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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03 불교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4권

by Kay/케이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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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4

 

남해기귀내법전 제4권


의정 지음
이창섭 번역


31. 관목존의(灌沐尊儀)

수행하고 공경하는 근본으로 삼존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계상(契想)의 원인이 어찌 사제(四諦)를 넘어서겠는가? 그런데도 진리는 그윽하고 깊으며 일은 거친 마음과는 거리가 있다. 성의(聖儀)에 물부어 씻겨 주는 것은 실로 모든 것을 제도하는 일이다. 큰 스승님은 비록 멸도하셨지만 그 형상은 아직 남아있어 마음을 지극히 하면 살아계시는 것과 같으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따르고 공경하여야 한다. 혹 향화를 늘 마련하여 청정한 마음이 생길 수 있게 하여도 되고, 또 항상 불상을 씻겨서 혼침한 업을 쓸어버려도 된다. 이렇게 마음을 두드린다면 드러나지 않은 이익을 스스로 거두어들이게 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권장한다면 유작(有作)의 공덕으로 아울러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복을 구하는 사람은 뜻을 여기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서쪽 나라의 모든 절에서는 존의(尊儀)를 씻기는 일은 늘
사시(巳時)에 하게 된다. 이때 일을 감독하는 사람이 곧 건치(健稚)를 울린다일을 감독하는 사람을 범어로 갈마타나(羯磨陀那)라 한다. 타나는 내려준다는 뜻이고, 갈마는 일이란 뜻이다. 내용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내려준다는 뜻이다. 예전에 이것을 유나(維那)라 한 것은 잘못이다. 유나의 유(維)는 중국의 음이고 그 뜻은 강유(綱維)를 말한 것이며, 나(那)는 범어의 발음으로 갈마다나란 말에서 갈마타를 생략한 것이다.
절 마당에는 보개(寶蓋)를 치고 불전 옆에 향병을 나열하며 금ㆍ은ㆍ동ㆍ돌로 만든 불상을 취하여 동ㆍ금ㆍ나무ㆍ돌의 반석에 안치한다. 안에서는 여러 기녀(妓女)들이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마향(磨香)을 바르고 향수로 관욕시키고전단향(栴檀香)ㆍ침수향(沈水香) 등을 취하여 초석 위에서 물로 갈아 흙이 되게 하고 이것을 사용하여 불상의 몸에 바르고 비로소 물을 붓는다 깨끗한 흰 주단으로 문질러 닦는다. 그런 다음에 불전 안에 안치하고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한다. 이것이 곧 절의 대중들의 의식이며 갈마타나가 그것을 맡아 한다.
승방마다 그 안에서는 나름대로 존의를 목욕시키며 날마다 모두가 마음을 가늠하여 빠지는 날이 없게 한다. 다만 이곳에서는 초목의 꽃을 갖고 와서 모두 봉헌하니 겨울 여름을 논할 것 없이 항상 꽃향기가 자욱하고 저자의 곳곳에는 꽃을 파는 사람도 많다.
동하(東夏)의 경우에는 연꽃과 석죽(石竹)은 여름과 가을에 여기저기를 물들이고, 금형화(金荊花)와 복사꽃ㆍ살구꽃은 봄날에 만개하며, 목근화(木槿花)와 석류(石榴)는 계절에 따라 바꾸어 가며 피고 주홍빛 앵두꽃과 흰 능금나무 꽃은 시절 따라 꽃망울을 터뜨리니, 동산에 피는 촉규화[蜀葵] 등과 산장(山莊)에 피는 향기로운 풀 등을 반드시 갖고 와서 벌려 놓아야 하며 멀리서 수원(樹園)을 가리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겨울 볕이 들면 잠깐 동안 혹 꽃이 부족한 일이 있으니 이때는 여러 가지 비단을 잘라 좋은 향을 모아서 존상 앞에 설치하니 이는 실로 아름다운 일이다.
동상(銅像)에 이르러서는 작고 큰 것을 물을 것 없이 반드시 가는 재나 벽돌가루로 문질러 닦아서 광명이 나게 하고, 맑은 물을 부어서 투명하고 빛나기가 거울같이 하여야 한다. 큰 불상은 보름날과 그믐날에 모든 대중이 함께 하고 작은 불상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늘 씻겨야 한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비록 적더라도 복덕의 이익은 매우 많다.
불상을 목욕시키는 물은 두 손가락으로 정수리 위에서 퉁기는데 이것을
길상(吉祥)의 물이라 하기 때문에 커다란 복을 구하기를 바란다. 불전에 봉헌하고 남은 꽃은 들어서 향기를 맡아서는 안 된다. 물과 꽃을 버려 함부로 밟아서는 안 되며 깨끗한 곳에 이를 기울여 놓아야 한다.
어찌 흰머리로 죽을 때까지 한번도 존상을 닦아 목욕시키지 않고 붉은 꽃이 들에 두루 피어도 본래 스스로 그것을 봉헌할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끝내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생략한 채 게으르게 되어 멀리서 못과 정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쉬고, 고된 것이 두려워 할 일에 게을러져서 법당을 열고 보경(普敬)하는 일도 그만둔다면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를 이어주는 관계가 끊어지는 일로 마침내 공경을 이룰 말미가 없게 만드는 일이다.
흙으로 탑을 만들고 또는 니상(泥像)의 본을 떠서 혹 비단이나 종이에 인쇄하여 곳에 따라 공양드린다. 혹 흙을 쌓고 모으고 벽돌로 둘러쌓으면 곧 불탑이 이루어진다. 혹 빈 들판에 놓아 두어 그것이 자연스럽게 흩어지도록 내버려두기도 한다. 서방의 스님과 속인들은 이것을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한 대체로 부처님의 형상과 탑을 만들 때 금ㆍ은ㆍ동ㆍ철ㆍ진흙[泥]ㆍ옻나무[漆]ㆍ벽돌로 만들고 혹 모래와 눈을 모아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을 만들 때 그 안에 두 종류의 사리를 안치한다. 하나는 대사(大師) 몸의 뼈이고, 두 번째는 연기법(緣起法)의 게송이다. 그 게송을 말한다.

모든 법 인연에서 일어나니
부처님 이 인연 말씀하셨네.
그 법도 인연으로 다한다고
이렇게 큰 스님 말씀하셨네.

이 두 가지를 안치하면 복이 크고 많아진다. 이로 말미암아 경전 가운데서는 널리 비유를 하면서 그 이익이 불가사의함을 찬탄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상 만들기를 귀리[穬麥]처럼 작게 만들고, 탑 만들기를 작은 대추처럼 만들어 그 위에 윤상(輪相)을 설치하되, 장대는 가는 바늘처럼 한다고 하더라도 그 남다른 인연은 7해(海)와 비슷하여 다함이 없게 되고, 그 뛰어난 과보는 사생(四生)에 두루하여 다함이 없을 것이다. 이 일에 대한 소상한 내용은 다른 경전에 갖추어져 있으니, 여러 법사들께서는 때로 이에 힘쓰기를 바란다.
존용을 씻고 공경하는 일은 세세생생에 부처님을 만날 업을 짓는 일이며, 꽃과 향을 마련해 놓는 것은 대대로 부락(富樂)의 인연이 된다. 스스로 업을 지어 다른 사람에게 무량한 복을 얻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일찍이 어떤 곳에서 보니 4월 8일에
혹 스님이나 혹은 속인이 길 가에 불상을 갖고 나와 편의에 따라 물을 부어 씻으면서도 문질러 닦을 줄을 몰랐는데, 이는 바람에 나부끼고 햇볕에 쪼일 뿐이지 그 의식에 일치한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32. 찬영지례(讚詠之禮)

