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무상의경(佛說無上依經) 상권
불설무상의경(佛說無上依經) 상권
양(梁) 천축삼장 진제(眞諦) 한역
김달진 번역
1. 교량공덕품(校量功德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어느 때 부처님이신 바가바(婆伽婆)께서는 왕사성의 가란타죽림(迦蘭陀竹林:죽림정사)에 계셨는데 큰 비구의 무리 1,250명과 함께였다.
이들은 모두가 나한(羅漢)으로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였고 짓는 바를 이미 이루었으며, 모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이미 이익을 얻었다. 모든 존재의 결박을 다하여 그 마음은 해탈을 잘 얻었고, 자재함을 잘 얻었고, 사마타와 비발사나(毘鉢舍那)에 통하였다.그 이름을 정명(淨命) 아야교진여(阿若憍陣如)ㆍ정명(淨命) 마승(馬勝)ㆍ정명 현승(賢勝)ㆍ정명 바사파(婆沙波)ㆍ정명 마하나마(摩訶那摩)ㆍ정명 우루빈나가섭[漚樓頻蠡迦葉]ㆍ정명 가야가섭(伽耶迦葉)ㆍ정명 나제가섭(那提迦葉)ㆍ정명 야수타(耶輸陀) 정명 마하가섭(摩訶迦葉)ㆍ정명 사리불(舍利弗)ㆍ정명 마하목건련(摩訶目犍連)ㆍ정명 수보리(須菩提)ㆍ정명 수바후라(須婆睺羅)ㆍ정명 마하구치라(摩訶拘郗羅)ㆍ정명 우바리(優波離)ㆍ정명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ㆍ정명 마하 겁빈나(摩訶劫賓那)ㆍ정명 이바다(離婆多)ㆍ정명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ㆍ정명 아니루타(阿尼樓馱)ㆍ정명 손타라난타(孫陀羅難陀)ㆍ정명 라후라(羅睺羅)라고 하였다. 오직 배움의 땅[學地]에 있는 아난만을 제외한 이 같은 1,250명이었다.또 큰 비구니의 무리 5백 명이 함께하였다. 그 이름은 마하파사파제(摩訶波闍波提) 비구니ㆍ청련화색(靑蓮華色) 비구니ㆍ기마(綺摩) 비구니ㆍ발타(跋陀) 비구니ㆍ난타(難陀) 비구니ㆍ야수다라(耶輸陀羅) 비구니였는데, 이와 같은 이들에게 각각의 권속이 있었다.또 무량한 백천의 보살마하살이 있었다. 이는 현겁 중의 여러 보살의 무리로서 모두가 남김없이 크고 깊은 법의 성품에 통달하였다. 조화(調和)를 좇아서 교화하기 쉽고 평등한 선행으로 보살도를 닦았다. 일체 중생의 참다운 선지식으로서 거리낌이 없는 다라니를 얻었으며, 물러서지 않는 법의 바퀴를 굴려 이미 무량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을 거쳤다. 모두가 다른 곳의 세계로부터 와서 모인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성자로서 미륵보살을 우두머리로 하였다.또 백천만의 우바새의 무리가 있는데 빈바사라왕(頻婆沙羅王)을 우두머리로 하였다. 또 무량한 백천의 우바이의 무리가 있는데 비제희 부인(毘提希夫人)을 우두머리로 하였다.이때 세존께서는 모든 하늘과 사람에게서 공경함과 존중함과 따름[隨從]과 공양을 받으셨다. 이에 정명 아난은 대중 가운데 있었다.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서 이렇게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 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 왕사성에 들어가 차례로 걸식을 하였습니다. 저는 한 곳에서 크고 높고 겹겹인 집을 보았습니다. 장엄은 새로 이루어졌고 조각과 장식과 그림은 안팎이 완연하고 치밀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나니 곧 마음에 생각이 났습니다.만약 믿음이 깨끗한 선남자와 선여인이 이 크고 높은 겹겹인 집을 지어 사방의 뭇 스님에게 보시하고, 동시에 네 가지 일[四事:네 가지 공양으로 옷과 음식과 침구와 약(藥)]을 갖춘다면, 만약 여래께서 멸(滅)하신 뒤, 개자[芥]의 크기만 한 부처님의 사리를 취하여 탑 안에 모시고, 탑을 세우기를 아마라자(阿摩羅子:직경이 1촌인 원형의 과일) 크기와 같고, 찰간(刹干)을 올리기를 바늘 크기와 같고, 노반(露盤:탑 위에 세운 찰간의 밑에 설치된 접시)은 대추나무 잎의 크기와 같고 부처님을 조성하기는 보리 알 크기와 같다 하면, 이 두 가지 공덕은 어느 것이 뛰어나다 하겠습니까. 지금 세존께 여쭈겠으니, 오직 바라건대 해설하여 주십시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아난아, 능히 여래에게 이 같은 큰 일을 묻는구나. 너는 능히 여러 가지로 많은 이익을 수행하고 세간을 연민하여 귀의할 곳이 되고, 능히 사람과 하늘로 하여금 도를 얻어 안락하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괴로운 땅을 벗어나 머물지 않게 한다. 이 때문에 아난아, 너는 지금 분명하게 들어라. 오로지 이를 사념하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믿고 받아야 한다.”
“예.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기를 원하옵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염부제(閻浮提)의 세계는 길이와 너비[縱廣]가 7천 유순이며, 그 섬[洲]의 북쪽 가[邊]는 광대하여 남쪽은 수레와 같고, 사람의 얼굴도 또한 같다. 그 중에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 등이 가득하기를 비유컨대 자림(蔗林)과 죽림과 갈대 숲과, 혹은 논이 조밀하여 비지 아니하여 빈 곳이 없다.
