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55 불교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1권

by Kay/케이 2023. 5. 31.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1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서(大唐大慈恩師三藏法師傳序)


수공(垂拱) 4년 앙상(仰上) 사문 석언종(釋彦宗) 한역
김영률 번역



생각해 보면 우리 석가모니께서 인토(忍土)1)에 태어나시어 처음으로 8정도(正道)2)의 법을 선양하시고 삼보(三寶)의 문호를 열어 삿된 가르침들을 몰아내심으로 말미암아 불교(佛敎)가 생겨났다.
방등(方等)3)의 1승(乘)4)과 원종(圓宗)5)의 10지(地)6)를 큰 법[大法]이라 하는 것은 참된 말씀[眞筌]7)이기 때문이고, 화성(化城)8)에서 때 묻은 옷을 입고 사슴 떼를 구제하고 양을 모는 것을 작은 학문[小學]이라 하는 것은 방편의 진리[權旨]이기 때문이다. 선(禪)과 계(戒)와 주술(呪術)에 이르기까지 그 가닥은 만 갈래이지만 혹(惑)을 멸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이치는 한 가지이다.
이런 까닭에 역대의 성현들이 보배처럼 우러러 모셨던 것이다. 8회의 경[八會之經]9)이 근본이 된다고 한 것은 그 교리가 근본이 되기 때문이고, 3전의 법[三轉之法]10)이 끝이 된다고 한 것은 그 교리가 지말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 내리고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하는 상서가 나타나기에 이르러서는 상투 속의 보배를 풀어놓으시고 품 안의 구슬을 들어 보이시니, 1승(乘)을 들어 3승(乘)11)을 깨뜨리시고 끝을 거두어 근본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부법장전(付法藏傳)』12)에서는 “성자(聖者) 아난(阿難)13)이 여래의 모든 법장(法藏)을 외워 지니기를 마치 병속의 물을 쏟아서 다른 그릇에 붓듯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석존(釋尊)께서 한평생 49년 동안에 근기와 때에 맞추어 응하신 교법이라 하겠다.
발제하(跋提河)14)에 물이 마르고 견고림(堅固林)15)에 그믐달 그림자 드리워 거룩한 가르침과 깊은 종지가 자칫 사라질 지경이 되었을 때에, 대선배이신 가섭께서 5관(棺)을 이미 가리고 천전(千氈)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에 도착하시어 천인(天人)의 안목이 사라져 창생(蒼生)을 구제할 수 없게 되었음을 개탄하셨다.
그리하여 여러 성자들을 소집하여 거룩한 말씀을 결집하시되 승묵(繩墨)16)을 상고하여 선정의 문을 정하시고 관화(貫花)17)에 나아가 율장 부분을 여시고 우바제사(優婆提舍)18)에 의거하여 논장(論藏)으로 삼으셨다.
공(空)과 유(有)19)의 도리를 분석하고 단견(斷見)20)과 상견(常見)21)을 드러내어 인수(因修)22)의 도리로써 보이시고 과증(果證)23)의 논리로써 밝히시니,
당대의 중생에게 법보로써 보여주고 미래의 중생에게 궤칙으로 전하기에 충분하므로 귀의하는 무리 모두가 그 도리를 따르게 되었다.
왕진(王秦)이 사자(使者)로서의 명을 받들어 일광(日光)24)의 꿈을 상고하여 불법을 구하고, 마등[騰]25)과 축법란[蘭]26)이 청에 응하여 채찍을 다그쳐[練影] 경을 전달하기에 이르러 그 후로부터 머리 모습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먹은 나그네가 불법의 아름다움을 하늘 저 밖까지 퍼뜨리고 어려운 경전의 걸리던 이치가 이 땅 안에서 정교하게 번역되었다.
그러나 지극히 그윽하고도 지극히 신묘한지라 생각하는 이는 가끔 성(性)과 상(相)에 헷갈리고, 황(恍)하고 홀(忽)한지라 이야기하는 이는 간혹 그 시(是)와 비(非)에 어두운 이가 있으니, 하물며 성인과의 거리가 이미 멀어서 들어오는 교법에 결함이 많건만 제각기 길을 달리하여 분주히 수레를 달리고 제각기 다른 가닥으로 방법을 구하고 있을 뿐이니 어찌하랴?
법사께서 일찍이 탄생하실 때엔 방에 공생(空生)27)의 감응이 나타났고 휴(觿)를 차는 동자가 되어서는 마음이 묘덕(妙德)28)의 정성에 부합되시었다. 애욕의 바다에는 벗어날 나루터가 없고 깨달음의 경지에라야 마음을 깃들일 곳이 있다 하여, 그리하여 머리를 깎고 문장을 다듬어 이공(二空)29)의 진리를 널리 모으기 위해 낯선 고을 먼 산천을 두루 헤매며 천 리를 누비셨다.
그러나 번번이 옛 현인들이 보던 책과 유통시킨 책에는 어(魚)가 노(魯)로 바뀌는 틀린 글자가 많아서 짜증스러웠고, 지난 종장(宗匠)들이 들었던 의문과 전해주는 의문은 시(豕)니 해(亥)니 하는 글자에 현혹되어 개탄스러웠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시기를 음악소리를 담은 나무 밑에는 반드시 금석(金石)의 메아리가 숨어있듯이 5천축(天竺)30)에는 반드시 백 편(篇)의 이치가 갖추어 있으리라 하시고는, 마침내 뜻을 내어 길을 떠나시니 끼니를 잊으시고 험한 길 밟기를 평지와 같이 여기셨다.
만 번의 죽을 고비도 가벼이 여기시어 총령(蔥嶺)과 열하(熱河)를 건너시고 한 말씀을 소중히 여기시어 암라수원[柰苑]31)에 도달하셨다. 취산(鷲山)32)과 후소(猴沼)33)에서는 수승한 행적을 우러르면서 기적을 보았고, 녹야원34)과 가비라성[仙城]35)에서는 묵은 서적에 남아 있는 교학의 자취를 찾으셨다.
봄과 가을, 추위와 더위를 겪기 열일곱 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나라가 무려 130개 나라였는데, 가는 곳마다 우리 황제의 융성한 위엄을 선양하고 그 황후의 권능을 알리셨다. 외도의 도도한 교만을 잠재우고 같은 스승들의 드높은 깃발을 돋우어 주셨다. 이름난 왕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훌륭한 도반들이 어깨를 나란히 했으니 만고의 영웅은 오직 법사 한 분뿐이시리라.
법사께서는 그 나라에서 얻은 대승 소승 삼장의 범본(梵本)
총 656부를 모두 큰 코끼리와 날랜 말에 싣고서 길을 나섰으니, 서리를 무릅쓰고 눈발과 싸우며 걷는 길은 하늘이 도와서 잘 뚫렸고 고통스러운 햇볕과 음산한 그늘은 황제의 위엄에 의해 잘 건널 수 있었다.
이에 정관(貞觀) 19년(645)에 경성에 도달하시니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나와 영접하였다. 무리들이 성곽을 꽉 메우고 시끌벅적 늘어섰으니 이 또한 당대에 보기 드문 성대함이었다.
천자께 알현하자 그간의 노고를 간절히 하문하시고 이어 유사(有司)에게 명령을 내리시기를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여 널리 퍼뜨리라 하셨으니 많은 사람들이 힘써서 공경하여 받든 사실은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나아가 이름난 가문의 선비가 세속을 버리고 불법으로 귀의하여 먼 길을 왕래하면서 나라 안팎에서 밝히고 드날린 일, 교화의 걸음을 멈추시고 저 세계로 돌아가심이 마치 땔감이 다 타고나서 불이 꺼지는 것 같았던 일, 이러한 일들까지도 이 전기(傳記)에 갖추어 수록되어 있다.
이 전기는 본래 다섯 권이었으니 위(魏) 나라 서사(西寺)에 있던 사문 혜립(慧立)36)이 지은 것이다. 그의 속성은 조(趙)씨이며 빈국공(豳國公) 유인(劉人)이며 수(隋) 나라 기거랑(起居郞)이며 사예종사(司隸從事)인 의(毅)의 아드님이시다.
