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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819 불설처처경(佛說處處經)

by Kay/케이 2025.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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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처처경(佛說處處經)

 


불설처처경(佛說處處經)


후한(後漢) 안식국(安息國) 안세고(安世高) 한역
김성구 번역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도인(道人)이 도를 행하되 만약 성내는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제지해야 하느니라. 제지하면 곧 생각이 착하게 되리니, 이것이 도인의 행이니라.
재물을 보시하고 얻으면 곧 무상(無常)한 줄 생각하고 몸으로 범(犯)하지 말지니라. 이른바 살생ㆍ도둑질[偸盜]ㆍ음행(婬行)을 범하지 않을지니, 이것이 몸으로 범하지 않는 것이니라.
성내는 마음에서 벗어난 이는 입으로도 말하지 않고 뜻으로도 생각하지 않으니, 이것이 성냄을 벗어난 뜻 가운데 크고 깊은 소리이니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말하기를 ‘네가 한 일은 크게 모양이 없도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뜻 가운데 크고 깊은 소리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맛[味]을 맛보는 차례[次第]라는 것은, 먹을 것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옴에 그 맛을 분별하여 헷갈리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맛을 맛보는 차례이니라. 보살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이전 세상에서 먹었던 것을 모두 먼저 부모와 도인(道人)에게 올린 뒤에 자기도 먹으니, 그러므로 이 서른두 가지 몸매[相]와 여든 가지 맵시[種好]를 얻었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네 가지 일[四事]로써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을 얻으니, 첫째는 자기가 아는 것은 다른 사람도 다 알게 하고자 하며, 둘째는 사람을 가르치되 지겹다는 생각이 없고, 셋째는 평등한 마음으로 감추거나 숨기는 것이 없고, 넷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경(經)을 말해 주고 나중까지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일이니라.
부처님도 네 가지 일로써 네 가지 두려워할 바가 없음을 얻으셨으니, 첫째는 법답게 말하고, 둘째는 타인의 물건을 받지 않고, 셋째는 마음을 평등하게 하고, 넷째는 계(戒)를 구족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네 가지 두려워할 바가 없음[四無所畏]이 있으니, 첫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둘째는 아까워하는 바가 없고, 셋째는 신통[神足]이 구족하고, 넷째는 사람들과 입씨름하지 않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정수리의 광명을 얻은 데는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등불을 밝혀 불사(佛寺)에 보시하였고, 둘째는 경(經)을 밝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였으며, 셋째는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 준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오른손을 드시는 데에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나쁜 사람은 악행(惡行)을 반복하지 않고, 둘째는 좋은 사람은 선행(善行)을 반복하며, 셋째는 가르침을 나타내고, 넷째는 사람들에게 악(惡)을 짓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오른손을 드시는 데에 또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시방(十方)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와서 도를 배우고 행을 따르게 하려는 뜻이고, 둘째는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바의 복(福)으로 지금 이런 상호(相好)를 얻었음을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사람들에게 권하여 모두 계율을 지니게 하고, 넷째는 위의(威儀)가 저절로 그러하여 또한 사람들에게 나쁜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모두 오른손을 드시느니라.
부처님께서 신을 신지 않는 데에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수행하는 이로 하여금 욕심을 적게 하려고 함이며, 둘째는 발바닥의 바퀴무늬[足下輪]를 드러내며, 셋째는 사람들이 보고서 기뻐하게 하려는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다니실 때 발이 땅에서 네 치[寸] 떨어지는 것에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땅에 개미와 벌레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땅에 살아 있는 풀이 있기 때문이요, 셋째는 신통[神足]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들의 뜻이 부처님의 행에 머무르도록 하려고 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다니실 적에 땅의 높고 낮은 곳이 모두 평평해지는 데에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본래 네 가지 평등한 마음[四等心]을 행하여 일체를 안은(安隱)하게 해서 땅에 있거나 물 위나 물속에 있는 귀신과 벌레와 개미 등 일체의 부처님 발밑에 있는 것들이 모두 안은하여 한마음으로 뜻을 세웠기 때문에 낮은 데는 높아지고 높은 데는 낮아지느니라.
둘째는 모든 하늘과 귀신들이 복을 짓기 위하여 부처님을 위해 땅을 소제(掃除)하기 때문에 높고 낮음이 평평해지며, 셋째는 부처님께서 보살이었을 때 길을 틔워서 편리하게 하였으며 다리를 놓아 사람을 건너게 하였기 때문이니라. 이것을 좇아 복(福)을 얻었기 때문에, 높고 낮음이 바르고 평평해져서 사람들의 뜻도 또한 그러하도록 하신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날아다니지 않으시는 데에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제자들을 권면(勸勉)하여 정진하게 하려는 것이요, 둘째는 제자들이 경(經)을 듣게 하려는 것이요, 셋째는 여러 생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요, 넷째는 상호(相好)를 나타내기 위함이니, 이런 까닭에 날아다니지 않으시니라.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모든 하늘과 귀신과 용과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 계신 곳에 와서 경(經)을 듣되 수천백(數千百) 겹으로 앞뒤에 둘러 앉아 모두 부처님의 얼굴을 뵈었으니,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전생에 말씀이 앞뒤가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이가 없으며, 사람들이 누울 때 모두 부처님께서 머리 두신 곳을 따르는 것은 부처님을 존경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처음 도(道)를 얻고 7일 동안을 잡숫지 않은 데는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도를 생각하느라 음식을 잊은 것이요, 둘째는 한 마음이라 배고프지 않으셨으며, 셋째는 환희(歡喜)하여 목마르지 않으셨으며, 넷째는 아프고 가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생사식(生死識)을 생각하심이 바로 네 가지가 되느니라. 사람들이 경을 듣게 하고자 하시어 또한 그러신 것이니라.
부처님의 가사(袈裟) 안쪽에 먼지나 물이 묻지 않고 밖에도 때가 타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일체 사람들의 악(惡)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일체의 사람들에게 욕심이 있는 것을 보면 소멸시키려 하시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가사를 빨래하시는 것은, 밖은 때가 묻지 않지만 안쪽은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때가 있으니, 왜 그런가 하면, 밖의 행(行)은 이미 다하였으므로 때가 밖에는 묻지 않지만 안의 행은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때가 묻기 때문이며, 몸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안은 아직 다하지 않았고, 몸이 있음으로써 죄의 쓰임이 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니, 왜 그런가 하면, 다시 목숨을 아껴 목숨을 써서 도를 얻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80억만의 인연경(因緣經)을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사람들의 세 가지 병(病)을 다스리기 위함이니, 첫째는 탐욕과 음욕이요, 둘째는 성내는 마음이요, 셋째는 어리석음이니라. 이 세 가지 일을 나누면 여섯 가지가 되는데, 그러므로 여섯 가지 쇠퇴함에 맞추어 세 가지 병을 다스리느니라.

