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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95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83권

by Kay/케이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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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83

 

대지도론 제83권

69. 대방편품을 풀이함 ②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經】“세존이시여, 이 문에는 근기가 영리한 보살마하살이 들어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근기가 둔한 보살도 이 문을 들어갈 수 있으며, 중간 근기의 보살과 산란한 마음의 보살도 이 문에 들어갈 수 있나니, 이 문은 막힘이 없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로서 일심으로 배우는 이면 모두 이 문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하지만 게으름을 피우거나 정진이 모자라거나 허망한 기억을 하거나 마음이 산란한 이는 들어갈 수 없으니,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바르게 기억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이는 들어갈 수 있느니라.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에 머무르고자 하고 일체종지를 체득하고자 하는 이도 들어갈 수 있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서 말한 대로 마땅히 배워야 하며 단바라밀까지도 설명한 대로 배워야 하나니, 이 보살마하살은 장차 일체지를 얻을 것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악마의 일이 일어나려 하다가도 곧 사라져 버리나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방편의 힘을 얻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고 이와 같이 익히며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이때에 한량없는 아승기 국토에 계시는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들을 호념(護念)하시느니라. 왜냐 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내셨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생각하기를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얻으신 법을 나도 또한 얻어야 한다’고 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익혀야 하느니라. 만일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익히면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나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항상 살바야(薩婆若)의 생각을 멀리 여의지 않아야 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을 손가락을 튕기는 시간만큼 짧은 시간이라도 행한다면, 이 보살의 복덕은 매우 많으니라. 어떤 사람이 3천대천세계의 중생들을 교화하여 마음대로 보시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지계(持戒)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를 닦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얻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얻게 한다 하여도, 이 보살이 손가락을 튕기는 시간만큼 짧은 시간이라도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만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보시ㆍ지계ㆍ선정ㆍ지혜와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벽지불의 도가 생겨나고, 지금 시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나오시며, 과거ㆍ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로부터 나오시기 때문이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살바야의 생각에 상응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잠깐 동안이나 한나절 동안이나 하루 동안이나 한 달 동안이나 백 일 동안이나 1년 동안이나 백 년 동안이나 1겁 동안이나 백 겁 내지는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겁 동안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그 복덕은 매우 많아서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세계의 중생들에게 보시ㆍ지계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을 가르쳐 주고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벽지불의 도를 얻게 하는 것보다 뛰어나느니라.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나오시어 이 보시ㆍ지계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과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벽지불의 도를 설하게 되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에서 말한 대로 머무른다면, 그 보살마하살은 바로 아비발치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호념을 받으리니, 이와 같은 방편의 힘으로 성취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 보살은 한량없는 천만억의 모든 부처님을 친근히 하고 공양하여 선근을 심었으며, 선지식을 따라 오래전부터 6바라밀을 행하였고 오래도록 18공(空)과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과 부처님의 10력(力) 내지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닦았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 보살은 법왕자(法王子)의 지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모든 소원을 만족시키고 항상 모든 부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모든 선근을 여의지 않았으며, 한 부처님의 나라로부터 또 다른 한 부처님의 나라에 다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 보살은 말재주[辯才]가 다함이 없고, 다라니(陀羅尼)를 완전히 갖추고 증득하였으며, 몸의 빛깔[身色]을 완전히 갖추고 수기(受記)를 두루 갖추었으므로 중생들을 위하여 몸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이 보살은 자문(字門)을 잘 알고 자문이 아닌 것[非字門]을 잘 알며, 말[言]을 잘 하고 말하지 않는 것[不言]도 능하며, 한 마디의 말[一言]에도 능하고 두 마디의 말[二言]에도 능하고 여러 말[多言]에도 능하며, 여인의 말을 잘 알고 남자의 말을 잘 알며, 물질[色] 내지는 인식[識]을 잘 알고 세간의 성품[世間性]도 잘 알며, 열반의 성품[涅槃性]도 잘 알며, 법의 모양[法相]을 잘 아느니라.
유위의 모양[有爲相]을 잘 알고 무위의 모양[無爲相]을 잘 알며, 존재하는 법[有法]을 잘 알고 없는 법[無法]을 잘 알며, 제 성품[自性]을 잘 알고 다른 이의 성품[他性]을 잘 알며, 합하는 법[合法]을 잘 알고 흩어지는 법[散法]을 잘 알며, 상응하는 법[相應法]을 잘 알고 상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을 잘 알며, 여(如)를 잘 알고 여하지 않는 것[不如]을 잘 아느니라.
법성(法性)을 잘 알고 법위(法位)를 잘 알며,
연(緣)을 잘 알고 연이 없는 것[無緣]을 잘 알며, 음(陰)을 잘 알고 계(界)를 잘 알고 입(入)을 잘 알며, 4제[諦]를 잘 알고 12인연(因緣)을 잘 알며, 선(禪)을 잘 알고 무량심(無量心)을 잘 알며, 무색정(無色定)을 잘 알고 6바라밀(波羅密)을 잘 알며, 4념처(念處)를 잘 알고 일체종지(一切種智)까지도 잘 아느니라.
유위의 성품[有爲性]을 잘 알고 무위의 성품[無爲性]을 잘 알며, 존재하는 성품[有性]을 잘 알고 없는 성품[無性]을 알며, 물질의 관[色觀]을 잘 알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관[受想行識觀]을 잘 알며, 일체종지의 관[一切種智觀]까지도 잘 알며, 물질에 대해서는 물질의 모양이 공하다는 것을 잘 알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에 대해서는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모습이 공하는 것을 잘 알며, 나아가 보리(菩提)에 대해서는 보리의 모습이 공하는 것을 잘 아느니라.
도를 버릴[捨道] 줄을 잘 알고 도를 버리지 않을[不捨道] 줄도 잘 알며, 생기는 것[生]을 잘 알고 소멸하는 것[滅]도 잘 알고 머무르거나 달라지는 것[住異]을 잘 알며, 탐욕[欲]도 잘 알고 성냄[瞋]도 잘 알고 어리석음[癡]도 잘 알며, 탐욕하지 않을[不欲] 줄도 잘 알고 성내지 않을[不瞋] 줄도 잘 알며, 어리석지 않을[不癡] 줄도 잘 아느니라.
