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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87 보리심이상론(菩提心離相論)

by Kay/케이 2024.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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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리심이상론(菩提心離相論)

 

보리심이상론(菩提心離相論)


용수(龍樹) 지음
시호(施護) 한역
이인혜 번역


일체의 부처님께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
내 이제 보리심의 의미를 간략히 설하면서
저 보리심에 지극정성으로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씩씩하고 용감한 군사가 훌륭한 병장기를 잡는 것처럼
내가 보리심을 설명하는 뜻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저 대보리심이란 모든 부처님이신 세존과 대보살들이 다 이 보리심을 원인으로 삼아서 발했기 때문이니, 내가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취한 것이라서 보리도량[菩提場]에 앉아 정각(正覺)의 과(果)를 성취하기까지 이 마음은 견고하다. 또 이 보리심은 모든 보살의 총지행문(摠持行門)으로서 이와 같이 관상(觀想)하고 이와 같이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보리심을 찬탄하는 이유는 모든 중생들에게 윤회의 고통을 그치게 하고자 함이다. 구제 받지[得度] 못한 자를 빠짐없이 구제케 하고, 해탈하지 못한 자들을 해탈케 하고, 편안함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편안함을 얻게 하고, 열반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열반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 또 이렇게 뛰어난 원력을 원만히 하기 위함이요, 자기 모습[自相]의 올바른 바탕[正體]의 인(因)을 세우기 위함이요, 제일의(第一義)인 진실관(眞實觀)에 들기 위함이다. 저 보리심은 무생(無生)이 자기 모습[自相]이니, 이런 까닭으로 나는 지금 보리심이란 일체의 성품을 여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그렇다면 어떻게 그 모든 성품을 여의었다는 말인가?
【답】온(蘊)ㆍ처(處)ㆍ계(界)는 갖가지 취하고 버리는 법을 여의어서 아(我)가 없으며 평등하다. 자심(自心)이란 본래 생하지 않으니,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무엇을 아(我)라고 하는가?
온(蘊) 등으로 표현되어 마쳤지만 분별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체가 없다. 그러므로 보리심을 항상 깨달아 마친 자라면 즉각 모든 법의 공상(空相)에 능히 안주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항상 저 보리심을 깨달아 마친 자는 비심(悲心)으로 관하기 때문에 대비(大悲)를 체로 삼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온갖 온(蘊) 속에서도 아상(我相)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외도들은 상응(相應)하지 않는 행을 일으켜서 상(相)에 집착해 분별하면서 갖가지 온에는 무상(無常)하지 않은 법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저 아상이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이 맡아 지니고[任持] 있는 진실한 성품 가운데는 항상하다고 집착할 만한 것이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무상(無常)한 것도 아니다. 아(我)의 온(蘊) 속에서는 명칭도 오히려 실답지 않은데, 하물며 그에 따르는 작용[作]이나 갖가지 분별을 실제로 있다고 하겠는가? 만일 어떤 자가 한 법, 나아가 갖가지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자는 세간의 마음이 구르면서 세간의 행을 따르는 것이라서 저 상응하지 않는 것을 항상하는 행상(行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성품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안이다 바깥이다 분별할 수 없으니, 저 능히 집착하는 마음일 뿐이지 무슨 원인[因]이 있겠는가? 말하자면 능히 여의질 못하고 세간의 모습[相]을 따르는 것이다. 원인이든 모습이든 이 두 가지에는 구별이 없다. 이들은 항상하지도 않고 능히 집착하지도 않으니 심성이란 항상하다고 집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저 성품의 무상은 항상이다.
만일 저 성품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저 성품이 무엇으로 만들어지며 무엇으로부터 나와서 아(我) 등의 모습을 갖게 되는가? 만일 세간을 여읜다면 온 속에 즉(卽)해서도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다. 온(蘊)1) 외에 처(處)2)와 계(界)3)를 깨달아 마치는 것도 마찬가지라서 취하고 버리는 두 가지 법이 성립할 수 없다.
