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20권
대지도론 제20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32. 초품 중 세 가지 삼매[三三昧]의 뜻을 풀이함
【經】 공삼매1)‧무상(無相)삼매2)‧무작(無作)삼매3)와 4선(禪)‧4무량심(無量心)‧4무색정(無色定)‧8배사(背捨)‧8승처(勝處)‧9차제정(次第定)‧10일체처(一切處)[를 구족해야 하느니라.]
【論】 【문】 무슨 까닭으로 37품에 이어 여덟 가지 법을 말하는가?
【답】 37품은 열반에 나아가는 길이다. 이 길을 행하면 열반의 성에 이르게 된다. 열반의 성에는 세 문이 있으니, 이른바 공ㆍ무상ㆍ무작이다.
이미 길을 말했으니 다음에는 이르른 곳의 문을 말해야 하리라.
4선 등은 문을 여는 데 도움이 되는 법이다.
또한 37품은 높고 묘한 법이니, 욕계의 마음이 산란하면 행자는 어떤 지위와 어떤 방편을 의지하여야 되는가? 곧 색계ㆍ무색계의 여러 선정에 의지해서 4무량심ㆍ8배사ㆍ8승처ㆍ9차제정ㆍ10일체처 가운데 머물러서 마음이 보드랍고 자재하고 마음대로 되는가를 시험해야 한다.
비유하건대 말을 타는 이가 말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지를 시험한 뒤에야 진중(陣中)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10일체처도 그와 같아서 약간의 푸른 빛을 보고서 일체의 물건을 모두 푸르게 하니, 모든 누런빛, 붉은빛, 흰빛도 모두 이와 같이 한다.
또한 8승처의 반연에 대하여 자재하나니, 처음의 두 배사에서는 몸의 부정함을 관찰하고, 셋째 배사에서는 몸이 도리어 깨끗한 것으로 관찰한다.
4무량심이란, 자(慈)는 중생 모두가 즐겁다고 관찰하는 것이요, 비(悲)는 중생 모두가 괴롭다고 관찰하는 것이요, 희(喜)는 중생 모두가 기쁘다고 관찰하는 것이요, 사(捨)4)는 이러한 세 가지 마음을 버리고 단지 중생들에 대하여
미움도 사랑도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또한 두 가지 관법이 있으니, 첫째는 견해를 얻는 관법[得解觀]이요, 둘째는 진실한 관법[實觀]이다.
진실한 관법이라 함은 이 37품이다. 진실한 관법으로는 얻기 어려우므로 차례로 견해를 얻는 관법을 말하는 것이다.
견해를 얻는 관법에서 마음이 유연해져 진실한 관법을 얻기 쉽고, 진실한 관법에 의해서 세 가지 열반의 문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문】 무엇이 공열반의 문인가?
【답】 모든 법은 나와 내 것(我所)이 없어서 공하며, 모든 법은 인연의 화합으로 생긴 것이어서 짓는 이[作者]도 없고 받는 이도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공의 문이라 한다.
또한 공의 문은 인지품(忍智品)에서 말한 바와 같다.
나와 내 것이 없는 줄 안 뒤에 중생들이 어찌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이 집착되겠는가.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부터 생긴 것이어서 진실한 법이 없고, 오직 모습만 있거늘 중생들이 그 형상을 탐내어 나와 내 것에 집착되는구나. 나는 이제 이 모습에서 실로 얻을 것이 있는가를 관찰하리라.’
자세히 관찰하여도 전혀 얻을 수 없으니, 남자와 여자의 모습, 하나와 다름의 모습 등 이러한 모습을 실로 모두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나와 내 것이 없으므로 공하며, 공하기 때문에 남자도 여자도 없고, 하나도 다름 등의 법도 없건만 나와 내 것 가운데서 이름하여 하나다 다르다 한다. 이런 까닭에 남자ㆍ여자ㆍ하나ㆍ다름의 법을 얻을 수 없다.
또한 4대(大)와 그로 인해 지어진 물질이 허공을 둘러쌌기 때문에 몸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안팎의 입(入)의 인연이 화합해서 의식의 종자[識種]를 내거늘 몸은 이 종자와 화합하므로써 갖가지 일을 하여 말하고 이야기하고 가고 오고 앉고 일어서나니, 허공 가운데 여섯 가지가 화합한 것에다 굳이 남자라 여자라 이름할 뿐이다.
만일 여섯 가지가 남자라 하면 마땅히 여섯 남자가 있어야 하리니, 하나를 여섯이라 할 수 없고, 여섯을 하나라 할 수도 없다.
또한 땅 가운데도 남녀의 모습이 없고, 나아가서는 의식의 종자에도 남녀의 모습이 없다.
만일 개체 가운데에 없다면 화합한 가운데에도 없다. 마치 여섯 마리의 개가 제각기 사자를 낳을 수도 없고 화합해서 사자를 낳을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문】 무슨 까닭에 남녀가 없는가?
정신은 비록 차별이 없지만 신분(身分)은 차별이 있어서 남녀의 차이가 있다. 이 몸은 신분을 여의지 않고, 신분도 몸을 여의지 않는다.
예컨대 신분을 보면 부분이 있는 법[有分法], 즉 몸ㆍ발 등이 있음을 족히 알 수 있나니, 신분은 몸과는 다르지만 몸은 남녀의 모습이 될 것이다.
【답】 신(神)은 이미 먼저 파하였고, 몸의 상(相)도 역시 무너졌거니와 이제 다시 설명하리라.
만일 이러한 부분 있는 법을 몸이라 한다면 제각기의 부분 안에 갖추어져 있는가, 아니면 신분이 모든 부분 안에 나뉘어져 있는가?
만일 모든 부분 가운데에 갖추어 몸이 있는 것이라면 머리 가운데에도 다리가 있어야 한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머리 가운데 몸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몸의 부분이 모든 부분 가운데 나뉘어져 있다면 이 몸은 부분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부분 있음[有分]이란 것은 모든 부분을 따르기 때문이다.
【문】 만일 발 등 몸의 부분이 부분 있음과 다르다면 허물이 되겠지만 지금은 발 등 몸의 부분이 부분 있음, 즉 몸이란 법과 다르지 않다고 하므로 허물이 없을 것이다.
【답】 만일 발 등 몸의 부분이 부분 있음과 다르지 않다면 머리가 곧 발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두 가지 경우가 모두 몸이어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몸의 부분은 많고 부분[有分]은 하나인데, 많음이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많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원인이 없어지므로써 결과가 없어지는 것이요, 결과가 없어지므로써 원인이 없어지는 것인데 이제 몸의 부분이 부분 있음과 다르지 않다면 응당 결과가 없어지므로써 원인이 없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와 다름 가운데서 몸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은 몸이 없기 때문이거늘 어떻게 남녀의 모습이 있으랴. 만일 남녀가 있다면 이 몸 그대로인가? 아니면 이 몸과는 다른 것인가? 몸에서는 얻을 수 없다. 만일 다른 법에 있다면 다른 법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남녀의 차별이 없거늘 다만 두 세상의 인연이 화합한 곳에
뒤바뀐 마음으로써 남녀라고 말할 뿐이다.
이런 게송이 있다.
구부렸다 폈다 하는 곳에 과거와 미래를 세우나
우러러보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실체가 없다.
바람이 식에 의지하므로 작용이 있으나
이 식은 모습이 없어서 잠시도 있지 않다.
너와 나, 남자와 여자는 나란 마음 있기 때문이니
지혜가 없으므로 허망하게 있다고 여긴다.
뼈마디가 서로 이어진 곳에 가죽이 덮이었고
신체 기관 움직임은 허수아비 같도다.
실체는 없으나 겉만 사람 같으니
금을 녹여 물속에 던질 때 같고
들불이 대숲을 태울 때 같아서
인연이 화합하면 소리도 난다.
이러한 갖가지 모습은 전에 이미 말했거니와 여기에서 다시 자세히 말하리라. 이것을 모습 없음의 문[無相門]이라 한다.
지을 이 없음[無作者]이라 하나니, 이미 모습 없음[無相]과 심지어 짓는 바도 없음[無所作]을 알면 이것을 지음 없는 문[無作門]이라 한다.
【문】 세 가지는 지혜로써 공을 관찰하고, 모습 없음을 관찰하고, 지음 없음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 지혜를 어찌하여 삼매라 하는가?
【답】 이 세 가지 지혜가 선정에 머무르지 않으면 이는 미친 지혜로서 대개는 삿된 의혹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만일 선정에 머무르면 모든 번뇌를 깨뜨리고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
또한 다시 이 모든 온갖 세간과 다르고 세간과 서로 맞지 않거니와 모든 성현들이 선정에 머물러 실상을 얻고서 말씀하신 것은 미친 마음의 말씀이 아니다.
또한 다시 모든 선정 가운데 이 세 가지 법이 없으면 삼매라 하지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도리어 물러나서 생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청정한 계율을 지키면
비구라 부르고
공을 관하면
선정을 닦는 이라 한다.
일심으로 항상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는 이는
이를 일러 진실한
도인이라 부른다.