보는 것[見]을 잘 알고 보지 않는 것[不見]을 잘 알며, 삿된 견해[邪見]도 잘 알고 바른 견해[正見]도 잘 알고 온갖 견해[一切見]도 잘 알며, 이름[名]을 잘 알고 모양[色]을 잘 알고 이름과 모양[名色]도 잘 알며, 인연(因緣)을 잘 알고 차제연(次第緣)을 잘 알며, 연연(緣緣)을 잘 알고 증상연(增上緣)도 잘 아느니라.
행상(行相)1)을 잘 알며, 괴로움[苦]을 잘 알고 쌓임[集]을 잘 알고 사라짐[滅]을 잘 알고 도(道)를 잘 알며, 지옥(地獄)을 잘 알고 아귀(餓鬼)를 잘 알며, 축생(畜生)을 잘 알고 사람[人]을 잘 알며, 하늘[天]을 잘 아느니라. 지옥의 세계[趣]를 잘 알며, 아귀 세계도 잘 알고 축생 세계를 잘 알며, 사람의 세계도 잘 알고 하늘 세계도 잘 아느니라.
수다원(須陀洹)을 잘 알고 수다원의 과위[果]를 잘 알고 수다원의 도(道)를 잘 알며, 사다함(斯陀含)을 잘 알고 사다함의 과위를 잘 알고 사다함의 도를 잘 알며, 아나함(阿那含)을 잘 알고 아나함의 과위를 잘 알고 아나함의 도를 잘 알며, 아라한(阿羅漢)을 잘 알고
아라한의 과위를 잘 알고 아라한의 도를 잘 알며, 벽지불(辟支佛)을 잘 알고 벽지불의 과위를 잘 알고 벽지불의 도를 잘 아느니라.
부처님을 잘 알고 일체지(一切智)를 잘 알고 일체지의 길을 잘 알며, 선근(善根)을 잘 알고 모든 근(根)이 구족함을 잘 알며, 지혜[慧]를 잘 알고 빠른 지혜[疾慧]를 잘 알며, 힘 있는 지혜[有力慧]를 잘 알고 예리한 지혜[利慧]를 잘 알며, 벗어나는 지혜[出慧]를 잘 알고 통달한 지혜[達慧]를 잘 알며, 넓은 지혜[廣慧]를 잘 알고 깊은 지혜[深慧]를 잘 알고 큰 지혜[大慧]를 잘 알며, 견줄 데 없는 지혜[無等慧]를 잘 알고 보배의 지혜[寶慧]를 잘 아느니라.
과거의 세상[過去世]를 잘 알고 미래의 세상[未來世]을 잘 알고 현재의 세상[現在世]을 잘 알며, 방편(方便)을 잘 알고 중생을 기다림[待衆生]을 잘 알며, 마음을 잘 알고 깊은 마음[深心]을 잘 알며, 뜻[義]을 잘 알고 말[語]을 잘 알며, 3승(乘)을 분별할 줄도 잘 아느니라.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적에 반야바라밀에 들어가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이와 같은 이익을 얻느니라.”
【論】해석한다. 수보리가 생각하기를 ‘네 가지 문(門)으로써 비록 안온하기는 하나 매우 깊기 때문에 근기가 영리한 이[利根者]라야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여겼는데, 부처님께서는 “들어가지 못할 이가 없다”고 대답하셨다.
수보리는 지혜가 있고 근기가 영리한 이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밝혔고, 부처님의 생각엔 다만 한마음으로 정진하여 배우려고 하는 이라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더울 때에 맑고 서늘한 연못에 눈과 발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건만, 비록 가까이 있으면서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 이라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4문(門)의 반야바라밀의 못도 이와 같아서 사방(四方)의 중생을 막는 것은 없다.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함은 곧 바른 정진[正精進]이요, ‘허망한 기억을 하지 않는다’고 함은 바른 기억[正念]이며, ‘산란하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은 바른 선정[正定]이니, 이런 등의 4문은 곧 바른 소견[正見]을 말하는 것이다. 바른 소견에 편히 머무르는 것이 바로 계행(戒行)이니, 이 여덟 가지 거룩한 도[八聖道]가 반야바라밀을 얻게 한다.

수보리는 소승으로서 지혜가 짧기 때문에 다만 근기가 영리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부처님은 대승으로서 지혜가 큰 분이기 때문에 비록 중간 근기[中根]요 둔한 근기[鈍根]라 할지라도 여덟 가지 법이 화합하여서 이 4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대비의 기운[大悲氣] 때문에 중간 근기나 둔한 근기라도 모두가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이 반야에서 말씀하신 대로 6바라밀을 배운다면 오래지 않아서 살바야를 얻게 되지만, 성문의 법에서는 바른 소견만으로는 도를 얻지 못하고 여덟 가지를 한데 합쳐 행해야만 얻게 된다. 대승의 법도 이와 같아서, 다만 반야만을 배워서는 얻지 못하고 살바야와 다섯 가지 바라밀이 화합하므로 얻게 되나니, 이 때문에 말씀하기를 “보살이 말한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일체지를 얻는다”고 하신 것이다.
【문】위에서는 “다만 반야만이 일체종지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여기에서 무엇 때문에 “다섯 가지 바라밀과 화합하기 때문에 이르게 된다”고 하시는가?
【답】언제나 “6바라밀이 화합하기 때문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간혹 청정한 부처님 국토에서는 다만 실상(實相)만을 듣기 때문에 살바야에 이르기도 하니, 거기서는 차례로 모든 바라밀을 행할 필요가 없다. 이 가운데에서는 보살이 살바야를 얻으면 곧 반야 공덕의 과보가 이미 충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반야를 행한 사람의 세력을 찬탄할 뿐이다. 마치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보살이 반야를 행할 적에는 모든 악마의 일[魔事]이 일어나다가도 곧 소멸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위의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신다’는 데서부터 여기까지는 모두가 보살이 반야를 행하는 공덕을 찬탄한 것이며 분별하여 3승(乘)을 잘 알게 한 것이다.
‘자문을 잘 안다[善知字門]’고 함은 문자다라니(文字陀羅尼)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글자가 아닌 것[非字]’이란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를 말하나니, 이 중에는 문자가 없다.
요약하여 그 뜻을 말하면, 이 보살이 한량없는 복덕의 힘 때문에 세간과 열반의 두 가지 법을 잘 아는 것이다. 만일 세간의 괴로움을 싫어하면 곧 열반을 생각하게 되고, 만일 열반에 빠지려 하면 도로 세간을 생각하게 된다.
