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사론(鞞婆沙論) 11권
비바사론 제11권
시타반니 지음
승가발징 한역
34) 사등처(四等處)4무량등(無量等)이라 하는 것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拾)를 말한다.
【문】무엇 때문에 선(禪) 다음에 무량등(無量等)을 말하는가?
【답】선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선과 함께 말하는 것이며 또 끝까지 궁구하지 못한 공덕이 있기에 다음으로 무량등을 말하는 것이다.
【문】무량등에 어떤 성품이 있는가?
【답】자비와 호지(護持), 탐욕이 없는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 공유법(共有法)과 상응법(相應法)을 취한다. 또한 욕계와 색계에 존재하는 5음의 성품과 희근의 성품에서 공유법과 상응법을 취하니, 결국 이것은 욕계와 색계의 5음의 성품이다.【문】만약 기쁨[喜]이 희근(喜根)의 성품을 지닌 것이라면 바수밀(婆須蜜)의 말과는 어떻게 상통되는가?
【답】바수밀의 설명에 보면 “자(慈)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를 “자와 자가 상응하는 수ㆍ상ㆍ행식이다”라고 하였다.
【문】어떻게 수음(受陰)이 수음과 서로 호응하는가?
【답】그 설명은 이렇다. “어떤 것이 자인가?”라고 묻는다면 “자와 자가 상응하는 수ㆍ상ㆍ행식이다”고 대답해야 한다.【문】만약 그렇게 대답하지 않는 경우에도 어떤 이치가 있을 것 아닌가?
【답】그것은 총체적으로 5음의 성품을 말한 것이다. 4무량등은 비록 수음(受陰)이 수음과 서로 호웅하지는 아니하지만 오직 상음(想陰)ㆍ행음(行陰)ㆍ식음(識陰)과는 서로 호응한다. 이것이 4무량등의 성품이다.
이미 그 본래의 종상(種相:種相身)1)을 말하였으니 마땅히 그 행(行)도 말해야 한다.【문】무엇 때문에 무량이라 말하며, 무량한 것들[無量等]이라 하는 것에는 어떤 이치가 있는가?
【답】희견(戱見)을 제거하기 때문에 무량등이라 한다.【문】만약 회견을 제거하는 것이 무량등이라고 한다면 무량등에도 두 가지의 희견의 쓰임새가 있는데 무슨 희견을 제거한다는 것인가?
【답】자비심은 희견을 제거한다. 중생이라 하는 것은 편견이 많기에 거기에는 노여움이 많다. 또 희호(喜護:喜捨)는 부질없는 애견(愛見:愛戱)을 제거한다. 그런 까닭에 회견을 제거하는 것이 무량등이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방일한 마음을 제거하기 때문에 무량등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의 유희(遊戱)이기 때문에 4무량등이라 말한다. 가령 호족(豪族)ㆍ귀족(貴族)일 경우에는 온갖 즐거운 놀이가 많은 것처럼 이와 같이 성인의 유희는 무량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인의 유희이기 때문에 4무량등이라 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그 세계를 말한다면 이는 욕계에 연계되기도 하고 또한 색계에 연계되기도 하며 그 경지를 말한다면 일곱 경지이니 욕계에서 미지정(未至定:未至禪)ㆍ중간정(中間定:中間禪)ㆍ4근본정(根本定)에 의지하는 일곱 경지이다. 그 의(依)란 욕계를 소의한다는 것이다. 그 행(行)을 말하자면 자(慈)는 즐겁게 해주는 행이며, 비(悲)는 괴로움을 없애주는 행이며, 희(喜)는 같이 기뻐하는 행이며, 지키는 마음 호(護)는 평등하게 대하는 행이다. 또 연(緣)에 대해서는 욕계에서의 무량등에 연하여 초선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초선의 무량등에 연하여 2선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2선에 연하여 3선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3선의 경지에 연하여 4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또 이와는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은 “자기의 경지에 연한다”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욕계에 연하고 모든 것이 중생에 연하며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연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욕계와 연한다고 하는 것은 혹 5음을 갖춘 중생과 연하는 경우도 있고 혹 2음만을 갖춘 중생과 연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자기 마음이 4무량심에 머무는 경우에는 5음을 갖춘 중생과 연하게 되고 만약 자기 마음이 4무량심에 머물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2음을 갖춘 중생과 연하게 된다.
염처(念處:意止)는 4념처이다. 그 지혜에 있어서 4무량등은 그 성품이 지혜가 아니지만 등지(等知)와 상응하게 된다.
정(定)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4무량심은 정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문】이 4무량등은 과거라 말해야 하는가, 미래라 말해야 하는가, 현재라 말해야 하는가?
【답】과거라고 말해도 좋고, 미래라고 말해도 좋고, 현재라고 말해도 좋다.
【문】이것은 과거의 연이라 말해야 하는가, 미래의 연이라 말해야 하는가, 현재의 연이라 말해야 하는가?
【답】과거의 연이라 말해도 되고, 미래의 연이라 말해도 되고, 현재의 연이라 말해도 된다.
【문】자기 생각을 연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연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답】마땅히 다른 사람의 생각에 연한 것이라 말해야 한다.
【문】이름에 연하는 것이라 말해야 하는가, 이치에 연한 것이라 말해야 하는가?
【답】이름에 연한 것이라 말해도 되고 이치에 연한 것이라 말해도 된다.【문】무량등2)이라 하는 것은 말과 같이 행동도 그러한가, 아니면 말과 행동이 다른가?
【답】일설에 의하면 무량등이라 하는 것은 말과 같이 행도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즉 먼저 자(慈)를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먼저 자(慈)를 말씀하셨다. 다음 비(悲)ㆍ희(喜)ㆍ호(護)도 역시 그렇다.
또 이와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무량등이라 하는 것은 말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다”라고 하였다.【문】무슨 까닭으로 말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다고 하는가?
【답】혹 경우에 따라서는 자애한 행을 하면서도 다른 행은 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문】왜 그렇게 하는가?
【답】모두가 점차로 삼매에 드는 일은 없으며, 순서에 따라 삼매에 드는 경우도 없으며, 또한 순서를 어기고 거꾸로 삼매에 드는 경우도 없고 또한 단계를 뛰어넘어 삼매에 드는 경우도 없다. 무량한 등해탈(等解脫)을 할 경우 모든 입(入)을 제거하게 된다.
【문】어떤 사람이 무량등을 행할 수 있는가?
【답】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악(惡)을 구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공덕을 구하는 사람이다. 악을 구하는 사람은 끝내 무량등을 행할 수 없다. 그는 아라한(阿羅漢)이 있는 곳에 이르러도 역시 악을 구한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범했는가, 무엇이 잘못인가, 무엇이 허물인가?’ 하면서 항상 악한 일을 외우고 익히고 지니게 된다. 그러나 공덕을 구하는 사람 그는 무량등을 행할 수 있다. 즉 그는 선근이 끊어진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도 거기서 공덕을 구하게 된다.【문】선근이 끊어진 사람에게는 공덕이 없는데 어디서 공덕을 구하는가?
【답】선근이 끊어진 사람이라도 모습이 단정하고 지극히 묘한 형상을 지녀서 예전의 숙세(宿世)의 행이 나타난 경우 곧 생각하기를 ‘예전의 숙세의 행은 지극히 묘하였구나. 이리하여 좋은 과보를 받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악을 구하는 사람은 무량등을 행할 수 없고 공덕을 구하는 사람은 무량등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문】무량등을 행할 때는 어떤 방편을 만들어야 하는가?
【답】이 자애한 마음은 먼저 친한 사람에서부터 그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중생에게 미치게 하는데 세 가지 등급이 있으니, 즉 친한 등급과 원수 등급과 그 중간치 정도의 등급이다.그 중에 친한 사람 가운데서도 또 세 가지 등급이 세워진다. 즉 하ㆍ중ㆍ상 다시 말해서 약간 친한 사람, 중간 정도의 친한 사람, 아주 친한 사람의 세 등급이다. 이 가운데 상급의 친한 사람이라 하는 것은 부모와 존경하는 스승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먼저 가장 친한 등급에 속하는 사람의 즐거움의 길을 열어주고 근실을 풀어주어서 상대로 하여금 즐거워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마음은 지극히 나빠서 제어(制御)하기도 어렵고 유지하기도 어려워서 아주 친하게 되면 그만 묘의(妙意) 속에 머물지 못한다. 그때 그는 부지런히 정진해서 수행을 버리지 아니하고 문득 가장 친한 사람에게 생각을 모아 그 사람의 즐거움의 길을 열어주고 근심을 풀어주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콩알을 송곳에 던져 꿰게 하려 할 때 여러 번 콩알을 던져도 콩알이 송곳에 머물지 못하는데, 그는 부지런히 정성을 다해 그 노력을 버리지 않아 결국에는 콩알을 던져 송곳에 꿰게 하는 것과 같다. 그가 부지런히 정성을 다해 문득 가장 친한 등급의 사람한테 생각을 모아 그들의 즐거움의 길을 열어주고 근심을 풀어주어 즐겁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가장 친한 등급에 속하는 사람에게서 즐거움의 길이 열리고 근심이 풀어지게 한다. 그 다음에는 그 노력을 중간 정도의 친한 사람과 약간 친한 사람에게까지 확대하여 그들의 즐거움을 열어주고 근심을 풀어주기에 노력한다. 그런 다음에 친하지도 밉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의 사람들과 원수들에게까지 그 노력을 확대하여 그들에게 즐거움의 길을 열어주고 근심을 풀어주기에 노력한다. 그 경우에도 중간 정도의 사람들의 즐거움을 열어주고 근심을 풀어준 다음 가장미워하는 원수 등급에게까지 즐거움의 길을 열어주고 근심을 풀어주어 그들이 즐겁도록 노력한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도리에 따라 찬양하여 속임이 없는 때에 즐거움의 길이 열리고 근심이 풀려서 가장 친한 등급의 사람과 같이 가장 미워하는 원수도 모두 이와 같이 즐겁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자애심을 성취하는 일이다.
자애심의 경우와 같이 슬퍼하고[悲] 기뻐하는[喜] 마음도 역시 그렇게 성취한다.
다음 버리는[捨:護)]마음은 중간 정도의 사람들과 연하여 행하는 수행이다.【문】버리는 마음은 왜 중간 정도의 사람들과 연하여 행하는가?
【답】버려야 할 때는 친한 등급의 사람에게는 미움과 사랑을 버려야 하고 원수에게는 미움과 노여움을 버려야 한다. 그런 까닭에 중간 정도의 사람에게 버릴 길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원수에게 버리는 길을 열게 된다. 이것은 일반 중생에게 해당한다.
【문】왜 먼저 원수부터 버리는가?
【답】노여움은 제거하기가 쉬우나 사랑하는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가장 친한 등급의 사람들에게 버린다.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찬양하되 속임이 없을 때, 모든 중생에게 중간 정도의 사람에게 버린 것과 같이 버려야 하며 이와 같이 하여 가장 친한 등급의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한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평등한 버림[護:捨]을 성취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먼저 자애한 마음부터 수행한다고 하였다.【문】왜 먼저 자애한 마음부터 수행하는가?
【답】그것은 그가 먼저 중생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애한 마음이라 하는 것은 많은 이익이 있는 모습이다. 중생들에 많은 이익을 주고 나면 그는 생각하기를 ‘마땅히 중생들에게 이롭지 못한 일을 제거해 주어야 하겠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슬퍼하는 마음[悲]이라 하는 것은 중생들에게 이롭지 못한 일을 슬퍼하는 것이다. 이미 중생들에게 이롭지 못한 일을 제거해주고 나면 그는 생각하기를 ‘중생들을 기쁘게 해주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생들이 기뻐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면 그 다음에 중생들을 보살피게 된다.
또 이와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슬퍼하는 마음부터 먼저 수행하여야 한다”라고 한다.【문】왜 슬퍼하는 마음부터 수행해야 하는가?
【답】먼저 중생들에게 그들에게 이롭지 못한 일을 제거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슬퍼하는 마음은 이롭지 못한 일을 제거하는 마음이다. 이롭지 못한 일이 제거되고 나면 곧 중생들을 이롭게 해주고자 하나니, 자애하는 마음은 곧 이롭게 하는 모습이다. 만약 이롭지 못한 일이 제거되어 중생들을 이롭게 해 주었을 경우 그는 생각하기를 ‘중생들을 기쁘게 해주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그런 다음에 중생들을 보살피게 되는 것이다.
또 이와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슬퍼하는 마음과 기뻐하는 마음 등 두 가지 무량등한 마음은 각각 다른 한 마음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먼서 슬퍼하는 마음을 수행한다면 다음에는 기뻐하는 마음을 수행하여야 한다”라고 한다.【문】왜 슬퍼하는 마음 다음에 기뻐하는 마음을 수행해야 하는가?
【답】슬퍼하는 마음의 경우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데 그때 기쁨이 생기면 근심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또 만약 먼저 기뻐하는 마음을 수행할 경우 다음에는 슬퍼하는 마음을 수행해야 한다.
【문】왜 기뻐하는 마음 다음에 슬퍼하는 마음을 수행해야 하는가?
