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하권
법계도기총수록 하권의 1
찬자 미상
윤옥선 번역
【본문】 셋째, 아래 본문의 뜻을 풀이한 문장에는 7언 30구가 있다. 이를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으니, 처음 18구는 자리행(自利行)을 기준으로 한 것이요, 다음 4구는 이타행(利他行)을 밝힌 것이며, 그 다음 8구는 행자(行者)의 수행 방편(修行方便)과 이익 얻음[得利益]을 분별한 것이다.
처음의 문(門)에 나아가면 둘이 있으니, 처음 4구는 증분을 나타내 보인 것이요, 그 다음 14구는 연기분을 나타낸 것이다. 이 가운데1) 처음 2구는 연기의 체를 가리킨 것이다. 둘째로 그 다음 2구는 다라니의 이치와 작용[理用]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거두어들이는 영역[攝法分齊]’을 분별한 것이다. 셋째로 그 다음 2구는 현상[事法]에 즉하여 섭법분제를 밝힌 것이다. 넷째로 그 다음 4구는 세간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섭법분제를 보인 것이다. 다섯째로 그 다음 2구는 지위를 기준으로 하여 섭법분제를 드러낸 것이다. 여섯째로 그 다음 2구는 위의 뜻을 총괄해서 논한 것이다. 비록 여섯 문(門)이 같지 않으나 오직 연기다라니법(緣起陀羅尼法)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에 ‘연기의 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일승(乘)이요, 다라니법은 하나가 곧 일체이며 일체가 곧 하나인 걸림없는 법계의 법이다. 지금은 우선 하나의 문(門)을 기준으로 하여 연기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연기라는 것은 위대한 성인께서 중생을 거두어들임에 있어 이치[理]에 계합하여 현상[事]을 버리게 하고자 하나, 범부는 현상을 보고 곧 이치에 미혹되고 성인은 이치를 얻으니 이미 현상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실제의 이치[實理]를 들어 미혹한 유정을 이해시켜서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현상은 없는 것임을 알게 하며, 현상에 즉해서 이치를 회통하였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지론(地論)』2)에서 말하기를, “자상(自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상(報相)이니 명색(名色)이 아리야식(阿梨耶識: 아뢰야식)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에서 “삼계의 땅에 다시 싹이 자라나니, 이른바 명색이 함께 생겨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명색이 함께 생겨난다는 것은 명색이 저것과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둘째는 피인상(彼因相)이니 명색이 저것을 여의지 않고 저것에 의지하여 함께 생겨나기 때문이다. 경에서 “저것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피과차제상(彼果次第相)이니 6입(入)3)으로부터 유(有)에 이르기까지로, 경에서 “이 명색이 증장(增長)하여 6입취(入聚)와, 나아가 유를 이루고 인연이기 때문에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은 고통 덩어리[苦聚]를 생장한다. 이 가운데서 나[我]4)와 내 것[我所]5)을 여의고 아무런 지각(知覺)이 없어 풀이나 나무와 같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기서 ‘아와 아소를 여읜다’는 것은
이 둘은 공(空)을 나타내고, ‘아무런 지각이 없다’는 것은 자체(自體)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풀이나 나무와 같다’는 것은 중생수(衆生數)가 아님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12인연 등은 곧 자체의 성품이 공하여 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생겨나며, 뇌야[梨耶]는 미세하여 자체가 무아이나 12인연을 생기게 하니, 12인연도 또한 모두 무아이기 때문에 연생(緣生) 등이 별도의 법이 있지 않다. 부처님께서 연기관문(緣起觀門)을 들어서 제법을 회통하셨으니, 일체를 분별하지 않음이 곧 실제의 성품[實性]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론(地論)』에서 말하기를 “세제(世諦)를 수순(隨順)하여 관하면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간다”6)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일인 것이다. 이 뜻은 삼승에 있으나 또한 일승에도 통한다. 왜냐하면 일승의 조목[一乘所目]이기 때문이다. 만약 별교 일승(別敎一乘)을 기준으로 하면 간략히 10문(門)으로 설할 수 있으니, 이른바 인연유분차제(因緣有分次第)이기 때문이며, 일심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며, 자신의 업을 이루기 때문이며,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3도(道)7)를 끊지 않기 때문이며, 선후제(先後際)를 관하기 때문이며, 3고(苦)8)를 모으기 때문이며, 인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며, 인연으로 생멸함에 묶여 있기 때문이며, 유진관(有盡觀)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12인연이 일승의 뜻에 거두어지는데, 왜 열이라는 숫자[十數]로 설하였는가? 한량없음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문】 열 가지 인연은 전후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동시[一時]인가?
【답】 전후가 있기도 하고, 전후가 없기도 하다. 알 수 있는 것은 문(門)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곧 전후가 있으며, 6상(相)9)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곧 전후가 없는 것이니 그 뜻은 무엇인가? 열 가지가 비록 다르지만 무아(無我)를 함께 이루기 때문이다.
『영락경(纓絡經)』10)의 열 가지 인연이 삼승의 뜻에 거두어지니 무슨 까닭인가? 가르침이 차별되어 같지 않음에 준거한 것이나 자세한 뜻은 『지론』에서 설한 것과 같다. 12인연설과 같이 나머지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법’은 예에 준거하면 알 수 있다.
둘째, 다라니법은 아래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셋째, 현상에 즉해서 법을 거두어들인다[卽事攝法]는 것은 인다라니(因陀羅尼)와 미세(微細)를 드러내기 때문이니, 자세한 뜻은 경과 같다.
넷째, 세간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였다는 것은 이른바 9세(世)를 말하는 것이니, 과거의 과거ㆍ과거의 현재ㆍ과거의 미래, 현재의 과거ㆍ현재의 현재ㆍ현재의 미래, 미래의 과거ㆍ미래의 현재ㆍ미래의 미래세이다. 삼세가 상즉(相卽)하고 상입(相入)해서 일념을 이루니, 총(總)과 별(別)을 합하여 밝히기 때문이다. 10세(世)가 일념이 된다는 것은 현상과 생각[事念]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다.
다섯째, 지위를 기준으로 했다는
것은 6상 방편으로 뜻에 따라 없어지고 생기니 이해할 수 있다. 6상이라는 것은 또한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문】 연기라는 한 마디 말 속에 모든 법은 둘이 아님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분명한데 어째서 많은 문(門)이 필요한 것인가?
【답】 체를 풀어놓은 것이 바로 이것이니, 먼 데서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음(婬)ㆍ노(怒)ㆍ치(癡)의 성품이 바로 보리이다”라고 하니, 이와 같은 것 등은 미혹됨이 지극히 먼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가르침의 일곱 가지 고제(苦諦) 이외에 따로 보리가 있어서 3무수겁(無數劫)에 설하신 대로 수행하면 득도(得度)할 수 있으니 미혹한 자를 위하여 많은 문을 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문】 만약 이와 같다면 법문(法門)이 헤아릴 수 없이 많거늘 왜 오직 6문만을 설했는가?
【답】 6문으로 설한 것은 모든 법을 예에 준거하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간략히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그 실은 말한 것처럼 여섯이 명연(冥然)하여 분별이 없는 것은 연기법의 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위에 준하여 생각할 수 있다.
둘째,11) 이타행 중에 나아가 해인(海印)이라는 것은 비유하여 이름한 것으로 무슨 뜻인가 하면, 큰 바다가 매우 깊고 밝고 맑아 바닥까지 훤하여, 천제(天帝: 제석천)가 아수라와 싸울 때 모든 군사와 일체 무기가 그 속에 나타나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마치 도장의 문자와 같기 때문에 해인이라 이름한 것이다. 능인삼매(能人三昧)도 또한 이와 같아서, 법성을 궁구하여 증득해보니 근원[源底]이 있지 않아서 마침내 청정하며 담연(湛然)하고 명백하니, 세 가지 종류의 세간이 그 가운데에 나타나므로 ‘해인’이라고 이름한다. ‘번(繁)’이라 한 것은 치성(熾盛)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출(出)’이라고 한 것은 솟아나옴이 끝없기 때문이다. ‘여의(如意)’라는 것은 비유에서 이름을 얻은 것이니, 여의보왕(如意寶王)이 무심(無心)히 보배를 비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하되 연을 따라 끝이 없는 것과 같다. 석가여래의 선교방편(善巧方便)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한 음성[一音]으로 펼쳐놓은 것이 중생계에 응하여 악을 멸하고 선을 생겨나게 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니, 어떤 쓰일 곳을 따르더라도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여의’라고 이름한 것이다.
셋째,12)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한 것에는 이 가운데 둘이 있으니, 첫 번째는 ‘수행의 방편’을 밝힌 것이요, 두 번째는 ‘이익 얻음’을 분별한 것이다. 첫째 문에서 ‘행자(行者)’라는 것은 일승 보법(一乘普法)을 보고 듣고[見聞] 난 뒤에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기 이전이 바로 이것이니, 이는 별교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만약 방편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5승(乘)이 모두 다 일승으로 들어가 거두어지니, 왜냐하면 일승에서 흘러나온 것[一乘所流]이며,
일승의 조목[一乘所目]이며, 일승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5승을 모두 거두어들이니 일승을 수행하는 자도 또한 얻는 것이다. 소류(所流)・소목(所目)이라는 것은 연기의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요, ‘방편’이라는 것은 지혜[智]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향해 나아가서 머무르지 않음을 ‘마음을 돌이키지 않음’이라 하지, ‘방편’이라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성자(聖者)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라 할 수도 있으니, 왜냐하면 선교방편으로 중생을 맞아 이끌기 때문이다. 5승의 설과 같이, 인법(人法)ㆍ인과(因果)ㆍ해행(解行)ㆍ이사(理事)ㆍ교의(敎義) 등 일체 모든 법도 예에 준거하면 이와 같다.
【문】 이른바 5승 등의 법은 능전(能詮)13)의 교법인가, 소전(所詮)14)의 의(義)인가?
【답】 능전과 소전의 일체 모든 법이 다 말[言] 속에 있으니, 그 뜻은 어떠한가? 소전의 법은 말의 상[言相]이 모두 끊어졌으나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는 대자비의 본원력(本願力)으로 하시기 때문이며, 모든 불가(佛家)의 법은 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언교(言敎)를 시설하여 중생을 위해 설한 것이다. 이러한 뜻 때문에 가르침의 그물[敎網]로 일체 모든 법을 거두어들임이 모두 다 말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이 다만 명자(名字)에 있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 뜻인 것이다.
【문】 ‘증득하게 하는 법은 말의 상으로는 미칠 수 없고, 말로 가르치는[言敎] 법은 현상[事] 속에 있다’는 것에서, 증득[證]과 가르침[敎]의 두 법은 항상 두 변(邊)의 허물이 있지 않는가?
【답】 만약 정(情)15)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면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은 항상 두 변에 있으나, 만약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은 예로부터 중도요, 하나여서 분별됨이 없다[一無分別]. 그러므로 변계(遍計)는 상이 없고[無相], 의타(依他)는 생겨남이 없으며[無生], 진실(眞實)은 성품이 없음[無性]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자성이 항상 중도에 있어서 세 가지 법 이외에 다시 증득과 가르침은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하나여서 분별됨이 없음을 마땅히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이 이치를 알기 때문에, 이름과 모양[名相]으로는 미칠 수 없으나 중생을 위해 설하기 때문에 “현상 속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여래께서는 불법(佛法)을 설함이 있지 않고 그 응하는 바를 따라 교화하셔서 법을 연설하신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그러므로 성자(聖者)가 변계를 따르기 때문에 세 가지 성품[三性]을 건립하여 우선 마음을 편안히 하고, 이후에 점점 세 가지 성품 없음[三無性]을 드러내어 꿈꾸는 사람을 깨우치니 이것이 바로 성자의 위대한 선교[大善巧]이다.
【문】 『섭론』16)에서, “변계소집(遍計所執)은 범부의 경계이고 의타(依他)・진실(眞實)은
성인의 지혜 경계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성자가 변계를 따르는가?
【답】 변계의 모든 법은 전도되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 이르기를 “범부의 경계가 필경에는 공하기 때문에 대할 수 있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논에서 성인의 경계가 아닌 것을 ‘공을 아는 것은 성인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비 방편으로 눈병을 따르기 때문에 허공꽃[空花]을 언설한 것이니, 어찌 가로막는 힐난이 있겠는가. 여기에 뜻이 있으니, 의타기상(依他起相)은 인연으로부터 생겨나서 자성이 있지 않고 두 변의 허물을 여의어서 무아(無我)와 같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평등한 법의 성품이 원융하여 이것과 저것을 분별할 수 없어서 예로부터 한 맛[一味]이니, 이러한 의미 때문에 분별이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 이르기를 “성인의 지혜 경계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만약 실(實)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면 세 가지 자성이 모두 범부의 경계이다. 왜냐하면 정(情)에 따라 현상[事]을 설하여 세 가지를 안립하였기 때문이다. 세 가지 자성이 곧바로 성인의 지혜 경계이니, 왜냐하면 지혜[智]를 따라 이치[理]를 드러내며 안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 가운데 또한 어떤 곳에서는 3성 이외에 따로 3무성을 세웠으니, 이유는 무엇인가? 정을 따라 안립한 것은 해문(解門)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따로 3무성을 세운 것이나, 지혜를 따라 이치를 드러낸 것은 행문(行門)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3성 이외에 3무성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히려 두 가지 성품 이외에 진실이 있지 않거늘, 하물며 3성 이외에 어찌 따로 3무성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상(無相) 등의 지혜가 앞에 나타나 궁극적으로 어떠한 법도 대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오직 중도(中道)에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모름지기 교를 세우는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문】 위에서 말한 증분(證分)의 법과 연기분(緣起分)의 법은 어떻게 다른가?
【답】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하니, 그 뜻은 무엇인가? 증분의 법은 실상(實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니 오직 증득하여 아는 것이고, 연기분의 법은 중생을 위해 설한 것이어서 연(緣)과 서로 응하므로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연기의 법은 뭇 연으로부터 생겨나므로 자성이 없으니 근본[本]과 차이나지 않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
【문】 만약 이와 같다면 스스로 증득한 것으로써 중생을 위하는 것이 지말[末]과 다르지 않아서 평범하게 차별되는 것인가?
【답】 또한 그런 뜻일 수도 있다. 만약 증득한 바가 말[言]에 있다면 지말과 다르지 않고, 언설(言說)이 증득에 있다면 근본과 다르지 않다. 근본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작용하되 항상 고요하고, 설하되 설하지 않는다. 지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고요하나 항상 작용하며 설하지 않고도 설하는 것이다. 설하지 않고도 설하기 때문에 설하지 않음이 곧 설하지 않음이 아니요, 설하되 설하지 않기 때문에 설함이 곧 설함이 아니다. 설함이 곧 설함이 아니기 때문에 설함을 얻을 수 없고, 설하지 않음이 곧 설하지 않음이 아니기 때문에 설하지 않음이 곧 설하지 않음이 아니어서17) 둘 다 얻을 수 없으므로 둘 다 서로 막지 않는다. 이러한 뜻 때문에 설함과 설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됨이 없으며, 생함과 생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됨이 없으며,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됨이 없다. 일체 차별의 서로 대하는 법문[相對法門]을 예에 준거하면 이와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일체 모든 법이 부처가 있건 부처가 없건 성(性)과 상(相)이 항상 머물러서 변하여 달라짐이 있지 않다”고 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또한 정설법(正說法) 중에서는 언설 이외에 다시 다른 뜻이 없어서 말[言]로 뜻[義]을 삼으며, 정의법(正義法) 가운데서는 정의(正義) 이외에 다시 다른 말이 없어서 뜻으로 말을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뜻으로 말을 삼기 때문에 말에 뜻 아님이 없고, 말로 뜻을 삼기 때문에 뜻에 말 아님이 없다. 뜻에 말 아님이 없기 때문에 뜻은 곧 뜻이 아니요, 말에 뜻 아님이 없기 때문에 말은 곧 말이 아니다. 말이 곧 말이 아니고 뜻이 곧 뜻이 아니기 때문에 둘 다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체 법이 본래 중도에 있으며, 중도라는 것은 말과 말 아님에 통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 말 가운데 있지 않으니 이름과 성품을 떠났기 때문이요, 언설의 법이 참된 성품[眞性]에 있지 않고 근기를 이익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근기를 이익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름에 참된 성품이 없고, 이름과 성품을 떠났기 때문에 이름하였으나 이름이 없다. 이름하였으나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름으로 실다움[實]을 구함에 실다움을 얻을 수 없고, 이름에 참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였으나 나[我]라고 할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이름하였으나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과 같은 까닭에 이름과 성품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뜻 때문에 둘 다 모두 얻을 수 없으니 오직 증득하여 아는 바이지, 그 밖의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이지, 나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 앞과 뒤의 두 뜻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앞의 뜻은 근본과 지말이 상즉(相卽)하고 상융(相融)하는 것으로 중도의 뜻을 드러내었고, 뒤의 뜻은 이름과 뜻이 서로 객(客)이 되는 것으로 무아(無我)의 뜻을 드러내었으니, 나타낸 도리는 다르지 않으나
능전(能詮)의 방편이 다른 것이다. 이는 곧 근본과 지말이 서로 바탕이 되고 이름과 뜻이 서로 객이 되는 것으로 중생을 인도하여 자체(自體)의 이름 없는 참된 근원에 이르게 한 것이니, 교화하는 주체[能化]와 교화되는 대상[所化]의 종요(宗要)가 여기에 있다.
【문】 이 뜻은 돈교종(頓敎宗)에 해당되는데 어째서 여기에서 설하는 것인가?
【답】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설함과 설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니, 왜냐하면 모두 실덕(實德)이기 때문에 방해하고 힐난함이 없다. 또한 분별을 돕기 때문에 삼승의 설을 따르니 대개 지혜로운 자의 뛰어나고 미묘한 능력이다.
위의 증분 및 연기분의 뜻은 논에서 의대(義大)와 교대(敎大)에 해당된다. 분별을 등지고 거슬러서 분별 없음을 얻는 것을 이름하여 ‘연(緣)이 없다’라 하고, 이치에 순하여 머물지 않기 때문에 선교(善巧)라 하며, 설한 대로 수행하여 성자(聖者)의 뜻을 얻기 때문에 ‘뜻대로 붙잡음[捉如意]’이라 이름하니 앞과 같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본성(本性)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집[家]’이란 무슨 뜻인가? 그늘을 드리워 덮는다는 뜻이며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니, 이른바 법성진공(法性眞空)은 깨달은 자가 머무는 곳이므로 집[宅]이라 하는 것이고, 대비선교(大悲善巧)로 중생에게 그늘을 드리워 덮음을 집[舍]이라 하는 것이다. 이 뜻은 삼승에 있는데 일승은 바야흐로 구경이 되니, 어째서 그러한가? 법계에 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계다라니가(法界陀羅尼家)와 인다라니가(因陀羅尼家)와 미세가(微細家) 등은 바로 성자가 의지하여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이 집[家]이라 하는 것이다.
‘분을 따른다[隨分]’는 것은 아직 가득 차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고, ‘자량(資糧)’이란 보리분(菩提分)을 돕기 때문이니, 『화엄경』의 「이세간품(離世間品)」에서 2천 가지 답 등이 이것이다.
【본문】 처음에 연기의 체라고 말한 것은……예에 준거하면 알 수 있다.
『대기』 ‘처음에 연기의 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일승이요, 다라니……’ 등은 연기의 체가 10보법(普法)에 통하지만 진성(眞性)이라고 말한 것은 오직 유정(有情)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문(門)’이란, 이하의 본문에서 이르기를 ‘지금은 우선 한 문을 기준으로 하여 연기의 뜻을 나타낸다’라 하고, 12지(支)를 기준으로 하여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문】 앞에서 행실만(行實滿)의 뜻으로 증분(證分)에 배대시킨 것은 어째서인가?
【답】 만약 어떤 수행자가 오직 증분에 의지하여 닦거나 오직 교분(敎分)에 의지하여 닦는다면 참다운 수행이 아니니, 화상의 뜻은 즉 증과 교를 함께 밟아 닦는 것이 참다운 수행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증만(證滿)의 뜻으로 연기분에 배대시킨 것은 어째서인가?
【답】 총상이 갖춘 법을 보일 때에 그 별상이 열리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증분 가운데 만족한 법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며, 진성을 분별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법기』 ‘우선 한 문을 기준으로 하여 연기의 뜻을 나타낸다’는 것은 진성을 가리킨 것이다.
【문】 무슨 까닭에 법성(法性)을 풀이하지 않고 곧바로 진성을 분별하는가?
【답】 저 증분을 가리켜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성인께서 중생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비유하면 취한 사람이 뜨락에서 항아리를 보고 귀신이라 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중생이 12유지(有支)18)에 미혹되어 곧 깊고 깊은 진성의 체를 허망분별하여 생사의 법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위대한 성인께서 대비심을 일으켜 그에게 12유지가 곧 이 깊고 깊은 진성의 체임을 알게 하기 때문에 ‘모든 유정에게 현상은 곧 없는 것임을 알게 해서 현상에 즉하여 이치를 회통한다’라고 한 것이다.
【문】 위대한 성인은 항아리와 귀신을 꿰뚫어 보는가?
【답】 그러하다. 이하의 본문에서 이르기를 ‘성인은 눈병을 따르기 때문에 허공꽃[空花]을 언설하셨으니 어찌 가로막는 힐난이 있으리오’라고 하였으니, 꿰뚫어 봄을 알 수 있다.
‘논에서 자상이라고 한 것은……’ 등에서, 자상이란 자신(自身)을 가리키는 것이고, 보상이라는 것은 오직 색일 때에는 이 보(報)가 아니요 오직 마음[心]일 때에도 역시 이 보가 아니니, 이 마음이 부정색(不淨色)을 품을 때를 기준으로 하여 보상으로 삼은 것이다. 명색이란 색이 아닌 4음(陰)이 상(相) 없이 어둡고 넓어서 이름이 아니면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명’이라 한 것이요, 색의 상[色相]은 거칠기 때문에 당체(當體)를 ‘색’이라 한 것이다. 또 해석하면 오직 마음일 때에는 이름을 세울 수 없고, 오직 색일 때에도 역시 이름을 세울 수 없으므로 다만 이 마음이 부정색(不淨色)의 첫 찰나를 잡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지목해서 사람의 몸이라 하며, 지목해서 말의 몸이라 하니, 그러므로 명색이라고 한 것이다.
‘아리야식(阿梨耶識: 아뢰야식)과 함께19) 생긴다’는 것은, 생을 구하는 중유(中有)가 장차 종자로 아리야식에 숨어 있다가 태어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자루에 물건을 가득 넣고 물 속으로도 가고 불 속으로도 가듯이 뜻대로 간다. 본식은 밭과 같고 무명과 행은 종자를 뿌리는 것과 같으니, 뿌려진 종자는 5과(果)를 낳는 종자이다. 애(愛)와 취(取) 두 지(支)는 흙과 물 같고, 그 유(有)의 지(支)는 능히 생노사(生老死)의 업을 낳으니 그 생노사가 바로 생겨난 과(果)이다.
【문】 5과(果)는 종자인가?
耶【답】 5과는 종자가 아니요, 다만 능히 다섯 종류를 낳는 종자이다.
【문】 5과의 종자는 무엇인가?
【답】 뇌야식 가운데 세 가지 성품 종자[三性種]이다. 이 종자는 세 번째 식(識)의 지(支) 자리에 있으니, 이 종자가 합쳐져 식이 되는 것이다.
‘삼계의 땅에 다시 싹이 자라난다’는 것은, 바로 모든 성인이 매우 깊은 대비의 근심을 가장 잘 일으킨 곳이다. ‘다시’라는 것은 갔다가 다시 오는 것이니, 갔다가 다시 오기 때문에 ‘다시’라고 한 것이다.
‘피인상(彼因相)이란’에서 ‘피인’은 뇌야식이고, ‘상’은 명색(名色)이다.
‘피과차제상(彼果次第相)이란’에서, 여기에는 여섯 지(支)가 있다.
‘이 둘은 공을 보인 것이요’라는 것은 색을 기준으로 하여 미루어 보면 색에는 병고(病苦)가 없고, 마음을 기준으로 하여 미루어 보면 마음에도 병고가 없으니, 이와 같이 아무런 지각(知覺)이 없기 때문에 자체 무아(無我)인 것이다.
‘중생수가 아니다’라는 것은, 색과 마음이 합쳐져 바야흐로 곳곳에서 생을 받으니, 만약 색과 마음이 떨어져 다만 색일 때에는 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중생수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곧 실성(實性)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의 티끌도 자성이 없어서 일체 법으로 자성을 삼기 때문에 어떠한 한 법도 하나의 티끌의 성품이 아닌 것이 없으니, ‘실성을 이룬다’라고 한 것이다. 이 티끌이 곧 해인의 체이기 때문에 ‘실성’이라고 한 것이다.
‘세제를 수순하여 관하면……’ 등은, 마치 물 속에 여러 상(像)이 거두어들여지는 것은 바로 자리(自利)이기 때문에 진제(眞諦)가 되고, 물이 도로 상을 나타냄은 바로 이타(利他)이기 때문에 속제가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약 세속을 따르면 곧 진(眞)에 들어갈 수 있으니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밖으로 향한 뜻이 속제의 12인연이 되기 때문에 세제를 수순해 관하는 것이 곧 제일의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탐현기』20) 둘째, 모든 고(苦)를 구족함에는 셋이 있으니, 첫째는 12연(緣)의 상을 나타낸 것이요, 둘째 ‘이와 같이’ 아래는 고취(苦聚)를 묶어서 이룬 것이며, 셋째 ‘이 가운데’ 아래는 연의 체가 공함을 밝혀서 유(有)가 바로 전도된 것임을 드러내었다.
논에서 앞의 첫째 단 안에 앞의 3지(支)가 합쳐져 한 부분이 되고, 둘째로 ‘삼계에서’ 아래는 뒤의 9지(支)를 밝힌 것이다. 그 중에 논주가 나누어 세 개의 상(相)으로 삼았으니 첫째는 자상(自相)이요, 둘째는 동상(同相)이요, 셋째는 전도상(顚倒相)이다. 해석에 두 문이 있으니 첫 번째는 분위(分位)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두 번째는 수의(隨義)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앞에서21) ‘자상’이란 이른바 현재 인연의 체의 상태[體狀]를 밝히기 때문이요, 둘째, ‘동상’이란 이른바 미래 인연이 현재와 같기 때문이다. 이치로는 실로 현재에도 또한 생로(生老) 등이 있고, 미래에도 또한 식(識)ㆍ명색(名色) 등이 있으나 지금은 분위를 기준으로 하여 상을 나누었기 때문에 두 가지 상을 세운 것이다. 셋째, ‘전도’라는 것은 연(緣)의 체가 실은 공함을 나타낸 것이요, 유(有)에 집착함이 바로 전도임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수의를 기준으로 하면, 첫 번째 종인(從因)을 기준으로 하여 미세한 행상(行相)을 낳는 것이 바로 연기의 자상이다. 두 번째 과상(果相)을 기준으로 하여 연기의 허물과 근심이 과위(果位)에 두루 통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동상’이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연(緣)에는 실로 아(我)가 없는데 망령되게 취하여 전도된 것이다.
【문】 동상 가운데 두 지(支)는 한편으로는 과(果)요 한편으로는 현행(現行)이며, 자상의 일곱 지(支)는 현과(現果)가 되고 인종(因種)이 되니, 설령 그렇다 하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동시에 존재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종을 취한다면 삼계의 땅에 싹을 틔운다고 말할 수 없고, 만약 현과를 취한다면 곧 저 앞의 넷은 ‘……자라난다’ 등과 다르지 않으며 뒤의 셋은 다시 생긴 과에 거두어지지 않을 것이다.
【답】 이것 등이 모두 과위(果位)의 생함을 나타냄에 도리어 인명(因名)을 말하여 자상(自相)을 나타낸 것이다. 자상의 일곱 지(支) 안에 대해서 논을 나누면 셋이 된다.
첫째, 보상이니, ‘명색이 아뢰야식과 함께 생긴다’는 것은 이른바 명색지(名色支) 중에 어떤 뜻이 일체 명언종자(名言種子)를 통틀어 거두니, 아뢰야는 곧 식지(識支)이다. 통틀어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잡집론』 제4에 의지하여 업의 종자로 식지를 삼았기 때문에 식의 종자를 이끎에 따라 명지(名支)의 거둠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앞의 세 지(支)를 한 곳에서 해석한 것이니, 함께 이끄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본식의 종자로 식지를 삼은 것이니, 여기에서 식의 종자와 명색 등의 종자가 업에 감응해서 힘을 이끌어 보태기 때문에 이 종자를 일으켜서 고과(苦果)를 낳는 것이다. 셋째는 현행하는 제8식이 또한 이 식지이니, 그러므로 이 가운데 인상(因相)을 ‘명색이 본식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이것은 식과 함께 생긴 것이고, 명색이 생기고 나면 현행하는 제8식에 의지하여 저것에 집착하게[執持] 되기 때문에 인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치로는 실로 여기에서 식 등의 다섯 종자가 앞의 훈습을 말미암아 발하여 함께 하나하나 모두 생기니,
다만 앞으로 일어날 분위(分位)에 의지하여 차제(次第)가 있기 때문에 앞뒤가 되는 것을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과차제상이라 이름한 것이다. 애(愛)ㆍ취(取)ㆍ유(有) 셋은 비록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생기는 바로 그 때에 이것을 갖추기 때문에 『유식론』에서 “‘생함과 이끎이 동시이다’라고 하니 바로 이 뜻이다”(云云)라고 하였다. 이는 본식이 의지하는 것[能依]과 화합함을 밝혀 보상이라 이름한 것이다.
둘째, 능의(能依)는 체가 없어서 소의(所依)에 따라 있기 때문에 이 식을 인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셋째, 능의의 상(相)이 다하고 오직 소의가 바뀌어서[轉轉] 저 위(位)에 들어감을 과(果)라고 이름하니, 또한 본식이 전변해서 이 과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점차로 줄어서 나머지 상이 모두 다하고 오직 식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상은 시교(始敎)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만약 종교(終敎)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 본식이 바로 여래장이니, 처음은 즉 염(染)과 화합하고, 다음은 염법(染法)이 진(眞)에 의지하고, 마지막은 염이 진과 다르지 않으므로 오직 진이 전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연……’ 이하는 고취(苦聚)를 매듭지은 것이다.
‘이 중에는 아(我)가 없으니……’ 이하는 전도된 상을 나타낸 것이니, 모두 논의 해석과 같다.
『관사십이인연관(觀師十二因緣觀)』 12인연은 바로 생사의 큰 나무[大樹]이며, 또한 생사의 큰 강물[大河]이니, 어째서 나무라 이름하는가? 세간의 나무가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사귀ㆍ꽃ㆍ열매가 있어서 끊임없이[相續] 생기는 것과 같으니, 12인연도 또한 이와 같아서 과거에 두 인(因)이 있으니 그것을 뿌리라고 한다. 두 인이란 첫째는 무명지(無明支)요, 둘째는 행지(行支)이다. 현재에 5과(果)가 있으니, 5과란 첫째 식지(識支)요, 둘째 명색지(名色支)요, 셋째 6입지(入支)요, 넷째 촉지(觸支)요, 다섯째 수지(受支)이다. 현재에 3인(因)이 있으니, 3인이란 첫째 애지(愛支)요, 둘째 취지(取支)요, 셋째 유지(有支)이다. 미래에 2보(報)가 있으니, 2보란 첫째 생지(生支)요, 둘째 노사지(老死支)이다.
과거상의 인 가운데 첫째 무명지는 이른바 과거의 일체 번뇌를 무명지라 하고, 또한 연(緣)을 요달하지 못한 것을 무명이라 이름한다. 둘째 행지라는 것은, 이른바 일체 신(身)ㆍ구(口)ㆍ의(意)의 선하고 악한 등의 업을 모두 다 행이라 이름한다. 무명 때문에 행을 발하여 생하니 무명과 행 두 가지가 바로 과거의
두 인이다. 행이란 생사의 업이다. 이 두 가지가 현재의 5과를 감응하기 때문에 뿌리[根]라고 한 것이다.
