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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12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

by Kay/케이 2024.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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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100

 

 

 


대지도론 제100권

89. 담무갈품을 풀이함 ②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經】“그때에 살타파륜 보살마하살과 장자의 딸과 그리고 5백의 시녀들은 담무갈 보살마하살에게로 가서 하늘의 만다라 꽃을 뿌리고는 머리 조아려 예배한 뒤에 물러나 한쪽에 앉았으며, 담무갈보살은 그들이 다 앉은 것을 보고 나서 살타파륜보살에게 말했느니라.
‘선남자여, 자세히 듣고 받아 지녀라. 이제 그대에게 반야바라밀의 모양[相]을 설할 것이니라.
선남자여, 모든 법은 평등하기[等]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평등한 줄 알아야 하고, 모든 법은 여의기[離]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여의는 줄 알아야 하며,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기[不動]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움직이지 않는 줄 알아야 하고, 모든 법은 생각이 없기[無念]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생각이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모든 법은 두려움이 없기[無畏]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두려움이 없는 줄 알아야 하고, 모든 법은 한 맛[一味]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한 맛인 줄 알아야 하며, 모든 법은 끝이 없기[無邊]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끝이 없는 줄 알아야 하고, 모든 법은 생겨남이 없기[無生]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생겨남이 없는 줄 알아야 하며, 모든 법은 소멸함이 없기[無滅]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소멸함이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허공은 끝이 없기[無邊]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끝이 없는 줄 알아야 하고, 큰 바닷물은 끝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끝이 없는 줄 알아야 하며, 수미산은 장엄(莊嚴)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장엄한 줄 알아야 하며, 허공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분별이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물질은 끝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끝이 없는 줄 알아야 하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 끝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끝이 없는 줄 알아야 하며, 땅의 요소[地種]가 끝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끝이 없는 줄 알아야 하고, 물의 요소[水種]ㆍ불의 요소[火種]ㆍ바람의 요소[風種]가 끝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끝이 없는 줄 알아야 하며, 허공의 요소[空種]가 끝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끝이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금강과 같이[如金剛]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평등한 줄 알아야 하고, 모든 법은 분별이 없기[無分別]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분별이 없는 줄 알아야 하며, 모든 법의 성품은 얻을 수 없기[不可得]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얻을 수 없는 줄 알아야 하고, 모든 법은 있는 바 없이 평등하기[無所有等]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있는 바 없이 평등한 줄 알아야 하며, 모든 법은 조작이 없기[無作]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조작이 없는 줄 알아야 하고, 모든 법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불가사의한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때에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은 곧 그 자리에서 모든 삼매를 얻었나니, 이른바 제법등(諸法等)삼매와 제법리(諸法離)삼매와 제법무외(諸法無畏)삼매와 제법일미(諸法一味)삼매와 제법무변(諸法無邊)삼매와 제법무생(諸法無生)삼매와 제법무멸(諸法無滅)삼매와 허공무변(虛空無邊)삼매와 대해수무변(大海水無邊)삼매와 수미산장엄(須彌山莊嚴)삼매와 허공무분별(虛空無分別)삼매와 색무변(色無邊)삼매와 수상행식무변(受想行識無邊)삼매와 지종무변(地種無邊)삼매와 수종화종풍종공종무변(水種火種風種空種無邊)삼매와 여금강등(如金剛等)삼매와
제법무분별(諸法無分別)삼매와 제법불가사의(諸法不可思議)삼매가 그것이니, 이와 같은 등으로 6백만의 모든 삼매문(三昧門)을 얻었던 것이니라.”
그때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3천대천세계 가운데서 모든 비구승에게 둘러 싸여 이런 모양[相]과 이런 모습[像貌] 그리고 이런 이름[名字]으로써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있는 것처럼 살타파륜도 이 6백만의 삼매문을 얻고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간방과 위와 아래의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3천대천세계에 계신 모든 부처님이 모든 비구들에게 공경히 둘러싸여서 이런 모양ㆍ이런 모습ㆍ이런 이름으로써 이 마하반야바라밀을 설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된 것도 이와 같았느니라.
살타파륜보살은 그로부터 다문(多聞)과 지혜(智慧)가 불가사의한 것이 마치 큰 바닷물과 같았고,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았으며 부처님이 계신 국토에 태어났으니, 꿈속에서까지도 일찍이 부처님을 뵙지 않은 때가 없었고 온갖 숱한 재난은 남김없이 이미 끊어졌으며, 부처님이 계신 국토에 원하는 대로 가서 태어났느니라.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의 인연은 보살마하살의 온갖 공덕을 능히 성취하게 하고 일체종지를 얻게 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만일 6바라밀을 배우고자 하고 모든 부처님의 지혜에 깊이 들고자 하며 일체종지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반야바라밀을 받아지니어 읽고 외우고 바르게 기억하며 사람들을 위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고 또한 경권(經卷)을 서사하여 향과 꽃 내지는 기악으로써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해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바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시방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존중하시기 때문이니라.”

【論】해석한다. 담무갈은 이미 나와서 법좌(法座)가 있는 데로 나아가 자기보다 뛰어난 이가 없는가를 두루 살펴본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이때에 살타파륜보살은 그가 좌정한 것을 알고는 담무갈에게로 나아가 머리를 발에 대어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다.
예를 올리는 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말로 하는 예[口禮]요, 둘째는 무릎을 꿇고 머리는 땅에 대지 않는 예이다. 셋째는 머리를 땅에 대는 예이니, 이것은 최상의 예배이다. 사람의 한 몸에서는 머리가 맨 위가 되고 발이 맨 아래가 되는 것이니, 머리로써 발에 예배하는 것은 공경함이 지극하다는 것이다.