【답】가령 기쁨이 생기면 마음이 안정되며 그 다음에 슬퍼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중생들을 거두어들이게 된다.【문】중생들을 즐겁게 하려 하는데 자삼매(慈三昧)는 어떤 즐거움으로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깨닫게 하는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즐거움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먹고 마시는 즐거움, 옷을 입고 이불을 덮고 책상에 앉고 좌석에 앉는 즐거움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즐거움으로 해서 모든 중생들이 즐거움을 깨닫게 된다.【문】그 설명에 따른다면 모든 중생들은 아마도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중생에게 이러한 즐거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답】또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3선의 경지는 뛰어난 즐거움이 있어 중생들이 즐거움을 깨닫게 한다”라고 하였다.【문】그 말에 따른다면 3선의 경지를 얻지 못한 사람은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깨닫게 할 수 없는가?
【답】또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3선 경지에서는 숙명(宿命)의 지혜와 기억으로 이미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깨닫게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문】이와 같이 말할 경우 3선의 경지에서 숙명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그는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깨닫게 하지 못할 것이다.
【답】또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중생들의 즐거움이라 하는 것은 그 인연이 그의 자애(慈愛)의 수행으로부터 생긴다”라고 하였다.【문】그와 같이 말한다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즐거움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답】또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중생들에게 낙근(樂根)이 눈앞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그가 자애심을 수행함에 인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그와 같이 말한다면 모든 중생들에게 낙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낙근을 성취하는 것도 아니다.
【답】존자 바수밀은 설명하기를 “중생의 즐거움이라 하는 것은 자삼매(慈三昧)를 말한다. 그 선정을 수행하여 연하는 것이 중생들의 즐거움이다. ‘무슨 즐거움으로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깨닫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그가 스스로 받는 편안한 즐거움이 그것이다. 즉 먹고 마시는 즐거움과 옷 입고 이불 덮고 책상과 자리에 앉는 즐거움, 이것은 그가 자삼매(慈三昧)를 수행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 선정은 아마도 모는 중생들과 연하지 아니하며 또한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즐거움을 받지도 못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묻는다면 이에 대한 답은 ‘3선의 경지에서는 뛰어난 즐거움으로 중생들이 즐거움을 깨닫게 한다’라고 하게 된다.또 묻기를 ‘이 선정은 모든 중생들과 인연하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모는 중생들도 3선의 경지에 즐거움을 얻지도 못한다’라고 한다면 거듭 설명하기를 ‘3선의 경지에서의 숙명지(宿命智)는 이미 중생들이 즐거움을 깨닫도록 생각케 한다’라고 하게 된다. 또 묻기를 ‘이 신정은 모든 중생과 인연한다고 할 수 없으며 또만 모든 중생들도 3선의 경지에서의 숙명지를 얻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면 거듭 설명하기를 ‘중생의 즐거움이라 하는 것은 그가 자애를 행하는 일에서부터 생긴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또 묻기를 ‘이 자삼매(慈三昧)는 모든 궁생과 인연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중생들의 즐거움도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때는 거듭 설명하기를 ‘중생에 따라서는 낙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그가 자삼매를 수행하는 데서 인연한 것이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또 묻기를 ‘이 자삼매는 모든 중생들과 인연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모든 중생들에게 낙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라고 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이에 대하여 담마다라(曇摩多羅)는 설명하기를 “여러 존자께서 모든 중생을 관찰하는 때에는 모든 중생들의 즐겁다는 생각과 자애하고 연민하는 마음에는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모든 중생을 가엾게 보는 평등행은 일찍이 어떤 수행자가 보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 수행자가 어느 성과 마을에 들어가 걸식을 하는 때에 돈과 재물이 없는 사람, 누워서 잘 침상이 없는 사람, 옷이 얼어 벌거벗고 있는 사람, 더럽게 때 묻고 낡은 옷을 입고 손발이 터져 갈라진 사람, 머리카락이 쑥대처럼 어지러운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손에 흙으로 빛은 그릇을 잡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상냥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말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음식을 구걸해서 곧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에게 베풀었으며 고단하고 재액을 만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고독한 사람에게 물자를 공급하였습니다.그는 코끼리를 타고 말을 타고 수많은 수레를 타고 수많은 걸어가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수많은 금관(金冠)을 쓰고 장식을 하여 그 빛나는 광채가 눈을 부시게 하고 묘한 옷을 입고 가마덮개를 지니고 뒤따라가는 사람들이 북을 두드리며 나팔을 불면서 5열(列) 놀이를 하는 저 천자(天子)와 같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보고 나서 식사를 한 뒤에 도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와 옷과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고 혹 앉아있거나 또는 승상(繩床)ㆍ목상(木床)에 앉아있으면 몸도 유연하고 마음도 유연하여집니다. 이렇게 앉은 다음에 저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 즐거움 가운데 있게 한다면 그 고통받는 사람들도 역시 이와 같이 즐거워질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말하나니, 여러분, 즐겁게 하려는 생각은 자애하는 마음과 불쌍해하는 마음과 함께 존재하며 중생들을 가엾게 생각하는 것이 평등한 행임은 일찍이 수행하는 사문이 본 바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문】중생들을 즐겁게 하려고 자삼매(慈三昧)를 수행하여도 그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면 이 선정은 전도(顚倒)된 선정이라 말해야 하는가, 전도된 선정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답】마땅히 전도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의 뜻이 묘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땅히 전도되지 아니하였다고 말해야 한다. 중생들을 가엾게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존자 바수밀은 말하기를 “마땅히 전도되지 아니하였다고 말해야 한다. 중생에 따라서는 낙근(樂根)이 눈앞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자삼매론 수행하는 데서 인연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거듭 설명하기를 “마땅히 전도되지 아니하였다고 말해야 한다. 그 이유는 노여운 마음을 허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존자 담마다라는 말하기를 “여러분 그가 자삼매를 수행함으로써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의 수행으로부터 노여운 마음이 제거될 뿐 입니다”라고 하였다.【문】전도된 수행으로도 노여움이 제거되는가?
【답】바른 수행만이 노여움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것은 전도된 것이 아니다. 다른 행은 노여움을 제거하더라도 좋지 못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중생들을 괴롭게 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마땅히 전도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해하기로는 중생들을 즐겁게 하려 했으나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지 못하였다면 그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착한 마음에 들어가 모든 중생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는 전도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일설에 이르기를 “이는 세 가지의 사유를 말한 것이다. 첫째는 스스로의 모습을 사유하고, 두 번째는 총제적인 모습을 사유하고, 세 번째는 해탈을 얻어서 사유한다.
첫 번째 스스로의 독자적인 모습을 사유한다고 하는 것은 가령 색의 모습을 사유할 경우 색에서 수ㆍ상ㆍ행ㆍ식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인식 이것을 스스로의 모습을 사유하는 것이라 말한다.
두 번째로 총체적인 모습을 사유한다고 하는 것은 가령 16성행(聖行:八忍八智)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것이 총체적인 모습을 길이 사유하는 일이다.
세 번째로 해탈을 얻어 사유한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무량등해탈은 입문(入門)을 제거하여 모든 입(入)을 제거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의 사유 가운데서 한량없는 평등한 이해[意解]를 말하게 되는 것이며 다른 것은 이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문】무량등이라 하는 것은 두루 모든 중생과 인연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방향과 한정된 경계가 있는 것인가? 만약 두루 모든 중생들과 인연한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고해의 끝을 얻지 못하는가? 또 만약 한정된 지방의 제한이 있는 것이라 한다면 아래와 같은 계경의 말씀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계경에 이르기를 “그 4무량등은 모든 세간에서 유희삼매(遊戱三昧)는 성취한다”라고 하였다.
【답】본론에서는 “4무랑등은 두루 모든 중생과 인연한다”라고 하였다.【문】그렇다면 어찌하여 고해(苦海)의 끝을 얻지 못하는가?
【답】모든 중생들이 고해의 끝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중생이란 난생(卵生)ㆍ화생(化生)ㆍ태생(胎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의 네 가지 생명체다. 이것을 제외하면 다시 다른 중생은 없다. 이렇게 추리하면 고해의 끝을 알 수 있다. 다만 총체적인 모습은 독자적인 모습이 아닐 따름이다.
이와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있나. 그는 말하기를 “4무량등은 방불상응법(方不相應法)에 따른 제한이 있다”라고 한다.【문】그것은 경에서 말씀하신 “4무량등은 모든 세간에 가득하여 노니는 곳을 성취한다”는 말씀과 어떻게 상통할 수 있는가?
【답】이같이 중생들이 말하는 방위(方位)는 단지 이름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두루 중생들을 연하지만 벽지불(辟支佛)과 성문승(聲聞僧)은 한정된 제한이 있다”라고 말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과 벽지불은 모든 중생들을 연하지만 성문승은 한정된 지방의 중생들과 연한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과 벽지불과 성문승으로서 끝없는 득도(得度)를 한 사람은 모든 중생들을 연하지만 다른 성문승에게는 한정된 지방의 제한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무량등은 해탈을 얻은 사유(思惟)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만약 부처님이 두루 모든 중생들과 연한다면 벽지불과 성문승도 그렇게 될 것이다. 또 만약 부처님이 한정된 지방의 중생들을 연한다면 벽지불과 성문승도 그렇게 될 것이다.【문】가령 무량등이 두루 모든 중생들을 연한다면 왜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생각이 자애심과 더불어 함께 동방에 가득하여 이미 노닐 곳을 성취하였고 이와 같이 남방ㆍ서방ㆍ북방의 모든 방위에서 생각이 자애심과 더불어 함께 가득하여 이미 노닐 곳이 성취되었다”라고 하셨는가?
【답】이것은 계경에서는 마땅히 그렇게 말씀하셨어야 한다. “생각이 자애심과 더불어 함께 동방에 가득하여 이미 노닐 곳이 성취되었다. 이와 같이 남방ㆍ서방ㆍ북방에서도 생각이 자애심과 더불어 모든 방위에 함께 가득하여 이미 노닐 곳이 성취되었다”라는 이 말씀은 응당 그렇게 말씀하셔야 하는 것이다.【문】만약 그렇게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다면 어떤 뜻이 되는가?
【답】이것은 중생을 방위에 따라 분별 설명하여 표현한 말씀이다.
【문】초선의 경지에서는 4무량등이 일어나지 아니하다가 2선의 경지에서는 4무량등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도 있는가?
【답】일설에 의하면 “초선의 경지에서 4무량등이 일어나지 아니하였다면 2선의 경지에서 4무량등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문】왜 초선의 경지에서 4무량등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2선의 경지에서 4무량등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되는가?
【답】초선의 경지의 4무량등은 2선의 경지의 4무량등의 방편의 문이 된다. 그런 까닭에 초선의 경지에서 무량등이 일어나지 아니하다가 2선의 경지에서는 능히 일어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와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초선의 경지에서 무량등이 일어나지 아니하여도 2선의 경지에서는 일어날 수 있다. 가령 성도(聖道:八正道)의 경우 초선의 경지에서는 8정도가 일어나지 아니하여도 2선의 경지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데 하물며 4무량등의 득해탈사유(得解脫思惟)가 일어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문】4무량등은 한 경지에서 한꺼번에 얻을 수 없고 각각 차례차례로 눈앞에 나타난다면 다른 경지에서도 각각 차례차례로 눈앞에 나타날 수 있는가, 없는가?
【답】일설에 의하면 무량등의 경지도 역시 각각 차례차례로 눈앞에 나타날 수는 없다. 그 한 경지의 비슷한 선근(善根)이 눈앞에 나타나야만 그 다음에 무량등이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무량등이 눈앞에 나타나게 되면 다음과 같은 행(行)이 있게 된다. 즉 자애심에 근거한 낙행(樂行)과 비심(悲心)에 근거한 고행(苦行)과 희심(喜心)에 근거한 열행(悅行)과 호심(護心)에 근거한 사행(捨行)이 있게 되는 것이다.【문】초선의 경지에서 생긴 무량등위에서 2선의 경지의 무량등이 속히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2선의 경지에서 생긴 무량등위에서 초선의 경지의 무량등이 속히 일어나는 것인가?
【답】2선의 경지의 무량등위에서 빠르게 초선의 경지의 무량등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초선의 경지의 무량등위에서 2선의 경지의 무량등이 속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비유하면 마치 범서(梵書:梵語의 글씨)를 배우면 거로문자(佉盧文字)3)를 빠르게 배우게 되지만 거로문자를 배워서는 빠르게 범어의 문자를 배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2선의 경지의 무량등위에서는 빠르게 초선의 경지의 무량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문】그것은 정해진 건도(犍度:規則ㆍ法度)로 설명되는 것인데 어떤 것이 자삼매(慈三昧)를 사유하는 것인가?
【답】중생들의 즐거움을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문】어떤 것이 비삼매(悲三昧)를 깊이 생각하는 것인가?
【답】중생들의 괴로움을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문】어떤 것이 희삼매(喜三昧)를 깊이 생각하는 것인가?
【답】중생들을 기쁘게 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문】어떤 것이 호삼매(護三昧)를 깊이 생각하는 것인가?
