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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026 불설대방등정왕경(佛說大方等頂王經)

by Kay/케이 2024.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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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불설대방등정왕경(佛說大方等頂王經)

 

불설대방등정왕경(佛說大方等頂王經)일명 유마힐자문경(維摩詰子問經)

서진(西晉) 축법호(竺法護) 한역
주법장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어느 때 부처님께서 유야리(維耶離)1)의 내씨(奈氏)2) 소유인 나무 숲 동산을 노니실 때에 큰 비구의 무리와 함께 계셨다. 비구 800명과 보살 1만 명으로, 모두 대성(大聖)이며 신통을 통달하고 총지(摠持)3)와 걸림 없는 변재를 다 얻고 삼세의 지혜4)를 간직하고 3달지(達智)5)를 성취하였으나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은 증득한 이가 없었다. 대자(大慈)를 행하되 번거로워하거나 애달파하며 나와 우리를 헤아리는 일이 없었고, 저 언덕[彼岸:열반의 세계]에 건너가서 삼세를 통달하여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었다.모든 법이 허깨비[幻化]ㆍ꿈ㆍ그림자ㆍ메아리ㆍ아지랑이ㆍ파초(芭蕉)ㆍ물거품과 같은 줄을 깨닫고, 3처(處)가 본래 없는데 인연 따라 생겨남에 이익이 있고 없음과 칭찬ㆍ비방ㆍ이름을 얻음과 명예를 잃음ㆍ괴로움ㆍ즐거움 등의 세간(世間)의 모든 법이 임시방편으로 3도(塗)6)에 두루 도는 것[周旋]임을 잘 알아서 욕계ㆍ색계ㆍ무색계를 초월하고 도의(道義)를 분명히 알아 모든 이들을 구하여 제도하니, 모든 하늘들이 와서 모시고 깊은 법을 물어서 받아 지니고 어리석은 마음을 개발(開發)하여 모두 도의 밝음[道明]에 들어갔다.그때 세존께서는 다음날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드시고 유야리성에 들어가 걸식하시면서 유마힐(維摩詰)의 집에 이르셨다. 유마힐에게는 선사(善思)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침에 목욕을 하고 향을 몸에 바르고 새 옷을 입고 연꽃을 가지고 부인과 함께 누각(樓閣)에 올라가서 기악(妓樂)을 구경하며 서로 오락을 즐기다가 전생에 심은 덕이 감응하여 멀리 부처님께서 거룩한 무리들과 함께 성(城)에 들어오셔서 걸식하시고 크게 상서로운 신통변화를 나투심을 보고 게송으로 부인에게 말하였다. 말한 바 청아한 게송은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한 것이었다.
맑고 부드러운 소리 들리니
우리 함께 일어나서
기악이 있는 곳을 향하여
누각 위에서 빨리 내려갑시다.
부처님[大雄]께서 오신 것 의심 없고
세상을 보호하는 광명을 비추시니
반드시 오른쪽 발가락으로
성문(城門)의 문지방을 밟으셨으리.
온갖 새와 짐승들이
애달프고 온화한 소리를 내니
이처럼 미묘한 음향은
예로부터 일찍이 듣지 못했네.
부처님께서 오신 것 의심 없고
중생들을 이롭게 인도하시려고
이제 오른쪽 발가락을 드시어
문지방을 편안히 밟으셨네.
내 오늘 부처님 뵈오니
보배 영락(瓔珞)의 몸과 같아
갖가지 기악을 연주하지 않아도
미묘하여 마음 기쁘다.
부처님[三千聖]께서 오신 것 의심 없고
위덕(威德)으로 깨끗하게 장엄하시어
반드시 오른쪽 발가락으로
성문의 문지방을 밟으시리.
비유컨대 큰 발우에
강물을 담아가지고 옴에
조화로운 소리가 들리고
그 토지에 두루함과 같네.
부처님[人中天]께서 오신 것 의심 없고
큰 성인께서 존귀한 광명 비추시니
부처님께서 세간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시려고
반드시 성문에 들어오시리.
신통력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시니
마치 나무와 꽃이 만발함에
약간의 색깔과 날리는 꽃잎들이
매우 좋은 향기를 흘려보냄과 같네.
부처님[大龍]께서는 의심하시는 바 없으사
서원(誓願)을 근본 세움에 두시어
이제 오른쪽 발가락으로
성문의 문지방을 밟으셨네.
광명이 허공을 널리 비추어
하늘과 땅에 두루하니
태양이 빛을 잃어
영원히 빛을 내지 못하네.
부처님[一切尊]께서 오신 것 의심 없고
위엄을 나타내는 큰 광명을 비추시니
이제 오른쪽 발가락으로
성문의 문지방을 밟으셨네.
마치 모든 하늘 사람들이
허공 가운데 머무른 것 같고
중생들이 부처님을 따라 모심은
하늘 사람들이 범왕(梵王)을 모심과 같네.
세간을 가엾게 여기심이 의심할 것 없는
존귀한 성인이신 길잡이[尊人聖導師]께서
이제 오른쪽 발가락으로
성문의 문지방을 밟으셨네.
오늘 성 안의 사람들을 살펴보니
제각기 자비심으로 원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 이야기하되
부모나 자손처럼 하네.
위덕의 광명은 사라지지 않고
복덕과 위덕이 저절로 장엄되시니
이제 오른쪽 발가락으로
성문의 문지방을 밟으셨네.
남녀를 살펴보니 크거나 작거나 간에
제각기 약간의 꽃을 가지고
두 손을 깍지끼고 스스로 귀의하여
기뻐하며 꽃을 멀리서 흩뿌려 공양하였네.
부처님[大導]께서는 머뭇거림이 없으셔서
덕(德)의 꽃으로 몸을 장엄하시고
이제 오른쪽 발가락으로
성문의 문지방을 밟으셨네.
모든 하늘과 인간의 꽃이
허공에 두루 퍼지고
꽃을 흩뿌리고 향을 태워
그 향내, 마음을 기쁘게 한다.
부처님[大勇]께서는 의심의 번뇌가 없으셔서
유야리(維耶離)에 들어오시어
대중들을 교화하여 기쁘게 하시려고
가장 뛰어난 까닭에 여기에 오셨네.
그때 선사(善思)의 부인이 이 말을 듣고 마음속에 두려운 생각을 하여 옷의 털이 곤두서고 몸이 오싹하였다. 그리고 난간에 기대서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무슨 신(神)인가? 천(天)인가, 용(龍)인가, 귀신인가, 도깨비인가, 긴나라인가, 마후라가인가, 사람인 듯 사람이 아닌 것[人非人]인가? 입으로 사람의 말을 하며, 있는 그 자리에서 동요하지 않아 감히 피할 수가 없구나.’
그때 부처님께서는 선사 동자가 살고 있는 마을에 나아가셔서 선사 동자의 집 문 앞에 서 계셨다. 선사 동자는 부처님을 뵙고 곧바로 누각에서 내려가 직접 받들어 맞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의 희열을 감당할 수 없어 누각에서 몸을 던져 부처님의 거룩하신 뜻을 공경하여, 허공에 머물러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성스러운 지혜, 높이 머무시고
사람 가운데서 가엾이 여기시는 이여,
중생을 애달프게 여기시니
오직 이 마실 것[水漿]을 받으십시오.
그때 부처님께서 선사를 위해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참된 본제(本際)에 머무름
세속의 지혜로는 알 수 없고
그 경계는 소유할 것 없으니
이것이 본제의 모습이어라.
선사 동자가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본제에 머물러
무명(無明)의 세계를
참된 본제로 교화하여 이끌며
무엇을 허무(虛無)라고 말합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다시 선사에게 말씀하셨다.
참된 본제는
곧 여래(如來)의 경계이니
만약 본제에 머무름을 살핀다면
분명하게 이처럼 머무른다.
참된 본제는
곧 여래의 경계이니
참된 본제를 환히 아는 것같이
동자의 머무름 또한 그러하다.
선사 동자가 다시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끝[際]이 없다는 끝은 무슨 끝이며
어떤 것이 끝의 모양이며
어떠한 임시방편으로
본제라 이름합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선사를 보니, 마음에 도(道)를 환히 알고자 하였으므로 선사 동자에게 게송으로 알려 주셨다.
끝이 없어 기다릴 수 없는 것을
바로 참된 본제라 하니
그 끝의 모양은 허공이며
허공은 또한 모양이 없도다.
선사가 부처님을 위해서 게송으로 말했다.
대단합니다, 참되고 바른 곳이여.
그곳은 현묘하여 위가 없어라.
모든 중생들을 머물게 하기를
지금의 부처님같이 하리라.
그때 선사 동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으로 이 연꽃을 받아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바로 받으시자, 선사 동자의 입에서 저절로 말이 나왔다.
