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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93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81권

by Kay/케이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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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81

 

대지도론 제81권

68. 육도품(六度品)을 풀이함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찬제(羼提)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단(檀)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도량(道場)에 앉기까지 그 사이에 온갖 중생들이 와서 성을 내고 욕하고 꾸짖거나 또는 온몸을 찢는다 해도, 보살은 인욕(忍辱)에 머무르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온갖 중생에게 보시해야 하며 베풀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중생이 밥을 구하면 밥을 주고, 마실 것을 구하면 마실 것을 주며, 살림에 필요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그에게 베풀어야 한다’라고 하니, 이 공덕을 지니어 온갖 중생들과 함께 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회향(迴向)하느니라. 이 보살이 회향할 때에 ‘그 누가 회향하는 자[誰迴向者]이며, 어디로 회향하는가[迴向何處]’에 대한 두 가지의 마음을 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단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시라(尸羅)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그 사이에 끝내 남의 목숨을 빼앗지도 않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으며, 나아가 삿된 소견을 내지 않고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탐내지도 않으니, 이러한 공덕을 지니어 온갖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느니라. 이 보살이 회향할 때에는 ‘그 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고, 어떠한 법으로써 회향하며, 어디로 회향하는가’ 하는 이 세 가지 마음을 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시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찬제바라밀에 머물러 정진하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1유순(由旬), 아니 10유순(由旬), 백천만억 유순을 가고 한 세계를 지나며, 나아가 백천만억의 세계를 지나면서 한 사람이라도 교화하여 5계(戒)를 지니게 해야 하겠거늘, 하물며 수다원의 과위[須陀洹果]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阿羅漢果]와 벽지불의 도[辟支佛道]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는 것이랴’고 하느니라. 그리고는 이 공덕을 지니어 온갖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나니, 이것이 곧 보살마하살이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비리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선(禪)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욕락을 여의고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떠나며,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이 있고 여읨에서 생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가며, 나아가 제4선(禪)에 들어가느니라. 이 모든 선정 안의 청정한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이 모두 살바야(薩婆若)2)에 회향하며, 회향할 때에 이 보살은 모든 선정과 선정 갈래[禪支]를 모두 얻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보살마하살이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선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반야(般若)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모든 법의 여읜 모양[離相]과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과 다함이 없는 모양[無盡相]을 관(觀)하고 고요히 사라진 모양으로써 증득하지 않으며, 나아가 도량에 앉아 일체종지를 얻고
도량으로부터 일어나서 곧 법륜(法輪)을 굴리느니라. 이것이 곧 보살이 찬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반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 그것은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단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되, 게으르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하니, 얻지 못하면 안 된다’고 하느니라. 이 보살은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1유순 혹은 백천만억 유순을 가고 하나의 세계를 지나고 혹은 열개의 세계를 지나고 혹은 백천만억의 세계를 지나도록 비리야바라밀 가운데에 머물러, 어느 한 사람도 부처님의 도 가운데에서 성문의 도나 벽지불의 도에 들지 못하게 하느니라. 혹은 한 사람이라도 그로 하여금 10선도(善道)를 행하게 하고, 정진하고 게으르지 않게 하며, 법 보시[法施]와 재물의 보시[財施]로써 두루 갖추게 하느니라. 이런 공덕을 지니어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되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회향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단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시라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처음 발심해서부터 도량에 앉기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살생하지 않고 다른 이를 시켜서 살생하지도 않으며, 살생하지 않는 법을 칭찬하고 살생하지 않는 이를 기뻐하면서 찬탄하며, 나아가 스스로 삿된 소견을 멀리 여의고 다른 이로 하여금 삿된 소견을 멀리 여의게 하며, 삿된 소견이 아닌 법을 칭찬하고 삿된 소견을 지니지 않는 이를 기뻐하면서 찬탄하느니라.
이 보살은 시라바라밀에 머무른 인연으로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복을 구하지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구하지 않으니, 이런 공덕을 지니어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되 세 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곧 회향하는 이를 보지 않고 회향하는 법을 보지 않으며, 회향하는 곳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시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찬제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처음 뜻을 내서부터 도량에 앉기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사람이나 사람 아닌 이[非人]가 와서 그의 몸을 갈갈이 찢고 끊어도,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의 몸을 베는 이가 누구일까. 나의 몸을 끊는 이가 누구일까. 나의 몸을 빼앗는 이가 그 누구일까’ 하고,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좋은 이익을 크게 얻는구나. 나는 중생들을 위하여 몸을 받은 것인데 중생이 도리어 스스로 와서 가져가니 말이다’라고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바르게 기억하며 이 공덕을 지니어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로 향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찬제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선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욕락을 여의고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며,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고 여읨에서 생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가고 제2선ㆍ제3선ㆍ제4선에까지 들어가며, 자(慈)ㆍ비(悲)ㆍ희(憙)ㆍ사(捨)에 들어가고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常處)에까지 들어가느니라. 이 선(禪)ㆍ무량심(無量心)ㆍ무색정(無色定)을 지니고서도 그 과보를 받지 않으며,
중생을 이롭게 할 처소에 태어나 단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에 이르는 6바라밀로써 중생을 성취시키느니라. 그리하여 한 부처님의 국토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국토에 이르면서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 하고 공양하여 선근(善根)을 심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선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반야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단바라밀의 법(法)을 보지도 않고 단바라밀의 모양[相]도 보지 않으며, 나아가 선바라밀의 법도 보지 않고 선바라밀의 모양도 보지 않으며, 4념처에서 일체종지까지도 그 법을 보지 않고 역시 그 모양도 보지 않으며, 온갖 법에 대하여 ‘법이 아닌 것’과 ‘법이 아닌 것도 아님’을 보지 않고 온갖 법 가운데서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이 보살이 하는 일은 말한 바와 똑같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반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단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모든 욕락을 여의고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며,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고 여읨에서 생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가고 나아가 제2선ㆍ제3선ㆍ제4선에 들어가며,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처에 들어가 선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느니라. 또한 법의 보시[法施]와 재물의 보시[財施]의 두 가지 보시로 중생에게 베풀되, 스스로 두 가지 보시를 행하면서 다른 이들에게도 두 가지 보시를 행하게 하며, 두 가지 보시의 법을 찬탄하고 두 가지 보시를 행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찬탄하느니라. 그리고는 이 공덕을 지니어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되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로 향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단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시라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음욕[婬欲]과 성냄[瞋恚]과 어리석은 마음[愚癡心]을 내지 않고 다른 이를 괴롭히는 마음도 내지 않으며, 다만 일체지(一切智)3)와 상응하는 마음을 닦고 행할 뿐이니라. 그리고는 이 공덕을 지니어 중생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되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로 향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시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찬제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물질[色]은 마치 물거품 덩어리[聚沫]와 같다고 관(觀)하고 느낌[受]은 마치 작은 물거품[泡]과 같다고 관하며, 생각[想]은 마치 아지랑이[野馬]와 같다고 관하고 의욕[行]은 마치 파초(芭蕉)와 같다고 관하며, 인식[識]은 마치 환(幻)과 같다고 관하느니라. 이런 관(觀)을 지을 때에 5중(衆)에는 견고한 모양이 없다고 보면서 생각하기를 ‘나의 몸을 베는 이는 누구일까. 나의 몸을 자르는 이는 누구일까. 그 누가 느끼고 그 누가 생각하며 그 누가 의욕을 내고 그 누가 인식하는 것일까. 그 누가 욕설을 퍼붓는 이고 그 누가 욕설을 받는 이며 그 누가 성을 내는 이일까’라고 관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찬제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비리야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욕락을 여의고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며,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고 여읨에서 생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가고 제2선ㆍ제3선ㆍ제4선에 들어가며, 이 모든 선과 그 갈래[禪支]의 모양을 취하면서 갖가지 신통을 내나니, 물[水]을 밟는 것이 마치 땅에서와 같고 땅속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물에서와 같으니라. 또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천이(天耳)로써 하늘과 사람의 두 가지 음성을 들으며, 다른 이의 마음[他心]에 대해 가다듬은 마음인지 혹은 산란한 마음인지를 알고, 나아가 위가 있는 마음[有上心]인지 혹은 위없는 마음[無上心]인지를 아느니라.
