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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924 불설광박엄정불퇴전륜경(佛說廣博嚴淨不退轉輪經) 3권

by Kay/케이 2024.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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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불설광박엄정불퇴전륜경(佛說廣博嚴淨不退轉輪經) 3

 

광박엄정불퇴전륜경 제3권


지엄 한역
김두재 번역



“또 아난아, 어째서 여래께서는 보살마하살을 사다함이라고 이름하셨는가?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지혜를 따르고 배워서 보리(菩提)는 인연을 따라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아느니라. 인연이 없는 지혜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나니, 갖가지 인연으로써 머무르는 곳이 없는 선정[禪]을 구하며,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여 번뇌의 법을 태워 버릴 수 있으며, 모든 번뇌를 태워 버렸으므로 부처님의 평등법(平等法)을 증득하느니라.
얻을 수 없는 법을 구하되, 마치 불(佛)ㆍ아라하(阿羅訶)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와 같나니, 비록 중생을 해탈시켰더라도 중생을 동요하지 않으며, 동요하지 않는 중생계(衆生界)를 구하느니라.
모든 중생들이 지혜의 마음이 적고 엷어서 근심하고 걱정하며 고뇌하면서 법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중생들로 하여금 지혜에 머물러서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게 하느니라.
근(根)ㆍ역(力)ㆍ각도(覺道)ㆍ해탈(解脫)ㆍ삼매(三昧)에 대하여 스스로 먼저 깨닫고 난 뒤에 중생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부처님의 지혜와 소가용지(所可用智)를 구하게 하느니라.
능히 도량에 이르러 이 지혜를 증득하고 부처님의 지혜와 불안(佛眼)을 구하느니라. 이것은 불가사의하여 장애가 없는 눈이니, 항상 이 눈으로써 세간을 이익되게 하며, 이 지혜의 눈을 구하였기 때문에 지혜 가운데에서도 뛰어난 지혜와 소가용지를 구하며, 모든 법은 여여(如如)하여 또한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아 아느니라.
이 지혜와 소가용지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이런 지혜에 머물게 하나니, 이른바 일체 법에 머무르지 않는 지혜이니라.
이러한 일 때문에 이 사이에 왔나니, 여기에 와서는 중생계를 보되, 이것은 불가사의한 경계라고 아느니라. 이 경계를 구하지만 이 경계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중생이 어느 곳으로부터 태어났겠느냐? 중생이 태어나는 곳을 알지도 못하면서 중생계를 쫓으므로
차별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으니, 법계와 중생계를 관찰할 때에 이러한 차별상(差別相)을 보지 않으면 중생계가 다 법계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리라.
법계는 곧 평등한 도이며, 불법의 도는 곧 중생이니, 이러한 도는 얻을 수도 없어서 중생은 평등지의 도와 같다고 아느니라. 이러한 비교할 데 없는 지혜를 구하기 때문에 이 지혜는 청정하여 번뇌의 때를 여의었느니라.
이 지혜는 얻을 수도 없으며 또한 이 지혜로써 구할 수도 없으니, 이 지혜는 곧 아는 바가 없는 지혜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이 지혜 때문에 차별상이 생기지만 그 지혜도 얻을 수 없거니와 이 지혜를 구하기 위해 이 세간에 왔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일 때문에 보살마하살을 사다함(斯陀含)이라 이름하였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기 위해 게송을 설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 따르고 배우니
그 지혜는 가장 으뜸이네.
부처님 지혜 구하는 까닭에
이것을 사다함이라 이름하였네.

설한 바 갖가지 인연법
모두 보리에서 생겨나니
이와 같은 인연 위하여
이 세간에 오네.

설한 바 머무름 없는 선정[禪]
모든 번뇌 태워 없애나니
그런 까닭에 이 세간에 와서
이러한 선정 만들어냈네.

과거에 얻지 못했던 법
일체지(一切智)의 수행법을
나 또한 구하기 위해
이 세간에 왔다네.

모든 중생 움직이지 않으며
법계도 역시 이와 같으니
움직여 옮겨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런 까닭에 이 세간에 왔네.

고통 받고 번뇌하고 지혜 없으며
근심하고 걱정하는 모든 중생들
이와 같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한량없는 지혜에 머물게 하리라.

근(根)과 역(力)과 각도(覺道)와
해탈(解脫)과 선정으로
스스로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여
부처님의 지혜 구하네.

도량에 나아가는 것은
과거 부처님께서도 행하신 바이니
이 법을 구하기 위하여
그런 까닭에 이 세간에 왔네.

이와 같은 지혜 구하고
부사의한 불안(佛眼)을 구하기 위함이며
이와 같은 눈을 구하는 까닭에
이 세간에 왔네.

모든 부처님 세상을 인도하는 스승
교묘한 방편 행하여
이와 같은 지혜 구하니

모든 지혜 가운데 가장 훌륭하네.

모든 소가용지(所可用智)로
모든 법이 여여(如如)함을 알았네.
이 지혜는 얻을 수 없는 것
어떻게 모든 법을 구할 수 있으랴.

수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무상지(無上智)에 편안히 머물기 바라며
다른 이들도 지혜 얻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세간에 왔네.

여기 와서 중생을 보니
그 세계 부사의하네.
그러므로 사다함(斯陀含)이
여기 와서 중생 구제하네.

중생 세계 구한다지만
중생은 얻을 수 없나니
이런 까닭에 비록 와서 구하나
그 또한 알 수 없다네.

모든 중생과
중생의 세계 알지 못하니
만약 능히 이 세계 알면
중생의 차별상을 알게 되리라.

일체 법을 관찰하되
관찰하고 나면 볼 것도 없으니
선정의 마음에 편안히 머물면서
모든 부처님의 법 구하네.

이렇게 청정한 지혜는
더러움 없어 그 성품 청정한 것이네.
이 지혜도 얻을 수 없으니
알아야 할 바를 알 뿐이네.

이와 같아서 중생이
능히 이와 같은 지혜 체득하면
의지함이 없는 보살이라 이름하나니
그런 까닭에 이 세간에 왔네.

아난아, 이런 일 때문에
사다함이라 이름하였나니
지혜 없는 중생들은
이 일을 잘못 분별하네.

아난아, 이런 일 때문에
사다함이라 이름하였나니
부지런히 정진하는 중생만이
마침내 이 일을 깨닫게 되리.

지혜 있는 이는 미묘하고 비밀함을 깨달아
심오한 법에 대해 결정내리니
이와 같은 이치 알면
속히 보리를 성취할 수 있으리.