유(儒)와 석(釋)을 널리 상고하여 문장이 능하고 우아하였으며, 묘한 말솜씨가 구름 일듯하고 좋은 생각이 샘솟듯 하였다. 더구나 정색을 하고 곧은 말을 하실 때에는 위엄을 보이시기에 서슴지 않았으며 물과 불에 뛰어들 일이 있더라도 흔들림이나 굽힘이 없으셨다.
삼장의 학행(學行)을 보고 삼장의 형의(形儀)를 흠모하게 되어 우러르는 마음과 찬탄하는 마음이 갈수록 견고하고 갈수록 심원하여져서, 그리하여 그의 사적을 찬술하여 후대에 전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원고를 다듬는 일을 끝내신 후에는 행여 유실될까 염려하시어 땅 속에다 묻어두었기에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 뒤 몸과 마음에 병이 깊어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문도들에게 명하여 파내라 하시고 곧 출판하려 하셨지만 바로 입적하시고 말았다. 문인들이 애통해 하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사이에 이 전기의 원고는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 뒤 여러 해 동안 원고를 수소문하고 수집하다가 근래에야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서문을 쓰고 편집도 하여 책을 만들라고 조르는 것이다.
그러나 내 부족함을 스스로 아는 터라 거절하였더니 또
나에게 말하기를 “불법의 일을 속인들에게 맡길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꼭 하셔야 할 일을 굳이 사양하시다니요?” 하는 것이다.
내 다시 한 번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물러나와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보고 종이를 펴고 붓을 들기는 하였으나 마음이 영 껄끄럽고 답답하기만 하다. 이제 호랑이와 표범 같이 힘찬 글에 개나 양 같은 보잘것없는 글을 갖다 붙이고 아름다운 옥돌에다 무른 기왓돌을 섞는 것처럼 본문을 이리저리 뒤섞고 모아서 10권으로 만들었다. 뒷날 이 책을 보는 이들이여, 행여나 비웃지 말기를 바란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제1권


혜립(慧立) 언종(彦悰) 한역
김영률 번역


1. 구씨(緱氏) 집안에서 태어나 서역1)의 고창(高昌)2)에 가기까지

법사(法師)의 이름은 현장(玄奘)이고 속성(俗姓)은 진(陳)이다. 진류(陳留)3) 사람으로 한(漢) 나라 태구(太丘)4)의 현장이었던 중궁(仲弓)5)의 후손이다.
증조부 흠(欽)은 후위(後魏) 때 상당(上黨)6)의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조부 강(康)은 학문이 뛰어나 북제(北齊)에서 국자박사(國子博士)7)의 벼슬에 임명되었고 주남(周南)8)을 식읍(食邑)9)으로 받았다. 그리하여 자손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구씨(緱氏)10) 사람이라고도 한다.
아버지 혜(慧)는 재주가 뛰어나고 지조가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경술(經術)에 통달하였다. 그는 키가 8척(尺)이나 되고 눈썹이 아름답고 눈에는 광채가 있었으며, 소매 넓은 도포(道袍)를 입고 넓은 띠를 두른 모습이 유학을 좋아하는 학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곽유도(郭有道)11) 라고들 불렀다. 성품이 침착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벼슬을 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게다가 때마침 수(隋) 나라의 정치가 쇠퇴해가고 있었기에 마침내는 경전 공부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주군(州郡)에서 여러 번 효렴(孝廉) 및 사예(司隸)의 벼슬을 내리기도 하고 임금이 명령하기도 했으나 모두 병(病)을 핑계로 거절하며 나아가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이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그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법사(法師)는 바로 그의 넷째 아들이다.
법사는 어릴 때부터 특출하였고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8세 때엔 아버지가 책상 앞에 앉혀 놓고 『효경(孝經)』을 가르치는데, “증자(曾子)가 자리를 피하다[避席]”라는 대목에 이르자 갑자기 옷깃을 여미고 일어났다. 그 까닭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증자는 스승의 명(命)을 듣고도 자리를 피해 앉았다고 했는데 저는 지금 자훈(慈訓)을 받들고 있사오니 어찌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며 그가 반드시 크게 성공할 것임을 알고 집안사람들을 불러 이런 사실을 알리니 모두 축하하며 말하였다.
“이 아이는 자네의
양오(揚烏)12)가 될 걸세.”
그는 어릴 적부터 이처럼 지혜로웠다.
그 뒤로 경전의 깊은 뜻을 다 통달하여 옛것을 사랑하고 현인(賢人)을 숭앙했으며, 고상하고 바른 글이 아니면 보지 않았고 성스럽고 밝은 기풍이 아니면 익히지를 않았다. 어린 아이들과 몰려 놀지 않았고 쓸데없이 시끄러운 거리를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비록 길거리에 꽹과리나 북소리가 떠들썩하고 온갖 잡다한 놀이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곳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어도 그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또 어려서부터 기쁜 안색으로 부모를 봉양할 줄 알았으며 인정이 깊고 순박하며 부지런했다.
둘째 형인 장첩(長捷)은 먼저 출가하여 동도(東都)13)에 있는 정토사(淨土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법사(法師)가 능히 법을 가르치고 전할 만 하다는 것을 알고는 절로 데리고 가서 경전(經典)을 외우고 익히게 했다.
그때 마침 조칙(詔勅)이 내려져서 낙양에서 27명의 승려를 뽑게 되었는데, 당시에 학업이 우수한 자가 수백 명이나 있었고 법사는 어린 소년이라서 거기에 참예할 수가 없었으므로 관청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때의 인선 관리(人選官吏)는 대리경(大理卿)14)인 정선과(鄭善果)15)라는 사람으로서 인재를 알아보는 감별력이 있었다. 그가 현장(玄奘)을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물었다.
“그대는 어느 집 자손인가?”
법사는 집안에 대하여 대답했다.
그러자 또 물었다.
“승려로 뽑히기를 바라는가?”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배움이 얕고 학업이 모자라 시험에 참예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물었다.
“출가하려는 뜻은 무엇인가?”
“멀리로는 여래(如來)를 따르고 가까이로는 유법(遺法)을 빛내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선과는 그의 뜻을 아주 가상하게 여기고 또 그 재주와 용모를 특별하게 여겼다. 그래서 특별히 법사를 뽑으려고 관리들에게 말했다.
“암송하는 학업이야 쉽게 이룰 수 있지만 인물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다. 만약 이 아이를 뽑는다면 반드시 석문(釋門)의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여러 공(公)들은 그가 하늘 높이 날아올라 감로(甘露)를 뿌리며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니 인물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 살펴본다면 정경(鄭卿)의 말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법사는 출가한 뒤에 형과 함께 살았다.
그때 절에는 경 법사(景法師))16)가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법사는 경전에 몰두하여 마침내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또 엄 법사(嚴法師)에게 『섭대승론(攝大乘論)』17)을 배웠는데 더욱 좋아하여 연구에 몰두했다. 한 번 들은 것은 다 알았으며,
두 번 본 뒤에는 다시 의심이 없었으므로 대중들은 모두 경탄했다.
그래서 법좌(法座)에 올라 그대로 강술하도록 하니 읽는 억양이나 해석하는 표현이 모두 스승과 똑같았다. 그의 훌륭한 소문과 명성은 이로부터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13세였다.
그 뒤에 수(隋) 나라가 세력을 잃어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제왕의 도성은 걸(桀)18)과 척(跖)19) 같은 도적들의 소굴이 되었고, 하(河)와 락(洛) 등의 하남 지역은 포악한 폭도들로 들끓었다. 의관(衣冠)을 갖춘 관리들은 다 없어지고 승려[法衆]들도 사라졌으며 백골(白骨)이 거리에 나뒹굴고 굴뚝에는 연기마저 끊어져 버렸다.
일찍이 왕망(王莽)20)과 동탁(董卓)21)이 반역으로 살상하고, 유연(劉淵)22)과 석륵(石勒)23)이 화북(華北)을 어지럽히는 재앙을 일으켰을 때도 이처럼 백성을 참살하고 나라를 난도질한 적은 없었다. 비록 법사가 나이는 어렸지만 변란이 일어날 것을 마음으로 알고는 이를 형에게 말했다.