중국 땅에서 예전부터 전해져 오는데 오직 예불이란 명칭만 알고 있을 뿐 많은 사람이 부처님을 칭념하고 공덕을 찬양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이름을 들으면 다만 그 이름만 들었을 뿐 지혜의 높고 낮은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찬탄하는 일은 자세히 그 덕을 말하는 것이기에 공덕의 넓고 깊은 것을 체득하게 된다.
곧 서방의 경우에는 탑에 절하거나 보통 예경(禮敬)할 경우에도 늘 해질녘이나 혹 황혼 무렵에 대중들이 절문을 나서서 탑을 세 바퀴 돌고 향화를 갖추어 나란히 쭈그리고 앉는다. 그 가운데 소리에 능한 사람을 시켜 애달프면서도 단아한 소리를 내게 하여 명철하고 웅장하며 낭랑하게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한다. 그리하여 혹 10수의 게송을 외우기도 하고 또 혹 20수의 게송을 외우기도 하면서 차례로 다시 절 안으로 들어가 늘 모이는 곳에 이르면 자리를 정하여 앉기를 마친다.
한 경사(經師)에게 사자좌(師子座)에 오르게 하여 약간의 경을 독송하게 한다. 그 사자좌는 윗자리 스님의 머리 위에 있으며, 성량과 음의 높낮이도 적당한 정도를 헤아려 높거나 크지 않게 하고 독송하는 경은 흔히 삼계(三啓)로 외운다. 이것은 곧 존자 마명(馬鳴)1)이 모아놓은 것으로 처음에는 10수 가량 되는 게송에서 경전의 뜻을 취하여서 삼존(三尊)을 찬탄하였고 다음 정경(正經)을 진술하였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친히 설법하신 경이다. 독송이 끝나면 다시 10여 수의 게송을 말하고 회향(廻向)ㆍ발원(發願)을 논한다. 이 절차의 단계는 세 가지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삼계(三啓)라 말하는 것이다.
경이 끝날 때는 대중들은 모두 소바사다(蘇婆師多)라 말한다. 소(蘇)는 묘하다는 뜻이고, 바사다(婆師多)는 말이란 뜻이다. 내용은 경을 찬탄하고자 이것이 미묘한 말씀이라 한 것이다. 혹 때에 따라서는 사바도(娑婆度)라고도 하는데, 뜻은 거룩하다[善哉]는 말을 지목한 것이다.
그리하여 경사(經師)가 막 자리에서 내려오면 상좌 스님이 먼저 일어나 사자좌에 절한다. 공경을 닦는 일을 끝내면 다음에는 성승(聖僧)의 자리에 예배드리고 다시 본래 있던 곳에 자리잡는다. 다음은 두 번째 상좌 스님이 높은 자리의 스님이 앞 스님의 한 일에 준하여
두 곳에 예배드린 다음 상좌 스님에게 예배드리고 비로소 자기 위치에 자리잡고 앉는다. 세 번째 상좌 스님도 앞의 스님에 준하여 그렇게 하며 그 뒤 대중의 말석에 자리한 스님에게까지 이르러 끝낸다
만약 그 대중의 집단이 커서 15인을 넘을 경우 나머지 스님들은 모두 일시에 대중을 바라보고 일어서서 예배드리고 사정에 따라 그곳을 떠난다. 이것이 곧 동인도[東聖方]의 탐마입저국(耽摩立底國) 승도들의 모범 법식이었다.
나란타사(那爛陀寺)와 같은 사찰에 이르러서는 사람과 대중이 매우 번화하여 승도의 수효가 3천 명을 넘어서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모두 모이기가 어렵다. 이 절에는 8원(院)이 있고 승방이 3백 개가 있어 거처하는 곳에서 수시로 예배드리고 독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절의 법에는 창(唱)에 능한 도사(導師) 한 사람으로 하여금 포시(晡時)2)에 이르러 늘 돌아다니며 예찬하게 하였으며 정인(淨人)과 동자들이 여러 가지의 향과 꽃을 지니고 앞을 인도하여 갔다. 원(院)마다 모두 지나가고 전(殿)마다 모두 예배드리며 때로는 높은 소리로 찬탄하면서 3송(頌)ㆍ5송을 외어 그 메아리가 두루 퍼지게 하고 해가 질 때가 되어야 비로소 모두 다 하였다고 말하게 된다.
이 창도하는 스님은 항상 절집에서 특별한 요리를 공양받게 되고 또한 향대(香臺)와 마주하게 되면 홀로 앉아서 마음 속으로 찬탄하고 혹 범우(梵宇)에 여러 사람이 모이게 되면 대중들은 꿇어 엎드리고 높이 천양(闡揚)한 후에 열 손가락을 땅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며 세 번 절한다.
이것이 곧 서방에서 이어 온 바탕이 된 예경 의식이다. 그리고 늙고 병든 무리는 뒷자리[小座]에 자리잡는 대로 맡겨둔다. 찬불하는 사람은 예전에도 이미 있었으나 다만 이를 행하는 방법이 조금 달라 범문(梵文)과 같지 않다. 또한 가령 예불할 때에 이르면 부처님의 상호(相好)를 찬탄하여 말할 경우 곧 곧은 소리[直聲]로 길게 찬탄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경우 혹 10수의 게송을 외우기도 하고 혹 20수의 게송을 외우기도 한다. 이것이 그곳의 법이다.
또한 여래 등의 범패(梵唄)는 원래 이것이 찬불인데 자못 음운이 조금 길어 뜻을 나타내기가 어렵다. 혹 재(齋)에 인연하여 고요한 밤 대중들의 마음이 쓸쓸하고 구슬플 때 능숙한 어떤 사람을 시켜 150수나 4백 수의 게송으로 찬탄하게 하고 아울러 다른 특별한 찬탄을 할 수 있다면 이는 아름다움을 이루게 되는 일이다.
그런데
서쪽 나라에서 예경하는 것은 크게 찬탄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라 다만 재주있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공경하는 존상 앞에서 칭설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한 존자 마지리제타(摩咥哩制吒)3)는 곧 서방 세계의 굉재(宏才)로서 뭇 영준한 사람 가운데서도 빼어난 큰 덕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가 전하여 말하였다.
“예전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어떤 인연으로 친히 대중들을 거느리시고 인간세계를 유행하셨는데, 그때 한 마리의 꾀꼬리가 부처님의 상호(相好)를 보고 그 근엄함이 금산(金山)과 같기에 곧 숲 속에서 온화하고 고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부처님을 찬영하는 소리와 같았다. 이에 부처님께서 곧 여러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새가 나를 보고 기뻐하여 저도 모르게 슬피 울었다. 이 복된 인연 때문에 내가 죽은 이후 사람의 몸을 얻어 이름을 마질리제탁이라 하게 될 것이며 널리 칭탄하면서 나의 실덕(實德)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마지리(摩咥里)란 어머니란 뜻이며, 제타(制吒)는 아이란 뜻이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외도에 귀의해 출가하여 대자재천(大自在天)을 섬기었다. 그를 존경하였기 때문에 갖추어 그를 찬미하여 노래하였다. 후에 이름을 기억하신 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어 부처님을 받들고 옷을 물들이고 속가에서 벗어나 널리 찬탄을 일으키면서 지나간 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앞으로는 훌륭한 궤적을 따르기로 하였다. 스스로 큰 스승이신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남아있는 불상만을 만나게 된 것을 슬퍼하여 마침내 왕성한 붓을 뽑아들고 우러러 수기(授記)에 부응하고자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였다. 처음에는 4백 수의 찬양 게송을 지었고 다음에 150수의 찬양 게송을 지어 총체적으로 육도바라밀(六度波羅蜜)을 말하여 부처님 세존께서 지니신 수승한 덕[勝德]을 밝혔다.
이 게송은 글과 감정이 아름답고 고와서 하늘세계의 꽃봉오리와 함께 꽃다움을 말할 수 있고, 이치가 맑고 높아 땅의 산봉우리와 더불어 가파로움을 다툰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서방에서 찬양의 게송을 짓는 사람이면 모두 이것을 본받아 익히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무착(無著)보살4)ㆍ세친(世親)보살5)도 그의 발꿈치를 우러러 보았다. 그런 까닭에 오천축국 땅에서 처음 출가하거나 또는 이미 5계ㆍ10계를 외우게 된 사람이라면 반드시 먼저 이 두 개의 찬양 구를 외우게 하여 대승ㆍ소승을 물을 것 없이 모두가 다같이 이에 따랐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의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부처님의 공덕의
심원함을 알 수 있고, 두 번째는 글을 짓는 순서를 체득하게 되며, 세 번째는 설근(舌根)을 청정하게 하고, 네 번째는 가슴에 갈무리한 것이 개통되고, 다섯 번째는 대중 속에 처해도 미혹되지 않게 되고 여섯 번째는 오래 살고 병이 없어진다.
이 게송을 외우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경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도 이 아름다운 게송이 아직 동하(東夏)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 게송에 해석을 다는 사람도 많다. 또한 이 게송에 창화(唱和)를 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다. 진나(陳那)보살6)은 스스로 화운(和韻)이라 하여 게송의 첫구절마다 각기 한 구절을 더하여 이를 잡찬(雜讚)이라 이름하였는데 그의 게송은 3백 수가 있다.
또 녹야원(鹿野苑)의 이름난 스님인 석가제바(釋迦提婆)도 진나보살의 게송 앞에 각기 한 수의 게송을 더하여 이를 유잡찬(糅雜讚)이라 이름지었는데 모두 450수가 있다. 다만 이런 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게송을 모범으로 삼고 있다.
또한 용수보살은 시(詩)로써 글을 대신하여 이를 소힐리리거(蘇頡里離佉)라 이름지었는데 이 말을 번역하면 밀우서(密友書)란 뜻이다. 이 글을 옛 시주인 남방 대국의 임금에게 보내었다. 그의 호는 사다바한나(娑多婆漢那)이고 이름은 시인득가(市寅得迦)이다. 이 글은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정성스럽게 위로하고 가르치며 중도(中途)를 목표로 하여 친함이 혈육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의 지취(旨趣)는 참으로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먼저 삼존을 공경하고 믿게 하였고 부모를 효도로 봉양하며 계율을 지켜 악을 버리고 사람을 가려서 사귀게 하였다. 모든 재물과 색에 있어서 부정관(不淨觀)을 닦으며 집과 방을 검교(檢校)하고 바르게 무상(無常)을 생각하게 하였다. 널리 아귀ㆍ방생(傍生)을 말하고 크게 인간계 및 천상계와 지옥을 말하며 머리 위에 불이 타고 있어도 털고 제거할 여가가 없음을 말해 주어 연기(緣起)에 마음을 돌려 오로지 해탈을 구하라 하였다.
부지런히 3혜(慧)7)를 수행하고 성도(聖道)의 8지(支)8)를 밝히며 4제(諦)9)를 배워 원응(圓凝) 두 가지를 얻는 경지를 증득하게 하였고, 관자재(觀自在)보살이 원친(怨親)을 가리지 않는 것과 같이 되고, 아미타불이 항상 정토에 거처하는 것과 같이 되게 하였다. 이것은 곧 중생들을 교화하는 지혜이며 그 요체는 이에 더할 것이 없다.
오천축국에서 처음 불교를 배우는 무리들은
모두 먼저 이 서찬(書讚)을 외우며 마음으로 귀의하여 계앙(繫仰)하는 무리들도 종신토록 연미(硏味)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는 마치 중국의 스님들이 관음유교(觀音遺敎)를 외우고, 속인의 무리들이 천자문과 효경(孝經)을 읽는 것과 같아서 공경하고 완미하여 이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다. 예를 들면 사득가마라(社得迦摩羅)라 하는 것도 이 부류와 같은 글이다사득가(社得迦)라는 말은 본생(本生)이란 뜻이고, 마라(摩羅)는 꿰뚫는다는 뜻이다. 보살의 예전 생(生)에서 행하기 어려운 일을 모아서 한 곳에 모아둔 것이다.
이 책을 만약 번역한다면 10여 축(軸)은 될 것이다. 부처의 본생(本生)의 일을 취해서 시를 지어 찬탄하였다. 풍속에 순응하여 곱고 아름다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하고 사랑하게 하여 군생(群生)을 거두어들이게 한 글이다.
당시 계일왕(戒日王)10)은 극히 문필을 사랑하여 마침내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여러분들이여, 오직 좋은 시찬(詩讚)만 있거든 내일 아침에 모두 갖고 와서 나에게 보여다오.” 그리하여 모두 모은 것이 5백 협(夾)의 시찬이었는데 이것을 펼쳐보니 많은 것이 사득가마라였기에 비로소 찬송을 읊은 시 가운데서는 이것이 아름다움의 극치임을 알게 되었다.
남해의 여러 섬에는 10여 개의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스님과 속인을 물을 것 없이 모두가 앞에서 말한 시찬과 같은 시를 읊고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중국에서는 한 번도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다. 또한 계일왕은 승운(乘雲)보살이 몸으로 용을 대신한 일을 취하여 이것을 모아 노래를 만들었다. 현악기와 관악기를 함께 연주하여 사람들에게 악곡을 만들게 하여 즐기고 춤추게 하여 시속에 유포시켰다.
또한 동인도의 월관대사(月官大士)는 비수안달라(毘輸安呾囉)태자의 노래를 지어 사인(詞人)들이 이에 맞춰 춤추고 읊조려 오천축국에 두루 퍼졌다. 예전에 소달나(蘇達拏)11)태자라 한 것이 이것이다.
또한 존자 마명(馬鳴)도 역시 가사(歌詞)와 『장엄론(莊嚴論)』을 지었고 아울러 불본행시(佛本行詩)를 지었는데, 이는 대본(大本)으로서 만약 번역한다면 10여 권의 책이 될 것이다.
그 내용은 부처님께서 처음 왕궁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의 일대 불법을 모두 모아 시로 만든 것인데, 오천축과 남해에서 이를 풍송(諷誦)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뜻이 분명하고 글자 수가 적으면서
담고 있는 내용은 많아 독자들로 하여금 마음이 흐뭇하여 고단함을 잊게 한다. 또한 성인의 가르침을 모아 지님으로써 복덕과 이익이 생길 수 있게 하였다.
그 150수의 시찬과 용수보살의 책은 모두 따로 기록하여 갖고 돌아왔으니 찬송 읊기를 즐기는 사람은 수시로 마땅히 외우고 익혀야 할 것이다.

33. 존경괴식(尊敬乖式)

무릇 예경(禮敬)하는 의식은 교의에 분명한 규칙이 있으니 스스로 6시(時)에 생각을 채찍질하고 4체(體)를 부지런히 발돋음하여 한 승방에 단정하게 자리잡고 걸식을 업으로 삼으며 두타행(頭陀行)을 하여 지족(知足)의 도를 닦아야 한다.
단지 3의(衣)만을 입고 가득히 채우거나 쌓아두지 않으며 무생(無生)의 세계에 생각이 이르면 번뇌는 완전히 없어진다. 어찌 승단의 의식과 달리하여 따로 궤식(軌式)을 행할 수 있겠는가? 출가한 사람의 옷을 걸치고도 그 무리와 달리하여 저자거리나 집 안에서 여러 속인 무리에게 절하는 것은 율교를 찾아 점검해 보면 완전히 이러한 일을 금지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절해야 할 대상에 두 종류가 있다. 이른바 삼보와 자기보다 법랍이 높은 비구가 그것이다”라고 하셨다.
또한 존상을 갖고 와서 큰길 가운데서 성스러운 모습을 먼지로 더럽히면서 그것으로 재물과 이익을 구하는 사람도 있고, 혹 몸을 갈고리로 매달고 눈 등을 찌르며 마디를 끊고 살갗을 뚫으면서 거짓 속임수로 좋은 마음에 기탁한다 하지만 본심은 불로장생을 희구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와 같은 모습은 서쪽 나라에는 전연 없다. 여러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인도하나니 다시는 이런 일을 행하지 말라.

