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사론(鞞婆沙論) 10권
비바사론 제10권
시타반니 지음
승가발징 한역
33) 사선처(四禪處)4선(禪)이라 하는 것은 초선(初禪)ㆍ2선(禪)ㆍ3선(禪)ㆍ4선(禪)을 말한다.【문】4선에 어떤 성품이 있는가?
【답】5음(陰)이 그 성품이다. 이 선정의 성품이 그 본래의 모습과 신체의 종자가 되는 것이다. 성품을 말하게 되면 마땅히 그 행도 말해야 한다.【문】무엇 때문에 선(禪)이라 하는가? 선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 결(結)을 버리는 까닭에 선이라 하는가, 바른 관을 이루기 때문에 선이라 하는가? 만약 결(結)을 버리는 것이 선에 해당된다면 무색계(無色界) 안에서도 역시 선정(禪定)이 있어 능히 결을 버릴 수 있다 한다. 또 만약 바른 관을 이루는 것이 선에 해당된다면 욕계 가운데서도 역시 선정이 있어 능히 바른 관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답】어떤 사람은 설명하기를 “결을 버리기 때문에 선이 된다”라고 하였다.【문】만약 결을 버리는 것이 선에 해당된다면 무색계 가운데서도 선정이 있어 능히 결을 버릴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왜 선이라 하지 않는가?
【답】악(惡)과 무기(無記)의 두 종류의 결을 버리는 것 그것을 선이라 한다. 무색계 가운데서의 선정은 비록 무기의 결을 버린다 하더라도 악한 결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선이라 부르지는 아니한다.【문】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미래에 근거해서만 그것을 선이라 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선에서는 불선(不善)과 무기의 두 종류의 결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답】이것은 결을 꾸짖고 버리는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을 버리는 일은 두 종류의 버림[棄]으로 설명된다. 즉 꾸짖고 버리는 경우와 끊어서 버리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욕계의 결이 되기 때문에 두 종류, 즉 끊음으로써 버리는 경우[斷棄]와 꾸짖음으로써 버리는 경우[呵責棄]가 그것이다. 상지(上地)에서는 비록 끊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직 꾸짖고 버리는 일에는 해당된다. 그것을 꾸짖고 버리는 경우라 하며 그런 까닭에 선은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문】만약 그렇다면 멸제(滅諦)ㆍ도제(道諦)에서의 법지분(法智分)과 모든 미지근지분(未知根智分)은 선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욕계의 결이지만 끊어서 버리는 것도 아니고 꾸짖고 버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답】함께 지(地)를 취하지 못하고 함께 계(界)를 취하지도 못하나니,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1계(界)ㆍ1지(地)이다. 욕계의 결은 끊음으로써 버리게 되고 꾸짖고 버리게도 된다. 무색계 안에서는 잠시라도 이럴 수가 없으니 이 욕계의 결을 일컬어 끊어서 버리게 되고 꾸짖어 버리게 된다고 한다.존자 구사는 설명하기를 “모든 6지에서 욕계의 결을 끊어서 버리기도 하고 꾸짖고 버리기도 한다. 다만 그것이 미래에나 생기는 욕계의 결만 버리게 되면 나머지 다른 지(地)는 무슨 버릴 것이 있겠는가? 다른 곳에서도 역시 버릴 수는 있다. 다만 버릴만한 결이 없을 따름이다.비유하면 한 사람에게 여섯 집의 원수진 집안이 있을 때 만약 모의하는 곳을 알고 그에 따라 당장 그의 목숨을 끊는다면, 그가 처음 원수졌던 집에서 목숨을 끊었을 때 나머지 다른 집에서는 어떤 목숨을 끊어야 하는가? 다른 집에서도 역시 원수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데 다만 끊어야 할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목숨을 끊겠는가? 이와 같이 모든 6지에서 욕계의 결을 끊어서 버리기도 하고 꾸짖어 버리기도 하지만 오직 미래에나 생기는 욕계의 결을 버리게 되는데 나머지 다른 지(地)에서는 당장 무엇을 버릴 것이 있겠는가? 다른 지(地)에서도 역시 버릴 수는 있는데 다만 버릴만한 결이 없을 따름이다.또 다른 비유로 설명한다면 가령 어떤 사람이 여섯 개의 등불을 지니고 어두운 방안에 들어갔을 때 그가 처음 한 등불을 밝히게 되면 극도의 어둠은 버리게 되니 나머지 다른 등불은 무슨 버릴 어둠이 있겠는가? 다른 등불도 역시 어둠을 버리게 할 수는 있는데 다만 버릴 만한 어둠이 없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 모든 6지에서 모두 욕계의 결을 끊어서 버리기도 하고 꾸짖어 버리기도 할 수는 있는데 그러나 다만 미래에나 생기는 욕계의 결을 버리게 되니 그 나머지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나머지 지에서도 역시 버릴 수는 있는데 다만 버려야 할 것이 없을 따름이다.또 다른 비유로 설명한다면 가령 모든 햇빛은 모든 어둠을 허문다. 아침 햇빛ㆍ낮의 햇빛ㆍ저녁 햇빛이 모두 어둠을 허물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아침 첫 햇빛이 모든 어둠을 허물어버리면 밤의 어둠은 버리게 되는데 나머지 다른 시각의 햇빛에는 무슨 버릴 만한 어둠이 있겠는가? 다른 햇빛도 어둠을 버리게 할 수는 있는데 다만 버릴 수 있는 어둠이 없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 모든 6지의 선정이 모두 욕계의 번뇌를 끊어서 버리기도 하고 꾸짖어 버리기도 할 수 있지만 오직 미래에나 생기는 욕계의 결은 버리게 되니, 나머지 지(地)에서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나머지 지에서도 역시 결을 버리게 할 수는 있는데 다만 버릴 만한 것이 없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禪)이란 득정(得定)이다. 즉 모든 연 가운데서의 정(定)은 또한 모든 결을 버리게 된다. 욕계의 정도 역시 모든 연(緣) 속에서 얻는 정이기는 하지만 모든 결을 버리지 못한다. 또한 무색계의 정은 모든 연 가운데서의 정도 아니며 모든 결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이라 부르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이란 도를 얻는 일반적인 지혜이기에 능히 결을 버릴 수 있다. 욕계의 정(定)은 비록 일반적인 지혜는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다만 결을 버리는 도는 아니다. 무색계의 정에는 비록 결을 버리는 도라 하더라도 도를 얻는 일반적인 지례가 없다. 즉 선(禪) 가운데서만 도를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지혜를 갖춰서 또한 결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도(道)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선이라 부른다. 욕계와 무색계에서는 세 가지 도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선이라 부르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경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선이라 부른다. 욕계와 무색계는 세 가지 경지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선이라 부르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근기(根機)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선이라 부른다. 욕계와 무색계는 세 가지 근기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선이라 부르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배움[學], 즉 계율을 익히고 정을 익히고 지혜를 익히는 이 세 가지 배움의 길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선이라 부른다. 욕계와 무색계는 이 세 가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선이라 부르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지(支)ㆍ5지(支)ㆍ5음(陰)이 포함된 정(定)을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선이라 부르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시현(示現), 즉 신족시현(神足示現)ㆍ관찰시현(觀察視現)ㆍ교수시현(敎授示現)을 선이라 부른다. 욕계와 무색계는 이러한 세 가지 시현을 성취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선이라 부르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신족통(神足通)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선이라 부른다. 세 가지 신족이라 하는 것은 의해신족(意解神足)과 의첩질신족(意捷疾神足)과 신용신족(身踊神足)을 말한다.이 가운데 의해신족이란 힘센 역사(力士)가 팔을 굽히고 펴는 사이에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의첩질신족이란 마치 심식(心識)이 세계를 도는 사이에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신용신족이란 모든 몸이 마치 새가 창공을 날아가듯 공중으로 뛰어 올라 그림 속에 사람이 날아가는 것과 같아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선이라 부르며, 욕계와 무색계는 이 세 가지 신족(神足)을 얻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이라 부르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37도품(道品)을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을 선이라 부르며, 욕계와 무색계는 37도품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선이라 부르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이와는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는 “바르게 관하기[正觀] 때문에 선이라 부른다”고 하였다.【문】만약 바르게 관하는 것을 선이라고 한다면 욕계에도 역시 정(定)이 있어 바르게 관할 수 있는데 그것은 왜 선이라 부르지 않는가?
【답】욕계의 정에는 비록 정이란 이름은 있으나 정의 작용은 없다. 마치 흙으로 만든 교량[橋]은 교량이란 이름은 있더라도 교량의 작용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욕계의 점에는 정이라는 이름은 있어도 정의 작용은 없는 것이다. 색계의 정에는 이미 정이라는 이름도 있고 또한 정의 작용도 있다. 마치 나무로 만든 교량이 교량이란 이름도 있고 교량의 작용도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색계의 정은 정이라는 이름도 있고 또한 정의 작용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계의 정은 어지러워 안정되어 있지 않다. 마치 네거리 길에서 등불을 태울 때 사방에서 바람이 불면 바람따라 동서남북으로 흔들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욕계의 정은 어지러워 안정되어 있지 않으나 색계의 정은 어지럽지 아니하여 항상 안정되고 흔들리지 아니한다. 마치 방안에 있는 등불과 같아서 바람이 불어오지 아니하여 불꽃이 동서로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색계의 정은 어지럽지 아니하여 항상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계의 정에는 힘이 없고 견고하지 아니하여 대장부의 공덕이 없으나 색계의 정은 견고하고 힘이 있어 대장부의 공덕이 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선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이 선의 내용을 설명한다면 이 선이라 이름하는 경지 가운데는 열여덟 가지가 있다. 즉 초선의 경지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각지(覺支)ㆍ관지(觀支)ㆍ희지(喜支)ㆍ낙지(樂支)ㆍ일심지(一心支)가 그것이다. 또 2선의 경지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즉 내정지(內淨支)ㆍ희지(喜支)ㆍ낙지(樂支)ㆍ일심지(一心支)가 그것이다. 또 3선의 경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즉 의지(猗支, 輕安支:홀가분한 작용)ㆍ낙지(樂支)ㆍ염지(念支)ㆍ정지지(正智支)ㆍ일심지(一心支)가 그것이다. 또 4선의 경지에서는 네 가지가 있으니, 불고불락지(不苦不樂支)ㆍ호지염지(護支念支)ㆍ일심지(一心支)가 그것이다.【문】선지(禪支)에 이름은 열여덟 가지지만 그 종류는 몇 가지로 구분되는가?
【답】선의 갈래는 이름은 열여덟 가지지만 종류로 구분하면 열한 가지로 구분된다. 즉 초선(初禪)의 5지(支) 이것은 이름도 다섯 가지며, 종류도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2선에서는 이 다섯 가시에 하나의 종류가 더 불어나는데 신지(信支)가 그것이다. 3선의 경지에서는 여기에 다시 세 가지 지가 더 불어나니, 낙지와 염지와 정지지가 그것이다. 4선의 경지에서는 다시 두 가지가 더 불어나니, 불고불락지와 호지(護支)가 그것이다. 이렇게 선지는 이름은 열여덟 가지가 있고, 종류로 구분하면 열한 가지가 된다.이와는 다르게 설명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름은 열여덟 가지지만 종류로 구될하면 열 가지로 구분된다고 말한다.【문】무슨 까닭인가?
