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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909 불설해절경(佛說解節經)

by Kay/케이 2025.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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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해절경(佛說解節經)

 

불설해절경(佛說解節經)

진(陳) 진제(眞諦) 한역
김성구 번역

1. 불가언무이품(不可言無二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어느 때 부처님 바가바(婆伽婆)께서 왕사성(王舍城) 기사굴산(耆闍崛山)에 머무시면서 큰 비구들 9만 9천 명과 함께하셨는데, 모두가 아라한(阿羅漢)으로서 모든 누(漏:번뇌)가 다하였으며, 할 일은 이미 다하여 모든 무거운 짐을 버렸으며 자기의 이익을 얻어 모든 유(有:존재)의 매듭[結:번뇌]을 다하였으며, 마음이 해탈을 잘 얻었으며, 자재를 잘 얻었으며, 사마타(奢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를 잘 얻었으니, 그 이름은 정명아야교진여(淨命阿若矯陳如)의 무리와 나아가 아라나(阿羅那)삼매의 선정에 머무른 수보리(須菩提) 등이었다.다시 큰 비구니들 3만 6천 명과도 함께하셨는데, 마하파사파제(摩訶婆沙婆提)와 나아가 발타가비라(跋陀迦比羅) 비구니들이 상수(上首)가 되었다.또 한량없고 셀 수 없는 우바새(優婆塞)와 우바이(優婆夷)가 있었으니,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 등이 상수가 되었다.또 보살마하살 무량 백천(百千)과 이 현겁(賢劫) 가운데의 많은 보살들로서 혹은 이 땅에 머무르고 혹은 딴 곳에서 왔으니, 일생보처(一生補處)인 미륵보살(彌勒菩薩)과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등이 상수가 되었다. 모두 매우 깊은 법성(法性)을 통달하였고, 길들여 교화하기 쉽게 하였으며, 선행(善行)을 평등하게 하였으며, 보살도를 닦아서 일체 중생의 참된 선지식이 되었으며, 걸림 없는 다라니를 얻어서 물러나지 않는 법륜(法輪)을 굴렸으며,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니, 이러한 무리들이 모두 다 모여 들었다.그때 여리정문(如理正問)보살이 능해심심의절(能解甚深義節)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일체의 법은 둘이 없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능해심심의절보살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일체의 법이란 이 두 가지에 지나지 않으니, 이른바 소작(所作:有爲)과 비소작(非所作:無爲)입니다. 소작이란, 소작도 아니고 비소작도 아니요, 비소작이란 비소작도 아니고 또한 소작도 아닙니다.”여리정문보살이 물었다.
“불자여, 어떻게 소작이 소작도 아니고 비소작도 아닙니까? 그리고 비소작이 비소작도 아니고 또한 소작도 아닙니까?”능해심심의절보살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소작이라는 것은 대사(大師: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의 언구(言句)이니, 만약에 이것이 대사의 바른 가르침의 언구라면, 곧 세간에서 주장하는 언설(言說)이어서 분별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이 세간의 언설이 만약 분별에서 일어났다면, 갖가지 분별과 말한 것이 한결같음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소작이 아닙니다.선남자여, 비소작이라는 것도 언교(言敎)에 속하며, 포섭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떠한 법이 소작과 비소작을 떠났을지라도 그 법도 또한 그렇고[如是], 또한 그러합니다. 만약 이러하다면, 대사(大師)의 설교가 가히 뜻[義]이 없겠습니까? 뜻이 없지 않을 것이니, 만약 뜻이 있다면 뜻의 모습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른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본체(本體)이어서 오직 성인의 분별없는 지견(知見)만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인데, 남들로 하여금 이러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본체를 깨닫게 하려고 하시는 까닭에 대사께서 이러한 언교(言敎)를 말씀하시니, 이러한 법을 소작(所作)이라 합니다.선남자여, 비소작이라는 것도 대사의 바른 가르침의 언구(言句)이니, 만약 이것이 대사의 바른 가르침의 언구라면, 이는 세간에서 세운 말들이라 분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말들이 만약 분별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갖가지 분별과 말한 것이 한결같음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니, 그런 까닭에 비소작이 아닙니다.