34. 서방학법(西方學法)

무릇 큰 성인의 한 소리는 삼천세계를 꿰뚫어 모든 것을 거두어들이셨다. 혹 다섯 갈래의 기연을 따라 칠구(七九)를 밝히시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시었다칠구(七九)라 하는 것은 성명(聲明) 가운데 7이 9로 바뀌는 예를 말한 것으로 아래에서 간략히 밝힐 내용과 같다. 때로는 의언(意言)으로 법을 갈무리하여 천제(天帝)가 무설(無說)의 경을 이해하기도 하였다. 혹은 또 말에 의해 궁극의 이치를 이야기하면 지나(支那)에서도 본성(本聲)의 글자를 깨닫게 되었다.
인연에 투합하여 지혜가 일어나 각기 빈 마음과 일치하게 하였고, 오직 뜻만을 취하여
번거로운 것을 제거하니 모두가 원적(圓寂)12)에 합치되었다. 승의제(勝義諦)13)의 진리에 이르러서는 표현과 말을 완전히 벗어났으나 문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복속제(覆俗諦)라 하는 것은 예전에는 세속제(世俗諦)라 하였으나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생각건대 이는 세속의 일이 다른 진리를 덮는 것을 말한 것 같다. 물질은 본래 병(甁)이 아닌데도 함부로 병이라 풀이하고, 소리에는 노래하는 가락이 없는데 함부로 노래하는 마음을 만든다. 또한 식(識)의 상(相)이 생길 때 몸은 분별함이 없는데도 무명(無明)에 가려져서 함부로 여러 가지 형상이 일어난다. 자기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경계는 외부에 있다고 하면서 뱀이라 하고 새끼줄이라고 잘못 아니, 바른 지혜는 이에 물 밑에 가라앉아 숨겨지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실이 덮이는 것을 복속이라 하게 되었다. 이는 곧 복(覆)이 속(俗)인 것에 근거하여 복속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며 혹 다만 진제(眞諦)ㆍ복제(覆諦)라고만 말하여도 된다.
그렇다면 예전부터 번역한 사람들은 범어의 규범을 이야기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요즘 경을 전하는 사람들도 다만 처음 7(七)만을 말하고 있다. 이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무익하니 논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나는 범문(梵文)을 총체적으로 익혀 번역에 중복되는 수고를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제목과 절(節)ㆍ단(段)으로써 간략히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서술하고자 한다그런데 골륜국(骨崙國)과 속리국(速利國)에서는 아직도 모두 범어의 경전을 읽을 수 있는데 어찌 하물며 천부(天府)인 신주(神州:중국)에서 그 본래의 설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서방에서는 찬탄하여 이르기를, “문수사리보살이 현재 중국의 병주(幷州)에 계셔서 사람들에게 모두 복이 있다”라고 하고 있다. 이치로 보아 마땅히 흠모하고 찬탄할 만한 일이다. 그에 관한 글은 이미 상세히 나타나 있으므로 여기서는 번거롭게 기록하지 않는다.
무릇 성명(聲明)이라 하는 것은 범어로는 섭타필타(攝拖苾駄)라 하는데 섭타는 소리라는 뜻이고, 필타는 밝힌다[明]는 뜻이다. 이는 곧 오명론(五明論) 가운데 일명(一明)이다.
오천축국의 속서를 총체적으로 비하갈라나(毘何羯喇拏)라 하며 크게 나누면 다섯 가지가 있어 중국의 오경(五經)과 같다예전에 비가라논(毘伽羅論)이라 한 것은 와전된 것이다.
첫째는 창학실담장(創學悉談章)인데 또 다른 이름으로는 실지라솔도(悉地羅窣覩)라고 한다. 이것은 소학(小學)을 나타내어 일컫는 것으로 모두가 길상(吉祥)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본래는 49자(字)가 있는데 이것이 함께 서로 승전(乘轉)하여 18장(章)을 이루어 모두 1만 여의 글자가 있으며 합하면 3백여 수의 게송이 된다. 무릇 한 게송을 말할 때 그 안에는 4구(句)가 있으며 1구는 여덟 글자로 모두 32언(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밖에 다시 소송(小頌)ㆍ대송(大頌)이 있으나 갖추어 다 말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여섯 살 난 동자가 이것을 배워 6일이면 곧 이를 마치게 된다. 이것은 서로 전해진 것으로 이는 대자재천(大自在天)14)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는 소달라(蘇呾囉)라 하는데 이것이 곧 모든 성명(聲明)의 근본 경전이다. 번역하면 약전(略詮)이란 뜻으로 내용을 밝힌다는 뜻이다. 이 속에는 1천 수의 게송이 있으며 이는 예전의 박학(博學)한 선비인 바니니(波尼儞)가 지은 책이다. 이는 대자재천(大自在天)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얼굴에 세 눈[三目]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바야흐로 이를 믿었다. 이 책은 여덟살 된 동자가 여덟 달 안에 다 암송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타도장(駄覩章)이라 하는데 1천 수의 게송이 있으며 오로지 글자의 근원을 밝힌 책으로 그 공부는 위에서 말한 경과 같다.
네 번째는 삼기라장(三棄攞章)이라 하는데 이는 황경(荒梗)하다는 뜻이다. 내용을 풀이하면 농사꾼이 처음으로 밭두렁을 개간하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마땅히 삼황장(三荒章)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장은 안슬타타도(頞瑟吒駄覩)라 이름하며 1천 수의 게송이 있고, 두 번째 장은 문도(文荼)라 이름하며 1천 수의 게송이 있다. 세 번째 장은 오나지(鄔拏地)라 이름하며 1천 수의 게송이 있다.
타도(駄覩)라 하는 것은 뜻을 일곱 가지 사례[七例]로 밝힌 것으로 10나성(羅聲)으로 깨우쳐 주고 18개의 음운(音韻)으로 말하는 것이다. 일곱 가지 사례라 하는 것은 모든 소리 위에는 모두 이것이 있다. 그 하나하나의 소리마다 그 가운데서 3절(節)를 나눈다. 즉 일언(一言)ㆍ이언(二言)ㆍ다언(多言)으로 모두 21언을 이룬다. 예를 들면 가령 남자를 부를 때 한 사람일 경우에는 보로쇄(補嚕灑)라 부르고, 두 사람일 경우에는 보로초(補嚕▼(竹/稍))라 부르며, 세 사람일 경우에는 보로사(補嚕沙)라 한다. 이 가운데 소리에 호흡의 무겁고 가벼운 구별이 있다.
일곱 가지 사례 외에 다시 호소성(呼召聲:사람을 부르는 소리)이 있어서 곧 8례(例)를 이루게 된다. 첫 구절이 이미 셋으로 구분되었으니 나머지도 모두 이에 준해야 하는데, 번거로울까 두려워 여기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것을 소반다성(蘇槃多聲)이라 이름한다모두 스물네 가지의 소리가 있다.
다음 10나성(羅聲)이라 하는 것은 열 종류의 라(羅)자가 있어서 한 소리를 나타낼 때 곧 삼세의 차이를 밝힌다. 18운(韻)이라 하는 것은 상ㆍ중ㆍ하, 존(尊)ㆍ비(卑), 피(彼)ㆍ차(此)의 구별을 밝혀 열여덟 가지 같지 않은 음운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정안차성(丁岸哆聲)이라 부른다.
문도(文荼)라 하는 것은 글자의 체(體)를 합성한 것으로 잠시 예를 들면 나무의 한 목(目)을 범어로 필력차(苾力叉)라 하는데, 문득 20여 구의 경문을 인용하여 함께 서로 섞어야
비로소 한 가지 일의 이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나지(鄔拏地)라 하는 것도 대체로 이 예와 같으나 상세하고 간략한 것이 같지 않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이 삼황장(三荒章)은 열 살 난 동자가 2년을 부지런히 배워야 비로소 그 내용을 해득하게 된다.
다섯 번째는 필률저소달라(苾栗底蘇呾羅)라 하는데 이는 곧 앞의 소달라의 해석서이다. 상고시대에 지은 해석은 그 종류가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 묘한 것으로 1만 8천의 게송이 있다. 이 책은 그 경본을 연역하고 여러 가지 뜻을 소상히 담론하여 우주의 법칙을 다하고 천인(天人)의 궤칙(軌則)을 궁구한 책으로 열다섯 살의 동자가 5년을 공부해야 비로소 해득하게 된다.
신주(神州)의 사람으로 만약 서방 세계에 가서 학문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꼭 이것을 알아야만 비로소 나머지 다른 학문을 익힐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스스로 힘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여러 책들은 모두 암송하여야 한다. 이것은 상근기를 지닌 사람을 기준한 것으로 중근기나 하근기를 지닌 사람의 경우는 내용으로써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익히자면 밤낮으로 부지런히 발돋음하여 편안하게 잠잘 여가가 없나니, 공자가 책을 매는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진 것과 같이 하여야 하고, 세정(歲精)이 백 번 두루 읽었던 일과 같이 하여야 한다. 소털은 천(千)으로 헤아리지만 기린(麒麟)의 뿔은 오직 하나뿐이다. 공덕을 비교하면 중국의 가장 훌륭한 경전과 비슷하다.
이 책은 학사인 사야질저(闍耶昳底)가 지은 책이다. 그 사람의 기량은 넓고 깊으며 그의 문채는 수려하게 펼쳐져 한 번 듣게 되면 곧 이해하였으니 어찌 두 번 이야기하는 수고를 빌렸겠는가? 삼존을 공경하고 존중하여 많은 복업을 지었는데 그가 죽은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이다.
이 해석서를 익히고 나서 비로소 서(書)와 표(表)를 모으고 시편을 제작하고 『인명론(因明論)』에 생각을 이루고 『구사론(俱舍論)』에 경건하게 정성을 쏟으며 이문론(理門論)을 찾아보고 비량론(比量論)을 훌륭하게 이루어 본생(本生)을 꿰뚫어 익히면 청명한 재능이 빼어나게 함양되게 된다. 그런 다음에 함장(函丈)이 6년 동안 경전을 전수하는 과정을 거쳐서 많은 사람이 나란타사(那爛陀寺)중천축국(中天竺國)이다에 남아 있는 것이다. 혹 발랍비국(跋臘毘國)서천국(西天國)이다에 사는 사람도 있다.
이 두 곳은 사정이 중국의 금마(金馬)ㆍ석거(石渠)ㆍ용문(龍門)ㆍ궐리(闕里)와 같아서 영준하고 훌륭한 스님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시시비비를 헤아려 생각하곤 한다. 만약
현명하여 거룩하다고 찬탄되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영준하다고 일컬어지고 비로소 스스로 자신의 칼날을 헤아려 보고 왕정(王庭)에 칼을 던지든지 나라에 계책을 올려 재능을 보여 주어 등용되기를 희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담론하는 곳에 앉아서는 자리를 이중으로 하여 기이함을 나타내고, 비판하는 장소에 오르게 되면 다른 사람의 혀를 묶은 채 부끄럽게 만들어버린다. 그리하여 그 메아리는 5산(山)을 진동하고 그 명성은 4역(域)에 흐르게 된다. 그런 다음에 봉읍(封邑)을 받고 영예로운 지위에 책봉되어 높은 문에 흰 색으로 씌어진 자신의 이름을 상 받은 이후에 다른 업을 닦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 또 필률저소달라의석(苾栗底蘇呾羅議釋)이 있는데 이를 주니(朱儞)라 부른다. 여기에는 2만 4천의 게송이 있는데, 이는 학사인 발전사라(鉢顚社攞)가 지은 책이다. 이 책은 곧 앞에서 말한 경전을 거듭 밝히면서 살갗을 쪼개서 이치를 분석하고 소상하게 밝힌 후에 해석하여 털 끝 가시와 같이 작은 것도 모두 나누어 분석하였다. 경에 밝은 사람도 이것을 배우자면 3년이 걸려야 비로소 마치게 되며 그 공부는 중국의 춘추(春秋)ㆍ주역(周易)과 비슷하다.
또 벌치가리론(伐致呵利論)이 있는데 이는 앞의 주니의 뜻을 해석한 것이며 대학사인 벌치가리(伐致呵利)가 지었다. 여기에는 2만 5천 수의 게송이 있다. 이 책에는 크게 인사(人事)ㆍ성명(聲明)의 핵심이 될 일을 이야기하고 있고, 널리 여러 가문의 흥하고 망한 이유를 서술하였으며, 깊이 유식(唯識)15)을 밝히고 훌륭하게 인유(因唯)를 논하고 있다.
이 학사의 영향을 오천축국에 메아리져 떨쳤고 덕이 8극(極)에 흘렀다. 그는 철저히 삼보를 믿고 진리로서 2공(空)16)을 생각하여 승법(勝法)을 희구하여 출가하였다가 속세가 그리우면 곧 환속하니 이렇게 왕복한 횟수가 일곱 번에 달하였다.
스스로 깊이 인과(因果)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이와 같이 부지런히 집착할 수 있겠는가? 그는 스스로 한탄한 시에 말하였다.

염(染) 때문에 문득 속가로 돌아왔고
탐욕 벗어나려고 다시 승복 입었네.
어찌하여 두 가지 일이
갓난아기처럼 나를 희롱하는가?

