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23권
대지도론 제23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37. 초품 중 십상(十想)의 뜻을 풀이함
【經】 10상(想), 곧 무상상(無常想)ㆍ고상(苦想)ㆍ무아상(無我想)ㆍ식부정상(食不淨想)ㆍ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ㆍ사상(死想)ㆍ부정상(不淨想)ㆍ단상(斷想)ㆍ이욕상(離欲想)ㆍ진상(盡想)[을 구족해야 하느니라.]
【論】 【문】 이 온갖 행하는 법[行法]은 무엇 때문에 어떤 때에는 지혜[智]1)라 하고 어떤 때에는 염(念)2)이라 한다.
어떤 때에는 생각[想]3)이라 하는가?
【답】 처음에 착한 법을 익힐 때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만 염이라 한 것이다. 모양을 굴리고 마음을 굴리기 때문에 생각이라 하고, 확연히 알고 의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지혜라 한다.
온갖 유위의 법[有爲法]은 무상하다고 관하면서 지혜와 상응하는 생각4)을 바로 무상상(無常想)이라 한다. 온갖 유위의 법이 무상하다고 함은 새롭게 자꾸 나고 없어지고 하기 때문이고, 인연(因緣)에 속하기 때문이며, 더욱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생겨날 때에도 오는 곳이 없고 멸하는 때에도 가는 곳이 없나니, 이 때문에도 무상하다고 한다.
또 두 가지의 세간은 영원함이 없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나니, 첫째는 중생이 무상하고, 둘째는 세계가 무상하다.
이러한 게송이 있다.
대지(大地)의 초목은 모두 닳아 없어지고
수미산과 큰 바다도 무너지고 마르며
천인이 사는 곳들도 모두 불 타서 다하나니
그러니 세상에 무엇이 영원하겠는가.
10력(力) 지닌 세존은 몸의 광명 갖추시고
지혜 밝게 비추심이 또한 한량없으면서
온갖 모든 중생을 제도 해탈케 하시어
명문(名聞)이 두루 10방에 차셨거늘
오늘날은 텅 비었으니 모두 어디 계실까.
어찌 지혜 있는 이라면 마음 아프지 않으랴.
그와 같아서, 사리불과 목건련과 수보리 등의 모든 성인들과
전륜성왕과 모든 국왕ㆍ상락천왕(常樂天王) 및 모든 하늘들이며 거룩한 덕이 있고 존귀한 이도 모두 또한 다하고 큰 불길의 광명도 홀연히 꺼졌으며 세간이 바뀌고 무너짐이 마치 바람 속에 있는 등불과 같고, 험한 언덕에 서 있는 나무와 같으며 새는 그릇에 담긴 물이 오래지 않아 비고 다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체 중생과 중생들이 사는 곳은 모두 무상하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한다.
【문】 보살은 무엇 때문에 이 무상상을 닦는가?
【답】 중생은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常顚倒]에 집착하여 뭇 고통을 받으면서 생사(生死)를 못 면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 무상상을 체득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말하기를 “모든 법은 모두가 무상한 것이니, 그대들은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에 집착하여 도를 행할 때를 잃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으뜸가고 묘한 법은 이른바 4제[四眞諦]이니, 4제 안에서는 고제(苦諦)를 첫째로 하고, 괴로움의 네 가지 행[四行] 가운데서는 무상행이 첫째가 된다. 이 때문에 보살은 무상하다는 생각[無常想]을 닦는 것이다.
【문】 어떤 사람은 무상한 일이 닥치게 되면 더욱더 굳게 집착하기도 한다. 마치 국왕의 부인인 보녀(寶女)와 같다. 그녀는 땅속에서 나온 열 개의 머리를 가진 나찰(羅刹)5)에게 끌리어 큰 바다를 건너갔다. 그러자 왕은 크게 근심하고 걱정하였는데, 지혜 있는 신하6)가 간(諫)하기를 “왕께서는 지혜의 힘을 두루 갖추셨으므로 부인은 오래지 않아 돌아오시게 될 터인데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계십니까”고 하자, 대답하기를 “내가 근심하는 까닭은 내가 부인을 만날 수 없을까를 근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 한창 때가 쉬이 지남을 두려워할 뿐이다”고 했다.
또한 사람이 좋은 꽃과 좋은 과일을 볼 때에는 욕망이 과하여 몹시 애착을 내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무상함을 알면서도 더욱더 번뇌[結使]를 일으키는데 어찌하여 무상하므로 마음에 싫증을 내면서 모든 번뇌를 끊게 한다 하는가?
【답】 이처럼 무상을 본다면 이는 무상함의 조그마한 부분만을 아는 것이요 구족하지는 못한 것이다. 짐승이 무상함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시되 “무상상 [등을] 구족해야 한다”고 하셨다.
【문】 어떤 것이 무상상을 구족하는 것인가?
【답】 유위의 법이 생각 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을 관하는 것이다. 마치 바람에 먼지가 날리는 것과 같고 산 위에서 물이 흘러 내리는 것과 같으며, 불길에 따라 꺼져가는 것과도 같다. 온갖 유위의 법은 단단함도 없고 강함도 없으며 취할 수도 없고 집착할 수도 없나니, 마치 허깨비[幻化]7)가 범부를 속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무상으로 인하여 공의 문[空門]에 들어가게 된다. 이 공안에서는 온갖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상함도 역시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한 생각 동안에 나고[生] 머무르고[住] 사라지는[滅]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날 때에는 머무르고 사라지는 것을 얻지 못하고, 머무를 때에는 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얻지 못하며, 사라질 때에는 나고 머무르고 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나고 머무르고 사라지는 모양과 성품8)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없고, 이 없다는 것 때문에 무상함도 역시 없다.
【문】 만일 무상함이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고제(苦諦) 가운데서 무상함을 말씀하셨는가?
【답】 범부는 삿된 소견[邪見]을 내기 때문에 세간은 곧 항상한다고 여기나니, 이 항상한다는 소견[常見]9)을 없애 주기 위하여 무상하다 함을 말씀하신 것이지 무상함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에 말씀한 것은 아니다.
또 부처님께서 아직 세간에 출현하시기 전에는 범부들은 다만 세속의 도(道)로써 모든 번뇌를 막았으나, 이제는 모든 번뇌의 근본을 뽑아내려는 까닭에 이 무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모든 외도의 법에서는 다만 형체만으로 5욕(欲)을 여의고는 이것을 해탈이라 여기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삿된 형상의 인연 때문에 속박되고 무상하다 하는 바른 모습을 관하기 때문에 해탈한다”고 하셨다.
또 두 가지로 무상한 형상을 관하는 것이니, 첫째는 남음이 있는 것[有餘]이고, 둘째는 남음이 없는 것[無餘]이다. 마치 부처님의 말씀과 같아서 온갖 사람이나 물건이 모두 다 사라져 없어지고 오직 이름만이 남아 있음을 바로 남음이 있다고 하고, 만일 사람이나 물건이 다 사라져 없어지고 이름조차도 사라지면 이것을 남음이 없다고 한다.
또 두 가지로 관하는 무상한 모양이 있나니, 첫째는 몸이 죽어서 다하여 멸하는 것이고 둘째는 새롭게 자꾸 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계율을 지님[持戒]이 중요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계율의 인연에 의거한 까닭에 차례로 번뇌가 다하게 되기 때문이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많이 들음[多聞]이 중요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혜에 의거하는 까닭에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선정(禪定)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한 것과 같아서 선정은 도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12두타(頭陀)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와 같이 저마다 자기가 행한 것을 귀히 여기면서 다시는 부지런히 열반을 구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 모든 공덕은 바로 모두가 열반에 나아가는 갈래[分]이며, 만일 모든 법의 무상함을 관하면 이것이 바로 참된 열반의 도(道)이다”고 하셨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은 비록 공하다 하더라도 이 무상상(無常想)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무상상은 바로 그것이 성인의 길에 대한 별명(別名)이다.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다른 이름으로 도를 말씀하신 것이니, 혹은 4념처(念處)를 말씀하기도 하시고 혹은 4제(諦)를 말씀하기도 하셨으며 혹은 무상상을 말씀하기도 하셨다.
