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2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2권
혜립 언종 한역
김영률 번역
2. 아기니국(阿耆尼國)에서 갈야국사국(羯若鞠闍國)까지
이로부터 서쪽으로 나아가 아기니국 아부사천(阿父師泉)에 이르렀다. 샘은 길 남쪽 모래 언덕에 있었는데, 언덕 높이가 수 길[丈]이나 되고 물은 그 중간에서 솟아났다.
샘에 대해서는 이런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에 장사꾼 수백 명이 길을 가다가 물이 바닥이 났다. 그리하여 피로에 갈증까지 심했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장사꾼 가운데 승려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노자가 없어서 상인들 틈에 끼어서 얻어먹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상인들이 서로 의논하였다.
“이 스님은 부처님을 섬기기 때문에 우리들이 공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만 리 길을 오면서도 그에게 한 푼도 내 놓으라고 한 적이 없다. 게다가 지금 우리들은 목이 타들어가고 있는데 저 스님은 근심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 우리가 그와 함께 의논해 보도록 하세.”
그러자 승려가 말했다.
“당신들이 물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부처님께 귀의하여 3귀(歸)1)와 5계(戒)2)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나는 여러분을 위해 언덕에 올라가서 물을 만들겠소.”
사람들은 목이 타서 괴로웠기 때문에 모두 그의 명을 따랐다.
계를 받고 나자 승려가 말했다.
“내가 언덕에 올라간 뒤에 여러분은 ‘아부사(阿父師)여, 나에게 물을 주소서’라고 외치십시오. 모름지기 여러분이 필요한 만큼을 말하도록 하시오.”
그 승려가 떠나고 조금 있다가 사람들은 가르친 대로 물을 청하니 별안간 물이 흘러나와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 대중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그 승려가 끝내 돌아오지 않자, 사람들이 언덕에 올라가 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모두 슬피 울며 서역의 법에 따라 시신을 화장하고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돌과 기왓장을 쌓아 탑을 만들었다. 그 탑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샘물 역시 끊이지 않고 흘러 왕래하는 여행자들의 숫자에 따라 많이 흐르기도 하고 적게 흐르기도 한다. 만약 사람이 없을 때에는 진액(津液)처럼 흐른다고 한다.
법사는 대중과 함께 이 샘 옆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출발하여 은산(銀山)을 넘었다. 산은 대단히 높고 웅장하였는데 온통 은광(銀鑛)이었다. 그래서 서역의 은전은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고 한다.
산의 서쪽에서는 또 산적 떼를 만났으나 사람들이 물건을 주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마침내 왕성이 있는 곳에 이르러 냇가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이때 동행하던 외국 상인[胡商] 수십 명이 먼저 가서 물건을 팔려고 밤중에 몰래 떠나 버렸다. 그런데 그들이 10리도 채 못가서 도적을 만나는 바람에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다음날 법사 일행이 그 자리에 도착했을 때는 시체만 보일 뿐 재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행은 매우 상심하여 개탄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얼마를 가니 멀리 왕도(王都)가 보였고, 이윽고 아기니왕이 여러 신하와 함께 나와 왕궁으로 맞이해 들어가 공양을 했다.
그렇지만 이 나라는 일찍이 고창(高昌)의 공격을 받았었기 때문에 원한이 남아 있어 말 [馬]조차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법사도 이곳에서는 하룻밤만 머물고는 이내 떠났다.
계속해서 큰 강을 두 개나 건너고 서쪽으로 평탄한 길을 수백 리쯤 가자 굴지국(屈支國)옛날에 구자(龜玆)라고 잘못 부르던 곳이다.의 경계에 들어섰다. 거의 왕도에 가까이 왔을 때에 왕이 여러 신하와 대덕승(大德僧) 목차국다(木叉鞠多:Mokṣagupta)와 함께 나와 맞이하였다.
굴지국 부근에서 온 수천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성(城)의 동문 밖에다 장막을 치고 행상(行像)을 안치해 놓고 음악을 연주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법사가 도착하자 모든 승려들이 나와서 위로의 말을 건네고서는 각기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자 한 승려가 아름다운 꽃을 소반에 담아 와서 바쳤다. 법사가 꽃을 받아들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꽃을 뿌려 예배드리고 목차국다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앉고 나서는 또 꽃을 바치고, 꽃을 바치고 나서는 포도즙을 바쳤다. 처음에 다른 절에서도 꽃을 받고 포도즙을 받고 하였는데 그 다음 절들에서도 그렇게 하였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모든 향응이 끝나고 승려들도 흩어졌다.
여기에는 고창 사람 수십 명이 있었는데 이 굴지국으로 출가하여 따로 절 하나를 차지하고 살고 있었다. 그 절은 성(城)의 동남쪽에 있었는데 법사가 한 고향에서 왔다고 하여 먼저 자기 절에서 머물도록 청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따라가기로 하자 왕과 여러 승려들은 각자 돌아갔다.
다음날 왕은 법사를 궁궐로 청하여 준비한 공양을 대접하였다. 식사 중에 법사가 3정(淨)3)을 들지 않자 왕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법사가 말했다.
“3정은 소승교[漸敎]4)에서는
허락되어 있으나 제가 배운 대승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음식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성의 서북쪽에 있는 아사리아사(阿奢理兒寺)5)당나라 말로는 기특(奇特)이라고 한다로 갔다. 이곳은 목차국다가 머물고 있는 절인데, 국다는 사리에 밝고 총명하여 사람들이 숭앙하고 따랐다. 인도에서 20여 년 간 유학하여 모든 경전을 섭렵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성명(聲明)6)에 가장 밝았다. 왕이나 백성들도 모두 존중하여 그를 ‘독보(獨步)’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는 법사를 대해서 한갓 스님으로써 예우했을 뿐 얼마만큼 법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는 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는 『잡심(雜心)』7)ㆍ『구사(俱舍)』ㆍ『비바사(毘婆沙)』8) 등의 모든 경전이 구비되어 있소. 그것을 배우면 충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굳이 서방으로 가서 고생할 필요가 있겠소?”
법사가 말했다.
“여기에도 『유가론(瑜伽論)』9)이 있습니까?”
국다가 말했다.
“무엇에 쓰려고 그런 삿된 책을 찾습니까? 참된 불자(佛子)는 그런 것을 배우지 않소.”
법사는 처음에 국다를 매우 존경했으나 이 말을 듣고는 마치 흙덩이를 보는 것 같아 이렇게 대답했다.
“『바사』나 『구사』는 중국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은 매우 간소하고 생략되어 있으며 뜻이 얕으므로 궁극의 설(說)이 될 수 없는 것이 애석합니다. 그래서 『대승유가(大乘瑜伽)』를 배우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이 『유가』는 후신(後身) 보살인 미륵(彌勒)10)이 설하신 것입니다. 지금 삿된 글이라 하셨는데 무간지옥[无底枉坑]11)이 두렵지 않습니까?”
국다가 말했다.
“『바사』 등의 책은 당신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인데 어째서 뜻이 깊지 않다고 말하시오?”
법사가 말했다.
“국다께서는 이해하십니까?”
국다가 말했다.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소.”
그래서 법사는 즉시 『구사』의 처음 구절을 인용하여 질문했는데, 국다의 대답은 처음부터 틀렸다. 법사가 다시 추궁해 들어가자 국다는 안색이 달라지면서 말했다.
“다른 구절을 물어보시오.”
현장이 또 다른 한 구절을 묻자 역시 말을 못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논(論)에는 그런 말은 없소.”
왕의 숙부(叔父)인 지월(智月)은 출가한 사람으로서 경론에 밝았는데, 그때 마침 옆에 앉아 있다가 이렇게 증언했다.
“논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들어 그 구절을 읽어 주었다.
국다는 매우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늙어서
잊었을 뿐이오.”
그러나 다른 부분을 질문해도 역시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했다.
아직 능산(凌山)12)의 눈길이 트이지 않아 출발하지 못하고 60여 일을 머무는 동안 관광도 하고 때때로 국다를 찾아가서 말을 걸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다는 법사의 얼굴을 보고도 본체만체하고 바쁘다고 피해버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이 중국[支那]13) 승려는 섣불리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 인도에 가더라도 저 젊은이 같은 이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법사를 두려워하고 경탄함이 이와 같았다. 출발하는 날이 되자 왕은 일꾼과 낙타를 내주었고, 승려와 속인들이 함께 모든 정성을 다해 전송해 주었다.
거기서부터 서쪽으로 이틀 동안 가다가 돌궐(突厥)의 도적 2천여 기(騎)를 만났다. 그 도적들은 행인들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서로 나누다가 각기 불평하고 다투며 싸우다가 흩어져버렸다.
또 앞으로 6백 리를 지나 조그마한 사막을 건너서 발록가국(跋祿迦國)옛날에는 고묵(姑墨)이라 하였다.에 이르러 하룻밤을 잤다.
거기서 서북쪽으로 3백 리를 가서 사막 하나를 지나 능산(凌山)에 이르렀다. 이곳은 총령(蔥嶺)14)의 북쪽 기슭으로서 그 산은 험준하고 하늘에 닿을 듯이 높았다. 개벽(開闢) 이래 빙설(氷雪)이 쌓이고 쌓여서 빙산(氷山)이 되었는데, 봄과 여름에도 얼음덩이가 녹지 않고 빙산처럼 얼어붙어서 마치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하였다. 쳐다보면 흰 빛이 끝없이 뻗어 있는데, 얼음 봉우리가 길옆에 무너져 있는 것이 어떤 것은 높이가 백 척 가량 되고 어떤 것은 넓이가 수백 평이나 되었다.
이처럼 길이 좁고 험해서 이 고개를 넘기가 무척 어려웠다. 거기에다 눈보라가 휘몰아쳐 아무리 털옷을 겹겹이 입어도 추위를 면할 수가 없었으며,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할 때에도 머물 만한 마른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솥을 걸어 밥을 하고 얼음 위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이렇게 7일의 여행 끝에 비로소 산을 벗어났는데 일행 중에 열이면 서너 사람은 병들어 죽거나 얼어 죽었고 소나 말은 그보다 더했다.
산을 벗어나서 한 청지(淸池)청지는 열해(熱海)라고도 한다. 능산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얼지 않아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고 그 물이 따뜻하다는 뜻은 아니다.에 이르렀다. 둘레가 1,400 내지 1,500리가 되며 동서는 길고 남북으로는 좁다. 바라보니 망망하고
거센 바람이 없어도 여러 길 되는 높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호수를 따라 서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서 소엽성(素葉城)15)에 이르러 돌궐의 섭호가한(葉護可汗)을 만났는데, 마침 사냥을 나가기 위해 말을 많이 준비해 놓고 있었다. 가한은 초록색의 엷은 비단옷을 입었고, 머리카락은 한 길이나 되었으며, 명주로 이마를 감싸서 뒤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달관(達官)16) 2백여 명도 다 비단옷을 입고 머리를 땋아 변발(編髮)17)을 한 채 가한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밖의 병사들은 다 가죽옷이나 털옷을 입었으며 창과 활을 가졌는데, 낙타나 말을 탄 사람들로 한눈에 다 파악할 수가 없었다.