【답】초선ㆍ2선의 낙지라 하는 것은 3선의 낙지와 같다. 그렇기에 마땅히 선지에 이름은 열여덟 가지가 있으나 종류는 열 가지가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초선ㆍ2선의 낙지는 경안(輕安)이고, 3선의 낙지는 낙수(樂受)이니, 이것이 다른 점이며 초선ㆍ2선에서의 즐거움은 행음(行陰)에 속하지만 3선에서의 즐거움은 수음(受陰)에 속한다. 이것으로 선지(禪支)의 이름은 열여덟 가지지만 종류는 열한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름도 같고 종류도 같은 것, 이와 같은 이름의 수효와 종류의 수효, 이름의 모습과 종류의 모습, 이름도 다르고 종류도 다른 것, 이름도 구별되고 종류도 구별되는 것, 이름으로 느끼고 종류로 느끼는 것 등등의 일도 이와 같이 추리하면 모두를 곧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禪)의 성품이며 이미 종류와 모습과 바탕이 지닌 사연적인 본질을 설명하였으니 마땅히 그 행(行)도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문】무엇 때문에 선지를 말하게 되는가? 선지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
【답】수순한다[順]는 뜻이 선지의 뜻이고 조행(助行)하는 뜻이 선지의 뜻이고 섭수(攝受)하는 뜻이 선지의 뜻이다.
수순한다는 것이 지(支)의 뜻이라 하는 것은 그 경지의 정(定)에 수순하여 곧 경지 가운데에서 건립되기 때문이다.
수행을 돕는 것이 지의 내용이라 하는 것은 이 지가 결을 끊고 제거할 때 그 정의 행상을 돕기 때문이다.
섭수한다는 것이 지의 내용이라 하는 것은 이 지가 결을 끌고 제거할 때 그 출입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지라고 하는 것은 따라 일어나고 수행을 돕고 수행에 포함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네 구(句)로 구분되어야 한다.【문】선지라 하는 것은 도품(道品)인가?
【답】초선의 각지(覺支)와 2선의 신지(信支), 3선의 낙지(樂支), 4선의 불고불락지(不苦不樂支) 이것은 도품이 아니다.
【문】어찌하여 도품이 선지가 아니라 하고 또 어찌하여 선지도 도품이라 하는가?
【답】앞에서 말한 선지 이외의 다른 선지는 선지인 동시에 또한 도품이다.
【문】어떤 것이 선지도 아니고 도품도 아닌가?
【답】이 행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문】초선의 선지도 도품인가?
【답】혹 초선의 선지가 도품이 아닌 경우도 있다.
【문】어떤 초선의 선지가 도품이 아닌 것인가?
【답】초선에 있는 각지(覺支) 이것은 도품이 아니다.
【문】어떤 것이 도품이면서 초선의 선지가 아닌가?
【답】신(信)ㆍ염(念)ㆍ정진(精進)ㆍ호지(護持)ㆍ정견(正見)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定命) 이것은 도품이지만 초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도품이기도 한 것인가?
【답】초선의 나머지 선지[觀ㆍ喜ㆍ樂ㆍ一心]는 초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도품이기도 한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도 아니고 도품도 아닌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것이 그것이다.【문】2선(禪)의 선지는 도품인가?
【답】혹 2선의 선지도 도품이 아닌 것이 있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이면서 도품이 아닌가?
【답】2선의 신지(信支) 이것은 2선의 선지이지만 도품은 아니다.
【문】어떤 것이 도품이면서 2선의 선지가 아닌가?
【답】신ㆍ염ㆍ정진ㆍ호지ㆍ정견ㆍ정지(正志)ㆍ정어ㆍ정업ㆍ정명 이것은 도품이지만 2선의 선지는 아니다.【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도품이기도 한가?
【답】2선의 나머지 선지[喜ㆍ樂ㆍ一心]는 2선의 선지인 동시에 도품이기도 한 것이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도 아니고 도품도 아닌가?
【답】위에서 말만 것을 제외한 다른 것이 그것이다.【문】3선의 선지라 하는 것도 도품인가?
【답】혹 3선의 선지도 도품이 아닌 경우가 있다.
【문】어떤 것이 3선의 선지이면서 도품이 아닌가?
【답】3선의 낙지(樂支) 이것은 3선의 선지이기는 하지만 도품은 아니다.
【문】어떤 것이 도품이면서 3선의 선지가 아닌가?
【답】신ㆍ정진ㆍ희ㆍ호지ㆍ정시ㆍ정어ㆍ정업ㆍ정명 이것은 도품이지만 3선의 선지는 아니다.【문】어떤 것이 3선의 선지이기도 하고 도품이기도 한 것인가?
【답】3선의 나머지 선지[輕安ㆍ念ㆍ正智ㆍ一心] 이것은 3선의 선지인 동시에 도품이기도 한 것이다.
【문】어떤 것이 3선의 선지도 아니고 도품도 아닌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것이 그것이다.【문】4선의 선지라 하는 것도 도품인가?
【답】혹 4선의 선지도 도품이 아닌 것이 있다.
【문】어떤 것이 4선의 선지이면서 도품이 아닌가?
【답】4선의 불고불락지(不苦不樂支) 이것은 4선의 선지이기는 하지만 도품이 아니다.【문】어떤 것이 도품이면서 4선의 선지가 아닌가?
【답】신과 정진ㆍ희ㆍ경안(輕安)ㆍ정견ㆍ정지ㆍ정어ㆍ정업ㆍ정명 이것은 도품이지만 4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4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도품이기도 한 것인가?
【답】나머지 4선의 선지[護ㆍ念ㆍ一心]는 4선의 선지인 동시에 도품이기도 한 것이다.
【문】어떤 것이 4선의 선지도 아니고 도품도 아닌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것이 그것이다.【문】선지라 하는 것은 염처(念處:意止)를 말하는 것인가?
【답】혹 선지라 하더라도 염처가 아닌 경우도 있다.
【문】어떤 것이 선지이면서 염처가 아닌 것인가?
【답】초선의 각지(覺支)와 2선의 신지(信支:內淨支), 3선의 낙지(樂支)와 4선의 불고불락지(不苦不樂支) 이것은 선지(禪支)이기는 하지만 염처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염처인데도 선지가 아닌가?
【답】신과 정진ㆍ정어ㆍ정업ㆍ정명 이것은 염처이지만 선지가 아니다.【문】어떤 것이 선지이면서 염처인가?
【답】나머지 선지 이것은 선지이면서 염처이다.
【문】어떤 것이 선지도 아니고 염처도 아닌 것인가?
【답】이것을 제외한 다른 것이 그것이다.
4념처(念處)ㆍ4정단(正斷)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正道) 역시 이와 같다.【문】초선의 선지라 하는 것은 염처에 해당되는가?
【답】혹 초선의 선지라도 염처가 아닌 경우가 있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이면서 염처가 아닌 것인가?
【답】각지(覺支)가 있다. 이것은 초선의 선지이지만 염처가 아니다.
【문】어떤 것이 염처이면서 초선의 선지가 아닌가?
【답】신ㆍ염ㆍ정진ㆍ호지ㆍ정견ㆍ정어ㆍ정업ㆍ정명 이것은 염처를 의미하지만 초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염처이면서 동시에 초선의 선지이기도 한 것인가?
【답】초선의 나머지 선지[觀ㆍ喜ㆍ樂ㆍ一心]는 염처이면서 동시에 선지이기도 한 것이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도 아니고 염처도 아닌 것인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것이 그것이다.【문】2선의 선지라 하는 것도 염처를 뜻하는가?
【답】혹 2선의 선지에도 염처가 아닌 것이 있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이면서 염치가 아닌가?
【답】2선의 신지(信支) 이것은 2선의 선지이기는 하지만 염처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염처이면서 2선의 선지는 아닌 것인가?
【답】신ㆍ염ㆍ정진ㆍ호지ㆍ정견ㆍ정어ㆍ정지ㆍ정업ㆍ성명 이것은 염처이지만 2선의 선지가 아니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이기도 하고 염처이기도 한 것인가?
【답】2선의 나머지 선지[喜ㆍ樂ㆍ一心] 이것은 2선의 선지인 동시에 염처이기도 한 것이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도 아니고 염처도 아닌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것이 그것이다.【문】3선의 선지라 하는 것도 염처인가?
【답】3선의 낙지(樂支) 이것은 3선의 선지이지만 염처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염치이면서 3선의 선지는 아닌 것인가?
【답】신ㆍ정진ㆍ희ㆍ호지ㆍ정견ㆍ정지ㆍ정어ㆍ정업ㆍ정명 이것은 염처이지만 3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3선의 선지이면서 염처인가?
【답】3선의 나머지 선지(輕安支ㆍ念支ㆍ正智支ㆍ一心支) 이것은 3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염처이다.
【문】어떤 것이 3선의 선지도 아니고 염처도 아닌 것인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것이 그것이다.【문】4선의 선지라 하는 것도 역시 염처인가?
【답】혹 4선의 선지에도 염처가 아닌 경우도 있다.
【문】어떤 것이 4선의 선지이면서 염처가 아닌가?
【답】4선의 불고불락지(不苦不樂支) 이것은 4선의 선지지만 염처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염처이면서 4선의 선지는 아닌 것인가?【답】신ㆍ정진ㆍ의ㆍ경안ㆍ정견ㆍ정지ㆍ정어ㆍ정업ㆍ정명 이것은 염처이지만 4선의 선지는 아니다.【문】어떤 것이 4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염처인가?
【답】4선의 나머지 선지[護支ㆍ念支ㆍ一心支] 이것은 4선의 선지인 동시에 염처이다.
【문】어떤 것이 4선의 선지도 아니고 염처도 아닌 것인가?
【답】위에서 말한 행을 제외한 다른 것이 그것이다.
4념처같이 4정단ㆍ4여의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 역시 이와 같다.【문】초선의 선지라 하는 것이 또한 2선의 선지이기도 한가?
【답】혹 초선의 선지가 2선의 선지가 아닌 경우가 있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로서 2선의 선지가 아닌 것인가?
【답】각(覺)ㆍ관(觀)은 초선의 선지이기는 하지만 2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로서 초선의 선지는 아닌 것인가?
【답】2선의 신지(信支) 이것은 이선의 선지로서 초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2선의 선지인가?
【답】나머지 선지[喜支ㆍ樂支ㆍ一心支]는 초선의 선지인 동시에 2선의 선지이기도 하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도 아니고 2선의 선지도 아닌 것인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행이 그것이다.【문】초선의 선지라 하는 것이 3선의 선지이기도 한가?
【답】혹 초선의 선지로서 3선의 선지가 아닌 경우도 있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이면서 3선의 선지가 아닌 것인가?
【답】초선의 세 가지 선지, 즉 각지(覺支)ㆍ관지(觀支)ㆍ희지(喜支) 이것은 초선의 선지로서 3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3선의 선지로서 초선의 선지는 아닌 것인가?