이 사람은 곧 호법(護法)논사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는 늘 절 안에 있을 때는 속가로 돌아갈 마음이 있었고 번뇌로 힘들어 하며 확고하게 마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학생들을 시켜 가마를 절 밖으로 향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였다.
“무릇 이 복된 땅[福地]은 본래 계행(戒行)이 있는 사람들이 살 곳으로 견준 것인데 나는 이미 안에 사심(邪心)이 있으니 이는 곧 정교를 이지러지게 하는 일이라 시방(十方)의 승지(僧地)에 발붙일 만한 곳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는 청신도가 되어 흰 옷을 입고 바야흐로 절에 들어가서 정법을 선양하였다. 그가 교화를 버린 이래 이미 40년이 되었다.
다음으로 『박가론(薄迦論)』이 있는데, 여기에는 7백 수의 게송이 있고 7천 자의 해석이 있다. 이 책도 역시 벌치가리가 지은 책으로 성인의 가르침의 양(量)과 비량(比量)의 뜻을 서술하고 있다.
다음으로 필나(蓽拏)가 있는데, 여기에는 3천 수의 게송이 있고 1만 4천 자의 해석이 있다. 게송은 벌치가리가 지은 것이며 해석은 호법(護法)논사가 지은 글이다. 이 책은 하늘과 땅의 깊숙한 비밀을 다하고 인간사회의 진리의 정화(精華)를 다한 책이라 말할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의 학문이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성명(聲明)을 잘 해득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중국의 구경백가(九經百家)와 비슷한 책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책들을 스님이나 속인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배우게 된다. 만약 그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다문(多聞)’이란 칭호를 얻지 못하게 된다. 만약 출가한 사람이라면 두루 율(律)을 배우고 자세히 경(經)과 논장(論藏)을 찾아 외도의 이론을 꺾어야 하나니, 마치 중국에서 천하의 패권(霸權)을 놓고 다투는 일과 같다. 좌우에서 힐난하는 내용을 아는 것은 끓는 가마솥의 넘치는 물을 해소하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그 메아리가 남섬부주(南贍部洲) 안에 흐르게 하여 인간계와 천상계의 위에서 공경을 받고 부처님을 도와 교화를 드높이며 널리 중생을 인도하게 된다.
이는 세상에 빛나고 우뚝 솟아나게 태어난 사람으로 그것이 한 사람이건 두 사람이건 비유를 취한다면 일월과 같고 상황을 표시한다면 용상(龍象)에 비유된다. 이런 사람은 멀리는 용맹(龍猛:龍樹)ㆍ제바(提婆)ㆍ마명(馬鳴)과 같고 중세(中世)에서는 세친(世親)ㆍ무착(無著)ㆍ승현(僧賢)ㆍ청변(淸辯) 등의 스님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가깝게는 진나(陳那)ㆍ호법(護法)ㆍ법칭(法稱)ㆍ계현(戒賢) 및 사자월(師子月)ㆍ안혜(安慧)ㆍ덕혜(德慧)ㆍ혜호(慧護)ㆍ덕광(德光)ㆍ승광(勝光) 등의 스님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대사들은 앞에서 말한 내외의 많은 공덕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고 각기 모두가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아는 스님들이라 참으로 더불어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으며 속류(俗類) 외도 가운데서는 이런 부류는 얻기 어렵다자세한 것은 서방십덕전(西方十德傳)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 가운데서 법칭(法稱)은 거듭 인명(因明)을 밝혔고 덕광(德光)은 다시 율장을 홍법하였으며 덕혜(德慧)는 선정[定門]에서의 명상을 실천하였다. 혜호(慧護)는 널리 옳고 그름을 가려내니 바야흐로 경해(鯨海)에서 이름난 보배가 광채를 나타내고 높고 험준한 향봉(香峯)에서 뛰어난 약재가 기묘함을 보여 준다는 것을 증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불법이 머금고 있는 넓고 큰 진리는 무엇인들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메아리에 응해서 책을 빨리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어찌 열네 개의 발을 번거롭게 여길 필요가 있겠는가? 백 번을 두루 읽는 수고를 할 필요 없이 두 권의 책을 한 번 듣고 곧 받아들인 것이다어떤 외도가 6백 수의 게송을 지어 호법(護法)논사를 찾아와 따졌는데 호법논사는 대중을 상대로 한 번 듣고 글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였다.
또한 오천축의 땅에서는 모두가 바라문족(婆羅門族)을 귀하고 뛰어난 가문으로 삼고 있어 어떤 좌석이 마련되어도 모두 다른 3성(姓)과는 함께 가지 않으며 자기 족속 밖의 잡류(雜類)들과는 짐짓 멀리한다. 그들이 존중하는 전고(典誥)에 사벽타서(四薜陀書)란 책이 있어 10만 수 가량의 게송이 실려 있다. 벽타(薜陀)란 말은 명해(明解)란 뜻이며, 전에 이것을 위타(圍陀)라 한 것은 와전된 것이다. 모두가 이것을 입으로 서로 전수하고 있으며 종이나 나뭇잎에 이를 써서 전하지는 않는다.
매번 총명한 바라문족이 이 10만의 게송을 외우는데, 즉 서방의 경우에는 서로 이어가며 총명을 배우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두 번, 세 번 살펴서 지혜가 생기게 하고, 두 번째는 자모(字母)에 정신을 안착시키면 열흘, 한 달 사이에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나니 한 번 듣게 되면 곧 내용을 이해하여 두 번 이야기하는 수고를 빌리는 일이 없다. 이는 내가 직접 눈으로 그런 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물론 거짓이 아니다.
동인도에 한 대사(大士)가 있어 이름을 일월관(日月官)이라 하였는데 이는 큰 재웅(才雄)을 지닌 보살(菩薩)이었다. 나 의정(義淨)이 인도에 이르렀을 때 그 사람은 아직도 생존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독경(毒境)과 독약(毒藥)은 해가 됨에 어느 것이 더 무겁습니까?”라고 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독약과 독경과의 거리는 실로 멉니다. 독약은 먹어야 비로소 해를 끼치지만 독경은 생각만 하여도 문득 불타오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등란(騰蘭)17)은 동락(東洛)에 꽃다움을 떨쳤고 진제(眞諦)18)는 뛰어난 메아리를 남명(南溟) 땅에 몰았으며 대덕인 구마라습(鳩摩羅什)19)은 다른 나라 땅에서 덕장(德匠)을 이룩하였고 법사인 현장(玄奘)20)은 자기 나라에서 스승의 공덕을 깊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금의 여러 스님들이 나란히 불일(佛日)을 빛나게 전하며 유(有)와 공(空)을 가지런히 이룩하였다. 즉 삼장을 익힘으로써 그것을 스승으로 삼고 정혜(定慧)21)를 아울러 닦아 칠각지(七覺支)22)를 가리켜 장인(匠人)으로 삼았는데, 그것이 서방에 현존하는 곳으로는 저라도사(羝羅荼寺)에 지월(智月)법사23)가 있고 나란타사(那爛陀寺)에는 보사자(寶師子)대덕이 있다. 또 동방에는 곧 지바갈라밀달라(地婆羯羅蜜呾囉)가 있고 남예(南裔)에는 달타계다계사(呾他揭多揭娑)가 있고 남해의 불서국(佛逝國)에는 석가계율저(釋迦鷄栗底)가 있다지금 현재는 불서국에 있으며 오천축을 지나오면서 널리 배웠다.
이들은 모두 앞의 현인(賢人)과 비교해도 빼어난 사람들로 지난날의 철인의 발자취를 뒤쫓아서 인명론을 깨달아 곧 진나(陳那)와 견주려고 하였고, 유가종(瑜伽宗)24)을 음미하여 실로 마음을 무착(無著)과 같이 비웠다. 공(空)을 이야기하면 교묘히 용맹(龍猛)과 부합되었고 유(有)를 논하면 묘하게 승현(僧賢)에 일체를 이루었다.
이 여러 법사들은 나 의정(義淨)과 모두 책상을 마주하고 친숙하게 지냈다. 나는 그들의 심오한 말들을 받아먹었는데, 듣지 못했던 것을 새로 알게 된 것이 반가웠고 일찍이 얻어 예전에 해득한 것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게 되니, 등불을 전하는 한 가닥 바람을 생각하면서 실로 아침에 도를 듣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온갖 의문에서 먼지를 말끔히 없애니 저녁에 죽더라도 기꺼이 따르리라. 영취산에서 남은 구슬을 줍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때로 그 진실을 얻게 되면 용하(龍河)에서 흩어진 보석을 골라내고 자못 그 묘한 것을 만나게 되면 우러러 삼보의 먼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은택을 멀리에서 입어 마침내 발꿈치를 돌려 동쪽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남해에서 돛을 달아 탐마입저국(耽摩立底國)을 지나 실리불서국(室利佛誓國)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에 머문 지 이미 4년이 지났으나 아직 이곳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5. 장발유무(長髮有無)

장발로 구족계를 받는 일은 오천축국에서는 없는 일이며, 율장에도 그런 글은 나타나 있지 않다.
과거의 일을 두루 돌아보아도 원래 이런 일은 없었다. 다만 형상만이 속인과 같아도 죄에서 보호받기는 어렵다. 이미 계율을 지킬 수 없는데 받은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반드시 청정한 마음이 있어야 하며 모름지기 머리를 깎고 옷에 물들이고 생각을 깨끗이 하여 해탈할 마음을 품고 있어야만 5계ㆍ10계를 받들어도 훼손시키지 않고, 원만히 구족된 마음으로 율장을 준수하게 된다.
유가(瑜伽) 배우기를 마치게 되면 무착(無著)의 팔지(八支)첫 번째 『이십유식론(二十唯識論), 두 번째 『삼십유식론(三十唯識論)』, 세 번째 『섭대승론(攝大乘論)』, 네 번째 『대법론(對法論)』, 다섯 번째 『변중변론(辯中邊論)』, 여섯 번째 『연기론(緣起論)』, 일곱 번째 『대장엄론(大莊嚴論)』, 여덟 번째 『성업론(成業論)』이다. 이 가운데는 비록 세친(世親)보살이 지은 책이 있지만 그 공은 무착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를 몸으로 다하게 된다.
인명론(因明論)의 공부에 몸붙여 진나(陳那)의 8논(論)을 거울같이 투철하게 비추어 보고첫 번째 『관삼세론(觀三世論)』, 두 번째 『관총상론(觀總相論)』, 세 번째 『관경론(觀境論)』, 네 번째 『인문론(因門論)』, 다섯번째 『사인문론(似因門論)』, 여섯 번째 『이문론(理門論)』, 일곱 번째 『취사시설론(取事施設論)』, 여덟 번째 『집량론(集量論)』이다 아비달마(阿毘達磨)25)를 익히면 두루 6족(足)26)을 엿보게 되고 아급마경(阿笈摩經)을 배우면 마침내 4부(部)를 모두 탐구하게 된다.
그런 다음에 사(邪)를 항복받고 외도를 굴복시켜 바른 진리를 확고하게 부양하고 널리 뭇 중생들을 교화하며 널리 인도하여 피로를 잊게 한다. 2공(空)에 명상을 집중하여 투명하게 8정도(八正道)를 가슴에 품고 공경하는 자세로 4선(禪)을 닦고 거룩하게 7편(篇)을 수호한다. 이것으로 죽음을 보낸다면 이것이 최상의 공덕이 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비록 가족들과 함께 집에 거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私室)에 물들지 않고 단연히 온 몸으로 번뇌에서 벗어나기를 희구하며 구걸해 오는 대로 공상(公上)에 공양드리고 거친 옷을 입으며 단지 부끄러운 곳만을 가린다.
8계(八戒)첫 번째 불살생(不殺生), 두 번째 불투도(不偸盜), 세 번째 불음일(不婬佚), 네 번째 불망어(不妄語), 다섯 번째 불음주(不飮酒), 여섯 번째 부작락관화도향(不作樂冠花塗香), 일곱 번째 부좌고광대상(不坐高廣大床), 여덟 번째 불비시식(不非時食)을 지키고 간직하면서 형체가 다할 나이까지 마음을 가늠하여 삼존에 귀의하고 공경한다. 열반을 기약하면서 생각을 펴나간다. 이것이 그 다음가는 좋은 일이다.
반드시 그가 현재 울타리 속에 거처하면서 처와 자식을 양육하고 있더라도 공손한 마음으로 윗사람을 공경하고 자애로운 품으로 아랫사람을 염려하며 오계를 받아 간직하고 항상 4재(齋)흑월(黑月) 8일이나 14일 혹은 15일과 백월(白月) 8일이나 15일에는 반드시 8계(戒)를 받아야만 비로소 성수(聖修)라 칭하게 된다. 만약 앞의 7계는 없이 오직 여덟 번째의 계만 지킨다면 복인(福因)을 얻는 것이 적을 것이다. 그 뜻은 나머지 일곱 가지 계율도 지켜야 하며 비단 굶주린 배만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를 짓고 충직하며 동정심이 그 사람에게 남아 있어 자기가 할 일에 부지런히 할 수 있고 죄 없는 일을 행하여 관수(官輸)를 받든다면
이것도 역시 아름다운 일이다여기서 죄가 없다는 것은 교역(交易)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중생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서쪽 나라의 당시 풍속은 장사꾼을 귀하게 여기고 농부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밭 갈고 샘 파면서 중생의 목숨이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양잠(養蠶)과 도살을 상당한 괴로움의 원인으로 삼았다. 1년마다 그 가운데서 손해를 보는 것이 거억(巨億)에 달하였으나 이를 행한 지가 나름대로 오래되어 이것을 잘못이라 하지 않았고 미래의 생(生) 가운데서 무극한 고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업을 하지 않는 것을 무죄라 하였다.
그러나 속인의 무리는 시끄럽게 몰려다니며 3귀의(歸依)27)도 모르고 수명이 다할 때까지 허둥대고 있으니 어떻게 한 계율이라도 지닐 수 있겠으며, 열반이 적멸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생사가 윤회라는 것을 깨닫겠는가? 눌러앉아 죄업만 짓게 되니 이것이 가장 하등한 인간들이다.