선남자여, 소작이라는 것도 언교에 속하여 포섭되니, 만약 어떠한 법이 비소작과 소작을 떠났다 할지라도 이 법은 또한 그렇고 또한 그러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대사의 설법이 가히 이치가 없겠습니까? 이치가 없지 않을 것이니, 만약 이치가 있다면 그 모습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른바 말로 못할 본체이어서 오직 성인의 분별없는 지견(知見)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인데, 남들로 하여금 이러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본체를 깨닫게 하려고 하신 까닭에 대사께서 언교를 말씀하시니, 이른바 이것이 법의 비소작입니다.선남자여, 마치 재주 있는 요술쟁이[幻師]나 그의 제자가 네거리에서 풀잎사귀나 나무ㆍ돌 따위를 취하여 한곳에 모으고 갖가지 허깨비의 일을 나타내되, 코끼리 군사[象兵]ㆍ말 군사[馬兵]ㆍ수레 군사[車兵]ㆍ걷는 군사[步兵]와 마니(摩尼)ㆍ진주(眞珠)ㆍ산호(珊瑚)ㆍ옥석(玉石)ㆍ창고(倉庫) 따위를 청하니, 만약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어린이나 범부(凡夫)나 어리석고 삿된 지식(知識)을 가진 이라면 풀잎 따위가 허깨비의 근본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보거나 들은 것을 사유하되, ‘실제로 이러한 코끼리나 말 따위의 네 가지 병졸이나 창고가 있다’고 여깁니다.혹은 보거나 혹은 들은 것을 능력에 따라 집착하여 보고 들으며, ‘이것만이 진실하고 다른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다시 거듭 사량하여야 합니다. 만약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어린이나 범부나 어리석고 삿된 지식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이러한 풀잎 따위가 허깨비의 근본임을 알고, 혹은 보거나 혹은 들은 것을 사유하되, ‘이들 코끼리나 말 따위의 물건과 창고들은 없다’고 생각하고, 이 사람은 혹은 보거나 혹은 들은 것을 능력에 따라 집착하지 않고 보고 들으며, ‘내가 생각하는 이것만이 진실하고 다른 것은 진실이 아니다. 비록 세간의 말을 따랐으나 진실한 이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다시 거듭 사량하기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선남자여, 이와 같은 어린이나 범부들은 세간을 벗어나는 진여의 성스러운 지혜[聖慧]를 얻지 못하였으며, 모든 법의 말할 수 없는 본체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이 사람이 만약 모든 법의 소작(所作)과 비소작(非所作)을 혹은 보거나 혹은 듣고서 사유하되, ‘실제로 이러한 모든 법의 소작과 비소작이 있다.’고 할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볼 수 있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이 사람은 혹은 보거나 혹은 들은 것을 능력에 따라 집착하여 보고 들으며, ‘이것만이 진실하고 다른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거듭 사량하기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만약 어떠한 사람들이 어린이나 범부가 아니어서 이미 진실을 보았고, 세간을 벗어나는 진여의 성스러운 지혜를 얻었으며, 이미 모든 법의 말할 수 없는 본체를 알았으므로, 혹은 보거나 혹은 들은 것을 사유하되, ‘보고 아는 것과 같은 모든 법의 소작과 비소작은 모두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거짓된 모습만이 있다. 분별에서 일어난 허깨비의 일이 범부의 마음을 속이는데, 이 가운데 소작과 비소작의 이름과 나머지 여러 이름이 일어났구나.’라고 할 것입니다.이 사람이 보거나 들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이것만이 진실하고 다른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비록 세간의 말을 따랐으나, 진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므로 이 사람은 거듭 사유할 필요가 없습니다.선남자여, 이와 같이 하여 성인이 성스러운 지견(知見)을 말미암아 이미 말할 수 없는 본체를 깨닫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법의 실상을 보게 하고자 하는 까닭에 가르침의 구절[句]을 말씀하시니, 이른바 이것이 소작과 비소작 따위입니다.”그때 능해심심의절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부처님의 말씀하신 말이 끊긴 법
두 가지가 아니며 범부 경계 아니네.
어리석은 범부는 그 속에 홀려
두 갈래를 연(緣)하여 희론 일삼네.
삿된 결정을 결단하지 못해
항상 모든 유(有:존재)에 바퀴 도나니
지혜 있는 사람은 보고 들음 떠나서
중간의 참된 이치 고르라.
