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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90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78권

by Kay/케이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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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78

 

대지도론 제78권

64. 원요품(願樂品)을 풀이함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


【經】그때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생각하기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과 선바라밀(禪波羅蜜)과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과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과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과 단바라밀(檀波羅蜜) 내지는 18불공법(不共法)을 행할 때에도 온갖 중생들 위에 우뚝 서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이랴.
이 살바야를 듣고 믿는 모든 중생은 인간 가운데서 좋은 이익과 수명(壽命) 가운데 으뜸을 얻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랴. 이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내면 그 밖의 다른 중생들은 마땅히 원하고 바라면서 좋아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석제환인은 하늘의 만다라꽃을 부처님 위에 뿌리고는 말씀드렸다.
“이 복덕으로써 만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부처님 법을 두루 갖추고 일체종지를 두루 갖추며 자연의 법[自然法]1)을 두루 갖추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문을 구하는 이에게는 성문의 법을 두루 갖추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내면 저는 끝내 그로 하여금 물러나게 하려는 한 생각도 내지 않겠으며, 저는 또한 그로 하여금 물러나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게 하려는 한 생각도 내지 않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모든 보살들이 갑절 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정진하게 하며 중생들이 생사(生死) 가운데서 갖가지의 고뇌를 받는 것을 보면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 등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려고 원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써 서원을 세우되 ‘나는 자신이 제도되고 나면 또한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해야 하고 내 자신이 해탈하고 나면 마땅히 아직 해탈하지 못한 이를 해탈하게 해야 하며, 내가 이미 안온하게 되면 마땅히 아직 안온하지 못한 이를 안온하게 해야 하고 내가 이미 멸도(滅度)를 얻게 되면 아직 멸도에 들지 못한 이로 하여금 멸도를 얻게 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ㆍ선여인이 처음에 뜻을 낸[初發意] 보살의 공덕에 대하여 따라 기뻐하는[隨喜] 마음을 내면 얼마의 복덕을 얻으며, 오래전에 뜻을 낸[久發意] 보살의 공덕에 대하여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얼마의 복덕을 얻는지요? 아비발치(阿鞞跋致)의 보살의 공덕에 대하여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얼마의 복덕을 얻으며,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의 공덕에 대하여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얼마의 복덕을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憍尸迦)야, 사천하(四天下)의 세계는 근(斤)과 냥(兩)으로 달아 알 수 있어도 이 따라 기뻐하는 마음의 복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다시 교시가야, 이 삼천대천세계는 근과 냥으로 달아 알 수 있어도 이 따라 기뻐하는 마음의 복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다시 교시가야, 삼천대천세계 안에 가득 찬 바닷물을 머리카락 한 올을 백 개로 쪼개서 그 쪼갠 한 개의 털로 바닷물을 적셔 내면서 그 방울의 수효는 알 수 있어도 이 따라 기뻐하는 마음의 복덕은 어림잡아 알 수 없느니라.”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중생으로서 마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따라 기뻐하지 않는 이면 그는 악마의 권속이며, 마음에 따라 기뻐하지 않는 이는 모두 악마 가운데에서 와 태어난 자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내는 모든 보살은 악마의 경계를 깨뜨리기 위하여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3존(尊)2)을 사랑하고 공경하려는 이는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내어야 하며, 따라 기뻐한 뒤에는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 하오니,
하나도 아니고[不一] 둘도 아닌[不二] 모양으로써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교시가야, 만일 어떤 사람이 보살의 마음에 대하여 이와 같이 따라 기뻐하면서 회향하면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 뵈면서 끝내 나쁜 빛깔을 보지 않고 끝내 나쁜 소리를 듣지 않으며 끝내 나쁜 냄새를 맡지 않고 끝내 나쁜 맛을 보지 않으며 끝내 나쁜 접촉에 닿지 않고 끝내 나쁜 기억을 따르지 않으며 끝내 모든 부처님을 멀리 여의지 않으면서 한 부처님의 세계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하며 선근을 심을 것이니라.
왜냐하면 선남자ㆍ선여인은 한량없는 아승기만큼 많은 처음 뜻을 낸 모든 보살의 선근을 따라 기뻐하면서 회향하며 한량없는 아승기의 제2지(地)ㆍ제3지 내지 제10지와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모든 보살마하살의 선근을 따라 기뻐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이니라.
이 선근의 인연 때문에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지며, 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에는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의 중생들을 제도하느니라.