36. 망재승현(亡財僧現)

무릇 죽은 비구의 물건을 나누어 갖고자 하는 경우는 율에 자세한 글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대의 필요에 대비해서 다만 간략하게 해설해 나가겠다.
먼저 죽은 사람의 부채(負債)와 맡겨서 건네줄 사람의 유무와 간병한 사람의 유무를 물어 보고 법에 근거해서 상의하되 이치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 그밖에 남은 물건은 이 일에 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올타남(嗢拕南:섭송)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토지와 집과 가게와 이부자리
구리, 무쇠 및 모든 가죽제품
체도(剃刀) 등과 병과 옷
여러 장대와 온갖 가축들

음식과 여러 가지 약
걸상과 자리와 문권(文券)
삼보ㆍ금은 등은
만들어진 것과 만들어지지 못한 것이 다르다.

이와 같은 모든 물건은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때에 따라 응해서 간별(簡別)해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일이다.

여기서 때에 따라 응한다[隨應]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토지ㆍ집ㆍ가게ㆍ와구ㆍ털담요ㆍ여러 가지 동철기(銅鐵器) 등은 모두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 가운데서 철발우와 작은 발우 및 작은 구리공기ㆍ집의 자물쇠ㆍ바늘ㆍ송곳ㆍ면도칼ㆍ작은 칼ㆍ철표(鐵杓)ㆍ화로 및 도끼ㆍ끌 등은 모두 이 여러 개의 부대에 담고, 와기(瓦器)의 경우, 즉 발우와 작은 발우,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구별하는 군지(君持) 및 기름을 저장하는 물건과 아울러 물을 담는 그릇 등 이런 것은 모두 마땅히 나누어야 하나, 나머지 물건은 나누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
그 가운데 목기(木器)ㆍ죽기(竹器) 및 가죽으로 된 와물(臥物)ㆍ머리 자르는 도구ㆍ노비ㆍ음식ㆍ곡식ㆍ
콩ㆍ토지ㆍ집 등은 모두 사방의 승단에 넣어야 하고, 만약 옮길 수 있는 물건이라면 마땅히 여러 창고에 저장하여 사방의 승단에서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여야 한다. 만약 토지와 집 마을 장원에 있는 집 같이 옮길 수 없는 것은 마땅히 사방의 승단에 소속시켜야 하며, 그래도 만약 남는 옷ㆍ이불 등이 있다면 법의나 속의를 물들였거나 물들이지 않은 것, 가죽ㆍ기름ㆍ병ㆍ신발ㆍ등속을 물을 것 없이 모두 눈앞에 보이는 곳에서 마땅히 나누어야 한다. 예전에 같은 소매 속의 물건은 나누어 갖지 아니하고 흰 옷은 다시 속인에게 넣어야 한다고 한 것은 아마도 내용으로 짐작해서 한 말인 듯하다.
큰 장대는 섬부광상(贍部光像)을 모신 곳에 깃발을 매달아 놓는 장대로 삼는 것이 좋다섬부광상이란 것은 율장 가운데 나오는 연기설과 같은 것으로 원래 세존께서 대중 속에 거처하시지 않으셨을 때, 대중에게 위엄과 엄숙함이 없어서 세존께서 급고독원(給孤獨園)의 장자28)를 시켜 세존께 청하기를, “원컨대 섬부광상을 만들어 대중의 우두머리에 안치하게 하소서”라고 하여 부처님께서 이것을 만드는 것을 허락하셨다.
작은 것은 석장(錫杖)을 만들어서 떠나는 비구에게 주는 것이 좋다석장(錫杖)이라 하는 것은 범어로는 끽기라(喫棄羅)라 하는데, 이는 곧 소리가 울린다는 뜻이다. 예전 사람이 이것을 석(錫)이라고 번역한 것은 뜻으로 주석이 소리가 울리는 것을 취한 것이다. 장(杖)ㆍ석장은 정황에 맡겨 칭한다. 내가 눈으로 증험한 바에 의하면 서방에서 지니는 석장은 머리 위에 오직 하나의 무쇠고리가 있을 뿐이며 너비는 2, 3촌(寸)이다. 거기에 자관(▼(金*字)管)을 안치하는데 길이가 4, 5지(指) 가량 된다. 그 막대기는 나무를 사용하며 굵고 가는 것은 때에 따라 정하고 높이는 어깨 높이와 같이 하여 아래에는 약 2촌(寸) 가량의 철찬(鐵纂)을 안배하고, 그 고리는 혹 둥글기도 하고 혹 기울어 굽히기도 하여서 각기 중간에서 합쳐서 큰 손가락을 넣을 만하다. 지팡이 다리 위에 혹 여섯 개나 여덟 개의 구멍을 뚫어놓는데 구리ㆍ무쇠로 만든다. 원래 이것을 제작한 뜻은 걸식할 때 소나 개를 방비하기 위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어렵게 떠받들고 받드는 데 노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한 온몸이 모두 무쇠로 되어 있고 머리에 네 개의 다리를 마련하여 지니고 다니는 데 무겁고 걸음이 지체되며 매우 차갑고 거칠거칠하니, 만드는 뜻이 아니다.
네 발 지닌 짐승들 가운데서는 만약 그것이 코끼리ㆍ말ㆍ낙타ㆍ당나귀ㆍ노새 등 사람이 타고 다니는 짐승일 경우에는 마땅히 국왕의 거처에 보내야 하나, 소나 양과 같은 것은 사방의 승단에 소속시켜야지 나누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갑옷ㆍ투구와 같은 것들도 역시 국왕의 집으로 보내야 하며, 온갖 무기 등은 두들겨서 바늘ㆍ송곳ㆍ작은 칼 및 석장두(錫杖頭)를 만들어 가서 눈앞에 나타나는 승단에 주는 것이 좋다모두에게 주지 못한다면 큰 스님에게 드린다.
그물과 같은 것들은 창문에 치는 휘장으로 사용하여야 하며 만약 상과 같이 채색된 물건, 예를 들면 노란색ㆍ주홍색ㆍ파란색ㆍ푸른색ㆍ초록색 등의 물건은 마땅히 불당에 넣어 불상에 공양할 용도에 견주어야 한다.
백토(白土)ㆍ적토(赤土) 및 하청색(下靑色)은 현전(現前)에서 나누어야 한다. 만약 술맛이 시어지려고 한다면 땅에 묻어서 식초가 되기를 기다려 승단의 스님들이
이것을 먹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현재 술이라면 마땅히 기울여서 버려야 하며, 그것을 파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부처님 말씀에, “너희들 모든 비구들이 만약 나에게 귀의하여 출가한 사람이라면 술을 가지고 가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스스로 마셔서는 안 되며, 나아가 풀 끝만큼의 한 방울의 술이라도 걸러서 입 안에 넣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다.
만약 술과 술지게미로 면(麵)을 만들거나 술국 따위를 만들어 먹는 사람은 모두 월법죄(越法罪)를 초래한다. 이는 율장에 규제가 이룩된 것이 있으니 의심할 필요는 없다영암도량(靈巖道場)에서는 늘 보리죽장[麮漿]으로 면을 만드는데 이는 술로 면을 만드는 허물을 피하기 위한 것이니, 선인들은 참으로 깊은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잡약(雜藥) 등이 있을 경우 깨끗한 창고에 안치하여 그것으로 병든 사람에게 공급하게 하여 마음대로 통용하게 한다. 여러 가지 진귀한 보배와 주옥이 있으면 둘로 나누어 한 몫은 법보의 용도에 맞게 넣고, 나머지 한 몫은 승단에 넣어서 법물은 불경을 쓰게 하는 것이 좋고 아울러 사자좌(師子座)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좋으며, 승단에 넣은 것은 현전(現前)에서 나누어야 한다. 만약 보배로 이루어진 상자와 책상 등속이 있다면 마땅히 내다 팔거나 현전에서 나누어야 하며, 나무로 이루어진 것은 사방승단[四方僧伽]29)에 넣어야 한다.
가지고 있는 경전과 장소(章疏)는 모두 나누어서는 안 되며 마땅히 경장(經藏)에 넣어 사방에서 오는 스님들이 함께 읽게 하여야 한다. 만약 일찍 이를 찾아 얻을 수 있을 경우에는 곧 이것을 나누어야 하며 만약 그렇게 할 수 없을 경우에는 문권을 마땅히 창고에 저장하였다가 뒷날 찾아 얻어 사방승의 사용에 충당하여야 한다.
또 모든 금ㆍ은 및 이루어졌거나 이룩되지 않은 기물ㆍ패치(貝齒)ㆍ여러 가지 돈과 같은 것은 모두 셋으로 나누어 한 몫은 부처님에게, 두 번째는 달마(達磨)에게, 세 번째는 승단에 배분한다. 부처님 물건으로는 마땅히 불당과 머리카락ㆍ손톱ㆍ발톱을 봉안한 탑의 파괴된 곳을 수리하여야 하고, 법물로는 불경을 베껴 쓰게 하고 사자좌(師子座)를 정리하게 하며, 대중의 물건은 현전에서 나누어야 한다. 6물(物)은 마땅히 간병인에게 주어야 하며, 그밖의 잡동사니 물건은 이에 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대율(大律)에 실린 내용과 같다.

37. 수용승물(受用僧物)