“이 공덕으로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之道]를 이루고, 최정각(最正覺)을 이루어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경전을 널리 펴서 범부의 법에 이르고 도의 법[道法]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현자(賢者) 사리불(舍利弗)도 모임 가운데에서 선사 동자에게 말하였다.
“선사의 마음이 나아가는 바는 어떠하며, 이룬 바 바른 깨달음의 법은 어떤 모양이기에 중생들을 위해서 널리 펴고자 하는가?”
선사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뜻은 얻을 것이 없으며
모든 성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중생들을 위해서 널리 펴십니다.
향하여 말한 것이 없고
또다시 이를 곳이 없습니다.
대지(大智)는 마땅히 이것을 아니
본래 청정하고 맑기가 이와 같습니다.
과거의 모든 정각(正覺)께서는
세상을 보호하는 무상존(無上尊)
또한 얻을 수 없는 모든 법으로
세상을 인도하여 멸도(滅度:열반)를 얻게 하십니다.
헤아림에 영원히 법계(法界)가 없고
또한 중생계(衆生界)도 없으니
이것이 본제이며
세속의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거짓으로 일러 세계라 하니
사람이 모양으로 인하여 부른 것이며
모든 생각하는 것이 없고
다시 특별한 업[異業]도 없다.
그때 빈뇩문타니자(邠耨文陀尼子)가 선사 동자를 위해서 게송을 말하였다.
동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이 법을 배우고자 하는가?
이곳은 심오하여 미치기 어려워
눈 밝은 이도 미혹하는 곳이다.
어진 이는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지혜가 유독 용맹스러워
성문(聲聞)과 이야기할 적에
즉시 대처하는 지혜, 두려움 없다.
곳곳마다 잘 분별하고
머무는 모습은 자금(紫金)빛이며,
대왕의 길에 우뚝 서 있어
허공의 달이 밝게 비춤과 같다.
그때 선사 동자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어진 이는 오직 태어남을 물으나
태어남은 태어남이 없으며
모든 법은 일어남이 없으니
무엇이 다시 태어나겠는가?
그 법은 태어남 없어
자연히 소유할 것 없으니
본래 청정한 그 법은
얻을 것이 없는 것도 없다.
모든 법은 본래 청정하건만
아직 이를 얻지 못함은
무명(無明)과 아만(我慢) 때문이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 법을 말씀하셨도다.
사슴이 노니는 녹야원(鹿野苑)에서
최초로 이 법륜을 굴리시니
대부분의 성문승(聲聞乘)들은
뜻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하였다.
말씀하시는 법음(法音)의 메아리
수많은 변재(辯才)이어라.
방편의 거룩한 지혜로
깊은 진리를 말씀하셨도다.
태어남에 결국은 사라지는 것
이 어리석은 행위는
전도된 업(業)에 처해서이니
빈뇩(邠耨)이 말한 것과 같다네.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
이것은 세속의 말이며
법(法)은 말이 없으나
가탁(假託)하여 가르침에 나아가네.
그때 현자(賢者) 빈뇩문타니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지극히 미증유(未曾有)하신 부처님이시여, 이제 선사 동자는 깊이 지혜에 들어가 매우 뛰어나며 주장하는 말은 독보적이어서 대중들이 미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빈뇩이여, 그대의 말처럼 틀림이 없다.”
그때 부처님께서 보살인 선사 동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道]에 이르러 최정각(最正覺)을 이루려 하는가?”선사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분명히 하신 바를 다시 자세히 물으시니, 큰 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지극히 어지신 이 말씀으로 인하여 저의 몸은 고요하여 할 일이 없고, 큰 서원으로 모든 것에 걸림이 없으며 열어 보이고 교화하는 바가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가장 깊은 최고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중생들에게 있어서도 그러하여 미혹하게 하는 일 없이 제도하시니, 지극히 자세하고 깊고 미묘한 말씀으로 본래 참된 것의 처음과 끝을 분명히 깨닫습니다.그러므로 무수한 중생들이 대부분은 깊고 미묘하고 위없는 말씀을 통달함이 없고 법(法)으로 이 중생들을 교화함에 그 행(行)은 각각 다르나 가르쳐서 중생이랄 것이 없습니다. 설사 중생이 없다면 저 모두가 공(空)하고 지혜 없는 지혜에 의해서 중생은 본래 청정하고 본래 청정하여 제각기 차이가 있을 수 없으니, 이 이치를 알면 세간의 밝은 지혜가 됩니다. 그러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이러한 이치를 잘 알아서 스스로 정각(正覺)을 이루고 중생들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입니다.”현자 아난(阿難)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지극히 미증유(未曾有)합니다. 선사 동자가 변재에 깊이 들어감이 이와 같아서, 응함에 수순하며 미묘한 말씀에 집착이 없고, 천상이나 세간의 수많은 사람과 아수라(阿修羅)가 들으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기꺼이 받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깊고 미묘한 법을 마땅히 믿고 즐거워하겠습니까? 지난 전생에 이 깊고 원대한 행을 듣고 배웠기 때문에 믿고 받아 배우는 것입니다.”
그때아난이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수미산의 꼭대기가
멀리 미묘하고 좋은 모습 나타내듯
지금 이 선사(善思)의 덕
수많은 미묘함 이와 같아라.
여러 산중의 왕
큰 바다에 견고히 머물 듯
지금 이 대중 속에서
흔쾌히 미묘한 말을 연설하네.
선사가 탄식하는 건
무엇이라 말할 수 없어서이네.
본제 빛나건만
세속에서는 볼 수 없어라.
그 말이 두려운 것 없어
공경히 찬탄하지 않는 이 없고
오직 선사만이 말을 하니
어떻게 본말(本末)을 알겠는가?
선사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내 몸과 목숨 버려
걸림 없는 갑옷을 입고
뜻은 정각(正覺)을 탐내지 않고
그리하여 널리 듣는다네.
욕심 때문에 타락하여
끝없는 재앙을 만나니
누가 재앙을 만나지 않는가.
오직 세간의 길잡이[導師]이시네.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세간을 보호하여 건지시니
그 몸은 액난(厄難)이 없으며
부처님의 높으신 도(道)에 머무네.
허공과 사람의 몸
두 가지 다 얻을 수 없고
법(法)답게 얻을 것 없어도
법에 있어서 두려움 없네.
허공과 부처님의 몸 깨달으니
진실로 일정한 처소 없어라.
인욕(忍辱)을 이루면
영원히 두려움 없다네.
허공에서 땅에 이르기까지
자연이어서 있는 바 없어라.
이 자연의 선사(善思)가
모두 처소 없음을 통달하였네.
허공에서 땅에 이르기까지
선사는 얻은 것 없고
태어남도 없고 자연도 없어
고요[虛寂]하여 있는 바 없네.
허공은 높이가 없고
다시 아래가 없으니
이 법을 깨달으면
저 모두 두려움 없다네.
그때 부처님께서 선사 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어진 이여, 체성(體性)에 두려움이 없는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거듭 물으셨다.
“그대는 참으로 두렵지 않은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좋다. 어진 이는 두려움이 없어서 공포심이 없다.”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있음[有]을 좇아서 두려움 생겨남에
거짓으로 무소유(無所有)를 나타내니
이러한 인(忍)을 잘 안다면
부처님의 도에 가깝도다.
사람이라는 생각에 두려움 있으니
중생은 본래 영원하지 않은 것
이러한 이치를 알면
이러한 데에 머무름 없으리라.
정각(正覺)도 얻으려 않고
깨달음 없음에도 그러하니
여타의 얻을 것 없으면
두려울 바가 없으리라.
이 이치를 깨달으면
있다 없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선사가 이러함을 아는 것은
부처님 도(道)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선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보살이 있어 속히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에 영원히 편안하게 이르러 최정각(最正覺)이 되고자 하는 이는 바로 유상상(有常想)ㆍ안상(安想)ㆍ고상(苦想)ㆍ중생상(衆生想)ㆍ인상(人想)ㆍ수명상(壽命想)을 없애 분별해 분명히 알아서 집착함이 없이 행하고, 의지하는 바가 없이 행하면 무상정진도를 성취하리라. 부처도 지난 숙세(宿世)에 보살업(菩薩業)을 행할 때에 이 도(道)를 짓고, 곧 지혜를 품어서 법을 얻을 것이 없었으니, 이것을 부처님의 도라고 한다.”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항상하다는 생각 허깨비와 같아서
항상한 줄 알면 생사(生死)를 이룬다.
항상함과 무상함과 허무에 있어서
구하는 업은 소유할 것이 없다.
중생이 편안한 생각이 있으면
불안(不安)함을 알아서 자연스럽다.
이 생각은 전도(顚倒)된 것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법을 분명히 안다면
각각의 차별은 있을 수 없다.
바라는 생각을 품지 않으면
명상(命想)도 인상(人想)도 없다.
도 밝음은 말미암음이 없으니
도 없음 또한 다시 그러하다.
이것을 본래 청정이라 하니
법은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만일 밝게 통달한 이 있으면
모든 것이 본래 청정한 줄 안다.