법사를 보자 가한은 기뻐하며 말했다.
“제가 수렵을 나갔다가 2~3일 뒤에 올 테니 법사께서는 제 막사에 계십시오.”
그리고 달관인 답마지(答摩支)로 하여금 인도하여 편히 계시도록 했다. 3일이 되자 가한이 돌아와서 법사를 인도하여 자신이 거처하는 큰 천막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천막은 눈이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게 금화(金花)로 장식되어 있었다. 모든 달관들은 천막 앞에 긴 자리를 깔고 두 줄로 앉아 있는데 모두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며 나머지 병사들은 천막 뒤에서 호위하며 서 있었다. 이것을 보니 비록 흉노(匈奴)의 군장(君長)이라고는 하나 매우 존엄하였다.
법사가 천막 앞으로 30여 걸음을 다가가자 가한이 천막을 나와 마중하며 절을 하고 위로의 말을 전한 뒤 자리에 앉았다. 돌궐(突厥)은 불을 섬기기 때문에 침상을 쓰질 않는다. 왜냐하면 나무는 불에 타기 때문에 상극이라 하여 쓰지 않고 다만 땅바닥에 겹으로 된 요를 깔 뿐이다. 그래서 법사를 위해 쇠로 된 침상을 만들어 요를 깔고 앉도록 하였다.
잠시 후 한나라 사신과 고창에서 온 사신을 인견하였는데, 들어오자 국서(國書)와 신물(信物)을 바쳤다. 가한은 이들을 보자 매우 기뻐하며 사신들을 자리에 앉도록 하고 주연을 베풀며 음악을 연주토록 명하고, 여러 신하와 사자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즐겼다.
그러나 법사에게는 따로 포도즙[蒲桃漿]을 올렸다. 이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이 계속 오가는 가운데 금말도리(僸秣兜離)라는 음악이 은은히 울려 퍼지면서 온갖 악기 소리가 울렸다.
이 역시 토번 풍속의 음악이긴 하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음식이 들어왔는데 삶은 양고기와 쇠고기로 만든 음식이 눈앞에 가득 쌓였다.
법사에게는 별도로 정식(淨食)을 바쳤는데 떡과 밥과 우유와 꿀과 자밀(刺蜜)과 포도 등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다시 포도즙을 돌리고, 그런 후에 법을 설해주기를 청하였다.
법사는 10선(善)18)과 물명(物名)의 애양(愛養) 및 바라밀다(波羅蜜多)19)와 해탈(解脫)의 업에 대해서 가르쳤다. 가한은 손을 들어 이마를 치고 환희하면서 믿음으로 받들었다.
여기서 여러 날을 머물렀는데 가한은 더 머물기를 권하며 말했다.
“법사께서는 인특가국(印特伽國)곧 인도이다.에는 가지 마십시오. 그 나라는 대단히 무더워서 10월이 되어도 이곳 5월처럼 덥습니다. 법사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 나라에 가시면 병이 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검은 피부에다 위의(威儀)도 없이 벌거벗고 다니니 뾰족하게 볼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지금 그 나라에 가는 것은 성스런 자취를 찾아보고 애타게 법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가한은 할 수 없이 군대 안에 명령을 내려 중국어와 다른 여러 나라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찾게 했다.
마침 한 소년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안(長安)에 가서 수년 동안 있어서 중국어에 능통했다. 그래서 즉시 통역관인 마돌달관(摩咄達官)20)에 임명하고 여러 나라에 보낼 국서(國書)를 만들게 한 뒤, 마돌로 하여금 법사를 가필시국(迦畢試國)21)에까지 모시고 가도록 했다. 그리고 비단으로 만든 법복 한 벌과 명주 50필을 보시하고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10여 리 밖까지 전송해 주었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4백여 리를 가서 병률(屛聿) 땅에 이르렀다. 이곳은 천천(千泉)22)이라고도 하는데, 이 지방은 둘레가 수백 리나 되며 못도 많고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시원하므로 가한의 피서지이기도 하였다.
병률에서 서쪽으로 150리를 가서 달라사성(呾邏斯城)에 도착했고, 다시 서남쪽으로 2백 리를 더 가서 백수성(白水城)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서남쪽으로 2백 리를 가서 공어성(恭御城)에 이르렀다.
다시 남쪽으로 50리를 가서 노적건국(笯赤建國)노고반(奴故反)이다.에 도착했고, 다시 서쪽으로 2백 리를 가서 자시국(赭時國)23)당나라 말로는 석국(石國)이다.에 도착했는데, 이 나라
서쪽에는 섭섭하(葉葉河)24)가 흐르고 있다.
또 서쪽으로 1천 리를 가서 솔도리슬라국(窣堵利瑟那國)에 이르렀는데, 이 나라는 동쪽으로 섭섭하와 연해 있다. 이 강은 총령(蔥嶺)의 북쪽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또 서북쪽으로 나아가 큰 사막에 들어섰는데 물도 없고 풀도 없이 오직 나뒹구는 해골들을 보며 전진했다.
5백 리를 가서 삽말건국(颯秣建國)당나라 말로는 강국(康國)이라 한다.에 이르렀다. 이곳은 왕이나 백성들이 불법을 믿지 않고 불[火]을 섬기는 조르아스터교를 믿고 있었다. 절이 두 개 있었으나 승려는 살고 있지 않았고 객승(客僧)들이 찾아들면 사람들은 불을 피워 쫓아내고 머물지 못하게 했다.
법사가 처음 왕을 만났을 땐 왕은 매우 거만하게 대했었다. 그러나 며칠 묵으면서 인천(人天)의 인과(因果)와 찬불(讚佛)의 공덕과 공경(恭敬)의 복리(福利)에 대해 설해 주었더니 왕은 기뻐하며 재계(齋戒) 받기를 청하고, 마침내 은근히 따르게 되었다.
법사를 따라온 두 소년 승이 절에 가서 예배를 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와서 불을 피우고는 사미를 쫓아내었다. 돌아와서 이 일을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은 불을 피운 자를 잡아다가 백성들이 운집한 자리에서 그의 손을 자르라고 명령했다. 법사가 이에 대해 듣고는 자선을 권고하고 차마 그 사람의 손을 자르지 못하게 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었다. 왕은 결국 무거운 태형(笞刑)을 내리고 성 밖으로 추방해 버렸다.
이로부터 높은 이나 낮은 이나 모두 숙연해져서 법사에게 신앙을 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큰 법회[大會]를 열고 사람들을 제도하여 절에 거처하도록 하였다. 법사는 그들의 삿된 마음을 고쳐 바로잡고 어리석은 풍속을 계몽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이와 같이 하였다.
다시 서쪽으로 3백여 리를 가서 굴상이가국(屈霜儞迦國)에 이르렀고 거기서 또 서쪽으로 2백여 리를 가서 갈한국(喝扞國)당나라 말로는 동안국(東安國)이라 한다.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4백 리를 가서 보갈국(捕喝國)25)당나라 말로는 중안국(中安國)이라 한다.에 이르렀고 다시 서쪽으로 1백여 리를 가서 벌지국(伐地國)26)당나라 말로는 서안국(西安國)이라 한다.에 이르렀으며 다시 서쪽으로 5백 리를 가서 화리습미가국(貨利習彌伽國)27)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동쪽으로 박추하(縛芻河)28)에 위치해 있다.
거기서 서남쪽으로 3백여 리를 가서 갈상나국(羯霜那國)29)당나라 말로는 사국(史國)이다.에 이르렀고 다시 서남쪽으로 2백 리를 가니 산으로 접어들었다. 산길은 매우 험악하여 겨우 한 사람이 걸어갈 수 있었으나 물도 없고 풀도 없었다. 산길을 3백여 리 걸어가서
철문(鐵門)30)에 들어섰는데 봉우리는 가파르고 절벽의 돌에는 철광(鐵礦)이 많아 이 때문에 문을 만들고 그 위에 쇠로 방울을 만들어 많이 달아 놓았다. 이래서 철문이라 붙였는데 돌궐의 관문이기도 하다.
철문을 나와 도화라국(睹貨羅國)31)옛날에는 토화라(吐火羅)라고도 하였다.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수백 리를 가서 박추하(縛蒭河)32)를 건너 활국(活國)33)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섭호가한의 장남 달도설(呾度設)설(設)은 벼슬 이름이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는 고창왕(高昌王)의 매제(妹弟)였으므로 고창왕의 편지를 가지고 찾아갔다.
그런데 법사가 도착했을 때는 공주(公主) 가하돈(可賀敦)34)은 이미 죽고 없었으며 달도설 역시 병중에 있었다. 달도설은 법사가 고창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또 편지까지 받아보자 그곳에 있던 남녀들과 함께 오열을 금치 못했다.
달도설은 법사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법사를 뵈오니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바라건대 조금 더 머물러 주십시오. 만약 병에 차도가 있으면 제가 직접 법사님을 바라문국에까지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한 범승(梵僧)이 찾아와서 주문(呪文)을 외우자 병이 점점 회복되었다. 그 뒤 달도설은 나이 어린 왕비를 새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새 왕비가 전처의 큰 아들과 짜고 왕을 독살했다. 달도설이 죽고 나서는 고창왕의 공주가 낳은 아들은 아직 어렸으므로 마침내 큰 아들 특근(特勤)35)이 설(設)36)의 지위를 찬탈하고 그 새어머니를 아내로 삼았다.
법사는 상(喪)을 만나는 바람에 한 달 가량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활국에는 달마승가(達摩僧伽)라는 사문이 있었는데, 인도에 유학했기 때문에 총령 서쪽 나라에서는 그를 법장(法匠)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그래서 소륵(疏勒)이나 우전(于闐)37)의 승려들도 감히 대담하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법사는 그의 학문의 깊이를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에게 그가 몇 권의 경론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여러 제자들은 이런 말을 듣고 화를 냈으나 달마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 알고 있으니 마음대로 물어보시오.”
법사는 그가 대승(大乘)은 배우지 않은 것을 알고 소승의 『바사(婆沙)』 등에 대해 몇 가지를 질문했으나 그는 시원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법사에게 승복하였고 그 제자들도 부끄러워하였다.
이로부터는 서로 만나면 기뻐하면서 가는 곳마다 자기들은 법사에게 미치지 못한다며 칭찬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 얼마 뒤에 새로운 설(設)이 즉위하였다.
법사가 안내자와 오락마(鄔落馬)38)를 구하여 남쪽 바라문국으로 떠나려고 하자 설이 이렇게 말했다.
