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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131 불교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2권

by Kay/케이 2023.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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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2

 

 

대반열반경 제32권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11. 사자후보살품 ⑥

사자후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업이 과보가 결정되어 받는 것이 아니며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면 8성도를 닦을 것인데, 무슨 인연으로 모든 중생이 대반열반을 모두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이 불성이 있다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인데, 어찌하여 8성도를 닦아야 합니까?
세존이시여, 이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병난 사람이 만일 의원과 약과 간병할 사람과 병에 따르는 음식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모두 병이 낫는다. 모든 중생도 그와 같아서 성문ㆍ벽지불ㆍ부처님ㆍ보살ㆍ선지식을 만나서 법을 듣고 성인의 도를 닦거나 만나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성인의 도를 닦지 않거나 간에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된다. 왜냐하면 불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자면 해와 달을 막아서 알다(頞多)산 주변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4대하의 물을 바다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일천제들을 지옥에 이르지 못하게 할 수가 없는 것처럼, 모든 중생도 그와 같아서 능히 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지 못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이치로 모든 중생이 도를 닦지 않더라도 불성의 힘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 성인의 도를 닦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일천체나 4중금(重禁)을 범한 자나 5역죄를 지은 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였다면 마땅히 도를 닦아야 할 것이니 불성을 인하여 반드시 얻게 되는 것이고, 닦음을 인하여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자석(磁石)이 철에서 멀리 있더라도 자석의 힘으로 철이 따라가서 붙는 것과 같이 불성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도를 닦을 필요가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야, 항하 가에 일곱 사람이 있어서 목욕하기 위하여 혹은 도둑이 무서워서 혹은 꽃을 따려고 물에 들어갔다. 첫째 사람은 물에 들어가서 곧 빠졌다. 왜냐하면 기운이 없고 헤엄을 익히지 못한 탓이었다. 둘째 사람은 빠졌다가 도로 솟아오르고 솟았다가 다시 빠졌다.
왜냐하면 기운이 세어서 능히 솟았으나 헤엄을 익히지 못한 탓에 솟았다가 다시 빠진 것이었다. 셋째 사람은 빠졌다가 곧 솟아오르고 솟아서는 빠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몸이 무거웠기 때문에 빠지고 기운이 세기 때문에 솟아올랐고 먼저 헤엄을 익혔으므로 솟아올라서 그대로 떠 있는 것이다. 넷째 사람은 물에 들어가서 빠지고 빠졌다가 도로 솟고 솟아서는 그대로 떠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몸이 무거워서 빠졌고 기운이 세어서 도로 솟고 헤엄을 익혀서 떴으며, 나갈 데를 몰라서 사방을 살펴보았던 것이다. 다섯째 사람은 들어가서는 빠지고 빠졌다가 도로 솟고 솟아서는 떠 있고 떠서는 사방을 살펴보고 곧 나아갔다. 왜냐하면 두려워한 까닭이다. 여섯째 사람은 들어가서는 헤엄쳐 가서 얕은 데에 머물렀다. 왜냐하면 도둑이 가까이 있는지 멀리 있는지 살펴보려 한 까닭이었다. 일곱째 사람은 저 언덕으로 가서 산 위에 오르니 다시 두려움이 없었으며 원수를 멀리 떠나서 매우 쾌락하였다.