“이곳이 비록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긴 하지만 사람이 죽고 화란(禍亂)이 이처럼 심하니, 어찌 이곳을 지키다가 죽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당(唐)의 황제[高祖]가 진양(晋陽)24) 사람들을 데리고 이미 장안(長安)에 계시며 천하 사람들이 부모처럼 의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형님, 함께 장안으로 갑시다.”
형은 그의 말을 따라 곧 함께 갔는데 그때가 무덕(武德) 원년(618)이었다. 이때는 아직 나라가 건립된 초창기여서 전쟁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병법25) 익히는 것을 급선무로 삼는 시기였다. 그래서 한가하게 유교와 불교의 도를 배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장안에는 불교의 강석(講席)이 없었으니 법사가 이를 매우 개탄했다.
일찍이 수양제(隋煬帝)는 낙양[東都]에다 네 개의 도량(道場)을 세우고 천하의 이름난 승려들을 불러 살게 했었는데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승려들이 숲속의 나무처럼 많았는데, 그 중에 경(景)ㆍ탈(脫)ㆍ기(基)ㆍ섬(暹)26) 등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말년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공양하는 시주가 끊어져 많은 승려들이 면촉(綿蜀)27)으로 떠났기 때문에 불법을 아는 사람들이 그곳에 아주 많았다.
이에 법사가 형에게 말했다.
“장안에는 불법(佛法)을 강하는 일이 없으니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습니다. 촉나라로 가서 수업(受業)하도록 하십시다.”
형은 그의 말을 따랐다. 그래서 형과 더불어 자오곡(子午谷)28)을 지나 한천(漢川)29)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공(空)ㆍ경(景)30) 두 법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다 도량(道場)의 대덕(大德)으로서
서로 만난 뒤로는 희비(喜悲)를 같이 했다. 법사는 그곳에서 한 달 남짓 머물면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에 다 함께 성도(成都)로 떠났다.
촉나라에서는 여러 대덕(大德)들이 이미 크게 법연(法筵)을 열고 있었다. 여기에서 도기와 보섬 법사의 『섭론(攝論)』과 『비담(毘曇)』, 도진(道震) 법사의 『가연(迦延)』31)을 듣고는 촌음을 아껴가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했으므로 2~3년 만에 경전의 모든 분야에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천하가 기아로 허덕일 때였으나 그래도 촉(蜀) 지방만은 양식이 풍부했다. 이 때문에 사방의 승려들이 많이 몰려들어 강좌에는 항상 수백 명이 사람들이 모였다. 그 가운데 현장 법사의 이지(理智)와 큰 재주가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오(吳)ㆍ촉(蜀)ㆍ형초(荊楚)32)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사모하고 따르는 것이 마치 옛날에 사람들이 이응(李膺)33)과 곽태(郭泰)34)를 흠모하던 것과 같았다.
법사의 형은 성도(成都)35)의 공혜사(空慧寺)에 살고 있었는데 그 역시 풍채가 훤칠하고 아버지를 닮아 몸집도 컸으며, 불교는 물론 그 밖의 학문까지도 좋아했다. 그는 『열반경』ㆍ『섭대승론』ㆍ『아비담(阿毘曇)』 등을 강의하였는데, 거기에 겸하여 『서전(書傳)』까지 통달했으며 특히 노장학(老莊學)에 밝았다. 그래서 촉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였고, 총관(總管)36)인 찬공(酇公)37)은 특별히 그를 흠모하고 귀하게 여겼다. 글을 짓거나 말을 함에 있어 깊이가 있고 풍류가 있었기 때문에 남과 교제하거나 범인(凡人)들을 유도하는 것에는 아우보다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저하게 뛰어나서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고 팔굉(八紘)38)까지 가서 불교의 현묘한 이치를 연구한 점이나, 우주처럼 넓고 큰 뜻을 세우고 성업(聖業)을 이어받을 마음을 가진 점, 퇴폐한 기강을 바로잡아 일으키고 나쁜 풍속을 없앤 점, 세파에 시달려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천자(天子)를 대하는 자리에서 기품과 절개가 더욱 고상하다는 점에서는 형이 현장 법사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처럼 형과 아우 두 사람의 아름다운 덕업(德業)과 청정한 기질은 비록 여산(廬山)에 살던 혜원(慧遠)39)과 혜지(慧持) 형제40)라 해도 따를 수가 없었다.
법사는 만 20세가 되던 해인 무덕 5년(622)41)에 성도에서 구족계를 받고 여름 안거(安居) 때에 율(律)을 배워 5편(篇) 7취(聚)42)의 종지(宗旨)를 한 번에 터득했다. 이리하여 익주(益州)43)에서 경론(經論) 연구를 다 마치고 법사는 다시 장안으로 들어와 뛰어난 종지를 배울 생각이었으나
법률 조식(條式)에 어긋나기도 하고 또 형의 만류도 있어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에 법사는 몰래 상인들과 더불어 일행이 되어 배를 타고 3협(峽)44)을 거쳐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가서 형주(荊州)45)의 천황사(天皇寺)에 이르렀다. 이곳의 승려나 속인들도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이던 터라 모두들 이렇게 오신 김에 설법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법사가 『섭대승론』과 『아비담(阿毘曇)』을 강의하였는데 여름에서부터 겨울에 걸쳐 각각 세 번씩 강론했다.
이때 덕망 높은 황실의 친척이던 한양왕(漢陽王)이 그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법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여 몸소 방문하여 알현하였다.
설법하는 날에 왕은 관료들과 승려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름난 사람들이 모두 강당으로 모여 들었다. 여기에서 질문이 구름처럼 쏟아지고 어려운 질문이 나오기도 했으나, 법사는 일일이 응대하며 해석해 주어 뜻이 이해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 중에는 깊이 깨달은 사람도 있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왕도 역시 감탄을 그칠 줄 몰라 하였다. 보시(布施)한 것이 산처럼 쌓였으나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자 다시 북쪽으로 유람하면서 선덕(先德)들을 찾아 물었다. 먼저 상주(相州)46)에 이르러 혜휴(慧休) 법사를 만나 의심나는 것을 질문했고, 또 조주(趙州)47)에 가서는 도심(道深) 법사를 뵙고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다. 그리고 장안에 들어가서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면서 도악(道岳) 법사에게서 『구사론(俱舍論)』48)을 배웠다.
배우는 것은 모두 단번에 그 뜻을 깨달아 경전의 조목조목을 마음에 새겨두니 비록 나이 많은 노승들이라 해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고, 학문이 깊고 원대하여 은미하게 숨은 뜻까지도 밝혀내므로 대중들이 따를 수가 없었다. 때로는 홀로 깊고 오묘한 뜻을 깨닫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당시 장안에는 법상(法常)49)과 승변(僧辯)이라는 두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2승(乘)50)에 대하여 깊이 알았고 3학(學)51)을 행하였으므로 도성의 법장(法匠)이라고 승려나 속인들이 모두 그에게로 모여 들었다. 그들의 도는 중국에 널리 퍼지고 명성은 해외(海外)에까지 알려져 상경하여 그를 따르는 승려들이 구름 같이 많았다.
그들은 비록 모든 경전을 갖추고 있기는 했으나 특히 『섭대승론』에만 치우쳐 강의하고 있었다. 법사는 이미 오(吳)와 촉(蜀)에서 배웠던 것이지만 장안에 와서도 그들을 찾아가 또다시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단번에 모두 습득해 버렸다.
그러자 두 대덕은 크게 칭찬하면서 법사에게 말했다.
“자네는 석문(釋門)의 천리마(千里馬)라 할 수 있으니, 다시 지혜의 해를 밝게 하는 일은 마땅히 그대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이미 늙어서 그날을 아마도 보지 못할 것이 두렵구나.”
이때부터 학승들의 보는 눈이 달라졌고 명성이 장안에 자자해졌다.