【답】이 중생들에게 버리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문】이것을 어찌하여 정수(正受)라고 하는가?
【답】근본정(根本定:前正受)과 근분정(近分定:已正受)을 이름한다.
【문】이 가운데서 증득하게 되는가?
【답】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설명하신 바에 따르면 “수열다라(須涅多羅)의 제자가 범천(梵天)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짐짓 설법을 하였을 때 모든 계율의 수행을 갖추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 세계에서 혹 사천왕(四天王) 가운데 태어나기도 하고 또 혹 삼십삼천(三十三天) 가운데 태어나기도 하고 또 염천(炎天)에 태어나기도 하고 또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기도 하고 또 혹 화자재천(化自在天)에 태어나기도 하고 혹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태어나기도 하였다. 또 한 사람의 수열다라의 제자는 범천에 올라가서 설법할 때 모든 계율의 수행을 갖추었다. 그는 네 곳의 범천에서 노닐 곳을 사유하였고 욕계에서 탐욕을 제거한 다음 많은 유각(遊脚)수행을 한 까닭에 범천에서도 유각할 곳을 생각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문】이렇게 말한다면 수열다라가 뛰어난 사람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뛰어난 분이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왜냐 하면 수열다라의 제자가 모든 계율의 수행을 갖추게 되면 그는 범천 안에 태어나게 되고 모든 계율의 수행을 갖추지 아니하였을 경우에도 욕계의 여섯 하늘 세계에 태어나게 되는데 석가모니의 제자는 모든 계율의 행을 갖추었을 경우 그는 졸은 곳이나 멸진열반(滅盡涅槃)의 세계에 태어나고 모든 계율의 수행을 갖추지 아니하였을 경우 그는 지옥ㆍ아귀(餓鬼) 축생들의 세계 안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답】그것은 그렇지 아니하다. 왜냐 하면 계경에 따라 순서를 찾아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연인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수열다라는 4무량등을 계율로 삼았다. 범천에 올라가 설법하였다는 것은 즉 수열다라의 제자가 범천의 사람들을 위하여 그곳에 올라가서 설법하였을 때 4무량을 구족하게 행할 수 있기를 바랬던 사람은 범천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으며, 수열다라의 제자가 범천위에서 설법할 때 4무량등을 구하여도 구족된 행을 할 수 없었던 사람은 그의 수행으로 뛰어난 선근이 생겨서 욕계의 여섯 하늘 세계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또한 그때에는 모든 중생들에게도 각기 묘한 행[妙行]이 있었기에 무량등의 행을 구족하지 아니하고도 그들은 욕계의 여섯 하늘 세계에 태어날 수 있었으니 하물며 무량등을 구족한 사람에 있어서랴! 무량등을 일으킬 수 없으면 어찌하여 그가 뛰어난 선근을 지니고도 욕계의 여섯 하늘 세계에 태어나지 못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선근이란 것은 범계(犯戒)나 파계(破戒)와 상대되는 선근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백쉰 가지 금기(禁忌)를 계율로 감았고 무여열반을 위하여 설법하신 것이다. 석가모니의 제자는 계율을 범하지 아니하고 계율을 깨뜨리지 아니하면 곧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되고 또한 무위열반에 들게 된다. 석가모니의 제자가 계율을 구족하지 아니하고 계율을 범하거나 계율에 정한 금기를 뛰어넘게 되면 지옥과 아귀와 중생 가운데 태어나거나 인간으로 태어나는 등 여러 악취(惡趣) 속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계경의 순서를 말한 것이다.수열다라는 생각하기를 ‘나는 제자들과 함께 같은 곳 같은 세계에 태어나는 그런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차라리 더욱더 자삼매(慈三昧)를 사유하는 것이 좋다. 더욱더 자삼매를 사유하면 곧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훗날 그는 더욱더 자삼매를 사유함으로써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나게 되었다.【문】가령 이미 보살의 경지가 이룩되어 모든 병ㆍ근심이 제거되었을 경우 무엇 때문에 자신은 2선을 수행하여 무량등을 일으키면서 제자들을 위해서는 초선을 설법하였는가?
【답】수열다라가 관(觀)한 제자들의 근본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2선의 경지에서의 무량등은 불법이 없었을 때는 일으킬 수 없었다. 오직 이미 보살의 경지를 이룩한 사람에 있어서만 능히 무량등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일으킬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열다라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범지는 긴긴 밤을 범천을 얻고자 하였고 늘 범천을 원하여 끝까지 범천을 생각하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범천에 태어나 대범전왕 가까이에 있게 하소서≻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수열다라는 늘 다른 사람의 소원을 채워주고자 한 까닭에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설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문】가령 3선ㆍ4선의 경지에서의 무량등은 지극히 묘한 것인데 왜 2선의 경지의 무량등이 묘하다고 말하는가?
【답】그의 제자들의 무량등을 말한 까닭에 2선의 경지의 무량등이 묘하다고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초선의 경지의 무량등 때문에 2선의 경지의 무량등이 묘하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열다라 보살은 생각하기를 ‘3선ㆍ 4선의 경지에서의 무량등은 부처님이 없는 시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경지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2선의 경지의 무량등이 모하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존자 구사(瞿沙)도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높은 경지에서 무량등을 얻을 수 있다면 수열다라 보살은 아마도 ‘나는 차라리 더욱더 무량등을 사유해서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나야겠다’라고 말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범부의 경지가 아니다. 다만 부처님의 위력과 신통력 때문에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게 한 것이다.【문】무엇 때문에 범유행처(梵遊行處)를 말하였는가?
【답】처음에 얻을 수 있고 또한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근거하면 비록 처음으로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갖춘 것이 아니며 상지(上地)에서는 비록 모든 것을 갖추게 되더라도 그것은 처음 얻는 것이 아니다. 이 초선의 경지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얻는 동시에 모든 것이 완전히 갖추어진다. 그런 까닭에 범유행처를 말하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능히 청정하지 아니한 것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천이 아닌 것은 욕계의 결(結)이다. 그것은 능히 이 욕계의 결을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은 범천이 아닌 것을 제외한 유행처(遊行處)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대범천을 사유하여 이미 범천왕의 경지를 얻었기 때문에 유행처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대범천왕의 음성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유행처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범(梵)이라 한 것은 여래(如來)를 말한 것이다. 그의 말은 분별해서 건립하여 뚜렷이 나타내기 위한 까닭에 범유행처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문】무량등과 범유행처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일설에 의하면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무량등에도 자ㆍ비ㆍ의ㆍ사의 네 가지 구성요소가 있고 범유행처(梵遊行處)에도 역시 자ㆍ비ㆍ의ㆍ사의 네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그런 까닭에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초선의 경지에서 얻울 수 있는 것이 범유행처이고 상지(上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량등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청정이 아닌 것을 제거하기 때문에 범유행처라 부르는 것이며, 희론을 제거하기 때문에 무량등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청정하지 아니한 것을 제거하기 때문에 범유행처라 하고 방일한 마음을 제거하기 때문에 무량등이라 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미지정[未來禪]과 초선(初禪)과 중간정[中間禪]의 세 경지에서 성취할 수 있는 곳을 범유행처라 하고 욕계선(欲界禪)과 미래선ㆍ중간선ㆍ근본4선 등 일곱 경지에서 성취할 수 있는 곳을 무량등이라 한다. 이것은 범유행처와 무량등에 차별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러 비구들이여, 나는 스스로 알았으며 7년 동안을 길이 자애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일곱 번 세계가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동안 이곳에 오지 아니하다가 이제 이 세계에 이르게 되었다. 이 세계가 이루어졌다가 허물어질 때 나는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날 것이고, 이 세계가 이루어져서 허물어지지 아니할 때에는 나는 다른 비고 고요한 범궁(梵宮)에 태어날 것이며, 그곳에 범천이 될 것이고 다른 곳은 일천 번을 오고 가면서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천자가 되어 그 가운데 서른여섯 번은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될 것이고 백천 번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이 경의 내용을 설명하기를 “이곳에서의 여름 일곱 달을 경에서는 칠 년이라 표현하였다. 그 내용을 설명한다면 보살은 지극히 좋을 때 선근이 많은 곳 즉 모래나 돌이 없고 모든 금과 은이 나는 곳에 있게 된다. 중국에서는 사람들의 왕이 되는 자리다. 그 나라는 지극히 더울 때는 성을 떠나서 멀지 아니한 곳에 산과 숲이 있는 곳으로 간다. 여름이 되면 그 성 안의 사람들은 산과 숲을 찾아가고 그 보살은 사람을 남겨두어 성을 지키게 한 다음 성을 나서서 자기도 역시 산과 숲을 찾아간다.여름 넉 달 동안 그곳에서 사람들은 각각 일을 하게 되고 보살은 따라 높고 드러난 곳에 이르러 무량등을 일으킨다. 무량등을 일으킨 다음에는 여름 넉 달 동안 무량등에서 유행(遊行)한다. 여름 넉 날이 지나고 나면 곧 사람들이 산과 숲에서 나온 다음 도로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보살도 산림에서 나와서 역시 도로 성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 보살은 극히 큰 모임을 마련하여 사람들에게 복덕을 지을 물건들을 베풀어 준다. 즉 음식물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음식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마실 것을 주고, 벌거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주고, 또한 집과 침상과 밝은 등불을 보시해 주지만 역시 계율을 지킨다”라고 하였다.
이 뜻을 설명하기를 “보살은 산과 숲을 여섯 번 가고 오다가 일곱 번째 되돌아온다”라고 하였고 혹 “보살은 목숨이 끝나면 광음천에 태어난다”라고 하였으며, 또 “보살은 그 성이 이루어졌다가 허물어질 때 그의 목숨이 끝나면 광음천에 태어난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여름 일곱 달을 계경에서는 칠 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문】만약 무량등의 과보로 범천(梵天)이나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난다고 한다면 이곳에서는 마땅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으나 무량등이라 하는 것을 색계의 과보[果]와 색계의 법(法)에 연관시킨다면 그때도 만약 무량등의 과보로 타화자재천에 태어나게 된다고 할 경우 거기서 제석천왕이 되고 전륜성왕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쪽은 색계의 선근을 지니고 있으니 그는 욕계에서 과보를 받지 아니할 것인데 어떻게 무량등의 과보로 타화자재천과 제석천왕ㆍ전륜성왕으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는가?
【답】보살은 욕계와 초선의 경지와 2선의 경지 등 세 경지에서 무량등을 일으킨다. 욕계의 무량등의 과보로는 타화자재천자나 제석천왕ㆍ전륜성왕으로 태어나게 되고 초선의 경지에서의 무량등의 과보로는 대범천(大梵天)에 태어나게 되고 2선의 경지의 무량등의 과보로는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나게 된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곳에서의 무량등인 까닭에 욕계에서는 나가는 마음[出心]과 들어오는 마음[入心]이 있는 것이다. 마치 시장의 가게 안에서는 모든 잡다한 물건을 얻을 수 있듯이 욕계도 또한 그렇다. 이 욕계에서 마침내 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에 이르게 되면 비슷한 모습이 있게 된다. 욕계에서 나가는 마음ㆍ들어오는 마음이라 하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타화자재천자로 태어나고 제석천왕으로 태어나고 전륜성왕으로 태어나게 된다. 근본정(根本定)에서의 무량등은 그 과보로 대범천(大梵天) 및 광음천에 태어나게 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른바 보살이 지극히 큰 모임을 마련하였을 때 보시를 하여서 복덕을 짓게 하고, 음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음식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마실 것을 주고, 벌거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주고, 그 밖에 집과 침상과 등을 보시해 주면 그 과보로 전륜성왕이 된다. 만약 여기서 계율을 지킨 사람 은 그 과보로 제석천왕 및 타화자재천자가 되고 무량등의 과보로는 대범천 및 광음천 안에 태어나게 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을 부처님의 계경에서는 세 가지 복덕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보시(布施)며, 둘에는 지계(持戒)며, 셋째는 사유(思惟)다. 이 계경에서는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누가 과(果)를 행하고 누가 보(報)를 행하여 나를 크게 존중받는 신묘(神妙)한 몸이 되게 하였는가? 비구들이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 가지 행의 과보가 나를 가장 존중받고 지극히 크고 신묘한 존재가 되게 하였다. 무엇이 세 가지의 행(行)인가? 첫째는 보시며, 둘째는 제어(制御)이며, 셋째는 거두어들이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보시한다는 것은 보시로 얻는 복을 말한 것이며, 제어라 한 것은 계율을 지킴으로써 얻는 복을 말한 것이던, 수습한다고 한 것은 사유(思惟)로써 얻는 복을 말씀하신 것이다. 보시한 복의 과보로 전륜성왕이 되고 계율을 지킨 복의 과보로 제석천왕과 타화자재천자가 된다. 사유한 복의 과보는 대범천이나 광음천에 태어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문】왜 색계의 모는 선근을 무량등의 사유복(思惟福)이라 하고 다른 복이라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무량등의 과보라 하는 젓은 태울 수 없는 과보다. 그 이치를 계경의 설명에 의하면 한 천신(天神)이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게송으로 물었다.