교시가야, 이런 인연 때문에 선남자와 선여인은 처음 뜻을 낸 보살의 선근에 대하여 따라 기뻐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되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니요 마음을 여의고 하는 것도 아니며, 오래전에 뜻을 낸 아비발치와 일생보처의 선근에 대하여 따라 기뻐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회향하되 마음으로써 하는 것도 아니요 마음을 여의고 하는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마음은 마치 허깨비[幻]와 같거늘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대는 이 마음이 마치 허깨비와 같다고 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허깨비를 보지도 않고 또한 마음이 허깨비와 같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허깨비도 없고 마음이 허깨비와 같다고도 보지 않으면 그대는 이런 마음을 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허깨비를 여의고 마음이 허깨비와 같다는 것도 여의면서 그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어떤 법이 따로 있다고 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허깨비를 여의고 마음이 허깨비와 같다는 것도 여의면서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어떤 법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다시 어떠한 법을 ‘있다, 없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어떤 법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이 법의 모양은 필경 여의기[畢竟離] 때문에 있다는 데도 떨어지지 않고 없다는 데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법이 필경 여읜 것이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으며, 아무것도 없는 법[無所有法]도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온갖 법은 아무것도 없어서 이 가운데서는 더러운 것[垢者]도 없고 깨끗한 것[淨者]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필경 여읜 것이요 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단바라밀은 필경 여읜 것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또한 필경 여읜 것입니다. 만일 법이 필경 여읜 것이라면 닦지도 않아야 하고 파괴되지도 않아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또한 얻을 수 있는 어떤 법도 없나니, 필경 여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반야바라밀이 필경 여읜 것이라면 어떻게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지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또한 필경 여읜 것이거늘 이 두 여읜 것 가운데서 어떻게 얻는 바가 있을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이 반야바라밀은 필경 여읜 것이요, 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과 단바라밀도 필경 여읜 것이며, 나아가 일체종지도 필경 여읜 것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반야바라밀이 필경 여의고, 나아가 일체종지가 필경 여읜 것이라면 이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반야바라밀이 필경 여읜 것이 아니고, 나아가 일체종지가 필경 여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반야바라밀이라 하지 못하며 선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라 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반야바라밀이 필경 여의고, 나아가 일체종지가 필경 여읜 것이라면, 이 때문에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을 인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도 아니니라. 그렇다고 여의는 것으로 여의는 것을 얻는 것도 아니면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은 반야바라밀로 인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행한 바의 이치는 심히 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행한 바의 이치는 매우 깊으니라.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나니, 이른바 이런 깊은 이치를 행하면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증득하지 않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이치와 같아서는 보살마하살이 행하는 바가 어렵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이런 이치를 증득할 수도 없고, 또한 반야바라밀을 증득하지도 못하며, 또한 증득하는 이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떠한 것이 이런 이치이기에 증득할 수 있고,
어떠한 것이 반야바라밀이기에 증득하게 되며 어떠한 이가 증득하는 이이기에 증득한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얻을 바가 없는 행[無所得行]이라 합니다. 보살은 바로 이것을 행하면서 모든 법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런 깊은 법을 듣고 마음에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도 않으면 이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 하는 것입니다.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다’고도 보지 않고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고도 보지 않으며, 또한 ‘나는 장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살바야는 나와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대 마치 허공은 ‘어떤 법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어떤 법은 나와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허공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도 또한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살바야는 나와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대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은 ‘환술사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구경하는 사람은 나와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은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을 닦는 보살도 역시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살바야는 나와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대 마치 거울 속의 영상은 ‘인(因)이 된 것은 나와 가깝게 떨어져 있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울 속의 영상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도 역시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살바야는 나와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사랑함[愛]이 없고 미워함[憎]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자성(自性)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부처님께서는 사랑함이 없고 미워함도 없는 것처럼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에게 사랑함이 없고 미워함이 없는 것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미워함도 없고 사랑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부처님께서 온갖 분별하는 생각을 끊으신 것처럼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도 그와 같아서 온갖 분별하는 생각을 끊으니, 그것은 필경 공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사람은 ‘성문과 벽지불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나와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사람은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도 그와 같아서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나와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대 마치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변화로 만들었으나 그 변화로 된 일에는 분별이 없는 것처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도 그와 같아서 하는 일이 있어서 닦아 이 일이 성취되면서도 반야바라밀에는 역시 분별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대 마치 장인[工匠]이나 그 장인의 제자가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무사람[木人]으로서 남자와 여인을 만들고 코끼리ㆍ말ㆍ소와 양을 만들었으나 그 만들어진 것이 할 일을 하면서도 그 소와 말에는 역시 분별이 없는 것처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도 그와 같아서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성취한다고 말하면서도
반야바라밀에는 역시 분별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다만 반야바라밀만이 분별이 없습니까? 아니면 선바라밀, 내지는 단바라밀도 또한 분별이 없습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선바라밀은 분별이 없고, 나아가 단바라밀도 분별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물질[色]은 분별이 없고 식(識)까지도 또한 분별이 없으며, 눈[眼] 내지 뜻[意]도 분별이 없고 빛깔[色]과 법(法)도 분별이 없습니까? 안식의 접촉[眼識觸] 내지 의식의 접촉[意識觸]도 분별이 없고 눈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眼觸因緣生受] 내지 의식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意觸因緣生受]과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과 4념처(念處) 내지 8성도분(聖道分)과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과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대자대비(大慈大悲)ㆍ18불공법(不共法)ㆍ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와 무위의 성품[無爲性]도 역시 분별이 없습니까?
수보리여, 만일 온갖 법이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6도(道) 가운데 나고 죽음[生死]이 있어서 ‘이것은 지옥(地獄)이요, 이것은 아귀(餓鬼)며, 이것은 축생(畜生)이요, 이것은 하늘[天]이며, 이것은 사람[人]이요, 이것은 아수라(阿修羅)이다’라고 분별하겠습니까? 어떻게 ‘이것은 수다원(須陀洹)이요, 사다함(斯陀含)이며, 아나함(阿那含)이요, 아라한(阿羅漢)이요, 벽지불(辟支佛)이며, 모든 부처님이다’라고 분별하겠습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대답했다.
“중생은 뒤바뀐 인연 때문에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을 짓고 탐욕이 근본이 되는 업도(業報)에 따라 지옥ㆍ아귀ㆍ축생ㆍ사람ㆍ하늘 및 아수라의 6도의 몸을 받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말씀과 같아서 어떻게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의 도가 있다고 분별하겠습니까.
