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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311 불설부증불감경(佛說不增不減經)

by Kay/케이 2024.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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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부증불감경(佛說不增不減經)

 

불설부증불감경(佛說不增不減經)

원위(元魏) 북인도삼장 보리류지(菩提流支) 한역
김달진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어느 때 바가바(婆伽婆: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기사굴산 중에 큰 비구의 무리 1,250인과 함께 계셨다. 여러 보살마하살은 무량하고 무변하여 말하고 헤아릴 수가 없었다.이때 혜명(慧命)1) 사리불은 대중 가운데에서 곧 자리를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이르고, 이르기를 마치고서는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고 절을 하였다. 물러서서 한쪽에 앉아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아뢰었다.“세존이시여, 일체의 중생은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지금까지 6도(道)를 돌고 돌아 삼계(三界)를 왕래하면서 4생(生) 중에 윤회하여 나고 죽으면서 괴로움을 받음이 끝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중생의 모임[聚]과 중생의 바다에 더하고 덜함이 있습니까, 더하고 덜함이 없습니까. 이 뜻은 깊고 감추어져 있어 저는 아직껏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사람이 저에게 물으면 마땅히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합니까.”이때 세존께서는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착하고 착하다. 사리불아, 너는 일체 중생을 안온하게 하고, 일체 중생을 안락하게 하고, 일체 중생을 가엾게 여기며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며, 일체 중생과 모든 하늘과 사람을 요익하고 안락하게 하고자 하는 까닭에 나에게 이 깊고 깊은 뜻을 물었다.사리불아, 네가 만약 여래ㆍ응공ㆍ정변지에게 이와 같은 뜻을 묻지 않았다면 많은 허물이 있게 된다. 무슨 까닭인가. 현재세(現在世)와 미래세(未來世)에 있어서 모든 하늘과 사람 등 일체 중생은 깊이 쇠뇌(衰惱)하고 손해되는 일을 받고, 깊이 일체의 이익과 안락함을 잃기 때문이다.사리불아, 큰 사견이란 이른바 중생계(衆生界)의 더함을 보고 중생계의 덜함을 보는 것이다. 사리불아, 이 큰 사견을 가진 여러 중생들은 이 소견으로 해서 나면서부터 장님이며 눈이 없어, 이 까닭으로 긴 밤을 망령되이 사도(邪道)를 행하고, 이 인연으로 해서 현재세에서 여러 나쁜 세계[惡趣]에 떨어진다.사리불아, 큰 험난이란 이른바 중생계의 더함을 취하여 굳게 집착하고 망령되이 집착하며, 중생계의 덜함을 취하여 굳게 집착하고 망령되이 집착하는 것이다. 사리불아, 이 여러 중생은 굳게 집착하고 망령되이 집착하는 이 까닭에 긴 밤을 삿된 도를 행하고 이 인연으로 해서 미래세(未來世)에 있어서 나쁜 세계에 떨어진다.사리불아,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는 여실하게 한 법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실하게 한 법계[一法界]2)를 보지 못하는 까닭에 사견의 마음을 일으키고, 중생계는 더하고 중생계는 덜한다고 말한다.사리불아, 여래가 세간에 있을 때 나의 여러 제자는 이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멸한 뒤, 5백 세를 지나면 많은 중생이 있고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으며 불법 중에서 수염과 머리털은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 사문의 모양을 나타낸다 하여도, 그러나 그 안에는 사문의 덕과 행이 없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실로 사문이 아니면서 스스로는 사문이라고 말하며, 부처의 제자가 아니면서 부처의 제자라고 말한다.더욱 스스로 설하여 ‘나는 곧 사문이며 진실한 부처님의 제자이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더하고 덜한다는 견해를 일으킨다.무슨 까닭인가. 