현재의 5과 중에 첫째, 식지는 과거의 행업이 있음으로 현재의 식신(識神)을 발하여 일으키는 것이니, 처음 생명을 받을 때에 태에 드는 한 찰나[一念]의 마음을 식이라고 이름한다. 둘째, 명색지라는 것은 생명을 받은 식[受生識]이 있기 때문에 명색을 발하여 일으킨다. 명색은 5온(蘊)이니, 이른바 제2찰나[念] 이후의 마음이다. 부모의 붉고 흰 정혈(精血)이 화합하여 백 일이 지날 때까지 모든 포(包)가 아직 열리지 않았으니 다만 이것은 고기 덩어리요, 아직 눈ㆍ귀ㆍ코ㆍ혀의 모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다만 색심(色心)만이 있기 때문에 명색이라 한다. 셋째, 6입지란 명색을 말미암아 6입을 발하여 생하니, 6입이란 6근(根)이 식도(識道)를 통하여 생하기 때문에 6입이 된다. 이것은 이른바 태내에서 백 일이 지난 것이다. 고기 덩어리 안에서 업이 생기는 바람을 일으켜 고기 덩어리에 불어 열어서 펼쳐 모든 근의 모습을 변하도록 지음을 6입지라 한다. 넷째, 촉지라는 것은 6입으로 말미암아 근(根)ㆍ진(塵)ㆍ식(識) 등이 발생하고, 세 가지 것이 화합하여 촉대(觸對)함을 촉이라 한다. 이것은 태에서 나온 이후 2년간이다. 아직 다른 진(塵)을 분별하지 못하고 다만 배고프고, 목마르며, 덥고, 추운 것만을 알 수 있는 것이니, 불을 만지거나 독(毒)에 닿으면 곧 큰 소리로 우는 것을 촉지라 한다. 다섯째, 수지라는 것은 대상[境]을 촉대하여 수(受)를 일으키니, 받아들임[領納]을 수라 한다. 이것은 이른바 2년 후에 마음이 점점 여러 진(塵)을 분별하여, 대여섯 해까지를 수지라 한다. 이 다섯 지(支)가 과거의 두 인을 수답[酬]하는 것을 현재의 5과라고 하니, 세간의 나무가 나무의 몸[樹身]이 생기면 반드시 큰 가지와 작은 가지, 꽃과 열매가 생기는 것처럼 애ㆍ취ㆍ유의 세 인이 다시 미래의 생로병사라는 2보(報)를 초감한다.
현재의 세 인 가운데 첫째 애지(愛支)라는 것은, 받아들임을 말미암아 애를 발생하고 연(緣)에 대해 염(染)을 일으킴을 애라 한다. 이것은 이른바 일곱 해 이후로 열다섯 해까지 꽃을 사랑하고 열매를 탐하여 마음이 욕구를 추구하는 것을 애라고 한다. 둘째, 취지(取支)라는
것은 염애(染愛)를 말미암아서 취를 발생하니 연(緣)에 물들어 들어가서 집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취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 유지(有支)라는 것은 취착(取着)함을 말미암아 유를 발생하니 신ㆍ구ㆍ의의 조작으로 능히 미래의 유를 불러와서 미래의 과로 지목하여 현재의 세 인이 되기 때문에 유라고 한다. 이것은 이른바 그 취하는 대상에 따라서 재(財)ㆍ색(色)ㆍ살(殺)ㆍ도(盜)ㆍ사음(邪淫)을 취득하여 손에 넣어 본심(本心)에 칭합해 따르는 것이니, 많은 사유가 업을 이루어 당래의 과가 있음을 유지라고 한다. 꽃이 열매를 맺음에 이 꽃이 뒤의 열매를 생함을 다시 이름하여 인(因)이라 하는 것과 같아서, 이미 그 인이 있으면 미래의 2보(報)를 초감하는 것이다. 2보란 첫째 생지(生支)이니, 현재에 발기함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생을 받도록 함이 있으므로 법에서 처음 일어남을 생이라 이름한다. 둘째 노사지(老死支)란, 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노사를 일으키니 생이 바로 노사의 연이기 때문에 생을 연하여 노사가 된다. 이 두 지(支)는 후에 생기는 과이니, 과가 다시 인이 되어 인과 과가 서로 낳는 것이 마치 큰 나무와 같은 것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12인연에 떴다 가라앉고 윤회하여 생사를 따르고 쫓으며 삼계의 뇌옥(牢獄)에 왕래하며 고통을 받음이 끝이 없어 마치 세간의 강물이 떴다 가라앉는 것과 서로 비슷하다. 범부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가 요달하면 곧 흐름을 쫓지 말고 도를 닦아 끊어 버려야 곧 벗어나 여읠 수 있는 것이다. 무릇 12인연이란 생사에 얽매인 인연이니, 반드시 이 인연을 멸해야만 이내 생사를 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에서, “무명이 멸하면 곧 행이 멸하고, 나아가 생이 멸하면 곧 노사가 멸하니, 이 인연을 멸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도를 닦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문】 도를 닦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 12인연의 근본을 추구해 보면 바로 무명이니, 무명으로 인하여 번뇌의 업을 일으키고, 업으로 인하여 과보를 일으키며, 과보가 있기 때문에 고(苦)가 있다. 그러므로 모두 무명으로 인한 것이 근본이 되고 생사윤회하여 삼세를 분리함이 마치 나무와 같고 강물과 같다. 지혜로운 자는 요달해 알아서 그 뿌리를 베어 버리고 그 근원을 끊고자 하니, 나무를 벨 때 먼저 그
뿌리를 베고, 또한 물을 끊을 때 먼저 그 근원을 끊는 것과 같다. 지금 12인연의 나무와 강물을 베어 버리고 끊고자 한다면 먼저 무명을 끊어야 한다.
【문】 무명이란 무엇인가?
【답】 깨닫지 못한 마음[不覺心]이 이것이니,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망령되게 분별을 일으켜서 마음 밖에서 경계를 보고는 ‘있다’ 하고 ‘없다’ 하며, ‘옳다’ 하고 ‘그르다’ 하며, ‘얻었다’ 하고 ‘잃었다’ 하니, 모든 과보법의 신심(身心) 등의 고(苦)가 모두 바로 무명의 힘이다. 내가 이제 무명을 끊고자 한다면 먼저 반드시 스스로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야 하니, 마음을 따라 일으킨 일체의 망상은 모두 깨닫지 못한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문】 이제 모름지기 자기 마음의 본성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하거늘, 어떻게 일체의 망념을 알 수 있겠는가?
【답】 홀연히 망령되게 일어나니 깨달으면 생기지 않는다.
【문】 무엇을 깨달음[覺]이라 하는가?
【답】 만약 탐ㆍ진ㆍ치가 일어날 때 도리어 자기의 마음으로 관찰하고 헤아려서 이 탐ㆍ진ㆍ치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지 추구한다면, 푸른가, 누런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안ㆍ밖ㆍ중간 어디에 있는가? 탐ㆍ진ㆍ치를 추구해 보면 형상이 전혀 없다. 만약 탐ㆍ진ㆍ치가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면 오늘 깨달을 때에 또한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하지만, 지금 깨달으니 곧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홀연히 망령되게 일어나고 깨달으면 생하지 않으니, 따라서 깨달음이 바로 무명의 대치(對治)이다. 이 깨달음이 나타나 있으면 무명이 마음에 있을 수 없으니, 무명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망상과 번뇌가 생기지 않고, 번뇌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업이 생기지 않고, 업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두 인이 없고, 두 인이 없기 때문에 현재의 다섯 과가 생기지 않고, 다섯 과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애ㆍ취ㆍ유의 세 인이 생기지 않고, 세 인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두 보가 생기지 않음을 ‘12인연의 큰 나무를 자른다’, ‘12인연의 큰 강물을 말린다’라고 이름한다. 이 12인연이 없는 곳을 열반이라 하고, 이 스스로 깨달은 성스러운 지혜를 보리라 한다.
『진기』 ‘위대한 성인께서 중생을 거두어 이치에 계합하여 현상을 버리게 하고자 하나……’라는 것에서, 이것은 동교(同敎)의 뜻을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 첫째로 보상(報相)은 여래장이 염(染)과 화합하여 명색(名色)의 보(報)를 이루니, 마치 큰 바닷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가 이는 것과 같다. 둘째로 피인상(彼因相)은 일으킨 명색이 곧 이 여래장진식(如來藏眞識)이니, 일으킨 파도가 바로 물인 것과 같다. 셋째로 피과차제상(彼果次第相)이라는 것은, 저 일으킨 과는 다른 사물이 있지 않고 오직 하나의 진실된 마음이 회전(廻轉)된 것이니, 마치 차별된 각각의 파도는 오직 하나의 바닷물이 회전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 ‘아(我)와 아소(我所)를 여읜다’는 것은 오직 하나의 진실된 마음의 체요, 다른 사물이 있지 않은데 어느 것이 아며, 어느 것이 아소인가?
‘중생수가 아니다’라는 것은, 마치 흐르는 물이 항상 흘러 끊어지지 않아서 싫증나거나 버릴 때가 없는 것과 같으니, 무념(無念)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생사에 유전하여 단절됨이 없는 것은 다만 자체가 무아임을 말미암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그러므로 ‘중생수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뇌야가 미세하여’라는 것에서, 뇌야는 곧 여래장이기 때문이다.
‘곧 실성을 이룬다’라는 것은,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여래장실성(如來藏實性)이라 말할 것이요,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매우 깊은 진성(眞性)이라 말할 것이니, 아래에서 이 뜻이 삼승에 있다고 하였으나 또한 일승에 통하기 때문이다.
『고기』 임 대덕이 당에 들어가 융순(融順) 화상을 만났는데, 묻기를 “일승 중에 뇌야를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니, 순 화상이 말하기를 “일체 모든 법이 모두 뇌야로 근본을 삼으니, 넓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간략히 하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백정무기식(白淨無記識)이니 3성(性)의 종자를 가지고 있고, 둘째는 아마라식(阿摩羅識)이니 항사(恒沙)의 덕을 가지고 있으며, 셋째는 성기식(性起識)이니 10보법(普法)을 가지고 있고, 넷째는 법계안립식(法界安立識)이니 세 가지 세간법을 가지고 있으며, 다섯째는 법계인다라식(法界因陀羅識)이니 다함없는 인다라니법을 가지고 있어서 온 법계의 유위이며, 온 법계의 무위이기 때문에 ‘뇌야가 선(善) 등의 3성 및 무위와 함께 집기(集記)한다’라고 한 것이다.
『법기』 이른바 ‘인연유분차제(因緣有分次第)’란 것에서, ‘인연’이란 12지인연(支因緣)이고, ‘유’는 3유22)를 말하며, ‘분’이라는 것은 12지(支)로 구별됨을 말하고, ‘차제’라는 것은 처음의 무명지(無明支)로부터 맨 끝의 노사지(老死支)까지를 말한다.
‘일심(一心)에 거두어진 것’에서 ‘일심’이라는 것은 거두는 것[能攝]이요, 거두어지는 것[所攝]은
바로 12인연이다.
‘자신의 업을 이룬다’는 것은 다른 삿된 원인을 가려내고 자신의 불법 가운데 소연의(疎緣義)를 가려내지 않은 것이다. 앞의 문(門)에서 ‘12인연은 바로 한 마음이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의심이 있을까 두려워 ‘오직 한 마음의 지음이요 연(緣)을 기다리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업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12인연을 지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않는다’는 것은 앞의 지(支)가 뒤의 지를 여의지 않고, 뒤의 지가 앞의 지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앞 문에서 자신의 인(因)이 생기는 가운데 증상연(增上緣)이 12연을 이루는 뜻을 나타내었고, 이 관(觀)에서 자신의 인이 생기는 가운데 인연이 12연을 이루는 뜻을 나타내었다.
‘3도(道)를 끊지 않는다’는 것은 3도를 끊지 않기 때문에 12지(支)가 서로 여의지 않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선후제(先後際)를 관한다’는 것은 앞 문에서 3도를 끊지 않는다는 것이 과거의 무명으로 현재의 5과(果)를 생하고 현재의 3인(因)으로 미래의 노사(老死)를 생하기 때문이다.
‘3고(苦)를 모은다’는 것은 3제(際)의 인으로 이 3고를 구족한 몸을 얻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 관(觀)은 인이 얻은 과를 취하여 세운 것이요 능생(能生)의 인을 취한 것은 아니다.
‘인연으로 생겨난다’는 것에서, 인연은 바로 속제가 의지하는 것이다. ‘생겨난다’는 것은 생겨난 과법이다. 인연의 가깝고 멀게 치우친 힘을 깨뜨려서 전력으로 과를 낳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인연으로 생멸함에 묶여 있다’는 것은 속제가 의지하는 것을 거듭 든 것이다. ‘생’이라는 것은 생한 과법이요, ‘멸’이라는 것은 인연으로 생긴 과의 힘을 여읜다는 뜻이다. ‘묶인다’는 것은 묶임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른바 생은 곧 멸에 묶임을 따르고 멸은 곧 생에 묶임을 따르므로, 화상이 이르기를 “생(生)은 옆이 없는[無側] 생이니 이러한 생이 곧 무생(無生)이요, 멸은 옆이 없는 멸이니 이러한 멸이 곧 무멸(無滅)이다. 이 두 가지 무이(無二)가 바로 생멸을 만족하는 것이다. 멸로 생을 묶을 때에 생은 비록 멸이 아니지만 또한 멸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새끼줄로 두 사람을 묶을 때 비록 서로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또한 합쳐져 한 몸이 되지는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곧 부분적인 비유[分喩]요 만족한 비유[滿喩]는 아니다. 이 중에 생과 멸은 곧 오늘날에도 쓰이는 법이니, 앞에 나타난 것으로 생을 삼고 본래 나지 않음으로 멸을 삼는다. 그러므로 멸로 생을 묶으면 멸은 바로 묶는 주체가 되고 생은 묶이는 대상이 되며, 생으로 멸을 묶어도 또한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이 관(觀)은 앞의 온 힘으로
과를 생한다는 뜻을 파하여서 무력(無力)ㆍ무생(無生)한 연의 자질로 과법을 낳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또 이르기를, “‘마음의 미혹됨’이라는 것은 세간ㆍ출세간 마음의 번뇌이니, 세간법에 미혹한 것을 세간심의 번뇌라 하고, 출세간법에 미혹한 것을 출세간심의 번뇌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더욱 집착해서 집착한 법에 대해 그 이치와 현상을 미혹한 것을 인(人)과 법(法)의 두 아집이라 이름한다. 이 두 아집은 앞의 여덟 번째 관으로 다스리고 미혹한 마음은 이 관 가운데서 다스린다”라고 하였다.
‘유진관(有盡觀)을 수순한다’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무슨 까닭에 이 성기문(性起門) 중에서 앞의 ‘연기문의 무력ㆍ무생의 연이 공(空)한 과(果)를 낳는다’는 뜻으로 다스릴 대상을 삼았는가?
【답】 성기문 가운데 공(空)과 유(有)를 함께 나타내기 때문에 앞 문의 공에 치우친 집착을 다스리는 것이다.
‘열 가지가 비록 다르나 함께 무아를 이룬다’는 것은 일승 가운데 해인(海印)의 체로써 무아를 삼는 것이다.
‘12인연의 설과 같으니, 나머지 연(緣)으로 생겨난 모든 법은 예에 준거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위에서부터 곧바로 법성을 나타내었으나 근기가 증득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쳐서 ‘진성(眞性)’이라 하였고, 연기의 체를 가리켜서 장차 익히도록 하고자 우선 중생의 12지(支)를 기준으로 해서 열 가지 관으로 가리켜 보였기 때문에 나머지 일체 법도 또한 그렇게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르치고 타이르기 때문에 ‘예에 준거하면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진기』 만약 별교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간략히 10문을 설한다면, 앞에서 논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세제를 수순하여 관해서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동교라고 하였는데, 지금 곧바로 열 가지[番]의 뜻을 판별하기 때문에 ‘만약 별교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등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열 가지로 하나의 무명지(無明支)를 관하면 곧 3세간(世間)을 갖추어서 하나의 무명지의 체(體)를 이루기 때문에 허물과 근심을 움직이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성(性)이 중도에 있는 법이다. 하나의 무명과 같고 나아가 노사(老死) 등도 모두 또한 그러하다.
【문】 관하는 대상[所觀]이 이와 같다면, 관하는 주체[能觀]는 어떠한가?
【답】 관하는 주체도 또한 그러하니, 처음 하나의 인연유분(因緣有分) 중에 나머지 아홉을 모두 거두고 나머지 아홉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비록 각기 나머지 아홉을 거두나 첫 번째는 곧 유분의 차제(有分次第)를 관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곧 10종 성기심(性起心)을 관하고, 나아가 여덟 번째는 인연, 아홉 번째는 연기(緣起), 열 번째는 성기(性起)이니, 이와 같이 문(門)이 차별된 것이다.
【문】 『영락경(瓔珞經)』의 열 가지가 『화엄경』의 열 가지와 어떻게 다른가?
【답】 『영락경』의 열 가지는 한 법계의 체를 그린 것이고, 이 경의 열 가지는 곧 무진법계를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에 준하면 차별되어 같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대기』 진정(眞定) 대덕이 열 가지 중에서 세 가지 생멸로 풀이하였으니, 이른바 앞의 일곱은 변계생멸(遍計生滅)이요, 여덟 번째는 인연생멸(因緣生滅)이요, 뒤의 둘은 도리생멸(道理生滅)이다.
임 대덕[林德]은 네 가지 생멸로 풀이하였으니, 이른바 앞에는 인연생멸이요, 아홉 번째는 연기생멸(緣起生滅)이요, 열 번째는 성기생멸(性起生滅)이요, 정(情)을 뛰어넘은 견처(見處)는 무주생멸(無住生滅)이다.
훈 대덕[訓德]은 다섯 가지 생멸로 풀이하였으니, 이른바 중간의 다섯 관(觀)은 곧 변계생멸이요, 여덟 번째는 인연생멸이요, 아홉 번째는 연기생멸이요, 열 번째는 성기생멸이요, 처음의 두 관은 무주생멸이다.
이제 훈 대덕의 뜻에 의지하여 풀이하면, 곧 무주생멸 가운데 두 번째 관(觀)의 후반(後半)은 무주의 체이고, 처음 관과 두 번째 관의 초반(初半)은 바로 무주의 지위이니, 그 12연(緣)의 모양 등으로 무주 별교 가운데 22위(位)로 삼기 때문이다.
『청량제육지소(淸凉第六地疏)』 이제 경문 안에 간략히 10중(重)을 나타내어 성상(性相)을 궁구하여 무진(無盡)을 나타내었으니, 오직 기댄 지위가 2승과 같은 것은 아니다. 10중이라고 말한 것은, 첫째 유지상속(有支相續)이요, 둘째 섭귀일심(攝歸一心)이요, 셋째 자업조성(自業助成)이요, 넷째 불상사리(不相捨離)요, 다섯째 삼도부단(三道不斷)이요, 여섯째 삼제윤회(三際輪廻)요, 일곱째 삼고집성(三苦集成)이요, 여덟째 인연생멸(因緣生滅)이요, 아홉째 생멸계박(生滅繫縛)이요, 열째 수순무소유진(隨順無所有盡)이다. 각각 역(逆)과 순(順)이 있어서 이십을 이루기 때문에 아래의 경에서 이르기를, “이와 같이 역과 순으로 관찰하니, 역은 연(緣)이 멸하고 순은 연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기에서 3관(觀)을 논한다’는 것은, 첫째 상제차별관(相諦差別觀)이요, 둘째 대비수순관(大悲隨順觀)이요, 셋째 일체상지관(一切相智觀)이다. 첫째는 단지 2제(諦)의 유위(有爲)를 관하여 아(我)가 없기 때문에 곧 대비위수관(大悲爲首觀)이요, 둘째는 비(悲)가 사물을 따라 늘어나니 곧 대비증상관(大悲增上觀)이요, 셋째는 인연의 성상(性相)을 자세히 궁구하는 데 즉하여 모든 문을 관하기
때문에 곧 대비만족관(大悲滿足觀)이다. 처음의 하나는 아래 2승의 일체지와 같다. 다음 하나는 자현보살(自現菩薩)의 도상지(道相智)요, 뒤는 곧 위의 모든 부처의 일체종지(一切種智)와 같다. 그러므로 『열반경』에 이르기를, “12인연을 하지(下智)로 관하기 때문에 성문의 보리를 얻고, 중지(中智)로 관하기 때문에 연각의 보리를 얻으며, 상지(上智)로 관하기 때문에 보살의 보리를 얻고, 상상지(上上智)로 관하기 때문에 부처의 보리를 얻는다”고 하였다. 처음 두 보리는 첫 번째 관의 의미요, 나머지 둘은 각각 하나씩이니, 알 수 있다. 앞은 사물됨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셋 모두 비(悲)라 칭하였고, 지금은 마음을 관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셋 모두 지관(智觀)이다. 이는 세 구절이 각각 비(悲)와 지(智)로 서로 인도함이 있어서 이 세 관을 융합하여 오직 한마음에 있음을 아는 것이니, 깊고 깊은 반야가 이에 나타나는 것이다.
『탐현기』에 이르기를, “무엇이 10관(觀)인가? 첫째 인연분차제(因緣分次第)요……열째 수순무소유진(隨順無所有盡)이니, 그 가운데 각각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기 때문에 20문(門)이 있다. 이른바 순관은 대비(大悲)이니 열반에 머물지 않고, 역관은 대지(大智)이니 생사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도에 머물지 않음[不住道]’이라 한다……첫째 인연분차제 중에 바로 유지(有支)가 무아임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첫 번째는 아(我)가 있다고 거꾸로 집착하여 망령되게 연(緣)을 일으킴을 밝힌 부분이고, 두 번째는 모든 진리[諦]의 이치에 미혹하여 연을 일으키는 차제를 밝힌 것이다. 처음에 셋이 있으니, 첫째 아(我)가 없음을 판정한 것이요, 둘째 미혹되어 연기를 이루는 것이요, 셋째……. 처음에 두 구(句)가 있으니, 첫째 ‘세간에서 몸을 받음은 모두 아(我)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라고 말한 것은 미혹된 정(情)을 반대로 들어서 아가 이치에 어긋남을 밝혔다. 만약 아에 이치가 있다면 아에 집착함이 순리라서 마땅히 세간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데 이미 세간에 태어났으니 아에는 이치가 없음이 분명하다. 둘째 ‘만약 아에 집착함을 여의면 곧 태어남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는 마음[解心]을 따라서 들어 이치에는 아가 없음을 밝혔다. 만약 이치에 아가 있다면 아를 여읨이 이치를 어기는 것이어서 마땅히 세간에 태어나야 할 것인데 이미 세간을 벗어났으니 이치에는 아가 없음이 분명하다. 둘째23) 이 아가 없음에 미혹하여 저 유지(有支)를 일으킴을 밝혔으니, 그 가운데 먼저는 연기를 좇아서 관하였고[順觀], 뒤에서는 무아를 거슬러 관하였다[逆觀]……”라고 하였다.
둘째24) 일심이 거둔 것 중에서 ‘삼계는 허망하니 오직 일심이 지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한 문장을 여러 논이 함께 인용하여 유식을 이룸을 증명하니, 지금 여기서 말한 것은 어떠한 마음이며 어떻게 이름 지을 것인가?
이제 이 뜻을 해석하는 데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 의지하여 여러 문으로 설하였으니, 첫 번째는 상(相)과 견(見)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유식을 설하였고, 두 번째는 상을 거두어 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유식을 설하였으며, 세 번째는 수(數)25)를 거두어 왕(王)26)으로 돌아가기 때문에……네 번째는 지말로써 근본에 돌아가는 것이요, 다섯 번째는 상을 거두어 성(性)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여섯 번째는 진(眞)을 전변하여 사(事)를 이루는 것이요, 일곱 번째는 이(理)와 사(事)를 모두 융섭하는 것이요, 여덟 번째는 사를 융섭해서 상입(相入)하는 것이요, 아홉 번째는 사를 온전히 해서 상즉(相卽)하는 것이요, 열 번째는 제석천 그물망의 걸림 없음이다. 이 가운데 처음 셋은 초교(初敎)를 기준으로 하여 설하였고, 그 다음 넷은 종교(終敎)와 돈교(頓敎)를 기준으로 하여 설하였으며, 뒤의 셋은 원교(圓敎) 가운데 별교(別敎)를 기준으로 하여 설해서 총체적으로 10문(門)을 갖추었으며, 동교(同敎)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면…….
셋째27) 자신의 업을 도와 이루는 것 중에는, 이 12지(支)에 모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 번째는 스스로 행하는 모습[自行相]을 밝힌 것이요, 두 번째는 뒤의 작용을 도와 이루는 것이니 이른바 연(緣) 중에 어리석음의 번뇌는 바로 무명 자상(自相)이요, 행과 더불어 인(因)을 짓는 것은 바로 업을 도와 이루는 것이다.
넷째28)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않음 중에서, 앞은 뒤를 일으키므로 뒤를 여의면 앞이 없고, 뒤는 앞에 의지하여 일어나므로 앞을 여의면 뒤가 없으니,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각각 자성(自性)이 없고 자성 없이 연기하므로 허깨비처럼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다섯째29) 3도(道)를 끊지 않음 중에서, 정의(淨意)보살의 『십이연론(十二緣論)』에 이르기를 “번뇌는 첫 번째와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요, 업(業)은 두 번째와 열 번째요, 나머지 일곱은 고(苦)를 설하였으니 세 가지가 열둘을 다 거둔다. 셋을 따라서 둘을 낳고, 둘을 따라서 일곱을 낳으며, 일곱을 따라 다시 셋을 낳으니, 그러므로 수레바퀴가 도는 것과 같다. 일체 세간법이 오직 인과(因果)뿐이요 사람은 없으니, 다만 공한 법을 따라서 다시 공한 법을 낳는다”라고 하였다. 해석하면, 이것은 3도가 서로 낳음을 밝혀서 2무아30)를 나타낸 것이다.
여섯째31) 먼저와 나중을 분별하는 가운데, 이 12지(支)에서 처음의 둘은 이끄는 주체이고, 그 다음 다섯은 바로 이끌리는 대상이며, 그 다음 셋은 바로 생하는 주체요, 뒤의 둘은 바로 생기는 것이니……. 첫째, 이 경에 의지하여 이끄는 주체와 대상을 열어서 먼저[先際]와 중간[中際]을 나누고 생하는 주체와 대상을 합하여 모두 나중[後際]으로 삼으니, 먼 것을 끌어왔기 때문에 열었고 가까운 데서 나왔기 때문에 합한 것이다.
일곱째32) 3고(苦)를 분별하는 가운데 두 문(門)이 있는데, 첫 번째는 이실변통문(理實遍通門)이요……두 번째는 수상증현문(隨相增現門)이니, 이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른바 처음 5지(支)는 천류(遷流)하는 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행고(行苦)라 칭하고, 촉(觸)과 수(受) 두 가지는 서로 닿고
대하여 고(苦)를 낳기 때문에 고고(苦苦)라 하며, 나머지 괴고(壞苦)가 되는 것은 다만 즐거움을 무너뜨려 괴고라 하였다. 노사지(老死支)는 이미 무너뜨릴 수 있는 즐거움이 없거늘, 무슨 까닭에 괴고라 하는가? 해석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즐거움이 무너지는 것이 고가 되는 것은 무너지는 대상에 대한 설이요, 두 번째는 무너짐이 바로 고이기 때문에 괴고라고 하였으니, 이 노사지가 무너짐을 낳기 때문에 괴고에 속하는 것이다.
여덟째33) 인연이 생기는 가운데서, 이실무명(理實無明)이 행에 대해서 인연의 뜻이 없으나 ‘인연이 행을 낳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자종(自種)이 인이 되고 무명이 연이 되어 합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하였으나, 저 직접적인 종자[種]를 숨기고 이 뛰어난 연을 나타내기 때문에 ‘무명인연’이라 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다만 저 증상연(增上緣)으로 자증상과(自增上果)에 대해서 도리어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무명이 행의 인연이 된다고 설하였으니 나머지도 또한 이와 같다. 과는 스스로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인연을 따르나 인연이 형탈(形奪)하여 다시 각각 성품이 없어짐을 밝히고자 하였으니, 그러므로 ‘인연이 생하여 이에 생함이 없음을 나타낸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순관(順觀)일 뿐이며, 역관(逆觀)은 한 번 없어져서 생인지 불생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심오한 관찰에서 뒤의 세 문을 거두어서 합하여 네 구(句)를 이루니, 첫째는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님이요, 둘째는 다른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이며, 셋째는 함께 생기는 것이 아님이요, 넷째는 인(因)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님인 것이다. 이 네 구를 풀이함에 여러 논이 같지 않으니, 간략히 하면 다섯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외도를 파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 풀이이니, 이른바 모든 법이 명제(冥諦)34)의 자성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하는 것이요, 범천ㆍ자재천 등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한다. 또한 미진(微塵)의 대종(大種)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하며, 또한 인(因) 없이 자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승을 깨뜨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른바 모든 법이 반드시 자기의 동류인(同類因)35)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하는 것이요, 반드시 이숙인(異熟因)36)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하는 것이다. 또 저것이 반드시 구유인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함께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하고, 소승에서 무명지(無明支) 전에 바르지 못한 사유로 허공에 맡겨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니 흡사 인이 없는 듯하나 이제 또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이 없음을 여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법이 공(空)함을 나타내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과가 스스로 일어나지 않음을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하고, 자신이 이미 서지 못하였으니 누구를 대하여 다른 것을 판별할 것이며, 또한 다른 것 역시 각각 모두 자신을 이루지 않으니 어찌 다른 것에서 생긴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다른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하는 것이며, 자신[自]과 다른 것[他]의 인과가 이미 각각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함께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하고, 인연을 떠나 밖에 따로 과법(果法)이 없기 때문에 ‘인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한다. 이상의 세 가지는 『반야등론(般若燈論)』과 『중론(中論)』 등의 설과 같다. 네 번째는 인연형탈(因緣形奪)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대법론(對法論)』에 이르기를 “자기의 종자가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따르지 않고, 뭇 연(緣)을 기다리기 때문에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며, 작용이 없기 때문에 함께 생기지 않는 것이요,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에 인(因)이 없지 않으니, 모든 연기가 두 구(句)를 쌍으로 헤아림[双土]37)도 매우 깊은 것인데, 하물며 네 구를 총체적으로 헤아림[摠土]38)이겠는가. 그러므로 연기가 가장 지극히 깊은 것이다. 다섯 번째는 연기무애문(緣起無礙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다만 인연이 과를 낳으나 인과 연은 서로에 대해서 각각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온전히 힘이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온전히 힘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인은 과에 대해서 온전히 생하지 않음이 있고, 연은 반드시 온전히 생하기 때문에 ‘인은 생하지 않으니, 연이 생하기 때문이다’라 하였고, 연은 과에 대해서 또한 온전히 생하지 않고 인은 반드시 생하기 때문에 ‘연은 생하지 않으니, 자기의 인이 생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두 힘이 동시가 아니기 때문에 ‘함께 생하지 않는다’라 하였고, 두 힘이 없음도 또한 동시가 아니기 때문에 ‘인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다.
이 문(門)39)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힘에 근거하면 있음과 있지 않음의 뜻을 갖추기 때문에 상입(相入)하게 하나, 이른바 인이 힘이 있을 때에는 연은 반드시 힘이 없다. 그러므로 인에 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능히 다른 것을 거두고, 연에 힘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능히 다른 것에 들어가니, 저 연의 힘을 모아서 한 데 합쳐 인의 힘으로 돌아감을 ‘다른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 한다. 비록 ‘다른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이라고 말하지만 도리어 ‘스스로 생겨남’을 나타내며, 인의 힘이 연으로 돌아감에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님’도 또한 그러하니, 앞에 것을 뒤집어서 생각하라. ‘두 가지 힘’과 ‘두 가지 힘 없음’이 각각 동시가 아니기 때문에 저것이 상입하지 않음이 없고, ‘한 가지 힘’과 ‘한 가지 힘 없음’이 서로 돌아가기 때문에 언제나 상입하며, 서로 장애하지 않아서 증상연(增上緣)이 넓기 때문에 일체 모든 법이 상입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십인품(十忍品)」40)에 이르기를 “보살이 연기법을 잘 관찰하여 한 법[一法] 가운데서 무수히 많은 법[衆多法]을 이해하고 무수히 많은 법 가운데서 한 법을 이해하는 것은
진실로 이 문을 말미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둘째는 체(體)에 근거하면 공(空)과 불공(不空)의 뜻이 있기 때문에 상즉(相卽)이 있으니, 이른바 인의 힘이 곧바로 연으로 돌아가 그 상입을 밝히는 것이 아니요, 또한 인의 체가 연을 말미암아 인의 성품이 공함을 나타내며 연을 거두어 함께 하니, 어째서인가? 만약 연이 없음이 곧 인이 없음이기 때문에 과를 낳는 것을 인이라 한다면, 연이 없으면 과가 생기지 않으니 이 때는 인이라 이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인이 저 연으로 모여 돌아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님’이 됨을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연이 있다는 의미라서 거두지 않음이 없고 인은 바로 ‘공’의 의미라서 받아 거두지 않음이 없으니, 인은 받아 거두기 때문에 자기를 폐(廢)하고 연과 함께 하고 연은 거두기 때문에 인을 거두어 자기와 함께 한다. 나머지 인이 거두고 연이 받는 것 등은 아울러 준하여 생각하면 알 것이다. 이 뜻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이 상즉하며 장애되는 것이 없으니, 위의 경문에서 ‘하나가 곧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곧 하나임을 알아서’라고 한 것 등이 모두 이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함없는 대연기법(大緣起法)은 걸림 없이 자재하여 모두 이 문(門)을 좇아서 열고 나타난 것이다.