모든 즐거움 중에서
으뜸가는 것으로는
모든 애욕을 끊고
미친 법을 없애는 일이니
5중(衆)의 몸과
도법(道法)까지 버리면
이를 일러 항상하고 즐거워
열반을 얻었다 한다.
이런 까닭에 세 가지 해탈문을 부처님께서는 삼매라 하신다.
【문】 이제는 무슨 까닭에 해탈문(解脫門)이라 하는가?
【답】 이 법을 행할 때에 해탈을 얻어서 무여열반(無餘涅槃)5)에 이르게 된다. 이런 까닭에 해탈문이라 한다.
무여열반이야말로 참해탈이어서 몸과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반면 유여열반은 그 문호(門戶)가 된다.
이 세 가지 법은 비록 열반은 아니지만 열반의 원인이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세간에도 원인에서 결과를 말할 때도 있고, 결과에서 원인을 말할 때도 있다.
이 공ㆍ모양 없음ㆍ지음 없음은 정의 성품이요, 이 정과 상응하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의 법과 몸의 업과 입의 업과 여기에서 일어나는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의 화합은 모두가 삼매라 불린다.
비유하건대 왕이 가면 대신과 들러리[營從]가 반드시 있는 것 같으니, 삼매는 왕과 같고 지혜는 대신과 같으며, 다른 법은 들러리와 같다.
다른 법의 명칭은 말하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정의 힘은 홀로 생길 수 없고, 혼자서는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법은 함께 생기고, 함께 머무르고, 함께 일을 이루어서 서로가 이익을 이룬다.
이 공의 삼매에는 두 가지 행이 있으니, 첫째는 5수중(受衆)이 같은 모습도 다른 모습도 없는 것이라 관찰하는 까닭에 공이요, 둘째는 나와 내 것이란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다.
모습 없는 삼매[無相三味]의 네 가지 행으로 열반에는 갖가지 괴로움이 다한 것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다함[盡]이라 하고, 3독 등 모든 번뇌의 불길이 사라졌으므로 사라짐[滅]이라 하고, 모든 법 가운데서 으뜸이기 때문에 묘함[妙]이라 하고, 세간을 여의었기 때문에 벗어남[出]이라 한다.
지음 없는 삼매[無作三昧]의 두 가지 행으로 5중(五衆)이 인연 따라 생겼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몸과 마음이 번거롭기 때문에 괴롭다고 관찰하고, 5수음[五受衆]의 네 가지 행이 번뇌와 유루의 업과 화합함으로 인하여 능히 괴로운 결과를 내기 때문에 집(集)이라 하고, 여섯 가지 원인으로 괴로운 결과를 내기 때문에 인(因)이라 하고,
네 가지 대상[緣]이 괴로운 결과를 내기 때문에 연(緣)이라 하고,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인연들이 결과를 내기 때문에 생(生)이라 한다.
5불수중(不受衆)을 관찰함에 네 가지 행이 있다.
이 8성도분은 능히 열반에 이르기 때문에 도이고, 뒤바뀌지 않기 때문에 바름[正]이며, 일체의 성인의 가는 곳이기 때문에 자취[迹]이며, 애견(愛見)의 번뇌가 가로막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른다고 한다.
이 세 가지 해탈문은 아홉 지위 가운데 있다. 곧 4선(禪)ㆍ미도지(未到地)ㆍ선중간(禪中間)ㆍ3무색(無色)이 그것으로, 무루의 성품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3해탈문은 오로지 무루이고, 3삼매는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삼매와 해탈이라는 두 명칭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11지(地)에도 있게 되니, 곧 6지(地)와 3무색(無色)과 욕계와 유정지(有頂地)6)가 그것이다.
만약에 유루라면 얽매여 11지에 있고, 무루라면 얽매이지 않는다.
희근(喜根)ㆍ낙근(樂根)ㆍ사근(捨根)에 상응하는 초학자는 욕계에 속하고, 성취한 이는 색계와 무색계에 속한다. 이와 같이 성취함과 성취하지 못함, 닦음과 닦지 않음 등은 아비담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다.
다시 두 가지의 공한 이치가 있어서 일체법의 공함을 관찰하나니, 이른바 중생의 공함과 법의 공함이다.
중생의 공함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법의 공함이란 모든 법의 자상이 공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색과 색의 모습은 공하며, 수ㆍ상ㆍ행ㆍ식과 식의 모습이 공하니라” 하셨다.
【문】 중생이 공하고 법이 공하지 않다면 이는 믿을 수 있겠지만, 법의 자상이 공하다 함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법의 자상이 공하다면 생도 멸도 없을 것이요, 생멸이 없다면 죄도 복도 없을 것이요, 죄와 복이 없다면 어찌 도를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답】 법의 공함이 있는 까닭에 죄와 복이 있다. 만일 법의 공함이 없다면 죄와 복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법이 실로 자성이 있다면 가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성품과 모습이 인연을 따라 생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라면 이것은 만들어진 것[作法]이니, 만일 법성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는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법성이 지을 수 있고, 파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옳지 않다. 성품이란 지어지지 않는 법을 이르는 말이니, 인연을 기다려서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법에는 자성이 있고, 자성이 있다면 곧 날 것이 없으리니, 성품이 먼저부터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남이 없으면 멸함도 없고, 남과 멸함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도 없고,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도를 배울 필요도 없다.
만일 중생에게 참성품이 있다면 능히 해칠 이도 없고 이롭게 할 수도 없나니, 자성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이라면 은혜도 의리도 알지 못하고, 업도 과보도 파괴한다. 법의 공함 가운데에는 법이 공하다는 모습도 없거늘 그대는 법의 공함을 얻으려는 마음에 집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 법공은 부처님들께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애욕의 매듭을 끊고 삿된 소견을 제해 주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은 능히 모든 괴로움을 멸하나니, 이는 모든 성인들의 진실한 수행처이다. 만일 이 법공에 성품이 있다면, 일체법의 공을 말할 때 어떻게 자신마저도 공해질 수 있겠는가.
만일 법공의 성품이 없는 것이라면 그대는 무엇을 힐난하려는가?
이 두 가지 공으로써 모든 법의 공함을 관찰하여 마음이 모든 법을 여읠 수 있고, 세간이 거짓되어 허깨비 같은 줄도 알게 된다.
이렇게 공을 관찰하고서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을 집착한다면 이러한 인연으로 교만 등 번뇌를 일으키고는 말하기를 “나는 능히 모든 법의 실상을 아노라” 한다.
이럴 때에는 무상문(無相門)을 배워야 하나니, 공의 모습을 취하려는 마음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만일 무상(無相) 가운데에서 희론을 일으키면 분별하여 지은 바 있기를 원해 이 무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때는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착각했구나. 모든 법은 공하고 모습도 없거늘 어찌하여 모습을 얻고 모습에 집착되어 희론을 하는가. 이럴 때엔 공과 모습 없음을 따라 몸ㆍ입ㆍ뜻으로 짓는 바가 있게 하지 말아야 한다. 지음 없는 모습을 관찰하여 삼독을 멸하고,
몸ㆍ입ㆍ못의 업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며, 삼계 안에 태어나기를 구하지 않아야 하리라.’
이렇게 생각할 때에 도리어 지음 없는 해탈문에 들어간다.
이 3해탈문은 마하연 가운데서는 동일한 법이건만 수행의 인연에 따라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법이 공하다고 관찰함이 공이다. 공 가운데서는 모습을 취할 수 없나니, 이때 공은 모습 없음이라 바뀌어 불린다.
모습 없음에는 어떤 작위(作爲)나 삼계에 태어날 일이 있을 수 없나니, 이때 모습 없음은 작위 없음[無作]이라 바뀌어 불린다.
비유하건대 성에 세 문이 있는데 한 사람이 동시에 세 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서 들어가려면 한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이 열반의 성인데, 그 성에 공ㆍ모습 없음ㆍ지음 없음이라는 세 개의 문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공의 문으로 들어가서 이 공을 얻거나 모습에 집착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곧장 들어가 일을 마치기 때문에 나머지 두 문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이 공의 문으로 들어가서 모습을 취하여 이 공을 얻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문이라 할 수 없고, 트인 길이 도리어 막힌다.
만일 공의 모습을 제하면 이때에 모습 없음의 문을 통해 들어가게 된다.
만일 모습 없음의 모습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 희론을 일으키면 이때에 무상의 모습을 제하고 지음 없음의 문[無作門]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비담의 이치에서는 이 공의 해탈문은 고제(苦諦)를 반연하고 5중을 포섭한다. 모습 없음의 해탈문은 한 법을 반연하나니, 이른바 수연진(數緣盡)이다. 지음 없음의 해탈문은 세 가지 진리[三諦]를 반연하고 5중을 포섭한다.
마하연의 이치에서는 이 3해탈문은 모든 법의 실상을 반연하며, 이 3해탈문으로써 세간이 곧 열반이라고 관찰한다. 왜냐하면 열반은 공ㆍ모습 없음ㆍ지음 없음이며, 세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문】 경에서는 말하기를 “열반은 한 문이다” 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셋이라 하는가?
【답】 법은 하나지만 이치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먼저 이미 말했다.
다시 제도해야 할 이에 세 종류가 있으니, 애욕이 많은 이와 사견이 많은 이와 애욕과 사견이 균등한 이이다.