담무갈은 그가 앉은 것을 본 후 그가 멀리서 와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갖가지로 애쓰고 있는 것은 바로 법을 듣고자 함임을 알았다.
처음 서로가 만났을 적에는 해가 거의 지려는 무렵이었으므로 잠시 동안 법을 들었을 뿐이며, 담무갈은 해가 지자 일어나서 궁중으로 들어갔다.
이제 법을 위하여 7년 동안 간절히 우러르면서 다른 마음을 내지도 않았으며, 그가 나오려 할 즈음에는 몸에서 피를 내어 땅에 뿌렸다. 이에 담무갈은 그가 법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그의 마음은 물러나지 않고 결정되어 의심도 없어서 교화를 받아 낼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말하기를 “선남자여, 일심으로 자세히 들어라”고 하였다.
위에서는 모든 부처님께서 오가는 데에 대한 의심을 이미 끊었었고, 여기서는 다만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만을 듣고 싶어 할 뿐이니,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설한 것이다.
반야바라밀의 모양이란, 앞에서 모든 법의 평등한 이치[平等義]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의 힘 때문에 모든 법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모든 법의 성품은, 그 성품이 저절로 평등한 것은 아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담무갈은 말하기를 “모든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평등하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왜냐하면 원인[因]과 결과[果]가 닮았기 때문이니라. 처음에 모든 법의 평등을 관찰하는 것은 바로 원인이요, 결정된 마음으로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바로 그것은 결과이다.
【문】모든 법은 평등하다고 관찰하는 것이 곧 반야요 반야가 곧 평등이거늘,
무엇 때문에 원인과 결과라 분별하는가?
【답】반야와 모든 법은 비록 하나의 모양[一相]이어서 둘도 없고 구별이 없다고 하더라도, 수행하는 이가 처음에 관찰할 때는 그것이 원인이요, 관찰하여 마치면 결과라 한다. 마치 수다원의 도에서 과위를 얻는 것[得]과 도에 향하는 것[向]과도 같은 것이다.
또 유루(有漏)의 5중(衆)에서와 같아서 원인일 때를 쌓임[集]이라 하고 결과일 때를 괴로움[苦]이라 하나니, 물질 등의 온갖 법이 평등하게 되면 곧 그것이 반야바라밀의 평등이다.
【문】마땅히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설해야 되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평등을 설하고 있는가? 평등하지 않은 것[不平等]으로 인하여 평등(平等)이 있고 평등한 것으로 인하여 평등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반야 가운데서도 역시 하나의 모양도 아니요 다른 모양도 아니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하나의 모양을 취하려 하는가?
【답】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서 방편으로써 해설하지 않으면 이해하는 이가 없다. 그 때문에 만일 평등하지 않다고 분별한다면, 곧 모든 번뇌가 생기고 3독(毒)이 더욱 자라게 되나니, 이른바 원수를 미워하고 친한 이를 사랑하며 착한 것을 사랑하고 착하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등이 그것이다.
보살은 이 두 가지가 평등한 가운데에 머물러서 온갖 법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관찰한다. 중생이 평등한 가운데에 머무르면 원수거나 친한 이거나 미워하는 이거나 사랑하는 이거나 간에 모두가 다 평등한 것이니, 복덕의 문이 열리고 모든 나쁜 세계[惡趣]가 닫힌다. 법이 평등한 가운데에 머무르면 온갖 법 가운데서 생각과 분별과 집착하는 마음과 취하는 모양 등이 모두 제거되고 다만 모든 법이 공한 것만을 보게 되나니, 공이 곧 평등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모든 법이 평등한 공을 얻으면 곧장 보살의 도에 나아가 공에 대하여 희론을 펴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비록 평등을 얻었다 하더라도 희론을 일으키니, ‘만일 도무지 공하다고만 관찰한다면 이와 같은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평등한 데에서도 곧 평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진실한 평등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의 평등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희론이 아니다. 평등하다거나 평등하지 않다거나 하는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읜 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모양이다.
【문】평등하다 하면, 반야바라밀의 모양에서
이미 두루 갖추었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여읨[離] 등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모양이다”라고 말하는가?
【답】경에서는 다만 “모든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도 평등하다”고 말했을 뿐인데, 수행하는 이가 이 평등한 모양을 취하여 집착을 낸다.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평등한 모양이어서 제 성품을 여읜다”고 말하는 것이니, 물질 등의 모든 법은 제 모양을 여의기 때문이다. 여읨[離]의 뜻에 대해서는 「상무상품(相無相品)」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모든 법의 평등을 얻고 또 평등하게 여읜 데서 공한 가운데에 편히 머무른다. 공한 가운데서는 움직이지 않나니, 희론으로도 움직일 수 없고 모든 번뇌의 산(山)으로도 움직일 수 없으며 덧없는 때[時]로도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법에서 실상(實相)을 얻었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 두 가지의 공에 머무르면서 움직이지 않는[不動] 반야바라밀을 얻나니, 이것이 곧 궁극의 경지[究竟]이다. 만일 생각이 있으면, 모양이 있고 집착할 곳이 있게 되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모든 법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생각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움직임이 없는 모양[無動相]이 곧 반야바라밀이니, 반야바라밀은 모든 모양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만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라면, 미혹과 번민이 향해 나아갈 데가 없다. 희론[戲論]를 펴는 이는 대중 가운데에 있으면서 두려운 생각을 내기도 하며, 혹은 열반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역시 두려운 생각을 내기도 하나니, 이 때문에 “두려워함이 없는 모양[無畏相]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결정적으로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법 성품[法性]에 깊이 들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서 모든 모양에 대해 힐난하는 이가 있어도 마음에 두려워함이 없나니, 모든 법에서 모양이 없는 것[無相]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어갈 때에는 온갖 법은 얻을 수 없음을 아나니, 이 가운데서도 또한 두려워함이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보살은 온갖 법을 잘 통달했기 때문이다.
