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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870 불설개각자성반야바라밀다경(佛說開覺自性般若波羅蜜多經) 1권

by Kay/케이 2024.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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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불설개각자성반야바라밀다경(佛說開覺自性般若波羅蜜多經) 1

 

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1)


태종신공성덕문무황제(太宗神功聖德文武皇帝) 지음



위대하구나,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여. 헤매는 중생들을 교화해 인도하시고, 으뜸가는 성품을 널리 드날리셨도다. 넓고 크고 성대한 언변이여, 뛰어나고 훌륭한 자도 그 뜻을 궁구하지 못하는구나. 정밀하고 은미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여, 용렬하고 우둔한 자가 어찌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있으랴.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현묘한 진공(眞空)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며, 만상(萬象)을 포괄하는 비유는 끝이 없네. 법 그물[法網]의 벼릿줄을 모아 끝이 없는 바른 가르침을 펴셨고, 사생(四生)을 고해에서 건지고자 삼장(三藏)의 비밀스러운 말씀을 풀어주셨다. 하늘과 땅이 변화하여 음과 양을 이루고,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추위와 더위를 이뤘으니, 크게는 선과 악을 말씀하셨고, 세밀하게는 항하의 모래알에 빗대야 할 정도네. 다 서술할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온갖 일들을 마치 상법(像法)2)을 엿보듯이 하고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육정(六情)3)을 벗어나 길이 존재하고 천겁이 지나도록 오래갈 만한 것이며, 마치 수미산이 겨자씨에 담기 듯 여래께서 끝없는 세계에서 걸림이 없으신 것이다.
달마(達磨)께서 서쪽에서 오시자 법이 동토에 전해졌고, 오묘한 이치를 선양하시자 대중이 돌아갈 길을 순순히 따랐으니, 피안(彼岸)은 보리요 애욕의 강은 생멸이라, 오탁의 악취(惡趣)에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삼업(三業)의 길에서 빠진 자들을 건지셨다. 세상에 드리운 경은 궁구하기 어렵지만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영원히 태평하도다. 설산(雪山)의 패엽(貝葉)4)이 눈부신 은대(銀臺)와 같고, 세월의 연라(煙蘿)5)가 저 멀리 향계(香界)6)를 일으켰지만 높고 우뚝하여 측량하는 자가 드물고, 멀고 아득하여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도(道)를 깨달은 십성(十聖)7)과 덕(德)을 갖춘 삼현(三賢)8)께서 지극한 도를 건원(乾元)9)에서 일으키고 온갖 오묘함을 태역(太易)10)에서 낳아 무성한 생명체들을 총괄해 어둠을 뚫고 한 가닥 빛을 비추었으며, 저 시시비비를 단절하고 이 몽매함을 깨우쳤던 것이다.
서역의 법사 천식재(天息災) 등11)은 항상 사인(四忍)12)을 지니며 삼승(三乘)을 일찌감치 깨달은 분들이니,
불경의 참된 말씀을 번역하여 인간과 천상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이었다. 이는 꽃다운 지혜가 거듭 열린 것이요, 국운이 창성할 때를 만난 것이니, 문장(文章)에서 오성(五聲)13)을 윤택하게 하였고, 풍율(風律)14)에서 사시(四始)15)를 드러냈다. 당당한 행동거지에 온화하고 아름답도다. 광대한 세월 어둠에 빠졌던 세계가 다시 밝아 현묘한 문이 환하게 드러났으며, 궤범이자 두루한 광명인 오묘한 법이 청정한 세계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유정을 이롭게 하여 함께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고, 장애를 만드는 일 없이 병들고 지친 자들을 모두 구제하였으며, 드러내지 않고 자비를 행하며 만물 밖으로 광대하게 노닐고, 부드러움으로 탐학한 자들을 조복해 어리석음을 씻고 깨우쳐 주었다. 소승의 성문(聲聞)을 연설하여 그 위의에 합하고 대승의 정각(正覺)을 논하여 그 성품을 정립하자, 모든 생명체들이 깨달아 복을 받았고, 삼장의 교법에서 결락된 것들이 다시 흥성하였다.
허깨비에 홀려 길을 잃은 것이니, 화택(火宅)16)은 심오한 비유로다. 부처님께서 비록 이런 가르침을 시설하셨지만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이에 “선념(善念)이 생기면 한량없는 복이 남몰래 찾아오고, 악업(惡業)이 일어나면 인연 따라 모두 타락한다”17)는 말씀으로 사부대중을 길들이고 시방세계에서 보살행을 쌓았다. 금륜왕[金輪]18)에게 꽃비를 쏟아 붓고 대궐에서 항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를 보호하였으니, 유정천(有頂天)에 부는 바람19)도 파괴하지 못할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홍수도 휩쓸지 못하리라. 맑고 고요해 담담한 것이 원만하고 밝으며 청정한 지혜요, 성품이 공하여 물듦이 없는 것이 망상으로부터 해탈하는 인연이니, 이로써 마음의 밭에서 번뇌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우주에서 청량을 얻을 수 있으리라.
짐은 부끄럽게도 박학하지도 못하고 석전(釋典)20)에 능통하지도 못하니, 어찌 감히 서문을 써서 후인에게 보일 수 있는 자이겠는가? 반딧불이나 횃불과 같아 찬란한 태양과 견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니, 작은 소라로 바다를 측량하려다 그 깊은 연원을 끝내 밝히지 못하는 자일 따름이로다!