법사는 두루 다니면서 여러 스승을 뵙고 그 말씀을 자세히 경청하고서는 그 이치를 자세히 고찰해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제각기 종지(宗旨)를 멋대로 해석하고 있어서, 성전(聖典)에 징험해 봐도 또한 숨은 뜻과 나타난 뜻에 다른 곳이 있어서 어느 것을 따라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법사는 서방(西方)으로 가서 의혹되는 것을 풀고, 아울러 『십칠지론(十七地論)』을 가지고 와서 모든 의심을 풀기로 맹세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52)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법현(法顯)53)과 지엄(智嚴)54)은 역시 한 시대를 이끌었던 승려로서 모두가 법을 구하고 대중들을 교화하였으니 어찌 그들의 고고한 발자취를 따르지 않거나 위업을 잊을 수 있겠는가. 대장부라면 당연히 그의 뒤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이에 동료들과 함께 인도로 가고 싶다는 뜻을 상소하였으나, 불허한다는 조칙(詔勅)이 내려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포기했으나 오직 법사만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혼자라도 떠날 것을 결심하고 서방 여행에서 어려움을 견뎌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마음을 시험해 보기로 하고, 인간의 여러 가지 고통을 하나하나 겪어서 이겨 내면서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탑(塔)에 들어가 지극정성으로 자기 뜻을 피력하면서 성중(聖衆)의 가호와 왕복 여행길에 무사하기를 빌었다.
처음 법사가 태어날 때 어머니는 법사가 흰 옷을 입고 서방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내 아들인데 지금 어디로 가려 하느냐?”
“법을 구하러 갑니다.”
이것으로 볼 때 서방으로 갈 조짐은 처음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다.
정관(貞觀) 3년(629)55) 가을 8월에 드디어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는 한편 또 상서로운 일이 있기를 바랐더니 그날 밤 이런 꿈을 꾸었다.
“큰 바다 한가운데 소미로산(蘇迷盧山)56) 있었는데 네 가지 보배로 만들어져 있어서 매우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마음으로는 산에 오르고 싶었으나 큰 파도가 일고 있었으며 또 타고 갈 배도 없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고 이윽고 결심하고 들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돌로 된 연화(蓮華)가 발걸음을 따라
파도 위에 솟아나 발을 디딜 수 있게 생겨났다가 잠시 후에 발을 떼면 사라졌다. 그리하여 잠깐 사이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준하여 오를 수가 없었다. 시험 삼아 몸을 힘껏 뛰어보았더니 거센 바람이 불어와 몸을 솟구쳐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환하게 트여서 장애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기뻐하고 있을 때 잠이 깼다.”
이런 꿈을 꾸고서 마침내 길을 떠났으니 이때 법사의 나이 26세였다.
그 당시 진주(秦州)57)에 효달(孝達)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장안에서 『열반경』을 배웠으며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효달과 함께 떠나 진주에 이르러 하룻밤을 지내고, 거기서 난주(蘭州)58) 사람을 만나 그를 따라 난주에 가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관마(官馬)를 끌고 양주(涼州)59)로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 그를 따라 양주에 이르렀고, 거기서 또 한 달가량을 머물렀다. 그리고 그곳 승려와 속인들이 『열반경』ㆍ『섭대승론』 및 『반야경』의 강의를 요청하니 법사는 모두 강의해 주었다.
양주는 하서(河西)60) 지방에 있는 도시로서 서번(西蕃)61)과 총우(蔥右)62)의 여러 나라와 접해 있어서 상인들의 왕래가 끊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법사가 강의를 개설하자 날마다 성황을 이룬 가운데, 그 상인들이 모두 진기한 보물을 시주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감탄하면서 돌아갔다. 그리고 각자 돌아가서는 자기 군장(君長)에게 법사의 훌륭함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불법을 구하러 서역 바라문국(婆羅門國)63)으로 오려고 한답니다. 이리하여 서역의 여러 도시에서는 법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환희심을 내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미리 기다리지 않는 도시가 없었다. 강의가 끝나는 날에는 시주한 보물이 너무 많아서 금이나 은전(銀錢), 말까지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법사는 반은 불전(佛殿)에 공양하고 나머지는 모두 여러 절에 나누어 주었다.
이 무렵은 당(唐) 나라의 정치가 막 시작되는 때여서 국경도 멀리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허가해 주지 않았다.
이때 양주의 도독(都督)64)을 맡고 있던 이대량(李大亮)65)도 이미 엄칙(嚴勅)을 받들어 단호히 출국을 엄금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대량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도로 가겠다고 장안에서 온 승려가 있습니다. 왜 그러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대량은 법사가 금지된 칙령을 위반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법사를 만나 양주에 온 이유를 물으니 법사가 말했다.
“서방으로 불법을 구하러 가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이대량은 장안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했다.
당시 양주에는
혜위(惠威) 법사가 있었는데 하서(河西) 지방의 지도자로서 도력(道力)과 총명함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벌써부터 법사의 강의와 논리를 중하게 여기고 있었던 데다가, 또 법을 구하러 간다는 뜻이 있다는 말까지 듣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래서 몰래 혜림(惠琳)과 도정(道整)이라는 두 제자를 보내어 법사가 서역으로 떠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현장 법사는 감히 공공연하게 나가지는 못하고 낮에는 잠을 자고 밤길을 걸어 마침내 과주(瓜州)66)에 이르렀다. 이때 과주 자사(刺史)67) 독고달(獨孤達)은 법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극진히 공양했다. 법사가 서역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했다.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50여 리를 가면 호로하(瓠蘆河)68)가 나옵니다. 강의 하류는 넓고 상류는 좁아서 회오리치는 물살이 세고 깊으니 건널 수가 없습니다. 상류로 가면 옥문관(玉門關)69)이 설치되어 있는데 반드시 그곳을 거쳐야만 합니다. 이 옥문관은 서쪽 국경의 요충지[襟喉]입니다. 옥문관 밖 서북쪽에는 다섯 개의 봉화대(烽火臺)가 있는데 그곳에는 감시병이 있습니다. 각 봉화대 사이의 거리는 백 리 정도가 되며 그 중간에는 물과 초목이 없습니다. 그 다섯 봉화대의 북쪽은 곧 막하연적(莫賀延磧)70)이며 이오국(伊吾國)71)의 국경이 됩니다.”
이 말을 듣고 법사는 마음이 불안했다. 타고 온 말도 죽어서 달리 계책을 세울 길이 없이 어쩌지도 못한 채 한 달가량을 지나게 되었다. 아직 떠나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양주에서는 또 통첩이 내려졌다.
“현장이라고 하는 중이 서번(西蕃)으로 가려고 한다. 각 지방 주현(州縣)에서는 엄중히 경계하여 체포하도록 하라.”
그런데 주리(州吏) 이창(李昌)은 불교를 숭상하는 관리였다. 마음으로 이 법사가 현장이 아닐까 의심이 나서 몰래 통첩장을 가지고 가서 말했다.
“스님이 여기에 적힌 분이 아니십니까?”
법사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자 이창이 말했다.
“법사께서 사실대로 말씀하신다면 이 제자가 반드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법사가 사실대로 말하자 이창이 듣고는 매우 드문 일이라며 감탄하며 말했다.
“법사께서 정히 그러시다면 저는 법사를 위해서 이 문서를 찢어버리겠습니다.”
그리고 법사 앞에서 통첩장을 찢어버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법사께서는 어서 떠나십시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근심걱정이 점점 더해만 갔다. 따라오던 두 제자 가운데 도정(道整)은 이미 돈황(燉煌)으로 떠났고, 오직 혜림(惠琳)만 남아 있었는데 그도 먼 길을 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돌려보냈다. 그러다 마침내 말 한 필을 사긴 했으나
마부가 없어 걱정하다가, 마침 머물고 있는 절의 미륵상 앞에서 간절히 빌었다.
“바라옵건대 마부 한 사람을 얻게 해주시어 옥문관을 지날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날 밤이었다. 그 절에 호승(胡僧)인 달마(達磨)가 머물고 있었는데, 그의 꿈에 법사가 한 송이 연꽃 위에 앉아서 서방으로 가는 것이었다. 달마가 이를 이상히 여겨 아침 일찍 찾아와서 꿈 이야기를 하니 법사는 출발을 해도 되는 징조라고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그러면서도 달마에게 말하였다.