“아난아, 이와 같이 여래 등정각께서 방편의 힘으로써 성문의 사람들을 위하여 보살마하살을 사다함(斯陀含)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느니라.”
“또 아난아,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는 보살마하살을 아나함이라고 이름하셨겠느냐?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미 분행(分行:세간의 행업)을 초월하여 부처님의 행(行)을 증득하고 일체의 행법(行法)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오고 가는 법이 없음을 아느니라.
모든 법 가운데에는 의지할 대상도 없고 머무르는 곳도 없나니, 그런 까닭에 이 세간에 오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에서 오고 가는 모양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니라.
이미 범부를 초월하여 범부의 생각을 여의었고,
또한 부처님의 생각을 여의고 머무르는 곳이 없는 법을 초월하였으며, 어떤 인연이 있어서 능히 오도록 하는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미 적정(寂靜)한 경계를 체득(逮得)하였기 때문이니라. 모든 부처인 세간 중생을 인도하시는 분이 범부선(凡夫禪)을 설하여 가서 태어나지 않게 하시므로 그는 모든 어려운 곳을 여의고 애욕(愛欲)을 영원히 끊으며, 덩어리 음식[搏食]을 탐내지 않고 음식에 대한 생각을 영원히 끊어서 보리를 체득하였으며, 모든 삿된 견해를 보여 탐내거나 집착하는 것이 없고, 예순두 가지 견해의 성품이 열반(涅槃)과 같음을 알아 여러 가지 번뇌[蓋]의 생각을 여의고, 모든 법 가운데 허물이 되고 근심이 될 만한 것은 다 여의어서 청정하고 때가 없느니라.
교만을 항복받고 무명(無明)의 화살을 뽑아 버리며, 이미 애결(愛結)을 없애고 다시 기뻐하거나 사랑함이 없고, 모든 번뇌를 태워 버리고 모든 생각을 여의었으며, 근심과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리고 교만과 큰 교만을 여의었으며, 모든 음성을 잘 알고 밝은 광명의 비춤을 체득하였으며, 불가사의한 불승(佛乘)을 타고 보살마하살의 성품을 증득하였으며, 욕망의 더러움을 여의고 과거 부처님의 감춰둔 것을 증득하니, 가장 뛰어난 지혜의 창고는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느니라.
일체의 중생승(衆生乘) 가운데 최상인 불승(佛乘)을 증득하며,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을 여의고 모든 의혹을 끊나니,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것들의 법을 성취하여 이 세간에 오지 않기에 아나함(阿那含)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아난아, 보살마하살은 인연 있는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에 머물게 하나니 어떻게 머무는가? 이른바 중생이 곧 보리(菩提)요 보리가 곧 중생이니, 능히 중생의 생각을 깨닫느니라.
왜냐하면 이미 성품이 공(空)함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이며, 중생계가 곧 불가사의한 경계임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능히 이런 생각을 깨달아 중생계가 바로 허공계임을 아느니라.
허공계(虛空界)가 공한 까닭에 중생계를 멀리 여의고 허공계는 허공의 성품을 여의어서 멈추어 머무름이 없으며, 허공계의 허공마저도 공하니, 이와 같은 법으로써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에 회향(廻向)하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중생이 곧 허공계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중생계가 모두 허공계에 들어가니, 어째서인가 하면 중생의 성품과 모든 법의 성품이 각각 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모든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세간에 오지 않나니, 그러므로 아나함이라고 이름하였느니라.
모든 법 가운데 수상(數相)이 없나니, 모든 부처님은 이미 수상을 초월하였느니라.
아난아, 이런 일 때문에 보살마하살을 아나함이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기 위해 게송을 설하셨다.

이미 여의고 다시는 오지 않으며
또 분별 있는 행업 닦지 않나니
이미 분별상 있는 행업 여읜 까닭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오고 가는 모습 잘 알고
모든 법을 의지하지 않네.
적은 처소를 얻었기에
이 세간에 오지 않네.

세간을 인도하는 스승이신 모든 부처님
범부선정[凡夫禪] 설하시어
다시는 저 세간에 가지 않게 하시니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모든 법은 오는 모양도 없고
가는 모습도 얻을 수 없나니
오고 가는 모습 멀리하여 없애면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한다네.

그 사람 다시는 오지도 않고
세 가지 악한 세계로 가지도 않으며
이미 모든 부처님 법 체득했기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모든 욕애 영원히 끊고
덩이 밥을 탐내지 않으며
이미 보리도를 체득했기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이른바 예순두 가지
모든 견처(見處) 있으나
다시는 이런 견처에 머무르지 않나니
그러므로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모든 법은 성품이나 모습도 없으니
이미 성품과 모습 여의고
여실(如實)함을 깨달아 알았으므로
다시는 이 세간에 오지 않네.

열반(涅槃)ㆍ적정(寂靜) 법 설하여
모든 번뇌 태우게 했으니
모든 모습 멀리 여의었기에
이 세간에 오지 않네.

모든 어려운 처소 이미 끊어 버리고
먼지와 때도 멀리 여의어
안온(安隱)한 열반에 이르렀기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이미 악마(惡魔)를 항복받았고
그의 모든 권속도 항복받아서
저들에게 흔들리지 않기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이미 무명의 화살 뽑아 버렸고
또한 모든 애욕의 번뇌 없애서
이미 기쁨과 사랑 깨달아 알았기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모든 번뇌 능히 태우고
모든 생각도 여의었으며
뛰어나고 절묘한 과업 결정했기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근심과 번뇌의 화살 이미 뽑아내고
모든 교만 제거했으며
5음(陰)의 모습 잘 알고 있기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이미 모든 조명(照明)과
부사의한 불승(佛乘) 체득하여
애욕의 더러움 멀리 여의었으니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한다네.

이미 큰 지혜의 창고인
과거 부처님의 창고를 얻어
모든 창고 중에 제일이 되었으니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이미 가장 으뜸가는
모든 부처님의 대승에 편히 머물고
갖가지 의심 영원히 끊었기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인연 있는 모든 중생들
모두 보리에 머물게 했고
저들이 보리에 머무르므로
이 세간에 오지 않네.

모든 세계 공함을 깨달아 알고
중생계(衆生界) 생각지 않네.
이미 이런 생각 여의었기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능히 중생계와
법계가 다 공한 것임을 알아
모든 중생 얻지 않나니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한다네.

그 마음 다시 구하지 않고
모든 생각에 집착하지 않아서
이미 모양 없는 처소에 이르렀기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하였네.

아난아, 이런 일 때문에
이것을 아나함이라 이름했으며
모든 법은 머무름이 없으므로
부처님 법 가운데 머무느니라.