사리불이여, 수다원은 곧 분별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고 수다원의 과위[果]도 분별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며,
나아가 아라한ㆍ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ㆍ벽지불의 도와 부처님ㆍ부처님의 도도 역시 분별이 없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사리불이여,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역시 분별이 없으며 분별을 끊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온갖 법에는 분별이 없다고 알아야 하니, 파괴되지 않는 모양인 여여한 법[如法]과 여여[如]한 법성(法性)이며 실제(實際)이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분별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분별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한 뒤에 곧 분별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합니다.”
【論】해석한다. 이때 석제환인과 그 모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으며 석제환인은 생각하기를 ‘이 보살이 보살의 도를 행할 때에 있게 되는 모든 공덕조차도 오히려 온갖 중생들보다 수승하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룸이겠는가’라고 한다.
중생에게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발심(發心)한 이요, 둘째는 아직 발심하지 못한 이다. 발심한 보살은 아직 발심하지 못한 모든 이보다 뛰어나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사람은 한량없고 위없는 부처님 법의 인연을 심고 온갖 중생들을 제도하면서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려 하거니와 그 밖의 다른 중생은 자기 자신의 즐거움만을 구하면서 다른 이에게는 괴로움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 때문에 발심한 이가 뛰어난 것이다.
【문】모든 아라한과 벽지불과 그리고 5통(通)을 지닌 이는 바로 탐욕을 여읜 사람들[離欲人]이거니와 발심한 이라도 혹 아직은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다만 발심만 한 이도 있거늘 어떻게 그들보다 뛰어나다 하는가?
【답】이런 일은 앞의 품(品) 가운데서 이미 여러 가지로 대답했다. 아라한은 비록 번뇌가 다했다 하더라도 처음 발심한 보살보다는 못하다. 비유하건대 마치 전륜성왕의 태자는 비록 태 안에 있다 하더라도 벌써 그 밖의 다른 아들들보다 뛰어난 것과 같고,
또 마치 국왕의 태자가 비록 아직 왕위에는 오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위가 있고 부귀한 모든 대신들보다 뛰어난 것과 같다.
발심한 보살에게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바라밀 등의 보살도(菩薩道)를 행하는 이요, 둘째는 다만 헛되이 발심만 한 이다. 여기서는 보살도를 행하는 이만을 말하고 있다. 이 사람은 비록 아직 일은 성취 못했다 하더라도 온갖 중생들보다 뛰어나거늘 하물며 성취한 뒤이겠는가. 마치 가릉빈가[歌羅頻伽]3) 새가 알 속에 있을 때에 아직 소리를 내지 않았어도 벌써 그 밖의 새들보다 뛰어난 것과 같으니, 하물며 알에서 나온 뒤이겠는가.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록 아직 부처님은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보살의 도를 행하면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설하는 음성은 모든 외도와 악마 백성들의 쓸모없는 이론을 때려 부수거늘 하물며 성불한 뒤이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일 한번만이라도 발심하면서 ‘나는 장차 부처님이 되어 온갖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 줄 것이다’고 말한다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고 아직 어려운 일을 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음과 입의 업(業)이 중하기 때문에 온갖 중생들보다 뛰어나다. 온갖 중생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즐거움만 구하며,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그와 친한 이만을 사랑한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비록 세간의 쾌락을 탐내지 않더라도 자신의 괴로움만을 소멸하기 위하여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면서 중생들을 위하지 않는다. 보살은 마음에서 내고 입으로 하는 말은 온갖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니, 이 때문에 수승하다”고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여섯 가지 신통[六神通]을 지닌 아라한이 한 사미에게 바랑을 지우고 길을 가면서 했던 일과 같다.
사미가 가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장차 어떤 승(乘)으로써 열반에 들어야 할까’라고 하다가 이내 발심하면서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존귀하며[世尊] 가장 높으시며 가장 미묘하신 분이니, 나는 장차 불승(佛乘)으로써 열반에 들어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스승은 그의 마음을 알고 얼른 바랑을 벗겨서 자신이 짊어지고 사미를 앞에 세워 걸어갔다.
사미는 조금 지난 뒤에 다시 생각하기를 ‘부처님 도는 매우 어렵다. 오래도록 나고 죽고 하면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우선 소승(小乘)으로써 일찍 열반에 들어야겠다’고 했다. 그때 소승은 다시 바랑을 벗어서 사미에게 도로 지우고 뒤에 따라오게 하면서 자신이 앞서서 걸어갔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러자 사미는 스승에게 묻기를 “스승께서는 늙으셨으면서 하시는 일이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하듯 하십니다. 처음에는 저를 앞에 세우셨다가 뒤에 따라오게 하시니, 어찌 그리도 변덕이 죽 끓듯 하십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스승은 대답하기를 “너는 처음 발심하면서 부처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마음은 귀중한 것이어서 곧 나로 치면 스승의 도 안에 머무른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모든 벽지불조차도 공양해야 되거늘 하물며 아라한인 나이겠느냐. 그 때문에 너를 앞에 세워 모시고 간 것이다. 그런데 너는 도로 마음에 후회하면서 소승을 취하겠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너는 아직 도를 얻지 못했고 나와는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너를 도로 뒤에 세우고 걸은 것이다”고 했다.
사미는 스승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한편 깨닫고는 ‘나의 스승께서는 나의 마음을 아셨구나. 내가 한 번 발심한 것조차도 벌써 아라한보다 뛰어나거늘 하물며 성취한 것이랴’고 하고, 곧 스스로가 견고하게 대승의 법에 머물렀다.
또 뛰어나다는 말은 반드시 모든 일 가운데서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번만이라도 발심하면서 부처님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려 했다는 이 일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밖의 선정이나 해탈 등은 아직 있지도 않거늘 어떻게 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공중을 난다 하여 그 새가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미래에는 당연히 공덕을 얻겠지만 이런 일까지 논한 것이 아니다.