마치 경에서 말씀한 것과 같아서 “무상상을 잘 닦으면 온갖 욕애(欲愛)10)ㆍ색애(色愛)11)ㆍ무색애(無色愛)12)와 들뜸[悼]ㆍ교만[慢] 등을 끊고 무명(無明)이 다하여 삼계의 번뇌를 제거할 수 있나니, 이 때문에 곧 도(道)라 한다”고 하셨다.
이 무상상은 혹 유루(有漏)이기도 하고 혹 무루(無漏)이기도 하다. 바르게 무상함을 얻으면 이것은 바로 무루요 처음 무상함을 배우면 이것은 바로 유루이다.
마하연(摩訶衍) 중에서는 모든 보살의 마음이 광대하여 갖가지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이 무상상은 역시 유루이기도 하고 역시 무루이기도 하다. 만일 무루이면 9지(地)가 있고, 유루이면 11지(地)가 있나니, 삼계(三界)의 5수중(受衆)을 대상으로 삼고 4근(根)과 상응하며, 고근(苦根)은 제외된다.
범부에 대해 성인은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을 얻어서 무상상의 공덕을 설명한다.
고상(苦想)13)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는 “온갖 유위의 법[有爲法]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 만일 유위의 법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 하면 모든 성현에게도 유위의 무루[有爲無漏]법은 역시 괴로움이어야 하리라.
【답】 모든 법이 비록 무상하다 하더라도
애착하면 고통이 생기고 애착함이 없으면 고통이 없다.
【문】 어떤 모든 성현에게는 비록 애착함이 없다 하더라도 역시 모두 괴로움이 있다. 마치 사리불(私利佛)에게는 풍열병(風熱病)의 고통이 있었고,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14)에게는 눈병의 고통이 있었으며, 라바나발제15)[羅婆那跋提:음성이 제일이다.]는 치질병(痔疾病)의 고통이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런데 어찌하여 괴로움이 없다고 하는가?
【답】 두 가지의 괴로움이 있나니, 첫째는 몸의 괴로움[身苦]이고, 둘째는 마음의 괴로움[心苦]이다. 이 모든 성인들은 지혜의 힘 때문에 다시는 근심 걱정이나 질투나 성을 내는 등의 마음의 괴로움은 없다. 이미 전생에 지은 업(業)의 인연으로 4대(大)로 만들어진 몸을 받았으니 늙고 병들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덥고 하는 등의 몸의 괴로움이 있나니, 그 몸이 괴로운 가운데서도 역시 고통은 얇고 적다.
마치 사람이 분명히 다른 이에게 빚진 것을 알고 있다면 그 빚을 갚아 고통으로 여기지 않겠지만 만일 빚졌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빚쟁이가 강제로 빼앗아 가면 성을 내면서 괴로워하는 것과 같다.
【문】 괴로운 느낌[苦受]은 바로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이다. 몸은 마치 풀이나 나무와 같아서 마음을 여의게 되면 깨닫는 바가 없거늘 어떻게 성인은 다만 몸의 괴로움만을 받는다고 하는가?
【답】 범부는 고통을 받을 때에 마음으로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성냄의 번뇌[瞋使]에 부림을 당하며 마음에서는 다만 5욕만을 향한다.
마치 부처님의 말씀과 같아서 범부는 5욕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즐거운 느낌[樂受]에서는 탐욕의 번뇌에 부림을 당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에서는 무명(無明)의 번뇌에 부림을 당한다.
범부는 고통을 받을 때에 안으로는 3독(毒)의 고통을 받고 밖으로는 추위와 더위와 매를 맞는 따위를 받게 되나니, 마치 사람이 안으로 열(熱)이 성하면 바깥의 열도 역시 성하는 것과 같다.
마치 경에서의 말씀16)과 같아서, 범부는 사랑하던 물건을 잃게 되면 몸과 마음이 다 함께 고통을 받게 되나니, 마치 두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나란히 쏘는 것과 같다. 모든 성현들은 근심하는 괴로움이 없고 다만 몸의 고통이 있을 뿐이며 다시 그 밖의 고통은 없다.
또 다섯 가지 식[五識]과 상응하는 괴로움 및 바깥의 인연으로서 매를 맞거나 춥거나 덥다는 등의 괴로움이 있을 뿐이니, 이것을 몸의 괴로움이라 하고 그 밖의 나머지 것을 마음의 괴로움이라 한다.
또 나는 말하건대 유위의 무루법은 애착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다. 성인의 몸 이것은 유루인지라 유루의 법이면 괴로움이 있는 것인데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이 맨 마지막 몸[末後身]은 그 받는 괴로움 또한 미미하고 적다.
【문】 무상한지라 바로 그것이 괴로운 것이라면 도(道)도 역시 괴로운 것인데 어찌하여 괴로운 것으로써 괴로운 것을 여의는 것인가?
【답】 무상이 곧 괴로움이란 5수중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도(道)는 짓는 법[作法]이기 때문에 비록 무상하다 하더라도 괴로움이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괴로움을 없애고 모든 집착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공하고 나 없는[無我] 등의 모든 지혜와 화합하기 때문에 다만 이것은 무상하면서도 괴로움은 아닌 것이다. 마치 모든 아라한이 도를 얻을 때에 게송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삶을 탐내지 않고
또한 죽음도 좋아하지 않으니
한마음과 지혜로써
때가 이름을 기다리다 갈 뿐이라네.
부처님께서 열반을 드실 때 아난(阿難) 등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 8성도(聖道)를 잘 닦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근심을 했으니, 모든 욕망을 여읜 아나함(阿那含) 등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모든 무루의 아라한들은 그 마음은 변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세간의 눈이 사라짐이 빠르기도 하다”고 했는데, 도력(道力)을 얻었기 때문이다.
비록 부처님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었고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이 중함을 안다 하더라도 괴로움을 내지는 않았나니, 이 때문에 도는 비록 무상하다 하더라도 괴로움의 인연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라 하지 않으며 다만 5수중만이 괴로움일 뿐이다. 왜냐하면 애착하기 때문이요 무상하여 무너지기 때문이다. 마치 수념처(受念處) 안의 괴로움의 이치[苦義]17)와 같으니, 이 안에서 자세히 설명해야 하리라.
또 괴로움이라 함은, 몸에는 항상 이런 괴로움이 있거늘 어리석음에 가렸기 때문에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게송이 있다.
말을 타다 피로가 극에 이르기에
서 있을 곳을 구하며 찾고
서 있어도 피로가 극에 이르기에
앉아 쉴 곳을 구하며 찾네.
오래 앉아도 피로가 극에 이르기에
편히 누워 있을 곳을 구하며 찾는다네.
뭇 극치[極]는 지음으로 생기거늘
처음은 즐겁다가 나중에는 괴롭다네.
눈을 깜박이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구부리고 펴고 앉고 눕고 일어나며
다니고 서고 그리고 오고 가는
이런 일은 다 괴롭지 않음이 없다네.
【문】 이 5수중은 모두가 괴로운 것이요 괴롭다는 생각으로 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만일 모두가 괴로운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세 가지의 느낌, 즉 괴로운 느낌[苦受]18)과 즐거운 느낌[樂受]19)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20)이 있다고 하셨는가? 만일 괴롭다는 생각[苦想]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면 어찌하여 고제(苦諦)는 진실한 괴로움[實苦]이라 하셨는가?
【답】 5수중은 모두 괴로운 것이다. 범부는 네 가지의 뒤바뀐[四顚倒] 인연으로 욕망의 핍박을 받고 5욕으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마치 사람이 다친 상처에 약을 바르면 몹시 아프던 것이 그치기 때문에 즐겁다고 여기게 되지만 이 상처는 즐거운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의 느낌은 세간을 위해서일 뿐, 진실한 법 안에서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만일 5수중 가운데 실로 즐거움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5수중이 소멸함을 일컬어 즐거움이라 한다”고 하셨겠는가.
또 그가 즐기는 것에 따라 즐거운 마음이 곧 생겨나지만, 즐거움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즐거움이 만일 실로 정해져 있다면 마음의 집착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마치 뜨거운 불은 손이 닿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뜨거운 것과 같다. 즐거움에는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 한다.