경이 많은 이유는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으면 마땅히 다른 약으로 바꾸어 먹는 것과 같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들의 뜻은 여러 갈래이고 빠르게 바뀌는 까닭에 경이 많은 것이니, 마음대로 치료하여 빨리 이해하게 하려고 한 때문이다’라고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미 도를 얻으셨는데도 다시 세 가지 병과 여섯 가지 근심이 있으시니, 여섯 가지 근심이란 여섯 개의 감관[六入]을 근심하는 것이요, 세 가지 병이란 마음ㆍ뜻ㆍ알음알이가 잘못 받아들이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미 도를 얻으시고도 이런 근심과 병이 있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임에랴. 재앙과 죄가 끝나지 않으면 세상을 건너갈 수 없으니, 부처님의 업(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세상을 건너갈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남은 수명 20년을 버리신 데는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세간 사람의 빈궁한 몸 때문이요, 둘째는 가르칠 것이 다하였기 때문이요, 셋째는 나쁜 사람이 비방하여 무거운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셨기 때문에 문득 열반(涅槃)에 드셨느니라.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나 또한 몸을 가지고 가신 것도 아니며, 뜻을 가지고 가신 것도 아니요, 다만 번뇌[苦]가 소멸되었을 뿐이니라. 땅ㆍ물ㆍ불ㆍ바람은 항상 세간에 있어서 끊어질 때가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몸을 불에 태우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썩어서 문드러지기 때문이요, 둘째는 벌레와 나비가 생기기 때문이요, 셋째는 사람들이 향(香)과 꽃을 가지고 와서 공양하여 복을 얻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웃으시면 입에서 다섯 가지 빛깔의 광명이 나오니, 거기에는 다섯 가지 인연이 있느니라. 첫째는 사람들이 물을 것이 있으면 물음으로 인하여 이익이 있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사람들이 ‘부처님은 웃을 줄 모르신다’고 말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입 안의 광명을 나타내심이요, 넷째는 지극하고 성실하지 않은 모든 것을 웃으심이요, 다섯째는 아라한(阿羅漢)들이 공(空)을 고수하여 보살도(菩薩道)를 얻지 못함을 웃으심이니라.
광명이 다시 정수리로 들어가는 것은 뒤의 사람들에게 큰 광명을 보이려고 하시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려고 하심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간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부처님을 따름으로써 복을 얻었는데, 이제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세간의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다시 누구를 따라야 복을 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비록 세상을 떠나지만 경법(經法)은 남아 있을 것이며, 또 네 가지 인연이 있어서 따라 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첫째는 축생들이 먹을 것이 없거든 먹여 주어서 목숨을 얻게 하고, 둘째는 사람들이 병에 걸려서 보살피는 이가 없는 것을 보거든 거들어 주고 공양하여 안은(安隱)하게 해주고,
셋째는 빈궁하고 고독한 이를 보호하고 보살펴 주며, 넷째는 어떤 사람이 혼자서 선정(禪定)을 닦거나 도를 생각하되 의식(衣食)이 없거든 보시하고 보살펴 줄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일이니라. 착한 뜻을 가지고 보시하여 주면, 그가 복을 얻음이 부처님과 꼭같아서 다름이 없으리라.”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온몸이 아프시어 곧 세상을 뜨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사리불(舍利弗)에게 이르시어 경을 말하게 한 것에는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부처님이 떠나신 뒤에 사람들이 다른 비구(比丘)의 말을 믿지 않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이요, 둘째는 제자들이 뜻으로 알도록 권면하신 것이니, 부처님도 오히려 비구에게 경을 말하도록 하셨거늘 어찌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 셋째는 사리불의 공덕을 나타내신 것이니, 다른 비구들이 제각기 스스로를 높여 경을 말하려 할까 봐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에게 경을 말하도록 하셨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모든 아라한들이 함께 아난(阿難)을 꾸짖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물을 얻고자 하셨거늘, 어찌하여 물을 드리지 않았는가?
시방의 일체 중생들은 모두 마땅히 부처님을 좇아 해탈을 얻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부처님이 열반에 들지 마시도록 만류하지 않았는가?
부처님께서 네 가지 신통[神足]을 행하시면 한 겁(劫)이나 또는 백 겁, 천 겁을 머물러 계실 수 있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부처님께 네 가지 신통을 부리시도록 권하지 않았는가?”
아난이 대답하였다.
“만약 그대들의 말대로라면, 부처님께서 자재(自在)하지 않으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마땅히 내가 말하리라.
만약 한 겁을 더 세상에 머무르신다면 미륵(彌勒)이 당래(當來)에 어떻게 내려와 부처를 이루겠는가? 부처님께서 인위(因位)에서 행하실 때
함께 도(道)를 배운 이가 80억만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보살도를 구하였으나 오직 두 사람만 도를 얻었을 뿐이니, 석가모니(釋迦牟尼)와 미륵이셨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아라한이나 벽지불(辟支佛)을 얻었을 뿐이니라.
부처님의 인욕(忍辱)은 땅보다 두텁고, 부드러운 마음은 물보다 더하고, 견고한 뜻은 수미산(須彌山)보다 뛰어나고, 공덕은 바닷물보다 많으며, 지혜는 허공보다 넓으니, 이런 까닭에 먼저 부처를 이루셨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 탄강(誕降)하지 않음은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복(福)이 저 세간에 응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 세간의 사람들은 거칠어서 경(經)을 받을 만한 이가 없기 때문이요, 셋째는 공덕이 아직 가득하지 않기 때문이요, 넷째는 세간에 경을 말할 수 있는 이가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미륵이 내려오지 않고 장차 탄강하려면 5억 7천60만 년이 남았느니라.