“아난아, 이런 까닭에 여러 등정각께서 방편의 힘으로써 성문의 사람들을 위하여 보살마하살을 아나함이라 하셨느니라.”
“또 아난아, 여래께서는 어째서 보살마하살을 아라한(阿羅漢)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셨겠느냐?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모든 분행(分行)을 여의고 마땅히 부처님의 행(行)을 닦으며, 모든 중생들을 행업에서 구제하여 제도하고 여러 가지 번뇌를 깨뜨리느니라.
번뇌로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하여 마땅히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시키지만 중생에 집착하지도 않고 번뇌의 속박에 집착하지도 않기에 이런 일 하는 것을 아라한(阿羅漢)이라 이름하느니라.
얻을 바 있는 것을 버리고 얻을 바 없는 데에 머무르며, 일체는 공하다고 알지만 이 공한 것마저도 공하다고 알며, 모양 없음을 통달하여
모든 모양을 여의고 일체의 생각을 여의고, 중생이란 생각은 허물되고 걱정이 되는 법임을 깨달아 능히 무지(無智)함을 버리고 무심법(無心法)을 깨달으며, 모든 법이 공함을 밝게 깨달아 마땅히 보리를 체득하고 마땅히 불가사의한 불보리(佛菩提)를 생겨나게 하나니, 이런 일 때문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마땅히 법을 선설(宣說)하되 마치 3세의 부처님께서 이미 설하셨고 지금 설하며 앞으로 설할 법과 같은 법을 설하나니, 그가 설하는 법은 모두가 적정(寂靜)하여 희론(戲論)도 없고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다는 이런 일을 통달하여 알기 때문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마땅히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에 머무르게 하고, 일체 법과 보리는 곧 존재하는 실체가 없어서 취할 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밝게 깨달아 알아서 마땅히 부처님의 자비를 닦고 중생의 자비에 집착하지 않나니, 이와 같은 자비를 중생들에게 두루 베풀되 중생을 얻지 않고, 이미 중생을 얻지 않는 자비를 체득하였기 때문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마땅히 모든 법을 설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서도 법이니 법이 아니니 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모든 법에 대하여 마땅히 항상하여 과거에 있었던 것이라고 아나니,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마땅히 중생들을 위하여 근(根)ㆍ역(力)ㆍ각도(覺道)를 설하되, 이 법에 대하여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마땅히 세간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길러 주되 탐내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마땅히 중생들을 위하여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이롭게 하고 길러 주는 법을 설하나니, 이런 법을 설하는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마땅히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가서 모든 부처님을 보되 부처님께서 부처님을 보듯이 하며, 이와 같이 부처님 세계를 보고 나서는 마땅히 발심(發心)하여 이와 같은 세계를 구하나니, 이른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세계이며,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이며, 무등등(無等等)한 세계이며, 가없는 세계이며, 희론(戲論)이 없는 세계이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세계이며, 모습이 없는 세계이며, 작용이 없는 세계이며,
물러나지 않는 세계이며, 부처님의 어리석은 말이 없는 세계이며, 보살 세계이며, 장애가 없는 세계이며, 더러움이 없는 세계이며, 마군을 항복받는 세계이며, 원적(怨敵)이 없는 세계이며, 필경의 열반 세계이니, 이 모든 세계는 일체의 세계 가운데 최상의 세계이다. 마땅히 이와 같은 세계를 구하기 때문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생겨나지 않는 모든 법을 마땅히 생겨나게 하고 일으키는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탐욕에 물들지 않고 성낼 만한 법에 대하여 성내지 않는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위없는 멸(滅)과 집(集)의 지혜를 속히 통달하는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아라한인 까닭에 보리라고 이름하고, 보리인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보리는 움직이지 않고, 중생계를 움직이지도 않기 때문에 마땅히 백천만억 중생들로 하여금 보살도에 머물게 하며, 정녕 보살도에 머무는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일체 중생과 보리는 분별이 없는 데서부터 생겨나니, 마땅히 이러한 평등법(平等法)으로써 모든 중생들을 가르치는데, 이 평등법은 모든 법 중에서도 같을 것이 없으며, 이 평등한 보리는 분별이 없는 데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은 법을 알며, 이와 같은 법을 알고 난 뒤에는 중생들을 위하여 설하되 늘지도 줄지도 않나니, 늘지도 줄지도 않는 법을 성취한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마땅히 이와 같은 음성(音聲)을 여읜 법을 설하는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마땅히 이와 같은 많은 중생의 집착을 풀어 주나니, 이른바 중생은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집착이고, 중생은 단멸하여 없어진다거나 항상 존재한다는 집착이며, 중생의 몸이라는 견해를 일으키는 집착이고, 초월하지 못한다는 집착이다. 모든 법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함도 없고 작용도 없다고 보는 집착이며, 색(色)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집착이고, 수(受)ㆍ상(想)ㆍ식(識)ㆍ행(行)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집착이다. 범부법을 여의었다는 집착이고, 모든 불법을 건립한다는 집착이다.
수다원과를
생각하는 집착이고, 사다함과를 생각하는 집착이며, 아나함과를 생각하는 집착이고, 아라한과를 생각하는 집착이며, 벽지불과를 생각하는 집착이고, 여러 등정각을 생각하는 집착이며, 보리심을 생각하는 집착이고, 보리를 닦기 위하여 보시를 해야 한다는 집착이며, 보리를 행하기 위해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집착이고, 진에(瞋恚)의 생각이 남아 있는 채로 인욕을 행한다는 집착이며, 게으른 생각을 지닌 채로 정진한다고 하는 집착이고, 혼란한 마음의 생각을 지닌 채로 선정에 든다는 집착이다. 악한 지혜의 생각이 남아 있는 채로 지혜를 닦는다는 집착이고, 부모ㆍ아내ㆍ자식ㆍ권속ㆍ형제ㆍ자매에 대해 모든 친척을 사랑한다는 집착이며, 모든 친척을 사랑하는 생각으로 보려는 집착이다.
이야기하기를 즐거워하는 집착이며, 번뇌법(煩惱法)과 출요법(出要法)1)은 두 가지라는 견해를 일으키는 집착이고, 이것은 재가(在家)이며 이것은 출가(出家)라는 견해를 일으키는 집착이며, 범부법(凡夫法)을 여의어야 한다는 집착이고, 불법을 인연해야 한다는 집착이며, 하열한 법이다 최상의 법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는 집착이고, 모든 모습을 구족(具足)하는 것이 방편이라는 집착이며, 불세계(佛世界)에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내는 집착이니, 마땅히 중생들의 이와 같은 집착을 없애는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또한 ‘이 중생은 곧 열반법이고 이 중생은 열반법이 아니다. 이 중생은 능히 법을 생(生)하는데 이 중생은 법을 생하지 않는다. 이 중생은 보리를 수행하는데 이 중생은 보리를 수행하지 않는다. 이 중생은 계율을 지키는데 이 중생은 계율을 무너뜨린다. 이 중생은 복이 많은데 이 중생은 복이 적다’는 분별을 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견해[二見]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또한 ‘이 중생은 곧 복전(福田)인데 이 중생은 복전이 아니다. 이 중생은 정진(精進)하는데 이 중생은 정진하지 않는다. 이 중생은 소소한 범인이요 이 중생은 지혜가 밝다. 이는 여인이요 이는 남자며, 이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이것은 옳은 법이요 이것은 그른 법이다’라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견해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아라한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또한 ‘이 중생은 보리(菩提)에서 물러나고 이 중생은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이 중생은 보리에 자재(自在)함을 증득했는데 이 중생은 보리에서 자재함을 얻지 못했다. 이 중생은 보리에 가깝고 이 중생은 보리에 멀다’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 ‘나는 기어코 보리를 증득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대략 설하여 중생들의 모든 집착을 제거해 주는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하느니라.
아난아, 아라한은 이와 같이 중생의 집착을 제거한 뒤에 다시 중생을 위하여 중생의 진실한 성품을 설하나니, 이와 같은 법을 설하는 까닭에 보살마하살을 아라한이라 이름하였느니라.”
그때 세존께서는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하여 게송을 설하셨다.