2. 과각관경품(過覺觀境品)
그때 담무갈(曇無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사바세계로부터 동쪽으로 가장 먼 극동(極東)의 세계에서 다시 77항하사(恒河沙) 수의 세계를 지나서 세계가 있으니, 이름은 선명문(善名聞)이요, 부처님의 명호는 광대선문(廣大善聞)이며, 가타(伽陀)를 닦는 이의 머무는 곳이었습니다.제가 어느 때 그 부처님 처소에 갔다가 그 가운데 어느 한 지방에 77천(千)의 외도들이 스승을 앞에 하고 모여 앉아서 모든 법의 실상을 사량(思量)하고 있었습니다.그때 외도들이 헤아리고 사량하여[稱量] 모든 법의 실상을 간택(簡擇)하고 안립(安立)하되, 그가 배운 것에 의하여 실상을 구하고 찾았으나 얻을 수 있는 이가 없었습니다. 갖가지 집착을 일으켜 서로서로 어기며 다투더니, 나중에는 입으로 나쁜 말을 하다가 마침내 칼이나 지팡이로 서로서로 상처를 입히고 제각기 흩어졌습니다.제가 이를 보고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희유하고 희유하다.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심이여,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심을 말미암아 각(覺)과 관(觀)의 경계를 넘어서는 깊고 깊은 법상(法相)을 통달하고 깨달아서 모두 드러나게 하리라.’ 하였습니다.”보살이 말을 마치자, 부처님께서 곧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법상(法上)이여, 이러한 실상은 각과 관을 넘어서는 경계이다. 나는 깨달은 뒤에 남을 위해 해설하고 바른 교법을 세워 열어 보이고 드러나게 하려고 뜻을 얕고 쉽게 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말한 진실은 다만 성인 스스로가 증득하고 본 것이지만, 만약 범부의 각과 관의 경계라면 자타(自他)가 가히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상이여, 이러한 까닭으로써 마땅히 알아야 하니, 실상은 일체의 각과 관의 경계를 넘어선다.법상이여, 내가 말한 진실은 모습이 아닌 행처(行處:대상의 세계)이고, 일체의 각과 관은 모양을 연하는 행처이니, 이러한 뜻으로 마땅히 알라. 실상은 각과 관의 경계를 넘어선다.법상이여, 내가 말한 진실은 가히 말로 못하거니와, 일체 각과 관은 다만 말을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알라. 실상은 각과 관의 경계를 넘어선다.법상이여, 내가 말한 진실은 네 가지 일이 끊어졌으니, 이른바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다. 일체의 각과 관은 네 가지 일을 연(緣)하여 일어난다.법상이여, 내가 말한 진실은 모든 다툼을 멀리하였지만, 일체의 각과 관은 다툼의 경계이다. 이러한 이치로써 마땅히 알라. 실상은 각과 관의 경계를 넘어선다.법상이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한평생 수명이 다하도록 쓴맛만을 먹었는데, 다시 꿀 따위의 단 맛을 깨닫거나 헤아리거나 기억한다고 하면, 이는 그럴 리가 없다.또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항상 욕진(欲塵)을 즐겨 욕진의 뜨거움에 태워졌는데, 다시 대상[塵]의 모습을 연하지 않고 안에 의지하여 여의는 즐거움을 깨닫거나 헤아리거나 기억한다고 하면, 이는 그럴 리가 없다.법상이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항상 다투는 말과 삿된 말과 희롱하는 말을 즐겼는데, 다시 성스럽고 잠잠한 선정[定]을 깨닫거나 기억한다고 하면, 이는 그럴 리가 없다.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을 항상 즐기고 항상 행하였는데, 이 네 가지 일이 끊어지고 신견(身見)이 멸한 것이 반열반(般涅槃)임을 깨닫거나 헤아리거나 기억한다고 하면, 이는 그럴 리가 없다.법상이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항상 재물을 쌓고자 정벌(征伐)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북쪽 울단월(鬱單越)에는 내 것이라는 것이 없고, 모아 쌓아 놓는 것[積蓄]이 없으며, 서로 다투지 않는 것이 이 현전(現前)의 법락(法樂)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헤아리거나 기억한다고 하면, 이는 그럴 리가 없다.법상이여, 이러한 모든 사람이 각(覺)과 관(觀)의 경계에 있으면서, 다시 각과 관의 경계가 아닌 것을 생각하거나 헤아리거나 기억한다고 하면, 이는 그럴 리가 없다.”부처님께서 경을 말씀하시고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스스로 깨달은 모양 없는 법
말을 떠나 네 가지 일[四事] 끊어졌나니
다툼 없는 이 법의 통하는 모습
깨닫고 아는 경계 모두 지났네.