이와 같이 아난아, 이 염부제에는 수다원과 나아가 벽지불이 가득 차 있는데, 만약 한 사람이 있어 모양과 목숨이 다하기까지 의복과 음식과 탕약과 침구를 공양하고, 열반에 든 뒤에는 남김없이 큰 탑을 세우고, 등을 켜고, 사르는 향과 바르는 향과 가루 향과 꽃다발과 산개(繖蓋:비단으로 만든 삿갓)와 번당(幡幢:佛前에 꾸미는 旗)을 공양하면, 아난아, 뜻에 어떠하냐.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해서 공덕이 많이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아난이 아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수가타(修伽陀:善逝)여.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해서 많은 공덕이 생합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염부제는 그만두고서 서쪽의 구야니(瞿耶尼:수미산의 서쪽에 있는 大洲)는 길이와 너비가 8천 유순으로서 그 섬은 반달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사람의 얼굴도 그러하다. 그 안에는 수다원과 나아가 벽지불 등이 가득하기를, 비유컨대 자림과 대 숲과 갈대 숲과, 혹은 삼밭과 논이 조밀하여 비지 않음과 같다. 이와 같이 아난아, 이 구야니에는 수다원과 나아가 벽지불 등이 남김없이 가득 차 있는데, 만약 한 사람이 있어 모양과 목숨이 다하기까지 의복과 음식과 탕약과 침구를 공양하고 열반에 든 뒤에는 남김없이 큰 탑을 세우고 연등(燃燈)과 사르는 향과 바르는 향과 꽃다발과 의복과 산개와 번당 등을 공양하면 아난아, 뜻에 어떠하냐.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해서 공덕을 생함이 많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아난이 아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수가타여.”“아난아, 구야니주(瞿耶尼洲)는 그만두고서 동쪽으로 불우체(弗于逮:수미산의 동쪽에 있는 大洲)는 길이와 너비가 9천 유순으로 그 섬은 둥글어 만월과 같고 사람의 얼굴도 그러하다. 그 안에는 수다원과 나아가 벽지불 등이 가득하기를, 비유컨대 자림과 대 숲과 갈대 숲과, 혹은 삼밭과 논이 조밀하여 비지 않음과 같다. 이와 같이 아난아, 이 불우체에 수다원과 나아가 벽지불이 가득한데 만약 한 사람이 있어 모양과 목숨이 다하기까지 의복과 음식과 탕약과 침구를 공양하고 열반에 든 뒤에는 남김없이 큰 탑을 세워 연등과 사르는 향과 바르는 향과 꽃다발과 의복과 산개와 번당 등을 공양하면 아난아, 뜻에 어떠하냐.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해서 공덕을 생함이 많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아난이 아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수가타여.”“아난아, 동쪽의 불우체주(弗于逮洲)는 그만두고서 북쪽의 울단월(鬱單越)은 길이와 너비가 십천 유순으로 그 땅은 모가 나고 사람의 얼굴도 또한 그러하다. 그 안에 수다원과 나아가 벽지불 등이 가득하기를, 비유컨대 자림과 대 숲과 갈대 숲과, 혹은 삼밭과 논이 조밀하여 비지 않음과 같다. 이와 같이 아난아, 울단월은 수다원과 나아가 벽지불이 가득한데 만약 한 사람이 있어 모양과 목숨이 다하기까지 의복과 음식과 탕약과 침구를 공양하고 열반에 든 뒤에는 남김없이 큰 탑을 세워 연등과 사르는 향과 바르는 향과 꽃다발과 의복과 산개와 번당 등을 공양하면 아난아, 뜻에 어떠하냐.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해서 공덕을 생함이 많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아난이 아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수가타여.”“아난아, 북쪽의 울단월주는 그만두고서 제석천(帝釋天)이 머무는 곳인 천궁(天宮)에는 큰 비각(飛閣)이 있는데 상승전(常勝殿)이라고 이름한다. 8만 4천의 높은 누각이 둘러싸고 8만 4천의 푸른 유리의 기둥이 있다. 진금(眞金)의 보배 그물로 그 위를 덮고 금 새끼줄의 방울 달린 그물을 사면에 펴서 쳤다. 금은의 보배 모래와 전단의 향수와 온갖 하늘 꽃이 그 땅에 넘쳐흘렀다. 8만 4천의 아름다운 장식의 창틀은 비유리의 보배와 인다라니의 보배와 파리의 보배와 연꽃 빛깔의 보배 등으로 사이가 장엄되어 있다. 8만 4천의 계단과 깊은 순청(純靑)의 유리를 합성하였다.아난아, 만약 믿음이 깨끗한 선남자와 선여인이 있어서 제석의 천궁에 있는 다락이 높은 비각, 상승보전과 같은 것을 백천 구지를 지어서 사방의 스님들에게 베풀고, 만약 또 사람이 있어서 여래가 반열반한 뒤에 개자(芥子)와 같은 크기와 같은 사리를 취하여 아마라자 크기와 같은 탑을 짓고, 바늘의 크기와 같은 찰간을 올리고, 노반(露盤)은 대추나무 잎의 크기와 같고, 부처의 형상은 보리 알 크기와 같게 조성하면, 이 공덕은 앞에 설한 것은 백분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만억분, 나아가 승기수분(僧祗數分:無數)으로서 하나도 미칠 수 없는 곳이며, 나누고 나누어도 서로 미칠 수 없음이 비유가 미칠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여래는 무량하기 때문이다.아난아, 이와 같은 공덕은 그만두고서 이 염부제와 서쪽의 구야니와 동쪽의 불우체와 북쪽의 울단월과 대해와 수미와 그리고 철위산과 사바세계를 부수어서 가는 티끌을 만들어 이를 차례로 헤아려 남김없이 이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이라면 만약 깨끗한 믿음의 선남자와 선여인이 있어서 모양과 목숨이 다하기까지 공양하고, 만약 멸도(滅度)한 뒤에 탑을 일으켜 공양하면, 뜻이 어떠하냐. 이 선남자와 선여인이 복을 받음이 많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수가타여.”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있어서 부처가 열반한 뒤에 크기가 개자와 같은 사리를 취하여 크기가 아마라자와 같은 탑을 짓고, 바늘의 크기와 같은 찰간을 올리고, 대추나무 잎 크기와 같은 노반과 보리 알 크기와 같은 불상을 지으면 앞에서 설한 바 이 공덕은 백분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난아, 만약 이 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지 않으면 이 공덕의 모임이 얻는 복의 과보는 사바세계의 미진수를 다하여서야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과 화락천왕(化樂天王)과 도솔타천왕(兜率陀天王)과 삼십삼천왕(三十三天王)이 된다. 하물며 다시 전륜성왕(轉輪聖王)이겠느냐.”
2. 여래계품(如來界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 바가바께서 열반에 든 뒤 찰간을 일으키고 탑을 세우며 불상을 지어 공양하면 공덕의 복된 과보는 말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다. 미진(微塵)의 산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아난아, 여래는 희유하고 불가사의하다. 무슨 까닭인가. 경계를 삼고 성품을 삼음이 불가사의하다. 보리를 삼고 증득(證得)함이 부가사의하다. 공덕을 삼고, 법을 삼음이 불가사의하다. 이익을 삼고 일을 지음이 불가사의하다.아난아, 어떠한 것이 곧 여래의 경계인가. 어찌하여 여래가 경계를 삼는 것이 불가사의한가. 아난아, 일체의 중생에게 음(陰)과 계(界)와 입(入)이 있다. 뛰어난 상의 종류와 안팎이 나타남은 비롯함이 없는 시절로부터 서로 이어지고 흘러와서 법은 얻는 바가 지극히 밝고 오묘하고 선하다. 이곳은 혹은 마음과 의식이 반연하여 일어나지 못하며, 크고 작은 생각의 분별이 반연하여 일어나지 못하며, 바르지 않은 생각이 반연하여 일어나지 못하는 곳이다.만약 바르지 않은 생각과 서로 떠나면 이 법은 무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무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 법은 12유분(有分:12因緣)을 일으키는 인연이 아니며, 만약 12유분을 일으키는 인연이 아니면 이 법은 상이 없다. 만약 이 상이 없으면 이 법은 짓는 바가 아니다. 생함이 없고 멸함이 없고 덜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것으로서 이는 항상하고, 이는 구원하고, 이는 적멸하고, 이는 머무름이다. 본성은 청정하여 염착함이 없고, 멀리 떠나 때[垢]가 없으며, 번뇌의 껍질을 벗어나 해탈하여 여래의 법과 바르게 수순하고 상응한다.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수를 지나도 서로 떠나지 않고 지혜를 버리지 아니하며, 사량(思量)할 수가 없다. 아난아, 비유컨대 값을 매길 수 없는 여의보주(如意寶珠)와 같다. 밝은 옥을 다듬어 장엄하면 사랑할 만하고 밝고 깨끗하다. 그 몸은 둥글고 깨끗하여 더러운 때가 없으며, 이를 더러운 진흙 속에 버려 백천 겁을 지나도 이를 지난 뒤에 사람이 있어 줍고, 줍기를 마치고 깨끗하게 씻어서 지키고 간직하여 떨어뜨리지 않으면, 이 여의보주는 이미 깨끗하게 씻기었으므로 다시 청정함을 얻고 보물의 종류임을 버리지 않는다.이와 같이 아난아, 일체의 여래는 옛날 인지(因地)에 있으면서 중생의 경계의 청정한 자성도 객진번뇌(客塵煩惱)에 더럽혀짐을 알았으며, 모든 부처와 여래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객진번뇌는 중생의 청정한 경계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번뇌의 때는 밖을 덮고 가릴 뿐이며, 허망한 사유가 쌓고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들은 능히 일체의 중생을 위하여 깊고 오묘한 법을 설하여 번뇌의 장애를 없애리라. 마땅히 하열한 마음을 내지 않고 큰 아량으로 해서 모든 중생에게 대하여 존중하는 마음을 내고 큰 스승의 공경함을 일으키고 반야(般若)를 일으키고 사나(闍那)를 일으키고 대비를 일으키리라.’이 다섯 가지 법에 의지하여 보살은 아비발치(阿鞞跋致:不退轉)의 지위에 들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보살은 또다시 생각하였다.
