 하며
이는 다시 무슨 인연입니까?

무슨 까닭으로 대모니(大牟尼)께선
이렇게 선언하셨습니까?

가섭(迦葉)과 구류손(拘留孫)
구나함(拘那含)이 바로 나다.

무슨 까닭에 단(斷)과 상(常)
아(我)와 무아(無我)를 말씀하시며
어찌하여 모든 때에
진실한 이치를 연설하지 않고
다시 중생을 위해
심량(心量)을 분별해 말씀하십니까?

어떤 인연으로 남녀의 숲에
가리륵(訶梨勒)과 아마륵(阿摩勒)이 있고
계라(鷄羅)와 철위(鐵圍)와
금강(金剛) 등의 모든 산이
무량한 보배로 장엄하며
선인(仙人)과 건달바(揵闥婆)가 가득합니까?

무상세간해(無上世間解)께서는
그가 말한 게송을 들었으니
대승의 제도하는 문이며
모든 부처님의 심(心)이고 제일이었다.여기에서 심(心)자는 나무의 견실한 핵심 같은 것이지, 생각으로 반연하는 마음이 아니다.

물음이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대혜(大慧)야, 자세히 잘 들어라.
내가 지금 차례대로
너의 물음에 따라 말하리라.

생(生)과 불생(不生)
열반(涅槃)과 공(空)과 찰나
자성이 없는 데 이르는 것과
부처와 모든 바라밀

불자(佛子)와 성문
연각과 모든 외도
그리고 무색행(無色行)
이와 같은 갖가지 일과

수미산(須彌山)과 큰 바다와 산
삼각주와 국토의 땅
별과 해와 달
외도와 하늘과 수라(修羅)

해탈(解脫)과 자재(自在)와 통달(通達)
힘[力]과 선(禪)과 삼마제(三摩提)
멸(滅)과 여의족(如意足)
각지(覺支)와 도품(道品)

모든 선정(禪定)의 무량함과
모든 음신(陰身)의 왕래
정수(正受)와 멸진정(滅盡定)
삼매(三昧)에서 깨어나는 마음 설명하리라.

심(心)과 의(意)와 식(識)
무아(無我)와 다섯 가지 법(法)
자성(自性)과 생각[想]과 생각하는 대상[所想]
그리고 현전(現前)의 이견(二見),

승(乘)과 모든 종성(種性)과
금(金)과 은(銀)과 마니(摩尼) 등
일천제(一闡提)와 대종(大種)과
황란(荒亂)과 일불(一佛),

지혜와 이염(爾焰)과 얻음[得]과 향함[向]
중생의 있음과 없음
코끼리와 말과 모든 금수를
어떻게 잡아들이는가 하는 것,

비유와 인(因)으로 실단(悉檀)을 이루는 것
그리고 짓는 자[作]와 지어진 것[所作]
울창한 숲 같은 미혹(迷惑)과 통함과
심량(心量)과 현전(現前)에 있지 않음,

모든 경지가 서로 이르지 않는 것
백 번 변하되, 백 번 받지 않는 것
의방론(醫方論)과 공교론(工巧論)
기술(伎術)과 모든 명처(明處),

모든 산과 수미산과 땅
큰 바다와 해와 달의 크기
하중상(下中上)의 중생
몸에 각각 얼마나 많은 미진(微塵)이 있고
각각의 국토에 얼마나 미진이 있으며
궁궁(弓弓)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팔꿈치 길이와 걸음 폭과 구루사(拘樓舍)
반유연(半由延)과 유연(由延),

토호(兎毫)와 창진(窓塵)과 의(蟻)
양모(羊毛)와 굉맥진(䵃麥塵)
발타(鉢他)는 몇 굉맥진이고
아라(阿羅)는 몇 굉맥진인지,

독롱나거리(獨籠那佉梨)와
늑차(勒叉)와 거리(擧利)와
빈바라(頻婆羅)
이들은 각각 얼마만한 수(數)인지,

얼마만큼의 아누(阿㝹)를
사리사바(舍梨沙婆)라고 하는지
얼마만큼의 사리사바를
1뇌제(賴提)라고 하는지,

얼마만큼의 뇌제마사(賴提摩沙)를
마사타나(摩沙陀那)라고 하는지
얼마만큼의 마사타나를
타나라(陀那羅)라고 하는지,

또 얼마만큼의 타나라를
가리사나(迦梨沙那)라고 하는지
얼마만큼의 가리사나가
1바라(波羅)가 되는지,

이와 같이 모인 모습이
몇 바라미루(波羅彌樓)인지
이런 것들은 반드시 물어봐야 하겠지만
다른 것들이야 물을 필요 있겠는가.

성문과 벽지불
부처와 최승자(最勝子)
그 몸은 각각 얼마나 되는지
왜 이것을 묻지 않는가?

불꽃은 얼마만큼의 아누이며
바람은 또 얼마만큼의 아누인가.
뿌리의 뿌리는 얼마만큼의 아누이며
털구멍과 눈썹의 털은 얼마인가.

재물을 보호하는 자재왕(自在王)과
전륜성제왕(轉輪聖帝王)은
어떻게 왕위를 수호하며
어떻게 해탈하는가를
길게 또는 짧게 설명하리라.

네가 물은 바와 같이
무엇이 중생의 갖가지 욕심이며
갖가지 음식이며
무엇을 남녀의 숲이라 하며
금강같이 견고한 산이라고 하며
무엇을 환(幻) 같고 꿈같다고 하며
들 사슴이 갈증이 나 애착하는 데 비유하며,

무엇을 산(山)과 천(天)과 선인(仙人)과
건달바가 장엄한다 하며
해탈하면 어디에 이르며
누가 얽매고 누가 해탈하며,

무엇이 선(禪)의 경계이며
변화이고 외도이며
인(因) 없이 짓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인(因)이 있어 짓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인(因)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면서 짓는다는 것과
인(因)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현재에 이미 멸(滅)한 것이며
무엇이 모든 각(覺)을 깨끗이 한 것이며,

무엇이 모든 각이 구르는 것[轉]이며
또 모든 만들어진 것을 굴리는 것이며
어떻게 모든 상(想)을 끊으며
어떻게 삼매(三昧)에서 일어나며,

3유(有)를 파괴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어느 곳에서 어떤 몸이 되며
어떻게 중생이 없는데
내[吾我]가 있다고 말하며,

세속의 말이란 무엇인가.
자세히 분별해 달라 하였는데

무엇이 그대가 물은 법의 모습이며
무엇이 그대가 물은 법엔 실체가 없다는 것인가.

무엇이 태장(胎藏)이며
갖가지 다른 몸이며
무엇이 단견(斷見)이고 상견(常見)이며
무엇이 마음이 정(定)을 얻는 것이며,

언설(言說)이며 모든 지(智)이며
계율이며 종성이며 불자며
무엇이 이루어져 논(論)이 되며
무엇이 스승이고 제자이며,

갖가지 모든 중생
이들은 또 누구이며
무엇이 음식이며
총명(聰明)이고 널리 시설(施設)하는 것이며
무엇이 나무이고 칡넝쿨인가.

최승자여, 그대가 묻기를
어떻게 여러 국토에서
선인(仙人)이 오래 고행(苦行)하며
어떤 족성(族姓)이 되어
어떤 스승에게서 배우며,

무엇을 추루(醜陋)라 하며
어떤 사람이 수행하며
욕계(欲界)에서는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고
아가니타(阿迦膩吒)에서는 이루며
어떻게 세속에서 신통(神通)을 얻으며,

무엇을 비구(比丘)라 하며
무엇을 화불(化佛)이라 하며
무엇을 보불(報佛)이라 하며
무엇을 여여(如如)라 하며
평등한 지혜불(智慧佛)이라 하며
무엇을 중승(衆僧)이라 하는가?

불자(佛子)야, 이와 같이 묻는구나.
공후와 허리 잘록한 북과 꽃
국토와 광명을 가리는 것
심지(心地)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지 물으니
물은 것이 모두 여실(如實)하다.

이것과 나머지 많은 것들
불자(佛子)가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니
각각의 상(相)이 모두 상응하며
모든 견해의 허물 멀리 벗어나고
성취하여[悉檀] 언설을 벗어난다.
내가 지금 드러내 보이리라.