또 세간의 뒤바뀐 즐거움은 지금의 세상이나 뒷세상에서 한량없는 고통의 과보를 얻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강물에 소량의 독(毒)을 집어넣어서 그 물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세간의 뒤바뀐 독약은 온갖 큰 고통의 물속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게송이 있다.
하늘에서 내려와 지옥에 떨어졌을 때
본래 있던 천상의 즐거운 일을 기억하면
궁관(宮觀)과 채녀(婇女)들이 눈앞에 가득하고
동산과 목욕하던 못이 마음을 즐겁게 한다.
또 지옥 불로 몸이 타는 것을 볼 때는
마치 큰 불이 대 숲[竹林]을 태우는 것 같으니
이때에는 비록 천상의 낙(樂)을 보더라도
한갖 느낌만이 맺힐 뿐 아무 이익이 없다.
이 고상(苦想)에 속하는 대상은 무상상(無常想)과 같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괴로움을 분별하는 것을 고상이라 한다.
무아상(無我想)21)이라 했는데, 괴로운 것은 곧 나 없음[無我]이다. 왜냐하면 다섯 가지의 느낌에서는 모두가 다 괴로운 모양이요 자재(自在)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자재함이 없다면 이는 곧 나가 없다는 것이며 만일 나에게 자재함이 있다면 몸은 마땅히 괴로움을 받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다음의 게송과 같다.
모든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바로 나라 헤아리면서
점점 가까이하며 굳게 집착하므로
무상의 법을 알지 못한다.
이 몸에는 짓는 이[作者]가 없고
또한 받는 이[受者]도 없으며
이 몸은 무생(無生)이면서
갖가지의 일을 짓고 있다.
6정(情)22)과 진(塵)23)의 인연으로
6식(識)24)이 생기게 되나니
이 세 가지로 화합하는 인연으로부터
접촉[觸法]25)이 일어나게 된다.
접촉의 인연으로부터
느낌과 염(念)하는 업의 법이 생기나니
마치 구슬과 해와 풀과 땔나무가
화합하기 때문에 불이 생기는 것 같다.
정과 진과 식이 화합해
짓는 바 사업이 이루어지나니,
상속되어 서로 닮은 존재[有]는
마치 씨앗에 싹눈이 있는 것과 같다.
또 나의 모양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나가 없는 것이다. 온갖 법에는 모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 줄을 안다. 마치 연기를 보고 뜨거움을 깨닫기 때문에 불이 있는 줄 아는 것과 같다. 5진(塵) 중에서는 저마다 구별되고 다르다. 그러므로 알아라. 유정들은 갖가지로 모든 법을 생각하고 헤아리기 때문에 있는 줄을 아나니, 마음[心]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에는 이 나라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나가 없다고 아는 것이다.
【문】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나의 모양이며, 눈을 깜박이고 수명을 누리고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정성을 다하는 따위가 바로 나의 모양이다. 만일 나가 없다면 그 무엇이 있어서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눈을 깜박이고 수명을 누리며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정성을 다하겠는가? 그러므로 나가 속에 있으면서 움직이고 일으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수명이나 마음 역시 이것은 나의 법이다. 만일 나가 없다면 마치 소는 있으나 부리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나가 있기 때문에 능히 마음을 제어하고 법에 들어가며 방일하지 않게 된다. 만일 나가 없다면 누가 마음을 제어하겠는가?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이다. 만일 나가 없다면 마치 수목과 같아서 곧 괴로움과 즐거움을 구별하지 못해야 하리니,
사랑하고 미워하고 정성을 쓰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나는 비록 미세하여서 5정(情)26)으로써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이런 모양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인 줄을 알 수 있다.
【답】 이 모든 모양은 모두가 식(識)의 모양일 뿐이다. 식이 있으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며 눈을 깜박이고 수명을 누리는 것 등이 있지만, 만일 식이 몸을 떠나면 없게 된다. 그대들이 말하는 나[我]는 항상하면서 두루하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도 역시 눈짓이나 들숨ㆍ날숨이나 수명 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바로 색법(色法)27)이다. 마음의 바람의 힘[心風力]을 따르기 때문에 움직이고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식의 모양이지 나의 모양은 아니다.
수명(壽命)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心不相應行]28)이어서 역시 이것은 식의 모양이다.
【문】 혹은 무심정(無心定)29) 중에 들어가거나 혹은 잠을 잘 때 꿈이 없을 때에도 숨은 역시 드나들며 수명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모두가 이는 식의 모양이라고 하는가?
【답】 무심정 등에서는 식이 비록 잠시 동안은 없다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도로 돌아와 식이 생긴다. 몸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식이 있는 때가 더 많고 식이 없는 때는 적나니, 이 때문에 식의 모양이라 한 것이다. 마치 사람이 잠시 동안 밖으로 나가서 다닌다 하여 그 집에 주인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정성을 다하는 등의 것은 마음과 상응하면서 인연을 함께하며 마음의 작용을 따르는 것이니,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곧 있고 마음이 없으면 곧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이것은 식의 모양이요 나의 모양이 아니다.
또 만일 나가 있다면 나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항상한 것[常]과 항상하지 못한 것[無常]이다.
이러한 게송이 있다.
만일 나가 바로 항상하다면
곧 나중의 몸30)은 없을 것이며
항상하다면 나지 않기 때문에
해탈 역시 없으리라.
허망한 것도 아니고 짓는 것도 아니니
이 때문에 알아야 한다.
죄와 복을 짓는 이도 없고
또한 그것을 받는 이도 없다.
나의 내 것[我所]을 버리면
그러한 뒤에라야 열반을 얻나니
만일 진실로 나가 있다면
나라는 마음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만일 나가 무상한 것이라면
곧 몸을 따라서 소멸해야 하며
마치 큰 언덕에서 물이 떨어진 것 같으리니
역시 죄와 복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나와 그리고 아는 이[知者]와 알지 못하는 이[不知者]와 짓는 이[作者]와 짓지 않는 이[不作者]에 대하여는 단바라밀(檀波羅密)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나의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법에는 나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나니, 만일 온갖 법에 나가 없음을 알면 곧 나라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만일 나가 없고 또한 내 것이라는 마음이 없으면 나와 내 것이라는 것을 여의기 때문에 곧 속박이 없고, 만일 속박이 없게 되면 그 바로 그것이 열반이다. 이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마땅히 무아상(無我想)을 행해야 한다.
【문】 이 무상(無常)과 괴로움[苦]과 무아(無我)는 한 가지의 일인가? 혹은 세 가지 일인가? 만일 이것이 한 가지의 일이라면 세 가지로 설명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이것이 세 가지의 일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무상하다면 바로 괴로움이요 괴로움이라면 바로 무아이다”라고 하셨는가?
【답】 이것은 한 가지의 일이니, 이른바 유루의 법[有漏法]을 받는 것이다. 관문(觀門)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세 가지의 다름이 있을 뿐이다.
무상함의 행상(行相)31)은 바로 무상상(無常想)이어야 하고, 괴로움의 행상32)은 바로 고상(苦想)이어야 하며, 무아의 행상33)은 바로 무아상(無我想)이어야 한다. 무상함은 삼계(三界)에 들지 않게 하고, 괴로움은 삼계의 죄과(罪過)를 알게 하며, 무아는 곧 세간을 버리게 한다.
또 무상으로는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괴로움으로는 두려움을 내며, 무아로는 벗어나서 해탈하게 한다.
무상하다 함을 부처님께서는 “5수중(受衆)이 바로 무상한 것이다”고 하셨고, 괴로움이라 함을 부처님께서는 “무상한 그것이 괴로움이다”고 하셨으며, 무아라 함을 부처님께서는 “괴로운 그것이 곧 무아이다”고 하셨다.
무상하다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5수중은 다하여 사라지는 모양이다” 함을 보이셨고, 괴롭다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마치 화살이 염통에 들어간 것과 같다” 함을 보이셨으며, 무아라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버리고 여의는 모양이다” 함을 보이셨다.
무상하다 함은 애욕을 끊을 것을 보인 것이고, 괴롭다 함은 나라는 습기[我習]와 잘난 체함[慢]을 끊을 것을 보인 것이며, 무아라 함은 삿된 소견을 끊을 것을 보인 것이다.
무상하다 함은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을 막고, 괴롭다 함은 이 세상에서의 열반은 즐겁다 하는 소견을 막으며 무아라 함은 집착하는 곳을 막는다.