선남자야, 생사의 큰 강도 그와 같다. 일곱 가지 사람이 번뇌의 도둑이 무서워서 생사의 강을 건너려고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으나, 출가하고 나서 나쁜 동무를 가까이하여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삿된 법을 받는다. 이른바 중생의 몸은 5음이며 5음은 곧 5대라고 하는데, 중생이 죽으면 5대를 영원히 끊는 것이며 5대를 끊었으므로 선업이나 악업을 닦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선업 악업과 선업 악업의 과보가 없음을 알 아야 한다. 이런 이를 일러 일천체라고 한다. 일천제는 선근을 끊었다는 말이며, 선근을 끊었으므로 생사의 강에 빠져서 다시 나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쁜 업이 중한 탓이며 믿는 힘이 없는 탓이니 항하 가에 사는 첫 번째 사람과 같다.
선남자야, 일천제들은 여섯 가지 인연이 있으므로 3악도에 빠져서 나오지 못한다. 무엇이 여섯인가? 첫째는 나쁜 마음이 성한 첫째는, 둘째는 후세를 보지 못하는 까닭이며, 셋째는 번뇌 익히기를 좋아하는 까닭이며, 넷째는 선근을 멀리 여읜 까닭이며 다섯째는 나쁜 업에 막힌 까닭이며, 여섯째는 나쁜 동무를 가까이한 까닭이다.
또 다섯 가지가 있어서 3악도에 빠지는데,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비구에게 법답지 못한 짓을 한 까닭이며, 둘째는 비구니에게 법답지 못한 짓을 한 까닭이며, 셋째는 제멋대로 승가의 물건을 사용한 까닭이며, 넷째는 어미에게 법답지 못한 짓을 한 까닭이며, 다섯째는 5부승[五部僧]에게 서로 시비를 일으킨 까닭이다.
또 다섯 가지 일이 있어서 3악도에 빠지는데,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선업과 악업의 과보가 없다고 항상 말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보리심을 낸 중생을 죽인 까닭이며, 셋째는 법사의 허물을 말하기를 좋아하는 까닭이며, 넷째는 법을 법 아니라 말하고 법 아닌 것을
법이라 말하는 까닭이며, 다섯째는 법의 허물을 구하기 위하여 법을 듣는 까닭이다.
또 세 가지 일이 있어서 3악도에 빠지는데,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여래가 무상하여 아주 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정법이 무상하여 변천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승보가 없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런 까닭에 항상 3악도에 빠지는 것이다.
두 번째 사람은 뜻을 내어 생사의 강을 건너려 하면서도 선근을 끊은 까닭에 빠져서 솟아 나오지 못한다. 솟아 나온다고 함은 선지식을 친근하여 신심을 얻는 것이니, 신심이란 보시와 보시의 과보를 믿으며 선한 업과 선한 업의 과보를 믿으며 악한 업과 악한 업의 과보를 믿으며 생사의 고통과 무상하여 파괴됨을 믿는 것으로 이것을 신심이라고 한다.
신심을 얻음으로써 깨끗한 계율을 닦으며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며 항상 즐겨 보시를 하고 지혜를 닦는 것이다. 그러나 근기가 암둔하여 다시 나쁜 동무를 만나서 몸과 계율과 마음과 지혜를 닦지 못하고 삿된 법을 받으며 혹은 나쁜 시절을 만나거나 나쁜 나라에 있어서 선근을 끊어 버리며 선근을 끊었으므로 항상 생사에 빠지니, 항하 가에 사는 두 번째 사람과 같다.
세 번째 사람은 뜻을 내어 생사의 강을 건너려 하면서도 선근을 끊었으므로 그 가운데 빠지고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솟아나온다고 한다. 여래는 온갖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여서 항상하고 변함이 없으며 중생을 위하여 위없는 도를 말씀하며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멸하는 것이 아니고, 법과 승가도 그러하여 멸하지 않으며, 일천체들은 그 법을 끊지 못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고 멀리 여읜 뒤에야 얻을 줄을 믿는다.
믿는 마음 때문에 깨끗한 계율을 닦고 계율을 닦은 후에는 12부경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며 중생들을 위하여 널리 선포하며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지혜를 닦으며 근성이 예리하므로 믿음과 지혜에 머물러서 마음이 물러가지 않으니, 항하 가에 있는 세 번째 사람과 같다.
네 번째 사람은 뜻을 내어 생사의 강을 건너려 하면서도 선근을 끊었으므로 그 가운데 빠지고 선지식을 친근하여 신심을 얻었으니 이것을 일러 솟아나온다고 한다. 신심을 얻었으므로 12부경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며 중생을 위하여 널리 선포하고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지혜를 닦으며 근성이 예리하므로 믿음과 지혜에 머물러서 마음이 물러나지 않고 사방을 두루 살피는데, 사방이라고 함은 네 가지 사문의 과보이며 저 항하 가에 있는 네 번째 사람과 같다.
다섯 번째 사람은 뜻을 내어 생사의 강을 건너려 하면서도 선근을 끊었으므로 그 가운데 빠지고, 선지식을 친근하여 신심을 얻었으니 이것을 일러 솟아나온다고 한다. 신심으로 12부경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며 중생을 위하여서 널리 선포하고, 보시를 좋아하고 지혜를 닦으며, 근성이 예리하므로 믿음과 지혜에 머물러서 마음이 물러나지 않으며, 물러나지 않으면서 곧 앞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나아간다 함은 벽지불을 말함이며 비록 자기는 건너갔으나 중생에게 미치지 못하므로 갔다고 이르는 것이니, 저 항하 가에 있는 다섯 번째 사람과 같다.
여섯 번째 사람은 뜻을 내어 생사의 강을 건너려 하면서도 선근을 끊었으므로 그 가운데 빠지고 선지식을 친근하여 신심을 얻고 신심을 얻었으므로 솟아나온다 이름하며, 신심이 있으므로 12부경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며, 중생을 위하여서 널리 선포하며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지혜를 닦으며, 근성이 예리하므로 믿음과 지혜에 머물러 마음이 물러나지 않고 마음이 물러나지 않으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 얕은 곳에 이르고, 얕은
데에 이르면 머물고 가지 않는다. 머물고 가지 않는다는 것은 보살이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서 머물러 있으면서 번뇌를 관찰하는 것이니, 저 항하 가에 있는 여섯 번째 사람과 같다.
일곱 번째 사람은 뜻을 내어 생사의 강을 건너려 하면서도 선근을 끊었으므로 그 가운데 빠지고 선지식을 친근하여 신심을 얻으니, 신심을 얻은 것을 솟아나온다고 이름하며, 신심이 있으므로 12부경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며 중생을 위하여 널리 선포하고 보시를 좋아하고 지혜를 닦으며
근성이 예리하므로 믿음과 지혜에 머물러서 마음이 물러나지 않으며, 물러나지 않으면서 곧 앞으로 나아가며 앞으로 나아가서는 저 언덕에 이르러 높은 산에 올라 모든 공포를 여의고 안락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선남자야, 저 언덕은 여래를 비유하고 안락을 얻음은 부처님이 항상 머무는 데 비유하고, 높은 산은 대열반을 비유하였다.
선남자야, 이 항하 가에 사는 여러 사람이 모두 손과 발을 구족하였지만 건너가지 못한다. 모든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불보ㆍ법보ㆍ승보가 있고 여래가 항상 법의 중요한 이치를 말하여 8성도와 대반열반이 있다고 하지만, 중생들이 얻지 못하는 것은 나의 허물이 아니며 성인의 도의 허물도 아니며, 중생들의 허물도 아니며 번뇌의 허물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까닭으로 모든 중생들이 열반을 얻지 못한다.
선남자야, 마치 용한 의원이 병을 잘 알고 약을 말하여 주었지만 환자가 먹지 않는 것은 의원의 허물이 아닌 것과 같다. 선남자야, 어떤 시주가 그에게 있는 대로 여러 사람에게 주지만 받지 않는 것은 시주의 허물이 아니다. 선남자야, 마치 해가 떠서 어둡던 것이 모두 밝아지는데, 소경이
길을 보지 못함은 해의 허물이 아닌 것과 같다. 선남자야, 항하의 물이 갈증을 없애 주지만 목마른 이가 마시지 않음은 물의 허물이 아니다. 선남자야, 땅에서 여러 가지 과실을 내는 일이 평등하여 다르지 않지만 농부가 씨를 심지 않음은 땅의 허물이 아니다. 선남자야, 여래가 중생들을 위하여 12부경을 분별하여 연설하지만 중생들이 듣지 않음은 여래의 허물이 아니다.