차례로 논리를 세워
불자여, 자세히 잘 들어라.
이상 말한 108구(句)는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불생구(不生句)와 생구(生句), 상구(常句)와 무상구(無常句), 상구(相句)와 무상구(無相句), 주이구(住異句)와 비주이구(非住異句), 찰나구(刹那句)와 비찰나구(非刹那句), 자성구(自性句)와 이자성구(離自性句), 공구(空句)와 불공구(不空句), 단구(斷句)와 부단구(不斷句), 변구(邊句)와 비변구(非邊句), 중구(中句)와 비중구(非中句),
상구(常句)와 비상구(非常句)무릇 세 가지 상이 있으니 이 상(常)은 범음(梵音)으로 위의 상(常)과 소리가 다르다., 연구(緣句)와 비연구(非緣句), 인구(因句)와 비인구(非因句), 번뇌구(煩惱句)와 비번뇌구(非煩惱句), 애구(愛句)와 비애구(非愛句), 방편구(方便句)와 비방편구(非方便句), 교구(巧句)와 비교구(非巧句),
정구(淨句)와 비정구(非淨句), 성구(成句)와 비성구(非成句), 비구(譬句)와 비비구(非譬句),
제자구(弟子句)와 비제자구(非弟子句), 사구(師句)와 비사구(非師句), 종성구(種性句)와 비종성구(非種性句), 삼승구(三乘句)와 비삼승구(非三乘句), 소유구(所有句)와 무소유구(無所有句), 원구(願句)와 비원구(非願句), 삼륜구(三輪句)와 비삼륜구(非三輪句), 상구(相句)와 비상구(非相句), 유품구(有品句)와 비유품구(非有品句),
구구(俱句)와 비구구(非俱句), 자성지(自聖智)에 연(緣)하여 법락(法樂)을 나타내는 구와 법락을 나타내지 않는 구, 찰토구(刹土句)와 비찰토구(非刹土句), 아누구(阿㝹句)와 비아누구(非阿㝹句), 수구(水句)와 비수구(非水句), 궁구(弓句)와 비궁구(非弓句), 실구(實句)와 비실구(非實句), 수구(數句)와 비수구(非數句)이것은 물건의 숫자이다., 수구(數句)와 비수구(非數句)이 수(數)는 상(霜)의 초성과 루(縷)의 종성을 합한 발음이다., 명구(明句)와 비명구(非明句),
허공구(虛空句)와 비허공구(非虛空句), 운구(雲句)와 비운구(非雲句), 공교기술명처구(工巧伎術明處句)와 비명처구(非明處句), 풍구(風句)와 비풍구(非風句), 지구(地句)와 비지구(非地句), 심구(心句)와 비심구(非心句), 시설구(施設句)와 비시설구(非施設句), 자성구(自性句)와 비자성구(非自性句),
음구(陰句)와 비음구(非陰句), 중생구(衆生句)와 비중생구(非衆生句), 혜구(慧句)와 비혜구(非慧句), 열반구(涅槃句)와 비열반구(非涅槃句), 이염구(爾焰句)와 비이염구(非爾焰句), 외도구(外道句)와 비외도구(非外道句), 황란구(荒亂句)와 비황란구(非荒亂句), 환구(幻句)와 비환구(非幻句), 몽구(夢句)와 비몽구(非夢句),
염구(焰句)와 비염구(非焰句), 상구(像句)와 비상구(非像句), 윤구(輪句)와 비윤구(非輪句), 건달바구(揵闥婆句)와 비건달바구(非揵闥婆句), 천구(天句)와 비천구(非天句), 음식구(飮食句)와 비음식구(非飮食句), 음욕구(婬欲句)와 비음욕구(非婬欲句), 견구(見句)와 비견구(非見句), 바라밀구(波羅蜜句)와 비바라밀구(非波羅蜜句),
계구(戒句)와 비계구(非戒句), 일월성수구(日月星宿句)와 비일월성수구(非日月星宿句), 제구(諦句)와
비제구(非諦句), 과구(果句)와 비과구(非果句), 멸기구(滅起句)와 비멸기구(非滅起句), 치구(治句)와 비치구(非治句), 상구(相句)와 비상구(非相句), 지구(支句)와 비지구(非支句), 교명처구(巧明處句)와 비교명처구(非巧明處句),
선구(禪句)와 비선구(非禪句), 미구(迷句)와 비미구(非迷句), 현구(現句)와 비현구(非現句), 호구(護句)와 비호구(非護句), 족구(族句)와 비족구(非族句), 선구(仙句)와 비선구(非仙句), 왕구(王句)와 비왕구(非王句), 섭수구(攝受句)와 비섭수구(非攝受句), 실구(實句)와 비실구(非實句), 기구(記句)와 비기구(非記句), 일천제구(一闡提句)와 비일천제구(非一闡提句),
여남불남구(女男不男句)와 비여남불남구(非女男不男句), 미구(味句)와 비미구(非味句), 사구(事句)와 비사구(非事句), 신구(身句)와 비신구(非身句), 각구(覺句)와 비각구(非覺句), 동구(動句)와 비동구(非動句), 근구(根句)와 비근구(非根句), 유위구(有爲句)와 비유위구(非有爲句), 무위구(無爲句)와 비무위구(非無爲句),
인과구(因果句)와 비인과구(非因果句), 색구경구(色究竟句)와 비색구경구(非色究竟句), 절구(節句)와 비절구(非節句), 울수등구(鬱樹藤句)와 비울수등구(非鬱樹藤句), 잡구(雜句)와 비잡구(非雜句), 설구(說句)와 비설구(非說句), 비니구(毘尼句)와 비비니구(非毘尼句), 비구구(比丘句)와 비비구구(非比丘句), 처구(處句)와 비처구(非處句), 자구(字句)와 비자구(非字句)이다.
대혜야, 이 108구는 과거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너를 비롯한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식(識)에는 몇 종류의 생김과 머묾과 없어짐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식에는 두 가지의 생김과 머묾과 없어짐이 있으니,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식에는 두 가지의 생김이 있으니 유주생(流注生)과 상생(相生)이고, 두 가지의 머묾이 있으니 유주주(流注住)와 상주(相住)이며, 두 가지의 없어짐이 있으니 유주멸(流注滅)과
상멸(相滅)이다. 모든 식에는 세 종류의 상(相)이 있으니, 전상(轉相)과 업상(業相)과 진상(眞相)이다.
대혜야, 간략히 말하면 세 종류의 식(識)이 있고, 자세히 말하면 여덟 가지 상(相)이 있다. 무엇이 세 종류인가? 진식(眞識)과 현식(現識) 그리고 분별사식(分別事識)이다. 이는 마치 맑은 거울이 모든 색상(色像)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으니, 현식에 색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다.
대혜야, 현식과 분별사식 이 두 가지는 무너지는 모습[壞相]과 무너지지 않는 모습[不壞相]이 번갈아 인(因)이 된다. 대혜야, 부사의훈(不思議薰)과 부사의변(不思議變)은 현식(現識)의 인이다. 대혜야, 갖가지 경계를 취하는 것과 끝없는 옛날부터의 망상훈(妄想薰)은 분별사식(分別事識)의 인이다. 대혜야, 만약 저 진식(眞識)을 덮고 있는 온갖 진실하지 않은 것들과 모든 허망한 것들이 없어지면 모든 근식(根識)이 없어진다. 대혜야, 이것을 ‘상(相)이 없어진다’고 한다.
대혜야, 상속(相續)이 없어진다는 것은 상속하는 원인[所因]이 없어지면 상속이 없어지고, 말미암는 곳[所從]이 없어지거나 반연하는 대상[所緣]이 없어지면 상속이 없어지는 것이다. 대혜야, 왜냐하면 이것이 그 의지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것이란 끝없는 옛날부터의 망상훈(妄想薰)을 말하고, 반연하는 것이란 자기 마음과 견해 등으로 경계를 인식하는 망상을 말한다. 마치 진흙덩이와 미진(微塵)이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같으니, 금(金)과 장엄구(莊嚴具)도 역시 이와 같다.
대혜야, 만약 진흙덩이와 미진이 다르다면 진흙덩이는 미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진흙덩이와 미진은 당연히 분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전식(轉識)과 장식(藏識)의 진상(眞相)이 만약 다르다면, 장식은 전식의 인(因)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이 없어지면 장식 역시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체의 진상(眞相)은 실제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혜야, 자체 진상의 식(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업상(業相)이 없어질 뿐이니, 만약 자체의 진상이 없어진다면 곧 장식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대혜야, 장식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외도들의 논의인 단견(斷見)과 다르지 않다.
대혜야, 저 모든 외도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없어지면 식(識)의 상속 역시 없어진다. 만약 식의 상속이 없어진다면 끊임없는 옛날부터의 상속 역시 끊어져야 한다.’
대혜야, 외도들은 ‘상속하는 식은 인(因)에서 생긴다. 안식(眼識)은 물질과 밝음이 모여서 생기는 것이 아니니, 다른 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인(因)으로 여기는 것은 훌륭하고 묘한 것[勝妙]ㆍ사람[士夫]ㆍ자재한 것[自在]ㆍ시간[時]ㆍ미진(微塵)이다.
또, 대혜야, 일곱 가지 성자성(性自性)이 있다. 말하자면 집성자성(集性自性)ㆍ성자성(性自性)ㆍ상성자성(相性自性)ㆍ대종성자성(大種性自性)ㆍ인성자성(因性自性)ㆍ연성자성(緣性自性)ㆍ성성자성(成性自性)이다.
또, 대혜야, 일곱 가지 제일의(第一義)가 있다. 말하자면 마음의 경계ㆍ혜(慧)의 경계ㆍ지(智)의 경계ㆍ견(見)의 경계ㆍ2견(見)을 초월한 경계ㆍ불자의 지위를 초월한 경계ㆍ여래가 스스로 도달한 경계이다.
대혜야, 이것이 바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등정각(等正覺)의 성자성제일의의 마음[性自性第一義心]이다.여기에서 ‘마음≺心≻’은 범음(梵音)으로 간율대(肝栗大)이다. 간율대는 송나라 말로 마음≺心≻이라고 하는데 나무의 심지와 같다는 뜻이다. 이는 생각으로 반연하는 마음≺念慮心≻이 아니다. 생각으로 반연하는 마음은 범음으로 질다(質多)라고 한다. 성자성제일의의 마음으로써 여래는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과 출세간상상법(出世間上上法)을 성취하고, 성스러운 혜안(慧眼)으로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들어가서 건립하니, 그 건립된 것은 외도가 주장하는 악한 견해와는 같은 것이 아니다.
대혜야, 무엇이 외도가 주장하는 악한 견해와 같은 것인가? 이는 자기의 경계인 망상견(妄想見)에 대해서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것인 줄 알지 못해 한계[分際]를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성품에 성자성제일의(性自性第一義)가 없어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의 논의를 짓는다.
또, 대혜야, 망상으로 인한 3유(有)의 고통이 없어짐, 무지(無知)와 애업(愛業)의 인연이 없어짐, 자기 마음에 나타난 환과 같은 경계를 견해에 따라 이제 설명하겠다.
대혜야,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종자가 없이[無種] 또는 종자가 있어서[有種] 인과가 나타난다고 하고, 일[事]과 시간[時]이 머문다고 하고,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생김을 반연해 머문다고 하며, 혹은 생기고 나서 없어진다고 말한다면, 대혜야, 그들이 말하는 상속(相續)ㆍ일[事]ㆍ생김[生]ㆍ있음[有]ㆍ열반(涅槃)ㆍ도(道)ㆍ업(業)ㆍ과(果)ㆍ진리[諦]는 모든 법을 파괴하는 단멸론(斷滅論)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실에서 시초(始初)를 볼 수 없으니, 분(分)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깨어진 병이 병으로 쓰일 수 없는 것과 같고, 또 볶은 씨앗에서 싹이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대혜야,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성품은 이미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 자기 마음의 망상견(妄想見)이어서 인(因)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차례로 생김이 없다.
대혜야, 만약 또 종자가 없는 것, 종자가 있는 것, 식(識), 이 세 가지 연(緣)이 합해서 생긴다고 말한다면, 거북이에게 당연히 털이 나야 할 것이고 모래에서는 당연히 기름이 나와야 할 것이니, 너의 주장은 틀린 것이며 결정된 이치에 어긋난다. 종자가 있다거나 종자가 없다는 말을 하는 데에는 이러한 잘못이 있으므로 하는 일이 모두 공(空)하여 의의[義]가 없다.
대혜야, 저 모든 외도가 세 가지 연(緣)이 화합하여 생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어진 방편과 인과의 자상,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종자가 있는 모습과 종자가 없는 모습이 본래부터 사물을 이룬다는 각상지(覺想地)를 이어받고 굴러서는, 스스로 허물과 습기를 보고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악견(惡見)의 해(害)를 받아 마음이 비뚤어지고 정신이 헷갈려 지혜가 없으면서, 망령되게 일체지(一切智)의 말이라고 칭한다.
대혜야, 만약 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자성(自性)을 떠난 것이 뜬 구름이나 불을 돌려 생기는 바퀴 모양[火輪]이나 건달바성(揵闥婆城)이나 생긴 적이 없는 환(幻)이나 아지랑이나 물에 비친 달이나 꿈과 같음을 본다면, 내외의 마음으로 나타난 망상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이지만 자기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망상의 인연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가 망상으로 말[說]과 말의 내용[所說], 관(觀)하는 자와 관하는 대상을 모두 벗어나고, 몸의 장식(藏識)을 수용하고 건립하여 식경계(識境界)의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인 것과 서로 응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무소유(無所有) 경계에서 생김과 머묾과 없어짐을 벗어나 자심으로 따라 들어가고 분별한다면, 대혜야, 이러한 보살은 오래지 않아 생사와 열반이 평등해지고 대비교방편(大悲巧方便)과 무개발방편(無開發方便)을 얻으리라.
대혜야, 저 모든 중생계는 모두 다 환과 같다. 그러므로 인연을 떠나려고 애쓰지 않아도, 내외의 경계를 멀리 떠나 마음 밖에 보는 것이 없으면 차례로 무상처(無相處)에 들어가리니, 차례로 따라 들어가서 한 지위로부터 다른 지위의 삼매경계(三昧境界)에 이를 것이다.
삼계가 환과 같은 줄 이해하고 분별하여 관찰하면 반드시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게 되고,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것이어서 공한 것임을 헤아리면 반야바라밀에 머물게 되며, 저것이 일으켜 짓는 방편을 버리고 떠나면 금강유삼마제(金剛喩三摩提)를 얻는다. 그리고 여래의 몸에 따라 들어가고 여여(如如)한 변화에 들어가, 신통이 자재하며 자비스러운 방편으로 장엄을 다 갖춘다. 그리고 평등하게 모든 불국토와 외도가 들어가는 곳에 들어가며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을 벗어나니, 이 보살은 점차 몸을 바꿔 여래의 몸을 얻을 것이다.
대혜야, 그러므로 여래에 따라 들어가는 몸을 얻으려면 반드시 음(陰)ㆍ계(界)ㆍ입(入)과 마음이 인연하여 일으키는 방편과 생기고 머물고 없어지는 거짓된 망상을 멀리 벗어나야 한다. 오직 마음만으로 곧장 나아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되고 허물인 망상과 습기로 인하여 3유(有)가 있음을 관찰하고, 무소유의 부처님 경지는 생기는 것이 아님을 사유하면, 자각성(自覺聖)에 이르고 자기 마음이 자재한 데에 나아가며 개발(開發)이 없는 행에 이를 것이다.
마치 여러 색이 마니(摩尼) 보배를 따르는 것과 같이, 중생의 미세한 마음에 따라 들어가 화신(化身)으로써 중생의 마음을 따라 헤아려 제도하고, 모든 지위를 차례로 연속하여 건립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스스로 성취하는 선법(善法)을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다섯 가지 법의 자성의 모습은, 일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행하신 것입니다. ‘자기 마음과 자기의 견(見) 등으로 반연하는 경계와는 화합하지 않는다’ 하신 것은, 모든 말씀이 진실한 모습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능가국(楞伽國) 마라야산(摩羅耶山) 바다 속 주처(住處)의 대보살들에게 마음[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래가 찬탄한, 바다의 파도 같은 장식(藏識)의 경계가 법신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세존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인연 때문에 안식(眼識)이 움직인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것을 받아들이는 줄 깨닫지 못하는 것,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이고 허물인 물질에 습기로 계착하는 것, 식(識)의 성품이 원래 그러한 것, 갖가지 색상(色相)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대혜야, 이를 네 가지 인연이라고 하니, 물이 흐르는 곳처럼 장식이 움직여 식의 물결이 일어난다.
대혜야, 안식이 그렇듯이 모든 감관[根]들도 미진수 같은 모공(毛孔)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생기니, 차례대로 경계가 생기는 것도 이와 같다. 마치 맑은 거울에 여러 색상(色像)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대혜야, 마치 큰 바다에 맹렬한 바람이 부는 것과 같으니, 바깥 경계의 바람이 마음 바다에 불어 식의 파도가 끊이지 않는다. 인(因)과 만들어진 모습[所作相]이 다르다 다르지 않다 하며, 업의 생상(生相)에 밀착하고 깊이 들어가 계착하며 물질 등의 자성을 명료하게 알지 못하므로 다섯 가지 식신(識身)이 구른다.
대혜야, 저 다섯 가지 식신은 모두 차별된 분단상(分段相)으로 인하여 알 수 있다. 명심하라, 이 의식(意識)이 인(因)이 되어 저 5식신이 구르는 것이니, 저 5식신은 ‘내가 서로서로 인이 되어 주어 자기 마음에 현재의 망상계착이 구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들이 각각 무너지는 모습과 함께 움직인다고 경계를 분별하고 차별을 나누는 것이다. 저들의 움직임은 수행자가 선삼매(禪三昧)에 들어갔을 때, 미세한 습기가 움직임을 깨달아 알지 못하고서 ‘식이 없어진 후에 삼매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은 식이 없어져 삼매에 들어간 것이 아니니, 습기의 종자가 없어지지 않은 까닭에 없어진 것이 아니다. 경계의 움직임과 받아들임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없어졌다고 한 것이다.