선사(善思)는 이것을 마땅히 아니
이것이 도 중에 바른 도[正道]이다.
도승(道乘)을 행하지 않아
불승(佛乘)의 구제를 받고
만약 이를 다투는 사람이라면
곧 도법(道法)을 펴지 못한다.
지혜의 업을 닦지 않아
도의 보호함이 되지 않으니
이 행을 따르지 않으면
불법(佛法)을 깊이 알기 어렵다.
모든 법은 법이랄 것 없어
본래 모두 형상이 없으니
있는 바도 허무하여
삼계가 영원히 불안하다.
모든 즐거움과 고통을 생각함에
허공을 다니는 것과 같으니
만일 이러한 행을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심해탈(心解脫)이다.
소유한 몸을 나라고 하면
그 법도 허무하니
나라고 할 것이 없어
아는 바는 소유하는 바가 없다.
이러한 부류는 수명을 생각하지 않고
본말(本末)을 궁구하지 않아
허무한 생각을 진실이라 하여
조금 밝은 것에 미혹된다.
나와 수명은 본래 청정하여
소유할 것이 없고
어리석게 행하는 것은
본래 청정한 것이 있다고 헤아린다.
부처님의 도는 사의(思議)할 수 없고
있는 바를 생각할 수 없어
만약 깊고 미묘한 법을 듣더라도
받들어 수지(受持)하지 않는다.
일찍이 이러한 경법(經法)을
나누어 펴지 않았더라면
이 같은 경과 법을 체득할 수 없거니와
설한 바도 얻지 못했으리라.
부처님께서 나무 아래에 앉아서
도의 지혜[道慧]를 이루었으니
만일 도의 지혜를 못 이루었다면
아는 바가 없었으리라.
부처님의 도와 지혜의 도량
또한 말한 바가 없는데도
범부들은 바라는 생각을 품고서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법을 사모한다.
이는 진실한 가르침[敎]이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깊고 미묘한 법이라 하여
뜻에 알음알이가 매우 깊으니
마군이 행하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들어도
경(經)의 의미를 모르면
모든 법의 구호하는 바가 된다.
보살은 매우 부지런히 노력하여
도(道)의 안온함을 구하지 않으니
도의 깨달음이 없으면
이 두 가지 일은 모양이 없다.
뜻에 마땅히 의지하고 사모하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는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가 하여
전도(顚倒)된 업에 집착하는가.
만약 괴로움을 만나면
깊고 미묘함에 매우 집착하여
각기 큰 소리를 내어
‘통쾌하구나, 부처님은 사의(思議)할 수 없다’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다시 선사에게 말씀하셨다.
“이 법을 배우는 이는 마땅히 심오한 가르침을 익혀라. 그리고 뜻[志]을 이익이 없는 잡다한 글과 많은 말에 두지 말라. 바르고 참되고 끝이 없고 큰 지혜이고 매우 원대한 법[正眞無極大慧深遠法]을 이루지 못하리라. 이는 바로 ‘매우 심오한 것’이라 하고 법에 응하여 말하기를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중생들은 삿된 소견에 떨어져 이 법을 행하지 못하여 삼매(三昧)로 날카로운 이치를 알지 못한다. 지혜는 경계가 없고 지혜 없음도 그러하니,이 자리는 지혜로 행할 곳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전생에 이 심오한 법을 듣고 고요함을 알아 마음에 집착함이 없다. 만약 이 심오한 법을 듣고서 기뻐한다면 일찍이 수많은 부처님께 나아가서 공덕을 행하여 세우고 이 법을 받아 지니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외워 받들어 행하며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고 시방에 널리 폈기 때문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선사 동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이러한 큰 서원을 닦되, 두려움을 가진 세상 사람들 속에서 지극한 진리를 부지런히 배워서 부처님에게 두려움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두렵고 어려워서 물러나면 마땅히 이러한 견해를 일으켜야 한다.
‘펴서 베풀고 받들어 행하여 도의 지혜[道慧]에 들어가도록 하리라.’”선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즐거이 믿고 따르겠습니다. 세속의 믿지 않는 바일지라도 홀로 돈독한 신심(信心)은 끝이 없고 뜻[志]은 허공처럼 텅 비어 영원히 연모하는 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선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 대사(大士)로서 깊고 미묘한 법에 뜻을 둔 이 모든 정사(正士)는 방편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따르니, 도법(道法)에 있어서 다투는 바가 없다. 다투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법에 두려움이 없고 단절함이 없고, 모든 법이 본래 없는 줄을 알며 뜻에 연모하는 바가 없어서 바로 도의 지혜에 들어간다. 만약 모든 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없다고 말하여도 겁내지 않으면, 있다 없다는 것의 법에 있어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어서 모든 법은 응한다, 응하지 않는다, 정진(精進)이다, 게으름이다라는 말을 듣고 모든 시방의 법을 안다.지혜가 돌아갈 곳이로되 만약 돌아갈 곳이 없으면, 다시 모든 법이 있다는 생각과 없다는 생각을 알지 못함에 두려워함이 없다. 그리고 모든 법은 유위(有爲)이다, 무위(無爲)이다, 유계(有界)이다, 무계(無界)이다, 기쁨이다, 기쁨이 없다는 것에 있어서 두려워함이 없다. 모든 법은 또한 유위도 아니고무위도 아니며, 모든 법은 본래 소유한 것이 있거나 본래 소유한 것이 없음에 대해 모든 법은 고요하여 시끄러움에 두려워함이 없다. 모든 법이 전도되고 전도됨이 없음도 허무함도 진실무위(眞實無爲)함에도 두려워함이 없다. 모든 법에 계(戒)가 있고 없고, 밝음[明]이 있고 없고, 이름[名]이 있고 없고, 일어남[興]이 있고 없고, 두려움이 있고 없고, 태어남이 있고 없고, 죽음이 있고 없음에도 두려워함이 없다. 모든 법은 도(道)가 있고 없고, 건너감[度]이 있고 멸도(滅度)가 없고, 옳고 그름에 두려워함이 없다.왜냐하면 모든 법은 모두 텅 비었으되 진실하지 않음이 없으니, 마치 허깨비ㆍ물거품ㆍ파초ㆍ그림자ㆍ메아리ㆍ아지랑이ㆍ꿈속에서 본 바와 같아서 본래 옴도 없으며 감에 도착할 곳도 없다. 그것은 마치 허공에 홀연히 나타나는 구름ㆍ안개ㆍ먼지ㆍ연기ㆍ재 등과 같아서 허공에 의탁하여 나타나되 더러운 때가 되지 않고 홀연히 사라지면 허공은 그대로여서 깨끗이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도의 있고 없음에 세속의 지혜가 밝아 널리 자연을 이해하여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고 아는 것조차도 없어서 이내 도의 지혜가 무상정진(無上正眞)에 응해서 두려운 것이 없어 마음에 겁을 먹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소유할 것 없고
자연히 텅 비어 진실함이 없으니
자연히 텅 비어 없는 것
이 모습이 곧 멸도(滅度)이다.
모든 법은 다툼이 없고
이 또한 소유할 것 없으니
모든 법이 없음을 분명히 깨달으면
자연히 있지 않음을 안다.
다투는 모든 법은
이 또한 소유할 것 없고
모든 법이 허무한 줄 알면
다투지 않는 줄 안다.
모든 법은 소유할 것 없어
본래 깨끗해 영원히 모습이 없으니
본래 깨끗해 얻을 수 없어
잃어버릴 것도 없다.
모든 법을 끊어 버린 것을
밝은 지혜라고 하며
이것을 영원히 헐어 버림이라 하니
헐어 버릴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
모든 법은 없앨 것이 없어
생각으로 일으켜 세울 수 없고
또한 대부분 헐어 버릴 것도 없어
법 또한 얻을 수 없다.
모든 법은 본래 허무하여
또한 찾아볼 수 없으니
설사 얻을 것이 없어도
방편으로 소유함을 나타낸다.
모든 법은 소유할 것 없고
인연에 의해서 생기니
소유와 무소유는
경전에 널리 설하였다.
모든 법은 서로 응하고
다툼이 없음을 나타내 보이니
다투지 않아 자연스럽고
구경(究竟)에는 모습도 없다.
모든 법은 응할 것 없고
지을 것 없어 멸도(滅度)도 없으니
이처럼 얻을 수 없어
늘 모든 헤아림[數]을 떠난다.
모든 법은 얻을 수 없어
또한 과거가 있을 수 없다.
영원한 실체가 없는 것
본래 참다움이라고 한다.
모든 법은 기쁘면서
기뻐할 수 없으니
만약 법을 얻을 수 없으면
또한 언설(言說)도 없다.
모든 법에 방일함이 없는 것
두 가지 함께 소유할 수 없어
자연히 취할 수 없으니
이것이 깊고 미묘한 모양이다.