무상하다 함은 세간에서 집착할 만한 늘 있다고 하는 법에 대해서이고, 괴롭다 함은 세간에서 즐거운 곳을 헤아리는 것에 대해서이며, 무아라 함은 세간에서 나라고 계착할 만한 견고한 것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세 가지 모양으로 분별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무아상의 반연은 갖가지를 포섭하나니, 마치 고상(苦想)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식염상(食厭想)34)이라 함은 이 음식은 깨끗하지 못한 인연으로부터 생긴다고 관하는 것이다. 마치 고기는 정혈수(精血水)가 드나드는 길에서 생긴다고 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고름벌레가 사는 곳이어서 마치 소(酥)와 우유[乳]와 타락[酪]은 피가 변하여 이루어지므로 문드러진 고름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주방[廚]에서 일하는 사람은 땀 흘리고 때가 끼여 갖가지로 깨끗하지 않다. 만일 그 음식이 입속으로 들어가면 뇌(腦)에서 문드러진 점액[涎]이 있다가 두 길을 타고 내려와서 침과 화합한 후에야 맛을 이루는데 그 형상은 마치 토(吐)한 것 같으며, 그것이 뱃속으로 들어가면 땅[地]은 지니고 물[水]은 부수며 바람[風]은 움직이고 불[火]은 삶는데 이는 마치 솥에서 죽을 끓일 적에 찌끼의 흐린 것은 아래로 가라앉고 맑은 것은 위에 뜨게 되는 것과 같다. 비유하건대 마치 술을 빚으면 찌끼의 흐린 것은 똥이 되고 맑은 것은 오줌이 되는 것과 같다.
허리에는 세 개의 구멍이 있어서 바람이 불면 기름의 즙(汁)이 흩어지면서 백 개의 맥(脈)으로 들어가 먼저의 피와 화합하여 엉켜 변하면서 살이 된다. 이 새 살로부터 기름과 뼈와 골수가 생기며, 이 안에서부터 몸의 기관[身根]35)이 생기고 새 살과 옛 살이 화합하여 다섯 개의 감관[五情根]이 생긴다.
다섯 개의 감관으로부터 다섯 가지의 식[五識]이 생겨난다. 다섯 가지 식은 차례로 의식(意識)36)을 낳으며 분별하고 모양을 취하여 그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헤아리니, 그런 뒤에는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을 일으키고 모든 번뇌와 모든 죄업을 낳는 것이다.
음식을 관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처음과 마지막의 인연과 갖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을 관하면 안의 4대(大)와 바깥의 4대가 다름이 없으니, 다만 나라는 소견[我見]37) 때문에 억지로 나가 있다고 할 뿐임을 알게 된다.
또 이 음식을 생각해 보면 논밭을 갈고 심어서 김을 매고 수확하여 찧고 일어서는 불을 지펴 삶고 하여 비로소 완성되는데 그 들인 공력은 매우 중하다. 한 발우의 밥을 헤아려 보아도 농부가 흘린 땀의 집합체이다. 그것을 헤아려 보건대 밥은 적지만 땀은 아주 많나니, 이 음식이 만들어진 공력의 중함과 받게 되는 모진 고통은 이러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입으로 들어와 먹게 되면 곧 부정한 것이 되어 아무 값어치도 없게 되며, 얼마 지나면 변하여서 똥과 오줌으로 된다. 본래 이것은 맛이 있어 사람들이 즐겨 먹되
이내 변하여 깨끗하지 못한 것이 되므로 불쾌해져서 보고 싶지 않게 된다.
수행하는 이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나쁜 음식을 내가 만일 탐착하게 되면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서 이글거리는 철환(鐵丸)을 먹어야 되고, 지옥으로부터 나오면 소와 양과 낙타 등의 짐승이 되어서 그 옛 빚을 갚아야 하며, 혹 돼지나 개가 되어 항상 똥이나 찌끼를 먹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음식에 대하여 관하면 싫어하는 생각이 나고, 음식에 대하여 싫어하기 때문에 5욕에 대하여 모든 싫증을 내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느 한 바라문(婆羅門)의 경우와 같다. 그는 정결(淨潔)한 법을 닦으면서 어떤 일 때문에 청정하지 못한 나라로 갔는데, 그는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부정함을 면할 수 있을까. 오직 마른 음식만을 먹으면서 청정함을 얻어야겠다.”
마침 어느 한 노모(老母)가 백수떡[白髓餠]을 팔고 있었기에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일이 있어서 여기서 백일 동안 머무를 것입니다. 항상 이 떡을 만들어서 보내 주시면 값을 많이 드리겠습니다.”
그 노모는 날마다 떡을 만들어서 그에게 보냈으며 그 바라문은 탐착하여 배불리 먹으면서 좋아했다.
그런데 노모가 만든 떡은 처음에는 희고 깨끗했는데 갈수록 빛깔도 없고 맛도 없었으므로 곧 그 노모에게 “떡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고 물었더니 노모는 말하기를 “종기의 상처가 나았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그 바라문은 다시 물었다.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노모는 말했다.
“나의 대가집 부인의 은밀한 곳[隱處]에 종기가 생겼는데, 밀가루와 소(酥)와 감초(甘草)를 섞어서 그곳에다 붙이면 종기가 곪아서 고름이 나오므로 그것을 소와 떡에다 버무려 떡을 만들어서 날마다 당신에게 드린 것입니다. 이 때문에 떡이 맛있고 좋았지만 이제 부인의 종기가 다 나아버렸는데 내가 어디서 다시 고름을 얻어 오겠습니까.”
바라문은 이 말을 듣고 두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고 가슴을 치며 전부 토해 버리면서 “나는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 청정한 법을 깨뜨리고 말았으니, 나는 이제 끝장이다”고 하며 하던 일을 다 내버리고 도망치듯 본국으로 돌아와 버렸다.
수행하는 이도 그와 같아서 이 음식에 탐착하여 기뻐하면서 즐겨 먹거나 그 좋은 빛깔과 부드럽고 향기로운 맛이 입에 맞다 하여 부정함을 관찰하지 못하면 뒤에는 고통의 과보를 받으리니, 후회한들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능히 음식의 본말(本末)을 관찰하여 이와 같이 싫증나는 마음을 내면
음식에 대한 욕망을 여의기 때문에 다른 네 가지의 욕망[四欲]도 모두 여의게 된다. 욕계(欲界) 안의 쾌락에 대하여 모두 다 버리고 여의어 이 5욕을 끊고 5하분결(下分結)38)도 역시 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의 나쁜 허물에 다시는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나니, 이것을 식염상(食厭想)이라 한다.
【문】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라는 생각은 무루(無漏)의 지혜와 상응하고, 식염(食厭) 등의 네 가지 생각은 유루(有漏)의 지혜와 상응하니, 차례법으로는 마땅히 앞에 있어야 하거늘 지금은 어찌하여 뒤에서 설명하는가?
【답】 부처님의 법에는 두 가지 도가 있는데 견도(見道)39)와 수도(修道)40)이다. 견도 중에서 이 세 가지의 생각으로써 모든 삿된 소견 등을 깨뜨리고 성인의 과위를 얻지만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했기에 욕망을 여의기 위하여 세 가지 생각 다음에 이 식염상 등의 네 가지 생각을 말하여 음욕 등의 모든 번뇌를 여윌 수 있게 한다.
처음 세 가지의 생각[三想]은 견제도(見諦道)41)에서 보이고 중간 네 가지의 생각[四想]은 수도(修道)를 배우는 데서 보이며 나중 세 가지의 생각[三想]을 무학도(無學道)에서 보이는 것이다.
처음에 신념처(身念處)42)를 익히는 가운데서는 비록 식염상이 있다 하더라도 그 공용(功用)이 적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수다원(須陀洹)과 사다함(斯陀含)을 제도하려고 하기 때문에 무아상(無我想) 다음에 이 식염상 등의 네 가지 생각을 말씀하신 것이다.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43)이라 함은, 만일 세간의 색욕(色欲)ㆍ자양분 있는 맛있는 음식[滋味]ㆍ탈것[車乘]ㆍ의복과 장식구[服飾]ㆍ오두막[盧觀]ㆍ동산 및 집 등의 갖가지 즐거운 일을 기억하면 즐겁다는 생각이 나고, 만일 세간의 뭇 악하고 허물되는 일을 기억하면 마음에 싫다는 생각이 나게 된다.