3. 과일이품(過一異品)
그때 정혜(淨慧)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말씀은 바른 설법이어서 심히 깊고 희유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이 진실한 이치는 미세하고 심히 깊어서 통달하기 어려우니, 이른바 같고[一] 다른[異] 모습을 넘어선 것입니다.세존이시여, 제가 어느 때 어느 한곳에서 보니, 큰 보살들이 원락지(願樂地)에 있으면서 보리의 행을 닦았는데, 이곳에 모여 앉아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 모든 행(行)의 법과 같은가 다른가 하고 사량하고 있었습니다.그때 무리 가운데 어떤 보살이 말하기를, ‘진실의 모습은 모든 행과 다르지 않다.’ 하였으며, 다시 어떤 보살은 말하기를, ‘진실의 모습과 행은 같지 않다.’ 하였으며, 다시 어떤 보살들은 의혹을 내어 같다, 다르다 함을 믿지 않으면서 말하되, ‘이들 같다, 다르다 하는 가운데 어떤 사람이 진실이며, 어떤 사람이 허망한가? 어떤 사람이 바른 행이며 어떤 사람이 삿된 행인가? 같다는 쪽을 집착함이 마땅할까, 다르다 함을 집착함이 마땅할까?’ 하였습니다.세존이시여, 제가 이 일을 보고 생각하되, ‘모든 선남자는 어린 아이며, 어리석으며, 깨달음이 없으며, 알지 못하여 이치와 같이 행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이 선남자들은 미세하고 심히 깊고 진실한 법이 모든 행과 더불어 같고 다른 모습을 넘어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보살이 말을 마치자,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그렇다. 정혜여, 이러한 법을 선남자들은 어린 아이 같고 어리석고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이치와 같이 행하지 못하나, 여래는 미세하고 심히 깊고 진실한 법이 모든 행과 더불어 같고 다른 모습을 넘어섬을 통달하였다.1) 왜냐하면 정혜여, 만약 이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여러 행의 법에 의지하고 진실관(眞實觀)을 닦아 진여의 법을 능히 통달하고 능히 깨달았다고 한다면, 이는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왜냐하면 정혜여, 만약 진여가 행상과 더불어 다르지 않다면 일체 범부가 응당 진여를 볼 것이요, 또 일체 중생이 바야흐로 범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위없고, 여실히 안락한 열반을 얻어야 할 것이며, 또 일체 중생이 범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마땅히 위없는 보리도 얻어야 할 것이다.만약 진여의 모습이 행상과 다르다면 일체 성인은 이미 진여를 보았으나, 응당 행상을 조복하여 없애지 못했을 것이요, 모든 행상을 없애지 못한 까닭에 비록 진제(眞諦)를 보았으나, 여러 가지 상(相)의 얽매임[繫縛]에서 능히 해탈하지 못했을 것이요, 만약 여러 가지 상에서 해탈하지 못하였으면 또한 추중(麤重:번뇌)의 얽매임에서 해탈하지 못할 것이요, 만약 두 가지의 얽매임에서 해탈하지 못하였다면 능히 위없고 여실히 편안한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얻지 못할 것이며, 또한 위없는 보리도 얻지 못할 것이다.정혜여, 모든 범부들은 진여를 보지 못한 까닭에 범부의 지위에서 위없고 여실히 편안한 열반을 얻지 못하고, 또한 위없는 보리도 얻지 못한다.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진여의 이치가 모든 행과 같다고 함은 옳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여가 행상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이러한 뜻을 말미암은 까닭에 이 사람은 이치와 같게 행하지 않는 것임을 알 것이다.또 정혜여, 일체 성인은 진여를 본 까닭에 이미 모든 법의 행상을 조복하여 없앴으니, 할 수 없는 까닭이 아니며, 이미 일체 모습의 매듭[相結]과 추중한 혹[麤重惑]을 벗어났으니,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 해탈을 말미암아 이미 위없고 안락한 열반을 얻으며 나아가 위없는 보리를 얻으므로 진여가 행상과 다르다고 함은 옳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실이 행상과 다르다고 한다면,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이 사람은 이치와 같이 행하지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라.