미륵부처님 때는 사람들이 모두 눈으로 4천 리를 보리니, 미륵부처님 때에 사람들이 눈으로 4천 리를 보는 것은 인위(因位)에서 행할 때 열 가지 인연을 얻어서이니라. 첫째는 사람들의 눈의 광명을 가리지 않고, 둘째는 사람들의 눈을 버리지 않고, 셋째는 사람들의 눈을 덮어 가리지 않고, 넷째는 사람들의 선(善)을 감추지 않고, 다섯째는 죽이는 것을 보지 않고, 여섯째는 훔치는 것을 보지 않고, 일곱째는 음행(婬行)을 보지 않고, 여덟째는 비밀[陰私]과 남의 단점을 보지 않고, 아홉째는 모든 나쁜 일은 보지 않고, 열째는 절에 등불을 밝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 일이니라.
부처님과 벽지불과 아라한, 이 세 사람은 법(法)은 같으나 행(行)이 다르니, 부처님은 깨달았다는 뜻이요, 벽지불은 인연을 보고 안다는 것이요, 아라한은 선정(禪定)을 닦아서 안다는 것이니라.
벽지불은 인연법으로 생사의 모습을 보고서 스스로 지켜 감히 행을 여의지 않으니, 인연법을 보고 도를 얻기 때문에 벽지불이 되느니라.
부처님은 행을 통달하시고 사람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짐짓 벽지불을 구하니, 벽지불은 스스로 몸을 베어 끊어 5백 명을 살리며, 나무로 자기 목을 찔러 인연을 보고 계교(計挍)하되 마치 흙을 베는 것 같이 하여 피를 물로 보고 만물(萬物)이 모두 항상하지 않다고 보아서 곧 도를 얻느니라. 어떤 벽지불은 지난 세상 5백 겁 동안 보살이 되어서 이미 서른 가지 상호가 있으나 두 가지 상호가 없어서 부처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부처를 이루지 못한 것은 좋은 권도(權道) 방편이 없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생사의 괴로움과 세 가지 나쁜 길의 일을, 밝은 지혜가 있는 사람은 뜻으로 알아서 곧 아라한을 이루느니라. 비록 아라한이 되었으나 그들 가운데 가장 높으니, 왜 그런가 하면, 지난 세상에서 5백 겁 동안 보살도를 행하였고, 자비로운 마음이 있어서 시방의 사람들을 건지고자 하였기 때문이니라.
비록 아라한이 되었어도 지혜가 능히 시방의 사투리[俗語]까지 알 수 있으며, 처음 아라한이 되었을 때는 지난 세상에서 보살이었던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부처님께서 부처의 공덕을 말씀하시고 다시 아라한의 공덕을 말씀하시고서야 비로소 부처의 공덕이 큰 줄을 알아 곧바로 스스로 뉘우치고 뜻을 돌려 부처를 취하려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미 아라한의 도를 얻고 나면 다시 옮길 수 없어서, 문득 스스로 후회하며 말하길 ‘나는 어찌하여 어리석게도 바로 아라한의 도를 얻었는가’ 하니, 부처님께서 곧바로 그를 위해 뜻을 풀어 주시되 ‘너의 지혜는 다른 아라한의 지혜보다 뛰어나지만 부처에는 미치지 못하며, 아라한은 자기 괴로움은 끊고 다른 이의 괴로움은 끊지 못하지만 부처님은 인위(因位)에서 행하실 때 자기 괴로움도 끊고 다른 이의 괴로움도 끊으셨으니, 이런 까닭에 서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시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은 세 가지 말로써 다른 사람의 뜻을 다 아니, 첫째는 거친 말[麤語]이요, 둘째는 깊은 말[深語]이요, 셋째는 끌어대는 말[牽語]이니라. 이 세 가지 말을 얻어서 착한 뜻이 있으면 곧 알고, 나쁜 뜻이 있어도 또한 알며, 참는 뜻이 있어도 또한 아니, 뜻으로 이 세 가지 말을 좇아 다른 사람의 뜻을 다 알려고 하는 것이니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손가락을 튀기는 사이에 사람들의 뜻에는 60번의 나고 죽음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960차례의 나고 죽음이 있어도 많은 것이 아니지만 요약하면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착한 뜻과 나쁜 뜻과 욕심내는 뜻이니라.
착한 뜻이 320번 있고, 나쁜 뜻이 320번 있으며, 욕심내는 뜻이 320번 있어서, 손가락을 튀기는 사이에 세 가지 뜻이 모두 움직여 도합 960차례나 나고 죽으니, 착한 뜻의 320번을 제외한 나머지 640번은 나고 죽는 뜻이니라.
부처님과 사리불이 함께 37품(品) 경(經)1)을 수행하되 지혜가 같지 않은 것은, 비유하면 마치 호흡을 하되 모든 털구멍으로 동시에 나고 듦을 깨닫는 것과 콧구멍만으로 숨이 나고 듦을 아는 것과 같으니, 부처님이 아시는 것은 모든 털구멍을 다 아는 것이고, 사리불이 아는 것은 콧구멍과 같으니라.
사리불이 아는 것을 취하여 열여섯 몫으로 나누면, 한 부처님 세계 삼천대천(三千大千) 일월천하(日月天下)의 영리한 사람이 아는 것이 사리불이 아는 것의 한 몫에도 미치지 못하며, 부처님의 지혜를 취하여 열여섯 몫으로 나누면, 한 부처님 세계 가운데 사리불이 아는 것이 부처님께서 아시는 것의 한 몫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37품의 행에는 세 부류가 있으니, 큰 37품이 있으며, 중간의 37품이 있으며, 작은 37품이 있어서, 뜻이 크면 큰 뜻을 얻고, 뜻이 중간이면 중간의 뜻을 얻고, 뜻이 작으면 작은 뜻을 얻거니와, 깊고 미묘하고 구족하게 행하면 37품을 곧 통달하리라.
무슨 까닭에 정분(正分)을 열여섯 몫으로 나누었느냐면, 사람이 본래 열여섯 가지 뜻이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분별하셨으니, 그러므로 같지 않느니라.
사리불은 일체의 법다운 말[法語]과 때에 맞게 쓰는 말[用時語]과 보호하는 말[護語]과 지키는 말[守語]을 아는데, 부처님은 곧바로 사리불에게 ‘때에 맞지 않는 말을 씀을 버릴지니,
사람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느니라.