모든 법은 알 수 없어
무아(無我)이면서 자연이니
뜻으로 알기를 구할 수 없어
자연이라고 부른다.
함[爲]도 없고 즐거울 것도 없고
또한 소유할 것도 없다.
유(有)로 말미암아 무명업(無明業)이며
이로 인하여 무위(無爲)라고 부른다.
만약 모든 법을 생각해 보면
구경(究竟)은 볼 수 없다.
이는 진실한 말이니
의념(意念)이라고 이른다.
모든 법을 생각지 않아
머무를 곳과 돌아갈 곳이 없어
이를 알면 중생이 없으니
법(法) 가운데 법이라고 한다.
모든 법은 마치 허깨비와 같고
허깨비는 소유할 것 없는데
법에 어둡기 때문에
생사(生死)를 말한다.
모든 법은 모양이 없어
자연의 이치대로이니
만약 모든 법이 없으면
해탈은 해탈이 아니다.
거짓으로 경계(境界)라고 하나
자연이어서 경계가 없다.
어리석어 기대어 집착하기 때문에
부계(部界)라고 이른다.
부처님께서 선사에게 말씀하셨다.
“물질[色]ㆍ느낌[痛]ㆍ생각[想]ㆍ작용[行]ㆍ인식[識]은 공(空)하여 본래 소유할 것이 없고 눈[眼]ㆍ귀[耳]ㆍ코[鼻]ㆍ입[口]ㆍ몸[身]ㆍ마음[心]은 공하여 본래 소유할 것이 없고, 흙ㆍ물ㆍ불ㆍ바람은 공하여 본래 형상이 없다. 그러나 인연이 합하면 이루어지니, 마치 다섯 가지 사물로 집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무엇을 다섯 가지 사물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재목(材木)이며, 둘째는 기와와 풀이며, 셋째는 성(城)을 빙 둘러서 흐르는 물이며, 넷째는 사람의 공력(功力)이며, 다섯째는 진흙이 섞인 물이다. 이 다섯 가지 사물로 집을 이룬다. 그러나 본래 각각 떨어져 있을 때는 집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연이 합하여 몸을 이루는 것도 이와 같아서 5음(陰)의 인연이 닿으면 곧 4대(大)가 있게 되어 몸이라고 부른다.흙ㆍ물ㆍ불ㆍ바람이 각각 인연으로 와서 합하는 것이 집의 네 기둥과 네 벽이 모두 인연으로 모이는 것과 같아서 합하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무너져서 모두 처소가 없다. 마치 꿈속에서 집ㆍ성곽ㆍ수목ㆍ꽃ㆍ열매를 보고 물을 대고 전답을 갈고 5곡(穀)을 심어 때에 따라 자라면 주인이 수확하여 자급자족할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심신(心神)이 밝지 못하여 모든 삼계가 다 공한 줄을 알지 못하고 의지하여 바라는 것을 구하여 곧 의식을 내어서 12인연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끝없이 돌아다녀 신식(神識)이 피로하여 다섯 가지 세계[五趣]에서 깊이 미혹하여 휴식할 때가 없다. 그리고 본래 공하여 꿈에서 보는 것과 같은 줄을 알지 못하고 깨어남에 처소를 알지 못하니, 어느 곳으로 돌아간 것인가?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야 다섯 가지 세계의 윤회를 마치고 본래 처소가 없어 홀로 거닐어도 두려움이 없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물질ㆍ느낌ㆍ생각ㆍ인식이 공하고
눈ㆍ귀ㆍ코ㆍ입ㆍ뜻도
본래 고요하여 소유할 것 없고
흙ㆍ물ㆍ불ㆍ바람은 각기 다르다.
경계를 알아 자재하여
널리 설하되 부장(部章)이 없어
말하는 좋은 불토는
그 경계 열반의 상[涅槃想]이다.
모든 법은 각기 형상 있으나
본래는 합하여 모일 것도 없다.
텅 비어 고요한 줄 알지 못하니
본래는 몸이랄 것도 없다.
얻을 것 없어 체득할 수 없으나
인연 따라서 합하여 이루어졌다.
얻을 것 없어 이를 수 없는데
눈앞에서 생겨남을 바란다.
그것은 계(戒)를 닦을 것 없어
또다시 금계(禁戒)를 범할 것 없고
행할 것도 없고 지킬 계율도 없다.
이것이 모든 법의 모습[相]이다.
모든 법은 소유할 것 없는데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생겨난다.
무명이란 법이 있으므로
곧 밝은 지혜에 나아가 도달한다.
모든 법은 거짓으로 이름이 있으니
이것을 무소유라고 한다.
거짓으로 일러 법이랄 것 없으니
이것을 멸도(滅度)라고 말한다.
일어난 것의 생겨난 곳 없으나
눈앞에 5음(陰)이 있고
그 5음은 볼 것이 없는데
보인다고 말한다
소유는 처소가 없는데
변화에 따라 유법(有法)을 보인다.
법은 생사의 업을 떠나서
오래도록 생사의 어려움이 없다.
요술쟁이가 형상을 변화로 만들듯이
어리석어 사람이 있다고 한다.
소유와 무소유에
눈 밝은 이는 미혹되지 않는다.
법의 생겨남과 생겨남 없음에
지혜로운 이는 따지지 않는다.
모든 법은 다 텅 비었건만
어리석은 이는 알지 못한다.
생겨난 모든 법은
마땅히 없어지니
태어나고 병들고 죽음
이를 버리면 두려움 없다.
모든 법은 다 텅 비어
법 또한 돌아갈 곳 없으니
선사는 이것을 알아라.
이는 부처님이 연설한 바이다.
정각(正覺)은 짓는 바가 없으면
곧 미칠 수 없다.
만약 도처(道處)를 못 얻으면
삼계의 일들을 겪는다.
만약 불도(佛道)를 바라보고
집착하면 정각을 구하지 못하며
만약 행하는 뜻이 도(道)에 있으면
영원히 무상(無想)에 나아가지 못한다.
모든 생사(生死)가 자연이라도
자연의 법이라고 관찰하지 않으니
자연은 소유할 것이 없어
이것을 무위상(無爲想)이라 한다.
구경(究竟)에는 생겨날 것이 없어
언설(言說)로도 얻을 수 없으며
무명업(無明業)을 행하기 때문에
무위법(無爲法)을 보인다.
생각해 본 여러 이치로
모든 법은 자연이라
모두 생겨날 것이 없어
다투는 일도 없다.
널리 설한 바 깊고 미묘한 법
받들어 행하지 않음 없으며
모두 살리는 데 쓰이고
보살은 불쌍히 여김을 행한다.
그때 선사가 게송으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은
우리들을 연민히 여겨서이니
몸을 의심의 그물로 여겨서
이 법의 이치를 펴셨다.
부처님의 출현하심은 사의(思議)할 수 없는데
구족하게 변화를 일으키셔서
마군의 그물을 부수고
62사견(邪見)을 제거하셨다.
생사의 근본을 끊으시고
보리수 아래 앉으시니
영원히 근심스런 읊조림이 없어지고
여러 생각의 집착을 소멸하셨다.
거짓된 업을 풀어 밝히고
부처님께서는 모든 견해를 없애시고
용맹스럽게 세속을 위하셔서
우리들의 여러 의심을 끊으셨도다.
그때 부처님께서 선사 동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의 행한 바는 일찍이 허망한 적이 없었고, 구호(救護)한 바가 많고 은혜를 베풀어 구제하되 다투는 일이 없었다. 여러 허물을 제거하여 모든 더러움을 없애고 중생들을 연민히 여겨서 심원(深遠)한 이치를 행하며, 바라는 생각을 품지 않는다. 세간은 견고한 것이 없어 탐욕을 없애고, 탐욕을 없앤 까닭으로 뭇 번뇌를 버리고 항상 평등한 마음을 행하여 중생들에게 베풀되 뜻에 허망하지 않다. 대자비(大慈悲)를 행하는 법을 이룰 수 없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아 정진(精進)을 버리지 않고, 마음에 부처님의 길을 행하되 부지런한 업을 잃지 않는다. 해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인욕을 받들어 행하되 다투는 일이 없다.보는 이 없어도 하루 종일 오로지 행한다. 선사는 한마음으로 나태함을 버리고 도행(道行)을 성취하여 마음이 선정에 들어가 고요하며, 훌륭한 지혜를 닦아서 모든 법을 영원히 얻지 않더라도 행함에 두려운 바가 없어 마음에 겁먹거나 나약하지 않다.
도심(道心)을 발현(發顯)하여 걸림 없이 행하고 여래의 열 가지 힘을 성취한다. 마땅히 무슨 행으로 뛰어나고 특별한 업에 이르러 오로지 부처님을 받들며 시방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노닐면서 행함에 걸림이 없이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시키는가?”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허망함이 없는 업을 행하니
이것이 모든 보살의 말이다.
그러므로 해탈의 문을 받들고
모든 장애되는 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행함이 없음을 바른 행이라고 하니
이는 보살의 업이다.