‘이 번뇌의 때는 힘이 없고 무능하여 근본과 상응하지 않는다. 참된 근본이 없고 의지할 곳의 근본도 없다. 가장 청정한 근본도 없다. 이 까닭에 근본이 없는 허망한 생각과 전도를 익히고 일어나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근본에 의지하여 머무름을 얻는다. 이 근본이 의지할 곳이 없음과 같이 번뇌도 또한 이와 같이 진실로 의지가 없다. 만약 여실하게 알고 바르게 사유하여 관하면 이 모든 번뇌는 어기고 거스르는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나는 지금 마땅히 관하여 모든 번뇌로 하여금 염착하지 않게 할 것이다. 만약 내가 번뇌가 있어도 염착하지 않으면 이를 선재(善哉)라 이름한다. 만약 우리들로 하여금 번뇌의 물들음에 집착하게 하면 어떻게 능히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번뇌의 결박을 풀겠는가. 이 까닭에 나는 지금 마땅히 번뇌를 버릴 것이며, 마땅히 바른 법을 설하여 중생의 결박을 풀 것이다. 만약 번뇌가 있어 생사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고 선근(善根)과 더불어 상승하게 한다면, 이와 같이 번뇌를 나는 마땅히 받아들일 것이다. 중생을 성숙하게 하고 불법을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이다.’이와 같이 아난아, 여래는 인지 안에 있으면서 여실하게 아는 것에 의지하고 진실한 사량을 닦음에 의지하여 여래의 경계에 이르러서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게 되며, 능히 생사에 들어 생사에 윤회하여도 번뇌에 묶이지 아니하여 큰 방편을 밝히고 머무름이 없는 곳의 적정한 열반에 머물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아난아, 이 여래의 경계는 무량하고 무변하지만 여러 가지 번뇌의 껍질에 가리어지고 감추어져서 생사의 흐름에 따라 6도(道)에 뜨고 잠기면서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윤회하는 것을 나는 설하여 중생의 경계라고 이름한다.
아난아, 이 중생의 경계인 생사의 괴로움에서 염리(厭離)을 일으켜 6진(塵)의 욕망을 없애고 8만 4천의 법문과 10바라밀이 거두는 바에 의지하여 보리의 도를 닦는 것을 나는 설하여 보살이라고 이름한다.아난아, 이 중생의 경계의 여러 가지 번뇌의 껍질을 이미 벗어남을 얻어 일체의 괴로움을 지나고 더러운 때를 씻어 없애 끝내 담연(淡然)하고 청정하고 깨끗하여 모든 중생이 보기를 원하는 바가 되고, 미묘하고 으뜸가는 지위이며 일체지의 지위인 일체에 걸림이 없는, 이 안에 들어 머물러 비할 바 없음에 능히 이르고, 이미 법왕의 큰 자재력을 얻은 것을 나는 설하여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如來)ㆍ아라하(阿羅訶:應供)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正遍知)라고 이름한다.아난아, 이 여래의 경계는 세 가지 지위 중에서 모든 곳에 평등하며 모두 다 걸림이 없어 본래 적정하다. 비유컨대 허공을 일체의 빛깔로도 덮지 못하고 채우지 못하며 막지 못하고, 혹은 흙 그릇도, 혹은 은 그릇도, 혹은 금 그릇도 허공의 곳에서는 평등함과 같다. 여래의 경계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세 가지 지위 중에서 모든 곳에 평등하며 모두 다 걸림이 없다.아난아, 일체의 여래는 인지(因地)에 있을 때 여실하게 아는 것에 의지하고 진실한 사량(思量)을 닦음에 의지하여 여래의 경계의 다섯 가지 공덕인 불가설과 두 상이 없음과 하나와 다름[一異]을 지나침과 크고 작은 생각의 경계를 지나침과 모든 곳이 한 맛인 것을 관하였다. 보살은 보기를 마치고 중생의 상을 없앴으며, 법의 다른 상을 없앴으며, 큰 결박의 상을 없앴고, 걸림이 없는 지혜에 의지하여 중생이 상속하는 중에서 여래의 경계를 관하였는데 기이한 생각이 일어났다.‘돌재(咄哉)라, 중생은 여래가 곧 중생의 몸 안에 있어도 이치와 같이 여래를 보지 못한다. 이 까닭에 나는 갈래를 갖추어 거룩한 도를 설하여 비롯함이 없는 결박의 상이 덮이고 가린 것을 열어서 풀고, 여러 중생으로 하여금 거룩한 도의 힘에 의하여 결박된 상을 깨뜨리고 없애게 하며, 스스로 능히 이치와 같이 여래가 진실로 평등함을 밝혀 보도록 하리라. 무엇을 인하여 이와 같은가. 일체의 중생은 집착의 상에 묶이어 여래를 알지 못하고 여래를 얻지 못하며 여래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아난아, 여래는 옛날 인지(因地)에 있으면서 여래의 경계를 관하고 명료하게 통달하여 온갖 법이 다 평등하고 같음을 바르게 깨달아 위없는 미묘한 법륜을 바르게 굴리고 정직하게 거룩한 제자의 무리를 성숙시켜 무량하고 무변하게 공경하며 둘러싸여 남음이 없는 청량한 열반에 머물러서, 나아가 세계가 끝나고 다하기까지 중생을 버리지 않고서 이익된 일을 한다.아난아, 이 여래의 경계는 자성이 깨끗하기 때문에, 중생의 곳에서 다른 상이 없기 때문에, 극히 평등함을 따라서 청량하고 윤택하게 가장 오묘하고 부드럽고 현명한 그와 상응한다. 아난아, 비유컨대 물의 경계와 같아서 자성이 맑고 부드러우며 일체의 약초와 수목을 능히 거두고 능히 윤택하게 하며 능히 키운다.이와 같이 아난아, 일체의 모든 부처는 인지 중에 있으면서 여래의 경계에 의지하여 선근을 닦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였다. 이 일을 위한 까닭에 와서 삼계(三界)에 들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나타낸다. 이 모든 보살들의 태어남과 늙음 등의 괴로움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미 여실하게 여래의 경계를 보기 때문이다.아난아, 비유컨대 부호인 장자에게 외아들이 있는 것과 같다. 단정하고 총명하여 보호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아끼며 우러러보며 기르고 지키어 잠시도 정을 버리지 않았다. 이 아이는 어리고 작아서 생각이 없이 즐거움을 탐하여 똥과 쓰레기와 주검의 썩는 냄새가 가득한 곳인 크고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 아이의 어머니와 다른 친족[眷屬]은 아이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오, 슬픈 일이다’라고 하며 놀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괴로워하였다. 이 모든 권속이 슬피 운다고 하여도 몸은 힘이 없어 겁에 질려 이 깊은 구덩이에 들어가 아이의 괴로움을 구하지 못한다. 이때 장자가 빨리 뛰어서 돌아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무거워 더러운 냄새를 싫어하지 않고 스스로 구덩이 속에 들어가 아들을 붙들어 끌어냈다.이와 같이 아난아, 나는 이 비유를 지어서 실다운 뜻을 나타낸 것이다. 말한 주검과 똥의 구덩이라고 하는 것은 삼계에 비유하며, 그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범부의 중생을 비유하며, 어머니와 다른 친족은 성문과 연각을 비유한다.