“저의 관내에 박갈국(縛喝國)39)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북쪽에는 박추하(縛芻河)가 흐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소왕사성(小王舍城)이라 부르며 성스러운 유적도 매우 많습니다. 바라건대 법사께서는 잠시 가서 둘러보신 뒤에 남쪽으로 내려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때 마침 박갈국의 승려 수십 명이 달도설이 죽고 그 아들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조문하러 와 있었다. 법사가 그들을 만나 의사를 타진하니 그들이 말했다.
“마땅히 가셔야지요. 거기를 가시면 좋은 길도 있으니 다시 이곳으로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법사는 그들의 말에 따라 곧 설과 헤어져 탈 것에 타고 그 승려들을 따라갔다. 박갈국에 도착해서 보니 그 성읍(城邑)은 교외가 넓게 트였고 물이 흐르는 기름진 들판이 있는 참으로 좋은 땅이었다. 가람(伽藍)도 백여 개나 있고 승려들도 3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소승을 공부하고 있었다.
성 밖의 서남쪽에 납박가람(納縛伽藍)당나라에서는 신(新)이라 한다.이 있는데 장식이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였다. 가람 안의 불당에는 한 말들이의 커다란 부처님 세숫대야가 있고 또 길이가 1촌(寸)에 너비가 8ㆍ9푼이나 되는 불치(佛齒)가 모셔져 있었는데 매일 황백색의 광채를 내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쓰시던 빗자루가 있는데, 가사초(迦奢草)40)로 만들어졌으며 길이가 3척 남짓하고 둘레는 7촌 정도였다. 그 빗자루의 손잡이는 여러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세 가지는 재일(齋日) 때마다 공개하며 승속(僧俗)들이 이것을 보고 예배드린다. 지극한 정성이 있는 사람은 감동하여 신광(神光)을 발한다고 한다.
가람의 북쪽에는 솔도파(窣堵波)41)가 있는데 높이가 2백여 척이나 되었다. 가람 서남쪽엔 정려(精廬)가 한 채 있는데 건립한 지 오래된 것으로 그 안에서 도를 닦아 4과(果)42)를 증득한 사람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열반에 들면 모두 탑을 세우는데 그 탑이 백여 개나 서로 줄지어 서 있다.
박갈국 큰 성에서 서북쪽으로 50리를 가면 제위성(提謂城)에 이른다. 그 성의 북쪽 40리쯤에 바리성(波利城)이 있는데 성 가운데에 높이가 세 길이나 되는 두 개의 탑이 있다.
옛날에 부처님이 처음 성도(成道)하셨을 때 제위와 바리 두 장자(長者)가 보릿가루와 꿀을 바친 곳이라 한다.
두 장자가 처음 5계(戒)와 10선(善)을 듣고 아울러 여래를 공양하기를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주시면서 탑을 만들게 하고 조탑(造塔) 의식도 거행했다. 두 장자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 영찰(靈刹)을 짓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절이다.
성(城)의 서쪽 70여 리 되는 곳에 높이가 두 길이 넘는 탑이 있는데 이것은 과거 가섭불(迦葉佛)43)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납박가람에는 책가국(磔迦國)44)의 소승(小乘) 삼장(三藏)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반야갈라(般若羯羅)당나라에서는 혜성(慧性)이라 음역한다.라고 하였다. 그도 박갈국에 성적(聖跡)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예경(禮敬)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이 사람은 총명하고 학문을 숭상하였다. 젊어서부터 머리가 뛰어나 9부(部)45)를 연구하고 4함(含)46)을 섭렵하여 깊은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인도에까지 퍼져 있었다.
그는 소승의 『아비달마(阿毘達磨)』47)ㆍ『가연(迦延)』ㆍ『구사(俱舍)』ㆍ『육족아비담(六足阿毘曇)』 등 통달하지 않은 경전이 없었다. 그는 법사가 멀리서 법을 구하러 왔다는 것을 듣고 찾아왔는데 서로 만나보고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법사가 그에게 『구사』ㆍ『바사』 등의 경전에 의심나던 곳을 질문했는데, 그의 대답은 매우 정교하고 원숙하였다. 그래서 법사는 이곳에 한 달 남짓 머물면서 그에게 『비바사론(毘婆沙論)』을 배웠다. 그리고 이 절에는 달마필리(達摩畢利)당나라 말로는 법애(法愛)이다.와 달마갈라(達摩羯羅)당나라 말로는 법성(法性)이다.라고 하는 두 분의 소승의 삼장이 있었는데, 모두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법사의 준수한 용모를 보고는 매우 존경하며 우러렀다.
당시 박갈국의 서남쪽에는 예말타(銳末陀)48)와 호시건(胡寔健)49)이라는 두 나라가 있었다. 그 왕은 법사가 먼 나라에서 왔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들을 보내서 자기 나라에도 들러 공양을 받도록 간청했다. 법사는 사양하고 가지 않으려 했으나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왔으므로 부득이하게 가게 되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법사에게 금과 보석을 바치고 음식을 베풀었으나 법사는 모두 받지 않고 되돌아갔다.
박갈에서부터 혜성 법사(慧性法師)와 함께 남행(南行)하여 게직국(揭職國)에 이르렀고, 다시 동남쪽으로 대설산(大雪山)으로 들어가 6백여 리를 행진하여
도화라(睹貨羅)의 국경으로 나왔다가 범연나국(梵衍那國)50)으로 들어섰다. 이 나라는 동서의 길이가 2천여 리나 되었으며, 설산(雪山) 속에 있다. 도로가 얼마나 험했든지 빙하나 사막길보다 배나 더 힘들었다. 두꺼운 구름은 잠시도 쉬지 않고 눈을 날렸는데, 심한 곳은 평지보다 수 길이나 높게 눈이 쌓여 있었다.
옛날에 송옥(宋玉)51)이 읊은 글도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서방길의 험난함이여
치솟은 빙산(氷山)에다
눈 날리는 천리길이로다.
아, 만약에 중생을 위하여 무상(無上)의 정법(正法)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으로 이런 길에 올랐으랴.
그 옛날 왕준(王遵)52)은 이 아홉 구비의 언덕에 올라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한(漢) 나라의 충신이다.”
그러니, 법사가 지금 눈 봉우리를 넘어 경전을 구하러 가는 것은 바로 여래의 참된 제자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범연나국의 도성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10여 개의 절이 있고 승려 수가 1천 명이나 되는데, 소승의 출세설부(出世說部)53)를 배우고 있었다.
범연나국의 왕이 마중 나와 궁궐로 모셔다가 공양을 베풀고, 여러 날을 머물다가 겨우 떠나도록 했다.
범연나에는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Mahāsaṅghika)54)의 학승 아리야타바(阿梨耶駄婆:Aryadāsā)당나라 말로는 성사(聖使)라 한다.와 아리야사나(阿梨耶斯那)당나라 말로는 성군(聖軍)이라 한다.가 있었다. 모두가 법상(法相)에 대해 깊이 잘 알고 있었는데 법사를 보고는 중국같이 먼 나라에도 이런 승려가 있는 것에 경탄하고 각지를 안내하며 친절을 베풀었다.
왕성(王城)의 동북에 있는 산에는 높이 150척이 되는 석상(石像)이 세워져 있었다. 석상 동쪽에 절이 있었고 절 동쪽 켠에는 동(銅)으로 주조한 석가모니 입상(立像)이 있었는데 그 높이가 1백 척이나 되었다.
절 안에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는 모습의 와상(臥像)이 있는데 길이가 1천 척이나 되었고 모두가 장엄하고 절묘했다.
여기서부터 동남쪽으로 2백여 리를 더 가서 큰 설산을 지나 작은 강에 이르렀다. 여기에도 절이 있었고, 불치(佛齒)와 겁초(劫初) 때의 독각(獨覺)의 치아를 모셨는데, 그 길이는 5촌(寸)이고 너비는 4촌이 조금 안 되었다. 그리고 또 길이 3촌, 너비가 2촌인 금륜왕(金輪王)55)의 치아도 있었다.
그리고 상낙가박바(商諾迦縛婆)
옛날에는 상나화수(商那和修)라 불렀다.가 가지고 던 7~8되 들이 쇠발우와 붉은 색의 승가지의(僧伽胝衣)56)가 있었다. 상낙가박바는 5백 생 동안을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한다. 그는 항상 모태(母胎)에서 나올 때부터 이 옷을 입고 나왔고 이것이 뒤에 변해서 가사(袈裟)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인연은 다른 책[西域記]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렇게 하여 15일이 지난 뒤에 범연나를 출발했는데 이틀 만에 눈이 내려 길을 잃었다가 한 작은 모래 언덕에 이르러 사냥꾼을 만나 길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흑산(黑山)57)을 건너 가필시(迦畢試)의 국경에 도착했다. 이 나라는 둘레가 4천여 리이며 북쪽으로 설산(雪山)을 등지고 있다.
왕은 찰리종(刹利種)58)으로서 병략(兵略)에 밝고 위엄이 있으며 10여 개의 나라를 통솔하고 있었다. 도성 가까이에 이르자 왕은 여러 승려와 함께 성 밖으로 나와 법사를 맞이해 주었다. 절은 백여 개가 있었으며 여러 승려들이 앞 다투어 법사를 자기 절로 모시려 하였다.
그때 사락가(沙落迦)라는 소승의 절이 있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한(漢) 나라 천자(天子)의 태자가 이 나라에 인질로 잡혀 왔을 때 지었다고 한다. 이 절의 승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 절은 원래 한나라 천자의 아들이 창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 오셨으니 마땅히 저희 절에 먼저 머무르셔야 합니다.”
법사는 그의 간절하고 지성스러움을 보고, 또 동행한 혜성 법사가 같은 소승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대승의 절에 머물기를 꺼리는 것 같아 결국 거기에 가서 머물렀다.
그런데 인질로 온 태자는 이 절을 세울 때, 한량없는 진보(珍寶)를 불당(佛堂)의 동문 남쪽에 있는 대신왕(大神王)의 발밑에 매장했다고 한다. 후에 절을 보수할 때 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승려들은 태자의 은혜를 알고 곳곳의 벽에다 태자의 형상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안거(安居)가 끝나는 날에는 태자를 추모하며 강송(講誦)으로 복을 심는 관습이 대대로 전해져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부근에 악한 왕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탐욕이 많고 포악하여 승보(僧寶)를 빼앗기 위해 사람을 시켜 대신왕의 발밑을 파게 했다. 그러자 땅이 갑자기 크게 흔들리고 대신왕 상(像)의 머리 위에 있는 앵무새의 상이 발굴되는 것을 보고는 날개를 퍼덕이며 놀란 듯이 울어댔다. 그러자 악한 왕과 병사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절에 있는 탑의 맨 위에 있는
상륜(相輪)이 부서져 승려들이 보물을 꺼내서 수리하려 했으나, 역시 땅이 진동하여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이때 법사가 이 절에 이르자 대중들이 다 운집하여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법사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법사는 함께 대신왕 앞에 이르러 향을 사르고 고했다.