모든 복덕의 길을 모으기 때문에 글자를 잘 알며, 복덕 속에 있는 뒤바뀜을 깨뜨리기 때문에 글자 없는 것을 잘 안다.
말[語]과 말이 아닌 것[不語]에서도 역시 이와 같다.
‘한 마디 말[一語]’이란, 이 한 마디의 말로써 많고 적은 말과 깨끗한 말과 깨끗하지 않은 말과 한 번의 말과 두 번의 말과 여러 번의 말과 남자의 말과 여인의 말 등의 그 음성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니, 보살이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모든 삿된 도[邪道]와 모든 뛰어난 것[豪勝]들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물질에서 인식에 이르기까지 항상하거나 무상하다고 하는 등의 두 가지 모양을 잘 아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도를 버리기[捨道]를 잘 안다’고 함은, 보살이 한 지위[地]로부터 다른 지위에 이른 때에 아래의 지위를 버리고도 근심하지 않고, 위의 지위를 얻고서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를 버리지 않는다[不捨道]’고 함은, 이 지위에서 삿된 소견에 머무르다가도 다음에는 세간의 바른 소견과 다른 온갖 소견이나 유학(有學)ㆍ무학(無學) 등 모든 소견에 머무르는 것이다.
‘행(行)’이란 16행(行)2)을 말한다.
‘수다원을 잘 안다’고 함은 사람[人]이요, ‘수다원의 도’라고 함은 견제도(見諦道)이며, ‘수다원의 과위’라고 함은 제16심(心)이다.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과 무루계(無漏戒)등 모든 법으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모든 근(根)을 잘 안다’고 함은 22근(根)을 잘 분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제도해야 할 중생을 관찰함에 있어서 영리한[利] 이와 무딘[鈍] 이가 있다. 두루 갖춘 이는 제도할 수 있지만 두루 갖추지 못한 이는 제도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보살도 자기 자신이 두루 갖추었는가 갖추지 못했는가를 아는 것은, 마치 어린 새가 자신의 깃털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비로소 날아야 하는 것과 같다.
‘지혜[慧]’라고 함은 온갖 지혜의 전체적인 형상[總相]이다.
‘빠른 지혜[疾慧]’라고 함은 모든 법을 빠르게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비록 빠르다 하더라도 지혜의 힘이 강하지 못하니, 마치 말이 비록 빠르기는 하나 힘이 약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비록 강한 지혜의 힘이 있기는 하나 예리하지 못하니, 마치 도끼가 무뎌서 비록 큰 힘이 있기는 하나 물건을 쪼갤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벗어나는 지혜[出慧]’라고 함은, 갖가지 어려운 일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또한 모든 번뇌 속에서 스스로 삼계(三界)를 벗어나 열반에 드는 것이다.
‘통달한 지혜[達慧]’라고 함은, 부처님 법을 두루 궁구하여 통달하며 번뇌를 다 끊고 열반을 얻기까지 모든 법을 파괴하여 법 성품에 드는 지혜이다.
‘넓은 지혜[廣慧]’라고 함은, 도속(道俗)의 갖가지 경서(經書)와 논의(論議)가 불법 가운데에도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모두 아는 지혜이다.
‘깊은 지혜[深慧]’라고 함은 온갖 법에 대하여 한량이 없고 모양이 없으며 불가사의한 세간임을 관찰하는 지혜이다.
‘깊은 지혜[深智慧]’라고 함은 멀고 오래된 일을 알며, 이로운 가운데 쇠(衰)함이 있고 쇠하는 가운데 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큰 지혜[大慧]’라고 함은, 위의 모든 지혜를 통틀어 갖춘 것을 크다[大]고 한 것이며, 또 온갖 중생들 가운데 부처님이 제일 크고 모든 법 가운데 반야가 제일 크므로 부처님을 알고 법을 믿어 큰 법과 화합하기 때문에 크다고 한 것이다.
‘견줄 데 없는 지혜[無等慧]’라고 함은, 반야 가운데서 반야에 집착하지 않고 이와 같이 깊이 들어가되 다시 그와 비교할 만한 다른 법이 없다는 말이다. 또 보살이 점차로 도를 행하여 불가사의한 성품에 이르면 그와 비교할 만한 이가 없기 때문에 비교할 것이 없다[無等]고 한 것이다.
‘보배의 지혜[寶慧]’라고 함은, 마치 여의보(如意寶)는 스스로 일정한 빛깔이 없고 앞에 있는 물건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반야도 또한 이와 같아서 스스로 일정한 모양이 없고 모든 법의 행위에 따른다는 것이다. 또 여의주는 소원에 따라 모두 얻게 해주는 것처럼 반야도 또한 이와 같아서 어떤 사람이 수행하면 부처님이 되는 소원도 얻게 되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것이겠는가.
과거는 이미 소멸하고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으므로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이 가운데서 그 실상(實相)을 행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잘 안다[善知]’고 하며, 현재의 법은 생각 생각마다 나고 없어지므로 알 수는 없으나 능히 통달하여 알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현재의 세상을 잘 안다[善知現在世]’고 한 것이다.
‘방편(方便)’이란 것은, 그 일을 이루어 마치고자 하여 인연의 많고 적음을 두루 갖추어 그 처소를 얻고, 그 가운데서 과실이 있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하니, 마치 보살이 비록 공을 행한다 하더라도 실제(實際)를 증득하지 못하고,
비록 복덕을 행한다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을 기다린다[待衆生]’고 함은, 마치 장사꾼의 대장이 비록 날랜 말을 타고 목적한 곳에 빨리 도달했다 하더라도 짐짓 그 일행들을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보살도 이와 같아서 지혜의 날랜 말을 타고 열반에 빨리 들어가더라도 역시 중생들을 기다리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잘 안다[善知心]’고 함은) 중생들의 갖가지 선악의 마음을 잘 안다는 것이다.
‘깊은 마음[深心]’이라는 것은, 현재는 비록 악하다 하더라도 그 근본만은 좋은 것이니, 마치 부모가 자식을 회초리로 때릴 때에 겉으로는 미워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사랑하는 것과 같다. 마치 부처님께서 앙굴마라(鴦堀魔羅)를 제도하실 적에 그의 겉마음은 비록 악하다 하더라도 속마음은 진실로 선함을 아신 것과 같나니, 보살은 중생의 신근(信根)등 다섯 가지 선근이 속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관찰하여 이때에 제도해야 한다.