또 온갖 법은 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성품이 공하다.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온갖 법을 따르며, 따라서 역시 성품이 공한 것과 한 맛[一味]이다.
【문】위에서 이미 모든 법은 평등하다고 설명했으면서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한 맛’을 말하는가?
【답】공은 때로는 맛[味]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맛이 없기도 하다. 만일 수행하는 이가 모든 소견 때문에 모양을 취하면서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것을 분별하고 헤아리다가 그때에 이 모든 법의 평등한 공을 얻으면, 마음이 크게 기뻐지기 때문에 이것을 맛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덥고 몹시 목이 말랐을 적에 맑고 시원한 물을 얻으면, 견줄 데 없는 참 맛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때에 따라 작용하기 때문에 맛이라 하지만, 진실로 필경공하다면 맛도 맛 아닌 것도 없다.
또 ‘한 맛[一味]’이라 함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반연할 바[所緣]와 관할 바[所觀]가 모두 한 맛이 된다. 공에 대한 지혜의 힘이 크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법도 모두 따라서 공하게 되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석밀(石蜜)을 불에 끓이려 할 때에 비록 다른 물질이 화합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석밀로 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큰 바다에는 온갖 하천 물이 그 속에 흘러들어가 모두가 한 맛이 되는 것과 같나니, 이른바 필경 공한 맛이다. 물질 등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범부의 마음속은 저마다 다른 데도 반야바라밀의 가운데로 들어가면 모두가 한 맛이 된다.
치우침[邊]을 모양[相]이라 하나니, 있다[有]거나 없다[無]거나 하는 것이다. 물질 등의 모든 법을 실관(實觀)한다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없나니, 모양이 없는 것은 곧 끝이 없는 것[無邊]이다. 이렇게 관찰하고 나면 곧 그것이 끝이 없는 반야바라밀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치우침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항상하다는 치우침[常邊]과 아주 없다는 치우침[斷邊]이요, 세간에 대한 치우침[世間邊]과 열반에 대한 치우침[涅槃邊]이며, 나쁜 것에 대한 치우침[惡邊]과 착한 것에 대한 치우침[善邊] 등이다”라고 한다. 이 가운데서는 이와 같은 등의 모든 치우친 소견이 없기 때문에 치우침이 없는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치우침을 전제(前際)와 후제(後際)라 한다”고 한다. 세간은 비롯함이 없기 때문에 전제가 없고,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기 때문에 전제가 있으며, 또 다시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후제도 없다. 이와 같은 모든 치우침을 분별하면서
세간에 집착하기 때문에 열반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 가운데는 이런 온갖 치우침이 없으며 다만 모든 법의 실상에는 들어가는 것도 없고 나오는 것도 없다는 것만을 들을 뿐이다.
【문】모든 법의 평등과 모든 법의 여읨[離]에는 모두가 치우침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별도로 설명하는가?
【답】어떤 사람은 모든 법의 평등을 알고 모든 법의 여읨도 알고 있으므로 설명해 줄 필요가 없지만, 어떤 사람은 모양을 취하여 이 하나의 맛[一味]에 탐착하기 때문에 치우침이 없는 것을 설명하게 된다.
담무갈은 다만 살타파륜만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 아니며 살타파륜도 역시 자신만을 위하여 물은 것이 아니다. 다만 중생들은 갖가지 마음과 갖가지 행동이 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모양 가운데서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나는 것이 없고[無生] 없어지는 것도 없다[無滅]’고 함은 앞에서 갖가지 인연으로 생멸을 깨뜨리는[破生滅]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허공이 끝이 없다’고 함은 마하연(摩訶衍)의 허공의 비유[虛空譬喩] 가운데서 설면한 것과 같다.
‘큰 바닷물이 끝이 없다’는 것과 ‘수미산의 장엄’에 대해서는 앞에서 아직 설명하지 않았기에 여기에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문】허공은 무위(無爲)이어서 항상 있는 법[常法]이기 때문에 그 끝을 얻는 이가 없으므로 ‘끝이 없다[無邊]’고 할 수 있지만, 큰 바닷물은 4천(天) 가운데에 있고 수미산을 빙 둘러싸고 있어서 유순(由旬)의 수량이 있으므로 사람으로서 건널 수 있는 이도 있거늘, 무엇 때문에 끝이 없다고 말하는가?
【답】‘끝이 없다’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로 끝이 없는 것이요, 둘째는 사람으로서는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건널 수 있는 것이요, 둘째는 수미산을 둘러싼 구보산(九寶山)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의 너비가 8만 2천 유순이라 세간 사람으로서는 그 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고 말한다. 마치 작은 바다는 배의 힘으로도 건널 수 있으나, 큰 바닷물은 배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고 오직 신통이 있는 이만이 건널 수 있는 것과 같다. 마치 외도(外道)의 범부는 선정의 배[船]를 내어 타고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바다는 건널 수 있지만, 무색계(無色界)의 큰 바다는 깊고 넓어서 건널 수 없는 것과 같나니,
나라는 마음[我心]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현은 지혜와 선정이라는 날개[翅]의 힘으로 모든 법의 삿된 모양을 깨뜨리고 실상을 얻게 되기 때문에 건널 수 있나니, 이 때문에 큰 바다로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다.
【문】수미산은 한 가지 빛깔이거늘 무엇 때문에 “장엄한다”고 말하는가?