소승의 사람은 말하기를 “보처(補處) 보살조차도 오히려 작은 사미로서 한량없는 율의(律儀)를 얻은 이보다는 못하다”고 한다. 또한 『마하연론(摩訶衍論)』 안에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어떤 이가 대승의 마음을 일으켰다면 비록 그가 못된 소인(小人) 가운데에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2승(乘)으로서 해탈을 얻은 이보다 뛰어나다”고 하기도 한다. 이것을 두 가지의 치우침[二邊]이라 하고,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면 중도(中道)라 한다. 중도에 관한 이치는 위에서의 설명과 같다.
그 이치에 진실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취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처음 발심할 때조차도 온갖 중생보다 뛰어나거늘 하물며 성불하는 것이랴”고 한다.
살바야를 듣고 믿는 이는 인간 안에서 좋은 이익을 얻는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6바라밀이 바로 그 이익이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6바라밀의 과보가 바로 그 이익이니, 이른바 전륜성왕과 제석ㆍ범천왕이 되고 인간의 왕이나 법왕(法王)이 되는 것 등이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비발치(阿鞞跋致)를 얻고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며 항상 인간과 천상의 부귀한 곳에 태어나는 것이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살은 과보의 신통에 머물러 시방에 돌아다니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갖가지의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며 인연을 믿고 받으면서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큰 이익을 얻는다”고 하기도 한다.
‘수명 가운데서 으뜸’이라 함은 중생에게 두 가지의 수명이 있다. 첫째는 목숨뿌리[命根]요, 둘째는 지혜의 목숨[智慧命]이다. 이 사람은 지혜의 목숨을 얻기 때문에 수명 가운데서 으뜸이라 한다. 하물며 발심하는 것이겠는가.
발심한 이는 공경해야 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앞에서 인연을 설명한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은 즐거움을 버리면서 남에게 즐거움을 주고 자기 자신의 괴로움은 근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은 근심하기 때문이다.
그때 석제환인은 기뻐하는 모양을 나타내려 하면서 하늘의 만다라꽃을 부처님 위에 뿌렸으니,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문】죄와 복은 남에게 줄 수도 없고 아무리 주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거늘 석제환인은 무엇 때문에 “이 복덕으로써 부처님 도를 구하는 이로 하여금 부처님 법을 완전히 갖추게 하겠다”고 말하는가?
【답】비록 남에게 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스스로 자신들의 마음을 좋게 한다. 또 이 석제환인은 이런 복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따라 기뻐하는 마음으로써 부처님 도를 구한 이들에게 주니, 성문의 사람에게 주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석제환인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저는 비록 성문의 도를 얻었다 하더라도 보살로 하여금 도로 물러나 2승(乘)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한 생각조차도 내지 않겠습니다”고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보살은 중생이 나고 죽고 하는 가운데 있으면서 갖가지 고통이 있는 것을 보고 온갖 세간을 이익되게 하려고 원을 세우되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저는 평등하게 제도하리이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때 모임 안에 있던 중생으로서 이런 생각을 한 이도 있었나니, 곧 ‘만일 위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따라 기뻐하는[隨喜] 공덕이 있다 하면
처음 발심한 사람을 따라 기뻐하는 것과 오래전에 발심한 사람을 따라 기뻐하는 데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라고 하였으므로, 석제환인은 뭇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 주려고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처음 발심한 보살의 공덕을 따라 기뻐하는 데는 얼마의 복덕을 얻겠습니까”라고 한다.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이 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다. 그 종류는 한량없고 끝이 없기 때문에 복전(福田) 중의 사람의 공덕은 헤아려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알게 하였으니, 경 가운데서 자세히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따라 기뻐하는 덕(德)은 비록 한량없고 끝이 없다 해도 부처님 도에 가까워진 이는 따라 기뻐하는 복덕이 더욱더 많다”고 하신다.
이때에 제석은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런 공덕을 듣고도 따라 기뻐하지 않는 이면 그는 바로 악마의 백성이요, 악마의 하늘[魔天]에서 온 자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악마의 경계에 있으면서 나쁜 마음을 쌓고 모은 까닭에 따라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따라 기뻐하는 마음은 악마의 경계를 때려 부순다. 이 때문에 부처님 도를 구하는 이가 3존(尊)을 사랑하고 공경하면서 버리지 않으려 하면 마땅히 따라 기뻐하는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 한다”고 하신다.
‘하나도 아니고[不一] 둘도 아닌[不二] 모양’이라 함은 모든 법에 일정한 모양이 있어서 인연(因緣)에 속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다’고 하며, 따라 기뻐하는 마음[隨喜心]과 회향하는 마음[迴向心]을 분별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둘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니, 필경 공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제석의 뜻을 옳다 하신 뒤에 다시 따라 기뻐하는 공덕을 칭찬하시면서 “이 사람은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기억하고 따라 기뻐하기 때문에 신속히 부처님을 뵙게 된다”고 하시며, 또 깊은 마음으로 온갖 중생들에게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려고 이 때문에 나고 죽기를 왕래하면서도 6정(情)은 처음부터 나쁜 티끌[惡塵]을 받아들이지 않고 끝내 모든 부처님 앞에 가 나는 것을 여의지 않나니, 그것은 부처님을 뵙는 행[見佛行]을 심는 일을 끊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신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이런 사람은 그지없는 아승기 동안 처음 발심한 보살에서부터
한량없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따라 기뻐하였기 때문에 위에서와 같은 과보를 얻어 신속히 부처님 도를 이루고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시며, 다시 “교시가야, 이런 보살은 이런 복덕으로 인하여 모든 법의 실상(實相) 그대로 실상 가운데에 회향하느니라”고 하신다.