“인질로 잡혀온 태자가 원래 이곳에 보물을 묻은 뜻은 공덕을 쌓기 위함입니다. 지금 그 보물을 꺼내어 쓰려는 것은 진실로 지금이 바로 그때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혀 사심이 없다는 것을 살피시고 위엄의 덕을 거두어 주소서.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현장은 직접 발굴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 무게를 파악하여 관리에게 넘기겠습니다. 여법(如法)하게 수리하도록 하여 헛되이 쓰지 않겠나이다. 신(神)의 영(靈)이시여, 바라건대 굽어 살펴 주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사람들에게 명하여 발굴하게 했는데 아무 우환이 없었다. 발굴을 하여 깊이 7~8척 되는 지점에 이르자 하나의 커다란 동기(銅器)를 얻었는데, 그 안에 황금 수백 근과 밝은 구슬 수십 과(顆)가 나왔다. 대중들은 기뻐하며 법사의 법력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법사는 그 절에서 하안거(夏安居)를 보내게 되었다.
가필시국왕은 예의 구속[禮羅]을 가벼이 여기고 오직 대승만을 깊이 믿었기 때문에 강송(講誦)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법사와 혜성삼장을 설득시켜 어떤 대승의 절에서 법회를 열었다.
그 절에는 대승의 삼장인 말로약구사(秣奴若瞿沙)당나라 말로는 여의성(如意聲)이라 한다.와 살바다부(薩婆多部)59)의 승려 아려야벌마(阿黎耶伐摩)당나라 말로는 성조(聖曺)라 한다.와 미사새부(彌沙塞部)60)의 승려 구나발타(求那跋陀)당나라 말로는 덕현(德賢)이라 한다.가 있었는데, 모두 이 나라의 제일인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학문이 두루 통하지 못하고 대승과 소승으로 각각 나뉘어져서 비록 하나의 이치에 정통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한쪽에만 뛰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법사는 모든 교리를 두루 알고 있어서 질문하는 내용에 따라서 각각 거기에 맞는 대답을 해주었으므로 모두가 탄복하였다. 이렇게 하여 5일간의 법회는 끝났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순정한 비단 다섯 필을 특별히 법사에게 보시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주었다.
사락가(沙落迦) 절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혜성 법사는 다시 도화라왕(睹貨羅王)의 부름을 받아 돌아가게 되어 법사와 헤어졌다.
법사는 동쪽으로 6백여 리를 진행하여 흑령(黑嶺)을 넘어 북인도에 들어가
남파국(濫波國)에 이르렀다. 이 나라의 둘레는 1천여 리이며 절은 열 개나 있고 승려들은 모두 대승을 배우고 있었다.
여기서 3일 동안 머물렀다가 남쪽으로 가서 하나의 작은 산에 이르렀다. 이 산에는 탑이 있었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옛날에 남쪽으로부터 걸어오시다가 여기에 이르러 서 계시던 곳이라 한다. 후세 사람들이 그 일을 경모(敬慕)하여 이 탑을 건립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북쪽의 경계 지역은 모두 멸려차(蔑戾車:Mleccha)61)당나라 말로는 변지(邊地)이다.라 한다. 여래께서는 교화하실 때 허공을 타고 왕래하며 땅을 밟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만약 땅 위를 걷게 되면 땅이 기울고 흔들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20여 리, 산을 내려가 강을 건너 나게라갈국(那揭羅喝國:Nagarahāra)북인도의 국경이다.에 이르렀다. 큰 성의 동남쪽 2리 되는 곳에는 높이 3배여 척 되는 탑이 있는데, 무우왕(無憂王)62)이 조성한 것이라 한다. 이곳은 석가보살이 제2 승기(僧祇)63) 때 연등불(然燈佛)64)을 만나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을 깔고 머리카락으로 진흙을 덮고 수기(受記)를 얻은 곳이라 했다. 비록 겁괴(劫壞)65)를 지났으나 그 유적은 항상 남아 있어서 하늘이 여러 가지 꽃을 뿌려서 공양을 하고 있었다.
법사가 그 탑으로 가서 예배하며 주위를 돌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노승(老僧)이 탑이 건립 인연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법사가 물었다.
“보살이 머리카락을 땅에 깔았던 그 때는 제2 아승기였습니다. 제2 아승기에서 제3 아승기에 이르기까지는 그 중간에 무량겁(無量劫)을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 한 겁 한 겁마다 세계는 만들어졌다가 괴멸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겁괴(劫壞)의 불이 일어났을 때 소미로산(蘇迷盧山)도 재로 변한다고 하는데 어째서 이 유적만 손상이 없습니까?”
노승이 대답했다.
“세계가 무너질 때 이 유적도 따라 무너집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시 이루어질 때면 본래대로 이 유적도 다시 나타납니다. 저 소미로산도 무너졌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어찌 성적(聖跡)만이 없어지겠습니까? 이로써 생각해보면 굳이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이 또한 훌륭한 답변이었다.
여기서 서남쪽 10여 리 되는 곳에도 탑이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꽃을 산 곳이라 한다.
다시 동남쪽으로
모래 언덕을 넘어 10여 리를 가서 불정골성(佛頂骨城)66)에 이르렀다. 이 성안에는 2층 누각이 있는데, 그 2층에는 7보(寶)로 된 작은 탑이 있어 여래의 정골(頂骨)이 그 안에 모셔져 있다. 정골의 둘레는 1척(尺) 2촌(寸)이고, 털구멍도 분명하며 그 색은 황백(黃白)인데 보함(寶函) 속에 들어 있다.
만약 죄복(罪福)을 점치고자 하는 사람은 향 가루를 이겨 반죽하여 명주 헝겊에 싸서 이 정골 위에 덮어 놓고, 나타나는 상으로 길흉을 정한다고 했다. 법사도 그렇게 해봤더니 그 헝겊에 보리수(菩提樹)의 상(像)이 나타났다. 데리고 온 두 사미 가운데 큰 사미한테는 불상(佛像)이 나타났으며 작은 사미한테는 연화상(蓮華像)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 정골을 지키고 있던 바라문67)은 기뻐서 법사를 향해 손가락을 퉁겨[彈指]68) 꽃을 뿌리며 말했다.
“법사께서 얻으신 상은 매우 희귀합니다. 이는 보리(菩提)의 분별력이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뼈를 모신 촉루골탑(髑髏骨塔)에 있는데 뼈의 모양은 연잎 같으며, 그리고 부처님의 안정(眼睛)이 모셔져 있는데 눈동자 크기가 능금[柰]69)만하고 휘황한 광명이 상자 밖으로 비쳐 나왔다. 또 최상의 고운 모직으로 만든 부처님의 승가지(僧伽胝)70)가 있으며, 그리고 백철(白鐵) 고리가 달리고 전단(栴檀)71)으로 만든 부처님의 석장(錫杖) 등이 있었다.
법사는 각 유품마다 예배를 드리고 간절한 공경의 뜻을 다했다. 그래서 이 절에 금전 50, 은전 1천, 명주로 된 번(幡) 4구, 비단 2단(端)72), 법복 2벌을 시주하고 많은 꽃을 뿌리고 절을 한 뒤 나왔다.
또 법사는 등광성(燈光城)73) 서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구파라용왕(瞿波羅龍王)이 머물던 암굴74)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옛날에 여래께서 이 용을 항복시켰는데 지금도 그 안에 부처님의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법사는 그곳으로 가서 예배드리려고 했으나 길이 험악하고 또 도적들이 많아서 2,3년 사이에 왕래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 가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그래도 법사는 가서 예배드리려고 했는데, 이때 가필시국(迦畢試國)에서 따라온 사신이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더 머물기를 꺼려하며 가지 말자고 하자 법사가 말했다.
“여래 진신(如來眞身)의
모습은 억겁(億劫)을 지나도 만나기 어렵소.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예배를 드리러 가지 않을 수 있겠소. 그대들은 앞서 가고 있으시오. 나는 잠시 들렀다가 가겠소.”
그리고는 법사는 혼자서 등광성에 도착하여 한 절에 들어가 그곳까지의 길을 묻고 안내해 줄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한 사람도 나서는 자가 없었는데 마침 뒤에 있던 한 소년이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절의 장원(莊園)이 그 근방에 있는데 지금 법사님을 장원까지는 모셔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곧 그와 동행하여 장원에 이르러 묵게 되었다. 그때 그 굴의 위치를 알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나 안내를 받고 출발했다.
몇 리를 나아가자 다섯 명의 도적이 칼을 빼들고 다가왔다. 이때 법사는 즉시 모자를 벗고, 법복을 입은 승려임을 나타냈다. 그러자 도적이 물었다.
“법사께서는 어디를 가려고 합니까?”
법사가 대답했다.
“부처님의 진영(眞影)에 예배드리려고 가는 길이오.”
도적이 말했다.
“법사께서는 이곳에 도적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대답했다.
“도적도 사람이지요. 지금 부처님께 예배드리러 가는 길인데, 비록 맹수들이 길에 득실거린다 해도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단월(檀越)75)들께서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도적들도 마침내 발심(發心)하여 법사를 따라가서 예배하게 되었다.
굴에 이르러보니 굴은 물이 흐르는 동쪽 암벽에 있었고, 입구는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컴컴하여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노인이 말했다.
“법사께서 곧장 들어가면 동쪽 암벽에 닿을 것입니다. 거기서 50보 쯤 물러나서 정동(正東)쪽을 바라보면 부처님의 진영(眞影)이 그곳에 있을 것이오.”
법사는 들어가서 발걸음을 재며 앞으로 50보 쯤 가니 과연 동쪽 암벽에 닿았다. 그래서 뒤로 물러서서 정성을 다하여 백여 번 절을 하였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업장이 두꺼움을 원망하고 비탄에 빠져 고뇌하면서도 다시 지극한 마음으로 『승만경(勝膵經)』76) 등 여러 경전과 찬불게송(讚佛偈頌)을 독송하였다. 찬불하고 예불하고 또 백여 번 절을 하고 나서 동쪽 벽을 보니 발우만한 빛이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다. 희비(喜悲)가 교차된 가운데 계속 예배를 드리니 다시 쟁반만한 빛이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법사는 더욱 감동하는 마음이 더해져 스스로 맹세하기를 ‘만약 세존의 진영(眞影)을 뵙지 못한다면 끝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또다시 2백여 번 예배를 올리자 드디어 굴 전체가 환해지더니
여래의 모습이 확연히 암벽에 나타났다. 이는 마치 삽시간에 운무(雲霧)가 개여서 황금빛 산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여래의 모습은 온화하고 거룩했으며 몸에서 환한 빛이 났다. 법사가 우러러보며 기뻐하는 마음이란 어디에 비할 데가 없었다. 불신(佛身)과 가사는 모두 적황색이었고 무릎에서부터 머리까지의 상호(相好)도 매우 분명했으나 연화대좌(蓮華臺座) 아래부터 조금 희미하였다.