이미 모든 것 다 버리고
여러 가지 분별행[分行]도 버리니
분별행을 버린 까닭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능히 모든 번뇌와
괴로움과 중생의 매듭[結:惑] 끊어
모두 해탈을 얻게 하므로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얻을 수 있는 법 멀리 여의고
얻을 수 없는 법에 머물러
일체 법 모두 공한 것임을 알기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이미 공(空)의 이치 깨달아 알고
또한 모습이 없음도 통달하여
일체의 모습 멀리 여의니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마땅히 가장 뛰어난 수행인
모든 부처님께서 행한 바를 행하여
세간의 여러 중생들을
나고 죽는 커다란 험난에서 해탈시키네.

이미 일체의 모습 다 여의고
중생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
모든 생각 버린 까닭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지혜롭지 못한 생각 모두 버리고
무심(無心)한 법 통달하여
이미 공(空)한 법 알았기 때문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마땅히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한 보리를 체득하고
부지런히 정진(精進)을 행하기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마땅히 모든 법은
청정하여 희론(戲論)이 없음을 선설(宣說)하여
중생들을 도에 머물게 하기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마땅히 두루 인연한 자비로써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지만
중생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마땅히 모든 법 설법하니
숱한 법 중에 가장 으뜸이어라.
법이다 법이 아니다 하는 생각 없으니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마땅히 모든 중생 위하여
근(根)ㆍ역(力)ㆍ각지(覺支)의 도 설하되
이 법에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나니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마땅히 다른 중생들로 하여금
청정한 법 깨달아 알게 하고
또한 보리까지 생하게 하니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마땅히 세상 사람 유익하다 생각하는 것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이양(利養)을 탐하지 않는 까닭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마땅히 모든 부처님의
엄숙하고 청정하고 미묘한 세계
여러 부처님 머무는 곳에 가서
중생 위해 설법을 하네.

마땅히 이 마음 내어
이렇게 엄숙하고 청정한 세계 구하면
이런 세계 구하는 까닭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탐욕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성냄의 처소에서도 성내지 않나니
보리의 평등함 깨달았기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이미 멸(滅)과 집(集)의 지혜에서
적멸한 모습 통달하였으니
보리의 도이기 때문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모든 중생계(衆生界)에서
중생을 움직여 옮겨가지 않게 하며
수많은 억 중생들로 하여금
빠짐없이 보리도(菩提道)에 머물게 하네.

중생과 보리에 대해
분별하는 마음 일으키지 않나니
이러한 평등법 알고 있기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모든 법 가운데
이 법이 가장 으뜸이니
중생법과 평등법에서
분별상 일으키지 않네.

알고 나서 다른 이 위해 설법하여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게 하지만
또한 이 법에서 생겨나나니
그런 까닭에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마땅히 이 중생들 위해
음성(音聲)이 없는 법 설하여
숱한 중생 해탈시키고
흔들림이 없게 하네.

중생은 얻을 수도 없고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두 가지 극단도 없으니
모든 사견(邪見) 제거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많은 괴로움 해탈케 하네.

모든 법의 생멸(生滅)에 집착하지만
작용도 없고 조작하는 모습도 없는 것을
고뇌하는 여러 중생은
모습으로 분별한다네.

색(色)을 무너뜨리지 않고
수(受)도 또한 그러하니
상(想)ㆍ행(行)ㆍ식(識)에 대한 집착
이러한 모든 집착 여의게 하네.

이 범부법에 대하여
견해 내어 움직여 옮겨 다니고
머물러야 할 불법(佛法)에 머물지 않는
이런 중생을 해탈시키네.


모든 과보에 대한 생각에 머물며
연각의 생각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기에
중생 위해 설법하면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집착까지 여의게 하네.

보리심에 집착하고
보시에 집착함도 또한 그러하며
계율과 인욕에 집착하는 이 위해
집착 없는 법 설해 주었네.

게으른 생각 없애고
부지런히 정진하되
정심(定心)2)과 난상(亂想)3)
약한 지혜와 미묘한 지혜를 분별하네.

이 법은 분별 없으니
갖가지 모습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마땅히 이와 같이 설법하기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나라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고
성문(聲聞)에 대해 많은 분별하면
이러한 분별 없애게 하기 위해
마땅히 저들 위해 설법하네.

부모와 처자에 대해
지혜 없기에 탐하고 집착하네.
이런 도는 보리 아니니
이는 나고 죽는 행업을 안정하기 때문이라네.

이것은 나의 형제요
자매라 하여 사랑하는 생각을 내니
저러한 탐애 제거하므로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교묘한 담설(談說)하면서
다른 이에 대해 기쁘고 용렬한 마음 일으키고
마음 내어 보고자 하면서
예부터 친했던 바라 하네.

만약 서로 만나기만 하면
엎치락뒤치락 애욕 내어 집착하나니
지혜 없어 전도(顚倒)된 까닭에
마군에 소속되어 자재하지 못하네.