이 여러 중생은 여래의 불요의경(不了義經)3)에 의지하므로 해서 지혜의 눈이 없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공의 견해를 멀리 떠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가 밝힌 바 초발심(初發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닦아서 모은 무량한 보리(菩提)의 공덕과 행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가 얻은 무량한 법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무량한 힘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무량한 경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래의 무량한 행처(行處)를 믿지 않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부사의(不思議)한 무량한 법의 자재(自在)함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부사의하고 무량한 방편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무량한 차별의 경계를 분별하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래의 불가사의한 대비에 잘 들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실하게 여래의 대열반(大涅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사리불아, 어리석은 범부는 듣는 지혜가 없는 까닭에 여래의 열반을 듣고서도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일으킨다. 단상(斷想)과 멸상(滅想)을 일으키므로 해서 중생계는 덜한다고 하고 큰 사견의 지극히 무거운 악업을 이룬다.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이 여러 중생은 덜한다고 하는 견해에 의지하여 다시 세 가지 견해를 일으킨다. 이 세 가지 견해는 저 덜한다고 하는 견해와 서로 버리고 떨어질 수 없음이 마치 그물과 같다. 무엇을 세 가지 견해라 하는가. 하나는 단견(斷見)으로 필경에는 다한다 함이며, 둘은 멸견(滅見)으로 즉 열반을 말하며, 셋은 열반이 없다는 견해로 이 열반이란 필경은 공적(空寂)함을 말한다.사리불아, 이 세 가지 견해의 이와 같은 얽매임과 이와 같은 집착과 이와 같은 접촉의 이 세 가지 견해의 힘과 인연으로 해서 전전하여 다시 두 가지 삿된 견해를 낳는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저 세 가지 견해와 서로 버리고 떠나지 못함이 마치 새 그물과 같다. 무엇을 두 가지라고 말하는가. 하나는 탐욕이 없는 견해이며, 둘은 필경은 열반이 없다고 하는 견해이다.사리불아, 욕망이 없는 견해에 의하여 다시 두 가지 견해를 일으킨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욕망이 없는 견해와 서로 버리고 떠날 수 없음이 마치 새 그물과 같다.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하나는 계(戒)를 취하는 견해이며, 둘은 부정(不淨)함 중에서 깨끗함을 일으킨다는 전도(顚倒)된 견해이다.사리불아, 필경은 열반이 없다고 하는 견해에 의하여 또 여섯 가지 견해를 일으킨다. 이 여섯 가지 견해는 열반이 없다고 하는 견해와 서로 버리고 떨어질 수가 없어 마치 새 그물과 같다. 무엇을 여섯이라 하는가. 하나는 세간(世間)은 시작이 있다고 하는 견해이며, 둘은 세간은 끝이 있다고 하는 견해이며, 셋은 중생은 환화(幻化)로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이며, 넷은 괴로움이란 없고 즐거움도 없다고 하는 견해이며, 다섯은 중생의 일이란 없다는 견해이며, 여섯은 거룩한 진리[聖諦]는 없다고 하는 견해이다.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이 여러 중생은 더한다는 견해에 의지하여 다시 두 가지 견해를 일으킨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저 더한다는 견해와 서로 버리고 떠나지 못함이 마치 새 그물과 같다.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하나는 열반의 비롯함이 생겼다는 견해이며, 둘은 인연(因緣)이 없어 홀연히 있게 된다는 견해이다.사리불아, 이 두 가지 견해는 중생으로 하여금 선법 중에서 원하는 욕심과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을 없게 한다.사리불아, 이 여러 중생은 이 같은 두 가지 견해를 일으키는 까닭에 참으로 칠불(七佛) 여래ㆍ응공ㆍ정변지(正遍知)로 하여금 차례로 출세하여 그를 위하여 설법하게 하여도 선법 중에서 혹은 욕심과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그렇게 할 리가 없다.사리불아, 이 두 가지 견해는 이는 곧 무명과 여러 미혹의 근본이다. 이른바 열반의 비롯함이 생겼다고 하는 견해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는데 홀연히 있다고 하는 견해인 것이다.사리불아, 이 두 가지 견해는 이는 곧 극악(極惡)한 근본적인 큰 환난의 법이다.사리불아, 이 두 가지 견해에 의하여 일체의 견해를 일으킨다. 