사견이 많은 이에게는 공의 해탈문을 말해 준다. 곧 일체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겨서 자성이 없음을 보게 한다.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고, 공하므로 모든 사견이 사라진다.
애욕이 많은 이에게는 지음 없음의 해탈문을 말해 준다. 곧 일체법이 무상하고 괴로우며 인연을 따라 생긴다는 것을 보게 한다. 본 뒤에는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 애욕을 여의고 곧 도에 들어간다.
애욕과 사견이 균등한 이에게는 모습 없음의 해탈문을 말해 준다. 곧 이러한 남녀 등의 모습이 없다고 듣기 때문에 애욕을 끊고, 같음과 다름 등의 모습이 없다고 듣기 때문에 사견을 끊는다.
부처님께서는 일시에 두 문을 말씀하시고 혹은 일시에 세 문을 말씀하셨다. 보살은 두루 배워서 일체의 길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세 문을 말해 주신 것이다.
다시 다른 일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3해탈문의 이치를 간략히 말씀하신 것이다.
4선(禪)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정선(淨禪)이요, 둘째는 무루선(無漏禪)이다.
무엇을 정선이라 하는가? 곧 유루의 선한 5중(衆)이다. 무엇을 무루선이라 하는가? 곧 무루의 5중이니, 이것들은 4선에 포섭된다.
몸과 입의 업은 색법(色法)이요, 나머지 비색법은 일체가 볼 수도 없고 대할 수 없다.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다.
유루라 함은 선한 유루의 5중이요, 무루라 함은 무루의 5중이다. 모두가 유위이다.
유루는 색계에 얽매이고 무루는 얽매이지 않는다.
선(禪)은 몸ㆍ입의 업과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心不相應行]을 포섭하나니, 이는 마음도 아니요, 마음에 속하는 법도 아니요, 마음과 서로 응하는 법도 아니다.
선은 느낌[受衆]과 생각[想衆]과 그리고 서로 응하는 법을 포섭하나니, 이는 마음에 속하는 법이며, 마음과 서로 응하는 법이기도 하다.
선은 마음ㆍ뜻ㆍ의식을 포섭하나니, 마음뿐이다.
4선(禪)에는 마음은 따르나 느낌에는 서로 응하지 않는 것도 있으며, 혹은 느낌과는 서로 응하나 마음은 따르지 않는 것도 있으며, 흑은 마음을 따르기도 하고 느낌과 서로 응하는 것도 있으며, 혹은 마음을 따르지도 않고 느낌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 것도 있다.
마음은 따르나 느낌과는 서로 응하지 않는다 함은 4선이 몸ㆍ입의 업과 마음을 따르는 행과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 및 느낌[受]을 포섭한다는 것이다.
느낌과는 서로 응하나 마음을 따르지 않는다 함은 4선이 마음ㆍ뜻ㆍ의식을 포섭함을 말한다.
마음을 따르고 또한 느낌과도 서로 응한다 함은 4선이 생각[想衆] 및 상응하는 지어감[行衆]을 포섭함을 말한다.
마음을 따르지도 않고 느낌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다 함은 4선에 포섭되는 마음을 따르는 행과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행과 생각과 행과 상응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4선ㆍ3선 가운데 2선은 각행(覺行)을 따르지도 않고 또한 관(觀)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다.
초선은 각행을 따르나 관과 서로 응하지 않기도 하고, 혹은 관과 서로 응하나 각행을 따르지 않기도 하며, 혹은 각행을 따르면서 또한 관과 서로 응하기도 하며, 혹은 각행을 따르지도 않고 관과 서로 응하지 않기도 한다.
각행은 따르나 관과 서로 응하지 않는다 함은 초선이 신업ㆍ구업과 각을 따르는 행과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 및 관을 포섭함을 말한다.
관과 서로 응하나 각의 행을 따르지는 않는다 함은 각(覺)을 이르는 말이다.
각의 행을 따르기도 하고 관과 서로 응하기도 한다 함은 각과 관이 서로 응하는 모든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다.
각의 행을 따르지도 않고, 관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다 함은 각의 행을 따르는 것과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이다.
4선에는 모두가 인연이 있고, 또한 인연이 되어 주기도 한다.
4선에서 초선은 차례대로 연(緣)이 되기도 하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기도 하며, 혹은 차례대로 연이 되기도 하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기도 하며, 혹은 차례대로 연이 되지도 않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기도 한다.
차례대로 연이 되기도 하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요, 차례대로 연이 되고 또한 차례대로 연이 되어 준다 함은 과거와 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요, 차례대로 연이 되지 않고 또한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을 제외한 나머지인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으로서 몸과 입의 업, 그리고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이다.
제2선과 제3선도 이와 같다.
제4선의 차제연이 되고 또한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 그리고 무상정(無想定)을 이미 낸 것과 내려는 것이다.
차제연이 되고 또한 차제연이 되어 주기로 한다 함은 과거와 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다.
차례대로 연이 되고 또한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을 제외한 나머지 미래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 그리고 다음에 일어날 마음과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과 몸ㆍ입의 업들이다.
4선에 포섭되는 몸 입의 업, 그리고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은 연이 되어 주지만 연은 되지 않고, 나머지는 연도 되고 연이 되어 주기도 한다.
이 4선은 증상연(增上緣)이기도 하고 증상연이 되어 주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은 아비담에서 자세히 분별한 것과 같다.
보살이 선의 방편과 선의 모습과 선의 가닥[支]을 얻는 일은 선바라밀에서 이미 자세히 말한 바이다.
【문】 이 반야바라밀의 논리에서는 모든 법의 공한 모습만을 말했거늘 보살은 어찌하여 공한 법 가운데서 능히 선정을 일으키는가?
【답】 보살이 5욕(欲)과 5개(蓋)가 모두 인연 따라 생긴 것이어서 자성이 없으며,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줄을 안다면, 그것을 버리기가 매우 쉽다.
중생들은 뒤바뀐 인연 때문에 이러한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즐거움에 집착되어 선정 가운데의 깊고도 묘한 즐거움을 여읜다. 보살은 이러한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에 대비심을 일으켜 선정을 닦는다.
그는 마음을 대상에 매어 두고 5욕을 여의고 5개를 제거해 커다란 기쁨이 있는 초선에 들어간다.
다시 각관을 멸하고 마음을 거두어 깊은 내면의 청정함에 들어가 미묘한 기쁨을 얻는 제2선에 들어간다.
다시 깊은 기쁨이 집중을 산란시키기에 일체의 기쁨을 여의고 두루 가득한 즐거움을 얻는 제3선에 들어간다.
다시 일체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여의고 일체의 근심과 기쁨 및 들고나는 호흡을 제하여 청정미묘한 무관심[捨]으로 스스로를 장엄하는 제4선에 들어간다.
이 보살은 모든 법이 공하여 모습이 없는 줄 알지만 중생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의 모습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만일 모든 법의 공함이 실제로 있다면 이는 공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또한 5욕을 버리고서 선을 얻을 수도 없으니, 버릴 수도 없고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지금 모든 법의 공한 모습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법이 공하다면 어떻게 능히 선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다시 이 보살은 모습을 취해 애착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약을 먹는 것과 같으니, 병을 제하기 위함일 뿐 아름다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곧 계를 청정히 하고 지혜를 성취하기 위한 까닭에 선을 행하는 것이다.
보살은 하나하나의 선 가운데에서 대자(大慈)를 행하고 공을 관하면서도 선에 의지하지 않는다. 5욕이 거칠고 거짓되고 뒤바뀐 까닭에 미묘하고 허망하다는 법으로 다스리니, 비유하건대 독으로써 능히 독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33. 초품 중 사무량(四無量)의 뜻을 풀이함
4무량심(無量心)이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말한다.
자는 중생들을 사랑하고 염려해서 항상 안온하고 즐거운 일을 구하여 요익하게 해 주는 것이요, 비는 중생들이 5도에서 갖가지 몸을 받아서 몸과 마음으로 괴로워함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요, 희는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에서 환희를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요, 사는 세 가지 마음을 버리고 오직 중생들을 생각하되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자심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하여 미워하는 생각을 제하기 위함이요, 비심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하여 번거롭다는 생각을 제하기 위함이요, 희심을 닦는 것은 함께 기뻐하지 못함을 제하기 위함이요,
사심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하여 사랑도 미움도 제하기 위함이다.
【문】 4선에 이미 4무량심과 나아가서는 10일체처까지 있거늘 이제 어찌하여 따로 논하는가?
【답】 비록 4선 가운데 모두 있기는 하나 이 법은 따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 공덕을 알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주머니 속의 보물은 꺼내 놓지 않는다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큰 복덕을 얻고자 하는 이에게는 4무량심을 말해 주고, 색(色)에 근심하고 싫어하기를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같이 하는 이에게는 4무색정(無色定)을 말해 주고, 대상에 대해 자재로움을 얻어 마음대로 반연할 바를 관찰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8승처(勝處)를 말해 주고, 도에 가로막힘이 있어 통달치 못한 이에게는 8배사(背捨)를 말해 주고, 마음이 유연하지 못하여 선에서 일어나 다음 선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에게는 9차제정(次第定)을 말해 주고, 일체의 대상을 두루 비추어 마음대로 이해[解]를 얻지 못하는 이에게는 10일체처(一切處)를 말해 준다.