계작성교서(繼作聖教序)21)

어제(御製)

높고 밝은 것이 처음으로 나뉘자 삼진(三辰)22)이 비로소 차례로 나타났고, 두텁게 실어주는 것이 비로소 안정되자, 만물이 이로써 실마리를 일으켰으니, 맑음과 탁함의 본체가 이미 밝혀진 것이요,
선과 악의 근원이 여기서 드러난 것이다. 이런 다음에 문물(文物)로 그 가르침을 세우고 바른 법전[正典]으로 그 세속을 교화하는 것이니, 이익의 공은 모두 이치로 돌아간다. 이렇게 상법(像法)이 서쪽 나라에서 와 진제(眞諦)가 중국에 유포되었지만 천고의 세월을 관통하는 진실한 이치는 궁구할 방법이 없고, 구위(九圍)23)를 포괄하는 현묘한 문은 궁구할 수가 없다. 허망한 생각으로 말하자면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고, 참된 모습을 나타내자면 터럭 하나에도 원만하니, 광대한 그 가르침을 어찌 기술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태종신공성덕문무황제께서는 법성이 두루 원만하시어 인자함을 널리 베푸셨다. 오랑캐들을 교화하시자 만방(萬邦)이 바큇살처럼 몰려들어 온 백성을 인수(仁壽)의 영역에 올려놓으셨고, 교법을 숭상하시자 사해(四海)가 구름처럼 뒤따라 창생에게 풍요로운 땅을 베푸셨다. 존귀한 경전이 방대함을 보시고는 방편을 시설해 물에 빠진 자들을 구제하셨고, 법계가 광활함을 알시고는 정진을 행하여 나태한 자들을 거두셨다. 이에 아늑한 절을 선택해 저 참된 문서24)들을 교열하고는 천축의 고승들에게 명령하여 패다라(貝多羅)의 부처님 말씀을 번역하게 하셨다.25) 상아 붓대가 휘날리며 황금의 글자를 완성하고, 구슬을 엮어 다시 낭함(琅函)에 안치하자26) 용궁(龍宮)의 성스러운 문장27)이 새롭게 탈바꿈하였으니, 취령(鷲嶺)의 필추(苾芻)28)들마저 우러러 감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삼승(三乘)이 모두 하나로 꿰뚫어지고 사제(四諦)가 함께 원만해졌으니, 고(苦)가 공하다는 참되고 바른 말씀을 완전히 밝히고, 정밀히 연구한 비밀스러운 뜻을 환히 드러냈다. 상(相)을 찬탄하는 상이 바로 진실한 상이고, 공(空)을 논하는 것도 공하여 모조리 공이라 하였으니, 화엄(華嚴)의 이치와 궤도를 같이하고, 금상(金像)29)의 가르침과 규구(規矩)30)가 동일하였다.
짐은 대업(大業)을 계승하여 삼가 황위에 임했기에 항상 조심하면서 만백성을 어루만지고 매일 긍긍하면서 선황의 훈계를 지켜왔다. 불교경전[釋典]에 대해서는 더구나 정밀하지도 상세하지도 못하니, 진실로 그 그윽하고 심오한 뜻을
어찌 탐색하고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경원(譯經院)31)의 서역 승려 법현(法賢)32)이 간절한 글을 올리고 그 뜻을 너무도 열심히 피력하였다. “선황제께서는 참된 교화의 바람을 크게 펼치고 부처님의 뜻을 높이 전하셨으며, 전대의 왕들이 빠뜨린 전적을 흥성시키고 각로(覺路)33)의 무너진 기강을 다시 떨치셨다”고 하면서, 하늘이 이룬 공로를 높이 휘날리고 성황의 글34)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나에게 서문을 지어 성인의 가르침을 계승해달라고 청하였다.
성고(聖考)35)께서 승하하시고 추호(追號)36)가 아직 잊히지도 않았는데 정사 밖에 마음을 둘 겨를 어디 있었겠는가? 담제(禫祭)37)를 마치고 이제야 생각이 은미하고 오묘한 곳에 미치게 된 것이다. 어려서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능통한 재주가 본래 부족한 걸 어쩌랴. 법해(法海)의 나루터와 언덕을 어찌 궁구하리오! 공문(空門)의 문턱으로 나아가질 못하니, 대략 대의나마 서술하여 이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부응할 따름이다. 소발자국에 고인 빗물이라 태양을 씻는 파도에 빗대기에는 부족하니, 한척짜리 채찍이 어찌 드넓은 하늘의 그림자를 측량할 수 있으랴! 이렇게나마 짧은 서문을 지어 이로써 성인들의 공로를 기록할 따름이다.