모든 이양(利養) 멀리 여의고
이양 때문에 생기는 허물과 걱정 깨닫고서
마땅히 모든 중생 위하여
이양의 허물 설하여 주네.

이것은 곧 번뇌법(煩惱法)이요
이것은 곧 출요법(出要法)이라는
이런 두 가지 견해에 집착 않으면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이양만을 탐하고 집착하면서
스스로 알지 못하니
저런 집착 제거하기 때문에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네.

이것은 곧 재가법(在家法)이요
이것은 곧 출가법(出家法)이라는
중생들 이런 분별 일으키므로
마땅히 저들의 집착 풀어 주리라.

모든 법 가운데
하열하고 우수함을 보고
이것은 도의 그릇이요 이것은 도의 그릇 아니라고 집착하므로
마땅히 이와 같은 집착 풀어 주리라.

범부법 멀리 여의고
부처님 법을 인연해야 한다고 하나니
마땅히 저들 위해 설법하여
얻는다 얻지 못한다 하는 집착 여의게 하네.

크고 작은 견고하지 못한 법
이와 같이 매우 많으니
마땅히 중생들의 이와 같은 모습에 대한
집착을 풀어 주어야 하리라.

여러 가지 상호(相好)를 내는
그런 일 매우 많으니
오직 조유(調柔)만이
저런 생각 없앨 수 있네.

모든 부처님의 미묘한 세계

깨끗하게 만들 마음 일으켜
저런 세계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나니
마땅히 제거해 없애야 하리라.

열반이다 열반 아니다 하는 생각과
능히 생겨나게 한다 생겨나게 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보리도를 행한다 해도
이는 보리를 구할 수 없네.

이것은 악한 계율이요 이것은 선한 계율이라 하고
이는 복이 있고 이는 복이 없다고 하며
어리석은 모든 중생들
갖가지 모습을 일으키네.

이와 같은 모든 중생들
갖가지 생각 많이 일으키다니
이런 생각 없애기 위하여
마땅히 저들 위해 설법하리라.

이는 곧 훌륭한 복전(福田)이요
이는 훌륭한 복전 아니라고 하며
어리석은 법이니 지혜로운 법이니 하고 분별하는
그런 일 또한 매우 많다네.

여자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또한 남자라 분별하며
이것은 성인이요 이것은 성인이 아니라고
분별하여 두 가지 견해 일으키네.

중생은 지혜로운 마음 없어서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일으키나니
이 두 가지 견해에 집착하는 것
마땅히 제거하여 끊어 주리라.

물러남이다 물러남이 아니다
유기(有記)다 무기(無記)다
이것은 보리에 가깝고
이것은 보리에 가깝지 못하다고 하며

이미 보리를 체득하여서
필경 반열반에 이르렀다고 하나니,
이상과 같은 모습 행하여
열반에 대한 분별심 내네.

오직 조유선(調柔善)만이
중생들의 이런 생각 없애나니
이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하며
또한 생각 없앤 이라 이름한다네.

이것은 곧 보살법이니
아라한이라고 이름한다 설하였네.
만약 이 본래의 인연 깨달으면
이가 곧 아라한임을 알리라.

“아난아, 이와 같이 여러 등정각께서는 방편의 힘으로써 성문의 사람들을 위하여 보살마하살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느니라.”
“또 아난아, 여래께서는 무엇 때문에 보살마하살을 성문(聲聞)이라 이름한다고 하셨겠느냐?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부처님 법의 소리ㆍ불가사의한 법의 소리ㆍ적정(寂靜)한 보리법의 소리ㆍ희론(戲論)이 없는 법의 소리ㆍ때 없이 깨끗한 소리에 대하여 한량없고 끝없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듣게 하는 까닭에 성문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열반, 곧 비교할 데 없는 법과 안락(安樂)한 법의 소리와 염처(念處)ㆍ
정근(正勤)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각지(覺支)의 도법에 대한 소리를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빨리 부지런히 구하게 하므로 성문이라 이름하느니라.
이 몸은 공(空)한 것이어서 견고(堅固)한 법이 아니요 견고하다는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인데, 범부(凡夫)들이 어리석고 소심해서 이 몸을 탐하고 집착하므로 알게 하기 위해 소리에 대하여 설해 주고, 또 눈이 경계를 보는 것도 허망한 것임을 설하여 마땅히 불안(佛眼)과 불가사의한 눈이 생기게 해 이러한 눈으로써 수많은 중생들한테 어리석고 미혹한 소리가 없게 하며, 또 모든 법은 어떤 모습도 생기게 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설하므로 성문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음성(音聲)이란, 비유하면 메아리와 같아서 마땅히 소리에 대하여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아야 하나니, 듣는 이도 없고 또한 말한 이도 없기 때문이며, 냄새에 대하여 냄새를 맡는다는 생각을 내지 않아야 하나니, 냄새를 맡는 이도 냄새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꿈에서 갖가지 숱한 냄새를 맡았을지라도 실제는 아무 냄새도 없고 또한 냄새를 맡은 이도 없는 것인데 전도(顚倒)되어 냄새를 맡았느니 냄새라느니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냄새도 마치 꿈속의 일과 같아서 믿을 만한 것도 아니요 또한 견고한 것도 아니니, 이런 법을 설하는 까닭에 성문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혀와 맛도 마치 고깃덩이와 같은 것이어서 맛을 알지 못하나니, 이와 같은 고깃덩이는 마치 거품 덩어리와 같아서 실제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맛의 생각은 불가사의하고 맛의 경계는 무심(無心)하므로 모든 심법(心法)을 여의어 마땅히 마음을 생기게 하지 않나니, 마음은 곧 머무르는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은 법의 소리를 설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듣게 하므로 성문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이 법에 대하여 눈앞에 나타난 것을 또렷이 보아 그 본 바와 같이 음성으로 선설하며, 또 이 몸은 공한 것이어서 성품이나 모습이 없으니, 모습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또한 생겨날 것도 없다고 설하느니라.
수많은 중생들을 위하여 이 보리법의 소리를 설하므로 성문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뜻과 법은 공(空)한 것이어서 존재하는 실체도 없고 또한 자성(自性)도 없으니, 그것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설하느니라. 이러한 법의 소리를 설하므로 성문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불가사의한 법시(法施)를 설하자면 이 법은 능히 보리를 얻게 하는데,
보리도 불가사의하고 법시 또한 불가사의하여 불가사의한 보리법을 생겨나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종자와 열매의 관계와 같지만 이 가운데에는 과업이 없나니, 그것은 음성으로 과업을 설할 뿐이기 때문이니라.
또 재물의 보시는 하열(下劣)하고 법의 보시는 가장 으뜸가는 것이라고 설하여 아끼는 마음을 없애되, 분별도 없어야 하고 보시를 했다는 생각도 내지 않아야 하나니, 마치 요술쟁이가 요술로 만들어낸 일에 대하여 분별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분별하는 마음 없이 보시를 행하면 능히 보리를 생기게 할 수 있느니라. 이러한 법의 소리를 설하기에 성문이라 이름하느니라.
이 소리는 일체의 말을 여의고 모든 번뇌를 쉬며, 모든 언설(言說)을 초월하고 모든 물들고 집착함을 여의며, 이 음성으로써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부처님 법을 설하여 펴느니라. 왜냐하면 이 음성은 여러 음성 가운데 가장 으뜸이니, 이러한 음성으로써 부처님 법을 설하여 펴기 때문이니라.
이 소리는 파괴할 수도 없고 또한 의지할 바도 아니며, 두 가지 법도 아니고 분별성도 없는 데에서 생겨나니, 그 생겨난 바와 같이 두 가지 법도 아니요, 분별상도 없는 부처님 법을 설하느니라.
그런 까닭에 아난아,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법의 소리를 중생들로 하여금 듣게 하므로 성문이라 이름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하여 게송을 설하셨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가장 으뜸인 부처님 법의 소리를
중생들로 하여금 듣게 하므로
보살을 성문이라 이름한다네.