여기서 온이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한다. 이를 오온(五蘊)이라 하며 모든 성문들이 이 가운데서 배웠다. 그런데 색은 물거품과도 같고, 수는 물 위에 뜬 거품과도 같고, 상은 아지랑이와도 같고, 행은 파초와도 같고, 식은 허깨비를 만들어내는 마술사와도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오온의 의미는 복덕과 지혜 양쪽을 갖추신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들을 위해 응하는 대로 설하신 것이다.
색온(色蘊)에 대해서 이제 그 특성을 간략히 제시하자면, 사대(四大)의 종자와 저 사대의 종자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색온이 되는 걸 설했지만, 색이 아닌 것, 즉 나머지 수ㆍ상ㆍ행 세 가지는 여러 가르침에서 설한 대로 알아야 하나니, 식온(識蘊)이나 행온, 상온에 대해서는 앞으로 설명하겠다.
위에서 말하는 처(處)란 내부의 안(眼) 등의 처소와 외부의 색(色) 등의 처소를 말하니, 이를 12처라 한다.
위에서 말하는 계(界)란 안근(眼根) 등의 계와 안식(眼識) 등의 계와 색(色) 등의 경계를 말하니, 이를 18계라 한다.
이상의 온ㆍ처ㆍ계는 갖가지 취하고 버림을 여의고 방향도 없고 구분도 없어서 분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분별을 통해 이것들을 본다면 옳지 않다. 분별을 일으킴에 따라서 즉각 집착이 있게 되니, 그렇다면 어떻게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상응할 수 있는가? 만일 하나의 모습으로 바깥을 보는 뜻이 있다면, 마땅히 알라, 이것은 지혜가 파괴되어 구르는 것으로서 뜻[意]이 색(色)을 길이 기르는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이와 같이 색과 뜻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예컨대 파리몰라야가(波哩沒囉惹迦)4) 등의 외도들은 갖가지 다른 견해를 따라 세 가지로 분별을 일으키는데 이는 옳지 않다. 가령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을 만났음에도 그가 당했던 일은 실제의 행상(行相)이 아닌 것과 같고, 또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뛰어난 행상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비유는 무엇을 뜻하는가? 말하자면 식(識)의 광명이 취하고 버리는 상을 파괴한다는 뜻이다. 식법(識法)이 이와 같다면, 바깥이라는 의미[外義]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바깥이라는 의미가 없다. 마땅히 알지니, 일체의 색상(色相)으로 표현된 것은 자기 식의 광명이 색상으로 비춘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환술로 만든 환상이나 어른거리는 아지랑이, 또는 건달바(乾闥婆)의 성(城)을 보고는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지혜가 없는 자들이 어리석게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색 등을 실제라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온갖 지혜 없는 사람이 어리석고 집착하는 마음으로 색(色) 등을 실답다고 관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라서 이 아집(我執)을 말미암아 이 마음이 따라서 전변[轉]하는 것이다. 앞서 온처계의 뜻을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색상 등이) 저 갖가지 분위(分位)와 차별을 여의었음을 알아야 한다. 오직 마음의 분위에 따라 시설(施設)한 것이므로 갖가지 상이란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이치에 대한 논증은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설한 바와 같다.5)
【문】앞서 질문했던 오온(五蘊)에서 식(識)은 무엇을 자상(自相)으로 삼는가?
【답】심(心)에 대한 이치를 설한 바와 같이 식도 그러하다. 부처님이신 세존께서는 항상 일체가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뜻은 너무나 깊어서 어리석은 자들은 요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아상을 공(空)할 수 있다면 즉시 이 마음에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분별을 일으키는 자는 삿된 가르침 때문이니, 저들이 세운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여실한 이치를 얻은 자는 법무아(法無我)를 보니, 이것이 바로 대승에서 말하는 법무아의 이치다. 자심은 본래(本來)라서 생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생하는 바를 두는데 따라서 역시 평등하다. 자심의 증상(增上)6)으로 진실한 이치에 들어가니, 유가(瑜伽)의 방편[行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알아야 하나니, 여기서 저것[彼:自心]이 뒤의 것[後:所生]에게 의지[所依]가 되어주되 실체가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청정한 마음의 현행(現行)이라고 한다.
