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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34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22권

by Kay/케이 2024.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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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22

 

 

대지도론 제22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36. 초품 중 팔념의 뜻을 풀이함②

염법(念法)133)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바 그대로, 수행하는 이는 마땅히 생각하기를 “이 법은 교묘하고 특출하여[巧出] 지금 세상에서 과보를 얻고 들끓는 번뇌[熱惱]도 없으며 때[時]를 기다리지 않고 능히 좋은 곳[善處]에 이르며 통달하여 걸림돌이 없다[通達無礙]”고 해야 한다.
교묘하고 특출하다 함은, 두 가지 진리[二諦]가 서로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니, 이른바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134)가 그것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이도 파괴할 수 없고 어리석은 이도 다툼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 법은 또한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여의나니, 이른바 5욕(欲)의 즐거움을 받는 것과 고행(苦行)을 받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나니, 항상함[常]과 단절됨[斷], 나[我]와 나 없음[無我], 존재함[有]과 존재하지 않음[無] 등의 이러한 두 가지 치우침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교묘하고 특출하다 한다. 모든 외도의 무리들은 자기의 법만을 귀히 여기고 다른 이의 법은 헐뜯고 천히 여기는 까닭에 교묘하거나 특출하지 못하다.
지금 세상에서 과보를 얻는다 함은, 애욕의 인연인 세간의 갖가지 괴로움을 여의고 삿된 소견의 인연인 갖가지 논의(論議)와 다툼을 여의어 몸과 마음에 안락함을 얻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계율을 지키는 이는 편안하고 즐거우며
몸과 마음에는 들끓는 괴로움 없고
누워도 편안하고 깨어나도 편안하며
명성도 또한 멀리 들린다.

또 이 불법 가운데에서 인연(因緣)은 차츰차츰 그 결과를 내나니, 이른바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고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기 때문에 법에 기쁨이 생기며, 법에 기쁨이 생기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즐겁고 몸과 마음이 즐겁기 때문에 능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가다듬기 때문에 여실히 알게 된다. 여실히 알기 때문에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기 때문에 탐욕을 여의며, 탐욕을 여의기 때문에 해탈을 얻고 해탈의 과보를 얻기 때문에 열반을 얻나니,
이것을 지금 세상의 과보를 얻는다고 한다.
외도의 법에는 공연히 괴로운 일만 하고 얻는 것은 없나니, 마치 염부(閻浮)135) 아라한이 도를 얻었을 때에 스스로 말한 것과 같다.

나는 옛날 외도가 되어서
55년 동안이나
다만 마른 쇠똥만을 먹으며
벌거숭이로 가시나무 위에 누워 있었네.

“나는 이와 같은 모진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침내 얻은 것이 없었다. 지금과 같지 못했으니, 나는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고 출가한지 3일만에 할 일을 다 마치고 아라한이 되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에서는 지금 세상에서 과보를 받는 줄 알 것이다.
【문】 만일 부처님의 법에서는 지금 세상에서 과보를 얻는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의 제자들로서 얻지 못하는 이도 있는가?
【답】 수행하는 이가 능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차례로 수행한다면 그 과보를 얻지 못함이 없다. 마치 병든 사람이 용한 의사의 가르침대로 치료하는 법을 따른다면 그 병이 낫지 않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차례대로 행하지도 않는다면 계율을 깨뜨리고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얻는 것이 없을 뿐이요 법이 바르지 않아서가 아니다.
또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들은 이 세상에서 비록 열반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뒷세상에 복과 쾌락을 받게 되고 점차로 열반을 얻게 되리니, 끝내 헛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누구라도 출가하여 열반을 닦는다면 더디거나 빠르거나 간에 모두 열반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바와 같다.
이와 같은 등으로 능히 지금 세상에서 과보를 얻게 된다.
들끓는 괴로움이 없다 했는데, 들끓는 괴로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곧 몸의 괴로움[身惱]과 마음의 괴로움[心惱]이다. 몸의 괴로움이란 포박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하거나 고문(拷問)과 형벌 등을 받는 것이다. 마음의 괴로움이란 음욕과 성냄과 간탐과 질투 등의 인연 때문에 근심ㆍ걱정ㆍ두려움 등을 내는 것이다.
이 불법 중에서는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기 때문에 몸에는 이 포박이나 옥살이ㆍ고문ㆍ형벌 등의 괴로움이 없고, 마음에서도 5욕을 여의고 5개(蓋)를 제거하여 진실한 도를 얻기 때문에
이러한 음욕이나 성냄ㆍ간탐ㆍ질투ㆍ삿된 의심 등의 괴로움이 없나니,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들끓는 열(熱)이 없다.
또 무루(無漏)의 선정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 온몸에 두루 느끼기 때문에 모든 들끓는 열이 곧 제거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몹시 뜨겁고 답답할 적에 맑고 시원한 못 안에 들어가면 몸이 시원해지고 맑아지면서 다시는 뜨거운 괴로움이 없는 것과 같다.
또 모든 번뇌는 소견에 속하고 애욕에 속하는 데, 이것을 뜨겁다 한다. 불법 중에는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들끓는 괴로움이 없다고 한다.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함은, 불법에서는 때[時]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행하며 또한 때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과를 준다. 외도의 법에서는 해가 나오지 않을 때에 법을 받고 해가 나온 때에는 법을 받지 않기도 하며, 혹은 해가 나온 때에 받고 해가 나오지 않은 때에는 받지 않기도 하며, 혹은 낮에 받고 밤에는 받지 않기도 하고 밤에 받고 낮에는 받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님 법안에서는 받는 데에 때를 기다림이 없다.
8성도(聖道)를 닦으면 그에 따라 곧 열반을 얻는다. 마치 불이 땔나무를 만나면 곧 타오르는 것처럼 무루의 지혜가 생겼을 적에는 곧 모든 번뇌를 능히 태워버려 때를 기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문】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때맞추어 먹는 약[時藥]과 때맞추어 입은 옷[時衣]과 때맞추어 먹는 음식[時食]이 있다. 만일 사람의 선근(善根)이 아직 익지 않았다면 때를 기다려 얻어야 하는데 어째서 때가 없다고 하는가?
【답】 이때라는 것은 세속의 법을 따른 것이다. 부처님 법에 오래오래 머무르기 위해서는 때에 맞는 계율[時戒]을 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도를 닦아 열반과 모든 선정과 지혜와 미묘한 법을 얻기 위해서라면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외도의 법에서는 모두가 시절을 기다리지만 불법에서는 다만 인연이 두루 갖추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만일 비록 계율을 지니고 선정을 닦는다 하더라도 지혜가 아직 성취되지 못하면 도를 이루지 못한 것이고, 만일 지계와 선정과 지혜가 모두 성취되었으면 곧 결과를 얻은 것이므로 다시는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또 오래오래 걸려서 결과를 얻는 것을 때라고 하며 즉시 얻어지는 것을 때라 하지는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물이 잘 드는 것은 한번 넣어도 이내 물이 드는 것처럼 마음이 깨끗한 사람도 그와 같아서 법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물이 들면서 법의 눈[法眼]이 깨끗하게 되나니,
이것을 바로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한다.
능히 좋은 곳에 이른다[到善處] 함은, 이 서른일곱 가지 무루의 도법[無漏道法]136)이 사람을 데리고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항하(恒河)로 들어가면 틀림없이 큰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모든 다른 외도의 법은 일체지(一切智)를 갖춘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다. 삿된 소견이 섞였기 때문에 나쁜 곳[惡處]에 이른다. 혹은 천상에 이르기도 하나 도로 떨어져서 고통을 받게 된다. 이는 모두가 무상하기 때문에 좋은 곳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문】 데려갈 이가 없거늘 어떻게 좋은 곳으로 데려갈 수 있겠는가?
【답】 비록 데려가는 이는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법이 능히 모든 법을 데리고 간다.
무루의 선[無漏善]이 5중(衆)을 끊어 주나니, 5중 가운데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중생이라 하는데 이들을 데려가서 열반에 들게 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바람이 먼지를 불어버림과 같고 물이 풀을 떠내려가게 함과 같은 것이다. 비록 데리고 가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가는 일은 있는 것이다.
또 인연(因緣)이 화합하여 짓는 것이 없다면 역시 데려가는 것이 없지만, 그 과보는 인연에 속하여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이것을 곧 간다[去]고 하는 것이다.
통달하여 걸림이 없다[通達無礙] 함은, 부처님의 법인(法印)137)을 얻기 때문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왕의 도장[王印]138)을 얻게 되면 어려운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문】 어떤 것이 부처님의 법인인가?
【답】 부처님의 법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온갖 유위법[有爲法]은 생각마다 나고 없어져 모두 무상(無常)한 것이고, 둘째는 온갖 법에는 나가 없는[無我] 것이며, 셋째는 고요한[寂滅] 열반139)이 그것이다.
수행하는 이는 삼계(三界)는 모두가 유위요 나고 없어짐을 안다. 조작된 법은 먼저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고 지금은 있지만 뒤에는 없으며, 생각마다 나고 없어지면서 계속 이어가되 서로 비슷하게 생겨나기 때문에 보고 알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흐르는 물과 등불의 불꽃과 길게 부는 바람과도 같으니, 서로 비슷하게 이어가는 까닭에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一]라고 여긴다. 중생은 무상한 법 가운데서 항상 뒤바뀐 채 생각하기 때문에 떠나가는 것을 항상 머문다고 여긴다. 이것을 온갖 만들어진 법[作法]의 무상함의 징표[無常印]이라 한다.
온갖 법에 나가 없다 함은, 모든 법은 그 안에 주(主)140)가 없고 짓는 이도 없으며, 아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으며,
낳는[生] 이도 없고 업을 짓는 이도 없다. 온갖 법은 모두가 인연에 속한다.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자재(自在)하지 못하고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가 없으니, 그것은 나의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파아품(破我品)141)에서 말한 것과 같나니, 이것을 나 없음의 징표[無我印]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다만 만들어진 법은 무상하고 온갖 법에는 나가 없다 하는가?
【답】 조작되지 않는 법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기 때문에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지 않는다.
또 조작되지 않는 법에는 마음의 집착이나 뒤바뀐 생각을 내지 않나니, 그러므로 이것은 무상하다고 하지 않고 나 없다고는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신(神)142)은 항상 두루 아는 모양이니, 이 때문에 온갖 법에는 나가 없다고 한다”고 했다.143)
고요히 사라진다[寂滅] 함은 바로 그것이 열반이니, 3독(毒)과 3쇠(衰)의 불이 꺼지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짐의 징표[寂滅印]144)라 한다.
【문】 고요히 사라짐의 징표 가운데는 무엇 때문에 다만 하나의 법뿐이요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가?
【답】 첫 번째 징표[印]에서는 5중(衆)을 말했고, 두 번째 징표에서는 온갖 법에는 모두 나가 없다고 말했으며, 세 번째의 징표에서는 두 징표의 결과를 말한 것이니 이것을 고요히 사라짐의 징표라 한다.
온갖 만들어진 법이 무상하다면 곧 나의 것[我所]과 바깥의 5욕 등을 깨뜨리는 것이고, 만일 나 없다고 말하면 안의 나의 법[內我法]을 깨뜨리는 것이니, 나와 나의 것이 파괴되기 때문에 이것을 고요히 사라지는 열반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가 조작되는 법은 무상하다고 관(觀)하면 곧 싫증을 내면서 세간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된다. 이미 괴로움을 싫어할 줄 알지만 집착을 일으켜 주체[主]를 관하면서 “내가 능히 이런 관(觀)을 짓는다”고 여기나니, 이 때문에 두 번째 법의 징표가 있는 것이다.
온갖 것에 나 없는 줄 알면 5중ㆍ12입(入)ㆍ18계(界)ㆍ12인연(因緣) 가운데서 안팎으로 분별하고 추구(推求)하면서 주인을 관한다 해도 얻을 수가 없으며,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온갖 법에는 나라는 짓는 것[我作]이 없다.
이와 같이 알고 나면 쓸모없는 희론(戱論)도 짓지 않고 의지할 데도 없으며 다만 사라짐[滅]에 돌아갈 뿐이니, 이 때문에 고요히 사라진 열반의 징표를 말한다.