무엇이 나쁜 일인가? 곧 나쁜 일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중생(衆生)이고, 둘째는 토지(土地)이다.
중생에게는 여덟 가지의 괴로운[八苦] 환난이 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과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恩愛別離], 원수와 같은 데서 만나는 일[怨憎同處],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일[所求不得] 등이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5수중(受衆)의 괴로움이다.
중생의 죄로서는 음욕이 많기 때문에 곱거나 추함을 구별하지 않고, 부모나 스승[師長]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며, 부끄러워함[慚愧]이 없어서 날짐승ㆍ길짐승과 다름이 없다.
또 성을 냄이 많기 때문에 경중을 구별하지 않은 채 성냄의 독을 미친 듯이 일으키고, 부처님 말씀도 받들지 않고 법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악도(惡道)를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매나 몽둥이를 멋대로 휘두르며, 다른 이의 고통을 알지도 못한 채 몹시 캄캄한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도무지 보는 것이 없게 된다.
또 어리석음이 많기 때문에 구하는 바를 도(道)로써 하지 않고 일의 인연[事緣]을 알지 못함은 마치 뿔을 비틀어 짜면서 우유를 구하는 것과 같다. 무명(無明)으로 가리워졌기 때문에 비록 밝은 햇빛을 받는다 하더라도 영원히 보는 것이 없다.
또 간탐이 많기 때문에 그 집은 마치 무덤과 같으므로 사람들이 그곳을 가지 않는다. 교만이 많기 때문에 성현을 공경하지도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지도 않으며, 교만과 방일(放逸)로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면서 영원히 고쳐지지 아니한다. 그리고 다시 삿된 소견이 많기 때문에 이 세상과 뒷세상을 믿지도 않고 죄와 복도 믿지 않으므로 함께 같이 처할 수조차 없게 된다.
이와 같은 등의 모든 번뇌가 많기 때문에 못되고 망가져서 곧게 잡을 수가 없게 된다.
악업이 많기 때문에 무간죄(無間罪)를 지으면서 혹은 부모를 죽이기도 하고 혹은 성현을 상해하기도 하며 혹은 영화와 부귀를 구하면서 충정(忠貞)한 이를 참소(讒訴)하기도 하고 친척을 죽게 하기도 한다.
또 세간의 중생들에는 착하거나 좋은 이는 적고 못되거나 나쁜 이는 많다. 때로는 비록 선행(善行)을 한다 하더라도 빈천하며 비루하기도 하고 혹은 비록 부귀하고 단정하다 하더라도 행하는 것이 착하지 않으며 혹은 비록 보시하기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가난하여 재물이 없기도 하고 혹은 비록 부자이어서 재보(財寶)가 있다 해도 인색하고 탐착하면서 보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혹은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잠자코 말이 없으면 곧 그를 보고는 뽐내고 잘난 체하면서 다른 사람과 상대하지 않는다고 여기기도 하고 혹은 좋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을 대하면서 은혜를 두루 베푸는 사람을 보면 곧 속임수를 쓰면서 아첨하고 있다고 여기기도 하며 혹은 좋은 말로써 이론을 잘 펴나가는 사람을 보면 곧 그는 조그마한 지혜를 믿고 교만을 부린다고 여기기도 한다.
혹은 질박하고 정직한 좋은 사람을 보면 곧 함께 속이고 조롱하고 끌어와서 업신여기기도 하고 혹은 착한 마음을 쓰면서 부드러운 사람을 보면 곧 업신여기어 밟고 차고 하면서 도리로써 대우하지 않기도 하며 혹은 계율을 청정하게 지닌 이를 보면 곧 행하는 것이 거짓이요 이상하다 하면서 가벼이 여기는 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와 같이 중생들이 못되고 나쁘므로 하나도 즐거울 만한 것이 없다.
토지가 나쁘다 함은 온갖 토지에 쇠함이 많고 길함이 없으며,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고 질병과 유행병과 독기와 침해가 있으며 늙고 병들고 죽는 두려움이 있어서 어느 곳마다 이런 일이 가득 차지 않음이 없다.
몸이 가게 되는 곳에도 수많은 고통이 그를 따라 다녀서 면할 수 없으며 비록 좋은 나라에 풍요함과 안온함이 있다 하더라도 거의 모두가 번뇌에 시달리게 되므로 즐거운 땅이라고 하지 않는다.
온갖 모두에 몸의 괴로움[身苦]과 마음의 괴로움[心苦]이라 하는 두 가지 괴로움이 있나니, 어느 나라마다 이런 일이 있지 않는 데가 없다.
이러한 게송이 있다.
어떤 국토에는 추위가 많고
혹 어떤 국토에는 더위가 많으며
어떤 국토에는 구호함이 없고
혹 어떤 국토에는 악(惡)이 많기도 하다.
어떤 국토에서는 항상 굶주리고
혹 어떤 국토에서는 병이 많으며
어떤 국토에서는 복을 닦지 않나니
이와 같아서 즐거운 곳이란 없다.
중생과 토지에는 이와 같은 악이 있으므로 세간을 생각해 보면 하나도 즐거운 만한 곳은 없다.
욕계(欲界)의 악한 일은 이와 같다.
그 위의 두 세계에서 죽을 때와 물러날 때에 거기에서 크게 겪는 괴로움은 아래 세계에서보다 더 심하다. 비유하건대 마치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부서지고 무너짐이 더 심한 것과 같다.
【문】 무상상(無常想)과 고상(苦想)과 무아상(無我想)과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기에 따로따로 설명하는가?
【답】 두 가지의 관이 있나니, 총관(總觀)44)과 별관(別觀)45)이 그것이다. 앞에서는 총관이었지만 여기서는 별관이다.
다시 두 가지 관이 있나니, 법관(法觀)46)과 중생관(衆生觀)47)이 그것이다. 앞에서는 온갖 법을 꾸짖는 관이 되고 여기에서는 중생들의 죄악이 같지 않음을 관하는 것이다.
또 앞의 것은 무루도(無漏道)이고 여기에서는 유루도(有漏道)이다. 앞에서는 견제도(見諦道)이고 여기에서는 사유도(思惟道)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 차별이 있다.
이는 일체의 경지[一切地]에 속하여 삼계의 법을 반연하나니, 이것을 일체세간불가락상이라 한다.
사상(死想)48)이라 함은 마치 사념(死念)49)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부정상(不淨想)이라 함은 마치 신념처(身念處)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단상(斷想)50)과 이상(離想)51)과 진상(盡想)52)이라 함은 열반의 상을 반연한다.
모든 결사(結使)를 끊기[斷] 때문에 단상이라 하고, 결사를 여의기 때문에 이상이라 하며, 모든 결사를 다하기 때문에 진상이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한 가지 생각[一想]만으로도 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세 가지로 설명하는가?
【답】 마치 앞에서 하나의 법을 세 가지로 설명하면서 “무상(無常)함이 곧 괴로움[苦]이요 괴로움이 곧 나 없는[無我] 것이다”고 했듯이 여기서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세간의 죄악이 깊고 중하기 때문에 세 가지로 꾸짖는 것이다. 마치 큰 나무를 베는 데는 하나의 밑둥만을 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열반의 미묘한 법은 예부터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에 갖가지로 칭찬하는 것이니, 일컬어 단상과 이상과 진상이라 한다.
또 3독(毒)을 끊기 때문에 단(斷)이라 하고, 애욕을 여의기 때문에 이(離)라 하며, 온갖 괴로움을 멸하여 다시는 나지 않기 때문에 진(盡)이라 한다.
또 수행하는 이가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의 바른 지혜를 관하면서 모든 번뇌를 멀리하므로 이것을 이상이라 하고, 무루의 도를 얻어서 모든 번뇌를 끊으므로 이것을 단상이라 하며, 열반에 들 때에 5수중을 멸하여 다시는 상속시키지 않으므로 이것을 진상이라 한다.
단상은 유여열반(有餘涅槃)53)이고, 진상은 무여열반(無餘涅槃)54)이며, 이상은 이 두 가지 열반의 방편문이다.