아홉째41) 인연에 묶임을 설하는 가운데서, 인연이 묶임을 낳는다는 것은 이른바 이 연기가 서로서로 묶어 두어서 낳음이라 할 수 없고, 이 묶임 때문에 또 멸함도 아니니, ‘묶는다’는 한 글자로 이 법의 체를 도장 찍어 모든 분별을 여읜 것이다. 그러나 이 연기가 묶는다는 상(相)을 또한 여의어서 말에 기대어 나타냈기 때문에 ‘묶는다’라고 말하였으니, 이 묶임이 다만 말 가운데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이 문은 연기법이 사상(事相)이 다해감에 이치의 성품이 장차 드러나는 지극히 미묘한 곳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기를 “세제를 수순해 관하여 곧 제일의제에 들어간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문이다.
열째42) 있는 바가 없음을 다함 가운데서, 이 유지(有支)가 허상이며 이미 다함에, 있는 바가 없음을 수순하여 제일의(第一義)를 궤뚫어 밝혔으니, 이는 속제를 무너뜨리지 않고도 항상 진제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무명의 인연으로 모든 행이 생기니 이것이 있는 바가 없음을 수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명이 행을 낳는 것은 바로 있는 바를 따르는 것인데, 무슨 까닭에 있는 바가 없음을 따른다고 말하는가?
【답】 “앞의 모든 문을 올라타고 차례대로 여기에 이르러 저 무명이 행을 낳는 바로 그 때에 곧 생함이 없음을 따라 이치에 들어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무슨 까닭에 경에서는 ‘없음을 따른다’ 하고 논에서는
‘있음을 따른다’고 하였는가? 경의 뜻을 풀이하면 연으로 이치에 돌아간다는 설이고, 논의 뜻은 성(性)으로 상(相)을 좇는다는 설이니, 각각 다른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렇게 설한 것이다……첫째 유지행렬(有支行列)이요, 둘째 섭귀일심(攝歸一心)이요, 셋째 역용상생(力用相生)이요, 넷째 전후상속(前後相屬)이요, 다섯째 삼도윤환(三道輪環)이요, 여섯째 삼제인과(三際因果)요, 일곱째 삼고과실(三苦過失)이요, 여덟째 종인무성(從因無性)이요, 아홉째 사유약무(似有若無)요, 열째 민동평등(泯同平等)이니, 앞의 열 가지에 배대하여 묶으면 문장에 나타난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현기(搜玄記)』 첫째는 인연분차제관(因緣分次第觀)으로 아견(我見)에 집착함을 다스리고……둘째는 의지일심관(依止一心觀)으로 저 바깥 경계가 자성(自性)이라 집착함을 다스리며……셋째는 자인관(自因觀)으로 인연을 다르게 계교하는 집착을 다스리고, 넷째는 불사리관(不捨離觀)으로 인과가 때가 다르다고 계교함을 다스리며, 다섯째는 삼도관(三道觀)으로 인연의 현상을 폐하고 이치만 계교하는 집착을 다스리고, 여섯째는 삼제관(三際觀)으로 인(因)이 없다는 집착을 다스리며, 일곱째는 삼고관(三苦觀)으로 즐겁고 깨끗하다는 집착을 다스리고, 여덟째는 인연관(因緣觀)으로 하나의 인(因)이 힘이 있어 과(果)를 낳음을 다스린다……인연으로 생하는 이치는, 인에는 결정적인 작용이 있고 연에는 과를 일으키는 공능이 있어서 바야흐로 법을 낳을 수 있으니, 만약 다만 인의 힘뿐이고 연이 과를 일으키는 공능이 없다면 그 인의 여섯 가지 뜻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또 소승에 의지하면 6인(因)43)과 4연(緣)44)이요, 만약 삼승에 의지하면 곧 10인(因)45)과 12인 등이요, 만약 일승에 의지하면 곧 법을 따라 인을 변별하니 하나하나의 인연이 되고, 이치와 현상이 각각 다르니 법계와 더불어 동등하다. 이제 여섯 가지 인(因)의 뜻은 오직 일승만이 궁구할 수 있으니, 이것은 별교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아홉째는 인연생멸박관(因緣生滅縛觀)이니, 이 아래의 두 관은 다만 마음의 번뇌를 다스린다. 통하는 뜻은 알 수 있으니, 이른바 인연의 공통된 힘으로 과를 초감한다는 집착이다……앞의 ‘인연이 과를 낳는다’는 것에서 ‘낳음[生]’의 의미는 바로 ‘늘어난다[增]’는 것이요, ‘공(空)’의 의미는 미세함이라는 것이니, 인연법이 미혹을 따라서 생하고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제 연박법(緣縛法)에서 ‘공’의 의미는 바로 ‘늘어남’이요, 힘을 낳는다는 뜻은 미세함이니 연기법은 무분별지를 따라 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의 경에서 이르기를 “연기법은 유와 무를 여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비록 힘을 낳지는 않지만 ‘공’의 뜻을 이루기 때문에 자성을 여의고서 생하는 것이니,
경에서 “머무름이 없음[無住]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열째는 무소유진관(無所有盡觀)이니, 다스릴 바가 마음의 번뇌에 국한되며 또한 모든 사(使)46)에도 통할 수 있어서 속제를 통틀어 거두기 때문에 인연에 집착함이 되니, 다만 속제의 상에 응함이 있고 자체의 공한 의미가 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모든 연생법(緣生法)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그만이지만 일어난다면 쌍으로 나타나니, 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 물을 보면 마르고 습함이 아울러 나타나는 것과 같으며, 또 거울에 모습이 더럽고 깨끗함이 쌍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바로 바른 이치이다.
【문】 그 나타난 공이 진제인가, 속제인가? 또 이 관법이 앞의 ‘연으로 생함’과 ‘묶임을 낳는다’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답】 인연 및 묶임은 오직 유(有)를 따라서 이루어지고, 지금의 열 번째 관은 공과 유를 모두 따르며, 또 이 공과 유가 모두 속제이다. 진제와 속제를 밝힘에 여기에는 많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체와 상을 상대하는 것[體相相對]이요, 둘째는 공과 유를 상대한 것[空有相對]이다. 이와 같이 진제와 속제를 나눔에 그 뜻이 하나가 아니니, 만약 공과 유로 진제와 속제를 나눈다면, 유는 곧 속제가 되고 공은 곧 진제가 되니 증득한 지혜47)로 알 바이다. 만약 체와 상을 상대하면 공과 유를 서로 논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속제가 공과 유에 통하니, 이 공은 바로 자체가 공한 것이요 현상이 공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기를 “이 마음의 진여상이 마하연(摩訶衍)의 체를 보이기 때문이다”48)라고 하였으니, 비록 진여이지만 이름이 있는 세속상을 얻으면 체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곧 공과 유가 함께 하나의 상이 되는 것이니, 연으로 본성을 따르는 이치와 현상으로 이 관의 체를 삼기 때문이다.
위의 경문에서 “12연으로 생함이 바로 무위(無爲)이다”라고 하였으니, 열 가지 관이 또한 서로 순서를 낳음이 있어서, 모든 허망한 과실을 알기 위함 때문에 첫째가 있다. 이미 망령됨을 인식한 뒤에는 아직 망령된 법이 무엇에 의지하여 생하는지 알지 못하므로 둘째가 있다. 의지하는 바를 인식하여 알지만, 아직 어떤 이치가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셋째가 있다. 이미 생하는 이치를 알았지만 어느 때를 의지하는지 알지 못하므로 넷째가 있다. 때를 인식하여 알았으나 어느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알지 못하므로 다섯째를 밝혔다. 그 뜻을 알고 나면 어떤 본말이 있는가? 그러므로 여섯째가 있으며, 본말을 알고 난 뒤에 어떤 허물이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일곱째가 있다.
그 허물을 알고 난 뒤에는 어떤 현상을 짝하여 이루어지는가? 그러므로 여덟째가 있다. 이루어짐을 알고 난 뒤에는 어떤 상(相)이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아홉째가 있다. 상을 알고 나면 의심하여 ‘이치에 어긋난다’고 하므로 열째가 있는 것이니, 경에 의지하여 열로 묶음을 마친다.
『추혈기(錐穴記)』의 열 번째 관에서 이르기를 “이는 곧 인연이 자신의 진여[自如]에서 다한 것이니, 이는 곧 속제가 분별의 끝을 여읜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가는 곳은 최초의 거친 어리석음으로 전도된 곳이니, 곧 이 깊고 깊은 법이 하나를 듦에 따라 일체를 다 거두므로 다함없는 자재한 연기법이 바로 10수(數)의 나타난 바이며 보법연기(普法緣起)의 도리이다”라고 하였다.
【본문】 연기라는 한 마디에……분별이 없다.
『대기』 ‘연기라는 한 마디에……어째서 많은 문(門)이 필요한가’라고 한 것 등에서, 이 질문을 일으킨 의미는 처음에 진성(眞性)을 나타내서 연기의 체를 보이니, 곧 분별이 없는 이치가 이미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분명하게 나타나거늘[現了手], 어찌하여 번거롭게 다시 중즉(中卽) 등의 많은 문(門)을 설하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답은 놓아둠[縱]과 빼앗음[奪]을 갖추니, 경문에 나타난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 어찌 여섯 문을 해석하지 않고 문답하는가?
【답】 여섯 번째 문은 위의 뜻을 모아서 묶기 때문이며, 다섯 문을 해석함에 그 뜻이 이미 다하기 때문이다.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분명하다[了手]’는 것은 일이 끝났다는 말이다.
『법기』 ‘음(婬)ㆍ노(怒)ㆍ치(癡)의 성품이 바로 보리’라는 것에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다만 물을 써서 물건을 깨끗하게 하는지는 알지만, 물을 깨끗하게 하는지 더럽게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라 하였으니,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른바 물을 깨끗이 하고자 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돌을 거두어 낸다면 물은 깨끗해질 수 없고 흙과 돌을 움직이지 않아야 물은 비로소 스스로 깨끗해지니, 자기의 마음을 깨끗이 하려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3독(毒)49)의 번뇌를 끊어 없애고자 한다면 마음은 깨끗해질 수 없고, 3독이 움직이지 않아야 마음은 저절로 청정해진다. 그러므로 승열(勝熱) 바라문 선지식의 처소에 가서 치법문(癡法門)을 받으면 곧 안주조명(安住照明)을 얻고, 만족왕(滿足王) 선지식을 만나 진법문(瞋法門)을 받으면 곧 안락삼매(安樂三昧)를 얻으며, 파수밀(婆須密) 선지식을 만나 탐법문(貪法門)을 받으면 곧 욕심을 여읜 실제[離欲實際]를 얻는 것이다.
『탐현방편명지식소(探玄方便命知識疏)』 이와 같은 반대의 도[反道]가 위아래의 문장 가운데 모두 세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이 지위가 사견(邪見)과 같은 것이요, 두 번째는 만족왕이 성냄[瞋恚]과 같은 것이며, 세 번째는 파수밀은 탐애(貪愛)와 같은 것이니,
그러므로 3독(毒)의 상(相)에 아울러 정법(正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 상을 만나면 곧 공[當相卽空]이니 그러므로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서 이르기를 “탐욕이 곧 도요 성냄과 어리석음[恚癡]도 또한 그러하니, 이 세 가지 일 중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법이 있다”라고 하였다. 해석하면, 이것은 공에 즉함이 바로 불법(佛法)임을 말하는 것이지, 현상[事]이 곧 불법은 아닌 것이다. 둘째, 공교하게 중생을 거두어 설함이 불법이 됨을 말하는 것이지,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유마경』50)에서 “먼저 욕심으로 잡는[拘] 것을 ‘에워싼다[牽]’고 하니, 뒤에 불지(佛智) 등에 들어가게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 번뇌가 중생을 적시는 것을 정지하여 보살도를 길러 설함에 불법이 있는 것이지,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은 아니니, 『유마경』에서 “일체 번뇌가 여래의 종자가 된다”51)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 상을 만나면 곧 이것이니 앞의 셋과는 같지 않다.
『법기』 일곱 가지 고제(苦諦)라는 것은 일곱 가지 생사(生死)이니, 이른바 분단(分段)52)에 셋이 있고 변역(變易)53)에 넷이 있다.
분단의 셋은 바로 삼계(三界)이고, 변역의 넷은 첫째 방편생사(方便生死)요, 둘째 인연생사(因緣生死)요, 셋째 유유생사(有有生死)요, 넷째 무유생사(無有生死)이다.
『법상공섭론소(法常公攝論疏)』 첫째 방편생사는 곧 무명으로 연(緣)을 삼아 생사를 초감하니 친인(親因)이 아니기 때문에 ‘방편’이라 칭하는 것이다.
둘째 인연생사는 곧 무루업(無漏業)으로 인(因)을 삼아 생사를 초감하니 친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인연’이라 이름한 것이다.
셋째 유유는 곧 앞의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생(生)을 초감하는 과(果)가 있으니, 이 과가 있기 때문에 ‘유유’라 이름한 것이다.
넷째 무유는 곧 노사지(老死支)이니 그 보(報)를 다 끊고는 뒤에 다시 과(果)가 있지 않기 때문에 ‘무유’라 이름한 것이다.
『청량연의(淸凉演義)』『무상의경(無上依經)』에 이르기를 “아라한과 벽지불과 대지보살이 네 가지 장애가 되어 여래법신의 4덕(德)을 얻지 못하니, 첫 번째는 생연감(生緣感)이요, 두 번째는 생인감(生因感)이요, 세 번째는 유유(有有)요, 네 번째는 무유(無有)이다”라고 하였으니, 무엇이 생연감인가? 곧 이 무명이 머무는 상태[無明住地]가 일체 행을 낳으니 무명이 업을 낳는 것과 같다. 무엇이 생인감인가?
이 무명주지가 낳은 모든 행이, 비유하면 무명이 낳은 모든 업과 같은 것이다. 무엇이 유유인가? 무명주지에 연(緣)하고 무명주지를 인(因)해서 일으킨 무루행이 세 가지 의생신(意生身)54)을 일으키니, 비유하면 4취(取)55)가 연이 되고 세 유루업이 인이 되어 세 가지 유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무엇이 무유인가? 세 가지 의생신을 연하여 미세타멸(微細墮滅)을 깨달아 알 수 없으니, 비유하면 3유(有)56)에서 태어남을 연하여 생각생각에 늙고 죽는 것과 같다……삼계 중에 네 가지 어려움[四難]이 있으니, 첫째 번뇌난(煩惱難)이요, 둘째 업난(業難)이요, 셋째 생보난(生報難)이요, 넷째 과실난(過失難)이다. 무명주지에서 일으킨 방편생사는 삼계 안의 번뇌난과 같고, 무명주지에서 일으킨 인연생사는 삼계 안의 업난과 같으며, 무명주지에서 일으킨 유유생사는 삼계 안의 생보난과 같고, 무명주지에서 일으킨 무유생사는 삼계 안의 과실난과 같다.
『법기』 ‘분별이 없다’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각각 ‘불상즉(不相卽)’ 등의 네 구를 합쳐 취하여 이르는 것인가?
【답】 그러하다. 이른바 앞의 세 구는 즉문(卽門)이기 때문에 체문(體門)이요, ‘불상즉’ 구는 중문(中門)이기 때문에 지위가 움직이지 않는 문인 것이니, 지위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바야흐로 서로 들어갈[相入] 수 있어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상즉’의 뜻을 합쳐 취하여서 ‘명연하여 분별함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본문】 비유로 이름을 얻음……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다.
『대기』 ‘해인이라는 것은 비유로 이름을 얻은 것이다’라는 것은, 아수라[修羅]와 제석(帝釋)이 서로 싸울 때, 모든 병구(兵具) 등이 밝고 맑은 바다 가운데 나타난다는 뜻으로 그 3독(毒)의 상을 맞아 움직이지 않음[當相不動]을 비유하였으니, 곧 이 ‘안으로 증득한[內證]’ 해인의 궁극적인 법체이기 때문이다.
『고기(古記)』 운화 존자(雲華尊者)57)가 이르기를 “오직 『화엄경』에서 설한 법만이 해인정(海印定)에 의지하여 일어났다”라 하니, 이 때에 지적 국통(智積國統)이 힐문하여 말하기를 “『대집경』에
‘염부제 일체 중생의 신(身) 및 외색(外色)과 이와 같은 색상(色相)이 바다 속에 모두 인상(印相)이 있는 것과 같아, 이러한 까닭에 대해(大海)라 이름하여 인(印)으로 삼는 것이다.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 대해인삼매(大海印三昧)를 얻으면 일체 중생의 심행(心行)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즉 아래의 네 가지 교법(敎法)도 또한 해인정(海印定)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거늘, 무슨 까닭에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운화 존자가 대답하기를 “해인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삼대아승기겁(三大阿僧祇劫) 동안 닦은 제석이 법공수미산(法空須彌山) 꼭대기에 올라가 소지장아수라(所知障阿修羅)와 싸움을 벌일 때에 3과(科)58) 백법(百法)59)의 상(像)이 대원경지해(大圓鏡智海) 속의 해인에서 나타난다. 둘째는 불가수겁(不可數劫) 동안 닦은 제석이 본각(本覺)수미의 꼭대기에 올라가 근본무명(根本無明)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에 항하의 모래수 같이 많은 성공덕[性德]의 상(像)이 일심진여해(一心眞如海)의 해인에 나타나는 것이다. 셋째는 한 생각도 내지 않는[一念不生] 제석이 일행삼매(一行三昧)수미의 꼭대기에 올라가 망상(妄想)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에 상(相)도 없고 분별도 없는 상(像)이 불이실상해(不二實相海)의 해인에 나타나는 것이다. 넷째는 이불찰미진수겁(二佛刹微塵數劫) 동안 닦은 제석이 총상(總相)수미의 꼭대기에 올라가 변계(遍計)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에 열 가지 보법(普法)의 상(像)이 세계해(世界海)의 해인에 나타나는 것이다. 다섯째는 십불(十佛)의 제석이 법성(法性)수미의 꼭대기에 올라가 무주실상(無住實相)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에 3종세간60)의 상(像)이 국토해(國土海)의 해인에 나타나는 것이다”(이상)라고 하였다.
이 다섯 가지 중에 앞의 셋은 차례대로 시교ㆍ종교ㆍ돈교이며, 뒤의 둘은 차례대로 외화(外化)와 내증(內證)이다. 여기에 논(論)을 더하여 인해인(因海印)을 기준으로 하면 마땅히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보현의 제석이 해행(解行)수미의 꼭대기에 올라가 백장(百障)아수라와 서로 싸울 때에 다함 없는 보법의 상(像)이 정광파려경(錠光玻瓈鏡)의 해인에 나타난다. 만약 앞의 세 가지 뜻을 기준으로 하면 삼승이 분(分)에 따라서 또한 해인을 논하니, ‘
삼승은 모두 해인정 밖에서 설한 것이다’라는 말은 일승 해인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청량석해인(淸凉釋海印)』 열 가지 뜻으로 풀이하여 다함 없는 작용을 표하니, 첫째는 무심이 나타난다는 뜻[無心能現義]이요, 둘째는 나타낼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뜻[現無所現義]이요, 셋째는 나타나는 주체[能現]와 나타나는 대상[所現]이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요, 넷째는 다르지 않다는 뜻[非異義]이요, 다섯째는 가고 옴이 없다는 뜻[無去來義]이요, 여섯째는 넓고 크다는 뜻[廣大義]이요, 일곱째는 널리 나타난다는 뜻[普現義]이요, 여덟째는 갑자기 나타난다는 뜻[頓現義]이요, 아홉째는 항상 나타난다는 뜻[常現義]이요, 열째는 나타남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뜻[非現現義]이다.
『대기』 ‘여의(如意)라는 것은 비유로부터 이름을 얻은 것이니……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다’ 등은, 마치 여의주왕(如意珠王)을 복덕(福德)이 없는 사람이 얻으면 변하여 독사가 되어서 도리어 그 사람을 해치고, 만약 복덕이 있는 사람이 얻으면 그의 뜻에 따라 즐거워 다함 없는 보배를 비내려서 탐내는 사람에게 널리 베푸는 것과 같다. 일승보법(一乘普法)의 의리(義理)도 또한 그러하여, 만약 원만한 믿음이 없는 하열한 근기가 들으면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여 의심을 내고 비방을 일으키며 도리어 악도에 떨어져서 끝없는 고(苦)를 받지만, 만약 큰마음 바른 믿음이 있는 사람이 들으면 듣자마자 믿어서 곧 일승의 성품에 칭합하는[一乘稱性] 이익을 얻어 널리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여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본문】 일승을 보고 듣고…… 5승의 설과 같다.
『대기』 ‘행자(行者)’라는 것에서, 이른바 일승을 보고 보법(普法)에 올라탄 이후에 아직 원증(圓證) 보법 등을 만족히 하지 못한 자는 만약 무주 별교(無住別敎)를 기준으로 한다면 ‘보고 들음[見門]’이 곧 원증이나, 지금은 기댄 지위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일승을 보고 듣고……아직 원증 보법 등을 만족히 하지 못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고기(古記)』 3생(生)61)에 여러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報)를 기준으로 하면 과거에 보고 듣고[見聞], 현재에 이해하고 행하며[解行], 미래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證入]이요, 둘째는 계(界)를 기준으로 하면 계 안[界內]에서 보고 듣고, 세간을 벗어나 법을 얻으며[出世得法],
출세간에서도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는 것[出出世證成]이다. 또 계 안은 견문과 해행에 통하고, 세간을 벗어나 법을 얻으며 출세간에서도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셋째는 자분(自分)의 승진(勝進)을 기준으로 하면 10신(信) 이전에 보고 듣고, 10신에서 이해하고 행이며, 10신 만심(滿心)에서 승진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요, 넷째는 신해증장문(信解增長門)을 기준으로 하면 10신에서 보고 듣고, 3현(賢)에서 이해하고 행하며, 10지(地)에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다섯째는 비증(比證)을 기준으로 하면 초지 전[地前]에서 보고 듣고, 초지(初地)에서부터 7지(地)까지는 이해하고 행하며, 8지 이상에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여섯째는 일승과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4지에서 보고 듣고, 5지ㆍ6지ㆍ7지에서 이해하고 행하며, 8지에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일곱째는 5승(乘)을 기준으로 하여 문(門)을 일승의 뜻에 배대하면 8지에서 보고 듣고, 9지에서 이해하고 행하며, 제10지에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여덟째는 선지식[知識]을 기준으로 하면 문수는 보고 들음이 되고, 덕운(德雲) 이후는 이해하고 행함이며, 미륵이 이르기를 “마땅히 와서 나를 보아라”라고 한 것은 깨달아 들어감이 되며, 또 보현선지식은 과해를 증득함[證果海]이 된다.
『지통기(智通記)』 【문】 견문(見聞) 등의 세 지위는 보법의 바른 지위[普法正位]인가?
【답】 아니다. 다만 삼승을 좇아서 이렇게 설하였을 뿐이지, 만약 보법의 바른 법이라면 지위[位]도 없고 지위 아님도 없으니, 일체의 6도(道) 삼계 법계 법문(法門)이 보법 정위 아님이 없다. 또 한 지위[一位]가 일체 지위[一切位]요, 일체 지위가 한 지위이다. 위법문(位法門)과 같이 일체 행(行)ㆍ교의(敎義) 등의 법문도 또한 그러하니 생각할 수 있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보법에서는 무엇으로 시작을 삼는가?
【답】 하나의 법문(法門)을 얻어 시작[始]으로 삼으니, 이는 곧 끝[終]과 다름이 없다.
『대종지현문론(大宗地玄文論)』 ‘순서를 건너뛰지 않고 점차로 옮겨가는 지위’라는 것은, 게송에서 이르기를 “51위에서 차례대로 건너뜀 없이 옮겨가 하나에 일체를 갖춤을 ‘점차로 옮겨가는 지위’라 한다”라고 하였다. 논의 해석에서 말하기를 “오직 한 행자(行者)는 51종 별상위(別相位)에서 그 차례대로 뛰어넘는 법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남김이 없는 구경에서 모두 모아 지니는 지위’라는 것은, 게송에서 “51위 중에 그 앞을 따라 들어가서 일체의 일체를 거둠을 ‘남김이 없는 구경’이라 이름한다”라고 말하였다.
논의 해석에서 말하기를 “51위의 별상 중에 혹 어떤 행자는 믿음으로써 향해 들어가고[趣入], 혹 어떤 행자는 진여지(眞如地)로써 향해 들어가며, 혹 어떤 행자는 대극지(大極地)로써 향해 들어가고…… 등이니, 앞을 따라 들어가 일체의 일체 계위와 지위[位地]를 다 거두어 구경에 남김이 없어서 또한 이전(移轉)함이 없으며, 또한 나고 듦이 없으니 하나하나가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주위에 두루하여 원만 광대한 지위’라는 것은, 게송에서 “51종의 지위가 앞뒤 없이 동시이고, 함께 옮기고 함께 행하기 때문에 ‘주위에 두루하여 원만함’이라 이름한다”라고 말하였다. 논의 해석에서 말하기를, “51위가 앞뒤가 있지 않아서 동시이고, 함께 옮기고 함께 행하여 남는 것이 있지 않으며, 또한 51별상위 중에 있는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위가 앞뒤가 있지 않고 동시에 함께 옮기며 동시에 함께 행하여 멋대로 옮겨서 향함이 없는 도인이다”라고 하였다.
‘일체 모든 법이 함께 지위가 아니다’라는 것은, 게송에서 “모든 한량없고 가없는 일체 갖가지 지위가 모두 건립되는 것이 아님을 ‘함께 지위가 아니다’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논의 해석에서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닌 등이니……그 ‘아니다’라는 뜻으로 세워서 지위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일체 모든 법이 함께 지위이다’라는 것은, 게송에서 “일체 갖가지 법이 금강신(金剛身) 아님이 없으니, 한 몸[一身]의 뜻이기 때문에 ‘함께 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의 해석에서 “이를 ‘병이 없는 도인[無病道人]’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1신의 금강보륜산왕(金剛寶輪山王)은 그 상(相)이 어떠한가? 게송에서 말하기를, “점차로 ‘아님’이 다하면, 동시와 앞뒤를 만족히 하여 함께 더불어 하고 함께 아울러서 하나와 다름[一異]이 아닌 때와 장소를 옮겨 다닌다”라고 하였다.
『대기』 ‘5승이 모두 일승으로 들어가 거두어지니 일승으로부터 흘러나온 것[一乘所流]이며, 일승의 조목[一乘所目]이며, 일승의 방편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에서, ‘소류’라고 말한 것은 마치 모든 개울이 저 큰 바다를 좇아 흘러나오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아서, 3승・5승 등 일체 모든 법은 근본인 일승을 좇아 흘러나와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소목’이라는 것은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안목(眼目)의 뜻이 되고,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명목(名目)의 뜻이 된다. ‘삼승 중에서는 안목이 된다’라고 말한 것은, 그 훈습된 일체
모든 법이 온전히 이 일승 보법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곧 화엄 보법의 안목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일승 중에서는 명목이 된다’라는 것은, 만약 무생 불법(無生佛法)을 기준으로 하면 명목이라 할 수 없으나, 근기의 인연[機緣]을 위하여 여러 명자(名字)로 제목해서 보인 것이다. ‘방편’이라는 것은 마치 높은 집[堂]에 오르려고 하는데 용감하고 빠른 사람은 한 번에 뛰어서 바로 오르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뒤로 서너 걸음쯤 가도록 하여 거기서부터 나올 때에 이미 집에 오를 수 있는 힘을 얻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상근기의 사람은 보법을 한 번 듣고 곧바로 일승에 들어가지만, 중ㆍ하근기의 사람은 곧바로 일승보법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대비로 삼승을 시설(施設)하셔서 일승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삼으신 것이다.
‘소류・소목은 연기의 도리를 기준으로 한 말이요’라는 것은, 대연기(大緣起)의 도리를 이르는 것은 아니요, 일승의 법이 기연 가운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방편이라는 것은 지혜를 기준으로 한 말이다’라는 것은, 하교(下敎)의 근기가 스스로의 삼승이 바로 임시로 시설된 것임을 알고 일승으로 돌아가 들어가는[廻入] 지혜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또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할 수도 있다’라는 것은, 교화의 주체인 대성인께서 훌륭한 방편으로 일승 가운데서 삼승을 나누어 설하시어 중ㆍ하근기를 이끌어서 근본인 일승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니, 왜냐하면 선교방편으로 중생을 맞아 이끌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십구장기(十句章記)』62) ‘소목’이라는 것은 바로 이 경이요, 소류ㆍ방편 등은 아래의 4교이다.
【문】 기연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어느 기연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답】 하교의 연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소목(所目)도 역시 하교인가?
【답】『화엄경』 가운데 소목의 법이 밖을 향해 흘러서 하교의 기연 중에 일어난 것이니, 이 연 중에서 일어난 하교의 법이 본시 『화엄경』 중의 소목임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아울러 소목을 논했을 뿐이다.
『대기』 ‘5승의 설과 같으니 인법(人法)・인과(因果)……예에 준거하면 이와 같다’라는 것 등에서,
‘5승’은 삼승과 소승・인천승(人天乘)이요, ‘예에 준거하면 이와 같다’ 등은 기연을 따라서 5승이 비록 다르지만 그 5승의 법은 일승과 다르지 않다. 이른바 앞에서는 근기를 따라 나눈 5승을 기준으로 하여 행자를 논하였는데, 여기서 그 법을 기준으로 하면 예에 준거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일승의 열 가지 보법을 기준으로 하여 ‘예에 준거하면’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5승 중에 있는 인(人)과 법(法) 등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이니, 이른바 5승을 거두어 일승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이 그 5승에 있는 인과 법 등도 또한 모두 거두어 일승에 들어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본문】 이른바 5승……뛰어나고 묘한 능력이다.
『대기』 【문】 ‘이른바 5승 등의 법은 능전의 교법인가, 아니면 소전의 뜻인가?’라는 것에서, ‘등’이라고 한 것은 이 아래에 일곱 번의 문답이 있는데, 처음의 문답에서 질문의 의도는 5승교 이외에 따로 말을 여의고 상을 끊은 취지가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며, 또 저 5승의 교법이 곧 이름과 상을 여읜 소전임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답의 의도는, 즉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이는 저 누런 잎을 가지고 진짜 금을 바로잡는 것이니, 이와 같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알린 곳이다”라고 하였다. 고사(古辭)에 이르기를 “원효 대사가 의상 화상을 만나서 의심을 해결한 것이 세 가지 있으니, 이른바 첫째는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같으니 범부가 되고 성인이 되는 뜻이요, 둘째는 습과해(濕過海)니 갖가지 마음의 뜻이요, 셋째는 이 능전과 소전이 모두 말 속에 있다”는 것이다. 원효 대사의 뜻은, 이른바 하교 중에 실재로 법체가 있는 줄 알고 있다가 이 경문을 보고 이에 능전과 소전이 모두 말 속에 있고 실다운 법체가 없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문】 ‘이 능전과 소전이 모두 말 속에 있다’는 것은 어느 곳에 있음을 세워서 이른 것인가?
【답】 보현이 소류・소목의 근기를 위하여 생함도 없고 이름도 없는 곳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제목한 것이니, 이때 가운데서 능전과 소전이 차별을 이루기 때문에 이 곳을 기준으로 하여 ‘모두 말 속에 있다’라고 한 것이며, 또 이곳으로 와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이에 밖을 향해 산왕(山王)의 근기를 위하여 항상 설하시고 두루 설하시기 때문에 이 때에
10현(玄)ㆍ10법(法)이 구족하고 자재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위로 십불(十佛)의 내증(內證)을 바라보면 오히려 이것은 교(敎)와 상응하기 때문에 이곳을 기준으로 하여도 또한 ‘모두 말 속에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자비의 본원력으로 하시기 때문이며……언교를 시설하여’ 등은, 모든 불세존께서 성해분(性海分)으로부터 대비원을 발하고, 자신이 증득한 법으로 밖으로 기심(機心)을 향하여 두 가지 언설을 일으킨다. 이른바 법계문(法界門)에서 세계해의 성패(成敗)와 청정한 지혜 등의 부사의함을 설하고, 반야문(般若門)에서 불국토가 불가사의함을 설하니, 이 두 가지 언설이 비록 보현과 문수가 선정에서 나온 이후이나 지상(至相) 과지오해(果地五海) 10지(智)의 뜻에 의거하면, 즉 분신정(奮迅定) 중에 이 언설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불국토는 부사의하다’라는 말이 내증의 토해(土海)에 칭합하여 일어나지만 보현과 문수 등이 이 언설에 칭합하여 증득하기 때문에 ‘직접 증분을 증득한다’라고 한 것이니, 이 문(門)에서 부처님과 보살이 하나로 상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향하면 십불이요, 밖으로 향하면 보현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문】 보현의 내증인 정장삼매(淨藏三昧)가 바로 부처님께서 밖으로 향하는 것인데 무슨 이유로 ‘안으로 향하면 십불이요, 밖으로 향하면 보현’이기 때문에 바로 하나로 상속한다는 것인가?