사리불의 본래 이름은 우파체(優婆替)이니, 사리불이 부처님보다 먼저 세상을 버린 것에는 세 가지 인연이 있느니라. 첫째는 옛 세상의 업이 다한 때문이요, 둘째는 부처님이 세상 떠나시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요, 셋째는 다시 건너 벗어날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이 다니면서 남의 음식을 받고는 정사(精舍)로 돌아와서 말하길 ‘마땅히 빚[債]을 갚아야 하리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좌선(坐禪)하며 도를 생각하면 빚을 갚는 것이요, 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빚을 지고 다니면서 남의 보시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비유하면 마치 빚을 지고는 아직 다 갚지도 않고 다시 바꾸어 취하는 것과 같으니, 앞의 죄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죄를 짓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의 보시를 먹고 도(道)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스스로 얻어 다시 일체의 사용할 물건을 더하니, 그러므로 마땅히 빚을 갚아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은 지혜가 제일이요, 목건련(目犍連)은 신통이 제일이요, 아난(阿難)은 들음[多聞]이 제일이요, 라운(羅雲)은 계행이 제일이요, 아나율(阿那律)은 꿰뚫어 보는 것이 제일이니라.”
부처님께서 목건련에게 사리불을 부르게 하셨다.
사리불이 말하기를 “나의 띠[滯]를 들라”고 하였으니, 능히 목건련을 이기지 못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곧 띠를 끌어당기니, 삼천대천세계의 해와 달과 하늘과 땅이 모두 움직였으나 띠를 일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사리불은 곧 생각하기를 ‘마땅히 먼저 부처님 계신 곳에 가리라’라고 하였으나, 목건련이 뒤를 좇다가 먼저 갔다. 사리불이 이르니, 부처님께서는 두 사람이 각각 제일임을 알고 계셨다.
시방 천하의 비구로서 라운처럼 계율을 지니는 이가 없으니, 라운이 계율을 지니는 데는 네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스스로 생각하길 ‘나는 부처님의 아들이다’라고 함이요, 둘째는 지니라고 일러 명하심이 많았고, 셋째는 항상 스스로 생각하길 ‘나는 사문(沙門)이다’라고 하였고, 넷째는 계를 지니되 항상 다른 비구보다 뛰어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사리불은 한 그릇의 물을 바다에 부어 물속에서 저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가서 옛 물을 가지고 가니, 사리불도 오히려 능히 이와 같거늘 어찌 하물며 부처님이시겠는가.
목건련이 사람들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날아가지 못한 것은 신통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왜 신통을 얻지 못하였느냐면, 죄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가사왕(沸迦沙王)의 행이 12문(門)에 이르렀으되 도리어 몸 안의 여섯 갈피[六分]를 알지 못하며, 뜻을 잡아 능히 도를 행하되 몸이 뜻을 낳고 뜻이 몸에서 생기는 줄 알지 못하며,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였으니, 부처님께서는 제도할 만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곧 그에게 가서 묵으셨다.
왕은 부처님을 알지 못하였다.
부처님께서 묻기를 ‘왕은 어떤 법을 행하며, 어떤 도를 좋아합니까’라고 하시니, 왕의 터럭이 곤두섰다. 부처님께서 왕을 위하여 몸 안의 일이 공함을 해설하시니, 이에 문득 도를 얻었으나 모두 끊지는 못하였으므로 아라한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부처님께서 모든 행자(行者)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알라, 뜻하면 능히 도를 얻으리라’고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주리만대(朱利滿臺)2)는 24년 동안 경을 배우고 겨우 다섯 마디를 외워 번뇌 여의는 법을 알았으나 또한 다시 근심하지 않았으니, 왜냐하면 지난 세상에서 5백 부처님을 뵙고 뭇 경전을 모두 통달하였으되 다만 장경(藏經)의 도(道)를 닫아 두고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다가, 뒷날에 병이 든지 24일 만에 죽음에 임하여 마침내 뉘우치고 사람을 불러 가르쳤기 때문이니라.
이런 한 가지 복덕이 있었기 때문에 다섯 마디의 말씀을 알았으니, 어찌 하물며 마침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구족함에랴. 복덕(福德)을 얻음을 헤아릴 수 없느니라.지리만대(知利滿臺)는 다른 판본에는 주리반특(朱利盤特)으로 쓰여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전나(旃那) 비구가 병이 나자 부처님께서 사리불을 보내어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사리불이 이로 인하여 묻기를 ‘그대의 눈은 알음알이[識]가 있는가?’라고 하니, 전나 비구가 대답하기를 ‘눈은 알음알이가 없으며 다만 물질[色]을 볼 뿐입니다. 알음알이가 몸을 낳고 병을 낳거니와, 상대하는 것이 이르기 때문에 병도 있고 몸도 있습니다. 또한 죽음을 알지 못하니, 설사 몸이 죽는다 하여도 땅[地]ㆍ물[水]ㆍ불[火]ㆍ바람[風]으로 공(空)하여 모두 흩어지고 다만 의식만이 옮겨가 태어날 뿐입니다’라고 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 사리불을 보내어 가서 보살피게 하시니, 음녀(婬女)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음녀가 곧
문을 닫고 길을 쓸면서 사리불에게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음행을 하지 않으면 큰 불 속에 들리라’라고 하였느니라. 사리불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불 속에 들지언정 너와 함께 음행하지 않으리니, 음행은 사람을 나쁜 갈래에 떨어지게 해서 벗어나올 때가 없느니라’라고 하니, 하늘이 곧바로 내려와서 구제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다만 계를 지키지 못할 뿐이니, 만약 지킬 수만 있다면 삿된 길[邪道]에 있더라도 끝내 근심하지 않으리라’고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어떤 한 비구가 좌선을 하면서 도를 닦는데 부처님의 아우 난타(難陀)가 술에 취하여 자주 그곳에 가서 노래하고 희롱하였느니라. 비구가 부처님께 아뢰기를 ‘저는 다른 곳으로 피할까 합니다’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러지 말라. 난다가 지금 마땅히 도의 자취[道迹]를 얻으리라’ 하시고, 아난을 곧 그 집으로 보냈느니라. 마하가섭[大迦葉]이 그 뒤를 따랐고, 사리불이 경을 말해 주었으며, 목건련이 신통을 나타내니, 난타가 곧 기뻐하여 즉시 도의 자취를 얻었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비구들이 도를 닦을 때 마땅히 다만 마음이 견고하다면, 어찌 도를 얻지 못할까 근심하겠느냐’라고 하시니, 비구들이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기쁘고 뜻이 풀려 곧바로 아라한을 성취하였느니라.”