갖가지의 숙명(宿命)을 기억하는 것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천안(天眼)이 청정하여 사람의 눈보다 뛰어나므로 중생들이 지었던 업대로 그 과보를 받고 있는 것까지도 보니, 그것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으니라. 보살은 이 다섯 가지의 신통에 머물러 한 부처님 세계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 세계에 이르면서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 하고 공양하며 선근을 심으면서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니, 이 공덕을 지니어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비리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반야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물질을 얻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을 얻지 않으며,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을 얻지 않고 반야바라밀도 얻지 않으며, 4념처를 얻지 않고 일체종지까지도 얻지 않으며, 유위의 성품[有爲性]을 얻지 않고 무위의 성품[無爲性]도 얻지 않느니라. 얻지 않기 때문에 짓지 않고 짓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지 않으며,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없어지지도 않나니,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이 여(如)ㆍ법상(法相)ㆍ법성(法性)은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어서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언제나 일심으로 살바야에 응하여 행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반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단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내공(內空)은 안도 공(空)한지라 얻을 수 없고 외공(外空)은 바깥도 공한지라 얻을 수 없으며, 내외공(內外空)은 안팎이 다 공한지라 얻을 수 없고 공공(空空)은 공도 공한지라 얻을 수 없으며, 나아가 일체법공(一切法空)은
온갖 법이 다 공한지라 얻을 수 없느니라. 보살은 이 열 네 가지 공(空)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물질의 모양이 공한 것과 공하지 않은 것도 얻지 못하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모양이 공한 것과 공하지 않은 것도 얻지 못하며, 4념처의 공한 것과 공하지 않은 것도 얻지 못하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공한 것과 공하지 않은 것도 얻지 못하며, 유위의 성품과 무위의 성품이 공한 것과 공하지 않은 것도 얻지 못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그가 가진 음식과 의복과 갖가지 살림살이를 보시하면서도 이 보시도 공(空)하다고 관하느니라. 어떤 것이 공한 것이냐 하면,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 및 재물이 공한 것이므로, 간탐하는 마음을 내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망상분별이 없기 때문이니라. 마치 모든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에 아끼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아끼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느니라. 이 보살이 존중할 것은 반야바라밀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단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시라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내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이 보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는 얻을 수 없고 성문이나 벽지불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그 중간에 스스로 살생(殺生)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살생하지 않게 하며, 살생하지 않는 법을 칭찬하고 살생하지 않는 이를 기뻐하면서 찬탄하며,
나아가 스스로 삿된 소견을 지니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삿된 소견을 내지 않게 하며, 삿된 소견이 아닌 법을 칭찬하고 삿된 소견을 지니지 않는 이를 기뻐하면서 찬탄하느니라. 이러한 계율을 지니기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로서 취할 만한 어떤 법도 없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법이겠느냐. 이것이 바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시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찬제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수순법인(隨順法忍)이 생기면, 생각하기를 ‘이 법 가운데에는 어떤 법도 일어나거나 없어지거나, 태어나거나 죽거나, 욕설을 당하거나 나쁜 말을 듣거나, 베거나 자르거나 파괴하거나, 속박하거나 때리거나 죽이는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이 보살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온갖 중생들이 와서 욕하고 꾸짖고 나쁜 말을 하거나, 칼이나 몽둥이ㆍ기와ㆍ돌로써 베고 때리고 상해한다고 해도 그는 마음이 동요하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참으로 괴이하구나. 이 모든 법 가운데에는 꾸짖음을 받고 나쁜 말을 들으며 베이고 끊기고 상해받는 법이 없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어떤 법도 없는데도 중생들은 괴로움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찬제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비리야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행하게 하고, 그들을 교화하여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을 행하게 하며,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얻게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면서,
유위(有爲)의 성품에도 머무르지 않고 무위(無爲)의 성품에도 머무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비리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선바라밀을 취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모든 부처님의 삼매(三昧)를 제외하고 그 밖의 다른 온갖 삼매에 들어가니, 혹은 성문의 삼매 혹은 벽지불의 삼매 혹은 보살의 삼매를 모두 행하고 모두 들어가느니라.
이 보살은 모든 삼매에 머무르면서 8배사(背捨)4)에 역(逆)으로 순(順)으로 나고 들고 하느니라. 무엇이 여덟이냐 하면, 안에 색상(色想)이 있으면서 밖에 있는 깨끗하지 못한 모든 색상을 관(觀)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의 배사요, 안에 있는 색상은 없어졌으나 밖의 색을 계속 관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의 배사며, 청정한 배사를 몸으로 증득하는 것이 바로 세 번째의 배사요, 온갖 색상을 지나서 대함이 있는 모양을 없애고 갖가지의 모습을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무량허공처(無量虛空處)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네 번째의 배사이니라. 온갖 허공처를 지나서 무변식처(無邊識處)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다섯 번째의 배사요, 온갖 식처(識處)를 지나서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여섯 번째의 배사이며, 온갖 무소유처를 지나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常處)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일곱 번째의 배사요, 온갖 비유상비무상처를 지나서 멸수상처(滅受想處)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여덟 번째의 배사이니라.
이 8배사와 9차제정(次第定)에 역으로 순으로 나고 들고 하느니라. 무엇이 아홉이냐 하면, 모든 욕락을 여의고 모든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떠나며,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이 있으며, 여읨에서 생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가고,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를 지나서 멸수상정(滅受想定)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9차제정에 역으로 순으로 들고 난다 하느니라.