대혜야, 이와 같이 미세한 장식의 구경(究竟)의 변제(邊際)는 모든 여래와 주지보살(住地菩薩)이 아닌, 모든 성문이나 연각이나 외도가 수행하여 얻는 삼매나 지혜의 힘으로는 어떤 것으로 측량하여 결단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지위에서 지혜와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확고한 말씀의 뜻을 분별하고, 가장 훌륭하고 끝없는 선근을 성숙시키며, 자기 마음에 나타난 망상의 허위를 벗어나 숲에 조용히 앉아서 상ㆍ중ㆍ하의 수행을 닦으면, 자기 마음의 망상이 상속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량없는 국토에서 모든 부처님이 관정(灌頂)하고, 자재력과 신통과 삼매를 얻으며, 모든 선지식과 불자가 권속이 되리니, 그런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은 자기 마음에 나타난 자성의 경계이다. 그는 허망한 생각과 생사라는 유위(有爲)의 바다, 업애(業愛)와 무지(無知) 등 이와 같은 인(因)을 모두 초월하고 건넌다. 그러므로 대혜야, 모든 수행자는 가장 훌륭한 선지식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치 큰 바다의 파도가
맹렬한 바람으로 일어나
거대한 파도가 바다를 두드려
끊어질 때가 없는 것처럼
장식(藏識)의 바다는 항상 머물러 있으나
경계(境界)의 바람에 흔들려
갖가지 모든 식(識)의 파도가
용솟음쳐 구르며 생긴다.