부처님의 내종제(內從弟)가 있었으니 이름이 수나찰다(須那察多)였다. 부처님을 따르며 모신 지 8년 만에 문득 생각하길 ‘우리 형제가 함께 도를 행하였는데 혼자만 32가지 상호(相好)를 가졌도다’ 하고, 문득 나쁜 뜻을 내어 부처님 뒤를 따르면서 부처님의 자취를 쓸어버려 사람들이 부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고, 다시 사람들 가운데서 “부처님은 도가 없다. 다만 말씀이 사람들의 뜻에 맞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사리불과 아난이 듣고는 문득 근심하여 즐겁지 않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나찰다는 내가 나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공덕을 칭찬하였을 뿐이니, 말이 사람들의 뜻에 맞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뜻에 병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수나찰다는
계교(計挍)한 것이 아니라 다만 화를 낸 것일 뿐이니라. 어찌하여 계교한 것이 아닌가 하면, 부처님이 32상(相)의 광명과 신통이 있는 것은 다만 삿된 도를 항복하였기 때문이며, 부처님이 자주 수나찰다를 경계하시어 ‘바르고 참된 말을 하라’고 하였으며, 이는 삿됨을 기다리는 기도이니, 그러므로 화를 낸 것일 뿐이니라.”
부처님께 내종 누이[姑姨]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건만 손수 옷감을 짜서 가사를 지어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이 받지 않으시니,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받으시어 저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를 위해 받으소서.”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가지고 가서 모든 비구들에게 주도록 하여라. 나도 또한 이 비구승이니, 많은 사람에게 주어서 후세(後世)에 인연이 되도록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지금 세상에서 서로 만나면 반가운 이는 모두 전생에 친한 마을의 벗이었으니, 어떻게 아는가 하면, 마주 보기만 하여도 뜻으로 이해가 되기 때문이니라. 세간 사람들은 서로 어울릴 때, 다만 괴로우면 사이가 얇고 괴롭지 않으면 두터우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여래를 모시던 이는 이름이 미희(彌喜)였고, 다음은 이름이 수나찰다(須那察多)였으며, 그 다음은 이름이 아난이었느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나이 많아 한 사람의 시봉을 두고자 하노라’라고 하시니, 사리불과 마하가섭과 목건련 등이 제각기 부처님을 모시려 하였는데, 부처님께서 모두 거절하셨느니라.
마하가섭과 목건련이 선정에 들어서 부처님이 아난을 두고 싶어하시는 것을 알고는 곧 아난을 불러 말하길 ‘그대가 부처님을 시봉하시오’라고 하니, 아난이 말하기를 ‘나는 감히 부처님을 모시지 않겠습니다. 나는 부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느니라.
목건련이 말하길 ‘부처님을 모시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니, 아난이 말하기를 ‘나의 네 가지 요청을 허락하소서. 첫째는 부처님의 남는 옷을 나는 받고자 하지 않으며, 둘째는 부처님의 남은 밥을 나는 먹지 않겠으며, 셋째는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청하였을 때 모든 비구들이 가지 않으면 나도
가지 않겠으며, 넷째는 부처님이 좌선하시고 도를 생각하실 때 나는 자유로이 출입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대단히 좋다. 너의 소원을 허락하노라’라고 하시니, 이에 아난이 부처님을 모셨으며, 그러므로 아난만이 부처님께 물을 수 있었느니라.”
부처님의 제자 아나율과 난제(難提)와 금비라(金毘羅) 세 사람이 함께 앉아서 각자 일곱 가지 일을 생각하였으니, 첫째는 욕심이 적으면 도를 얻고 욕심이 많으면 도를 얻지 못하며, 둘째는 족한 줄 알면 도를 얻고 족한 줄 알지 못하면 도를 얻지 못하며, 셋째는 정진(精進)하면 도를 얻고, 정진하지 않으면 도를 얻지 못하며,
넷째는 여섯 가지 쇠퇴함[六衰]을 지켜 일어나지 않게 하면 도를 얻고, 여섯 가지 쇠퇴함을 지키지 않아서 방일(放逸)하여 일어나게 하면 도를 얻지 못하며, 다섯째는 자신을 수호하면 도를 얻고 자신을 수호하지 않으면 도를 얻지 못하며, 여섯째는 뜻을 지키면 도를 얻고 뜻을 지키지 않으면 도를 얻지 못하며, 일곱째는 지혜로우면 도를 얻고 지혜롭지 않으면 도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 일곱 가지 일을 함께 생각하고 있을 때 부처님과의 거리는 60리였고, 부처님께서는 때마침 좌선을 하시다가 곧 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문득 뜻을 옮겨 세 사람 앞에 가서 앉아 말씀하시길 “장하도다, 장하도다. 내가 다시 너희들에게 한 가지 일을 말하리니, 집의 욕심[家欲]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얻고 집의 욕심을 생각하면 도를 얻지 못하리라”라고 하시니, 이에 세 사람은 기뻐하며 곧 보살의 지위를 얻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바는 42만 유순(由旬)이니, 어떻게 아는가 하면, 해와 달은 땅과의 거리가 42만 유순인데 사람의 눈으로 해와 달을 보니, 이것으로 눈으로 보이는 바를 알 수 있느니라. 시방의 넓고 먼 곳에는 해와 달이 억억만 배이니, 비유컨대 큰 바다의 모래와 같아서 억억만 배는 헤아리거나 알 수 없느니라.
사람이 지은 선과 악으로 재앙과 복을 받으니, 곧 앞과 뒤에 지은 재앙과 복은 억만 배여서 다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일체의 선과 악의 요체(要體)는 목숨이 다할 때에 있으니, 악을 지으면 나쁜 곳을 만나고 선을 지으면 좋은 곳을 얻느니라. 재앙과 복은 모두가 미리 알 수 있으며, 있는 곳을 모두 미리 알 수 있으니,
부모ㆍ형제ㆍ처자는 도를 얻으면 곧바로 그치거니와 도를 얻지 못하면 끊을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조달(調達)3)은 사람들에게 복 짓는 것만 가르치고 도를 행하는 것은 가르치지 않았으나,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짓고 계율을 지니고 뜻을 지키도록 가르쳐서, 도를 얻어야 마침내 그치니, 조달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아사세왕(阿闍世王)의 처소에서 신통을 나타내리니, 왕이 나를 따르면 다른 사람도 나를 따르리라. 내가 문득 한 마리 흰 코끼리로 변하여 혼자서 궁중을 출입하거나, 다시 단정함이 견줄 데 없는 한 어린아이로 변하여 왕의 무릎에 오른다면 왕이 크게 사랑하리라’고 하였느니라.
