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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35 불교(광석보리심론 1권 / 廣釋菩提心論)

by Kay/케이 2023.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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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석보리심론(廣釋菩提心論) 1

 

연화계(蓮華戒) 지음

시호(施護) 한역

김치온 번역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귀명합니다.

대승의 모든 법의 행을 간략히 모아

최초로 수승한 사업(事業)을 건립하여서

나 지금 보리심을 자세히 주석하노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에 일체지(一切智)를 속히 증득하고자 하는 자라면, 총체적이거나 간략하게 표방한 마음이 세 곳에 머물면서 비심(悲心)을 낳는다. 비심으로부터 대보리심이 발생하는데, 가장 수승한 일체 부처님의 법은 모두 비심을 말미암아서 근본이 되니, 이 비심이 인()이 되어 중생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말하였다.

이 때 관자재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은 여러 가지 법문을 수학(修學)하지 말고 다만 한 가지 법만을 스스로 부지런히 행해야만 곧 일체법을 손 안에 얻은 듯합니다. 어떠한 것이 한 가지 법입니까? 이른바 대비(大悲)입니다. 모든 보살은 이 대비를 타면 곧 일체 부처님의 법을 손 안에 얻은 듯합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자면 전륜성왕이 윤보의 행처[輪寶行處]에서 곧 일체 힘의 더미[力聚]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대비의 행처에서 곧 일체 부처님의 법력의 더미를 능히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사부(士夫)의 명근(命根)이 견고함은 능히 모든 근()을 굴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듯이, 모든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대비가 견고함은 능히 모든 보리의 행법을 능히 굴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였다.

또한 사리자여, 마땅히 알아라. 모든 보살의 대비는 다함이 없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일체법과 더불어 선도(先導)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여, 비유하자면 사부(士夫)가 지닌 명근이 출입하는 호흡과 더불어 선도가 되는 것과 같으니라. 대승 법문의 광대하고 두루한 모임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보살의 대비가 선도하기 때문이니라.”

상두경(象頭經)에서 말하였다.

이 때 천자(天子)가 묘길상보살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일체 보살의 수승한 행을 일으킬 수 있고 또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묘길상이 말했다. ‘천자여, 대비라야 능히 일체 보살의 수승한 행을 일으키고, 보살이 모든 중생을 반연함이 경계가 되어 머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항상 일체 중생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자신의 몸을 돌아보고 애석해 하는 바가 없느니라. 순수하게 한결같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기르며, 오랜 세월동안 어렵게 짓고 능히 지어서 모든 행을 발생하느니라.’”

신력법문경(信力法門經)에서 말하였다.

저 모든 보살의 비심(悲心)은 견고해서 일체 중생을 구하여 제도하지만, 그 때도 조금도 고통이라는 생각이 없고, 제도한 후에도 제도하였다는 생각이 없고, 일체의 어려운 행과 고통스러운 행도 버리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하여 오래지 않아 모든 행이 원만해지고 본래 원한 일체지의 증득을 이루어서 일체의 부처님 법을 얻느니라.”

이와 같이 모두가 비심을 말미암음을 근본으로 삼아서 모든 불세존은 일체지를 현증(現證)하고 대비를 두루 거두어서 널리 세간을 위하여 가장 수승한 이익을 짓고 무주(無住)열반에 편안히 머무른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행은 모두가 대비로써 그 인()을 삼는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인() 중에 설령 고뇌가 있더라도 이때도 중생의 작의(作意)를 반연하여 더욱 다시 많은 것을 지어서 증장하여 물러서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모든 경전에서 설하셨듯이, 일체 중생은 모든 취()에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는다. 그 감응하는 바 지극한 고통만큼이나

 

 

보살은 항상 중생을 위해 자비와 연민으로 관찰한다. 이른바 지옥취 중에는 여러 가지의 고통이 있는데, 업의 불길이 타올라 오랜 시간 끊이지 앉는 고뇌가 다함없는 것이 마치 세간의 도적을 여러 가지 벌로 다스려 묶고 치고 찌르고 또 쫓아버리고 몸을 잘라 나누어서 모든 고뇌를 받게 하는 것과 같다. 이 고통 또한 그러하다.