무릎 좌우와 뒤쪽에는 보살과 성승(聖僧)들의 모습도 역시 갖추어져 있었다.
법사는 친견한 다음 문 밖에 있는 여섯 사람에게 명하여 불을 갖고 들어오도록 하여 향을 사르려고 했다. 그런데 불을 가지고 오자 갑자기 부처의 모습이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급히 불을 끄게 하고 다시 청하였더니 이윽고 다시 나타나셨다. 그런데 여섯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만 보았을 뿐 한 사람은 끝내 보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반 식경(食頃) 남짓 부처님의 모습을 명확히 볼 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예찬(禮讚)하고 꽃과 향을 공양하고 나자 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모두들 밖으로 나왔다. 법사를 모시고 온 바라문은 기뻐하며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법사의 지극한 정성의 원력(願力)이 깊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굴 문 밖에도 수많은 성적(聖跡)이 있었는데 이는 다른 책77)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런 후에 함께 돌아왔으며 그 다섯 명의 도적들은 칼을 버리고 법사에게 계를 받고는 헤어졌다.
여기서부터 법사는 다시 일행들과 만나서 함께 동남쪽으로 5백여 리의 산길을 나아가 건다라국(健陀邏國)옛날에 건타위(健陀衛)라 한 것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이 나라의 동쪽은 신도하(信度河)78)에 임해 있고 도성(都城)은 포로사포라(布路沙布羅)라 불렀다.
이 나라에서는 성현(聖賢)이 많이 배출되어 예로부터 논(論)을 지은 여러 법사, 즉 나라연천(那羅延天:Nārāyana)79)ㆍ무착보살(無着菩薩:Asaṅ- gha)80)ㆍ세친보살(世親菩薩:Vasubandhu)81)ㆍ법구(法救:Dharmatrāta)82)ㆍ여의(如意:Manoratha)ㆍ협존자(脇尊者:Pārśva) 등이 모두 이 나라 출신이었다.
왕성(王城)의 동북쪽에 부처님의 발우를 놓아두었던 보대(寶臺)가 있었으나 발우는 그 뒤로 여러 나라에 옮겨졌다. 지금은 바자나사국(波刺拏斯國)에 있다.
성 밖의 동남쪽으로 8~9리 되는 곳에 필발라수(畢鉢羅樹)가 있는데 높이가 백여 척이나 된다. 과거의 네 부처님이 모두 이 나무 아래에 앉아 수행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네 여래의 상(像)이 거기에 있다. 앞으로 출현하실
996명의 부처님도 역시 이곳에 앉으시리라.
필발라수 옆에는 또 탑이 있는데 이는 가니색가(迦膩色迦:Kaniṣka) 왕이 만든 것으로 높이 4백 척, 기부(基部)의 둘레가 1.5리(里)이다. 높이 150척의 상단에는 금동상륜(金銅相輪)이 25층이나 되며 그 안에는 여래의 사리가 한 말이나 들어 있다.
이 큰 탑(塔)의 서남쪽으로 1백여 걸음 되는 곳에 흰 석상(石像)이 있는데 크기가 1장(丈) 8척이나 되고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영험과 상서로움이 많아서 이따금 불상이 밤에 큰 탑을 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다.
가니색가 가람으로부터 동북쪽으로 1백여 리를 가서 큰 강을 건너 포색갈라벌저성(布色羯羅伐底城)83)에 이르렀다. 성 동쪽에는 탑이 있는데 무우왕(無憂王)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곳은 과거 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곳이다.
성 북쪽 4~5리 되는 곳에 있는 가람 안에 2백여 척 되는 탑이 있는데 이것도 무우왕이 건립한 것이라 한다. 이곳은 석가불(釋迦佛)이 옛날에 보살도(菩薩道)를 행하실 때 혜시(惠施)를 즐겨 행하셨던 곳으로, 석가불께서 이 나라에 1천 번이나 환생하여 왕이 되시어 장님을 위해 천 번이나 눈을 뽑아주셨던 곳이라 하였다.
이러한 등등의 성적(聖跡)이 수없이 많은데 법사는 모두 두루 순례하고, 고창왕(高昌王)이 보시한 금과 은과 비단과 의복 등을 큰 탑이나 큰 가람에 다 나누어 공양하고 정성을 다한 뒤에 떠났다.
여기서부터 다시 더 나아가서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84)에 도착했다. 성 북쪽으로 산과 강을 건너 6백여 리를 행진하여 오장나국(烏仗那國)85)당나라에서는 원(苑)이라 한다. 옛날 아수가왕(阿輸迦王)86)의 동산이다. 전에 오장(烏長)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은 소바살도(蘇婆薩堵) 강을 끼고 있었다.
옛날에는 1천4백여 개의 가람이 있었고 승려는 무려 1만 8천 명이 되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지고 황무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곳 승려들의 율의(律儀)와 종파(宗派)는 5부(部)가 있었는데, 첫째는 법밀부(法密部)87), 둘째는 화지부(化地部)88), 셋째는 음광부(飮光部), 넷째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89), 다섯째는 대중부(大衆部)90)였다.
이 나라 왕은 주로
몽게리성(瞢揭椒城:Maṅgalipura)에 살았으며,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했다.
성 동쪽 4~5리 되는 곳에 커다란 탑이 있는데 기이하고 상서로운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곳은 옛날에 부처님이 인욕선인(忍辱仙人)이 되시어 갈리왕(羯利王:Kāli)당나라 말로는 투쟁(鬪諍)이다. 옛날의 가리(歌利)91)는 잘못이다.을 위해 몸을 잘랐다는 곳이다.
성의 동북쪽으로 250리를 가서 큰 산으로 들어갔다가 아바라라용천(阿波邏羅龍泉)92)에 이르렀다. 이곳은 소바(蘇婆)강의 상류로서 서남쪽으로 흐르고 있는데 이 지역은 한냉(寒冷)하여 봄과 여름에도 항상 얼어붙어 있다. 해가 지면 다섯 가지 빛깔을 머금은 눈이 날리는데, 내리는 모양이 마치 여러 가지 꽃잎이 난무(亂舞)하는 듯했다.
용천에서 서남쪽 30여 리 되는 강의 북쪽 언덕 반석(磐石) 위에는 부처님 발자취의 흔적이 있는데, 사람들의 복덕과 발원[福願]에 따라서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옛날에 아바라라용을 항복받았을 때 이곳에 오시어 족적을 남기고 가신 것이라고 한다.
다시 강을 따라 30여 리를 내려가면 여래께서 의복을 빨 때 사용하였다는 돌이 있는데, 가사 조각의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다.
성 남쪽으로 4백여 리를 가서 혜라산(醯羅山)에 이르렀다. 이곳은 옛날에 여래께서 반게(半偈)93)옛날에 게(偈)라 한 것은 범문(梵文)의 약자(略字)이다. 혹은 게타(偈陀)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범문을 잘못 읽은 것이니 지금은 정음(正音)을 따라 마땅히 가타(伽陀)라 해야 한다. 가타를 당(唐)에서는 송(頌)이라 하는데 송은 32언(言)으로 되어 있다.를 들으시고 약차(藥叉)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몸을 낭떠러지로 던져 투신한 곳이다.
몽게리성에서 서쪽으로 40~50리를 가서 큰 강을 건너 노혜달가(盧醯呾迦:Rohitaka)당나라말로는 적(赤)이다. 탑에 이르렀다. 탑의 높이는 10여 장(丈)이며 무우왕이 조성했다고 한다. 이곳은 여래께서 옛날에 자력왕(慈力王:Maitribara)94)이 되었을 때 칼로 몸을 베어 약차에게 먹였던 곳이다옛날에 야차(夜叉)라고 했던 것은 잘못이다..
성의 동북쪽으로 30여 리 가서 알부다(遏部多)당나라 말로는 기특(奇特)이다.의 석탑(石塔)에 이르렀는데 탑 높이는 30척이나 되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이곳에 계시면서 인천(人天)을 위해 설법하시던 곳인데, 부처님께서 가신 뒤에 저절로 이 탑이 솟아났다고 한다.
탑으로부터 서쪽으로 큰 강을 건너 3~4리를 더 가서 한 정사(精舍)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아박로지다이습벌라보살(阿縛盧枳多伊濕伐羅菩薩)당나라에서는 관자재(觀自在)라고 한다. 글자를 이어서 발음하면 범어(梵語)로는 위와 같지만,
그러나 글을 나누어 말하면 아박로지다(阿縛盧枳多)는 관(觀)이라 번역하고, 이습벌라(伊濕伐羅菩薩)는 자재(自在)라 번역한다. 옛날에 광세음(光世音), 또는 관세음(觀世音),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라 한 것은 모두 잘못 된 것이다.이 있는데 두드러지게 영험하였다고 한다.
이 성의 동북쪽에도 사람이 산다는 말을 듣고 산곡(山谷)을 타고 넘어서 사다(徙多)95)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길은 매우 험하여 굵은 밧줄을 타고 기어오르기도 하고 구름다리[飛梁]를 건너기도 하여 거의 천여 리쯤 가자 달려라강(達麗羅江)96)에 이르렀다. 이곳은 오장나(烏杖那)의 옛 수도이다.
그 강의 중간에 있는 큰 가람 옆에 목각(木刻)으로 된 자씨보살상(慈氏菩薩像)이 있었다. 금색으로 장엄되었고 높이는 백여 척이나 되었는데 말전저가(末田底加:Madhyantika)97)옛날에 말전지(末田地)라 한 것은 잘못 된 것이다.라고 하는 아라한(阿羅漢)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신통력으로써 장인(匠人)을 데리고 도사다천(覩史多天)98)옛날에 도솔타(兜率陀)라 한 것은 잘못 된 것이다.에 올라 직접 미묘한 모습[妙相]을 관찰하기를 세 차례나 반복하며 마침내 완성하였다고 한다.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에서 남쪽으로 신도하를 건넜다. 이 강의 폭은 3~4리 되고, 매우 맑은 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 동굴 속에는 독룡(毒龍)과 사나운 짐승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인도의 기이한 보배나 이름난 꽃, 그리고 사리(舍利)를 가지고 이 강을 건너면 그 배는 전복해 버린다고 한다. 신도하를 건너서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99)북인도의 국경이다.에 이르렀다.
이 성의 북쪽으로 12~13리 되는 곳에 탑이 있었는데 무우왕이 건립한 것으로 항상 신령스러운 빛을 나타내고 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옛날에 보살도를 행하실 때 큰 나라의 왕이 되시어 이름을 전달라발자바(戰達羅鉢刺婆)당나라 말로는 월광(月光)이다.라 하여서 항상 보리(菩提)를 구하는데 뜻을 두어 천 번이나 머리를 버린 곳이다.