선남자야, 도를 닦는 이라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선남자야, 그대가 말하기를 ‘중생들이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 마치 자석과 같다’고 한 말은 잘한 말이다. 불성의 인연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라 하여 성인의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함은 옳지 않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넓은 벌판을 걸어가다가 갈증이 심하던 차에 우물을 만났는데, 그 우물이 깊어서 물이 보이지 않지만 물은 반드시 있다. 이 사람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두레박을 구하여 길어 내고서야 물을 마실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불성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에게 있기는 하지만 모름지기 무루(無漏)인 성인의 도를 닦은 뒤에야 보게 된다.
선남자야, 참깨가 있으면 기름을 짤 수 있지만 방법을 모르고는 짜지 못하는 것처럼 사탕수수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삼십삼천과 북울단월(北鬱單越)이 있기는 하지만 선한 업과 신통력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 땅속에 있는 풀뿌리와 땅 밑에 있는 물은 땅에 덮였으므로 중생이 보지 못한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성인의 도를 닦지 않으면 보지 못한다.
선남자야, 그대가 말하기를, 병난 사람이 간병할 이와 용한 의원과 좋은 약과 병에 필요한 음식을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병이 낫는다고 한 것은, 선남자야, 내가 6주 보살을 위하여 그런 뜻을 말한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허공이 중생에 대하여 안도 아니며 밖도 아니며 안팎도 아니므로 걸림이 없는 것과 같이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의 재산이 다른 지방에 있으면 비록 앞에는 없더라도 마음대로 쓰는 것이며 사람이 물으면 내게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여기도 아니며 저기도 아니지만, 반드시 얻을 것이므로 온갖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중생이 모든 업을 지음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이런 업의 성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본래는 없다가 지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인이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 짓고 이것이 받으며 이것이 짓고 저것이 받으며 저것이 짓고 저것이 받는 것도 아니며 지음도 없고 받음도 없어서 시절이 화합하면 과보를 받는다.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본래는 없다가 지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다른 데서 오는 것도 아니며, 인연이 없음도 아니고 모든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보살들은 시절 인연이 화합하여 보는 것이다. 시절이라 함은 10주보살마하살이 8성도를 닦아 중생들에게 평등한 마음을 얻는 것이니, 그때 보게 되는 것은 짓는다고 이르지 않는다.
선남자야, 그대가 말하기를 자석과 같다 함은 이치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자석은 쇠를 빨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을 말하면 마음의 작용[心業]이 없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다른 법이 있으므로 다른 법이 생겨나고 다른 법이 없으므로 다른 법이 없어지는 것이며, 짓는 이가 없어 파괴하는 이도 없다. 선남자야, 마치 불길이 맹렬한 것으로 섶을 태운다고 하는 것이 아니며,
불이 나고 섶이 없어짐을 섶을 태운다고 이른다. 선남자야,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서 돌지만 해바라기는 공경하는 마음도 없고 알음알이도 없고 업도 없으며 다른 법의 성품이므로 스스로 도는 것이다.
선남자야, 파초나무가 천둥을 인하여 자란다 하지만 이 나무는 귀도 없고 마음도 뜻도 식도 없으며, 다른 법이 있으므로 다른 법이 자라고 다른 법이 없어지므로 다른 법이 망가진다. 선남자야, 아숙가(阿叔迦)나무를 여인이 만지면 꽃이 나오는데, 이 나무는 마음도 없고 감각도 없지만 다른 법이 있으므로 다른 법이 나오고 다른 법이 없어지므로 다른 법이 파괴된다.
선남자야, 귤나무 아래 송장을 묻으면 과실이 많이 열리는데, 귤나무는 마음도 없고 감각도 없지만 다른 법이 있으므로 다른 법이 많아지고 다른 법이 없어지므로 다른 법이 파멸한다. 선남자야, 안석류(安石榴)가 흙[塼]과 골분과 분뇨로 과실이 번성하지만 안석류나무 역시 마음이나 감각이 없는 것이고 다른 법이 있으므로 다른 법이 생겨나고 다른 법이 없어지므로 다른 법이 파멸한다.
선남자야, 자석이 철을 빨아들임도 그와 같아서 다른 법이 있으므로 다른 법이 생겨나고 다른 법이 없어지므로 다른 법이 파멸한다.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빨아들이지 못한다. 선남자야, 무명도 행(行)을 빨아들이지 못하고 행도 식을 빨아들이지 못하지만 역시 무명이 행을 반연하여 주고 행이 식을 반연하여 준다고 이른다. 부처님이 있거나 부처님이 없거나 법계는 항상 머문다.
선남자야, 만일 불성이 중생들 중에 머문다고 말한다면, 선남자야, 항상한 법은 머묾이 없으니 만일 머무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무상한 것이다. 선남자야, 12인연은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다. 만일 머무는
곳이 있다면 항상하다고 이르지 못한다. 여래의 법신도 머무는 곳이 없고, 법의 경계[界]와 법의 인식 대상[入]과 법의 요소[陰]와 허공도 모두 머무는 곳이 없다. 불성도 그러하여 머무는 데가 없다.
선남자야, 4대의 힘이 균등하지만 굳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젖기도 하고 동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희기도 하고 누르기도 하고 검기도 하지만 4대는 업이 없으며 다른 법의 경계이므로 각각 같지 않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다른 법의 경계이므로 때가 되면 나타나는 것이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의 불성이 물러가지 않으므로 있다고 이르는데, 아비발치(阿毗跋致)이기 때문이며 마땅히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반드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마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한다.
선남자야, 비유하자면 어떤 임금이 대신에게 분부하되 ‘너는 코끼리를 한 마리 가져다가 소경들에게 보여라’하였다.
대신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여러 소경을 모아놓고 코끼리를 보였더니, 소경들은 제각기 손으로 만져 보았다. 대신은 돌아가서 임금에게 여쭈기를 ‘신이 코끼리를 보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여러 소경들을 불러서 각각 묻기를 ‘너희들은 코끼리를 보았느냐?’ 하였다.
소경들은 제각기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코끼리가 무엇과 같으냐고 물었다. 상아를 만져본 사람은 코끼리 모양이 무[蘆菔根]와 같다 하고, 귀를 만져본 사람은 코끼리가 키[箕]와 같다 하고, 머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돌과 같다고 말하고, 코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절굿공이[杵]와 같다 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나무통[木臼]과 같다 하고, 등을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평상과 같다 하고, 배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독[甕]과 같다 하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동아줄과 같다고 하였다.
선남자야, 저 소경들은 코끼리의 전체를 말하지 못하였으나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일 그 여러 모양이 모두 코끼리가 아니라면
그것을 떠나서는 따로 코끼리가 없다.