이 2승(乘)의 사람은 모든 중생이 유류(有流)에 뜨고 잠기며 생사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서 근심하고 아프게 한탄하고 가엾이 여긴다 하여도 힘이 없어 능히 구출하지 못한다. 부호인 장자란 곧 이 보살이다. 청정하고 때가 없어 더럽고 흐린 마음이 없으며 이미 능히 일찍이 없던 공부(功夫)를 밝히고 보았으며, 생사의 냄새가 더러운 곳에 들어와서 몸을 받아 나타내어 중생을 구제한다.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의 대비는 희유하여 말로 설하지 못한다. 삼계를 뛰어넘어 모든 결박을 벗어났지만 다시 삼계에 들어가 세 가지 존재의 생을 받는다. 구화구사라(漚和拘舍羅:善巧方便)에 의하여 반야바라밀을 거두어 지니고 번뇌가 있다 하여도 더럽히지 못하며, 바른 법을 널리 설하여 중생의 괴로움을 없앤다. 아난아, 이와 같이 여래의 경계는 큰 위신력이 있고 변함과 다름이 없으며, 유화하고 윤택하기 때문이다.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아난아, 이 중생의 경계는 이 모든 거룩한 것의 성품으로서 닦음이 없고 닦지 아니함도 없고 행도 없고 행하지 않음도 없으며, 마음도 없고 마음의 법도 없으며, 업도 없고 과보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 이곳에 들 수가 있다. 이 성품은 평등하고, 이 성품은 다른 상이 없으며, 멀리 떠남이며, 수순함이며, 광대하며, 밝고 맑다. 아난아, 어찌하여 이 성품은 곧 모든 거룩한 것의 성품인가. 일체의 거룩한 법은 이로 반연하여 이루어짐을 얻고, 일체의 거룩한 사람은 이 성품에 의지하고 인하여 나타남을 얻으며,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를 설하여 모든 거룩한 것의 성품이라고 한다.아난아, 나는 지금 여래의 성품을 말하였다.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수를 넘는 모든 여래와 함께하지 않는 진실이 이 법으로부터 나와서 나타냄을 얻는 것을 여래의 경계라고 이름한다. 바른 설법을 믿고 즐기며 깊은 맛을 사랑하고 중하게 여겨서 모든 성현된 사람의 계(戒)와 정(定)과 혜(慧)의 몸을 성취함을 얻는다. 이 까닭에 이 법을 이름하여 법신(法身)이라 한다.이 법은 서로 거두어서 서로 떠나지 않으며, 지혜를 버리지 아니하고 이해함이 있지 않아도 이는 의지할 것이며, 이는 지닐 것이며, 이는 속할 곳이다. 혹은 법이 서로 거두지 않고 서로 떠나고 지혜를 버리고 이해함이 있어도 또한 이는 의지할 것이며, 이는 지닐 것이며, 이는 속할 곳이다.
이 까닭에 나는 설한다. 일체의 법장은 변화함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여여(如如)라고 한다. 전도함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실제(實際)라고 한다. 일체의 상(相)을 지나치면 이름하여 적멸이라고 한다. 성인이 행하는 곳이며 분별이 없는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에 제일의(第一義)라고 이름한다.아난아, 이 여래의 경계는 유(有)가 아니며 무(無)도 아니다. 물드는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다. 자성은 때가 없어 청정함과 상응한다.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아난아, 어찌하여 여래의 경계가 불가사의하다 하는가. 아난아, 이 여래의 경계는 때가 있는 땅에 있으면서 깨끗함과 깨끗하지 않은 법이 일시에 함께 있으며, 이곳은 사유(思惟)할 수가 없다. 매우 깊은 이치에 의하여 해탈을 얻는다. 아라한을 이루고 벽지불을 이루는 것은 그 경계가 아니다. 아난아, 두 가지 법이 있는데 통달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는 자성이 청정한 법계로 통달하지 않아야 한다. 둘은 번뇌의 때와 장애로 통달하지 않아야 한다. 오직 아비발치(阿鞞跋致:不退轉)의 보살은 법과 상응하여 능히 듣고 능히 받고 능히 지닌다. 모든 보살과 성문과 연각은 부처의 말을 믿기 때문에 이 법을 알게 된다. 아난아, 여래는 이 경계의 성품을 불가사의하다 한다.”
3. 보리품(菩提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 모든 부처님 바가바는 샘이 없는[無漏:煩惱가 없음] 경계에 있고 모든 장애를 길이 다하였고 전(轉)과 의(依)가 적정하고 밝고 맑다. 이 위없는 보리는 열 가지 갈래와 상응한다.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들을 열 가지라고 하는가. 하나는 자성이며, 둘은 인연이며, 셋은 의혹의 장애이며, 넷은 지과(至果)이며, 다섯은 불사(佛事)를 지음이며, 여섯은 서로 거두는 것이며, 일곱은 행하는 것이며, 여덟은 항상 머무르는 것이며, 아홉은 함께하지 아니함이며, 열은 사유하지 않아야 함이다.아난아, 무엇을 이름하여 보리의 자성이라 하는가. 10지(地)와 10바라밀로 도리와 같고 사랑함과 같게 출리의 도를 닦아 얻는 바 전(轉)과 의(依)는 적정하고 밝고 깨끗하여 성문과 연각은 그 경계가 아니다. 이를 이름하여 곧 보리의 자성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 경계가 아직 번뇌의 껍질을 없애지 못한 것을 나는 설하여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하며, 지극히 청정한 것을 이를 전의의 법이라고 이름한다.