‘뜻[義]’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법(法)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名]이다. ‘말[語]’이라는 것은 언어(言語)이니, 명자(名字)로 사물을 표현한 것이다. 모든 법의 이치를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것[義無礙]과 모든 법을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것[法無礙]을 얻기 때문에 ‘뜻을 잘 안다’고 한 것이며, 말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것[辭無礙]과 중생의 원에 따라 상응하는 설법을 함에 막힘이 없는 것[樂說無礙]을 얻기 때문에 ‘말을 잘 안다’고 한 것이다.
보살은 이 두 가지의 잘 아는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3승(乘)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3승을 잘 분별할 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문에서 알기 어려운 것들만 해설하고 알기 쉬운 것은 해설하지 않는다.
【문】무엇 때문에 앞에서는 “물질 내지는 인식을 잘 안다”고 말씀하시고 나중에는 “중(衆)ㆍ계(界)ㆍ입(入)을 안다”고 말씀하셨는가? 무엇 때문에 앞에서는 “연(緣)을 잘 안다”고 말씀하시고 뒤에서는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연연(緣緣)ㆍ증상연(增上緣)을 말씀하셨는가?
【답】앞에서는 자세히 말씀하고 뒤에서는 간략하게 말씀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앞의 5중(衆)에는 착함[善]ㆍ착하지 못함[不善]ㆍ무기(無記)3)의 세 가지가 있다. 계중(戒衆) 등의 다섯 가지를 5중(衆)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두 번째 질문인 연(緣)에 관해서는 앞은 간략한 말씀이요, 나중은 자세한 말씀이다.

70. 삼혜품(三慧品)을 풀이함 ①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내고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닦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질[色]은 고요히 사라지기 때문에[寂滅],
물질은 공(空)하기 때문에, 물질은 거짓(虛誑)이기 때문에, 물질은 견실(堅實)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나니, 느낌[受]ㆍ생각[想]ㆍ의욕[行]ㆍ인식[識]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대가 물은 것과 같아서,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내느냐[生] 하면, 마치 허공처럼 내기 때문에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내어야 하느니라.
그대가 물은 것과 같아서,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닦느냐 하면, 모든 법의 파괴를 닦기 때문에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반야바라밀을 내며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은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도량(道場)에 앉기까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고 내어야 하며 닦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차례차례 마음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언제나 살바야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밖의 다른 생각이 들어올 수 없게 하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되고 반야바라밀을 내는 것이 되며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 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당연히 살바야를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닦지 않아도 살바야를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닦거나 닦지 않거나 간에 살바야를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닦는 것도 아니요 닦지 않는 것도 아니면 살바야를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살바야를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살바야를 얻는 것은 마치 여(如)의 모양과 같으니라.”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여의 모양과 같은 것인지요?”
“실제(實際)과 같은 것이니라.”
“어떠한 것이 실제와 같은 것인지요?”
“법성(法性)과 같은 것이니라.”

“어떠한 것이 법성과 같은 것인지요?”
“나의 성품[我性]과 중생의 성품[衆生性]과 수명의 성품[壽命性]과 같은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과 수명의 성품이 같은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와 중생과 수명의 법은 얻을 수 있는 것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나와 중생과 수명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과 수명의 성품이 있다고 말하겠느냐. 만일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온갖 법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일체종지를 얻을 것이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다만 반야바라밀만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지요? 아니면, 선(禪)바라밀에서 단(檀)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단바라밀 내지는 유위(有爲)ㆍ무위(無爲)의 온갖 법과 성문의 법[聲聞法]ㆍ벽지불의 법[辟支佛法]과 보살의 법[菩薩法]과 부처님의 법[佛法]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느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이것은 지옥이다, 이것은 축생이다, 이것은 아귀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수다원이다, 이것은 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이다, 이것은 모든 부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중생들의 이름은 실로 얻을 수 있는 것이더냐?”
“세존이시여,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중생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지옥ㆍ아귀ㆍ축생ㆍ사람ㆍ하늘과 수다원에서 부처님까지도 있다고 말하겠느냐.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마땅히 온갖 법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울 때에는 마땅히 물질ㆍ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을 배워야 하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울 때에 마땅히 물질은 늘어나지도 않고[不增] 줄어들지도 않는다[不減]는 것을 배워야 하며, 나아가 일체종지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물질이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것을 배우며,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겨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기[不滅] 때문에 배우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데 배운다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행업(行業)에 대해 ‘있다[有], 없다[無]’ 함을 일으키지도 않고 짓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모든 행업에 대해 ‘있다, 없다’ 함을 일으키지도 않고 짓지도 않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제 모양이 공하다[自相空]고 관하기 때문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모든 법은 제 모양이 공하다고 관찰해야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질[色]은 물질의 모양이 공하다고 관찰해야 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의욕[行]ㆍ인식[識]은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모양이 공하다고 관찰해야 하며, 눈[眼]은 눈의 모양이 공하고 나아가 뜻[意]과 물질[色] 내지 법(法)과 안식의 경계[眼識界], 내지 의식(意識)의 경계까지는 의식의 경계까지의 모습이 모두 공하다고 관찰해야 하느니라.
내공(內空)은 내공의 모양이 공하다고 관찰해야 하고, 자상공(自相空)까지도 자상공까지의 모양이 공하다고 관찰해야 하며, 4선(禪)은 4선의 모양이 공하다고 관찰하고, 멸수상정(滅受想定)까지도 멸수상정까지의 모양이 공하다고 관찰해야 하며, 4념처(念處)는 4념처의 모양이 공하다고 관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의 모양이 공하다고 관찰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엔 마땅히 모든 법은 제 모양이 공함을 행해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물질은 물질의 모양이 공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이 공하다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행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한다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보살도 얻을 수 없고 행도 또한 얻을 수 없으며, 행하는 이[行者]와 행할 법[行法]과 행하는 처소[行處]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고 하나니, 온갖 희론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면, 처음에 뜻을 낸 보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는지요?”