“꿈이란 허망한 것인데 어찌 그런 말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절에 들어가 미륵상에게 간청하였더니, 갑자기 한 호인(胡人)72)이 들어와 예불을 하고는 마침내 법사를 따라 주위를 한 번, 두 번, 세 번 돌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물었다.
“성은 석(石)이고 이름은 반타(槃陀)입니다.”
이 호인이 즉시 계 받기를 청하기에 이에 5계(五戒)73)를 주었다. 호인은 매우 기뻐하며 돌아갔다가 잠시 후에 병과(餠菓)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법사는 그가 밝고 건강한 모습에다가 공손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고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말했더니 호인은 허락하며 말했다.
“법사께서 다섯 봉화대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법사는 크게 기뻐하며 의복을 팔아서 말을 사고는 떠날 날을 약속했다. 다음 날 과주를 출발하여 해질 무렵에 초원 사이로 들어섰다. 얼마 뒤 그 호인은 다시 붉은 색의 야윈 조랑말을 탄 늙은 호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뒤따라왔다.
법사가 마음으로 불쾌한 마음을 보이자 젊은 호인이 말했다.
“이 노인이 서역 길을 아주 잘 압니다. 이오(伊吾)74)를 30여 차례나 왕복했습니다. 이 때문에 함께 온 것이니, 잘 도와줄 것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서역으로 가는 길은 험악하며 사막은 멀기만 합니다. 만약에 뜨거운 도깨비 바람을 만나면 죽음을 면할 자가 없습니다. 여럿이 짝을 지어 간다 해도 자주 길을 잃고 헤매는데 하물며 법사께서는 어떻게 혼자 가실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시고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법사가 말했다.
“빈도(貧道)는 대법(大法)을 구하기 위하여 서방으로 떠나려는 것이오. 만약 바라문국(婆羅門國)에 이르지 못한다면 결코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오. 비록 중도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노인이 말했다.
“법사께서 반드시 가시고자 한다면 저의 이 말을 타고 가십시오. 이 말은 이미 이오(伊吾)를 열다섯 차례나 왕복했습니다.
튼튼한데다가 길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법사님의 말은 아직 어려서 먼 길을 횡단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법사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처음 장안에서 장차 서방으로 가려고 뜻을 세웠을 때 하홍달(何弘達)이라고 하는 점쟁이[術人]에게 점을 친 일이 생각났다. 그는 점을 치고 관상을 보아 적중한 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신이 인도로 가는 일에 대해 점을 치게 했더니 하홍달이 이렇게 말했다.
“법사께서는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실 때의 모습은 옻칠을 한 안장[鞍]에다 금구(金具)를 매단 한 마리의 붉고 야윈 늙은 말을 타고 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 늙은 호인이 타고 있는 말을 보니 야위고 붉은데다가 안장에는 옻칠을 했고 금구가 달렸으니 하홍달의 말과 일치한 것이다. 마음으로 ‘이제 됐구나’ 생각하고 드디어 말을 바꿔 탔다. 호옹(胡翁)은 기뻐하며 예를 올리고 떠나갔다. 이윽고 짐 보따리를 꾸려 젊은 호인과 함께 밤에 출발하여 3경(更) 무렵에 강에 이르니 멀리 옥문관75)이 보였다. 옥문관에서의 거리가 상류로 10리쯤 되는 곳인데 양쪽 언덕의 너비는 한 길 정도이고 그 옆에는 후추나무[胡椒樹]가 무성했다.
호인은 곧 나무를 베어 다리를 놓고 그 위에 풀을 깔아 모래를 덮고는 말을 몰아 건넜다. 법사도 건너게 되자 기뻐하며 짐을 풀고 쉬기로 했다. 법사는 호인과 50보쯤 떨어져서 각자 자리를 깔고 자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호인이 칼을 빼들고 일어나 살금살금 법사를 향해 열 걸음 쯤 앞에까지 왔다가는 다시 돌아갔다. 법사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딴 마음을 갖지는 않았나 하는 의심이 생겨 즉시 일어나 경을 외우고 관세음보살을 마음으로 염했다. 호인이 이런 광경을 보고는 돌아가 눕더니 마침내 잠이 들었다. 하늘이 밝아올 무렵 법사는 그를 불러 깨우고, 물을 길러 얼굴을 씻고 양치질하고 나서 식사를 한 후 출발하려고 하자 호인이 말했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만, 그러나 갈 길은 함하고도 먼 데다 물도 초목도 없습니다. 오직 오봉(五烽) 밑에 가야 물이 있는데 그 물마저도 반드시 밤을 틈타 물을 훔쳐 와야 합니다. 그런데 한 번 발각되면 그 즉시 죽임을 당할 것이니 차라리 돌아가서 평온하게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법사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이 확고했다. 그리고 곧바로 하늘을 한 번 우러러보고는 나아가니 호인은 칼을 빼들고 활에 시위를 메우고는 법사에게 앞서서 가라고 명령했다. 법사는 앞서 가지 않았다. 호인은 혼자서 몇 리 쯤 가다가 멈춰 서서 말했다.
“나는 도저히 더 이상 갈 수 없소. 딸린 가족도 많은데다가
왕법(王法)도 어길 수가 없소.”
법사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마음대로 돌아가라고 하자 호인이 말했다.
“법사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오. 만약 잡히어 나까지 끌어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소.”
법사가 대답했다.
“비록 이 몸이 잘리고 끊겨 티끌 같이 된다 해도 끝내 당신을 끌어들이지는 않을 것이오.”
이렇게 굳게 맹세하자 호인의 마음이 바로 풀렸다. 법사는 그에게 말 한 필을 주고 수고한 데에 대한 고맙다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이때부터 혈혈단신으로 사막을 건너는데 오직 보이는 것이라고는 쌓여 있는 해골과 말의 분뇨뿐인 곳을 계속해서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얼마 뒤에 갑자기 사막이 꽉 찰 만큼 수백의 군대가 나타났다. 군대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멈춘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모피나 털옷을 입고 있었고 낙타나 말을 타고 있는 형상에다 깃발이나 창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아물거리며 순간적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였다. 멀리서 볼 때는 분명히 보였는데 가까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법사가 처음에 볼 때는 도적의 무리라 여겼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이것이 곧 요괴(妖鬼)임을 알았다.
그때 공중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때부터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80여 리를 지나가니 제일봉(第一烽)이 보였으나 감시병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 사막의 구덩이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된 다음에 출발했다.
이윽고 제일봉에 도착하여 봉우리 서쪽에서 물을 발견하여 마시고 손도 씻었다. 그리고 가죽주머니에 물을 가득 채우려는데 갑자기 화살 하나가 날아와 무릎 가까이에 꽂히더니 조금 있다가 또다시 화살 하나가 날아 왔으므로 감시병에게 들켰다는 것을 눈치 채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중이오. 장안에서 왔소. 그러니 당신은 나를 쏘지 마시오.”
그리고서 곧 말을 끌고 봉화대로 다가가니 봉화대 위에 있던 사람 역시 문을 열고 나왔다. 법사를 보고는 승려임을 확인한 뒤 데리고 들어가 교위(校尉)76)인 왕상(王祥)을 만나게 했다. 왕상이 횃불을 비추어 보더니 말했다.
“우리 하서(河西) 지방의 승려는 아니다. 틀림없이 장안에서 온 것 같다.”
그리고는 여행의 목적을 꼬치꼬치 묻자 법사가 말했다.
“교위께서는 양주(涼州) 사람들이 ‘현장이라는 승려가 바라문국으로 법을 구하러 간다’라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교위는 대답했다.
“현장 법사는 이미 동쪽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까?”
법사가 말 위에 있던
장소(章疏)와 이름을 보여 주었더니 그는 현장 법사임을 확신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서역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멉니다. 법사께서는 결코 거기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법사의 죄도 또한 봐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돈황 사람이니 법사를 돈황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곳에는 장교(張皎)라는 법사가 있는데, 현인(賢人)을 흠모하고 덕(德)을 숭상하는 분이니 법사를 뵙게 되면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그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법사가 말했다.