이 보살은 8배사와 9차제정에 의하여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에 들어가느니라. 무엇이 사자분신삼매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은 욕락과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며,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으며, 여읨에서 생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가고 멸수상정에까지 들어가며,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다시 비유상비무상처에 들어가고 비유상비무상처로부터 일어나 도로 다시 초선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이 보살은 사자분신삼매에 의하여 초월삼매(超越三昧)에 들어가느니라. 무엇이 초월삼매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은 욕락을 여의고 모든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며,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으며, 여읨에서 생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가고 초선으로부터 일어나 이에 비유상비무상처에 들어가며, 비유상비무상처로부터 일어나 멸수상정에 들어가고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도로 초선에 들어가며, 초선으로부터 일어나 멸수상정으로 들어가고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도로 제2선에 들어가며, 제2선으로부터 일어나 멸수상정에 들어가고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제3선에 들어가며, 제3선으로부터 일어나 멸수상정에 들어가고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제4선에 들어가며, 제4선으로부터 일어나 멸수상정으로 들어가느니라.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공처(空處)에 들어가고 공처로부터 일어나 멸수상정에 들어가며,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식처(識處)에 들어가고 식처로부터 일어나 멸수상정에 들어가며,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가고 무소유처로부터 일어나 멸수상정에 들어가며,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비유상비무상처에 들어가고 비유상비무상처로부터 일어나 멸수상정에 들어가느니라.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흩어진 마음[散心] 가운데에 들어가고 흩어진 마음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멸수상정에 들어가며, 멸수상정으로부터 일어나 도로 흩어진 마음 가운데에 들어가며,
흩어진 마음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비유상비무상처에 들어가고 비유상비무상처로부터 일어나 도로 흩어진 마음 가운데에 들어가며, 흩어진 마음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무소유처에 들어가고 무소유처로부터 일어나 흩어진 마음 가운데에 머무르며, 흩어진 마음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식처에 들어가고 식처로부터 일어나 흩어진 마음 가운데에 머무르며, 흩어진 마음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공처에 들어가고 공처로부터 일어나 흩어진 마음 가운데에 머무르느니라.
흩어진 마음 가운데로부터 제4선에 들어가고 제4선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흩어진 마음 가운데에 머무르며, 흩어진 마음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제3선에 들어가고 제3선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흩어진 마음 가운데에 머무르며, 흩어진 마음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제2선에 들어가고 제2선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흩어진 마음 가운데에 머무르며, 흩어진 마음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초선에 들어가고 초선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흩어진 마음 가운데에 머무르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초월삼매에 머무르면서 모든 법의 평등한 모양[等相]을 얻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선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論】【문】무엇 때문에 다만 하나의 바라밀만으로 주(主)를 삼는가?
【답】수행하는 인연의 차례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보살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이다. 재가의 보살은 복덕의 인연 때문에 크게 부유하며, 크게 부유하기 때문에 부처님 도의 인연을 구하면서 모든 바라밀을 행하되, 마땅히 먼저 보시를 행해야 한다. 왜냐 하면, 이미 재물이 있고 또 죄와 복을 알며 겸하여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도 있기 때문에 당연히 먼저 보시를 해야 한다. 그리하여 차례차례 인연을 따라 모든 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출가보살은 재물이 없기 때문에 차례에 따라 당연히 계율을 지니고 욕됨을 참으며 선정을 닦아야 하나니, 그 순서가 마땅한 것이므로 주(主)로 삼는 것이다. 재물의 보시를 제외한 그 밖의 다른 바라밀은 모두가 출가한 사람들이 행해야 할 것이다.
보살은 찬제바라밀을 주로 삼으면서 원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몸을 끊고 벤다 해도 성을 내지 않아야 한다. 나는 지금 보살의 도를 행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모든 바라밀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모든 바라밀 가운데서 단(檀)바라밀이 맨 처음에 있다. 단(檀)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하고 아끼는 것은 몸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남에게 이것을 능히 보시하고 아까워하지 않으며 성내지도 않게 되면, 인욕(忍辱)바라밀을 두루 갖추면서도 단(檀)바라밀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보살이 인욕 가운데 머무르면서 중생에게 보시하고 의복과 음식 등의 모든 물건을 모두 공급할 적에 받는 이가 그 보살을 거역하면서 욕하고 꾸짖고 때리고 해치는 등으로 그의 보시를 파괴하더라도, 그것을 참으면서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이 거짓으로 된 몸 때문에 바라밀의 도를 허물지 않아야 한다. 나는 마땅히 보시를 해야 하고 나쁜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니, 조그마한 나쁜 인연 때문에 그만두거나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런 보살은 그 목숨이 다하기 전에는 보시하는 마음이 더욱 더하다가, 만일 목숨을 마치면 두 바라밀의 힘 때문에 곧 좋은 곳에 태어나 계속해서 보시를 행하게 된다.
“시라바라밀을 취한다[取尸羅波羅蜜者]”는 것에 대하여 문답한다.
【문】인욕에 머무른 때에 악(惡)을 짓지 않으면 그것이 곧 계율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인욕에 머물면서 지계바라밀을 취한다”라고 말했는가? 마땅히 계율에 머무르면서 인욕을 섭수해야 한다.
【답】여기에서는 다만 그 모양만을 설명하고 모양이 생기는 차례는 말하지 않았다. 비록 한데 합쳐 있다 하더라도 저마다의 모양이 있는 법이니, 만일 차제법이라면 마땅히 먼저 계율이 있고 그 뒤에 인욕이 있어야 한다. 계율은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는 말이요, 인욕은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이니, 이 때문에 인욕 가운데서 특별히 계율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또 인욕은 스스로가 그의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성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지계(持戒)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스스로 선정의 근본을 내는 것이다. 어떤 보살은 인욕을 행하면서도 아직 계법(戒法)을 받아 지니지 못하고 다만 죄만을 두려워하여 그 때문에 참을 뿐이니, 아직 중생들을 깊이 불쌍히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혹은 스승으로부터 듣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계율을 지니는 것은 곧 부처님 도의 인연이라서 중생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제는 이미 인욕을 할 수 있으므로 이런 일을 행하기 쉽다’고 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인욕으로 능히 시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인욕은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이요, 지계는
형상 있는 법[色法]이니, 지계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입으로 말을 하고 받아 지니는 것이나, 인욕은 다만 이 마음에서 우러나올 뿐이요, 받아 지니는 법이 아니다.
또 몸과 입이 청정한 것을 지계라 하고, 뜻이 청정한 것을 인욕이라 한다.
【문】선정[禪]ㆍ지혜[智]바라밀도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법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인욕만을 말씀하는가?