만약 능히 이를 행할 줄 알면
곧 탐하여 구하는 것이 없다.
법으로 구호하여 거두니
모든 보살의 베푸는 바이다.
얻을 것이 없는 이치
이 행을 무상(無上)이라고 한다.
내가 도법(道法)을 행한다고 말하면
곧 전도에 머문다.
전도된 업에 머물기 때문에
곧 두려운 것이 있다.
가령 다툼이 있더라도
다툼의 소재(所在)를 보지 않으며
밝게 아는 이는 이것을 통달하여
무상승(無上乘)을 행한다.
이 승(乘)은 두려운 것이 없고
대승은 최고이며 끝이 없다.
두려움과 두려운 것이 없으니
이 또한 방일함이 없다.
모든 것을 소유함이 없는 것이
온갖 행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나며
만일 비어 고요함을 알면
무상도(無上道)를 행함이다.
깊고 미묘한 법을 행하여
모든 법을 구호하며
건너게 해줌 또한 심원(深遠)하며
모든 바라는 생각을 없앴다.
행하는 것 아득하고 현묘하여
두 가지 다 처소가 없다.
만약 본제(本際)를 알아
법에 의지하는 생각이 없으면
법은 영원히 더러움[垢]이 없어서
더러움을 제거하지 않으며
이 법은 본래 청정하여
도리어 욕심에 대하여 버림을 베푼다.
사역(邪逆)과 애욕이
견고하지 않음을 드러내어 보여 주니
문자에 끄달리지 않아
이 구절을 무상(無上)이라 한다.
집착하지 않음이 허깨비와 같아서
이는 말이 없는 가르침이니
전도된 행을 버리면
문득 다툴 생각이 없어진다.
모든 중생들의 행함은
실로 얻을 수 없으니
만약 능히 그 이치를 알면
이 행함은 바로 훌륭한 가르침이다.
중생들은 무명(無明) 때문에
중생[黎庶]이라고 이름한다.
중생의 법이 그러하듯이
이 도는 무상(無上)이다.
생각이 중생에 미쳐서는
영원히 얻을 수 없으니
이를 제일 자비[第一悲]라 하여
자비를 찬탄하는 일은 끝이 없다.
이를 세상의 큰 보시라고 하며
이를 보살[大士]이라고 한다.
항상 열반락을 사모하여 집착을 놓아버리니
이를 지혜의 도심[慧道心]이라 한다.
가령 법은 얻을 수 없으니
모든 법은 텅 비어 실체가 없다.
보살이 밝게 사무침을 보이니
좋은 보시(布施)라고 한다.
법은 얻을 수 없음을 알아
두려운 것이 없으니
더 존귀할 것이 없는 이 법을
바로 보시라고 부른다.
법의 모양은 얻어 가질 수 없고
부처님의 법은 생각할 수 없으며
이 계(戒)는 범할 것이 없고
모든 법은 집착할 것이 없다.
부처님의 국토는 불가사의하여
모든 세계를 볼 수 없다.
계(戒)에 있어서 바라는 생각이 없으니
모든 보살들이 찬탄한다.
모든 중생들이 능히 참아도
모든 것 얻을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 가르쳐 깨우쳐 주신 것
이 법이야말로 제일의 법인(法忍)이네.
부처님께서 다시 선사에게 말씀하셨다.
“물질[色]은 공(空)하여 얻을 수 없고 느낌ㆍ생각ㆍ작용ㆍ인식도 공하여 얻을 수 없다. 이른바 공(空)이란 것은 물질은 공하되 다시 공과 다르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작용ㆍ인식의 공함도 다시 공과 다르지 않고, 4대(大)ㆍ5음(陰)ㆍ18제종(諸種:18界)ㆍ3계(界)도 본래 공하고, 12인연도 없어서 공하되 다시 공과 다르지 않고, 현세(現世)ㆍ열반의 세계[度世]ㆍ유위(有爲)ㆍ무위(無爲)ㆍ4대가 모두 공하되 다시 공과 다르지 않다. 물질은 물거품 덩어리와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고, 생각[思想]은 파초와 같고, 생사(生死)는 꿈과 같고, 인식은 허깨비와 같고, 삼계는 변화하는 것과 같고, 다섯 가지 세계[五趣]는 그림자와 같으니, 그림자 같은 것은 인연을 따라서 생기기 때문이다.삼계의 본말(本末)인 욕계(欲界)ㆍ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마치 그림 그리는 사람이 하얀 벽판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인연이 화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나는 새가 허공을 나는 것과 같다. 보살은 이처럼 바라는 생각이 없이 행하여 시방에 돌아다님이, 마치 태양이 허공에 다니되 어둠에 물들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은 이처럼 삼계를 홀로 다니되 마음에 집착함이 없고, 음(婬)ㆍ노(怒)ㆍ치(癡) 3독(毒)의 그윽하고 깊은 어둠을 제거하여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 살면서도 진흙과 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은 이처럼 생사 속에서 최정각(最正覺)을 성취하여 마음이 깨끗하기가 허공과 같아서 영원히 집착함이 없으며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시킨다.”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그 마음 얻을 수 없다면
다툼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중생을 얻을 수 없다면
이는 제일의 법인(法忍)이다.
보살이 게으른 마음을 떠나면
그 뜻에 행하는 것 없고
영원히 부지런히 닦는 것 없어도
최고의 정진(精進)이라고 한다.
그 몸과 마음을 버려
바로 사악한 견해가 없으면
보살은 말하는 것 없어도
이는 제일의 정진이라고 한다.
만약 게으른 이가 있으면
보살은 그를 교화하여 세우면서
마음도 없고 행하는 바도 없어서
제일 정진에 머무른다.
그 마음 얻을 수 없어
안과 밖에 집착하는 것 없다.
만약 마음이 미칠 수 없으면
이는 정의(定意)7)이다.
마음에 항상 스스로 부지런히 닦아
자연히 소유할 것 없으면
생각도 없고 정수(正受:삼매)도 없으니
이에 삼매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의(定意)라고 말함은
능히 이 행을 함으로써
안주함을 자연이라고 하니
이것이 제일의 정의이다.
지혜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어느 곳이 자연의 법인가.
자연과 지혜
둘 다 함께 무소유이다.
이 법은 얻을 수 없어
이 식(識)이 정법(正法)을 행하나
식으로 법을 알 수 없으니
자연히 무소유이다.
만약 이 행(行)을 알면
보살의 뜻이 견고해져서
제일의 이치를 행하니
세간에 나아갈 것이 없다.
대중의 모임에서 똑같은 이 없어
대중을 위해서 법을 베푼다.
이들은 비록 돌아다니며 살지라도
중생들의 바라는 생각이 없다.
부처님께서 다시 선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허깨비와 같고, 허깨비는 본래 공(空)하여 소유할 것이 없다. 그러나 미혹하고 어리석으며 속된 이는 스스로 자기 몸과 다른 사람을 계산하고 비교하여 소유할 것이 있다고 하므로 다섯 가지 세계[五趣]에 빠진다. 확실히 깨달아 알면 이 모두 두려울 것이 없다. 모든 법의 본말(本末)은 안과 밖이 없으니, 이와 같음을 깨달으면 마음에 겁내거나 나약함이 없어서 삼계를 어렵게 여기지 않으며 삼계가 다 공하게 된다.만약 보살이 이것이 본래 없음을 깨달으면 홀로 삼세를 거닐되 어려워하는 것이 없고 생사를 통달하여 허공이 형상이 없고 본래로 이름이 없는 것과 같게 된다. 모든 법도 다시 이와 같이 형상이 없고 이름도 없는데 무명(無明) 때문에 삼계에 내달려서 끝이 없이 윤회하게 되니, 마치 다섯 가지 사물이 허공에 머물러서 더러움[垢]을 어찌하지 못함과 같다. 자연히 마음이 본래 청정하거늘 임시방편인 줄을 바로 몰라서 3독(毒)ㆍ5음(陰)ㆍ6쇠(衰)의 객진(客塵)에 가려졌다. 비록 시비(是非)가 있더라도 본래 청정함은 물들이지 못하니, 마음을 열어 통달하고 삼세가 공한 줄을 알면 곧바로 대도(大道)에 들어갈 것이다.”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중생은 허깨비와 같고
그 허깨비는 소유할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선설(宣說)하는 이
영원히 두려울 것이 없다.
자기 몸과 다른 사람의 몸
두 가지 다 허무하고 적막하다.
능히 이것을 깨달으면
영원히 두려울 것이 없다.
그 안과 밖의 법
있는 곳을 헤아릴 수 없고
겁내고 나약한 마음이 없으므로
세속을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모든 법은 장애될 것이 없어
마치 허공에 노니는 것과 같다.
이르는 곳마다 허공과 같으니
이 법을 자연이라고 한다.