【답】3선의 세 가지 선지, 즉 경안지(輕安支)와 염지(念支)와 정지지(正智支) 이것은 3선의 선지로서 초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이면서 동시에 3선의 선지인가?
【답】나머지 선지[樂支ㆍ一心支] 이것은 초선의 선지인 동시에 3선의 선지이기도 하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도 아니고 3선의 선지도 아닌 것인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행이 그것이다.【문】초선의 선지라 하는 것이 4선의 선지이기도 한가?
【답】혹 초선의 선지로서 4선의 선지는 아닌 경우가 있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로서 4선의 선지는 아닌 것인가?
【답】초선에 존재한 네 가지 선지, 즉 각지(覺支)ㆍ관지(觀支)ㆍ희지(喜支)ㆍ낙지(樂支) 이것은 초선의 선지이지 4선의 선지는 아니다.【문】어떤 것이 4선의 선지이며 초선의 선지가 아닌 것인가?
【답】4선에 존재하는 세 가지 선지, 즉 불고불락지(不苦不樂支)와 호지(護支) 염지(念支) 이것은 4선의 선지이지 초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4선의 선지이기도 한 것인가?
【답】일심지(一心支) 이것은 초선의 선지이기도 하고 또한 4선의 선지이기도 하다.
【문】어떤 것이 초선의 선지도 아니고 4선의 선지도 아닌 것인가?
【답】위에서 말한 행상을 제외한 다른 행이 그것이다.【문】2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3선의 선지이기도 한가?
【답】혹 2선의 선지로서 3선의 선지가 아닌 경우가 있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로서 3선의 선지가 아닌 것인가?
【답】2선에 존재하는 신지(信支)와 희지(喜支)의 두 선지는 2선의 선지일 뿐 3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3선의 건지로서 2선의 선지가 아닌 것인가?
【답】3선에 존재하는 세 가지 선지, 즉 경안지(輕安支)ㆍ염지(念支)ㆍ정지지(正智支) 이것은 3선의 선지일 뿐 2선의 선지가 아니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3선의 선지이기도 한 것인가?
【답】나머지 다른 선지[樂支ㆍ一心支] 이것은 2선의 선지인 동시에 3선의 선지이기도 하다.【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도 아니고 4선의 선지도 아닌 것인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행이 그것이다.
【문】2선의 선지라 하는 것이 4선의 선지이기도 한가?
【답】혹 2선의 선지로서 4선의 선지는 아닌 경우가 있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일 뿐 4선의 선지가 아닌 것인가?
【답】2선의 세 가지 선지, 즉 신지와 희지와 낙지 이것은 2선의 선지일 뿐 4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4선의 선지일 뿐 2선의 선지가 아닌 것인가?
【답】4신에 존재하는 세 가지 선지, 즉 불고불락지와 호지ㆍ염지 이것은 4선의 선지일 뿐 2선의 선지가 아니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인 동시에 4선의 선지이기도 한 것인가?
【답】일심지(一心支) 이것은 2선의 선지이기도 하고 또한 4선의 선지이기도 하다.
【문】어떤 것이 2선의 선지도 아니고 4선의 선지도 아닌 것인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행이 그것이다.【문】3선의 선지라 하는 것이 4선의 선지이기도 한가?
【답】혹 3선의 선지로서 4선의 선지는 아닌 경우가 있다.
【문】어떤 것이 3선의 선지로서 4선의 선지가 아닌 것인가?
【답】3선에 존재하는 세 가지 선지, 즉 의지( 猗支:輕安支)ㆍ낙지(樂支)ㆍ정지지(正智支) 이것은 3선의 선지일 뿐 4선의 선지가 아니다.
【문】어떤 것이 4선의 선지로서 3선의 선지가 아닌 것인가?
【답】4선의 두 가지 선지, 즉 불고불락지와 호지 이것은 4선의 선지일 뿐 3선의 선지는 아니다.
【문】어떤 것이 3선의 선지인 동시에 4선의 선지이기도 한 것인가?
【답】나머지 선지[念支ㆍ一心支] 이것은 3선의 선지이면서 또한 4선의 선지이기도 하다.
【문】어떤 것이 3선의 선지도 아니고 4선의 선지도 아닌 것인가?
【답】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다른 행이 그것이다.【문】초선에 존재하는 각지(覺支) 그것은 왜 도품(道品)이라 내세우지 않는가?
【답】관(觀)을 허물기 때문이다.
【문】2선의 신지(信支)는 왜 도품이라 내세우지 않는가?
【답】2선의 신지라 하는 것은 내부에 연유한 마음이고 도품이라 하는 것은 4제(諦)에 연유한 것이다.
【문】3선의 낙지(樂支)는 왜 도품이라 내세우지 않는가?
【답】경안심(輕安心)에서 즐거움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문】4선의 불고불락지(不苦不樂支)는 왜 도품이라 내세우지 않는가?
【답】호지(護支)하던 것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문】정진(精進)은 왜 선지(禪支)라 내세우지 않는가?
【답】이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수순한다는 것이 지(支)의 내용인데 이 정진이라 하는 것은 정(定)을 방호(防護)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지라 내세우지 아니한다.【문】어떤 것을 정을 수순한다고 하는가?
【답】즐기는 것이 그것이다. 설명에 따르면 즐기게 되면 마음이 안정된다. 즉 중생들이 알뜰하게 정진할 때 그는 조금은 즐거움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문】정어ㆍ정업ㆍ정명은 왜 선지라고 내세우지 않는가?
【답】선지라 하는 것은 서로 호응하고 의지하여 행해지는 자기의 힘과 함께 하는 연을 말하는 것인데 정어ㆍ정업ㆍ정명이라 하는 것은 서로 호응하는 것이 아니며 의지하는 것이 아니며 행이 없으며 자기의 힘이 없고 함께 하는 연이 아니다.【문】왜 초선과 3선에는 다섯 가지 선지가 있고 2선과 4선에는 네 가지 선지가 있는가?
【답】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수순한다는 것이 지(支)의 내용이다. 즉 법의 여러 경지에 따라 그 선정에서 이 선지가 건립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어나는 순서에 따른 것이다. 다섯 선지로부터 다섯 선지에 이르게 되고, 네 가지 선지로부터 네 가지 선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문】3선이라 하는 것은 그 다음에 공처정(空處定)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럴 경우 다섯 선시로부터 정이 일어나서 선지가 없는 공처(空處)로 들어가는 것이니, 어떻게 수순한다고 할 수 있는가?
【답】모든 안팎의 일은 마땅히 처음 작용할 때 순서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자면월덕왕(月德王)과 차륵대신(遮勒大臣)이 12년을 수학하다가 하나의 금환(金丸)을 성취한 다음에 사자후(師子吼)로 외치기를 “우리들은 모든 땅을 금으로 화하게 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또한 가령 수행하는 사람이 신족지(信足智)를 증득하여 신통력을 이를 때 처음에는 신통력을 수습하는 것이 그 신족통(神足通)의 거리가 깨알처럼 작다가 곧 한 치로 불어나고 네 치로 더 불어나고, 한 자ㆍ두 자ㆍ다섯 자ㆍ열 자ㆍ열두 자ㆍ열여덟 자ㆍ스물네 자로 더욱더 불어나서 마침내 신족(神足)의 지혜를 증득하여 신통력을 이루게 되면 한 번 생각만 일으키면 마침내는 유정천(有頂天)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이 초월삼매(超越三昧)에 들어가는 때라도 마땅히 처음 작용할 때의 순서를 따라서 다섯 선지[初禪]에서 다음 다섯 선지[三禪]에 이르고 네 선지[二禪]에서 다음 네 선지[四禪]로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욕계에서는 끊기 어렵고 깨뜨리기도 어렵고 건너가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 사연으로 인한 까닭에 초선에 다섯 개의 선지가 있다고 내세운 것이다. 초선의 경지에서는 번뇌를 끊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깨뜨리기 어려운 것도 아니며 건너가기도 쉽다. 그런 까닭에 2선에서는 네 개의 선지를 내세운 것이다. 2선의 불선(不善:染汚)한 희각지(喜覺支)는 끊기도 어렵고 깨뜨리기도 어렵고 건너기도 어렵다. 그런 이유로 3선에서는 다시 다섯 가지 선지를 내세운 것이다. 3선의 경지에서는 급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깨뜨리기 어려운 것도 아니며 건너가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4선에서는 네 가지 선지를 내세운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욕계에서는 5욕(欲)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초선에서는 5지(支)를 건립한 것이니, 초선에서는 얻을 수 있는 5욕이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2선에서는 4지를 건립한 것이며, 2선에서는 애착과 상응하는 다섯 가지 희각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3선에서는 다시 5지를 건립한 것이며, 3선의 경지에 들어가면 애착과 상응하는 다섯 가지 희각지는 없어진다. 그런 이유로 4선에서는 다시 4지를 건립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선과 3선에는 5지를 건립하고 2선과 4선에서는 4지를 건립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문】초선의 경우에도 믿음은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왜 신지(信支)는 초선에는 내세우지 아니하고 2선에 건립한 것인가?
【답】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수순한다는 것이 선지(禪支)의 내용이다. 즉 정에 수순한 여러 정지(定地)를 본받아 선지를 건립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처한 위치를 말한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지극히 믿는 경계[信界]에서 탐욕을 버리고, 지극히 믿는 경지[信地]에서 탐욕을 버리게 된다. 즉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이 욕계에서는 여러 가지 악한 일이 많았는데 욕심을 제거하고 나서는 생각하기를 ‘나는 이미 이 안정되지 아니한 경계를 건너서 탐욕이 제거되었다’라고 하고서 그의 마음이 지극히 안정된다. 그리하여 그는 ‘나는 욕계에서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그 행상(行相)이 처한 위치에서 그 경계를 지극히 믿어 탐욕을 버리기에 그 정지(定地)를 지극히 믿어 탐욕을 버린다고 일컫는다. 그런 까닭에 신지(信支)는 2선의 선지로 건립하고 초선의 선지로는 건립하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문】경안지(輕安支)의 경우 모든 경지에서 모두 얻을 수 있는 마음인데 왜 3선의 선지라고 내세운 것인가?
【답】이것도 앞에서 이미 설명만 바와 같이 정(定)에 수순한 여러 정지(定地)를 본받아 선지를 건립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2선에서의 더럽게 물든 애착심은 안정되지 못한 마음이라 나찰(羅刹)이 될 종자를 얻을 수 있다. 즉 수행하는 사람이 3선의 경지에서 물러서게 되면 부처님은 ‘마땅히 멈추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까닭에 경안지는 3선의 선지라고 내세우고, 다른 경지에는 내세우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문】경안지와 호지(護支)의 경우 모든 경지에서 모두 얻을 수 있는 마음인데 왜 경안지는 3선의 선지라 내세우고 호지는 4선의 선지라고 내세운 것인가?