만일 시방의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 할 때 마음에 속하는 법 가운데 생겨나는 법을 일컬어 자(慈)라 한다. 이 자와 서로 응하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識衆]이 마음에 속하는 법으로 몸의 업ㆍ입의 업 및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을 일으키는데, 이 법과 화합된 것을 모두 자라 부른다.
이름이 자인 까닭에 이 법이 생길 때엔 자로써 우두머리를 삼는다. 그러므로 자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일체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모두 후세의 업의 인연이지만 오직 생각[思]만이 이름을 얻나니, 업을 짓는 가운데서 생각이 가장 힘이 있기 때문이다.
비ㆍ희ㆍ사 역시 이와 같다.
이 자는 색계에서는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며, 혹은 끊을 수 있기도 하고 끊을 수 없기도 하다. 근본선 가운데나 선중간에도 있기도 하며, 세 근(根)에 서로 응하되 고근(苦根)과 우근(憂根)은 제외한다.
이러한 일들은 아비담에서 분별하여 말하였다.
“중생의 모습을 취하기 때문에 유루이며, 모습을 취한 뒤에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에 들어가기 때문에 무루이다.
이런 까닭에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의 질문에 대답하시기를 “자(慈)에 세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중생연(衆生緣)이요, 둘은 법연(法緣)이요, 셋은 무연(無緣)7)이다.”
【문】 이 4무량심은 어떻게 행하는가?
【답】 부처님께서는 곳곳의 경(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가 자에 서로 응하는 마음으로 성냄 없고, 한(恨) 없고, 원망 없고, 번뇌 없으며 광대하고 무량하게 자심을 잘 닦고 이해[解]를 얻어 두루 채운다. 동방세계의 중생에게도 자심으로 이해를 얻어 두루 채우며, 남ㆍ서ㆍ북과 네 간방[四維]ㆍ위아래의 시방세계 중생에게도 비ㆍ희ㆍ사에 상응하는 마음으로 두루 채우기를 이와 같이 한다.”
자에 서로 응하는 마음이라 했는데, 자는 마음에 속하는 법을 이름하며, 능히 마음속의 시끄러움과 혼탁함을 제하나니, 이른바 성냄ㆍ원망ㆍ인색함ㆍ탐냄 등의 번뇌이다. 마치 물을 정화하는 보배 구슬[浮水珠]을 흐린 물에 담구면 즉시에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성냄과 한(恨)이 없다 했는데, 먼저 성냄이란 중생들에 대하여 인연이 있건 인연이 없건 화를 내는 것이다. 곧 욕하고 꾸짖고 해치고 위협하려는 것이니, 이를 성냄이라 한다. 그것이 시절을 기다리고 장소를 만나 세력이 생겨서 해코지하려 한다면 이것을 한이라 한다.
자심으로써 이 두 가지 일을 제거하므로 성냄과 한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원망과 번뇌가 없다 했는데, 한이 곧 원망이다. 처음으로 혐오하는 것을 한이라 하고, 한이 오래 되면 원망이라 하며, 몸과 입의 업으로 해를 가하면 이를 번뇌라 한다.
다시 처음 성냄의 번뇌가 생겨나는 것을 성냄이라 하고, 성냄이 늘어나서 따지고 헤아리면서 마음속에 꼭 간직하여 결단치 못하는 것을 한이라고도 하고 원망이라고도 하며, 마음이 이미 결정되어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는 것을 번뇌라 한다.
자심의 힘으로 제해 버려서 이 세 가지 일을 여의면 이것을 일컬어 성냄 없고, 원한 없고, 원망 없고, 번뇌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성냄 없음ㆍ원한 없음ㆍ원망 없음ㆍ번뇌 없음을 가지고 부처님께서는 자심을 찬탄하신 것이다.
일체 중생은 모두 괴로움을 두려워하고 즐거움을 탐착하거니와 성냄은 괴로움의 인연이 되고,
자는 즐거움의 인연이 된다.
중생들이 이 자삼매(慈三昧)를 듣고는 능히 괴로움을 제거하고 즐거움을 주는 까닭에 일심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이 삼매를 행하여야 한다.
이런 까닭에 ‘성냄 없고, 원한 없고, 원망 없고, 번뇌 없다’고 하는 것이다.
‘광대하고 한량없다’고 함은 하나의 큰 마음을 말한다. 분별하면 세 이름이 있다.
광(廣)이란 한 방향을 말하고, 대(大)란 높고 멀다는 뜻이며, 한량없음이란 아래쪽 및 나머지 아홉 방위이다.
또한 아래는 광이요, 중간은 대요, 위는 한량없음이다.
또한 사방의 중생심을 반연하는 것을 광이라 하고, 네 간방[四維]의 중생심을 반연하므로 대라 하고, 위와 아래의 중생심을 반연하는 것을 한량없음이라 한다.
또한 성내고 한하는 마음을 깨뜨리는 것을 광(廣)이라 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깨뜨리는 것을 대라 하고, 번뇌심을 깨뜨리는 것을 한량없음이라 한다.
또한 일체의 번뇌심은 소인(小人)들이 행하는 것으로 작은 일을 내기 때문에 소(小)라 하고, 다시 이보다 더 작기 때문에 성냄ㆍ원한ㆍ원망ㆍ번뇌라 하며, 이렇게 작은 가운데서도 작은 것을 깨뜨리는 것을 광대하고 한량없음이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큰 인연은 항상 작은 일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넓은 마음이란 죄를 두려워하고 지옥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마음속의 삿됨[惡法]을 제거하는 것이요, 큰 마음이란 복덕의 과보를 믿고 즐기어 나쁜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요, 한량없는 마음이란 열반을 얻기 위하여 나쁜 마음을 제하는 것이다.
또한 수행자는 계행을 깨끗하게 지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넓고, 선정을 구족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크고, 지혜를 성취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한량이 없다.
이러한 자심으로써 도를 얻은 성인을 생각하는 것을 한량없는 마음이라 한다. 한량없음으로써 성인을 분별하고 모든 하늘과 사람의 존귀한 곳을 생각하는 까닭에 큰 마음이라 하고, 나머지 하천한 중생과 3악도를 생각하는 것이 넓은 마음이다.
사랑하는 중생에 대하여 자애로운 생각을 하되 자신에 대해서 보다 넓게 하기 때문에 넓은 마음이라 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맞추기 때문에 큰 마음이라 하고, 인자한 생각으로 원수와 미운 이를 대해 그 공덕이 많기에 한량없는 마음이라 한다.
또한 좁게 반연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넓다 하고, 작게 반연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크다 하고, 한량이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한량이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치를 분별한다.
‘잘 닦는다’고 함은 이 자심이 견고해지는 것을 말한다. 처음으로 자심을 얻은 것을 닦는다[修]고 하지는 않는다. 단지 사랑하고 염려하는 중생에 대해서가 아니고, 단지 좋아하는 중생에 대해서가 아니고, 단지 자기에게 이로운 중생에 대해서가 아닌, 곧 어느 치우친[一方] 중생에 대해서가 아닌 것을 일컬어 ‘잘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행하면 얻는 것이 깊으니, 애락과 애증 및 그 중간 등 세 종류의 중생은 꼭 같아서 다름이 없는 것이다.
시방 5도의 중생을 하나의 자애로운 마음으로 관찰하되 마치 부모ㆍ형제ㆍ자매ㆍ자식ㆍ조카ㆍ친지와 같이 하며, 항상 좋은 일을 구해서 그들로 하여금 이로움과 평온함을 얻게 하고자 한다. 이러한 마음이 시방의 중생에 두루 베풀면, 이와 같은 자심을 중생연(衆生緣)이라 한다. 이는 대체로 범부들의 행하는 경지, 혹은 배울 것이 있는 이로서 아직 누(漏)가 다하지 못한 이에게 속한다.
법연(法緣)을 행한다고 했는데, 모든 누가 다한 아라한ㆍ벽지불ㆍ부처님들과 같은 성인들은 나다 남이다 하는 상(相)을 깨뜨렸고, 같다 다르다 하는 상을 멸한 까닭에 오직 인연의 상속을 따라 모든 욕망이 생함을 관찰하며, 그로써 인자한 마음으로 중생을 생각할 때에 화합된 인연의 상속에 의하여 생겨났기에 오직 공한 것이다.
5중이 곧 중생이니, 이 5중을 인자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 법의 공함을 알지 못하고 항상 일심으로 쾌락을 얻으려고만 한다. 성인은 그들을 가엾이 여기어 생각에 따라 즐거움을 얻게 하나니, 그것이 세속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법연이라 한다.
무연(無緣)이라 했는데, 이 인자함은 부처님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들의 마음은 유위나 무위의 성품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세상에 의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모든 반연이 진실치 않고, 뒤바뀌어 허망한 줄을 아시기 때문에 마음에 반연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이러한 법의 실상을 알지 못한 채 다섯 길에 왕래하면서 마음이 모든 법에 집착되어 분별하거나 취하고 버리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을 아시는 지혜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이를 얻게 하시니, 이를 무연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 줄때 혹은 재물을 주거나 혹은 금은보물을 주거나 혹은 여의주를 주는 것과도 같으니, 중생연ㆍ법연ㆍ무연 역시 이와 같다.