【답】외서(外書)에서 “수미산은 한 가지 빛깔이어서 순수하게 그것은 황금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육족아비담(六足阿毘曇)에서는 “수미산의 네 둘레는 각각 하나의 보배로 되었고 금ㆍ은ㆍ파리ㆍ유리로 장엄되어 있으며, 모든 새들은 그 가는 방향에 따라 각각 그 빛깔이 같아진다. 난타(難陀)와 바난타(婆難陀) 용왕의 형제가 몸으로 일곱 겹을 둘러싸고 있고 산의 꼭대기에는 33천(天)의 궁전이 있으며, 그 성(城)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어서 이름을 희견(喜見)이라 한다. 이것에는 9백 99개의 문이 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문마다 곁에는 열여섯 명의 푸른 옷을 입고 있는 힘이 센 귀신들이 있어서 성을 수호한다.
그 안의 높은 곳에는 전각이 있는데 이름을 최승(最勝)이라 하고, 그 네 둘레에 네 개의 큰 동산이 있는데 4천왕(天王)이 살고 있다. 그 네 둘레에는 산이 있는데 이름은 유건타(游乾陀)라 하고, 각각의 높이는 4만 2천 유순이며 4천왕이 그 위를 다스리고 있다. 네 개의 바닷물 속에는 모든 아수라의 궁전[阿修羅宮]과 모든 용왕(龍王)들의 궁전이 있고, 유건타 등의 아홉의 보배산에는 해와 달과 5성(星)ㆍ28숙(宿)이며 그 밖의 모든 다른 별들이 주위를 에워싸 장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갖가지로 꾸며져서 장엄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는 이는 싫증냄이 없다”고 한다.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6바라밀의 과보 때문에 전륜왕(轉輪王)과 범천왕(梵天王)과 제석천왕(帝釋天王)과 정거천왕(淨居天王)과 대자재천(大自在天)들이 된다. 이와 같은 등의 과보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아직 완전하게 갖추지 못했을 때에 이런 과보의 장엄(莊嚴)을 받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었을 적에는 곧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비발치(阿毗跋致)의 보살과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도과(道果)의 장엄이 있게 된다.
마치 수미산의 위아래가 모두 장엄하게 되어 있는 것처럼, 반야바라밀의 장엄도 또한 그러하나니, 아직 완전히 갖추지 못했을 적에는 모든 천왕(天王) 등의 장엄이 있고 완전히 갖춘 뒤에는 모든 도과로 장엄하게 된다.
마치 수미산은 겁초(劫初)에 세워질 때에 네 둘레에서 큰 바람이 불어서 땅에 모인 정미(精味)를 한데 쌓아 수미산을 만들었고, 다시 바람이 불어서 그 산을 견고 하게 하고 보배로 되게 한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온갖 착한 법들 가운데서 제일 견실하고 단단한 것만이 화합한 것을 반야라 하는 것이다.
마치 수미산은 네 둘레에서 부는 큰 바람이나 큰 바닷물의 파도로도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삿된 소견을 지닌 외도(外道)의 희론으로나 모든 악마의 백성들로서는 움직일 수가 없다.
마치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네 개의 동산에 하늘들이 다다르면 갖가지 즐거움을 받듯이, 반야도 또한 이와 같아서 수행하는 이가 반야의 꼭대기에 오르면 4선(禪) 등 모든 선정의 동산에 이르러 갖가지 즐거움을 받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미산에 여러 가지 새들이 이르면 모두가 동일한 빛깔이 되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모든 법이 그 속에 들어가면 모두가 동일한 모양이 되나니, 이른바 모양 없는[無相] 것이다”라고 한다.
‘마치 허공은 분별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함은, 허공에서는 ‘이것은 안이다, 밖이다. 이것은 멀다, 가깝다. 이것은 길다, 짧다. 이것은 깨끗하다, 깨끗하지 않다’라고 분별함이 없는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법이 반야에 들어가면, 역시 안과 밖이라거나 착하고 착하지 않다는 등의 분별이 없다.
‘5중(衆)이 끝이 없다’고 함은, 마치 5중은 언제나 세간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또한 이와 같아서 5중을 멀리 여의지도 않나니, 5중의 실상이 곧 반야바라밀이다.
또 마치 형색이 있는 법[色法] 등은 낱낱이 쪼개고
깨뜨려서 작은 티끌이 되게 하면 방소가 없게 되고 방소가 없기 때문에 끝이 없으며, 무색법이어서 형태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라거나 저것이라는 것도 없으며, 이것저것이라는 것도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온갖 법에 대하여 형색 있는 것을 분별해서 작은 티끌까지 이르고 형색 없는 법을 분별하여 한 생각 동안까지 이른다 해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있는 것을 결정코 보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물질이 끝이 없기 때문에 반야도 끝이 없다”고 하니라.
나아가 허공에 이르기까지의 여섯 가지도 또한 이와 같다. ‘금강과 같이[如金剛] 평등하다’고 함은, 마치 천왕(天王)이 가지고 있는 금강은 미워하는 이도 없고 사랑하는 이도 없어서 사용하는 곳마다 자르고 부수지 못하는 것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 앞에 있는 마음[前心]이라는 이 마음 속 삼매는 온갖 결사(結使)의 번뇌와 뒤바뀜과 그리고 습기(習氣)를 끊어 모두 소멸시키기 때문에 금강과 같다고 한다.
