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수진천자경(佛說須眞天子經) 3권
불설수진천자경 제3권
서진 축법호한역
김달진 번역
5. 무외품(無畏品)
수진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보살은 무엇을 좇아 도의 뜻을 일으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일체의 욕망으로부터 도의 뜻을 일으킨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바로 이 말을 할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애욕 가운데서 애욕과 더불어 종사하여 도를 이루니, 애욕을 따르지 않는다면 보살은 무엇을 인연하여 일체의 도의 뜻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마음은 어느 곳을 좇아 도를 건립(建立)합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불법 가운데서 도의 뜻을 건립한다. 왜 그런가? 천자여, 도의 뜻은 본래 모든 불법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일체 불법은 어느 곳에서 일어납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일체의 불법은 본래 없는 것이어서 일어나는 바가 없다. 왜 그런가? 천자여, 마치 허공이 본래 없는 것과 같으니, 허공으로부터 일체의 불법이 일어난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일체의 불법(佛法)이 얼마나 됩니까? 그 수를 알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법과 같이 불법 또한 그러하다. 왜 그런가? 일체의 법과 같이 여래가 이 최정각(最正覺)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자여, 모든 법과 같이 불법의 수도 이와 같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음란하고 성내고 어리석음을 다시 불법이라고 하는 겁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음란하고 성내고 어리석음이 바로 불법이 된다. 왜 그런가? 애욕은 깨달음[覺]이 없으므로 도(道)로써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장차 일체가 모두 마땅히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일체가 모두 마땅히 부처가 되기도 하고 부처를 구하기도 할 것이니, 그대는 의심하지 말라. 왜 그런가? 천자여, 일체가 마땅히 여래의 정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모두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적정(寂靜)에 들고 공(空)에 들어가기 때문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적정과 공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만일 공을 얻지 못한다면 무엇을 좇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공은 짝할 수는 없고 강함도 없고 약함도 없기 때문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여래는 공을 깨우쳐 도를 얻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말한 바와 같이 공이 곧 도(道)이니, 부처님께서 ‘공을 알면 곧 도에 든다’고 말씀하셨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공과 같은 행(行)은 마땅히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색욕(色欲)이 없는 행이 바로 공의 행이니, 욕계(欲界)에서 불위정행(不爲情行)을 행하고, 또한 불향행(不香行)을 행하며, 또한 불색행(不色行)을 행하고, 또한 불무색행(不無色行)을 행하며, 또한 불신행(不身行)을 행하고, 또한 불심행(不心行)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행을 행하지 않는 것이 또한 공이기 때문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여래가 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본래 공을 행하는 것입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여래의 공 또한 이 공과 같아서 저도 가진 바가 없고 나도 그러하니, 만일 행한 바가 없다면 곧 여래의 행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만일 가진 바가 없다면 마땅히 무엇을 행해야 합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만일 가진 바가 없다면 마땅히 가진 바가 없음을 행해야 하니, 다른 나머지 행이 다른 나머지 것에 이르지 않는 것도 가진 바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이 바로 또한 가진 바가 없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만일 가진 바가 없다면 무엇을 가지고 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음욕에 이르러 욕망을 여의면 곧 이름하여 가진 바가 없다고 하고, 음욕 가운데서 가진 바가 없음을 익혀[習]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의 욕망에 대해 욕망하지도 욕망하지 않음도 없으니, 그런 까닭에 이름하여 가진 바가 없다고 한다.욕망을 익히지 않음을 이름하여 가진 바가 없다고 하고, 나와 내 몸으로 공(空)의 행에 머무는 것을 이름하여 가진 바가 없다고 하니, 이 가진 바가 없음을 익히는 것도 가진 바가 없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무엇을 익혀야 가진 바가 없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적정(寂靜)을 익히면 가진 바가 없다.
이것은 공(空)이며, 이것은 한가함[閑]이며, 이것은 나지도 않고 일어남도 없으니, 적정이 곧 가진 바가 없음을 익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무엇을 하는 것을 이름하여 익힌다[習]고 합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파괴됨이 없음을 이름하여 익힌다고 하고, 모든 소유를 밝혀 더러움이 없음을 이름하여 익힌다고 하며, 한도(限度)를 지을 수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음을 이름하여 익힌다고 하고, 잘난 체함을 여의고 항상 일체를 비추어 밝힘을 이름하여 익힌다고 하며, 많지도 않고 또한 적지도 않음을 이름하여 익힌다고 한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무엇이 이 익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법을 익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이름하여 익힘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무엇을 이름하여 익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법을 익힘을 아는 것이 바로 곧 익힘을 아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뜻이 망령되이 믿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 그 모양(相)입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모든 걸림 없는 행이 바로 그 모양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뜻이 망령되이 믿지 않는 보살은 어떻게 믿음으로 베풀어준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뜻이 망령되이 믿지 않는 이를 이름하여 ‘눈으로 일체의 모든 법을 보았다’고 하니,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따라 믿고 따르는 바가 없으며, 뜻이 망령되이 믿지 않는 이는 믿음으로 베풀어준 은혜를 되갚지 않는다. 왜 그런가? 처음부터 다 청정하기 때문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찌하여 수염과 머리를 깎은 보살은 기꺼이 대중 가운데 들어가지 않으며 그 가르침을 따르지도 않습니까?