푸르고 붉은 온갖 색깔
흰 우유와 석밀(石蜜)
담백한 맛과 온갖 꽃과 과일
해와 달과 광명(光明)이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으니
바닷물이 일어나 파도가 되는 것처럼
7식(識)도 이와 같아
마음과 함께 화합하여 생긴다.

마치 바닷물이 변하여
온갖 파도가 되어 구르듯
7식도 이와 같아
마음과 함께 화합하여 생기니
저 장식에서
갖가지 모든 식이 구르는 것이고
저 의식(意識)으로
모든 상(相)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는 모습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나
모습이 없다는 것 또한 모습이 없으니
마치 바다와 파도가
차별이 없는 것처럼
모든 식과 마음도 이와 같아서
다르다 함도 얻을 수 없다.


마음이란 업을 채집한다고 이름하고
의(意)는 널리 채집한다고 이름하며
모든 식이 알아야 할 대상을 알아
나타내는 등의 경계를 다섯 가지로 말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푸르고 붉은 모든 색상(色像)은
중생이 모든 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파도 같은 온갖 법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푸르고 붉은 모든 여러 가지 색은
파도와 같아 모두 없는 것
업을 채집하는 것을 마음이라 하여
모든 범부를 깨우쳐 준 것이다.

저 업이란 모두 없는 것이니
자기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을 벗어나면
받아들인 것에 받아들여진 것이 없으니
저 파도와 같다.

수용하여 건립한 몸
이것이 중생의 현식(現識)이니
그곳에 모든 업이 나타나
마치 물과 파도 같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큰 바다와 파도의 성품은
치고 솟구치는 것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장식과 업도 이와 같다면
어찌하여 알 수 없습니까?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범부는 지혜가 없기에
장식을 큰 바다와 같다 하고
업상(業相)을 파도와 같다 한 것이니
이 비유에 의지해 유추해서 알라.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해가 뜨면 광명이
낮고 높은 중생을 평등하게 비추듯
여래께서 세간을 비추시는 것도
어리석은 사람에게 진실을 말씀하기 위함인데
이미 모든 법을 나누셨건만
어찌 진실을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만약 진실을 말한다면
그의 마음에는 진실이 없으니
마치 바다의 파도나
거울에 비친 모습이 꿈과 같다.

모두가 일시에 나타나니
마음의 경계도 그러하지만
경계가 갖추어지지 않으므로
차례로 업이 전전해서 생긴다.

식이란 식으로 알 바요

의(意)란 그러리라 여기는 것이며
다섯 가지는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이나
정해진 차례가 없다.

마치 화가와
그의 제자가
헝겊에 여러 형상을 그리듯
내가 말하는 것 역시 그와 같다.

고운 빛깔은 본래 무늬가 없으며
붓도 아니고 또한 흰 천도 아니지만
중생을 기쁘게 하려고
비단에 수를 놓아 여러 형상을 만든다.

말이란 따로 시행하는 것이어서
진실은 그 글자[名字]를 떠났지만
분별하는 것이 당연히 최초의 업이므로
수행하는 이를 위해 진실을 보여 준다.

진실이란 스스로 깨닫는 것이며
깨달았다는 생각도 깨달아야 할 대상도 벗어난다.
이것은 불자(佛子)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자세히 분별해 주리라.

온갖 것은 모두 환(幻)과 같아
비록 나타나나 진실이 없으니
이와 같이 갖가지 말을
경우에 따라 다르게 시설한다.

말한 바에 감응(感應)이 없으면
그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이 되니
저 모든 병자들을
훌륭한 의사가 병에 따라 처방하듯
여래도 중생을 위해
그 마음을 헤아려 말씀하신다.

망상으로 알 경계가 아니며
성문(聲聞) 역시 해당되지 않는다.
불쌍히 여기는 이[哀愍者]가 말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은 자가 알 경계이니라.