만약 이것을 깨달으면
보살은 두려울 것 없다
모든 법을 분별하여
중생들의 행을 깨달으면
저것이 중생들을 어찌 못하니
그 법 모두가 이와 같다.
모든 세계를 쪼개고 쪼개면
그 세계는 소유할 것이 없다.
이것을 입도행(入道行)이라 하고
무상도(無上道)라고 하며
이 지극한 업을 다하면
중생들의 마음이 가는 곳을 알게 된다.
모든 세계와 중생들은
두 가지 다 소유할 것이 없다.
그것이 이와 같음을 생각하면
모든 법을 깨달아 알게 된다.
그 안과 밖의 일 합하여
모여도 바라는 생각 없고
제거할 수 없는 법이라 여기고
참된 본제(本際)라고 한다.
이 법은 사의(思議)할 수 없어
부처님의 법이라고 한다.
이것은 모두 소유할 것 없고
이룰 것도 없다.
행하는 바가 능히 이와 같아
헤아릴 사람이 없으며
무위(無爲)의 지혜를
부처님의 지혜라고 한다.
이 승(乘)이 대승(大乘)이며
널리 모두를 편안하게 한다.
영원히 이 세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간도 소유할 것이 없다.
그는 세계에 있으면서
세간의 모든 세계에 널리 미친다.
보살은 행하는 바 없이
무상혜(無上慧)를 구한다.
이 법은 심원(深遠)하니
부처님의 법은 불가사의하며
만약 법을 얻을 수 없으면
이는 부처님의 도에 가깝다.
부처님과 경법(經法)은
모두 다 없는 것
만약 이와 같이 행하는 이라면
부처님의 도에 가깝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하는 이
속인과 짝하는 일 없고
그 마음에 집착함이 없어
그는 부처님의 도에 가깝게 된다.
부처님께서 다시 선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 대사(大士)가 이 깊은 경을 듣고서만약 읽고 외워 지니고 마음에 두려움이 없으면 큰 서원을 잘 입어서 마음은 금강처럼 견고하며, 속히 보리수에 근접한 도량에 앉아서 부처님의 경계에 가까이 들어가 직접 지진무애탈문(至眞無礙脫門)을 얻고, 행함이 없고 합하여 모여듦이 없는 곳을 관찰하여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가서 크게 자비하고 번뇌가 없는 도(道)의 불쌍히 여김을 굳건히 익혀서 18불공(不共)의 모든 부처님의 법을 성취하여 삼세의 최존혜(最尊慧)로서 달과 태양처럼 덕이 같은 이가 없으며, 지혜는 허공을 뛰어넘어 도의 밝음이 우뚝 솟아 비유할 수가 없으며, 끝이 없이 거룩한 무견정상(無見頂相)8)을 성취한다.만약 이 무한하며 아름다운 경전을 듣고서 이 깊고 미묘한 경전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연설하고 믿고 즐기는 이가 있다면, 지난 과거세에 일찍이 모든 부처님을 뵙고서 또한 헤아리지 않았으며, 또 업신여겨 교만하거나 희롱하며 비웃지 않은 자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그 사람을 예견(豫見)해 보면 본래 일찍이 이 경을 믿고 여래를 오래 전부터 우러러보았던 자이다. 만약 이 경전을 믿고 즐겨 익히지 않고 듣고서 희롱하면, 외도(外道)의 학문과 모든 마군의 관속(官屬)과 방일하는 사람이다. 이 법을 믿는 자는 부처님의 제자이며,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의 스승이 되어 직접 수염과 머리를 깎아 주시고 사문(沙門)을 만드시며 믿지 않는 자는 외도의 삿된 업을 행한다. 그리고 96종의 외도가 도법(道法)을 반역한다.”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리수 아래에 앉거나
참된 도량을 거닐어도
부처님의 도(道)를 믿지 않으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걸림이 없는 법
구경(究竟)은 얻을 수 없으니
법이 처소가 없음을 분명히 알면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뜻이 거룩한 지혜에 들어가면
모든 법의 왕이다.
모든 법과 도의 지혜[道慧]는
부처님께서 널리 설하시는 바가 아니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는
어리석어 내는 것이니, 곧 바라는 생각이다.
모든 보살은 생각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은 크게 성스럽고 밝으시다.
이 세간을 널리 관찰하니,
세간은 다 얻을 수 없다.
세간을 분명히 알면
이 또한 처소가 없다.
성스러운 부처님과 중생은
이에 바라는 생각이 없다.
생각[思想]이 없는 이는
훌륭하고 자비가 위없도다.
가령 중생계와
법계(法界) 또한 그러하니
이것을 일러
보살은 집착함이 없다는 것이다.
자비로 불쌍히 여김을 보려 해도
그 불쌍히 여김은 모양이 없으니
그 불쌍히 여김이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이가 깨달아 행할 바가 아니다.
다섯 가지 일 허공에 있어
처소가 없을 수 없듯이
모든 속세도 이와 같아
이것이 바로 위없는 불쌍히 여김이다.
위없는 정법(正法)을
바로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니
이는 세간을 탐함이 없어
자연법이라고 한다.
세간을 보호하며 비추심
그 색은 소유할 것 없고
이 색 없는 법 때문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라 한다.
허공은 끝이 있을 수 없고
넓고 평평하여 얻을 수 없다.
이것이 부처님의 정법이니
무능관(無能觀)이라 한다.
그 지혜는 미칠 수 없으니
이것은 무상대도(無上大道)이다.
지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견고한 것도 없다.
이 세계와 저 피안의 세계
소견(所見)으로 볼 수 없는 듯
깊이 알아서 이를 행하지 말라.
이는 망상으로 구할 것이 아니다.
이 지혜의 법을 생각하면
이 법은 평등하다.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어기면
좋은 친우(親友)가 아니다.
정진함이 없이 제도하는 것을
바로 허망함에 이른다고 하니
그는 평등함을 행하지 않아
좋은 친우가 아니다.
이 법을 발흥(發興)하는데
만약 다시 이 법을 없애면
이들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능히 뭇 괴로움을 끊으면
본래 청정하여 소유할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설법하는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선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모든 행을 말하면 모두 습관에 따라서 쓰되, 삼계에서 익히므로 도습(道習)을 닦고서도 내가 있다고 헤아린다. 때문에 큰 자비를 행하여 번뇌가 없는 불쌍히 여김을 닦으며, 삼계에 의지해서 3해탈문[脫門]을 행하고 4대(大)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비신(非身)을 행하는 것이다. 생로병사 때문에 4무외(無畏)를 구하며, 12인연 때문에 12부경(部經)을 깨닫는다.18종(種) 때문에 18불공의 모든 부처님의 법을 행하고, 시방의 중생들이 10악(惡)을 범하기 때문에 10선(善)을 행하여 열 가지 힘[十種力]을 구하고, 세 가지 폐단[三蔽] 때문에 3달지(達智)에 이르고, 6정(情)에 집착하기 때문에 6바라밀을 행하되 다함이 없이 하고, 여섯 가지 신통[六通]을 홀로 행하여 병에 따라서 약을 주어 위험한 액난을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부처님은 마치 훌륭한 의사와 같고, 경법(經法)은 약과 같다. 질병이 있기 때문에 의약이 있으며, 병이 없으면 약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본래 공(空)하여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고 거짓 이름도 없다. 마음의 평등함은 허공과 같아서 비교할 것 없고 짝할 것 없다. 홀연히 정해진 끝[際]이 없어지면 바로 도에 응하게 된다.”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머무는 바 없는 법은
그 속에서 익혀 행할 바이나
널리 펴서 사라지는 것을 닦으면
불법(佛法)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
만약 이 고요한 법에
허망한 생각을 지으면
허망한 법 때문에
멸도(滅度)에 가까이하지 못한다.
다투는 법을 펴며
이것이 멸도라고 하니
선사는 마땅히 이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바른 견해의 행이 없다.
만약 수행할 도가 있는데
반역된 일을 선포하면
벗이 어지럽고 전도되니
이것은 배우는 이의 업이 된다.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강설(講說)
보살은 크게 칭송하나니
미래에 모두 배움에 나아가게 하려고
도(道) 행하기를 권하여 교화하셨다.
만약 부처님께서 교화하신 깊고 미묘한 법을
받들어 지니는 이 있으면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을 공양하듯 하리라.
만약 밝은 지혜 있는 이가
이 진실한 법을 수지(受持)하면
이들의 미래세(未來世)는
정법(正法)으로 말미암아 존립한다.