이것을 무엇이라 이름하며, 마땅히 어떻게 응대해야 합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수염과 머리를 깎은 보살은 기꺼이 대중 가운데 들어가지 않으며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도 않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세간에서 가장 후(厚)하다’고 한다. 왜 그런가?천자여, 무위(無爲)를 짓는 것을 이름하여 승가[衆僧]12)라 하는데, 보살은 무위에 머물지도 않고 무위에 그치지도 않으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세간에서 가장 후한 이’라고 한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가령 보살이 무위에만 머문다면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가령 보살이 무위에만 머물러 일체를 이익되게 함이 없다면 곧 소승(小乘)의 익힘에 떨어져 멸도(滅度)13) 할 것이니, 이것이 그 허물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무위는 8도(道)14)의 자리이며, 유위(有爲)는 범부의 자리인데, 보살은 범부의 자리에 머무는 까닭에 세간에서 가장 후한 것입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보살은 무위의 자리에 머물지도 않고 또한 유위의 자리에 머물지도 않으니, 그런 까닭에 이름하여 ‘세간에서 가장 후하다’고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보살은 행을 일으키는 자이니, 때마침 유위에 그쳐서 무위에 머물지도 않고 무위를 짓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에 세간에서 가장 후한 이가 되는 것이다.유위에 머물러서 옳고 그른 곳을 다 알고, 무위에 머물러서 모든 지혜로운 곳을 알며, 이미 유위의 옳고 그른 것을 알기에 곧 그 가운데 머물고, 이미 무위의 지혜를 알기에 그 가운데 그치지 않는다.천자여, 비유컨대 용맹스러운 사나이가 활을 들고 화살을 먹여 허공을 향해 쏜다면, 화살이 공중에 머물지도 않고 또한 아래로 떨어지지도 않는 것과 같다.”문수사리가 천자에게 말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인가?”천자가 대답하였다.
“매우 어렵고, 매우 어렵습니다.”문수사리가 말했다.
“보살이 하는 것은 이 보다 더 어려우니, 왜 그런가?
유위 가운데서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서도 곧 무위를 얻고, 무위에 머물면서도 유위 가운데서 일체를 길러 보호하기 때문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보살의 두려워함은 유위로부터 이른 것입니까, 무위로부터 이른 것입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의 두려워함은 두 가지 인연으로부터 이른 것이니, 유위를 따르기도 하고 또한 무위를 따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유위를 따르는 중에는 애욕을 두려워하고, 무위 가운데 있어서는 애욕이 없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이미 애욕이 없다면 어째서 다시 두려워합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3계(界)를 가까이 하지 않음이 바로 두려움이 되니, 3계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소승의 자리에 떨어지게 된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은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얻었을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유위 가운데서도 항상 지혜다운 지혜로 훌륭한 방편의 지혜를 행하여 무위에 떨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얻은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일체를 위한 까닭에 유위를 버리지 않고, 불법(佛法)을 위한 까닭에 무위에 떨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얻은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이 소유한 복 보시[福施]의 인연은 유위에 가깝고, 소유한 부처님 지혜[佛慧]의 인연은 무위에 떨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얻은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유위에 머물면서도 이미 선정을 세우고, 방편의 지혜에 머물러 선정을 좇아 돌아오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얻은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도의 뜻에 머물러 곧바로 공덕을 일으키고, 큰 비(悲)에 머물러 널리 일체를 보호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얻은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텅 비어 한가한 곳에 머물러 마군의 일을 깨달아 알고, 이미 훌륭한 방편에 머물러 마군의 행을 항복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얻은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큰 자(慈)에 머물러 널리 법을 말하고, 큰 비(悲)에 머물러 온갖 보시를 행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얻은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생사에 머물러 열반의 근본을 심고, 열반에 머물러 생사의 근본을 심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얻은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나지 않는 가운데서 이미 태어나고, 유위 가운데서 이미 태어남을 벗어나며, 본 바의 법을 나타내어 5음(陰) 6쇠(衰)를 칭찬하여 기리지 않고, 여의어서 생겨날 것이 없음을 다 보아 알며, 고요하게 이미 고요해져서 불타거나 타오르지 않는다.불타오르는 가운데에도 생겨날 것이 없으며, 애욕을 다 가지고도 애욕에 더럽혀지지 않고, 배운 자나 배우지 않은 자가 모두 복종하며, 소승의 해탈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사람 몸에 들어가도 법신(法身)을 버리지 않고 마계(魔界)에서 법계를 나타낸다.방일함이 없이 지혜로써 무위에 들어가고, 방편으로써 무위를 좇아 돌아오며, 모든 옳고 옳지 않은 것을 숱하게 나누어 나타내도 모두 참아내서 부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것은 항상 즐겨 보기를 생각하고, 법이 나타내 보인 것은 여우같은 의심을 하지 않는다. 천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얻은 것이다.”