“나는 낙양에서 태어나[桑梓]77) 어려서부터 불법을 흠모하였습니다. 장안과 낙양의 법에 밝은 고승을 친견했으며, 오(吳)와 촉(蜀)에서 뛰어난 승려들이 책을 짊어지고 따르는 그들에게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배우고 서로 대담하고 토론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평생 존경을 받고 살았소. 그러니 만약 저 자신만 수행을 하고 이름을 내고자 한다면 어찌 시주[檀越]께서 말하는 돈황의 법사 같은 이를 싫어하겠소.
그러나 부처님의 교화와 경전이 완전하지 않고 그 뜻도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은 것이 한탄스러워서, 그 때문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서방으로 가서 유법(遺法)을 구하려고 맹세하였소.
그런데 지금 그대는 서로 격려는 하지는 못할지언정 그저 돌아가라고만 권유하고 있으니, 어찌 괴로움을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열반(涅槃)의 인(因)을 심을 수 있겠소. 굳이 나를 만류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형벌을 내리시오. 나는 절대로 한 발자국도 동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처음 먹은 마음을 저버리지 않겠소.”
왕상은 이 말을 듣고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다행히 법사님을 만나 기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법사께서는 피로하실 것이니 날이 밝을 때까지 누워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펴고 편히 쉬시게 하였다. 새벽이 되어 법사가 식사를 마치자 왕상은 사람을 시켜 물과 미숫가루와 빵을 준비하게 하여 직접 10여 리 길을 전송하고는 말했다.
“법사께서는 이 길을 따라 곧장 제4봉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착합니다. 그리고 저의 친족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성은 왕이고 이름은 백롱(伯隴)이라 합니다. 그곳에 도착하시거든 제가 법사님을 그곳으로 가라고 해서 왔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법사에게 절을 하고 헤어졌다.
그리하여 제4봉에 이르렀으나 어려운 일을 당할까 두려워 물가에 가서 묵묵히 물만 마시고 지나치려 하였다. 그런데 물가에 이르러 내려가지도 전에 벌써 화살이 날아왔다.
그래서 다시 지난번처럼 큰 소리로 외치며 황급히 봉화대로 향해 걸어갔다. 그도 역시 내려와서 봉화대로 법사를 데리고 들어갔다.
봉화대를 지키던 관리의 물음에 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천축(天竺)78)으로 가기 위해서
여기를 거쳐 지나게 되었고 제1봉의 왕상 교위가 이곳으로 가라고 하여 들르게 되었소.”
그는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면서 법사를 유숙하게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커다란 가죽 주머니와 말을 먹일 보리까지 주고 전송하면서 말했다.
“법사께서는 제5봉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성품이 거칠어서 딴 생각을 품을까 두렵습니다. 여기에서 1백 리 정도를 가시면 야마천(野馬泉)이 있습니다. 거기서 물을 구하도록 하십시오.”
거기서부터는 바로 막하연적(莫賀延磧)인데 길이는 8백여 리이며 옛날에는 사하(沙河)라고 불렀던 곳이었다. 하늘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도 없으며 또 물과 초목도 없는 곳이었다.
이때부터는 사방을 돌아보아도 그림자라고는 오직 법사 하나일 뿐이었다. 법사는 관세음보살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마음속으로 염하였다.
옛날에 법사가 촉에 있을 때 한 병자를 만났었는데, 병자는 몸에 부스럼이 터져 나와 더러운 냄새를 풍겼고 의복은 다 찢어지고 더러웠었다. 법사는 불쌍히 여겨 절로 데리고 가서 의복과 음식 값을 준 일이 있었다. 이에 병자는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에 법사에게 이 『반야심경』을 주었는데 법사는 그것을 항상 독송했다.
그때 사하를 건널 때에 여러 기이한 종류의 악귀(惡鬼)들이 그를 둘러싸고 앞길을 방해하여 관음보살을 염송(念誦)했으나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반야심경』을 독송했더니 모두 소리를 지르며 흩어졌다. 그러니 위기를 만날 때마다 대사를 구해준 것은 바로 이 경전이라 하겠다.
이때 1백여 리를 가다가 그만 길을 잃어서 야마천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주머니를 내리는데 주머니가 무거워 실수로 엎지르고 말았다. 천 리를 가는 동안 마실 물을 그만 한꺼번에 다 쏟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길을 잃어 맴돌기만 할 뿐 가야 할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제4봉으로 되돌아가기를 결심하고 10여 리쯤 왔을 때 다시 생각했다.
‘나는 처음에 발원할 때 만약 천축(天竺)에 이르지 못한다면 끝내 한 걸음도 동쪽으로 옮기지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 어째서 되돌아오고 있는가. 차라리 서쪽으로 가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동쪽으로 되돌아가서 살기를 바라겠는가?’
이에 말고삐를 되돌려 오직 관음(觀音)만을 염송하면서 서북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사방을 돌아보니 망망한 사막일 뿐 인적도 없고, 하늘을 나는 새의 자취도 완전히 끊어졌다. 밤에도 요사스런 도깨비의 불빛이 찬란하기가 마치 무성한 별빛 같았고, 낮이면 거센 바람이 모래를 휘몰아 흩뜨리는 것이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은 일을 만나도 마음에 두려움은 없었다.
단지 물이 없어 갈증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이때에 법사는 4일 밤, 5일 낮 동안 입에 물 한 방울도 적시지 못해 목구멍과 배가 바싹바싹 타들어가도 있었다. 법사는 거의 절명 상태로 더 이상은 나아갈 수가 없게 되어 마침내 모래 위에 누워 사경(死境)을 헤매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잊지 않고 관음을 염하면서 관음보살에게 기도했다.
“현장의 이 여행은 재리(財利)를 구함도 아니며 명예를 바라서도 아닙니다. 단지 위없는[無上] 정법(正法)을 구하려고 가는 것일 뿐입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보살께서는 자비로우신 생각으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괴로워하는 사람을 어째서 모른 채 하십니까?”
이렇게 빌기를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더니 5일째 밤이 되자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몸에 닿아 찬물에 목욕이나 한 듯이 상쾌해졌다. 그러자 눈이 번쩍 뜨이고 말도 거뜬히 일어섰다. 몸이 회복되자 잠깐 잠도 자게 되었다.
그렇게 잠든 사이에 꿈을 꾸었는데, 여러 길[丈]이나 되는 한 대신(大神)이 창을 잡고 가리키며 말하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강행하지 않고 자꾸 잠만 자고 있느냐?”
이 소리에 법사는 놀라 깨어나 출발했다. 한 10리쯤 가다가 말이 갑자기 다른 길로 들어섰다. 법사가 아무리 제지해도 말은 돌아서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몇 리를 더 가니 갑자기 몇 이랑이나 되는 푸른 초원이 나타났다. 말에서 내려 풀을 실컷 뜯게 한 뒤 초원을 열 발자국 쯤 가서 한 바퀴 돌아 나오다가 못물을 하나 발견했는데 거울처럼 맑고 깨끗했다. 그걸 마시고 나니 목숨이 되살아나서 사람과 말이 함께 소생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이것은 옛날부터 있었던 물과 초원이 아니라 아마 보살의 자비로 만들어진 듯하였다. 지극한 정성이 신(神)에게 통하면 다 이렇게 되는 것이리라.
이곳 초지(草池)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날 물을 가득 담고 말에게 먹일 풀도 뜯어 가지고 출발했다. 다시 이틀이 지나서야 비로소 유사(流沙)를 빠져나와 이오(伊吾)에 이르렀는데, 이와 같은 위태롭고 어려운 일들이 수없이 많아 이루 다 갖추어 서술할 수 없다.
이오에 이르러서는 어떤 절에서 묵게 되었다. 절에는 중국의 승려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노승(老僧)이 있었다. 그는 옷고름도 여미지 못하고 맨발로 뛰어나와 맞으며 법사를 껴안고 울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늘 이렇게 고향 사람을 만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렇게 소리 내어 흐느끼자
법사 역시 마음이 아파 그들과 함께 울었다. 이오는 물론 근처의 호승(胡僧)과 호왕(胡王)이 모두 찾아와서 법사를 배알하였다. 이오왕은 자신의 거처로 법사를 청하여 정중하게 공양하였다.