여금강(如金剛)삼매와 상응하는 지혜로는 온갖 법이 모두가 평등하다고 관찰하나니, 반야바라밀이 모든 법을 평등하다고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 왜냐 하면, 반야로 먼저 모든 법이 평등하다고 관찰한 연후에 이 삼매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분별이 없다’고 함은, 세간의 범부들은 번뇌의 힘 때문에 갖가지로 모든 법을 분별하지만, 모든 법의 실상을 얻으면 모두가 파괴되고 변하여 달라지므로 이 때문에 성인은 반야바라밀은 얻음으로써 생각하고 분별하는 모든 법을 따르지 않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매에 들어가며, 설령 모든 법이 변하여 달라질 때에도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나니, 그것은 먼저부터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하거나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성품은 얻을 수 없다[不可得]’고 함은, 온갖 법은 모두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요 인연이 없이 있는 것은 없다. 만일 조그마한 인연으로 생기게 되거나 또 인연으로부터 생긴다 하면, 곧 제 성품[自性]이 없는 것이니, 제 성품이란 본래부터 있고 결정된 진실한 일을 말한다.
만일 성품이 인연의
화합한 편에서 생긴다면,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곧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먼저는 없었는데 이제야 인연의 화합으로부터 있게 되었어도 성품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인연으로부터 성품이 생겼다면, 성품은 곧 짓는 법[作法]이다. 성품은 서로 기다리지 않고[不相待] 서로 의지하지 않는 것[不相因]이어서 언제나 홀로 존재한다고 한다. 이와 같아서 유위의 법[有爲法]은 곧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의 성품은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반야바라밀의 성품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법은 있지 않고[無所有] 평등하기 때문이다’고 함은, 모든 법의 성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뭇 인연도 또한 얻을 수 없고, 뭇 인연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있지 않아서 있는 바 없는 가운데에 들기 때문에 곧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있기[有] 때문에 분별이 있고 없기[無] 때문에 분별이 없나니, 마치 초향(草香)과 전단향(栴檀香)을 사를 때에는 분별이 있지만 다 없어졌을 때에는 분별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은 조작이 없다[無作]’고 함은, 중생도 공하고 법도 공하기 때문에 모두가 조작이 없다는 것이다. 중생으로서 조작하는 일이란 이른바 열 가지 착한 일[十善]과 열 가지 착하지 않는 일[十不善] 등을 말한다.
‘법의 조작[法作]’이라 함은, 이른바 불은 타고 물은 흐르며 바람은 움직이고 의식[識]은 식별하며 지혜는 아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에는 저마다 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이 있다. 중생도 없고 나아가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도 없으며 물질 등과 일체종지까지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파괴하였다. 중생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조작하는 이[作者]가 없고 법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조작할 바[所作]가 없는데도 다만 범부의 사람이 뒤바뀌고 가려졌기 때문에 ‘나는 짓는 바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모든 법은 불가사의하다[諸法不可思議]’고 함은, 물질 등 온갖 법은 항상 있다거나 무상하다거나, 괴롭다거나 즐겁다거나, 진실하다거나 공하다거나, 나[我]가 있다거나 나가 없다거나, 나고 없어진다거나 나고 없어지지 않는다거나, 고요히 사라진다거나 고요히 사라지지 않는다거나, 여읜다거나 여의지 않는다거나,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등으로 결정할 수도 없고, 갖가지의 문으로 분별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미루어 헤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법은 모두가 마음속의 생각과 분별에서부터 생기고 또한 결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온갖 법의 진실한 성품은 모두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에서 벗어나고 이름과 말의 길[言語道]을 초월한 것이니, 앞의 품에서 “온갖 법의 평등은 온갖 성현들도 행할 수 없고 도달할 수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불가사의하니, 반야바라밀도 또한 그러하여 이 법을 관찰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때에 살타파륜보살은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삼매를 얻었다.
【문】살타파륜은 먼저 이미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을 알았고 지금은 갖은 고행을 다하면서 서서 7년 동안 지내다가 담무갈을 보게 되었는데 어떠한 이익을 얻었는가?
【답】살타파륜은 먼저 모든 부처님을 뵈었고 모든 삼매를 얻었으면서도 반야바라밀을 귀중히 여기면서 탐착하는 모양을 내고 있으므로, 이제 담무갈은 7년 만에 정에서 일어나서 그를 위하여 반야를 설해 주어 그의 탐착하는 마음을 깨뜨려 주었다. 온갖 법의 성품은 본래 공한 것이요 반야바라밀이 있어서 그것을 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모든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평등하고, 모든 법은 모양을 여의었고 나아가 모든 법은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반야도 불가사의하다”라고 한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법을 소홀히 여기거나 반야만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도록 한 것이니, 왜냐하면 반야로 인하여 다시 때가 낀 탐착[垢著]을 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이 비록 필경에는 청정하고 이로운 바가 많다 하더라도, 다시 그 모양을 취하거나 해서 탐착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되니, 마치 불에 달구어진 금이 비록 좋다 하더라도 손으로 쥘 수 없는 것과 같다.
살타파륜은 이러한 교화를 받고서, 반야에 탐착하는 마음을 끊고 제법등(諸法等)의 모든 삼매를 얻었으니, 구절마다 해설하고 있다.
산란한 마음 가운데 다만 지혜만이 있는 것을 삼매라 하지 않는다. 이제 스승으로부터 들은 뒤에는 한 마음으로 사유(思惟)하는 것을 삼매라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흩어지지 않아서 지혜가 변하여 삼매로 되니,
마치 바람 속에서는 등불이 빛을 밝게 비추지 못하다가 고요한 방에서 문을 닫았을 때에야 비로소 밝게 비추는 것과 같다.