또 정혜여, 만약 진여의 모습이 행상과 다르지 않다면, 행상이 미혹한 모습에 떨어지는 것처럼 진여 또한 미혹한 모습에 떨어질 것이다.또 정혜여, 진여의 모습이 행상과 다르다면 진여는 곧 모든 행상에 통하는 모습이 아니다. 정혜여, 이 진여는 미혹한 모습에 떨어지지 않으며, 다시 일체 모든 행상에 통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까닭에 진여와 행상이 같다고도 하며 다르다고도 함은 이치에 모두 옳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되 진여와 행상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하면, 이러한 까닭에 이 사람은 이치와 같이 행하지 못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라.또 정혜여, 만약 진여가 행상과 다르지 않다면 마치 진실의 모습이 모든 행상 가운데 통하여 차별 없는 것 같아서 행상도 그러하여 마땅히 통하여 차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모든 행 가운데서 이를 듣고 보고 깨닫고 아는 것을 떠나서 훌륭하고 참된 관행을 닦지 말아야 한다.만약 진여의 모습이 행상과 다르다면 이러한 까닭에 일체 행상은 무아(無我)이며, 무성(無性)이어서 응당 진실이 아니다. 또 한때에 맑거나 맑지 못한 품류(品類)가 각각 다른 모습일진대 정혜여, 모든 행상은 다만 차별되어 통하지 않는 까닭이며, 관행을 닦는 이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을 지나 훌륭하고 참된 관행을 닦는 까닭이며, 모든 행의 무아와 무성으로 나타난 바가 진실인 까닭이며, 나아가 맑지 못한 품류가 또한 한때에 각각 차별된 모습이 아닌 까닭이니, 이러한 뜻으로 진여와 행상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함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되 진여와 행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하면, 이 사람은 이치와 같이 행하지 못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라.정혜여, 비유컨대 상거(傷佉)의 흰 빛깔은 소라[螺]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주장하지 못하며, 붉은 빛깔과 금빛깔이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닌 것 또한 그러하다.비유컨대 비나(毘拏)의 음성은 아름답고 묘하나 가히 비나와 같은 것인지 비나와 다른 것인지를 주장하지 못한다. 또 침향(沈香)의 향기가 사랑스러우나 침향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주장하지 못한다. 또한 마리차(摩梨遮)의 맛이 지독하게 매우나 가히 마리차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주장하지 못하며, 가리륵(呵梨勒)의 떫은맛도 또한 그러하다.또한 햇솜의 촉감이 부드럽고 연한 것도 솜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주장하지 못하며, 소락(酥酪)과 제호(醍醐)가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닌 것 또한 그러하다. 또 일체 유의 흐름[流]은 괴롭고, 일체 행(行)은 무상하며, 일체 법은 무아이니, 이러한 괴로움 등과 법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주장하지 못한다. 또한 탐욕(貪慾)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ㆍ아만(我慢) 등과 고요하지 못한 모습들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주장하지 못한다.정혜여, 이와 같아서 진여와 일체 행상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주장하지 못한다. 정혜여, 이와 같이 진여는 미세하고 심히 깊어 통달하기 어려운데, 내가 깨달은 뒤에 남을 위하여 해설하고, 바른 가르침을 세우며, 열어 보이고 드러나게 하려고 뜻을 얕고 쉽게 하였다.”부처님께서 경을 말씀하시고,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진실과 행(行)의 법에는
같고 다른 모습 없나니
같음과 다름에 집착하면
이치대로 행하지 못한다 하리.
사마타와 그리고
비바사나를 수행하여라.
이 사람은 모름지기
모습의 미혹과 번뇌[麤重]의 매듭에서 해탈하리라.