어떤 물건 불에 타지 아니하고
바람이 허물 수 없고
물의 재앙이 땅을 허물 때도
어떤 물건 물에 잠기지 아니하나.
이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답하셨다.
복은 불이 태울 수 없고
복은 바람이 허물 수 없고
복은 물이 잠기게 할 수 없다.
복이 아닌 것도 불에 타지는 아니하지만 다만 그 과보는 불 타게 된다. 그러나 무량등은 복도 불에 타지 않고 그 과보도 역시 불에 타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색계의 모든 선근(善根) 가운데서만 무량등의 사유하는 복을 말하게 된다”라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따르면 “자정수(慈正受:慈三昧)가 일어났을 때는 불도 이를 태울 수 없고 칼도 이를 상하게 할 수 없고 독약도 중독시킬 수 없고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횡사(橫死)당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문】왜 자정수가 일어났을 때는 불도 이를 태울 수 없고, 독약도 이를 중독시킬 수 없고, 칼도 이를 상하게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지 않는가?
【답】존자 바수밀(婆須蜜)은 설명하기를 “그같은 정(定)은 마음에 갈등이 없다. 그런 까닭에 마음의 갈등이 마음을 흔들 수 없게 된다”라고 하고 거듭 설명하기를 “그같은 정은 지극히 전 위력과 신통력이 있다. 그런 까닭에 모든 천신(天神)이 보호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거듭 설명하기를 “색계의 4대(大)가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근심거리가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없다. 만약 그에게 색계의 4대가 몸 안에 충만하다면 하나로 합쳐져서 지극히 두터워지고 돌과 같이 단단해진다. 그런 까닭에 그러한 근심거리가 그의 몸을 흔들 수 없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정수가 일어났을 때에는 불도 태울 수 없고, 독도 중독시킬 수 없고, 칼도 강하게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횡사당하지는 아니한다”라고 말한 것이다.【문】비정수(悲正受)ㆍ희정수(喜正受)ㆍ호정수(護正受)가 일어날 때는 이 근심거리는 능히 마음을 흔들 수 있는가, 아니면 흔들지 못하는가? 만약 흔들 수 있다고 한다면 왜 정수가 일어날 때는 흔들지 못하다가 비정수ㆍ희정수ㆍ호정수가 일어날 때는 흔들게 되는가? 또 흔들지 못한다고 한다면 왜 오직 자정수에서만 흔들지 못한다고 말하고 비정수ㆍ희정수ㆍ호정수의 경우에는 말하지 않는가?
이런 이론이 제기되자 대답하였다.
【답】비정수ㆍ희정수ㆍ호정수에도 역시 흔들리지 아니한다.【문】그렇다면 왜 자정수에서만 흔들리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비삼매ㆍ희정수ㆍ호정수는 말하지 않는가?
【답】마땅히 말해야 한다. 자정수의 경우와 같이 비정수ㆍ희정수ㆍ호정수의 경우에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였을 경우에는 부처님께서 다른 말씀이 계셨을 것이다. 이것은 이치를 나타내고 이치의 문[義門]을 나타내며 이치의 도[義度]를 나타내고 이치의 약[義略]을 나타내는 말씀이니 그런 내용을 알아야 한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비정수ㆍ희정수ㆍ호정수는 비록 정수에 들었을 때는 흔들리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정수에서 일어날 때는 혹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자정수의 경우에는 정수에서 일어설 때에도 역시 흔들리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비정수ㆍ회정수ㆍ호정수의 경우는 삼매에 들었을 때는 비록 흔들리지 않더라도 정수에서 일어섰을 때는 혹 상하고 허물어질 수 있다. 그러나 자정수의 경우에는 정수에서 일어섰을 때에도 상하거나 허물어지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근본정에서 비정수ㆍ희정수ㆍ호정수에 들었을 때는 비록 흔들리지 않더라도 비정수ㆍ희정수ㆍ호정수는 방편정(方便定)에서는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자정수의 경우에는 방편정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한다. 그 이치를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이 욕계의 사정수의 방편정을 얻었는데 그는 법을 몰라서 국법을 범하게 되어 집사(執事)가 거두어서 곧 임금이 있는 곳으로 보내지게 되었다.그때 임금은 큰 코끼리를 타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가 멀리 그 사람을 보고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묻기를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니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그 사람은 국법을 범한 사람이니 원컨대 임금님이 이를 처벌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임금은 이때 손에 예전 율법책을 잡고 있다가 그의 허물의 상황을 살펴보니 이 사람이 범한 죄는 임금이 마땅히 손수 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에 임금은 노여움이 크게 성해져서 파고 있던 검(劍)을 그 사람에게 던졌다.그 사람은 임금이 매우 노여워하는 것을 보고 방편을 찾아 자정수를 행하니 마치 나무에 콩알을 던지면 곧 콩알이 도로 땅에 떨어지듯 임금의 검(劍)도 이와 같이 그의 몸에 던지면 도로 임금의 발밑에 떨어졌다. 이때 임금은 놀라고 무서워하며 그에게 묻기를 ‘그대는 무슨 요술을 행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을 현혹하는 도를 만들어 무슨 요술을 폈는가’라고 하니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대왕이시여, 기뻐하소서. 저는 요술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사람들을 현흑하는 도를 만들지도 않았으며, 요술을 부리지도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이에 임금이 묻기를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것은 무슨 조화냐?’라고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내가 보니 임금님이 크게 노여워하시기에 내가 천왕(天王)이 있는 곳에서 수행한 자애한 마음을 행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 검이 나의 몸을 해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런 까닭에 자정수는 방편정에서도 역시 흔들리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근본자정수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자정수에 들었을 때는 흔들리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비정수ㆍ희정수ㆍ호정수는 말하지 아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자정수를 수습(修習)하여 많이 수습하게 되면 마음의 갈등이 제거되고, 비삼매를 수습하여 많이 수습하게 되면 노여움을 제거할 수 있으며, 희정수를 수습하여 많은 수습을 하게 되면 즐겁지 아니한 마음을 제거할 수 있으며, 호정수를 수습하여 많이 수습하게 되면 해(害)를 제거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문】무량등은 결(結)을 제거할 수 있는가? 마음의 결은 제거할 수 없는 것인가? 만약 무량등이 마음의 결을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정(定)의 건도(犍度)와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정의 건도에 이르기를 “자애한 마음이 무슨 결의 얽매임을 제거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답】결이 있을 장소가 없어진다.
【문】비(悲)ㆍ희(喜)ㆍ호(護)는 무슨 결을 제거하는가?
【답】결이 있을 장소가 없어진다.
【문】만약 무량등이 마음에 결을 제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계경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되기에 이같이 논을 지었는가?
【답】무량등은 결을 제거할 수 없다.【문】만약 그렇다면 정의 건도와는 잘 상통될 수 있으나 이 계경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답】결을 제거하는데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잠깐 동안 제거하는 경우이극 두 번째는 끝까지 모조리 제거하는 경우이다. 잠깐 동안 제거하는 경우에는 이것이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자정수를 수습하여 많은 수습을 하게 되면 마음의 갈등을 제거할 수 있고, 비정수를 수습하여 많은 수습을 하게 되면 노여움을 제거할 수 있으며, 희정수를 수습하여 많이 수습하면 즐겁지 아니한 마음을 제거할 수 있고, 호정수를 수습하여 많이 수습하게 되면 해(害)를 제거할 수 있다”라고 하신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만약 무량등이 구경(究竟)까지 결을 제거할 수 없다고 한다면 정의 건도에서 말한 내용과 같게 된다. 이와 같이 이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면 두 가지 모두에 잘 통하게 된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자정수를 수습하여 많은 수습을 하게 되면 음욕의 쟁근(諍根)이 제거되고 호정수를 수습하여 많이 수습하게 되면 역시 쟁근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문】어떤 쟁근을 자애한 마음이 제거할 수 있고 또 어떤 쟁근을 보호하는 마음[護心]이 제거할 수 있는가?
【답】쟁근에 두 종류가 있다. 즉 처쟁(處諍)과 비처쟁(非處諍)이 그것이다. 처쟁은 자정수가 제거할 수 있고 비처쟁은 호정수가 제거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또 두 종류의 쟁근이 있다. 첫째는 중생이 생명을 버리고자 할 때의 쟁근이고 두 번째는 중생을 얽어매는 쟁근이다. 중생이 생명을 버리고자 할 때 일어나는 쟁근은 자정수가 제거할 수 있고 중생을 얽어매는 쟁근은 호삼매가 제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의 갈등은 자정수도 제거할 수 있고 호정수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부정관(不淨觀)을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게 되면 음욕을 제거할 수 있으며 자정수(慈定受)를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게 되면 역시 음욕을 제거하고 청정해진다”라고 하였다.【문】어떤 음욕을 부정관(不淨觀)으로 제거할 수 있고, 어떤 음욕을 자정수로 제거할 수 있는가?
【답】음욕에 여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색욕(色欲)이며, 둘째는 처욕(處欲)이며, 셋째는 행욕(行欲)이며, 넷째는 음욕(婬欲)이며, 다섯째는 갱락욕(更樂欲)이며, 여섯째는 장식구욕(莊飾具欲)이다. 이 가운데서 색욕이라 하는 것은 부정관으로 제거할 수 있고, 처욕(處欲)이라 하는 것을 자정수로서 제거하며, 행욕이라 하는 것은 부정관으로 제거하고, 갱락욕이라 하는 것은 자정수로 제거하고, 음욕이라 하는 것은 부정관으로 재거하고, 장식구욕이라 하는 것은 자정수로 제거한다. 이와 같이 욕망을 부정관으로도 제거하고 자정수로도 제거하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이 계경에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이와 같이 자애한 마음을 닦고 익혀서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니, 이와 같이 많은 수습을 하게 되면 아나함과(阿那含果:聲聞三果)를 얻을 수 있고, 혹 더 높은 경지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문】무량등의 경우 그것으로는 결을 제거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이 자애한 마음을 닦고 익히면 해탈하게 되어 많이 닦고 익히면 아나함과를 얻을 수 있으며 혹 또 더 높은 경지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답】이것은 부처님이 계경에서 성인의 도[聖道]로 표현하여 자애한 마음을 설명하신 것이다. 성인의 도에는 많은 종류의 표현이 있으니 혹 받는 감각[痛]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상(想)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생각[思]로 표현하기도 하고, 뜻[意]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믿음[信]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정진(精進)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염(念)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정(定)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지혜[慧]로 표현하기도 하고, 밝히는 등불[燈]로 표현하기도 하고, 아자재(我自在)로 표현하기도 하고, 석산(石山)으로 표현하기도 하천, 꽃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서 첫 번째로 혹 받는 감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비구들이여, 이 고통을 깨닫게 되면 사실 그대로의 진실을 알게 되고 이 번뇌의 찌꺼기가 다하게 되면 도(道)에서 사실 그대로의 진실을 알게 된다”라는 말씀과 같은 것, 이것을 받는 감각으로 성인의 도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다음 상으로 표현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무상(無常)하다는 생각을 닦고 익혀서 많이 닦고 익히게 되면 모든 음욕과 모든 색욕과 모든 무색계의 욕망과 모든 무명(無明)과 모든 자만심(自慢心)을 제거할 수 있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을 상으로 성인의 도를 표현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혹 생각으로 성인의 도를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말나야사(末那若思:末那耶識에 근거한 생각) 및 행흑(行黑:黑은 惡으로서 악한 행)과 흑보(黑報:惡報)를 생각으로 능히 제거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생각으로 성인의 도를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 뜻으로 성인의 도를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의입(意入)의 처소[處]에서
생각을 제어(制御)하고 아무 인연 갖지 않고
끝내 세속에 염착(染着)하지 않아야
모든 사람의 공양을 받게 되리라.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뜻으로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 성인의 도를 혹 믿음의 측면에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계경에서 게송으로 말한 바와 같다.
믿음 능히 흐름을 건너서
방일하지 아니하는 바다에서
진리로 고통을 제거하면
지혜가 청정하리라.
계경의 설명에 따르면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이여, 믿음을 성취하라. 비구든 비구니든 악(惡)을 제거하고 선(善)을 닦아야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믿음으로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정진(精進)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계경의 말씀에 따르면 “아난아, 정진하면 능히 경지를 바꾸어 도를 이룩하느니라”라고 하셨고, 또 다른 경에 따르면 “사리불이여, 성인의 제자는 정진을 성취하여 악을 제거하고 선을 닦고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정진으로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혹 염(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경의 말씀에 따르면 “사리불이여, 성인의 제자는 염에서 성취하여 마치 문을 지키는 사람과 같이 악을 제거하고 선을 수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염으로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혹 정(定)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경에서 게송으로 말한 것과 같다.
정이란 곧 도(道)이고
정 아니면 도 아니니
정으로 스스로
오음의 흥쇠(興衰)를 알게 되리라.
다른 경의 말씀에 따르면 “사리불이여, 성인의 제자는 삼삼매(三三昧:空ㆍ無ㆍ相ㆍ無願)를 성취하여 악을 제거하고 정을 닦아야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정으로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혹 지혜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지혜는 세간의 묘한 것
능히 나아가면 이른 곳 있으리.