6. 주도품(住道品)이때 수진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보살은 어떻게 도(道)에 머무를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탐욕을 멸하는 법을 말하되 탐욕을 멸하는 데서 그 증과(證果)를 구하지 않으며,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모든 애욕을 멸하는 법을 말하되 그 가운데서 그 증과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자여, 보살은 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공(空)을 말하되 공으로써 증과를 삼지 않으며, 모양이 없음을 말하되 모양이 없음으로써 증과를 삼지 않으며, 원[願]이 없음을 말하되 원이 없음으로써 증과를 삼지 않으며, 모이지 않음을 말하되 모이지 않음으로써 증과를 삼지 않으며, 남[生]이 없음을 말하되 남이 없음으로써 증과를 삼지 않으며, 일으킬 것이 없음을 말하되 일으킬 것이 없음으로써 증과를 삼지 않는다.가두리[際]가 없음을 말하되 가두리가 없음으로써 증과를 삼지 않으며, 탐욕을 여읨을 말하되 탐욕 여읨으로써 증과를 삼지 않으며, 지음[所作]을 여읨을 말하되 지음을 여읨으로써 증과를 삼지 않으며, 멸(滅)하는 일을 말하되 멸하는 일로써 증과를 삼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보시하는 바가 없어도 단나(檀那) 바라밀을 구족하며, 계율을 지니지 않고도 시라(尸羅) 바라밀을 구족하며, 성냄이 있어도 찬제(羼提) 바라밀을 구족하며, 게으르고 나태하고도 비리야(毘梨耶) 바라밀을 구족하며, 어지럽고 잊기를 잘하고도 선나(禪那) 바라밀을 구족하며, 어리석은 데 뜻을 두어도 반야(般若) 바라밀을 구족한다. 그러므로 천자여, 보살은 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무슨 연유로 이런 말을 합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네 가지의 보시할 바 없는 일이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첫째는 일체를 버리지 않는 것이, 둘째는 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도의 뜻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넷째는 모든 공덕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법을 버리지 않아서 단나 바라밀을 구족한다.천자여, 계율을 지니는 까닭은 마음이 조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음이 조복되고 나면 곧 계율을 버리고, 이미 계율을 버렸으므로 어둠에서 벗어나며, 이미 어둠에서 벗어났으므로 밝아졌고, 이미 밝음도 버렸으므로 평등함을 얻으며, 이미 평등함도 버렸으므로 곧 지혜를 얻고, 이미 지혜도 버렸으므로 곧 해탈을 얻어 지혜를 나타내 보인다.천자여,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와 같은 까닭에 계율을 버리고도 시라 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천자여, 가령 이 보살의 모습이 제자승(弟子乘)을 비판하고 대승을 찬탄한다면, 이미 대승을 찬탄하여 대승에 이르렀으므로 곧 찬제 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천자여, 가령 이 보살이 몸과 입과 뜻에 속지 않는다면 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나태함이 없을 것이니, 이와 같은 법이 비리야 바라밀을 구족한 것이다.천자여, 가령 이 보살이 꿈속에서와 같다면 마음이 양 끝단에 염착(念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승과 벽지불승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제자승과 벽지불승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대승에 이르렀고, 이미 대승에 이르렀으므로 선나 바라밀을 구족한 것이다.천자여, 일체 법은 모두 어리석어서 비유하자면 마치 초목(草木)과 장벽(障壁)과 와석(瓦石)과 같으니, 어리석음도 이와 같아서 보아 씀이 파리하고 열등하고 어리석은 이치를 오래 익혔으므로, 일체 어리석은 법의 근본을 지혜로써 도를 갖추게 하는 까닭에 곧 반야 바라밀을 구족한 것이다.천자여, 지은 바에 이미 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생사의 자취를 버리지 않고 열반의 자취도 구하지 않아서 자취를 끊음이 없고 자취를 지음도 없으며, 또한 머무는 바도 없어서 그 삿됨에 들어간 자를 바른 도에 서게 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일체의 사람들을 찾고 일체의 법을 구하며, 또한 일체의 사람들을 얻지 못하고 또한 일체의 법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보살도를 놓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는 바가 지극히 진실하여 모두 효력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제자승의 도를 알지만 바라는 바가 없고, 벽지불의 도를 알지만 또한 바라는 바가 없으며, 보살의 도를 알아 그 근본을 구족하고 모든 공덕이 원만한 뒤에야 이에 따라간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이 생사에서 지은 바를 모아 모두 하더라도 지은 바의 과보를 실제로는 받지 않는 것처럼 화합하여 모이는 모양을 능히 더럽힐 수 없으며, 일체의 공덕이 모두 도(道)의 바램[願]을 지어서 물러가지 않는 도가 있음을 보지 않는다. 