마음은 얻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마음이 아니요 또한 마음을 여의지도 않는다”고 하시며, 위에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라는 이치를 말씀하신 것과 같은 그 일과는 다르기 때문에 다시 설명한다.
수보리는 듣고 나서 이 공에는 마음의 모양도 없다는 데에 대하여 부처님께 따지면서 “이 마음은 마음이 아니요 공하여 아무것도 없어서 마치 허깨비와 같다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되받아서 묻되 “그대는 이 공한 마음이 일정한 모양이어서 마치 허깨비와 같다고 보느냐”고 하시자,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마음이 만일 공하여 허깨비와 같다면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만일 볼 수 있다면 공한 것이 아닌 것이다’고 하고, 이 때문에 대답하기를 “아닙니다”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마음이 만일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면 그대는 이런 가운데서 ‘있다, 없다’ 하는 쓸모없는 이론이 있다고 보느냐”고 하시자,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공하여 아무것도 없고 마치 허깨비와 같은 마음을 여의고 그대는 다시 어떤 법이 있어서 위없는 도[無上道]를 얻을 수 있다고 보더냐”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보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면 얻을 수도 없거늘 어찌 법이 있겠습니까.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은 필경 여의기 때문에 필경 공하기 때문에 있다는 데에도 떨어지지 않고 없다는 데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법이 ‘있다, 없다’ 하는 데에 떨어지지 않으면 이것은 곧 필경 아무것도 없으므로 위없는 도를 얻지 못해야 합니다. 이런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필경 여의는 모양입니다. 그것은 있다거나 없다고 보면 두 가지에 다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이니, 선바라밀(禪波羅蜜)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아서 필경 여의는 모양입니다.
만일 법이 필경 여읜 것이라면 볼 수도 없고 닦을 수도 없으며 끊을 수도 없고
증득할 수도 없으므로 이런 법을 행한다면 다시는 얻을 것이 없나니, 그것은 필경 여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반야바라밀은 필경 여읜 것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필경 여읜 것이거늘 어떻게 필경 여읜 것으로써 필경 여읜 것을 얻겠습니까. 만일 하나의 법이라도 필경 여읜 것이라면 오히려 얻을 것이 있지 않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두 개 다 여읜 것이겠습니까.
비유하건대 마치 손가락으로 허공을 대는 것과 같나니, 허공에는 접촉할 것이 없기 때문에 손가락이 닿을 수 없거늘 하물며 두 개 모두에 접촉할 것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또 마치 허공이요 열반과 같아서 반야바라밀은 필경 여읜 것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필경 여읜 것이거늘 어떻게 여읜 것으로써 여읜 것을 얻겠습니까”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따르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의 말을 옳다 하시면서 “참으로 훌륭하구나”고 하시고, 곧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만일 반야바라밀이 필경 여읜 것이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필경 여읜 것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얻을 수 있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하나의 법이라도 정해진 모양이 있고 공한 것이 아니라면 곧 그것은 항상 있는 법이어서 나지 않는 모양이기 때문이니, 미래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고 현재로부터 과거에 이르기까지 만일 실로 나는 모양[生相]이 없다면 곧 없어지는 모양[滅相]도 없느니라.
만일 나고 없어지는[生滅] 것이 없다면 네 가지의 진리[四諦]가 없고 만일 네 가지의 진리가 없다면 법보(法寶)가 없으며, 법보가 없기 때문에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나니, 법보는 곧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기 때문이니라.
만일 법보가 없다면 불보(佛寶)가 없고 불보가 없다면 승보(僧寶)도 없나니, 만일 3보(寶)가 없다면 곧 온갖 법도 없다. 이와 같은 허물이 있기 때문에 필경 여의는 모양은 곧 환히 통달하여 막힘이 없느니라”고 하신다.
만일 필경 여읜 것을 말하면 또한 공도 여의는 줄 알아야 하나니, 만일 공을 여의지 않는다 하면 필경 여읜다고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경에서 말씀하시되 “반야바라밀은 필경 여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며, 비록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두 가지 여읜 것으로써 두 가지 여읜 것을 얻는 것은 아니다”고 하셨으니, 필경 공이기 때문에 더 따지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매우 깊은 모양을 알았으며 이 때문에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하면 곧 매우 깊은 이치를 행하는 것입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의 말을 옳다 하시면서 “이 보살은 어려운 일을 능히 하는 이이니, 이와 같이 매우 깊은 이치를 능히 행하면서도 2승을 증득하지 않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이 보살은 일심으로 예리한 지혜로써 공에 깊이 들면서도 열반을 증득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어려운 일이니라”고 하신다.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제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매우 깊은 이치에서는 일정한 모양으로 증득할 만한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니, 반야바라밀도 얻지 못하고 증득하는 이도 얻지 못하거늘 그 누가 이 매우 깊은 이치를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 매우 깊은 이치를 증득하지 못한다면 그 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습니까. 이것을 바로 보살의 얻을 바가 없는 행[無所得行]이라 하나니, 이 도를 행하면 온갖 법을 밝게 비추게 됩니다”고 한다.
【문】부처님께서는 ‘어려운 것’이라 하시고 수보리는 ‘어렵지 않은 것’이라 하는데 스승과 제자로서는 그 뜻[義]이 같아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저마다 서로 어긋나는가?