이때 고창(古昌)의 왕 국문태(麴文泰)79)의 사신이 먼저 와서 이오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날 돌아가려다가 때마침 법사를 만나게 되었다. 돌아가서 왕에게 보고 하니 왕이 듣고는 그날로 사신을 보내서 이오왕에게 법사를 고창으로 보내도록 부탁했다. 그리하여 좋은 말 수십 필을 마련하고 중신(重臣)들을 시켜 숙사(宿舍)를 마련하여 환영하도록 했다. 왕의 사신은 10여 일을 머물다가 왕의 뜻을 전하고 은근히 고창에 와주시기를 간청하였다.
법사의 생각에는 가한부도성(可汗浮圖城)을 경유하여 서방으로 가려고 했는데 고창왕이 이렇게 간청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고창으로 떠나 남적(南磧)을 건너 6일 만에 고창의 경계인 백력성(白力城)에 이르렀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법사는 이 성(城)에서 묵으려고 하였으나 관인(官人)과 사신이 말했다.
“왕성(王城)이 가까이 있으니 그냥 가시기 바랍니다.”그래서 여러 번 좋은 말로 바꾸어 타며 전진하였다. 법사가 먼저 타고 온 붉은 말은 그 뒤를 따르도록 했다.
그날 밤 닭이 울 무렵에 왕성(王城)에 도달했는데, 문지기가 왕에게 아뢰자 왕이 문을 열어주라고 명하여 법사는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왕은 신하들과 함께 앞뒤로 촛불을 밝히고, 몸소 궁을 나와 법사를 맞이했다. 후원(後院)으로 들어가 비단 장막으로 둘러쳐진 2층 누각에 앉게 한 뒤 매우 정중하고 공경스럽게 말했다.
“제가 법사의 명성을 듣고서 기뻐 침식조차 잊었습니다. 노정(路程)을 미루어 생각해 보니 법사께서 오늘 밤에 틀림없이 도착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처자와 함께 잠을 자지 않고 경을 읽으며 경건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에 왕비가 수십 명의 시녀와 함께 와서 예배하였다.
어느덧 날이 샐 무렵이 되자 오랜 이야기 끝에 졸음이 몰려왔다. 왕은 그제야 궁으로 돌아가면서 대궐을 지키는 환관들에게 법사를 숙소로 모시게 했다.
아침에 법사가 일어나기도 전에 왕이 왕비와 함께 문 앞에 와서 예문(禮問)하였는데 왕이 말했다.
“제가 생각하건대 적로(磧路)는 매우 험악한데 법사께서 단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감탄을 이기지 못했다. 미리 준비해 둔 식사를 마치고 궁궐 옆에 따로 마련해 둔 도량(道場)으로 왕이 법사를 직접 인도하여 머물게 하고는 환관을 보내서 시중들게 하였다.
고창(高昌)에는 단(彖) 법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안(長安)에 가서 유학하여 법상(法相)80)에 대해 잘 알았으므로 왕이 그를 귀히 여기고 있었다. 왕은 단 법사를 오게 하여 법사와 서로 만나보게 했는데 조금 있다가 떠났다.
또 국통왕(國統王) 법사라는 나이가 80이 넘는 자가 있었는데, 왕은 그에게 명하여 법사와 함께 거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기를 권하고 서쪽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법사는 듣지 않았다.
법사가 10여 일을 머물고 나서 떠나야겠다고 하자 왕이 말했다.
“이미 통사(統師)를 통해 머무시도록 청했는데 법사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법사가 말했다.
“여기 머물게 된 것은 참으로 왕의 은혜라고 여깁니다만 여기에 온 것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말했다.
“제가 선왕(先王)을 모시고 중국 여러 곳을 다닐 때 수 양제(隋煬帝)를 따라 동서(東西) 이경(二京)과 연(燕)ㆍ대(岱)ㆍ분(汾)ㆍ진(晋)81)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명승(名僧)들을 친견했습니다만 마음으로 존경할 만 한 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법사의 명성을 듣고부터는 심신(心身)이 즐거워 춤을 추는 듯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법사가 머무시게 된다면 저는 종신토록 공양하면서 이 나라 사람들을 다 법사의 제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법사께서는 이곳 승려들에게 강의를 해주십시오. 비록 수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수천 명은 될 것입니다. 모두 경전을 공부하게 하여 법사의 청중이 되게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제 마음을 살피시어 서방으로 가실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법사가 고맙게 생각하며 말했다.
“왕의 후의(厚意)는 덕이 없는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공양을 받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중국에 법의(法義)가 전파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도 빠진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회의를 품고 부처님의 참된 자취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서방에서 마친다 해도 아직까지 듣지 못했던 종지(宗旨)를 청하려 합니다. 방등(方等)82)의 감로(甘露)를 단지 가라(迦維)83)에만 뿌릴 것이 아니라 미언(微言)을 가려 뽑아서 동방 여러 나라에 전하고자 합니다. 파륜(波崙)84)이 도를 물었던 그 의지와 선재동자(善財童子)85)가 벗을 찾던 마음처럼 지금 제 마음은 날이 갈수록 굳어질 뿐인데 어찌
중도에서 그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왕의 뜻을 거두시고 공양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왕이 말했다.
“나는 법사를 사모하며 기뻐할 따름이니 반드시 머무시도록 하고 공양할 것입니다. 비록 총령산(蔥嶺山)86)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해도 나의 뜻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나의 우직한 정성을 믿으시고 실속 없다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법사가 말했다.
“왕의 깊은 마음을 말씀을 안 하신다고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서방으로 가려는 것은 법을 위해서이므로 법을 얻기 전에는 절대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삼가 말씀드리는 것이니 부디 왕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대왕께서는 일찍이 훌륭한 복을 닦아 왕이 되셨는데 이는 단지 백성들이 숭앙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리로 보아 돕고 북돋아줘야 하는데도 어째서 장애가 되게 하십니까?”
왕이 말했다.
“저도 또한 감히 장애를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 나라에는 이끌어 줄 만한 법사[導師]가 없기 때문에 법사를 머물게 하여 우매한 중생들을 인도하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법사가 모두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자 왕은 곧 얼굴색이 변하고 소매를 걷어 올리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른 방법으로 법사를 처리한다면 법사가 어찌 떠날 수 있겠소.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법사를 법사 나라로 돌려보낼 수도 있소. 부디 스스로 잘 생각해 보시오. 내 말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오.”
법사가 대답했다.
“현장이 여기 온 것은 대법(大法)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와서 이렇게 장애를 만났으니, 단지 육체는 왕 곁에 머물 수 있겠으나 정신은 머물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목이 메어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 역시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많은 공양을 바치면서, 매일 음식을 차린 상을 왕이 직접 올렸다. 이렇게 법사는 고창에 머물면서 처음 세운 뜻이 막히게 되자 마침내 결심하고 단식(斷食)을 함으로써 왕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이에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3일 동안 물 한 방울 넘기지 않았다. 4일째가 되자 왕은 법사의 호흡이 점점 멎어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두려운 마음이 일어서 깊이 뉘우치며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였다.
“법사께서 하고 싶은 대로 서방으로 떠나십시오. 이렇게 비오니 부디 어서 아침 식사를 하십시오.”
그러자 법사는 진실한 말이 아닐까 봐 걱정하며 왕에게 해를 가리키며 언약을 하라고 요청했다.
왕이 말했다.
“만약 그러시다면 함께 부처님 앞에서 인연을 맺도록 하십시다.”

그리고는 함께 도량으로 들어가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모후(母后)인 장태비(張太妃) 앞에서 함께 법사와 형제가 될 것을 약속하며 이렇게 말했다.
“법사의 뜻대로 법을 구하러 가십시오. 그리고 바라건대 돌아오실 때에는 이 나라에 3년 만 머무시어 저의 공양을 받아주소서. 만약 금생에 성불(成佛)하시면, 원컨대 저는 바사닉왕(波斯匿王)87)이나 빈바사라(頻婆娑羅)88) 등과 같이 법사를 위해 외호(外護)89)하는 단월(檀越)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한 달만 더 머물면서 『인왕경(仁王經)』을 강의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 사이에 법사께서 여행길에 입으실 옷을 마련하겠습니다.”