【답】선정과 지혜의 힘은 크기 때문에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계율을 지닐 때에 마음이 아직 청정하지 못하면, 모름지기 인욕을 하면서 마음을 수호해야 하기 때문에 이 경 가운데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길 “어떤 보살은 큰 공덕과 지혜가 있고 근기가 영리하므로 현재 계시는 부처님 처소에서 발심하여 모든 바라밀을 행하고 있나니, 이 때문에 세상마다 더욱 더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5)에 이르기까지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하고, 이런 보살을 위하여 짐짓 말씀하시길 “그는 처음 발심해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고 중생의 목숨을 빼앗지 않으며, 또한 2승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그것은 이 두 바라밀의 공덕 때문이며, 그 때문에 세 가지 마음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 세 가지 마음[三心]이란, 사람[人]도 없고 법(法)도 없고 회향할 곳[廻向處]도 없는 것이니, 나라고 하는 마음[我心]과 뒤 바뀐 마음[顚倒心]이 없다.
“비리야바라밀을 취한다[取毘梨耶波羅蜜]” 함은, 스스로 공덕을 쌓고 중생을 제도하고 발심하여 게으르지 않으며, 이에 그 일을 이루어 마치기까지 도(道)를 가로막는 인연이 있어도 마음이 위축되지 않고 물러나지도 않아서 여러 가지 괴로움을 견뎌내며, 오래도록 애쓰고 고생하더라도 어렵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마치 경에서 말씀하기를 “이 보살은 천만 유순6)을 지나는 동안 한 사람조차도 진실한 법에 들거나 열반을 얻게 하지 못했다 해도 이때의 마음은 역시 근심하지 않으며, 만일 한 사람을 만나 5계(戒) 등을 지니게 했다면 그때에는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한량없는 국토를 지나와서 정작 이 한 사람을 얻었구나’라고 하면서 걱정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과 같다. 왜냐 하면,
한 사람의 모양은 곧 온갖 사람들의 모양이요, 온갖 사람의 모양은 바로 한 사람의 모양이어서 이 모든 법의 모양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바라밀을 취한다[取禪波羅蜜]’고 함은, 이 보살이 인욕의 힘 때문에 그 마음이 제어되어 유연해지고, 마음이 제어되어 유연해지기 때문에 선정을 얻기 쉽고, 그 선정 가운데서 자비(慈悲) 등의 모든 청정한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얻어서, 모두 이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취한다[取般若波羅蜜]’고 함은, 보살이 중생인(衆生忍)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온갖 중생들이 나쁜 일을 가한다 해도 참으면서 큰 자비를 행하니, 이 때문에 큰 복덕을 얻는다. 큰 복덕을 얻기 때문에 마음은 유연해지고, 마음이 유연해지기 때문에 이른바 온갖 법은 끝내 생함이 없는[無生] 법인(法忍)을 쉽게 얻나니, 이 법인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온갖 법의 공한 모양[空相]과 여의는 모양[離相]과 그지없이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 마치 열반의 모양과 같다고 관하는 것이다.
그때에는 도리어 중생인(衆生忍)이 더욱더 자라거늘 이와 같은 필경의 공[畢竟空]에서 그 누가 꾸짖는 이겠으며, 그 누가 해치는 이겠는가. 그때에는 두 가지의 인(忍)이 두루 갖추어지기 때문에 인욕하는 법[忍法]ㆍ인욕하는 이[忍者]ㆍ인욕하는 곳[忍處]의 세 가지의 일을 보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온갖 법에 대하여 희론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법은 공하고 고요히 사라진 모양이어서 열반과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큰 서원을 세워 부처님 도를 구하게 된다.
저 필경의 공한 법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도량(道場)에 앉기 전까지는 실제(實際)를 증득하지 않다가 도량에 앉은 뒤에는 부처님 법을 갖추어서 부처님 도를 증득하고 법륜(法輪)을 굴리면서 뜻대로 중생을 제도하게 되나니, 이것은 모두가 반야바라밀의 힘이다.
‘비리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단바라밀을 취한다[住毘梨耶波羅蜜取檀波羅蜜]’고 함은, 보살이 처음에 정진의 문으로써 모든 바라밀 가운데에 들어가 부지런히 다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면서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되 쉬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으며, 정진 외에 다시는 다른 것이 없어서 이렇게 정진하는 것에 머무르면,
아비니리(阿鼻泥犁)7)의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고통이겠는가. 보살은 또한 온갖 법은 필경 공하고, 필경 공한 것으로부터 나옴을 알아 자비로운 마음 때문에 선업(善業)을 일으키면서도 열반을 취하지 않으니, 이것이 정진(精進)의 힘이다.
보살은 정진 가운데 머무르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오래도록 정진하여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하니, 얻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고, 이 사람은 1유순에서부터 백천 유순을 지나가기까지 재물과 법, 두 가지 일로써 중생들에게 베풀어 준다. 나아가 백천만억의 국토를 지나도록 한 사람조차도 3승(乘)에 들게 하지 못했다 해도, 보살은 마음에 뉘우치지도 않고 또한 위축되지도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그렇게 많은 부처님의 나라에서 한 사람도 제도하지 못했거늘 어떻게 온갖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곧, 백천의 국토를 지나가서 혹은 한 사람이라도 10선(善)을 행하게 하여 그를 3승에 들게 하지 못했고, 한 사람이라도 실상(實相)을 얻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마음에 경망한 생각이나 후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아울러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10선도(善道)를 행하게 하며, 점점 3승으로써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리라’고 한다. 10선도로 교화한 뒤에는 다시 재물과 법의 두 가지 보시로써 중생을 만족시켜 주며, 이 공덕을 지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고,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면서 수없는 국토를 지나다니며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
【문】온갖 보시는 모두 정진으로써 하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이 두 가지의 보시만이 정진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는가?