왕은 조달이 이와 같이 지은 것을 보고, 왕의 뜻에는 조달이 부처님보다 낫다고 여겼으며, 왕은 곧 조달의 말을 따랐고, 왕의 관리들과 백성들과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사문(沙門)들도 모두 왕을 따라 조달의 처소에 이르러 일을 물었느니라. 조달이 곧바로 부처님께 와서 말하길 ‘부처님은 나이가 많으시니 다시는 제자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사리불에게 ‘떠나라’고 하고, 모든 사문들에게 ‘떠나라’고 하였으니, 조달은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이런 나쁜 뜻을 두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신통을 잃었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어리석은 사람의 하는 짓은 뒤바뀌어서 모든 부처님의 법이 아니니라’라고 하셨느니라.
조달이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날아가리니, 사람들이 내가 나는 것을 보면 모두 나를 따라 섬기리라. 하지만 내가 날아가려고 하나 능히 다시 날 수가 없다’라고 하였느니라.
조달은 신통이 없어진 줄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때에 곧 어떤 바라문(婆羅門)이 평등한 마음을 행하여 문득 첫 번째 하늘에서 내려와 사리불에게 말하길 ‘조달은 신통이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길 ‘조달이 너를 불러 거듭 죄를 짓게 하려고 하는구나’ 하시고, 하늘에게 말씀하시길 ‘조달은 아직 신통을 얻지 못하였다. 나는 벌써부터 없는 줄 알았으니, 어찌 하물며 지금에서이겠는가’라고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들은 마땅히 탐심을 내지 말 것이니, 조달은 다만 앉아서 탐심을 냈기 때문에 신통을 잃었느니라’라고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라한에 두 가지 무리가 있으니, 첫째는 사말(舍沫)이라고 해서, 스스로 도 얻을 것을 근심하여 곧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것이요, 둘째는 교화하는 것마다 모두 해탈케 하는 것이니라.
부처와 아라한은 함께 37품의 경을 행하니, 비유컨대 마치 등불을 켜 놓은 것과 같아서 부처님은 계교(計挍)하시어 몇 가지 일이 있는지 알고 그 근본과 끝을 알아 지키면서 소멸시키지만, 아라한은 근본과 끝을 헤아리지 않고 곧바로 소멸시키느니라.
부처님은 비유컨대 마치 나무를 따르는 것과 같아서 뿌리에서부터 가지 끝에 이르러 분별하여 아시고, 아라한의 행은 비유컨대 마치 끝에서부터 뿌리에 이르는 것과 같으니라. 뿌리에서 끝에 이른다는 것은 본래 공함을 헤아리는 것이니, 공함을 알지 못하는 이는 도를 얻지 못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라한은 왕성한 음(陰)은 있으나 5음(陰)은 없으며, 있는 것은 모두 나타내되 다만 집착하지 않을 뿐이며, 색(色)ㆍ느낌[痛痒]ㆍ생각ㆍ알음알이는 있을지언정 생사는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라한은 침묵으로써 아라한을 얻되 세 가지 상(相)이 있으니, 첫째는 몸과 입과 뜻을 다시는 범하지 않고, 둘째는 세 가지 독(毒)을 멸하고, 셋째는 옷과 음식은 좋은 것을 쓰지 않고 다만 주리고 추움을 면할 뿐이니라. 이러한 세 가지 인연이 있어 곧 능히 변화하여 자재하거니와, 쇠퇴함을 집착한 까닭에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라. 뜻으로는 다만 여섯 가지 쇠퇴함을 분별할지언정 집착하지 말지니, 집착하면 곧 도를 얻지 못하리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라한이 날아다니는 데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첫째는 사람들이 보면 너무 많이 공양할까 두려워함이요, 둘째는 나쁜 사람이 질투할까 두려워해서니라.
신통을 나타내는 데 다시 두 가지 복이 있으니, 첫째는 사람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곧바로 정진하여 도를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사람들의 보시(布施)를 받아서 그들로 하여금 큰 복을 받게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신통을 나타냄에 뜻으로 기뻐한 까닭에 곧 큰 복을 얻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라한이 있었으니, 이름이 교범발(憍梵鉢)이었는데, 이미 아라한의 도를 얻었으나
늘 소처럼 새김질을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부처님께 그 까닭을 물으니, 부처님이 대답하시기를 ‘이 비구는 과거 전생에 7백 번 소가 되었는데, 금생(今生)에 도를 얻었어도 남은 습기가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몸이 무상(無常)한 줄 생각하여라.”
한 비구가 곧 부처님께 여쭈었다.
“제가 무상함을 생각하니, 인간이 세간에 있어 봐야 50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다시 한 비구가 말하였다.
“30년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다시 한 비구가 말하였다.
“10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다시 한 비구가 말하였다.
“1년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다시 한 비구가 말하였다.
“한 달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다시 한 비구가 말하였다.
“하루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다시 한 비구가 말하였다.
“한 때라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다시 한 비구가 말하였다.
“호흡하는 사이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다. 나간 숨이 돌아오지 않으면 후세(後世)에 속하리니, 사람의 목숨은 호흡하는 사이에 있을 뿐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모여 앉아서 일체가 다만 법어(法語)만을 이야기하라. 할 수 없는 이는 빨리 눈과 소리를 막고 뜻을 지켜 잘 들으라. 도를 얻은 이를 따르는 것이 옳으니라.”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환희하여 뜻이 풀려서 곧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가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갈 때는 마치 손이 허공에서 걸리는 바가 없는 것처럼 해야 하며, 뜻도 집착하는 바가 없게 할지니, 귀로 뜻에 맞는 소리를 들음이 바로 집착이요, 뜻에 맞지 않는 말을 들음도 바로 집착이 되느니라.”
한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뜻에 맞거나 뜻에 맞지 않거나 모두 집착일진댄, 어찌해야 도를 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 뜻이 풀려서 공(空)하여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으면 이는 보살의 행에 응하는 것이니라.”