선남자야, 임금은 여래ㆍ정변지에 비유하고 대신은 방등의 대열반경에 비유하고 코끼리는 불성에 비유하고 소경들은 모든 무명 중생에게 비유하였다.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혹은 색이 불성이라고 말하였다. 왜냐 하면 색이 비록 멸하지만 차례차례 서로 계속하므로 위없는 여래의 32상을 얻기 때문이다. 여래의 색은 항상하고, 여래의 색은 항상 끊어지지 않는 까닭으로 색을 말하여 불성이라고 한다.
마치 진금(眞金)이 모양은 변천하지만 빛은 달라지지 않아서, 혹은 팔찌를 만들고 비녀도 만들고 쟁반을 만들어도 그 누런색은 처음 그대로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바탕은 비록 무상하나 빛은 항상한 것이므로 색을 말하여 불성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수(受)가 불성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수의 인연으로 여래의 진실한 낙(樂)을 받기 때문이다. 여래의 수는 필경(畢竟)의 수이며 제일의(第一義)의 수이다. 중생의 수(受)의 성품은 무상하지만 차례차례 서로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으므로 여래의 항상한 수를 얻는다. 마치 어떤 사람이 성을 교시가(憍尸迦)라고 하였는데, 사람은 비록 무상하나 성은 항상하여서 천만 대[世]를 지내어도 바뀌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으므로 수를 불성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상(想)이 불성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상의 인연으로 여래의 진실한 상을 얻기 때문이다. 여래의 상은 생각이 없는 상[無想想]이며 생각이 없는 상은 중생의 상이 아니고 남녀의 상도 아니고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상도 아니며 상이 끊어진 상도 아니다.
중생의 상은 무상하지만 상이 차례차례 서로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으므로 여래의 항상한
상을 얻는다. 선남자야, 마치 중생의 12인연과 같아서 중생은 멸하더라도 인연은 항상한 것이다.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으므로 상을 말하여 불성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행(行)이 불성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행을 수명이라고 하며 수명의 인연으로 여래의 항상 머무는 수명을 얻기 때문이다. 중생의 수명은 비록 무상하나 수명이 차례차례 서로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으므로 여래의 진실하고 항상한 수명을 얻는다. 선남자야, 마치 12부경을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비록 무상하지만 이 경전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으니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으므로 행을 말하여 불성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식(識)이 불성이라고 한다. 식의 인연으로 여래의 평등한 마음을 얻기 때문이다. 중생의 의식(意識)이 무상하지만 식이 차례차례 서로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으므로 여래의 진실하고 항상한 마음을 얻는다. 마치 불의 뜨거운 성품과 같아서 불은 무상하지만 더운 것은 무상하지 않으니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으므로 식을 말하여 불성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음(陰)을 여의고 내[我]가 있으므로 나를 불성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나의 인연으로 여래의 여덟 가지 자재한 나를 얻기 때문이다. 여러 외도들이 말하기를 가고 오고 보고 듣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말하는 것을 나라고 하는데, 이러한 나라는 것이 비록 무상하나 여래의 나는 진실하여 항상하다. 선남자야, 5음ㆍ6입ㆍ18계가 비록 무상하지만 항상하다고 하며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저 소경들이 제각기 코끼리를 말하는 것이 비록 코끼리의 실상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코끼리를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닌 것처럼 불성을 말하는 이도 그와 같아서 여섯 가지 법이 곧 그것은 아니지만 여섯 가지 법을 여의지도 않았다. 선남자야, 그러므로
나는 중생의 불성은 색도 아니고 색을 여의지도 않았으며 나아가 나도 아니고 나를 여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선남자야, 모든 외도들이 비록 내[我]가 있다고 말하나 실로는 내가 없는 것이며 중생의 나라는 것은 곧 5음이니 5음을 여의고는 다시 다른 내가 없다. 선남자야, 줄기와 잎과 꽃술과 꽃판이 합하여 연꽃이 되었으므로 이런 것을 떠나서는 따로 연꽃이 없다. 중생의 나란 것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마치 담과 벽과 풀과 나무가 화합한 것을 집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떠나서는 따로 집이 없다. 또 가타라(佉陀羅)나무ㆍ파라사(波羅奢)나무ㆍ니구다(尼拘陀)나무ㆍ울담발(鬱曇鉢)나무들이 화합하여 숲이 되었는데, 이런 것을 떠나서는 따로 숲이 없는 것과 같다.
마치 거병(車兵)ㆍ상병(象兵)ㆍ마병(馬兵)ㆍ보병(步兵)이 화합하여 군대가 되었는데 이런 것을 떠나서는 따로 군대가 없다. 마치 5색실이 화합하여 짜진 것을 비단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떠나서는 따로 비단이 없는 것과 같다. 또 4성이 화합한 것을 대중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떠나서는 따로 대중이 없는 것과 같다. 중생의 나라는 것도 그러하여 5음을 떠나고는 따로 내가 없다.
선남자야, 여래의 항상 머무는 것을 나라고 하며 여래의 법신이 가없고 걸림이 없고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여덟 가지 자재함을 얻음을 나라고 하지만 중생은 참으로 이러한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없고 다만 반드시 필경에 제일의공(第一義空)을 얻을 것이므로 불성이라고 이른다.
선남자야, 대자대비를 불성이라 이른다. 왜냐하면 대자대비가 항상 보살을 따르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 하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은 반드시 대자대비를 얻을 것이므로 중생들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한다. 대자대비를 일러 불성이라 하고
불성은 여래라고 이른다.
대희대사(大喜大捨)를 불성이라고 이른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만일 25유를 버리지 못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들이 반드시 얻을 것이므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대희대사는 곧 불성이며 불성은 곧 여래이다.
불성은 큰 신심[大信心]이라고 이른다. 왜냐하면 신심이 있으므로 보살마하살이 능히 단바라밀과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들이 반드시 큰 신심을 얻을 것이므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큰 신심은 곧 불성이며 불성은 곧 여래이다.
불성이라고 함은 외아들의 지위라고 이른다. 왜냐하면 외아들의 지위인 인연으로 보살이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을 얻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들이 반드시 외아들의 지위를 얻을 것이므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외아들의 지위는 곧 불성이며 불성은 곧 여래이다.
불성은 네 번째 힘[第四力]이라고 이른다. 왜냐하면 네 번째 힘의 인연으로 보살이 능히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반드시 네 번째 힘을 얻을 것이므로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네 번째 힘은 곧 불성이며 불성은 곧 여래이다.
불성은 12인연이라고 이른다. 왜냐하면 12인연으로써 여래가 항상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반드시 이러한 12인연이 있으므로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12인연은 곧 불성이며 불성은 곧 여래이다.