또 대혜야, 만약 보살마하살이 자심(自心)의 현량(現量)과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이는 대상과 망상의 경계를 알고자 하면, 모여 쌓인 세속의 습관과 잠[睡眠]을 없애야 하며, 초저녁부터 한밤중을 지나 새벽에 이르기까지 항상 스스로 각오(覺悟)하고 방편을 써서 수행하여야 하며, 악견(惡見)의 경론(經論)과 모든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의 모습을 벗어나야 하며, 자기 마음에 나타난 망상의 모습을 막힘없이 환히 알아야 한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이 지혜상(智慧相)을 건립하여 머물고 나면, 높은 성지(聖智)의 세 가지 모습을 열심히 배우고 닦아야 한다. 성지의 세 가지 모습을 열심히 배우고 닦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소유(無所有)의 모습과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스스로 원을 세우던 시절의 모습[自願處相]과 자각성지(自覺聖智)의 구경의 모습을 말한다. 수행하여 이것들을 얻고 나면, 능히 어리석은 마음과 지혜의 모습을 버리고 보살의 제8지(地)를 얻게 되니,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모습을 닦음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대혜야, 무소유의 모습이란 성문과
연각과 외도의 모습을 말하니, 저들이 닦고 익혀 생기는 것이다. 대혜야, 스스로 원을 세우던 시절의 모습[自願處相]이란, 모든 과거의 부처님께서 스스로 원한 곳에서 수행하여 생기는 것이다. 대혜야, 자각성지의 구경의 모습이란, 모든 법의 모습에 계교하여 집착하는 것이 없이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는 것을 말하니, 모든 불지(佛地)에 나아가는 행으로 생긴다.
대혜야, 이를 성지(聖智)의 세 가지 모습이라고 한다. 만약 이 성지의 세 가지 모습을 성취한다면, 자각성지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혜야, 성지의 세 가지 모습을 열심히 닦고 배워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은 대보살(大菩薩)들의 무리가 마음속으로 ‘성지사로써 자성을 분별하는 경[聖智事分別自性經]’이라는 경을 생각하는 줄을 알고, 모든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108구(句)가 의지하는 ‘성지사로써 자성을 분별하는 경’을 말씀해 주십시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시여, 이것을 분별해 말씀해 주시면, 보살마하살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망상자성(妄想自性)에 들어갔더라도, 망상자성을 분별하여 말씀해 주셨으므로 곧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人)과 법(法)이 무아(無我)인 줄 두루 관찰하고 망상을 깨끗이 없앨 것이며, 밝게 모든 지위를 비추어 모든 성문과 연각과 모든 외도와 모든 선정(禪定)을 초월할 것이며, 여래께서 행하시는 불가사의한 경계를 관찰하여 마침내 확실히 다섯 가지 법의 자성을 버리고 벗어나서 모든 부처님 여래의 법신(法身)의 지혜로 훌륭히 스스로 장엄할 것입니다. 그리고 환(幻) 같은 경계를 초월하여 모든 불국토와 도솔천궁(兜率天宮)과 색구경천궁(色究竟天宮)에 올라가 여래의 상주법신(常住法身)을 얻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일종의 외도는 무소유에 대해 망상으로 계착하여 ‘인(因)이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리고는 ‘토끼에게 뿔이 없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낸다. 토끼에게 뿔이 없는 것과 같은 의미로 불법(佛法)에서도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대혜야, 또 어떤 다른 외도들은 종(種)ㆍ구나(求那)ㆍ극미(極微)ㆍ다라표(陀羅驃)ㆍ형처(形處)라는 구성법[橫法]들이 각각 차별이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보고 나서는 ‘토끼 뿔이 없음’을 구성하는 법에 계착하여 ‘소에게는 뿔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대혜야, 저들은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에 떨어진 것이니, 심량(心量)을 알지 못하고 자심(自心) 경계의 망상을 증장시켜 자신이 망상의 한정된 분량을 수용하여 건립한 것이다. 대혜야, 모든 법성(法性)도 역시 이와 같으니 있고 없음을 벗어난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
대혜야, 만약 다시 있고 없음을 벗어나 토끼에 뿔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이를 삿된 생각[邪想]이라고 한다. 그는 관찰하고 나서 토끼가 뿔이 없다 한 것이니,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라. 티끌만큼이라도 사물의 성품을 분별하면 모두 옳지 않다. 대혜야, 성인의 경계는 소에게 뿔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지도 벗어나는 것이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망상이 없어진 사람이 망상이 생기지 않은 사실을 확인한 뒤에 비사량(比思量:比量)을 따라 관찰해서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면, 망상이 ‘없다’고 말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관찰하고서 망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망상이란 상대에 의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니, 마치 저 뿔에 의지해서 망상이 생긴 것과 같다. 뿔에 의지해서 망상이 생겼기 때문에 ‘인(因)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망상과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벗어나며, 그러므로 관찰해서 망상이 생기지 않는 것을 ‘뿔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대혜야, 만약 또 망상이 뿔과 다르다면 뿔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닐 것이요, 만약 망상과 뿔이 다르지 않다면 그것을 인(因)한 까닭에 티끌까지 분석하고 추리해 구하여도 모두 얻을 수 없으니, 뿔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저 뿔도 역시 참 성품이 아니다. 둘 다 성품이 없다면, 어떠한 법이 어떤 이유로 ‘없다’고 말하느냐? 대혜야, 만약 없기 때문에 뿔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있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에 ‘토끼가 뿔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생각[想]을 가지지 말라. 대혜야, 바르지 않은 인(因)으로 인해 있다거나 없다고 말한다면,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대혜야, 또 어떤
다른 외도는 삿된 견해로 물질[色]ㆍ공(空)ㆍ일[事]ㆍ형처(形處)라는 구성법에 계착해 허공의 범위를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물질은 허공을 벗어나 있다’고 말하여 망상으로 나누는 견해를 일으킨다.
대혜야, 허공은 곧 물질이니, 물질의 무리에 따라 들어간다. 대혜야, 물질은 곧 허공이니, 지니고 갖춰진 처소(處所)에서 세운 품성이기 때문이다. 물질과 허공을 분별하여 알아야 한다. 대혜야, 4대(大)가 생길 때 자상(自相)이 각각 다르고 또한 허공에 머무르지 않으나, 그 속에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아서 대혜야, 소에 뿔이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토끼에 뿔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대혜야, 쇠뿔이 있다고 한다면 쪼개면 티끌이 되고, 또 티끌을 분별하면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으니, 소의 어느 곳을 보겠느냐? 그러므로 ‘없다’고 한다. 만약 그 밖의 다른 물질을 ‘본다’고 말한다면, 그 법도 역시 그러하다.”
이때 세존께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토끼의 뿔이나 쇠뿔이나 허공이나 물질이 다르다는 망상의 견해를 벗어나야 한다. 너희들 모든 보살마하살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나는 망상을 잘 생각하고 모든 불국토의 보살들에게 따라 들어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나는 방편을 가지고 그들을 가르쳐라.”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물질 등, 그리고 마음이란 없으나
물질 등은 마음을 기르고
몸이 받아들여 편안히 서며
식장(識藏)이 중생을 나타낸다.

심(心)과 의(意)와 식(識)
자성(自性)과 다섯 가지 법
두 가지 무아(無我)를 깨끗이 하라고
광설자(廣說者)가 말하노라.

길고 짧고 있고 없는 것 등
전전(展轉)하여 서로 생기니
없음으로 인하여 있음이 이루어지고
있음으로 인하여 없음이 성립된다.

티끌을 분별하여
물질의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
심량(心量)이 안립(安立)하는 곳
악견(惡見)이 좋아하지 않는 곳이다.

각상(覺想)은 경계가 아니니
성문 역시 그러하며
세상을 구제하는 이가 말하는 것은
자각(自覺)의 경계이다.


이때 대혜보살이 현재의 자기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 다시 여래께 청하여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현재 자기 마음의 흐름을 어떻게 청정하게 합니까? 단박에 합니까, 차례로 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차츰차츰 청정하게 하는 것이지 단박에 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암라과(菴羅果)가 차츰차츰 익는 것이지 단박에 익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여래가 모든 중생의 현재 자기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하는 것도 이와 같아 차츰차츰 청정하게 하는 것이지, 단박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도예가(陶藝家)가 그릇을 만들 때 차례로 이루는 것이지 단박에 이루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여래가 모든 중생의 현재 자기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해 주는 것도 이와 같아서 차례로 청정하게 하는 것이지 단박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대지(大地)에서 차례로 만물이 생기며 단박에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래가 모든 중생의 현재 자기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해 주는 것도 이와 같아 차츰차츰 청정하게 하는 것이지 단박에 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음악이나 서화(書畵)나 갖가지 기술을 배울 때,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단박에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이, 여래가 모든 중생의 현재 자기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해 주는 것도 이와 같아서 차례로 청정하게 하는 것이지 단박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깨끗하고 맑은 거울에 모든 무상(無相)과 색상(色像)을 단박에 나타내는 것과 같다. 여래가 모든 중생의 현재 자기 마음의 흐름을 청정하게 해 주는 것도 이와 같아 무상(無相)이며 유(有)와 소유(所有)가 없는 청정한 경계를 단박에 나타낸다.
마치 해와 달이 일시에 비추어 모든 색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처럼, 여래도 자심(自心)의 현전(現前)의 습기와 허물을 벗어나려는 중생을 위해, 이와 같이 부사의(不思議)한 지혜와 가장 훌륭한 경계를 단박에 드러내 보인다.
이는 마치 장식(藏識)이 단박에 분별하여 자기 마음에 나타난 것과 자신이 안립하고 수용하는 경계를 아는 것처럼, 저 모든 의불(依佛)도 이와 같아[의(依)를 호본(胡本)에서는 진이(津膩)라고 했는데 화불(化佛)을 뜻하니, 이는 진불(眞佛)의 일부이다] 단박에 중생이 처한 경계를 성숙시켜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 색구경천(色究竟天)에 편안히 있게 한다.
이는 마치 법불(法佛)이 지어낸 의불(依佛)의 광명이 밝게 비추는 것과 같으니, 스스로 깨달은 성인들도 역시 이와 같아,
법상(法相)에 대해서 성품이 있다고 하고 성품이 없다고 하는 저들의 악견(惡見) 망상(妄想)을 비추어 없애 준다. 대혜야, 법불(法佛)과 의불(依佛)은 ‘모든 법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들어가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습기의 인(因)이 되며, 상속하는 망상으로 자성에 계착하는 인이 되어 갖가지 진실하지 않은 환(幻)에 갖가지로 계착하는 것이므로 얻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또 대혜야, 연기자성(緣起自性)에 계착하므로 망상자성(妄想自性)의 모습이 생긴다. 대혜야, 마치 재주 많은 요술쟁이가 풀이나 나무나 기와나 돌로 갖가지 환을 만들면 모든 중생들이 여러 가지 형색을 보고 갖가지 망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니, 그 모든 망상 역시 진실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연기자성에 의해 망상자성의 모습이 생기는 것이니, 갖가지 망상심(妄想心)과 갖가지 망상의 기능[行事]과 갖가지 망상의 모습으로 습기망상(習氣妄想)에 계착한다. 대혜야, 이를 망상자성의 모습이 생기는 것이라 하고, 이를 ‘의불(依佛)의 설법’이라 한다.
대혜야, 법불(法佛)이란, 마음의 자성상(自性相)을 벗어나고 성인이 연(緣)한 경계를 스스로 깨달아 건립하고 시행하는 것이다.
대혜야, 화불(化佛)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 그리고 마음의 지혜를 말하고,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벗어나 해탈할 것을 말하며, 식의 모습을 분별하고 관찰하여 건립함으로써 외도의 물질이 없다는 견해를 초월할 것을 말한다.
대혜야, 또 법불은 반연(攀緣)과 반연할 바를 벗어나며, 모든 지은 바의 근량(根量)을 벗어나서 상이 멸한 것이다. 모든 범부나 성문이나 연각이나 외도가 계착하는 아상(我相)으로 계착할 경계가 아니니, 자각성지[自覺聖]의 끝까지 차별된 상으로 건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자각성지의 차별상을 마땅히 열심히 닦고 배워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견해를 반드시 제거하고 없애야 한다.
또 대혜야, 두 종류의 성문승(聲聞乘)이 있어 모두 분별상(分別相)에 통달하니, 자각성지의 차별상을 얻는 것과 망상의 성품을 자성으로 계착하는 상이다.