과거의 법을 따져보면 과거란 실체가 없다. 미래의 법을 따져본다면 미래란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의 법을 따져본다면 현재란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면 삼세 중에 어디에 머물겠는가? 마치 군대나 수풀 등이 (독립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병정과 다수의 나무로 이루어진 사례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에도 아상이 없음을 알아야 하나니, 저 식(識) 역시 소의(所依)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을 이와 같이 본다면 적운(赤雲)이 빠른 속도로 흩어져 소멸하듯 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만일 법이 있다면 그것은 사유[思]로부터 나타난 것임[所現]을 알아야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도 마찬가지다. 갖가지 유정의 무리는 과거든 미래든 법 그대로[法爾如是]이니, 마치 큰 바다가 갖가지 물줄기의 종착지가 되듯이 아뢰야식이 (모든 식에서) 근거[所依]가 되는 것도 그러하다. 만일 이렇게 저 식을 관하는 자가 있다면 분별심을 내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저들 각각에 대해 여실하게 안다면 저들 각각의 명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만일 저들 갖가지에 대해 각각 사물의 성품[物性]을 안다면, 그 각각에 대해서는 딱 맞게[稱] 설명할 수 없다. 이렇게 설함을 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결정적인 말[決定語]이다. 그러므로 제법 역시 결정적으로 생하여 일체 사(事)에서 구르는데 따라 성취되는데, 능지(能知)와 소지(所知) 두 가지로 차별이 된다. 그런데 소지가 없다면 능지가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두 가지가 모두 실답지 않은데 법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음[心]이라고 한 것은 단지 이름일 뿐이며, 저 이름 역시 개별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단지 표현일 뿐이기 때문에 저 명칭의 자성 역시 성립할 수 없다. 이런 이치에서 지혜로운 자라면 응당 보리심의 자성도 허깨비 같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한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 중간에서든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취할 만한 법도 없고 버릴 만한 법도 없으며, 모양[形色]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색깔[顯色]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남자나 여자의 모습도 황문(黃門)7)의 모습도 아니어서 그 어떤 색상(色相)에도 머물지 않는다. 볼 수 있는 법이란 아무것도 없으니, 눈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모든 부처님만이 평등함을 관찰하신다. 마음의 자성이 있건 없건 간에 평등한 법 가운데서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말해진 성품[性]이란 명칭의 분별이기 때문에 분별을 여읜다면 마음과 성품이 모두 공하다. 만일 분별이 있어서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명칭을 설해서 공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깨닫는 주체[能覺]도 없고 깨달을 경계[所覺]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보리심을 이렇게 관할 수 있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만일 능각과 소각이 있다면 보리심은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보리심은 어떠한 상(相)도 없고 또한 생함도 없다. 말로서 표현할 수 없지만[非語言道] 능히 찬탄할 만한 것이다. 또 보리심이란 허공과 같다. 마음과 허공은 다 같이 두 모습이 없다. 이는 마음의 공함과 공의 지혜가 평등하다는 말이니, 부처님과 부처님의 신통이자 부처님과 부처님의 차이가 없다. 모든 부처님께서 삼세에 걸쳐 하시는 일이 모두 보리계(菩提界)에 머무는 가운데 갈무리[攝藏]되어 있다. 비록 저 모든 법을 다 갈무리하고 있으나 항상 고요[寂靜]하면서도 또한 항상 관찰한다. 무상한 법은 환술로 만들어낸 환영[幻化]과도 같아서 보리계에 갈무리 되는 것이 아니니, 삼유(三有:삼계의 유정)를 조복하여 공에 머무는 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생하지 않음(無生) 이것을 공이라 하며, 일체에 아(我)가 없음[無我]을 역시 공이라 한다. 만일 무생과 저 무아로써 관(觀)하여 공이 된다고 한다면, 이 관은 성립할 수 없다. 물듦이나 청정함 두 가지로 분별하는 즉시 단견(斷見)과 상견(相見) 두 가지 견해의 상(相)을 이룬다. 만일 지혜로 저 공을 관한다고 말하더라도 이 공 역시 개별적인 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리심은 갖가지 소연(所緣)을 여의고 허공의 상(相)에 머문다. 만일 허공이 머물 곳이라고 관한다면, 이 가운데는 공도 있고 성품도 있어서 두 가지 명칭으로 차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을 아는 자는 마치 세간에서 한 번의 포효로 모든 짐승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사자처럼 공이라는 한마디에 온갖 말이 고요해지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곳곳마다 항상 적멸이며 모든 것이 다 공함을 안다.