불성은 4무애지(無碍智)라고 이른다. 네 가지 걸림 없는 인연으로 글자의 뜻이 걸림 없다 말하고 글자의 뜻이 걸림 없으므로 능히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걸림 없는 것은 곧 불성이며 불성은 곧 여래이다.
불성은 정삼매(頂三昧)라고 이른다. 이와 같은 정삼매를 닦아 능히 모든 부처님 법을 통틀어 거두므로 정삼매를 이름하여 불성이라고 한다. 10주보살은 이 삼매를 닦으나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불성을 보아도 분명하지 못하며 모든 중생들은 반드시 얻을 것이므로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선남자야, 위에서 말한 가지가지 법을 모든 중생들이 반드시 얻을 것이므로 모든 중생들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선남자야, 내가 만일 색이 불성이라고 말하면 중생들이 듣고 나서 잘못된 사견을 낼 것이며 잘못된 사견으로써 목숨을 마치면 아비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여래가 법을 말함은 지옥을 끊으려 하는 것이므로 색이 불성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나아가 식(識)을 말함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만일 중생들이 불성을 분명히 알았으면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10주보살은 8성도를 닦고도 불성을 조금만 보는데 하물며 닦지 않은 이가 볼 수 있겠는가? 문수사리보살 같은 이들은 한량없는 세상에서 이미 성인의 도를 닦았으므로 불성을 분명히 알지만, 성문이나 벽지불이 어떻게 불성을 알겠는가?
모든 중생들 가운데 불성을 분명하게 알려는 이는 마땅히 일심으로 이 『열반경』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며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할 것이며, 이 경을 받아 가지거나 나아가 찬탄하는 이를 보거든 마땅히 좋은 집과 의복과 음식과 와구와 병을 치료하는 의원과 약으로 이바지하고 겸하여 찬탄하고 예배하고 문안하여야 한다.
선남자야, 지나간 옛적 한량없고 그지없는 세상에서 한량없는 부처님께 이미 친근히 하여 공양하고 선근을 많이 심은 뒤에야 이 경의 이름을 듣게 된다.
선남자야, 불성은 헤아릴 수 없으며 부처님과 법과 승가도 헤아릴 수 없으며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으면서 알지 못하는 것도 헤아릴 수 없으며 여래의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법도 헤아릴 수 없으며 모든 중생들이 이 『대열반경』을 능히 믿는 것도 헤아릴 수 없다”
사자후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대반열반경』을 능히 믿는 것이 헤아릴 수 없다 하시니, 세존이시여, 이 대중 가운데에서는 8만 5천억 사람이 이 경에 신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을 믿는다는 것은 헤아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남자야, 이런 사람들도 오는 세상에는 반드시 이 경전을 믿을 것이며 불성을 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사자후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물러가지 않는 보살들이 자기에게 반드시 물러가지 않는 마음이 있는 줄을 알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고통으로 그 마음을 시험하되, 하루에 참깨 한 알을 먹으면서 이레를 지내고, 멥쌀ㆍ녹두ㆍ삼씨ㆍ좁쌀ㆍ흰콩도 그와 같이 각각 이레 동안을 한
개씩 먹으면서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렇게 하는 고행은 조금도 이익이 없으니, 이익이 없는 일도 능히 하는데 하물며 이익이 있는 일을 어찌 짓지 않겠는가?’ 이익이 없는 일도 능히 참고 견뎌 물러가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이렇게 날마다 고행을 할 때에 모든 살과 가죽은 여위고 쭈그러져서 여물지 않은 박을 쪼개서 볕에 말린 듯하고 눈이 움푹 들어간 것은 우물 밑의 별빛과 같으며, 살이 빠지고 힘줄이 드러난 것은 이엉이 썩은 초가집 같고 등골뼈가 드러난 것은 벽돌을 포개 놓은 듯하다. 앉았던 곳은 말발굽 자국 같으며 앉으려면 엎어지고 일어나려면 쓰러지며, 이렇게 이익 없는 고통을 받더라도 보리심에서 물러가지 않는다.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모든 고통을 깨뜨리고 안락을 주기 위하여, 나아가 안팎 재물[內外財物]과 목숨까지도 버리기를 풀 한 포기같이 하며, 만일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면, 이런 보살은 반드시 물러가지 않는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알고 ‘나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라고 한다.
또 보살이 법을 위하는 인연으로 몸을 갉아 등잔을 만들면서 천으로 살을 싸고 기름을 부어 심지를 만들어 불을 켜거든, 보살이 그때 큰 고통을 받으면서 스스로 꾸짖어 말하기를 ‘이만한 고통은 지옥에서 받는 고통에 비하면 백천만 분의 일도 되지 못하는데, 너는 한량없는 백천겁 동안에 큰 고통을 받았지만 아무 이익도 없지 않았느냐?
네가 이만한 가벼운 고통도 받지 못하고야 어떻게 지옥 속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하여 내겠느냐?’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관찰할 때에는 몸으로 고통을 깨닫지 않고 그 마음도 물러가거나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으며 보살은 이럴 때에
내가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을 깊이 안다.
선남자야, 보살이 그때 번뇌를 구족하고 끊지 못한 이는 법의 인연을 위하여서 머리와 눈과 골수와 수족과 피와 살로 사람에게 보시하며 몸에 못을 박고 바위에서 떨어지며 불구덩이에 들어가니, 보살이 이럴 때에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음이 물러가거나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으면 보살이 자기에게 반드시 물러가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며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을 안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의 고통과 번뇌를 깨뜨리기 위하여 큰 축생의 몸이 되기를 발원하여서 그 몸의 피와 살을 중생에게 보시하며, 중생이 먹을 때에 다시 가엾은 생각을 내고 나서 보살은 그때 숨을 안 쉬고 죽은 모양을 보여 먹는 이로 하여금 살해한다는 의심을 내지 않게 한다. 보살은 비록 축생의 몸을 받았으나 축생의 업을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남자야, 보살은 이미 물러가지 않는 마음을 얻었으므로 마침내 3악도의 업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만일 오는 세상에 티끌만한 나쁜 업의 과보라도 반드시 받지 않을 것이 있다면 큰 원력으로 중생을 위하여 모두 받는다.
마치 병난 사람에게 귀신이 붙어서 몸속에 숨었다가 주문의 힘으로 모습이 드러나면 말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성내고 꾸짖고 울고 통곡하는 것과 같으니, 보살마하살이 오는 세상에 받는 3악도의 업보도 그와 같다.
보살마하살이 곰의 몸을 받았을 때에는 항상 중생을 위하여 바른 법을 연설하며 혹은 가빈사라(迦賓闍羅) 새의 몸을 받는 것도 중생들에게 바른 법을 말하기를 위한 것이며, 구다(瞿陀)의 몸ㆍ사슴의 몸ㆍ토끼 몸ㆍ코끼리 몸ㆍ
암양ㆍ원숭이ㆍ흰 비둘기ㆍ금시조ㆍ뱀의 몸을 받는다.
이런 축생의 몸을 받았을 때에도 마침내 축생의 나쁜 업을 짓지 않고 항상 다른 축생들을 위하여 바른 법을 연설한다. 그들로 하여금 법을 듣고 축생의 몸을 빨리 여의게 하려는 까닭이다. 보살이 그때 비록 축생의 몸을 받았으나 나쁜 업을 짓지 않으므로 반드시 물러가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보살마하살이 흉년 드는 세상에서 굶주린 중생을 보고 한량없이 큰 거북이나 고기의 몸이 되고, 다시 원을 세우기를 ‘모든 중생들이 나의 살을 뜯어갈 때에 뜯는 대로 살이 따라 생기며 나의 고기를 먹고 나서 기갈의 고통을 떠나고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기를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또 보살의 원을 세우기를 ‘만일 나를 인하여 기갈을 면한 이가 있으면 오는 세상에 빨리 25유에서 기갈하는 근심을 여의길 원합니다’라고 합니다. 보살마하살이 이런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음이 물러가지 않는 이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을 안다.