【문】 마하연(摩訶衍)에서는 모든 법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 없음[無相]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어째서 이 무상한 것을 일컬어 법의 징표[法印]라 하는가? 이 두 법은 어떻게 서로 어긋난 것이 아닌가?
【답】 무상함을 관하면 곧 그것이 공의 인연을 관하는 것이니, 마치 물질[色]이 생각마다 무상하다고 관하면 곧 공인 줄 알게 됨과 같다. 과거의 물질은 사라지고 무너져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색상(色相)이 없고, 미래의 물질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조작도 없고 작용도 없어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색상이 없으며, 현재의 물질도 역시 머무름[住]이 없어서 볼 수도 없고 분별하여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색상이 없다. 색상이 없다면 그것은 곧 공이요 공이면 곧 남[生]도 없고 멸함[滅]도 없다. 남도 없고 멸함도 없음[不生不滅]과 나고 멸함[生滅]은 실로 하나이니, 설명에서 자세함과 간략함이 있을 뿐이다.
【문】 과거와 미래의 물질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색상이 없지만 현재의 물질은 머무는 때를 볼 수 있는데 어찌하여 색상이 없다고 말하는가?
【답】 현재의 물질도 역시 머무는 때가 없으니, 4념처(念處)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만약 법이 나중에 파괴되는 모양을 보인다면 마땅히 처음 생겼을 때부터 파괴될 모양이 있음을 알 것이다. 파괴가 미세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 뿐이다. 마치 사람이 신을 신는 것과 같으니, 첫날 새 신발이어서 헌 곳이 없었다면 후일에도 마땅히 헐어 떨어짐이 없이 새 것이어야 하며, 만일 헐어 떨어짐이 없다면 이것은 항상한 것[常]이어야 한다.
항상한 것이기 때문에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죄도 없고 복도 없다면 곧 도속(道俗)의 법이 문란해질 것이다.
또 나고 멸하는 모양은 항상 조작된 법을 따르므로 머무는 때가 없다. 만일 머무는 때가 있다면 곧 나고 없어짐이 없으리니, 이 때문에 현재의 물질은 머무름이 없다. 머무는 중에는 역시 나고 없어짐이 없으니, 한 생각 가운데 머무르며 또한 이것은 유위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통달하여 걸림이 없다[通達無礙]고 한다.
이와 같이 법을 염하여야 한다.
또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3장(藏)ㆍ12부(部)ㆍ8만 4천의 법문이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말씀한 법의 이치[法義]이니, 이른바 지계(持戒)ㆍ선정ㆍ지혜ㆍ8성도(聖道) 및 해탈의 결과인 열반 등이다.
수행하는 이는 먼저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것을 염하여야 하고 다음에는 법의 이치를 염하여야 한다.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것을 염한다 함은, 부처님의 말씀은 미묘(美妙)하고 모두 진실이어서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것은 깊기도 하고 또한 얕기도 하다. 실상(實相)145)을 관하기 때문에 깊으며, 교묘한 말씀으로 일부러 얕게도 하셨으며 귀중한 말씀이라 과실이 없나니, 각각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연설한 것은 네 가지 곳[四處]에 머무르며 네 가지 공덕으로 장엄함이 있나니, 첫째는 지혜의 곳[慧處]이고, 둘째는 진리의 곳[諦處]이며, 셋째는 버림의 곳[捨處]이고, 넷째는 사라짐의 곳[滅處]이다.
네 가지의 대답이 있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 없나니, 첫째는 정답(定答)146)이요, 둘째는 해답(解答)147)이며, 셋째는 반문답(反問答)148)이요, 넷째는 치답(置答)149)이다.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것은 때로는 듣고 가로막기도 하고, 때로는 가로막으면서 듣기도 하며, 혹 듣기만 하고 가로막지 않기도 하고, 혹 가로막고 듣지 않기도 하나니, 이 네 가지 모두가 순종한 것이요 어긋남이 없다.
부처님의 연설은 모든 법상(法相)을 얻은 까닭에 쓸모없는 이론이 없으며, 이치가 있는 말씀인 까닭에 있다 없다[有無] 하는 논리를 깨뜨린다.
부처님의 연설은 제일의(第一義)를 따르니 비록 세간의 법을 말씀하신다 하더라도 역시 허물이 없다. 두 가지 진리[二諦]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이익에 순응해 따르므로 청정한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묘한 말씀이 되고 청정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쓰고 거친 말씀이 되나니, 아름다운 말씀과 쓴 말씀에서도 역시 죄과(罪過)가 없다.
부처님 말씀은 모두 선법(善法)을 따르지만 또한 선법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비록 그것이 때가 낀 법이요 원수라 하더라도 역시 높은 체하지도 않고, 비록 갖가지로 꾸짖는 바가 있더라도 역시 꾸짖음의 죄는 없으며, 갖가지로 법을 찬탄한다 하더라도 역시 의지하는 바가 없다.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에는 또한 더한 것도 없고 덜한 것도 없으며, 혹 간략하기도 하고 혹 자세하기도 하다.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은 처음도 착하며 오래오래 궁구하고 구할수록 역시 착하다.
부처님 말씀은 비록 많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천박하지 않다.
비록 갖가지 말이 섞였다 하더라도 그 뜻은 어지럽지 않다.
비록 사람의 마음을 끌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애착이 나지 않게 하고, 비록 기이하면서 높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역시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거나 어렵게 하지 않다.
비록 두루 이르는 데가 있다 하더라도 범부 소인(小人)은 역시 이해할 수 없다.
부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갖가지의 희유한 일이 있으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털이 곤두서게 하고 땀이 흐르게 하며 기(氣)가 온몸에 꽉 차면서 벌벌 떨리게 한다. 또한 모든 하늘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싫어하는 소리가 시방에 가득 차게 하고 여섯 가지로 땅을 진동하게 하며, 또한 무시(無始) 이래로 세계에 대하여 굳게 집착하는 이로 하여금 잘 버리게 하고, 굳게 집착하지 않는 이는 매우 즐겁게 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죄악을 지은 사람이 들으면 스스로 죄가 있기 때문에 근심과 두려움으로 몹시 괴로워하며, 착하게 한마음[一心]으로 정진하여 도(道)에 들어간 사람이 들으면 마치 감로(甘露)의 맛을 보는 것과 같아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역시 좋다.
또 많이 모인 대중들 안에서 저마다 묻고자 할 때, 부처님은 하나의 말씀으로 대답하지만 각자가 이해하게 되므로 저마다 “부처님께서는 나 혼자만을 위하여 말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한다.
대중들 가운데 비록 멀거나 가까움이 있다 하더라도 듣는 이는 그 소리의 증감이 없고 삼천대천세계에서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가득 찬다. 제도될 사람은 듣게 되고 제도되지 못할 사람은 듣지 못하게 되니, 비유하건대 마치 천둥소리가 땅을 진동한다 해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고 귀 밝은 이만이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부처님의 말씀을 염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법의 이치[法義]150)인가? 곧 믿음[信]과 계율[戒]과 버림[捨]과 견문[聞]과 선정[定]과 지혜[慧] 등으로서 도(道)가 되는 것과 모든 착한 법과 세 가지의 법 도장[三法印]이니, 마치 통달(通達)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온갖 유위의 법은 무상하고 온갖 법에는 나가 없으며 고요히 사라진 열반을 바로 부처님 법의 이치라 한다. 이 세 가지 징표는 온갖 논의사(論議師)151)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비록 갖가지로 말한 바가 많이 있기는 하나 역시 모든 법의 성품[法性]을 바꿀 수 있는 이는 없나니, 마치 차가운 모양[冷相]은 바꾸어서 뜨겁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법의 성품은 무너뜨릴 수가 없다. 가령 사람이 허공에 상처를 낼 수 있다 해도 이 모든 법의 징표는 여법(如法)하여 무너뜨릴 수 없다.