네 가지 상이 있다. 하나는 생하고 일어나는 반연인 까닭이며, 둘은 멸하고 다하는 반연인 까닭이며, 셋은 아는 바 법과(法果)를 바르게 익혀 사량하기 때문이며, 넷은 가장 청정한 법계의 체(體)이기 때문이다.무엇을 생하고 일어나는 반연이라고 이름하는가. 일체의 세상을 떠나서 여래를 상속하는 것, 이것이 보리의 도가 생하고 일어나는 반연의 곳이다. 무엇을 멸하고 다하는 반연이라고 이름하는가. 3품(品)의 번뇌의 근본 종류인 이 법에 의지하고 인하여 길이 멸하고 다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는 바 법과(法果)인가. 이미 바르게 아는 바인 진여에 통달하여 과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법계의 체라고 이름하는가. 모든 상(相)의 결박을 없애고, 가장 깨끗한 법계가 나타나는 바이기 때문이다. 아난아, 이것이 전의(轉依)의 상이다. 이 전의는 곧 부처님 바가바의 위없는 보리이기 때문에 보리의 성품이라고 이름한다.아난아, 네 가지 법이 있어 위없는 보리를 얻는 인(因)의 지음이 된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하나는 마하연(摩訶衍)의 법을 원하여 즐겨 닦는 것이다. 둘은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다. 셋은 허공의 삼매문(三昧門)을 깨뜨리는 것이다. 넷은 여래의 대비를 닦는 것이다. 아난아, 네 가지 미혹이 있어 보리의 과(果)를 장애한다.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하나는 대승의 법을 버리고 어기는 것이다. 둘은 아견에 집착하는 삿됨이다. 셋은 생사의 괴로움을 두려워함이다. 넷은 다른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행하지 않음이다. 아난아, 네 가지 보리의 위없는 승과(勝果)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하나는 가장 깨끗함이며, 둘은 진아(眞我)이며, 셋은 묘락(妙樂)이며, 넷은 항상 머무름이다.이때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기를 마치고 무리가 모인 가운데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굽혀 공경하고 부처님 발에 정례(頂禮)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서 게송을 설하며 말하였다.
깊고 깊은 도리를 능히 설하고 능히 설하며
길이 유류를 건너 물러서지 아니하고
이미 원결(怨結)의 모든 두려움을 지났습니다.
때문에 저는 머리 조아려 구담(瞿曇)을 향하여 묻습니다.
어떠한 법이 곧 보리의 인(因)이옵니까.
무엇을 이름해 장애라 하고, 과(果)라고 이름합니까.
오직 바라오니 자선(慈善)의 대비존(大悲尊)이시여
저희들 가엾게 여기시어 분별하여 설하여 주십시오.
이때 세존께서는 불러 말씀하셨다.
“착하도다. 아난아, 능히 여래에게 깊고 깊은 큰 뜻을 물었다. 너는 많은 중생의 이익을 행하고자 하는 까닭이며, 사람과 하늘로 하여금 도를 얻어 안락하게 하고자 하기 위함이니, 너는 지금 자세히 듣고 지극한 마음으로 우러러 공경하고 믿고 받아라.”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즐겨 듣고자 합니다.”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세간 중에는 3품(品)의 중생이 있다. 하나는 집착이 있는 것이며, 둘은 집착이 없음이며, 셋은 유무(有無)에 집착하지 않음이다. 집착이 있음에는 또 두 가지가 있다. 하나의 열반의 도를 배반하여 열반의 성품이 없고 열반을 구하지 않고 생사를 원하고 즐긴다. 둘은 나의 법 중에서 우러러 갈구함을 내지 아니하여 대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아난아, 이들 중생은 부처의 제자가 아니다. 부처님은 큰 스승이 아니며, 귀의(歸依)할 곳이 아닌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이미 어리석고 눈이 어두운 곳에 머물러 있어 반드시 험하고 두려운 큰 어둠 속에 떨어진다.
광야(曠野)의 땅에서 다시 검고 더러운 가시나무가 빽빽한 숲에 들고, 생사의 결박으로써 뒤의 경계를 짓고 천제(闡提)의 그물에 떨어져 스스로는 나오지 못한다. 집착을 끊어 없앤 자에게도 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행에 방편이 없는 것이고, 둘은 행에 방편이 있는 것이다.행에 방편이 없는 것에는 또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불법 밖에 아흔여섯 가지의 배움이 다른 외도가 있고, 지라가파육파(支羅歌波育婆) 등과 같다. 둘은 불법 중에 있으면서 능히 믿는 마음이 생하여도 굳게 아견(我見)에 집착하여 바른 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이 사람까지를 저 외도와 같다고 설한다.
또 증상만(增上慢)의 사람이 있다. 불법 중에 있으면서 공을 관하고 유무(有無)의 견해를 낸다. 이 진실로 공한 자는 위없는 보리에게로 곧바로 향하는 하나의 도인 깨끗한 해탈문(解脫門)으로서 여래는 밝고 뚜렷하게 열어 보이고 바르게 설한다. 그 중에서 공의 견해를 내는 것을 나는 고칠 수 없다고 설한다.아난아, 만약 사람이 있어 아견(我見)에 집착함이 수미산의 크기와 같아도 나는 놀라지 않으며, 또 꾸짖지 않는다. 증상만의 사람이 공의 견해에 집착함에 하나의 머리털을 열여섯으로 나눈 것과 같다 하여도 나는 허가하지 않는다. 행에 방편이 있는 것에도 또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성문승(聲聞乘)으로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닦으며, 남을 이익되게 하지 못한다. 둘은 연각승(緣覺乘)으로 조금은 능히 남을 이롭게 하지만 작은 일에 머물러 조금 얻으면 만족하다고 말한다.유무(有無)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최상의 이근(利根)으로서 대승을 수행한다. 이 사람은 생사에 집착하지 않음이 천제(闡提)와 같지 아니하며, 행에 방편이 없음도 외도와 같지 않으며, 행에 방편이 있음이 2승과 같지 않다. 어떻게 행하는가. 생사와 열반계(涅槃界)가 평등하고 일상(一相)임을 관하여 바른 도를 얻어 그 마음을 안정함에 이르고, 머무름이 없는 곳인 청정한 열반에 머물러 생사에 유행(遊行)하여도 오염되지 않으며, 대비심(大悲心)을 닦아 이를 근본을 삼고 뜻과 힘은 높고 굳세어 굳게 움직이지 않음에 머문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약 세 가지 존재에 탐착하고 대승을 비방하면 일천제(一闡提)라고 이름하며, 사정취(邪定聚)1)에 떨어진다. 만약 사람이 무(無)에 집착하여 행에 방편이 없으면 부정취(不定聚)2)에 떨어진다. 또 무(無)에 집착하여 행에 방편이 있는 것도 있다.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지 않고 평등한 도를 행하는 것을 정정취(正定聚)3)라고 이름한다.아난아,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지 않고 평등함을 수행하는, 오직 이 사람을 제외하고서 다른 네 사람이 있다. 하나는 일천제이며, 둘은 외도이며, 셋은 성문이며, 넷은 연각이다. 