【답】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끝이 아울러 보현의 원만한 인[圓因]이니, 이 원만한 인이 안으로 향하면 바로 십불이기 때문에 ‘하나로 상속한다’고 한 것이다.
『법기』 ‘본원력’이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인(因)을 닦을 때에 곧 서원(誓願)을 발하되 “나는 마땅히 성불하여 삼승의 근기를 위해 가르침을 시설하고 나서 자취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반드시 일승의 실체(實體)로 돌아가 들어가게 하리라”고 이와 같이 원(願)을 일으킨 것이다.
‘법이 이와 같다’는 것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룰 때에 법답게 이와 같이 이 원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대기』 두 번째 문답에서 질문 가운데 ‘증득[證]과 가르침[敎]의 두 법은 항상 두 변의 허물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소전의 법은 말과 상(相)으로 미칠 수 없다’라 하고, 또 ‘일체 모든 법이 모두 다 말에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두 말을 거듭 들어서 이 질문을 한 것이다.
답에서는 먼저 두 뜻이 모두 맞는 답임을 들었으며, ‘그러므로 알 수 있다’는 것은 거듭 물은 것이고, ‘변계는 상이 없고’ 아래는 거듭 답한 것이다.
『법기』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은 예로부터 중도요 하나여서 분별됨이 없다[一無分別]’는 것은, 마치 물에 모든 상(像)이 나타나지만 물가에 있는 사람은 다만 그 물이 상과 다른 것을 보니, 그 물로 눈을 삼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만약 해인으로 눈을 삼지 않으면 3세간법(世間法)이 바로 해인임을 보지 못하고, 만약 해인으로 안목을 삼으면 모든 법이 곧 해인의 체임을 볼 수 있으니, 해인이 나타낸 삼세간이 바로 교분(敎分)이며 삼세간을 거둔 해인은 바로 증분(證分)이다. 그러므로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이 하나여서 분별됨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변계는 상이 없고 의타는 생겨남이 없으며 진실은 성품이 없어서……세 가지 자성이 항상 중도에 있다’는 등에서, 3성(性)63)은 바로 가르침이요, 3무성(無性)64)은 바로 증득이니, 그러므로 증득과 가르침을 갖춘 것이다.
만약 정(情)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변계는 상이 없다’는 것은 바로 실재를 잡은 ‘없음’이지 유사하게 있음[似有]의 ‘없음’은 아니며, ‘의타는 생겨남이 없다’는 것은 유사하게 있음의 없음이지 자체가 공(空)한 것은 아니며, ‘원성은 성품이 없다’는 것은 바로 자체가 공한 것이지 연(緣)의 성품이 없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3성을 보내버리면[遣] 3무성이 나타나게 된다.
만약 이(理)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다만 하나의 진(眞)이 곧 ‘상이 없음’이며, ‘성품이 없음’ 등이기 때문에 나눌 수가 없고, 이것이 바로 ‘변계를 보내버린 상이 없음’이고 이것이 바로 의타를 보내버린 생겨남이 없음’이다. 그러므로 3무성이 곧 1제(際)이다. 다만 하나의 진에 의지하여 나뉜 셋이기 때문에 3성도 역시 1제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자성이 항상 중도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나무숲[樹林]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다면, 이 설명[詮]은 3성을 뜻하기 때문에 초교(初敎)이다. 만약 금을 쪼개어 셋으로 됨을 기준으로 하여 3성을 논한다면, 이것은 3성의 의미를 뜻하고 또 숙교(熟敎) 중의 의미가 있다. 만약 연유[酥]를 셋으로 나눔을 기준으로 하여 3성을 논한다면 숙교종(熟敎宗)에 해당된다. 만약 허공을 나눠 셋이 됨을 기준으로 하여 3성을 논한다면,
동교일승(同敎一乘)에 해당된다.
두 번째 뜻에 있어서, 금을 셋으로 나눔에 각각 다르다는 것이 바로 3성이요, 그 조각이 다름에 따라서 금상(金像) 또한 다른 것은 바로 3무성이니, 이는 곧 겹침[重]이 있기 때문에 이 설명은 3성을 뜻하는 것이다. 만약 금의 체를 기준으로 한다면, 세 조각의 금이 오직 한 가지라는 것은 바로 3무성이요, 세 조각의 금상이 바로 한 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3성이니, 이 의미는 숙교에 해당된다.
세 번째 뜻에 있어서, 연유를 나누어 셋으로 만든다는 것은 바로 3성이요, 세 그릇의 연유가 체덕(體德)이 가지런하여 하나라는 것은 3무성이다. 만약 이치의 실제를 기준으로 한다면, 3성은 초교의 중간에서는 나뉨을 따라 논한 것이요, 숙교의 처음에서는 구경을 논한 것이며, 숙교의 마지막에서는 쓰지 않은 것이다.
동교일승에서 삼승의 3성을 익힌 사람을 이끌고자 한다면, 그가 익힌 3성의 궤(軌)에 의지하여 우선 큰 공[大空]을 나누어 셋으로 구획지었기 때문에 하나를 들면 전체가 거두어지니,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진기』 ‘변계는 상이 없고 의타는 생겨남이 없으며……세 가지 법 이외에 다시 증득과 가르침은 없으니’라는 것은, 곧바로 일승을 분별함에 증득과 가르침이 가장 어렵기 때문에 저 숙교에서 논한 3성에 기대어 이 뜻을 보인 것이다.
처음의 ‘변계는 상이 없다’는 것에 나아가서는 해문(解門)과 행문(行門)이 있으니, 해문은 ‘변계의 정유(情有)를 떠나서 의타의 사유(似有) 등에 들어가는 것이고, 행문은 정유가 바로 진위(眞位)인 것이다. 그러므로 법장[康藏]이 말하기를 “연(緣)은 별다른 연이 없고 체로써 연을 다하니, 그러므로 차별된 연기가 곧 깊고 깊은 토해(土海)이다”라고 하였다.
『대기』 세 번째 문답 가운데 질문의 의도는, 즉 앞에서 성자(聖者)가 변계를 따른 말을 인하여 논을 인용해서 힐난한 것이다. 답 가운데 처음에서부터 ‘다른 의미가 이와 같다’에 이르기까지는 말로 나타낸 질문에 바로 답한 것이요, ‘만약 실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면’ 아래는 뜻이 갖추어진 질문에 겸하여 답한 것이다. ‘허공꽃을 언설하였다’는 것은 마치 맑은 눈의 사람은 허공꽃을 보지 않으나 눈병을 따라서 그 허공꽃을 설한 것과 같이, 성자도
또한 그러하여 이미 변계의 공(空)을 요달하였으나 변계하는 사람을 따라서 3성을 건립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허공꽃의 비유가 5교(敎)에 통한다”고 하니, 이른바 소승에서는 인공(人空)의 허공꽃을 설하였고, 나아가 돈교에서는 일념불생(一念不生)의 허공꽃을 설하였으며, 일승 중에서는 허공꽃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변계가 바로 보현의 머무름 없는 별교의 구경법인 것이다.
『법기』 ‘세 가지 자성이 모두 범부의 경계이니’라는 것에서, 의타와 원성은 범부의 경계가 아니나 이것이 바로 변계며 의타와 원성임을 설하여 보이기 때문이요, 범부가 무성(無性)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해문(解門)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따로 3무성(無性)을 세웠으나’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해문 중에 3무성은 무엇인가?
【답】 이치로 없는 것[理無]이 유사하게 있음[似有]에는 미치지 못하고, 성품 없음[無性]이 연을 따름[隨緣]에는 미치지 못하니, 이른바 숙교에서 ‘삼계가 오직 무명이 지은 것이다’라 하고, 또 ‘진망(眞妄)이 화합하여 지은 것이다’라 하고, 또 ‘하나의 진실된 마음이 지은 것이다’라고 하니, 이 세 가지 지은 것을 보내버려 이치를 멸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변계의 ‘이치로는 없음’이 진망의 ‘유사하게 있음’에는 미치지 못하고, 이 유사하게 있음의 ‘성품 없음’이 진여의 ‘연을 따름’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문(行門)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3성(性) 이외에 3무성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행문에서 만약 3무성을 따로 세우지 않았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3무성으로 삼을 것인가?
【답】 다만 없음[無]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3무성’이라 말할 수 있을 뿐이니, 만약 이것이 있다면 어떻게 ‘무성’이라 할 것인가?
【문】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육지소(六地疏)』에서 “실경계[實境]를 보내버려서 멸할 때에 곧 일부분의 무상의 성품[無相性]을 얻으니, 무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오직 식이며 상(想)과 경(境)이 아울러 즉하여서 생겨나지 않음을 무성의 성품[無性性]을 얻었다고 이름한다. 이것이 바로 행문의 유식관이다”라고 하였는가?
【답】 다만 보내버림을 말미암기 때문에 바야흐로 없음을 아는 것일 뿐이다.
『도신장(道身章)』 일승에서 만약 의타가 아니면 변계가 없다고 한다면, 변계는 과(果)요 의타는 인(因)이 되며, 만약 변계가 아니면 의타는 없다고 한다면, 의타가 과요 변계가 인이 되니, 이와 같은 뜻이 곧 연기일 뿐이다.
【문】 변계가 연기가 된다면 항아리 안에 실재로 귀신이 있다는 것인가?
【답】 나무 그루터기[杌]에 만들어진 유사한 귀신과 귀신이 실재한다는 뜻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계교하여 귀신으로 삼은 것이니, 만약 나무 그루터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실재의 귀신이 있다면 마땅히 나무그루터기에서 계교하여 실재의 귀신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3성을 보내버려서 3무성을 분별하는 두 종(宗)이 같지 않으니, 시교(始敎)는 다만 변계를 보내버리며, 또 다만 집착하는 대상으로 변계를 삼고, 집착하는 마음은 의타(依他)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3성을 보내버려서 3무성을 나타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만 변계 중의 3성을 보내버리는 것일 뿐이니, 이른바 청색(靑色) 등이 실재라고 계교하는 것은 변계의 변계가 되고, 집착하는 마음이 실재가 된다고 계교하는 것은 의타 가운데 변계가 되며, 만약 원성이 실재가 된다고 계교한다면 원성 가운데 변계가 되니, 이 종(宗)은 해문(解門)에 해당된다.
종교(終敎)는 3성을 모두 보내버리고 또한 계교하는 마음을 합하여 변계로 삼으니 이것은 행문(行門)에 해당된다.
또 3성을 하나[一際]로 합한다는 것은 3성이 곧 3무성이요, 셋이 아닌 행문의 3성임을 기준으로 하여 3성의 원융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것은 방편으로 거둔 것으로 일승의 다함없는 성품을 나타내기 위한 것일 뿐이다.
『대기』 ‘오히려 두 가지 성품 이외에 진실이 있지 않거늘’ 등은, 상 없는 지혜[無相智]로 변계하여 집착한 분별 경계를 보내버릴 때, 의타를 취함도 아울러 생겨나지 않아서 상(相)이 나타남이 없기 때문에, 이밖에 따로 원성실(圓成實)이 없는 것이다.
‘무상 등의 지혜가 앞에 나타나’라는 것은, 상 없는 지혜가 나타나서 다른 것에 의지한 마음의 경계가 모두 없어지기 때문에 ‘무상 등의 지혜가 나타나’라고 한 것이다.
‘대할 수 있는 법이 없다’라는 것은, 의타가 생겨남이 없어서 진리가 나타날 때에는 다시 원성의 진실은 없기 때문이다.
『법기』 ‘모름지기 교를 세우는 연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앞에서 비록 이미 증득과 가르침의 중도 및 3성 외에 3무성의 도리가 없음을 나타내었으나, 만약 그 교를 세우는 연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숙교의 3성ㆍ3무성의 중도이며,
일승의 중도이기 때문이다. 또 숙교 중에 비록 “3성을 보내버려서 3무성을 나타낸다”라고 하였으나, 다만 그 상(相)을 융섭하여 진실된 성품으로 돌아가게 할 뿐인 것이다. 일승에서는 바야흐로 “체(體)가 진(眞)을 융섭한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은 앞의 노주(露柱)65)의 명상(名相)에 있으니, 바로 해인의 구경법체(究竟法體)이기 때문에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이 항상 중도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릇 들은 것을 삼가하여 말대로 뜻을 취하지 말고 모름지기 연유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도신장(道身章)』66) 일승의 연기법은 정(情)으로 미칠 바가 아니니, 비록 정으로 미칠 수는 없지만, 먼 데서 구할 것은 아니요 정을 돌이키면 곧 이것이다.
【문】 정을 돌이키는 방편은 무엇인가?
【답】 방편이 한량없으나 그 요체(要體)는 보는 곳을 따라 마음을 집착하지 않음이 이것이니, 들은 법을 따라서 문장대로 취하지 않고 곧 그 연유를 이해하며 또 법의 실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문】 무슨 말인가?
【답】 대개 성인의 말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기연(機緣)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이른바 가르침[敎]은 좋은 약이라 생하는 병[生病]을 치료한다. 만약 생함[生]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생함으로써 하고, 만약 생하지 않음[不生]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생하지 않음으로써 한다. 만약 법이 반드시 생함과 생하지 않음이고, 생함이 옳은 것이라면 생하지 않음은 그른 것이요, 생하지 않음이 옳은 것이라면 생함은 옳은 것이 아니니, 그 법이 생함과 생하지 않음에 있지 않기 때문에 생함과 생하지 않음으로써 병을 다스림에 막힘이 없는 것이다.
『십구장석(十句章釋)』67) 두 번째 구(句)에서 이르기를 “둘째, 문장을 따라 뜻을 취하면 다섯 가지의 허물이 있다는 것은……만약 범부의 이름을 듣고 성인 말씀을 안 듣는다면 다섯 가지 허물이 있으니, 첫째는 바르게 믿지 않음이요[不正信], 둘째는 용맹에서 물러남이요[退勇猛], 셋째는 다른 이를 속임이요[詐他], 넷째는 부처님을 비방함이요[謗佛], 다섯째는 법을 가볍게 여김이다[輕法]”라고 하였다.
『대기』 네 번째의 문답에서 정(情)과 이(理)를 통틀어 근거해서 질문하였기 때문에 다름과 다르지 않음으로 차례대로 답한 것이다. 혹자는 “앞에서 3성과 3무성의 설명을 기준으로 하여 증득과 가르침의 중도를 나타내었고, 지금은 근본과 지말이 서로 의지하는[本末相資] 등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중도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질문한 것이요,
답에서 다름과 다르지 않음의 뜻은 아울러 이문(理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앞에서는 증득과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여서 분별됨이 없는 뜻을 밝혔기 때문에 ‘만약 그렇다면 증득과 가르침은 어떻게 다른가?’라고 질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훈(訓) 대덕의 뜻은, 이 네 번째 문답 아래에 네 단락의 뜻이 있으니 이른바 ‘묻기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그러므로 다르지 않다’는 것에 이르기까지는 표(標)요, ‘묻기를, 만약 이와 같다면……둘 다 서로 막지 않으니’까지는 풀이[釋]요, ‘설함과 설하지 않음이’ 등은 맺음[結]이요,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아래는 인용하여 증명한 것[引證]이라는 것이다.
표(標)에서 처음은 증득과 가르침이 서로 마주대하여 ‘다름’의 뜻을 밝힘을 표한 것이고, 뒤는 근본과 지말이 서로 마주대하여 ‘다르지 않음’을 밝힘을 표한 것이다.
두 번째의 풀이 중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묻기를 만약 이와 같다면……근본과 다르지 않다’까지는 근본과 지말을 서로 마주대하여 풀이하였다. 둘째, ‘근본과 다르지 않아서……설하지 않고도 설한다’까지는 고요함과 작용이 걸림 없음[寂用無礙]으로 뜻과 설함을 서로 마주대하여[義說相對] 풀이하였다. 셋째, ‘설하지 않고도 설하여……설함이 곧 설함이 아니다’까지는 위의 증분(證分)도 역시 설할 수 있으며, 교분(敎分)도 역시 설할 수 없다는 뜻을 풀이하였다. 넷째, ‘설함이 곧 설함이 아니니……설하지 않음을 얻을 수 없다’까지는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의 성품이 중도에 있어서 한 맛[一味]이라는 뜻을 풀이하였다. 다섯째, ‘두 가지 모두 얻을 수 없다’라는 것은 갖가지가 한 맛임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에 설함과 설하지 않음을 갖춘 것이다. 이상 다섯 단락의 구절 풀이를 5중해인에 준하라.
세 번째의 맺음에서, 설함과 설하지 않음은 뜻과 설함의 2대(大)요, 생함과 생하지 않음은 원선결정(願善決定)이요, ‘6결정처(決定處)68)에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근본입(根本入)과 9입(入) 등이다.
『대기(大記)』 다섯 번째의 문답에서 질문의 의도는, 앞의 문답 중에서 다만 연기의 무성이 근본과 다르지 않음을 밝히고 그 근본이 지말과 다르지 않음은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뜻을 나타내고자 이 질문을 한 것이다. 답에서 먼저 그 뜻을 총괄적으로 답하였으니, ‘만약……라면’이라는 것은 거듭 물은 것이요, ‘증득한 것이 말에 있다면’ 아래는 자세히 답한 것이다. 이 자세히 답하는 중에 앞의 다름과 다르지 않음의 뜻을 아울러 나타내었으니, 이 중에 둘이 있다. 먼저 증득과 가르침의 중도를 밝혔고, 뒤에서 ‘또한 정설(正說)……’ 아래는 바른 뜻[正義]과
바른 설함[正說]의 둘이 아닌 중도를 나타내었으니, 이 ‘바른 뜻’과 ‘바른 설함’이라는 것을 혹자는 “바른 뜻은 내증(內證)이요, 바른 설함은 외화(外化)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른 뜻은 즉 일승이요, 바른 설함은 즉 삼승이다.
‘모든 법의 실상이 말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말로 뜻을 삼으면 말이 바로 중도인데 어째서 실상이 말에 있지 않다는 것인가?
【답】 말과 뜻의 구경처에서는 말이 바로 뜻이니, 곧 이 중도이기 때문에 ‘말에 있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근기를 이익 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름에 참된 성품이 없고’라는 것은, 위의 ‘참된 성품에 있지 않고’를 거듭 들어서 ‘참된 성품이 없음’으로 삼은 것이 아니요, 자성의 실체가 없음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참된 성품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이름과 성품을 떠났기 때문에 이름하였으나 이름이 없다’ 아래는, 모든 법의 실상이 말 가운데 있지 않다는 뜻을 거듭 들어 나타낸 것이다.
‘이름에 참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아래는 언설의 법이 참된 성품에 있지 않다는 뜻을 거듭 들어 나타낸 것이다.
『법기』 중도라는 것은 말과 말 아님에 통하는 것이니, 어째서인가?
‘모든 법의 실상이 말 가운데 있지 않다’ 등에 대해서이다.
【문】 중도와 실상이 어떻게 다른가?
【답】 중도는 이미 ‘말과 말 아닌 것에 통한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증득과 가르침에 통하고, 실상은 이미 말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오직 증득일 뿐이다. 이른바 뜻으로 가르침을 삼으면 가르침 외에 뜻이 없어서 가르침은 옆이 없기[無側] 때문에 가르침이 바로 중도이니, 뜻도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증득이 중도인 것이다.
『대기』 여섯 번째의 문답에서 ‘앞뒤의 두 뜻’이란, ‘또한 정설법 중에서……’를 기준으로 하여 이상으로 앞의 뜻을 삼고 이하로 뒤의 뜻을 삼은 것이다.
‘근본과 지말이 상즉하여’ 등에서, 근본은 곧 부처이며 일승이요, 지말은 곧 중생이며 소승ㆍ삼승이니, 이러한 것 등은 모두 법성가 안의 진실한 덕용이기 때문이다.
‘이름과 뜻이 서로 객(客)이 되어’라는 것은, 일체 모든 법이 이름과 뜻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름과 뜻의 자성에 꼭 집착한 사람을 위하여 그것들은 서로 객이 되어서 자성이 있지 않다는 도리를 나타낸 것이다.
‘자체의 이름 없는 참된 근원’이란,
바로 증분이며 연기를 겸하니 머무름이 없는 별교이다.
【문】 참된 근원은 근본과 지말이 서로 의지하여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깊다. 서로 의지하는 근본은 비록 ‘증득’이라 하나 오히려 얕은 것인가?
【답】 우선 삼승을 따라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니, 만약 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동일하게 한 곳이다. 이 중도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은 구경이 바로 일승이기 때문에 ‘교화하는 주체와 교화되는 대상의 종요가 여기에 있다’라고 한 것이다.
『법기』 ‘근본과 지말이 상즉하며’라는 것은, 숙교 가운데서 근본에 의지하여 일으킨 지말을 없애서 근본으로 되돌아가서 바야흐로 일심을 나타내고, 저것에 기대어 일승의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의 성품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름과 뜻이 서로 객(客)이 된다’는 것은, 초교에서 이름과 뜻이 서로 객이 되는 것으로 이름과 뜻의 무아(無我) 도리를 나타내었고, 저것에 기대어 일승의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이 자성이 없다는 뜻을 나타내었다. 나타낸 도리가 능전의 방편의 차별과 다르지 않은 것은 초교와 숙교의 세운 뜻이 다르나 저 나타낸 ‘무아’와 ‘중도’의 뜻에 의지하여 일승의 증득과 가르침이 둘이 아닌 뜻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의 문답에서 질문의 의도는, 차별을 없애서 중도로 돌아가는 것은 종교 가운데 이 뜻을 논할 수 있으나 맨 끝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 뜻은 돈교종에 해당된다’라고 한 것이다.
대답의 의미는, 유마는 문수의 말을 털어버리고 ‘하나의 고요함[一寂]’에서 침묵하였고, 여덟 회상의 부처님의 침묵은 언설(言說)을 움직이지 않는 침묵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이른바 설함과 설하지 않음의 이름과 뜻의 근본과 지말을 없애서 중도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우선 삼승의 설을 따른 것이다. 만약 일승의 실다운 의미[實意]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름과 뜻의 근본과 지말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곧 이 법성가 안의 진실한 덕이기 때문에 돈교종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법기』 ‘또한 분별을 돕기 때문에 삼승의 설을 따르니’ 등은,
곧바로 삼승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익힌 것을 버리고 일승에 들어가도록 할 것이지만, 믿어서 받기가 어려울까 두려워 하여 방편으로 그가 집착하는 것에 의지해 따라서 분별을 도운 것이다. 혹자는 “비록 아래의 네 교(敎)가 모두 실다운 덕[實德]이나, 만약 소승 및 초교 등이 바로 일승이라고 말한다면 그 익힌 것에 칭합해서 분별을 더할 것이니, 그러므로 저 삼승의 차별하는 병통이 다함에 기대어 돈교의 뜻을 설하였기 때문에 ‘우선 분별을 돕기 때문에 삼승의 설을 따르니, 대개 지혜로운 자의 뛰어나고 미묘한 능력이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문】 설한 대로 수행하여……집이라 이름한다.
『대기』 ‘설한 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는다’는 것은, 수행하여 증득으로 나아가서 바야흐로 모든 부처님의 무리로 하여금 미혹됨을 필경 마치고 법성가(法性家)에 이르도록 하고자 함을 얻기 때문에, 언교(言敎)의 큰 뜻을 시설한 것이다.
‘법성진공(法性眞空)’이라는 것은 구경을 기준으로 하면 증분의 법성가이나, 이 가운데 뜻이 증득과 가르침을 나누지 않고 행자(行者)의 수행하는 방편을 모두 밝혔기 때문에, 증득과 가르침에 통하는 것이다.
‘법계다라니’는 증분이요, ‘인다라니가(因陀羅尼家)’ 등은 교분이니, 머무름이 없는 별교이다.
『법융기』69) ‘택(宅)’은 증분이요, ‘사(舍)’는 연기분이다. ‘법계다라니가(法界陀羅尼家)’는 이(理)요, ‘인다라니 및 미세’ 등은 사(事)이다. 이른바 한 법이 온전히 법계를 거두어들여서 옆도 없고[無側] 남김도 없다[無遺]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법계다라니요, 하나하나 법, 법이 거듭거듭 서로 거두어서 다함이 없고[無盡] 다함이 없는 것은 인다라니이며, 한 법 가운데 일체 모든 법이 머리를 나란히 하여 가지런히 나타나는 것은 미세이다.
‘성자가 의지하여 머무를 바이기 때문에 집[家]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10현문(玄門)이다.
【문】 이 10현문은 교분이 되는가, 증분이 되는가?
【답】 만약 자증(自證)을 기준으로 한다면 증분이요, 다른 사람을 위해 시설한 것이면 교분(敎分)이다.
법계도기총수록 하권의 2
찬자 미상
윤옥선 번역
【본문】 두 번째1)는 이익을 얻음[得益]이다. 이른바 ‘다라니’라는 것은 모두 모아 지니기[總持]2) 때문이니, 아래의 10전(錢)을 세는 법에서 설한 것과 같다. ‘실제(實際)’는 법성(法性)을 다하기 때문이며, ‘중도(中道)’는 양끝을 융섭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일체를 거두기 때문이니, 법계의 열 가지 열반의 넓고 큰 보배 평상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거두기 때문에 ‘평상에 앉음’이라 하는 것이다. ‘보배[寶]’란 귀히 여길 만하기 때문이며, ‘평상[床]’이란 거두어 지닌다는 뜻이기 때문이고, ‘열 가지 열반’이란 것은 아래 경전의 「이세간품(離世間品)」의 설과 같다.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예로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이니, 이른바 10불(佛)은 『화엄경』3)에서 설한 것과 같다. 첫째 무착불(無着佛)이니 세간에 안주하여 정각을 이루기 때문이고, 둘째 원불(願佛)이니 출생(出生)하기 때문이며, 셋째 업보불(業報佛)이니 믿기 때문이고, 넷째 지불(持佛)이니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며, 다섯째 열반불(涅槃佛)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고, 여섯째 법계불(法界佛)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며, 일곱째 심불(心佛)이니 안주하기 때문이고, 여덟째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고 집착이 없기 때문이며, 아홉째 성불(性佛)이니 결정(決定)하였기 때문이고, 열째 여의불(如意佛)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십(十)’이라는 숫자로 설하였는가? 많은 부처님[多佛]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 뜻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 구경의 현묘한 종지여서 깊고 깊어 이해하기 어려우니, 우선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문】 계박되어 있는 유정(有情)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여 복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예로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는가?
【답】 번뇌를 아직 끊지 못했으면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지 않으나, 번뇌 끊기를 다하고 복과 지혜를 다 이루었으니, 이 이후부터를 ‘예로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한 것이다.
【문】 미혹을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 『지론(地論)』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지만, 처음[前]ㆍ중간[中]ㆍ나중[後]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으니 이와 같이 끊기 때문이다. 아직 끊기 전은 ‘끊음[斷]’이라 하지 않고, 끊고 난 이후를 ‘예로부터 끊었음’이라 하니, 마치 깨어 있음과 꿈을 꾸는 것[覺夢]・잠자는 것과 깨어 있음[睡悟]이 같지 않기 때문에 ‘이룸’과 ‘이루지 못함’・‘끊음’과 ‘끊지 못함’ 등을 세우는 것이다. 그 실제 도리는 모든 법의 실상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본래부터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번뇌법(煩惱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드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청정법(淸淨法) 가운데 한 법도 늘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등의 경문은 ‘이치에 즉함[卽理]’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지, ‘현상에 즉하여[卽事]’ 설한 것이 아니다. 만약 삼승의 방편 교문(方便敎門)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 뜻에 합치될 것이나, 만약 일승의 여실 교문(如實敎門)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이치를 다할 수 없다. 이치와 현상이 명연(冥然)하여 ‘하나이고 나뉘어 구별됨이 없으며[一無分別] 체와 용이 원융하여 항상 중도에 있으니, 스스로의 사[自事] 이외에 어느 곳에서 이(理)를 얻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문】 삼승교 중에도 또한 고요하나 항상 작용하고, 작용하지만 항상 고요한 이와 같은 등의 뜻이 있는데, 무슨 이유로 위에서 ‘이치에 즉한 문[卽理門]에 두루한 것이지 현상에 즉함 가운데서가 아니다’라고 하여 자재하지 않은가?
【답】 이치와 현상이 상즉[理事相卽]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뜻이 있는 것이지, 현상과 현상이 상즉함[事事相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삼승교 가운데서 분별하는 병을 다스리고자 하여 ‘현상을 만나 이치에 들어가는 것[會事入理]’으로 종지를 삼았기 때문이다. 만약 별교일승에 의지한다면 이치와 이치가 상즉하는 것[理理相卽]도 얻을 수 있고, 현상과 현상이 상즉하는 것도 얻을 수 있으며, 이치와 현상이 상즉하는 것도 얻을 수 있고, 각각 상즉하지 않는 것도 또한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중(中)・즉(卽)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이인다라(理因陀羅)와 사인다라(事因陀羅) 등의 법문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십불보현법계택(十佛普賢法界宅) 가운데 이와 같은 등의 걸림없는 법계 법문(法門)이 있어서 지극히 자재하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 역과 순, 그리고 주반상성(主伴相成) 등의 법문은 예에 준거하여 서로 거두면 뜻을 따라 없어지고 생길[消息] 것이다.
만약 연기실상다라니법(緣起實相陀羅尼法)을 관(觀)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땅히 동전 열 개를 세는 법[數十錢法]을 배워야4) 할 것이니, 이른바 1전(錢)에서 나아가 10전(錢)까지이다. 열[十]을 말한 이유는 한량없음[無量]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첫째는 일 가운데 십[一中十]과 십 가운데 일[十中一]이요, 둘째는 일이 곧 십[一卽十]이고 십이 곧 일[十卽一]인 것이다.
처음의 문[初門]에 둘이 있으니, 첫째는 위를 향해 오는 것[向上來]이고, 둘째는 아래를 향해 가는 것[向下去]이다.
위를 향해 온다고 말한 것 중에 10문(門)이 있으니, 같지 않다. 첫째는 일이니, 왜냐하면 연으로 이루어졌기[緣成] 때문이다. 이것이 곧 근본수[本數]이다. 나아가 열째는 일 가운데 십이니, 왜냐하면 만약 일이 없으면 십은 곧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대로 십은 일이 아니다. 나머지 문(門)도 또한 이와 같으니, 예에 준거하면 알 수 있다.
아래를 향해 간다고 말한 것 중에도 또한 10문이 있다. 첫째는 십이니, 왜냐하면 연성(緣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째는 십 가운데 일이니, 왜냐하면 만약 십이 없다면 일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대로 일은 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머지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렇게 왔다 갔다 헤아리면 마땅히 곧 하나하나의 동전[錢] 가운데 10문을 구족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처음[本]과 끝[末]의 두 동전[錢] 가운데에 10문을 구족하고 있는 것과 같이, 나머지 여덟 개의 동전 가운데서도 예에 준거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 이미 일이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일 가운데를 십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
【답】 대연기다라니법(大緣起陀羅尼法)은 만약 일이 없으면 일체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음을 반드시 아는 것이다. 그 상(相)은 어떠한가? 말한 일이라는 것은 자성(自性)이 일이 아니라 연성이기 때문에 일이며, 나아가 십이라는 것은 자성이 십이 아니라 연성이기 때문에 십이다. 일체의 연으로 생겨난 법[緣生法]은 어느 한 법도 정해진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곧 자재(自在)하지 않은 것이다. 자재하지 않다는 것은 곧 생함의 생하지 않음[生不生]이고 생하지 않음의 생함[不生生]이다. ‘생하지 않음의 생함[不生生]’이란 것은 곧 머무르지 않는다[不住]는 뜻이고,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은 곧 중도의 뜻이며, 중도의 뜻이라는 것은 곧 생(生)과 불생(不生)에 통한다. 그러므로 용수(龍樹)가 말하기를, “인연으로 생긴 법을 나는 곧 공(空)이라 설하며, 또한 이것은 가명(假名)이라 설하고, 다시 중도의 뜻이라고 설한다”라고 하였으니, 곧 이 뜻이다. 중도란 분별하지 않는다는 뜻이요, 분별하지 않는 법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연을 따라 다함이 없으며[無盡], 또한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 가운데 십과 십 가운데 일이 서로 받아들여 걸림이 없어서 그대로 ‘서로 이것이지 않음[不相是]’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미 1문(門) 가운데 10문(門)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1문 가운데 무진(無盡)의 뜻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니, 1문에서와 같이 나머지도 또한 이와 같다.