또한 식법(識法)은 무상하며 법은 무상으로부터 생한다. 저 무상의 성품[無常性]이 바로 보리심이니, 공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만일 무상의 성품이 바로 보리심이라면 보리를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마음의 평등일 터이니, 저 공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라고 설하지도 않는데 공을 집착[取]하는 마음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본래의 자성인 진실의 일체가 보리심의 뜻을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물에는 자성이 없음을 알아야 하니, 자성 없는 성품[無自性性]이 바로 여기서 설하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만일 아(我)와 법(法)을 여읜다면 즉각 마음은 머물지 않는다. 이는 하나의 법도 아니고 모든 법도 아니며, 각각 자기 성품이되 자기 성품을 여읜다. 마치 세간의 설탕이나 꿀이 단맛을 자성으로 삼는다든가 불이 뜨거움을 자성으로 삼는 경우와 같다. 저 모든 법은 공하며 자성 역시 그러하다. 저 모든 법의 성품은 항상한 것도 단멸하는 것도 아니며, 얻을 수 있는 것도 여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이치 때문에 무명(無明)이 시초가 되고 늙고 죽음이 마지막이 되면서 온갖 연생법(緣生法)이 성립된다. 이는 마치 꿈이나 허깨비와 같아서 그 체가 실답지 않다. 이렇게 해서 일명 십이지륜(十二支輪)이라고도 이름하는 십이지의 법을 설한다. 저 생사의 문을 계속해서 뱅뱅 돌아다니는 중에도 실제로는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따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며, 삼업(三業)의 행에 따라 받는 과보의 차별도 없다. 이렇게 윤회하는 가운데 연생법을 깨달으면 갖가지 경계의 문을 당장에 여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이는 (연생법의) 행상이 아니라서 정인(正因)을 파괴하지 않고 온(蘊)의 소생이기 때문이며, 윤회를 마친 뒤에는 더 이상 그러한 행상이 없기 때문이며, 일체(一切)를 지니는 바가 없이 공공(空空)에서 생하기 때문이다. 법과 법이 평등한 가운데 인을 지어 과를 받는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다. 갖가지 모든 법은 부류의 모임[聚類]에서 생기니, 북을 치면 북소리가 나고 보리를 심으면 싹이 생하듯이, 모든 법이 자기 부류에서 생하는 이치도 마찬가지로서 허깨비나 꿈처럼 연생(緣生)으로 나타난 것이다. 모든 법은 인으로 생하지만 생함이 없으니, 인마다 계속 따져보아도 스스로 공한데 어디서 생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모든 법은 생함이 없으며 생함 없는 이것을 공이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온을 설할 때 오온의 성품이 평등함을 설한 것처럼, 저 모든 법에 대해서도 이렇게 염(念)해야 한다. 만일 공을 설함이 있다면 진실 그대로 설해서 설하는 공의 체(體) 역시 단멸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단멸이 아닌 체 가운데에는 실(實) 역시 얻을 수 없다. 체를 설할 때 공이라고 하는 것처럼, 공 역시 체가 없다. 만일 실(實)이 없음을 요달한다면 짓는 자[作者]가 항상하지 않는다. 갖가지 번뇌의 업이 모이고 쌓인 것이 체가 되었으니, 이 업 역시 마음으로부터 생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만일 머묾이 없다면 업이란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보리를 좋아하고 즐기는 마음은 적정(寂靜)의 성품이니, 저 적정한 마음으로 포착[取]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 있는 자라면 실답게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니, 저들은 진실[實]을 보기 때문에 해탈을 얻는다.