개각자성반야바라밀다경(開覺自性般若波羅蜜多經) 제1권


역경(譯經)삼장 조산대부(朝散大夫) 시홍려경(試鴻臚卿)
광범(光梵)대사 사자(賜紫)사문 신(臣) 유정(惟淨) 등 한역
장순용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왕사성 취봉산(鷲峰山)에서 대필추(大苾芻)들과 보살마하살들과 함께 계셨다.이때 부처님께서 존자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색(色)은 무성(無性)ㆍ가성(假性)ㆍ실성(實性)이고,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무성ㆍ가성ㆍ실성이다.’
수보리야, 이와 같이 나아가 안색(眼色)과 안식(眼識), 이성(耳聲)과 이식(耳識), 비향(鼻香)과 비식(鼻識), 설미(舌味)와 설식(舌識), 신촉(身觸)과 신식(身識), 의법(意法)과 의식(意識)도 무성ㆍ가성ㆍ실성이다.’
다시 수보리야, 색은 이 같은 세 가지 성품 속에서
어리석음을 전변하는데, 이와 같이 행하는 바를 마땅히 아는 것이 바로 보살의 올바른 행이다.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과(果)를 신속히 증득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모든 식(識)의 무상법(無相法)을 이해하면, 고통이 저절로 그치면서 온갖 모습이 적정해지니, 이와 같이 행하는 바를 마땅히 아는 것이 바로 보살의 올바른 행이다.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바로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果)를 신속히 증득하는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을 설하셨다.

만약 무상법(無相法)을 이해한다면,
온갖 고통이 저절로 그치고
온갖 상(相)도 모두 적정해지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행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야, 모든 색 속에서는 어둠과 밝음이 평등하게 의지(依止)하는데, 보살이 만약 실답게 요달해서 이것을 능히 이해해 들어갈 수 있다면, 모든 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것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果)를 신속히 증득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식 속에서 어둠과 밝음은 평등하게 의지하는데, 보살이 만약 실답게 요달해서 이것을 능히 이해해 들어갈 수 있다면 모든 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것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를 신속히 증득하는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을 설하셨다.

만약 법의 어둠과 밝음이
이와 같이 평등한 성품이라면,
의지하고 이해해 들어가서
자기를 알아서 보리를 얻으리라.