【답】부처님께서는 세간의 이치[世諦]로 말씀하시고 수보리는 첫째가는 이치[第一義]로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보살은 이 매우 깊은 이치를 얻는다”고 말씀하시며, 수보리는 “보살도 또한 이 매우 깊은 이치를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중생들을 위한 까닭이라 하시면서 말씀하시되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들으면 곧 발심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말하거니와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들으면 그만두고 물러나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는 일을 말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얻을 바가 없는 행[無所得行]이라 한다”고 하신다.
이런 행 가운데에 머무르면 온갖 법을 환히 통달하고 막힘이 없다.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필경 여읜 것이어서 증득할 수 있는 법도 없고 증득을 취할 이도 없으며 또한 반야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는 말을 듣고 이때에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 않으면서 환히 통달하며 막힘이 없으면 이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라 하며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를 바로 진실한 행[眞行]이요, 깊은 행[深行]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보지 못하고 또한 내가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는 것도 보지 못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보지 못하고 또한 이 법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도 보지 못하며, 도무지 분별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보살은 온갖 모든 법의 실상(實相) 가운데에 편히 머무르기 때문에 ‘2승(乘)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부처님 도는 나와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분별하지 않습니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허공 등의 비유로 말하고 있는데 이 모든 비유는 필경 공한 이치를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반야바라밀이 비록 공하다 하더라도 만일 닦는 바가 있으면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나니, 마치 나무로 만든 사람[木人]까지도 짓는 바에 따라 무슨 일이든 모두 성취하는 것과 같다.
사리불은 수보리에게 묻기를 “다만 반야만이 분별이 없습니까, 아니면 모든 바라밀도 분별이 없습니까? 다만 반야만이 공하여 분별이 없고 그 밖의 바라밀은 바로 모양이 있어야 한다면 이것은 곧 보살의 도와는 다른 것이어서 평등하지 않습니다. 또 초품(初品) 중에서 말하기를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도 없고 또한 재물도 없다’고 하였거늘 지금은 어떻게 다르다 하는 것입니까? 만일 다섯 가지 일이 모두 공하여 분별이 없다면 여섯 가지의 이름도 없고 또한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고 한다.
수보리는 말하기를 “다섯 가지 바라밀도 또한 공하여서 분별이 없습니다.
처음 발심하여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지 못한 이에게는 분별이 있습니다”고 한다. 마치 네 개의 강물[四河]이 아직 큰 바다를 만나기 전이면 다른 이름이 있지만 큰 바다에 들어간 뒤에는 차별이 없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세속의 이치 가운데서는 차별이 있거니와 첫째가는 이치에서는 분별이 없다.
사리불은 묻기를 “물질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와 무위의 성품[無爲性]도 분별이 없습니까? 만일 이 법이 공하여 차별이 없다면 어떻게 6도(道)에 차별이 있겠으며, 어떻게 수다원과 부처님 도에 차별이 있겠습니까”라고 한다.
수보리는 사리불에게 대답하기를 “모든 법은 비록 필경 공이어서 분별이 없다 하더라도 이 중생들은 미치고 뒤바뀐 마음으로 신업ㆍ구업ㆍ의업을 일으키고 그 업에 따라 몸을 받습니다. 업보(業報)는 탐욕이 그 근본입니다. 다만 탐욕에 핍박을 받아 집착하는 마음을 낼 뿐이요, 모든 법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습니다”고 한다. 업의 과보라 함은 이른바 6도(道)이다.
그러므로 공하여 분별할 바 없는 것이 바로 그의 진실한 근본인데 다만 뒤바뀌어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6도의 차별이 있을 뿐이라고 알아야 한다.
또 수다원 등의 성현도 역시 필경 공하여 분별이 없는 법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3결(結)의 법을 끊으면 수다원의 과위라 한다. 3결사가 곧 뒤바뀜[顚倒]이요 뒤바뀐 것을 깨달아서 물리치는 것을 끊는다[斷] 한다. 이 때문에 그 끊는 법이 곧 공하여 분별이 없는 것이다.
세속 이치[世諦] 때문에 임시로 사람이라 부르고, 이런 법을 얻기 때문에 수다원의 과위[果]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다원의 사람과 과보는 필경 공하여 분별이 없으며, 나아가 부처님과 부처님의 도 역시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서는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다만 현재만이 분별이 없는 것이 아니요 과거의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도 온갖 분별이 끊어졌기 때문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신 것이다. 일정한 모양을 분별할 수 있는 조그마한 법조차도 없고
온갖 법은 필경 공한 것이니, 이 여(如)와 법성(法性)과 실제(實際)의 문에 들었기 때문이다”고 하시며, 이 때문에 “인연의 법은 심히 깊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의 문(門)에 들기 때문에 보살은 으레 이와 같은 분별이 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며, 분별이 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분별이 없는 법을 얻나니,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65. 칭양품(稱揚品)을 풀이함①

【經】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진실한 법[眞實法]을 행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진실함이 없는 법[無眞實法]을 행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대답했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진실함이 없는 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진실함이 없고, 나아가 일체종지도 진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진실함이 없어서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진실이겠습니까. 나아가 일체종지를 행하면서도 진실함이 없어서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진실이겠습니까.”
그때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모든 천자(天子)들이 생각하기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들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일으켜 깊은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신 그대로의 이치를 행하면서 평등한 법에 대하여 실제(實際)를 증득하지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는 이들이면 그들에게 예배해야 하리라’고 했다.
수보리가 천자들에게 말했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평등한 법에서 성문이나 벽지불을 증득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큰 서원으로 장엄하여 ‘나는 마땅히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의 중생들을 제도해야 한다’고 하고, 중생들을 필경 얻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바로 어려운 일입니다.