【문】 1문 중에 십을 포섭하여 다하는가[盡], 다하지 않는가[不盡]?
【답】 다하기도 하고 다하지 않기도 하다. 왜냐하면 다하기를 필요로 하면 곧 다하고, 다하지 않기를 필요로 하면 곧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뜻은 무엇인가? 일의 사[一事]로 일의 많음[一多]을 분별하기 때문에 곧 다하는 것이요, 다른 사[異事]로 일의 많음을 분별하기 때문에 곧 다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일의 사에서 일다의 뜻은 ‘서로 이것이지 않으니[不相是]’ 곧 이 다(多)이며, 일의 사이므로 곧 이 일(一)인 것이다. 4구(句)5)로 허물을 보호하고, 그른 것을 제거하여 덕을 나타내는 것이다. 준거하면 이해할 수 있으니, 이사(異事)도 또한 준거하면 같다.
【문】 ‘필요로 한다[須]’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답】 ‘필요로 한다’는 것은 연으로 이루어진다[緣成]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연법은 하나도 어긋나 잃어버림이 없으니, 개별의 모든 현상문[事門] 중에서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연기의 묘한 이치가 응당 이와 같음을 알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第一門]을 마친다.
두 번째 문6)은 이 가운데 두 문이 있으니, 첫 번째는 위를 향해 가는 것[向上去]이요, 두 번째는 아래를 향해 오는 것[向下來]이다. 처음의 문7) 가운데 10문이 같지 않다. 첫째는 일(一)이니, 왜냐하면 연성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째는 ‘일이 곧 십[一卽十]’이니, 왜냐하면 만약 일이 없으면 십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연성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8) 가운데에도 또한 10문이 있다. 첫째는 십이니, 왜냐하면 연성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째는 ‘십이 곧 일[十卽一]’이니, 만약 십이 없으면 일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예에 준거하라.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동전[錢] 가운데 열 개의 문이 구족되어 있음을 마땅히 아는 것이다.
【문】 위와 같은 많은 문(門)이 일시에 모두 원만한 것인가? 앞뒤가 같지 않은 것인가?
【답】 원만하기도 하고 앞뒤가 같지 않기도 하니,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원만함을 필요로 하면 곧 원만하고, 앞뒤를 필요로 하면 곧 앞뒤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법성가(法性家) 안의 덕용(德用)이 자재하여 장애가 없기 때문이니, 연으로 이루어짐을 말미암기 때문에 모두 이와 같음을 얻는 것이다.
【문】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오고 감[去來]’의 뜻은 그 상(相)이 어떠한가?
【답】 자기의 지위는 움직이지 않고 항상 오고 간다. 왜냐하면 오고 간다는 것은 ‘연을 따른다[隨緣]’는 뜻이니, 곧 이것은 인연의 뜻이며, 움직이지 않는다[不動]는 것은 ‘근본을 향한다[向本]’는 뜻이니, 곧 이것은 연기의 뜻이기 때문이다.
【문】 인연과 연기는 어떻게 다른가?
【답】 다르기도 하고 또한 같기도 하다. 이른바 다르다는 뜻에서, 인연이란 세속의 차별을 따르는 것이니, 곧 인과 연이 서로 바라보아서 자성이 없다[無自性]는 뜻을 나타낸 것이요, 바로 속제(俗諦)의 체이다. 연기란 성품에 분별이 없음을 따르는 것이니, 곧 이것은 서로 즉하고 서로 융섭해서 평등하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요, 바로 제일의(第一義)의 체를 따르는 것이다. 속제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제일의를 따르니, 그러므로 경에서 “세제를 수순(隨順)하여 관하면 곧 제일의제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 바로 그 뜻인 것이다. 다르다는 뜻은 이와 같고, 같다는 뜻은 앞에서 용수가 풀이한 것과 같다. 하나하나의 동전[錢]에 나아가 ‘동시에 구족한다’는 등의 10문에 의지해서 회전(廻轉)한다는 것이니, 준거하면 이해할 수 있다. 10문은 아래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동전 가운데 첫 번째와 나아가 열 번째가 같지 않으나 상즉(相卽)하고 상입(相入)해서 걸림 없이 서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비록 인과(因果)ㆍ이사(理事)ㆍ인법(人法)ㆍ해행(解行)ㆍ교의(敎義)ㆍ주반(主伴) 등의 중다(衆多)한 문이 다르나, 하나의 문을 따라 맡겨서 일체를 다 섭수한다. 나머지 뜻은 이에 준하라.
이상에서 ‘동전을 세는 법’이라는 것은, 우선 변계 현상[遍計事]의 동전에 의지하여 의타(依他)・인연(因緣)ㆍ연기(緣起)의 동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한 ‘연으로 생긴 일체 모든 법은 끝내 얻을 수 없음’을 가리켜 보임에 의지해서 변계의 사물에 집착하여 연기법에 미혹하는 것과 법의 머무름[逗留]9)이 완전히 다름을 나타낸다.
경에서 “처음 발심한 보살의 일념 공덕은 다할 수 없다”라고 한 것은 첫 번째 동전과 같다. 왜냐하면 1문(門)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 없음[無盡]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하물며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 두 번째 동전 이후와 같으니, 왜냐하면 다른 문[異門]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처음 발심한 때에 곧 정각을 이룬다’는 것은 1전(錢)이 곧 십인 것과 같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행의 체[行體]를 기준으로 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문】 ‘처음 발심한 보살’이란 신지(信地) 보살이니 곧 제자의 지위요, ‘정각을 이룬다’는 것은 불지(佛地)이니 곧 대사(大師)의 지위이다. 높고 낮음이 같지 않고 계위와 지위[位地]가 완전히 다른데, 무엇 때문에 같은 곳에서 머리와 다리를 나란히 하는 것인가?
【답】 삼승의 방편법은 원교의 일승법과 법용(法用)의 머무름[逗留]이 각각 다르므로 섞어서 쓸 수 없으니, 그 뜻은 무엇인가? 삼승법은 머리와 다리가 각각 달라서 아버지와 아들의 연월(年月)이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가? 상(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며, 믿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원교의 일승법은 머리와 다리가 총체적으로 하나여서 아버지와 아들의 연월이 모두 같으니, 왜냐하면 연을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도리(道理)를 기준으로 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문】 ‘일(一)’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일’이라는 것은 하나여서 분별됨이 없다는 뜻이다.
【문】 ‘같다[同]’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같다’는 것은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니, 분별함이 없어서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처음과 끝이 같은 곳에서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나란히 하는 것이다.
【문】 ‘같은 곳에서 머리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같은 곳에서 머리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서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니, 왜냐하면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문】 ‘분별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분별이 없다’는 것은
연으로 생긴다[緣生]는 뜻이니, 곧 처음과 끝이 동등하여 둘도 없고 다름도 없는 것이다. 어째서 이와 같은가? 일체의 연생법(緣生法)은 짓는 자가 있지 않으며, 이루는 자가 있지 않으며, 아는 자가 있지 않으니, 고요함[寂]과 작용[用]이 하나의 상(相)이요, 높고 낮음이 한 맛이라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법다움이 예로부터 이와 같다. 그러므로 『화엄경』10)에서 “일체 법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서 인연으로 있음을 관하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등의 문장이 바로 그 뜻이다.
【문】 어떻게 신위(信位) 보살과 나아가 부처가 같은 곳에서 머리를 나란히 함을 알 수 있는가?
【답】 아래의 경에서 “처음 발심하였을 때 곧 정각을 이룬다”라고 한 것과 같고, 또한 『지론』에서 ‘신지(信地) 보살과 나아가 부처가 6상(相)으로 이루어진다’라고 해석한 것과 같기 때문에, 이와 같은 뜻이 있음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6상은 위와 같으니, 이 말은 법성가의 요체가 되는 문에 들어가 다라니장(陀羅尼藏)11)을 좋은 자물쇠와 열쇠로 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밝힌 것은 오직 일승다라니대연기법(一乘陀羅尼大緣起法)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또한 일승무애변재(一乘無㝵辯才)의 체를 논했다고도 할 수 있으니, 삼승의 영역[分齊]은 아니다.
【문】 초교(初敎) 이후는 일체 모든 법이 곧 공(空)하며 곧 여여(如如)하여 하나여서 분별됨이 없는데, 무슨 까닭에 위에서는 머리와 다리가 각각 다르다고 말한 것인가?
【답】 이 뜻이 없지 않으나 아직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아래를 따라 말한 것이다.
【문】 스스로의 삼승 이외에 따로 원교 일승의 분제가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답】 아래의 경12)에서 “일체 세계의 군생류(群生類)가 성문도를 구하고자 함이 드물게 있으며, 연각을 구하는 자는 더욱 적고, 대승을 구하는 자는 더더욱 드물다. 대승을 구하는 자는 오히려 쉬우나 이 법을 믿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만약 중생이 하열(下劣)하여 그 마음에 싫증을 내면 성문도를 보여서 뭇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만약 다시 어떤 중생의 근기가 조금이라도 밝고 예리하여 인연법을 즐거워하면 그를 위해 벽지불을 설한다. 만약 어떤 사람의 근기가 밝고 예리하여 대자비심이 있어서 중생을 넉넉하고 이익 되게 하면 그를 위해 보살도를 설하며, 만약 위없는 마음[無上心]이 있어서 결정코 대사(大事)13)를 즐거워한다면 그를 위해 부처님 몸을 보이며 다함 없는 부처님 법을 설한다”라고 하였다. 성인의 말씀이 손바닥의 밝은 구슬[明珠]과 같으니 놀라거나 괴이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문】 일승과 삼승 분제의 다른 뜻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답】 우선 열 개의 문에 의지하면 곧 알 것이다. 첫째는 동구족상응문(同具足相應門)이다. 그 가운데 열 개의 문이 있으니, 이른바 인법(人法)ㆍ이사(理事)ㆍ교의(敎義)ㆍ해행(解行)ㆍ인과(因果)이다. 이러한 열 개의 문이 상응하여 앞과 뒤가 없는 것이다. 둘째는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이다. 여기에 앞의 열 개의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義]이 비유를 따르는 것이 다를 뿐이니, 나머지는 준할 수 있다. 셋째는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現俱成門)이니, 이 또한 앞의 열 개의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연(緣)을 따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넷째는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이니, 이 또한 앞의 열 개의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상(相)을 따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다섯째는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이니, 이 또한 앞의 열 개의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세간[世]을 따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여섯째는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이니, 이 또한 앞의 열 개의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문(門)을 따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일곱째는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이니, 이 또한 앞의 열 개의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이치[理]를 따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여덟째는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이니, 이 또한 앞의 열 개의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용(用)을 따르는 것이 다를 뿐이며, 또한 성(性)에 의지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아홉째는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이니, 이 또한 앞의 열 개의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마음[心]을 따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열째는 탁사현법생해문(托事現法生解門)이니, 이 또한 앞의 열 개의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지혜[智]를 따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준할 수 있다. 위의 열 개의 문이 현묘하여 아울러 모두 구별되어 다르니, 만약 교의(敎義)의 분제가 이와 상응한다면 곧 일승 원교와 돈교에 거두어지고, 만약 모든 교의의 분제가 이와 상응하나 구족하지 않는다면 곧 삼승 점교(漸敎)에 거두어지니, 이와 같이 알라. 이와 같은 열 개의 문이 구족되어 원만하다는 것은 『화엄경』의 설과 같고, 나머지 자세한 뜻은 경론소초(經論疏抄)와 『공목』・『문답』 등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일승법계도합시일인(一乘法界圖合詩一印)」은 『화엄경』과 『십지경론』에 의거하여 원교의 종요(宗要)를 나타낸 것으로, 총장(總章)14) 원년 7월 15일에 기록하였다.
【문】 무슨 이유로
모은 사람[集者]의 이름은 적지 않았는가?
【답】 연으로 생기는 모든 법은 주재하는 자[主者]가 없음을 표하였기 때문이다.
【문】 무슨 이유로 연월(年月)의 이름은 남겨 두었는가?
【답】 일체 법이 연(緣)을 의지하여 생김을 보였기 때문이다.
【문】 연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답】 전도된 마음으로부터 온다. 전도된 마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시작도 없는 무명[無始無明]으로부터 온다. 시작도 없는 무명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여여(如如)로부터 온다. 여여는 어디에 있는가? 여여는 자기의 법성(法性)에 있다. 자기의 법성은 무엇으로 상(相)을 삼는가? 분별이 없음[無分別]으로 상을 삼는다. 그러므로 일체 법이 항상 중도에 있어서 무분별(無分別) 아님이 없다. 이러한 뜻 때문에 문장 첫머리의 시(詩)에서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고……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음을 부처라 이름한다’라고 말하였으니, 의미가 여기에 있다. 시에 의지한 이유는 허(虛)에 즉(卽)하여 실(實)을 나타냈기 때문이니, 일승 보법(一乘普法)의 명자(名字)와 뜻을 보고 듣고 수행하여 모아서 이 선근으로 일체 중생에게 도로 베풀어 널리 쐬고 널리 닦아 온 중생계가 일시에 성불하도록 서원한 것이다.
【본문】 이른바 십불(十佛)은……깊고 깊어 이해하기 어려우니.
『대기』 이른바 ‘십불’이란 만약 불자인(佛字印)으로 도장을 찍으면 증분(證分)의 십불이요, 만약 보자인(普字印)으로 도장을 찍으면 이는 교분(敎分)의 십불이다.
『법기(法記)』 ‘첫째, 무착불이니 세간에 안주하여 정각을 이루기 때문이요’라는 것에서, 집착 없는 것이 곧 집착이며 집착하는 것이 집착이 없는 것이다. ‘세간에 안주한다’는 것은, 삼승에서는 세간을 벗어나 부처를 이루기 때문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요, 일승에서는 3세간(世間)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삼기 때문에 ‘세간에 안주한다’라고 한 것이다. 증득한 마음으로 보면 다만 마음일 뿐이요, 상대할 경계가 없는 것이 바로 집착이 되니, 분별하는 의식으로 다른 경계를 취하여 집착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집착 없는 것이 곧 집착이라는 것은, 비록 마음이 경계를 보지 않으나 일체 경계가 내 마음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집착하는 것이 집착 없음이라는 것은 일체가 내 마음의 태양이 아님이 없으니, 향하여 달려가는 바가 기준 기준마다 옆이 없는[無側] 것이다. ‘정각을 이룬다’는 것은, 마치 안식(眼識)이 안근과 안진[眼根塵]으로 체를
삼는데 고름과 피, 살갗의 깨끗하지 않고 물든 것으로 깨끗한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귓구멍쯤에 침을 놓아 고름과 피를 제거하더라도 깨끗한 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혜로 바르게 깨달은 자도 또한 이와 같아서 3세간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삼는데, 중생의 업과 번뇌에 물들어서는 정각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대연기(大緣起) 가운데서는 한 법을 제거하면 일체 모든 법이 전체로서 서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의 혹업(惑業)과 번뇌에 대해 만약 한 물건이라도 말한다면 정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원불(願佛)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며’라는 것은, 해인(海印) 중에 3세간의 일체 모든 법을 출생하는 것이요, 또 3세간의 하나하나의 법이 법계의 모든 법을 출생하여 생각생각 가운데 새롭고 새로워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출생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법, 법이 닦거나 닦지 않거나 간에 일체 중생의 몸과 마음 가운데 항상 그러하고 항상 그러하다. 여래께서 이 법을 나타내 보이신 이유는 다만 원(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법을 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원(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니, 이 출생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원불’이라 한 것이다.
‘셋째, 업보불(業報佛)이니 믿기 때문이요’라는 것은, 세간의 6도(道)의 인(因)과 출세간의 성문ㆍ연각ㆍ보살의 인 등이 업이 되니, 제9지(地) 업행조림(業行稠林)의 문장에서 볼 수 있다. ‘보(報)’는 6도의 과(果)이니, 성문과 연각・모든 부처 등의 과(果)로 보(報)를 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인(海印)의 원만하고 밝은 법이기 때문에 ‘업보불’이라 한 것이다. 일체 중생이 자기의 참된 부처가 그 몸과 마음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다만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오직 믿는 마음에서 업보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한 것이다.
‘넷째, 지불(持佛)이니 수순하기 때문이며’라는 것에서, 만약 하나의 티끌을 들면 옆에 남겨 둠이 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옆이 없이 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이 하나의 티끌을 수순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수순하지 않는다면 이 하나의 티끌이 어떻게 일체 법을 다할 수 있겠는가? 나머지 모든 법에서도 이와 같이 준하여 생각하라.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인 것과 주반구족(主伴具足) 무진자재(無盡自在)의 도리가 모두 이 뜻인 것이다.
이와 같이 듦에 따라서 거두어 지니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지불’이라 이름한 것이다.
‘다섯째, 열반불(涅槃佛)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요’라는 것에서, 삼승에서는 요컨대 생사를 버려야만 바야흐로 열반을 증득하나 이로 말미암아 도리어 생사 가운데 빠지기 때문에 영원히 건너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둘15)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요, 둘이 없기 때문에 부처이다. 그러므로 만약 생사와 열반 가운데 둘16)이 있음을 본 자가 어찌 생사 가운데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승에서 우선 내 몸의 별보(別報)를 기준으로 하면, 하나의 눈동자가 해인(海印)의 구경의 끝을 꿰뚫었으니, 이 이상으로 다시 전전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건너갔다’라고 한 것이다. 나머지 일체 법도 기준 기준마다 모두 그러하니, 이와 같은 뜻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여섯째, 법계불(法界佛)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며’라는 것에서, 만약 이 집 위 용마루의 서쪽 끝에 집착하여 서쪽 분제(分齊)를 구한다면, 서쪽의 허공을 다한다 하더라도 분제를 얻지 못하고, 동쪽의 허공을 다함에 이 서쪽 끝을 구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하더라도 그 서쪽 분제는 끝내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법계의 서쪽 끝이기 때문이며, 서쪽이 곧 동쪽이기 때문이니, 나머지 방향도 모두 그러하다. 이 하나의 용마루와 같이 일체 모든 법이 모두 또한 이와 같아서 하나하나의 법, 법이 듦 듦에 기준 기준마다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음이 바로 법계불이다.
‘일곱째, 심불(心佛)이니 안주하기 때문이요’라는 것에서, 만약 마음을 말할 때에는 일체 모든 법이 이 마음 아닌 것이 없으니, 이 의미는 식(識) 가운데 두루함을 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한 것이다. 참 마음이 이룬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망령된 마음이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마음이 볼 때에 단지 이 마음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심불’이라고 한 것이니, 이른바 한 법계의 성기심(性起心)ㆍ조림심(稠林心) 등이다. 삼승에서는 마음은 바로 연려(緣慮)17)이며 색(色)은 바로 ‘질을 가진 장애[質㝵]’이나, 일승에서 마음은 바로 갖가지[種種]라는 뜻이요 색은 바로 ‘질을 가져 장애됨이 없다[無質㝵]’는 뜻이다. 이미 마음이 바로 갖가지라는 뜻이기 때문에 마음이 볼 때에 어떠한 사물[物]도 마음 아닌 것이 없으며, 이미 색이 바로 ‘질을 가져 장애됨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만약 색이라고 할 때에 어떠한 사물도 색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만약 습과해(濕過海)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밝힌다면, 과(過) 가운데 실(實)을 마음이라 이름하며,
일체 모든 법의 자기 지위를 움직이지 않음이 바로 이 마음이기 때문에 ‘안주한다’라고 한 것이니, 이와 같은 뜻을 기준으로 하여 ‘심불’이라 이름한 것이다.
‘여덟째,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고 집착이 없기 때문이며’라는 것에서, 「현수품(賢首品)」 중의 열 가지 대삼매(大三昧)와 모든 회상마다의 모든 대삼매가 다 삼매불이 되니, 하나의 삼매를 따라서 일체 모든 법이 만족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다’라고 한 것이다. 한량없음 가운데 매 하나하나의 법이 듦에 따라 옆이 없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다’라고 한 것이니, 삼매에 의지하여 법이 이와 같음을 보기 때문에 ‘삼매불’이라 이름한 것이다.
‘아홉째, 성불(性佛)이니 결정하였기 때문이요’라는 것에서, ‘성(性)’은 머무름이 없는 법성[無住法性]을 말하는 것이니, 일체 법마다 모두 ‘머무름이 없는 이치’를 결정한 것이다. 부처가 있건 부처가 없건, 성상(性相)이 항상 머무르니 이와 같은 뜻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열째, 여의불(如意佛)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라는 것에서, 사갈라용왕(娑竭羅龍王)18)의 궁전에 출생무진(出生無盡)이라는 여의보왕(如意寶王)이 있었다. 이 보주왕(寶珠王)이 바다와 육지의 일체 진귀한 보배와 큰 바다의 물을 생기게 하니, 큰 바다 가운데 일체 살아있는 무리들이 이 물로 집을 삼고 이 물로 밥을 삼아 모두 생장할 수 있었다. 큰 바다로 인하여 큰 땅이 있을 수 있었으며, 강과 내와 모든 연못과 우물이 일체 초목과 모든 곡식과 과일을 적셔 주고 생장시켜서 중생을 양육하니, 만약 이 무진보왕(無盡寶王)이 없었다면 바닷물이 말라 버리고 곡식과 과일이 타들었을 것이니 물과 육지의 중생이 무엇으로 생장하고 양육되어 이로움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이 여의왕은 오직 모든 부처님의 중생을 기르고 보살피는 본원(本願)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니, 만약 모든 부처님의 본원의 힘이 없었다면 이 보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이 생장하고 양육되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은 모두 여의불의 덮어 주고 보살펴 주는 덕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등의 뜻은 오직 내 몸과 마음의 참 부처가 가진 도리이니, 열 가지의 이름으로 설하여 보였을 뿐이다.
‘이 뜻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이 곳에도 열 가지 이름이 있는가?
【답】 없다. 이른바 연기분(緣起分)에 열 가지 이름이 있을 뿐이요, 증분(證分) 가운데는 열 가지의 이름이 없다.
【문】 그렇다면 이 ‘열 부처님[十佛]’의 이름은 증분의 밖인가?
【답】 증분 가운데 실제의 이름이 있다.
【문】 「십종정토장(十種淨土章)」에서 “분량을 알고자 한다면, 그 십불에 준하면 곧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무엇인가?
【답】 ‘집착함이 없다’, ‘원(願)이다’ 등은 다만 이름을 설명한 것일 뿐이다. 부처는 설명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이름 등은 다만 모양을 설명하여[詮相]’ 말한 것일 뿐이다. 토해(土海)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준하면 알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대기』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라는 것은 연기분이요, ‘구경의 현묘한 종지’라는 것은 증분이다. 이 뜻은 증(證)과 교(敎) 두 부분에 통틀어 십불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오직 증분 가운데 십불이 있다면 증분이 바로 교분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참된 근원’이라 한 것이다. 또 빼어난 업의 의미는 참된 근원이요, 지(智)이고, 현묘한 종지는 경(境)이니, 참된 지혜로 본 경계라야 바야흐로 ‘현묘하다’라고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깊고 깊어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한 것이다.
『고기(古記)』19) 의상 화상[相和尙]이 태백산(大伯山) 대로방(大蘆房)에 머무를 때에 진정(眞定)20)・지통(智通)21) 등을 위하여 설하되, “수행하는 사람으로 십불을 보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먼저 안목(眼目)을 길러야 한다”고 하였다. 지통 등이 묻기를 “무엇이 안목입니까?”라고 하니, 화상이 말하기를 “『화엄경』으로 자기의 안목을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른바 문장 구절[文文句句]마다 모두 이 십불이니, 이것 밖에서 부처를 보고자 하는 자는 생생겁겁(生生劫劫)에 끝내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화상이 말하였다. “이른바 ‘무착불이니 세간에 안주하여 정각을 이루기 때문이요’라는 것은, 금일 내 5척의 몸을 세간이라 이름하니, 이 몸이 허공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정각’이라 한 것이요, 세간에 안주하기 때문에 열반에 대한 집착을 여읜 것이나 정각을 이루기 때문에 생사에 대한 집착을 여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실(實)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세 가지 세간이 원만히 밝고 자재하기 때문에 ‘무착불’이라 한 것이다.
‘원불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며’라는 것은, 1백40원(願)과 10회향원(廻向願)과
초지원(初地願)과 성기원(性起願) 등이 모두 원불인 것이다. 이 부처[佛]는 머무르지 않음[無住]으로 몸을 삼기 때문에 한 물건이라도 부처님 몸 아님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한 법을 듦에 따라서 일체를 다 거두어 두루 법계에 칭합하는 것이니, 원불이라 이름한 것이다.
‘업보불이니 믿기 때문이요’라는 것은, 22위(位)의 법이 본래 움직이지 않아서 원만히 밝게 비추니, 만약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믿을 수 있다면 곧 ‘믿는다’고 할 것이다. 만약 실제의 도리를 들어서 말한다면, 위로는 묘각(妙覺)으로부터 아래로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사(佛事)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공경히 믿으면 이 일[事]을 말할 수 있으니 업보불인 것이다.
‘지불이니 수순하기 때문이며’라는 것은, 법계의 빽빽이 늘어선 모든 법이 비록 다함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해인(海印)으로 도장 찍어 결정하면 오직 하나의 해인정법(海印定法)이니, 그것이 나를 유지하고 내가 그것을 유지하기 때문에 ‘수순한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로 부처를 유지하고 부처로 세계를 유지하는 것을 ‘지불’이라 이름한 것이다.
‘열반불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요’라는 것은,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함을 증득해 알았기 때문에 ‘영원히 건너갔다’라고 한 것이다. 이른바 ‘생사는 시끄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열반은 적막하고 고요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법계불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며’라는 것은, 일진 법계(一塵法界)ㆍ송목 법계(松木法界)ㆍ율목 법계(栗木法界), 나아가 시방 삼제(十方三際) 허공 법계(虛空法界)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님 몸이다. 이른바 진여(眞如)는 전제(前際)에 없어지지도 않고 후제(後際)에 생기지도 않으며 현재에 움직이지도 않으니, 여래도 또한 그러하여 과거에 없어지지도 않고 미래에 생기지도 않으며 현재에 움직이지도 않는다. 형상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계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백천만 겁 동안 이미 설하였고 지금도 설하고 앞으로도 설할 것이나 끝내 다할 수 없으니, 끝이 없기 때문에 ‘법계불’이라 한 것이다.
‘심불이니 안주하기 때문이요’라는 것은, 마음을 쉬면 곧 부처요, 마음을 일으키면 부처가 아니니, 어떤 사람이 물로 그릇을 씻는데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물이 깨끗하면 그림자가 밝고 물이 더러우면 그림자가 어두우니,
심법(心法)도 그러하여 마음을 쉬면 법계가 원만히 밝고 마음을 일으키면 법계가 차별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면 법계의 모든 법이 내 5척의 몸에 나타나는 것이다.
‘삼매불이니 한량없고 집착 없기 때문이며’라는 것은, 해인삼매의 법이 듦 듦에 기준 기준마다 머물러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고 집착 없는 삼매불’이라 한 것이다.
‘성불이니 결정하였기 때문이요’라는 것은, 법성에 둘이 있으니 이른바 대성(大性)과 소성(小性)이다. 무엇인가? 만약 한 법이 일어나면 삼세제(三世際)가 다하도록 안과 밖이 없기 때문에 ‘대성’이라 한 것이요, 한 법의 지위가 일체 가운데 두루해야 바야흐로 이룰 수 있는 것을 ‘소성’이라 이름하였다. 이른바 하나의 기둥이 법계의 끝[法界際]을 다하여 다만 이 기둥뿐인 것을 ‘대성’이라 이름하였고, 이 하나의 기둥 가운데 서까래ㆍ들보ㆍ기와 등 모든 지위[諸位]가 나타나는 것을 ‘소성’이라 이름한 것이다.
‘여의불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대용왕에게 큰 보왕(寶王)이 있는데 만약 이 보배가 없으면 일체 중생이 입고 먹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곡식과 아홉 가지 곡식,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성취되는 것은 오직 이 보왕의 덕인 것과 같이 여의불의 은혜도 또한 이와 같다.”
『정원경길상운지식소(貞元經吉祥雲知識疏)』 【문】 법문(法門)이 한량없이 많은데 어떻게 처음의 벗이 바로 염불을 가르치는가?
【답】 간략히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염불삼매가 뭇 행에 우선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부처님에 의지하여야 바야흐로 뛰어난 행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셋째는 공이 높아져 쉽게 나아가서 물(物)을 가지기 때문이고, 넷째는 깊고 얕음을 꿰뚫어 두루 거두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무거운 장애를 소멸하여 뛰어난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인(人)과 법(法)을 쌍으로 겸하여 쉽게 가호(加護)하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7지22) 보살이 모두 부처를 염하기 때문이고, 여덟째는 3보(寶)의 길상(吉祥)을 경의 처음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니, 처음은 이 염불이요, 해운(海雲)은 법을 설하고 묘주(妙住)는 승(僧)에 의지하는 것으로 차례를 삼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마음에 즉하고 부처에 즉하는 것이 쉽게 하나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고, 열째는 초주(初住)에 부처를 연(緣)하여 발심하고 즐거이 공양함을 표하기 위함이다…….
간략히 하면
세 개의 문(門)이 되니, 첫째는 염하는 것의 차별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경문(經文)을 모아 풀이한 것이며, 셋째는 염한 것을 거두어 묶는 것이다. 이제 처음에 말한 10신(身)ㆍ3신(身)의 관(觀)이 같지 않아서 대략 열 가지가 된다……. 열 가지라 말한 것은 첫째, 만약 이 관을 지으면 부처님께서 법으로 몸을 삼아서 청정하기가 허공과 같으리니, 무념(無念)을 염하는 것이 곧 진여를 염하는 것이며 바로 법신을 염하는 것이다. 둘째, 화장세계해(花藏世界海)가 법계의 차별됨이 없어서 진여에 의지하여 머물고 국토를 의지하지 않는 것은 바로 성토(性土)를 염하는 것이다. 셋째, 십연화장진수상(十蓮花藏塵數相)은 이것 등이 모두 보신상(報身相)을 염하는 것이다. 넷째, 다함 없는 덕이 있어서 하나하나 생각하기 어려움은 보내덕(報內德)을 염하기 때문이니, 위의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위의 중에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염하여 밤낮으로 잠시도 끊어짐이 없으니, 이와 같은 업을 마땅히 지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다섯째, 화장찰(華藏刹)의 한량없는 보배 장엄이 법계에 가득 차 두루함을 관하는 것은 바로 보토(報土)를 염하는 것이다.
여섯째, 혹 부처님의 상[佛相]이 서른두 가지를 갖춤에 총(總)과 별(別), 역(逆)과 순(順)의 길이가 6천 척(尺)임을 관하니 이러한 것 등이 모두 화신의 상[化身相]을 염하는 것이다. 일곱째, 10력(力)23)과 4무외(無畏)24)와 18불공(不共)25)은 이것 등이 모두 화신의 상을 염하는 것이다. 여덟째, 나머지 방향의 정토(淨土)의 물과 새와 나무와 숲, 이것 등이 모두 화신의 옷[化身依]을 염하는 것이다. 아홉째, 앞의 둘은 성(性)이요 뒤의 여섯은 상(相)이니, 상 밖에 성이 없고 성 밖에 상이 없어서 참부처와 참국토를 번갈아 꿰뚫는 것은 바로 아홉 번째 성상 무애(性相無㝵)를 염하는 것이다. 열째, 성으로 상을 융섭하고 상이 성을 따라 융섭되어 앞의 아홉 문(門)을 합하여 하나의 법도로 삼기 때문에, 덕(德)마다 다함이 없고 상(相)마다 끝이 없어서 티끌 티끌의 찰토[塵塵刹]에 가득한 것이 마치 제석천의 그물[帝網]과 같음은 바로 열 번째 거듭거듭 융섭함[重重融攝]을 염하여 뒤의 두 문(門)을 얻는 것이다. 앞은 모두 진실이니, 경에서 비록 다르게 설하였으나 뜻은 똑같다…….