“수보리야, 보살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공하고 얻을 것이 없는 법[無所得法]을 배워야 하느니라. 이 보살은 얻을 것이 없는 법으로써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을 닦기 때문이며 얻을 것이 없는 법으로써 지혜를 닦기 때문이니, 나아가 일체종지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얻을 것이 있다[有所得] 하고 어떤 것을 얻을 것이 없다[無所得]고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둘이 있는 것[有二者]은 얻을 것이 있다 하고, 둘이 없는 것[無有二者]은 얻을 것이 없다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무엇이 둘이 있는 것으로서 얻을 것이 있는 것이며, 무엇이 둘이 없는 것으로서 얻을 것이 없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눈[眼]과 물질[色]이 둘이 되고 나아가 뜻[義]과 법(法)이 둘이 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부처님까지도 둘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둘이 된다고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얻을 것이 있는 가운데서 얻을 것이 없는 것인지요, 아니면 얻을 것이 없는 가운데서 얻을 것이 없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을 것이 있는 가운데서 얻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얻을 것이 없는 가운데 얻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야, 얻을 것이 있는 것과 얻을 것이 없는 것이 평등하니, 이것을 일컬어 얻을 것이 없다[無所得]고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얻을 것이 있는 것과 얻을 것이 없는 평등한 법 가운데서 배워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을 일컬어 얻을 것이 없는 것[無所得者]이라 한다면, 허물이 없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얻을 것이 있는 것을 행하지 않고 얻을 것이 없는 것도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한 지위[地]로부터 다른 지위에 이르며 일체종지를 얻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얻을 것이 있는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고도 한 지위로부터 다른 지위에 이르나니, 왜냐 하면 얻을 것이 있는 가운데 머무르면 한 지위로부터 다른 지위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수보리야, 얻을 것이 없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모양이요 얻을 것이 없는 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이며, 얻을 것이 없는 것이 또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의 모양이기 때문이니,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을 수 없으며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도 또한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하여 ‘이것은 물질이다, 이것은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다’ 내지는 ‘이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물질을 얻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을 얻지 않으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지 않느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물질을 얻을 수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단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며, 보살의 법위(法位) 안에 들어가고 들어가서는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면서 일체종지를 얻으며, 일체종지를 얻은 뒤에는 법륜(法輪)을 굴리고 불사(佛事)를 하면서 중생들을 생사(生死)로부터 제도하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물질을 위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보살은 무슨 일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느니라. 왜냐 하면, 모든 법은 위하는 것이 없고 짓는 것도 없으며, 반야바라밀도 또한 위하는 것이 없고 짓는 것도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또한 위하는 것이 없고 짓는 것도 없으며, 보살도 또한 위하는 것이 없고 짓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위하는 것이 없고 짓는 것도 없어야 하느니라.”
【論】해석한다. 청중은 갖가지로 반야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을 듣고는 온갖 일을 잘 알게 되었으며, 게다가 반야바라밀의 방편을 귀히 여기고 좋아하며 얻고 싶어 하므로, 수보리는 사람들의 뜻을 알아차리고 이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떻게 반야를 행하고 어떻게 내며 어떻게 닦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행한다[行] 함은, 간혜지(乾慧地)에 있는 것이요, 낸다[生] 함은 무생인(無生忍)의 법을 얻은 것이며, 닦는다[修] 함은 무생인의 법을 얻은 뒤에 선(禪)바라밀로써 반야를 훈수(熏修)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길 “5중(衆)은 바로 온갖 세간에서 마음으로 하는 행을 결박하는 처소요, 열반은 곧 고요하고 사라진 모양[寂滅相]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예리한 지혜의 힘으로써 능히 5중을 파괴하고
통달하여 공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열반의 고요하고 사라진 모양이다. 이 고요하고 사라진 데서부터 벗어나 6정(情) 가운데에 머무르되 도리어 고요히 사라진 모양을 생각하면서 ‘세간의 모든 법은 모두가 공하고 거짓이며 견실(堅實)하지 못한 것’이라고 아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라 한다.
반야를 행하면서도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있다ㆍ없다’라고 말할 수 도 없으며, 언어(言語)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공(空)이니,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마치 허공과 같이 낸다[生]’고 한다. 또 허공과 같은 것은 그 가운데서 나오는 어떤 법도 없으며, 허공은 또한 내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법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접촉도 없고 작용도 없는 모양이기 때문이니, 반야바라밀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고 하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허공이 있기는 하나 다만 항상하는 법이어서 작용함이 없기 때문에 낼 수가 없나니, 이것이 곧 일정한 모양[定相]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마하연(摩訶衍) 가운데에는 허공은 없는 법[無法]이라 하여 항상 있다[常]고도 말할 수 없고 무상(無常)하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얻을 수도 없고 모든 희론이 소멸되었으며, 물드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문자(文字)도 없다.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세간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능히 관찰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반야바라밀을 낸다’고 한다.
보살은 반야를 얻은 뒤에 매우 깊은 선정에 들어가 반야의 힘으로써 선정과 선정의 대상[緣]을 관찰하여 모두 파괴한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온갖 법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 모양이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컬어 ‘반야바라밀을 닦는다’고 한다.
듣는 이들이 생각하기를 “온갖 법은 모두 시절이 있다”고 하자, 이 때문에 수보리가 여쭈기를 “반야바라밀은 얼마 동안이나 행해야 합니까”라고 하였고,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행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문】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마땅히 10지(地)와 6바라밀과 37품(品) 등 온갖 착한 법을 행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반야만을 행하라고 말씀하시는가?
【답】수보리가 다만 반야만을 묻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대답하시길 “반야를 행하라”고 하셨을 뿐이다. 또 이 온갖 법은 모두가 반야바라밀과 화합하며, 반야가 크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법은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문】반야바라밀은 한량도 없고 한계도 없거늘 무엇 때문에 도량(道場)으로써 한계를 삼으셨는가?
【답】앞에서도 이미 대답했었다. 이 반야는 부처님의 마음 가운데에 이르면 바뀌어서 살바야라 한다. 이치는 비록 하나라 하더라도 이름이 변했기 때문에 ‘도량에 이르기까지 행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보살이 도량에 이르면 뜻을 낸 이래로 얻었던 모든 법을 모두 다 버리고 무애해탈(無礙解脫)을 얻기 때문에 3세(世)를 다 통달하게 된다.
【문】손가락을 튕기는 잠깐 동안도 60번의 생각이 있어서 그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고 하거늘 어떻게 한마음[一心]4)으로 항상 살바야를 생각하면서 다른 생각이 들어 올 수 없게 한다 하시는가?