성인은 이 세 가지 법의 모양을 알고는 온갖 삿된 소견에 의지해 저마다 다투고 있는 데서 벗어날 수 있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눈 있는 사람은 소경들이 갖가지 색상(色相)에 대하여 다투는 것을 보면 그들을 가엾이 여기면서 웃을 뿐 함께 거들며 다투지 않는 것과 같다.
【문】 부처님의 성문법에는 네 가지 진실함[實]이 있고 마하연(摩訶衍) 가운데는 한 가지 진실함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무엇 때문에 세 가지의 진실함을 말하는가?
【답】 부처님께서 세 가지의 진실한 법 도장을 말씀하셨으나 자세히 설명하면 네 가지가 되며, 간략하게 설명하면 한 가지이다.
무상은 곧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도제(道諦)에 대한 말씀이고, 무아(無我)는 곧 온갖 법에 대한 말씀이며, 고요히 사라진 열반이란 곧 멸제(盡諦)에 관한 말씀이다.
또 유위의 법은 무상하고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기 때문에 모두가 인연에 속하고 자재함이 없으며, 자재함이 없기 때문에 나가 없다. 무상하고 나가 없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으며, 모양이 없어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곧 그것이 고요히 사라진 열반이 된다. 이 때문에 마하연의 법 가운데서는 비록 온갖 법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 한 모양, 이른바 무상(無相)을 말하지만 모양 없음이 곧 고요히 사라진 열반이 된다.
이 염법삼매(念法三昧)는 지혜를 반연하고 다함을 반연하며 모든 보살 및 벽지불의 공덕이다.
【문】 무엇 때문에 부처님을 염하는[念佛] 데에는 다만 부처님 몸 가운데 배울 것 없는[無學] 모든 공덕만을 반연하고, 염승삼매(念僧三昧)에서는 부처님 제자의 몸 가운데 모든 아직 배울 것이 있고[學], 더 배울 것이 없는[無學] 법을 반연하며, 나머지 착한 무루의 법은 모두가 염법삼매의 소연(所緣)이 되는가?
【답】 가전연니자(迦栴延尼子)152)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하연의 사람은 3세(世)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초발의(初發意)에서 법이 다함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짓는 공덕과 신통력은 모두 염불삼매의 소연이다.”
또 부처님의 말씀이나 설하신 『법의경(法義經)』과 같은 데서는 “한 글귀와 한 게송에서부터 8만 4천의 법취(法聚)에 이르기까지
믿음ㆍ계율ㆍ버림ㆍ견문ㆍ선정ㆍ지혜 등의 모든 착한 법 내지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은 모두가 염법삼매의 소연이 된다.
모든 보살ㆍ벽지불ㆍ성문들 그리고 부처님을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 온갖 성인들과 모든 공덕은 바로 염승삼매의 소연이 된다”고 했다.
염승(念僧)이란 곧 부처님 제자들의 계율의 구족함과 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의 구족함을 염하는 것이니, 이 4쌍(雙) 8배(輩)153)는 마땅히 공양과 공경의 예를 받아야 하는, 곧 세간의 위 없는 복전이다.
수행하는 이는 마땅히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것과 같이 승가[僧]를 염해야 한다. 곧 성문승(聲聞僧)ㆍ벽지불승(辟支佛僧)ㆍ보살승(菩薩僧)의 공덕이니, 이 성승(聖僧)154)이 다섯 가지[五衆]를 두루 갖추는 일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먼저 이미 다섯 가지[五衆]로써 부처님을 찬탄했는데 어떻게 다시 다섯 가지로써 승가를 찬탄하는가?
【답】 제자들이 얻는 다섯 가지에 따라 구족했음을 찬탄한 것이다. 구족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이 두루 갖추어짐[實具足]이요, 둘째는 이름이 두루 갖추어짐[名具足]이다.
마치 부처님의 제자로서 응당 얻어야 할 것을 다 얻어 칭찬을 받는다면 이것을 구족되었다고 부르고, 부처님께서 얻으신 바를 칭찬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구족되었다고 한다.
또 외도의 출가한 무리나 재가의 무리와 차별을 짓기 위하여 이렇게 칭찬하는 것이다. 외도로서 집에 있는 무리이면 그 부귀와 호존(豪尊)과 세력을 칭찬하게 되고, 출가한 무리라면 그의 삿된 소견과 고행(苦行)과 염착(染著)과 지혜와 고집하는 이론[執論]과 다툼을 칭찬하게 된다.
승중(僧衆)을 염하는 가운데 혹 지계ㆍ선정ㆍ지혜가 있어도 적으면 칭찬거리가 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스스로 제자들의 온갖 공덕의 근본 주처(住處)인 계율이 두루 갖추어진 것과 해탈지견이 두루 갖추어진 것을 칭찬하신다.
이 계율에 머물러 동요하지 않으면서 선정의 활을 당겨 지혜의 화살을 쏘아
모든 번뇌의 도적을 깨뜨려 해탈을 얻고 이 해탈 가운데서 지견(知見)을 내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건장한 사람이 먼저 발을 안정하게 딛고 활을 당겨 화살을 쏘아 능히 원적을 쳐부수어 두 가지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니, 곧 왕에게서 죄를 면하고 진(陳)에 대한 어려움을 구해 주는 것과 같다. 이는 적을 똑똑히 알고 본 뒤에 무너뜨렸기에 마음에 환희가 생겨난다. 이 때문에 다섯 가지[五衆]로써 칭찬하는 것이다.
공양해야 한다[應供養] 함은, 다섯 가지 공덕이 두루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부귀와 호세(豪勢)가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처럼 부처님의 제자들도 그와 같아서 청정한 계율ㆍ선정ㆍ지혜의 재물이 풍부하고 해탈ㆍ해탈지견의 세력이 있기 때문에 공양과 공경과 합장의 예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세간의 위없는 복전[世間無上福田]이라 했는데, 시주(施主)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가난한 이와 부자이다. 가난한 이는 예배하고 공경하고 영접하고 전송하면서 과보를 얻는다. 부자 역시 공경하고 예배하고 영접하고 전송하면서 한편 재물로써 공양하여 과보를 얻는다. 이 때문에 세간의 위없는 복전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좋은 밭을 갈고 다스려 때맞추어 씨를 뿌리고 물을 대어 흠씬 적셔 주면 수확을 많이 거두는 것처럼, 승가의 복전도 역시 그와 같아서 지혜의 쟁기로써 결사(結使)의 뿌리를 갈아 내고 4무량심(無量心)으로써 갈고 다스려 부드럽게 한 뒤에 모든 단월(檀越)155)이 신시(信施)의 씨를 뿌리고 염시(念施)와 공경의 청정한 마음의 물을 대면 금생 또는 후생에 한량없는 세간의 쾌락을 받고 3승(乘)의 과보를 얻게 된다.
마치 박구라(薄拘羅)156) 비구와 같은 이는 비바시불(鞞婆尸佛) 때 하리륵(呵梨勒)157) 열매 하나를 스님들에게 공양하였는데 91겁 동안을 천상과 인간에서 복락의 과보를 받으며 항상 질병이 없다가 지금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만나서 출가하여 번뇌가 다하고 아라한을 얻었다.
또 사문 이십억이(億耳)158)와 같은 이는 비바시불 때 한 방사(房舍)를 만들어서
물건을 땅에다 깔고 스님들에게 공양하였는데 91겁 동안을 천상과 인간에서 복락의 과보를 얻었다. 그는 발로 땅을 밟지 않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발 아래에 길이 두 치[寸] 되는 털이 나서 부드럽고 정갈하며 보기 좋았다. 그의 아버지는 보고 기뻐하면서 20억 냥의 금을 주었는데,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고는 아라한을 얻고 모든 제자들 가운데서 정진이 첫째였다.
이와 같이 적은 보시로써도 큰 과보를 얻는다. 그러므로 세간의 위없는 복전이라 한다.
승가[僧] 중에 4쌍(雙) 8배(輩)가 있다 했는데, 부처님께서 세간의 위없는 복전을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 여덟 부류의 성인이 있기 때문에 위없는 복전이라 하신 것이다.
【문】 부처님께서 급고독(給孤獨) 거사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면, 세간의 복전으로서 공양을 받을 만한 이는 두 가지가 있으니, 배울 것이 있는 이[學人]159)나 배울 것 없는 이[無學人]160)이다. 배울 것이 있는 이에게 18계위, 배울 것 없는 이에게 9계위가 있다 하셨는데 지금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여덟 가지만을 말하는가?
【답】 거기서는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에 18계위 및 9계위이나, 이제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8계위이다. 그곳의 27계위의 성인은 여기의 8계위에 모두 포섭된다.
신행(信行)과 법행(法行)은 혹 향수다원(向須陀洹)에 포섭되기도 하고 혹 향사다함(向斯陀含)에 포섭되기도 하며 혹 향아나함(向阿那含)에 포섭되기도 한다. 가가(家家)161)는 향사다함에 포섭되고 일종(一種)162)은 향아나함에 포섭되며 5종의 아나함은 향아라한에 포섭된다.
신행과 법행이 사유도(思惟道)에 들어가면 신해탈견득(信解脫見得)이라 한다. 이 신해탈견득은 15계위의 배울 것 있는 이에 포섭되며 9종의 복전(福田)은 아라한에 포섭된다.
또 수행하는 이는 승가를 염해야 한다. 승가(僧)는 바로 내가 열반으로 나아가는 참된 벗이니, 하나의 계율과 하나의 소견이라도 이와 같이 마땅히 기뻐하여 일심으로 공경하고 순종해서 어김이 없어야 한다. 나는 이미 갖가지 악(惡)과 처자와 노비며 인민들을 벗으로 삼고 있으니, 이들은 3악도(惡道)에 들게 하는 벗이었지만 이제는 성인의 벗을 얻었으므로
편안하고 고요히 열반에 이를 것이다.
부처님은 마치 의왕(醫王)과 같고 법은 마치 좋은 약과 같으며 승가는 마치 병든 이를 돌보는 사람과 같나니 우리는 마땅히 청정한 지계와 바른 억념을 얻어야만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한 법의 약을 우리는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승가는 바로 나의 모든 번뇌의 병[結病]을 끊어 주는 한 인연이어서 이른바 병든 이를 돌보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승가를 염해야 한다.
또 승가에는 한량없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두루 갖춘 이가 있으므로 그 덕은 측량할 수 없다.
마치 어느 부귀한 장자(長者)와 같은 이는 승가를 믿고 좋아했는데, 승가의 집사(執事)에게 아뢰되 “저는 차례로 스님들을 청하여 저의 집에서 공양토록 하겠습니다”고 했다. 그리하여 날마다 차례로 청(請)하여 이윽고 사미(沙彌)에까지 이르렀으나 집사는 사미163)에 관한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미들이 묻기를 “무슨 뜻으로 사미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단월(檀越)164)이 젊은이 청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게송으로 말했다.