이 일체의 견해는 저 두 가지 견해와 서로 떨어지고 버릴 수 없음이 마치 새 그물과 같다. 일체의 견해란, 이른바 혹은 안(內)이며, 혹은 밖이며, 혹은 거칠고 혹은 가늘고, 혹은 중(中)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온갖 견해로서 이른바 더한다고 하는 견해이며 덜한다고 하는 견해이다.사리불아, 이 두 가지 견해는 하나의 경계에 의지하며, 하나의 경계와 같고, 하나의 경계와 합하여,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는 저 하나의 경계를 여실하게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실하게 저 하나의 경계를 보지 못하는 까닭에 극악하고 크게 삿된 견해의 마음을 일으키며, 중생계는 더한다고 말하며, 중생계는 덜한다고 말한다.”이때 혜명(慧命) 사리불은 부처님께 아뢰었다.“세존이시여, 무엇이 곧 하나의 경계로서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가 여실하게 저 하나의 경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실하게 저 하나의 경계를 보지 못하는 까닭에 극악하고 크게 삿된 견해의 마음을 일으키어 중생계는 더한다고 말하고 중생계는 덜한다’고 말합니까?”사리불은 아뢰었다.“좋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뜻은 깊고 깊어 저는 아직껏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원하오니 여래께서는 저를 위하여 해설하시어 요해(了解)함을 얻게 하십시오.”이때 세존께서는 혜명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이 깊고 깊은 뜻은 이는 곧 여래의 지혜의 경계이다. 또 이는 여래의 마음이 행하는 곳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깊은 뜻은 일체의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지혜로 알 수가 없는 곳이며, 볼 수 없는 곳이며, 관찰할 수가 없는 곳이다. 하물며 어찌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로서 능히 헤아리겠느냐. 오직 모든 부처와 여래의 지혜만이 있고, 곧 능히 이 뜻을 관찰하고 지견(知見)한다.사리불아, 일체의 성문과 연각의 지혜는 이 뜻 중에서 오직 우러러 믿어야 하며 여실하게 지견하고 관찰할 수가 없다. 사리불아, 깊은 뜻이란 이는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제일의제란 이는 곧 중생계(衆生界)이다. 중생계란 이는 곧 여래장(如來藏)이다. 여래장이란 이는 곧 법신(法身)이다. 사리불아, 내가 설하는 바와 같은 법신의 뜻이란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끊이지 않고 다르지 않음이 항하(恒河)의 모래 수에 지나는 불가사의한 불법이며 여래의 공덕과 지혜인 것이다.사리불아, 세간의 등(燈)이 밝은 빛을 소유하고 접촉함이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음과 같이 또 마니보주(摩尼寶珠:如意寶珠)가 소유한 밝은 빛과 형상이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음과 같다. 사리불아, 여래가 설하는 바 법신의 뜻도 이와 같아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끊이지 않고 다르지 않음이 항하의 모래 수에 지나는 불가사의한 불법이며 여래의 공덕과 지혜인 것이다.사리불아, 이 법신은 곧 나지 않고 멸하지 않는 법으로서 과거제(過去際)도 아니며 미래제(未來際)도 아니다. 두 가[邊]를 떠난 까닭이다. 미래제가 아니라 함은 멸하는 때를 떠난 까닭이다. 사리불아, 여래의 법신은 항상하다. 다르지 않은 법인 까닭이며, 다하지 않은 법인 까닭이다.사리불아, 여래의 법신은 항상하다. 항상 귀의해야 할 것인 까닭이며, 미래제에도 평등한 까닭이다. 사리불아, 여래의 법신은 변하지 않는다. 멸함이 아닌 법인 까닭이며, 지음이 아닌 법인 까닭이다.사리불아, 즉 이 법신이 항하의 모래 수에 지나는 무변한 번뇌에 얽혀서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지금의 세간에 수순하여 파도에 표류(漂流)하면서 나고 죽음에 왕래함을 이름하여 중생이라고 이름한다.사리불아, 즉 이 법신이 세간에 나고 죽는 고뇌를 싫어해서 떠나고 일체의 모든 존재[有]의 욕구를 버리고서 10바라밀(婆羅蜜)을 행하고 8만 4천의 법문을 거두고 보리의 행을 닦는 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한다.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즉 이 법신이 일체 세간의 번뇌에 사역(使役)되고 얽힌 것을 떠나고, 일체의 괴로움을 지나고, 일체의 번뇌의 때를 떠나서 청정함을 얻고, 피안(彼岸)의 청정한 법 가운데 머무르고, 일체 중생이 원하는 땅에 이르고, 일체의 경계 중에서 구경(究竟)을 통달하여 다시 뛰어난 자가 없으며, 일체의 막힘을 떠나고 일체의 걸림을 떠나고, 일체의 법 중에서 자재한 힘을 얻는 것을 이름하여 여래ㆍ응공ㆍ정변지라고 한다.