능히 평등하고 바른 지혜 작용하면
생노병사 다하게 되리라.
다른 경의 설명에 따르면 “지혜는 모든 법을 넘어선 그 위에 있다”라고 하였고 또 다른 경의 설명에 따르면 “여러 누이들이여, 성인의 제자는 지혜의 칼로 모든 결(結)ㆍ박(縛)ㆍ사(使)ㆍ뇌(惱)ㆍ전(纏)을 엄격하게 끊어내는 이런 것을 지혜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지혜로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혹 등불[燈]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경의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부지런히 닦아 방일하지 않고
받아들고 거두어들이며 조절하고 제어하며
지혜 있는 사람은 등불을 켤 수 있기에
어리석음의 어둠일지라도 능히 허물 수 없느니라.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등불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혹 아(我:我自在)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계경의 설명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아(我)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여덟 가지 도(道)이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아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혹 돌산[石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계경의 설명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큰 돌산이라는 것은 견고하여 영구히 머물고 허물어지지 아니하며 모든 것이 다같이 한 바탕으로 평등하게 보인다”라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돌산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혹 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계경의 설명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칠각화(七覺花)가 피어난다고 하는 것은 7각지(覺支)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꽃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성인의 도를 혹 물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은 계경의 설명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 맛의 물[八味水]을 성취한다는 것은 8정도(正道)가 그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성인의 도를 물로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부처님은 성인의 도를 여러 가지 종류로 표현하신 것이며, 이와 같이 부처님은 계경에서 성인의 도를 자애한 마음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애한 마음의 이치를 말한다면 자정수(慈正受)에 의한 자해탈과 자애한 이치를 헤아리는 방편 등 두 가지가 있다. 혹 범부로 있을 때 아나함과(阿那含果)를 구하기도 하고, 혹 성인이 되었을 때 아나함과를 구하기도 한다. 범부로 있을 때 아나함과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그가 욕계의 결을 제거하였을 때 자의 해탈을 얻는 것이다. 그때 만약 그가 증득한다면 아나함과를 얻게 된다. 성인이 되었을 때 아나함과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욕계의 번뇌를 제거하여 얻은 아나함과에서 그 아나함과 위에서 자의해탈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이와 같이 자의해탈을 닦고 이와 같이 많이 닦고 익히면 아나함과를 얻게 되며 혹 또 더 높은 경지를 얻게 된다’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만 무량등은 결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문】무량등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묘한 것인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애[慈]가 가장 묘하다고 하였다. 즉 “자정수[慈正水]라 하는 것은 모든 대중이 상하게 하거나 해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비(悲)가 가장 묘하다고 하였다. 즉 부처님은 대비(大悲)하신 마음을 일으키시어 설법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문】왜 부처님을 거론할 때 대비하신 마음만 말하고, 대자(大慈)하신 마음은 말하지 않으며 대희(大喜)ㆍ대호(大護)는 말하지 않는가?
【답】마땅히 말해야 한다. 그러나 대비하신 마음을 말할 경우 대자ㆍ대희ㆍ대호하신 마음도 또한 그렇게 된다. 부처님의 뜻에 따라 그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공덕은 모두를 마땅히 “크다”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 하면,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을 가열게 여기시는 마음으로 중생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고자 하시는 거룩한 마음을 지니셨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뜻에 따라 그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공덕은 모두를 “크다”라고 말해야 만다. 이와 다르게 말하는 사림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문제 삼아서는 안 될 일이다. 왜냐 하면 만약 비가 곧 대비라고 한다면 이는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비는 대비와 다르다”라고 하였다.【문】만약 비와 대비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비와 대비 사이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곧 표현상에 차별이 있다. 하나는 그냥 비라 하고 또 하나는 대비라 표현한 것이 차별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경지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 비는 일곱 경지에 존재하는 마음이고, 대비는 근본4선에 존재하는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치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 비는 부처와 벽지불(辟支佛)과 성문승(聲聞僧)이 함께 지니는 마음이고, 대비는 오직 부처님만 지니는 마음이며 다른 사람은 해당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몸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 비라는 것은 남자와 석자가 함께 얻을 수 있는 마음이다. 대비는 남자의 바탕에서만 얻게 되고 여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결을 제거하는 측면에서도 역시 차별이 있다. 비는 탐욕이 없는 선근(善根)이기에 능히 탐욕을 제거할 수 있고 대비는 어리석음이 없는 선근이기에 능히 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행(行)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 비는 슬퍼할 수는 있어도 구제할 수는 없고 대비라 하는 것은 슬퍼할 수도 있고 구제할 수도 있다. 비유하면 두 사람이 강 언덕 위에 있을 때 그때 강물 속에 빠져서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생각은 비록 구해주고 싶었지만 구해줄 힘이 없어 다만 손바닥만 비비며 머물러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구해줄 생각도 있었고 또한 힘도 있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 그 사람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았다. 그 손바닥만 비비며 머물러 서서 힘이 없어 구해주지 못한 사람처럼 비라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두 번째 사람이 구해줄 뜻도 있고 힘도 있어서 물에 라진 사람을 건져내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은 사람처럼 대비라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존자 담마다라는 설명하기를 “여러분, 부처님의 대비하신 마음은 먼 옛날부터 극미입(極微入)에서 모든 입(入)에까지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거두어들였습니다. 성문승이 어떻게 그 슬퍼함이 색계와 무색계의 중생에까지 미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문】무엇 때문에 대비라고 하는가?
【답】큰 이익을 얻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 것이다. 이는 성문승이 한 물건을 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과는 같지 않고, 또한 벽지불이 한 가지 이쑤시개를 한다발 보시하는 것과도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대비라 한 것이다. 오직 모든 지극히 묘한 일과 지극히 좋아하는 물건 가운데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제외한 다음 나머지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을 두고 큰 이익의 물건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비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큰 몸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 것이다. 성문승이나 벽지불의 도가 구족하지 못한 몸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그 큰 몸은 32상ㆍ80종호로 장엄되어 있으며 그 몸에서는 자마금색(紫磨金色)의 원광(圓光)이 한 길이나 뻗어나오고 청정한 음성은 가비릉조(迦毘陵鳥)의 목소리와 같아서 이를 보아도 신지 아니하니 이를 두고 큰 몸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큰 방편으로 구해서 얻게 되는 까닭에 대비라 표현한다. 이는 성문(聲聞)의 도에서 처음 씨 뿌려서 두 번째 성숙시키고 세 번째 해탈(解脫)하는 그런 것이 아니며 또한 존자 사리불(舍利佛)이 60겁 동안을 지혜를 더해온 것과 같은 것도 아니며 또한 벽지불이 백 겁 동안 지혜를 더해가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니고 오직 3아승지겁에 걸쳐 헤아릴 수 없는 고행을 구족하게 닦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마음인 것이다. 이것을 두고 큰 방편으로 구해 얻은 것이기 때문에 대비라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생들에게 풍부한 이익을 주는 것이 지극히 많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다. 이 세상의 중생의 경우 부처님의 도를 구하기를 원하고, 벽지불과 성은의 도를 구하기를 원하고, 큰 부자가 될 수 있고, 큰 호족(豪族)ㆍ귀족의 집에 태어나고, 얼굴 모습이 단정하고 하늘 위의 사람 가운데 태어나기를 원한다. 그 모든 것이 대비한 마음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을 두고 중생들에게 풍족한 이익을 주는 일이 많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큰 구덩이에 떨어진 중생들을 건져내서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의 경우 중생들은 오취(五趣:지옥ㆍ아귀ㆍ축생ㆍ천상ㆍ인간 세계)에 떨어졌다고 보시기에 이를 제도하시어 여기에서 벗어나게 해 도과(道果)에 편안하게 살게 하신다. 그 모든 것이 모두 대비하신 마음에 말미암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큰 구덩이에 떨어진 중생들을 건져내서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능히 대호산(大護山)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이 4선의 경지에서 부처님만이 노닐 수 있는 곳을 대호산(大護山)이라 부른다. 즉 부처님의 가호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때는 지옥ㆍ아귀ㆍ축생 등 모든 중생들이 마치 고구마잎ㆍ대나무 껍질ㆍ볏단ㆍ삼단ㆍ풀더미ㆍ숲처럼 성한 불길 속에 활활 타오르나 부처님은 그곳에서 마음에 기울고 흔들림이 없으며, 대비한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때는 부처님의 몸은 지극히 견고한 힘을 지니게 되고 대비한 마음은 능히 바람이 파초나무에 불듯이 불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능히 대호간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살로서 큰 고량(考掠:栲掠) 형틀 속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다. 가령 부처님이 화해서 마라역사(摩羅力士)의 모습이 되고, 또 혹 기와장이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혹 거지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기생[妓女]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또 난타(難陀)의 손을 이끌어 5취 가운데 이르기도 하고, 또 앙굴마라(鴦崛摩羅) 때문에 앞으로 돌아갈 땅에서는 뒤가 넓게 하고 뒤로 돌아갈 땅에서는 앞이 넓게 하였으나 부처님은 항상 안정되어 어지럽지 아니하였다.입에서는 장광설(長廣舌)이 있어 스스로 얼굴을 가리는 것은 극히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성취시켜 주기 위함이고 여자를 위하여 마음상(馬陰相)을 나타내 보이시기도 하면서 묘한 선정(禪定)의 즐거움도 버리시고 지극히 묘한 불법도 버리시고 교화를 위해서 짐짓 백천억 겁으로 무쇠에 둘러싸인 대철위산(大鐵圍山)을 넘어서 항하의 모래같이 수많은 국토에 이르신 것이니, 이 모든 일이 모두가 대비하신 마음에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보살로서 능히 형틀 속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대비라 표현한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율장(律藏)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부처님은 중생들을 위하여 자애한 마음이 가득하시기에 설법하신다”라고 하였다.【문】부처님께서 자애하신 마음이 가득하시기에 설법하셨다면 그때 중생들도 즐거움을 얻게 되는가, 얻지 못하는가? 만약 중생들도 즐거움을 얻는다면 왜 자애한 마음으로 지옥과 아귀ㆍ축생ㆍ하늘ㆍ인간 세계에 가득히 메우지 아니하시고 설법만 하셨는가? 만약 그때 중생들은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게송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귀신이 마음속으로 악을 생각할 경우
만약 인간 세계를 찾아가 달라붙게 된다면
부딪치지 아니하고 해치지 아니해도
능히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귀신이 마음으로 악을 생각만 하여도 능히 악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데 하물며 부처님이 마음으로 선(善)을 생각하시는데 선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이런 이론이 제기되자 대답하였다.
【답】부처님은 중생들을 위하여 자애한 마음이 가득하시기에 그들을 위해 설법하셨고 그때 중생들은 즐거움을 얻게 된다.【문】만약 즐거움을 얻게 된다면 왜 자애한 마음을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천상에까지 가득 차게 하시지 않고 설법만 하셨는가?
【답】부처님은 중생들의 행동이 바꾸어지느냐, 바꾸어지지 아니하느냐를 관하시고 설법하신다. 그리하여 중생들의 발걸음이 바꾸어지면 그들을 위하여 자애한 마음을 가득하게 하여 설법을 하시고, 중생들의 행이 바꾸어지지 아니하면 자애하신 마음을 가득하게 하시지 아니하고 설법만 하신다.
또 이와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부처님이 중생들을 위하여 자애한 마음이 가득하시어 설법을 하셔도 그때 중생들은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다.【문】만약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면 앞에서 말한 ‘귀신이 마음속으로 악을 생각하는 경우 만약 인간 세계를 잦아가 달라붙게 된다면, 부딪치지 아니하고 해치지 아니해도 능히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다’란 게송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답】부처님께서는 헤아릴 수 일이 많은 종류의 자애가 가득한 마음이 있어 혹 신족통(神足通)으로 이 마음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애착의 연으로 나타내시기도 하고, 의방명(醫方明:知藥)이기도 하고, 훌륭한 촉감으로 나타내시기도 하고, 맑고 시원만 그림자로 나타내시기도 하였다.혹 신족통으로 자애한 마음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것은 계경의 설명에 따르면 부처님이 최후로 세간을 유행하시다가 파바국(波婆國) 염부림정사(閻浮林精舍)에 이르셨는데 파바국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세간을 유행하시면서 이 파바국 염부림정사에 오셨다는 말을 들고 한 곳에 모여들어 함께 규약을 마련하여 “우리들이 모두 곧 부처님을 찾아가서 만나보자. 만약 가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벌로 옛날 금전 5백 냥을 내야 한다”라고 하고 그들은 이러한 규약을 마련한 다음 모두가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갔다. 그때 대신(大臣)인 유지(留枝)란 사람은 부처님에 대해서 공경하고 믿는 마음이 없었는데도 그도 역시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갔다. 그때 아난 존자가 멀리서 대신 유지가 오는 것을 보고 나서 그를 만난 다음 그에게 말하였다.