앞에서는 이미 욕계의 마음으로 마음이 산란했기 때문에 지혜의 힘이 성취되지 못했으나, 지금은 가다듬은 마음[攝心] 속에 들어가 있으므로 들은 모든 법은 모두 삼매라 하니, 모든 번뇌 등과 악마의 백성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 마치 물에 찬바람이 불어오지 않아 아직 얼음이 얼지 않았을 때는 견고하지 않다가 얼음이 얼게 되면 밟을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6백만의 삼매문(三昧門)을 얻었고 살타파륜은 담무갈이 설하는 법을 듣게 되었으며 모든 법 가운데 큰 지혜의 광명을 얻었으니, 이른바 갖가지 모든 법의 실상의 문이며 모든 법의 평등이 그것이다. 평등이 바로 지혜이니, 살타파륜의 선정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변하여 삼매가 되었다.
지금 삼매와 지혜를 말하려는 것은 이 세상과 뒷세상의 과보 때문이니, 이때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기를 “마치 내가 지금 대중 가운데서 반야를 설하면서 이런 모양[相]ㆍ이런 모습(像貌)ㆍ이런 이름[名字]으로써 반야를 설하고 있는 것처럼 살타파륜이 담무갈로부터 이 삼매를 얻고 이 삼매 가운데서 시방의 부처님께서 대중 가운데서 반야를 설하고 계시는 것을 본 것도 또한 그러했니라.
수보리야, 살타파륜은 이로부터 뒤에는 법을 깊이 좋아하는 까닭에 모든 경전을 모아서는 널리 독송하고 많이 들었느니라. 마치 아난이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다 잘 지니는 것처럼 살타파륜도 이와 같아서 많은 견문(見聞)과 지혜가 불가사의하여 마치 큰 바닷물과 같았으며 곧 이 세상에서 언제나 부처님을 여의지 않았나니, 이와 같은 것들을 이름 하여 이 세상에서의 과보라 하느니라.
몸을 버린 뒤에는 항상 부처님이 계신 나라에 태어났으며,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수행하기 좋아한 까닭에 꿈속에서까지도 부처님을 뵙는 일을 여의지 않았으며, 지옥 등의 모든 재난은 모두 영원히 끊어졌으며 뜻에 따라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태어났나니,
그는 깊이 반야바라밀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업(業)에 따라 태어나지 않느니라. 살타파륜은 한 부처님의 국토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국토에 이르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벗어나게 하면서 한량없는 공덕을 쌓고 있나니, 마치 호귀(豪貴) 장자가 한 모임에서 다른 한 모임에 이르고 나아가 지금은 대뢰음(大雷音)부처님 처소에 있으면서 범행(梵行)을 깨끗하게 닦고 있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어떤 이가 반야바라밀을 구하고자 하면, 마땅히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이 견고하고 바르며 한 마음이어서 움직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해야 하느니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의 인연 때문에 온갖 공덕을 성취하는 줄 알아야 한다’고 함은, 모든 보살들로서 반야를 얻는 이는 탐욕ㆍ성냄 등 집에 있는 이[在家]의 허물[罪垢]이나 삿된 의심과 희론 등 출가한 이의 허물을 모두 다 제거시키고 마음이 깨끗하게 되며,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온갖 공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체종지를 얻는다’고 함은,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6바라밀’이라 함은, 초지(初地)로부터 7지(地)까지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8지ㆍ9지ㆍ10지는 바로 부처님의 지혜에 깊이 들어가서 일체종지를 얻어 부처님이 되어 온갖 법에서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이니, 모두가 받아 지니며 나아가 꽃과 향과 기악으로써 공양해야만 하는 것이다.
수보리는 비록 언제나 공의 행을 좋아하였으나 부처님과 함께 반야를 설하고 또 무쟁(無諍)삼매를 얻었으므로 부촉[囑累]할 수 없었으며, 아난(阿難)은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를 얻었고 또 항상 세존을 그 곁에서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므로 자세히 부촉한 것이다.

90. 촉루품(囑累品)을 풀이함

【經】그때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님은 바로 너의 큰 스승[大師]이며, 너는 바로 그 부처님의 제자이더냐?”
아난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바로 저의 큰 스승이시고 수가타(脩伽陁)1)는 바로 저의 큰 스승이시며 저는 바로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나는 바로 너의 큰 스승이요 너는 곧 나의 제자이니라.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너는 다하여 마쳤느니라. 아난아, 너는 몸과 입과 뜻의 인자한 업[慈業]으로써 나에게 잘 공양하고 시중들었으며, 항상 나의 뜻과 같아서 어기거나 잘못이 없었느니라.
아난아, 나의 몸은 현재 네가 사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시중든 덕으로 마음이 항상 깨끗하여 있지만, 내가 멸도한 뒤에는 이 온갖 사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시중드는 일로써 이 반야바라밀을 사랑하고 공경하면서 공양해야 하리니, 두 번 세 번에 이르도록 이 반야바라밀을 너에게 부촉하느니라.
아난아, 너는 잊지도 말고 잃지도 말며 최후에 종자를 끊는 사람이 되지 말지니라. 아난아, 반야바라밀이 세간에 있는 한 그때에는 부처님도 세간에 있으면서 법을 설하고 계시는 줄 알지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반야바라밀을 써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고 사람들을 위하여 널리 연설하며,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ㆍ향ㆍ번기ㆍ일산과 보배 옷이며 등불과 촛불 등의 갖가지로써 공양하면, 이 사람이야말로 부처님을 뵙는 일을 여의지 않고 언제나 법을 듣는 일을 여의지 않으면서 언제나 부처님을 친근히 하는 줄 알지지라.”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고 나니, 미륵(彌勒) 등 모든 보살마하살과 혜명(慧命)수보리(須菩提)ㆍ사리불(舍利弗)ㆍ대목건련(大目揵連)ㆍ마하가섭(摩訶迦葉)ㆍ부루나미다예야니자(富樓那彌多隷耶尼子)2)ㆍ마하구치라(摩訶俱絺羅)ㆍ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 및 아난 등과 온갖 대중들 그리고 온갖 세간의 모든 하늘과 건달바와 아수라 등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모두들 크게 기뻐하였다.