네 가지 미혹의 장애가 있어 여래의 법신(法身)과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지 못한다. 무엇을 넷이라고 하는가.대승을 버리는 것은, 이는 천제(闡提)4)의 장애이다. 이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나는 보살의 수행을 믿고 즐기는 대승의 참다운 법을 설한다. 모든 곳에 있어서 아견(我見)에 집착함은 이 외도의 장애이다. 이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나는 보살의 수행인 반야바라밀의 법을 설한다. 생사(生死) 중에서 싫어하고 두려워하며 피곤한 것은 이는 성문(聲聞)의 장애이다. 이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나는 허공삼매문(虛空三昧門)을 깨뜨리는 것을 설한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등지고 작은 일로 만족한다 함은 이는 연각(緣覺)의 장애이다. 이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나는 보살의 수행인 대비(大悲)를 설한다. 이 네 가지 사람에게는 네 가지 미혹(迷惑)이 있다. 이 미혹함을 없애기 위해 네 가지 거룩한 도를 설한다. 이 뛰어난 도로 인하여 4전도(顚倒)를 고치고, 능히 여래의 위없는 가장 오묘한 법신의 네 가지 덕(德)의 바라밀5)의 과(果)를 증득하게 한다.아난아, 색(色) 등의 모든 법은 남김없이 모두가 무상함에도 항상하다는 생각을 낸다. 모든 법은 모두가 괴로운 것임에도 즐겁다는 생각을 낸다. 모든 법은 나[我]가 없음에도 나라는 생각을 낸다. 모든 법은 부정함에도 깨끗하다는 생각을 낸다. 이것을 전도라고 이름한다. 색(色) 등은 곧 무상(無常)이며, 괴로움이며, 무아(無我)이며, 부정(不淨)이라고 관하면 전도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이 전도가 아닌 것을 가져, 만약 여래의 묘덕법신(妙德法身)을 관하면 곧 전도를 이룬다. 이 전도를 다스리기 위하여 나는 여래의 법신의 네 가지 덕을 설한다.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하나는 상주바라밀(常住波羅蜜)이며, 둘은 안락바라밀(安樂波羅蜜)이며, 셋은 진아바라밀(眞我波羅蜜)이며, 넷은 청정바라밀(淸淨波羅密)이다.아난아, 일체의 법부는 안으로 5음(陰)을 집착하여 전도된 견해를 일으켜 무상(無常)함 중에 있어서 항상하다는 견해를 낳고, 내가 없는 중에서 내가 있다는 견해를 낳고, 깨끗하지 않음 중에서 깨끗하다는 견해를 낳는다.아난아, 여래의 법신은 곧 일체종지(一切種智)의 경계이기 때문에 성문과 연각은 여래의 법신을 관찰하지 못하고, 전도된 수행을 뽑아 끊지를 못한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여래의 법신은 가장 뛰어나고 항상 머무는 것이라고 마땅히 닦아 익혀야 함에도 항상 머무는[常住] 닦음을 등지고 무상(無常)의 수행에 머문다. 여래의 법신은 가장 으뜸이며, 오묘한 즐거움의 수행을 등지고 괴로움의 수행에 머문다. 여래의 법신은 가장 뛰어난 참다운 나[眞我]의 수행에 머문다. 여래의 법신은 가장 뛰어난 청정이라고 마땅히 수습해야 함에도 청정한 수행을 등지고 청정하지 않는 수행에 머문다. 이로 인하여 전도된 수행은 성문과 연각이 머무는 도(道)로서, 이 여래 법신의 네 가지 덕의 길이 이르는 곳이 아니다. 이 까닭에 법신의 항상하고 즐겁고 참다운 나이며, 청정함은 그 경계가 아니다.아난아, 만약 중생이 있어서 여래의 말을 믿고, 능히 법신의 항상함과 즐거움과 참다운 나임과 청정함을 보면 이 중생은 전도의 마음이 없어서 참되고 바른 견해를 낳는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전도의 수행은 성문과 연각이 머무는 도로써 이 여래 법신의 네 가지 덕의 길이 이르는 곳이 아니며, 이 까닭에 법신의 항상하고 즐겁고 참다운 나이며 청정함은 그 경계가 아니다.아난아, 만약 중생이 있어서 여래의 말을 믿고, 능히 법신의 항상함과 즐거움과 참된 나임과 청정함을 보면, 이 중생은 전도의 마음이 없어서 참되고 바른 견해를 낳는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아난아, 여래의 법신은 곧 참으로 항상하고 즐겁게 참된 나이며 청정한 바라밀(波羅蜜)이다. 만약 중생이 있어 뛰어나고 오묘한 도로 인하여 여래의 몸을 관하면, 이들 중생은 밝음[明]으로부터 밝음[明]으로 들어가고 안온한 곳으로부터 뛰어난 즐거움의 곳에 이른다. 이는 부처의 참된 아들로서 부처가 마음으로 사랑하고 생각하며, 부처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부처를 성취함을 얻고 법으로부터 화생(化生)함을 얻어 법재(法財)의 분을 얻는다.아난아, 일천제(一闡提)인 사람은 바른 법을 버리고 등지고서 생사의 더러운 냄새를 깊은 마음으로 탐하고 즐긴다. 이 미혹(迷惑)을 없애기 위하여 나는 대승을 수행하고, 바라고 즐김을 설하며, 이 법에 의지하고 인하여 가장 청정한 열매를 얻게 한다.아난아, 일체의 외도는 아견(我見)을 삿되게 집착하여 취하고 탐착함을 낸다. 색(色)이 없고 다툼이 없는 까닭에, 3세(世)의 부처님은 일체의 곳에 미치고, 나는 설하여 곧 참된 나라고 이름한다. 이 모든 외도는 안으로 5음(陰)을 집착하여 아견(我見)을 일으켜 마음이 평안하고 쾌락한다. 이 미혹을 깨뜨리기 위하여 이 까닭에 나는 반야바라밀을 수습할 것을 설하며, 이 법에 의지하고 인하여 참된 나의 열매를 얻게 한다.아난아, 성문의 사람은 생사를 두려워하고 괴로움이 없어지는 곳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낸다. 이 집착을 없애기 위하여 나는 허공삼매문(虛空三昧門)을 깨뜨리는 것을 수습함을 설하며, 이 법에 의지하고 인하여 세간과 출세간의 분을 구족한 즐거움의 바라밀의 열매를 얻게 한다.아난아, 연각의 사람은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관찰하지 못하여 모든 중생과 화합하여 머물지 못한다. 홀로 있어 사유함으로써 마음이 편안하고 쾌락한다. 이 집착을 없애기 위하여 나는 보살의 대비를 수습함을 설하여 이 법에 의지하고 인하여, 항상 시방에 두루하여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익된 일을 짓고자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항상 머무르는 바라밀의 열매를 얻게 한다.아난아, 이 네 가지 덕에 의하여 일체의 여래는 실로 법계(法界)를 헤아리며,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지 않음이 큰 허공과 같으며, 공계(空界)의 가장 구경을 닦아서 3제(際)를 지나 길이 안주한다.아난아, 일체의 아라한과 벽지불과 대지(大地)의 보살은 네 가지 장애 때문에 여래의 법신의 네 가지 덕의 바라밀을 얻지 못한다.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하나는 낳는 연(緣)의 미혹이며, 둘은 낳는 인(因)의 미혹이며, 셋은 유(有)가 있음이며, 넷은 무(無)가 있는 것이다.무엇이 낳는 연(緣)의 미혹인가. 곧 이는 무명이 머무는 땅이다. 일체의 행을 낳는 것이 무명의 업을 낳음과 같다.
무엇을 낳는 인(因)의 미혹이라고 하는가. 이는 무명이 머무는 땅이 낳는 바인 모든 행이다. 비유컨대 무명이 낳는 바인 모든 업과 같다.