“다시 수보리야, 가령 보살마하살이 모든 색에서, 그리고
수ㆍ상ㆍ행ㆍ식에서 세 가지 성품으로 전변함을, 만약 지혜로운 자가 실답게 요달하여 식(識)에 대해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또한 전변을 나타내지 않아서 그 마음이 지혜[明]를 연다. 저 식에 대해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지혜를 열고 나면, 이는 곧 대승법(大乘法) 속에서 능히 출리(出離)한 것이니, 어찌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에 비하겠는가? 또 이처럼 집착을 일으키지 않아서 마음이 지혜를 연 것이기 때문에 지옥ㆍ축생ㆍ아귀ㆍ인(人)ㆍ천(天)의 모든 취(趣)의 오랜 생사의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야, 색은 생(生)하는 것인가, 멸(滅)하는 것인가? 만약 색을 생함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색은 곧 생함이 없는 것이고, 만약 색을 생함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 색은 곧 생함이 없는 자성[無生自性]이다. 만약 다시 보살이 저 색이 생함이 없는 자성이라는 걸 실답게 요달한다면, 이 때문에 색은 있다고 할 만한[可有] 생함이 없다.’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식(識)은 생하는 것인가, 멸하는 것인가? 만약 식을 생함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식은 곧 생함이 없는 것이고, 만약 식을 생함이 없는 것이라 말한다면 그 식은 곧 생함이 없는 자성일 뿐이다. 만약 다시 보살이 저 식이 생함이 없는 자성이라는 것을 실답게 요달한다면, 이 때문에 식은 있다고 할 만한 생함이 없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이 바로 나[我]이고 바로 내 것[我所]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異生)의 삿된 견해의 분위(分位)38)라고 말하겠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수ㆍ상ㆍ행ㆍ식을 바로 나이고 바로 내 것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異生)의 삿된 견해의 분위(分位)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을 바로 선세(先世)의 인(因)으로 지어진 것이라 하거나, 혹은 대자재천(大自在天)의 화인(化因)으로 지어진 것이라 하거나, 혹은 인연이 없는 것[無因緣]이라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수ㆍ상ㆍ행ㆍ식을 바로 선세(先世)의 인(因)으로 지어진 것이라 하거나, 혹은 대자재천의 화인(化因)으로 지어진 것이라 하거나, 혹은 인연이 없는 것이라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은 색상(色像)을 특징[相]으로 하고, 수(受)는 받아들이는 것[領納]을 특징으로 하고, 상(想)은 두루 아는 것[遍知]을 특징으로 하고, 행(行)은 짓는 것[造作]을 특징으로 하고, 식(識)은 요별(了別)을 특징으로 한다고 이와 같이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고통은 적정(寂靜)이 아니니, 만일 저 색을 멸해야 이 즐거움이 적정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수ㆍ상ㆍ행ㆍ식도 마찬가지이며, 이 고통은 적정이 아니니, 만일 저 식(識)이 멸해야 이 즐거움이 적정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저 색은 무(無)이고, 수ㆍ상ㆍ행ㆍ식도 모두 무(無)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설하셨듯이 색은 자성(自性)이 없어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不生不滅], 본래부터 적정한 자성의 열반[本來寂靜自性涅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저 일체 법에서 화합도 없고 낙욕(樂欲)도 없다는 그 말에 따라 지해(知解)를 지은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에게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수ㆍ상ㆍ행ㆍ식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부처님께서 설하셨듯이 모두 자성이 없어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본래부터 적정한 자성의 열반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저 일체 법에서 화합도 없고 낙욕(樂欲)도 없다는 그 말에 따라 지해(知解)를 지은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에게 바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서 어리석은 범부나 이생의 삿된 견해의 분위라고 말하겠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을 있다[有]고 헤아리면, 색에 대해 집착해서 생기하는 바가 있는 것이라서 언설에 따른 전변[轉]이다. 또다시 색을 있다고 헤아리면, 곧 저 잡염(雜染)의 색에 대해 의지하는 것이라서 유상(有相)에 따른 전변이다. 다시 색을 있다고 헤아리면, 곧 저 청정한 법을 닦은 색에 대해 따라서 전변함[隨轉]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식(識)을 있다고 헤아리면, 일어남이 있는 식에 집착하는 것이니, 언설에 따른 전변이다. 또다시 식을 있다고 헤아리면, 곧 잡염의 저 식에 대해 의지하는 것이라서 유상(有相)에 따른 전변이다. 또다시 식을 있다고 헤아리면, 곧 청정한 법을 닦은 식에 대해 따라서 전변함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모든 보살이 색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색에 대해서 끊음도 있고 앎도 있어서 대락(大樂)의 행에서 언설이 갖추어지므로
유(有)에 따라 전변하게 된다. 또 모든 보살이 색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색에 대해서 끊음도 있고 앎도 있어서 표시도 하고 이루기도 하므로 유(有)에 따라 전변하게 된다.’