또 보살마하살이 병이 유행하는 세상에서 앓는 이를 보고 나서 생각하기를 ‘마치 약 나무가 있는데 병난 이들이 뿌리를 캐고 줄기를 찍고 가지를 꺾고 잎을 뜯고 꽃을 따고 열매를 취하고 껍질을 벗기고 살을 깎아다가 먹고 병이 낫듯이, 나의 이 몸도 그와 같아서 병난 이가 소리를 듣거나 몸을 만지거나 피와 살을 먹거나 나아가 뼈와 골수를 먹고 나서 모두 병이 쾌차하길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또 원하기를 ‘중생들이 나의 고기를 먹을 때에 악한 마음을 내지 말고 아들의 살을 먹듯이 하며, 병을 고친 뒤에는 내가 항상 법을 말하는 것을 그들이 믿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을 가르치길 원합니다’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보살이 번뇌를 구족하고 몸의 고통을 받더라도 마음이 물러가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 반드시
물러가지 않는 마음을 얻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줄을 알아야 한다. 또 선남자야, 어떤 중생이 귀신으로 병이 들렸다면 보살이 보고는 원을 세우기를 ‘귀신의 몸ㆍ큰 몸ㆍ건장한 몸ㆍ권속이 많은 몸이 되어 그로 하여금 보고 듣고 병이 나아지길 원합니다’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위하여서 부지런히 고행을 닦으면 비록 번뇌가 있으나 마음을 더럽히지는 않는다.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비록 6바라밀을 닦더라도 6바라밀의 과보를 구하지 않고 위없는 6바라밀을 닦을 때에 이러한 원을 세운다.
‘내가 지금 6바라밀로 낱낱 중생들에게 베풀면 중생들이 나의 보시를 받고는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하며, 나도 6바라밀을 위하여 부지런히 고행을 닦으며 모든 고통을 받지만, 고통을 받을 때에도 나의 보리심이 물러가지 않기를 원합니다’라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런 서원을 짓는 때를 일러서 보리에서 물러가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생사에는 죄와 허물이 큰 줄을 잘 알며, 대반열반에는 큰 공덕이 있음을 관찰하고 중생들을 위하여 생사 중에 있으면서 가지가지 고통을 받아도 마음이 물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살은 불가사의하다고 한다.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인연이 없으면서도 불쌍한 생각을 내어 은혜를 입지 않고도 항상 은혜를 베풀며 은혜를 베풀면서도 갚음을 바라지 않으므로 또 불가사의하다고 한다. 또 선남자야, 중생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고행을 닦지만 보살마하살은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고행을 닦으면서 스스로 이익함이라고 하므로 또 불가사의하다고 한다.
또 보살이 번뇌를 구족하고도 원수라 친한 이라 하여, 받는 고통을 깨뜨리기 위하여 평등한 마음을 닦으므로 또 불가사의라고 한다. 또 보살이 만일 나쁘고 착하지 않은 중생을 보고는 꾸중하거나 좋은 말을 하거나 쫓아내거나 내버려 두거나 하되, 나쁜 성질이 있는 이에게는 좋은 말을 하고 교만한 이에게는 큰 교만을 보이기도 하지만 속마음에는 실로 교만이 없다. 이것을 일러 보살의 방편이 불가사의하다고 한다.
또 보살이 번뇌를 구족하고 재물이 없을 때에 달라는 이가 많이 오더라도 마음이 좁지 않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불가사의라고 한다. 또 보살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을 때에 부처님의 공덕을 알면서도 중생들을 위하여 부처님이 없는 곳에서 변방에 나는 몸을 받는데, 소경 같고 귀먹은 이 같고 절름발이 같고 조막손이 같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불가사의라고 한다. 또 보살이 중생의 죄악을 알면서도 제도하기 위하여 함께 다니며 그의 뜻을 따르면서도 죄악에 물들지 않으므로 불가사의라고 한다.
또 보살은 중생의 모습도 없고 번뇌의 더러움도 없고 도를 닦아서 번뇌를 여읠 것도 없으며, 비록 보리를 닦는다 하나 보리의 행도 없고 보리의 행을 성취할 것도 없으며 괴로움을 받을 것도 괴로움을 깨뜨릴 것도 없는 줄을 분명하게 알고 분명하게 보지만 그래도 중생들을 위하여 괴로움을 깨뜨리고 보리의 행을 행한다. 그러므로 불가사의라고 한다.
또 보살이 나중 몸[後邊身]을 받아서 도솔타천(兜率陀天)에 있는 것도 불가사의라고 한다. 왜냐하면 도솔타천은 욕계 중에서 가장
훌륭한 데이기 때문이다. 그 아래 하늘에 있는 이는 마음이 방일하고 위의 하늘에 있는 이는 모든 근이 암둔(闇鈍)하므로 훌륭하다고 한다. 보시를 닦고 계행을 닦는 이는 위의 하늘의 몸과 아래 하늘의 몸을 얻고 보시와 계행과 선정을 닦으면 도솔타천의 몸을 얻는다.
모든 보살들은 모든 유(有)를 나무라고[毁呰] 모든 유를 파괴하면서도 마침내 도솔타천의 업을 짓고 그 하늘의 몸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이 다른 데 있어서도 중생들을 교화하고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계의 마음이 없으면서도 욕계에 나는 것이므로 불가사의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도솔타천에 나면 세 가지 훌륭한 일이 있으니, 첫째는 수명이며 둘째는 색신(色身)이며 셋째는 이름이다. 보살마하살은 진실로 수명이나 색신이나 이름을 구하지 않으니, 비록 구하는 마음은 없으나 얻어짐이 훌륭하다.
보살마하살은 열반을 매우 좋아하지만 유의 인연도 훌륭하다. 여러 천인들은 보살에 대하여 성내는 마음ㆍ질투하는 마음ㆍ교만한 마음을 내지 않고 항상 기쁜 마음을 내며 보살도 천인들에게 교만하지 않다. 그러므로 또 불가사의라고 이른다.
보살마하살이 오래 살 업을 짓지 않지만 그 하늘에서 끝까지 오래 사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수명이 훌륭하다고 하며 색신의 업도 없지만 묘한 색신에 광명이 가득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색신이 훌륭하다고 하며, 보살마하살이 저 천궁에 있으면서도 5욕을 즐기지 않고 불법(佛法)의 일만 하므로 이름이 시방에 충만하니, 이것을 말하여 이름이 훌륭하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불가사의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올 때에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하므로 또 불가사의라고 한다. 왜냐하면 보살이 내려올 때에 욕계ㆍ
색계의 천인들이 모두 와서 전송하면서 큰 음성으로 보살을 찬탄하며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땅이 진동케 하기 때문이다. 또 보살은 사람 중에 상왕(象王)이며 사람 중에 상왕을 용왕이라고 하는데 용왕이 처음 태에 들 때에는 모든 용왕들이 이 땅 밑에서 혹은 무서워하고 혹은 깨닫는다. 그래서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하며, 그러므로 또 불가사의라 이름한다.
보살마하살은 태에 드는 때와 머무는 때와 나올 때를 알며 아버지도 알고 어머니도 알며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음이 마치 제석천왕의 머리에 있는 푸른빛 구슬과 같으므로 또 불가사의라고 이른다.
선남자야, 『대열반경』도 그와 같아서 불가사의한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큰 바다에 여덟 가지 불가사의가 있음과 같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점점 더 깊어지고, 둘째는 깊어서 바닥을 얻기 어렵고, 셋째는 똑같은 짠맛이며, 넷째는 조수가 시간을 어기지 않고, 다섯째는 가지가지 보배가 있고, 여섯째는 몸이 큰 중생들이 그 속에 살고, 일곱째는 송장을 묵혀 두지 않고, 여덟째는 모든 강물과 큰 비가 모두 들어가도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음이다.
선남자야, 점점 더 깊어짐에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중생의 복력(福力)이며, 둘째는 바람을 따라 행함이며, 셋째는 강물이 들어가는 까닭이며, 나아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음이 각각 세 가지가 있다.