법사는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대비도 매우 기뻐하면서 말했다.
“바라건대 법사와 더불어 한 권속이 되어 대대로 서로 도와 나갑시다.”
그러자 법사는 비로소 식사를 했다. 그의 절지(節志)와 굳은 마음이 이와 같았다.
그 후에 왕은 일부러 커다란 장막을 치고 강의를 열었다. 천막은 3백여 명이 앉을 수 있었고 대비를 비롯해서 왕과 통사(統師)와 대신 등이 각각 자리를 따로 하여 강의를 들었다. 매번 강의할 때마다 왕이 직접 향로를 들고 와서 법사를 맞아 인도하였으며, 법좌에 오를 때에는 왕이 엎드려 법사로 하여금 매일 딛고 오르게 했다. 이리하여 강의는 끝났다.
법사를 위해 네 명의 사미(沙彌)를 뽑아 시중들게 했으며, 법복(法服) 30벌[具]을 만들었다. 서역(西域)은 매우 춥기 때문에 면의(面衣)90)ㆍ장갑ㆍ신발ㆍ버선 따위의 여러 가지도 준비했다. 그리고 황금 1백 냥과 은전 3만, 비단과 명주 등 5백 필을 법사의 왕복 20년 동안의 경비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또 말 30필과 일꾼 25명을 지급했으며,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환신(歡信)을 보내어 서돌궐(西突厥)의 섭호가한(葉護可汗)의 아문(衙門)까지 배웅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스물네 통의 편지를 써서 굴지(屈支)91) 등 스물 네 나라에 보내면서 편지 하나마다 비단 한 필씩을 선물로 함께 보내도록 했다. 섭호가한에게는 비단 5백 필과 과일 두 수레를 헌상(獻上)하면서 아울러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이 법사는 나의 동생입니다. 바라문국에 가서 법을 구하고자 하니, 바라건대
가한께서는 법사를 이 몸처럼 어여삐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고창의 서쪽 여러 나라에 조서를 내려, 오락마(鄔落馬)92)를 번갈아 바꿔 보내서 국경을 나갈 수 있도록 청하였다.
법사는 왕이 사미(沙彌)와 국서(國書), 비단 등을 보낸 것을 보고, 너무 극진한 전별(餞別)을 부끄러워하여 사의를 표하며 말했다.
“현장이 듣기로는 강해(江海)가 깊어서 이를 건너려면 반드시 배를 타야하고, 중생이 미혹하여서 그들을 인도하려면 진실로 성언(聖言)을 빌려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대자대비로 이 예토(穢土)에 태어나시어 3명(明)93)의 혜일(慧日)94)을 비추어 이 세상의 유혼(幽昏)을 밝히셨습니다. 자비로운 구름은 멀리 하늘을 덮고 법우(法雨)는 삼천대천세계를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베풀고 나서 응신(應身)95)을 버리시고 진여(眞如)96)로 돌아갔습니다.
그 분이 남기신 가르침이 동방에 들어온 지 6백 년, 가섭마등(迦葉摩騰)97)과 강승회(康僧會)98)는 그 빛을 오(吳)와 낙(洛)에서 떨쳤고, 담무참(曇無讖)99)과 구마라집100)은 그 아름다움을 진(秦)과 양(涼)에 알렸습니다. 그들은 숭고한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고 모두가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멀리 다른 나라 사람이 중국으로 와서 경전을 번역했기에 음과 뜻이 다른 곳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신 지가 오래되어 해석하는 뜻이 서로 달라서 마침내 사라쌍수(沙羅雙樹)101) 밑에서 가르치신 불법의 참뜻이 극단의 두 길로 갈라졌습니다. 대승(大乘)의 종지(宗旨)는 둘이 아닌데도 남종(南宗)102)과 북종(北宗)103)으로 쪼개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쟁론(諍論)이 분분한 지가 무려 수백 년이나 되었으나 천하에 의문을 해결할 학자가 없는 듯합니다.
현장은 숙세의 좋은 인연으로 요행히도 어린 나이에 사문이 되어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스승을 따라다니기 어언 20년이 되었습니다. 이름난 현인(賢人)과 훌륭한 벗들과 함께 묻고 배우며 대승과 소승의 종지(宗旨)에 대해 거의 열람하였으나, 아직도 책을 잡으면 주저하고 경을 받들면 실망하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급고독원(給孤獨園)104)을 바라보며 발돋움하였고, 영취산(靈鷲山)105)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했습니다. 그러기에 한 번이라도 배임(拜臨)하여 오랜 의혹을 풀어보는 것이 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짧은 대롱을 통해서는 하늘을 알 수가 없고 작은 벌레가 바다를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단지 나의 이 미약한 정성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장을 꾸려 길을 따라오다가 마침내 이오(伊吾) 땅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해보면 대왕께서는 천지의 순화(淳和)를 받고 음양(陰陽)의 기운을 바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가 되어
백성들을 자식처럼 기르게 되었습니다. 동으로는 중국의 기풍(氣風)에 닿았고 서로는 백융(百戎)의 풍속을 어루만지셨습니다. 누란(樓蘭)106)과 월지[月氏]107)의 땅과 차사(車師)108)나 오랑캐가 넘보던 땅에까지도 다 함께 인(仁)을 베풀어 그 도타운 덕에 젖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현인을 흠모하고 학자를 사랑하며 선(善)을 좋아하여 자애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온 저 같은 사람도 정성을 다해 맞아 주시어, 머무는 동안 깊고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불법의 의리를 밝히고자 법연(法筵)을 펴주시고, 또 형제의 인연을 맺어 우애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아울러 서역 20여 번국[蕃]에 편지를 보내어 주실 뿐 아니라, 따뜻한 의복과 음식까지 주어 전송해 주셨습니다. 또 서방으로의 여행이 외롭고 눈길이 춥고 고될 것을 걱정하시어 사미승 네 사람까지 뽑아서 동행하도록 하셨으며, 법복과 솜모자와 담요와 버선 등 50여 가지 물건과 비단과 금전과 은전 등으로 20년 동안의 왕복 비용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엎드려 대하자니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설사 교하(交河)의 물길이 터져 범람한다 해도 이 은혜보다 넘치지는 않을 것이며, 총령(蔥嶺)의 산을 들어 올린다 해도 이 은혜보다 어찌 무겁겠습니까?
현도(懸度)109)와 능계(陵溪)110)가 험난하다 해도 근심이 되지 않고 천제(天梯)111)와 도수(道樹)112)에 참배하는 일이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왕의 윤허를 얻어 천축에 가게 된다면 이것이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이는 왕의 은혜일 것입니다. 그리고 뒷날 여러 스승을 뵙고 정법(正法)을 이어 받게 되면 귀국해서는 그 것을 번역하여 미문(未聞)의 경전을 널리 유포함으로써 여러 삿된 견해의 나무들을 잘라내어 이단(異端)의 구덩이를 메우고 교화(敎化)의 모자람을 보충하여 불문(佛門)의 지남(指南)을 정립하겠습니다. 원컨대 이 미약한 공(功)으로나마 왕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앞길이 멀어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내일이면 떠날 것을 생각하니 슬픔이 더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삼가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이에 대해 왕이 말했다.
“법사와 저는 이미 형제 사이입니다. 그러니 나라에 있는 모든 것은 나와 법사의 것일 텐데 어찌 고맙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떠나는 날에는 왕이 모든 승려들과 대신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성(城)의 서쪽까지 전송을 나왔다. 왕이 법사를 껴안고 통곡하니 승려와 속인들로 모두 슬퍼하며 이별의 울음소리가 교외에까지 넘쳐흘렀다.
왕은 왕비와 백성들은 먼저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대덕(大德)들과 함께 말을 타고 수십 리 밖에까지 전송하고 돌아갔다. 현장 법사가 지나가는 모든 나라 왕들의 예우는 모두 이와 같았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 무반성(無半城)113)과 독진성(篤進城)114)을 지난 뒤에 아기니국(阿耆尼國)115)으로 들어갔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