무엇이 유(有)의 있음인가. 무명이 머무는 땅을 연(緣)으로 하고 무명이 머문 땅에서 일어나는 바인 샘이 없는[無漏] 행을 인(因)으로 하는 세 가지 뜻을 낳는 몸[意生身]이다. 비유컨대 네 가지 취함[四取]을 연으로 하고, 세 가지 샘이 있는 업을 인으로 하여 세 가지 유(有)를 일으킴과 같다.무엇이 무(無)의 있음인가. 세 가지 뜻을 낳는 몸을 연(緣)한, 깨달아 알 수 없는 미세한 멸에 떨어지는 것이다. 비유컨대 세 가지 유로 연하여 그 중에서 생각생각에 노사를 낳음과 같다. 무명이 머무는 땅, 이는 일체의 번뇌가 의지하는 곳으로 아직 끊어 없애지 못하는 까닭에 모든 아라한과 그리고 벽지불과 자재한 보살은 번뇌의 때, 습기의 더러운 냄새가 멸하고 다한 구경의 크게 깨끗한 바라밀을 지극하게 봄을 얻지 못한다.무명이 머무는 땅을 인하여 경상의 미혹을 낳고 허망한 행이 있어 아직 없애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음이 없고, 행함이 없는 지극히 적멸한 대아(大我)의 바라밀을 지극히 봄을 얻지 못한다. 무명이 머무는 땅을 연으로 하고, 미세한 허망함이 일어나는 샘이 없는 업을 인으로 하여 뜻이 낳는 모든 쌓임[陰]이 아직 다하여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극히 적멸하여 멀리 떠난 큰 즐거움의 바라밀을 지극히 봄을 얻지 못한다. 만약 이 모든 여래의 감로계인, 일체 번뇌의 모든 업의 생난(生難)을 길이 다하고 남음이 없음을 얻지 못하면, 곧 변하기 쉬운 죽음과 흐름이 끊어져 멸함이 무량하여, 변하고 다름이 지극히 없는 크게 항상하는 바라밀을 지극히 봄을 얻지 못한다.아난아, 삼계(三界) 중에 네 가지 난이 있다. 하나는 번뇌의 난이며, 둘은 업의 난이며, 셋은 생보의 난이며, 넷은 과실의 난이다. 무명이 머무는 땅이 일으키는 바인 방편의 생사는 삼계 안의 번뇌의 난과 같다. 무명이 머무는 땅이 일으키는 바인 인연의 생사는 삼계 안의 업의 난과 같다. 무명이 머무는 땅이 일으키는 바인 유가 있는 생사는 삼계 안의 생난(生難)과 같다. 무명이 머무는 땅이 일으키는 바인 무(無)가 있는 생사는 삼계 안의 과실의 난과 같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아난아, 네 가지 생사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 가지 뜻을 낳는 몸에는 항상하고 즐거우며 나이며 깨끗한 바라밀이 없다. 오직 부처님의 법신만이 이 항상하고 즐거우며 나이며 깨끗한 바라밀임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아난아, 여래의 법신의 크게 깨끗한 바라밀에는 마땅히 두 가지가 있음을 알라. 자성(自性)의 청정함은 곧 그의 통하는 상이며, 때가 없는 청정함은 곧 그의 다른 상이다. 큰 나[我]인 바라밀에는 마땅히 두 가지가 있음을 알라. 일체 외도의 삿된 집착을 멀리 떠난다. 항상하는 내가 있다고 하는 견해의 허망함을 지나 나왔기 때문이다. 2승(乘)의 이치를 헤아리는 잘못된 집착을 멀리 떠난다. 항상하는 내가 없다고 하는 허망함을 지나 나왔기 때문이다.
큰 즐거움의 바라밀에는 마땅히 두 가지가 있음을 알라. 괴로움이 모이는 근본을 끊고 습기의 얽매임을 푼다. 즉 능히 일체의 괴로움이 멸하는 것을 증득하여 뜻을 낳는 모든 쌓임[陰]을 뽑아 없애어 다하는 까닭이다. 크게 항상하는 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라. 이미 무상(無常)한 모든 행을 훼손하고 줄이지 않아 단견(斷見)을 지나 나왔기 때문이다. 또 항상 머무는 열반을 더하고 불리지 않는다. 상견(常見)을 지나 나왔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행의 무상함을 헤아리면 이를 단견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열반이 항상 머무는 것을 헤아리면 이를 상견이라고 이름한다. 네 가지 미혹의 장애를 다스리고 4전도(顚倒)를 되돌리면 항상함과 즐거움과 나임과 깨끗함을 그 참다운 열매라 한다.아난아, 무엇이 이 보리(菩提)를 이익되게 하는 일인가.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분별이 없는 지혜이며, 둘은 분별함이 없는 다음의 지혜[後智]이다. 이 두 가지 지혜에는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며, 둘은 남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다. 무엇이 스스로의 이익인가. 해탈신(解脫身)을 원만하게 하여 깨끗한 법신을 지니고, 번뇌의 장애와 일체 지혜의 장애를 멸하는 것, 이를 스스로의 이익이라고 이름한다. 분별함이 없는 지혜는 능히 이 법을 이룬다. 무엇을 남의 이익이라고 하는가. 분별함이 없는 다음의 지혜로부터 나아가 생사의 경계를 다하기까지 사량(思量)을 짓지 않고 두 가지 몸을 나타내어 설법함이 그침이 없으며, 틈 사이가 없고 무량하여 3악도에 나고 죽는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일체 중생을 안정하게 하고자 하기 위하여 선도(善道)에 놓고 3승의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 이를 남의 이익이라고 이름한다.또 다음으로 스스로의 이익은 세 가지 공덕의 분과 서로 떠나지 않는다. 하나는 샘이 없음이며, 둘은 변만(遍滿)함이며, 셋은 무위(無爲)이다. 또 다음으로 남의 이익은 네 가지 공덕의 분(分)과 서로 떠나지 않고 중생을 뽑아 구제하여 네 곳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 하나는 망견(妄見)과 어리석음의 미(迷)한 의혹이며, 둘은 괴로움의 길과 악한 길에 떨어지는 길이며, 셋은 질투심과 원수를 맺는 마음으로써 바른 가르침을 깨뜨리는 것이며, 넷은 하열(下劣)한 마음으로써 소승을 탐하여 즐기는 것이다. 아난아, 이 두 가지 일인 자기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흥하게 하는 것이 이 보리의 일이다.아난아, 무엇을 보리가 상응(相應)하는 법이라고 이름하는가. 위없는 보리는 곧 진실의 상으로서 열아홉 가지 법은 그와 상응한다. 하나는 불가사량(不可思量)이며, 둘은 미세(微細)함이며, 셋은 진실이며, 넷은 매우 깊은 도리(道理)이며, 다섯은 불가견(不可見)이며, 여섯은 어려움을 통달함이며, 일곱은 항상함[常]이며, 여덟은 있음[在]이며, 아홉은 고요함[寂]이며, 열은 항상함[恒]이며, 열하나는 청량(淸凉)함이며, 열둘은 변만(遍滿)함이며, 열셋은 분별이 없음이며, 열넷은 집착[着]이 없음이며, 열다섯은 걸림[礙]이 없음이며, 열여섯은 수순(隨順)함이며, 열일곱은 집착[執]하지 아니함이며, 열여덟은 큰 깨끗함이며, 열아홉은 맑고 맑음이다. 이 열아홉의 법은 위없는 보리와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 까닭에 보리가 상응하는 법이라고 이름한다.아난아, 무엇이 이 보리가 행하는 곳인가. 세 가지 도리로써 세 가지 몸[三身]을 나타낸다. 하나는 매우 깊은 도리이며, 둘은 넓고 큰 도리이며, 셋은 만덕(萬德)의 도리이다. 아난아, 제1신(身)은 다섯 가지 상과 다섯 가지 공덕과 상응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 상인가. 