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도 그와 같아서 여덟 가지 불가사의가 있다. 첫째는 점점 깊어짐이니, 이른바 우바새계ㆍ사미계ㆍ비구계ㆍ보살계와 수다원과(果)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ㆍ아라한과ㆍ벽지불과ㆍ아뇩다라삼먁삼보리과이다. 이 『열반경』에는 이런 법들을 말하였으니
이것을 점점 깊어짐이라 하며, 그러므로 이 경을 일러 점점 깊음이라고 한다.
둘째는 깊어서 바닥을 얻기 어려움이니, 여래 세존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도 않고 법 수레를 운전하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보시를 행하지도 않으므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고 이른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지만 불성은 색도 아니고 색을 여의지도 않았으며 나아가 수ㆍ상ㆍ행ㆍ식도 아니고 나아가 식을 여의지도 않았다. 이것이 항상 볼 수 있는 요인(了因)이며 짓는 인[作因]이 아니며, 수다원 나아가 벽지불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번뇌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으며 비록 번뇌가 없으나 항상하다고 이르지 않으므로 깊다고 한다.
다시 더 깊은 것이 있다. 이 경전에서 어떤 때는 나라 말하고 혹은 내가 없다고 말하며 혹은 항상하다 말하고 혹은 무상하다 말하며, 어떤 때는 깨끗하다 말하고 어떤 때는 부정하다 말하며, 혹은 즐거움이라 말하고 혹은 괴로움이라 말하며, 혹은 공하다 말하고 혹은 공하지 않다 말하며, 혹은 모든 것이 있다 말하고 혹은 모든 것이 없다 말하며,
혹은 3승을 말하고 혹은 1승을 말하며, 혹은 5음이 불성이라 말하며 금강삼매ㆍ중도(中道)ㆍ수릉엄삼매ㆍ12인연ㆍ제일의공(第一義空)을 말하며, 자비가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며 정지(頂智)와 신심으로 모든 근(根)과 역(力)을 알며, 모든 법 중에 걸림이 없는 지혜를 말하며, 불성이 있지만 결정되었다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깊다고 한다.
셋째는 똑같은 한 맛이니, 모든 중생들이 똑같이 불성이 있고, 같은 1승이며 같은 해탈이며 한 인이며 한 과보이며 같은 감로이며 모든 이가 마땅히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한 맛이라고 한다.
넷째는 조수가 시간을 어기지 않음이니, 경전 중에서 비구들은 여덟 가지
부정한 물건을 받아 두지 못하게 하였고 만일 내 제자로서 이 대반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고 분별하는데, 차라리 생명을 잃을지언정 범하지 말라고 한 것은 조수가 시간을 어기지 않음이다.
다섯째는 가지가지 보배가 있음이니, 이 경이 곧 한량없는 보배 광이다. 보배라 함은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분(如意分)ㆍ5근ㆍ5력ㆍ7각분(覺分)ㆍ8성도(聖道)이며, 어린 아기 행[嬰兒行]ㆍ거룩한 행[聖行]ㆍ범천의 행[梵行]ㆍ하늘의 행[天行]이며, 선한 방편과 중생의 불성이며, 보살의 공덕ㆍ여래의 공덕ㆍ성문의 공덕ㆍ연각의 공덕과, 6바라밀ㆍ한량없는 삼매ㆍ한량없는 지혜를 보배 광이라고 한다.
여섯은 몸 큰 중생들이 사는 곳이다. 몸 큰 중생이라 함은 부처님과 보살을 이름이니 큰 지혜이므로 큰 중생이라 하고 큰 몸이기 때문이며 큰마음이기 때문이며 크게 장엄하기 때문이며 크게 조복하기 때문이며 큰 방편이기 때문이며 크게 법을 말하기 때문이며 큰 세력이기 때문이며 큰 무리이기 때문이며 큰 신통이기 때문이며 크게 자비하기 때문이며 항상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에게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들을 포용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러 몸 큰 중생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일곱은 송장을 묵혀 두지 않음이다. 송장이라고 함은 일천제를 말한 것으로 4중금을 범한 것ㆍ5무간죄를 지은 것ㆍ방등경을 비방한 것과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 말하고 법을 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여덟 가지 부정한 물건을 받아 두는 것과 부처님의 물품과 승가의 물품을 마음대로 쓰는 일과, 비구와 비구니에게 법답지 못한 일을 하는 것 따위를 송장이라고 하는데, 이 『대열반경』에는 이런 것들을 여의었으므로 송장을 묵혀 두지 않는다고 한다.
여덟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음이다. 가없는[無邊際] 까닭이며, 처음과 나중이 없는 까닭이며, 색이 아닌 까닭이며, 지음이 아닌
까닭이며, 항상 머무는 까닭이며, 생멸하지 않는 까닭이며, 모든 중생이 다 평등한 까닭이며, 모든 법의 성품이 동일한 까닭으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이 경은 저 큰 바다에 여덟 가지 불가사의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사자후는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래의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깊다고 한다면 모든 중생이 네 가지 나는 일이 있는데, 알로 나고[卵生] 태로 나고[胎生]습기로 나고[濕生] 화하여 나는[化生]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나는 일이 사람에게는 구족하게 있습니다. 시바라(施婆羅) 비구ㆍ우바시파라(優婆施婆羅) 비구ㆍ미가라(彌迦羅) 장자의 어머니ㆍ니구타(尼拘陀) 장자의 어머니ㆍ반사라(半闍羅) 장자의 어머니 같은 이들은 각각 500아들을 알로 낳았으니 사람 중에 알로 낳은 일이 있음을 알겠으며,
습기로 나는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난 세상에 보살일 때에 정생왕(頂生王)과 수생왕(手生王)이 되었다’ 하신 것과 지금 말씀하신 암라수녀(庵羅樹女)와 가부다수녀(迦不多樹女)와 같으니 사람들도 습기로 나는 일이 있음을 알겠으며, 겁의 처음에는 모든 중생들이 모두 화생하였습니다. 여래 세존께서 여덟 가지 자재함을 얻으셨는데 무슨 인연으로 화생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네 가지 나는 법으로 나지만 성인의 법을 얻고 나서는 본래와 같이 알로 나거나 습기로 날 수 없다. 선남자야, 겁의 처음에 중생들이 모두 화생하였지만 그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지 않았다.
선남자야, 중생들이 병이 났을 때에는 의원이 필요하고 약이 필요하다. 겁초(劫初)의 중생은 화생하여 번뇌가 있지만 병이 생기지 않았으므로 여래가 그 세상에는 나지 않았으며, 겁초의 중생들은 몸과 마음이 법 그릇이 아니므로 여래가 그 세상에는 나지 않았다.
선남자야, 여래 세존의 하는 일은 중생들보다 뛰어나 문벌이나 권
속이나 부모가 모두 뛰어나므로 말하는 법을 사람들이 믿고 받는다. 그러므로 여래는 화생을 받지 않는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들이 아비는 아들의 업을 짓고 아들은 아비의 업을 짓는다. 여래 세존이 만일 화생한다면 부모가 없을 것이니, 부모가 없으면 어떻게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선한 업을 짓게 하겠느냐? 그러므로 여래는 화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
선남자야, 부처님의 정법에는 두 가지 보호함이 있다. 첫째는 안으로 보호함이며 둘째는 밖으로 보호함이다. 안으로 보호함은 금하는 계율이며 밖으로 보호함은 친척과 권속이니, 부처님 여래가 화생의 몸을 받으면 밖으로 보호함이 없을 것이므로 여래는 화생하는 몸을 받지 않는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은 문벌을 믿고 교만한 마음을 낸다. 여래는 이러한 교만을 깨뜨리기 위하여 훌륭한 문벌에 태어나고 화생하지 않는다. 선남자야, 여래 세존은 진정한 부모가 있으니 아버지 이름은 정반이며 어머니 이름은 마야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오히려 환술과 같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화생의 몸을 받겠느냐?
만일 화생의 몸을 받는다면 어찌 쇄신사리(碎身舍利)가 있겠느냐? 여래는 중생의 복덕을 이익되게 하려고 쇄신사리를 내어 공양하게 한다. 그러므로 화생의 몸을 받지 않는 것이다. 여러 부처님들이 화생하는 이가 없는데, 어찌 홀로 나만이 화생의 몸을 받겠느냐?”
그때 사자후보살은 합장하고 한쪽 무릎을 세워 꿇어앉아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더미를
내가 어찌 말씀할 수 있겠습니까만
중생 위해 한 부분만 말씀하오니
이 정성 살피셔서 들어주소서.