【論】【문】부처님은 이미 법애(法愛)를 끊고 나아가 일체종지와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으며모양을 취하지도 않으시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갖가지 인연으로 이 법을 부촉하시기를 마치 애착하시는 것과 같이 하셨는가?
【답】모든 부처님의 큰 자비심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이에 열반의 문에 도달하기까지 언제나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며, 사라쌍수(娑羅雙樹) 사이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몸을 부수기를 마치 한 톨의 깨나 쌀처럼 하셨거늘, 하물며 이익이 많은 경법(經法)이거늘 부촉(付囑)하지 않으시겠는가.
또 아난은 아직 욕탐을 여의지 못한 사람이어서 아직 반야바라밀의 세력과 과보에 이익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그 때문에 은근하게 “너에게 부촉하노니, 마땅히 잘 받아 지니면서 잊거나 잃지 않아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온갖 법에서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도 없고 항상 고요히 사라진 모양이면서도 이 반야를 부촉하셨다.
【문】아난은 곧 성문인(聲聞人)이거늘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부촉하며, 미륵 등의 큰 보살에게 부촉하지 않으셨는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길 “아난은 항상 부처님을 그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필요한 것을 시중들었고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를 얻었으므로 한 번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었다. 또 아는 것이 많고 명문(名聞)이 넓었으므로 4중(衆)이 그를 의지하고 있었으니, 그는 능히 부처님에 이어서 법의 바퀴를 굴릴 제3의 스승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불(舍利弗)은 수명이 짧아 일찍 멸도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에게 부촉하지 않으셨다.
또 아난은 6신통(神通)과 3명(明)과 두 가지 해탈을 다 같이 증득하신 분이요, 5백 아라한의 스승이어서 이렇게 많은 이익을 줄 수 있는 이였기 때문에 그에게 부촉한 것이다”고 한다.
미륵 등의 큰 보살들은 부처님이 멸도한 뒤에는 저마다 이리저리 흩어져서 그들이 제도해야 될 중생들이 살고 있는 국토를 가게 되어 있었다. 미륵은 도솔천(兜率天) 위로 돌아가 있게 되고 비마라힐(毗摩羅詰)과 문수사리(文殊師利)도 또한 제도해야 할 중생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또 이러한 모든 보살들은 반야바라밀의 힘을 깊이 알고 있었으므로
애써서 부촉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난은 바로 성문인이라 소승의 법을 따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부처님은 은근히 그에게 부촉하신 것이다.
【문】만일 그렇다면 『법화경(法華經)』이나 그 밖의 모든 방등경(方等經)은 무엇 때문에 애호할 수 있는 왕에게나 모든 보살들에게 부촉하신 것인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때 부처님은 심히 깊고 믿기 어려운 법을 말씀하고 계셨는데, 그곳에 성문의 사람은 없었다. 또 부처님께서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을 설하실 때와 같아서 5백의 아라한이 비록 부처님 곁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듣지 못했으며, 간혹 들은 것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때문에 보살들에게 부촉하신 것이다”고 한다.
【문】또 어떤 법이 그렇게도 깊어서 반야보다 뛰어난 법이기에 『반야경』은 아난에게 부촉하면서 그 밖의 다른 경은 보살에게 부촉하신 것이다.
【답】반야바라밀은 비밀스런 법이 아니다. 그러나 『법화경』 등의 모든 경에서는 “아라한이 수기를 받고 부처님이 된다”는 것 등을 말씀하고 있으며, 큰 보살들이라야 능히 받아 지녀서 이용할 수 있으니, 마치 큰 약사(藥師)라야 능히 독을 약으로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먼저 말한 것과 같아서, 반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문과 함께하면서 설하는 반야요, 둘째는 다만 시방에 있는 10지(地)에 머무른 큰 보살들만을 위하여 설하는 반야이니, 9지(地)에 머무른 이도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니거늘, 하물며 새로 뜻을 낸 이겠는가.
또 9지에서 들을 법이 있고 나아가 초지(初地)에서 들을 법이 있어서 저마다 같지 않다. 반야바라밀에는 전체 모양[總相]은 바로 하나이면서도 깊고 얕은 데에 차이가 있나니, 이 때문에 아난에게 부촉한다 해도 허물할 것은 없다.
【문】「아촉불품(阿閦佛品)」에서도 촉루[囑累]가 보이고 여기에도 또 촉루가 있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보살의 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반야바라밀의 도요, 둘째는 방편의 도[方便道]이다.
앞에서의 부촉은 반야바라밀의 본체[體]에 대한 설법을 마치면서 하신 부촉이요, 여기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이 반야의 방편을 얻게 하기 위한 설법을 마치면서 하신 부촉이다. 그러므로
아촉부처님 뒤에 구화구사라(漚和拘捨羅)3)를 설하는 품이 보이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에도 비록 방편이 있고 또 방편 가운데에도 반야바라밀이 있기는 하나 어느 곳에 더 많이 포함되었느냐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 반야와 방편의 본체는 바로 하나이면서도 그 작용하는 부분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고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금세공사가 뛰어난 방편으로 금을 가지고 갖가지 다른 물건을 만들면 비록 모두 그것은 금이라 하더라도 저마다 그 이름을 달리하는 것과 같다.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의 실상(實相)을 얻은 것이니, 이른바 온갖 법의 성품은 공하고 있는 바가 없어서 고요히 사라진 모양이 그것이다. 곧 멸도하려 해도 방편의 힘 때문에 열반의 증득을 취하지 않으면서 이때에 그는 생각하기를 ‘온갖 법의 성품은 공하므로 열반도 또한 공하다. 나는 지금 보살의 공덕에서 아직 완전히 갖추지 못했으므로 증득을 취하지 않아야 하며, 공덕이 완전히 갖추어지게 되면 그때에 증득을 취해도 좋으리라’고 한다. 이때에 보살은 그 방편의 힘 때문에 두 지위4)를 뛰어넘어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게 되며, 보살의 지위에 머물면서 매우 깊고 미묘하여 문자가 없는 법을 알아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이니, 이것을 곧 방편(方便)이라 한다.