아귀취 중에는 여러 가지 극심한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이 있는데, 몸이 비쩍 말라서 먹을 것을 찾아 구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해친다. 항상 찾아 구하기를 설령 백 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끝내 버려진 사소한 것이나 깨끗하지 못한 것 등이라도 얻을 수 없다. 또한 어떤 아귀는 자신의 힘이 열악하여 다른 수승한 것에 의지하기도 하는데, 비록 의지하기는 하지만 얻는 바가 없다. 설령 얻는 바가 있더라도 강력한 귀신들로 전변해서 기만과 능멸로 협박해 빼앗으며 채찍으로 때려서 벌로 다스린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고통을 받는 것은 예전에 사람으로 있을 때에 부유함과 즐거움이 자재한 무리들이 악한 일들을 일으키다가 이 아귀취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축생취에서도 무수한 고통을 받는다. 화를 내어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서로 간에 잡아먹고, 혹은 그 코를 꿰뚫고, 혹은 몸이 파열되고, 혹은 때리고 묶는 등 극히 자재하지 못해서 몸 전체가 아픈 것이 참으로 약간이라도 사랑하거나 즐거워할 만한 곳이 없다. 마치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면 전혀 게으르고 나태할 수 없듯이, 비록 오랜 시간이 흘러도 피로함을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축생들은 광야에서 한 순간 방일한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분주함으로 잠시도 머물지 않으며 서로 해치고 두려움을 일으킨다. 이 축생취 중에는 또 이러한 고통이 있다.

이와 같이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여러 취들은 여러 가지 번뇌의 악업을 일으키는 것이 인이 되기 때문에 그 각각의 취에서 고뇌를 받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낭떠러지의 험한 곳에 떨어진 것처럼 고뇌 또한 그러하다.

저 인취(人趣)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있는데,

 

 

다른 곳에서 설한 것과 같다.

다음은 욕계의 하늘들이다. 욕심의 불길이 타올라 마음이 산란해지자 자신의 마음을 찰나 간에 한 곳으로 고정하여 모으려고 하지만 결국 그럴 수가 없으니, 마땅히 욕망의 쾌락이 무너질 때 즉각 고통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치 가난의 고통과 같으니 어떤 즐거움이 있겠는가? 이 욕계천에는 항상 떨어져 멸하는 것이라서 두려움과 근심과 파괴 등 역시 그 즐거움이 아니다.

색계천들은 이른바 모든 행이 항상 변천하여 전전하는 것을 말미암으니, 그 하늘의 과보가 다하면 다시 지옥 등의 취에 떨어진다.

이와 같은 등의 취의 무리들은 번뇌와 업 등에 항상 얽히고 묶여서 자재하지 못하며, 이로 말미암아 온갖 고뇌들을 낳는다. 그러므로 고통의 불길이 치성하여 불타고 있는 세간은 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보살은 이 고통을 보면 즉시 자비심을 일으켜서 일체 중생을 널리 관찰한다. 또한 보살은 모든 중생들이 여러 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볼 때도 원망도 친함도 없이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 평등하게 관찰해서 제도한다. 또한 일체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윤회하여 유전하는데, 보살은 하나의 중생이라도 친우(親友)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이 없으니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에 즉()해서 시방의 일체 중생을 널리 두루 관찰하는데, 만일 하나의 중생이라도 고통 받는 자가 있음을 본다면, 보살은 그를 자식처럼 사랑해서 즉각 그 고통을 대신 받아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받지 않게 한다. 이러한 자비심이 전전하기 때문에 능히 일체 중생의 고뇌를 쉬어 멸하게 하며, 더 나아가 대비의 수승한 행을 성취하는 것이다.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였다.

이 자비관행[悲觀行]은 세존께서 아비달마경에서 최초로 설하신 것이다. 일체의 유정들을 구하여 제도하고자 하는

 

 

까닭에 비원(悲願) 등의 힘을 일으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곧 이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십지경(十地經)에서 말하였다.

일체 중생 가운데 구호(救護)를 받지 못하는 자, 귀의하여 나아가지 않는 자, 의지할 곳이 없는 자, 지견(知見)이 없는 자들을 보살이 보면 즉시 자비의 마음을 낳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다. 만약에 남을 위하여 길을 열어 가르침을 보이지 못한다면, 보살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들이 용감하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는 것은 곧 비심이 견고함을 말한다.

여래지인삼마지승상경(如來智印三摩地勝上經)에서 말하였다.

보리심이 행하는 바는 능히 윤회의 고통을 무너뜨린다.”