【답】비록 온갖 보시는 모두가 정진을 말미암아 생긴다 하더라도, 이것은 대부분 정진하는 힘으로써 생기기 때문이니, 경에서 “백천의 국토를 지나다니며 두 가지의 보시로써 중생을 만족시킨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시라바라밀을 취한다[取尸羅波羅蜜]’고 함은, 보살이 곧장 10선도만을 행하면 이것을 시라바라밀이라 하겠지만, 혹은 인욕 등의 바라밀로부터 생기거나
보살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10불선도(不善道)를 버리고 40종(種)의 선도(善道)를 행하되 쉬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으니, 이것을 바로 정진바라밀의 힘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한 가지도 행할 수 없거늘 하물며 네 가지이겠는가. 또한 시라바라밀 때문에 삼계(三界)에 나지도 않고 2승을 받지도 않는다. 중생들은 게으름과 번뇌의 마음 때문에 삼계 안에 태어나서 나고 죽는 것을 싫어하고 미워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 도를 버리고 소승(小乘)을 취하게 된다. 이 모두가 게으름을 피우는 모양이니, 이 때문에 “이 보살은 삼계를 탐내지도 않고 2승을 증득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찬제바라밀을 취한다[取羼提波羅蜜]’고 함은, 보살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이에 도량에 앉기까지 사람이나 사람 아닌 이[非人]가 와서 몸을 베고 끊어서 가지고 가면, 그때에 보살은 나라 하는 뒤바뀜[我顚倒]을 깨뜨리고 필경의 공[畢竟空]을 잘 쌓았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이 가운데는 몸을 베는 이나 끊는 이가 없다. 이런 일은 모두가 범부의 거짓된 소견일 뿐이다. 나야말로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으니, 나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았을 때에 열반에 들 수 있었으나, 다만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짐짓 이 몸을 받았을 뿐이니, 중생들이 스스로 와서 가져감에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때에 모든 법의 실상에 깊이 들어가 있어서 이 가운데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어 중생들이 스스로 두려움을 내게 되나니, 이러한 공덕을 중생들과 함께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만일 욕하고 꾸짖고 때리고 해치는 것을 능히 참으면 이것을 인욕이라 하고, 기뻐하며 물러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정진이다. 이 두 가지 법은 혹은 정진으로부터 인욕이 생기기도 하고, 혹은 인욕으로부터 정진이 생기기도 하는데, 지금은 정진으로부터 인욕이 생긴 것이다.
‘선바라밀을 취한다[取禪波羅蜜]’고 함은, 어떤 사람은 저절로 선정을 얻으니, 마치 겁(劫)이 다할 때에 혹은 물러나다가 얻기도 하고 태어나다가 얻기도 하며, 혹은 위의 지위[上地]에서 태어나서 아래 지위[下地]에서 얻기도 하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경우는 비록 선정을 얻더라도
정진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편 어떤 이는 큰 보시로 인하여 간탐(慳貪) 등의 5개(蓋)를 부수면서 곧 선정을 얻는 이도 있으며, 혹은 어떤 사람은 지계(持戒)가 청정하면서 인욕을 닦고 쌓기 때문에 작은 염심(厭心)으로 인하여 곧 선정을 얻기도 하며, 혹 어떤 사람은 큰 지혜의 힘으로 인해 욕계(欲界)는 덧없고 거짓이며 청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곧 선정을 얻기도 하나니, 비록 선정이 거짓[虛誑]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욕계보다는 낫다. 이와 같은 경우는 비록 정진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 밖의 다른 법으로 인하여 선정을 얻기 때문에 정진으로부터 생긴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다섯 가지 법[五法]으로 인하여 주(主)를 삼지 않고, 다만 낮이나 밤이나 정진하면서 거닐고[經行] 좌선을 하며, 항상 마음과 싸우면서 믿음 등의 5력(力)으로써 5개(蓋)를 깊이 제어한다. 만일 마음이 흩어져 내달으면, 곧 가다듬어 돌아오게 하는 것이 마치 도적과 싸워서 땀을 흘리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이들은 선정을 얻되 정진으로부터 일으킨 것이다.
혹은 어떤 보살은 근기가 둔하고 전생의 죄에 가리어져서 세간의 즐거움에 깊이 집착하고 멋대로 내달아서 제어하기 어렵기도 하나니, 이와 같은 사람은 깊이 정진을 더해야 비로소 선정을 얻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복덕이 있는 사람은 편히 앉아 이 없는데도 복록(福祿)이 저절로 이르지만, 박복한 사람은 부지런히 방편을 베풀고 싸워야 얻는 것과 같으니, 복이 있는 사람이 저절로 얻는 것을 복덕(福德)이 저절로 이른 것이라 하고, 방편을 써서 싸워 얻는 것을 정진(精進)하여 얻은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곳에 정진이 있어서 많은 곳[多處]에서 이름을 받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취한다[取般若波羅蜜]’고 함은, 보살이 정진하는 힘 때문에 선바라밀을 얻고 선바라밀을 얻기 때문에 보살에게 신통의 힘이 생기나니, 이 두 가지 일의 인연 때문에 신통의 힘으로써 시방을 두루 다니되 아직 공덕을 충분하게 갖추지 못한 것이면 충분히 갖추게 하려 하고 또 온갖 중생들을 교화하려 한다.
네 가지 바라밀에서 생기는 반야를 제외하고 그 밖의 다른 지혜는 거의 모두가 정진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정진에 머무르는 것을 주로 삼아
지혜를 취한다.
반야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법의 실상을 관하면서도 온갖 법 가운데서 법의 모양[法相]을 보지 않고 법이 아닌 모양[非法相]도 보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말씀한 대로 행하는 사람은 게으름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일을 행할 수 없으나, 정진하는 힘 때문에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선바라밀에 머무름을 주로 삼아 다섯 가지 바라밀을 취한다” 함은, 보살이 선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 마음이 조복되고 유연하여 동요하지 않고 모든 법의 실상을 관찰할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밀실에 등불을 켜면 광명이 비치어 환히 알게 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바로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지혜가 생긴다고 한다. 그때에는 온갖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고 또 더욱 가엾이 여기게 되는데 이것을 바로 매우 깊고 청정한 지계(持戒)와 인욕(忍辱)이라 한다. 신통의 힘으로써 재물을 변화하여 보시를 두루 갖추고 또한 변화로 된 사람을 보내어 온갖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고, 또 보살은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청정하고 유연한 마음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나니, 이것을 바로 보시라 한다. 선정의 힘으로 인하여 신통을 일으키고 시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일체를 인도하고 이롭게 하되 게으르지 않는 것을 바로 정진이라 한다. 또 선정으로 인하여 네 가지 바라밀을 더욱 늘리면, 이것을 바로 선정에서 정진을 낸다 한다. 나머지 뜻은 경에서 자세히 설하신 것과 같다.
‘반야바라밀에 머무름을 주로 삼아 다섯 가지 바라밀을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 가운데서 부처님이 친히 자세하게 말씀한 것과 같다.
【문】부처님께서 비록 자세하게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는 여전히 이해되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이제 물어야겠다. 18공(空) 가운데서 무엇 때문에 네 가지의 공8)은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답】제14 공의 이름이 일체법공(一切法空)이다. 일체(一切)라 하면, 법으로써 다하지 않는 것이 없음이니, 이 때문에 설명하지 않으셨다.
【문】만일 그렇다면 마땅히 14 가지만을 말씀해야 되거늘 무엇 때문에 18 가지를 말씀하셨는가?