지금 서방에 있는 모든 절의 비구들의 의복은 흔히 승단의 재산에서 나온 것이 많다. 혹 전원에서 남은 것이나 혹 과일 나무에서 얻은 이익을 해마다 나누어 옷값에 충당하게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갖고 있던 곡식조차도 보내서 승단의 재산으로 삼게 하는데 하물며 대중들의 콩과 곡식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누어 쓸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시주가 본래 마을의 장원을 희사할 때는 원래 목적이 승단의 대중들을 제도하고 공양하려 한 것입니다. 어찌 그들에게 다만 먹을 것만 주고 벌거벗은 채 지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다시 해당되는 일을 상세히 살폈더니 모두가 공로가 있는 집안 사람들조차도 나름대로 옷을 주고 있는데 조주(曺主:무리의 주인공)에게 옷을 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도리로 보아서는 음식을 공급하고 남는 것을 옷에 충당한다 하여도 법에 손상되는 일은 아닙니다”라고 답하였다.
이것이 곧 서쪽 나라 대중 스님들의 대체적인 의론이다. 그러나 그들의 율전에는 때때로 이 일이 언급되거나 언급되지 않을 뿐이다.
또한 서쪽 나라의 여러 절에는 따로 옷을 공급하는 장원(莊園)을 설치하고 있다. 중국의 도량에도 나름대로 옷을 공급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음식을 얻는데 속인과 도인이 공통된 것은 이는 시주의 원래 마음에 근거한 일이라 비록 그 음식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이치로 보아서는 역시 허물이 아니다.
모든 이러한 승가에 보시하는 밭이나 집이나 또는 잡물과 대중승단의 의식(衣食)과 통하는 물건들은 참으로 의심하고 염려할 근심이 없는 물건들이다. 만약 무심히 무진한 장애물이 없는 생각을 하였다면 비록 승가에 보시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정은 두루 모든 중생에게 통하는 것이므로 다만 이것을 먹고 사용한 사람에게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아울러 시주가 먼저 마음으로 기약한 일일 따름이다.
다만 중국 땅에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스님의 옷을 얻을 수는 없다. 이것 때문에 열심히 일하지만 실은 업에 방해가 되고 있다. 설사 공양에 응해서 목숨을 부지한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심력(心力)을 고단하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상주하면서 음식이 있고 아울러 승복을 입을 수 있다면 곧 단정하게 팔짱끼고 앉아서 절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될 것이며,
또한 이는 깊이 일을 덜어주는 결과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누더기 3의(衣)를 걸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걸식하고 암자는 나무에 의지하면서 정명(正命)이라 스스로 그곳에 자리잡고, 정혜(定慧)를 안에서 무르녹게 하고 계율의 길에 상(想)을 다하며 자비는 외부로 나타내서 마음을 보제(普濟)의 나루터에 내걸며 이것으로 마지막 길을 보낼 수 있다면 이는 최고의 경지이다.
그렇다면 절의 재산으로 되어 있는 물건으로는 이것을 사용하여 옷ㆍ이불ㆍ걸상ㆍ요 따위와 아울러 여러 가지 가구를 만들어 평등하게 나누어 받아쓰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귀속하지 않는다. 손바닥에 얹어놓고 사랑하며 호지(護持)하기를 자기 물건보다 더 사랑하고 큰 것이 오는 일이 있으면 작은 것은 역으로 다른 스님에게 준다. 이것은 곧 성인의 가르침이며 부처님 자신이 명백히 말씀하신 일이다. 법에 맞게 이를 사용한다면 참으로 죄와 허물이 없는 것이며, 족히 몸을 자양할 수 있고 추구하는 비용을 면할 수 있게 된다.
절집이 거부(巨富)가 되어 곡식과 보리가 창고에서 썩고 노비가 동네에 가득하고 돈과 재물을 창고에 넣어 놓았으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모른채 함께 가난 속에 처해 있는 일이 어찌 용납되겠는가?
옳고 그름의 마땅함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때로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혹 절집에서 대중의 식량을 남겨놓지 않고 승단의 물건을 나누어 개인적으로 먹고 다른 재산을 가로막는 일이 있다면 시방세계의 사명(邪命)이 오직 자기 한 몸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곧 스스로 비법(非法)을 행한 것이니 고통의 과보를 미래에 누가 당하겠는가?

38. 소신불합(燒身不合)

여러 출가한 대중 가운데에는 자못 외길을 걷는 초학(初學)의 무리가 있어 마음을 사납고 날카로운 곳에 둔 채, 성인의 경전을 아직 익히지 못해 선인들의 행적에서 믿음을 취하여 곧 손가락을 불사르는 것을 정근(精勤)이라 생각하고 살갗을 태우는 것을 큰 복이라 생각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하여 마음대로 행하니 그 결정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밝힌 것은 일이 통속(通俗)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몸조차 오히려 공양을 권하고 있거늘 하물며 그 밖의 여러 재물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경전에서는 다만 “만약 어떤 사람이 발심하여”라고만 말하였을 뿐 출가한 대중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
생각건대 출가한 사람은 율장에 국한되어 계율 가운데 범한 것이 없어야 비로소 경전의 가르침과 통할 수 있다. 계율을 어겨도 된다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설사 향대에
풀이 무성하더라도 어찌 한 포기인들 손상시키며, 넓은 들판에서 홀로 굶주린다 하더라도 어찌 반 톨의 곡식인들 먹겠는가? 그런데도 보기를 좋아하는 중생들이 있는데 이는 속된 무리들이다.
팔을 불살라 공양드리는 것을 참으로 옳은 일이라 하고 보살이 남녀의 상징을 버릴 수 있다고 하여 마침내 비구들에게도 남녀의 상징을 버리기를 구하고, 대사(大士)가 눈을 희사하고 몸을 희사한다고 해서 곧 걸사(乞士)에게도 몸과 눈으로 보시를 행하게 하여서야 되겠는가? 선인(仙人)이 미리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어찌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 할 짓이겠느냐? 또 자력왕(慈力王)30)이 몸을 희사한 일도 승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요즘에 듣건대 소년의 무리들이 용맹하게 발심하여 몸을 불사르는 것을 정각(正覺)의 경지에 오르는 길이라 생각하고 마침내 서로 뒤를 이어 이를 익혀 가볍게 그들의 몸을 버린다고 한다. 왜냐 하면 십 겁, 백 겁이 지나도 사람의 몸은 얻기 어렵고 천 생(生), 만 생 만에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지혜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며 칠각지(七覺支)를 듣는 일도 드물고 삼존도 만나지 못하니, 지금 이미 몸을 거룩한 도량에 의탁하고 마음을 묘법에 투입하여 겨우 한 수의 게송만 지니게 되어도 보잘것없는 몸을 버리는 것은 오히려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잠시 삶의 무상함을 생각한다면 몸을 받쳐 공양하는 것이 어찌 무거운 일이겠는가? 이치로 보아서 굳게 계품을 닦아 4은(恩)31)의 은혜를 갚고 굳게 선문(禪門)을 생각하여 3유(有)에서 몸을 뽑고 벗어나기를 바라야 한다. 그리하여 작은 허물을 크게 두려워하기를 마치 깊은 바다를 건너갈 때 부낭(浮囊)을 지키듯이 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지혜를 실천하기를 마치 엷은 얼음 위에서 준마를 채찍질해 가며 달리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착한 벗의 힘에 기대서 임종 때에도 마음이 놀라지 않고 바른 염원을 품고 발돋움하여 미래의 세계에서 미륵불을 만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작은 과보(果報)를 바란다면 곧 8성도(聖道)를 구해야 한다. 만약 큰 인연을 배웠다면 3대아승기겁(大阿僧祇劫)의 수행을 여기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총총히 스스로 자기의 몸과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실로 아직 그런 도리를 들어보지 못하였다. 자살하는 죄는 그에 관한 일이 첫 편 다음에 나와 있으며 율장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런 일을 하게 한 글은 보지 못하였다. 멸수(滅受)는 친히 중요한 방법을 설하셨으나 미혹됨을 끊는 것을 어찌 몸을 불태우는 것으로 말미암겠는가?
방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가로막고 허락하지 않으셨다. 못[池] 속에서도 생명을 존속시킨 일을 세존께서는 스스로 거룩하다고 칭송하셨다. 무거운 계율을 깨고 자기의 뜻을 따르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가로막고 따르지 않으셨다. 이런 일에 자신의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참으로
성인의 가르침이 아니다.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어서 보살행을 행하고 율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몸을 없애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일은 물론 여기서 말하는 테두리 밖에 있는 일일 따름이다.

39. 방인획죄(傍人獲罪)

무릇 몸을 불사르는 무리들은 각기 마음 속의 정성을 나타낸다. 혹 세 사람이나 두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기약을 맺고 여러 초학자들을 유혹하여 소상하게 죽음을 권유하면, 앞서서 죽는 사람은 스스로 투란죄(偸蘭罪)32)를 얻게 되고, 마지막에 목숨이 끝난 사람은 결국 바라이죄(波羅夷罪)33)를 부르게 된다. 금계(禁戒)를 지키려 하지 않고 계율을 파괴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다. 마음을 외길로 고수하고 한 번도 가르침을 살피지 않아 혹 옆 사람에게 권해서 죽게 하는 일이 있다면 곧 침혈(針穴)의 말씀을 범하게 되고, 만약 왜 불에 뛰어들지 아니하느냐고 말한다면 곧 절석(折石)의 허물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아, 이 일은 참으로 삼가하여야 할 일이로다.
속담에 이르기를, “살신(殺身)이 보덕(報德)만 못하고, 멸명(滅名)이 입절(立節)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던져 준 것은 보살로서 고통을 구제한 일이 되었으니, 몸을 잘라서 집비둘기를 대신한 것을 사문(沙門)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 하여, 이것을 자살과 같은 조목으로 본다면 실로 이것은 그런 정황이 아니다. 그러므로 잠시 삼장(三藏)에 기준하여 간략하게 그 가부를 말해 보기로 한다. 진퇴의 올바름은 지혜 있는 사람이면 소상하게 살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항하(恒河) 안에서 날마다 몇 사람을 죽이고 가야산(伽耶山) 변두리에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혹 굶으면서 먹지 않고 죽는 사람도 있고 혹 나무에 올라가서 투신하여 자살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러한 미혹된 길을 걷는 사람을 세존께서는 외도라 판정하셨다. 이 밖에도 스스로 자기 몸을 형벌하여 성기(性器)를 끊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율전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 설사 이것을 갖고 잘못이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죄가 두려워 감히 충고하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그가 이 일을 연유로 해서 목숨을 잃게 된다면 곧 일생의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도리로 인해서 이를 제지하시고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상인(上人)들은 모두 아는 일이라 스스로 이런 일은 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덕(古德)들이 서로 전한 말은 뒤에 밝히는 내용과 같다.

40. 고덕불위(古德不爲)