무엇을 자각성지의 차별상을 얻은 성문이라고 하는가? 무상(無常)ㆍ고통(苦痛)ㆍ공(空)ㆍ무아(無我)의 경계가 진제(眞諦)이므로 욕심을 벗어나 적멸(寂滅)하고, 음(陰)ㆍ계(界)ㆍ입(入)과 자상(自相)과 공상(共相)과 그 밖에 무너지지 않는 상(相)을 쉬고는 마음이 고요히 멈추었음을 여실히 알며, 그리고 마음이 고요히 멈춘 뒤에는 선정해탈(禪定解脫)과 삼매도과(三昧道果)와 정수해탈(正受解脫)이 습기의 부사의한 변역생사(變易生死)를 벗어나지 않고, 스스로 자각성지의 즐거움에 머무는 성문이다. 이를 자각성지의 차별상을 얻은 성문이라고 한다.
대혜야, 자각성지의 차별된 즐거움을 얻어 머무는 보살마하살은 멸문락(滅門樂)이나 정수락(正受樂)이 아니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본원(本願) 때문에 증득하지 않는다. 대혜야, 이것을 성문이 자각성지의 차별된 모습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은 저들이 얻는 자각성지의 차별된 모습의 즐거움을 배우고 닦아서는 안 된다.
대혜야, 어떤 것이 망상의 성품을 자성으로 계착하는 모습의 성문인가? 이른바 4대(大)의 파랑ㆍ노랑ㆍ빨간ㆍ하양ㆍ단단함ㆍ축축함ㆍ따뜻함ㆍ움직임은 만들어낸 자상(自相)이나 공상(共相)이 아니라고 선대(先代)의 승선(勝善)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것을 보고 나서 자성이라는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그러한 사실을 반드시 알고 반드시 버려 법무아(法無我)에 들어가 상을 없애고, 인무아(人無我)의 모습을 보고는 차례로 모든 지위를 상속해서 건립하여야 한다. 이를 모든 성문이 망상의 성품을 자성으로 계착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늘 영원함[常]과 부사의(不思議)와 자각성지로 나아가는 경계와 제일의(第一義) 경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은 모든 외도가 말한 영원함[常]과 부사의의 인연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외도가 인연으로 영원함과 부사의를 얻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모든 외도의 영원함과 부사의는 자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영원함과 부사의가 자상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인(因)해서 영원함과 부사의가 나타나겠느냐?
또 대혜야, 부사의가 만약 자상을 인해서 이루어진다면 저들은 당연히 영원함일 것이나, 짓는 자[作者]의 인상(因相)이므로 영원함과 부사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혜야, 내가 말한 제일의의 영원함과 부사의는 제일의 인상(因相)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나고, 스스로 깨닫는 상(相)을 얻기 때문에 상이 있으며, 제일의지(第一義智)의 인(因)이 있으니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나는 까닭이다. 마치 지음이 없는 허공이나 완전히 없어진 열반과 같기 때문에 영원한[常] 것이다.
이와 같아서 대혜야, 외도의 상론(常論)이나 부사의론(不思議論)과는 같지 않다. 이와 같아서 대혜야, 이 영원함과 부사의는 모든 여래께서 자각성지로 얻는 것이다. 영원함과 부사의는 자각성지로써 얻는 것이니, 반드시 닦고 배워서 얻도록 하라.
또 대혜야, 외도의 영원함과 부사의는 영원한 성품[常性]이 없으니, 이상(異相)의 인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라 인상(因相)의 힘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 또 대혜야, 모든 외도의 영원함과 부사의는 지어진 것들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에 있어서 무상(無常)함을 보고 나서 헤아려 ‘영원함[常]’을 꾀하는 것이다.
대혜야, 나도 역시 이와 같은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성품이건 성품이 아니건 무상한 것을 보고 나서, 자각성지의 경계에서 ‘저 영원함[常]은 인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대혜야, 만약 저 외도가 인상으로 영원함과 부사의가 이루어진다면, 자상의 성품[性]과 성품이 아닌 것[非性]에 인한 것이니, 토끼의 뿔과 같다. 이 영원함과 부사의는 단지 말뿐인 망상이니, 모든 외도의 무리들은 이와 같은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단지 말뿐인 망상이어서 토끼의 뿔과 같아 자기 인상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야, 내가 말한 영원함과 부사의는 스스로 깨달음을 인하여 상을 얻은 까닭에
지어진 것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벗어나므로 영원한 것이니,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의 무상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영원함을 꾀한 것이 아니다. 대혜야, 만약 또 밖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이 무상한 것을 헤아려 생각하고, 영원함을 꾀하여 부사의한 영원함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영원함과 부사의가 자기의 인상임을 모르는 것이므로 자각성지의 경계상(境界相)과 거리가 머니, 그들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
또 대혜야, 모든 성문이 생사와 망상의 고통을 두려워하여 열반을 구하나, 생사와 열반의 차별된 모든 성품이 망상이어서 성품이 아닌 줄 알지 못하고는, 미래에 모든 감관[根]과 경계를 억지로 쉬어서 열반이라는 생각을 지으니, 자각성지로 나아가서 장식(藏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범부는 3승(乘)이 있다고 말하고, 마음으로 헤아려 무소유(無所有)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대혜야, 그들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여래의 자심(自心)에서 나타난 경계를 알지 못하고, 마음 밖에서 나타난 경계에 계착(計着)하므로 생사의 바퀴가 항상 구른다.
또 대혜야, 모든 법은 불생(不生)이니, 이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에서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나타낸 것이니, 유(有)와 비유(非有)를 벗어난 생(生)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모든 성품은 불생이다. 모든 법이 토끼와 말 등의 뿔과 같거늘, 어리석은 범부가 사실과 다르게 망상을 부리니, 자성이 망상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모든 법은 불생이다. 자각성지가 나아가는 경계는 모든 성품이 자성상(自性相)이어서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저 어리석은 범부가 망상으로 두 가지 경계인 자성과 신재(身財)를 건립하여 자성상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대혜야, 장식의 받아들이는 모습과 받아들여지는 모습이 서로 전전(展轉)하거늘, 어리석은 범부는 생기고 머물고 없어지는 것에 대해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에 떨어져 모든 성품이 생긴다고 생각하며, 있다거나 있는 것이 아니라거나 하는 망상을 일으키니, 현성(賢聖)은 그렇지 않다.
대혜야, 이것을 반드시 배우고 닦아라.
또 대혜야, 다섯 가지 무간종성(無間種性)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성문승무간종성(聲聞乘無間種性)ㆍ연각승무간종성(緣覺乘無間種性)ㆍ여래승무간종성(如來乘無間種性)ㆍ부정종성(不定種性)ㆍ각별종성(各別種性)이다.
어떻게 성문승무간종성인 줄 아는가? 만일 말씀을 듣고 음(陰)ㆍ계(界)ㆍ입(入)과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끊을 줄 알게 되며, 그때 온몸의 털구멍까지 흔열(欣悅)하여 즐겨 상지(相智)만 닦고 연기하여 깨달음을 일으키는 상(像)을 닦지 않으면, 이를 성문승무간종성이라고 한다.
성문무간(聲聞無間)은 제8지를 보고 기번뇌(起煩惱)는 끊으나 습기번뇌(習氣煩惱)는 끊지 못하며, 부사의한 변역사(變易死)는 헤아리지 못하고 분단사(分段死)만 안다. 그리하여 곧 사자후를 하되 ‘나의 생사(生死)는 이미 다했고 범행(梵行)을 이미 이루었으며 뒤의 세상에 몸[後有]을 받지 않음을 여실(如實)하게 안다’ 하고는, 인무아(人無我)를 닦고 익혀 마침내 열반에 든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대혜야, 각별무간(各別無間)이란, 아(我)와 인(人)과 중생(衆生)과 수명(壽命)과 장양(長養)과 사부(士夫)이니, 저 모든 중생이 이러한 깨달음을 지어 열반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 또 어떤 다른 외도가 ‘모든 것은 주재하는 작자(作者)로부터 연유한다’고 하면서 모든 성품을 보고 나서 ‘이는 곧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지으면 법무아견(法無我見)은 그들의 몫이 아니므로, 그들에게는 해탈이 없다.
대혜야, 이런 모든 성문승은 외도종성(外道種性)과 간격이 없어서,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벗어났다는 생각을 하고 저 악견(惡見)을 바꾸었다고 여기므로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대혜야, 연각승무간종성(緣覺乘無間種性)이란, ‘제각기 무간(無間)을 따라 반연한다’는 말을 듣고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 슬프게 눈물을 흘리고 울며, ‘모든 반연을 가까이하지 않고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갖가지 자신(自身)과 온갖 신통으로 흩어지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면서 갖가지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이런 말을 들을 때는 그 마음이 따라 들어가는 자이다.
만약 그가 연각승무간종성인 줄 알았다면 수순(隨順)하여 그를 위해 연각승(緣覺乘)을 말해 주어야 한다. 이를 연각승무간종성(緣覺乘無間種性)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여래승무간종성(如來乘無間種性)에는 네 가지가 있다. 자성법(自性法) 무간종성과, 자상법(自相法)을 벗어나는 무간종성과, 자각성지(自覺聖智)를 깨닫는 무간종성과, 바깥 국토를 수승하게 하는 무간종성이다. 대혜야, 만약 이 네 가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을 들을 때, 자기 마음이 신재(身財)를 나타내 부사의한 경계를 건립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마음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를 여래승무간종성(如來乘無間種性)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부정종성(不定種性)이란, 저 세 가지 종성을 말할 때 말하는 데에 따라 들어가고, 그들이 말대로 이루는 것이다.
대혜야, 이것이 처음으로 터를 닦는 것이니, 이른바 종성을 건립하는 것이다. 무소유(無所有)의 경지로 뛰어넘어 들어가기 위해 이러한 건립을 세우는 것이다. 저 장식(藏識)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은 저절로 번뇌의 습기가 깨끗해 질 것이며, 법무아(法無我)를 보아 삼매의 즐거움에 머무는 성문은 반드시 여래의 가장 훌륭한 몸을 얻게 될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수다반나과(須陀槃那果)
일왕래(一往來)와 불환과(不還果)
아라한(阿羅漢)을 얻어도
이들은 마음이 미혹하고 산란하다.