그런데 저 보리심이란 최상의 진실이다. 이 진실한 이치를 공, 또는 진여, 실제(實際)라고 이름하니, 이것이 바로 모습을 갖지 않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만일 이러한 공의 이치를 요달하지 못한다면 그는 해탈할 분수가 없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이는 윤회하는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자인데, 윤회하는 자는 여섯 갈래의 길[六趣]에 떠돌아다니게 된다. 지혜 있는 자라면 저 보리심과 공이 상응함을 여실하게 관한다. 이렇게 관해야 비로소 남을 이롭게 하는 지혜를 성취하여 걸림과 집착이 없으니, 이를 두고 부처님의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아는 자라고 한다. 그들은 항상 비심(悲心)으로 중생들의 부모나 친지들이 맹렬한 번뇌의 불길에 타서 생사에 윤회하는 갖가지 모습을 두루 관하고는 고통을 받을 것 같으면 응당 대신해서 고통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즐거움을 누릴 것 같으면 응당 널리 보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세간에서 좋아할 만한 과보와 싫어할 만한 과보, 선한 길과 악한 길, 이로운 일과 이롭지 않는 일 등을 관찰하고는 중생을 따라 구르지만, 모든 중생이 본래 얻을 수 없고 지혜의 차별에 따라 갖가지 상을 일으킬 뿐이다. 범천이나 제석이나 세간을 보호하는 천[護世天] 등 하늘의 존재든 인간이든 그 모두가 세간의 모습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은 지옥ㆍ아귀ㆍ축생 등 여러 갈래에 있는 모든 중생의 한량없이 많은 종류의 색상을 관찰하는데, 이러한 중생들은 아무 이익도 없는 고통에 항상 굴려지면서 배고픔과 목마름에 핍박을 받고 서로 죽이고 서로 잡아먹으니, 이 때문에 고통의 과보가 무너지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선한 길[善趣]이나 악한 길[惡趣]에 있는 모든 중생의 업보가 자상(自相)이 이와 같음을 능히 관찰하신다.
이렇게 관찰하고 나서 방편의 마음을 일으켜서 중생을 잘 돌보아 괴로움을 벗어나도록 한다. 모든 보살은 이로 말미암아 대비심을 근본으로 삼고 저 중생을 소연의 경계[所緣境]로 삼는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은 일체 선정의 즐거운 맛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얻는 과보를 구하지도 않는다. 성문의 지위를 넘어서서 중생을 버리지 않고, 이타행(利他行)을 닦아서 대보리심을 일으키고, 대보리의 싹을 내서 부처의 보리의 과(果)를 구하고, 대비심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관한다. 끝없이 넓은 아비지옥에서는 갖가지 업이 원인이 되어 고통의 과보가 돌고 도는데, 이렇게 갖가지 죄로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보살은 비심(悲心)을 가지고 대신 받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갖가지 고통은 갖가지 모습을 갖는데, 이 모습들은 실다움이 있지 않다고 설하지만 실다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만일 공을 요달해 안다면 즉시 이 법을 알아서 온갖 업과(業果)를 따라 그대로 행한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 하기 때문에 용맹한 마음을 일으켜 생사의 흙탕에 들어간다. 그러나 생사에 처해도 물듦이 없으니, 마치 흙탕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연꽃과 같다. 대비(大悲)를 체로 삼아서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공의 지혜로 관하기 때문에 번뇌를 여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방편의 힘을 써서 왕궁에 태어나는 모습과, 성을 넘어 출가하고 고행을 통해 도를 닦는 모습과, 보리도량에 앉아 정등각을 이루는 모습과, 신통력을 보여 모든 마의 군대를 물리치는 모습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대법륜(大法輪)을 굴리는 모습과, 삼도(三道)의 보배계단을 나타내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갖가지 교화하는 모습을 일으키는 것과, 세간법에 따라 대열반(大涅盤)에 드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갖가지 색상을 나타내는데, 혹은 범천이 되기도 하고 혹은 제석이 되기도 하면서 천(天)이든 인간이든 갖가지 모습을 따라 전전[轉]한다. 이렇게 갖가지로 모든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니, 이 때문에 세상을 구하시는 스승[導師]이라고 이름한다. 이런 것들은 다 모든 부처와 보살이 대비의 원력으로 세간을 조복해서 상응하는 뛰어난 행에 안주케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회 속에서 물러나거나 게으르지 않고 일승(一乘) 가운데서 이승(二乘)의 법을 설하는 것이다. 일승이든 이승이든 모두 진실한 뜻이다. 성문의 보리이든 부처의 보리이든 지혜의 몸[智身]은 한 모습[一相]이며 삼매도 일체(一體)이다. 비록 설한 바가 있다 해도 설하면서 설함이 아니니, 간혹 갖가지 모습을 설하는 일이 있는 까닭은 단지 모든 중생을 인도하기 위함이다.