“잘 오셨소. 훌륭하고 훌륭하신 유지여, 그대가 찾아와서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니, 이곳에 오신 부처님은 위없는 복전(福田)을 구족하고 계시지만 오래지 아니하여 무상(無常)한 이치 때문에 육신이 허물어질 것이오.”이에 대신 유지가 말하였다.
“아난이시여, 나는 일부러 사문 구담을 찾아와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는 친족 마을의 규약을 어기지 않기 위하여 여기에 왔을 따름이오.”
아난 존자가 유지에게 친족 마을의 규약이 어떤 것인가를 물어보니 유지가 말하였다.
“존자 아난이시여, 우리들의 친족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함께 규약을 마련하여 ‘우리들은 모두가 곧 부처님을 찾아가 만나자. 만약 가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벌로 옛날 금전(金錢) 5백 냥을 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존자 아난이시여, 나는 차라리 금전 5백 냥을 줄지언정 사문인 구담씨를 찾아와 만나고 싶지는 않았소. 다만 나는 생각하기를 ‘친족 마을에 갈등이 있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만 생각하였소.”이에 아난 존자는 대신 유지의 팔을 이끌고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께 아뢰었다.
“오직 유일이신 부처님이시여. 이 대신 유지는 본래 옛 친족 마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처님에게 공경하고 믿는 마음이 없으니 오직 부처님께서 그를 위하여 잘 설법하셔서 그가 부처님에게 공경하고 믿는 마을이 있게 되면 기쁨이 생기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그 대신 유지란 사람은 마음속에 애착이 있었기에 산란(散亂)하여 안정되지 아니한 사람이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을 위해서는 설법을 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그때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계신 곳과 거리가 멀지 아니한 곳에 신통력으로 분뇨지옥(瀵尿地獄)을 만들었으니 그 깊이와 넓이가 헤아릴 수 없는 가운데 큰 소리가 울리게 하였다. “대신 유지란 사람은 부처님께 믿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니 그는 목숨이 끝나면 곧 이 국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대신 유지는 대지옥(大地獄)을 또 보고 또 소리를 듣고 나서 무섭고 두렵고 싫은 마음이 생겼다. 부처님은 그가 무섭고 두려워하며 지옥에 태어나기를 싫어하는 것을 아시고 그 마음에 따라 지극히 묘한 법문을 설하시니 대신 유지는 이 법문을 듣고 나서 티끌세상의 때 묻은 세계를 멀리 떠나서 제법(諸法) 가운데 법안(法眼)이 생겼다 한다.
이것은 부처님인 대자(大慈)하신 마음을 대신 유지에게 가득히 채워주신 일이다.【문】어떤 점이 자애가 가득한 점인가?
【답】그때 펼친 신족통(神足通)이 그것이다.
또한 이 밖에도 혹 신족통으로 자애를 교시한 일이 있다. 경의 설명에 따르면 예선에 아사세왕(阿闍世王)에게 단나파륵(檀那波勒)이라는 이름을 가진 코끼리가 있었는데 조달(調達)이 아사세왕에게 권유하여 코끼리에게 청주를 마시게 하여 코끼리가 술에 취하도록 해서 날뛰고 달려가 부처님을 해치게 하였다. 그때 코끼리는 멀리 부처님이 계신 것을 보고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멀리 코끼리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나서 좌우에 신통력으로 조화를 일으켜 매우 높은 담장을 만들고 뒷면에는 신통력으로 매우 크고 깊이가 백천 장에 달하는 개울을 만들고 위로는 신통력으로 매우 큰 산을 만들어 우렛소리를 내면서 무너져 내리게 하시고 앞에는 신통력의 조화로 다섯 마리의 큰 사자가 버티고 있게 하였다.그 코끼리는 다섯 마리의 사자를 보고 나서 지극히 큰 공포심이 일어나 좌우를 돌아보니 지극히 큰 담장이 있고, 뒤쪽을 돌아보니 지극히 크고 깊이가 백천 장이나 되는 개울이 있었으며, 우러러 위를 쳐다보니 큰 화산(火山)이 우렛소리를 내면서 무너져 내렸다. 이것을 보고 난 다음 모든 세계가 불에 타고 있는 곳에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부처님은 코끼리가 크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 도로 다섯 마리의 큰 사자를 거두어들이시니 다섯 마리의 사자가 물러갔고 오직 보이는 것은 부처님의 발밑의 맑고 시원한 경계뿐이었다. 이것을 보고 코끼리는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머리를 땅에 대고 부처님의 발아래 절을 하고 코를 부처님의 발아래 대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장엄하시니 자마금색이 5천 리에 가득하고 모든 중생에게 복덕과 도움을 주셨다. 부처님께서 오른손으로 코끼리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니 코끼리는 취기가 풀리기를 기다려 부처님은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코끼리야, 큰 용을 해치지 마라.
코끼리와 용은 세상에 나오기 어렵나니
코끼리야, 용을 해치지 마라.
끝내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하리라.
때리지 말아야 할 것을 때리고
성낼 것이 없는데 성이 나면
아마도 열 배의 보복 받아서
빨리 달려 저 지옥에 왕생하고
아마도 매우 큰 고통 받아서
몸도 역시 허물어져
고단하고 무거운 병 얻으며
마음은 어지럽고 뜻은 고달프고 나빠져
혹 고단한 재액 만나서
다른 사람의 비방을 받고
혹 친척과 이별하고
돈과 재물 모두 잃고 없어지며
사는 집과 모든 가진 것은
모두 불타버리고
몸 허물어지니 지혜도 없어
곧 지옥에 태어나리라.
그 코끼리는 이 게송을 듣게 되자 눈에서 곧 눈물이 나왔다. 이에 부처님은 코끼리의 음성으로 코끼리에게 설법하시니 그 코끼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목숨이 다하여 삼십삼천에 태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부처님이 코끼리를 위해서 자애한 마음을 가득히 베푸신 일이다.【문】이 가운데 어떤 것이 자애를 가득히 베푸신 일인가?
【답】곧 그때 펼치신 신족통이 그것이다.
이것을 두고 신족통으로 가득한 자애심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다음 혹 애착의 연으로 자애심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계경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범지에게 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논을 지키다가 하늘에서 큰 폭포수같은 비가 쏟아지면서 우박 때문에 논이 허물어졌고 그 아이는 죽음을 당하였다. 그 범지는 두 가지를 모두 함께 잃게 되자 곧 생각이 어지러워져서 미치게 되었고 벌거벗고 달려서 마침내 사위국(舍衛國)에 있던 아나분교원(阿那邠郊園)에 이르렀다. 그 범지는 마땅히 부처님으로부터 교화를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이때 부처님은 범지가 먼 곳에서 오고 있는 것을 보신 다음 생각하시기를 ‘지금 이 시대에 항하의 모래같이 수많은 부서가 설법한다 하더라도 저 사람을 제도할 수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곳에서 멀지 아니한 곳에 신통력의 조화로 논과 그의 아들을 만들어 놓았다.범지는 이 두 가지를 보고 나서 도로 본 마음을 되찾고 생각하기를 ‘이것은 나의 아들과 논이다. 이것이 항상 나를 근심ㆍ걱정을 품게 하는 것들이었다’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본 다음 곧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머리와 얼굴을 땅에 대어 부처님의 발아래 절을 하고 물러나서 한쪽에 앉았다. 그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공경심이 있었기에 속으로 큰 기쁨을 품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그의 마음에 따라 묘법을 설하시니 그 범지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서 티끌 세계의 때묻은 경계에서 멀리 벗어나 제법 가운데 법안(法眼)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부처님이 범지를 위해서 자애하신 마음을 가득히 베푸신 일이다.【문】이 가운데 어떤 절이 자애를 가득히 베푸신 일인가?
【답】곧 그에게 애착하는 연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 그것이다.
또한 이 밖에도 애착하는 연을 나타내신 일이 있으니 계경의 설명에 따르면 바사타(婆斯吒)이란 여자 범지에게 여섯 사람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들이 목숨이 끝나자 아들이 염려되어 근심과 슬픔으로 생각이 어지러워져서 미쳐버려 벌거벗고 거리를 달리다가 마침내 사위국의 아나분교원에 이르게 되었다. 그 여자 범지는 마땅히 부처님의 교화를 따라야 할 사람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여자 범지가 먼 곳에서 오는 것을 보시고 생각하시기를 ‘지금 이 시대에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부처가 설법을 한다고 하더라도 저 여자를 제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시고 그때 부처님은 그 여자와의 거리가 멀지 아니만 곳에 신통력의 조화로 여섯 아들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여자 범지는 여섯 이들을 보고 나서 본마음을 되찾게 되어 ‘이는 나의 아들이다. 이것들이 나에게 관심과 걱정을 품게 하였다’라고 생각하고 그는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길게 꿇어 엎드려 앉았다.그때 부처님이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 아난은 울다라승(鬱多羅僧)을 갖고 와서 저 여자 범지에게 주어라”라고 하셨다.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구제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서 웃옷을 가져다가 그 여자 범지에게 주었고 여자 범지는 그것을 받아 입었다. 그리하여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아래에 절하고 물러나서 한쪽에 머물렀다. 그 여자는 부처님에 대하여 믿음과 공경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속으로 큰 기쁨을 품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은 그 여자의 마음에 따라 묘법을 설하시니 여자 범지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서 티끌세상의 때 묻은 마음을 멀리 떠나 제법 가운데 법안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이 부처님이 그 여자 범지를 위해서 가득한 자애심을 베푸신 일이다.【문】이 가운데 어떤 점이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일인가?
【답】즉 과에게 애착의 연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애착의 연을 나타내서 가득한 자애심을 표현하신 일이다.
다음 혹 의방명(醫方明)으로 자애심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경의 설명에 따르면 마하선(摩訶先)이란 우바이는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의약(醫藥)의 공양을 드리고자 청하였다. 그때 한 비구가 병에 걸려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의원이 시키기를 육즙(肉汁)을 복용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 비구는 병을 간호하는 비구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마하선 우바이에게 말하되 ‘아무개 비구가 병이 나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곧 육즙이 필요하다’라고 말해달라”고 하였다.그때 병을 간호하던 비구가 곧 마하선 우바이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누이여, 아무개 스님이 병에 걸려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곧 육즙이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마하선 우바이는 심부름꾼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이 물건을 갖고 가서 고기를 사서 그 스님에게 주어라”라고 하니 그 심부름꾼이 물건을 갖고 가서 바라내성(波羅奈城)을 두루 돌아다니며 고기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그 내용을 설명하면 그때 그곳에 범마달왕(梵摩達王)이 한 아들을 낳게 되어 은 성 안에 명령하여 살생을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심부름꾼은 도로 마하선 우바이의 집으로 돌아와서 마하선 우바이에게 아뢰기를 “마님께 알려드립니다. 온 성 안을 두루 찾아도 고기를 살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이에 마하건 우바이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재난이다. 스님이 병에 걸려 약을 복용하는데 만약 고기를 얻지 못한다면 혹 목숨이 다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고 곧 날카로운 칼을 지니고 집안에 들어가서 몸의 연한 살 부분을 잘라서 심부름꾼에게 주면서 “네가 손수 끓여서 저 스님에게 주어라”라고 하였다. 그 스님은 이런 사연도 모르고 이 고기를 가지고 가서 병든 스님에게 주었으며, 그 병든 스님도 역시 그런 사연도 모르고 이것을 복용하여 병이 낫게 되었다.그러나 마하선 우바이는 몸이 부어오르고 통증이 생겼다.그때 마하선 우바이의 남편은 무슨 일이 있어 외출하고 집에 있지 아니하였는데 그 마하선 우바이의 남편이 집에 돌아와서 집안사람에게 묻기를 “마하선은 지금 집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집안사람이 대답하기를 “나리, 마하선 마님은 집 안에 계십니다만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하선의 남편은 이 말을 듣고 극도로 성이 나서 부처님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가령 즌 사람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받은 사람이 몰랐겠는가? 나는 곧 부처에게 가서 이 일을 따져봐야겠다”라고 하고 마하선의 남편은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찾아가게 되었다.그때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대중들이 주위를 에워싼 가운데서 설법을 하고 계셨다. 이 광경을 보고 마하선의 남편은 생각하기를 ‘오늘은 부처님과 의논할 수 없겠다. 내일 부처님에게 공양을 요청한 다음 따져야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곧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 발아래 절한 뒤 물러나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때 부처님은 마하선의 남편을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방편을 만들어 설법하셨으니, 정진을 권유하되 올바로 정진케 하시며 그를 환희케 하시되 올바로 환희케 하셨다. 한량없는 방편으로 법을 설하여 정진을 권유하되 올바로 정진케 하시며 그를 환희케 하시되 올바로 환희케 하고서 잠자코 있었다.그때 마하선의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앞에 모아 부처님을 향하여 부처님께 아뢰기를 “유일하신 부처님이시여, 내일 작은 공양을 마련하겠사오니 원컨대 부처님과 스님들이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이 요청을 받아들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마하선의 남편의 청을 받아들이시고 말없이 앉아 계셨다. 이에 마하선의 남편은 부처님이 말없이 허락하신 것을 알고 부처님의 발아래 절하고 부처님 주위를 돈 다음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와서 곧 그날 밤 여러 가지 반찬을 갖추고 갖가지 청정하고 묘한 공양할 음식을 마련하였고 준비를 마치자 곧 모임의 때가 되었다고 아뢰었다.그때 부처님께서는 새벽에 옷을 입으시고 여러 스님들이 앞뒤를 에워싼 가운데 마하선의 남편의 집을 찾아갔고 그곳에 이르러 자리에 앉으셨다. 부처님께서는 이 집 사정을 아셨으나 일단 집안사람에게 마하선 우바이가 지금 있는 곳을 물어보시니 집안사람이 대답하기를 “유일하신 부처님이시여, 마하선 우바이는 지금 발걸음을 끊고 매우 고통스러워하면서 집안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내오명(內五明)도 아시고 외오명(外五明)도 아셨기에 팔을 한번 굽혔다가 펴는 사이에 설산(雪山) 위에 이르러 약을 가지고 오셔서 상처 부위에 붙여주시고 마하선의 남편에게 말씀하시기를 “마하선 우바이를 불러내서 ‘부처님이 너를 부른다’고 오직 그렇게 부처님이 부른다고만 말하라”라고 하셨다.마하선의 남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곧 마하선이 있는 곳에 이르러 마하선에게 말하기를 “부처님이 당신을 부른다”라고 하였다. 마하선은 부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는 상처가 곧 예전대로 회복되어 다른 곳과 같은 빛깔이 되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공경심이 갑절로 불어났으며 마음속에 큰 기쁨을 품게 되어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아래 절하고 물러나서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은 그의 마음에 따라 그를 위하여 묘법을 설하시니 마하선 우바이와 모든 권속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서 티끌세상의 때 묻은 생각을 멀리 벗어나서 제법 가운데 법안(法眼)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부처님이 마하선 우바이를 위하여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일이다.【문】이 이야기 가운데 어떤 것이 가득한 자애인가?