【답】그 안에서는 온갖 법의 모양이 공한 것을 분별하므로
온갖 공은 모두 통틀어서 18공에 들어가니, 여기에서는 수행하는 이를 위해서 설명하신 것이다. 수행하는 이는 하나의 공, 둘의 공 또는 14의 공까지 행하게 되는데 그것은 본래 집착하는 바가 많고 적음에 따르는 것이다. 삿된 소견에 깊이 집착하고 있는 이는 그 밖의 4공(空)을 이용한다. 왜냐 하면, 법이 있다ㆍ법이 없다[有法無法] 등은 바로 외도(外道)의 삿된 소견이지만 이 보살은 자비를 닦아서 마음이 유연하기 때문에 이러한 있다ㆍ없다 하는 소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보살은 14의 공으로 마음을 훈수(熏修)한 까닭에 있다ㆍ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으므로 착오가 없나니, 그러므로 뒤의 네 가지 공은 설명하지 않으신 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보살에게는 모든 부처님과 같이 탐착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는가? 이 말씀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답】부처님은 모든 번뇌와 습기(習氣)를 끊으셨으므로 일어나지 않지만, 보살은 반야의 힘으로써 억제하여 일어나지 않게 한다. 지금은 반야의 힘을 찬탄하시려고 하기 때문에 번뇌[結使]가 아직 끊어지지 못했는데도 부처님께서 끊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곧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반야의 힘을 귀히 여길 줄 알기 때문에 발심하면서 ‘이 가운데서는 생기거나 소멸하거나 욕하고 꾸짖고 베고 끊는 등의 어떠한 법도 없다’고 하는 이런 생각을 짓게끔 하시려는 것이다.
【문】그것이 바로 무생인(無生忍)이거늘 무엇 때문에 유순인(柔順忍)이라 하시는가?
【답】이 가운데서는 “5중(衆)이 화합하여 된 임시로 붙인 이름인 중생을 파괴하면서 법을 파괴하지는 못하고 있다” 함을 말씀한 것이니, 이 때문에 경에서 “나는 이[生者]도 없고 없어지는 이[滅者]도 없으며 욕하고 꾸짖는 일을 받는 이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이 사람은 나[我]를 깨뜨리고서 비록 법공(法空)을 관(觀)하기는 하나, 아직 깊이 들지 못하여 여전히 집착하는 법애(法愛)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무생인의 법을 얻었으면서도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처럼 유순인 가운데서도 법공을 생각함이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법 가운데서 하나는 중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인(衆生忍)이라 하며, 다른 하나는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법인(法忍)이라 한다. 법인은 중생인을 방해하지 않고 중생인도 법인을 방해하지 않는다. 다만 그 깊고 얕은 것으로써 구별이 될 뿐이다.

【문】초월삼매(超越三昧)는 두 가지를 초월할 수도 없고 또 흩어진 마음[散心]으로부터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지도 못하거늘,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그처럼 말씀하는가?
【답】대승의 법과 소승의 법이 다르다. 둘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소승법에서의 설명일 뿐이다. 보살은 한량없는 복덕과 지혜로 선정의 힘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마음대로 초월할 수 있으니, 마치 사람의 힘[人力]은 아무리 훌쩍 뛴다 해도 한 길 정도에 불과하지만, 만일 하늘의 힘[天力]이라면 초월함에 넓거나 먼 것의 어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아비담(阿毘曇)에서는 모두가 범부와 성문을 위한 설명일 뿐이다. 보살에게는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지혜의 힘이 있기 때문에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에 들어가 모든 법에 있어서 자재로움을 얻으며, 반야의 힘으로 인해 뜻대로 자재롭게 모든 법을 설하며 중생들에게 응하여 가는 것이다.
또 어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많이 행하여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아 동요하지 않는 법[不動法] 안에 편히 머무르기 때문에, 온갖 세간의 하늘이나 사람으로서는 힐난하여 그를 동요하게 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만일 재물을 얻게 되면, 두 종류의 중생에 보시하니, 부처님에게 보시하고 중생들에게 베풀어 준다. 중생이 공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평등하여 부처님들이라 하여 귀히 여기거나 집착하지도 않고 중생이라 하여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만일 빈천한 사람에게 보시하면서 가벼이 여기면 그 때문에 복이 적어지고, 만일 모든 부처님께 보시하면서 탐착하게 되면 그 때문에 복은 완전히 갖추지 못하게 되나니, 금ㆍ은의 보물을 보시하거나 초목을 보시하는 데도 법이 공하기 때문에 역시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 모든 분별인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거나 하는 모든 허망한 생각을 끊고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서 보시하는 것을, 이름하여 재물의 보시[財施]라 한다.
법의 보시[法施]에서도 또한 이와 같으니, 지혜가 있어서 법을 잘 받는 이라 하여 탐내거나 귀히 여기지 않으며, 지혜가 없어서 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라 하여 가벼이 여기지도 않는다. 왜냐 하면, 부처님 법은 한량없어서 말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만일 보시 등의 얕은 법을 말하거나 12인연(因緣)과 공(空)ㆍ
무상(無相)ㆍ무작(無作)을 말할 적에도 공ㆍ무상ㆍ무작 등의 매우 깊은 법들은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 왜냐 하면, 이 법도 모두 고요히 사라지고 희론하지 않는 법 가운데에 들어가기 때문이니, 이러한 것들을 반야에서 보시를 낸다[般若生布施]고 한다.
또 이 보살은 시방과 3세의 모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닦으신 세 가지의 공덕을 따라 기뻐하면서 온갖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나니, 지혜의 힘 때문에 베풀지 못하는 바가 없어서 중생들에게 능히 복덕의 몫[福德分]을 준다.
또 어떤 보살은 보시할 때에 갖가지 좋은 마음을 내어 간탐(慳貪)의 근본을 뽑아버리고 보시를 행한다. 인자한 마음으로 보시하기 때문에 모든 성내는 일[瞋恚]이 소멸되고 받는 이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마음도 소멸한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기 때문에 교만을 부수고 분명하게 보시의 과보를 믿고 알기 때문에 의심과 무명(無明)을 부수며, 주는 이ㆍ받는 이의 정해진 실체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있다ㆍ없다는 등의 나머지 삿된 소견을 부수나니, 받는 이는 마치 부처님과 같다고 관찰하고, 물건은 마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과 같다고 관찰하며, 자기 몸은 본래부터 필경 공하다고 관찰한다. 만일 이와 같이 보시하면, 거짓으로 속이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곧장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게 되나니, 이와 같은 등의 모양을 일컬어 반야바라밀에서 단(檀)바라밀을 낸다고 한다.
또 보살은 청정한 반야바라밀에 깊이 들기 때문에 중생이 없는데도 10선(善) 등의 모든 계율을 잘 받아 지닌다. 살생(殺生)하는 뒤바뀜을 깨뜨리려고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이 있는 것이지, 실상(實相) 가운데서도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사람에게는 백 유순(由旬)의 중생들을 위하여 계율을 지녀서 살생하지 않는 이도 있고, 한 염부제(閻浮提)의 중생들을 위하여 계율을 지녀서 살생하지 않는 이도 있다. 이와 같이 한량이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지니는 계율이어서
혹은 하루 동안 계율을 지니는 이도 있고, 혹은 5계(戒)와 10계(戒)를 받는 이도 있나니, 이와 같은 것 등은 한량이 있는[有量] 지계(持戒)이다.