‘세 번째 염한 것을 거두어 묶으면’에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경계를 연(緣)하여 바르게 관하는 염불문[緣境正觀念佛門]이다. 진(眞)과 응(應), 의(依)와 정(正)이 모두 경계이기 때문에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입에 속하지 참된 염(念)이 아니니, 간략히 하고 말하지 않겠다. 둘째는
경계를 거두면 오직 마음뿐인 염불문[攝境唯心念佛門]이다. 마음이 바로 부처요, 마음이 부처를 짓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 정변지해(正遍知海)가 심상(心想)으로부터 생기는 것인데, 하물며 마음과 부처와 중생 세 가지가 차별됨이 없음이겠는가. 셋째는 마음과 경계가 모두 없어진 염불문[心境俱泯念佛門]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므로 마음은 마음이 아니요, 부처가 곧 마음이므로 부처 또한 부처가 아니니,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어서 일체를 멀리 여의므로 염하는 바가 없음이 바야흐로 진실한 염이다. 넷째는 마음과 경계에 걸림이 없는 염불문[心境無㝵念佛門]이다. 현상[事]과 이치[理]를 쌍으로 비추어 있음[存]과 없음[亡]에 걸림이 없다. 진문(眞門)의 적적(寂寂)함과 같으니, 무엇이 부처이고 무엇이 마음인가? 사리(事理)의 명명(明明)함에 비추어 본지라 언제나 마음이고 언제나 부처이다. 모두 잊어 바르게 들어가고 고요히 비추어 쌍으로 흐르는 것이다. 다섯째는 거듭거듭 다함이 없는 염불문[重重無盡念佛門]이다. 이치가 이미 다함이 없으니, 이치로 현상을 융섭하면 현상도 또한 다함이 없으므로 하나의 문을 따르면 일체 문을 거두는 것이다. 이 다섯 문을 융섭하여 일치하게 되니 바로 이 가운데 염하는 마음이 앞의 십불의 경계와 합치된다. 그러므로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게 하지도 않아서 겹겹의 생각하기 어려운 경계를 건너 들어가야 할 것이다. 염불의 한 문을 모든 가르침에서 닦기를 찬미하니, 이치가 매우 깊고 세간에서 많이 행하기 때문에 다시 간략히 서술하므로 번쇄한 것을 마다하지 않고 설한다…….
『보현지식소(普賢知識疏)』 첫째, 모든 부처님을 예경(禮敬)하는 것이다. 문장의 세 단락은, 첫째 이름을 거듭 든 것[牒名]26)이니, 마음으로 사모하고 공경함을 말미암아 몸과 마음을 움직여서 두루 예배하기 때문에 아만의 장애를 제거하고 공경함과 믿음과 선함을 일으키는 것이다. 늑나 삼장(勒那三藏)27)은 일곱 가지 예(禮)를 설하였으나 여기에 더하여 열 가지로 만들었다. 이른바 첫째는 아만례(我慢禮)이니, 위ㆍ아래가 확실하여 사모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 둘째는 창화례(唱和禮)이니, 높은 소리로 떠들썩하게 미사여구(美辭麗句)만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예의 법도가 아니다. 셋째는 공경례(恭敬禮)이니 5륜(輪)28)을 땅에 붙이고 정성스럽게 발을 받드는 것이다. 넷째는 무상례(無相禮)이니 깊이 법성(法性)에 들어가 주체[能]와 객체[所]라는 상(相)을 여의는 것이다. 다섯째는 기용례(起用禮)이니, 비록 주체와 객체가 없으나 두루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림자가 두루 미치는 것과 같아서, 예(禮)이나 예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여섯째는 내관례(內觀禮)이니, 다만 몸 안의 법신 진불(法身眞佛)에만 예를 드리고 밖을 향해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일곱째는 실상례(實相禮)이니
안과 밖이 동일한 실상인 것이다. 여덟째는 대비례(大悲禮)이니, 하나하나의 예(禮)에 따라서 널리 중생을 대신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총섭례(總攝禮)이니, 앞의 여섯 문(門)을 거두어 하나의 관(觀)으로 삼는 것이다. 열째는 무진례(無盡禮)이니 제망(帝網)의 경계에 들어가 부처와 예(禮)가 거듭거듭 다함이 없는 것이다.
『추혈문답(錐穴問答)』29)【문】 자신의 미래불이 도로 자신의 현재를 교화한다는 것은 어느 경문으로 아는가?
【답】 『영락경(纓絡經)』에서 제8지(地) 보살이 말하기를 “자기 몸의 당과(當果) 제불(諸佛)이 정수리를 문지르며 법을 설하심[摩頂說法]을 스스로 본다”고 하였기 때문에 성인의 말씀이 확실함을 알 수 있다. 또 이미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기 때문에 모든 죄업이 멸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란 무엇이겠는가?
【문】 이는 이미 성불한 다른 이에게 경배한다는 뜻인데, 어떻게 자기는 아직 성불하지 못했는가?
【답】 다른 부처님께 경배한다는 뜻이 없지 않으나 관계가 멀다. 그 이유는 모든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의 덕[佛德]을 설하는 뜻은 중생 스스로가 또한 저 과를 얻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에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자신의 다가올 미래[當來]에 얻을 과덕(果德)을 바라보아 저 과를 얻고자 해서 신명을 아끼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지, 다른 이의 불과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로 나로 하여금 발심해서 수행하게 하는 부처는 다만 이미 이루어진 나의 당과불이요 다른 부처[他佛]가 아니니, 이 뜻을 의심하여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이미 이루어진 타불(他佛)이 바로 자신의 다가올 과불[當果佛]이니, 왜냐하면 다른 이가 성불할 때에 곧 삼세 부처님의 평등한 과를 얻기 때문이다. 또 나의 당과불이 바로 다른 이가 지금 이루는 부처이니, 왜냐하면 내가 당과불을 얻는 때에 곧 삼세 부처님의 평등한 법을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바뀌어서[轉展] 다시 서로 평등하여, 평등한 차별 없는 과덕(果德)이다. 또 이 나의 부처가 일체 법계의 유정(有情)ㆍ무정(無情) 가운데 온전히 온전히 지어져 있어서 어느 한 물건도 내 몸의 부처[吾體佛]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몸의 부처[自體佛]에게 절할 수 있다면 절하지 못할 어떠한 물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심대한 요지이니, 항상 생각해 볼 일이다.
『자체불관론(自體佛觀論)』 【문】 무엇이 자성계(自性界)이며, 무엇이 자체불(自體佛)인가?
【답】 머무름이 없는 것이 자성계요, 실상(實相)이 자체불이다.
【문】 이 자체불을 어떻게 보는가?
【답】 게송으로 답하자면, 모든 연의 근본은 나[我]이고 일체 법의 근원은 마음이니, 크고 중요한 종지를 말하는 것이 진실한 선지식이다.
【문】 이 뜻은 무엇인가?
【답】 일체 법의 근원인 마음은 바로 자체불이요, 크고 중요한 종지는 자체원인(自體圓因)이고, 진실한 선지식은 자체만과(自體滿果)이며, 세 가지 뜻을 갖추었기 때문에 나[我]이니, 이것이 바로 자체불이다.
【문】 이 불과(佛果)는 닦아야 하는가, 닦지 않아도 되는가?
【답】 닦음[修]과 닦지 않음[不修]을 가리지 않으며, 정(情)과 정이 아님[非情]을 간택하지 않으니, 3세간(世間)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문】 이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가?
【답】 큰 허공[大虛] 안에 모든 법은 큰 허공 아님이 없으니, 그러므로 허공이 허공을 교화하는 것과 같아서 이를 ‘자체불의 교화’라 한다.한 판본[本]에서는 “자체불 안에 자체불 아님이 없는 것을 ‘자체불의 교화’라고 이름할 뿐이다”라고 했다.
【문】 모르겠다. 어떻게 ‘말한다’라고 하는가?
【답】 그대가 ‘말한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말이 매우 크다.
【문】 이 말은 무엇인가?
【답】 연기제(緣起際)의 말과 같다.
【문】 연기제란 무엇인가?
【답】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요 큰 허공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여의는 것이 ‘연기제’이다.
【문】 연기제를 기준으로 하면 그 법은 항상 그러하니, 처음 수행하는 사람은 어떻게 그 마음에 노닐어야 하는가?
【답】 법을 기준으로 하여 논하면, 닦음과 닦지 않음을 여의지만 처음 나아감에한 판본에서는 ‘처음 일어남’이라 했다. 밝히도록 시도하여 내 마음과 내 몸을 서로 말하도록 한 것이니, 이른바 마음을 가지고 몸을 찾고 몸을 가지고 마음을 찾아, 마음이 몸에 두루하고 몸이 마음에 두루하므로 ‘말한다’라고 이름한 것이다.
【문】 서로 두루하기 때문에 다시 말할 바가 없는데, 어째서 ‘말한다’라고 하는가?
【답】 마음이 말할 때에는 말 이외에 말할 바가 없고, 몸이 말할 때에도 말 이외에 말할 바가 없으니, 그러므로 말이 없는 말을 들음이 없이 듣는 것이다.
【문】 이것은 다만 내 마음과 내 몸일 뿐인데, 어째서 일체 법의 근원이라 하는가?
【답】 내 마음의 변제(邊際)를 구하는 것이 법계제(法界際)를 다하는 것이니, 내 몸의 4대(大)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문】 만약 이와 같다면 오직 내 몸과 마음뿐인데, 무엇을 진실한 선지식이라 하는가?
【답】 법계의 모든 법은 내 몸과 마음 아닌 것이 없으니, 모두 수순(隨順)하여 선지식이라 이름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미(迷)함과 깨달음의 차별이 없으리니, 무엇을 부처라 이름하는가?
【답】 둘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요 둘이 없기 때문에 곧 자체불이니, 이와 같이 관(觀)하는 것이 올바른 관[正觀]이다.
‘대법계연기(大法界緣起)’라는 것에서, 모든 연의 근본인 나는 불보(佛寶)요, 일체 법의 근원인 마음은 승보(僧寶)이며, 크고 중요한 종지를 말하는 것은 법보(法寶)요, 진실한 선지식은 이 대법계연기의 뜻이다. 마음을 얻은 사람은 비록 6도(道)와 4생(生)에 갈지라도 결정코 의심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를 ‘자체삼보(自體三寶)’라 하니, 이른바 신업(身業)은 불보요, 구업(口業)은 법보며, 의업(意業)은 승보이다. ‘불(佛)’은 연으로 합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요, ‘법’은 일체 법이 솟아 나오기 때문이며, ‘승’은 일체 법 가운데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부처를 섬기는 사람[佛仕人]’이 3업의 가사(袈裟)를 입으니, 신업은 5조(條)요, 구업은 7조며, 의업은 9조이니, 이와 같은 세 가지 가사를 모든 장소에서 입는다. 이 부처를 섬기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 실법계(實法界)의 법을 끝까지 볼 것이며, 다시 볼 때마다 곳곳에서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을 모두 얻을 것이니, 그러므로 3종세간이 이것 아님이 없는 것이다.
【본문】 계박되어 있는 유정이……뜻을 따라 없어지고 생길 것이다.
『대기』 ‘계박되어 있는 유정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여 아직 복과 지혜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무슨 뜻으로 ‘예로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한 것에서, 이 질문을 한 의도는 “만약 십불을 기준으로 한다면 법계의 모든 법이 부처 아님이 없으나, 이 금일의 나 등은 눈멀어 어두운 범부이니 어떻게 십불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이와 같이 따져 물은 것이다. 대답의 의미는 “정(情)을 초월한 법은 정을 뒤집으면 바로 이것이니, 만약 정을 뒤집어서 본다면 법계가 원만히 밝아서 일체 중생이 번뇌를 다 끊고 복과 지혜를 다 이루었으니 어찌 부처가 아니겠는가?”라고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문답의 의미는, 저 삼승의 ‘장애를 끊고 부처를 이룬다’는 뜻에 의탁하여
일승의 ‘예로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문】 본래부터 번뇌를 끊었다는 것인가, 본래부터 번뇌가 움직이지 않았음을 아는 것인가?
【답】 본래부터 끊었음을 아는 것일 뿐이니, 깨달은 사람은 꿈꾸는 사람이 보는 5척(尺)의 귀신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 그렇다면 인용한 경전 중에 ‘번뇌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듦을 보지 않는다’라는 뜻에 어긋나지 않는가?
【답】 본래 없기 때문이니, 어떻게 줄어듦을 보겠는가?
『진기(眞記)』 ‘처음도 아니요 중간이나 나중도 아니지만’이라는 것은, 세 찰나로 나누어 끊을 장애를 구한 것이다. 처음의 찰나에 지혜를 들어 장애를 구하면 지혜의 체 아님이 없어서 끊을 수 없으니, 중간과 나중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끊지 않으나 끊기 때문이다.
‘허공과 같아 이와 같이 끊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만약 지위에 붙여 말한다면 허공이라는 것은 사물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끊는 주체와 끊을 대상이 없는 것이 허공을 끊는 것과 같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허공이라는 것은 옆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지혜와 장애의 체(體)가 서로 옆이 없는 것이다. 옆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허공처럼 이와 같이 끊을 뿐이다.
『법기』 ‘마치 깨어 있음과 꿈을 꾸는 것・잠자는 것과 깨어 있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라는 것은, 어떤 두 사람이 함께 하나의 평상에 있는데, 한 사람은 처음부터 잠자지 않았기 때문에 세 때[三時]에 꿈 꾸는 것을 구하나 첫 때에도 얻지 못하고 중간과 나중에도 또한 그러하다. 다른 한 사람은 밤이 되자마자 잠들었기 때문에 세 때에 항상 꿈을 꾸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승이 장애를 끊고 부처를 이룸을 기준으로 한다면, 온전히 타자[他]가 자기[自]가 되어서 항상 깨어 있기 때문에 맨 처음부터 잠자지 않는 것이요, 온전히 자기가 타자가 되어 항상 꿈을 꾸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깨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삼승이 장애를 끊는다는 것은 ‘아직 끊지 못한 곳’을 끊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요, 일승은 ‘아직 끊지 못한 곳’을 끊는 데까지 미치는 것이니, 삼승의 부처가 끊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상속(相續) 밖의 중생의 장애요, 일승의 부처가 끊는 곳까지 미치는 것은 바로 스스로 증득한 중생해(衆生海)의 장애인 것이다. 일체 중생이 금일 발심하여 장애를 끊고 닦아 증득함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다함 없는 문(門)의 덕이다.
‘그 실제 도리는 모든 법의 실상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라는 것에서, 중생과 부처가 이미 한 법성의 평상을 함께 하니 비록 ‘중생’이라 말하여도 모자라거나 남음이 없고,
비록 ‘모든 부처’라고 말하여도 더하고 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치와 이치가 상즉하는 것’ 등에서, 앞의 세 구(句)는 즉문(卽門)이요, 뒤의 한 구는 중문(中門)이다.
【문】 ‘이치와 이치가 상즉한다’는 것은 2공(空)을 아우른 것인가?
【답】 아우르지 않은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상즉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답】 상즉하기 때문에 아우르지 않은 것이다.
『대기』 ‘십불보현법계택’이라는 것은, 곧 위의 법성가(法性家)와 법계다라니가(法界陀羅尼家) 등에서 바로 ‘밖으로 교화함[外化]’을 기준으로 하여 ‘안으로 증득함[內證]’에 통한 것이다.
‘그 나머지 역과 순, 그리고 주반상성 등은’에서, 역(逆)은 오열중비(五熱衆鞞)요, 순(順)은 십도정행(十度正行) 등이니, 이것으로 머리를 삼아서 일체 다함이 없는 법을 통틀어 취하기 때문에 ‘예에 준거해서 서로 거두면 뜻을 따라 없어지고 생길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본문】 연기를 관하고자 한다면……머무름[逗留]이 완전히 다르다.
『대기』 ‘만약 연기를 관하고자 한다면……10전(錢)을 세는 법’에서, 개종(開宗)에 말하기를 “10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은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데 첫째가는 약이요, 걸림 없는 덕을 이루는 가장 뛰어난 문(門)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면, 만약 이 동전 세는 법을 체달하는 자는 모든 경계가 날마다 작용하는 가운데 듣고 보는 바를 따라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리니, 하나하나의 털구멍과 하나하나의 티끌 중에서 일체 부처를 보고 일체 법을 들어,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과 발을 들고 발을 내리는 등의 모든 베풀어 행하는 바가 구경(究竟) 아님이 없어서 불사(佛事)를 만족하기 때문에 “병을 다스리는 데 첫째가는 약이요, 덕을 이루는 가장 뛰어난 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고기(古記)』 운화 존자(雲華尊者)가 말하기를 “어떤 한 누각을 관찰하니 안은 일승으로 꾸미고 밖은 삼승으로 치장했으며, 이 가운데 문이 있는데 ‘깨달음의 문[覺門]’이라 이름하였다. 보리수를 향하고 있으나 모든 중생들의 망상과 번뇌로 이 문이 막혀 있으니, 이와 같음으로 말미암아 일승의 진귀한 보배 장엄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친(天親)보살30)이 6상(相)의 자물쇠와 열쇠로 이 문을 열어 보였으나 천축 사람들이 6상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익힌 실담장(悉曇章)31) 총지(總持)의 법으로 가르쳐 보인 것이다”(이상)라고 하였다. 동토(東土)의 사람은 또 그 실담장
총지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니, 그래서 운화 존자가 그들이 익힌 ‘동전을 세는 법’으로 가르쳐 보인 것이다.
【문】 이 실담장과 동전을 세는 비유가 성인의 가르침 가운데 있는가, 없는가?
【답】 있다. 이른바 실담의 비유는 「십지품」에서 설하였고, ‘동전을 세는 법의 비유[數法之喩]’는 네 번째 회상에서 정진림(精進林)보살이 게송으로 말하기를, “비유하면 ‘수를 세는 법[算數法]’이 하나부터 증가하여 무량(無量)에까지 이르는 것과 같으니, 수법(數法)은 체성(體性)이 없어 지혜로 차별된다”라고 하였다.
【문】 이 동전 가운데 무엇이 변계(遍計)이고, 무엇이 인연인가?
【답】 이와 같이 10개의 동전이 첫 번째, 두 번째로부터 나아가 열 번째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성(自性)이 있기 때문에 하나를 취하면 하나가 없고 둘을 취하면 둘이 없다는 등은 바로 변계의 동전이요, 인연의 동전이라는 것은 이 1전(錢)의 지위에 중(中)ㆍ즉(卽)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만약 나머지 아홉이 없다면 곧 이 1전이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1전은 바로 다함이 없는 일(一)인 것이다.
【문】 이 동전 10개의 비유로 처음 동몽(童蒙)32)을 인도하는 방편은 무엇인가?
【답】 화상이 동몽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먼저 동전 10개를 줄 세워 보아라”고 하니,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줄을 세웠다. 화상이 말하기를 “이 10전은 자성(自性)이 십(十)인가, 연기한 성품이 없는[無性] 십인가?”라고 하니, 그 사람이 “이 동전은 실재 자성이 십입니다”라고 하였다. 화상이 말하기를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이 십은 바로 연으로 이루어진 십이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십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미혹한 사람이 이 뜻을 알아듣지 못하자, 화상이 일러 말하기를 “만약 이 10전이 모두 자성이 열 개인 동전이라면 그대가 한 번 세어 보라”고 하였다. 미혹한 사람은 시키는 대로 그 동전을 세기를 “하나, 둘…열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화상이 첫 번째 1전(錢)을 치워 버리고 묻기를 “몇 개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다만 아홉 개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니, 화상이 말하기를 “그대는 다시 한 번 세어 보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세기를 “하나, 둘……아홉입니다”라고 하니, 화상이 말하기를 “그대가 앞에서 이미 ‘이 십은 자성이 정해진 십’이라고 하였는데, 왜 그대는 앞에서 두 번째였던 것으로
첫 번째를 삼고 나아가 앞에서 십이었던 것으로 구(九)를 삼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화상께서 1전을 치워 버리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하니, 이에 화상이 도로 1전을 놓고서 묻기를 “몇 개인가?”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열 개가 있습니다”라고 하니, 화상이 말하기를 “그대는 마땅히 다시 세어 보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명을 받들어 다시 세기를 “하나, 둘……열”이라 하고, 말하기를 “화상께서 1전을 치워 버리셨을 때에는 두 번째로 첫 번째를 삼았고, 화상께서 도로 1전을 놓으시니 또한 다시 첫 번째로 두 번째를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성이 십이 아니니, 마땅히 하나로 말미암아 열이 있고 열로 말미암아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하나가 연기라서 성품이 없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법융기(法融記)』33) ‘첫 번째 위를 향해 오는 것[向上來]’에서, 어떤 이는 “이 문(門)에서 처음의 동전[初錢]은 다만 ‘감[去]’의 뜻만 있고 ‘옴[來]’의 뜻은 없으며, 열 번째 동전에는 다만 ‘온다’는 뜻만 있고 ‘간다’는 뜻은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이것과 반대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처음의 돈이 힘이 있어서 10전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온다’라고 한 것이요, 열 번째 동전이 힘이 있어서 10전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간다’라고 한 것이다.
‘근본이 되는 수[本數]’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본래 일[本一]은 본수와 어떻게 다른가?
【답】 지위를 주지 않았을 때 일(一)을 부르면 십(十)이 모두 응당 말하기를 “나도 일”, “나도 일”이라 하기 때문에 첫 번째부터, 나아가 열 번째 등의 지위를 주는 때에 첫 번째의 일이 바로 본래 일이기 때문에 첫 번째 지위[第一位]를 주는 것이니, 그러므로 ‘본수의 일’이라 한 것이다. 또 열을 세는 것의 처음의 일이기 때문에 ‘본래 일’이라 한 것이다.
『대기』 ‘첫째는 일이니……바로 근본수[本數]이다’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처음의 일이 근본법[本法]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 부처님의 자증법(自證法)은 하나, 둘이라는 표현[詮]을 떠나서 자성을 고수하지 않으므로 연을 따라 이루어질 때에 만약 일을 부르면 온 법계가 바로 일이 되니, 이미 지위를 주고서 “일(一)”, “이(二)”, 나아가서는 “십(十)”이라고 하기 때문에 “처음의 일이 본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문】 이미 옆으로 동전 10개를 늘어놓고 내가 드는 것을 따라 처음으로 삼아서 헤아리기 때문에 열 개가 모두 본수가 되는 것인가?
【답】 이미 드는 것을 따라 처음으로 삼아서 헤아린다면 바야흐로 본수가 될 것이나, 드는 것을 따라 차례대로 둘, 셋 등의 이름을 받기 때문에 끝수[末數]가 되는 것이다.
【문】 만약 이 화상이 일로 근본을 삼는다면, 경 가운데서 “비유하면 수법(數法)과 같아서
십이 모두 다 본수이다”라는 문장과 어떻게 통할 것인가?
【답】 바로 일의 십이기 때문에 십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일의 십이기 때문이며, 십이 모두 일이기 때문에 “모두 다 본수이다”라고 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이 십이 모두 본수일텐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답】 그 지위를 줄 때에 이미 ‘둘’, ‘셋’ 등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오직 처음의 일이 바로 본수이다. 그러나 그 십이 바로 일의 십이기 때문에 모두 본수인 것이다.
『법융기』34) ‘곧 생함의 생하지 않음[生不生]이고’ 등에서, ‘곧 생함’이란 무명의 인연으로 행과(行果)를 생하기 때문에 ‘곧 생함’이요, 묶임[縛]을 생한다고 설한 것은 ‘생하지 않음’이다. ‘생하지 않음의 생함[不生生]’이라는 것은 무명이 없어지기 때문에 행이 없어져 곧 ‘생하지 않음’이요, 묶임을 없앤다고 설한 것은 ‘생함’이다.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것은, 우선 하나의 티끌을 기준으로 하면 자기의 지위에 머무르지 않아서 법계에 다하니, 기준 기준마다 모두 그러하기 때문이다.
‘중도의 뜻’이라는 것은, 듦에 따라 옆이 없기 때문이다.
『대기』 ‘자재하지 않다’라는 것은, 자기가 이미 공(空)하다는 뜻이다.
‘곧 생함의 생하지 않음이고 생하지 않음의 생함이다’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첫 번째, ‘생함의 생하지 않음’이라는 것은 생함이 없는 불법[無生佛法]의 증분(證分)이요, ‘생하지 않음의 생함’이라는 것은 연기분(緣起分)이다. 두 번째, 연기분에 있어서 ‘생하지 않음’이란 연기관(緣起觀)이 힘도 없고 생함도 없기 때문이요, ‘생함’이라는 것은 인연관(因緣觀)이 힘도 있고 생함도 있기 때문이다.
‘용수가 이르기를, 인연으로 생긴 법을’ 등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으니, 어떤 이는 “처음 세 구절은 동교(同敎)요, 뒤의 한 구절은 별교(別敎)이다”라 하고, 어떤 이는 “‘곧 공(空)이다’라는 것은 연기관이요, ‘이것은 가명이다’라는 것은 인연관이며, ‘중도의 뜻이다’라는 것은 성기관(性起觀)이다”라고 하였다.
『법융기』35) ‘분별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이 10전 가운데 하나하나의 돈마다 듦에 따라 옆이 없어서 표시하여 가리킬 수 없기 때문이다.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이(二)가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삼(三), 사(四) 및 십도 또한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일의 체를 이루기 때문에 ‘연을 따른다[隨緣]’고 하고, ‘머무르지 않는다[不住]’고 하는 것이다.
‘일의 사[一事]로 일의 많음[一多]을 분별한다’라는 것에서, 일로 말미암아 십이 있으므로 만약 그 일을 취한다면 이(二), 삼(三), 나아가 십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일을 부를 때에 열 개[十]가 모두 입으로 “나도 일”, “나도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일(一)의 다(多)이기 때문에 ‘일의 다를 분별하므로 곧 다한다’라고 한 것이다.
‘다른 사[異事]로 일의 많음을 분별한다’ 등은, 이(二)를 부를 때에 열 개가 모두 입으로 “내가 바로 이(二)” 등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로 일의 다를 분별하므로 다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이른바 이(二)로써 십을 다하고, 삼(三)으로써 십을 다하며, 나아가 십으로써 십을 다하는 것이 모두 처음 1전(錢)의 다함 없는 덕인 것이다.
【문】 둘의 사[二事]로 둘의 많음[二多]을 분별하는 것은 바로 두 번째 돈의 다함인데, 이 두 번째가 다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답】 일의 사[一事]로 일의 많음을 분별하고, 삼의 사[三事]로 삼의 많음[三多]을 분별하는 등이 모두 이 두 번째가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 법장[藏師]이 말한 “일 가운데 십[一中十]이기 때문에 다하는 일(一)이다”라는 것은, “십 가운데 일[十中一]이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 일이다”라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답】 같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십 가운데 일’이 곧 다하지 않음이 되는가?
【답】 일 가운데 십을 갖추었으므로 “일 가운데 십이기 때문에 다한다”라고 한 것이니, 십을 갖춘 일이 다만 첫 번째의 일이 되어 십을 다하는 것이요, 두 번째와 세 번째 나아가 열 번째가 되어서 십을 다하는 것이 아니므로 “십 가운데 일이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이른바 ‘일 가운데 십’의 일(一)이란 이(二)를 갖추고 삼(三)을 갖추고, 나아가 십을 갖춘 일이다. ‘십 가운데 일’의 일이란 이가 되어 십을 거두지 못하고, 삼이 되어 십을 거두지 못하며, 나아가 십이 되어 십을 거두지 못하는 일인 것이다.
『대기』 【문】 ‘일의 사[一事]로 일의 많음을 분별한다’는 것은 열 개의 동전[十錢]에 통하는 것인가?
【답】 그렇다. 이른바 동전의 체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며, 또 지위를 따라 ‘이의 사[二事]로 이의 많음을 분별한다’는 등도 또한 얻을 수 있으니, 나머지 문(門)도 유례하면 그러하다. 동전의 지위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동전의 체를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다. 이 중에 ‘다른 사[異事]로’ 등은, 지금 변계(遍計)의 사람이 인연을 익히기 때문에 지위로 나열한[列位] 이구(離垢)36) 등의 다른 사[異事]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만약 인연의 사람에게 연기를 익히게 하면 하나하나가 십을 갖추기 때문에 그 환희(歡喜)37)에 갖추어진 십 가운데 이구 등이 다른 사가 됨을 기준으로 하였을 뿐이지, 열위의 이구 등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또 해석하는 가운데 1문(門)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과 다하지 않음을 분별하였으니, 처음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다할 수 없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 것이요, 뒤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다함이 없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 것이다.
【문】 다른 사[異事]라는 것은 다만 환희에 갖추어진 이구 등일 뿐이요, 열위의 이구가 아님을 어떻게 아는가?
【답】 법장[藏師]이 말하기를, “다만 자기 1문(門)의 다함 없음[無盡]만을 거두는가, 나머지 다른 문의 무진도 역시 거두는가?”라고 하였다. 혹은 모두 거두며, 혹은 다만 자기 1문의 무진만을 거두니, 왜냐하면 만약 자기 1문의 무진이 없으면 나머지 일체 문 중의 무진이 모두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처음 문의 동체(同體)가 곧 같음[同]과 다름[異] 두 문 중의 무진을 거두면, 무진이 그 원만한 구극의 법계[圓極法界]를 다하여 다 거두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이상).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나머지 다른 문[異門]이라는 것은, 위에서 ‘1문 가운데 이미 십이 있으나 이 십이 다시 스스로 상즉(相卽)하고 상입(相入)해서 중중(重重)으로 무진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스스로 거둔 것을 기준으로 하여 나머지 다른 문을 삼기 때문에 열위의 이구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기』 ‘또 일의 사[一事] 가운데……뜻은 ‘서로 이것이지 않으니[不相是]’ 곧 이 다(多)이며’ 등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이 가운데 다함과 다하지 않음의 뜻이다. 그러나 처음 다함의 구절 가운데 ‘일의 많음[一多]’의 뜻을 거듭 풀이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4구로 허물을 보호하고’ 등에 대해서이다.
【문】 만약 일(一)이 됨에 집착한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답】 단(斷)・상(常)의 허물이 있게 된다. 이른바 십이 있어서 바야흐로 일이 있는 것이니, 십이 없이 일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단(斷)이요, 십이 없이 일에 집착하기 때문에 바로 상(常)이다.
‘그른 것을 제거한다’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일인가?
【답】 아니다. ‘일이 곧 십’이기 때문이다.
【문】 십인가?
【답】 아니다. ‘십이 곧 일’이기 때문이다.
【문】 일이기도 하고 십이기도 한가?
【답】 아니다. 서로 어긋남을 여의기 때문이다.
【문】 일도 아니고 십도 아닌가?
【답】 아니다. 희론을 여의기 때문이다.
‘덕을 나타낸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일인가?
【답】 그렇다. 십이 곧 일이기 때문이다.
【문】 십인가?
【답】 그렇다. 일이 곧 십이기 때문이다.
【문】 일이기도 하고 또 십이기도 한가?
【답】 그렇다. 쌍으로 존재해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문】 일도 아니고 십도 아닌가?
【답】 그렇다. 기다림[待]을 끊고 상(相)을 여의기 때문이다.
‘다른 사[異事]도 준하면 같다’라는 것은, 첫 번째 동전에서 다함과 다하지 않음을 논하고 4구(句)로 허물을 보호하는 등과 같아서, 두 번째 동전 등도 또한 그러하니 준하여 알라는 것이다.
‘필요로 한다[須]는 것은 연으로 이루어진다[緣成]는 뜻이다’라는 것에서, 어떤 곳에서는 “연(緣)이란 필요로 한다는 뜻이며, 필요로 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없다[無他]는 뜻이다”라고 하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필요로 한다는 것은 연(緣)의 뜻이며, 연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첫째는 위를 향해 가는 것[向上去]이고, 둘째는 아래를 향해 오는 것[向下來]이다’라는 것은, 오직 처음 1전의 전체[擧體]가 이(二)가 되며, 나아가 십이 되기 때문에 ‘향해 간다’라고 했을 뿐이지,
장차 갈 것임을 기준으로 하여 ‘간다’라고 한 것은 아니다. 십에서부터 일을 향하여 전체가 오기 때문에 ‘온다’라고 했을 뿐이지, 장차 올 것임을 기준으로 하여 ‘온다’라고 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이 즉문(卽門)은 바로 형탈문(形奪門)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오고 감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온다’, ‘간다’라고 했을 뿐이요, 앞의 중문(中門)은 서로 따른다는 뜻이기 때문에 장차 오고 장차 갈 것임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온다’, ‘간다’라고 한 것이다.
‘자기의 지위는 움직이지 않고 항상 오고 간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앞의 중문(中門)은 바로 역문(力門)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즉문(卽門)은 바로 체문(體門)이기 때문에 ‘지위가 움직이는 문[位動門]’인데, 어떻게 ‘자기의 지위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가?
【답】 비록 ‘일이 곧 이(二)이고, 일이 곧 삼(三)이며, 나아가 일이 곧 십이다’라고 하였으나 일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열 번째 동전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자기의 지위는 움직이지 않고서 오고 간다’라고 한 것이다.