수많은 중생 위하여
보리의 적멸법(寂滅法) 설하매
청정하여 희론(戲論) 없으니
이것을 성문이라 이름한다네.

열반의 즐거운 설하여 펴니
그 즐거움은 비할 데 없고
또한 적멸한 모습 설하기에
이것을 성문이라 이름한다네.

염처(念處)와 정근(正勤)과
근(根)ㆍ역(力)과 각지(覺支)의 도 설하여
빠르게 이 법 생기게 하는 까닭에
이것을 성문이라 이름한다네.

이 몸은 공한 것이니
견고함을 얻을 수 없다 선설하였고
모든 범부와 소인들 위하여
이러한 몸의 모습 나타내 설하였네.

또 눈이 경계[入]에 대하여

보는 것 모두가 허망하다 설하지만
지혜 없는 모든 중생들
여기에 물들어 의혹을 낸다네.

마땅히 부처님의 눈과
생각하기 어려운 평등한 눈 내어
생멸 없는 법 가운데에서도
의혹과 집착 내지 않네.

마치 소리는 메아리 같나니
귀도 또한 그러함을 알리라.
여기엔 듣는 이도 없고
또한 말하는 이도 없다네.

듣고 말하는 이 없는 까닭에
마땅히 물들지도 않고 집착도 않네.
모든 중생들에게 선설하여 보이기에
이것을 성문이라 이름한다네.

마치 사람이 꿈속에서
갖가지 냄새 맡지만
다만 뒤바뀜을 반연하여 일어났을 뿐
실제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네.

마땅히 이같이 코를 알아서
저 향내 맡지 않나니
전도된 중생 위하여
보살은 이런 법 선설한다네.

혀 또한 공하여 없는 것이니
고깃덩이론 맛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네.
만약 고깃덩이가 맛을 알 수 있다면
손으로 만질 때에도 마땅히 알아야 하리.

이와 같은 생각 설하여 펴고
맛의 생각도 과환(過患) 많다 설하니
마땅히 이 맛의 경계 알면
그것은 곧 불가사의한 것이네.

보살은 의지하는 바가 없어서
능히 눈앞에 나타난 일 또렷이 알고
눈앞에 나타난 법 베풀어 말하기에
이것을 성문이라 이름한다네.

이와 같은 몸에 대해
공하여 성품과 모습 없음을 설하여 펴나니,
공하여 성품과 모습 없는 까닭에
생겨나지도 않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네.

보리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겨나지도 않고 생겨나는 것도 없음을
많은 중생 위해 설하기에
성문이라 이름한다네.

뜻과 그 경계의 성품과 모습도
실제는 존재하는 것이 없음을 설하나니
존재하는 법 없음을 설하기에
성문이라 이름한다네.

보시법을 선설(宣說)하되
법시(法施)는 헤아리기 어렵나니
이 보시는 능히
가장 으뜸가는 불보리(佛菩提)를 낸다네.

재시(財施)는 가장 하열(下劣)하고
법시는 가장 뛰어나다네.
간탐(慳貪)하는 마음 없애면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하리라.

모든 설법의 소리 여의고
갖가지 번뇌의 소리 제거하며
여러 물듦과 집착의 소리 여의면
때 없이 청정한 소리라 하네.

가장 으뜸인 미묘한 소리
그 소리의 성품은 고요하고 고요하니
이렇게 고요하고 고요한 소리로써
생각하기도 어려운 불법 설하네.

이 소리는 무너지지도 않고
또한 의지할 것도 없다네.
두 가지 법도 없고 분별도 없음을 설하기에
성문이라고 이름한다네.

이와 같은 음성으로써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셨던 법 설하였으니

음성으로 설한 법 따라
보리도를 구하네.

항상 다른 이 위해 선설하고
부처님 세계 엄숙하고 정화함은
최상의 세간을 인도하시는 스승
모든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곳이기 때문이네.

이 삼천대천세계는
허공처럼 머무는 것이라고 설하나니
허공 같은 모든 중생들
모두가 열반의 모습과 같네.

이른바 마흔네 가지를
중생들은 차별하지만
모두가 허공과 같아
생각할 것도 아니요 분별할 것도 없네.

이 세계 또한 이와 같으니
견고하다는 생각 일으키지 말라.
여기엔 생사(生死)도 없고
멸할 번뇌도 없네.

이 가운데엔 생겨나는 법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나니
이 모두는 고요하고 고요한
까닭에 생겨남을 볼 수 없다네.

항상 중생 위해 설하기를
밤낮으로 끊이지 않지만
이런 생각마저도 일으키지 않고
나는 중생 위해 설하네.

성문들 이와 같이 알고서
또한 중생 위해 설하지만
소리도 없고 듣는 이도 없는 까닭에
이것을 성문이라 이름한다네.

그 마음과 뜻 용맹하여
최상법(最上法)을 설해 펴나니
만약 능히 이런 법 알면
모든 법이 여여(如如)한 줄 알게 되리라.

성문의 말 이와 같아서
물듦도 없고 번뇌[有漏]도 없네.
또 많은 중생들 위하여
물들거나 집착 없는 법을 설하네.