보살은 반야를 행하면서 한량없는 국토의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계율을 지니고 한 세상 또는 두 세상만을 위하지도 않으며, 여(如)와 허공(虛空)과 법성(法性)과 실제(實際)와 같이 머무르고 필경 공한 모양으로써 짐짓 이 계율의 모양을 취하지 않으며 파계(破戒)를 미워하지도 않고 지계(持戒)에 집착하지도 않나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반야바라밀에서 구족하고 분별이 없는 계[具足無分別戒]를 낸다’고 한다.
인욕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하나는 중생인(衆生忍)9)이요 다른 하나는 법인(法忍)10)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깊이 들기 때문에 모든 법인을 얻어서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을 믿고 받으며, 마음에 시비(是非)와 분별(分別)이 없다. 이와 같은 모양을 일컬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인욕을 낸다’고 한다.
또 어떤 보살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다섯 가지 바라밀을 두루 갖추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으며, 세 가지 업[三業]이 소멸되면서 몸으로도 짓는 바가 없고 입으로도 말하는 바가 없으며, 마음으로도 생각하는 바가 없다. 마치 사람이 꿈속에서 큰 바다에 빠졌을 때,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건너려고 하다가, 깨고 나면 꿈속에서 가졌던 마음이 이내 쉬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것을 일컬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으뜸가는 정진[第一精進]을 낸다고 한다. 이는 마치 『지심경(持心經)』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정진을 얻었기 때문에 연등불(然燈佛)에게서 수기(授記)11)를 받게 되었다”고 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지혜를 여의고서는 선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지혜의 힘으로써 선정을 얻는다”고 하셨나니, 이 때문에 지혜로부터 선정이 생긴다. 마치 부처님께서 『벽지불경(辟支佛經)』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국왕이 있었는데, 두 마리의 황소가 음욕 때문에 싸우다가 죽는 것을 보고 곧 자신도 스스로 깨달아 ‘내가 재물과 색욕 때문에 남의 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라 하고, 즉시 5욕(欲)을 버리고 떠나서 선정을 얻고 벽지불이 되었다”고 하신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인연이 적건 많건 간에 5욕을 싫어하면서
“5욕의 즐거움과 선정의 즐거움은 서로가 현격하게 차이가 있거늘 내가 어찌 5욕의 조그마한 즐거움 때문에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겠느냐”고 한다. 선정의 즐거운[禪定樂]이란, 복덕이 청정하여 온몸에 즐거움을 두루 느끼는 것이니, 이와 같이 분별하는 지혜로부터 선정이 생긴다. 선정의 뜻에 대해서는 경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이 보살은 한량없는 겁 동안 부처님 도를 위하여 선근(善根)을 심었고 욕탐을 여읜 까닭에 모든 선정에서 자재(自在)함을 얻었으며,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에 깊이 들어가고 정진과 방편과 자비의 힘 때문에 매우 깊은 법에서 나와서는 도로 공덕을 닦는 것이다.
이 사람은 그의 마음을 아주 잘 조복하여 한 생각 동안에 6바라밀을 행할 수 있다. 이른바 보살은 보시할 때에 법다이 재물을 버리니, 이것이 바로 단바라밀이다. 10선도(善道) 가운데에 편히 머물러서 보시하면서도 2승(乘)으로 향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바로 시라바라밀이다.
만일 간탐 등 모든 번뇌와 악마의 백성들이 와서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찬제바라밀이라 한다. 보시할 때에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며 쉬지 않고 그치지도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정진바라밀이라 한다. 마음을 가다듬어 보시에 두고 산란하지 않게 하여 의심도 없고 후회하지도 않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바르게 회향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선바라밀이라 한다. 보시할 때에는 주는 이ㆍ받는 이ㆍ재물을 얻지 못하고, 삿된 소견과 같은 모양을 취하거나 일정하게 정해진 모양을 망령되이 보거나 하지 않아서 마치 모든 부처님과 성현들이 재물의 모양과 받는 이ㆍ주는 이ㆍ회향할 곳의 모양을 관찰하듯이 한다. 법의 보시도 역시 이와 같이 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이 모든 계를 다 받고 착한 마음으로 바른말[正語]과 바른 행위[正業]와 세 가지의 율의(律儀)인 계(戒)율의와 선정(禪定)율의와 무루(無漏)율의를 일으키며, 이 계율 가운데 머물러서 온갖 중생들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주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단바라밀이라 한다.
음욕과 성냄 등의 모든 번뇌가 계율을 파괴하려 하면
능히 제어하고 인내하며, 또 어떤 사람이 와서 욕하고 꾸짖고 때리고 해쳐도 파계(破戒)를 두려워하여 짐짓 참고 갚지 않으며, 또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더운 따위의 모든 고통이 핍박한다 해도 계율을 지니기 위하여 이와 같은 것들을 모두 능히 참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찬제바라밀이라 한다.
모든 계상(戒相)12)의 가볍고 무거움과 남고 모자람과 인연의 본말(本末)과 혹은 막기도 하고 혹은 허락하기도 하는 것 등을 분별하여서, 이 마음으로 정진하여 계법(戒法) 그대로 행하되, 이를 어기고 범한 바가 있으면 마음으로 뉘우치고 참회하여 제거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몸의 정진[身精進]이라 한다. 이 지계(持戒)의 정진으로써 천상의 왕[天王]이나 인간의 왕[人王]을 구하지도 않고, 나아가 소승의 열반도 구하지 않으며 다만 계율만을 위할 뿐이니, 이는 곧 보살의 도요 머무르는 처소이기 때문에 계율을 지니며 다섯 가지 바라밀을 닦고 쌓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정진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이 만일 지계가 청정하면 선정을 여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지계가 청정하면 모든 번뇌의 힘이 파괴되고 마음이 곧 조복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늙은이가 왕성했던 힘을 잃으면 죽음이 다가와서 무너지기 쉬운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선정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5욕을 생각하고 5개(蓋)13)를 일으켜 지계를 침해하게 된다. 이 때문에 계율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선정의 즐거움을 구하는 것이다. 선정(禪定)이라 함은, 모든 마음[心]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을 껴잡아 한 곳에 모으는 것을 선정이라 부르는 것이다. 수행하는 이는 잘못된 몸과 마음으로 계를 파하는 업을 제거하고, 다음에는 세 가지 거친 각관(覺觀)을 제거한 뒤에 세 가지 미세한 각관인 국토(國土)와 친리(親里)14)와 불사(不死)를 제거한다. 이와 같은 것이 제거된 뒤에는 곧 선정을 얻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선바라밀이라 한다.