『대기』 ‘오고 간다는 것은 연을 따른다는 뜻이니 곧 이것은 인연의 뜻이며,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을 향한다는 뜻이니 곧 이것은 연기의 뜻이다’라는 것에서, 법장[藏師]이 말하기를 “오고 가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바로 한 물건이기 때문이다”(이상)라고 하였다. 각각 하나의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또한 서로 인정하는 것이요, 평등하여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연기(緣起)라고 이름한 것이니, 그러므로 ‘근본을 향한다는 뜻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법융기』 ‘인과 연이 서로 바라본다’ 등에서, 인연의 동전이란 하나하나가 ‘힘이 있어 생(生)할 수 있는 온전한 힘’을 서로 도와 10전을 이루고, 연기의 동전이란 ‘힘이 없어 생함이 없는 빈 힘’을 도와서 10전이 있다. 만약 ‘힘이 없어 생함이 없는 빈 힘’을 돕지 않는다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연이 흩어지면 없고 연이 모이면 있는 것이다. 성기(性起)의 동전이란 자체가 공하기 때문에 연이 모이고 연이 흩어짐에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는 것이다.
『대기』 ‘우선 변계 현상[遍計事]의 동전에 의지하여 의타ㆍ인연ㆍ연기의 동전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또한 연으로 생긴……가리켜 보임에 의지했다고도 할 수 있으니’ 등에서, 처음의 마디는 변계의 동전에 의지하여 인연ㆍ연기의 동전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동전으로 비유를 삼은 것이 아니다. 이른바 3성(性)의 차례대로 변계의 현상에 의지하여 의타의 법을 나타내고, 의타의 법을 기준으로 하여 인연ㆍ연기 등을 나타낸 것이다. 뒷마디의 의미는 동전으로 설명한 것이니, 어떤 이는 “처음에 다시 차례대로 얕은 것에서부터 깊은 것을 나타냄은 경문과 같으니 알 수 있으며, 또한 아래에 의지해도 가능하다.
이 ‘헤아리는 법[數法]’을 밝힌 이유는, 미혹되고 어리석은 이를 이해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거듭 풀이하기를, “연으로 생긴 법은 자성이 없어서 이름과 모양[名相]을 여의므로 끝내 얻을 수 없음을 곧바로 가리켜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변계의 사물에 집착하여 연기법에 미혹한 자가 이해하는 10전(錢)’에 의지해서 헤아리는 법[數法]이 위에서 밝힌 ‘모양을 여읜 법’과는 머무름[逗留]이 완전히 다름을 나타낸 것이다. 이른바 우선 이 세속에서 아는 돈 세는 법도 오히려 이와 같이 깊고 깊으며 현묘(玄妙)할 수 있는데, 하물며 저 성인의 지혜로 증득한 말을 여의고 모양[相]이 끊어진 법이겠는가? 이와 같이 나타낸 것이나, 다만 글자에 의지하여 앞에 있기 때문에 문장의 모습이 작아져서 숨은 듯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두류(逗留)’란 사유(事由)이다.
『남악관공기(南岳觀公記)』 돈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변계(遍計)ㆍ의타(依他)ㆍ인연(因緣)ㆍ연기(緣起)ㆍ성기(性起)ㆍ무주(無住)ㆍ실상(實相)이다.
첫째, 변계의 돈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범부와 이승(二乘)의 소견이다. 범부는 다만 이 돈의 모나고 둥근 모양만을 보고 4대(大)38)와 4진(塵)39)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보지 못하며, 또한 다만 일이 이도 아니고 삼도 아니라는 등의 차별된 상(相)만을 보고 끝내 돈의 자성이 없음을 보지 못한다. 이승은 점차로 ‘임시로 모인 공한 상[假集空相]’임을 보지만 이 또한 여전히 변계의 돈이 될 뿐이니, 이승이 비록 4상(相)40)을 보지만 아직 법공(法空)의 이치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을 모두 변계의 돈[遍計錢]이라 이름한다.
삼승의 사람은 바야흐로 이 돈이 의타와 인연으로 일어난 것이며 일어날 때에 남이 없기[無生] 때문에 의타라 이름함을 이해하지만, 아직 인연의 멀고 가까움이 둘이 아님[無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승에 있어서는 이 인연에 멀고 가까움이 없음을 밝히기 때문에 인연의 돈[因緣錢]이라 이름하나, 앞의 병에 따라서 그 병을 다스리기 때문에 ‘인연’이라 이름하였을 뿐이다.
삼승은 가깝고 먼 것이 없다는 뜻을 나누어 설명하나, 지금은 일승의 가깝고 먼 것에 둘이 없다는 뜻을 곧바로 밝힌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문(門)은 다만 연기하여 앞에 나타나 힘이 있어 과를 낳는 뜻을 밝혔을 뿐이다.
다음으로 연기는 성품이 없어서 공(空)하여 평등한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연기의 돈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평등하여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연기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공(空)과 유(有)는 둘이 아니고 혼융하여 하나의 체가 되어 자체가 공한 뜻이기 때문에 성기관(性起觀)이라 이름함을 밝혔다. 이들은 대부분 12연생(緣生)의 열 번의 관(觀)을 기준으로 하여 세운 것이니, 그러므로 혹자는 “삼승의 뜻을 따른다”라고 한다.
【문】 위의 세 문(門)에 어떤 뛰어난 곳이 있기에 다시 무주ㆍ실상 등을 설하는가?
【답】 다시 또한 뛰어남이 있으니, 이른바 무주를 논할 때에 공(空)을 말하면 곧 족하므로 유(有)의 말을 덧붙이지 않으며, 유(有)를 말해도 또한 그러하여 그 1척(尺)을 말하는 것이 곧 법을 만족하는 것이다. 나머지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들 때마다 곧 족하고, 성품마다 모두 원만하여 본래의 지위를 고치지 않고 만족하게 하며, 앞의 이름을 옮기지 않고서 원만하게 하니, 좁은 것을 펼쳐서 넓게 하지 않으며 비루한 것을 받들어서 높게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무주라는 것은 ‘움직이지 않음[不動]’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실상이란, 처음에는 무명진원(無名眞源)의 문(門)에 들어가고 끝에는 연기 구경(緣起究竟)의 가장자리를 사라지게 하니, 끝을 이해하여 행에 들어가고 행이 이루어져 증득함에 들어가는 것이다.
【본문】보살의 일념……걸림 없는 변재.
『대기』 ‘초발심 보살의 일념 공덕을……일문(一門)을 기준으로 하여’라는 것은, 처음 문의 동체(同體)이다.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다른 문[異門]을 기준으로 하여’라는 것은, 두 번째 문 이후의 동체이다. ‘처음 발심할 때에……행의 체를 기준으로 하여’라는 것은, 바로 이체문(異體門)인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뜻이 있으나 지금 풀이한 뜻은, 동체와 이체를 묻지 않고 일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 없음[無盡] 등을 나타낸 것은 바로 첫 번째 동전의 무진을 나타낸 것이요, 동체와 이체를 묻지 않고 이문(異門)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은 바로 두 번째 동전 이후의 뜻이니, 1전(錢)이 곧 10전이라는 것과 같다. ‘행의 체를 기준으로 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위에서부터 비록 일문이 무진을 나타냄을 밝혔으나 또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이라 하고서 그 갖추어진 무진의 거듭됨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일문(一門)과 이문(異門) 안의 갖추어진 것을 가리켰으니, 그러므로 ‘1전이 곧 10전이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행의 체를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이라는 것은, 혹자는 “초발심이 곧 만 가지 행(行)의 체이기 때문이며, 또 믿음이 원만하여 부처를 이룸이 바로 행불(行佛)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월이 모두 같으니’라는 것은, 일념이 곧 9세(世)이기 때문에 아이의 나이가
적지 않고, 9세가 곧 일념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연세가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한 살짜리 여자아이가 임신한 지 50년에 50살 먹은 대장부를 낳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초발심 보살이 50위(位)를 거두어 곧 묘각위(妙覺位)를 이루는 것이다.
‘일이라는 것은 분별이 없다는 뜻이니’라는 것은, 모든 법의 체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같다는 것은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니’라는 것은, 이것이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저것과 같고, 저것이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과 같다는 것이다.
‘같은 곳에 머리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서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니’라는 것은, 머리를 들면 머리 외에 발이 없고 발을 듦도 또한 그러하여 상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곧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짓는 자가 있지 않으며’라는 것은 작용이 없다는 뜻이고, ‘이루는 자가 있지 않으며’라는 것은 체성(體性)이 없다는 뜻이며, ‘아는 자가 있지 않으며’라는 것은 체와 용이 모두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관이니, 체와 용이 없음으로 말미암아서 바야흐로 공한 과[空果]를 이루기 때문이다.
‘법성가’는 증분(證分)이요 ‘다라니장’은 연기분(緣起分)이니, 이른바 머무름이 없는 별교문(別敎門)에서 법의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6상(相)을 밝힌 것은 바로 증분가(證分家)에 들어가는 요문(要門)이요, 동교문(同敎門)에서 방편으로 6상을 설한 것은 머무름이 없는 별교[無住別敎]의 창고를 여는 좋은 자물쇠와 열쇠가 된다.
【문】 가(家)에 들어가는 요문이고 창고를 여는 자물쇠와 열쇠라면, 6상(相) 이외에 따로 들어가는 곳과 여는 곳 등이 있다는 것인가?
【답】 혹자는 “들어가는 곳이 증분이며, 6상이 바로 이 연기분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고, 혹자는 “6상이 곧 법성가와 다라니장이기 때문에 다시 들어갈 곳과 여는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6상 방편은 법체의 교상집성방편(巧相集成方便)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걸림 없는 변재의 체가 삼승의 분제는 아니다’라는 것은, 비록 머무름이 없는 별교이지만 6상 방편으로 언설(言說)을 삼기 때문이니, 이른바 별교에서는 비록 뜻이 곧 말이며 말이 곧 뜻이지만 말과 뜻이 섞이지 않는 것이다.
【본문】 동시구족……『화엄경』과 같다.
『대기』 ‘동시구족상응(同時具足相應)’이란 여러 가지 뜻풀이가 있으니, 혹자는 「대소(大疏)」에 의지하여 동(同)과 이(異)를 원만히 갖추는 가운데 이른바 앞의 아홉 문(門)을 모두 합하여
하나의 대연기법으로 삼고 여러 가지 의문(義門)으로 동시구족의 문장이라 하여 ‘오직 총(總)이요 별(別)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망목(網目)에 의지하여 이른바 ‘이 하나의 티끌이 위의 열 짝[對]을 거두나 동시구족도 또한 뒤의 아홉 문(門)의 현묘한 뜻의 문장을 거둔다’라고 하여, ‘첫마디는 별동시(別同時)의 뜻이요, 뒤의 마디는 총동시(總同時)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두 뜻이 모두 그러하니 국한하여 집작함이 불가하다. ‘동시’라는 말을 어떤 이는 “해인이 원만히 밝은 때이다”라 하고, 어떤 이는 “세간에서 나눈 12시 중에 무엇을 말하는가를 따랐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 두 가지 설이 모두 일리가 있다고 하여 그 가운데 10문(門)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른바 인법(人法)ㆍ이사(理事) 등은 「보법장(普法章)」에 의지하여 오직 ‘5쌍 10법[五對十法]’으로 묶은 것이요, 「대소」 등의 10쌍 20법(法)과는 같지 않으며, 다만 열고 합하였을 뿐이지 뜻에 가감이 없다.
‘10문(門)’이라는 것은 무슨 이유로 10법(法)을 ‘문(門)’이라고 하였는가? 이른바 지혜로 들어가는 뜻이 같기 때문이다.
‘상응하여 앞과 뒤가 없다’라는 것은, 혹자는 “시(時)와 법(法)이 상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혹자는 “10보법(普法)에서 매 하나하나의 법이 서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인다라망경계(因陀羅網境界)’라는 것은, 제석 궁전[帝釋殿]의 오색 구슬망이 서로 서로 그림자를 내놓아서 겹겹이 끝없는 것과 같으니, 연기법은 법마다 그러하여 서로 거두되 거두어지는 대상[所攝]이 다시 거두는 주체[能攝]가 되어 거듭거듭 서로 거두어 다함이 없다. 다함이 없기 때문에 안을 향하여 마음을 찾음에 들어갈수록 오히려 밖이요, 밖을 향하여 가[邊]를 찾음에 나올수록 오히려 안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비유하면 왕궁에 많은 겹문이 있는 것과 같아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때에 이른바 이 문으로 들어가면 곧 안이 되어야 할 것이나 그 문 안에 다시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앞서 들어온 곳이 도로 밖이 된다. 또 이른바 이것에 들어가면 곧 안이 되어야 할 것이나 그 문 안에 또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먼저 들어온 곳이 도로 밖이 되니, 이와 같이 겹겹이기 때문에 들어갈수록 오히려 밖인 것이다.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에도 이른바 이 문을 나가면 곧 밖이 되어야 할 것이나 그 문 밖에 또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앞서 나온 곳이 도로 안이 되니, 이와 같이 겹겹이기 때문에 나올수록 오히려 안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계’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나머지 문(門)을 가려냄이 어찌 증득한 지혜의 경계[證智境界]가 아니겠는가마는, 왜 이 문만이 치우쳐 이 말을 얻는가?
【답】 『십지경론』에서 “제망차별(帝網差別)이라는 것은 진실의상(眞實義相)이니, 진실의상은 증득한 자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논의 문장을 따라서 이 문(門)의 이름을 세운 것일 뿐이지, 나머지 문이 지혜의 경계가 아니라고 한 것은 아니다.
【문】 ‘여기서 앞의 10문(門)을 갖추었다’는 것은 한 가지의 10보법(普法)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문을 따라 각각 따로 세우는 것인가?
【답】 두 가지 뜻을 모두 얻으니, 이른바 문마다 모두 이르기를 “앞의 열을 갖추었다”라고 하기 때문에 한 가지의 10보법도 또한 얻지만, 문을 따라 섞이지 않아서, 나아가 백 개의 문, 천 개의 문에 각각 갖추어진 바가 있기 때문에 각각 다름도 또한 얻는 것이다.
‘비유를 따름이 다르다’는 것은, 법을 기준으로 하면 마땅히 “거듭거듭 다함이 없음을 따라 다를 뿐이다”라고 해야 한다.
【문】 왜 처음 문에는 이 가려낸다는 말이 없는가?
【답】 이미 이 처음의 문이라 남아서 넘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뒤의 여러 문을 대(對)하여 가려낸다면 “앞뒤의 다름이 없음을 따를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머지도 준하면 알 수 있다’41)라는 것은, 앞 문의 10법을 아울러 구족하고, 구족하기 때문에 이것에 준하면 마땅히 “인법(人法) 인다라와 나아가 인과(因果) 인다라 등의 나머지 문도 유례하면 그러하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 번째 문의 끝에 또한 이 말이 있는 것이다.
‘비밀은현구성(秘密隱現俱成)’이라는 것은, 어떤 글에서 “하나의 미진(微塵)에서 정수(正受)42)에 들어가고 한 터럭의 끝머리에서 삼매에서 일어나니 이와 같이 자재하여 저것이 숨고 이것이 나타나 정수와 ‘정(定)에서 일어남’이 동시여서 비밀이 이루어진다. 어떤 글에서는 “은(隱)은 곧 비밀이요, 현(現)은 곧 나타남임을 비밀은현구성문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으니, 처음의 의미는 숨음과 나타남이 일시에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밀’이라는 것이요, 뒤의 의미는 ‘비밀로 숨음[秘密隱]’이 ‘나타남[現]’과 더불어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연을 따름이 다르다’는 것은, 바로 기연(機緣)이니, 그러므로 「십현장(十玄章)」에서 “연을 따라 보는 바이기 때문에 늘어나고 줄어듦이 있다”라 하였다. 또 “필요로 하는 바의 연[所須緣]이니, 이른바 10보법(普法)에서 사람을 필요로 하면 사람은 나타나고 나머지는 숨으며, 나머지를 필요로 함도 또한 이와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미세상용안립(微細相容安立)’이라는 것에서, ‘미세’는 품는 주체[能含]를 지목한 것이요, ‘상용’은 품는 대상[所含]을 지목한 것이며,
‘안립’은 주체와 대상[能所]을 통틀은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뒤집어서 “미세는 품는 대상이고, ‘상용’은 품는 주체이며, ‘안’은 편안함의 주체이고, ‘입’은 세울 대상이다”라고 하였다. 아래의 ‘일다상용문’43)은 하나가 많음을 용납하고, 많음이 하나를 용납하는 등의 두 가지 뜻을 갖추니, 이 미세문(微細門)은 하나가 많음을 용납하는 뜻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옛사람이 이르기를 “유리병에 겨자가 아주 많이 담긴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또한 “미세라는 것은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른바 티끌이 커지지 않고서도 능히 찰토(刹土)를 용납하고 찰토가 작아지지 않고서도 티끌 안에 들어가니, 이와 같은 도리가 깊고 깊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상용’이라는 것은, 하나가 많음을 용납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하나의 법이 모두 또한 이와 같기 때문이다.
‘안립’이라는 것은, 하나와 많음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 “만약 이 신통변화로 지은 것이라면 안립이라 말하지 않으니, 곧바로 이 연기의 실덕[緣起實德]이어서 법이 그러하며 서로 용납하기 때문에 ‘안립’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상(相)을 따름이 다르다’는 것은, 이는 상에 나아가 말한 것이니, 이른바 소상(小相)ㆍ대상(大相)ㆍ일상(一相)ㆍ다상(多相) 등이다.
‘십세격법이성(十世隔法異成)’이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마땅히 ‘구세격법(九世隔法)’이라고 해야 하거늘, 왜 총(總)의 일념(一念)을 아울러 취하여 ‘격법’이라 하는가?
【답】 총별의 시[總別時]로 총별의 법[總別法]을 격하는 것이 또한 어려움이 없어서이다.
‘세간을 따름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하나의 세간 중에 각각 10법을 갖추었으니, 이것이 바로 세간의 갖출 바이기 때문이다.
‘제장순잡구덕(諸藏純雜具德)’이라는 것은,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에 의지하여 세운 것이다.
‘문(門)을 따름이 다르다’는 것에서, 하나의 행을 오래 닦음을 ‘순문(純門)’이라 하고, 만 가지 행을 가지런히 닦음을 ‘잡문(雜門)’이라 한다.
‘일다상용부동(一多相容不同)’이라는 것은, 옛사람이 말하기를 “미세상용과 일다상용의 두 문이 어떻게 다른가?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비록 같지만 뜻이 다르니, 이른바 무엇을 서로 용납하는가? 그러므로 일다상용문이 있는 것이다. 서로 용납하는 모양[貌]은 어떠한가? 그러므로 미세상용문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치를 따름이 다르다’는 것은, 진여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과의 도리(道理)이니, 이른바 인(因)이 과(果)를 갖추고 하나가 많음을 갖추는 등이기 때문이다.
‘제법상즉자재(諸法相卽自在)’라는 것은, 인연의 당체(當體)가 인에 즉(卽)하고 과에 즉하니, ‘이루는 인[能成因]’ 이외에 따로 ‘이루어지는 과법[所成果法]’이 없는 것이다.
‘용(用)을 따름이 다르다’는 것은, 덕용(德用)이 자재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모든 체가 서로 즉하는[擧體相卽] 용이다.
‘또한 성(性)에 의지했다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머무름이 없는 법성[無住法性]이다.
【문】 나머지 문은 어찌하여 무주 법성에 의지하지 않는가?
【답】 비록 모두 성에 의지하나 멀고 가까움의 다름이 없지 않으니, 이른바 ‘중문(中門)’은 다만 역용(力用)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 것이요, 여기에서는 머무름이 없는 본성이 이룬 법은 당체(當體)가 곧 공(空)하여 전체(全體)가 서로 즉하니 성(性)과 긴밀하게 가깝기 때문이다.
‘유심회전선성(唯心廻轉善成)’이라는 것은, 11조림심(稠林心)과 10종성기심(種性起心) 등이다.
‘마음을 따름이 다르다’는 것은, 오직 마음을 회전하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탁사현법생해(托事現法生解)’라는 것은, 의탁한 현상의 모양[事相]이 곧 나타날 다함이 없는 법체(法體)이니, 이것에 의탁하여 따로 표할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따름이 다르다’는 것은, ‘이해를 냄[生解]’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화엄략책(花嚴略策)』 ‘십(十)’은 다함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니, 하나하나가 현묘함을 지어 한 법을 듦에 따라 곧 십을 갖추는 것이다.
이른바 ‘첫째, 동시구족상응문’은 마치 바다의 한 물방울이 백 개의 시냇물 맛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고, ‘둘째, 광협자재무애문’은 한 자 지름의 거울에서 천 리(里)의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으며, ‘셋째, 일다상용부동문’은 한 방안에 천 개의 등이 빛마다 거쳐 들어가는 것과 같고, ‘넷째, 제법상즉자재문’은 금(金)과 금색(金色) 두 가지가 서로 여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다섯째, 비밀은현구성문’은 맑은 하늘에 조각달이 어둡고 밝음을 서로 비추는 것과 같고, ‘여섯째, 미세상용안립문’은 유리병에 겨자가 아주 많이 담긴 것과 같으며, ‘일곱째, 인다라망경계문’은 두 개의 거울이 서로 비춤에 찬란한 빛을 전하여 서로 쏟아서 번갈아 끝이 없음을 내는 것과 같고, ‘여덟째, 탁사현법생해문’은 서 있는 상(像)이 팔을 늘어뜨림에 눈 닿는 곳이 모두 도(道)인 것과 같으며, ‘아홉째 십세격법이성문’은 하루 저녁 꿈에 백 년을 방황하는 것과 같고, ‘열째 주반원명구덕문’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음에 뭇 별들이 받드는 것과 같다.
『원통수좌기(圓通首座記)』44) 우선 내 몸을 기준으로 하여 열 쌍의 10문(門)을 논한다면, 첫째는 내 5척의 몸이 이해를 내도록 표한 것을 교(敎)로 삼고, 곧 설명한 것[所詮]45)으로 뜻[義]을 삼는 것이다. 둘째는 내 5척의 몸이 곧 법성과 같음을 이치[理]로 삼으니, 경에 “중생이 곧 법신이요 법신이
곧 중생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며, 오체사대(五體四大)가 확실히 차별되는 것으로 현상[事]을 삼는다. 셋째는 내 5척의 몸이 머리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공적하여 걸림이 없는 것으로 관하는 경계[所觀境]를 삼고, 이와 같이 관하는 자는 바로 나의 심지(心智)이니, 관하는 지혜[能觀智]로 삼는다. 넷째는 내가 지은 선악ㆍ무기(無記) 등의 행이 행이 되고, 이 행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범부의 지위 등을 얻어 지위로 삼는다. 다섯째는 내가 지은 업이 인(因)이 되고, 이 업으로 말미암아 감응된 보(報)가 과(果)가 된다. 여섯째는 내 5척의 몸이 8만 마리의 벌레들이 의지할 처소이기 때문이며, 또 모든 부처가 내 털구멍에 두루하여 법을 설하며, 또 경에 “중생이 세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의보[依]가 되고, 바로 유정(有情)이기 때문에 정보[正]가 된다”라고 하였다. 일곱째는 내 본각의 성품[吾本覺性]이 본래 항상 머물러서 옮기지 않고 움직이지 않음이 체(體)가 되고, 완연히 현현함이 용(用)이 된다. 여덟째는 내 5척의 몸은 인(人)이 되고, 연기법의 거두는 바이기 때문에 법(法)이 된다. 아홉째는 내가 지은 선하지 않은 법이 진(眞)을 거스르기 때문에 역(逆)이 되고, 지은 선과 비슷한 행이 순(順)이 된다. 열째는 나의 당과불(當果佛)이 안으로 내 몸을 훈습하여 잠시도 버려두거나[捨] 필요로 함[須]이 없으니, 내가 만약 선을 지으면 도와서 증장(增長)케 하고, 내가 만약 악을 지으면 싫증냄에 의지하여 벗어나게 하는 것이 응(應)이 되며, 이는 나의 미혹한 마음이 얻은 바이기 때문에 감(感)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 5척의 몸이 본래 스스로 만족하여 원만하고[圓] 나누어짐[分]에 곧 교(敎) 등의 열 쌍이 갖추어짐이 동시구족상응문이 되고, 5척을 움직이지 않고 시방 삼제(十方三際)에 두루함이 광협자재무애문 등이 된다. 그러므로 행자(行者)가 만약 이 관을 닦으면 범부의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곧 자체가 비로(毘盧)이며, 다함 없는 법해(法海)의 총상(總相)인 보현이 곧 내증(內證)의 국토이다. 또한 이 화장세계이니,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규봉선사행원품초(圭峰禪師行願品抄)』 풀이하면, 가죽을 벗겨 종이로 삼고 피를 내서 먹으로 삼으며
뼈를 꺾어 붓으로 삼아서 베껴 쓴 경전 등의 문장에 이르기를 “두 번째는 관지(觀智)를 기준으로 하여 해석한 것이니, 이른바 이 몸을 관찰해보면 가죽이나 뼈가 도무지 정해진 실체가 없어서 전체가 완전히 공(空)하여 나[我]와 내 것[我所]이 없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눈으로 보면 몸의 상[身相]이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물거품과 불꽃, 파초와 같아 이미 자체가 없어서 원래 법계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미루어 궁구하면 3제(諦)를 구족하여 공(空)ㆍ가(假)ㆍ중(中)의 미묘한 3관(觀)46)을 이루니, 이 뜻을 자세히 설명하여 이것을 이해할 수 있으면 심기(心機)에 계합(契合)된다. 곧 이 경을 베껴 쓰니, 경은 바로 설명하여 표하는 것이라 뜻을 이해함을 낳기 때문이다. 만약 관찰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미혹되어 상(相)을 취하니 곧 경(經)이 없는 것이다”(이상)라고 하였다. 또한 이 뜻이 마땅하니 화엄을 배우는 사람이 어찌 부지런히 힘쓰지 않겠는가?
『남악관공기(南岳觀公記)』 【문】 10문(門)이 매우 깊어서 알기가 어려우니, 청하건대 우선 문상(門相)을 시설(施設)하여 주십시오.
【답】 열 가지의 연기도리(緣起道理)가 있으니, 이른바 ‘첫째, 동시구족’이라는 것은 법계의 상응하는 도리요, ‘둘째, 인다라망’은 법계의 다함 없는 도리이며, ‘셋째, 비밀은현’은 법계가 서로 이루어지는 도리이고, ‘넷째, 미세상용’은 법계가 가지런히 나타나는 도리이며, ‘다섯째, 십세격법’은 법계 유전(流轉)의 도리이고, ‘여섯째, 제장순잡’은 법계가 덕을 갖추는 도리이며, ‘일곱째, 일다상용’은 법계의 인과 도리요, ‘여덟째, 제법상즉’은 법계 덕용(德用)의 도리이며, ‘아홉째, 유심회전’은 법계가 모여 일어나는 도리이고, ‘열째, 탁사현법’은 법계가 앞에 나타나는 도리이니,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문】 10현연기(玄緣起)의 관법(觀法)을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는가? 만약 10문(門)을 따라서 10관(觀)을 이룬다면 나아가는 마음이 광탕(曠蕩)하여 하나의 관(觀)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10문의 다름을 따라서 그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약 10문을 버린다면 관행(觀行)이 좁아져서 마땅히 다함이 없을 수 없으니 곧 삼승과 같은 것이다.
【답】 이 뜻이 실로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해를 냄[生解]’과 ‘행을 이룸[成行]’이다. 만약 이해를 냄을 기준으로 한다면 10문을 갖추어 설하니, 그렇지 않으면 다함이 없는 이해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행을 이룸’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10문을 갖추어 설하니, 이른바 연기라는 한 마디에 모든 법이 둘이 아님은 곧 손[手]을 나타내거늘, 어찌 많은 문(門)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를 말함이 많음과 어긋나지 않고 많음을 말함이 하나와 어긋나지 않으니, 경에서 “만약 연기법을 본다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고 한 것이 이를 이르는 것이다. 만약 하나의 연기관(緣起觀)을 이룬다면 10문이 상응할 것이다.
【문】 그 성해(性海)의 과분(果分)은 인다라(因陀羅) 등을 논하지 않는지라 심지(心智)의 길이 끊어졌으니 오직 성해를 관한다면 족하거늘 어째서 반드시 10문관(門觀)을 이루어야 하는가?
【답】 다만 성해만을 관한다면 그 관은 치우침이 있으니, 저 삼승 보살도 오히려 2제(諦)를 쌍으로 비추어 공(空)과 유(有)에서 함께 노니는 것을 ‘머무름이 없음’이라 이름하는데, 하물며 일승이겠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어난다면 처음과 끝을 여의기 때문에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이 합하여 하나의 분제[一際]가 되어야 바야흐로 머무름이 없는 연기의 중도관(中道觀)이 될 것이다.
【문】 일승 행자(行者)는 어느 지위에 이르러야 10문의 걸림이 없는 용(用)이 있는가?
【답】 해행위(解行位)에 이르면 바야흐로 대용(大用)이 있으리니, 만약 견문(見聞)이 생긴다면 겨우 금강종(金剛種)을 이룰 뿐이다. 또 보고 듣는 가운데 곧 걸림 없는 대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문】 광협문(廣狹門)에서 4구(句)와 6구를 어떻게 보는가?
【답】 혹은 넓어서 끝이 없으며, 혹은 분한(分限)이 확실하며, 혹은 넓고 좁음이 함께 존재하고, 혹은 넓고 좁음이 함께 없어지며, 혹은 앞의 넷을 모두 갖추니, 바로 알음알이의 경계[解境]이기 때문이며, 혹은 앞의 다섯을 모두 끊으니 바로 행함의 경계[行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앞의 세 구(句)는 바로 연기하여 현전하는 뜻이요, 다음 한 구는 바로 연기하나 생함이 없는 뜻이다.
【문】 왜 앞의 네 구를 모두 갖추는 것이 바로 알음알이의 경계인가?
【답】 알음알이를 일으키는 사람은 모든 법의 보편과 특수[普別]ㆍ성품과 모양[性相]을 분별하여 아는 것으로 바야흐로 바른 이해[正解]를 일으키니, 만약 분별하여 알지 못한다면 곧 사견(邪見)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두 구는 바로 보편과 특수의 상대함이요, 뒤의 두 구는 바로 성품과
모양의 상대함이니, 「유전장(流轉章)」에 이르기를 “묻기를, 일문무념(一門無念)이면 곧 족하거늘, 어째서 위와 같이 자세히 분별함을 필요로 하는가? 답하기를, 만약 앞에서 저 뜻을 깊이 생각한 것과 같이 하지 않는다면, 중생을 굴복시키지 못함을 볼 것이요, 만약 해(解)와 행(行)의 차별됨을 분별해 알지 못한다면, 곧 망령되게 해를 행으로 삼아 망정[情]으로 이르기를 ‘깨트리지 못한다’라고 할 것이다. 설령 총체적으로는 모른다 하더라도 다만 억지로 마음을 굴복시켜 여러 관(觀)을 지으리니, 모두 말하는 가운데 지은 것이라 참된 행이 아니어서 구경에는 악견(惡見)을 증가시켜 마왕의 그물에 걸리고 이익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백천(百千)의 성내는 양 같은 스님들은 지혜로 닦는 정려(靜慮)가 없는 것이니, 설령 백천 겁이 지나더라도 하나도 열반을 얻음이 없을 것이요, 총민(聰敏)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듣고 법을 설하니 잠깐 동안 생각하고자 하더라도 빠르게 열반에 이를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왜 앞의 다섯을 끊는 경우가 바로 행함의 경계인가?
【답】 오직 ‘법(法)이 바로 1신(身)’임을 총체적으로 관(觀)하기 때문에 다섯 구(句)의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화 존자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말 것이니, 다만 하나를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또 경에서 “모든 법에 대하여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문】 ‘법이 바로 1신’임을 총체적으로 관해서 ‘광(廣)’ 등의 4구를 짓지 않는다면, 광협의 섭수[廣狹攝]로 안 되지 않는가?
【답】 비록 ‘하나의 관[一觀]’을 갖추었으나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필요로 함을 따라 걸림이 없으니, 운화 존자가 말한 것처럼 분별함이 없어 머무르지 않으므로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문】 해(解) 가운데 4구는 어찌하여 분별이 없지 않은 것인가? 또 행경(行境) 가운데 비록 이 하나의 관(觀)이나, 4구를 방해하지 않는 것은 해(解)와 행(行)이 차별되어서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답】 둘이 나란히 각각 통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쳐서 늘어남이 있으니, 이른바 해(解)를 이루고자 하면 하나의 많은 뜻으로 그 해(解)가 치우치지 않고, 만약 행(行)을 이루고자 한다면 곧 이 ‘많음의 한 관[多之一觀]’으로 그 행(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다.