수염과 머리칼이 눈과 같이 희고
이는 빠지고 피부는 쭈그러지고
구부정하게 걷고 형체가 파리한
이런 이를 청하기 좋아해서라네.

사미들은 모두가 큰 아라한들이었는데 마치 사자(師子)의 머리를 때리는 것 같은지라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게송으로 말했다.

단월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
형체만 보고 덕(德)은 취하지 않으니
나이 젊은이들의 모습은 버리고
늙어 야위고 검은 이들만 취하는구나.

웃어른과 늙은이의 모습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러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른바 장로(長老)의 모습이란
반드시 나이가 늙어서도 아니요
야윈 데다 수염과 머리칼이 희거나
헛되이 늙어 속에 덕이 없는 자가 아니다.

죄와 복의 과보를 능히 버리고
정진하면서 범행(梵行)을 수행하며
이미 온갖 법을 여읜 이라야
이런 이를 장로라 한다네.

이때에 모든 사미들은 다시 생각하기를 “우리들은 앉아서 볼 수만 없다. 이 단월은 승가의 좋고 나쁨을 헤아리고 있으니 말이다”고 하며 다시 게송으로 말했다.


찬탄하거나 꾸짖거나 간에
우리들의 마음은 한결같지만
이 사람은 불법을 헐뜯고 있으니
가르쳐 주지 않을 수 없구나.

마땅히 빨리 그의 집으로 가서
법으로써 그에게 가르쳐 주리니
우리들이 그를 제도하지 않으면
이야말로 중생들을 버리는 것이 된다.

그리고는 즉시 모든 사미들은 스스로 그의 몸을 변화하여 모두 늙은이가 되었다. 수염과 머리칼은 눈과 같이 희고 긴 눈썹은 드리워져 눈을 가렸으며 주름살은 마치 물결과 같고 등골은 굽어서 활과 같았다.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가서 차례대로 청을 받았는데 온몸을 모두 벌벌 떨면서 불안한 것이 마치 사시나무가 바람을 따라 흔들림과 같았다.
단월은 이들을 보고 기뻐하면서 맞아들여 앉게 했다.
그런데 앉자마자 도로 다시 젊은이의 몸으로 변하였다.
그 단월은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게송으로 말했다.

이렇게 나이 많은 늙은 모습이
도로 변하여 젊은 몸이 되었는데
마치 젊어지는 약 먹은 것 같으니
이런 일이 어찌하여 일어납니까.

모든 사미들이 말했다.
“당신은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은 비인(非人)이 아닙니다. 당신은 스님들을 헤아리려 하니, 이런 일이야말로 몹시 언짢은 일입니다.
우리들은 당신을 가엾이 여겨 일부러 그렇게 변화했던 것이니, 당신은 성인들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아셔야 합니다” 하면서 게송으로 말했다.

비유하건대 마치 모기의 부리로써
오히려 바다 밑을 측량할 수 있어도
온갖 하늘과 사람으로서
승가[僧]를 헤아릴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승가는 공덕의 귀함으로써도
오히려 분별하지 않는 것인데
당신은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써
모든 대덕(大德)을 헤아렸습니다.

크고 작음은 지혜에서 나오고
늙고 젊음에서 나오지 않으니

지혜 있는 이가 부지런히 정진하면
비록 젊더라도 이는 늙은이요
게으르며 지혜가 없으면
비록 늙더라도 이는 젊은이입니다.

“당신은 지금 승가를 헤아리고 있었으니, 이야말로 큰 실수입니다. 마치 한 손가락으로 큰 바다 밑을 측량하여 알려고 했으니, 지혜로운 이의 웃음거리입니다.

당신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비록 작다 하더라도 업신여길 수 없다는 네 가지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태자(太子)는 비록 작다 하더라도 장차 국왕이 될 것이므로 이는 업신여길 수 없고, 독사의 새끼는 비록 작다 하더라도 그 독은 사람을 죽일 수 있으므로 역시 업신여길 수 없으며, 작은 불은 비록 미미하다 하더라도 산과 들을 태울 수 있으므로 또 업신여길 수 없고, 사미(沙彌)는 비록 어리다 하더라도 거룩한 신통을 얻을 것이므로 가장 업신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네 가지의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암라 열매[菴羅果]는 여물지 않았으면서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익었으면서 여물지 않은 것 같기도 하며, 여물지 않았으면서 여물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익었으면서 익은 것 같기도 한 것처럼 부처님의 제자도 역시 그와 같아서 거룩한 공덕을 성취했으면서도 위의(威儀)와 언어(言語)는 착한 사람 같지 않은 이가 있고 위의와 언어는 착한 사람 같으면서도 거룩한 공덕은 성취하지 못한 이가 있으며, 위의와 언어는 착한 사람 같지 않으면서 거룩한 공덕도 아직 성취 못한 이가 있고 위의와 언어는 착한 사람 같으면서 거룩한 공덕도 성취하는 이가 있습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 승가를 저울질하려 하는지요? 당신이 만일 승가를 헐뜯고자 한다면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을 헐뜯는 것이라 당신이야말로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 추궁할 수는 없고 앞으로는 착한 마음으로 모든 의심이나 뉘우침을 제거하고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성인들은 헤아릴 수 없고
위의로써도 알기 어려우며
성바지[族姓]로써도 헤아릴 수 없고
많은 견문[多聞]으로써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위덕(威德)으로써도 헤아릴 수 없고
늙은 나이로써도 알지 못하며
엄숙한 용모로도 헤아릴 수 없고
말재주로써도 알지 못합니다.

성인들은 큰 바다의 물이요
공덕 때문에 심히 깊습니다.

부처님은 온갖 일로써 승가를 찬탄하셨으며
보시함이 적더라도 많은 과보를 얻습니다.이 셋째 보배[第三寶]의 명성 멀리 들리나니
이 때문에 승가에게 공양해야 합니다.

늙고 젊음으로 분별해도 안 되고
견문(見聞)과 명암(明闇)으로도 분별하지 마십시오.마치 사람이 숲을 구경할 제
이란(伊蘭)ㆍ첨복(瞻蔔)ㆍ살라(薩羅)를 분별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대 승가를 염하건대 이처럼 해야 하나니
어리석음으로써 성인을 분별하지 마십시오.


마하가섭(摩訶迦葉)이 출가할 때에
납의(納衣)의 값어치는 10만금(萬金)이었으나
걸인의 하천한 옷을 만들려고
낡은 것을 구하자 얻지 못했습니다.

성인들의 승가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맨 아래의 작은 복전[小福田]을 구하여도
베푼 것보다 10만 배의 과보를 받나니
그만 못한 것[不如]을 구하면 얻을 수 없습니다.

뭇 승가는 큰 바닷물이요
결성된 계율[結戒]은 그 물가이니
만일 계율을 깨뜨린 이 있으면
끝내 승의 범주[僧數]에 들지 못함은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다의 물이
시체와 함께 묵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단월은 이런 일을 듣고 또 이런 신통력을 보고서 몸이 놀라서 털이 곤두서므로 합장하고 모든 사미들에게 아뢰기를 “모든 성인들이시여, 저는 이제 참회합니다. 저는 범부라 마음에 항상 죄를 품었었습니다. 저에게는 조그만 의심이 있으니 이제 청하며 묻고자 합니다”고 하며 게송으로 말했다.

대덕이시여, 이미 지난 날 품었던 의심인데
저는 이제야 만나게 되었으니
만일 다시 묻지 아니한다면
어리석음 중에서도 큰 어리석음이겠습니다.