이 탑 옆에 가람이 있는데 옛날에 경부사(經部師) 구마라다(拘摩邏多)100)당나라 말로는 동수(童壽)이다.가 여기에서 『중론(衆論)』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동남쪽으로 7백여 리를 가면 승하보라국(僧揀補羅國)101)북인도의 국경이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달차시라의 북쪽 경계에서 신도하를 건너 동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서 큰 석문(石門)을 지나면, 옛날에 마하살타 왕자(摩訶薩埵王子)가 굶주린 일곱 마리의 굶주린 까마귀[烏擇]들에게 자신의 몸을 뜯어먹게 한 곳이 나온다. 이 땅은 옛날에 왕자의 신혈(身血)로 물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역시 검붉으며 초목들도 붉은 색이 난다.
다시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산길을 따라 5백여 리를 가서 오랄차국(烏剌叉國)102)에 이르렀다. 또 동남쪽으로 위험한 길에 올라 철교(鐵橋)를 건너 천여 리를 가서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103)구전(舊傳)에 계빈(罽賓)이라 한 것은 잘못 된 것이다.에 이르렀다.
그 도성은 서쪽으로 큰 강에 임해 있으며, 가람은 백여 개나 되고 승려도 5천여 명이나 되었다. 여기에는 4개의 탑이 있는데 모두 높고 장엄하며 무우왕이 세웠다고 한다. 각 탑마다 여래의 사리를 한 말씩 봉안하고 있다.
법사가 국경에 들어와 제일 먼저 석문(石門)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 나라의 서문에 해당된다. 왕은 자신의 외숙을 보내 거마(車馬)를 갖추어 맞아들였다. 석문에 들어와서는 여러 가람을 돌아보고 예배한 뒤 어떤 절에서 쉬게 되었다. 절 이름은 호슬가라(護瑟迦羅:Huṣkara)라 했다.
그날 밤에 모든 승려들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이 객승(客僧)은 마하지나국(摩訶脂那國)104)에서 왔다. 경전을 배우러 인도로 가 성적(聖跡)을 순례하면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려 하고 있다. 그 사람은 법을 위해 왔으며, 수많은 선신(善神)이 보호하여 현재 이 절에까지 오게 되었다. 그대들은 과거의 복업(福業)으로 먼 나라 사람의 흠모를 받고 있으니 마땅히 부지런히 경전을 학습하여 남에게 숭앙을 받아야 하는데도 어찌하여 게으르게 잠만 자고 있느냐?”
모든 승려들은 이 말을 듣고 저마다 깜짝 놀라 깨어나서 경전을 읽기도 하고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날이 밝자 모두 법사에게 와서 그 인연을 말하고 더욱 엄숙하게 예경(禮敬)했다. 이렇게 해서 며칠 뒤에 법사는 왕성 가까이로 다가가서 거리가 1유순(由旬)105) 쯤 되는 곳에 있는 달마사라(達摩舍羅:Dharmaśālā)당나라에서는 복사(福舍)라 한다. 왕명으로 세워진 것으로 여행객이나 가난한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에 도착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과 도성에 있는 승려들을 거느리고 복사(福舍)까지 마중 나왔으며, 왕을 따르는 사람은 천여 명이나 되었다. 깃발과 수레가 길을 가득 메웠으며 향냄새와 꽃이 길에 가득했다.
왕이 먼저 와 있다가 법사를 뵙자 정중히 예찬하고 손수 수없이 많은 꽃을 공양하며 뿌렸다. 그런 다음 큰 코끼리에 타기를 청하고 서로 나란히 도성으로 들어갔다. 도성으로 들어가 사야인다라사(闍耶因陀羅寺:Jayendra)이 절은 왕의 외숙이 세운 것이다.에서 멈추었다.
다음날 왕은 법사를 왕궁으로 초청하여 공양하면서 아울러
대덕(大德) 승칭(僧稱) 등 수십 명도 참석하도록 했다. 식사가 끝나자 왕은 강의를 열도록 청하고 법사로 하여금 강론하게 했다. 왕은 강론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먼 곳에서 찾아왔으나 읽고자 하는 책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서사(書士) 20명을 뽑아 경론(經論)을 베끼도록 하고, 별도로 심부름하는 사람 다섯 명을 딸려 주었다. 그리고 필요한 경비가 있으면 일일이 다 공급해 주었다.
이 나라의 승칭(僧稱) 법사라는 사람은 덕행이 높은 사람으로서 계를 지키는 데 순결하고 사려가 깊으며 박학하고 뛰어난 재주와 지혜를 지녔으며 현인(賢人)을 사랑하고 선비들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 법사는 이미 왕실의 귀한 손님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
법사도 역시 마음을 기울여 밤낮으로 질문하여도 피로한 줄 몰랐다. 그래서 법사는 여러 논(論)을 강의해주기를 청하였다. 승칭 법사는 이때 나이 70이 다 되어 기력도 매우 쇠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법사와 같은 신기(神器)를 만난 것을 기뻐하며 이에 힘을 다하였다. 오전에는 『구사론』을 강의하고 오후부터는 『순정리론(順正理論)』106)을 강의하고, 저녁에는 『인명(因明)』107)과 『성명론(聖明論)』을 강의하였다. 이 강의에는 절 안의 학인(學人)이 다 참석하였다.
법사는 설한 내용에 따라서 모조리 깨쳤으며, 깊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신비함을 모두 납득했다.
승칭 법사는 기뻐서 끝없이 칭찬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중국 승려의 지력(智力)은 넓고 커서 여기 대중들 가운데서는 능히 따를 자가 없다. 그의 총명함은 세친(世親) 형제108)의 풍도를 이었다 하겠다. 단지 애석한 것은 그는 먼 나라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성현(聖賢)이 후세에 남긴 가르침을 접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이때 대중 가운데 대승(大乘)의 학승인 비술타승하(毘戌陀僧揀:Viśu- ddhasimha)당(唐) 나라 말로는 정사자(淨師子)라 한다.와 진나반다(辰那飯茶)당나라 말로는 최승친(最勝親)이라 한다.와 살바다(薩婆多)의 학승 소가밀다라(蘇伽蜜多羅:Sugatamitra)당나라 말로는 여래우(如來友)라 한다.와 바소밀다라(婆蘇蜜多羅:Vasumitra)당나라 말로는 세우(世友)라 한다., 그리고 승기부(僧祇部)109)의 학승 소리야제바(蘇利耶提婆:Sūryadeva)당나라 말로는 일천(日天)이라 한다.와 진나달라다(辰那呾邏多:Jintrata)당나라 말로는 최승구(最勝救)라 한다. 등이 있다.
이 나라는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였기에 이 승려들은 모두 도업(道業)이 굳고 재주와
지혜도 뛰어났다. 이들은 비록 승칭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비한다면 아주 뛰어난 이들이었다.
이들은 법사가 자기들의 큰 스승에게 극찬을 받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법사에게 어려운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나 법사는 조목조목 밝혀가며 막힘없이 대답하니 이로부터 그들 또한 자신들이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며 승복하게 되었다.
이 가습미라국은 옛날에 용지(龍池)였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50년 뒤에 아난(阿難)의 제자 말전저가(末田底迦) 아라한이 용왕을 교화하여 이 못을 희사하게 하고, 이곳에 5백 개의 가람을 세워서 모든 현성(賢聖)을 불러 여기에 머물게 한 뒤 용의 공양을 받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건다라국(健陀羅國)의 가니색가왕(迦蘖色迦王)110)은 여래께서 입멸하신 지 4백 년이 되던 해에, 협존자(脇尊者)111)의 요청으로 모든 성중(聖衆) 중에서 안으로 삼장(三藏)을 깊이 연구하고 밖으로 5명(明)112)에 통달한 자를 모았다. 그래서 승려 499명과 존자 세우(世友:Vasumitra)를 얻었다. 이렇게 5백 명의 현성(賢聖)이 모이자 여기에서 삼장을 결집하게 되었다.
먼저 『오바제삭론(鄔波第鑠論)』옛날에 우바제사(優波提舍)라 한 것은 잘못이다. 10만 송(頌)을 만들어 『소달람장(素呾纜藏)』옛날에 수다라(修多羅)113)라 한 것은 잘못이다.을 해석하고, 다음으로 『비나야비바사론(毘奈耶毘婆沙論)』 10만 송을 만들어 『비나야장(毘奈耶藏)』옛날에 비야(毘耶)라 한 것은 잘못이다.을 해석하고, 다음에 『아비달마비바사론(阿毘達磨毘婆沙論)』 10만 송을 만들어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혹 『아비담(阿毘曇)』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을 해석했는데 무려 30만 송 96만 언(言)이다.
왕은 적동(赤銅)으로 판(版)을 만들어 거기에 논의 문장을 새겨서 석함(石函)에 넣고 봉했다. 그리고 큰 탑을 세워서 그 안에 넣은 다음 약차신(藥叉神)에게 수호하도록 명하였다. 불교의 오묘한 뜻이 거듭 밝아지게 된 것은 이런 힘 때문이었다.
이렇게 법사가 머물기 꼭 2년 만에 모든 경론을 배우고, 성적(聖跡) 순례를 마치고 나서 떠났던 것이다.
이 가습미라국에서 서남쪽으로 산과 계곡을 넘고 건너 7백 리를 가서 반노차국(半笯嗟國)에 이르렀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4백여 리를 가서 알라사보라국(遏邏睹補羅國:Rājapura)북인도의 국경이다.에 이르렀다. 여기서 다시 동남쪽으로 산을 내려가고
물을 건너 7백여 리를 더 가서 책가국(礫迦國:Takka)북인도의 국경이다.에 이르렀다.
남파국(藍波國)에서 이 영토까지는 인도에서도 변방이기 때문에 풍속이나 행동거지와 의복과 언어들이 모두 인도와 달리 야비하고 경박한 데가 있었다.
알라사보라국을 출발한 지 3일이 지나 전달라바가하(栴達羅婆伽河: Candrab)중국 말로는 월분(月分)이라고 한다.를 건너고 사야보라성(闍耶補羅城:Jayapura)에 이르러 외도(外道)의 절에서 묵었다. 이 절은 성(城) 서문 밖에 있는데 이 당시에는 승려 20여 명이 있었다.
다음 날 계속 전진하여 사갈라성(奢羯羅城)114)에 도착했는데 성안에는 가람이 있었고 승려는 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곳은 옛날 세친보살(世親菩薩)이 『승의제론(勝義諦論)』을 저술한 곳이다. 그 옆에는 높이 2백 척이나 되는 탑이 있었는데, 이곳은 과거의 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곳으로 지금도 경행(經行)하던 유적이 있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나라승하성(那羅僧揀城)의 동쪽 파라사(波羅奢:Palāśā)의 큰 숲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50여 명의 도적떼들과 마주쳤다. 도적들은 법사와 그 일행의 의복과 노자를 모두 강탈하고서 칼을 휘두르며 길 남쪽에 있는 말라붙은 못으로 몰아넣고는 모두 살해하려고 했다.