왜 그런가? 모두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또한 천자여, 보살은 도에서 도를 구하고 멸도(滅度)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도에서 다시 도를 구합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생사 때문에 도라고 부르니, 보살이 도를 구함은 일체를 해탈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일체는 있는 바도 없고, 구하는 바도 없으며, 또한 건널 바도 없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일체 세간에 들어가는 도가 바로 보살의 행입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이와 같으니, 천자여, 말한 바와 같이 살펴보라. 일체 세간에 들어가는 것이 곧 보살의 행이다. 왜 그런가? 이와 같으니, 천자여, 세간에서 행하면서도 세속법에 더럽혀지지 않으며, 애욕을 따르면서도 애욕이 없음을 나타내고, 애욕이 없음을 따르지 않아 생사에서 나타내 보이며, 일체 법이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음을 알아서 영예(榮譽)를 바라지 않고, 영예를 바람이 없으므로 증과(證果)를 구하지 않는다.5음(陰)과 6쇠(衰)를 가지면서 5음과 6쇠를 여의니, ‘나’와 ‘나의 것’을 보아 알아서 5음과 6쇠를 지닌 것이 아니며 일체가 법을 설하기 위해서이다.5음과 6쇠는 공(空)하여 가진 바가 없고 또한 볼 수도 없으니, 이미 가진 바가 없음을 알면 곧 선(禪)의 유무(惟務)삼매 삼마월(三摩越)에 이르러 합하여 하나가 되어 곧 뜻이 멈춤[意止]을 얻고, 마음이 곧 굳게 머무르며, 이미 굳게 머무를 수 있으면 곧 능히 일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다.그 마음이 멈추지 않으면 마군의 무리들에게 즐거움이 되지만, 보살은 마군의 일에 더럽혀지지 않아서 부처님 경계를 버리지 않고 마군의 경계에서 작위한 바를 따르되, 법의 경계에 처하여 움직여 돌아오지 않고 사람의 경계에 처하여 중생을 보호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정진하여 일체 세속을 따르는 행이다.”
7. 보살행품(菩薩行品)
이때 수진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무엇을 일러 보살이 정진행(精進行)을 한다고 합니까? 바라건대 말해주십시오. 저희들이 듣고자 합니다.”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행한 바가 없음이 바로 매우 청정하고 공경하는 행이니, 모두 이미 여기에 머무는 것이 바로 보살의 행이다. 모든 소유에 모자라거나 덜어냄이 없고, 고요한 곳에서 지은 바를 뜻에 응하여 판단하고 나서, 뜻을 도에 두는 것이 바로 잊어버리지 않는 행이다.마음과 뜻이 평등한 것이 바로 보시의 행이며, 마음과 뜻이 이미 조복된 것이 바로 계율의 행이며, 마음과 뜻이 이미 고요한 것이 바로 인욕의 행이며, 뜻이 게으르거나 권태롭지 않는 것이 바로 정진의 행이며, 몸과 뜻이 조용하고 고요한 것이 바로 선정의 행이며, 법계에서 소유에 집착하지 않음을 행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행이다.잘못을 따지지 않는 것이 바로 자(慈)의 행이며, 일체를 두[有]지 않는 것이 바로 큰 애(哀)의 행이며, 애욕은 나의 할 바가 아니므로 이미 공(空)한 것이 바로 희(喜)의 행이며, 확연(廓然)하여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바로 호(護)의 행이다.천인(天人)을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적정(寂定)의 행이며, 여러 가지 일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바로 고지(苦智)의 행이며, 5음(陰)을 헤아려 마치 허깨비처럼 여기는 것은 연기(緣起)를 아는 행이며, 지혜를 없애는 등의 부류가 바로 멸지(滅知)의 행이다.부류를 나누어 멸하는 것이 바로 도혜(道慧)의 행이며, 합쳐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인혜(因慧)의 행이며, 5음이 그러함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바로 연혜(緣慧)의 행이며, 이치에서 율(律)을 결단하는 것이 바로 함께 모이는 행이다.이치에 처함이 없고 묵묵히 말이 없는 것이 바로 법에 의지한 행이며, 법계에 무너뜨릴 것이 없음이 바로 멸(滅)에 의지한 행이며, 이름과 빛에 소유가 없는 것이 바로 과보(果報)에 의지한 행이다.