3승(乘)과 1승과
승(乘) 아닌 것을 내가 말하였으니
어리석은 사람 지혜가 적고
모든 성인은 고요함마저 멀리 벗어난다.

제일의(第一義) 법문은
두 가지 가르침을 멀리 벗어나고
무소유에 머무니
어찌 3승을 세울 것인가.

모든 선(禪)과 무량(無量) 등과
무색삼마제(無色三摩提)는
느낌과 생각, 모두 없어 고요하고
또한 헤아리는 마음도 없다.

대혜야, 저 일천제(一闡提)도 일천제가 아니니, 세간의 해탈을 누가 굴리겠는가?
대혜야, 일천제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선근(善根)을 버리고 무시중생(無始衆生)을 발원하는 것이다. 무엇이 모든 선근을 버리는 것인가? 보살장(菩薩藏)을 비방하고 또 악한 말로 ‘이것은 수다라(修多羅)ㆍ비니(毘尼)ㆍ해탈하는 말에 수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니, 모든 선근을 버리는 까닭에 열반에 들지 못한다.
둘째는 보살이 스스로 본원(本願)의 방편으로 된 것이다. 열반에 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니, 모든 중생이 열반에 들고 나서야 대혜야, 그들도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이를 열반에 들지 않는 법상(法相)이라고 하니, 이 역시 일천제의 무리에 속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왜 끝내 열반에 들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일천제(菩薩一闡提)는 모든 법이 본래 열반에 든 것임을 알고 나서 끝내 열반에 들지 않는 것이니, 모든 선근을 버린 일천제와는 다르다. 대혜야, 모든 선근을 버린 일천제는 다시 여래의 신통력으로 혹시 선근이 생기기도 한다. 왜냐하면 여래는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보살일천제는 열반에 들지 않는 것이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세 가지 자성을 잘 알아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 자성인가? 망상자성(妄想自性)과 연기자성(緣起自性)과 성자성(性自性)이다. 대혜야, 망상자성은 상(相)으로부터 생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망상자성이 상(相)으로부터 생깁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야, 연기자성은 사상(事相)의 모습과 행으로써 사상의 모습[相]임을 드러낸다. 계착에는 두 가지 망상자성이 있으니, 이는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 세운 것으로서 명상으로 계착하는 모습[名相計着相]과 사상으로 계착하는 모습[事相計着相]이다.
명상으로 계착하는 모습이란
안팎의 법을 계교하여 집착하는 것이고, 사상으로 계착하는 모습이란 안팎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계교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 가지 망상자성의 모습이라고 한다. 만약 의지나 반연으로 생기면 이를 연기라고 한다. 무엇이 성자성(性自性)인가? 명상과 사상의 망상을 벗어나는 것이니, 성지(聖智)가 얻는 것이며, 자각성지(自覺聖智)들이 행하는 경계이다. 이를 성자성이라고 하니, 여래의 장심(藏心)이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명상(名相)과 각상(覺想)은
자성의 두 가지 모습이고
정지(正智)와 여여(如如)
이것이 곧 성상(成相)이다.

대혜야, 이를 ‘다섯 가지 법의 자성의 모습을 관찰하는 경’이라고 한다. 자각성지들이 행하는 경계이니, 너희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두 가지 무아의 모습을 잘 관찰하여야 한다. 무엇이 두 가지 무아의 모습인가?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이다.
무엇이 인무아인가? 나와 나의 것과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벗어나고 무지(無知)와 업(業)과 애(愛)가 생기는 일도 없으며, 안색(眼色) 등이 받아들이고 계착하여 식(識)을 일으키는 일도 없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감관[根]은 자기 마음이 기세간[器]과 유정[身]을 나타내는 장(藏)이며, 자기 망상의 모습이 시설하여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고 종자와 같고 등(燈)과 같고 바람과 같고 구름과 같아 찰나찰나에 전전(展轉)하며 무너진다. 떠들썩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원숭이와 같으며, 더러운 곳을 좋아하는 것이 날아다니는 파리와 같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바람이나 불과 같다.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의 인(因)이 되는 것은 두레박의 바퀴와 같아서 생사취(生死趣)에 윤전(輪轉)하며 온갖 몸을 받으니, 환술(幻術)의 신통스런 주문으로 조화를 부려 만들어 놓은 상(像)을 일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모습을 잘 아는 것을 인무아지(人無我智)라고 한다.
무엇을 법무아지(法無我智)라고 하는가? 음ㆍ계ㆍ입이 망상자성(妄想自性)이어서
음ㆍ계ㆍ입이 ‘나’와 ‘나의 것’을 벗어나므로, 음ㆍ계ㆍ입이 모여 쌓인 것이 업(業)과 애(愛)의 속박으로 인해 전전하여 서로 반연하여 생기되, 실은 동요함이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법도 역시 그러하여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벗어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범부들은 망상의 힘으로 진실하지 않은 망상의 모습을 일으키나 성현은 그렇지 않으니, 마음ㆍ의(意)ㆍ식(識)과 다섯 가지 법의 자성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모든 법이 무아인 줄 잘 분별해야 한다. 법무아를 잘 분별하면, 보살마하살은 오래지 않아 반드시 초지(初地) 보살의 무소유관지(無所有觀地)의 모습을 얻어 관찰하여 각지(覺智)를 개발(開發)하고 환희하게 되며, 차례로 나아가 9지의 모습을 뛰어넘어 법운지(法雲地)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무량한 보배로 장엄한 커다란 보배 연꽃과 커다란 보배 궁전을 건립하니, 환(幻)과 자성의 경계를 닦고 익혀 생기는 것이다. 그 위에 앉으면 같은 부류의 모든 보살 권속들이 둘러싸고, 모든 불국토에서 온 부처님들이 마치 전륜성왕이 태자에게 관정을 해 주듯이 손으로 관정을 해 주며, 불자(佛子)의 지위를 초월하여 스스로 깨달은 성법취(聖法趣)에 이르러 여래의 자재한 법신(法身)을 얻게 된다. 이는 법무아를 보았기 때문이니, 이를 법무아의 모습[法無我相]이라고 한다. 너희들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건립하고 비방하는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를 비롯한 모든 보살마하살이 건립하고 비방하는 두 극단에 치우친 악견(惡見)을 벗어나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게 해 주시고, 깨달은 뒤에는 영원하다[常]고 건립하고 단멸한다[斷]고 비방하는 견해를 벗어나 정법(正法)을 비방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이때 세존께서 대혜보살의 청을 받아들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건립하고 비방하나
저 심량(心量)이 없고
자신이 수용하여 건립하면서