【답】서로 상대의 선지를 허물기 때문이다. 홀가분하게 편안한 마음을 지키겠다는 마음을 허물기 때문에 호지는 3선의 경지에서는 내세우지 아니하며, 지키는 마음은 홀가분한 마음을 허물기 때문에 경안지는 4선의 경지에서는 내세우지 아니한다.【문】어찌하여 이렇게 법이 서로 상대를 허물게 되는가?
【답】홀가분하게 편안하다는 것은 능히 멈출 수 있는 마음이며, 지킨다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극히 서로 어긋나는 마음이다. 마치 여러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떠나고 어떤 사람은 머물고 어떤 사람은 잠들고 어떤 사람은 깨어나는 것과 같아서 이것은 극히 서로 어긋나는 행동이다. 이와 같이 홀가분한 마음은 능히 멈출 수 있는 마음이며, 지기는 마음은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는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은 극히 서로 어긋나는 마음이니, 이것을 서로 허문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경안지는 3선의 선지로 건립하고 호지(護支)는 4선의 선지로 건립한 것이다.【문】염지(念支)와 정지지(正智支)의 경우 모두 4선의 경시에서 얻을 수 있는 마음인데 왜 염지는 4선의 선지라고 내세우고 정지지는 4선의 선지라고 내세우지 않는가?
【답】3선의 경지에서는 도(道)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 자기의 경지도 어지럽히게 된다. 도를 어지럽힌다고 하는 것은 2선의 경지에서의 더럽게 물든 기쁨은 안정되지 못한 마음이며 나찰과 같은 마음이라서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3선의 경지에서 물러서게 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바른 생각으로 2선의 기쁨 때문에 3선의 경지에서 물러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의 경지를 어지럽힌다고 하는 것은 3선의 경지의 즐거움은 모든 생사윤회 가운데서 가장 미묘한 즐거움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알아야 한다. 이 즐거움에 집착하여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는 안 되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선의 경지에는 비록 도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자기 경지를 어지럽히는 일만은 없다. 4선에서 도를 어지럽힌다고 하는 것은 3선 가운데서 생기는 즐거움은 생사윤회 가운데 가장 미묘한 즐거움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바른 염원[正念]을 세워 이 3선의 경지의 즐거움에 집착하여 4선의 경지에서 물러서지 아니하게 하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이다.
자기 경지를 어지럽히는 마음이 없는 것은 바른 지혜[正智]라 할 수 있으며, 이 지혜로 집착하지 않아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없게 하시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추게 되니, 그 까닭으로 염지와 정지지를 3선의 선지라 내세우고, 4선에서는 염지만 내세우고 정지지는 내세우지 아니하는 것이다.【문】이 가운데 어떤 것을 선(禪)이라 말하고 어떤 것을 선지라 하는가?
【답】선이라 하는 것은 정(定)을 말하는 것이고, 선지라 하는 것은 나머지 다른 법을 말하는 것이다.
【문】그대의 설명에 따른다면 마땅히 초선과 3선에는 네 가지 선지가 있어야 하고, 2선과 4선에는 세 가지 선지만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답】정(定)이라 하는 것은 선인 동시에 또한 선지이기도 하다. 나머지 다른 지는 비록 선지라 할지라도 그것은 선은 아니다.
마치 바른 견해[正見]는 도(道)이면서 도지(道支)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다른 것은 비록 도지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도는 아닌 것과 같다. 또 비유하면 택법각의(擇法覺意)는 각의(覺意)이면서 각지(覺支)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다른 것은 비록 각지일지라도 그 자체가 각의는 아닌 것과 같다. 또한 정은 신(神)인 동시에 신족(神足)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다른 것은 비록 신족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가 신은 아닌 것과 같다. 또 때가 아니면 먹지 아니하는[非時不食] 계율은 재(齋)인 동시에 재지(齋支)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규율은 비록 재지일지라도 그 자체가 재는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정은 선인 동시에 선지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다른 지(支)는 비록 선지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선은 아니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4선은 현법락주(現法樂住)의 처소다”라고 하셨다.【문】무슨 이유로 부처님께서 “4선은 현법락주의 처소다”라고 말씀하셨는가?
【답】범부는 법이 나타나면[現法] 마음속에서 헤아려 즐거운 생각에 집착하여 그것을 버리고서 욕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권고하여 욕계의 결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부처님은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즉 그들이 조금 즐거운 것에 집착하여 욕계의 결을 버리고자 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약 궁극적으로 넓고 무량한 즐거움을 받고자 한다면 곧 욕계의 결을 버려야 하고, 그러면 정의 근본지(根本地)가 눈앞에 나타나서 그 가운데서 무량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이것이 범부는 법이 나타나면 마음속으로 헤아려 즐거운 생각에 집착하여 욕계를 버리고 벗어나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권유하여 욕계의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4선은 헌법락주하는 처소다”라고 하신 내용이다.【문】이와 같은 경지는 후세에서도 안락하게 노닐 곳인데 왜 부처님은 후세에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현재의 법으로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하셨는가?
【답】이것은 마땅히 현재의 법으로 안락하게 노닐 곳과 같이 후세에도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고 말씀하셔야 한다. 만약 아직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면 부처님께서 다른 말씀이 계셨을 것이다. 이는 이치와 이치에 들어가는 법문[義門]을 간략히 드러낸 것이니, 이를 알아야 한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미 현재의 법으로 안락하계 노닐 곳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이는 이미 후세에도 안락하게 노닐 곳임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재의 법으로 안락하게 노닐 곳은 원인에 해당하고, 후세에 안락하게 노닐 곳 이것은 결과에 해당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처럼 이미 지어진 것과 곧 지어질 것, 이미 이루어진 것과 곧 이루어질 것, 이미 생긴 것과 곧 생기게 될 것, 이미 이어진 것과 곧 이어지게 될 것 등의 관계도 이와 같이 추리하면 모두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재의 법으로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한 것은 가까운 것을 말한 것이고, 후세에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하는 것은 먼 법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재의 법으로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하는 것은 거칠고 큰 경계를 말한 것이며, 후세에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하는 것은 미세한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굵고 미세한 것처럼 볼 수 있는 경계와 볼 수 없는 경계, 나타낼 수 있는 경계와 나타낼 수 없는 경계도 이와 같이 추리하면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현재의 법이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하는 것은 모든 후세에 안락하게 노닐 곳은 아니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재의 법으로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하는 것은 모든 성인의 경계를 말한 것이나 후세에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하는 것은 모든 성인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범부와 지혜 있는 사람이 이 법과 그 밖의 법에 대하여 혹 후세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후세에 안락하게 노닐 곳을 믿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4선은 현법락주하는 처소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부처님은 “4선은 음식[食]과 같다”라고 하셨다.【문】부처님은 왜 4선을 음식과 같다고 하셨는가?
【답】오래도록 법신을 길러내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음식이 오래도록 중생들을 길러내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선(禪)도 법신을 오래도록 길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4선은 음식과 같다”라고 하신 내용이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하신 말씀에 따른다면 “4선은 좌석에 앉는 일에 해당한다”라고 하셨다.【문】왜 부처님은 “4선이 좌석에 앉는 일에 해당한다”라고 하셨는가?
【답】높고 넓기 때문이다. 높다는 것은 욕계에서 벗어났기 매문이며, 넓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는 법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문】왜 좌석에 앉는다[坐座]고 표현하였는가?
【답】모든 성인은 생사윤회에 피로한 사람들에게 생사의 피로를 제거하여 주기 때문에 “4선이 좌석에 앉는 일에 해당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극도로 피로하면 앉아서 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성인들도 생사에 피로할 때 좌선으로 휴식하고 나면 생사의 피로가 제거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4선은 좌석에 앉는 일에 해당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4선은 네 가지 공덕에 해당하며, 4무색처정(無色處定)은 하나의 공덕에 해당한다”라고 하셨다.【문】왜 부처님은 4선을 네 가지 공덕이라 하시고, 4무색처정은 하나의 공덕이라 하셨는가?
【답】선이라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고 수많은 모습이 있어 서로 닮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마다 거기에 따른 공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무색처정(無色處定)이라 하는 것은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서로 닮지 아니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무색처정을 합쳐서 하나의 공덕이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이라 하는 것은 온갖 공덕으로 장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선이 합쳐지게 되면 한 공덕이라 말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이라 하는 것은 묘한 법이 많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하나하나의 법에 얽힌 공덕을 말하게 되지만 무색정이라 하는 것은 많은 묘한 법이 없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것을 합쳐서 하나의 공덕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이라 하는 것은 거칠고 볼 수 있고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그 하나하나의 선마다 공덕을 말하게 되지만 무색처정은 미세하여 볼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것을 합쳐서 하나의 공덕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4선은 네 가지 공덕이 되나 4무색처정은 하나의 공덕이 된다”라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계경에서의 설법에 따르면 “말나식(末那識)은 네 가지의 증상심(增上心)이며 현법락주처이다. 비구들이여, 선(禪)이 일어나게 되거든 나는 말하나니, 곧 말나식으로 환입(還入)하거라. 4선이 멎어 여기서 벗어나면 색계에서 무색계로 들어가게 되리라. 비구들이여, 여기서 건이 일어나거든 나는 말하나니, 그 사람을 이렇게 가르치거라”라고 하셨다.【문】부처님은 왜 “4선이 일어나거든 곧 말나식으로 환입해야 하니 4무색(無色)이 일어나거든 그 사람을 이렇게 가르치거라”라고 말씀하셨는가?
【답】이 4선이라 하는 것은 갖가지로 수많은 모습이 있어 서로 비슷하게 닮은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말나식으로 환입하게 한 것이다. 무색이라 하는 것은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며 수많은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비슷하게 닮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4선이 일어나 다시 환입하지 않는 경우,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약 4선이 일어나 환입하지 않는 경우 이 사람을 들어가도록 가르치거라. 이 사람을 가르쳐서 그 사람의 마음에서 입심(入心)을 일으켜 잊지 않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이라 하는 것은 온갖 공덕으로 장엄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 4선이 일어나는 경우 유심정에 환입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무색의 경우에는 온갖 공덕으로 장엄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는 무색정이 일어나서 환입하려 하지 않는 경우 ‘만약 환입하려 하지 않는다면 환입하도록 가르쳐라. 환입하도록 가르쳐서 그 사람의 마음에 입심을 일으켜 잊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이라 하는 것은 묘법(妙法)이 많다.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 4선이 일어나는 경우 다시 유심정에 환입하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무색의 경우에는 많은 묘법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 무색정이 일어나 환입하지 않는 경우,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약 환입하려 하지 않는다면 환입하도록 가르쳐라. 환입하도록 가르쳐서 그 사람의 마음에 입실을 일으켜 잊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이라 하는 것은 거칠고 억센 선정이라서 볼 수도 있고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성인께 4선이 일어나는 경우 다시 환입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무색의 경우에는 미세하여 볼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성인께 무색정이 일어나 환입하지 않는 경우,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약 환입하려 하지 않는다면 환입하도록 가르쳐라. 환입하도록 가르쳐서 그 사람의 마음에 입심을 일으켜 잊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4선이 일어나면 다시 환입한다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설법하신 내용에 따르면 “4선이라 하는 것은 증상(增上)의 일념(一念)이다”라고 하셨다.【문】왜 부처님은 4선이 증상의 일념이라 하셨는가?