천자들이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켜 서원을 세우면서 ‘나는 온갖 중생들을 제도해야 한다’고 하지만, 중생은 실로 얻을 수가 없으므로 이 사람이 중생을 제도하려 하는 것은 마치 허공을 제도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여읜 것이므로 중생도 또한 여읜 것인 줄 알아야 하고 허공은 공한 것이기에 중생도 또한 공한 것인 줄 알아야 하며, 허공은 견고함이 없으므로 중생도 또한 견고함이 없는 줄 알아야 하고 허공은 거짓된 것이므로 중생도 또한 거짓된 것인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자들이여, 이런 인연 때문에 보살이 하는 일을 어렵다 하는 줄 알아야 하나니, 있지 않은[無所有]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크게 장엄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세우는 것은 허공과 서로 싸우려는 것이며, 이 보살은 서원을 세운 뒤에 역시 중생을 얻지 못하는데도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여읜 것이므로 큰 서원도 또한 여읜 것인 줄 알아야 하며, 중생은 거짓된 것이므로 큰 서원도 또한 거짓된 것인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런 법을 듣고 마음에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 않으면 그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의 여읨이 곧 중생의 여읨이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여읨이 곧 중생의 여읨이며, 물질의 여읨이 곧 6바라밀의 여읨이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여읨이 곧 6바라밀의 여읨이며, 나아가 일체종지의 여읨이 곧 6바라밀의 여읨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 모든 법의 여의는 모양[離相]을 듣고도 마음에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으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인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마음이 침몰하지 않더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있지 않기[無所有] 때문에 침몰하지 않고 반야바라밀은 여의었기[離] 때문에 침몰하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은 고요히 사라졌기[寂滅] 때문에 침몰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인연 때문에 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마음이 침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침몰하는 이[沒者]를 얻지 못하고 침몰하는 일[沒事]도 얻지 못하며 침몰하는 곳[沒處]도 얻지 못하여 이 온갖 법은 모두 다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런 법을 듣고도 마음이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도 않으면 이런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침몰하는 이와 침몰하는 일과 침몰하는 곳의 이런 법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으면 모든 하늘과 그리고 석제환인ㆍ하늘ㆍ범천(梵天)ㆍ사천왕 및 세계의 주인[世界主]인 하늘들이 모두 그에게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다만 석제환인이나 모든 하늘ㆍ범천 및 모든 천상 세계의 주인과 모든 하늘만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 보살에게 예배할 뿐만이 아니라 이보다 위를 지나 광음천(光音天)ㆍ변정천(遍淨天)ㆍ광과천(廣果天)ㆍ정거천(淨居天)도 이 보살마하살에게 예배하느니라.
수보리야, 지금 현재 시방에 계신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도 역시 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마하살을 기억해 주시나니, 이 보살은 부처님과 같은 이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 안의 중생이 모두가 악마가 되고 그 낱낱의 악마들이 다시 변화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악마를 만들었다 해도 그 온갖 악마들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을 방해하지는 못하느니라.”

【論】해석한다. 그때에 사리불은 분별이 없는 모양[無分別相]의 법을 듣고 마음에 크게 기뻐하면서 수보리에게 묻기를 “만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진실한 법을 행하는 것입니까, 진실함이 없는 법을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한다. 진실한 법은 확실하고 결정되어서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으며 곧 그것은 취할 수도 있고 집착할 수도 있거니와 만일 진실하지 않은 법이면 그것은 곧 속임수요 거짓말이다.
수보리는 항상 깊은 공을 행하기 좋아하여 마음에 장애가 없기 때문에 대답하기를 “반야를 행하는 이는 곧 진실이 없는 법을 행합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공하여 정해진 모양도 없고 분별도 없기 때문이니, 나아가 일체종지도 역시 그와 같다.
보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옛날의 나고 죽고 하는 동안에 익히고 집착했던 거짓된 유위(有爲)의 법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앞으로 거짓된 인연에서 생긴 것을 관찰하겠는가. 반야바라밀은 집착하는 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보살은 “온갖 세간은 진실하지 않다”고 관찰하면서 또한 이 반야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세속의 이치[世諦]이기 때문에 진실하다고 말한다. 첫째가는 이치[第一義] 안에서는 진실조차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진실하지 않은 것을 말하겠는가.
그때에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그들 보살로서 발심한 이에게는 모두 예배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능히 하고 제일 깊은 이치를 행하면서도 증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한다. 첫째가는 이치란 곧 평등한 법[平等法]인데 다만 이름을 다르게 말할 뿐이다.
수보리는 모든 천자들에게 말하기를 “보살이 평등한 법에 대하여 증득하지 않은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보살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려 할 때에 중생은 필경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을 제도하려 하는 것은 허공을 제도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공은 여읜 것이기에 중생도 또한 여의고 허공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은 것이기에
중생도 공하여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습니다”고 한다.
【문】평등한 법에서 증득하지 않는 것과 중생은 필경 공한데도 중생을 제도하는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필경 공한 것이거늘, 어떻게 하나는 어렵다 하고 하나는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가?