만약 물듦 없는 경계 알면
청정하여 희론(戲論) 없어지리니
모든 불법 가운데에선
보고자 해도 볼 수가 없네.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멀어서 볼 수도 없고
가까워도 또한
볼 수 없다네.

성문이 이런 법 설하여
많은 중생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고
이 법 가운데 편안히 머물게 하기에
성문이라 이름한다네.

아난아, 이 일로 인해
나는 이를 성문이라 말하나니
마땅히 이 성문 안다면
이는 곧 의지함이 없는 보살이라네.

“아난아, 이와 같아서 여래 등정각께서는 방편의 힘으로써 성문의 사람들을 위하여 보살마하살을 성문이라 이름한다고 말씀하셨느니라.”
“또 아난아, 여래께서는 무엇 때문에 보살마하살을 벽지불이라 이름한다고 하셨겠느냐?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현재 나타나 있는 일체 법에 대하여 또렷하고 또렷하게 깨달아 안다. 현재 나타나 있는 일체 법을 또렷하고 또렷하게 아는 까닭에
능히 성인의 법을 알고, 모든 법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임을 깨달았으며 현재 나타나 있는 일체 법을 또렷하고 또렷하게 알기 때문에 벽지불이라 이름하느니라.
모든 것은 불가사의한 법임을 깨달아 알고 일체 중생 등은 열반(涅槃)과 같아서 얻을 수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임을 깨달아 아나니, 나는 것도 아니요 사라지는 것도 아니므로 이것은 곧 현실의 경계[實際]요 열반을 비추는 경계[照涅槃際]이며, 중생의 경계[衆生際]요 모든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경계[一切諸法無所有際]이며, 말할 수 없는 경계[不可言說際]이니, 언설에 의지하지도 않고 언설로는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언설의 법은 공(空)한 것이어서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언설(言說)로는 중생의 경계와 법의 경계가 현재에 나타나 있는 일체 법을 또렷하게 알 수 없나니, 이런 경계를 알면 벽지불이라 이름하느니라.
현재 보이는 색음(色陰)은 언설에 불과하기 때문에 색음이라 이름하나니, 이 색음에는 언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언설까지도 여의었기 때문이니라. 다만 언설로써 색음이라 이름할 뿐 이 가운데에는 나니 내 것이니 하는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말과 말하는 이,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한 것이어서 자재(自在)함을 얻을 수 없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사라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언설로써 알 수 없거늘 어떻게 이것을 색음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또한 이와 같아서 또렷하고 또렷하게 현재에 나타나 있느니라.
현재에 나타난 식음(識陰)은 언설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식음이라고 이름하지만, 이 식음은 언설도 없고 또한 언설까지도 여읜 것이니라. 그러므로 다만 언설로 식음이라고 이름할 뿐, 이 가운데에는 나와 내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말과 말을 하는 이,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한 것이어서 자재함을 얻을 수 없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사라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언설로써 알 수 없거늘 어떻게 이것을 곧 식음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이 5음(陰:蘊)에 대하여 언설의 모든 인연이 또렷하고 또렷하게 현재에 나타나는 까닭에 벽지불이라 이름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음(陰)이라는 언설은 모두가 인연에 대한 것이지만, 이 인연은 연(緣)도 없으므로 연이 아닌 줄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이것이
보살마하살을 벽지불이라고 이름하는 이유이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기 위하여 게송을 설하셨다.

현재 눈앞의 모든 법은
성인의 법과 같음을 알아야 하나니
다툼도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어
필경엔 아무 모습도 없네.

현재 나타난 모든 법
그 성품과 모습 저절로 공한 것이니
만약 스스로 성품과 모습 알고 나면
필경엔 아무런 존재하는 실체 없으리.

이미 현재 나타난 일체의 법과
저 법이 다름없음을 체득하면
이것을 바른 깨달음이라 이름하나니
생각하여 알기 어려운 벽지불이라네.

중생은 열반과 같아
애초부터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시제(始際)도 없고 종제(終際)도 없는 것을
실제(實際)라 이름한다네.

중생은 열반과 같아
필경엔 생겨나는 것도 없나니
만약 법에 생겨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을 열반이라 이름한다네.

중생은 열반과 같아
또한 여러 가지 비추는 작용이 있네.
비추는 작용엔 나라는 것도 없으니
그런 까닭에 열반이라 이름한다네.

중생은 열반과 같건만
갖가지 이름 붙였네.
나는 것도 아니요 소멸하는 것도 아닌데
연설로써 말할 뿐이네.

언설의 성품은 공한 것이니
언설로는 알게 하지 못하네.
또한 알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이 곧 열반이라네.

언설은 자재(自在)하지 못해
나도 없고 마음도 없으며
언설에는 성품도 없는 까닭에
끝끝내 존재하는 실체 없다네.

언설은 경계에 의지하지 않고
또한 머무르는 처소도 없네.
말과 말하는 사람
중생제(衆生際:俗諦)는 생각하기도 어렵다네.

중생제와 열반제(涅槃際:眞諦)는
부사의한 실제이므로
안온(安隱)하여 희론(戲論) 없으니
가장 뛰어난 귀의처(歸依處)라네.

마치 전광(電光)의 경계와 같은
저 중생의 경계
연(緣)도 없고 처소(處所)도 없는
실제를 생각할 수 없네.

일체 법의 끝 경계는
갖가지 이름도 없거늘
이름과 글자로 이름 붙인 까닭에
그 경계는 얻을 수 없네.

실제는 이름할 수도 없고
또한 아는 이도 없네.
중생제엔 나도 없나니
마땅히 이 경계 공함을 알아야 하네.

언설(言說)은 경계에 의지하지 않나니
언설로는 설명할 수 없네.
만약 능히 이런 이치 깨달아 알면
중생제는 있는 것이 아니라네.

언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한 것이라
말로는 모든 경계 알지 못하리.
말과 말하는 사람

중생의 경계 생각키 어려워라.

이와 같은 모든 경계
자연(自然)임을 깨달아 알면
이것을 정각(正覺)이라 이름하나니
벽지불은 생각키 어려워라.

현재에 나타난 색음
이름과 글자로써 말은 하지만
이 음(陰)은 언설이 없어서
항상 언설을 여의느니라.

소지(所知:所知障)를 멀리 여의라.
소지를 계수(計壽)라 이름하나니
능히 이 소지를 알면
본래 머무는 곳도 없다네.

이른바 색음이라 이름하지만
색음엔 본래 나[我]도 없다네.
말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한 것이어서
필경엔 나고 죽음 없다네.