중생들이 무명의 어둠 속에서
그지없는 온갖 고통 함께 받는지라
세존께서 벗어나게 지도하시니
온 세상이 대자비라 일컫습니다.


중생들이 생사에서 헤매느라고
미혹하고 혼란하여 괴로운 것을
여래께서 큰 안락을 베푸시매
나고 죽는 먼 길을 끊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낙을 주려고
당신의 즐거움을 탐하지 않고
중생을 위하여서 고행하시매
세상 사람들이 정성으로 공양합니다.

중생들의 받는 고통 애달프게 여겨
지옥의 갖은 고초 생각지 않고
중생을 위하여서 고행하시매
위없이 우뚝하심 한량이 없네.

부처님 중생 위해 고행 닦으시어
바라밀 구족하게 성취하시려
삿된 바람 가운데도 끄떡없으니
세상의 대사(大士)중에 뛰어나시네.

중생들은 안락을 얻고 싶지만
안락의 인 닦을 줄 모르는 것을
여래께서 가르치사 닦게 하시니
외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인 듯.

부처님이 중생의 번뇌 보시고
아기 병을 걱정하는 어머니처럼
치료할 모든 방법 생각하시매
이내 몸을 부처님께 맡깁니다.

중생들은 모든 괴로움 받으면서도
뒤바뀌게 낙인 줄만 여기는 것을
여래께서 낙과 괴로움 연설하시니
그러므로 대자비라 일컫습니다.

세상사람 무명이란 알 속에 있어
껍데기를 깨뜨릴 지혜 없어서
여래의 지혜 부리[智嘴] 깨뜨리시매
큰아들이 되었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삼세에 구애되지도 않고
이름도 자(字)도 호(號)도 모두 없고
열반의 깊은 뜻만 깨달았으매
부처님을 대각(大覺)이라 일컫습니다.

소용돌이치는 강물에 중생이 빠져
무명에 눈이 멀어 못 나오는 이
부처님 오셔서 건져 주시기에
큰 배의 사공이라 일컫습니다.

온갖 법의 인과를 죄다 아시고
괴로움이 없어지는 도(道)까지 통해
중생에게 좋은 약 베푸시기에
부처님 대의왕(大醫王)을 찬탄합니다.

외도들은 나쁜 소견으로 고행을 말하여
그로 인하여 위없는 낙 얻는다 말하지만

여래께서는 참된 복락 말씀하셔서
중생들로 하여금 좋은 쾌락 받게 하시며

여래께서 삿된 외도 깨뜨리시고
중생에게 바른 길을 지시하셔서
그대로 수행하면 안락 얻나니
부처님을 대도사(大導師)라 일컫습니다.

내가 짓는 것도 남이 짓는 것도
함께 짓는 것도 아니며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괴로움 받는 일은
여러 가지 외도보다 뛰어나십니다.

계와 정과 지혜를 갖추어 이루고
이 법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시되
아끼거나 질투하는 생각 없으시니
그러므로 인연 없는 자비라 하네.

짓는 일도 없으며 인연도 없으나
인도 없고 과도 없는 보(報)를 얻으시니
그러므로 모든 지혜 있는 이는
과보를 구하지 않는 여래라 하네.

방일한 일 사람들과 같이 하시나
부처님께서는 방일에 물들지 않아
그러므로 부사의라 일러
여덟 가지 세상법도 물들이지 못하네.

여래 세존께는 친한 이도 원수도 없어
그러므로 그 마음 항상 평등하시매
제가 사자후로 큰 자비를 찬탄하니
한량없는 사자후를 능히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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