【답】그 의방명(醫方明)이 그것이다.
또한 또 다른 지혜와 약에 얽힌 일도 있다. 경의 설명에 따르면 그 당시 어리석은 유리왕(琉璃王)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가유라위성(迦維羅衛城)을 무찔러 그곳에 있던 석씨(釋氏) 종족의 여섯 딸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마루 위에 앉아서 스스로 자랑하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의 친족들을 허물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일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때 석씨 종족의 딸이 대답하기를 “왕은 숙세(宿世)의 복이 있는 사람이요, 우리 친족들은 모두 다 진리를 밝혔으니 이는 성인이오. 다만 임금님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한 것뿐이니, 그 임금님이 이런 생각을 하신 까닭에 심히 그를 위하여 할 말이 있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유리왕은 그들 석씨 종족의 딸들의 손과 발을 잘라서 도랑 속에 넣었다. 그 석씨 종족의 여자들은 모두가 마땅히 부처님의 교화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그때 부처님은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곳에 이르셔서는 그들이 만난 한량없는 고통과 근심을 보신 후 생각하기를 ‘지금 이 시대에 이 석씨 종족의 여섯 딸들에게 항하의 모래처럼 수많은 부처가 그들을 위하여 설법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앓고 있는 이 고통 속에서 그들이 교화를 받을 수 있게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시고 부처님은 내오명(內五明)의 연기를 아시고 또 외오명(外五明)의 연기를 아시는지라, 팔을 한 번 굽혔다가 펴는 사이의 짧은 시간 안에 설산(雪山) 위에 이르시어 그 곳에서 약을 갖고 오신 다음 그들의 상처를 쓰다듬고 그 위에 약을 붙여주셨다. 부처님께서 약을 붙여주시자 고통이 곧 없어지고 문득 즐거운 감각이 생겼다. 즐거운 감각이 생기자 부처님은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마음따라 묘법을 설하시니 그 여섯 석씨의 딸들은 설법을 듣고 나서 티끌세상의 때 묻은 생각에서 멀리 벗어나 제법 가운데서 법안(法眼)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여섯 석씨의 딸을 위하여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일이다.【문】이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이 가득만 자애를 베푸신 일인가?
【답】그 의방명이 그것이다.
이것을 두고 의방명으로 가득한 자애를 표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 ‘혹 다시 즐겁게 함으로써 가득한 자애심을 나타낸다’라고 한 것은 경의 설명에 따르면 어느 날 부처님께서 여러 승방(僧房)을 돌아보시다가 한 승방에 이르셨는데 그 방안에는 한 비구가 병을 앓아 고통받고 있으면서 홀로 도반 없이 대소변 속에서 일어나 기거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부처님은 그 사연을 아시면서도 비구에게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이 병에 걸려 있으면서 혼자 도반이 없는가?”라고 하셨다. 병든 스님은 부처님께서 따져 묻자 아뢰기를 “저는 게으른 사람이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도 나를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부처님이시여, 나는 의지할 곳도 없고 믿을 곳도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비구여, 그대는 나를 위하여 짐짓 집을 나와서 도를 배우고 사문(沙門)이 된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다.
비구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부처님이시여, 그렇습니다. 부처님이시여“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비구여, 내가 네가 의지할 사람이며 천주(天主)와 세상 사람들이 의지할 곳이다”라고 하셨다.그때 부처님께서는 그를 누워있는 곳에서 천천히 부축해 일어나게 하여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쉬게 하고 천천히 그곳에 누워있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오셔서 그가 깔고 있던 자리를 끄집어내어 대소변을 제거하고 진흙으로 누워 있던 집을 수리하였다. 다시 새 자리를 깔고 병든 비구를 목욕시키고 나서는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헌옷을 세탁해서 도로 방안에 넣어주고 천천히 새로 깐 이부자리 위에 눕혀서 손으로 그의 몸을 어루만져 주셨다. 이때 부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만약 네가 더욱 부지런히 수행하지 아니한다면 네가 이르고 싶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네가 얻고자 하는 경지를 얻지 못하며, 네가 증득하고자 하는 경지를 증득하지 못할 것이다. 비구여, 그렇게 되면 다시 또 무거운 병에 걸려 이 병보다 더욱 심한 병에 걸릴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병든 스님을 어루만져 주시니 그의 병은 곧 제거되었고 문득 즐거운 감각을 얻게 되었다. 그가 즐거운 감각을 얻게 되자 부처님은 그의 마음따라 묘법을 설하시니 그 스님은 이 설법을 듣고 티끌세상의 때 묻은 마음에서 멀리 벗어나 제법 가운데 법안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부처님이 그 비구를 위하여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일이다.【문】이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이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것인가?
【답】그가 다시 즐거워한 것이 그것이다.
이 밖에 또 나른 다시 즐거워할 일이 있다. 경의 설명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기사굴산(耆闍崛山)의 한 곳에 노니실 때 조달(調達)도 같은 기사굴산의 한편에 있었다.
그때 조달은 심한 두통(頭痛)을 앓아 참고 감내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상호(相好)를 구족하시어 자마금색(紫磨金色)으로 만천의 복덕을 갖추시고 손으로 그 산을 꿰뚫어 조달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니 모든 고통이 제거되어 문득 즐거운 감각을 얻게 되었다. 이에 조달은 생각하기를 ‘이것이 누구의 은혜인가?’라고 하고 문득 되돌아보니 이는 부처님의 손이라 이를 본 조달은 말하기를 “거룩하도다. 실달(悉達)이여, 이러한 의술(醫術)을 훌륭히 배웠구나. 이 의술만으로도 넉넉히 생활할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부처님이 조달을 위해서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일이다.【문】이 이야기 가운데 어느 부분이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일인가?
【답】곧 그가 다시 즐거워한 것이 그것이다.
이런 일을 두고 다시 즐거워하게 함으로써 가득한 자애를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다음 ‘혹 맑고 시원한 그림자로써 가득한 자애를 표현한다’라고 한 것은 경의 설명에 따르면 어느 때 부처님과 존자 사리불이 함께 한 곳을 유행하였는데 존자 아난은 뒤쪽에서 불자(拂子)를 잡고 부처님의 뒷편을 털며 따라갔다. 그때 한 마리의 새가 매에게 쫓겨 마치 가랑잎처럼 몸을 떨고 무서워하다가 날아서 존자 사리불의 그림자 속으로 달려갔으나 여전히 몸을 가랑잎처럼 떨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새는 사리불의 그림자 속에서 떠나 날아가서 부처님 그림자 속에 머무니 무섭고 두려운 생각이 없어졌다.이 모습을 본 아난 존자는 두 손을 마주잡고 부처님께 아뢰기를 “몹시 기이한 일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와 같이 새가 사리불 존자의 그림자 속에 있을 때는 마치 가랑잎처럼 몸을 떨다가 사리불 존자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서 부처님 그림자 속에 이르게 되니 곧 무섭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어졌습니다”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아난아. 그렇다. 아난아. 사리불 비구가 비록 죽음에서는 벗어나게는 하지만 지극히 청정하지는 않다. 그런 까닭에 새가 그의 그림자 속에 머물면서 몸을 가랑잎처럼 떨었었다. 아난아, 그러나 나는 3아승지겁에 걸쳐 살생에서 벗어났고 지극히 구족한 청정행을 닦았다. 그런 까닭에 새가 나의 그림자 속에 머물게 되면 공포심이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부처님이 그 새를 위하여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일이다.【문】이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이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일인가?
【답】곧 그 맑은 시원한 그림자가 그것이다.
또한 맑고 시원한 그림자에 관한 설명이 있다. 경의 설명에 따르면 한 도적이 있어 손발이 잘려서 도랑 속에 버려져 있었다. 그 도적은 부처님의 교화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이때 부처님은 생각하시기를 ‘만약 이때 항하의 모래처럼 수많은 부처가 이 한 도적을 위하여 설법한다 하더라도 그를 제도할 수는 없다’라고 하시고 그때 부처님은 도적이 버려져 있는 곳으로 가시어 그 도적이 부처님의 그림자 속에 있게 하니 도적은 곧 고통에서 벗어나서 즐거운 감각을 얻게 되었다. 그가 즐거운 감각을 얻게 되자 부처님은 그의 마음따라 묘법을 설하셨고 도적은 설법을 듣고 나서 티끌 세계의 때 묻은 마음에서 멀리 벗어나 제법 가운데 법안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도적을 위하여 짐짓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일이다.【문】이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이 가득한 자애를 베푸신 것인가?
【답】곧 그 시원한 그림자가 그것이다.
이것을 두고 시원한 그림자로 가득한 자애를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가득한 자애심의 경우 그것은 한두 종류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율장(律藏)에서 말하기를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가득한 자애를 베푸시기에 설법하신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네 종류의 사람이 청정한 복덕을 받는다고 하셨다. 즉 사람들이 일찍이 세우지 아니하였던 곳에 부처님의 사리로 탑을 세운다면 이것을 첫 번째로 사람들이 청정한 복을 받는 잎이라 한다.다음 사람들이 일찍이 세우지 아니하였던 곳에 방사(房舍)를 지어서 주처(住處)가 없는 스님에게 보시한다면 이것을 두 번째로 사람들이 청정한 복을 받는 일이라 한다. 다음은 만약 서로 어지럽히고 싸우는 스님들이 있는 곳에서 어떤 사람이 이들을 화합하게 한다면 이것을 세 번째로 사람들이 청정한 복을 받는 일이라 한다. 다음은 어떤 사람이 자심(慈心)이 함께 한 지방에 가득하게 하여 노닐 곳을 성취하고 이와 같이 두 번째ㆍ세 번째ㆍ네 번째의 지방과 사유(四維:네 곳의 間方)와 상하(上下)에 이르기까지도 모든 지방에 가득히 자심을 함께 성취하여 노닐게 하고 이와 같이 비심(悲心)ㆍ희심(喜心)ㆍ사심(捨心)도 함께 한 지방을 가득히 하고 나서 노닐 곳을 성취하고 이와 같이 두 번째ㆍ세 번째ㆍ네 번째의 지방과 사유ㆍ상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면에 자ㆍ비ㆍ희ㆍ사가 가득하게 하여 노닐 곳을 성취시킨다면 이것을 네 번째로 사람들이 청정한 복을 받는 일이라 한다.경량부(輕量部)의 논사는 이르기를 “이것은 부처님의 계경에서 말씀하신 일도 아니고 또한 범복(梵福:청정한 복)도 아니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무량등이 곧 범복이다. 왜냐 하면, 무량등이라 하는 것은 등류과(等流果)를 가져오기 때문이고 이와 같이 받는 것이 범복이기 때문이다. 즉 금강좌(金剛座)에 앉거나 법륜을 굴리시면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곳에 탑을 세운다면 이와 같은 탑으로 얻는 복이 그들이 세운 자그마한 탑으로 얻는 범복과 똑같겠는가? 또 이와 같이 하여 받는 범복은 죽원정사(竹園精舍)나 기원정사(祇洹精舍)와 같이 숲이 깊고 그윽한 숲속에 큰 승방을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것이 저들이 세우는 자그마한 승방을 세워 얻는 범복과 같겠는가?또 이와 같이 받는 범복이라 하는 것은 조달이 승단을 어지럽히고 싸우게 하였을 때 이를 화합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것이 저 구사미( 拘舍彌) 비구가 자그마한 승단의 갈등을 화합하게 하여 받는 범복과 같겠는가? 그런 까닭에 이것은 부처님이 계경에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범복도 아니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무량등이 또한 이것이 범복이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이것이 부처님이 계경에서 하신 말씀이며 또한 범복이다”라고 하였다.【문】이와 같은 과보는 더불어 같지 않다.