이 세 가지 생각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체의 경지[一切地]에 속한다.
10상(想)이 끝나다.
38. 초품 중 11지(智)의 뜻을 풀이함55)
【經】 11지(智), 곧 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타심지(他心智)ㆍ세지(世智)ㆍ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ㆍ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ㆍ여실지(如實智)[를 구족해야 하느니라.]
【論】 법지(法智)56)란 욕계에 매인[欲界繫] 법(法)에서의 무루의 지혜[無漏智]이고, 욕계에 매인 인(因)에서의 무루의 지혜이며, 욕계에 매인 법이 사라질[滅] 때의 무루의 지혜이며, 욕계에 매인 법을 끊기 위한 도(道)에서의 무루의 지혜이며, 그리고 법지품(法智品)에서의 무루의 지혜이다.
비지(比智)57)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의 무루의 지혜이니, 역시 그와 같다.
타심지(他心智)란 욕계와 색계에 매인 현재 다른 이의 마음[心]과 마음에 속하는 법 및 무루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의 일부분을 아는 것이다.
세지(世智)58)란 모든 유루의 지혜이다.
고지(苦智)59)란 “5수중(受衆)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다”고 관할 때에 얻는 무루의 지혜이다.
집지(集智)60)란 유루법의 인(因)에 대해 그것의 원인[因]과 모임[集]과 생겨남[生]과 조건[緣]을 사유할 때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이다.
멸지(滅智)61)란 멸(滅)에 대해 그것의 그침[止]ㆍ묘함[妙]ㆍ벗어남[出]을 사유할 때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이다.
도지(道智)62)란 길에 대해 그것이 바르고[正] 실천[行]이고 통달[達]임을 사유할 때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이다.
진지(盡智)63)란 “나는 괴로움[苦]을 보았노라. 원인[集]을 끊었노라. 깨달음[證]을 다하였노라. 길[道]을 닦았노라”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ㆍ견해[見]ㆍ명(明)ㆍ깨달음[覺]이다.
무생지(無生智)란 “나는 괴로움을 보았으니 다시 보지 않고, 원인을 끊었으니 다시는 끊지 않으며, 깨달음을 다하였으니 다시는 깨닫지 않으며, 길을 닦았으니 다시는 닦지 않으리라”고 이렇게 생각할 때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이자 견해ㆍ명ㆍ깨달음이다.
여실지(如實智)64)란 온갖 법의 전체의 모양[總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을 실답게 바르게 알아 걸림이 없는 지혜이다.
이 법지(法智)는 욕계에 매인 법 및 욕계에 매인 법의 인(因)ㆍ욕계에 매인 법의 사라짐[滅]ㆍ욕계에 매인 법을 끊기 위한 길[道]을 반연한다.
비지(比智)도 역시 그와 같다.
세지(世智)는 온갖 법을 반연한다.
타심지(他心智)는 다른 이의 마음의 유루와 무루의 마음 및 마음에 속하는 법을 반연한다.
고지(苦智)와 집지(集智)는 5수중을 반연하고, 멸지(滅智)는 다함[盡]을 반연하며, 도지(道智)는 무루의 5중(衆)을 반연한다.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는 다 같이 4제(諦)를 반연한다.
10지(智) 가운데 한 가지는 유루이고, 여덟 가지는 무루이며, 나머지 한 가지는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타심지가 유루의 마음을 반연하면 이는 유루이고, 무루의 마음을 반연하면 이는 무루이다.
법지는 법지와 타심지와 고지와
집지와 멸지와 도지와 진지와 무생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비지도 역시 그와 같다.
세지는 세지와 타심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타심지는 타심지와 법지와 비지와 세지와 도지와 진지와 무생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고지는 고지와 법지와 비지와 진지와 무생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집지와 멸지도 역시 그와 같다.
도지는 도지와 법지와 비지와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진지는 진지와 법지와 비지와 타심지와 고지와 집지와 멸지와 도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무생지도 역시 그와 같다.
아홉 가지의 지혜는 8근(根)과 상응하되 혜근(慧根)65)ㆍ우근(憂根)66)ㆍ고근(苦根)67)은 제외되고 세지는 10근과 상응하되 혜근을 제외한다.
법지와 비지와 고지는 공삼매(空三昧)68)와 상응한다.
법지와 비지와 멸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무상삼매(無相三昧)69)와 상응한다.
법지와 비지와 타심지와 고지와 집지와 도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무작삼매(無作三昧)70)와 상응한다.
법지와 비지와 세지와 고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무상상(無常想)과 고상(苦想)과 무아상(無我想)과 상응한다.
세지는 그 가운데 네 가지 생각[四想]과 상응한다.
법지와 비지와 멸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뒤의 세 가지 생각[三想]과 상응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세지(世智)는 혹 이상(離想)과 상응하기도 한다.
법지(法智)는 아홉 가지의 지혜를 반연하되 비지(比智)는 제외되며, 비지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한다.
세지와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열 가지 지혜를 반연하고, 고지와 집지는 세지및 유루의 타심지를 반연하며, 멸지는 지혜를 반연하지 않고 도지는 아홉 가지 지혜를 반연하되 세 가지는 제외된다.
법지와 비지에는 16상(相)이고 타심지에는 4상(相)이며, 고ㆍ집ㆍ멸ㆍ도(苦集滅道)에는 각각 4상(相)이고
진지와 무생지에는 다 같이 14상(相)이되 공상(空相)71)과 무아상(無我相)72)은 제외된다.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 중의 세지(世智)는 16상(相)이며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 중의 세지는 4상(相)이되 무상(無相)은 제외된다.[모양을 굴리고 모양을 관하는(轉相觀相) 것으로 예전에는 16성행(聖行)이라 했다.]
처음에 무루의 마음[無漏心]에 들어가서 하나의 세지(世智)를 성취하고, 제2의 마음에서는 고지(苦智)와 법지(法智)를 더하며, 제4의 마음에서는 비지(比智)를 더하고 제6의 마음에서는 집지(集智)를 더하며, 제10의 마음에서는 멸지(滅智)를 더하며, 第14의 마음에서는 도지(道智)를 더한다. 만일 욕망을 여읜 이면 타심지(他心智)를 더하고, 무학의 도[無學道]는 진지(盡智)를 더하여 파괴하지 않는 해탈[不壞解脫]을 얻으면서 무생지(無生智)를 더하게 된다.
처음의 무루의 마음 가운데서는 지혜를 닦지 않고, 제2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며, 제4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면서 미래의 세 가지 지혜를 닦고, 제6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며, 제8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면서 미래의 세 가지 지혜를 닦는다.
제10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지혜를 닦고, 제12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면서 미래의 세 가지 지혜를 닦으며, 제14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지혜를 닦고, 제16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면서 미래의 여섯 가지 지혜를 닦으며, 만일 욕망을 여읜 이면 일곱 가지의 지혜를 닦는다.
수다원(修陀洹)은 욕계의 번뇌[結使]를 여의려고 하여 제17의 마음 가운데서 일곱 가지의 지혜를 닦되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되고, 제9의 해탈의 마음 가운데서는 여덟 가지의 지혜를 닦되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된다.
신해탈(信解脫)73)의 사람은 한층 더 견득(見得)74)을 지으면서 쌍도(雙道) 중에서 여섯 가지 지혜를 닦되 타심지와 세지와 진지와 무생지가 제외된다.
7지(地)의 욕망을 여윌 때에는 무애도(無礙道)75)에서 일곱 가지의 지혜를 닦되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되며,
해탈도(解脫道)76) 중에서는 여덟 가지 지혜를 닦되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된다.
유정(有頂)의 욕망을 여읠 때에는 무애도 안에서 여섯 가지의 지혜를 닦되 타심지와 세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되고, 8해탈(解脫)의 도에서는 일곱 가지의 지혜를 닦되 세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된다.
무학(無學)으로서 초심자와 제9해탈과 불시해탈(不時解脫)의 사람77)은 열 가지의 지혜와 온갖 유루와 무루의 선근(善根)을 닦고, 만일 시해탈(時解脫)78)의 사람이면 아홉 가지의 지혜와 온갖 유루와 무루의 선근을 닦는다.