모든 비구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모두 기뻐서 껑충껑충 뛰었으며, 곧 좇아서 태어남이 없는 법의 지혜[無所從生法忍]를 얻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비구가 산중에 앉아서 탄식을 하니, 한 사람이 와서 비구에게 묻기를 ‘그대는 도를 닦으면서 어찌하여 탄식하는가’라고 하였느니라. 비구가 대답하기를 ‘내가 지옥에 있을 때에 다섯 가지 형벌로 지극히 아팠는데, 지금 사람의 몸이 되었고 더욱이 부처님의 경(經)과 계율(戒律)을 만났으나 아직 도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죽어서 다시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한 까닭에 탄식하였노라’라고 하였느니라.
비구가 되어도 근심하고, 속인이어도 근심하고, 경(經)과 계(戒)가 있어도 또한 스스로 몸을 근심하니, 좋은 뜻이 항상할 수 없느니라. 혹 인연이 왔을 때도 문득 처자와 재물을 생각하니, 이것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한 비구가 우바이(優婆夷)의 집에 이르러 탁발하면서 경(經)을 말하니, 우바이가 곧바로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느니라. 비구가 경을 말하여 한밤중에 이르렀는데, 우바이는 꿇어앉아 일어나지 않았느니라.
비구가 말하기를 ‘내가 다니며 경을 말하였으나 아무도 이렇게 정진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니, 우바이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저의 집에 나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울다가 한밤중에 이르러 죽었으니, 그러므로 눈물이 나올 뿐입니다’라고 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경을 말하는 것은 많은 데 있지 않으며, 다만 지혜를 묻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어떤 한 비구가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곧 부처님께 가서 여쭈었다.
“저를 위해 한 가지 요긴한 법을 말씀하시어 제가 도를 얻도록 하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물건이 아니면 취하지 말고, 이것이 너의 물건이거든 취하라.”
이에 비구들이 곧 스스로 생각하기를 ‘천하의 모든 물건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니요, 오직 선행만이 집안의 살림이로다’ 하고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이미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는 것이 바로 도가 될 뿐이니라.”
때에 어떤 한 비구가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곧바로 부처님께 가서 여쭈었다.
“사리불은
이것을 얻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은 다 얻었느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사리불은 어찌하여 저를 꾸짖고, 가사(袈裟)를 가지고 저의 얼굴을 닦았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을 불러서 오면 물으라.”
사리불이 말하였다.
“저는 나쁜 뜻이 없었습니다. 꾸짖은 까닭은 인욕(忍辱)하게 하려던 것이요, 가사를 가지고 얼굴을 닦은 것은 눈ㆍ귀ㆍ코ㆍ입을 청정하게 하려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사리불이 착한 권도(權道)의 방편으로 한 일이니라.”
이에 비구가 기뻐하여 곧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비구에게 와서 따져 묻기를 ‘사람이 죽으면 알음알이[識]와 기억과 생각으로 알던 것이 모두 없어지고, 도를 닦고 선정을 얻어서 뜻으로 알던 것도 다 사라지니, 무슨 다를 것이 있습니까?’라고 하였느니라.
비구가 대답하기를 ‘함께 사라지지만, 사람이 죽어서 목숨은 없어지나 정신은 없어지지 않고, 행한 것을 따라 태어나되 다만 얻는 것이 같지 않음은 미세하여 보이지 않을 뿐이니, 착한 일을 하면 하늘에 나고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들어가는 이것이 다르니라’라고 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한 비구가 우바이의 집에 이르러 걸식[分衛]하다가 단정하고 예쁜 여인을 보고서 이로 인하여 비구가 문득 삿된 생각을 일으켰는데, 우바이가 곧 음식을 갖다 주니, 비구가 곧바로 버리고 가면서 ‘나는 남의 보시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느니라. 우바이가 곧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미 뉘우치는 뜻이 있으니 보시를 받음이 좋겠나이다’라고 하였고, 우바이가 거듭 말하니, 비구가 문득 받았느니라.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만일 어떤 사람이 악이 있더라도 곧 깨달으면 죄가 소멸되리니, 비구가 보시를 받는 것은 죄가 없느니라’라고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능히 공한 줄 헤아리고 뜻을 제어하면, 손가락을 튀기는 사이에 도를 얻을 수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한 비구가 앉아서 선정(禪定)을 얻었는데, 한 우바새가 보니 앉은 자리가 평평하지 않았으므로 끌어 일으켜 그에게 편안한 곳을 보였으나, 우바새는 뒤에 5백 겁 동안 안은(安隱)함을 얻지 못하였으니, 왜냐하면
도의 생각을 끊었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이가 경을 말하거든 삼가하여 끊지 말아야 하니, 경을 끊으면 죄가 무거워서 헤아릴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비구가 도를 닦아 첫 선정[一禪]을 얻고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도의 자취인 첫 번째 선정의 복을 얻었으니, 위로 일곱 번째 하늘에 태어나서 수명이 한 겁이리라’라고 하였느니라. 두 번째 선정을 얻고는 스스로 헤아리되 ‘사다함(斯陀含)의 세 번째 선정을 얻었으니, 위로 열다섯 번째 하늘에 태어나 수명이 여덟 겁이리라’라고 하였느니라.
네 번째 선정을 얻고는 스스로 헤아리되 ‘나는 아라한을 얻었건만 지금 무슨 까닭에 열아홉 번째 하늘에 태어나 수명이 열여섯 겁이 되지 않는가’라고 하였느니라. 이 말을 하고 나서 곧 ‘부처님이 두 가지 말을 하였을 뿐이다’라고 말하니, 즉시 하늘에서 지옥으로 떨어져, 모르는 결에 하늘의 수명을 잃고 문득 지옥의 고통을 받았느니라.
비유컨대 세간 사람이 진귀한 보물을 얻었으나 하루아침에 불이 나면 다 타버리는 것처럼, 사람이 나쁜 뜻을 일으키면 착한 뜻을 마구 불태우느니라.‘사다함’ 아래는 여러 본에 모두 ‘태어나, 하늘에, 수명이, 겁’과 ‘세 번째 선정을 얻어’ 등의 문장이 빠져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는 선과 악이 항상 따라서 풀어짐이 없으니, 오직 도를 얻어야만 마침내 속세를 여읠 뿐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정오가 지나서 먹지 않으면 다섯 가지 복이 있으니, 첫째는 음욕(婬欲)이 적고, 둘째는 잠이 적고, 셋째는 일심(一心)이 되고, 넷째는 아랫도리에 바람이 없고, 다섯째는 몸이 편안하며 또한 병이 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사문(沙門)이나 도사(道士)는 복을 알아 먹지 않느니라.