또 모든 보살이 색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색에 대해서 능히 요달해 앎으로써 백법(白法)이 구족된다. 이른바 모든 법에 대해 자재로움을 얻어서 대락(大樂)의 행으로써 능히 따라서 전변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모든 보살이 수ㆍ상ㆍ행ㆍ식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식에 대해서 끊음도 있고 앎도 있어서 대락의 행에서 언설이 갖추어지므로 유(有)에 따라 전변하게 된다. 또 모든 보살이 식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식 안에서 끊음도 있고 앎도 있어서 표시도 하고 이루기도 하므로 유(有)에 따라 전변하게 된다. 또 모든 보살이 식을 있다고 헤아리면, 저 식에 대해서 능히 요달해 앎으로써 백법(白法)이 구족된다. 이른바 모든 법에 대해 자재로움을 얻는 것이니, 대락(大樂)의 행으로써 능히 따라서 전변하는 것이다.’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 속에서 색의 모든 분량(分量)과 고(苦) 속에서 고(苦)의 모든 분량을 실답고 평등하게 관(觀)하지 못하면, 곧 색에 대해서 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만약 색에 대해서 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 대해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색에 대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 대해서 중생의 견해[衆生見]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색에 대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 대한 저 중생의 견해라서 얻는 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색에 대해서 저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을 때는 곧 저 중생도 역시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相)이 성립할 수 있다면 곧 얻는 바의 상(相)이 있고 의지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능히 출리(出離)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식(識) 속에서 식의 모든 분량과 고(苦) 속에서 고(苦)의 모든 분량을 능히 실답고 평등하게 관하지 못하면, 곧 식에서 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만약 식에서 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저 중생의 견해라서 얻는 바가 없으며, 만약 식에서 저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을 때는 곧 저 중생도 얻는 바가 없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相)이 성립할 수 있다면 곧 얻는 바의 상(相)이 있고 의지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능히 출리(出離)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 속에서 색의 모든 분량과 고(苦) 속에서 고(苦)의 모든 분량을 능히 실답고 평등하게 관할 수 있다면, 곧 색에서 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색에서 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색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색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색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색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색에서 저 중생의 견해라서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색에서 저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을 때는 곧 저 중생도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相)이 성립할 수 있으면, 곧 얻는 바의 상이 있고 의지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능히 출리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수보리야, 수ㆍ상ㆍ행ㆍ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식 속에서 식의 모든 분량과 고(苦) 속에서 고(苦)의 모든 분량을 능히 실답고 평등하게 관할 수 있다면, 곧 식에서 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식에서 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식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나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식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없다면 곧 식에서 저 중생의 견해라서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저 중생의 견해가 얻는 바가 있을 때는 곧 저 중생도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이 있어서 성립할 수 있다면, 곧 얻는 바의 상도 있고 의지함도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출리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다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색에서 능히 실답고 평등하게 관찰할 수 없다면, 분별의 분량과 의동(疑動)의 분량이 실답지 않기 때문에 색 안에서는 색으로 얻는 바가 있다. 만약 색에서 색으로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서 색견(色見)으로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색에서 색견으로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서 중생이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색에서 중생이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색에서 일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일체가 얻는 바가 있을 때는 곧 일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이 있어서 성립할 수 있다면, 곧 얻는 바의 상이 있고 의지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출리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수ㆍ상ㆍ행ㆍ식 안에서 실답고 평등하게 관찰할 수 없다면, 분별의 분량과 의동(疑動)의 분량이 실답지 않기 때문에 식에서 식으로서 얻는 바가 있다. 만약 식에서 식으로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식견(識見)으로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식견으로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중생이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중생이 얻는 바가 있다면 곧 식에서 일체가 얻는 바가 있는 것이며, 만약 식에서 일체가 얻는 바가 있을 때라면 곧 일체가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혹시 법에 얻는 바의 상이 있어서 성립할 수 있다면, 곧 얻는 바의 상도 있고 의지함도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성문승과 연각승으로는 출리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대승과 비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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