이와 같은 갖가지는 아비담문(阿毘曇門)79)에서 자세히 분별하는 것과 같다.
여실지(如實智)80)를 분별하는 모양에 대해서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의 후품(後品)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법지(法智)라 함은 욕계의 5중(衆)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을 알고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김을 아는 것이다. 이른바 무명(無名)의 인연으로 모든 지어감[行]이 있고 나아가 나는[生] 인연으로 늙어 죽음[老死]이 있다”고 한다. 마치 부처님께서 수시마(須尸摩)81) 범지(梵志)82)를 위하여 “먼저 법지로써 모든 법을 분별하고 그 뒤에 열반의 지혜로써 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비지(比智)라 함은 현재의 5수중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을 아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의 5수중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에 대해서도 역시 그와 같다. 비유하건대 마치 현재의 불이 뜨겁고 잘 타는 것을 보고 이로써 과거와 미래 및 다른 나라의 불이 이와 같음을 견주어 아는 것이다.
타심지(他心智)83)라 함은 다른 중생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아는 지혜이다.
【문】 만일 남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안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이의 마음[他心]을 안다고만 하는가?
【답】 마음[心]이 곧 주인[主]이기 때문에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고만 한다. 만일 마음을 말하면 이미 마음에 속한 법까지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지(世智)는 임시적 지혜[假智]84)라고도 하는데, 성인은 진실한 법 가운데서 알고, 범부는 다만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 가운데에서만 안다. 이 때문에 임시적 지혜라 한다.
마치 기둥과 들보와 서까래와 벽이 있는 것을 집이라 하는 것처럼 다만 이 일만을 알고 진실한 이치는 모르므로 이것을 세지라 한다.
고지(苦智)란 괴로움의 지혜[苦慧]로써 5수중(受衆)을 꾸짖는 지혜이다.
【문】 5수중은 역시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고지만을 설명하고 무상하고 공하고 나 없음의 지혜는 설명하지 않는가?
【답】 고제(苦諦)이기 때문에 고지를 말하고, 집제(集諦)이기 때문에 집지를 말하며, 멸제(滅諦)이기 때문에 멸지를 말하며, 도제(道諦)이기 때문에 도지를 말하는 것이다.
【문】 5수중에는 갖가지 악(惡)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괴로움의 진리만을 말하고 무상함의 진리[無常諦]와 공의 진리[空諦]와 나 없음의 진리[無我諦]는 말하지 않는가?
【답】 설령 무상ㆍ공ㆍ나 없음의 진리를 설명하여도 역시 법의 모양[法相]을 무너뜨리지는 않지만 중생은 거의 모두가 즐거움에 집착하고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있는 일체가 괴롭다”고 꾸짖으면서 버리고 여의게 하려는 것이다. 무상하거나 공하거나 나 없는 것에서는 중생이 크게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으신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시기를 “5수중에는 다른 이름이 있나니, 그것은 괴로움[苦]이라 한다”고 하셨다. 이 때문에 다만 고지(苦智)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고지는 혹 유루이기도 하고 혹 무루이기도 하다.
만일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에 있으면 이것은 유루이고, 만일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면 이것은 무루이다. 왜냐하면 난법으로부터 세간제일법에 이르기까지 네 가지로 괴로움을 관하기 때문이다. 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도 역시 그와 같다.
또 고지로는 괴로운 모양이 진실로 생기지 않는다 함을 안다고 한다.
집지로는 온갖 법이 여의어서 화합이 없다 함을 안다고 한다.
멸지로는 모든 법은 항상 고요히 사라져서 마치 열반과 같다 함을 안다고 한다.
도지로는 온갖 법은 항상 청정하여 바른 것도 없고 삿된 것도 없다 함을 안다고 한다.
진지(盡智)는 온갖 법은 아무것도 없다 함을 안다고 한다.
무생지(無生智)는 온갖 생기는 법은 진실하지도 않고 일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불생(不生)을 안다고 한다.
여실지(如實智)라고 함은, 열 가지의 지혜에서 알 수 없는 바를 이 여실지로써 열 가지 지혜의 각각의 모양과 각각의 인연과 각각의 구별과 각각의 관(觀)이 있는 법을 능히 아나니, 이 여실지 안에서는 모양도 없고 인연도 없고 구별도 없으며 모든 관법(觀法)이 소멸되고 또한 관이 있지도 않다.
열 가지의 지혜 속에는 법안(法眼)85)과 혜안(慧眼)86)이 있지만 여실지 속에는 오직 불안(佛眼)87)이 있을 뿐이다.
열 가지의 지혜는 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에게 다 같이 있지만 여실지는 유독 부처님께만 있다. 왜냐하면 유독 부처님만은 잘못되지 않는 특성[不誑法]88)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실지는 유독 부처님께만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열 가지의 지혜가 여실지 안에 들어가면 본래 가졌던 이름을 잃고 오직 하나의 여실지만이 있을 뿐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시방의 모든 냇물이 모두 큰 바다로 들어가면 그 본래의 이름은 버리고 다만 큰 바닷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갖가지 분별하면서 11지(智)의 뜻을 간략하게 설명하여 마친다.[단주(丹註):11지(智)의 설명이 끝나다.]
【經】 3삼매(三昧), 곧 유각유관삼매(有覺有觀三昧)ㆍ무각유관삼매(無覺有觀三昧)ㆍ무각무관삼매(無覺無觀三昧)[를 구족해야 하느니라.]
【論】 온갖 선정(禪定)으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을 모두 삼마제(三摩提)89)라 하는데, 중국말[秦言]로는 정심행처(正心行處)라 한다.
이 마음은 비롯함이 없는 세계로부터 오면서 항상 굽고 바르지 못했으나 이 정심행처를 얻으면 마음이 곧 바르고 곧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뱀이 다닐 때에는 항상 굽었다가도 대통 속으로 들어가면 곧 곧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삼매는 세 가지이니, 욕계(欲界)와 미도지(未到地)와 초선(初禪)에서는 각(覺)90)ㆍ관(觀)91)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각무각(有覺無覺)92)이라 하고, 2선(禪)의 중간에서는 다만 관과 상응할 뿐이기 때문에 무각유관(無覺有觀)93)이라 하며, 제2선으로부터 유정지(有頂地)에 이르기까지는 각ㆍ관과는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각무관(無覺無觀)이라 한다.
【문】 삼매와 상응하는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은 스무 가지에 이르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각ㆍ관만을 말하는가?
【답】 이 각ㆍ관은 삼매를 흔드나니, 이 때문에 이 두 가지만을 말한다. 비록 그것이 선하다 하더라도
이는 삼매의 도적이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음에 각ㆍ관이 있으면 삼매는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유각유관의 삼매는 다만 견고하지 못하다. 각ㆍ관의 힘이 아주 미약하다면 이때에는 삼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하셨나니, 이 각ㆍ관은 삼매를 낼 수도 있고 또 삼매를 파괴할 수도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바람은 비를 내리게 할 수도 있고 또한 비를 그치게 할 수도 있는 것과 같다.
세 가지 착한 각ㆍ관으로는 능히 초선(初禪)을 내나, 초선을 얻었을 때에 큰 기쁨의 각ㆍ관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이 흩어져서 도리어 상실하게 된다. 이 때문에 다만 각ㆍ관만을 말할 뿐이다.
【문】 각ㆍ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거친[麤] 마음94)의 모양을 각(覺)이라 하고 세밀한[細] 마음95)의 모양을 관(觀)이라 한다. 처음 대상 가운데서 마음이 일어나는 모양을 각이라 하고 뒤에 호추(好醜)를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을 관이라 한다.
세 가지 거친 각이 있으니, 욕각(欲覺)96)과 진각(瞋覺)97)과 뇌각(惱覺)98)이다. 세 가지 선각(善覺)이 있으니, 출요각(出要覺)99)과 무진각(無瞋覺)100)과 무뇌각(無惱覺)101)이다. 세 가지 세밀한 각[細覺]이 있으니, 친리각(親利覺)102)과 국토각(國土覺)103)과 불사각(不死覺)104)이다.
여섯 가지의 각은 삼매를 방해하거니와 세 가지의 선한 각은 삼매의 문을 연다. 만일 각ㆍ관이 지나치게 많으면 도리어 삼매를 잃게 되나니, 마치 바람이 배를 잘 가게도 하지만 바람이 거세면 곧 배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갖가지로 각ㆍ관를 분별한다.