【답】모든 경지에 근본지(根本地)처럼 그 세력과 공덕이 견고한 정이 없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4선은 증상의 일념을 지닌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4선 가운데서는 진여의 무량한 등해탈(等解脫)로 나가는 증상(增上)의 심과 심소법을 얻을 수 있어 모든 입(入)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4선을 증상의 일념이라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성인들은 이 가운데 있는 증상문(增上門)에서 즐거움을 받아 진여의 무량등문(無量等門)에서 해탈하고 입을 없애서 입의 문을 제거한다. 그런 까닭에 4선은 증상의 일념이라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4선은 모든 천신(天神)들이 하늘에서 닦는 도(道)로써 아직 청정하지 못한 중생은 곧 청정해지고 이미 청정한 중생은 곧 그 청정함이 더해지는 길이다”라고 하셨다.【문】이 말씀은 증득했기 때문에 4선의 하늘에서 닦는 도의 자취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아니면 유루가 다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만약 득한 까닭에 4선이 천도(天道)라고 하셨다면 마땅히 여섯 경지에서 증득을 얻었어야 한다. 즉 미지정(未至定:未來禪)과 중간정(中間定)과 4선의 근본정 등 여섯 경지가 그것이다. 또 만약 유루가 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응당 아홉 경지에서 번뇌가 다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위에서 말한 여섯 경지와 무색(無色)의 세 경지가 그것이다.
【답】증득한 까닭이기도 하고 또한 유루가 다하기 때문에 4선은 하늘의 도(道)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문】만약 그렇다면 무색은 그만두더라도 마땅히 여섯 경지에 하늘의 도가 있어야 할 것인데 왜 부처님은 4선이 모든 천신들이 하늘에서 닦는 도라고 말씀하셨는가?
【답】존자 구사는 설명하기를 “권속(眷屬)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4선이 하늘의 도라고 말씀하셨다. 중간정과 미지정에 근거하는 것 이것은 초선(初禪)이 거느리는 권속이다. 이것을 두고 권속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4선은 모든 천신들이 닦는 하늘의 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존자 바사는 설명하기를 “여기서 말하는 하늘이라 하는 것은 정천(淨天)을 말한 것이다. 하늘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작천(作天)과 생천(生天)과 정천(淨天)의 세 종류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직전이라 하는 것은 하늘의 왕과 같은 존재며, 생천이라 하는 것은 사천왕(四天王)에서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有頂天)이라 하는 것은 아라한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아라한이라 하는 위치는 이 가운데 견도(見道)와 사유도(思惟道)의 두 길이 잇다. 또한 인도(忍道)와 지도(智道)ㆍ법지도(法智道)와 미지지도(未知智道) 등 두 종류의 도가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늘이라 말한 것은 정전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도가 도를 즐기는 경지에 이르게 되고, 도가 구경(究竟)의 도에 이르게 되고, 도가 정천에 미치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법 가운데는 크게 미묘한 일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전륜왕(轉輪王)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을 때 큰 바다의 물이 솟아올라 놀이가 1유순(由旬)이나 뻗어 전륜왕의 도를 몰랐다. 그런 까닭에 아무도 전륜왕의 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전륜왕이 세상에 나온 뒤에는 그때 큰 바다의 물이 1유순이나 줄어들어서 전륜왕의 도로써 곧 청정한 금모래를 아래로 깔았고 전륜왕이 네 종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천하를 안무(按撫)하며 다녔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아직 세상에 나오시지 아니하였을 때는 4선의 근본정을 알지 못하여 중생들이 결(結)을 제거하려 하여도 4선의 근본정이나 무색이 아니니 제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 후에는 곧 4선의 근본정을 알게 되었고 부처님은 한량없는 권속을 교화하시어 번뇌가 모두 소멸한 열반에 들게 하였다. 이것이 불법 가운데는 크게 미묘한 일이 나타나기 때문에 4선은 모든 천신들이 하늘에서 닦는 도라고 하는 이유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천도(天道)에 태어나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제일가는 천도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하늘에 태어나는 것에는 삼십삼천(三十三天)이 있다. 그 내용을 설명하자면 삼십삼천에는 네 곳에 경치 좋은 정원이 있다. 첫 번째 정원은 종종(種種)이라 부르고, 두 번째 정원은 환락(歡樂)이라 부르며, 세 번째 정원은 추삽(麤澁)이라 부르고, 네 번째 정원은 잡사(雜肆)라 부른다. 그 경치 좋은 정원 안의 땅에는 네 가지 계단의 길이 있고, 거기에는 수많은 여러 가닥의 길이 있다. 남녀와 아름다운 여인의 무리가 유희하며 온갖 향과 온갖 놀이와 음악ㆍ꽃ㆍ음식이 풍성하게 가득 차 있고, 온갖 날아다니는 새와 오리ㆍ기러기ㆍ원앙새들이 슬피 울면서 서로 화답하여 삼십삼천의 헤아릴 수 없는 문과 헤아릴 수 없는 건널목으로 하여금 5욕의 즐거움을 받게 하고, 그 일이 끝나게 되면 그 경치 좋은 정원 속에 들어가게 된다.이와 같이 불법 가운데서 말하는 멸진열반(滅盡涅槃)이라 하는 것은 삼심삼천의 네 곳의 경치 좋은 정원과 같은 것으로 치 가운데 마련되는 4선은 정원 가운데 있는 네 계단의 길과 같은 것이며 열반의 무애도(無礙道)와 해탈도(解脫道)는 정원 안의 많은 남녀와 같은 것이고, 신통도(神通道)는 아름다운 여인의 무리가 유희하는 것과 같고, 성인의 갖가지 계율은 정원 안의 갖가지 향과 같은 것이며, 네 가지ㆍ다섯 가지의 선지(禪支)의 즐거움은 갖가지 놀이, 음악의 즐거움과 같은 것이며, 깨달음의 길에 피는 꽃은 정원 안에 생기는 갖가지 꽃과 같은 것이며, 열반의 탐욕 없는 기쁨과 위없는 법의 장물[法漿]은 정원 안에 마련된 갖가지 음식이 풍성하게 가득한 것과 같은 것이며, 학(學)ㆍ무학(無學)의 경지는 온갖 날아다니는 새ㆍ오리ㆍ기러기ㆍ원앙새가 슬피 울면서 서로 화답하는 것과 같고 그 성인으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법문과 헤아릴 수 없는 제도(濟度)로 성인의 즐거움을 받게 하여 멸진열반에 들게 하는 것은 경치 좋은 정원에 들어가는 일과 같다. 이것이 천도(天道)에 태어나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최상의 천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4선은 모든 천신들이 닦는 천도며, 아직 청정하지 못한 중생은 곧 청정해지고, 이미 청정한 중생은 그 청정함이 더해진다’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것이 4선의 이치인가? 이는 비구가 탐욕과 악ㆍ불선법에서 떠나 느낌이 있고[有覺] 관하는 것이 있어서[有觀] 생멸(生滅)을 벗어난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것을 말한다.
초선의 수행이 이루어져 노니는 그곳은 탐욕과 악ㆍ불선법을 떠나는 경지다.【문】벗어날 경우 모든 욕계에서 벗어난다고 하여야 할 것인데 부처님은 왜 다만 탐욕과 악ㆍ불선법에서 벗어난다고 말씀하셨는가?
【답】부처님께서 이미 욕망과 불선법에서 벗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미 모든 욕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탐욕과 악ㆍ불선법은 허물기 어렵고 깨뜨리기 어렵고 건너가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마땅히 탐욕과 악ㆍ불선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탐욕과 악ㆍ불선법은 아주 큰 근심거리며 극히 무거운 허물이며 모든 악한 일이 많은 곳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마땅히 ‘탐욕과 악ㆍ불선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다하고 나면 다시는 성취하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니, 성인의 도는 그것과는 서로 어긋난다. 성인의 도라는 것은 유루의 선법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은몰무기(隱沒無記)와도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탐욕과 악ㆍ불선법과 서로 어긋날 따름이다. 탐욕과 악ㆍ불선법을 버리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악한 것을 버리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등불은 심지와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며 기름도 아니고 등잔도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어둠과 서로 어긋날 따름이다. 어둠을 제거하게 되었을 때는 심지도 타오르고 기름도 소비되고 그릇도 뜨거워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인의 도도 그 등불은 유루의 선법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은몰무기의 마음과도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탐욕과 악ㆍ불선법과 서로 어긋날 따름이다. 탐욕과 악ㆍ불선법을 버리게 되었을 때 그때는 모든 것을 버리게 된다. 이것을 두고 ‘처음 다하면 다시는 성취되지 아니하니, 성인의 도는 그것과는 서로 어긋나는 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탐욕과 악ㆍ불선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탐욕과 악ㆍ불선법을 끊고자 하기 때문에 초선의 경지의 도를 닦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탐욕과 악ㆍ불선법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탐욕과 악ㆍ불선법에서 벗어날 때는 모든 욕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부처님은 탐욕과 악ㆍ불선법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탐욕과 악ㆍ불선법이라 하는 것은 높은 경지의 행이 아니며 높은 경지를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탐욕과 악ㆍ불선법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문】탐욕과 악ㆍ불선법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탐욕이며 또 어떤 것이 악하고 좋지 못한 법인가?
【답】욕망이라 하는 것은 5욕(欲)을 말한 것이며 악ㆍ불선법이라 하는 것은 노여운 생각ㆍ해칠 생각을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망이라 하는 것은 욕각(欲覺)이며, 악ㆍ불선법이라 하는 것은 노여운 느낌[恚覺], 해치려는 느낌[害覺]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을 말하기를 “욕망이라 하는 것은 5욕으로 인한 유루를 말하는 것이며, 악ㆍ불선법이라 하는 것은 나머지 다른 유루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망이라 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流]을 말하는 것이며, 악ㆍ불선법이라 하는 것은 나머지 다른 흐름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망이라 하는 것은 욕망이 앞을 가로막는 것을 말한 것이며, 악ㆍ불선법이라 하는 것은 나머지 다른 장애가 앞을 가로막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망이라 하는 것은 욕망에 대한 애착을 말한 것이며, 악ㆍ불선법이라 하는 것은 나머지 다른 애착심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망이라 하는 것은 욕망이 마음을 덮은 것[欲蓋]을 말한 것이며, 악ㆍ불선법이라 하는 것은 나머지 다른 번뇌가 마음을 덮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망이라 하는 것은 현욕애(現欲愛)를 말한 것이며, 악ㆍ불선법이라 하는 것은 이것이 곧 애착심이다. 그 좋지 못한 인연 이것을 애착하는 까닭에 악ㆍ불선법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을 욕망이라 하고, 이것을 악ㆍ불선법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욕망과 악ㆍ불선법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다음 느낌도 있고[有覺], 관하는 것도 있다[有觀]라고 한 것은 느낌과 함께 하고 관하는 일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느낌도 있고 관하는 것도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다음 “생멸을 벗어난 희(喜)ㆍ낙(樂)의 무량심[離生喜樂]”이라 한 것은 악한 법을 벗어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마치 물에서 태어나면 수생(水生)이라 부르고, 육지에서 태어나면 육생(陸生)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악법을 벗어난 세계에 태어나기 때문에 생멸을 벗어난 희ㆍ낙의 무량심이라 표현한 것이다.【문】상지(上地)에서 결을 벗어날 경우 그것이 최상의 묘한 벗어남이 될 것인데 왜 초선의 경지에서만 원리(遠離)를 말하고 다른 경지에서는 말하지 않는가?