소리와 같고 메아리와 같이 여기는 것은 가장 위의 이치에 의지한 행이며, 구족한 상호(相好)를 나타내 보이는 것은 신혜(身慧)에 의지한 행이며, 몸과 뜻이 단엄하고 상호가 구족한 것은 공(空)을 거쳐 감에 의지한 행이며, 죄가 있으면 스스로 뉘우치는 것이 바로 계율에 의지한 행이다.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이 바로 천안(天眼)의 행이며, 죄업(罪業)을 깨끗이 하는 것이 바로 귀가 밝은 행이며, 계율이 매우 청정한 것이 바로 남의 마음을 아는 행이며, 여러 가지 죄업을 이미 마친 것이 바로 전생을 아는 행이며, 3도(塗) 등을 헤아리는 것이 바로 뜻대로 움직이는[神足] 행이다.마음이 자재함을 얻은 것이 바로 굳세고 강한 행이며, 파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긴요한 행이며,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것이 바로 편안함에 나아가는 행이며, 진동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는 것이 바로 평등한 행이며, 항상 생각하되 믿고 의지함이 없는 것이 바로 허공 같은 행이며, 관찰하여 다 아는 것이 바로 허깨비 같은 행이다.장엄(莊嚴)한 모양[相]이 바로 꿈[夢]같은 행이며, 외모[邊幅]의 모양이 바로 불꽃[炎]같은 행이며, 모이지[聚] 않는 모양이 바로 그림자[影]같은 행이며, 탐내지[貪] 않는 모양이 바로 메아리 같은 행이며, 이치로서 율(律)을 결단하는 모양이 바로 아지랑이 같은 행이며, 황홀(恍惚)한 모양이 바로 공(空)한 행이며, 몸이 부류로 나누어진 모양이 바로 모양[相]이 없는 행이며, 뜻이 부류로 나누어진 모양이 바로 원(願)없는 행이다.3계(界)가 부류로 나누어진 모양이 바로 서로 만남이 없는 행이며, 서로 만나 부류를 나누는 모양이 바로 마군을 항복하는 행이며, 마음과 뜻과 의식이 있지도 않고 상대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삼보를 끊지 않는 금강(金剛)의 행이다. 일체가 늘어나 더해지는 것이 이 행의 모양이다. 천자여, 이와 같은 마음이 보살이 도를 행하는 행이다.”
8. 분별품(分別品)
이때 수진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도에 머무는 보살은 그 행이 이미 모든 성문과 벽지불 위를 벗어났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이와 같으니, 천자여, 말한 바와 같이 살펴보라.보살의 행은 참으로 모든 성문과 벽지불 위를 벗어났다. 왜 그런가?
증과를 믿음도 없고, 또한 법을 지니는 것도 아니며, 또한 8정도(正道)를 행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수타원(須陀洹)도 아니며, 또한 사타함(斯陀含)도 아니고, 또한 아나함(阿那含)도 아니며, 또한 아라한(阿羅漢)도 아니고, 또한 벽지불도 아니며, 또한 다타갈(多陀竭)15)도 아니고, 또한 삼야삼불(三耶三佛)16)도 아니며, 또한 세다라(世多羅)도 아닌 것이다.이와 같으니, 천자여, 만일 이를 알지 못한다면 이 보살이 보살인 줄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또한 속법(俗法)도 아니고, 또한 음법(婬法)도 아니며, 또한 노법(怒法)도 아니고, 또한 치법(癡法)도 아니며, 또한 생사법도 아니고, 또한 열반법도 아니다. 만일 이를 알지 못한다면, 이 보살이 보살인 줄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이와 같으며, 무엇을 인하여 보살이 믿고 증득하여 열반법에 이를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모든 법을 분명히 알고 믿어 일체를 멀리 여의어서 탐욕에 집착함이 없고 나머지 도(道)를 믿지 않는다. 왜 그런가?6바라밀의 도를 믿기 때문이다. 믿고는 곧 지녀서 묶이고 집착한 것을 해탈시키며, 항상 미래[未然]의 지혜를 탐구하여 생사도 두려워하지 않고 열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믿음의 요체[信要]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법의 요체[法要]를 지닐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교(法敎)를 모두 다 지녔으므로 세간의 맛(味)을 좋아하지 않고 법으로 음식을 삼으며, 법의 이치에 서고 애욕에 머무르지 않으니, 법의 힘[法力]을 얻어 세속의 힘[俗力]을 쓰지 않으며, 법의 이치를 얻어 세속의 이치를 숭상하지 않으며, 법의 거룩[法尊]함을 얻어 세속의 거룩[俗尊]함이 되지 않으며, 법에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며, 똑바른 법을 말하고 법 아닌 것을 말하지 않으며, 법에 머물고 법에 처하여 법 아닌 곳에 처하지 않는다.법으로 꿰뚫어 보아 살펴서 가리고 걸림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죄다 알고 다라니(陀羅尼)를 얻어 자세히 기억하여 잊지 않으며, 일곱 가지 일로써 보배를 구족하고, 일체의 법에 의지하여 곧 자재한 법에 머물 수 있다. 