법을 행하지 않고
마음에 사상(思想)을 세워 두고
스스로 지혜에 응했다 하나니
여타의 법으로는 도를 이룰 수 없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선사 동자는 이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이루고는 흔연히 크게 기뻐하며 허공에 솟구치니, 땅과의 거리가 4장(丈) 9척(尺)이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니 5색 광명이 우뚝 솟아 매우 미묘하였고, 청색ㆍ황색ㆍ적색ㆍ흰색ㆍ홍색ㆍ자색이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나와서시방의 한량없는 부처님의 국토를 비추고 돌아와 부처님을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정수리로 들어갔다.그때 여섯 번 반복하여 삼천대천세계가 진동하고 허공 하늘에서 곱게 빻은 전단향(栴檀香)ㆍ목밀향(木蜜香) 등의 많은 향을 비처럼 내리고, 하늘의 아름다운 꽃을 비처럼 내려서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공후(箜篌:피리) 등의 악기는 연주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리를 내었고, 허공을 장엄하고 시방을 두루두루 아름답게 장식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 삼천대천세계는 모든 보배가 나열되고 옥구슬이 서로 어울려 영롱한 이슬처럼 빛나는 미묘한 장막ㆍ높은 누각ㆍ수목ㆍ흐르는 물ㆍ욕지(浴池)에서는 5음(音)을 함께 발하되 온화하고 아름다우며 애잔했다. 그리고 이 변화를 듣고 보고는 기뻐하지 않음이 없어 미증유(未曾有)를 얻었다. 현자(賢者) 아난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길게 꿇어 앉아 두 손을 깍지끼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무슨 인연으로 빙그레 웃으시며, 이미 빙그레 웃으셨는데 무슨 뜻이 있어서입니까?”
그리고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허망한 적 없으시고
부처님께서는 헛되게 미소 짓지 않으시며
자비로 연민으로 부처님께서는 설하시니
무슨 인연으로 빙그레 웃으십니까?
하늘은 허공 속에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며
제각기 입으로 노래하여 찬탄하니
흔쾌히 경전을 말씀하시네.
태양과 번갯불 같으사
약간의 빛깔 미묘하시며
또한 이와 같이 비추시니
광명마다 멀고 가까이 비추시네.
모든 부처님의 법처럼
정도(正道)를 수여하시고
돌아와 자신을 세 바퀴 돌고
홀연히 정수리로 사라졌네.
부처님께서 미소 지어 비추시니
약간의 광명 빛이 부처님의
입에서 나와 정수리로 들어갔으니
오직 이 상서로운 뜻을 말씀하소서.
그때 부처님께서는 현자 아난을 위해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선사 족성자(族姓子)는
한량없는 덕을 지었으니
마땅히 여래의 깨달음을 이루어
하늘과 인간의 존귀한 이[天人尊]가 되리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선사 동자는 마땅히 수없이 많은 부처님을 만나 뵙고 세세생생(世世生生) 따라 모시고, 일찍이 멀리하지 않고항상 지극한 마음으로 모든 부처님께 옷ㆍ음식ㆍ평상ㆍ이부자리[臥具]ㆍ병을 치료하는 의약품 등을 공양하였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가신 뒤에는 사리에 공양하였는데, 많은 보배 탑을 세우되 높이가 4만 리였고 사리를 가져다 많은 보배 탑에 봉안(奉安)하고 받들어 섬겨 공양하였다. 그리고 좋고 이름난 향ㆍ여러 가지 꽃ㆍ의복ㆍ여러 가지 미묘한 보배ㆍ기악(技樂)ㆍ깃발[幢幡]ㆍ전단향ㆍ잡향(雜香)ㆍ해탈화(解脫華)와 여러 가지 비단으로 모든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을 공양하여 섬기고 최후 말세에 마땅히 부처님의 도를 성취하여 명호를 무구광(無垢光) 여래ㆍ지진ㆍ등정각ㆍ명행족(明行足)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佛世尊)이라 하리라.”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여러 가지 보배를
시방세계에 가득히 채워
모든 부처님과 세간을 보호하는
여러 여래께 공양하더라도
만약 이 경전을 들으면
그 공덕은 저 보시보다 많으니
머물러 힘써 법을 강설하여
세간을 보호하고 삼계를 비추라.
그때 사리불(舍利弗)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듣고 마음이 몹시 기뻐서 미증유(未曾有)을 얻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지극히 거룩함을 생각하였다.
‘덕은 수미산을 뛰어넘고 지혜는 삼세를 초월하고, 도는 비교할 수 없어 허공과 같아 짝할 이가 없고 옛 일을 더듬어 지금 일처럼 알고, 보시는 바는 끝이 없고, 지혜가 밝고 넓어서 비교할 것이 없고, 액난을 구제하여 밝게 통해 줌이 허공과 같아 끝이 없이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그때 사리불이 부처님의 은덕을 생각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매우 미묘한 이 경법(經法)
세간을 보호하사 펴시되
그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으시니
어떻게 그 이름을 알 수 있으리.
예로부터 아직껏 이 법(法)
널리 설하심 듣지 못했는데
머무르는 곳 없이
편안하게 이 법을 말씀하시네.
가령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도
헤아려 얻을 바가 없었는데
편안하게 이 법을 말씀하시네.
가령 유위계(有爲界)와
무위계(無爲界)도
이 두 가지 쌓일 바가 없으니
이 경(經)의 돌아감 이러하네.
세간을 보호하며 묘법(妙法)을 펴시고
도는 바르고 참된 가르침을 행하여,
봄[覩]에 처소가 없으시니,
이 경의 뜻이 이러하네.
말씀하신 모든 부처님의 법
찬탄하는 바 없어
제가 얻을 수 없더니
편안하게 이 경을 말씀하시네.
설사 시방의 세계
자연이어서 소유할 것 없다 해도
세간을 보호하여 말씀하신 바
이 경의 뜻에는 미칠 수 없네.
오직 세간을 불쌍히 여기시어 말씀하소서.
사람 중에 최고인 분이시여.
원하건대 연설하소서.
아직껏 이 경의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정왕(頂王)이니, 마땅히 함께 전하여 불러야 한다.
사리불이여, 마땅히 정왕이라고 이름하는 까닭을 알라. 마치 수미산의 꼭대기가 4천하를 모두 보는 것과 같아서, 이 경의 지혜를 알면 4무외인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얻어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어 삼계의 액난을 벗어난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이 법을 좋아하고 기뻐하면 시방세계가 구제를 입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정왕’이라고 부르며, 항상 이것을 받들어 지녀야 한다.만약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경을 받들어 지니면 마땅히 세간에서 모든 하늘과 인민들, 백만억 무리를 보호하고 무수한 공덕을 일으켜서 무상정진(無上正眞)이 되고 연각과 성문은 되지 않는다. 만약 이 법을 펴면 반드시 다함이 없는 세간의 보호를 성취하고, 깊고 어려운 법을 궁구하여 밝힘을 듣고 곳곳마다 이치를 연설하며, 이 법의 심오하고 위없음을 알면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모든 법을 받들어 지니고 다시는 여우 같은 의혹이 없을 것이다.만약 이 경을 펴서 지극히 교화하며 깨우치는 정왕법(頂王法)을 받아들이면 단지 제1 법인(法忍)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제2ㆍ제3 등 3인법(忍法)을 갖출 것이다. 그 법은 얻을 수 없고, 도에 처소가 없고 광현(光顯)하는 바 없이 대도(大道)를 펴고, 모든 법에 있어서 이 사람은 욕심이 없고 현재에 구함도 없다. 만약 이 경을 받들어 지니고 부처님께서 널리 설하신 정왕법의 언사들을 외워사람을 교화하면 복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만약 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는 이가 있으면 지혜를 행하여 속히 뛰어남을 얻어 여인의 나쁜 태도를 버리고 모두가 한결같음을 알며, 많은 것이 한결같음을 알기 때문에 곧 이 법을 지닌다. 이 경을 널리 설하면 모든 행업(行業)을 함에 있어서 모든 법의 돌아갈 곳을 분명히 알고 이 법설(法說)의 대부분의 비추는 곳에 들어가서 약간의 행하는 바 정진(精進)을 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도(道)의 가르침을 받지만 본래 공하여 법을 널리 설할 바가 없고, 모두 처소가 없어 모두 얻을 수 없다.왜냐하면 본말이 공한 까닭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치로 미칠 수 없으니 모든 법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문(門)을 받들어 지녀도 법은 얻을 것이 없다. 그렇다면 있음도 없음도 아닌 것, 이것은 본래 청정한 법이니, ‘집지(執持)’라고 이름한다. 이는 광명이 한량없이 널리 밝힘을 사모하여 마땅히 때에 따라서 이 『정왕경(頂王經)』을 강(講)하되 널리 법계를 구하고 이 광명의 눈을 마음에 두어 경계를 얻지 않으면 ‘집지’라고 한다. 모든 법은 매우 깊어서 얻을 법이 없으니, 만약 얻을 수 없다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변재가 구족하고 뜻이 부처님의 도에 있으면 또한 이와 같이 깨달아서 경의 이치를 밝히게 되니, 책도 없고 형상도 없으나 용(龍)이 화생(化生)함에 먼저 구름을 일으킨 연후에 비를 내리는 것과 같으며, 마음은 본래 온 곳이 없지만 인연이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지혜는 형상도 없고 사의(思議)할 수도 없다. 만약 헤아릴 수 없는 법을 선포하고자 하면, 마땅히 이 경을 배워야 한다. 일체가 공하여 집착할 법이 없는 줄을 알면 경전을 사유(思惟)함에 온 곳을 알 수 없다고 할 것이니, 말한 바가 매우 훌륭하다. 이 법은 ‘무생(無生)이다’에 대해서는 경에서 전한 바와 같다. 