【답】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고 하는[念念生滅] 마음이요, 또 다른 하나는 상속하며 생겨나는 마음이니, 통틀어서 하나의 마음이라 한다. 상속하면서 차례로 생겨나기 때문에 비록 많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마음이라 하는 것이다.
이때에 탐내거나 성내는 등의 마음이 상속하여 들어올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탐내고 성내는 등의 마음이 오래 머무르면 곧 반야바라밀에 장애가 되지만, 생각이 적으면 해칠 수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새로 뜻을 낸 보살들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또 큰 보살은 비록 그 밖의 다른 모든 착한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반야와 화합하여 생각생각마다 그 밖의 다른 마음이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할 수 있지만, 보살은 대개가 반야 가운데에서 갖가지 희론과 모든 삿된 마음을 일으키게 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항상 살바야를 생각하여 그 밖의 다른 마음이 들어갈 수 없게 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항상 생각하고 있는 이는 마음이 다른 데로 향하지 않으며, 비록 죽게 되는 다급한 일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살바야를 잊지 않는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모양[行相]이란 이른바 마음[心]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을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문】범부의 사람은 무상정(無想定)5)에 들어가
무상천(無想天)6)에 태어나기도 하고, 성인은 유여열반(有餘涅槃)에 머물러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다. 온갖 성인들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서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행하지 않나니, 이것이 곧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지만, 보살이 반야를 행할 때에는 어떻게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행해지지 않겠는가?
【답】이런 일은 아비담(阿毘曇)에서의 설명이요 대승(大乘)에서의 이치는 아니다. 소승과 대승의 갖가지 차별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아비담으로써 마하연(摩訶衍)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
또 무상삼매(無相三昧) 속에서도 물질 등 모든 모양이 소멸하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無相] 하며,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도 내지 않아야 하니, 이 역시 또한 무상정이나 멸진정이 아니다.
【문】‘모양이 없다[無相]’는 것에 대한 뜻은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다. 혹 견제도(見諦道)의 신행(信行)과 법행(法行)을 ‘모양이 없다’고 하기도 하니, 사람은 그로써 민첩해지기 때문이다. 혹은 무색정(無色定)에서의 생각이 미세하여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또한 ‘모양이 없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3해탈문(解脫門)에서 열반을 반연하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요, 다만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행해지지 않는다[心心數法不行]’고 한 것이다. 열반의 모양이 없는 법[涅槃無相法]을 반연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소멸하지 않거늘 하물며 모양이 있는 법을 반연하는 것이겠는가.
【답】견제도에서와 무색정에서 말한 ‘모양이 없다’고 함은 그럴 수도 있지만, 만일 ‘열반의 모양이 없는 법을 반연한다’고 한다면, 이 일은 그렇지 않다. 부처님께서 항상 여러 가지로 열반에 대한 모양이 없고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법을 찬탄하셨으니, 그것이 곧 모양이 없고 반연이 없는 법이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반연한다’고 말하는가?
【문】남자와 여자 등의 모양은 소멸되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는 것이요, 열반의 모양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 열반의 모양을 취하여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내는 것이니, 이것을 반연한다고 하는 것이다.
【답】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온갖 유위(有爲)로 생기는 법은 모두가 악마의 그물[魔網]이요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다”고 하셨다. 만일 열반을 반연하는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바로 진실이라면 곧 유위법의 거짓된 모양을 상실할 것이며, 만일 진실하지 않다면 열반을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기를 “열반은 모양이 있어서 반연할 수 있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문】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기를 “열반의 법에는 세 가지 모양[三相]이 있다”고 하셨거늘 어찌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답】이 세 가지 모양은 임시로 붙인 이름일 뿐이니, 실체가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유위의 세 가지 모양을 깨뜨리기 위하여 ‘생기는 것도 없고[無生] 소멸하는 것도 없으며[無滅], 머무르는 것도 없고[無住] 달라지는 것도 없다[無異]’고 하셨던 것이니, 본래 무위(無爲)에는 달리 모양이 없는 것이다.
또 ‘생기는 모양[生相]’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여러 가지 인연으로써 생긴다[生]는 것을 타파하셨다. 마침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거늘 어떻게 생기는 것 없음[無生]이 있겠는가. 유위의 모양을 여의고서는 무위의 모양도 얻을 수 없나니, 이 때문에 무위는 다만 이름만 있을 뿐이요 제 모양[自相]이 없다.
또 부처님의 법은 진실로 고요하고 사라진[寂滅] 것이어서 희론이 없다. 만일 열반에 모양이 있다면 곧 그것은 정해진 모양이어서 취할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이 곧 희론이며, 희론 때문에 다툼이 생긴다. 만일 다투거나 성을 낸다면 오히려 하늘이나 인간 안에도 태어날 수 없거늘 하물며 열반이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열반은 모양이 없고 한량없으며 불가사의하여 모든 희론이 소멸된다”고 하신 것이다. 이 열반의 모양이 곧 반야바라밀이니, 이 때문에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마땅히 없어야 한다. 이는 앞 품(品)에서 ‘보살은 반야를 행하여 마음이나 마음이 아닌 모양[心非心相]을 여읜다’라고 설명한 것과 같다. 만일 마음이 아닌 모양[非心相]이 있다면, 따져 말하기를 무심(無心)의 모양이 어떻게 반야를 행한다고 하느냐고 하겠지만 지금은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었기 때문에 따지지 않아야 한다.
또 앞 세상의 무명(無明)과 뒤바뀜[顚倒]과 삿된 소견[邪見]의 인연 때문에 이 몸을 얻었으며, 이 몸 안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비록 선(善)이 있다 하더라도 인연(因緣)으로 생기기 때문에 제 성품이 없고 거짓되고 진실하지 못하다. 이 착한 마음의 과보는 사람과 하늘의 복락을 받지만 그것은 모두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큰 괴로움을 생기게 하며,
또한 그것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거늘 하물며 착하지 못한 것[不善]과 무기(無記)의 마음이겠는가. 원인[因]이 거짓이기 때문에 결과[果] 역시 거짓이다.
반야바라밀은 진실이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행해지지 않는다.