잠시 나 의정(義淨)의 경우를 들면 친교사(親敎師)는 선우법사(善遇法師)이시고
궤범사(軌範師)는 혜지선사(慧智禪師)이시다. 나이 일곱 살이 넘어서 다행히 그 분들을 친히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스승께서는 나란히 태산(泰山) 금여곡(金輿谷)의 성인이신 낭선사(朗禪師:僧朗)가 지은 신통사(神通寺)의 대덕이시며 속가의 인연은 덕주(德州)와 패주(貝州)의 두 고을에 있다.
두 분 대덕은 생각하시기를 ‘산중에 살면서 홀로 착한 것은 중생을 이롭게 할 길이 희박하다’라고 하시고 함께 평림(平林)을 찾아가시어 맑은 계곡을 내려다 보며 그곳을 베개 삼고 토굴사(土窟寺)에 고요히 머무시면서 선을 닦으셨다. 이곳은 곧 제주성(齊州城)의 서쪽 40리가 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계속해서 음식을 준비하여 구애됨이 없이 공양하시고 받아들인 시주의 보시는 모두 희사(喜捨)를 하시니, 사홍서원(四弘誓願)34)은 하늘과 땅과 함께 끝이 없으며 4섭법(攝法)35)으로 널리 중생을 구제하심이 먼지나 모래처럼 다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이다. 공경히 사우(寺宇)를 수리하시어 크게 복업을 일으키셨다.
간략하게 법사의 일곱 가지 공덕을 말하겠다.
첫 번째는 법사의 박문(博聞)이다. 법사께서는 바로 삼장을 훔쳐보시고 한편으로 제자백가에 눈을 돌려 두 학문을 모두 겸하셨다. 6예(藝)를 통달하고 갖추시어 천문ㆍ지리ㆍ음양ㆍ역산(曆算)의 기이한 학문에 이르기까지도 오직 그것을 거쳐갈 마음만 있게 되면 묘하게 그것이 신부(神府)를 꿰뚫었다. 그리하여 양양한 지혜의 바다 속으로 마침내 쏟아져 흘러내리며 마르고 다하는 일이 없었다. 그 아름다운 문학의 동산에는 오랫동안 꽃피어 시들지 않고 지은 문장과 일체경음(一切經音)과 아울러 여러 자서(字書)들이 자못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약 몰랐다면 이것은 글자가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두 번째는 법사의 다능(多能)하심이다. 전자(篆字)ㆍ주자(籒字)에 능하시고 종장(鍾張)36)의 서체를 잘 쓰셨으며, 음악을 듣고 감상하면 종자기(鍾子期)가 산수(山水)로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증명하는 것과 같으셨고, 도끼를 놀리면 장석(匠石)37)이 작은 흙덩어리를 제거하듯 솜씨가 있었으니, 명철(明哲)한 사람은 정해진 그릇이 없다[哲人不器]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세 번째는 법사의 총명과 지혜다. 『열반경』을 읽으시면 하루에 곧 두루 다 읽으셨고, 처음 이 경전을 외우실 때 네 달 만에 전부를 마치셨다. 유종(幽宗)을 연미(硏味)하시고
현묘한 지혜를 탐미하셨으며 어린 동자를 가르치시면 이들을 유인하시는데 반자(半字)로 하시어 참으로 검(劒)을 어루만진다는 의혹이 없었고 큰 기틀을 지닌 사람에게 전수할 때는 이를 완벽한 그릇에 쏟아부어 실로 보배를 받쳐 드는 이익이 있었다.
예전 수(隋)나라의 말년에 도가 쇠퇴하여 미약해지자 법사는 곧 굳은 결심을 하시고 양부(楊府)로 옮기셨으나, 여러 스님들은 설법을 듣고도 모두 우둔한 사람이라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외모가 질박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법사로 하여금 『열반경』을 읽게 하고 두 제자를 시켜 구마다 암송하시는 것을 지켜보게 하였다. 법사께서는 당시에 강개(慷慨)한 목소리로 음성과 뜻을 격양하여 새벽부터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 세 질(帙)을 이미 끝내시니 당시 사람들 가운데 경찬(慶讚)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가 쉬기를 요청하며 드문 일이라고 감탄하고 찬탄하였다. 이 일은 대중들이 다함께 아는 사실이며 내가 개인적으로 찬양하는 말이 아니다.
네 번째는 법사의 도량이다. 시장에서 교역하는 일이 있기만 하면 찾는 대로 이에 응수하여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아니하고 한 번도 값을 깎지 않으셨다. 설사 값을 계산하면 되돌려 받을 돈이 있을 경우에도 다시 그 돈을 받지 않으셨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법사의 아량이 무리 가운데서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다섯 번째는 법사의 인애(仁愛)하심이다. 의리를 중히 여기시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시어 보살행을 따르셨다. 어떤 사람이 와서 따라 빌면 모두 그 말을 거역하지 않으시고 하루에 삼문(三文)을 보시하는 것이 평상시의 소원이었다. 또 일찍이 몹시 추운 겨울에 객승(客僧)인 도안(道安)이 눈길을 무릅쓰고 먼 길을 걸어오는 바람에 발이 부르터서 갈라졌고, 마을에서 며칠 쉬는 동안에 곪아 고름이 흐르자 마을 사람들이 수레에 실어보내 절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법사는 새로 가사 한 벌을 만들어 겨우 몸에 둘렀는데 문을 나서자 갑자기 그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가사로 그 피고름을 덮어 주니 옆에 있던 사람이 이를 제지하면서 말하였다.
“헌 물건을 찾아 덮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새 옷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법사가 말씀하셨다.
“서로 매우 심한 고통을 구제하는데 어찌 다른 것을 찾을 여가가 있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이를 보고 깊이 찬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이 일은 아주 중대한 일은 아닐지라도 그러나 이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은 본래부터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섯 번째는 법사의 제자들을 다독거려 격려함이다. 팔부(八部) 『반야경(般若經)』38)을 각각 모두 백 번을 두루 읽으셨고, 아울러 『일체경(一切經)』 39)을 다루기를 여러 번 처음부터 끝까지를 마치셨다. 정방업(淨方業)을 닦으실 때는 밤낮으로 발돋음하여
근면하셨으며, 불승(佛僧)의 땅을 맑게 하여 생(生)을 희구하였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셨다. 대부분 맨 발로 길을 걸어으시어 혹 중생이 손상될 것을 두려워하셨으며, 생각을 돌리어 마음을 드러냄에 한 번도 게으른 적이 없으셨다.
향대를 쓸고 물 뿌려 안양정토(安養淨土)40)에서 구품(九品)의 연꽃이 핀 것과 비슷하게 만드셨고, 경실(經室)을 장엄하게 하여 마치 취령(鷲嶺)의 하늘에서 네 종류의 꽃비가 내린 것과 같이 만드셔서 그것을 본 사람은 공덕을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몸소 권태로운 것을 잊으시고 목숨이 다할 때를 기한으로 삼으셨다.
또한 전독(轉讀)하는 여가에는 아미타불을 염불하시어 4위의(威儀)41)에 빠진 것이 없었고 1촌(寸)의 해 그림자가 지나가는 짧은 시간에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셨다. 작은 콩알을 헤아리기를 만 2년 가량 하셨으며 널리 제도하신 실마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곱 번째는 법사의 명(命)을 아신 일이다. 법사께서 곧 세상을 마치시기에 앞서 한 해에 갖고 계시던 문장ㆍ잡서ㆍ역사 등의 문서를 쌓아 큰 더미를 만들었다. 이것을 쪼개서 종이찰흙을 만들어 절에 금강역사(金剛力士)의 상 2구(軀)를 조성하여 용도에 충당하려 하자 문인들이 나아가 간(諫)하였다.
“어른께서 반드시 종이가 필요하시다면 저희들이 기꺼이 공지(空紙)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이에 법사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글에 탐착하여 오랫동안 나를 그르쳐 왔는데 어찌 오늘에 와서 다른 사람을 그르칠 수 있겠는가? 비유하면 짐독(鴆毒:짐새의 독)을 먹게 하는 것과 같고 지름길이라 하여 험한 길을 가르쳐 주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정업(正業)을 폐지하고 방공(傍功)을 익히게 되는 것으로 성인께서 상품(上品)의 스님으로 인정하신 사람이라도 여기에 탐착하면 큰 허물을 이루게 된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
그러자 문도들이 거룩하다고 칭송하면서 물러갔다.
그의 설문(說文)과 자서(字書) 등은 다행히 극진한 하사(下賜)를 받게 되었다. 이어 법사는 교훈을 드리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대략 경사(經史)를 읽어 보았으니 문자는 대충 알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훌륭한 경전에 마음을 두고 흠모하여야 하며 이 누(累)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리고 곧 세상을 떠나시려 할 때 문인들에게 알리셨다.
“나는 수삼 일 사이에 결국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마칠 때는 반드시 빗자루를 가슴에 안고 죽을 것이다. 나의 유해는 곧 넓은 못에 버려라.”
그 후 이른 아침에 맑은 계곡물이 굽어보이는 쓸쓸한 백양(白楊)나무 아래 초록색 가지 옆에서 서성거리다가 외롭게 홀로 앉아 빗자루를 손에 잡고 세상을 마치셨다.
문인인 혜력(慧力)선사가
날이 밝자 나아가 알현하였는데 조용하여 소리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곧 손으로 만져보니 오직 뜨거운 기운이 머리로 치밀어 오르는 것만 보았을 뿐 손발은 모두 차가웠다. 이에 마침내 곧 크게 통곡하니 사방 먼 곳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이때 법려(法侶)들의 슬픈 울음소리는 금하(金河)42)의 흐르는 피가 땅에 뿌려지는 것과 같았고, 일반인들의 울부짖고 통곡하는 모습은 옥령(玉嶺)에서 명주(明珠)가 부서지는 것과 같았으며, 모두가 도수(道樹)43)가 일찍 시든 것을 가슴 아파하였고 법주(法舟)가 갑자기 침몰한 것을 한탄하였다. 그리하여 절의 서쪽 뜰에 묻었는데 그때 춘추는 63세였다. 죽은 후에 몸에 연유한 자구(資具)라고는 오직 3의(衣)와 낡은 신발 두 켤레와 편의에 따른 와구(臥具)뿐이었다.
법사께서 세상을 떠나시던 날 나 의정은 단지 열두 살이었다. 대상(大象)이 떠나고 나니 의지하여 투신할 곳이 없어졌고 마침내 외서(外書)를 버리고 마음으로 내전(內典)을 흠모하게 되었으며, 열네 살 때 스님의 대열에 참여하는 은택에 젖게 되었으며, 열여덟 살 때 서천으로 향하려 하다가 서른일곱 살 때에 비로소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나 의정이 돌아오던 날 법사의 묘에 나아가 하직하는 예배를 올렸다. 이때 이미 서리 내린 숲이 둘러쳐져 있었고 해묵은 풀들이 묘역을 메우고 있었다. 신도(神道)가 비록 소원하다고는 하나 살아계실 때와 같은 공경을 펴면서 주위를 두루 발돋움하여 바라보면서 먼 길을 다녀온 마음을 술회하고 유령(幽靈)에 복리를 기원하며 인자한 스승의 두터운 덕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한편 혜지(慧智)선사께서는 뜻을 오로지 율의에 두고 마음을 선정(禪定)의 물결로 맑게 하여 주야로 6시(時)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사부대중을 인도하면서 피로를 잊으셨으니 어지러운 곳에 처해도 시끄럽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 있으면서 더욱 고요한 분이라 말할 수 있다. 도속들이 모두 마음을 맡겨도 극진하게 친한 것은 아니었다.
60여 년 동안 『법화경』44)을 매일 한 차례 두루 외웠으니 헤아려보면 2만여 번을 두루 외운 셈이 된다. 비록 수(隋)나라 말년에 나라 안이 폐허가 되어 운명의 물결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지만 그러나 이 기약한 마음에는 한 번도 그것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 육근청정(六根淸淨)45)과 사대평화(四大平和)의 경지를 얻어 60년 동안 조금도 다른 병이 없었다.
늘 계곡물을 굽어보며 경을 외우면 문득 신령한 날짐승들이 모여들어 앉았으며, 법당 구석에서 전독하면 그것에 감응되어 새벽에 우는 닭들이 모여들어 그것을 들었다.
인연과 정을 잘 알았고 음율에 몸담았으며 더욱이
초서(草書)ㆍ예서(隸書)에 밝았으며 그 창도한 업적은 끝이 없다. 비록 외전(外典)에 마음을 두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타고난 자유자재로운 재능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지은 육도송(六度頌)과 발원문(發願文)은 나란히 토굴사(土窟寺)의 등대에 쓰여 있다.
이어 선사께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깨끗하고 청정하게 법화경을 베껴 쓰니 극히 명수(名手)의 솜씨를 다하여 그 최상의 보시를 다하였다. 향기를 머금고 기운을 토해내어 몸을 깨끗이 하면 홀연히 경 위에 사리가 감응되었다. 그리하여 경이 이룩되자 곧 금자로 서첩을 만들어 은고리와 함께 합채(合彩)하여 보배함에 담으니, 옥축(玉軸)과 더불어 함께 빛이 났다. 황제가 태산에 행차하자 자세한 사정을 알고 내전에 들어가 공양하기를 청하였다.
이 두 스승께서는 곧 선대의 성인이신 낭(朗)선사의 뒤로 그 발자욱을 이어온 분들이다. 낭선사는 이진(二秦)시대에 현생하시어 오부대중에게 명성을 드높이신 분이며 분신(分身)으로 공양을 받았다. 몸이 공양하는 사람의 문에 이르러 일에 따라 기회를 이끌었으니, 일은 기회와 마음의 바라는 바에 맞았다. 오직 교화만을 위하여 물외(物外)에 초연한 까닭에 까닭에 신통(神通)이라고 절 이름을 지었다. 그 분의 신비한 공덕은 생각하기 어려웠으며 자세한 것은 따로 전기에 실려 있는 것과 같다.
이때에 즈음하여 군왕은 머리를 조아리고 관료와 서민들은 마음을 경건히 하였다. 처음 절을 짓고자 할 때 처음으로 산에 들어가니 북쪽 시냇물에서 호랑이가 절규하는 것을 보았고 산에서 나오려 하자 다시 남쪽 골짜기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우물은 아무리 퍼도 줄지 않았고 천연의 창고에는 쌀을 퍼내도 뒤따라 평평해졌다. 이러한 신비한 자취는 비록 오래되어 인멸(湮滅)되기는 하였으나 그 여풍은 아직도 다하지 않았다.
그 후 친교사와 궤범사의 두 분 스승과 그밖에 주지하는 대덕ㆍ명덕 선사들은 모두가 훌륭하게 율법의 뜻을 잘 익혔고 경전의 마음을 오묘하게 체득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스님들이었다. 손가락을 불사르고 살갗을 태우는 일은 일찍이 이곳 가르침에서는 없었다. 문도들을 훈계하는 스승은 이런 행위를 제지하여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는 모두 내가 친히 들은 일로서 전해 내려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자상하게 지난날의 명철하신 분들을 보고 옆에서 전대의 규칙을 들어보니 백마사(白馬寺)46)
말고삐를 멈춘 처음부터 청상(靑象)에 안장을 건 뒤로 마등(摩騰)47)ㆍ법란(法蘭)48)이 빛남을 열어 신주(神州)의 해와 달이 되어 승회(僧會)ㆍ법현(法顯)49) 스님은 법칙을 드리워서 천부(天府)의 진량(津梁)50)이 되었으며, 도안(道安)51)과 혜원(慧遠)52) 스님은 양자강의 남쪽에 범처럼 버티고 있었으며 혜휴(慧休)와 법려(法勵)53) 스님은 황하의 북쪽에 명성을 드날려 법도들이 뒤를 이어 지혜의 물결이 아직도 맑고 속사(俗士)들이 칭찬하여 방진(芳塵)이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직 손가락을 불사르게 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또한 몸을 태우게 한 일은 보지 못하였다. 규칙의 거울이 눈 앞에 있으니, 지혜 있는 사람은 모두 소상하게 알 것이다.
또한 선사께서는 늘 한가한 밤에는 어린 나를 가련히 여기시어 간곡히 진유(進誘)의 말씀을 하셨으며, 혹 노란 나뭇잎을 금이라고 하며 달래주시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근심을 덜어주셨다. 혹 비유의 말로 까마귀의 효도하는 이야기를 하여서 보양하는 덕을 품게 되기를 바라며, “너는 힘써 삼보를 계승하고 융성시켜 끊어지지 않게 하여야 하며, 마음을 백가(百家)에 방종케 하여 헛되게 일생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
이윽고 내 나이가 열 살이 되었으나 다만 그 말씀만 받아들였을 뿐 아직 그 깊은 뜻을 익히지는 못하여 오경(五更)이 될 때마다 선실에 나아가 진실로 청하였다. 이때 선사께서는 반드시 자비로우신 손으로 약한 어깨를 쓰다듬어 주셨으며 실로 자애한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기르는 것과 같았다. 혹 맛있는 반찬을 먹게 되면 흔히 맛보기를 그만두시고 남겨 주셨으며 오직 취하고 구하는 것이 있기만 하면 청하는 것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선우(善遇)법사는 그 은혜가 엄한 아버지의 격려를 받는 것과 같았으며, 혜지선사는 그 자애하심이 어머니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과 같았으니, 천성의 후덕함이 참으로 여기에 더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구족계에 나아갈 나이가 되자 도리어 선사를 화상(和尙)54)스님으로 삼게 되었고 계를 받고 나서는 홀연히 맑은 밤 행도하는 때에 향을 사르며 눈물을 떨구면서 가르침의 말씀을 하셨다.
“큰 성인께서는 오래전에 이미 열반에 드셔서 법과 가르침이 와전되고 바꾸어져서 사람들은 받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 사람만 많고 지니고 지키는 사람은 적다. 너는 오직 굳은 마음으로 금계를 존중하고 초편(初篇)의 죄를 범하지 말아라. 그 나머지 죄와 허물이 있는 것은 설령 그것을 범하였다고 하더라도 내가 곧 너를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 벌을 받겠다. 손가락을 불태우고 몸을 불사르는 일은 하여서는 안 된다.”
나아가 뜻을 받들던 날 다행히 자비를 입어
성계(聖戒)를 내려주셨기에 힘에 따라 뜻을 다하여 감히 허물고 어기는 것이 있게 되면 비록 작은 죄라 할지라도 큰 두려움을 가슴에 품게 되는 것이 있었다. 이에 5년 동안을 율전을 정밀하게 탐구하고 율사들의 글과 해설을 갈고 닦아 제법 깊은 뜻을 논의하게 되었다. 선율사(宣律師)의 초술(鈔述)은 남몰래 중도(中道)의 뜻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범(持犯 : 계율을 지키는 것과 파괴하는 것)의 한계를 알게 되니 스님은 곧 한 차례 두루 강론을 하게 하시고 비로소 대경(大經)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후 걸식으로 하루 한 끼의 밥만 먹으면서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비록 산사(山寺)가 마을에서 멀었지만 한 번도 수행을 그만둔 일은 없었다. 늘 대사(大師)의 자훈(慈訓)을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어디서 나오는지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로소 보살의 은혜는 고통받는 부류를 구제하려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큰 불더미 속에 몸을 던졌고 장자(長者)는 불쌍한 아들을 슬퍼하여 좁고 막힌 작은 문을 엿보았다는 것이 본래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험하게 되었다.
늘 친히 발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멀리 길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 밑에는 또 나의 시중을 들 사람이 있으니 공부를 폐하면서까지 공연히 이곳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알려 주셨다. 이에 곧 석장을 짚고 동위(東魏)땅으로 가서 자못 대법(對法)55)과 『섭론(攝論)』에 마음을 전념하고 다시 책 보따리를 등에 업고 서경(西京)으로 가서 비로소 『구사론(俱舍論)』56)과 『유식론(唯識論)』을 읽고 생각하였다.
수도에서 돌아오던 날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와 친히 큰스님에게 요청하였다.
“존자께서는 이미 연로(年老)하신데도 제 마음은 먼 곳을 유행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직 듣지 못한 것을 추람(追覽)하고 큰 이익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마는 아직 감히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승께서는 곧 가르침을 남기시어 말씀하셨다.
“너는 큰 인연을 위하여야 한다. 때는 두 번 오는 것이 아니다. 의리에 가로막혀서 어찌 사사로운 그리움을 품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혹 세상에 남아 있게 된다면 너의 전등을 보게 될 것이다. 곧 가는 것이 좋겠구나. 남아서 뒤를 돌보는 것을 일삼지 말아라. 성인의 발자취를 보고 예배드린다면 나도 진정 따라 기쁘겠구나. 불법을 계승하고 융성시키는 일은 중한 일이니, 너는 틈이 생기게 하여서는 안 된다.”
자비하신 허락을 받고 나니 윗분의 명을 어기기 어려워서 마침내 함형(咸亨) 2년(671) 11월에 배를 타고 광주(廣州)로 가서 남해에 돛대를 올려 인연이 있는 여러 나라를 지나 서쪽 나라에서 석장(錫杖)을 흔들면서 함형 4년 2월 8일에 이르러 비로소 탐마입저국(耽摩立底國)에 도달하였는데 이곳은 동인도의 바다의 입구였다.
그곳에 머물다가 5월에 이르러서야 도반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나란타사(那爛陀寺)와 금강좌(金剛座)에 이르렀고 마침내 두루 성인의 발자취를 순례하고는 불서국(佛誓國)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선지식이라야 범행(梵行)57)이 완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진실된 가르침이 어찌 어긋나는 말씀이겠는가?
대사께서는 중생에 응하시어 우뚝 뛰어나게 태어나시어 한 시대의 모범이 되셨고 친히 스스로 손잡고 권장하시어서 성인(成人)에 이르게 하셨으니 이는 마치 바다에서 뗏목만을 의지해가다가 좋은 시력을 가진 안내자를 만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곧 인생의 나루터에서 다행스럽게 두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다.
무릇 이것으로 볼 때 작은 선(善) 작은 혜택을 입은 일조차도 그 아름다움을 거문고와 노래로 전파하는 것인데 하물며 큰 지혜와 큰 은혜를 입고도 글로 전하여 찬양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아름답도다. 부모님이시여.
광겁(曠劫)의 예전부터 서로 지켜서
여기 나 이갈이 하는 어릴 때
손잡고 데려가 밝은 스승께 나아가게 하셨네.