끝내 마음을 알지 못하니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
건립하고 비방하는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게송의 뜻을 거듭 펴시고자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있지 않은데 있다고 건립하는 것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있지 않은 상(相)을 건립하는 것, 있지 않은 견(見)을 건립하는 것, 있지 않은 인(因)을 건립하는 것, 있지 않은 성품을 건립하는 것이니, 이를 네 가지 건립이라고 한다. 또 비방이란, 그들이 세운 무소득(無所得)에 대하여 분에 맞지 않다고 관찰하고는 비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들을 비방하고 건립하는 모습이라 한다.
또 대혜야, 무엇을 있지 않은 상(相)을 건립하는 모습이라고 하는가? 음(陰)ㆍ계(界)ㆍ입(入)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 없다. 그런데도 계착(計着)을 일으켜 ‘저것은 이것과 같다’, ‘저것은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니, 이를 있지 않은 상(相)을 건립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 있지 않은 상을 건립하는 망상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이고 허물인 온갖 습기로 계착하여 생긴 것이다.
대혜야, 있지 않은 견을 건립하는 모습이란, 만약 그들이 이와 같이 음ㆍ계ㆍ입과 아(我)ㆍ인(人)ㆍ중생(衆生)ㆍ수명(壽命)ㆍ장양(長養)ㆍ사부(士夫)라는 견해를 건립하면, 이를 있지 않은 견을 건립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있지 않은 인(因)을 건립하는 모습이란, 처음에 식이 인이 없이 생기므로 후에도 진실하지 않음이 환(幻)과 같아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닌데, 눈[眼]과 빛깔[色]과 안계(眼界)와 생각으로 ‘앞에서 식이 생겼고 생기고 나서 실제로 있다가 그리고 나서 다시 파괴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있지 않은 인을 건립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있지 않은 성품을 건립하는 모습이란, 허공(虛空)ㆍ멸(滅)ㆍ열반(涅槃)은 짓는 것이 아닌데 계착하여 성품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는 성품도 성품이 아닌 것도 벗어나는 것이다. 모든 업은 토끼나 말 등의 뿔과 같고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垂髮]처럼 나타난 것이므로, 있음과 있지 않음을 벗어난다. 건립과 비방은 어리석은 사람이 망상으로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을 잘 관찰하지 못한 것이니, 현성은 그렇지 않다. 이를 있지 않은 성을 건립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건립하고 비방하는 악견을 벗어나는 법을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심ㆍ의ㆍ의식과 다섯 가지 법의 자성과 두 가지 무아상(無我相)을 잘 알아 구경(究竟)으로 나아가며, 중생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모습을 지으니, 망상자성(妄想自性)이 연(緣)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과 같다.
마치 여러 가지 색깔을 띤 여의보주(如意寶珠)와 같이 일체 불국토 모든 여래의 대중 집회에 널리 나타나, 모든 법은 환(幻)과 같고 꿈과 같고 해 그림자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는 경법(經法)을 듣는다. 그리하여 모든 법에 있어서 생멸(生滅)과 단상(斷常)을 벗어나고, 성문이나 연각의 법을 벗어나며, 백천 삼매와 나아가 백천억 나유타 삼매를 얻는다.
삼매를 얻고 나서는 모든 불국토를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든 천궁(天宮)에 태어나 삼보를 선양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 보여 성문과 보살 대중이 둘러싸면,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고, 바깥 경계의 성품[性]과 성품 없음[無性]을 분별하여 연설함으로써 모든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등의 견해를 멀리 벗어나게 한다.”
이때 여래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의 크기와 같은
세간을 불자는 관찰하라.
종류(種類)의 몸이
짓는 행위를 벗어나고
힘을 얻어 신통해지면
자재(自在)를 성취하리라.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위해 모든 법이 공(空)하고, 생김이 없고[無生], 둘이 없으며[無二], 자성상(自性相)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들과 나머지 모든 보살들이 이 공(空)과 생김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과 자성상을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망상을 떠나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때 세존께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이제 너희를 위해 자세히 분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공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공공이란, 곧 망상자성(妄想自性)이 처하는 곳이다. 대혜야, 망상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은 ‘공이란 생김도 없고 다름도 없어 자성상을 벗어났다’고 말한다. 대혜야, 공을 간략히 일곱 종류의 공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 모습이 공한 것[相空], 성자성이 공한 것[性自性空], 행이 공한 것[行空], 행이 없음이 공한 것[無行空], 모든 법이 말을 떠나 공한 것[一切法離言說空], 제일의인 성지가 크게 공한 것[第一義聖智大空], 그곳에 그것이 공한 것[彼彼空]이다.
무엇이 모습이 공하다는 것인가? 모든 성품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 공한 것을 말한다. 전전(展轉)하여 모여 쌓인 것을 관찰하므로 성품이 없음을 분별하여 자상과 공상이 생기지 않고, 자성(自性)도 타성(他性)도 구성(俱性)도 성품이 없기 때문에 모습이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성의 모습이 공하다고 한다.
무엇이 성자성(性自性)이 공하다는 것인가? 자기의 성자성은 생겨나지 않나니, 이를 모든 법의 성자성이 공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성자성이 공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행이 공하다는 것인가? 음(陰)은 ‘나’와 ‘나의 것’을 벗어났으니, 이루어진 업[所成業]과 지어진 업[所作業]의 방편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이를 행이 공한 것이라 한다.
대혜야, 이와 같이 행이 공하나 전전하여 연(緣)으로 일어나며, 자성의 성품이 없으므로 이를 행이 없음이 공한 것이라 한다.
무엇이 모든 법이 말을 벗어나 공하다는 것인가? 망상자성은 말이 없는 까닭에 모든 법이 말을 벗어나는 것이니, 이를 모든 법이 말을 벗어나 공한 것이라 한다.
무엇이 모든 법의 제일의(第一義)인 성지(聖智)가 크게 공하다는 것인가? 자각성지(自覺聖智)를 얻어 모든 잘못된 견해와 습기가 공한 것이니, 이를 모든 법의 제일의인 성지가 크게 공한 것이라 한다.
무엇이 그곳에 그것이 공하다는 것인가? 그곳에 그것이 없어서 공한 것을 말하니, 이를 그곳에 그것이 공하다고 한다. 대혜야, 마치 녹자모(鹿子母)의 집에 코끼리나 말이나 소나 양 등은 없고 비구들은 없는 것이 아닐 때, ‘저것이 공하다’고 말하면 집[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집과 집의 성품이 공(空)하다는 것이 아니고, 비구와 비구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 아니며,
다른 곳에 코끼리나 말이 없다는 말도 아닌 것과 같다. 이를 모든 법의 자상(自相)이라고 한다. 모든 법의 자상은 그곳에 그것이 없다. 이를 그곳에 그것이 공한 것이라 한다.
이를 일곱 가지 공(空)이라고 한다. 그곳에 그것이 공한 공이 가장 거친 것이니, 너희는 마땅히 멀리 벗어나야 한다.
대혜야,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니, 삼매에 머무는 것을 제외하고는 ‘생김이 없다[無生]’고 한다. 자성을 벗어나면 곧 이것이 생김이 없는 것이다. 자성을 벗어나 찰나마다 상속(相續)하며 흘러 들어 다른 성품이 나타나므로, 모든 성품이 자성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성품이 자성을 벗어난다.
무엇이 둘이 없다[無二]는 것인가? 모든 법이 차거나 뜨겁고, 길거나 짧고, 검거나 흰 것처럼 두 가지 법인 듯하나, 대혜야 모든 법은 둘이 아니다. 열반이 저 생사가 아니고 생사가 저 열반이 아니니, 다른 모습인 것은 성품이 있음을 인하기 때문이다. 이를 둘이 없는 것이라 한다. 열반과 생사처럼 모든 법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공하고, 생김이 없고, 둘이 없고, 자성상(自性相)을 벗어난 것임을 배우고 닦아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항상 공한 법을 말하여
단(斷)과 상(常)을 멀리 벗어나게 하니
생사는 환(幻)과 같고 꿈과 같으나
저 업은 무너지지 않는다.

허공(虛空)과 열반(涅槃)
두 가지를 없애는 것 역시 이와 같으니
어리석은 사람은 망상을 짓고
모든 성인은 있고 없음을 떠난다.

이때 세존께서 다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야, 공하고 생김이 없고 둘이 없어 자성상(自性相)을 떠나면, 두루 모든 부처님의 모든 수다라(修多羅)에 들어간다. 모든 경은 다 이 뜻을 말한 것이다. 모든 수다라는 일체 중생의 희망하는 마음을 따르는 까닭에 그들을 위해 분별하여 그 뜻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니, 진실이 실재로 말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갈증 난 사슴이 미치고 미혹되어 사슴 무리를 보고는 그 모습을 물이라고 계착하지만 거기에는 물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수다라에서 말한 모든 법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환희심(歡喜心)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일 뿐, 진실한 성지(聖智)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뜻에 의지해야지 말에 집착하지는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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