그 광명이 현묘하게 비춤은 태양처럼 밝으며, 광명은 온 곳도 없고 가도 간 곳이 없으니, 경전도 이와 같이 모든 소유를 비추어 소유할 것이 없게 한다.만약 비구가 변재를 집지(執持)하고 청정하여 끊어짐이 없고 마땅히 지극한 마음으로 이 『정왕경』을 배우면법의 광명이 무량하게 비춤으로 인해서 자세히 법을 널리 펴고 속히 걸림 없는 변재에 도달해 들어감을 얻는다. 『정왕경』을 배움으로써 세속을 이익되게 하니, 이것을 배우지 않으면 법의 맛[法味]을 알지 못한다. 끝이 없이 미묘한 경전인 『정왕경』은 위가 없으니, 만약 이것을 받들어 지니지 않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진다.모든 비구의 무리와 비구니가 만약 이 법전(法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의취(義趣)에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을 구하지 않아 바르고 참됨[正眞]에 이르지 못한다. 만약 비구와 비구니가 이 법에 돌아감을 구한다면 모든 세간을 위해서 법인(法因)을 지어라. 모든 법은 다 깨우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도리천(忉利天)에 머물러 하늘의 궁전에 있으면서 천하를 다 보는 것과 같이, 이 경을 배우는 이가 널리 중생을 초월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마치 수미산의 꼭대기 위에 서서 천하를 관찰하는 것처럼 이 경은 이와 같다. 모든 법을 밝게 알고 모든 것이 없는 줄을 보아 중생을 열어 인도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큰 횃불을 들고 어두운 방에 들어감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 경도 이와 같아서 법의 광명으로 모든 법을 비추니, 이 경전을 익혀 지니고서 아직껏 어둠을 만난 일은 없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광명이 떠올라 천하를 비추어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이, 이 경도 이와 같아서 도법(道法)의 광명으로 모든 삼계를 비추어 모든 중생들에게 도의 지혜를 보인다. 그것은 마치 달이 허공을 다니면서 쉬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경은 이와 같아서 시방세계의 고통 받는 곳을 비춘다.이는 법인(法印)이며, 모든 법을 인가하고 이 인(印)을 건립하여 보살을 위한다. 또 그 인을 헤아림에 마치 허공과 같아서 소유할 것 없고 있게 할 수도 없으니 허공과 인, 이 두 가지는 바라는 것이 없다. 부처님과 정법(正法)도 이와 같아서 이 경을 널리 설하되 널리 설한 바가 없으니, 그것은 마치 국왕이 사랑하고 아끼는 아들을태자에 책봉하여 나라의 재산을 맡기려고 왕이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이 홍업(洪業)을 태자에게 부탁하고 이 성스러운 재물과 천하의 국토와 모든 만민을 위임하니, 이 뒤로 모든 신하들은 명령을 받들도록 하라’라고 하는 것과 같다.이제 이 경법(經法)도 이와 같다. 선사 동자여, 부처님이 열어 주심을 따라서 무수한 보살들에게 주어 상법(上法)에 들어가도록 하라. 부처님께서 이 경법을 건립함은 모든 보살들에게 바람이 있어서이다. 치성한 덕의 근본은 손으로 잡기만 하여도 그 복은 헤아릴 수 없다. 널리 설한 『정왕경』을 받아 지니되 마땅히 의심하지 말라. 이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한다. 변재를 이루고자 모든 법에 집착하는 바가 없으면 마땅히 널리 설한 『정왕경』을 배워야 한다.세간의 법에서는 이를 정도(正道)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속인이 도(道)를 믿고 이 경(經)에 들어온다면 혹은 다시 믿지 않아도 이로 말미암아 경의 은혜를 듣고 깨달아 오랫동안 닦아서 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만약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널리 사람들을 위해서 설한다면, 모두 지극히 어진 이라고 생각한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속일 수 없는 것, 모든 부처님의 법을 알아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면 세상을 보호하는 위없는 이라고 한다. 만약 이 경을 설하면 모든 하늘의 천억 사람들이 허공에 머물러 찬탄하여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정각(正覺:부처님)께서 널리 설하신 바는 매우 미치기 어렵고 미치기 어렵다’라고 한다.묘전(妙典)을 설함은 이 모두 도(道)의 영웅이며, 지혜의 영웅이니 이익되는 것은 헤아려 생각할 수 없다.
만약 4구를 외워서 사람들을 위해 강설하면, 다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전을 정미하게 배우는 것과 같다. 이 깊은 법은 불가사의하여 널리 사람들을 위해서 설하면 그 사람은 자비를 입고 부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성전(聖典)을 사랑하고 즐기며, 이 정왕법을 선전(宣傳)하여, 경전의 위없는 도의 요체를 가르칠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불가사의라고 이름한다.”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이와 같이 순전히 상법(像法)일 때에경권(經卷)을 받들어지니고 외우며 읽거나, 만약 비구ㆍ비구니ㆍ청신사ㆍ청신녀가 열어 주심을 따라서 지니고 외우며 읽으면 그 공덕은 한량이 없어서 실어 놓은 물건을 헤아림에 끝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마치 허공의 끝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난아, 이 경을 받아 지님이 비록 많지 않더라도 4구 게송만을 받아 지니고 외워서 선포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설하더라도 그 복은 헤아릴 수 없고 덕은 끝이 없이 무변무제(無邊無際)하여 비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허공은 오히려 헤아릴 수 있고
갖가지 생각을 다 말할 수 있어도
이 경전의 공덕과 복력(福力)은
끝까지 다할 수 없어라.
시방세계의 위없으며
세상을 보호하는 모든 분을 받들고
만약 이 경전을 받들어 지니면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신통력으로
시방세계를 드는 것을 보더라도
이 경을 듣고 모든 부처님을
널리 받드는 것만 못하다.
시방세계에서
열 가지 업을 버리고
부처님을 받들더라도
이 경전을 듣고서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
만약 멸도하신 모든 부처님과
미래에 정각을 이루실 부처님과
현재 시방 국토에 계시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모든 유위(有爲)의 업은
크게 어지신 부처님께 귀의한다.
만약 이 경전을 받아 지닌다면
펴신 말씀을 바로 깨닫게 될 것이다.
만약 의식(衣食)으로 공양하면
이는 정밀한 지혜는 아니나
이 업을 지키는 이 있으면
이 지혜는 위없는 공양이다.
모든 시방세계에
가득한 온갖 진기한 보배로
모든 부처님께 보시하여도
이 복은 특별히 뛰어난 것 아니다.
이 경전을 배우는 이 있어
『정왕경』을 널리 설하면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니
그 널리 설함이 제일이다.
내가 널리 설하는 경전은
모든 불도(佛道)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그 마음 이에 의지해서
부처님을 공양하고자 한다.
세속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
제일가는 받들어 섬김이니
전혀 들지도 내리지도 않아
이것을 공양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정각(正覺)의 법
모두 얻을 수 없고
부처님께서 널리 설하신 바
제일의 예경(禮敬)이다.
정광(定光)의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겨
모든 보살의 법을 보니
제일의 공양이로다.
이 공양이 제일이니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면
수기를 받아
마땅히 미래에 정각(正覺)을 얻으리라.
부처님의 도에 머물러서
정각의 중생존(衆生尊)이 되려면
이 청정한 법을 익히고
부처님께 공양하여라.
이와 같이 공양하면
더 이를 곳이 없는 도를 얻어
중생들을 가엾게 여겨 법을 받들고
모두 부처님의 지혜에 나아가게 한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법은
세간을 보호하려 연설함이니
모두가 바름에 돌아가면
이것이 제일의 공양이다.
이미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면
부처님의 지혜는 사의(思議)할 수 없으며
곧바로 사자후를 하면
내가 오늘에 하는 것과 같으리라.
사자후를 인하여
모든 법에 용맹하며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고
멸도(滅度)에 들어 번뇌 없으리라.
부처님께서 다시 선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시방에 선포하여 모두가 받아 지녀서 정법을 받들어 행하게 하고 다함이 없는 큰 지혜를 동학(同學)에게 열어 보여 주어 다함이 없이 6바라밀을 익히고 행하여 삼계에서 구제하도록 하라. 만약 족성자(族姓子)와 족성녀(族姓女)가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널리 설하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니, 마치 허공이 한도가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선사 동자와 모든 성중(聖衆)과 모든 하늘ㆍ용ㆍ귀신ㆍ모든 아수라와 세간의 백성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듣고서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절을 하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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