동자 나이 아직 어려서
사랑을 버리니 슬픔이 솟아났으나
배우고 때로 익혀
공덕을 잠규(箴規)에 의지하였네.

운명을 해와 달에 벗하니
그 덕 천지에 비유되고
나의 지혜의 칼날 갈아주시고
나의 법의 살갗 자라나게 하셨네.

손잡고 길러 주시며
친히 타이르시며 피로 잊으셨고
한밤중에도 잠자기 그만두시고
해 저물어도 굶주림 멈추셨다네.

상덕(上德)은 덕이 아니오라
멀어서 알지 못하고
광채를 높은 산마루에 묻어서
덕을 끝까지 가장자리에 감추셨네.

양양(洋洋)하도다. 지혜의 바다.
울울하도다. 선(禪)의 가지여.
그 문장 찬란하게 빛나고
그 선(禪)의 광채(光彩) 밝고 밝도다.

갈아도 번쩍거리지 아니하고
누렇거나 검어지지 아니하였고
좌천(坐遷)으로 남다름을 보이셨고
닭이 법문 듣는 일로 기이함을 나타내셨네.

어린 나이라
하나는 남아 있고 하나는 버렸지만
가지고 있는 복업은
모두 훈자(熏資)에 써서
은혜를 사별(死別)한 뒤에 갚고
덕은 살아서 헤어질 때 보답하오리.

원하옵건대 있는 곳마다 만나서 경사를 늘려 나가고
대대로 훈계를 받들어 교체 이루어
같은 산에 의리를 쌓고
못물처럼 청정한 선정(禪定)에 맡겨

용화수(龍華樹)의 첫 모임을 바라며
미륵불의 현오한 물결 법문을 듣고
사생(四生)에 두루 생각을 돌려

삼대의 긴긴 아승기(阿僧祇) 세월을 채우소서.

혹 듣는 사람들이 허망한 것에 근거한 말이라 생각할까 두려워 잠시 법사께서 지은 시를 해설하겠다.
대사께서는 일찍이 2월 15일에 스님과 속인이 함께 남산의 낭(朗)스님의 성적(聖迹)이 있는 곳을 찾아가 천창(天倉)ㆍ천정(天井)의 이적(異蹟)을 보시고 영감(靈龕)ㆍ영묘(靈廟)의 기적에 예배드렸는데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크게 공양을 일으켰다. 이때 제왕(齊王) 이하 문학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 자리에 모였으며 모두가 필해(筆海)를 가슴에 품고 나란히 문봉(文峯)을 마음대로 좌우하는 사람들로 각기 재능을 다투고 함께 자신의 뛰어남을 자랑하여 낭스님의 묘상(廟像)을 시로써 읊고자 하여 함께 법사를 추대하여 먼저 짓게 하였다.
법사께서는 곧 사양하지 않으시고 그 소임을 맡았다. 이에 강물과 못물이 먼저 넘쳐서 문한을 벽에 베껴 쓰는데 조금도 붓 끝을 멈추는 일이 없어 달리듯 써내려 가서 한 편의 시를 이루고 조금도 가점(加點)하는 일이 없었다. 그 시에서 말하였다.

상대의 성인 빼어나게 빛나
그 영유(英猷) 깊은 바다에 펼쳤네.
빈 골짜기에 스스로 깃들어
영예로운 명(命) 헛되게 기다리게 하였네.

만고에 산천은 텅 비어 있으나
천 년을 흘러 사람의 시대는 바뀌었네.
진실로 무생(無生)을 환하게 안다면
다만 단청만 남아 있음을 보는구나.

이에 여러 문사들은 법사가 지은 시를 보고 나서 모두가 속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혹 소나무 가지에 붓을 걸어놓기도 하고 혹 암곡(岩谷)에 벼루를 던지기도 하면서 말하였다.
“서시(西施)가 모습을 나타내니 모모(嫫母:醜女)가 어떻게 얼굴을 드러내겠는가?”
그리하여 재주 있는 선비가 숲의 나무처럼 많았지만 마침내 한 사람의 화운(和韻)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 밖의 문장은 모두 별집과 같다.
의정(義淨)은 공경하게 대주(大周)의 모든 대덕스님들께 아뢰나이다. 이 가운데는 혹 일찍이 빈자리에서 법문을 듣고 받은 사람도 있고, 혹 법문의 뜻을 묻고 논의한 사람도 있고, 혹 약관의 나이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도 있고, 혹 중년에 와서 회포를 통한 사람도 있으나 모두 큰 사람에게는 경례(敬禮)하고 작은 사람에게는 “천만(千萬)에”라고 하면서 나열한 40조의 글은 가늠이 될 일을 요약해서 논한 것이오.
무릇 여기에 기록된 것은 모두가 서방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현행되고 있고 성인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이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오. 무릇 목숨이란 흘러가는 시냇물과 같아서 아침에 저녁 일을 꾀할 수 없으니 혹 얼굴을 마주 보며 말하기가 어려울까 두려워 이렇게
먼저 베풀게 된 것이니, 여가가 있을 때 찾아오셔서 원대한 의견을 밝혀 주시면 다행으로 생각하겠소. 이는 살바다(薩婆多:설일체유부)에 근거한 것이며 다른 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오.
거듭 말씀하겠소.

공경하게 영칙(令則)을 말함은
큰 계획을 되살리려 함이네.
모두 성인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니
어찌 정으로 구한 것이라 하겠는가?

얼굴 보며 뵙기 어려울까 두려워
이렇게 먼저 갚아 보내오리다.
원컨대 수레바퀴 자락에 묶어두어
버리지 아니하고

보잘것없는 이 사람 거두어 주신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백 대 뒤에 발자취 뒤따라
천추에 아름다움을 전파하리라.

진실로 바라노니 영취산이 소실봉(小室峯)과
가지런하게 되고
왕사성(王舍城)이 신주와
나란히 있게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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