이것이 자심의 뜻을 간략히 설명한 것이다.
비심(悲心) 역시 이와 같으니,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시방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는 생각하기를 ‘중생들은 가엾기도 하구나. 이런 갖가지 고통을 받게 하지 않으리라’ 한다.
성냄 없고 원망 없고 번뇌 없는 마음에서 시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다.
【문】 세 종류의 중생이 있다. 곧 즐거움을 받는 이로서 모든 하늘과 인간의 일부분이요, 괴로움을 받는 이로서 3악도 및 인간의 일부분이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받는 이로서 5도 가운데 일부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를 행하는 이는 일체 중생이 모두 즐거움을 받는다고 관찰하고, 비를 행하는 이는 일체 중생이 모두 괴로움을 받는다고 관찰하는가?
【답】 수행자는 이 자무량심(慈無量心)을 배우고자 할 때에 먼저 서원을 세우되 “원컨대 중생들로 하여금 갖가지 즐거움을 받게 하리라” 하고는 즐거움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여 선정에 드나니, 이 모습이 점점 늘어나면 곧 중생들이 모두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비유하건대 불을 지필 때 먼저 보드라운 풀이나 마른 쇠똥을 쓰거니와 불의 세력이 더욱 커지면 능히 젖은 큰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다.
자삼매도 그와 같아서 처음에 인자한 서원을 세울 때엔 친척이나 아는 이에게만 미치다가 인자한 마음이 더욱 넓어지면 원수와 친한 이가 동등하게 모두 즐거움을 얻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자의 선정이 늘어나고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비ㆍ희ㆍ사의 마음 역시 이와 같다.
【문】 비심에서는 괴로움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희심에서는 기쁨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거니와 사심(捨心)에서는 어떤 모습을 취하는가?
【답】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취한다. 수행자는 이 마음이 점차 늘어나게 하여 모두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받는다고 보게 된다.
【문】 이 세 가지 마음에는 마땅히 복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사심은 중생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게 여기거늘 어떠한 복덕이 있는가?
【답】 수행자는 생각하기를 ‘일체의 중생은 즐거움을 여읠 때는 괴롭고 괴로울 때에는 그대로가 괴로움이니,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면 곧 안온하다’고 한다. 이것으로 이익을 삼는다.
수행자가 자와 희의 마음을 행하면서 때로는 탐착의 마음이 일어나고, 비심을 행하면서 때로는 근심과 슬픔의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탐착과 근심으로 마음이 산란해지면 이 버리는 마음으로 들어가 탐착과 근심을 제거한다. 탐착과 근심을 제거하는 까닭에 일컬어 사심이라 한다.
【문】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버리는 마음의 차별은 잘 알겠다. 그렇지만 인자한 마음은 중생들을 즐겁게 하고, 기뻐함은 중생들을 기쁘게 한다고 하는데, 즐거움과 기쁨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몸으로 좋아하는 것을 즐거움[樂]이라 하고,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을 기쁨[喜]이라 한다. 다섯 의식과 상응해 좋아하는 것을 즐거움이라 하고 뜻과 상응해 좋아하는 것을 기쁨이라 하며, 5진(塵)8) 가운데 생겨난 좋아하는 느낌을 즐거움이라 하고, 법의 대경[法塵] 가운데 생겨난 좋아하는 느낌을 기쁨이라 한다.
먼저 즐거움을 원해 구하게 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좇도록 하며, 그로 인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기쁨을 얻게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가엾이 여겨 먼저 보물을 베풀어 주는 것을 즐거움이라 하고, 나중에 스스로 돈을 벌도록 장사를 하게 해 5욕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을 기쁨이라 한다.
또한 욕계의 즐거움을 원해 중생들로 하여금 5욕의 좋은 느낌을 얻게 하는 것을 즐거움이라 하고, 색계의 즐거움을 원해 중생으로 하여금 얻게 하는 것을 기쁨이라 한다.
또한 욕계에서의 다섯 의식과 서로 응하는 좋은 느낌과 초선에서의 세 의식과 서로 응하는 좋은 느낌과 3선(禪)에서의 일체의 좋은 느낌을 즐거움이라 하고, 욕계 및 초선의 의식과 서로 응하는 좋은 느낌과 2선(禪)에서의 일체의 좋은 느낌을 기쁨이라 한다.
거칠게 느껴지는 좋은 느낌을 즐거움이라 하고 미세하게 느껴지는 좋은 느낌을 기쁨이라 한다. 원인일 때의 좋은 느낌을 즐거움이라 하고 결과일 때의 좋을 느낌을 기쁨이라 한다. 처음으로 좋은 느낌이 될 때를 즐거움이라 하고, 환희심이 내면에서 일어나 좋아하는 모습이 겉으로 나타나서 노래하고 춤추고 뛰어오르는 것을 기쁨이라 한다.
예컨대 처음으로 약을 먹을 때를 즐거움이라 하고, 약효가 발생하여 온몸에 두루 퍼지는 때를 기쁨이라 하는 것과 같다.
【문】 그렇다면 어찌하여 두 마음을 합쳐서 하나의 무량으로 하지 않고, 나누어서 두 법으로 만들었는가?
【답】 수행자가 처음에는 아직 마음을 잘 거두지 못하고 중생들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까닭에 단지 즐거움만을 주고, 마음을 거두어 중생을 깊이 사랑하는 까닭에 기쁨을 준다. 이런 까닭에 먼저 즐거움을 들고 나중에 기쁨을 드는 것이다.
【문】 그렇다면 어찌하여 자 다음에 희를 들지 않는가?
【답】 자심을 행할 때는 중생을 사랑하기를 마치 어린 애기같이 여겨 즐거움을 주기를 원하며, 자삼매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중생들이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내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 깊은 즐거움을 얻게 한다.
비유하건대 부모가 비록 자식을 항상 사랑하나 자식이 병에 걸려 위급해지면 이때는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과 같다. 보살들도 그와 같아서 비심에 들어가서 중생의 괴로움을 보고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문득 깊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비심이 중간에 있는 것이다.
【문】 만일 이처럼 중생들을 깊이 사랑한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사심을 행하는가?
【답】 수행자는 이처럼 관찰하되 항상 중생들을 버리지 않고, 오직 이 세 가지 마음을 버린다. 왜냐하면 다른 법에 방해하고 가로막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자심으로써 중생들을 즐겁게 만들고자 하나 즐거움을 얻게 하지 못하고, 비심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게 하려 하나 괴로움을 여의게 하지 못하며, 희심을 행할 때에도 역시 중생들로 하여금 큰 기쁨을 얻게 하지 못한다. 곧 이것은 다만 생각일 뿐이요 실제로 법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중생으로 하여금 실제의 일을 얻게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발심하여 부처가 되어야만 하리라. 6바라밀을 행하고 불법을 갖춘다면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실제의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러한 세 가지 마음을 버리어 이 사심에 드는 것이다.
또한 자ㆍ비ㆍ희의 마음은 사랑이 깊기 때문에 중생을 버리기 어렵지만, 이 사심에 드는 까닭에 쉽게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문】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며, 나아가 부처를 이루더라도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단지 이 세 마음은 생각하여 마음 가운데 일어날 뿐 실제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9)
【답】 이 보살이 부처를 이룰 때에 비록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지는 못하지만, 다만 보살이 큰 서원을 세우기만 하면 이 큰 서원에 의해 큰 복덕의 과보를 얻고, 큰 과보를 얻는 까닭에 범부들을 크게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문이 이 4무량(無量)을 행함은 스스로를 제어하고 스스로를 이롭게 하기 위한 까닭이니, 역시 중생을 부질없이 생각만 한다. 하지만, 보살들이 이 자심을 행함은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떠나서 즐거움을 얻게 하고, 이 인자한 마음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복덕을 짓고 남도 복덕을 짓게 하며, 과보를 받을 때엔 혹은 전륜성왕이 되어 그 이롭게 하는 바가 많다.
보살은 때로는 출가하여 선(禪)을 행하며, 중생을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을 닦게 하여 청정한 세계에 태어나 한량없는 마음의 즐거움을 얻게 하기도 한다.
만일 부처를 이룰 때에는 한량없는 아승기10)의 중생들과 더불어 무여열반에 드나니, 빈 마음으로 이익되게 하기를 원하는 것에 비한다면 이는 커다란 이익인 것이다.
나아가서는 사리나 그 밖의 다른 법으로 이롭게 하는 바가 많다.
또한 만일 한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시면 다른 부처님은 제도할 바가 없으리라 한다면 이는 미래의 부처님을 없다 하고, 부처의 종자를 끊는 것이 된다. 이러한 허물이 있으므로 한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시지 않는다.
또한 이 중생들의 성품은 어리석음으로부터 있는 것이어서 실제로 결정된 법이 아니다. 3세와 시방의 부처님들이 중생을 구하여도 실로 얻을 수 없거늘
어찌 일체를 다 제도하겠는가.