【답】다른 사람에게 많은 이익을 주기 때문에 세간의 복덕의 모습이 무량한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많은 이익을 준다는 것은 무량등을 닦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갉이 이것도 무량하게 다른 사람을 많이 이롭게 하는 것이다.일찍이 세우지 아니하였던 곳에 부처님의 사리로 탑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그것으로 인연하여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중생들이 착한 몸[身]ㆍ입[口]ㆍ생각[意]의 행을 닦고 부처님에게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덮개와 깃발과 놀이와 음악과 가루로 된 향을 공양하게 되고 불도(佛道)를 구하기를 원하는 사람과 성문도(聲聞道)ㆍ벽지불도(辟支佛道)를 얻기를 원하는 사람이 큰 부자가 되고 호족 귀족집에 태어나서 얼굴모습이 단정하게 되고 또한 하늘 위나 인간 세계 가운데 태어나게 된다. 이 지극히 큰 이익이 있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이 일은 극히 큰 이익이 있는 것이며, 이와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다른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하는 일은 무량등에서 일어난다고 한 것이며, 이것도 역신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일인 것이다.또한 일찍이 세우지 아니하였던 곳에 승방을 짓고 나서 머물 곳이 없는 스님에게 보시한다고 하는 것은 그곳으로 인연하여 백천의 중생들이 처한 몸ㆍ입ㆍ생각의 행을 닦게 되고 경을 외우고 익히고 읽고 묻고 가르치는 사람과 경전과 율장을 깊이 연구하고 사유하여 고요히 말없이 욕계의 결(結)을 제거하고 색계ㆍ무색계의 결을 제거하여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의 과보를 얻고 불ㆍ법ㆍ승의 삼보를 위해서 짐짓 대중의 일을 돕고 불도ㆍ성은도ㆍ벽지불도를 구하기를 원하고 큰 부자가 되어 호족ㆍ귀족집에 태어나 얼굴모습이 단정하고 하늘 위 사람 가운데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것은 지극히 큰 이익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큰 이익을 주는 일도 무량등에서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무량등에서 일어나는 것도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다음 싸우고 어지럽히는 승단을 화합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가령 승단이 어지럽고 싸워서 허물어지게 되면 그때 아직 증득을 얻지 못한 사람은 증득을 얻을 수 없게 되고 과보를 얻지 못한 사람은 과보를 얻지 못하여 결(結)을 제거하지 못하고 누(漏)를 다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경과 율장과 아비담을 외우고 익히지 아니하며 또한 경전과 율장과 아비담을 연구하지도 아니하여 고요하고 말없이 사유하지도 아니하고 욕계의 결도 제거할 수 없으며 또한 색계와 무색계의 결도 제거할 수 없고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과도 얻지 못하여 삼천대천세계에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지 못하고 정거천(淨居天:首陀會天)에 이르기까지 교단이 어지러워진다. 그러나 싸우고 어지럽던 승단이 화합하게 되면 증득을 얻지 못한 사람이 증득을 얻게 되고 과보를 얻어 결을 제거할 수 있고 누가 다할 수 있게 되고 경전과 율장과 아비담을 외우고 익히며 경전과 율장과 아비담을 연구하게 되고 또한 고요하고 말없이 사유하여 욕계의 결도 제거하게 되고 색계와 무색계의 걸도 제거하게 되어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의 과보를 얻고 삼천대천세계에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정거천에 이르기까지 어지러워지지 아니한다. 이것은 지극히 중생들에게 큰 이익이 있는 일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직 일찍이 세우지 아니하였던 곳에 부처님의 사리로 탑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란 곧 청정한 인이며 그곳은 범복(梵福)을 받는 곳임을 말한 것이다. 또한 일찍이 세우지 아니하였던 곳에 승방을 지어 일정한 머물 곳이 없는 스님에게 보시한다는 것은 청정행을 닦는 사람에게 처소를 줌으로써 청정한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한 싸우고 어지러운 승단을 화합시킨다고 하는 것은 성인의 도가 그곳에 인하여 청정한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존자 바수밀은 설명하기를 “일찍이 세우지 아니하였던 곳에 부처님의 사리로 탑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네 가지 일 때문에 청정한 복을 받게 된다. 어떤 것이 네 가시 일인가? 지극히 묘한 이치를 열어 널리 법의 재물이 나오게 하며 사리를 건립하게 되면 짓던 일이 이미 끝나게 되는 네 가지가 그것이다. 또한 일찍이 세우지 아니하였던 곳에 승방을 지어 일정한 머물 곳이 없는 스님에게 보시한다고 하는 것도 네 가지 일 때문에 청정한 복을 받게 된다. 즉 지극히 묘만 이치가 열려서 널리 법의 재물이 나오게 되고 짓던 일이 이미 끝났으니 선(禪)의 사유를 외우고 익혀서 안정되지 못하였던 마음이 안정을 얻게 되는 네 가지가 그것이다.싸우고 어지러운 승단을 화합시킨다고 하는 것도 네 가지 일 때문에 청정한 복을 받게 된다. 즉 입으로 생기는 네 가지 허물이 제거되고 행의 네 가지가 청정해지며 입에서 모든 법 아닌 말이 제지되고 베푸는 법에 안주(安住)하게 되는 네 가지가 그것이다.
무량등을 닦는다고 하는 것도 네 가지 일 때문에 청정한 복을 받게 된다. 갈등에서 벗어나 다투지 아니하게 되고 마음을 덮고 있는 다섯 가지 덮개[五蓋:탐욕ㆍ노여움ㆍ졸음ㆍ흔들림ㆍ의심)가 제거되고 색계의 과보로 색계에 영역을 얻어 그곳에 있게 되는 네 가지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문】청정한 복이란 그 복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가?
【답】일설에 의하면 객관적인 인의 행으로 얻은 전륜왕(轉輪王)의 자리 이것이 청정한 복의 수효라고 하였다. 이와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이르기를 “객관적인 인의 행으로 얻는 제석천왕의 자리 이것이 청정한 복의 수효이다”라고 하였다. 또 “객관적인 인의 행으로 얻은 타화자재천자(他化自在天子)가 되는 것이 범복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객관적인 인의 행으로 대범천왕이 되는 것이 범복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계가 허물어져서 다시 도로 이루어질 때 모든 중생들의 객관적인 인의 행으로 이 대지(大地)가 건립되는 것 이것이 범복의 작용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범천왕이 부처님께 청을 해서 법륜을 굴리시고 성인이 된 대범천왕이 부처님께 요청해서 부처님이 굴리신 법의 수레바퀴로 얻는 복 이것이 범복의 작용이다”라고 하였다.【문】대범천왕(大梵天王)은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의 마음으로 부처님께 요청하는데 어떻게 범복(梵福)을 받게 되는가?
【답】일설에 의하면 범천이 처음 발생하였을 때 “내가 마땅히 부처님께 가서 요청하리라”라고 하였기에 곧 그때 대범천왕이 범복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은 성립되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이것은 행(行)을 짓지 아니하고도 복을 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문】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답】대범천왕이 부처님께 법륜을 굴려주십사고 요청한 까닭에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셨고 대범천왕이 법문을 듣고 나서 생각하기를 ‘내가 요청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셨다’라고 생각하여 그는 이 생각으로 인해서 매우 기뻐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으며 지극히 묘하고 거룩한 원(願)을 일으켰다. 그때 그는 범복을 받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미 보살의 지위를 이룩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중생들이 받는 복 이것이 범복의 수효다”라고 하였다.이와 같이 말한 범복이라 표현하는 말은 칭찬받고 명예롭고 찬탄받는 복을 말한 것이다. 다만 범복이란 헤아릴 수 없고 한량이 없는 아승기의 수효인지라 말할 수 없이 많은 종류가 있을 뿐이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자정수(慈定受)를 닦고 익히 많이 닦고 익히면 변정천(遍淨天)에 태어나게 되고 비정수(悲正受)를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게 되면 공처(空處)에 태어나게 되고 희정수(喜正受)를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게 되면 식처(識處)에 태어나게 되고 호정수(護正受:捨正受)를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게 되면 불용처(不用處)에 태어나게 된다고 하셨다.【문】자정수를 닦고 익혀 말이 닦고 익히면 변정천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자정수라 하는 것은 그 과보가 변정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정수를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면 공처(空處)에 태어나고 희정수를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면 식처(識處)에 태어나고 호정수를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면 불용처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 이것은 그렇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이것은 색계에서 쌓은 공덕으로 얻는 거룩한 근기이므로 무색계의 과보는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비정수를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면 공처에 태어나고, 희정수를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면 식처에 태어나고 호정수를 닦고 익혀 많이 닦고 익히면 불용처에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일설에 의하면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야만 이를 설명하게 되리니 다른 사람은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결과가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자정수는 즐거운 수행이며 낙근(樂根)은 모든 생사(生死)윤회의 세계 가운데서 가장 묘하고 그것은 3선의 경지 가운데서 얻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자정수를 닦으면 변정천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비정수라 하는 것은 색을 꾸짖고 나무라고 색을 허문다. 공처도 역시 색을 나무라고 꾸짖고 색의 세계를 허문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비정수를 닦으면 공처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희정수라는 것은 느긋하게 기쁜 행이다. 식처(識處)의 내응도 느긋한 행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희삼매를 닦으면 식처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셨다. 호정수(護正受)라 하는 것은 능히 버릴 수 있는 경지다. 불용처(不用處)도 역시 버리는 곳이라 표현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호삼매를 닦으면 불용처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셨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것은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고 느긋하게 하는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혹 수행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3선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며, 혹 공처(空處)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도 있으며, 혹 식처ㆍ불용처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3선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욕계의 결을 제거하였을 때는 그의 마음이 즐겁지도 느긋하지도 아니하다. 또 초선의 욕망이 제거되어도 그의 마음은 즐겁지도 느긋하지도 아니하다. 2선의 경지의 욕망이 제거되고 3선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면 그의 마음은 비로소 느긋하고 즐거워진다.또만 공처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 욕계의 욕망이 제거되어도 그의 마음은 즐겁지도 느긋하지도 아니하다. 마침내 3선의 욕망이 제거되어도 그의 마음은 즐겁지도 느긋하지도 아니하다가 4선의 경지의 욕망이 제거되어 공처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야만 비로소 그의 마음은 느긋하고 즐거워진다. 또한 식처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그에게서 욕계의 욕망이 제거되었을 때는 마음이 즐겁지도 느긋하지도 아니하다. 그리하여 4선의 경지의 욕망이 제거되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마음은 즐겁지도 느긋하지도 아니하다가 공처의 욕망이 제거되었을 때 식처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면 비로소 그의 마음은 즐겁고 느긋해진다. 또한 불용처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도 욕계의 촉망을 제거하였을 때는 그의 마음은 즐겁지도 느긋하지도 아니하며 그리하여 공처의 욕망이 제거될 때까지도 그의 마음은 즐겁지도 느긋하지도 아니하다가 식처의 욕망이 제거되어 불용처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면 그의 마음은 느긋하고 즐거워진다.
이것을 두고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을 느긋하고 즐겁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각지(覺支)와 도지(道支)다. 각지ㆍ도지라 하는 것은 능히 그것이 2선의 결을 제거할 수 있을 경우 이것을 자정수라 표현한다. 또한 각지ㆍ도지가 4선의 번뇌를 제거할 경우 그것을 비정수라 부른다. 또 각지와 도지가 공처와 번뇌를 제거할 수 있을 경우 그것을 희정수라 부른다. 또한 각지와 도지가 식처의 번뇌를 제거할 수 있을 경우 이것을 호정수라 부른다. 이것이 각지ㆍ도지를 말한 것이라고 하는 이유이며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외도들의 생각을 끊기 위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외도들은 무색계 가운데 해탈이 있다고 헤아리기에 또 무량등 가운데 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외도들이 무색계 가운데 해탈이 있다고 헤아리는 생각에 대해 부처님은 무량등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존자 구사(瞿沙)도 역시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외도들은 번뇌에서 원리(遠離)에 대해 무지하기에 원리를 벗지도 못하면서 이를 해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해탈이라고 헤아리는 생각에 대해 부처님은 무량등이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
4무량등처(無量等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
'매일 하나씩 > 적어보자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어보자] #6037 비바사론(鞞婆沙論) 13권 (0) | 2025.05.19 |
---|---|
[적어보자] #6036 비바사론(鞞婆沙論) 12권 (0) | 2025.05.19 |
[적어보자] #6034 비바사론(鞞婆沙論) 10권 (1) | 2025.05.18 |
[적어보자] #6033 비바사론(鞞婆沙論) 9권 (0) | 2025.05.18 |
[적어보자] #6032 비바사론(鞞婆沙論) 8권 (0) | 2025.05.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