모든 사미들이 말하기를 “그대는 묻고 싶으시면 물으십시오. 우리는 들은 바로써 대답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단월은 묻기를 “불보(佛寶) 가운데 믿는 마음이 청정하고 승보(僧寶) 가운데 믿는 마음이 청정하면 그 어느 것의 복이 더 뛰어납니까”라고 했다.
사미들이 대답했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승보와 불보에 많고 적음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어느 때에 사바제(舍婆提)에서 걸식을 하실 적에 바라타서(婆羅埵逝)165)라는 성을 가진 바라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자주 그의 집으로 가셔서 걸식을 하자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사문이 무엇 때문에 자주 오는 것일까. 마치 그에게 빚을 진 것과도 같구나’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때맞추어 비가 자주 내리면
오곡(五穀)이 잘 여물며
복의 업을 자주 닦으면
자주 그 과보를 받는다.

자주 태어나는 법을 받기 때문에
자주 죽음을 받게 되나니
성인의 법을 자주 닦아 이루면
그 누가 자주 나고 또 죽겠느냐.


바라문은 이 게송을 듣고 나서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큰 성인이시구나. 나의 마음을 자세히 알고 계시니 말이다’고 하고는 부끄러워하면서 발우를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을 가득히 담아다 부처님께 올렸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고 말씀하시되 ‘내가 게송을 말한 까닭에 이 음식을 얻은 것이므로 나는 먹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라문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음식을 누구에게 주어야 하겠습니까’고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나는 하늘과 사람으로서 이 밥을 소화할 수 있는 이를 보지 못하노라. 그대가 가지고 가서 풀이 적은 땅이나 벌레 없는 물속에다 놓아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밥을 가져다 벌레 없는 물속에다 놓아두었습니다. 그러자 물이 곧 크게 끓어오르고 연기와 불이 함께 나오는 것이 마치 이글거리는 큰 쇳덩이를 던져 넣은 것 같았습니다.
바라문은 그것을 보고 놀라 두려워하면서 ‘전에 없던 일이로다. 음식 속에서까지 신력(神力)이 이러하다니’라고 하였습니다.
도로 부처님께로 와서 부처님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참회하면서 출가하여 계(戒) 받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어서 오너라’고 하시니, 즉시 수염과 머리칼이 저절로 떨어지고 곧 사문이 되었으며 점점 번뇌를 끊고 아라한의 도를 얻었습니다.
또 마하교담미(摩訶憍曇彌)166)가 있었는데 금빛으로 된 상하의 보배 옷을 부처님께 바치자 부처님은 뭇 대중이 수용할 수 있음을 아시고 교담미에게 말씀하시되 ‘이 위아래 옷을 대중 승가에게 가져다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불보와 승보의 복은 많고 적음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월이 말하기를 ‘만일 부처님께 보시할 것을 스님이 능히 소화하고 받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바라타서 바라문의 밥은 스님네로 하여금 먹게 하지 않았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미들은 대답하기를 ‘스님들의 큰 힘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밥이 물속에 있으면서 큰 신력이 있음을 보지 못했다면 스님들의 힘이 큰 줄을 모를 것이고, 만일 부처님께 보시한 물건을 스님들이 받을 수 있다면 곧 스님들의 힘이 큰 줄 아는 것입니다. 비유하건대 마치 약사(藥師)가 독약을 시험하려고 먼저 닭에게 주어서 닭이 먹고 즉시 죽은 뒤에 자신이 먹는다면 약사의 위력이 더욱 큰 줄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단월은 다음과 같이 아셔야 합니다.”


사람이 부처님을 사랑하고 공경한다면
또한 승가를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리.
분별이 있어서는 안 되나니
똑같이 다 보배[寶]이기 때문이라네.

그때에 단월은 이런 일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저 아무개는 오늘부터 만일 승의 범주[僧數]에 드는 이가 있으면 작은 이거나 큰 이거나 간에 일심으로 믿고 공경하면서 감히 분별하지 않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사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마음으로 위없는 복전을 믿고 공경하시니, 오래지 않아 도를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많은 견문과 계율을 지니고
지혜와 선정 두루 갖춘 이면
모두가 승가의 수효에 들어감이
온갖 물이 바다로 돌아감과 같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온갖 약초(藥草)가
설산(雪山)에 의지하고
백곡(百穀)과 여러 초목도
모두 땅에 의지하듯이
온갖 모든 착한 사람들은
모두 승가의 범주 안에 있다네.

또한 그대들은 일찍이 부처님께서 장귀신장군(長鬼神將軍)167)에게 아니로타(阿泥盧陀)168)와 난제(難提)169)와 가시미라(迦翅彌羅)170)의 이 세 선남자(善男子)를 칭찬하신 것을 듣지 않으셨는지요? 곧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만일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들이 일심으로 이 셋의 선남자를 염하면 오랜 세월 동안 한량없는 이익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니, 이러한 일로 봐서도 갑절 더 승가를 믿고 염해야 합니다.
이 세 사람은 승가라 하지 않았으면서도 부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염하면 이러한 과보가 있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일심으로 청정하게 승가를 염함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단월은 힘이 닿는 대로 승가의 이름을 염해야 합니다.
이러한 게송이 있습니다.”

이 모든 성인들은
뛰어나고 용맹한 군사가 되어
마왕 적군을 꺾어 멸하나니
이 벗으로 열반에 이른다네.