【문】 만일 공하여 다 제도하지 못한다면, 적은 수효도 공하기는 마찬가지거늘 어찌하여 조금은 제도한다 하는가?
【답】 나는 말하기를 “시방 3세의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기에 제도할 바가 없다” 했다. 하지만 그대는 질문하기를 “어찌하여 다 제도하지 못하는가” 하니, 이것이 잘못이다.
그대는 이 허물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중생 가운데 많거나 적거나 한 종류가 없거늘 어찌하여 조금만 제도하는가”라고 묻고 있으니, 이는 거듭 허물에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인 제일의제에는 중생도 없고, 또한 제도한다는 것도 없다. 다만 세속의 법에 의하는 까닭에 제도함이 있다고 할 뿐이거늘 그대는 세속의 법에서 제일의제를 구하니, 이 일은 옳지 못하다. 비유하건대 자갈 틈에서 보석을 찾으나 얻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또한 모든 부처님의 초발심으로부터 법이 다함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있는 공덕은 모두가 만들어진 것[作法]으로서 한량도 있고, 처음과 마지막도 있다. 따라서 제도할 중생 역시 한량이 있어야 하나니, 인연과보의 한량 있는 법을 좇아 한량없는 중생을 다 제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힘센 장수의 활이 아무리 세력이 크다 해도 거리가 멀면 화살도 반드시 떨어지는 것 같다.
또한 겁이 다하여 큰 불이 삼천대천세계를 태울 때 밝게 비추는 광명이 한량없고 오래간다 하여도 반드시 멸하는 것과도 같다.
보살의 성불도 이와 같아서 처음 발의함으로부터 정진의 활을 잡고 지혜의 화살을 써서 깊이 불법 속으로 들어가 큰 불사를 이룩하더라도 마침내 반드시 멸한다.
보살이 일체종지를 얻을 때는 몸에서 광명이 나와 한량없는 세계를 비추고, 낱낱 광명이 변화해 한량없는 몸을 만들어 내며, 시방의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한다.
열반에 든 뒤에는 8만 4천의 법 무더기와 사리로써 중생들을 교화하되 겁이 다하는 불이 비추기를 오래하면 끝내 멸하는 것이다.
【문】 그대는 말하기를 “광명이 변화해 한량없는 몸을 만들어 내며, 시방의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한다” 하면서 지금은 어찌하여 한량 있는 인연 때문에 제도 받을 중생 역시 한량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한량없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실제로 한량없음이니, 성인들도 헤아리지 못하는 바이다. 예를 들어 허공ㆍ열반ㆍ중생의 성품이니, 이것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
둘째는 가히 헤아릴 수는 있는 법이나 오직 힘이 적어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미산ㆍ바닷물의 무게ㆍ빗방울의 많고 적음이니, 이는 부처님들과 보살들은 능히 아시지만 하늘이나 인간 세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 부처님들은 능히 아시지만 다만 그대들이 미칠 바가 아니므로 한량없다고 말할 뿐이다.
또한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겨나는 까닭에 자성이 없으며, 자성이 없는 까닭에 항상 공하니, 항상 공한 가운데서는 중생을 얻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도량에 앉았을 때
지혜로운 이 볼 수 없었으니
빈주먹으로 어린애를 꼬이듯
모든 중생을 구제하였네.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은
그대로가 중생의 모습이니
만일 중생의 모습에 집착하면
진실한 도에서 멀어지네.
항상 영원히 공한 모습을 생각하면
이 사람은 도를 행하는 것이 아니니
생멸치 않는 법 가운데에서
분별의 모습을 짓는 자이네.
분별하거나 기억해 생각하면
이는 마라의 그물이니
움직이지 않고 기대지 않으면
이것이 곧 법인(法印)이어라.
【문】 만일 즐거움에 두 부분이 있어 자심과 희심이라면, 비심으로 괴로움을 관찰할 때엔 어찌하여 두 부분으로 나누지 않는가?
【문】 즐거움은 일체 중생이 다 같이 애착하고 소중히 여기므로 두 부분으로 나누거니와 이 괴로움은 사랑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 까닭에 두 부분으로 나누지 않는다.
또한 즐거움을 느낄 때엔 마음이 부드럽고 괴로움을 느낄 때엔 마음이 굳어진다.
아육왕(阿育王)11)의 동생인 위타수(違陀輸)12)가 7일 동안 염부제의 왕이 되어
최상의 쾌락을 얻어 5욕을 마음껏 누렸다. 7일이 지난 뒤에 아육왕이 물었다.
“염부제의 주인이 되어 마음껏 기쁨을 누렸느냐?”
그가 대답했다.
“나는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였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전다라(旃陀羅)13)가 날마다 요령을 흔들고 고성을 지르면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7일 가운데 이미 며칠이 지났다. 7일이 지난 뒤엔 그대는 반드시 죽으리라.’ 나는 이런 소리를 듣자 비록 염부제의 왕이 되어서 최상의 5욕을 누렸으나 근심과 걱정이 깊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괴로움의 힘은 강하고 즐거움의 힘은 약한 줄 알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온몸에 즐거움을 느끼다가 어느 한곳에 가시를 찔리면 뭇 즐거움을 모두 잃은 채 다만 가시의 아픔만을 느끼나니, 즐거움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야 강해지거니와 괴로움의 힘은 강하기 때문에 한 곳만으로도 족히 밝힐 수 있다.
【문】 이러한 4무량심을 행하면 어떤 과보를 받는가?
【답】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자삼매에 들면 현재에 다섯 가지 공덕을 받느니라.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고, 칼날에도 상하지 않고, 결코 횡사하지 않고, 착한 신이 옹호하나니, 한량없는 중생을 이롭게 했기 때문에 이런 한량없는 복덕을 받느니라. 이러한 유루의 한량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반연하기 때문에 청정한 곳에 태어나니, 이른바 색계이니라.”
【문】 무슨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자의 과보로 범천(梵天)에 태어난다 하셨는가?
【답】 범천은 중생이 존귀하게 여기는 바임을 모두가 듣고,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천축국14)에 머무셨는데, 천축국에는 언제나 바라문이 많았다. 바라문의 법에는 복덕이 다하면 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데, 만일 중생이 자를 행하면 범천에 태어난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믿고 따라서 자애로운 법을 행했다. 이런 까닭에 자를 행하여 범천에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음욕을 끊은 하늘을 모두 범(梵)이라 하는데, 범이라 말하면 색계를 다 포섭한다. 그러므로 음욕의 법을 끊은 법을 일컬어 범행(梵行)이라 하는 것이다. 음욕 여의는 것 역시 범이니,
만일 범이라 말하면 4선(禪)ㆍ4무색정(無色定)을 포함하게 된다.
또한 각(覺)과 관(觀)은 여의기 어려운 까닭에 위 경지의 이름은 말하지 않는다.
【문】 자에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면, 비ㆍ희ㆍ사에는 어찌하여 공덕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답】 위에서 비유했듯이 하나를 말하면 곧 세 가지가 포함되는 것이다. 이 역시 그와 같아서 자를 말하면 이미 비ㆍ희ㆍ사도 이미 말한 것이다.
또한 자는 곧 진실로 한량없는 것이니, 인자함은 왕과 같고 나머지 세 가지는 따르는 백성과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먼저 자심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고,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이를 보는 까닭에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고,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운 마음을 여의어 법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을 내고, 이 세 가지 일에 미움도 사랑도 없고, 탐냄도 근심도 없으므로 버리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는 즐거움을 중생에게 주는 까닭이다.
『증일아함(增一阿含)』에서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는 비심을 설하고, 마하연경15)의 곳곳에서도 그 공덕을 말하고 있다.
『명강보살경(明網菩薩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중생들 사이에서 32종의 비(悲)를 행하며, 차츰 늘어나고 넓어지면 대비(大悲)를 이루느니라. 대비는 일체의 부처님과 보살들의 공덕의 근본이요, 반야바라밀의 어머니요, 부처님들의 할머니이다. 보살은 대비의 마음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얻고, 반야바라밀을 얻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갖가지로 대비를 찬탄하셨으며, 희ㆍ사의 마음 역시 다른 곳에서 찬탄하셨다.
자ㆍ비의 두 가지는 두루 위대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 공덕을 찬탄하셨으니, 자는 공덕이 있기 어렵기 때문이요, 가엾이 여김은 능히 큰 업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문】 부처님께서 4무량의 공덕을 말씀하시기를 “인자한 마음을 잘 닦고 능숙히 닦으면 복이 변정천(遍淨天)16)에 이르고[極],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잘 닦고 능숙히 닦으면 복이 공처(空處)에 이르고,
기뻐하는 마음을 잘 닦고 능숙하게 닦으면 복이 식처(識處)에 이르고, 버리는 마음을 잘 닦고 능숙하게 닦으면 복이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른다” 하셨거늘 어찌하여 앞에서는 “자의 과보로 범천에 태어난다”고 하셨는가?
【답】 부처님들의 가르침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제도해야 할 중생들에 따라 그처럼 말씀하신다.
자정(慈定)에서 일어나서 제3선으로 회향하기는 쉽다. 또한 비정(悲定)에서 일어나서 허공처(虛空處)로 향하거나, 희정(喜定)에서 일어나서 식처에 들어가거나, 사정(捨定)에서 일어나서 무소유처에 들어가기가 쉽다.