【답】비로소 얻게 되고 처음 얻게 되기 때문에 초선의 경지에서 원리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의심이 나타나면 거기에 결정을 내린다. 초선은 욕계와 지극히 가까운 경지다. 가깝기 때문에 이와 같이 욕계에서 호귀(豪貴)한 곳, 권속(眷屬)을 거느리는 곳이 마련되면 초선에서도 그렇게 된다. 이와 같이 욕계에 신식(身識)이 있다면 초선도 그렇다. 욕계에 느낌이 있고 관한 것이 있게 되면 이와 같은 일은 초선에서도 그렇게 된다. 욕계에 호흡이 있다면 이와 같은 일은 초선에서도 그렇게 된다. 그것이 욕계를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의심에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초선은 욕계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그런 까닭에 수행하는 사람이 욕계에 존재하는 많은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나면 초선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마음이 지극히 기뻐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여기서 또 진지(盡智)나 무생지(無生智)를 얻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근(苦根)ㆍ우근(憂根)을 제거하고 뉘우침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제거하고 음식물에 대한 욕심, 음탕한 애욕을 제거하게 되는 까닭에 부처님은 초선의 경지에서 욕계를 벗어난다고 말씀하셨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초선의 경지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자기 경지 가운데 있는 세 가지 유루지(有漏地)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초선의 경지에서 욕계를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상지의 원리가 방편의 분이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초선의 세 가지 행(行)이라 하는 것은 증(證)하여 과보를 얻고 욕심이 없어져 유루가 다하게 되지만 첫째는 속박이 갖추어져 있고, 두 번째는 갑절로 탐욕을 버리게 되며, 세 번째는 음욕을 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욕계에서 벗어난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초선에서도 37도품을 갖추어 얻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초선이 벗어나는 경지에 해당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생(生)을 벗어난 기쁨과 즐거움이라 말하는 것이다. 초선이라 하는 것은 순서로 봐서 그 작용이 처음에 해당되기 때문이니, 여기서부터 순차적인 작용의 처음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한 차례로 순서에 따라 삼매(三昧)가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초선이라 말하는 것이다.
노니는 곳이 성취된다고 하는 것은 이 가운데서 선(善)한 5음이 찾아와 성취를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노니는 곳이 성취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비구가 각(覺)ㆍ관(觀)이 멎어 마음이 청정해지지만 그 일심에 각ㆍ관은 없어지고 정(定)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이 생긴다. 2선(禪)에서 노니는 곳이 성취되면 거기에 존재하는 각ㆍ관도 멎는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 경지에서는 거칠고 미세한 마음의 작용이 다하였기 때문이다.【문】이와 같이 작용이 멎는 것은 모든 초선의 선지(禪支)에 모두 해당되는 것인데 왜 각지(覺支)ㆍ관지(觀支)만 멎는다고 하는가?
【답】이미 각지ㆍ관지가 멎는다고 하였다면 모든 초선의 선지도 모두 멎는다는 것을 이미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각지ㆍ관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끊기 어렵고 깨뜨리기 어렵고 건너가기 어렵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거칠고 미세한 선정을 방해하는 마음의 작용이 멎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초선의 선지의 작용도 멎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거칠고 미세한 선정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다고 해서 높은 수행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마땅히 정성껏 그 작용이 멎게 하여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거칠고 미세한 선정을 방해하는 작용을 멎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내부가 청정하다[內淨]라는 것은, 내부란 마음이고 청정하다는 것은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내부의 청정을 말하는 것이다.존자 바수밀은 설명하기를 “내부의 청정에 어떤 이치가 있는가? 이에 대답하자면 각ㆍ관이 있는 마음이 자리잡게 될 때는 탁한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각ㆍ관이 멎게 되면 문득 마음이 청정해진다. 비유하면 그릇 속에 물을 담아놓고 만약 뜨겁게 끓어오르게 하면 물이 탁해져서 안정되지 아니하여 얼굴 모습을 볼 수 없으나 만약 물이 맑고 시원하여 끓어오르지 아니하고 탁하지 아니하게 되면 곧 안정되어 얼굴 모습이 보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각ㆍ관이 있는 마음이 자리를 정할 때는 탁한 마음이 생겼다가 각ㆍ관이 멎게 되면 곧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거듭 설명하기를 “각ㆍ관이 있는 마음이 자리잡았을 때는 마음을 제어(制御)해야 하지만 각ㆍ관이 멎게 되면 마음이 곧 청정해진다. 비유하면 물에 용솟음치던 물결이 멎게 되면 물은 곧 맑아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각ㆍ관이 있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을 때는 제어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각ㆍ관이 멎게 되면 마음이 곧 청정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내부가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다음 일심(一心)이라 하는 것은 욕계에서는 전육식(前六識)의 6식신(識身)이 있고, 초선의 경지에서는 네 가지 안ㆍ이ㆍ식ㆍ의의 4식신(識身)이 있으며, 2선(禪)의 경지에서는 한 가지 의(意)의 1식신(識身)이 있다. 그래서 의식만 있는 경지이기 때문에 일심이라 말하는 것이다.
각지ㆍ관지도 없다고 한 것은 각ㆍ관과 함께 하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에 각지ㆍ관지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정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긴다고 한 것은 초선의 경지는 정(定) 가운데서 생기기 때문에 정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긴다고 말한 것이다.【문】초선의 경우에도 정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2선에서 정을 말하게 되는가?
【답】초건의 경지의 정 때문에 2선의 경지의 정을 말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2선의 경지의 정이라 하는 것은 초선의 경지의 정 가운데서부터 생기고 초선의 경지 안의 정에서부터 유래하여 초선의 경지의 정으로부터 자라나고 길러져서 초선의 정의 힘으로 전환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초선의 경지는 욕계와 지극히 가깝다. 지극히 가까운 까닭에 이 욕계에는 호귀(豪貴)한 곳, 권속을 거느리는 곳이 마련되었음을 알고 초선에서도 역시 그렇게 된다. 이와 같이 욕계에서 신(身)ㆍ식(識)이 눈앞에 나타나면 초선에서도 역시 그렇게 되며, 이와 같이 욕계에서 각ㆍ관이 존재하게 되니 초선에서도 그렇게 되고, 이와 같이 욕계에서 숨을 내쉬고 들이쉬니 초선에서도 역시 그렇게 된다. 초선 이것은 어지럽혀져서 안정되지 아니한 경지다. 그러나 2선의 경지에는 이 어지럽히는 일이 없고 그것이 안정되면서 정에 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2선이라 하는 것은 이근(耳根)의 바탕을 떠난 경지다. 이근의 바탕이라 하는 것에는 거칠고 미세한 선정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다. 설명에 따르면 거사(居士)가 거칠고 미세한 마음의 작용이 있는 뒤에 말하기를 ‘2선은 이근의 바탕을 벗어난 경지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2선이라 하는 것은 현인ㆍ성인의 말없는 경지다. 설명에 따르면 비구로서 현인ㆍ성인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말없이 묵연해지는 경지는 2선이 여기에 해당한다. 2선은 현인ㆍ성인의 말없는 경지다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린 까닭에 점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이다.두 번째는 선의 순서에 있어 법수(法數)에 문득 두 가지 순서와 차례가 있고 그 작용도 두 가지가 있다. 또한 차례에 따라 삼매가 일어나기 때문에 2선이라 말하는 것이다.
노니는 곳이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2선의 경지에는 선(善)한 5음이 찾아와서 성취를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노니는 곳이 성취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비구가 희욕(喜欲)을 벗어나면 노닐 곳을 구하는 일이 없고 생각이 바른 지혜에 머물러 몸이 즐거움을 받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성인은 염원을 버린 안락하게 노니는 곳이라 말한다.
3선에서 성취되는 노니는 곳은 희욕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2선의 기쁨을 끊은 경지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문】벗어나는 것을 말할 경우 모든 2선의 욕망을 벗어나게 되는 것인데 왜 희지(喜支)만 벗어난다고 하는가?
【답】이미 희지의 욕망을 벗어났다고 말한다면 이미 모든 2선의 욕망에서 벗어났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기쁨은 근심을 이루어 극히 무거운 허물이 많고 여러 가지 악한 것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희지(喜支)에서 벗어날 경우 모든 2선의 선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기쁨이라 하는 것은 상지(上地)의 행이 아니기에 상지에서는 얻을 수 없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정성껏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런 까닭에 희욕(喜欲)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노닐 곳을 구하는 마음이 없어진다고 한 것은 이미 3선의 즐거움을 얻게 되면 다른 것을 구하는 마음은 없어지는 것을 말한 것이다. 생각이 머문다[念住]고 한 것은 3선의 즐거움을 지키기 때문이다.
바른 지혜라 한 것은 3선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몸에 즐거움을 받는다고 한 것은 스스로 두 종류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즉 마음이 가볍고 홀가분한 즐거움과 감각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그것을 성인은 버리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 것은, 말한다[說]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고, 버린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번뇌를 놓아버리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문】성인의 경우 모든 경지에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또한 자기의 결(結)을 놓아버리게 되는데 왜 오직 3선에서만 그것을 말하는가?
【답】3선의 도에 어지러움이 있게 되면 자기의 경지에도 어지러움이 있게 된다. 도에 어지러움이 있다고 하는 것은 2선의 경지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 기쁨에 물들면 나찰(羅刹)과 같이 도를 어지럽혀서 수행하는 사람을 3선의 경지에서 물러서게 한다. 이것이 도를 어지럽히는 일이다. 자기 경지도 어지럽힌다고 하는 것은 3선의 경지는 모든 생사윤회에서 가장 묘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이것을 자기 경지를 어지럽히는 일이라 한다.성인은 처음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바른 염을 세워서 그곳에 머물러 2선의 기쁨으로 3선의 경지에서 물러서지 말도록 했으며, 여기서도 역시 마땅히 바른 염을 세워 3선 가운데서 즐거움에 집작함으로써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신 것이다. 비유하면 장사꾼의 우두머리가 처음 장사길에 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어느 지방에는 음탕한 여자의 집이 있고, 어느 곳에는 놀음하는 집이 있고, 어디쯤에는 술집이 있으니, 그런 집에 들어가서 온갖 재물을 잃지 않도록 가르쳐주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성인도 처음 수행하는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마땅히 바른 염에 머물러 2선의 경지의 기쁨 때문에 3선의 경지에서 물러서지 말게 하고 3선의 경지에서도 역시 마땅히 바른 깨달음으로 그 가운데서 즐거움에 집착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인은 3선을 버리라고 설하는 것이다. 안락하게 노니는 곳에 대한 생각을 버리는 곳이 3선이라 한 것은 선의 순서로 보아 그 작용에 문득 세 가지가 있고, 순차적인 작용에 세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차례에 따라 일어나는 삼매에 곧 세 가지가 있다. 그런 까닭에 염이 안락하제 노닐 곳이라 말한 것이다.3선의 노닐 곳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3선의 경지에서도 선한 5음(陰)이 찾아와서 성취를 얻게 되기 때문에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즐거움을 끊게 되면 괴로움도 끊어진다. 그리하여 앞에서 일어났던 기쁨과 근심은 이미 사라지고 괴롭지도 아니하고 즐겁지도 아니하게 마음을 깨끗하게 간직하면, 4선의 경지에서의 노닐 곳이 성취된다. 그곳은 즐거움도 끊어지고 괴로움도 끊어진 곳이다.【문】가령 욕계의 결을 제거하였을 때 고통은 이미 다하게 되고 3선에서 결을 제거하였을 때 즐거움이 다하게 되는데 왜 3선에서 결을 제기하였을 때도 고통이 다하게 된다고 말하는가?