사미들은 단월을 위하여 갖가지로 승가의 거룩한 공덕을 말해 주었다. 단월은 듣고 나서 크건 작건 온 집안이 모두 4제(諦)를 보고는 수다원(須陀洹)의 도를 얻었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마땅히 일심으로 승가를 염해야 한다.
염계(念戒)라고 했는데, 계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곧 유루의 계[有漏戒]171)와 무루의 계[無漏戒]172)이다.
유루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율의계(律儀戒)173)며, 둘째는 정공계(定共戒)174)이다.
수행하는 이는 처음 배울 때 이 세 가지의 계율을 염하며, 이 세 가지를 배운 뒤에는 다만 무루의 계만을 염한다.
이 율의계는 능히 모든 악(惡)을 제 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며, 마르고 썩고 꺾이어 줄어들게 한다. 선정과 계율은 능히 모든 번뇌를 차단하나니, 왜냐하면 안[內]의 즐거움을 얻은 까닭에 세간의 쾌락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루의 계는 능히 모든 악과 번뇌의 근본을 뽑아버린다.
【문】 어떻게 계율을 염해야 하는가?
【답】 먼저 염승(念僧)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부처님은 마치 의왕(醫王)175)과 같고 법은 좋은 약과 같으며, 승가는 병든 이를 돌보는 사람과 같고 계율은 약을 먹을 때의 금기(禁忌)와 같다.
수행하는 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일 금기를 따르지 않는다면 3보(寶)가 나에게는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또 마치 길잡이와 같아서 좋은 길을 지시해 주는데도 길을 가는 이가 따르지 않는다면 길잡이에게는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계율을 염해야 하리라”고 한다.
또 이 계율은 온갖 착한 법이 머무르는 곳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백곡과 약나무가 땅에 의지하여 나는 것처럼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면 모든 깊은 선정과 참 모습[實相]의 지혜를 생장시켜 준다. 또한 이것은 출가한 사람의 첫 문이요 온갖 출가한 사람이 의지할 곳이며 열반에 이르는 첫째 인연이다.
마치 “계율을 지니기 때문에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고 나아가 해탈과 열반을 얻는다”고 말한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는 청정한 계율을 염하나니, 곧 이지러지지 않는 계율[不缺戒]과 깨지지 않는 계율[不破戒]과 뚫리지 않는 계율[不穿戒 ]과 섞이지 않는 계율[不雜戒]과 자재로운 계율[自在戒]과 집착하지 않는 계율[不著戒]과 지혜 있는 이가 칭찬하는 계율[智者所讚戒]이 그것이다.
모든 허물과 틈이 없으므로 청정한 계율이라 한다.
어떤 것을 이지러지지 않는 계율[不缺戒]이라 하는가? 곧 다섯 가지 계율[五衆戒] 중에서 네 가지 중한 계율[四重戒]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중한 것을 범하면 이것을 이지러졌다[缺犯] 하고 그 밖의 죄는 바로 깨뜨렸다[破]고 한다.
또 몸의 죄[身罪]는 이지러졌다 하고 입의 죄[口罪]는 깨뜨렸다 하며, 또 큰 죄는 이지러졌다 하고 작은 죄는 깨뜨렸다고 한다.
착한 마음으로 열반에 회향(廻向)하여
번뇌[結使]의 갖가지 나쁜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뚫리지 않는 계율[不穿戒]이라 한다.
열반과 세간의 이 두 곳을 향하면 이것을 섞여 따르는 계율[雜隨戒]이라 한다.
바깥 대상[外緣]을 따르지 않고 마치 자재한 사람처럼 매인 데가 없이 이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애욕의 번뇌에 구속 받지 않으면 이것을 자재한 계율[自在戒]이라 한다.
계율에 대하여 탐애와 교만 등의 모든 번뇌를 내지 않고, 계율의 참 모습[實相]을 알면서도 계율을 취하지도 않아야 한다. 만일 이 계율을 취한다면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옥살이를 하면서 차꼬176)와 수갑을 차고 구속되어 있다가 비록 사면(赦免)을 받아 풀려났다 하더라도 다시 쇠로 된 수갑을 차게 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은애(恩愛)의 번뇌에 매여 있는 것이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고 비록 출가했다 하더라도 금계(禁戒)에 애착을 두면 마치 쇠로 된 수갑을 차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행하는 이가 만일 계율은 곧 무루(無漏)의 인연이라는 것을 알아 집착을 내지 않으면 그것이 곧 해탈이어서 속박됨이 없나니, 이것을 집착하지 않는 계율[不著戒]이라 한다.
모든 부처님ㆍ보살ㆍ벽지불ㆍ성문에게 칭찬받는 계율이 있으니, 만일 이 계율을 행하고 이 계율을 수용한다면 이것을 지혜 있는 이가 칭찬하는 계율[智所讚戒]이라 한다.
외도의 계율이란 소의 계[牛戒]177)ㆍ사슴의 계[鹿戒]178)ㆍ개의 계[犬戒]179)ㆍ나찰귀의 계[羅刹鬼戒]180)ㆍ벙어리의 계[啞戒]181)ㆍ귀머거리의 계[聾戒]182) 등이니, 이와 같은 계율은 지혜 있는 이의 칭찬을 받지 못하며 헛되이 고생만 하고 착한 과보가 없다.
또 지혜 있는 이에게 칭찬을 받는다 함은, 세 가지 계율 가운데서 무루의 계[無漏戒]에 대해 깨뜨리지 않고 무너뜨리지도 않으면서 이 계율에 의거하여 진실한 지혜를 얻으면 이것이 바로 성인들이 칭찬하는 계율이다.
무루의 계율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바른 말[正語]과 바른 행위[正業]와 바른 생활[正命]의 세 가지 업이다. 이 뜻은 8성도(聖道) 중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이 가운데에서 자세히 설명해야 하리라.
【문】 만일 지계(持戒)가 선정의 인연이고 선정이 지혜의 인연이라면, 8성도 중에서 무엇 때문에 지혜를 맨 앞에다 두고 계율은 중간에 두었으며 선정은 뒤에다 두었는가?
【답】 길을 가는 법은 마땅히 먼저 눈으로 그 길을 본 뒤에 가야 하고, 갈 때에는 정성을 다해야 하며, 정성을 다하면서 갈 때에는
항상 길잡이가 가르쳐 준 대로 갈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는 일심으로 길을 걸어가되 길이 아닌 데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바른 소견[正見]도 역시 그와 같아서 먼저 바른 지혜로써 관한다면 5수중(受衆)은 모두가 괴로운 것이니 이것을 괴로움[苦]이라 하고, 괴로움은 애욕 등의 모든 번뇌가 화합하여 생기므로 이것을 쌓임[集]이라 하며, 애욕 등의 번뇌가 사라지면 이것을 열반이라 하고, 이러한 여덟 갈래[八分]를 관하면 도(道)라고 하나니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때에 마음을 안정시키면서 “세간은 허망하므로 마땅히 버려야 하고 열반은 진실한 법이므로 취해야 한다” 함을 알면서 쾌히 이 일을 결정하는 것을 바른 소견이라 한다.
이런 일을 지견(知見)하는 마음의 힘이 아직 크지 못하거나 아직 행하지 못한 채 생각하고 헤아려서 바른 소견을 발동시켜 힘을 얻게 하는 것을 바른 사유[正思惟]라 한다.
지혜가 이미 일어났고 말로써 펴려고 하기 때문에 다음에는 바른 말[正語]이며, 바른 행위[正業]와 바른 생활[正命]이다.
계율을 행할 때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고 색정(色定)ㆍ무색정(色無色定)에 머무르지 않게 하면 이것을 바른 방편[正方便]이라 한다.
이 바른 소견으로써 4제(諦)를 관하며 항상 기억하고 잊지 않으면서 “온갖 번뇌는 바로 도적이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 바른 소견 등은 바로 나의 참된 벗이니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하나니, 이것을 바른 기억[正念]이라 한다.
4제 안에서 마음을 가다듬어 흩어지지 않고 색정ㆍ무색정으로 향하지 않게 하면서 일심으로 열반으로 향하면 이것을 바른 선정[正定]이라 한다.
처음에 착한 유루[善有漏]를 얻으면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183) 중의 이치라 하는데 차례로 더욱 나아가 처음과 중간과 나중의 마음이 무루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빨리 하나의 마음속에 갖추어지면 앞뒤와 분별과 차례가 없게 된다.
바른 소견은 바른 생각ㆍ바른 방편ㆍ바른 기억ㆍ바른 선정과 상응하며 세 가지의 계율[三種戒]은 이 다섯 갈래[五分]를 따라 행해진다.
바른 소견[正見]은 좋고 추함[好醜]을 분별하면서 이익을 일[事]로 삼고, 바른 사유[正思惟]는 바른 소견이 발동하는 것을 일로 삼으며, 바른 말[正語] 등은 이 지혜와 모든 공덕을 지니면서 흩어지거나 잃지 않게 하고,
바른 방편[正方便]은 채찍질을 하여 빨리 나가면서 쉬지 않게 하며, 바른 기억[正念]은 일곱 가지 일[七事]을 행해야 할 이가 기억하면서 잊지 않게 하고, 바른 선정[正定]은 마음이 청정하여 흐리지도 않고 어지럽지도 않게 하면서 바른 소견으로 하여금 일곱 가지 갈래를 이룰 수 있게 하나니, 마치 바람이 없는 방안에 등을 켜면 곧 그 광명이 환히 비추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무루의 계율은 8성도 안에 있으며 또한 지혜 있는 이의 칭찬을 받게 된다.
【문】 무루의 계는 마땅히 지혜 있는 이의 칭찬을 받아야겠지만 유루의 계율[有漏戒]은 무엇으로써 칭찬하겠는가?
【답】 유루의 계율은 무루의 계율과 비슷하며 무루에 따라 똑같이 인연을 행하나니, 이 때문에 지혜 있는 이는 이 둘을 합쳐서 칭찬한다. 마치 도적 중의 한 사람이 그곳을 배반하고 나에게로 돌아와 귀순하는 것과 같으니, 그가 비록 도적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나에게로 왔으므로 나는 그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들을 쳐부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모든 번뇌의 도적이 삼계(三界)의 성(城) 안에 머물러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루의 계율의 선근(善根)과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184)은 다른 유루의 법과 다르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가 수용(受用)하여 이 인연 때문에 모든 번뇌의 도적을 물리치고 고법인(苦法忍)인 무루의 법재(法財)를 얻나니, 이 때문에 지혜 있는 이가 칭찬하게 된다.
이것을 염계(念戒)185)라 한다.
염사(念捨)186)라 함은, 두 가지의 버림[捨]이 있나니, 첫째는 보시의 버림[施捨]이고, 둘째는 모든 번뇌를 버림[捨諸煩惱]이 그것이다.
보시의 버림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재물의 보시[財施]요, 둘째는 법의 보시[法施]이다. 이 세 가지의 버림이 화합하는 것을 일컬어 버림이라 한다.
재물의 보시는 바로 온갖 착한 법의 근본이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가 생각하기를 “위의 네 가지 염[四念]의 인연 때문에 번뇌의 병이 낫게 된다. 이제 어떠한 인연으로 이 네 가지 염을 얻을까”라고 하나니, 이것은 전생이나 지금 세상에서 3보(寶)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시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중생은 비롯함이 없는 세계에서 3보에 대한 보시를 몰랐기 때문에 복이 모두 다하여 없어졌지만 이 3보에는 한량없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시도 역시 다하지 않고 반드시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처음 발심할 때에 모두가 적건 많건 간에 보시로써 인연을 삼으셨다.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보시는 바로 처음 도를 돕는[助道] 인연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또 사람의 목숨은 무상하고 재물은 번개와 같다. 설령 사람이 구걸하지 않아도 오히려 먼저 주어야 하거늘 하물며 구걸하는데도 주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도를 돕는 인연을 지어야 한다.
또 재물 이것은 갖가지 번뇌와 죄업(罪業)의 인연이고, 지계와 선정과 지혜와 갖가지 착한 법은 바로 열반의 인연이다. 이 때문에 재물은 오히려 스스로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좋은 복전 안인데 어찌 베풀지 않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두 사람의 형제와 같다. 그들은 각각 10근(斤)씩의 금을 지고 길을 가는데 그 길에는 다른 일행이 없었다. 형은 생각하기를 “내가 왜 아우를 죽이고 금을 다 빼앗지 않는 것일까. 이 넓은 길에서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란 없다”고 했다. 아우도 역시 “형을 죽이고 금을 다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형제가 저마다 나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과 보는 눈짓이 달랐으므로 형과 아우는 이내 스스로 깨닫고서 도리어 뉘우치는 마음을 내며 “우리들은 사람이 아니다. 금수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형제로 태어났으면서 조그마한 금 때문에 악심을 일으키고 있다니”라고 했다.
형제가 깊은 물가에 이르자 형은 금을 물속에다 던져 버렸다. 그러자 아우가 말하기를 “참으로 잘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아우도 이내 금을 물속에다 던져 버렸다. 그러자 형도 말하기를 “참으로 잘했도다” 했다. 그리고는 형제가 서로 “무엇 때문에 잘했다고 했는가?”라고 물었고, 저마다 대답하기를 “나는 이 금 때문에 착하지 않은 마음을 내어 한 사람을 죽이려 했었는데 이제 그것을 다 버렸기에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했으니, 두 사람의 말이 같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은 악한 마음의 인연이 됨을 아나니, 언제나 스스로 버려야 한다. 그러니 하물며 보시를 하면 큰 복을 얻게 되거늘 어찌 보시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게송이 있다.

보시는 보배 광[寶藏]이라 하고
또한 착하고 친한 벗이라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가 이익되며

이를 파괴할 수 있는 이가 없다.

보시는 좋고 촘촘한 우산이 되어
굶주림과 갈증의 비를 막아 주며
보시는 단단하고 견고한 배가 되어
가난[貧窮]의 바다를 건너게 한다.

인색함은 흉하고 쇠(衰)한 모양이라
그 때문에 근심과 두려움이 생기나
보시의 물로써 그것을 씻어버리면
곧 복과 이익이 생겨난다.