그러므로 천자여, 보살은 법의 요체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이 여덟 가지 일을 얻을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여덟 가지 삿됨[邪]에서 벗어나 청정한 공덕으로 여덟 가지 곧은[直] 행을 얻고 소원이 원만하여 곧 도에 들 수 있지만, 일체의 세간 사람들은 여덟 가지 어려운[難] 곳에 있으므로 모두 다 어려움이 없는 곳에 머물게 하여, 남자(男子)로서 여덟 가지 깨달음[覺]의 생각을 얻어 항상 도의 뜻을 원하여 함부로 놓아버리지 않아 여덟 가지 유무선(惟務禪)을 얻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이 여덟 가지 일을 얻을 수 있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수타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일체의 사람들을 모두 마치 바다에 빠져 물을 따라 떠내려 가다가 힘센 이가 있다면 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 올 수 있는 것처럼 보아서, 생사의 흐름을 끊고 그 근본 행을 무너뜨리지 않아서 평등함을 얻어 3악도(惡道)를 끊고 일체가 편안한 곳에 머물 수 있게 한다.진리에 대한 망설임을 멀리 여의고 부처님 법장(法藏)에 머물게 하며, 범부(凡夫)의 자취를 벗어나 부처님 법의 자취에 서기를 좋아하여 생사의 즈음[際]을 알아 곧 열반문을 향하게 한다.모든 세계에서 제일로 후(厚)하여 항상 사람들 가운데 서되 열반의 행에 뜻을 두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도를 향하게 하여 도량(道場)에 모이도록 하며, 살펴 나타내고 가르쳐 주어서 생사를 멀리 여의도록 하고 유위 가운데 있으면서 무위를 나타내어 감탄하게 하며, 아유월치(阿惟越致)17)를 똑같이 좋아하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수타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사타함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일체 미래의 법을 알기에 생사 가운데 들어와서 일체를 보호하고 법을 설하여 무위에 이르게 하되 유위법(有爲法)을 보지 않으며, 무위에 이른 자는 또한 오는 것도 보지 않고 머무는 것도 보지 않아서 비록 옴[來]을 나타내 보일지라도 애욕이 없다.가서는 하는 일을 마치고 와서는 본요(本要)에 어긋나지 않으며, 와서는 마군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와서는 도량(道場)에 이르며, 와서는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녀서 나타내 보여 모든 법을 의지하여 믿고, 와서는 일체를 보호하여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며, 이미 굳세고 강한 신통의 도를 얻었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사타함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아나함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일체의 소견에 다시 돌아가지 않아서 모든 쌓임[陰]과 덮임[蓋]을 따르지 않고 모든 뒤바뀜[顚倒]에 떨어지지 않으며, 여기에 다시 돌아가지 않아서 또한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여기에 다시 돌아가지 않아서 또한 비법(非法)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또한 두려움이 없으며 또한 탐욕과 음욕이 없고 또한 성냄도 없으며 또한 어리석음도 없다.다시 돌아가지 않아서 하는 바의 일이 항상 수승하고 부처님 법을 원만히 구족하며 오고 감의 공덕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고, 일체의 하는 일을 이미 마쳐 탐냄이 없으며, 이미 수기를 받아 결정되었으므로 지을 수 있는 바를 일으키지 않으며, 자재하지 못한 것을 지혜로 제도하고, 영특해서 다른 사람을 따라 다니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아나함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아라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탐욕을 항복하여 일체를 위하여 법을 말하고, 모든 성내는 이를 항복하고 법으로 가르쳐서 나쁜 버릇을 제거하며, 모든 어리석은 이를 항복하여 법으로 교화한다.이미 공의 무더기[空聚]를 얻어 모든 법을 다 보았으므로 모든 부처님 법에 대한 일체의 정진을 버리지 않으며, 세간에서 일체의 합하고 모여 모두 무상함을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고, 공양(供養)하는 가운데 항상 최고가 된다.마치 연꽃이 진흙탕에 물들지 않음과 같으며, 나[我]도 없고 지님[持]도 없고 가짐[所有]도 없어서 모든 법을 똑같이 지녀 항상 그것을 할 것을 생각하고, 지혜로써 공(空)을 분별하며,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바를 따라 그 뜻을 세운다.