또한 자심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기를 원한다면 이 과보로 스스로도 응당 즐거움을 받아야 하는데, 삼계 안에서는 변정천이 가장 즐거우므로 말하기를 “복이 변정천에 이른다” 했다.
비심으로써 중생들의 늙고 병들음과 잔인하고 해로운 고행을 하는 자를 보아 이렇게 연민의 마음을 일으킨다.
‘어찌하여야 괴로움을 여의게 할까. 만일 안의 괴로움을 제해 주면 밖의 괴로움이 다시 오고, 만일 밖의 괴로움을 제해 주면 안의 괴로움이 다시 오는구나.’
수행자는 다시 생각하기를 ‘몸이 있으면 반드시 괴로움이 있으니, 오직 몸이 없어야 괴로움이 없으리라. 허공이 능히 물질[色]을 깨뜨리리라’ 한다. 그러므로 복이 공처에 이른다 하는 것이다.
희심으로써 중생들에게 마음(心)과 의식[識]의 즐거움을 주고자 한다. 마음과 의식이 즐거움이란, 마음이 몸에서 떠나기를 마치 새가 조롱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허공처의 마음은 비록 몸은 벗어났으나 아직도 마음이 허공에 매여 있거니와 식처(識處)는 한량이 없으니, 일체법 가운데에 모두 마음과 의식이 있어 의식이 자재하고 끝이 없음을 얻게 된다.
이런 까닭에 기뻐함의 복은 식처에 이른다 했다.
사심이란 중생에 대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는 것이니,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는 까닭에 참된 버림의 상태[捨法]를 얻는다. 이른바 무소유처(無所有處)17)이다.
이런 까닭에 버리는 마음의 복은 무소유처에 이른다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4무량은 다만 성인만이 얻는 바로서 범부의 경지는 아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미래 세상의 제자들이 둔근이기 때문에 분별하여 모든 법에 집착되고 4무량의 모습을 착각하여
“이 4무량심은 중생이 반연이기에 유루일 뿐이요, 다만 욕계만을 반연하므로 무색계에는 없다. 왜냐하면 무색계는 욕계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할 것을 아신다.
이러한 사람들의 망견을 끊기 위하여 4무량심을 무색계 가운데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으로서는 4무량심이 시방의 중생을 두루 반연하기 때문에 무색계에서도 반연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은 질문 가운데서 말하기를 “자(慈)에 세 종류가 있으니, 중생을 대상으로 삼는 것[衆生緣]과 법을 대상으로 삼는 것[法緣]과 대상이 없는 것[無緣]이다”고 했으며, 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중생을 대상으로 삼는다 함은 유루요, 대상이 없다 함은 무루요, 법을 대상으로 삼는다 함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4무량심을 간략히 설명했다.
4무색정(無色定)이라 함은 허공처(虛空處)ㆍ식처(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이다.
이 4무색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구(有垢)18)요, 둘째는 생득(生得)19)이요, 셋째는 행득(行得)20)이다.
유구란, 무색계에 속하는 서른한 가지 번뇌[結] 및 이 번뇌에서 일어나는 마음과 상응하는 행을 포함한다.
생득이란, 이 4무색정을 행한 업보의 인연 때문에 무색계에 태어나서 은몰하지 않는 무기(無記)의 사중(四衆)을 얻게 되는 것이다.
행득이란, 이 색이 추악하고, 중한 고통이고, 늙고, 병들고, 살해되는 등 갖가지 고뇌의 인연이며, 마치 중병 같고, 종기 같고, 독한 가시 같아 모두가 거짓되고 헛된 표현이니 마땅히 제거해야 한다고 관찰한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 일체의 색상(色相)을 초월하고 일체의 유대상(有對相)을 멸하고, 일체의 다른 상[異相]을 생각하지 않아 가없는 허공처에 드는 것이다.
【문】 어찌하여야 능히 이 세 가지 모습을 멸하는가?
【답】 이 세 가지 모습은 모두가 인연 화합에 의하여 생겨나는 까닭에 자성(自性)이 없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 세 가지가 거짓되고 실체가 없어서 쉽게 멸할 수 있다.
또한 이 색을 분별하건대 조각조각 깨지고 흩어져서 나중에는 모두 없어진다.
이런 까닭에 뒤에만 없는 듯하나 지금에도 없거늘 중생들이 뒤바뀐 까닭에 화합된 색에 대하여 한 모습이라거나 다른 모습을 취하고, 마음이 색의 모습에 집착한다.
그러니 “나는 지금 어리석은 사람을 따라서 배울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일을 구해야 하리라”고 해야 하나니, 진실한 일 가운데는 한 모습이라거나 다른 모습이라 할 것이 없다.
다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만일 모든 법을 제거해서 여읜다면 이익을 얻음이 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먼저 재물과 처자를 버리고 출가하여 청정하게 계행을 지니면 마음이 평온해져 겁내거나 두려울 것이 없으며, 모든 욕망과 온갖 삿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고 기쁨과 즐거움이 생하는 초선(初禪)을 얻으리라. 다시 각(覺)과 관(觀)을 여의고 내적으로 청정해진 까닭에 제2선에서의 커다란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며, 다시 이 기쁨을 여의면 제3선의 경지이니 모든 즐거움 가운데 으뜸이 되리라. 다시 이러한 즐거움을 여의고 생각[念]이 무관심으로 청정해진 제4선을 얻으나, 이러한 4선을 버리고 마땅히 다시 묘한 선정을 얻어야 하리라. 이런 까닭에 이 색의 모습을 초월하고, 대함이 있는 모습을 멸해 다른 모습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세 종류의 색(色)을 말씀하셨다. 곧 어떤 색은 볼 수도 있고 대할 수도 있고[可見有對], 어떤 색은 볼 수는 없으나 대할 수는 있고[不可見有對], 어떤 색은 대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不可見無對].
여기에서 “색상을 초월한다” 함은 볼 수도 있고 대할 수도 있는 색이요, “대할 수 있는 모습을 멸한다” 함은 볼 수는 없으나 대할 수는 있는 색이요, “다른 모습을 생각하지 않는다” 함은 볼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는 색이다.
또한 다시 눈으로 색의 무너짐을 보기 때문에 색을 초월한다 하고, 귀의 소리ㆍ코의 냄새ㆍ혀의 맛ㆍ몸의 촉감이 무너지기 때문에 대상이 있는 모습을 초월한다 하고, 두 종류의 나머지 색 및 무교색(無敎色)21)에 대해 갖가지로 분별하기 때문에 다른 모습이라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해서 색계 가운데 물드는 일을 떠나 무변허공처(無邊虛空處)를 얻는다.
3무색을 얻는 인연과 방법은 「선바라밀품」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 4무색에서 하나는 항상 유루이거니와 나머지 셋은 지금 분별해야 하리라.
허공처는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도 하다.
유루라 함은 허공처에 속하는 유루의 4중(衆)이요, 무루라 함은 허공처에 속하는 무루의 4중이니, 식처와 무소유처도 이와 같다.
모두가 다 유위의 선(禪)이다.
유루의 허공처는 유보(有報)이고 무기(無記)이며, 무루의 허공처는 무보(無報)이다. 식처ㆍ무소유처도 이와 같다.
선(善)한 비유상비무상처는 유보이며, 무기의 비유상비무상처는 무보이다.
선한 4무색정은 닦을 수 있는 것이며, 무기의 4무색정은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숨어 없어진다 함은 때[垢]가 있음이요, 숨어 없어지지 않는다 함은 때가 없음이다.
하나가 셋 가운데 있으니, 유루라 함은 있는 것이요, 무루라 함은 있지 않는 것이다.
4무색정에 속하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은 서로 응하는 원인이요,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은 서로 응하는 원인이 아니다.
선한 법이면서도 4무색 안의 것이 아닌 것도 있고, 4무색 안의 것이면서도 선법이 아닌 것도 있다.
선한 법이면서 4무색 안의 것인 것도 있고, 선법도 아니고 4무색 안의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선한 법이면서도 4무색이 아니라 함은 일체의 색중(色衆)과 4무색이 포섭하지 못하는 선한 4중(衆) 및 지혜의 연이 다한 것이다.
4무색 가운데 있으면서도 선법이 아니라 함은 무기(無記)의 4무색이다.
선한 법이기도 하고 4무색이기도 하다 함은 선한 4무색이다.
선한 법도 아니고 4무색도 아니라 함은 일체의 선하지 못한 5중과 무기의 색중, 그리고 4무색이 포섭하지 못하는 무기의 4중과 허공 및 지혜의 인연이 다하지 않는 것이다.
선하지 않은 법에 서로 포섭되지 않는다.
무기법이면서도 4무색이 아닌 것도 있고, 4무색이면서도 무기법이 아닌 것도 있으며, 무기법이기도 하고 4무색이기도 한 것이 있으며, 무기법도 아니고 4무색도 아닌 것도 있다.
무기법이면서도 4무색이 아닌 것이라 함은 무기의 색중 및 4무색에 포섭되지 않는 무기의 4중, 허공 및 지혜의 연이 다하지 않은 것이다.