이 까닭에 사리불아, 중생계를 떠나지 않고서 법신이 있고 법신을 떠나지 않고서 중생계가 있는 것이다. 중생계는 곧 법신이며, 법신은 곧 중생계이다. 사리불아, 이 두 법은 뜻이 하나이면서 이름은 다르다.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내가 위에서 설함과 같이 중생계에도 또 세 가지 법이 있다. 모두가 진실로 같아서 다르지 않고 차별되지 않는다. 무엇을 네 가지 법이라고 말하는가. 하나는 여래장은 본래의 경계와 상응하는 체이며 청정한 법이다. 둘은 여래장은 본래의 경계와 상응하지 않으며 번뇌에 얽힌 청정하지 않은 법이다. 셋은 여래장은 미래의 경계와도 항상 평등하며 존재의 법이다.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장이 근본 경계와 상응하는 체이며 청정한 법이라고 함은, 이 법은 여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여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다. 지혜가 청정하여 진여의 법계는 부사의한 법이다. 비롯함이 없는 본래의 경계로부터 지금의 이 청정하고 상응하는 법체가 있다. 사리불아, 나는 이 청정한 진여의 법계에 의지하여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설하여 불가사의한 법의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라고 한다.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장이 근본 경계와 상응하지 않는 체이며 번뇌에 얽매인 청정하지 않은 법이라고 함은, 이 근본 경계는 떠나서 벗어나 번뇌에 얽매인 청정하지 않은 법과 상응하지 아니하며 오직 여래 보리 지혜의 능히 끊는 바 된다. 사리불아, 나는 이 번뇌에 얽매인 상응하지 않는 부사의한 법계에 의지하여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설하여 객진번뇌(客塵煩惱)에 물든 바 자성의 청정한 마음이 불가사의한 법이라고 한다.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장이 미래의 경계와 항상 평등하며 존재의 법이라 함은 이는 곧 일체의 모든 법의 근본으로서 일체의 법을 구비(具備)하여 세간의 법 중에서 진실한 일체의 법과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으며, 일체의 법을 주지하고 일체의 법을 거두는 것이다.사리불아, 내가 이 나지 않고 멸하지 않으며 항상하고 청량하고 변하지 않고 귀의하는 불가사의한 청정법계(淸淨法界)에 의지하여 설해서 중생이라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이라 함은 이는 곧 나지 않고 멸하지 않고 항상하며 청정하고 멸하지 않으며 귀의하는 불가사의한 청정법계 등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뜻인 까닭으로 해서 나는 그 법에 의하여 설하기를 중생이라고 이름한다.사리불아, 이 세 가지 법은 모두가 진실하고 같아서 다르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다. 이 진실하고 같고 다르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법 중에서 구경을 다하여 극악과 불선의 두 가지 삿된 소견은 일으키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실한 견해인 까닭이다. 이른바 더한다고 하는 견해와 덜한다고 하는 견해는 사리불아, 이 두 삿된 견해를 모든 부처와 여래는 필경 멀리 떠나고 모든 부처와 여래가 꾸짖는 바이기 때문이다.사리불아, 만약 비구와 비구니와 우바새와 우바이가 있어 혹은 하나의 견해를 일으키고, 혹은 둘의 견해를 일으키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그의 세존이 아니며, 이와 같은 사람들은 나의 제자가 아니다. 사리불아, 이 사람은 둘의 견해를 일으킨 인연으로 해서 두 어두움 속에서 어두움 속으로 들고 어두움 속에서 어두움 속으로 든다. 나는 이들을 설하여 일천제(一闡提)4)라고 이름한다. 이 까닭에 사리불아, 너는 지금 마땅히 이 법을 배워 저 중생을 교화하고 두 견해를 떠나서 정도(正道) 중에 머물러야 한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법들을 너도 또한 마땅히 배워서 저 두 견해를 떠나 정도 중에 머물러야 한다.”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심을 마치자, 혜명(慧命) 사리불과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ㆍ보살마하살과 모든 천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 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사람인 듯 아닌 듯한 무리[人非人] 등 일체의 대중들이 모두 환희하고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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