【문】 경에서는 세 가지 법에 대하여 유각유관(有覺有觀)의 법과 무각유관(無覺有觀)의 법과 무각무관(無覺無觀)의 법이라 하고 유각유관의 경지[地]와 무각유관의 경지와 무각무관의 경지라 말씀하셨거늘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세 가지 삼매만을 설명하는가?
【답】 묘하면서 수용할 만한 것을 취한 것이다.
유각유관의 법이라 함은 욕계와 미도지(未到地)와 초선 가운데에서 각ㆍ관과 상응하는 법으로, 선(善)이기도 하고 불선(不善)이기도 하며 무기(無記)105)이기도 하다.
무각유관의 법이란 선(禪) 중간에서 관과 상응하는 법이어서 선과 무기의 성질이 있다.
무각무관의 법이란 각ㆍ관의 법을 여의고 일체의 색심[色心]과는 상응하지 않는 행[不相應行]이요 또한 무위의 법[無爲法]이다.
유각유관의 경지란 욕계와 미도지와 범천 세계[梵世]106)이다. 무각유관의 경지라 함은 선정의 중간에 이 자리를 잘 닦으면 대범천왕(大梵天王)107)이 된다. 무각무관의 자리라는 것은 온갖 광음천(光音天)과 온갖 변정천(遍淨天)과 온갖 광과천(廣果天)과 무색계의 경지[無色地]이다.
이 안에서 으뜸가고 묘한 것이 바로 삼매이다. 그렇다면, 삼매란 무엇인가? 곧 공 등의 세 가지 삼매(三昧)로부터 금강(金剛)과 아라한ㆍ벽지불의 모든 삼매까지이고, 관시방불삼매(觀十方佛三昧)108)로부터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109)까지이며, 단일체의삼매(斷一切疑三昧)110)로부터 삼매왕(三昧王)111) 등 모든 부처님의 삼매까지이다.
이렇게 갖가지로 분별하여 간략하게 세 가지 삼매의 뜻을 설명하여 마친다.
【經】 3근(根), 곧 미지욕지근(未知欲知根)ㆍ지근(知根)ㆍ지이근(知已根)[을 구족해야 하느니라.]
【論】 미지욕지근(未知欲知根)112)이라 함은, 무루(無漏)의 9근(根)과 화합한 신행(信行)과 법행(法行)의 사람이 견제도(見諦道) 가운데 있는 것을 미지욕지근이라 한다. 이른바 신근(信根)113) 등 5근(根)114)과 희근(喜根)115)ㆍ낙근(樂根)116)ㆍ사근(捨根)117)ㆍ의근(意根)118)이 그것이다.
신해견득(信解見得)119)의 사람은 사유도(思惟道)에서 이 9근이 한층 더하므로 지근(知根)이라 한다.
무학도(無學道) 중에서의 이 9근을 지이근(知已根)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22근(根) 가운데 이 세 근만을 취하는가?
【답】 날카롭게 이해하여 분명하고 자재한 모양이므로 이것을 근(根)이라 하는데, 그 나머지 19근은 근의 모양을 두루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취하지 않는다. 이 3근은 날카로워서 곧장 들어가 열반에 이를 수 있고 모든 유위의 법 중에서 주인이기 때문에 자유자재하여 모든 근보다 수승하다.
또 10근(根)은 다만 유루(有漏)이고 저절로 얻어져 이익됨이 없기 때문이고, 9근(根)은 일정하지 않아서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 때문에 “보살은 구족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 10상(想)120)도 역시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거늘 무엇 때문에 “구족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10상은 모두가 도를 돕고[助道] 열반을 구하는 법이다. 신근 등의 5근은 비록 그것이 착한 법이기는 하나 모두가 열반을 구하지는 않는다. 마치 아비담(阿毘曇)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그 누가 신근 등의 5근을 성취하고 선근(善根)을 끊는 이라 하겠는가?
또 만일 5근이 청정하면 변하여 무루가 되어서 3근 안에 이미 속하게 되며, 이 3근 중에는 반드시 의근(意根)이 있고 3수(受) 중에는 반드시 하나의 느낌이 있나니, 이 때문에 다만 3근만을 설명한 것이다.
또 22근(根)에는 선(善)도 있고 불선(不善)도 있고 무기(無記)도 있어서 뒤섞여 있나니, 이 때문에 두루 갖추어야 한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 3근은 느낌[受衆]과 지어감[行衆]과 의식[識衆]에 속한다.
미지욕지근은 6지(地)에 속하고, 지근과 지이근은 9지(地)에 속한다.
3근은 4제(諦)를 반연하고 여섯 가지 생각[六想]과도 상응한다.
미지욕지근은 3근(根)의 인(因)이고, 지근은 2근의 인이며, 지이근은 다만 지이근의 인이다.
미지욕지근은 차례로 2근을 내며, 지근은 차례로 혹은 유루근(有漏根)을 내기도 하고 혹은 지근을 내기도 하고 혹은 지이근을 내기도 한다. 지이근은 혹은 유루근을 내기도 하고 혹은 지이근을 내기도 한다.
이러한 것 등은 아비담문(阿毘曇門)에서 자세히 분별해서 설명되어 있다.
또 미지욕지근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 하나니, 아직 모르는 것을 알려고[未知欲知] 하기 때문에 신근 등의 5근을 낸다. 이 5근의 힘 때문에 모든 법의 실상을 얻나니, 마치 사람이 처음 태(胎) 속에 들어가서 2근, 즉 신근(身根)과 명근(命根)을 얻는 것과 같다.
그때에 살[肉] 조직은 아직 갖추어지지 못하여 모든 감관은 따로따로 아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다섯의 감관이 성취되어야 5진(塵)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처음 발심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여도 아직 이 5근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비록 서원을 하여 모든 법의 실상을 알고 싶어 하더라도 알 수 없다.
보살은 이 신근 등의 5근을 내어야 곧 모든 법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눈은 4대(大)와 4대로 만들어진 물질이 화합한 것을 일컬어 눈이라 하는 것처럼 먼저 비록 4대는 있더라도 4대로 만들어진 물질이 아직 청정하지 못한 까닭에 안근(眼根)이라고는 하지 않으며, 선근을 끊지 않은 사람이 비록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아직 청정하지 못한 까닭에 근(根)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만일 보살이 이 신근(信根) 등의 5근을 얻게 되면 이때에야 능히 모든 법의 실상이 나지도 않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취할 것도 아니고 버릴 것도 아니어서 항상 고요히 사라져서 진실하고 청정함이 마치 허공과 같으며 보일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어서 온갖 말의 길을 초월해 온갖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으로 행할 바를 벗어나서 마치 열반과 같음이 바로 부처님의 법임을 믿게 된다.
보살은 신근(信根)의 힘으로써 능히 정진근(精進根)의 힘을 받기 때문에 부지런해 행하면서 물러나거나 변하지 않으며, 염근(念根)의 힘 때문에 착하지 못한 법에 들지 않게 하면서 모든 착한 법을 거두어 들이며, 정근(定根)의 힘 때문에 마음이 5욕 가운데에 흩어지더라도 실상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며, 혜근(慧根)의 힘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 가운데서 적건 많건 의미를 얻어 무너뜨릴 수 없게 된다.
5근이 의지하는 의근(意根)은 반드시 느낌[受]과 함께하면서 기쁘거나[喜] 즐겁거나[樂] 기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게[捨] 되며, 이 근에 의거하여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무생법인(無生法忍)121)의 과위를 아직 얻기 전까지를 바로 미지욕지근이라 한다.
이 안에서 모든 법의 실상을 똑똑히 알기 때문에 지근이라 하며, 이로부터 무생법인의 과위를 얻어 아비발치(阿鞞跋致)122)의 지위에 머무르고 수기(受記)를 얻으며, 나아가 10지(地)를 완성하고 도량(道場)에 가 앉아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얻는 그 동안을 지근이라 한다.
그리고는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여 일체를 아는 법[一切可知法]123)에 지혜가 두루 완성되었기 때문에 지이근이라 한다.[丹註:3근(根)의 설명이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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