4. 일미품(一味品)
그때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너는 얼마나 되는 중생이 중생계(衆生界)에서 증상만(增上慢)을 가지고 거만한 마음에 의하여 자기의 얻은 것을 기별(記別)하는 것을 보거나 알았는가? 또 너는 얼마나 되는 중생이 중생계에서 증상만이 없으며, 거만한 마음을 말미암지 않고 자기의 얻은 것을 기별하는 것을 보았으며, 알았는가?”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보고 또 알기에는 적은 수의 중생들만이 중생계에서 증상만을 말미암지 않고 자기가 얻은 것을 기별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보고 또 알기에는 한량없고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중생이 중생세계에 있으면서 증상만이 있고, 이 거만한 마음에 의하여 자기가 얻은 것을 기별[記]합니다.세존이시여, 제가 또 어느 때 멀고 고요한 숲 속 아련야(阿練若)에 머무르니, 많은 비구들이 모여들어 저와 멀지 않은 고요한 곳에 있었습니다. 제가 또 어느 날 저녁 때 보니, 이들은 서로서로가 모여 들어 그들이 증득한 갖가지 법상(法相)에 따라 자기의 수행을 말하고, 자기의 얻은 것을 기별하였습니다.어떤 비구들은 음(陰)을 깨친 까닭에 그가 얻은 것을 기별하고, 어떤 비구들은 음의 모양[陰相]을 깨치고, 어떤 비구들은 음의 생김[陰生]을 깨치고, 어떤 비구들은 음의 달라짐[陰變異]을 깨치고, 또 어떤 비구들은 음의 멸함[陰滅]을 깨치고, 혹 어떤 비구들은 음의 멸에 이르는 길[陰滅道]을 깨쳤다 하며, 음에 여섯 가지 깨치는 모양이 있는 것 같이, 어떤 비구는 모든 입(入:根)을 깨치고 자기의 얻은 것을 기별하며, 나아가 입의 멸함과 입의 멸에 이르는 길을 깨치며, 혹 어떤 비구들은 연생(緣生)을 깨쳐 자기가 얻은 것을 기별하며, 나아가 연생의 멸함과 연생의 멸에 이르는 길을 깨쳤습니다.혹 어떤 비구들은 먹을 것들을 깨치고, 어떤 비구들은 4제(諦)를 깨치고, 어떤 비구들은 모든 계(界)와 계의 차별과 갖가지 계와 나아가 계의 멸함과 계의 멸에 이르는 길을 깨치고, 혹 어떤 비구들은 염처(念處)와 염처의 모습과 염처의 다스림[對治]과 염처의 다스리는 길과 염처의 닦음[修習]과, 나지 않는 염처는 깨쳐서 나게 하고, 이미 나온 염처는 깨쳐서 머무르게 하고, 잃지 않게 하고 자라나게 하고 원만하게 하여 자기가 얻은 것을 기별하였습니다.염처를 깨친 것과 같이 정근(正勤)과 여의족(如意足)과 근(根)과 역(力)과 각분(覺分)과 성도(聖道)와 성도의 모습과 성도의 다스림과 성도를 다스리는 길과 성도의 닦음과, 나지 않은 성도는 깨쳐서 성도를 나게 하고, 이미 생긴 성도는 깨쳐서 성도에 머무르게 하고, 잃지 않게 하고, 자라나게 하고, 원만하게 하여 자기가 얻은 것을 기별하였습니다.세존이시여, 제가 이들을 보고 생각하되, ‘저 모든 장로(長老)들은 깨친 갖가지 법상(法相)에 따라 자기가 얻은 것을 기별하니, 이 모든 장로들은 증상만(增上慢)이 있고, 이 거만한 마음을 말미암아 자기가 얻은 것을 기별한다. 이 일은 결정된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그들이 말하는, 스스로가 깨치고 본 법과 같은 것으로는, 마땅히 이 사람들이 능히 한맛[一味]의 진여가 모든 곳에 두루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음을 알겠습니다.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한맛의 진실이 모든 곳에 두루하다 함은 미세하고 심히 깊어 통달하기 어렵습니다. 이 말씀은 희유(希有)하며 상대할 이가 없는 말씀입니다.세존이시여, 세존의 바른 교법에서 관행(觀行)을 닦는 모든 비구들조차도 오히려 한맛의 진실이 모든 곳에 두루한 것을 통달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모든 외도가 바른 교법의 밖에 있으니, 어찌 능히 한맛의 진실을 깨달아 알겠습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수보리야, 이와 같이 가장 미세하고, 가장 깊으며, 가장 보기 어려우며, 모든 곳에 두루한 맛인 진실을 내가 깨닫고 남을 위하여 해설하며, 바른 교법을 세워 열어 보이고 드러내려고 뜻을 쉽고 얕게 한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5음(陰) 가운데 청정한 경계는 내가 말한 것으로서, 이름이 진실이다.수보리야, 12입(入)ㆍ12연생(緣生)ㆍ4식(食)ㆍ4제(諦)와 모든 계(界)ㆍ염처(念處)ㆍ정근(正勤)ㆍ여의족(如意足)ㆍ근(根)ㆍ역(力)ㆍ각분(覺分)ㆍ8정도(正道) 가운데 청정한 경계는 내가 말한 것으로서 진실이라 한다. 이 청정한 경계는 일체 음(陰)과 처(處)에 평등한 한맛이어서 차별이 없는 모습이다. 음(陰)에서와 같이 나아가 성도(聖道)의 청정한 경계도 평등한 한맛이어서 모두 차별이 없다. 