【문】 왜 다만 모두 끊는 것으로 행을 삼는가? 마땅히 “보현의 행 가운데 모든 구(句)의 걸림없는 용(用)을 구족하였다”라고 해야 하는가?
【답】 운화 존자가 “진(眞)ㆍ속(俗) 2제(諦)는 분별지(分別知)가 아니요, 다만 ‘망정으로 보는 것[情見]’을 대하기 때문에 두 상(相)으로 나누었으니, 오직 망정으로 보는
것을 뛰어넘는다면 거스름[逆]과 따름[順]이 서로 응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섯을 끊음을 안다는 것은 오직 망정으로 보는 것을 뛰어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문】 앞의 다섯 구(句)를 끊어서 하나의 관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 만약 넓다고 말한다면 나머지 말은 필요 없고, 좁다고 말해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망정으로 보는 것을 뛰어넘으면 넓고 좁음이 서로 응하는 것이다. 또 옛사람이 “걸음[行步]은 바로 해(解)요, 걸음이 아닌 것은 바로 행(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에 있는 것이다. 임(林)대덕이 말하기를 “총(總)ㆍ별(別)의 상(相)을 여읨이 바로 모든 법의 구경의 체(體)이니, ‘넓어서’ 등의 4구(句)를 끊는 것이 바야흐로 ‘넓어서’ 등의 구경이 되기 때문에 별상(別相)의 모든 연을 모두 끊음이 바로 이 구경의 총상(總相)임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해(解)’란 바로 수행에 나아가는 자의 해(解)요, ‘경계[境]’라는 것은 넓고 좁음 등의 법이니, 처음 수행하는 사람이 연기분(緣起分)의 걸림이 없는 법을 ‘알아야 할 대상[所解]’으로 삼기 때문이다. ‘행(行)’이란 바로 연기분의 보현의 행이요, ‘경계’는 바로 십불 성해(性海)이니, 이른바 연기분을 행하는 사람이 저 성해(性海)를 행함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한 ‘일승 행자는 오직 국토해(國土海)를 닦는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기』 ‘『화엄경』과 같다’는 것은, 옛사람이 이르기를 “『화엄경』의 제명(題名)에서 대방(大方)은 기세계[器界]47)요, 광불(廣佛)은 불세계[佛界]이며, 화(花)는 바로 인(因)이니, 위로 등각(等覺)에서 아래로 6취(趣)48)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중생계[生界]이다. ‘엄(嚴)’은 이 세 가지 연기가 서로서로 융즉(融卽)해서 원만하게 밝고 자재한 것이요, ‘경(經)’은 앞의 경계에 대해 6상(相)을 관하는 지혜로 해(解)와 행(行)을 꿰어 가져서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니, 만약 관하는 지혜가 틈이 있어서 계속 이어질 수 없다면, 꿰어 가짐이 경(經)은 아닌 것이다. ‘총(總)’은 일곱 자의 제명이요, ‘별(別)’은 다함 없는 품(品)과 회(會)이며, ‘동(同)’은 품과 회가 모두 같은 것이요, ‘이(異)’는 품과 회가 각각 다른 것이며, ‘성(成)’은 연기(緣起)로 모여 이루어짐이며, ‘괴(壞)’는 품과 회가 각각 머무르는 것이다.
『화엄금관초(花嚴錦冠鈔)』 첫째, 경의 제목을 풀이하는 것이니……‘대(大)’ 등의 일곱 자를 간략히
일곱 문(門)으로 분별하겠다…….
네 번째49) 널리 펼쳐져 끝이 없다[展演無窮]는 것은, 미세한 것에서부터 드러난 것에 이르기까지 대략 여덟 가지가 있고, 자세하게는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장 청정한 법계를 억지로 이(理)와 지(智) 두 문으로 나누니, 곧 보리와 열반의 다름이다. 둘째는 이(理)에서 체(體)ㆍ상(相)ㆍ용(用)을 열어 대방광(大方廣)으로 삼고, 지(智)에서 인(因)ㆍ과(果)를 열어 불화엄(佛花嚴)으로 삼는 것이다. ‘엄’은 인과에 통하기 때문에 연합(連合)해서 설명[詮]을 이룸을 이에 ‘경(經)’이라 이름하니, 곧 제목의 일곱 자에서 위의 둘은 법을 펼친 것이요, 아래는 모두 처소를 펼친 것이다. 셋째는 일곱 자를 펼쳐서 첫 번째 회상을 이루니, 첫 번째 회상이 총(總)이기 때문이다. 저기에 10해(海)와 10지(智)가 있고, 10해 가운데 체ㆍ상ㆍ용이 있으니 곧 ‘대방광’이요, 10지 중에 인이 있고 과가 있으니 곧 ‘불화엄’이다. 이것을 설명해 풀이함을 곧 ‘경’이라 하니, 나머지는 모두 이것에 유례하라. 넷째는 첫 번째 회상을 펼쳐서 뒤의 여덟 회상을 이루고, 여덟 회상 중에 네 가지 인과가 있으니 그 관할 대상[所觀]과 증득할 대상[所證]이 곧 ‘대방광’이요, 관하는 주체[能觀]와 증득하는 주체[能證]는 모두 ‘불화엄’이다. 다섯째는 법계 동류(同類)의 찰토 가운데 두루 펼침에 모두 아홉 회상이 있다. 여섯째는 동류의 찰진(刹塵)에 두루한 것이다. 일곱째는 법계 이류(異類)의 찰토 가운데 두루한 것이다. 여덟째는 법계 이류의 찰진에 두루한 것이니, 동(同)과 이(異)에 각각 주반(主伴)을 겸하면 곧 열 가지[十重]가 이루어진다. 혹은 허공 진도(虛空塵道)와 제망 찰토(帝網刹土)에 두루하는 것으로 10중(重)을 삼으나, 이는 법계 안에 하나의 진(塵)과 하나의 찰토가 있지 않으니 이 경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大經』50)에서 “비로자나불의 원력이 법계의 일체 국토 가운데 두루하여 항상 위없는 법륜[無上輪]을 굴린다”라고 하였다. 또 이곳에서 부처님께서 앉아 계심을 보는 것과 같아서 일체 티끌 중에서도 또한 그러하니, 불신(佛身)이 가지도 않고 또한 오지도 않지만 모든 국토에서 모두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다섯 번째 ‘말아 거두어 서로 다한다[卷攝相盡]’는 것은, 이른바 이류(異類)의 찰진(刹塵)에서 말한 것이 이류의 찰토[刹] 중에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고, 이류의 찰토 중에서 말한 것이 동류(同類)의 찰진에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으며, 동류의 찰진에서 말한 것이 동류의 찰토 중에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동류의 찰토 중에서 말한 것이 보광당(普光堂)의 여덟 번째 회상에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으며,
여덟 번째 회상에서 말한 것이 첫 번째 회상에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첫 번째 회상에서 말한 것이 제목 중의 일곱 글자를 벗어나지 않으며, 제목 중의 일곱 글자가 이(理)와 지(智)를 벗어나지 않고, 이와 지가 청정한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 청정한 법계의 이름이 또한 체(體)를 안립(安立)할 수 없으니, 이는 자취를 없애고 흔적을 끊어서 말과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할 바이다. 그러므로 『대경(大經)』에서 “법성은 본래 공적(空寂)하여 취할 것도 없고 또한 볼 것도 없으니 성품이 공(空)한 것이 바로 부처여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실다움[實]과 실답지 않음, 망령됨[妄]과 망령되지 않음, 세간과 출세간은 다만 언설(言說)을 빌려서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섯 번째 ‘펼치고 말음에 걸림이 없어[展卷無礙]……’라는 것은, 펼치고 말음이 동시(同時)라 장애가 있지 않으니, 자세함[廣]이 바로 간략함[略]이요, 간략함이 바로 자세함이라 모두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거두어 관심으로 돌아간다[攝歸觀心]’는 것은, 지금까지 교전(敎詮)의 뜻에 이렇게 많은 문(門)이 있음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만약 거두어서 일심(一心)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여기서는 행(行)이 있음을 알게 해서 뜻을 발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대’라고 말한 것은 바로 심체(心體)이니 심체가 가없기 때문에 ‘대’라 이름한 것이고, ‘방’은 바로 심상(心相)이니 마음이 덕상(德相)의 법을 갖추었기 때문에 ‘방’이라 이름한 것이며, ‘광’은 바로 심용(心用)이니 마음에 ‘체에 칭합하는 용’이 있기 때문에 ‘광’이라 이름한 것이고, ‘불’은 바로 심과(心果)이니 마음이 해탈한 곳을 ‘불’이라 이름한 것이다. ‘화’는 바로 심인(心因)이니 마음이 행할 바를 행함을 꽃에 비유한 것이고, ‘엄’은 바로 마음의 공용(功用)이니 마음이 잘 공교[善巧]하게 엄식(嚴飾)할 수 있음을 지목하여 ‘엄’이라고 한 것이며, ‘경’은 바로 심교(心敎)이니 마음이 명언(名言)을 일으켜서 여기에 설명하여 나타내기 때문에 ‘경’이라 이름한 것이다. 따라서 ‘대’ 등의 일곱 글자가 모두 마음[心]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심’이라는 한 글자는 체(體)도 아니고, 용(用)도 아니며,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며, 의(義)도 아니고, 교(敎)도 아니니, 비록 일체가 아니지만 능히 일체가 된다. 왜냐하면 한 법계의 마음이 바로 절대적인 법이기 때문이다.
【문】 관행(觀行)이라고 말한 것은 행상(行相)이 어떠한가?
【답】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를 대하여 곧 사사무애관(事事無礙觀)을 이루기 때문에 상즉(相卽)하고 상입(相入)하며, 넓고 좁고 숨고 나타나며 주반(主伴)이 서로 참예하여 거듭거듭 다함이 없는 등이다. 또한 법이 본래 이와 같은데, 법에 의지하여 관하기 때문에 ‘관’이라 이름하는 것이고, 관에 의지하여 행을 일으키기 때문에 행도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사대상전법륜관(四大常轉法輪觀)』 이 경의 의미를 얻고자 한다면, 합하여 세 단(段)이 있다. 첫째는 대ㆍ방ㆍ광ㆍ불 등의 일곱 글자를 설명한 것이요, 둘째는 39품의 대의(大意)를 풀이한 것이며, 셋째는 도리(道理)를 나타내어 관(觀)에 의지해서 자세히 풀이한 것이다.
첫째, 제목을 설명한다는 것에서, ‘대방광(大方廣)’은 관하는 대상인 경계요, ‘불화엄(佛華嚴)’은 관하는 주체인 마음이며, ‘경(經)’은 경계[境]와 지혜[智]에 통하는 것이다. 이른바 ‘대’라는 것은 4대(大)요, ‘방’은 4대의 티끌[塵]이며, ‘광’은 하나하나의 티끌 상(相)이 법계ㆍ허공계와 9세(世)ㆍ10세에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 ‘불’은 이 이치를 이해하는 마음이며, ‘화’는 이 마음이 청정하며 깊고 고요해서 더러움을 여의는 것이다. ‘엄’은 더러움을 여읜 마음에 역순(逆順)의 덕을 갖추는 것이며, ‘경’은 주체와 대상[能所]이 둘이 아닌 것이다.
둘째, 품의 대의를 해석하는 것에서, 설명에 총(總)과 별(別)이 있다. 총은 3독(毒)51)이 곧 3지(智)52)이니, 하나하나의 지(智) 가운데 10덕(德)을 갖추기 때문에 삼십53)이 되고, 또 하나의 지(智) 가운데 삼세(三世)를 갖추고 견문(見聞)ㆍ해행(解行)ㆍ증(證)을 갖추며 3세간(世間)을 갖추기 때문에 9품(品)이 되는 것이다. 별이라는 것은…….
셋째, 도리를 나타내어 관에 의지해서 자세히 해석한다는 것은, 먼저 심상(心相)을 융섭해서 이 경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니, 무엇이 심상을 융섭하는 것인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바른 생각으로 관하는 마음이 실상(實相)의 이치와 상응할 때에 모든 심상을 여의니, 그러한 때에 세 가지 이익을 갖출 수 있다. 첫 번째는 10종 외도(外道)가 짓는 일을 초과(超過)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열 가지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모든 법을 마치 밝은 거울을 잡고 자기 얼굴을 보듯이 보는 것’을 갖추는 것이다. 열 가지 이익이란, 첫째 자기의 몸과 마음에 계(戒)ㆍ정(定)ㆍ혜(慧)의 일체 법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마음을 한 곳에 맞추면 판별하지 못할 일이 없고, 마음을 한 곳에 묶으면 지혜의 문을 열 수 있으니, 하나를 지켜 옮기지 않으면 정신이 흩어지지 않고 온 신령[万靈]들이 옆에서 호위한다. 초학(初學)이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에 마음을 하나의 대상[緣]에 묶어서 만약 오래 익히면 마음 관함을 성취하여 다시 심상이 없고 항상 정(定)과 함께 하리니, 일체의 심상이 곧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부사의정(不思議定)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경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경(一切經)이요, 둘째는 일심경(一心經)이요,
셋째는 자체경(自體經)이요, 넷째는 무주경(無住經)이요, 다섯째는 실상경(實相經)이다. 이른바 한 법계에 하나의 심인(心印)으로 모든 연의 체를 도장 찍으면 일체 모든 연이 도장 무늬[印文] 아님이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일체경인 것이다. 이 일체경은 오직 ‘한 마음의 헤아림[一心量]’이기 때문에 일심경이며, 마음의 모든 법은 체가 있기 때문에 자체경이고, 자체에 아(我)가 없어서 일체 가운데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무주경인 것이다. 이 무주경은 깊고 고요해서 상(相)이 없기 때문에 실상경이다. 처음은 문자경(文字經)이요, 다음은 의경(義經)이며, 그 다음은 관경(觀經)이고, 그 다음은 정경(定經)이며, 마지막 하나는 법경(法經)이다.
『심륜초(心輪鈔)』 ‘처음으로 정각을 이룬[始成正覺] 부처’가 해인삼매에 들어가 증득한 법문(法門)에 크게 여섯 가지 경이 있다. 첫째는 안과 밖을 여읜 경[離內外經]이요, 둘째는 안을 향한 경[向內經]이며, 셋째는 밖을 향한 경[向外經]이요, 넷째는 안과 밖이 상응하는 경[內外相應經]이며, 다섯째는 안에서 간략히 설한 경[內中略說經]이요, 여섯째는 근기를 위해 잡아 설하신 경[爲機將說經]이다. 이른바 앞의 세 경은 바로 과분(果分)의 자리(自利)이기 때문에 과분 별교(果分別敎)요, 뒤의 세 경은 바로 인분(因分)의 자리(自利)이기 때문에 인분 별교(因分別敎)이다.
『원통수좌기(圓通首座記)』『화엄경』 첫머리의 ‘여시아문(如是我聞)’ 네 글자를 풀이하면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이것에 대해서 아래의 ‘시성정각(始成正覺)’도 또한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말을 여읜 현묘하고 고요한 곳이니, 이른바 상(相)이 끊어져 지목할 수 없는 법성은 현묘하고 미세하여 뜻의 밖54)을 벗어난 곳이다. ‘지목할 수 없는 법성’이란 법계의 법의 이름과 지위가 움직이지 않는 곳이다. 만약 지금 내가 5척의 몸이면 오직 5척이 옳을 뿐이요, 이 5척 위에 다시 부처의 이름과 법의 이름을 지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지목할 수 없는 법성’이라 한 것이다. 이 5척이라는 이름이 바로 법의 체이니, 이른바 이 이름이 바로 법 위에 세워진 것이어서 이와 같이 계교하는 자의 미치지 못할 곳이기 때문에 ‘뜻의 밖을 벗어난다’라고 하였고, 또 ‘상이 끊어졌다’라고 한 것이다.
【문】 ‘오직 5척이 옳을 뿐이다’라는 것은, 연기의
분제(分際)에서 이 뜻을 허락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성해(性海)라고 하는 것인가?
【답】 이 5척이라는 이름의 연(緣) 중에서 5척의 법을 세운 것은 연기 인분(緣起因分)이요, 이 이름 이외에 다시 한 법도 세울 것이 없는 것은 성해 과분(性海果分)이다. 그러므로 법장[藏師]이 말하기를 “연(緣)에는 다른 연이 없어서 체(體)로써 연을 다하니, 그러므로 차별된 연기가 곧 매우 깊은 토해(土海)이다”라고 하였다. 또 의상 화상[相和尙]이 “언설(言說)이 증득에 있어 근본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교분(敎分) 가운데 언(言)은 바로 능전(能詮)55)이요, 소전(所詮)56)을 설명하는 것은 뜻[義]이나, 지금 이 중에 언은 곧 증득의 체이기 때문에 능전과 소전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문】 나의 5척 위에 다시 부처와 법의 이름을 지목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무엇으로 증거를 삼아 알 수 있는가?
【답】 이와 같이 분명하게 밝힌 내 말이 증거가 된다. 그러나 겸하여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으면, 「광명각품(光明覺品)」57)에서 “많음[多] 가운데 하나[一]의 성품이 없고, 하나에도 또한 많음이 있지 않다”라고 하였으니, 지상(至相)이 이를 인용하여 즉문(卽門)의 증거로 삼았다. 그러나 ‘많음’이라고 말한 것은 다만 많음일 뿐이어서 많음 가운데 다시 하나를 이루는 성품이 없으며, ‘하나’라고 말한 것은 다만 하나일 뿐이어서 하나 가운데 다시 많음을 이루는 성품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나의 5척이 옳을 뿐이니, 이 위에 부처와 법의 이름을 지목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뜻으로 이 문장을 풀이한다면, ‘여(如)’란 ‘같음[如]’이니 곧 ‘법의 근본[法本]’이다. ‘여’라는 것은 ‘균등함[均]’과 같다. 그러므로 곧바로 이 ‘나의 들음’인 것이다. 이 의미는 ‘오직 나의 들음일 뿐’이라는 것이니, 내가 들은 것 위에 다시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나를 기준으로 해서 논하였기 때문에 다만 ‘나[我]’일 뿐이요, 위아래로 다시 부처와 보살의 이름과 지위 등을 덧붙였으나, ‘들음[聞]’이라는 것은 나에게 국한되는 것이다.
【문】 이미 이름이 끊어지고 상을 여의었는데 왜 5척이라는 이름을 드는 것인가?
【답】 이 증분(證分)에서는 5척이라는 이름이 곧 실제의 법체이니, 이 이름 이외에 다시 법체가 없기 때문이다. 연기분(緣起分)에서는 이름과 뜻이 두 개의 지위로 같지 않기 때문에 상즉(相卽)하게 했으나, 지금 이 증분에서는 이와 같지 않다.
둘째,58) 닦음을 여의고 증득을 여읨이 원만하고 매우 지극한 도(道)이다.
장소와 사람을 가려내지 않으니 기준한 것을 따라 바로 부처요, 주(主)와 기(器)를 구별하지 않으니 일에 부딪쳐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광명각품」에서 “국토와 중생이 하나여서 다름을 얻을 수 없으니, 이와 같이 잘 관찰함을 ‘불법의 뜻을 안다’라고 이름한다. 장소와 사람을 가려내지 않고 주(主)와 기(器)를 나누지 않으니, 기와 중생이 본래 다르지 않는 하나의 불체(佛體)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가 아니니 각각 자기의 이름과 지위를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서, 비록 3세간(世間)이 바로 하나의 불체이지만 셋을 융섭하지 않고서 바야흐로 하나가 되며, 비록 하나의 불체가 곧 삼세간이지만 하나를 나누지 않고서 셋을 짓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3세간의 이름과 지위가 움직이지 않음이 곧 부처인 것이다. 이 뜻으로 이 문장을 풀이한다면, ‘여(如)’는 ‘나[我]’와 ‘들음[門]’이 하나가 되는 때이니, 곧 부처인 것이다.
이상 두 가지 뜻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여시아문’ 네 글자가 바로 구경의 법체이니, 이것으로 첫머리를 삼음이 없이 아래 문장에서 지목한 바의 뜻을 헤아려 가려낸 것이다.
셋째, 정각지(正覺智)의 태양이 도수(道樹)59)에서 떠오르니, 이른바 부처를 기준으로 하여 부처를 논한다면 법계의 모든 법이 부처 아님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緣을 따라, 부처를 이룸이 있음을 보이고 법을 설함이 있음을 보이기 때문에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다.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한다면, 7처8회(七處八會)의 법은 바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어서 결집한 사람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장주(章主)가 이 뜻에 의지하여 말하기를 “아래 문장에서 지목한 바의 뜻을 헤아려 가려낸다”라고 한 것이다.
위의 세 가지에 있어서, 첫 번째 부처는 증득할 대상이요, 두 번째 부처는 증득하는 주체이며, 이 두 부처를 갖춤이 바로 해인정(海印定)이요, 이 정(定)과 더불어 함께 증득하는[能證] 지(智)를 대공(大空)이라 이름하니, 이 대허공(大虛空)이 근기의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서 갖가지 이름을 이루는 것이다.
이룬 법은 티끌처럼 계산하여 다하기 어려우나, 중요한 것만 추려서 말하면 열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삼승에서 밝힌 삼과백법(三科百法)60)은 이숙식(異熟識)61)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주(主)와 반(伴)이 서로 이루어지는 뜻을 논하지 않았고, 지금 이 10법(法)은 증지(證智)의 대허공을 근본으로 하여 온전히 온전히 지목한 것이기 때문에 ‘주반성종(主伴成宗)’이라는 것이다. 또 세 부처님 중에 처음 두 부처님께서는
‘비로소 정각을 이룸[始成正覺]’의 증분이요, 세 번째 부처님께서는 비로소 정각을 이룸의 교분이다. 증분에 있어서 처음의 뜻은 증득할 대상[所證]이요, 두 번째 뜻은 증득하는 주체[能證]의 원만한 지혜이다. 교분은 곧 이 원만한 지혜가 연(緣)과 상응하는 뜻이다.
【문】 만약 처음의 풀이로 본다면 ‘여시’가 곧 ‘아문’이니, ‘비로소 정각을 이룸’은 어떻게 풀이하는가?
【답】 모두 이것에 유례하여 풀이하니, 이른바 ‘한 때’라는 것은 또한 법성을 만족하는 것이어서 다시 덧붙일 바가 없고, 장소도 또한 그러하다. ‘비로소 정각을 이룸’이라는 것은 또한 옛날에는 미혹되었다가 이제 깨달은 것이 아니요, 마땅히 법계에 칭합하여 삼세제(三世際)를 다하니 바로 구경의 법체를 만족하며, 나아가 『육십권경(六十卷經)』62)의 끝에 “중생들 마음의 미세한 티끌……” 등의 게송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두 번째 풀이로 본다면 ‘여’는 바로 ‘아’와 ‘문’이 하나가 되는 때이니 곧 부처이다. ‘아’는 바로 듣는 주체요 ‘문’은 바로 들을 대상이니, 듣는 주체인 나와 들을 대상인 법이 둘이면서 둘이 아니며 오직 하나의 체이므로 곧 불체와 같은 것이다. ‘처’는 보리도량이며 바로 불체이다.
원만히 나타남을 기준으로 본다면 ‘비로소 정각을 이룸’은 세 번째 부처이니, 이러한 뜻 등으로 일부의 처음부터 끝까지 풀이하는 것이 바야흐로 묘(妙)함이 될 것이다.
『고기(古記)』 대경(大經)에 대략 열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영락경』의 3현(賢)10지(地)는 삼승이요, 이 경에서 분별한 3현10지는 일승이니,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이 경의 문장을 풀이한다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고, 첫 번째로 적멸장(寂滅場)에서 화장세계(花藏世界)를 설하시며, 두 번째로 보광당(普光堂)에서
10신(信)을 설하시고……여덟 번째로 사위국(舍衛國)에서 입법계(入法界)를 설하셨다’라고 해야 한다.
둘째, 이 경에 있어서 항포(行布)의 차례는 삼승이요, 육상원융(六相圓融)은 일승이니,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적멸장에서 화장세계를 설하시고, 두 번째로 적멸장 안의 보광당에서 10신을 설하시며……여덟 번째로 적멸장 안의 사위국에서 입법계를 설하셨다’라고 해야 한다.
셋째, 앞의 둘은 표상(表相)이기 때문에 삼승이요, 안[內]은 곧 일승이니,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첫 번째로 사위국에서 화장세계를 설하시고, 두 번째로 보광당에서 10신을 설하시며, 세 번째로 타화천궁(他化天宮)에서 10주(住)를 설하시고, 네 번째로 도솔천궁(兜率天宮)에서 10행(行)을 설하시며……여덟 번째로 적멸장에서 입법계를 설하셨다’라고 해야 한다. 이 뜻은 바로 보현 22위가 벗어나는 지위[脫位]에 위치하기 때문에 뛰어나고 열등함이 없으니, 「명난기(明難記)」에서 밝힌 것과 같다.
넷째, 앞의 내표(內表)는 모두 삼승이요, 보현의 다함없는 법수(法數)로 나타낸 것은 바로 일승이니,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적멸장에서 화장세계를 설하시고, 두 번째로 적멸장에서 10신을 설하시며……여덟 번째로 적멸장에서 입법계를 설하셨다’라고 해야 한다.
다섯째, 앞은 모두 종이와 먹으로 기록한 바이기 때문에 바로 삼승이요, 문자가 없는 허공은 바로 일승이다.
여섯째, 문자가 없는 허공이 바로 삼승이요, 문자가 있는 허공이 바로 일승이다.
일곱째, 앞은 모두 교분이니 바로 보현의 인문(因門)이기 때문에 삼승이요,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는 것[佛外向]은 바로 일승이다.
여덟째,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는 것이 바로 삼승이요, 부처님이 안으로 향하는 것이 바로 일승이다.
아홉째, 부처님이 안으로 향하는 것이 바로 삼승이요, 향함과 등짐을 여의는 것이 바로 일승이다.
열째, 향함과 등짐을 여의는 것은 바로 삼승이요, 법성은 바로 일승이다.
이것이 바로 범체(梵體) 대덕이 전하고 윤현(潤玄) 대덕이 받은 것이니, 범체 대덕이 말하기를, “옛날에 질응(質應) 대덕이 세달수(世達藪: 세달사)에서 『기신론』을 강의할 때에 ‘만약 『화엄경』 중의 열 가지 해석을 알 수 없다면 끝내 『화엄경』의 문의(文義)를 얻을 수가 없다’라 하고, 또 ‘만약 『기신론』 중의 여덟 가지 해석을 알지 못한다면 또한 이 논의 문의를 얻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고 했다.
『현수대사화엄삼매관문(賢首大師花嚴三昧觀門)』 【문】 중생이 수행함에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聖敎]을 받아 지녀야 하는가? 교를 버림을 필요로 하는가?
【답】 열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혼자 있는 중생이 무식하여 성인의 말과 스승을 멀리 버리고 스스로 마음을 어리석게 하며, 다시 삿된 벗을 따라 가르침과 어긋나게 수행하여 교묘한 수단으로 남을 속이고 홀리니, 이는 바로 악인(惡人)이다. 둘째, 어떤 중생이 또한 성인의 가르침을 등지고 바탕의 참된 마음을 이른바 요체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겨서 부지런히 애써 수행하지만 끝내 이익이 없으니, 이 두 사람은 모두 성인의 가르침을 버리고 의리(義理)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오직 성인의 말을 외우기만 하고 의의(義意)를 이해하지 못하며, 성인의 가르침을 가까이함에 의지하여 명리(名利)를 구하고 자기가 외운 바를 어기니, 또한 악인이다. 넷째, 오직 문구(文句)만을 다듬고 의리를 알지 못하며 다만 곧은 마음으로 읽고 외우니, 비록 교묘한 수단으로 남을 속이지는 않지만 또한 이익되는 바가 없다. 이상의 두 사람은 모두 가르침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의리를 얻을 수 없다.
이상의 네 문(門)은 모두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다.
다섯째, 성인의 가르침을 읽고 외워서 부분적으로 해(解)와 행(行)을 알지만, 문구는 많이 읽고 수행함은 적은 것이다. 여섯째, 성인의 가르침을 널리 찾아서 해와 행을 두루 알지만 점차 성인의 말을 간략히 하여 의미를 취해 오로지 닦는 것이다. 일곱째, 받아 지녀 취지를 얻어서 오직 수행에만 있고 다시 말을 찾지 않는 것이다. 여덟째, 가르침을 찾아 뜻을 얻어서 일체법이 성품에 맞지 않음이 없음을 아니, 그러므로 가르침에 또한 지님도 버림도 없고 곧 이 말과 가르침이 성품에 맞아 가르침을 기준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아홉째, 늘 성품에 맞는 말을 지녀서 버리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항상 말이 끊어진 이치를 관하여 버리지도 않고 머물러 있지도 않는 것이다.
이상의 다섯 문은 아직 구경(究竟)이 아니다.
열째, 가르침을 찾아 실리(實理)를 얻어 이치와 가르침에 걸림 없어서, 늘 이치를 관(觀)하지만 가르침을 지님에 장애가 되지 않고 늘 가르침을 지니나 공(空)을 관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가르침과 이치를 함께 융섭(融攝)해서 합하여 하나의 관으로 삼는 것이므로 바야흐로 구경이라 이름한다.
이상의 열 문(門)에서 앞의 넷은 완전히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요, 다음 다섯은 얕은 데서부터 깊은 데로 옮겨가서 근본을 따라 깨달아 들어가지만, 범부를 고쳐 성인을 이루는 방편이라 아직 구경이 아니다. 오직 열 번째 문만이 바야흐로 구경이 된다.
또 현수 대사의 『명수지대승경(明受持大乘經)』에 반드시 다섯 가지 법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첫째, 그 문장을 밝힌 것에 다섯이 있다. 이른바 분단이 일어나 다함을 잘 아는 것과 앞뒤가 계속 이어지는 것과 차례대로 이어져 합하는 것과 설명과 뜻이 원만한 것과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는 것이다. 둘째, 그 일을 풀이한 것이 또한 다섯이니, 이른바 설한 곳[說處]과 설한 주체[說主]와 무리[徒衆]와 청하는 예의[請儀]와 원음(圓音)으로 설하신 바를 아는 것이다. 셋째, 그 뜻을 통달함에도 또한 다섯이니, 이른바 강요를 간략히 표시함과 자세히 풀이해서 의심을 제거함과 비유로 이해시킴과 사례를 인용하여 증명해 이룸과 이익을 들어 배우기를 권함이다. 넷째, 그 뜻을 얻음이 또한 다섯이니, 큰 마음을 발하여 진리를 관하게 해서 번뇌를 항복시키고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며 부지런히 만행을 닦는 것이다. 다섯째, 그 행을 닦음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들은 법을 행함이 몸과 마음에 있어서 일찍이 잠시도 쉬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는 앞의 네 문을 두루 거치고 차례대로 뛰어난 마음을 일으켜서, 앞 문장의 가르침에 대해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앞의 현상의 모양[事相]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부처님 만나 뵙기가 어려움을 탄식하고 자기를 도와주는 이가 적음을 근심하며, 앞의 의리(義理)에 대하여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앞의 뜻과 취지에 대해 슬픔과 기쁨이 서로 모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정법(正法)을 받아 지니는 것이니, 이른바 경문의 가르침을 엮고 베껴서 널리 퍼뜨리되 현상의 모양을 다함을 도모하여 부처님 법의 모임을 표하고, 의취(義趣)를 간추려서 수행하는 사람에게 곡진하게 보이는 것이다. 네 번째는 자기의 행이 증장(增長)하는 것이니, 착한 벗을 가까이 하여 생각을 묶어 사유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걸림이 없는 행을 이루는 것이니, 이른바 뜻을 얻고 표현[詮]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지킬 수가 없고, 표현을 잊고 가르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가르침에 대하여 지킴도 없고 버림도 없는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금 이것은 비록 10법행(法行)을 열기는 하였으나 다만 뭇 연(緣)들에 의지하여 이루고 바로 도와 서로 겸하니, 총괄적으로 ‘받아 지녀 닦아 익힌다’고 말한다. 온전히 이것을 의지하는 자는 인(因)을 원만히 하였다고 할 만해서 부지런히 닦아 물러나지 않고 모두 만과(滿果)를 증득하리니, 가르침으로부터63) 당(唐)에 이르기까지 고금(古今)에 법을 의지하여 닦고 배워서 신령스런 상서[靈瑞]를 통감함이 그 유(類)가 실로 적지 않다. 자세한 것은 『화엄전(花嚴傳)』과 『찬영기(纂靈記)』에서 말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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