전생에 바라던 바를 모두 이미 만족하고, 뜻이 굳건히 머물러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며, 좋고 나쁜 모든 말을 일체 받는 바가 없고, 환희하여 얻어서 결정하여 반드시 일체를 굴려 제도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아라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성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일체의 듣지 못한 바의 법을 말해주니 이것이 바로 성문이다. 성문승에 대해 믿음이 없고 모든 집착한 법에서 이미 내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아 법계에서 아직 듣지 못한 이로 하여금 듣도록 하되 모든 인연 있는 이를 반연하여 나도 없고 남도 없음으로써 익혀 듣게 한다.공법(空法)을 가르치되 부처님 법에만 한(限)하지 않아서 그 지은 바의 법이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 모든 법의 요체를 지으며, 듣고는 항상 정진하여 걸리는 바가 없으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법은 받아 행하지 않으며, 스스로 이 선정으로 하고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는 소리(音聲)를 다 깨우쳐 안다.이루다 할 수 없는 지음[作]을 이미 끊어 구족함을 얻으며, 또한 다함없는 비유법의 이치를 얻으며, 일체 사람들의 뜻과 행하는 바를 다 알아서 지혜로써 나타내 보여 인도하여 이롭게 하고, 그 원하는 바에 따라 법을 말하여 그 마땅한 곳에 이르게 하되 잘난 체하지 않고 항상 본래의 원(願)을 행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성문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벽지불(辟支佛)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인연방편을 얻어 모든 법이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수(壽)도 없고 명(命)도 없고 주재(主宰)도 없음을 안다. 마치 스스로 꾸며놓은 것은 거짓되어 실상도 없고 소속도 없는 것과 같으며, 그 인연의 모양도 비유하면 또한 이와 같다.모든 인연을 자세히 보아 도(道)로써 음식을 삼고, 율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모든 바라밀의 반려(伴侶)이며, 일체의 도를 증득(證得)함이 곧 법의 반려이며, 4은(恩)의 일에 대해 잘난 체 함이 없는 것이 바로 신통의 반려이다.인연법을 알아서 끊거나 집착하지 않고, 다른 업(業)을 믿지 않아서 평등한 도각(道覺)을 얻으며, 보고 아는 곳을 믿어서 다른 뜻을 행하거나 따르지 않으며, 소승(小乘)의 공덕을 무너뜨리고 대승을 세우며, 인연으로써 일체의 모든 법을 행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벽지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부처에 이를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일체의 법이 본래 모두 공적(空寂)함을 다 깨달아 알며, 일체가 본래 소유가 없음을 깨달아 알며, 악처(惡處)와 사람과 천상(天上)의 모든 행을 깨달아 알아서, 뜻으로 중생이 좋아하고 편안히 여기는 것을 다 멀리 떠난다. 왜 그런가?모든 지혜를 다 밝게 알았기 때문이니, 스스로 지혜를 깨달아 모든 욕(欲)이 공(空)하고 자신도 또한 공함을 알며, 한때에 생각하여 도를 깨닫고 다시 다른 데로 굴러가지 않아서 곧 무수한 갖가지 일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보살이 부처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다타갈에 이를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여래의 도(道)로 왔으니, ‘여(如)’라는 것은 진리[諦]라서 하나라도 빠뜨리거나 잊어버림이 없는 것이며, ‘여’라는 것은 만들어 세움이고, ‘여’라는 것은 보시이며, ‘여’라는 것은 계율이며, ‘여’라는 것은 인욕이며, ‘여’라는 것은 정진이며, ‘여’라는 것은 선정이며, ‘여’라는 것은 지혜이며, ‘여’라는 것은 훌륭한 방편이며, ‘여’라는 것은 혜(慧)이며, ‘여’라는 것은 사람이거나 또한 사람이 아니다.현세에 있어서는 사람을 위하여 익혀서 생사의 행을 끊고, 모든 행 가운데서 그 위로 나란히 벗어나 두려워하는 이를 제도하여 저 언덕에 이르게 하지만, 제도할 바에 저곳[彼]이 없으며 또한 저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이곳에 이르러도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생사 두 곳을 벗어나 어둠을 멀리 여의고 평등하게 밝음을 보니, 어둠에도 어둠이 없어서 어둠을 제도한다.
여래는 공(空)으로부터 왔으므로 번뇌[垢穢]를 무너뜨려 흩어버려서 공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다타갈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복가파(匐迦波)에 이르러 나고 죽는 곳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애욕을 깨뜨리고 3계(界)의 나고 죽는 곳을 건너가, 있는 곳[有處]에서 없는 곳[無處]을 나타내 보인다.