인색하여 옷과 음식을 아까워하면
종신토록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나니
비록 재물이 있다 하더라도
빈곤한 이와 다름이 없다.

인색한 사람이 사는 집은
비유하건대 마치 무덤과 같나니
구하는 이는 멀리서 그를 피하며
끝내 그곳으로 향하는 이가 없다.

이와 같이 간탐을 부리는 사람은
지혜 있는 이가 꺼리나니
목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더라도
죽은 이와 다름이 없다.

인색한 사람은 복과 지혜가 없어
보시에 대한 굳은 약속도 없다가
죽음의 구덩이에 떨어지려 할 적에
아까운 마음에 한탄하며 후회한다.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 가야 하고
근심과 후회의 불이 몸을 태우리니

보시하기 좋아한 이는 편안해서
끝내 이러한 고통은 없다.

사람으로서 보시를 닦은 이는
이름이 시방에 가득히 차고
지혜로운 이의 애경(愛敬)을 받으며
대중에 들어가도 두려워함이 없고
목숨을 마치면 천상에 나며
오랜 뒤엔 반드시 열반을 얻는다.

이러한 갖가지로 간탐을 꾸짖고 보시를 찬탄하나니, 이것을 바로 재물의 보시를 염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법의 보시를 염하는가?
곧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법의 보시는 이로움이 심히 크다. 법을 보시하는 인연 때문에 온갖 부처님의 제자들이 도를 얻는다”고 한다.
또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보시 가운데서 법의 보시가 으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재물 보시의 과보는 한량이 있지만 법의 보시는 과보가 한량이 없기 때문이다. 재물의 보시는 욕계(欲界)의 과보이지만 법의 보시는 삼계(三界)의 과보요 또한 삼계를 벗어나는 과보이다.
만일 명예와 재물의 이익과 세력을 구하지 않고 다만 부처님 도를 배우기 위하여 넓고 큰 자비로써 중생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제도한다면 이것을 청정한 법의 보시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시장에서 장사하는 법과 같게 된다.
또 재물의 보시는 많이 베풀수록 재물이 줄어들지만 법의 보시는 많이 베풀수록 법이 더욱 늘어난다.
재물의 보시는 바로 한량없는 세상 동안에 쓰던 오래된 법이지만,
법의 보시는 성인의 법에서 처음 오는 것이라 아직 얻지 못했으므로 새로운 법이라 한다.
재물의 보시는 다만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더운 등의 괴로움만을 구제할 수 있지만, 법의 보시는 98종류의 모든 번뇌의 병을 제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재물의 보시와 법의 보시를 분별하나니, 수행하는 이는 마땅히 법의 보시를 염해야[念法施] 한다.
【문】 어떤 것이 법의 보시인가?
【답】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부경(部經)187)을 청정한 마음으로 복덕을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말해주는 것을 바로 법의 보시라 한다.
또 신통의 힘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도(道)를 얻게 함이 있으면 역시 법의 보시라 한다. 마치 『망명보살경(網明菩薩經)』188)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서 도를 얻는다든가 천상에 태어난다면 이와 같은 것은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로 하여금 도를 얻게 하였기 때문에 역시 법의 보시라 한다.
이 법의 보시에서는 마땅히 중생의 심성에 번뇌의 많고 적음과 지혜의 예리함과 둔함을 관하여 그들에게 각자 이익이 되는 바를 좇아 법을 설해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병을 따라 약을 먹게 하면 이익이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음욕이 많고, 어떤 이는 성을 많이 내고, 어떤 이는 어리석음이 많다. 어떤 이는 두 가지가 섞여 있으며, 어떤 이는 세 가지가 섞여 있기도 하다. 음욕이 많으면 그를 위하여 부정관(不淨觀)을 말해 주고, 성을 잘 내는 이면 그를 위하여 인자한 마음[慈心]을 말해 주며, 어리석음이 많은 이면 그를 위하여 깊은 인연(因緣)을 말해 준다. 두 가지가 뒤섞인 이면 두 가지의 관을 다 말해 주며, 세 가지가 뒤섞인 이면 세 가지의 관을 다 말해 준다.
만일 사람이 병을 알지 못하고 잘못 약을 주게 되면 병이 더욱 악화된다.
만일 중생의 모양에 집착한 이면 그를 위해 단지 5중(衆)만이 있고 그 안에는 나[我]가 없다고 말해 주고, 만일 중생의 모양이 없다고 말하는 이면 곧 그를 위해 5중이 상속하고 있음을 말해 주니 단멸론[斷滅]189)에 떨어뜨리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다. 부귀와 쾌락을 구하는 이면 그를 위하여 보시를 말해 주고, 천상에 나기를 바라는 이면 그를 위하여 계율 지닐 것을 말해 준다.
인간 세계에서 가난을 겪음이 많은 이면 그를 위하여 천상의 일을 말해 주고, 괴로움을 겪으면서 집에 있는 이면 그를 위하여 출가하는 법을 말해 주며, 돈과 재산에 집착하여 집에서 사는 이면 그를 위하여 재가(在家)의 5계법(戒法)을 말해 주고,
만일 세간을 좋아하지 않는 이면 그를 위하여 무상(無常)ㆍ무아(無我)ㆍ열반(涅槃)의 세 가지 법의 징표[法印]를 말해 준다.
곧 경법에 의지하고 따르면서 스스로 도리를 연설하고 비유와 장엄으로 법을 보시하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말해 준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이로움 때문에 마땅히 법의 보시를 염해야 한다.
번뇌를 버린다[捨煩惱] 함은 3결(結) 내지 98사(使) 등을 모두 끊어 없애는 것이니, 이것을 버린다[捨]고 한다.
이러한 법을 버림을 염하는 것은 마치 독사를 버리는 것과 같고 마치 차꼬와 수갑[桎梏]을 버리는 것 같아서 안온함과 기쁨을 얻게 된다.
번뇌를 버리는 염은 또한 염법(念法) 중에 들어간다.
【문】 만일 염법 중에 든다면 지금 무엇 때문에 다시 설명하는가?
【답】 모든 번뇌를 버린다는 이 법은 미묘하고 얻기 어려우며 위없고 한량없나니, 이 때문에 다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또 염법(念法)과 염사(念捨)는 다르다. 염법은 부처님 법이 미묘하여 모든 법 중에서 으뜸감을 염하는 것이고, 염사는 모든 번뇌의 죄악을 염하면서 그것을 버리는 것을 쾌락으로 삼는다. 그 행상(行相)이 구별되나니 이것이 다르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수행하는 이는 버림[捨]을 염해야 한다.
염사란 처음 선지(禪智)를 배우는 가운데 증상만(增上慢)190)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게끔 하는 것이다.
염천(念天)191)이란 사천왕천(四天王天)에서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문】 부처님의 제자는 마땅히 일심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염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하늘[天]을 염하는가?
【답】 보시한 업의 인연과 과보 때문에 천상의 부귀와 즐거움을 누리는 것임을 알 수 있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하늘을 염한다.
또 이 여덟 가지 염[八念]을 부처님께서 스스로 인연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을 염하는 이는 마땅히 생각하기를 ‘사천왕천이 있는데 이 하늘은 다섯 가지 착한 법[五善法]의 인연 때문에 그 안에 태어난 것이다. 즉 죄와 복[罪福]을 믿고 계율을 받아 지녔으며, 착한 법[善法]을 듣고 보시(布施)를 닦았으며 지혜(智慧)를 배운 것이다. 나에게도 역시 이 다섯 가지 법이 있다’고 해야 하느니라.”
이 때문에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하늘들은 이 다섯 가지 법 때문에 부귀와 쾌락이 있는 곳에 태어났으니, 나에게도 역시 이것이 있으므로
내가 그곳에 태어나고자 하면 역시 태어날 수도 있지만 나는 하늘의 복은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한다. 타화자재천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문】 삼계(三界) 중에는 청정한 하늘이 많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욕천(欲天) 만을 염하는 것인가?
【답】 성문의 법 중에서는 욕계천을 염할 것을 말씀하셨고, 마하연(摩訶衍) 중에서는 온갖 삼계의 하늘을 염할 것을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이가 아직 도를 얻지 못했을 때에는 혹 마음으로 인간의 5욕락에 집착하기도 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하늘을 염하라 하신 것이다.
만일 능히 음욕을 끊는다면 위의 두 세계[二界]192)의 하늘에 태어나지만, 만일 음욕을 끊지 못했다면 곧 6욕천(欲天)193)에 태어나나니, 이 안에는 묘하고 미세하며 청정한 5욕이 있다. 부처님은 비록 사람들이 다시 태어날 때에 5욕을 받게 하고 싶지는 않으나 어떤 중생은 열반에 들기에 적당하지 않는 이도 있으므로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하늘을 염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국왕의 아들이 높고 위험한 곳에 서 있어서 구호할 수도 없는데, 그가 스스로 땅에 떨어지려 하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서 두꺼운 솜이불을 깔아 놓아 떨어져도 죽지 않고 땅에 약간만 부딪치게 만드는 것과 같다.
또 네 가지 하늘이 있나니, 명천(名天)194)과 생천(生天)195)과 정천(淨天)196)과 생정천(生淨天)197)이 그것이다.
명천이라 함은 마치 지금의 국왕을 천자(天子)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생천이라 함은 사천왕천으로부터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까지이다.
정천이라 함은 인간 가운데 태어난 모든 성인들을 말한다.
생정천이라 함은 삼계의 하늘 가운데 태어난 모든 성인들로서 이른바 수다원(須陀洹)과 가가(家家)와 사다함(斯陀含)과 일종(一種)이니, 혹은 천상에서 아나함(阿那含)과 아라한의 도를 얻기도 한다. 생정천은 색계(色界)에서는 5종의 아나함이 있는데 이 세간에는 돌아오지 않고 곧 그곳에서 아라한이 된다. 무색계(無色界) 안에서는 1종의 아나함이 색계를 여의고 무색계에 태어나서 이 안에서 무루의 도를 닦고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드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하늘인 생천과 생정천을 염하니,
이와 같은 하늘을 염하는 것을 바로 염천(念天)이라 한다.
염안나반나(念安那般那)198)라 함은, 마치 『선경(禪經)』 중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염사(念死)라 함은 두 가지 죽음이 있나니, 첫째는 저절로 죽는 것[自死]이고, 둘째는 다른 인연으로 죽는 것[他因緣死]이다. 이 두 가지 죽음에 대하여 수행하는 이는 항상 염해야 하나니, 이 몸은 설령 다른 이가 죽이지 않는다 해도 반드시 저절로 죽고 말 것이다. 이러한 유위(有爲)의 법에서는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사이에도 불사를 믿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이 몸은 온갖 시간 안에서도 모두 죽어가고 있고 늙기까지 기다리지 않나니, 이 갖가지의 근심스럽고 괴롭고 흉하고 쇠한 몸을 믿고서 안온하게 죽지 않으리라고 희망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마음은 어리석은 사람이 내는 것이다.
몸 속에는 4대(大)가 저마다 서로 해치고 있나니, 마치 사람이 독사가 든 상자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안온하기를 바라겠는가. 내쉰 숨을 도로 들이쉴 것을 보장하거나 들이쉰 숨을 도로 내쉴 것을 보장하거나 잠을 자면서 다시 깨날 것을 보장하기란 모두 어렵다. 왜냐하면 이 몸의 안팎에는 원한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게송이 있다.