만일 중생이 이익을 얻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복과 지혜에 있어서 평등하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실제로 머물 만한 두 가지 모습이 없다. 만일 상(相)에 머묾이 있다면 바로 종자(種子)가 되는데, 저 종자의 상은 자기 부류의 모임[聚類]의 소생이니, 이 때문에 생사의 싹과 줄기를 자라나게 한다. 이는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항상 설하신 바와 같다. 저 세간의 갖가지 행상(行相)을 타파하는 것은 단지 중생을 위해 갖가지 방편을 쓰는 것일 뿐 실제로 타파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분별을 여읜다면 이 이치[義]는 매우 깊은 것인데, 매우 깊은 이치 가운데는 두 모습이 없다. 비록 타파함이 있다고 설하기는 하나 이 역시 타파함이 아니다. 공한 법에는 두 모습이 없으니, 모든 법은 자성의 진실을 맡아 지니고[任持] 있다.
지(智)바라밀다가 바로 보리심이다. 보리심이란 일체의 견해를 제거함이다. 그러므로 몸과 말과 마음 모두가 무상한 법이라고 함은 단지 중생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 공이라고 말한 것은 공이면서도 단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유(有)라고 말한 것은 유이면서도 항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어서 다 머묾 없는 열반[無住涅槃)에 안주한다. 부처님이신 세존께서는 모두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심(悲心)이 낳은 한량없는 복의 덩어리, 그것이야말로 가장 높고 진실한 공의 이치[最上眞實空理)다. 이는 모든 부처님의 위신(威神)에서 나온 것으로서 스스로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두 가지 행을 성취한 것이다.
내 이제 저 일체의 성품에 머리를 숙여 절하며, 내 항상 저 보리심을 존경하리라. 이제껏 칭송하고 찬탄한 부처 종자가 끊이지 않아서 모든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세간에 영원히 머무시기를 발원한다. 보리심이란 대승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니, 나는 이 보리심에 안주해서 바르게 생각하리라.
또한 보리심이란 평등하게 이끄는 마음[等引心:삼매]8)에 머물러서 방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만일 이 보리심을 깨닫는다면 생사가 평등하여 스스로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두 가지 행을 성취한다. 또한 보리심이란 갖가지 견해의 상(相)을 떠난 무분별지(無分別智)9)가 진실하게 구르는轉] 것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보리심을 일으키니, 그들이 얻는 복덩이는 한량없고 끝이 없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이 한 찰나 사이에 보리심을 관상(觀想)하면, 그가 얻는 복덩어리는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보리심이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보리심이라는 보배는 청정하여 물듦이 없으며, 가장 크고 가장 뛰어나며 가장 높고 으뜸가는 것이다. 그래서 능히 파괴할 수도 없고 파괴되지도 않아서 진실로 견고하며, 번뇌 등 모든 마(魔)를 파괴하고 갖가지 보살의 보현행원(普賢行願)을 가득 채운다. 또한 보리심이란 일체 법이 돌아갈 곳[所歸趣]이다. 설해진 진실은 모든 희론을 여의었으니, 이것이 바로 청정한 보현의 행문으로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내가 칭찬하고 찬탄한 보리심은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신 세존께서 올바로 설하셨으니,
보리심은 가장 존귀하고 수승한 것이라
얻어지는 복덩이는 한량이 없네.

내 이 복을 중생에게 베푸노니
삼유(三有)의 바다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널리 기원하네.
이치 그대로, 사실 그대로 칭찬하고 찬탄하였으니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공부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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