수보리여, 이러한 까닭으로 한맛인 진여는 모든 곳에 두루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또 수보리여, 수행하는 비구가 만약 하나의 음에서 진여와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통달하면, 다시 낱낱 나머지 음에 있는 진여를 수고스럽게 관찰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12입ㆍ12연생ㆍ4식ㆍ4제와 모든 계(界)ㆍ염처ㆍ정근ㆍ여의족ㆍ근ㆍ역ㆍ 각분ㆍ8성도분에서 만약 어느 한 분(分)의 진여와 인무아와 법무아를 통달한 이는 다시 수고롭게 나머지 성도분에 있는 진여를 관찰할 필요가 없다.분별없는 후득지(後得智)를 떠나서 따로 진여의 관법을 수순할 것이 없으니, 나머지 법의 한맛인 진실이 모든 곳에 두루한 것도 다만 분별없는 후득지로 앞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수순하여 일체 법의 한맛인 진실을 관찰하고 기억해 지녀서 얻는 데 이른다. 수보리여, 이러한 까닭으로 너는 마땅히 알라. 진실한 이치는 모든 곳에 두루하여 오직 한맛인 모습이다.또 수보리여, 마치 모든 음(陰)이 서로 다른 모습[別相]이 있는 것처럼, 12입ㆍ12연생ㆍ4식ㆍ4제ㆍ모든 계ㆍ염처ㆍ정근ㆍ여의족ㆍ근ㆍ역ㆍ각분ㆍ8성도분이 서로서로 다른 모습이 있는 것처럼, 만약 모든 법의 진여와 인무아와 법무아가 서로서로 다른 모습이 있다면 모든 법의 여여(如如)한 인무아와 법무아는 진실을 이루지 못할 것이요, 마땅히 원인에 의하여 생길 것이다. 만약 원인에 의하여 생기면 곧 유위(有爲)를 이룰 것이요, 만약 유위라면 진실이 아닐 것이요, 만약 진실이 아니라면 다시 이에서 다른 진실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수보리여, 이 진실이 원인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므로 유위가 아니며,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니, 이 가운데 수고롭게 별다른 진실을 구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이 법은 항상하여서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거나 혹은 안 나오시거나 간에 법성(法性)ㆍ법계(法界)ㆍ법주(法住)는 모두 항상 머물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러한 까닭으로 너는 마땅히 알라. 한맛인 진실은 모든 곳에 평등하다.수보리여, 비유컨대 여러 가지 색(色)이 가지가지로 차별되어 서로서로 같지 않지만, 모든 색 가운데 허공은 모양이 없어서 차별도 없고 변하지도 않으니, 모든 곳에 동일한 맛이며, 같은 모양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각각 다르지만, 그대는 마땅히 알라. 모든 법 가운데 한맛인 진여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것 또한 그러하다.”그때 세존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고,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의 통한 모습은 한결같은 맛
모든 부처 평등을 말씀하셨네.
그 가운데 다르다 집착하는 이
이 사람은 바로 증상만(增上慢)이리.
나고 죽는 흐름을 거스르는 길
미세하고 깊어서 보기 어려워
탐욕에 물들고 어리석음 덮인 까닭에
범부들은 이 뜻을 얻지 못하리.
그때 관세음보살이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여 공경히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부처님께 이와 같은 해절(解節)의 깊은 법을 듣고 일찍이 없었던 것을 얻었으니, 정수리에 받들어 지니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은 무엇이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녀야 합니까?”부처님께서 관세음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 『요의정설(了義正說)』이라 하며, 또 『진실경지정설(眞實境智正說)』이라 하며, 또한 『십지바라밀의지정설(十地波羅蜜依止正說)』이라 하니,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받아 지녀야 한다.”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니, 8만 보살이 모두 대승의 위덕 있는 삼매[大乘威德三昧]를 얻었으며, 한량없고 끝없는 보살들이 남이 없는 법[無生法]에 대하여 무생인(無生忍)을 얻었으며, 셀 수 없는 중생들이 대승(大乘)에 대하여 믿고 즐기는 마음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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