수보리는 이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듣고 그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살바야를 얻습니까”라고 하였고, 부처님은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왜냐 하면, ‘닦는다’고 함은 항상 행하면서 쌓아 모음[常行積集]을 말하며, 모두가 이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의 힘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닦는다’고 말한 것이니, 닦는 그것조차도 오히려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닦지 않는 것이겠는가.
‘닦거나 닦지 않는 것[修不修]’이라 함은, 이 반야는 무위의 법이기 때문에 ‘닦지 않는다[不修]’라 한 것이고, 능히 실상(實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닦는다[修]’라고 한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에 “아니니라”고 하신 것이다.
【문】만일 세 번째[第三] 안에 허물이 있다면, 네 번째[第四]에서는 무슨 허물이 있기에 다시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는가?
【답】수보리는 모양을 취하여 마음에 집착하면서 물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아니니라”고 하신 것이다. 닦거나 닦지 않는 것을 받기 때문에 닦는 것도 아니고 닦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 있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아니니라”고 하신 것이다. 만일 모양을 취하지 않은 마음으로써 ‘닦는 것도 아니고[非修] 닦지 않는 것도 아니다[非不修]’고 한다면 허물이 없다.
수보리가 네 가지로 물었는데도 부처님은 모두 인정하지 않으셨으므로 마음이 현혹되기 때문에 다시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이제 어떻게 하여 살바야를 얻어야 합니까”라고 하였으며,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마치 여의 모양[如相]과 같이 해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如)도 또한 이해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마치 실제(實際)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문】「여품(如品)」 가운데서 수보리는 스스로 “여를 잘 안다”고 말했으면서 지금은 어찌하여 의심이 있는가?
【답】이 여(如)는 일정한 모양이 없다. 그러므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여에 일정한 모양이 있다면, 이미 이해하였을 것이나 이 여는 매우 깊고 한량없기 때문에 수보리가 어떤 곳에서는 이해하다가도 어떤 곳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물이 있는데 깊은 곳 까지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얕은 데에만 들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 모두는 “물에 들어가 있다”고 할 것이며, 얕은 데에 들어간 이라 하여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문】무엇 때문에 여(如)는 실제(實際)에 비유하지 않고 실제만 여에 비유하였는가?
실제에는 무슨 알기 쉬운 것이 있기 때문에 비유한 것인가?
【답】여와 실제는 비록 동일한 것이라 하더라도 관찰할 때에는 다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체성(體性)이 곧 실제인지라 수행하는 이는 마음으로 증득을 위하는 것이며, 부처님께서도 수보리가 이 실제를 증득하였으므로 그것으로써 비유하신 것이다.
【문】항상 법성(法性)은 여(如)의 다음에 말씀하셨고 실제(實際)는 법성 다음에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법성을 나중에 말씀하셨는가?
【답】여기서는 나의 성품[我性]과 중생의 성품[衆生性]으로써 필경공(畢竟空)을 말씀하려고 차례를 바꾸어서 나중에 두신 것이다.
또 견제도(見諦道)와 학도(學道) 가운데서 능히 모든 법을 여라고 관찰하고, 무학도(無學道) 가운데서 번뇌가 다하기 때문에 선정의 마음을 증득하며, 선정의 마음을 증득했기 때문에 전체의 모양[總相]과 각각의 모양[別相] 가운데 통달하니, 이것을 일컬어 법성을 증득한다 한다. 모든 법이 본래 생기는 곳을 이름하여 성품[性]이라 하니, 이 때문에 법성으로써 실제에 비유한 것이다.
법성에는 성문의 몫[聲聞分]이 있고 대승의 몫[大乘分]이 있다. 수보리가 성문의 몫에서는 의심하지 않았으나 대승의 몫에서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에 물은 것이고, 부처님은 범부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如)와 나의 성품[我性]ㆍ중생의 성품[衆生性]ㆍ수명의 성품[壽命性]을 말씀하신 것이다.
수보리는 다시 더 물을 것이 없어져, 부처님께서 그 구절을 매듭지으시려고 짐짓 반문하시면서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我]라는 법이 실제로 있느냐”고 하셨고, 수보리는 도(道)를 얻었기 때문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수다원도 오히려 나[我]를 보지 않거늘 하물며 아라한이겠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소승의 둔한 지혜로도 오히려 나[我]를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부처님이겠느냐”라고 하였으니, 부처님께서 지혜로써 나[我]를 구해도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 마치 나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온갖 법이 있다는 것도 이와 같다. 보살은 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법[不可說法]’을 행하기 때문에 살바야를 얻게 되는 것이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함은 있다ㆍ없다는 분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을 분별할 수 없다면, 어떻게 분별하시어 지옥 등의 다섯 갈래와 수다원 등의 모든 성인의 도가 있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길 “중생은 정해진 어떤 법도 없다. 다만 임시로 붙인 이름이 있을 뿐이거늘 어떻게 분별해서 ‘지옥 등 중생과 모든 성인이 있다’고 하겠느냐. 중생들을 분별하면서부터 모든 도(道)에 대한 이름이 있지만 중생은 실로 얻을 수 없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수보리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마땅히 물질 등의 모든 법을 배워야 하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온갖 법에 대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배우라 하십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길 “보살이 비록 물질 등의 법을 배워야 하나, 다만 늘어나지도 않고[不增] 줄어들지도 않기[不滅] 때문에 배워야 할 뿐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이 가운데 부처님께서 친히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인연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보살이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는[不滅] 법을 배우면, 곧 그것이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수보리가 여쭈기를 “어떻게 해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며,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모든 행업(行業)에서 있다[有]ㆍ없다[無]고 하는 것을 일으키지도 않고 짓지도 않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있다[有]에는 3유(有)가 있으니, 욕유(欲有)와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이다. 없다[無]는 것은 아주 없다[斷滅]고 하는 치우친 소견을 말하며, 8성도(聖道)를 여의고 억지로 소멸하기를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일 때문에 범부는 착하거나 착하지 못한 모든 행업을 일으킨다.
이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 즉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을 안다. 이 때문에 세 가지 업을 짓지도 않고 업(業)과 상응하는 모든 법을 일으키지도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이라 하고,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을 곧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이라 한다.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떤 방편 때문에 모든 행업을 짓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일 보살이 모든 법의 자체의 모양이 공함[自相空], 이를테면 물질은 물질의 모양이 공하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은
아뇩다라삼보리의 모양이 공하다고 관찰하면, 보살은 그때에 두 가지 일을 지을 수 있나니, 첫째는 모든 행업을 짓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는 것이요, 둘째는 온갖 법 가운데서 자체의 모양이 공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물질 등의 법이 자체의 모양이 공하다면, 어떻게 보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행하여야 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길 “행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반야 가운데서 행한다 하느니라”고 하셨다.