미륵해탈경(彌勒解脫經)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큰 금강보석을 취하지 않고 따로 일체 금으로 된 장엄구를 얻으며, 그리고 또한 큰 금강보석을 버리지 않고 가난하고 곤궁한 자들을 능히 널리 구제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일체 지혜의 마음인 큰 금강보석을 취하지 않고 따로 일체 성문, 연각의 공덕인 금으로 된 장엄구를 얻으며, 그리고 또한 그 보살의 행을 버리지 않고 일체 윤회하는 가난하고 곤궁한 자들을 능히 널리 구제한다. 보살은 능히 일체의 종류와 일체의 학문을 평등하게 닦는데, 이것이 한량없는 수승한 행이다. 그러므로 보리심으로부터 방편을 낳아서 대보리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여래시교승군왕경(如來示敎勝軍王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만약에 네가 여러 가지 사업을 짓는다면, 일체의 종류와 일체의 장소에서 마땅히 보시바라밀 내지 반야바라밀을 함께 상응하게 배워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대왕이여, 그대가 응당 이처럼 정등각에게 믿음과 염원을 구해서 평등한 마음을 향하여 나아감을 일으킨다면, 머물거나 가거나 눕거나 서거나 마시거나 먹거나 온갖 짓는 바에서 결정적으로 항시 작의(作意)를 사념하여 일체의 부처님ㆍ보살ㆍ연각ㆍ성문, 모든 어리석은 범부 중생들 및 자신의 몸 등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일체 선근이 한 곳에 모여서 수승하고 높은 마음을 발하여 응당 스스로 따라 기뻐할[隨喜] 뿐임을 관상(觀想)해야 하느니라. 일체의 부처님과 보살과 연각과 성문의 무리에 널리 공양하고 받들어 모신 공덕을 일체의 중생들과 더불어 나누면서 널리 중생들이 일체지를 얻기를 원해야 한다. 일체 부처님의 법은 모두 다 원만하여 만약에 매일 세 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면, 대왕이여, 그대가 짓는 일들이 모두 청정함을 얻을 것이고 보리행 등도 또한 모두 성취될 것이니라. 또한 대왕이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이 낳은 선근의 과보는 무수히 많으니라.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천상에 나거나 일체의 장소에서 항상 가장 수승함을 얻는다. 그리고 그대 대왕 또한 이와 같이 지으면, 그것은 광대해서 대왕의 대보리심은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할 것이다. 만약에 행한 바가 진실하다면, 곧 능히 대보리과를 성취할 것이다.’”

무외무문경(無畏撫問經)에서 말하였다.

보리심을 일으켜 생겨난 복들은 허공계와 같아서 광대하고 수승하고 높아서 다함이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불국토에 가득하게 진기한 보배를 세존께 공양한다 해도 어떤 사람이 능히 합장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한 번만이라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 복덕의 수승함은 앞서 말한 복덕과 비교할 수가 없느니라.”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여, 보리심으로부터 일체 부처님의 법이 나오며 광대하고 수승하게 장엄하니라. 보리심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가 원심(願心)이며, 둘째는 분위심(分位心)이니라.”

또 그 경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지극히 얻기 어려운 것이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지만, 만약 널리 행원(行願)을 일으킨다면 즉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현전해 안주할 것이며 능히 온 세간에 널리 이익을 지을 것이니라. 선남자여, 내가 성불할 수 있었던 것도 이른바 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본원심(本願心)을 탄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후에 행한 모든 행은 앞에서 일으킨 그 일체의 행으로부터 널리 포섭되어 분위심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행원(行願) 등의 힘이 만약 다 성립되면 곧 선지식이 현전하여 섭수하게 되어서 일체의 실답지 않은 경계의 모습은 버리게 된다. 마치 묘길상보살이 위에서 왕에 의해 보리심을 일으킨 것과 같다. 보살은 이와 같이 보리심을 일으켜서 스스로 행하는 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다가 수승한 행과 상응하게 한다. 만약에 사람이 자신을 조복시키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능히 다른 사람을 조복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이 만약에 스스로 모든 행을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능리 대보리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상두경(象頭經)에서 말하였다.

보살들의 소행이 진실하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 모든 소행에 진실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삼마지왕경(三摩地王經)에서 말하였다.

동자여, 내가 행한 대로 하면 진실을 얻기 때문이니, 그래서 그대 동자도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동자여, 행한 바가 진실하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행할 모든 행을 십바라밀다(十波羅蜜多)ㆍ사무량(四無量)ㆍ사섭법(四攝法) 등으로 자세히 분별한다면, 무진의경(無盡意經)보운경(寶雲經)등의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배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세간의 배움과 출세간의 배움이다. 무엇을 세간의 배움이라 하는가? 기능과 공교(功巧) 등이다. 무엇을 출세간의 배움이라 하는가? 선정 등을 말한다. 나머지는 어떤 것인가? 중생의 이익을 위해 짓는 일체의 사업을 말한다. 이 중에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의 소행은 요약해서 말하면 지혜와 방편이니, 이 두 법을 감소시키지 말아야 한다.

유마힐경(維摩詰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방편이 없으면 지혜가 묶이고, 방편이 있으면 지혜가 풀리고, 지혜가 없으면 방편이 묶이고, 지혜가 있으면 방편이 풀린다.”