그 못 안에는 가시나무와 덩굴이 우거져 있었는데, 법사를 따라다니는 사미가 우거진 수풀 사이로 못의 남쪽 귀퉁이에 겨우 사람이 통과할 만한 수로(水路)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미가 법사에게 가만히 아뢰니 법사는 곧 사미와 함께 도망쳐 나갔다. 동남쪽으로 2~3리 쯤 뛰어 가다가 밭갈이하는 한 바라문을 만나 그에게 도적떼를 만났던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은 법사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서 즉시 소를 법사에게 맡긴 뒤 마을을 향해 소라를 불고 북을 쳐서 알리니 80여 명 쯤 되는 사람이 모였다. 각자 무기를 들고 급히 도적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는데, 몰려오는 군중을 본 도적들은 흩어져 도망치며 각기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법사는 못으로 가서 묶여 있는 사람들의 오랏줄을 풀어주고는 마을 사람들이 보시한 옷을 나누어 입게 하고 그들을 데리고 마을로 가서 투숙했다. 사람들은 다들 분해서 슬피 울었으나 오직 법사만은 오히려 아무 근심이 없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함께 있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물었다.
“우리는 여행길에 도적들에게 옷가지와 노자를 몽땅 약탈당하고 오직 목숨만 겨우 살아남았을 뿐 곤궁하고 초라하며 괴롭기가 지금 극에 달했습니다. 산중에서 당한 일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슬퍼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법사님은 무슨 일로 함께 근심하지 않고 도리어 흔연히 웃고 계십니까?”
법사가 대답했다.
“살아가면서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오. 생명이 붙어 있으니 무엇을 걱정할 것이 있겠소.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속서(俗書)에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소. 살아 있기만 하면 큰 보물은 잃지 않은 것이니 사소한 옷가지나 재물 같은 것이야 뭐 그리 아까워할 게 있겠소.”
이 말을 듣고 일행은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법사의 마음은 한없이 크고 맑은 물과 같아 아무리 흐리려 해도 흐려지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다음 날 역가국(礫迦國)의 동쪽 경계에 있는 큰 성에 도착했다. 성의 서쪽 길 북쪽에 넓은 암라(菴羅)115) 숲이 있는데, 그 숲 속에 7백 살이나 된 바라문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그를 만나보니 한 30세 쯤 된 것 같이 보였다.
신체가 건장하고 얼굴에는 신령스러운 빛이 흐르고 있었고 『중론(中論)』116)ㆍ『백론(百論)』117) 등 여러 논에 밝았으며, 『베다(吠陀)』118) 등의 고전에도 능통했다. 그에게는 시자(侍者)가 둘이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백세가 넘었다고 했다.
법사를 맞아들여 이야기하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리고 도적을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한 시자에 명하여 성안에 불법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법사를 위해 식사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 성안에는 수천 호(戶)가 있었으나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적었고 외도(外道)를 섬기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법사가 가습미라국에 머물 때에 이미 명성이 멀리 외국까지 알려져서 여러 나라에서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심부름을 간 시자가 성안을 두루 돌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중국에서 승려가 왔습니다. 우리 마을 근처에서 도적을 만나 옷가지를 모두 빼앗겼습니다. 여러분, 복을 쌓을 때가 바로 지금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복력(福力)이라는 말에 감동되어 마침내 삿된 무리들의 마음도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마을의 호걸 등 3백여 명은 이 말을 듣고 각기 무늬가 있는 모직 1필과 음식을 받들어 공손히 걸어와서 법사 앞에 놓아두고 절을 하며 위로하였다.
법사는 그들을 위해 축원을 함과 동시에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을 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두 도심(道心)을 일으켜서 사도(邪道)를 버리고 정도(正道)를 따르게 했다. 설법을 들은 사람들은 좋아서 웃고 이야기 하며 기뻐하면서 돌아갔는데 늙은 바라문은 일찍이 없던 일이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받은 면포를 여러 사람들에게 각각 몇 필씩 나누어 주었으나 의복으로 쓰고도 오히려 50필이 남았으므로 늙은 바라문에게 바쳤다.
이렇게 한 달을 머물면서 『경(經)』ㆍ『백론(百論)』ㆍ『광백론(廣百論)』119)을 늙은 바라문에게서 배웠다. 늙은 바라문은 용맹(龍猛:Nāgārjuna)의 제자인데 직접 법사를 가르쳐 주었으며 그의 설명은 대단히 명료하였다.
다시 이곳에서 동쪽으로 5백여 리를 가서 지나복지국(至那僕底國)에 이르러 돌사살나사(突舍薩那寺)에 참배했다. 이 절에는 대덕(大德) 비니다발납바(毘蘖多鉢臘婆)이곳 말로는 조복광(調伏光)이라고 하는데, 즉 북인도의 왕자이다.가 살고 있었다. 그는 예절에 밝고 삼장(三藏)에 능했다. 그는 직접 『오온론석(五蘊論釋)』과 『유식삼십론석(唯識三十論釋)』을 저술한 사람이다. 그곳에서 그렇게 14개월 동안 머물면서 『대법론(對法論)』ㆍ『현종론(顯宗論)』120)ㆍ『이문론(理門論)』 등을 배웠다.
큰 성의 동남쪽으로 50여 리를 가면 답말소벌나승가람(答秣蘇伐那僧伽藍:Tamasāvana)당나라 말로는 암림(闇林)이다.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승려가 3백여 명이 있었는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배우고 있었다. 현겁(賢劫)121)의 천불(千佛)이 모두 이 땅에서 인천(人天)을 모아놓고 설법했다고 한다.
석가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뒤 3백 년 만에 가다연나(迦多衍那:Kātyā- yanīputra)옛날에 가전연(迦旃延)122)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논사가 나타나서 이곳에서 『발지론(發智論)』을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1백 4~5십 리를 지나서 사란달나국(闍爛達那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그 나라에 들어가 나가라타나사(那伽羅駄那寺)를 방문하였다. 이 절에는 대덕(大德) 전달라벌마(旃達羅伐摩)여기 말로는 월주(月宙)라 한다.가 있었는데 삼장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었다. 이곳에서는 4개월을 머물면서 『중사분비바사(衆事分毘婆沙)』를 배웠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험악한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 7백여 리를 더 가서 굴로다국(屈露多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굴로다국에서 7백여 리를 남쪽으로 전진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설다도로국(設多圖盧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8백여 리를 더 가서 파리야달라구(波理夜呾羅國)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5백여 리를 가서 말토라국(秣兎羅國)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석가여래의 여러 성제자(聖弟子)와 사리자(舍利子:Sāriputra) 등의 유신(遺身)을 모신 탑이 있는데, 사리자옛날에 사리자(舍梨子), 또는 사리불(舍利弗)이라 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와 몰특가라자(沒特伽羅子:Maudgalyāyana)옛날에 목건련(目乾連)123)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등의 탑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고 달려연니불달라(呾麗衍尼弗呾羅:Trāyaniputra)당나라 말로는 만자자(滿慈子)이다. 옛 미다라니자(彌多羅尼子)라고 한 것은 잘못 생략된 것이다. 우바리(優婆釐:Upāli)124)ㆍ아난타(阿難陀)125)ㆍ라호라(羅怙羅:Rāhula)옛날에 라후라(羅睺羅)126) 또는 라운(羅雲)이라 한 것은 모두 잘못이다. 만수실리(曼殊室利)127)당나라 말로는 묘길상(妙吉祥)이다. 옛날에 유수(濡首)ㆍ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만수시리(曼殊尸利)라고 하고 묘덕(妙德)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등의 모든 탑은 해마다 복을 닦는 날에 승려들이 소속된 종파를 거느리고 와서 종교 행사에 따라 각기 자기 종파를 공양을 한다고 한다.
아비달마(阿毘達磨)128)를 공부하는 무리는 사리자를 공양하고, 습정(習定:Samādhist)129)을 공부하는 무리는 몰특가라자를 공양한다. 경전을 독송하는 자들은 만자자를 공양하고, 비나야(毘奈耶)130)를 공부하는 자들은 우바리를 공양하며, 모든 비구니들은 아난타를 공양하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않은 자들은 라후라를 공양하고, 대승(大乘)을 배우는 자는 모든 보살에게 공양한다.
이 성 동쪽으로 5~6리를 가면 하나의 가람에 이른다. 존자 오바국다(烏波鞠多:Upagupta)당나라 말로는 근호(近護)131)이다.가 건립한 것인데 그 안에 부처님의 손톱과 모발과 사리가 모셔져 있다.
가람 북쪽의 암벽에 높이 20여 척, 너비 30여 척의 석실(石室)이 있는데, 그 안에는 4촌(寸) 길이의 가느다란 산가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존자 근호(近護)가 설법을 하여 부부가 함께 깨달아 아라한과(阿蘿漢果)132)를 증득하게 되었을 때, 그럴 때마다 산가지를 하나씩 던져 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단신이거나 별족(別族)인 자는 비록 증득했다 해도 기록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서 살타니습벌라국(薩他泥濕伐羅國)중인도의 국경이다.에 이르고, 다시 4백여 리를 동쪽으로 전진하여 녹륵나국(祿勒那國)중인도의 국경이다.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동쪽으로 긍가하(殑伽河)가 흐르고 북쪽으로는 큰 산을 등지고 있으며 염모나하(閻牟那河:Yamuna)가 중앙에 흐르고 있다.
다시 이 강의 동쪽으로 8백여 리를 가면 긍가하의 발원지에 이르게 된다. 강의 상류의 너비는 3~4리 정도 되지만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바다로 들어가는 지점에서는 너비가 10여 리나 된다. 물맛은 감미롭고 미세한 모래가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이 지방의 풍속서(風俗書)에는 복수(福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물에 들어가 목욕하면 죄업이 사라지고 이 물을 마시고 양치질을 하면 재앙이 사라지며 이 물에 빠져 죽은 자는 하늘에 태어나는 복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남녀들이 항상 강가에 모여 있는데, 이는 다 외도(外道)들의 삿된 말로서 진실성이 없다.
후일에 제바보살(提婆菩薩:Aryadeva)133)이 바른 이치를 밝혀 보이자 비로소 이런 풍습이 근절되었다고 한다.
이 나라에는 사야국다(闍耶鞠多:Jayagupta)라고 하는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삼장에 능통했다. 그래서 법사는 겨울에서부터 초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경부(經部)의 『비바사(毘婆沙)』 강의를 받았다.