이른바 말의 성품은
필경엔 아무런 존재가 없으니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까닭에
능히 색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네.

수(受)와 상(想)도 이와 같으며
행과 식도 또한 그러하여
언설이 있을 수도 없건만
이것을 5음이라 이름한다네.

이 음(陰)은 말로 할 수도 없고
또한 끊을 필요도 없네.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처소도 없고 덧없는 것도 아니라네.

번뇌도 아니요 출요(出要)도 아니며
과보도 아니요 또한 업장[業]도 아니라네.
취할 것도 아니요 버릴 것도 아니며
희론(戲論)도 아니요 적멸(寂滅)도 아니라네.

사마타(奢摩他)4)도 아니요
비바사나(毘婆奢那)5)도 아니라네.
욕심 많은 것도 아니고 만족할 줄 아는 것도 아니며
게으름도 아니요 정진도 아니라네.

도거(掉擧)6)도 아니고 뉘우침도 아니요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도 없으며
법을 생기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니
가히 계(戒)로 삼을 만하네.

분별 없음을 닦거나
분별 없음을 선설(宣說)하지도 않고
두려움도 없고 다툼도 없으며
얽매임도 없고 풀려남도 없네.

이로써 언설(言說)에 들어가지만
언설은 들어가는 곳이 없네.
언설과 모든 법은
언설로 말한 게 없다네.

스스로 눈앞에 보이는 것 체득하여
다함없는 법 설하나니
이러한 삼매(三昧)에 의지하면
모든 언설에 집착 않으리.

이 눈앞에 나타난 지혜 있어
언설이 평등한 것임을 깨달았네.
언설은 모든 법과 같나니
언설로 말할 수 없네.

이미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것 깨닫고 난 뒤엔
다시는 다른 인연 따르지 않네.
이것을 정각(正覺)이라 이름하나니
벽지불은 생각하여 알기 어렵네.

“또 아난아, 보살마하살은 현재 나타난 무명(無明)과 행(行)은 상(想)을 일으키지 않나니[非生想], 식(識)의 자성(自性)을 알고, 명색(名色)의 자성을 알며,
6입(入)의 자성을 알고, 감촉[觸]의 자성을 알며, 수(受)의 자성을 알고, 애착[愛]의 자성을 알며, 집착[取]의 자성을 알고, 존재[有]의 자성을 알며, 생겨남의 자성을 알고 늙고 죽음의 자성을 아나니, 이러한 법 가운데 또렷하고 또렷하게 나타난 것을 아는 것을 벽지불(辟支佛)이라 이름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하여 게송을 설하셨다.

앞에 나타난 무명(無明)
끝끝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마치 물속의 그림자 같아
마침도 시작도 없는 것이네.

일체 법(一切法) 밝게 깨달아
동요(動搖)하는 모습 없나니
만약 법에 대한 견해 이와 같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명(明)이라 하네.

밝음의 성품 허공과 같으니
모든 법도 다 그러하다네.
만약 이 눈앞에 보이는 이치 깨달아 알면
이것을 벽지불이라 이름한다네.

가령 이 몸의 행 말한다 해도
그것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니
이 몸의 행업도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네.

몸의 행업 파초와 같아
필경엔 견고하지 못하다네.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사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그 성품 마치 허공 같다네.

두려움 없는 여러 보살들
만약 이 앞에 나타난 일의 이치 증득하면
이것을 정각(正覺)이라 이름하나니
벽지불은 생각하여 알기 어렵네.

모든 법 깨달아 알면
그 성품 환상과 같네.
또한 능히 깊은 신심으로 이해하면
그 성품 존재하지 않음을 알리.

이와 같이 식(識) 관찰해 보면
행이 허망한 것임을 알 수 있나니
이런 지혜 아는 까닭에
식(識)의 성품 공한 줄 아네.

이미 지혜와 지혜 아님을 알아
일체의 처소에 물들지 않나니
만약 이와 같은 법 알면
식(識)도 환상과 같네.

모든 것을 명색(名色)이라 말들 하지만
느낌[受] 없으니 말할 수 없네.
그 성품과 모습 알면
필경엔 아무런 실체도 없다네.

모든 경계의 성품을 말하지만
거기에도 취할 모습 없다네.
이와 같이 경계에 대해
그 성품 공한 줄을 안다네.

감촉[觸]의 성품 있지 않은 곳 없어
모든 경계 속에 머물러 있지만
이 감촉도 관찰해 보면
환상과 같아 존재하는 실체 없다네.

감촉의 성품 본래 공한 것인데
분별 때문에 느끼게 되지만
이 모든 감촉의 성품
머무는 곳 방향이 없네.

현재에 나타난 접촉에 대하여
지혜로운 이는 멀리 여의었나니

지혜로워 접촉을 멀리 여의면
이것을 벽지불이라 이름한다네.

느낌[受]의 모습 공한 줄 알면
느낌 또한 자성이 없음을 알리라.
거품과 같아 견고하지 않으니
필경엔 존재하는 실체 없다네.

이미 모든 애착 끊어 버리고
애착 없는 법 깨달아 알아
이미 애착 끊어진 곳 이르게 되면
이것을 벽지불이라 이름한다네.

취(取)를 알아도 취할 게 없으니
이 또한 허무한 것임을 깨달았네.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는 실체도 없으니
더울 때의 염수(炎水)와 같네.

본래 모든 존재하는 생각과
본래 생겨남이 있다는 생각
만약 이런 성품과 생각 알면
필경엔 아무 존재하는 실체도 없으리.

이미 일체의 늙음 여의면
다시는 죽음을 받지 않고
모든 처소에서도
다른 몸 받지 않으리.

앞에 나타나 보이는 것 깨달으면
의지할 것 없네.
그러므로 벽지불이라 이름하나니
모든 보살법을 선설(宣說)한다네.

“아난아, 이와 같이 여래 정등각께서는 방편의 힘으로써 성문의 사람들을 위하여 보살마하살을 벽지불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느니라.
아난아, 이와 같아서 모든 불 여래께서는 보살마하살을 견고한 법ㆍ8인(人:忍)ㆍ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ㆍ성문(聲聞)ㆍ벽지불(辟支佛)이라 이름하셨느니라.”
그때 존자 아난이 게송을 설하였다.

자재하시고 세상을 인도하시는 스승께서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법 설하셨네.
공중에서 만든 매듭과 같아
공(空)에 나아가 풀어야 하리라.

부처님께선 큰 방편 있으셔서
집착 없는 법 설하셨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법
능히 분별하여 말씀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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