세수하고 양치질하는 데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손톱 밑에 때가 있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가려움을 마음대로 긁는 것이요, 셋째는 벼룩과 모기를 죽이기 때문이니라. 또한 뜻이 청정하여 욕심이 없게 하고자 함이며, 또 경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니, 이것은 때맞춰 밖의 때는 제거할 수 있으나 마음으로 악을 생각하면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니라.
학인(學人)의 으뜸가는 일은 마음을 맑힘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니, 마음은 법의 근본이 되며, 마음이 바르면 행이 방정(方正)하고, 행이 방정하면 도에 응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어떤 사미(沙彌)가 스승과 함께 가다가, 땅 위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잠자코 집으면서 스승에게 말하기를 ‘여기를 빨리 지나가십시다. 사람이 없으니 대단히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스승이 말하길 ‘다만 너에게 금이 있기 때문에 두려울 뿐이니라’라고 하고 금덩이를 버리고 가니, 다시는 두렵지 않았느니라. 제자가 곧 스승에게 예를 올리며 말하기를 ‘제가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금을 버렸더니 다시는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느니라.
이에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시되 ‘학인들이 도를 탐내는 것은 마치 사미가 금덩이를 탐낸 것과 같으니, 어찌 도를 얻지 못할까 근심하겠느냐’라고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비구가 도를 배우는데 스승에게 경(經)을 받고도 정진하지 않았느니라. 스승이 소와 말의 똥 몇 되를 가져오게 해서 태웠으나 어둡도록 다 타지 않았으며, 스승이 큰 돌을 취하여 지옥의 불을 가져다 태우니 곧 타서 재가 되었느니라. 제자가 크게 두려워하여 꿇어앉아 스승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불입니까’라고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네가 경을 읽지 않고 도를 행하지 않으므로 죽은 뒤에 마땅히 지옥에 들어가리니, 지옥의 불이 너를 태우되 다시는 때를 옮기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느니라. 이에 비구는 무섭고 두려워서 곧바로 정진하여 날마다 한 아함(阿含)을 듣고 문득 아라한을 얻었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훌륭한 권도의 방편으로 사람을 제도함이 이와 같으니라’라고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나함(阿那含)은 세 가지 번뇌[結]가 있으니, 첫째는 어리석음의 번뇌요, 둘째는 세간 애욕의 번뇌요, 셋째는 소견이 분명하지 않고 아직 다하지 않은 번뇌이니라. 아나함은 마치 불꽃 위에서 연기가 일어나되 태울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수다원(須陀洹)은 여든여덟 가지 번뇌를 제거하고, 사다함(斯陀含)은 일곱 가지 번뇌를 제거하고, 아나함(阿那含)은 세 가지 번뇌를 제거하고, 아라한은 번뇌가 없느니라.
수다원은 도의 자취[道迹]를 얻고, 사다함은 가고 오면서 도를 얻고, 아나함은 세간으로 돌아오지 않고, 아라한은 다시 집착하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도의 자취를 얻는 것인가? 이른바 괴로움을 아는 것이니, 세간의 사람들은 모두 괴로움을 모르지만
수다원은 괴로움을 아느니라. 사다함은 습(習)을 버리고, 아나함은 앎[知]이 다하였고, 아라한은 도를 행함을 이미 마쳤느니라.
수다원을 얻고 따로 백 겁을 지나야 아라한을 얻을 수 있으니, 무슨 까닭에 백 겁을 지나야 하는가?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열 가지 번뇌를 끊지 않으면 아라한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수다원은 다만 자신의 몸과 죄를 근심하여 감히 세간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니, 남아 있는 열 가지 의심의 매듭을 풀지 않으면, 풀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멈추어 머무르느니라.
수다원이 버릴 것은 항상 다섯 가지 낮은 번뇌[下結]가 있으니, 첫째는 탐욕의 번뇌요, 둘째는 성내는 번뇌요, 셋째는 소견이 움직이는 번뇌요, 넷째는 계(戒)를 탐하면 복이 된다는 번뇌요, 다섯째는 의심하는 번뇌니라. 또 이르기를 여섯 번째 하늘 이하로부터 세간에 이르기까지 탐욕과 성냄과 몸을 탐내는 것과 소원을 의심하는 것을 낮은 번뇌[下結]라 하느니라.
수다원이 인연을 본다는 것은 이른바 다섯 가지 계율을 범하지 않는 것이니, 죽음에 당하였을 때 죽을지언정 범하지 않느니라. 다른 사람은 급하면 모두 다섯 가지 인연을 범하거니와 수다원은 끊었기 때문에 새로 아라한의 법을 받으니, 새롭기 때문에 다 끊느니라.
보살은 옛날 죄를 마치고, 죄가 끝나서 도를 얻으면, 마침내 무상(無常)과 고(苦)와 공(空)을 알며, 몸도 아니요 도(道)도 아님을 알리라.
도인(道人)은 도를 행하되 마땅히 집착하지 말지니, 수다원을 행하면 수다원을 얻고, 사다함을 행하면 사다함을 얻고, 아나함을 행하면 아나함을 얻고, 아라한을 행하면 아라한을 얻고, 벽지불을 행하면 벽지불을 얻고, 보살을 행하면 보살을 얻으리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배우는 이들이 뜻을 따라 지으면 문득 그 과보를 얻으리니,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발우[鉢]에 네 가지 이름이 있으니, 첫째는 음식을 공양하지 않음[不供食]이라 하고, 둘째는 계(戒)라 하고, 셋째는 받음[受]이라 하고, 넷째는 따름[從]이라 하느니라.
이것은 복을 얻음에 티가 없어서 곧바로 복을 받으니, 발우를 가지면 곧 계율[戒]이 서서 뜻 가운데
나쁜 생각이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라한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축생을 머리로부터 발까지 헤아려도 제각기 이름은 있으되 고기라는 이름은 없기 때문이며, 벽지불은 본래의 정기가 저지른 부정(不淨)을 헤아리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느니라.
부처님은 일체의 천하가 모두 공(空)하여 아무 것도 없으며, 있던 것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나되 반드시 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며,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모든 제자들이 이 경을 듣고 기뻐하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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