이 가운데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길 “반야바라밀은 체성[體]을 얻을 수 없나니, 행하는 이[行者]와 행하는 법[行法]과 행하는 곳[行處]도 얻을 수 없느니라. 법이 공하기[法空]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없고 행할 곳을 또한 얻을 수 없으며, 중생이 공하기[衆生空] 때문에 행하는 이를 얻을 수 없으며, 온갖 희론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보살이 행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느니라”고 하셨다.
수보리가 여쭈기를 “만일 행하지 않는 것이 곧 반야를 행하는 것이라 한다면, 처음 발심한 보살은 어떻게 반야를 행하여야 합니까”라고 하였으니, 수보리의 뜻으로는 ‘만일 행하지 않는 것이 행하는 것이 된다면 처음 발심한 보살은 마음이 혼미하게 되며, 만일 행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곧 뒤바뀐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길 “처음 발심한 보살은 마땅히 얻을 것이 없는 법[無所得法]을 배워야 하나니, 얻을 것이 없는 법이란 곧 행함이 없이 배운다[無行學]는 말이니라. 방편의 힘으로써 점차로 행하나니, 이른바 보시할 때에 얻을 것이 없는 법으로써 모든 법의 실상과 필경 공에 보시해야 하는 것이니라.
필경 공한 가운데서는 있다ㆍ없다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보살도 이와 같은 지혜의 마음속에 머물러 많거나 적거나 간에 보시해야 하는 것은, 보시하는 물건과 주는 이와 받는 이를 평등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니, 모두가 얻을 수 없으며 살바야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느니라”고 하셨다.
수보리가 생각하기를 ‘얻을 것이 있기[有所得] 때문에 이 세간은 뒤바뀌며,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곧 열반이다’라고 하고,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여쭈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얻을 것이 있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얻을 것이 없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간략하게 말씀하시기를 “둘이 있는 모양[二相]은 얻을 것이 있는 것이요, 둘이 없는 모양[無二相]은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둘이 있는 모양’이란 눈이 하나요 물질도 하나여서 이 양쪽의 하나가 화합하는 것을 둘이라 한다. 눈 때문에 저것이 빛깔임을 알고 빛깔 때문에 이것이 눈임을 아는 것이니, 눈과 빛깔은 상대(相待)하는 법이다.
【문】빛깔을 보지 않을 때에도 눈은 있거늘 어찌하여 눈은 빛깔을 떠나지 못한다 하는가?
【답】일찍이 빛깔을 보았기 때문에 눈이라 한다. 이제 비록 빛깔을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래의 것으로써 부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온갖 유위의 법[有爲法]은 인연에 속하며, 인(因)은 결과에 속하고 결과는 연(緣)에 속하여 정해지거나 자재함이 없나니, 나아가 뜻의 법[意法]과 보살ㆍ부처님도 역시 이와 같다.
범부는 지혜가 없으므로 저마다 분별하여 착한 업[善業]과 착하지 못한 업을 짓고 있지만, 지혜 있는 이는 이 두 가지 법은 모두 거짓이어서 인연에 속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이 둘을 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보리가 여쭈기를 “이 둘의 법은 곧 얻을 것이 있는 것이요 둘이 아닌 법은 곧 얻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얻을 것이 있는 법 가운데서도 얻을 것이 없고 얻을 것이 없는 법 가운데서도 얻을 것이 없다면, 모든 법을 반연하여 모양을 취하면서 도를 행하므로 이것은 필경 공하여 얻을 것이 없는 것이 되며, 반연하지 않고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서 도를 행하지 않는 것이므로 이것도 필경 공하여 얻을 것이 없는 것이 됩니다.
만일 얻을 것이 있는 것[有所得] 가운데서 얻을 것이 없다면, 이 얻을 것이 있는 것은 곧 뒤바뀐 것인지라 뒤바뀜을 행하고 있는데 어떻게 진실을 얻겠습니까. 만일 얻을 것이 없는 것[無所得] 가운데 얻을 것이 없다면, 얻을 것이 없는 것은 곧 아무것도 없는 것[無所有]인지라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것을 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가 다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에 모두 인정하지 않으셨으니,얻을 것이 있는 것과 얻을 것이 없는 것의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평등하다고 관찰하나니, 평등하다면 곧
그것은 필경 공하여 얻을 것이 없는 것이요,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 인하여 얻을 것이 있는 것을 파괴한다. 일이 이미 이렇게 끝나면 역시 얻을 것이 없다는 것도 버리게 된다.
이와 같이 보살은 얻을 것이 있는 것과 얻을 것이 없는 것의 평등한 반야 가운데서 마땅히 배워야 한다. 만일 보살 이 이와 같이 배우면, 이것을 이름하여 참으로 얻을 것이 없는 것[無所得]이라 하며 과실이 없나니, 한 지위[一地]로부터 다른 지위에 이르는 이치도 또한 이와 같다.
수보리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반야도 얻을 수 없고 보리(菩提)도 얻을 수 없고 보살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보살이 반야를 배워서 모든 법의 모양 즉 ‘괴롭히는 모양[惱相]은 곧 물질[色]이요 괴롭다ㆍ즐겁다 하는 모양[苦樂相]은 곧 느낌[受]이다’라고 분별하게 되며, 만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물질 등의 법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단(檀)바라밀 등 모든 착한 법을 두루 갖출 수 있으며 어떻게 보살의 지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으니, 경 가운데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물질 등의 모든 법 모양을 얻기 때문에 반야를 행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그러자 또 여쭈기를 “무슨 일 때문에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얻을 것이 없기[無所得] 때문에 반야를 행하느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은 공(空)하고 모양이 없고[無相] 조작이 없고[無作] 일으키는 것이 없으며[無起], 반야바라밀과 보살과 보리도 또한 모양이 없고 조작이 없고 일으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보살은 온갖 법의 실상을 위하여 반야를 행하면서도 뒤바뀐 것으로써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조작이 없는 반야 가운데서 짓는 것도 없고 일으키는 것도 없는 것을 행해야 하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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