【답】중생은 거짓으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이것은 집착하게 되는 처소이거니와 평등한 법은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처소가 아니며, 중생은 유위(有爲)의 법이어서 거짓으로 붙인 이름으로부터 생기거니와 무위의 법은 바로 첫째가는 이치이다. 뒤바뀌어 집착할 곳인데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어려운 일이요, 집착할 것 없는 데서 집착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중생은 공하기 때문에 크게 장엄하는 것도 역시 공하며, 만일 크게 장엄한 것이 공한데도 발심할 수 있으면 그것이 어려운 일이다”고 한다. 보살은 이 첫째가는 평등한 이치를 듣고 중생을 제도하면서 크게 장엄하되 모두가 필경 공한데도 마음은 놀라지도 않고 침몰하지도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잘 길들여진 말이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라지 않는 것과 같나니, 왜냐하면 자기 그림자는 자기 몸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살도 그와 같아서 필경공인데도 유위법의 화합으로 인하여 허망한 법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살은 이런 일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도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물질 등의 법은 여의는 것이므로 중생도 역시 여의는 것이니, 여읜다[離]는 것은 공(空)하다는 말이다. 만일 중생이 공하고 법이 공하지 않다면 두려워함이 있어야겠거니와 만일 법도 또한 공하다면 두려움을 낼 처소가 없다. 만일 보살이 이 온갖 법의 여의는 모양[離相]을 듣고도 마음에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를 또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이라 한다.
위에서는 중생의 공[衆生空]을 들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여기서는 법의 공[法空]을 들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니, 만일 이 두 가지의 공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것을 진실로 반야를 행하는 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무엇 때문에 보살의 마음은 침몰하지 않느냐”고 하신다.
【문】부처님께서는 바로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사람이거늘 무엇 때문에 제자에게 마음이 놀라지도 않고 침몰하지도 않는 이유를 물으시는가?

【답】모인 대중 가운데 의심이 있으면서도 공경하고 어려워하기 때문에 감히 묻지 못하는 이가 있으므로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물으신 것이다.
또 이 첫째가는 평등한 이치는 매우 깊어서 얻기 어렵고 깊은 곳이라 응당 침몰해야 하는 데도 침몰하지 않기 때문에 시험 삼아 물으신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설법하는 법주(法主)로 삼았으므로 법을 듣는 이들은 으레 묻고 따져야 한다.
【문】부처님께서는 일체지를 지니고 계신 이거늘 무엇 때문에 몸소 법을 설하시는 법주가 되시지 않고 수보리로 하여금 설하게 하시는가?
【답】대중 안의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지혜는 한량없고 끝이 없거니와 우리들의 지혜의 힘은 한량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의심이 있어도 감히 묻지 못하겠구나”고 하기도 하므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수보리에게 명하여 설하게 하시는 것이다.
【문】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큰 보살로 하여금 설하게 하시지 않는가?
【답】큰 보살들의 지혜도 역시 크고 불가사의하여 위덕이 중하므로 그들에게도 감히 묻거나 따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라한과 벽지불과 부처님께서는 삼계(三界)의 매임[繫]인 무명(無明)이 영원히 다하여 남은 것이 없으므로 여실히 법을 설하실 수 있거니와 모든 보살은 비록 복덕을 널리 쌓았다 하더라도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믿을 수 없는 이도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명하지 않는 것이다.
【문】만일 그렇다면 지혜가 첫째가는 사리불과 그 밖의 다른 큰 제자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명하지 않으셨는가?
【답】이런 일은 이미 앞에서 대답했다. 이른바 수보리는 공의 행[空行]을 좋아하고 특별히 공을 잘 설한다. 반야바라밀에서는 대부분 공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수보리로 하여금 설하게 한 것이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온갖 법은 필경 공하여서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제 모양[自相]을 여의고[離] 모양을 여의기 때문에 언제나 고요히 사라지며[寂滅], 언제나 고요히 사라졌기 때문에 생각과 분별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보살은 마땅히 놀라지 않아야 하고 침몰하지도 않아야 하니, 침몰하는 이와 침몰하는 처소와 침몰하는 법은 모두 얻을 수 없습니다. 만일 보살이 이런 일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고 한다.
수보리는 대답하고 나서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이와 같이 행하면 역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능히 이와 같이 행하면 온갖 하늘의 제석 및 세계의 주인[世界主]들은 보살에게 예배해야 합니다”고 한다. 지신(地神)과 허공 안에 있는 신(神)과 사천왕(四天王)ㆍ도리천(忉利天)은 제석천왕을 주인으로 삼는데 모두가 함께 이 보살에게 예배한다는 것이다.
범천왕(梵天王)은 초선[禪] 안에 있는 범세계[梵世界] 중생들의 주인이다. 세계의 주인[世界主]이라 함은 욕계(欲界)의 그 밖의 하늘의 주인을 말한다. 중생들은 대개가 이 하늘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수보리는 “예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려 하거니와 이 세 종류의 하늘들은 다만 자기 자신의 즐거움만 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다만 이 세 종류의 하늘들만이 예배하는 것이 아니요 광음천(光音天) 등 청정하게 일심(一心)이 된 하늘들도 모두 다 예배하느니라”고 하신다.
욕계에 있는 모든 하늘은 음욕에 집착하는 마음이 많기 때문에 예배한다 해도 귀히 여길 만한 거리가 못된다. 초선천(初禪天)에는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의 산란함이 있으므로 역시 묘한 일로 여기기엔 모자라거니와 그 위의 모든 하늘은 마음이 청정한데도 이 보살에게는 큰 공덕이 있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이니, 이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어려운 일이 된다.
“수보리야,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이 반야를 행한다면 시방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기억하시게 된다”고 하신다. 부처님께서 기억하시는 인연에 대해서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이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런 보살은 모든 부처님께서 기억해 주신 과보이니라”고 하신다. 이른바 이런 보살은 부처님 같은 분이라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니, 그런 분은 반드시 부처님 도에 이르게 되고 물러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악마들이라도 이 보살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은 경에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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