【답】본래 이미 끊어진 것을 끊었다고 표현하고, 이미 해탈하였을 경우 이를 해탈이라 부른다. 설명한 그대로 그것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 욕계의 유루심에서 해탈하고자 하면 거기에는 유루의 무명도 있고 유루심의 해탈도 있는데 이미 이것을 알았을 경우 이것을 미래선(未來禪)이라 부른다. 또 설명한다면 가령 “대왕(大王)은 어느 곳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는 오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는 이미 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증거를 얻은 것으로 이름을 삼는 것이다. 또 설명하자면 보살이 삼매 가운데서 증득한 때는 등지(等智)를 얻게 되고 부처님께서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얻으셨을 때는 욕계에서 무욕(無欲)ㆍ무에(無恚)ㆍ무치(無癡)를 얻어 선(善)의 근본을 이미 다 얻는 까닭에 진지라 이름하며, 이미 삼매에 들었다면 삼매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 설명하자면 “어찌하여 염원으로 자비삼매(慈悲三昧)에 들어가는가?”라고 물었을 때, 대담하기를 “중생들이 즐거움이 생기게 되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하였다면, 이것은 받아드리는 일[受]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또 설명하자면 치가 즐거움을 받아들인 것을 느낄 때는 즐거운 감각[樂痛]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먼저 이미 끊어졌다면 그 끊어진 것이 이름이 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즐거움과 괴로움의 두 가지가 모두 영구히 소멸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두라 하는 것은 낙근(樂根)과 고근(苦根)을 말한다. 욕계에서 탐욕을 제거할 때에는 미래에 소멸된다 하여도 고르지 못하기에 3선의 낙수(樂受:樂痛)이며, 이는 무상(無常)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설법하신 말씀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무상이라 하는 것이 곧 고통이다’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3선은 낙수(樂受)이다. 부처님의 계경의 설법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낙수를 고수(苦受)로 하며 관하기를 칼로 찌르는 것과 같다고 관해야 하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는 독사(毒蛇)와 같다고 비관해야 한다’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결을 고통이라 말한 것이다. 성인에게는 지극히 고통에 대한 생각이 있으나 이 생각은 범부가 생각하는 지옥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괴로움도 끊어지고 고통도 끊어진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전에 근심하고 기뻐하던 일은 이미 사라졌다고 한 것은 욕계에서 탐욕이 제거 되었을 때 근심은 이미 끊어졌으며 2선에서 욕망을 제거하였을 때 기쁨은 이미 다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전에 근심하고 기뻐하던 일은 이미 사라졌다고 말한 것이다.
즐겁지도 아니하고 괴롭지도 아니하다[不苦不樂]고 한 것은 이미 고통과 즐거움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지킨다[護]는 것은 내쉬고 들이쉬는 숨결을 끊고 다른 것을 추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염이 청정하다[念淨]고 한 것은 여덟 가지 일에 대한 염원이 청정해지는 것을 말한 것이다.【문】모든 낮은 경지[下地]의 경우에도 무루의 염(念)은 청정한 것인데 왜 오직 4선에서만 염이 청정하다고 말하는가?
【답】생각이 결(結)과 번뇌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에서는 벗어나도 번뇌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또 번뇌에서는 벗어나도 결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결에서도 벗어나고 번뇌에서도 벗어나는 경우도 있고, 결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번뇌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결에서는 벗어나도 번뇌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라 하는 것은 3선의 무루염(無漏念)이 여기에 해당한다. 번뇌에서는 벗어나도 결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라 하는 것은 4선에서의 세속적인 생각이 그것이다. 결에서도 벗어나고 번뇌에서도 벗어나는 경우라 하는 것은 4선에서의 무루염이 그것이다. 번뇌도 벗어나지 못하고 결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라 하는 것은 3선에서의 세속적인 생각과 욕계에서의 생자들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염원이 결과 번뇌에서 벗어난 경우를 말하는 까닭에 4선의 염이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념(正念)을 잃지 아니하고 허물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염이 청정하다고 한다. 3선에서는 성공과 실패가 미칠 수 있는 경지라서 그것에 근거한 염원도 역시 허물어지게 된다. 그러나 4선의 경지는 성공과 실패가 미칠 수 없는 경지라서 그것에 근거한 염원도 허물어지지 아니한다. 이것을 두고 염원을 잃어버리지도 아니하고 허물어지지도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4선의 염(念)은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염원 안팎의 어지러움을 벗어나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초선에서는 내부가 불과 같이 타는 각ㆍ관에 의해 어지럽다. 이와 같이 내부에 어지러운 작용이 있으면 외부도 역시 어지러워지니 그 불길이 여기로 나오기 때문이다. 2선에서 내부에 있는 어지러운 작용이라 하는 것은 희지(喜支), 즉 기쁨이다. 이것은 마치 물결과 같아서 이와 같이 내부가 어지러워지면 외부도 역시 어지러워지니 물이 차오는 것과도 같다. 3선에서 내부에 있는 어지러움이라 하는 것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이다. 이것은 마치 칼날 같은 바람과 같다. 이와 같이 내부에 어지러운 작용이 있으면 외부도 역시 어지러워지니, 이 바람이 불어가는 것과 같다. 4선에서는 내부에 어지러운 작용이 없다. 이와 같이 내부에 어지러운 작용이 없으니 외부도 역시 어지러운 작용이 미치지 아니한다. 이것을 두고 염이 안팎의 어지러운 작용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염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은 마치 배꼽처럼 가운데 자리잡기 때문이다. 마치 가지런히 위로도 세 무루의 경지가 있고, 아래로도 가지런히 세 무루의 경지가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곧 4선의 경지가 배꼽처럼 가운데 자리잡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염이 청정하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의 세 가지 행에 의지하는 것이니, 즉 과보를 얻고 탐욕을 제거하고 누(漏)가 다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부처와 벽지불(辟支佛)과 성문(聲聞)이 얻는 과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염이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의 정이라 하는 것은 동요함이 없이 소의(所依)를 널리 증득하여 열반[無極]에 다다르기에 모든 의(依)가 가장 묘한 정지(定地)이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몸이 청정하시기 때문에 의도 역시 청정하다. 4선 가운데서 몸이 청정하다는 것은 그 정도가 가벼워 등불의 불꽃과 같다. 그러므로 그 소의염(所依念)도 역시 청정하다. 이것을 두고 부처님은 몸이 청정하시기 때문에 의(依)도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의 지혜는 변지(邊智:近分智)이며 상지(上地)의 지혜의 근원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은 사대변(四大邊)이고 색변(色邊)이고 조색변(造色邊)일지니, 근분처(近分處)이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의 경지는 두 가지가 넓다. 즉 처소(處所)가 넓고 선근(善根)이 넓다. 그런 까닭에 4선의 염이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4선이라 한 것은 차례의 법수로 보아서 네 번째에 존재하는 정수(正受)이며, 순차의 법수로 따져 곧 네 번째 존재하는 선정이고, 또한 차례로 삼매에 드는 과정에 네 번째 존재하는 삼매이기 때문에 4선이라 말하는 것이다.
4선에서도 노니는 곳이 성취된다고 하는 것은 4선에도 선한 오음이 찾아와서 성취를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노니는 곳이 성취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계경에서 설명하시기를 “4선은 구경(究竟)의 도이다”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초선의 경지를 자세히 설명하시고 나서 말씀하시기를 “범지여, 이것을 여래의 진근(盡根), 여래의 족행(足行), 여래의 소증(所證)이라 부르지만 그것을 구경(究竟)으로 삼지는 아니한다. 여래의 구경이라 하는 것은 집착하는 곳이 없는 등정각(等正覺)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2선ㆍ3선ㆍ4선에 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신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범지여, 이것은 여래의 진근ㆍ여래의 족행ㆍ여래의 소증을 말한 것이며, 그것으로 구경을 삼는다. 이것이 여래의 집착하는 곳이 없는 등정각이다”라고 말씀하셨다.【문】왜 부처님은 3선을 버리고 4선에서 구경의 도를 건립하신 것인가?
【답】이것은 부처님 스스로 이렇게 하셨기에 이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상대방 범지가 모든 등정각을 이룬 항하의 모래처럼 수많은 부처[三耶三佛]들이 4선의 경지에 근거하여 위없이 가장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씀을 듣게 되면 그는 생각하기를 ‘만약 사문 구담씨가 4선을 추경의 도라고 건립한다면 사은 구담씨에게는 아마도 일체지(一切智)와 일체견(一切見)이 있을 것이나 만약 사문 구담씨가 4선을 구경의 도라고 건립하지 아니한다면 사분 구담씨는 일체지도 아니며 일체견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그래서 범지는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와서 마주 보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물러나 한쪽에 앉고 나서는 부처님께 아뢰기를 “유일하신 구담씨여,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 내가 묻는 일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였고, 이에 부처님께서 “즉시 묻고 싶은 대로 물어보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이같이 말씀하시자 부처님께 아뢰기를 “유일하신 구담씨여, 구경의 도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 구경의 도며, 어떤 것이 사문 구담씨가 건립하는 구경의 도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그를 위하여 자세히 3선까지의 경지를 설법하신 다음 말씀하시기를 “범지여, 이것을 여래의 진근ㆍ여래의 족행ㆍ여래의 소증이라 말하지만 그것으로 구경을 삼지는 아니한다. 구경의 도는 여래의 집착하는 곳이 없는 등정각이다”라고 하셨다.다음 4선의 경지를 자세히 설명하신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범지여, 이것을 여래의 진근ㆍ여래의 족행ㆍ여래의 소중이라 하며 그것을 구경으로 삼는다. 이것이 여래의 집착하는 곳이 없는 등정각이다”라고 하셨다. 그 범지는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마음에 안정을 얻고 ‘사문 구담씨는 진실로 일체지를 이루고 일체견을 지닌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 태문에 4선을 구경의 도라고 하는 것이다.【문】무엇 때문에 여래의 진근(盡根)이라 표현하는가?