하나는 무위(無爲)이며, 둘은 서로 떠나지 않음이며, 셋은 두 변(邊)을 떠남이며, 넷은 일체의 장애를 벗어남이며, 다섯은 자성이 청정함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 공덕인가. 하나는 헤아리지 못함이며, 둘은 셈하지 못함이며, 셋은 생각하기 어려움이며, 넷은 함께하지 않음이며, 다섯은 구경의 청정함이다.제2신(身)은 법신이 맑게 흘러 나타나는 바, 일체의 무량한 여래의 공덕은 큰 반야(般若)와 대비를 체(體)로 하여 다섯 가지 공덕과 상응한다. 하나는 분별의 상이 없음이며, 둘은 공용의 마음이 없음이며, 셋은 중생의 뜻에 맞추어 이익을 지음이며, 넷은 법신과 서로 떠나지 않음이며, 다섯은 항상하고 반연하여 한 때라도 중생을 버리지 않음이다.제3신(身)은 반야와 대비의 깨끗한 흐름이 나타내는 바인 색종(色種)을 체로 하여 네 가지 공덕과 상응한다. 하나는 32상이며, 둘은 80종호이며, 셋은 위덕이며, 넷은 힘이다. 능히 모든 중생의 근기와 욕망과 성품과 행에 있어서 서로 거두고 서로 응하여 더러운 불토에서 여러 가지 본생사(本生事)를 나타낸다. 혹은 또 도솔천에 오르는 것을 나타내며, 혹은 또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나타낸다. 혹은 또 신(神)을 어머니의 태에 내리는 것을 나타내며, 혹은 처음으로 태로부터 나는 것을 나타낸다. 혹은 구마라(俱摩羅)의 지위를 나타내고, 혹은 18명처(明處)를 배우는 것을 나타낸다. 혹은 여러 후원(後園)에서 희롱하며 노는 것을 나타내고, 혹은 출가(出家)함을 나타내고, 혹은 고행을 나타낸다. 혹은 도량을 찾고, 혹은 불도를 이루고, 혹은 파라나(波羅那)에서 오묘한 법륜을 굴리며, 혹은 견고림(堅固林)에서 열반에 드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일을 나타내어 나아가서는 생사의 다음 경계까지를 다한다. 아난아, 위없는 보리는 세 가지 몸을 거두어 다한다. 이 까닭에 이름하여 보리의 행하는 곳이라고 한다.아난아, 무엇이 위없는 보리가 항상 머무는 법인가. 이 항상 머무는 것에는 두 가지 법이 있고, 때문에 인연을 짓는다. 하나는 나지 않고 멸하지 않음이며, 둘은 그침이 없고 다함이 없음이다. 이를 보리가 항상 머무는 법이라고 이름한다.아난아, 무엇이 이 위없는 보리가 함께하지 않는 상(相)인가. 함께하지 않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알지를 못함이다. 모든 범부와 성문과 연각은 통달하지 못하며 그 경계가 아니다. 둘은 얻지 못함이다. 부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으로 얻는 자가 없다. 이 함께하지 않는 법에 다섯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여(如如)의 이치가 매우 깊은 까닭이며, 둘은 자재(自在)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때문이며, 셋은 청정하고 샘이 없는 경계가 거두는 바이기 때문이며, 넷은 모든 앎의 곳에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은 중생의 이익된 일을 함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리의 함께하지 않는 상이라고 이름한다.아난아, 무엇이 이 위없는 보리를 사유(思惟)하지 못함인가. 여섯 가지 인(因)이 있는 까닭에 사유하지 못한다. 하나는 언어(言語)를 지나친 경계이며, 둘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거두는 바이며, 셋은 이미 크고 작은 생각과 분별의 사유를 지났으며, 넷은 비유할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며, 다섯은 일체의 법에 있어서 가장 상품이기 때문이며, 여섯은 생사(生死)와 열반의 곳에서 안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위없는 보리를 사유하지 못한다고 이름한다.아난아, 어찌하여 여래는 위없는 보리를 불가사의라 하는가. 아난아, 모든 여래가 위없는 보리의 곳에 머무름에는 다섯 가지 인연의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있다. 무엇을 다섯이라고 하는가. 하나는 자성(自性)이며, 둘은 곳[處]이며, 셋은 머무름[住]이며, 넷은 하나[同一]와 다름[異]이며, 다섯은 이익이다.아난아, 어찌하여 여래는 보리의 자성이 불가사의하다 하는가. 색에 즉하여 이 여래는 얻지 못하며, 색을 떠나서도 이 여래는 얻지 못한다. 느낌(受)과 생각과 행과 알음알이도 또한 이와 같다. 땅의 경계에 즉하여 이 여래는 얻지 못하며, 땅의 경계를 떠나서도 이 여래는 얻지 못한다. 물과 불과 바람의 경계도 또한 이와 같다. 유의 법에 즉하여 이 여래는 얻지 못하며, 무의 법도 또한 이와 같다. 이를 보리의 성품이 불가사의하다고 이름한다.아난아, 어찌하여 여래는 보리의 곳이 불가사의하다 하는가. 여래는 욕계(欲界)에 있으나 불가사의하며, 욕계를 떠나도 역시 불가사의하다.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도 또한 이와 같다. 여래는 사람 가운데 있으나 불가사의하며, 사람 가운데서 떠나도 또한 불가사의하다. 6도(道)도 또한 이와 같다. 여래는 동쪽에 있으나 불가사의하고 동쪽을 떠나도 역시 불가사의하다. 시방도 또한 이와 같다. 이를 이름하여 곳의 불가사의라고 한다.아난아, 무엇으로 여래는 이 보리의 머무름은 불가사의하다 하는가. 아난아, 안락(安樂)한 머무름은 여래의 머무름의 불가사의이다. 적정한 머무름은 여래의 머무름의 불가사의이다. 마음이 있는 머무름은 여래의 머무름의 불가사의이다. 마음이 없는 머무름은 여래의 머무름의 불가사의이다. 이와 같이 범주(梵住)와 성주(聖住)는 여래의 머무름의 불가사의이다. 이를 머무름의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아난아, 어찌하여 여래는 하나와 다름의 불가사의라 하는가. 3세(世)의 여래는 한 곳에 있으면서 머문다. 무엇이 한 곳인가. 자성이 청정한 샘이 없는 법계이다. 이것이 모든 여래의 혹은 하나이며, 혹은 다름의 불가사의이다. 이를 하나와 다름의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아난아, 어찌하여 여래는 이익된 일의 불가사의라고 하는가. 이와 같은 여래는 한 법계에서 평등하고 지혜와 신통력과 바른 정근(精勤)과 위덕(威德)이 남김없이 모두 평등하여 샘이 없는 청정한 법계에 머문다. 모든 여래들은 이 구르고 의지함에 인하여 능히 중생에게 무량한 이익을 이룬다. 이를 이익의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또 다음으로 불가사의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언설(言說)로 할 수 없음이다. 언어의 경계를 지나는 까닭이다. 둘은 일체의 세간을 나옴이다. 세간 중에서는 비할 것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
또 다음으로 진여(眞如)는 근본이 물들지 아니하며, 끝도 때 묻고 더럽혀짐이 없는 것이 불가사의이다. 아난아, 이를 보리의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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