태(胎) 안에서 죽기도 하고
태어날 때에 죽기도 하며
한창 나이에 죽기도 하고
다 늙어서 죽기도 한다.

또한 마치 과일이 익어갈 때에
갖가지 인연으로 떨어짐과 같다.

이 죽음이란 나쁜 도적을
면하고 여의기를 구해야 하나

이 도적은 신용하기 어려우며
버리는 때에 곧 안온해진다.

가령 큰 지혜 있는 사람으로서
위덕과 힘이 위없다 해도
앞도 없고 또한 뒤도 없으며
지금에도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없다.

교묘한 말에도 용서함이 없고
청하고 구하여도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막으면서 겨루는 곳에서도
이를 면할 수 있는 이는 없다.또한 청정한 계율을 지니면서
정진해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의 도적은 사정이 없어서
오는 때엔 그를 피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는 무상하고 위태롭고 연약한 목숨에 대하여 믿으면서 살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마치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위하여 죽음의 모습[死相]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199)
한 비구가 가사를 한쪽 어깨에 걷어 올리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능히 이 죽음의 모습을 닦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닦고 있느냐?”
그 비구가 대답했다.
“저는 7년을 더 살게 될 것을 바라지 않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방일하면서 죽음의 형상을 닦고 있구나.”
또 어떤 비구는 “저는 7개월을 더 살게 될 것을 바라지 않나이다”고 했고, 또 어떤 비구는 “7일”이라 말하고, 또 어떤 비구들은 “6일, 5일, 4일, 3일, 2일 1일을 더 살게 될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들도 모두가 방일하게 죽음의 형상을 닦고 있다”고 하셨다.
또 어떤 비구는 “아침부터 밥 때까지”라고 말했다.
또 어떤 비구는 “한 식경(食頃)까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도 역시 방일하게 죽음의 형상을 닦고 있다”고 하셨다.
어느 한 비구가 가사를 한 어깨에 메고 부처님께 아뢰기를 “저는 내쉰 숨을 도로 들이 쉬게 될 것을 바라지 않고 들이쉰 숨을 도로 내쉬게 될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참으로 이야말로 죽음의 모양을 닦는 것이요 방일하지 않는 것이니라. 비구여, 온갖 유위의 법은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져 머무를 때가 심히 적나니, 그것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지혜 없이 수행하는 이를 속이느니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죽음의 모양을 염하는 것이다.
【문】 법은 바로 3세(世)의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거늘 무엇 때문에 염불(念佛)이 앞에 있으며 이 여덟 가지 염[八念]은 그 다음 차례로 되어 있는가?
【답】 이 법이 비록 시방과 3세(世)의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은 이 법을 연출할 수 있고 그 공이 크시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설산(雪山) 중에는 보배산이 있고 이 보배산 꼭대기에는 여의보주(如意寶珠)200)와 갖가지의 보물이 많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올라가다가 혹 그 중도에서 돌아오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 가까이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한 큰 덕이 있는 국왕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어 그들을 위하여 큰 사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인민들은 크건 작건 심지어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까지도 모두 산을 올라갈 수 있었으므로 마음대로 여의주 등의 갖가지 보물을 가지고 온 것과 같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세간의 모든 법의 실상(實相)의 보배산은 96종의 이도(異道)로서는 모두 얻지 못하며 나아가 범천왕(梵天王)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의 실상을 구한다 해도 역시 구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밖의 사람들이겠는가.
부처님은 큰 자비로써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6바라밀(波羅密)을 구족하고 온갖 지혜방편을 얻어 12부경(部經)ㆍ8만 4천의 법 무더기 사다리를 말씀하셨으니, 아야교진여(阿若憍陣如)와 사리불(舍利佛)과 목건련(目揵連)과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일곱 살 사미인 소마(蘇摩)201)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무루의 법인 근(根)ㆍ역(力)ㆍ각(覺)ㆍ도(道)의 실상을 얻은 것이다.
이 실상이 비록 미묘하다 하더라도 온갖 중생은 모두가 부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얻게 되나니, 이 때문에 염불이 앞에 있고 그 다음에 법을 염[念法]하고 그 다음에 승가를 염[念僧]하는 것이다. 승가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세 번째이며 그 밖의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승가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일컬어 보배[寶]라 한다.
인간 안에서의 보배는 바로 부처님이고 96종의 도법(道法) 안에서의 보배는 바로 부처님의 법이며 온갖 무리 안에서의 보배는 바로 승가이다.
또 부처님의 인연 때문에 법이 세간에 출현했고 법의 인연 때문에 승가가 있다.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나는 어떻게 법보(法寶)를 얻어야 하는가”고 한다. 법보는 승가[僧數] 안에서 얻어지므로 마땅히 온갖 거칠고 세밀한 몸과 입의 나쁜 업[身口惡業]을 제거해야 된다. 그러므로 그 다음으로 지계(持戒)를 말씀하신 것이다.
또 어떻게 분별하여 7중(衆)이 있느냐 하면, 계율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악(惡)을 제거하려 하고, 간탐을 무너뜨리는 까닭에 버림을 염하며, 받는 이로 하여금 쾌락을 얻게 하려는 까닭에 성냄[瞋恚]을 깨뜨리고, 복의 과보를 얻을 것을 믿는 까닭에 삿된 소견을 깨뜨린다.
지계와 보시의 법 안에 머무르면 곧 10선도(善道)에 머물게 되어 10불선도를 여의게 된다.
열 가지 착한 길에는 두 가지 과보가 있나니, 만일 으뜸으로 수행한 이면 정천(淨天)에 태어나게 되고, 중간 정도 수행한 이면 하늘에 태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계율과 보시의 다음에 하늘을 염하는 것이다.
선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두 가지의 하늘에 태어나게 되어 모든 삿된 생각[覺]을 없애고 다만 착한 법만을 쌓아 마음을 한 곳에 거두나니, 이 때문에 하늘을 염하고 다음으로 안나반나(安那般那)를 염한다.
안나반나를 염하면 능히 모든 삿된 생각을 없애버림이 마치 비가 먼지를 가라앉히는 것과 같다.
들숨[入息]ㆍ날숨[出息]을 보면서 몸의 위태함과 연약함을 알고, 숨을 들이쉬고 내쉼으로 말미암아 이 몸이 존립하게 된다. 이 때문에 들숨ㆍ날숨을 염하며[念入出息], 그 다음에는 죽음을 염한다[念死].
또 수행하는 이는 간혹 일곱 가지의 염[七念]이 있음을 믿고 이 공덕에 집착하면서 게으른 마음을 내기도 한다. 이때에는 마땅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죽음의 일이 항상 앞에 있는데 어떻게 게으르게 이 법애(法愛)에 집착하겠는가.
마치 아나율(阿那律)202)이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실 때에 말한 게송과 같다.

유위의 법은 마치 구름과 같나니
지혜로운 이는 믿지 말아야 한다.
무상(無常)이라는 금강(金剛)이 와서
성주산왕(聖主山王)203)을 깨뜨리는구나.

이것을 여덟 가지 염[八念]의 차례라고 한다.
【문】 이것은 성문의 여덟 가지 염을 설명한 것인데, 그렇다면 보살의 여덟 가지 염과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성문은 자기 몸을 위하는 까닭이고 보살은 일체 중생을 위하는 까닭이며, 성문은 오직 늙고 병들고 죽음을 벗어나기 위한 까닭이고 보살은 온갖 공덕을 구족하기 위한 까닭이니, 여기에 차별이 있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역시 말씀하시면서 사리불에게 “보살마하살은 머무르지 않는[不住] 법으로써204)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물러 단바라밀을 구족해야 하며, 나아가 여덟 가지 염에 이르기까지를 구족해야 하나니, 얻을 수 없기[不可得] 때문이다”고 하셨다.
처음에 머물지 않음[不住]이 있고 나중에 얻을 수 없음이 있으니, 이 두 가지 징표로써 다른 것이다. 머물지 않는 일과 얻을 수 없는 일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단주(丹註):8념이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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