4무색 가운데 있으면서도 무기법이 아니라 함은 선한 4무색이다.
무기이기도 하고 4무색이기도 하다 함은 무기의 4무색이다.
무기의 법도 아니고 4무색도 아니라 함은 선하지 못한 5중과 선한 색중과 무색에 속하지 않는 선한 4중 및 지혜의 연이 다한 것이다.
혹은 누(漏)이면서 4무색이 아니거나, 혹은 4무색이면서 누가 아니거나, 혹은 누이기도 하고 4무색이거나, 혹은 누도 아니고 4무색도 아니다.
누이면서 4무색이 아니라 함은 한 누와 두 누의 일 부분이다.
4무색이면서 누가 아니라 함은 누에 속하지 않는 4무색이다.
누이기도 하고 4무색이기도 하다 함은 두 누의 일부분이다.
누도 아니요 4무색도 아니라 함은 색중 및 누와 무색에 속하지 않는 4중과 무위의 법이다.
혹은 유루이면서 4무색이 아니거나, 혹은 4무색이면서 유루가 아니거나, 혹은 유루이면서 4무색이거나, 혹은 유루도 아니고 4무색도 아니기도 하다.
유루이면서 4무색이 아니라 함은 유루의 색중과 무색에 속하지 않는 유루의 4중이다.
4무색이면서 유루가 아니라 함은 3무색계의 일부분이다.
유루이기도 하고 4무색이기도 하다 함은 1무색 및 3무색의 일부분이다.
유루도 아니고 4무색도 아니라 함은 무루의 색중과 무색에 속하지 않는 무루의 4중 및 3무위이다.
혹은 무루이면서 4무색이 아니거나, 혹은 4무색이면서 무루가 아니거나, 혹은 무루이면서 4무색이거나, 혹은 무루도 아니고 4무색도 아니기도 하다.
무루이면서 4무색이 아니라 함은 무루의 색중과 무색에 속하지 않은 무루의 4중과 3무위이다.
4무색이면서 무루가 아니라 함은 1무색과 3무색의 일부분이다.
무루이기도 하고 4무색이기도 하다는 것은 3무색의 일부분이다.
무루도 아니고 4무색도 아니라 함은 유루의 색중과 무색계에 속하지 않은 유루의 4중이다.
허공처는 혹은 견제(見諦)에서 끊고, 혹은 사유(思惟)로써 끓고, 혹은 끊지 않는다.
견제에서 끊는다 함은 믿음으로 행하고 법답게 행하는[信行法行] 사람이 견제의 지혜[見諦忍]를 써서 끊는 것이다. 무엇을 끊는가 하면, 곧 28사(使) 및 28사에 상응하는 허공처와 여기에서 일어나는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여러 행들이다.
사유에서 끊는다 함은 견도의 법을 배운 이가 사유(思惟)를 써서 끊는 것이다. 무엇을 끊는가 하면, 곧 사유로써 끊는 3사(使) 및 이에 상응하는 허공처와 여기에서 일어나는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과 무구(無垢) 유루인 허공처이다.
끊지 않는다 함은 무루의 허공처이다.
식처와 무소유처 역시 이와 같다.
비유상비무상처는 혹은 견제에서 끊고 혹은 사유에서 끊는다.
견제에서 끊는다 함은 믿음으로 행하고 법답게 행하는 사람이 견제의 지혜를 써서 끊는 것이다. 무엇을 끊는가 하면, 곧 28사 및 이에 상응하는 비유상비무상처와 여기에서 일어나는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이다.
사유에서 끊는다 함은 견도를 배운 이가 사유를 써서 끊는 것이다. 무엇을 끊는가 하면, 곧 3사 및 이에 상응하는 비유상비무상처와 여기에서 일어나는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과 무구의 비유상비무상처이다.
4무색에 속하는 것으로서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에 속하는 법도 아니고 마음과 서로 응하는 것도 아니다. 느낌[受衆]과 생각[想衆] 및 이와 상응하는 지어감[行衆]이니, 이 마음에 속하는 법은 또한 마음과 서로 응하는 마음ㆍ뜻ㆍ의식ㆍ독심(獨心)이다.
【문】 4무색은 혹은 마음을 따르는 행이면서 느낌과 서로 응하지 않는 것도 있고, 혹은 느낌과 서로 응하면서도 마음을 따르지 않는 것도 있고, 혹은 마음을 따라 행하기도 하면서 느낌과 서로 응하기도 하고, 혹은 마음을 따르는 행이 아니면서 느낌에도 서로 응하지 않는 행도 있다.
마음을 따르는 행이면서도 느낌과 서로 응하지 않는다고 함은 마음을 따르는 행과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 및 느낌이다.
느낌과 서로 응하면서도 마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함은 마음 그자체이다.
마음을 따르는 행이면서도 느낌과 서로 응한다 함은 생각[想衆] 및 여기에 서로 응하는 지어감[行衆]이다.
마음을 따르는 행이 아니면서도 느낌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다 함은 마음을 따르는 행과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이다.
생각[想]과 표상작용[行]에 서로 응함도 이와 같이 설명해야 하리라.
허공처는 혹은 신견(身見)의 인으로부터 다시 신견에게 원인이 되어 주지 않는 것도 있고, 혹은 신견의 원인으로부터 다시 신견에게 원인이 되어 주는 것도 있고, 혹은 신견을 인하지 않은 채 다시 신견에게 원인이 되어주지 않는 것도 있다.
신견의 원인으로부터 다시 신견에게 원인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과거ㆍ현재의 괴로움을 보고 끊는 모든 번뇌[使]와 이에 상응하는 허공처를 제외하며, 또한 과거ㆍ현재의 괴로움의 원인을 보고 끊는 모든 치우친 번뇌[邊結] 및 이에 상응하는 허공처를 제외하며, 미래 세상에서의 신견과 상응하는 허공처를 제외하며, 신견과 생ㆍ노ㆍ주ㆍ멸을 제외한 나머지의 때가 있는[有垢] 허공처이다.
신견의 원인으로 부터 다시 신견의 원인이 되어 주는 것이라 함은 위에서 제거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신견의 원인을 인하지 않고 다시 신견의 원인이 되어주지도 않는다 함은 때가 없는 허공처이다.
식처ㆍ무소유처ㆍ비유상비무상처도 역시 이와 같다.
4무색정은 모두가 인연이 있고 또한 인연이 되어 주기도 한다.
허공처에는 혹은 차제연(次第緣)22)이면서도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 것도 있고, 혹은 차제연이면서도 차제연이 되어 주는 것도 있고,
혹은 차제연이 아니면서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 것도 있다.
차제연이면서도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 세상에 생기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허공처 및 아라한이 과거ㆍ현재에서 최후로 멸도에 들고자 할 때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허공처이다.
차제연이면서도 차제연이 되어 준다 함은 과거ㆍ현재의 아라한이 마지막 멸도하려 할 때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허공처를 제외한 나머지 과거ㆍ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허공처이다.
차제연이 아니면서도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 세상에 생기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허공처를 제외한 나머지 미래 세상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허공처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이다.
식처와 무소유처 역시 이와 같다.
비유상비무상처는 혹은 차제연이면서도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 것도 있고, 혹은 차체연이면서도 차제연이 되어 주는 것도 있고, 혹은 차제연도 아니면서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 것도 있다.
차제연이면서도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 세상에 태어나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비유상비무상처 및 아라한이 과거ㆍ현재에 있어서 최후에 멸도하려 할 때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비유상비무상처 및 멸수상(滅受想)이 생겼거나 생기려 할 때이다.
차제연이면서 차제연이 되어 준다 함은 과거ㆍ현재의 아라한이 최후에 멸도하려 할 때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비유상비무상을 제외한 나머지 과거ㆍ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비유상비무상처이다.
차제연이 아니면서도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 세상에 생기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비유상비무상처를 제외한 나머지 미래 세상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비유상비무상처와 마음의 차제연과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이다.
그리고 4무색에 속하는 모든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과 연(緣)과 연연(緣緣)이다.
4무색에는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과 비연(非緣)과 연연을 포함한다.
4무색은 모두가 증상(增上)이면서 또한 증상연이 되어 준다.
이렇게 갖가지로 4무색을 분별함은 아비담분(阿毘曇分) 가운데에서 설하는 바와 같으나 여기에서도 자세히 말해야 할 것이다.
【문】 마하연에서의 4무색은 어떠한가?
【답】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맞추어 지혜를 행하는 것이 마하연의 4무색이다.
【문】 어떤 것이 모든 법의 실상인가?
【답】 모든 법은 법으로서의 자성이 공한 것이다.
【문】 색법(色法)은 화합ㆍ분별ㆍ인연 때문에 공하다. 그렇다면 이 무색 가운데 무엇이 공하다는 것인가?
【답】 색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거친 일도 능히 공하게 하거늘 하물며 볼 수 없고 대할 수 없고 고락을 느낄 수 없는데 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또한 색법을 분별하여 미진(微塵)에까지 이르면 모두가 흩어져 빈 것으로 돌아간다. 이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은 해와 달과 시절과 나아가서는 잠깐 사이에 이르기까지 한 생각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4무색정의 의의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4무색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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