상두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보살에게는 총체적으로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 종류의 도()가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도가 구족되면 모든 보살은 곧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속히 증득할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지혜와 방편이다. 만약에 반야바라밀다행과 모든 바라밀다 및 사섭법 등을 여읜다면, 어떻게 능히 청정한 불국토를 장엄하여 크게 부유하여 자재할 것이며, 유정을 성숙시켜 모든 교화의 일을 지을 것이며, 널리 모든 법의 선교방편을 거두어들이겠는가? 그러므로 이 지혜와 저 방편은 전도의 성품이 없고 분별의 인()이 있으니, 이 인을 말미암기 때문에 바른 방편이 일어난다. 마치 설한 법들이

 

 

전도됨이 없는 사유와 분별을 일으켜서 결국 능히 자신과 타인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 능히 번뇌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치 온갖 독이 주술에 의해 제거되는 것과 같다.”

또 이 경에서 말하기를, “지혜가 방편을 거두어들이는 이것을 유분별지(有分別智)라 한다고 하였다.

신력법문경(信力法門經)에서 말하였다.

무엇을 선교방편이라 하는가? 일체의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지혜라고 하는가? 일체의 법에서 선()을 파괴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지혜와 방편의 두 종류는 모든 경지에 두루 들어가서 어느 때나 항상 행하는 것이지 중도에 그것을 감소케 할 수 없는 것이다. 십지(十地)의 보살들은 십바라밀다를 행하고 나아가 모든 행을 널리 행하니, 십지경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팔지(八地)의 보살은 부처님의 위의(威儀)로부터 일어나니 지식행(止息行)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 경에서 말하였다.

다음으로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앞서 일으킨 대원가지선근력(大願加持善根力)의 머묾에 의거해야 한다. 모든 불세존 또한 이 법문으로부터 대지혜의 원만한 작용들이 흘러나온 것이니, 이것이 곧 최상의 인문(忍門)으로서 일체의 부처님 법이 이로 말미암아 집성된 것이다. 또한 선남자여, 마땅히 이와 같은 지식행(止息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나니, []가 십력(十力)ㆍ사무소외(四無所畏)ㆍ십팔불공(十八不共)의 모든 신통 등 일체 부처님의 법을 얻은 것과 같아서 그대는 마땅히 정진을 발하고 모든 염원을 일으켜서 상응하여 행해야 함을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와 같은 인문(忍門)을 버리거나 여의지 말아야 한다. 선남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모든 어리석은 범부 중생들이 갖가지 번뇌를 쌓고 갖가지 찾아 구함을 일으킴이 끊임없이 상속됨을 관찰하지 않는 것인가? 어떻게 지식(止息)의 행을 일으키고자 하는가?

 

 

또한 선남자여,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모든 법은 법성으로서 스스로 상주(常住)한다. 법성이 상주하므로 여래는 곧 생함이 없다. 소위 성문과 연각들이 일체의 법은 분별이 없고 생함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선방편으로 세간에 출현하신 것이다. 또 선남자여, 그대는 내 몸의 무량함과 지혜의 무량함과 불국토의 무량함과 원만광명[圓光]의 무량함과 지현전문(智現前門)의 무량함과 청정의 무량함 등과 같은 모든 광대한 법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본원(本願)의 행을 타고 마땅히 항상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을 사념해야 곧 이와 같은 부사의한 지혜의 문을 얻을 것이다.”

십지경에서 말한 행상(行相)유마힐경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 경에서 말하였다.

묘길상이 만약 어떤 이가 여래가 설한 법을 경솔하게 비방을 했다면, 이 사람은 비록 비방하는 말을 했지만 내가 설한 것처럼 또한 청정함을 얻었으니, 이 가운데 이()와 사()는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상두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미륵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들은 보리를 위하는 까닭에 육바라밀다를 쌓아 모으느니라. 혹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반야바라밀다는 보살의 학()인데 어찌 다시 나머지 바라밀다를 배우겠는가?‘라고 말하고, 혹은 어떤 이는 이미 듣고 나서 방편 등의 모든 바라밀다를 버리고자 하는 뜻을 일으키니. 미륵아, 너의 뜻은 어떠하냐? 예컨대 가시왕은 자신의 살을 취하여 비둘기를 구하였는데, 이 왕이 어리석은가? 미륵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미륵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살행을 닦을 적에 널리 육바라밀다와 상응하는 선근을 닦았는데, 응당 이익이 없는 것이냐?’ 미륵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미륵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육십 겁 중에 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다를 쌓아 모았듯이, 육십 겁에 이르도록 반야바라밀다를 쌓아 모은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그 가운데 행과 상응하는 지혜를 자세히 설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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