계율을 지닐 때에 계율은 이와 같이 금세와 후세의 공덕과 과보를 낼 수 있다 함을 아는 것을 일컬어 지혜(智慧)라 한다. 또 계율을 탐애하고[愛戒] 계율에 집착하고[持戒] 계율을 깨뜨리는[破戒] 이 세 가지 일을 얻지 못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지혜라 한다.
사람은 세 종류가 있으니, 하인(下人)은 계율을 깨뜨리고, 중인(中人)은 계율에 집착하며, 상인(上人)은 계율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보살은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계를 파하는 일과 파계한 이를 미워하며, 계율에 애착하는 이와 계율을 지니는 이를 좋아하거나 미워하면, 도리어 죄업(罪業)의 인연을 받게 된다. 마치 코끼리가 목욕을 하고 잘 씻은 뒤에 도로 흙을 칠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라 하며, 또 ‘온갖 법은 모두 인연에 속하여 자재로운 것이 없으며 모든 착한 법은 다 악(惡)으로 인하여 생긴다. 만일 악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어찌 집착할 것이며, 악은 곧 선(善)의 원인이거늘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라고 이와 같이 생각하며, 곧장 모든 법의 실상(實相)으로 들어가서 ‘지계(持戒)와 파계(破戒)는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고 관찰한다. 인연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제 성품이 없고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필경 공하며 필경 공한 것이기에 집착하지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이 인욕을 행할 때에 생각하기를 ‘만일 어떤 중생이 와서 나의 몸을 끊고 자르면, 나는 곧 보시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겁탈하고 훔치는 죄[劫盜之罪]를 얻게 하지 않으리라’고 한다. 혹 인욕을 닦을 때에 인욕으로 인하여 법을 설하고 갖가지 인연으로 세간의 열반을 분별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6바라밀 가운데에 머물게 하며, 중생인(衆生忍)을 얻고 몸으로써 보시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재물의 보시[財施]라 한다. 법인(法忍)을 얻고 모든 법에 깊이 들어가서 중생을 위하여 설하나니, 이것이 법의 보시[法施]이다. 이 두 가지 보시는 두 가지의 인(忍)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이름하여 단바라밀이라고 한다.
보살은 인욕을 행할 때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욕됨을 참거늘 하물며 중생을 괴롭히면서 계율을 깨뜨리겠는가. 그러므로 인욕으로 인하여 계율을 지니고 온갖 중생을 가엾이 여겨서 그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려고 계율을 지니는 것을 일컬어 온갖 착한 법이 편안하게 머무르는 처소라 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시라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인욕 가운데서 몸과 마음으로 부지런히 네 가지 바라밀을 수행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정진이라 한다.
인욕 가운데서 마음이 제어되어 유연해지고 5욕(欲)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마음을 한 곳에 가다듬고는 ‘나는 온갖 중생들에 대하여 인욕하기를 마치 땅과 같이 할 수 있다’고 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선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인욕의 과보 때문에 상호(相好)로써 장엄된 몸 등을 얻는 것을 알며, 보살이 인욕을 닦을 적에는 능히 모든 번뇌를 막고 중생들의 과악(過惡)을 참으며, 온갖 깊은 법을 능히 참고 받아들인 뒤에는 모든 법의 실상을 얻게 된다. 이때에 수행하는 이는 마음속으로 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나니,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다.
보살은 정진에 머물러서 모든 바라밀을 낸다. 정진은 비록 그것이 온갖 선 선(善)의 근본이라서 정진을 여의고서는 선법(善法)도 얻을 수 없지만, 다만 대개는 정진의 힘으로써 다섯 가지 바라밀을 내기 때문에 정진으로부터 생긴다[精進生]고 한다.
보살은 항상 세 가지 보시인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와 무외시(無畏施)를 행하여 일찍이 버리거나 없애는 일이 없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단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착한 몸과 입의 바른 업[正業]으로써 곧장 부처님의 도에 향하고 2승(乘)을 탐내지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시라바라밀이라 한다. 부지런히 정진을 행할 적에 어떤 사람이 와서 보살의 도를 무너뜨리려 하여도 능히 견디어 내고 동요하지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찬제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비록 갖가지 그 밖의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일심으로 살바야를 생각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선바라밀이라 한다. 두 가지 정진이 있나니, 하나는 움직이는 모양으로 몸과 마음이 부지런히 행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온갖 희론을 없애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비록 움직이면서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면서 또한 동요하지 않는 정진[不動精進]을 여의지 않으며, 동요하지 않고 정진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선정에 들어 자비로운 마음의 힘으로 온갖 중생들에게 두려움이 없는[無畏] 것을 베풀기도 하고, 혹은 선정의 힘으로 보물을 변화로 나타내어서 마치 수미산과 같이 온갖 것에 가득 채우기도 하며, 많은 꽃과 향 등을 비내려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빈궁한 중생들에게 의복과 음식 등을 베풀며, 혹은 선정에 들어 시방의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기도 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단바라밀이라 한다.

이 가운데서 선정을 따라 몸과 입으로 착한 업을 행하며, 또는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여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시라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선정에 들어 청정하고 유연한 즐거움[清淨柔軟樂]을 얻으면서도 선정의 맛[禪味]에 집착하지 않으며, 선정의 힘으로 일체 법의 공한 경지에 깊이 들어가 잘 인욕하면서 이 법을 받되 마음에 의심하거나 후회하지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찬제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인욕을 할 때에 모든 삼매를 일으키려 하니, 초월삼매(超越三昧)와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 등 한량없는 모든 보살의 삼매를 일으키면서 쉬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정진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선정의 힘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여 동요하지 않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들어가게 되나니, 모든 법의 실상이 곧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세 가지 보시의 모양이 마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같다고 능히 관하면서 ‘있는 것도 아니다[非有], 없는 것도 아니다[非無]’라는 등의 모든 희론을 없애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한량없고 그지없는 반야 가운데의 단바라밀이라 한다.
몸과 입의 업은 반야를 따라 행하고, 반야를 얻기 때문에 견고하고 청정하게 계율을 지니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시라바라밀이라 한다.
반야의 마음 가운데 머무르면 중생인(衆生忍)과 법인(法忍)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청정해지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찬제바라밀이라 한다.
반야를 행하는 보살은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동요하지 않는 정진[不動精進]을 얻으며, 동요하는 정진[動精進]은 마치 환과 같고 꿈과 같다고 관하면서 동요하지 않는 정진을 얻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정진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이 장애 없는 반야를 행하기 때문에 비록 항상 선정에 든다 하더라도 반야바라밀의 힘을 얻는 까닭에 선정에서 일어나지 않고서도 능히 중생을 제도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선바라밀이라 한다.
이와 같은 보살들은 날카로운 지혜 때문에 한 마음 가운데에서 한꺼번에
6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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