【답】지혜로 성취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큰 코끼리가 봄에 푸른 풀이 많은 것을 보고 나면 그는 코끼리 무리에서 벗어나 못 가운데 들어가서 연 뿌리를 먹는다. 그는 연 뿌리를 보면 매우 기뻐하여 상아로 땅을 파고 땅을 판 다음에는 발을 그 속에 넣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로 부처님은 4선의 경지를 지키고 수행하신 다음에 모든 법의 경지에 지혜의 발을 안치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지혜이기에 또 얻는 것이기에 여래의 진근이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여래의 진근이라 하는 것은 멈출 곳[止]을 세우기 때문에 다음에 여래의 족행을 말하게 되며, 부처가 족행이라 하는 것은 관(觀)이 건립되기 때문이다. 다음 여래의 소증이라 하는 것은 지관(止觀)이 건립되기 때문이다.【문】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설명하신 ‘4선은 안락하게 노닐 곳’이란 무엇인가?
【답】근본지(根本地)를 쉽게 이룬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안락하게 노닐 곳은 근본지가 아니며 무색처정(無色處定)도 이루기 어렵다”고 하셨다. 때문에 그곳을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말씀하시지는 않았다.【문】어찌하여 이 경지는 이루기 어려운가?
【답】수행하는 사람이 욕계의 행고(行苦:行結)에 구속당하면서 미래에 근거한 선정이 눈앞에 그리는 것은 오로지 고통일 뿐이고 아무런 진척도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두 손이 굳게 뒤로 묶여 있는 상태에서 그 오랏줄을 스스로 풀려 하면 그것은 오로지 고통이요 더디기만 한 노력인 것과 같다. 수행하는 사람이 욕계의 행고에 속박당할 때 미래에 근거한 선정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것은 오로지 고통이며 더디기만 한 수행이다.혹 어떤 수행자가 더러운 것을 관찰하거나 안반(安般)을 행하는 경우, 더러운 것을 관찰하는 수행자가 10년 또는 20년간 해골을 관찰할지라도 이 정(定)을 성취하지 못한다. 또 수식관을 행하는 경우 10년 또는 20년간 호흡을 관찰하더라도 이 정을 성취하기도 성취하지 못하기도 한다. 설사 이 정을 성취하였다 하더라도 욕계의 다른 결에 매우 힘쓰지 않으면 초선이 현전한다 하더라도 그 초선은 중간정이 현전한 것이기에 괴로움뿐이고 아무런 진척도 없다. 그 한 경지에 남아 있던 심과 심소법이 소멸하면 다른 심ㆍ심소법이 눈앞에 나타난다. 크고 거친 것이 소멸하면 미세한 것이 눈앞에 나타나고, 각지(覺支)가 소멸하면 관지(觀支)가 눈앞에 나타난다.마치 사람들이 나무로 나무를 깨뜨리고 돌로 돌을 깨뜨리는 것과 같아서 그것은 오로지 고통이며 오로지 더디기만 하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도 그의 한 경지에 남아 있던 심ㆍ심소법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심ㆍ심소법이 눈앞에 나타나고 크고 거친 것이 소멸하고 나면 미세한 것이 눈앞에 나타나고, 각지가 모두 소멸되고 나면 관지가 함께 눈앞에 나타나니, 이는 오로지 고통이며 오로지 더디기만 한 수행이다.
그러나 초선에서 욕망을 제거하고 나면 힘들이지 아니하여도 2선의 경지가는 앞에 나타나고 2선에서 욕망을 제거하고 나면 힘들이지 아니하여도 3선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고 3선에서 욕망을 제거하고 나면 힘들이지 아니하여도 4선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난다.【문】4선에서 탐욕을 제거하고 나면 공처(空處)의 정이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데 왜 이 경지는 이루기 어려운가?
【답】무색계는 미세하여 느끼기 어렵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혹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으니, 저 계경에서 말한 내용에 따르면 어떤 거사가 아난 존자가 있는 곳에 이르러 말하기를 “아난 존자시여, 나는 예전에 무색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치 깊은 물가에 간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떠한 중생을 무색이라 표현합니까?”라고 하였다.
이것은 근본지는 이루기 쉬운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하는 것은 근본지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또한 무색처정(無色處定)은 이루기 어려운 까닭에 부처님은 이곳도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안락하게 노닐 곳은 힘들게 구하지 아니하여도 얻을 수 있다. 마치 두 사람이 말을 탔을 때 한쪽 말은 조련(調練)이 되어 있지 아니하고 한쪽 말은 극히 조련이 잘된 말일 경우, 조련이 안 된 말에 탄 사람은 지극히 힘들게 말을 몰아야 하지만 조련이 잘 된 말을 탄 사람은 힘들게 몰지 아니하여도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많은 중생들이 탐욕을 제거하는데 혹 어떤 중생은 근본정도 아니고 또한 무색처정도 아닌 방법으로 탐욕을 제거하는 사람도 있고, 또 혹 어떤 사람은 근본정의 경지에서 탐욕을 제거하는 사람도 있다. 이 가운데 근본정도 아니고 무색처정도 아닌 방법으로 탐욕을 제거하려는 사람은 오로지 힘들게 수행할 길을 구하시만 근본정의 경지에서 탐욕을 제거하려는 사람은 오로지 힘들게 수행의 길을 찾지 아니하여도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근본지는 안락하게 노닐 곳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지(枝)ㆍ5지(支)를 겁수하는 정에서 얻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문】근본정의 경지도 아니고 무색처정의 경지도 아닌 정(定)에도 선지(禪支)가 있는가, 없는가? 만약 있다고 한다면 왜 근본정의 경지에서만 선지를 말하고, 다른 정에서는 선지를 말하지 않는가? 또 만약 선지가 없다고 한다면 여기서 건립하여 설명하는 내용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가운데서 말하기를 “공처(空處)에도 가장 모한 선정이 있고 가장 묘한 경지의 선지를 얻을 수 있는가?”라고 하자, 답하기를 “가령 공처에서 정이 일어나 다음 차례로 공처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말과는 어떻게 상통되는가?
【답】이런 논란이 지어지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근본이 아닌 정지(定地)와 상무색(上無色)의 정지에 선지가 있다”라고 하였다.【문】만약 선지가 있다면 왜 그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답】마땅히 말했어야 한다. 즉 초선의 5지(支)에서 희지(喜支)가 제거되면 불고불락지(不苦不樂支)가 불어난다. 이 5지를 초선의 근분(近分)이라 말한다. 2선에 있는 4지(支)에서도 희지(喜支)를 제거하면 불고불락지가 불어난다. 이 선지를 3선의 근분이라 한다. 4선에 있는 4지도 그 4선의 근분은 역시 무색정이다. 이와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근본정의 경지에만 선지가 있고 다른 정에는 선지가 없다”라고 하고 있다.【문】만약 근본정의 경지에만 선지가 있고 다른 경지에는 선지가 없다고 한다면 그 때문에 이 가운데서는 건립되는 것을 말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인데 이것과는 어떻게 상통되는가?
【답】그 가운데서 말하는 각지(覺支)라 하는 것은 도지(道支)를 말한 것이다. 그것을 지라고 한 것이며, 이렇게 말말 경우 근본정의 경지에만 선지가 있고 다른 성에는 선지가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낙지(樂支)는 도를 닦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 비유하면 두 사람이 한 지방으로 달려가는데 한 사람은 물길을 따라가고 한 사람은 육지길로 갈 경우 비록 다 같이 한 지방에 이른다 하더라도 물길로 간 사람은 쉽게 갈 수 있으나 육지로 간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많은 중생들이 있어 탐욕을 제거하는데 혹 근본이 아닌 정지와 상무색계의 정지에서 제거하는 경우도 있고, 또 혹 근본정의 경지에서 제거하는 경우도 있으니, 비록 결과적으로 한 곳에 이르러 다 같이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경계에 이른다 하더라도 오직 근본정의 경지에서는 쉽게 제거하였고 다른 방편정(方便定)으로 제거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근본정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날 때는 모든 몸의 사대(四大:地ㆍ水ㆍ火ㆍ風) 요소가 눈앞에 나타난다. 근본이 아닌 정지와 상무색계의 정지가 눈앞에 나타날 때는 마음 언저리의 사대가 눈앞에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또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이르기를 “근본이 아닌 정지와 상무색계의 정지가 눈앞에 나타날 때에는 모든 몸의 사대가 눈앞에 나타나지만 다만 생기는 즐거움이 근본정의 경지만 못하다. 비유하면 마치 두 사람이 못물에서 목욕을 할 때 한 사람은 못둑 위에 잇고 다른 한 사람은 못물 속에 들어가서 목욕을 할 경우 물로 때를 제거하는 것은 같지만 어느 쪽이 쉽게 때를 씻는가를 말한다면 못 속에 들어간 사람이라 말하게 된다. 이와 같이 비록 근본이 아닌 정지와 상무색계의 정지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모든 몸의 사대가 눈앞에 나다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얻는 즐거움은 근본선의 경지만 못하다. 그런 까닭에 그럴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 종류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즉 외부의 즐거움과 내부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외부의 즐거움이라 하는 것은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근본이 아닌 정지와 상무색계의 정지가 들어가는 것이 그것이고, 내부의 즐거움이라 하는 것은 한 정에서 일어나서 다시 다른 한 정으로 도로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두 종류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 종류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가볍고 홀가분한 즐거움이고, 하나는 감각으로 느끼는 즐거움이다. 3선에서 이 두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 4선에서는 비록 낙수(樂受)는 없지만 다만 홀가분한 마음의 즐거움은 지극히 묘하여 그 두 종류의 즐거움의 종류가 아니다. 두 종류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만 것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진(精進)과 지(止), 이 두 가지 행을 평등하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비록 모든 경지에서 증상(增上)의 정진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다만 정(定)의 힘에 인연한 근본정의 경시의 정진과 지(止)만이 평등하게 수행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노여움이 없는 즐거움이 지극히 넓고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이 가운데 노여움은 없나니, 이것이 지극한 즐거움이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즐거움으로 결을 벗어나는 출요(出要)의 길[道]을 얻을 수 있다. 비유하면 많은 사람들이 강물을 건너는데 혹 재목(材木)을 타고 건너기도 하고, 혹 부낭(浮囊:공기 주머니)을 타고 건너기도 하고, 풀단을 안고 건너기도 하고, 혹 지극히 큰 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는데 그들이 비록 함께 강물을 건너갔다고 하더라도 오직 배를 타고 건넌 사람만이 쉽게 건넌 사람이 된다. 이와 같은 이치로 많은 중생들이 있어 모두가 탐욕을 제거하게 되지만 혹 근본이 아닌 정지와 상무색계의 정지에서 탐욕을 제거하는 사람도 있고, 혹 근본정의 경지에서 탐욕을 제거하는 경우도 있는데 비록 다 같이 생사의 강물을 건너 열반의 피안(彼岸)에 이른다 하더라도 근본정의 경지에서 탐욕을 제거하는 사람이 쉽게 생사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이르게 되고 다른 방편정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까닭에 경전에서 ‘4선은 안락하게 노닐 곳이다’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4선처(禪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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