일체의 사람들은 모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마군들을 항복해서 모든 곳에서 좋아하고 기뻐하며 집착하는 것을 모두 멀리 여의지만, 무거운 짐을 놓아버리고 그곳을 끊어 여의게 한다.생겨나는 좋고 나쁜 여러 곳을 두루 보아서 이미 처해 있는 곳을 떠나 즐거이 탐욕과 음욕을 버리며, 유연(柔軟)한 마음으로써 몸과 뜻을 안정시켜 계지(戒智)를 결정하여 나쁜 곳을 다 보아 여의어 집착하지 않는다.모든 몸에 다 들어가 일체의 형태(形態)를 알고 나고 죽는 곳을 그쳐, 이로움으로 인도하여 복으로 보시하며 널리 교량(橋梁)을 시설하고 항상 공양하기를 좋아하여 3처(處)를 가득 덮되 일찍이 싫증내거나 그만두지 않아서 3계(界)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복가파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삼야삼불(三耶三佛)의 평등각(平等覺)18)에 이를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의 마음은 5역(逆)에 대해 바른 도[正道]와 같이 여겨 그 뜻이 평등하므로 평등하게 깨닫지 않음이 없다. 본 것과 네 가지 뒤바뀜에도 평등하고 음개[陰蓋)에서 모든 덮고 가린 것에도 평등하여 도(道)와 다름이 없이 여기므로 평등하게 깨닫지 않음이 없다.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및 모든 욕(欲)에 대해 평등하여 또한 도와 똑같이 여기므로 평등하게 깨닫지 않음이 없다.범부법(凡夫法)과 습법(習法)과 불습법(不習法)과 벽지불법과 보살법도 다 도와 똑같이 여기므로 평등하게 깨닫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삼야삼불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세다라(世多羅) 세존에 이를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세간 사람들을 가르쳐서 공덕을 얻어 성내지 않게 하니, 법교(法敎)를 들은 이는 모두 가르침을 받들어 지니고, 법교를 그르다고 하는 이를 위하여 법의 바퀴[法輪]를 굴려서 감교(甘敎)와 자교(慈敎)와 삼천세계교(三千世界敎)를 일체 세존의 가르침으로 삼는다.일체를 위하여 받아 스스로 귀의하며, 일체를 위하여 등불이 되고, 일체를 위하여 밝은 가운데 가장 밝으며, 일체를 위하여 고요한 선적(禪寂)을 지어서 일체의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함이 있지 않아 소멸하여 타오르지 않게 하며, 일체의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여우같은 의심을 풀어 주니, 여우같이 의심하는 모든 환난이 다 이미 끊어졌으며, 일체의 사람들을 위하여 길이 공덕을 더해서 전륜왕(轉輪王)과 사천왕(四天王)과 제석(帝釋)ㆍ범천(梵天)이 경례(敬禮)하는 바가 된다.어리석은 이에게 가벼이 여김을 받아도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지혜 있는 이에게 찬탄을 받아도 환희하지 않아서 마음이 항상 평등하여 늘 허공과 같으므로, 세존이 세간에서 가장 위가 된다. 그러므로 보살이 세다라(世多羅)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발속선타람(鉢遬禪陀嵐) 범인법(凡人法)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일체의 사람들이 행할 바를 좋은 방편으로써 나타내 보이고, 일체 범부의 행을 알면서도 집착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범부법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늑가타람(勒迦陀嵐) 탐음법(貪婬法)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항상 걱정하고 슬퍼하고 울면서 부처님 법을 얻으려고 하며, 항상 여래의 몸과 같은 몸을 이루기를 탐내고 좋아하며, 일체를 자비로 대하여 성냄이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탐음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대타람(䨴陀嵐) 진에법(瞋恚法)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한 가지 일 가운데서 열여덟 가지 일을 보고, 성문과 벽지불승을 마치 원수의 집처럼 여겨 사람들에게 그 법을 일으키라고 권유하지 않으며, 유위 가운데서 애욕을 나타내고 애욕 가운데서 마음이 집착한 바 없다. 왜냐하면 일체를 기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진에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무이타람(瞀訑陀嵐) 우치법(愚癡法)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아는 것이 없음을 바로 어리석다[癡]고 하니, 습인(習因)・습과(習果) 등의 정해진 법을 인식하지 못하며, 또한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속삭이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며, 짓지도 않고, 무너뜨리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우치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승살타람(僧薩陀嵐) 생사법(生死法)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생사에 움직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도를 구하기 때문이니, 굳건히 머물러서 움직이지 않아 일체의 마군들이 능히 그 기회를 얻지 못한다.일체의 모든 행에 집착함이 없음을 얻어 생사에도 평등하고 또한 부처님 법에도 평등하며, 작은 도를 좋아 하지 않고 큰 도를 평등하게 보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또한 전전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생사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천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니원타람(泥洹陀嵐) 멸도법(滅度法)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천자여, 보살은 모든 습속(習俗)을 따라 열반의 도를 나타내고, 일체의 법을 알아 익혀서 멸하며, 열반에서 열반에 들지 않고, 열반에서 영원히 열반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멸도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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