강의가 끝나자 긍가강의 동쪽 언덕을 건너 말저보라국(秣底補羅國)에 이르렀는데 그 나라 왕은 수다라종(戍陀羅種:Sūdra)이었다. 이곳에는 가람이 10여 개가 있고 승려는 8백여 명이 되었는데 모두 소승의 일체유부(一切有部)134)를 배우고 있었다.
큰 성(城)의 남쪽 4~5리 되는 곳엔 작은 가람이 있었고 승려가 5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옛날에 구나발랄바(瞿拏鉢剌婆:Guṅaprabha)당나라 말로는 덕광(德光)이다. 논사가 이곳에서 『변진(辯眞)』 등의 논술을 무려 1백여 부나 지은 곳이다. 논사는 발벌다국(鉢伐多國:Parvata) 사람으로 본래는 대승(大乘)을 익혔으나 뒤에 가서 소승을 배웠다고 한다.
이때에 제바서나(提婆犀那:Devrasena)당나라 말로는 천군(天軍)이다. 아라한은 도사다천(睹史多天)을 왕래했다고 한다.
그래서 덕광(德光) 논사는 자씨보살(慈氏菩薩)을 친견하고 여러 가지 의심되는 점을 풀기 위하여 천군(天軍)에게 신통력으로써 천궁(天宮)에 데려가 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미륵보살을 친견하게 되었으나 손만 올려 합장을 할 뿐 예는 올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미륵보살은 하늘에 있으나 속인과 같으니 예경(禮敬)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는 이렇게 세 번을 왕래하였으나 예를 올리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아만심(我慢心)이 높았으므로 의문 또한 해결하지 못했다.
덕광 논사의 가람 남쪽으로 3~4리 되는 곳에
승려 2백여 명이 살고 있는 사찰이 있었는데 모두 소승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곳은 중현(衆賢:Saṁ- ghabhadra) 논사가 목숨을 마친 곳이라고 한다.
중현 논사는 본래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사람으로서 박학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일체유부(一切有部)의 비바사(毘婆沙)에 밝았다. 그 당시 세친보살 역시 예지(叡智)와 박학으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먼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지어서 비바사론자들의 소론을 혁파하였다. 이론의 뜻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글도 아름다워서 서역(西域)의 학승치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귀신도 역시 이 경을 배울 정도였다고 한다.
중현(衆賢) 논사가 이것을 보고는 분발심을 내어 다시 12년간을 전념하여 『구사박론(俱舍雹論)』135) 2만 5천 송(頌), 모두 80만 언(言)을 만들었다.
중현논사는 이 논을 다 만들고 나서 세친을 만나 시비를 가리려 했으나 뜻을 실현하기 전에 죽고 말았다.
세친이 뒤에 그 논을 보고는 부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한 데에 대해 탄복하며 말했다.
“그의 사고력은 뭇 비바사론들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나의 이론을 많이 따르고 있으니 마땅히 『순정리론(順正理論)』이라고 이름 해야 할 것이다.”
그 뒤부터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중현이 죽은 뒤에 암몰라(菴沒羅) 숲 속에다 탑을 세웠는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숲 옆에 또 하나의 탑이 있는데 이곳은 비말라밀다라(毘末羅蜜多羅:Vimalamitra)당나라 말로는 무구(無垢)라 한다. 논사가 묻힌 곳이다. 비말라밀다라 논사는 가습미라국 사람으로 설일체유부에 의해 출가하여 5인도(印度)136) 전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삼장을 다 배운 인물이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중현의 탑에 들렀다. 그의 저술이 빛을 보기 전에 갑자기 사망한 것을 슬퍼하며 스스로 이렇게 맹세했다.
“내가 다시 여러 가지 논을 만들어서 대승의 이론을 혁파하고 세친의 이름을 없애버려서 중현 논사의 취지를 영원히 전하리라.”
이 말을 마치자마자 정신이상을 일으켜 다섯 개의 혀가 겹쳐 나오고 온몸에 피가 흘렀다. 그는 이러한 고통의 원인이 그 말 때문임을 알고는 참회의 글을 쓴 뒤 여러 동료들에게 권했다.
“대승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마치자 절명했는데 그가 죽은 곳에 땅이 꺼져서 큰 구멍이 나 있었다고 한다.
이 나라에는
밀다사나(蜜多斯那:Mitrasena)라고 하는 대덕이 있었다. 나이는 90세로 바로 덕광 논사(德光論師)의 제자이며 삼장에 능통했다. 현장 법사는 또 한 해 봄부터 여름에 걸쳐 살바다부(薩婆多部)의 『달타삼제삭론(怛埵三弟鑠論)』당나라 말로는 변진론(辯眞論)이다. 2만 5천 송(頌)으로 되어 있으며 덕광(德光)이 지었다.과 『수발지론(隨發智論)』 등을 배웠다.
말저보라국으로부터 다시 북쪽으로 3백여 리를 가서 바라흡마보라국(婆羅吸摩補羅國)137)중인도에 있다.에 이르렀다.
다시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4백여 리를 가서 혜제달라국(醯掣怛羅國)중인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서 긍가하(殑伽河)를 건너 서남쪽에 있는 비라나라국(毘羅那拏國)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또 동쪽으로 2백여 리를 가서 겁비타국(劫比他國)중인도에 이르렀다. 이 나라 도성의 동쪽으로 20여 리 되는 곳에 큰 가람이 있었는데, 그 절 안에는 세 개의 보계(寶階)가 남북으로 나란히 서서 동쪽을 향하면서 서쪽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이곳은 옛날에 부처님이 도리천(忉利天)138)에서 마야부인(摩耶夫人)을 위해 설법을 마치고 섬부주(贍部洲)139)로 돌아가 지상으로 내려오신 곳이다. 중앙은 황금으로 만들었고 왼쪽은 수정(水精)이며 오른쪽은 백은(白銀)으로 되어 있다.
여래께서는 도리천의 선법당(善法堂)140)으로부터 여러 천중(天衆)을 거느리고 중앙 보계를 밟고 내려오셨다고 한다. 대범천왕(大梵天王)141)은 흰 불자(拂子)142)를 들고 은으로 된 보계를 밟고 오른쪽으로 내려왔으며, 천제석(天帝釋)143)은 보개(寶蓋)144)를 가지고 수정으로 된 보계를 밟고 왼편으로 내려왔다. 이때 수많은 하늘 대중과 모든 큰 보살들이 수행하며 내려왔다고 한다.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보계에는 계단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낡아 없어졌다. 그래서 후세의 왕들이 옛날을 그리면서 벽돌과 돌을 쌓아서 옛 모습을 살리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장식해 놓았다. 현재의 높이는 70여 척이 된다.
그 보계 위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그 안에 석불상(石佛像)을 모셨다. 좌우에는 제석상(帝釋像)과 범천상(梵天像)을 두어 옛날에 부처님께서 강림하실 때의 의식(儀式)을 그대로 본떠서 나타내었다. 그 옆에는 높이 7장(丈)의 돌기둥[石柱]이 있는데 무우왕(無憂王)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바로 그 옆에는 길이 50여 보(步), 높이 7척(尺)이 되는 돌로 된 기단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옛날에 경행(經行)하시던 곳이라 한다.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2백여 리를 가서
갈약국사국(羯若鞠闍國)당나라 말로는 곡녀성(曲女城)으로 중인도에 있다.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둘레가 4천 리이고, 도성(都城) 서쪽으로 긍가하가 흐르고 있는데 길이는 20여 리, 강폭은 5~6리가 되었다.
성안에는 백여 개의 가람이 있고 승려는 1만여 명이 되는데, 대승과 소승을 모두 배우고 있다.
이 나라의 왕은 폐사종(吠奢種)이며 자는 갈리사벌탄나(曷利沙伐彈那)145)당나라 말로는 희증(喜增)이다.이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파라갈라벌탄나(波羅羯邏伐彈那:Prabhākaravardhara)당나라 말로는 작증(作增)이다.이며 형의 이름은 알라사벌탄나(羯羅闍伐彈那:Rājyavard)당나라 말로는 왕증(王增)이다.이다. 희증(喜增)이 왕으로 재위하고 있을 때에는 그가 매우 인자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고 기렸다.
그런데 이 무렵 동인도의 갈라나소벌라나국(羯羅拏蘇伐剌那國)당나라말로는 금이(金耳)이다.의 설상가왕(設賞迦王:Saśāṇka)당나라 말로는 위와 같다.은 왕증 같은 어질고 현명한 왕이 자기 나라 근처에 있으면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하여 은밀히 유인하여 살해해 버렸다.
대신 바니(婆尼:Bhandi)당나라 말로는 명료(明了)이다.와 여러 대신들은 백성의 주인이 없음을 슬퍼하여 그의 아우 시라아질다(尸羅阿迭多)146)당나라 말로는 계일(戒日)이다.를 세워 종묘(宗廟)를 계승하도록 했다.
새로 즉위한 왕은 풍채가 늠름한 호걸 기질에다 지략(智略)도 원대하였으며 그의 덕(德)은 천지를 움직였고 의로움에는 인신(人神)이 감복할 정도였다.
그는 마침내 형의 원수를 갚고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의 위풍이 미치는 곳이나 예교(禮敎)로 교화한 곳에서는 왕의 덕에 귀복(歸服)하지 않는 백성이 없었다.
천하를 이미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 다음에는 나라 안의 무기를 다 거두어들이어 복업(福業)을 성취하였다.
왕은 국내에 칙령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육식을 금하도록 했으며, 성적(聖跡)이 있는 곳마다 모두 가람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해마다 21일 동안을 모든 승려들에게 공양하고, 5년마다 한 번씩 무차대회(無遮大會)147)를 열어 국고에 쌓아 놓은 재물을 보시하여 나누어 주었다. 그의 이런 행적을 잘 살펴보면 수달나(須達拏)148)의 업적을 이은 것이다.
성의 서북쪽에는 높이 2백여 척 되는 탑이 서 있고 또 동남쪽 6~7리 되는 긍가강의 남쪽에도 높이 2백여 척이 되는 탑이 있는데, 모두 다 무우왕이 건립한 것이다. 이곳은 모두 부처님께서 옛날에 설법하신 곳이라고 한다.
법사는 그 나라에 들어간 뒤로 발달라비하수사(跋達邏毘訶雖寺:Bhadra- vihāra)에
3개월간 머물면서 비리야서나(毘離耶犀那:Viryasena) 삼장의 지도로 불사(佛使:Buddhadāsa)149)의 『비바사(毘婆沙)』와 일주(日冑:Sūryasena)의 『비바사』를 모두 독파하였다.
'매일 하나씩 > 적어보자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어보자] #2458 불교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4권 (0) | 2023.06.01 |
---|---|
[적어보자] #2457 불교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3권 (0) | 2023.06.01 |
[적어보자] #2455 불교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1권 (0) | 2023.05.31 |
[적어보자] #2454 불교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10권 (1) | 2023.05.31 |
[적어보자] #2453 불교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9권 (0) | 2023.05.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