다시 방편이 있으니, 보살은 온갖 법은 필경 공하여 그 성품은 있는 바 없는 줄 알면서도 도리어 착한 법을 일으켜 6바라밀을 행하면서 공을 따르지 않게 된다. 만일 의심[疑]이나 삿된 소견[邪見]이나 열반에 드는 것[入涅槃]이나 부처님이 되는 것[作佛] 이 네 가지를 내게 될 적에, 반야로써 이와 같이 분별하여 만일 삿된 소견과 의심은 없애고 열반에 들지 않으면 이것도 곧 방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은 이롭게 함이 많아서 크고 진기한 보배 더미 속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부처님은 멸도하신 뒤에 많은 원적들이 헐뜯고 무너뜨리려 할 것임을 아시므로 품(品)마다 부촉하신다 해도 오히려 허물이 없겠거늘 하물며 두어 군데서 부촉한 것이랴.
【문】부촉하신다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은근하고 정중하게 하시는가?
【답】부처님은 세속의 법에 따라 중생들을 인도하시는 것이
마치 장사꾼의 우두머리가 다른 나라로 멀리 나가려 할 적에, 비록 재보를 그의 아들에게 맡기면서 큰 값어치가 있는 묘한 보물은 유독 은근하게 부촉하는 것과 같나니, 그 아들은 그 묘한 보물의 귀중한 값어치를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장사꾼의 우두머리가 그 보물의 값어치를 잘 아는 사람이므로 은근히 부촉하면 반드시 그것이 귀중한 것임을 알아차리겠지만, 만일 그의 아들이 그 보물의 값어치를 찬탄한다면 그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과 같나니, 부처님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또 만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대중 가운데서 반야를 찬탄하면서 부촉한다면 사람들은 부처님을 비방하되 “자기 자신의 법을 칭찬하고 있구나”라 하고서 의심하며 믿지 않겠지만, 자신의 제자들에게 부촉한다면 싫어 할 이가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앞의 품[上品] 가운데서 ‘고요히 사라진 모양이요 쓸모없는 다른 논리도 없으니, 그것은 곧 일체지(一切智)이다. 이 안에는 결코 취할 만한 어떠한 법도 없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사람들은 그리 귀히 여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은근히 부촉한다면, 곧 부처님께서는 공한 법에 애착하지도 않지만 온갖 중생들 중에서 반야를 사랑하는 것은 부처님보다 더한 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부처님은 반야의 은혜가 깊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 반야를 귀중히 여겨서 은근히 부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중도(中道)를 나타내시려고 부촉하신 것이다. 앞에서는 모든 법은 공하다고 말씀하셔서 저들의 ‘있다고 하는 치우친 소견[有邊]’을 막으셨고 여기서는 은근히 부촉하시어 곧 ‘없다고 하는 치우친 소견[無邊]’을 깨뜨린 것이니, 이것이 곧 중도이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은 탐내는 마음으로 이 법에 애착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갖가지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의 공한 모양을 말씀한 것이요, 어떤 사람은 ‘부처님은 아주 없다[斷滅]는 가운데에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은근히 부촉하신 것이니, 이와 같다면 곧 두 가지 치우친 소견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문】부처님은 아난이 당신의 제자임을 알고 계시면서도 무엇 때문에 “아난아, 너는 바로 나의 제자이더냐, 내가 바로 너의 스승이더냐”고 물으셨는가?
【답】부처님에게는 삿된 제자로서 수나찰다라(須那刹多羅)5) 등이 있었다. 그들은 조그마한 인연으로 제자가 되었는데 부처님에게 활 쏘는 법을 배우려고 하였으나
부처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자, 이에 배반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수시마(須尸摩, Susīma) 같은 이들은 바로 법을 훔쳐가기 위하여 제자가 되었던 것이니, 이와 같은 이들은 바로 이름만 있는 제자였다.
또 외도 등이 말하기를 “아난은 마지못해서 부처님 곁에 있는 것이다. 아난은 일찍이 외도의 제자로 있으면서 풀 옷[草衣]을 입고 신선이 되려고 했었는데, 지금 부처님은 그의 친족이라 존중해야 되기 때문에 시봉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들 때문에 대중 가운데서 아난에게 물으시되 “너는 바로 나의 제자이더냐”고 하여, 그가 만일 “진실한 제자입니다”라고 하면, “마땅히 나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리니, 이 때문에 아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일부러 거듭하여 대답한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법을 너는 모두 다 갖추었느니라”고 하셨다. 제자로서 해야 할 법이란, 이른바 착한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 스승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제자에는 마음은 좋으면서도 몸과 입의 업이 합치하지 않는 이가 있고, 제자로서 몸과 입의 업은 좋으면서도 마음이 합치하지 않는 이도 있다. 만일 제자가 착한 마음으로 스승을 매우 좋아한다면, 몸과 입이 서로 합치하며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고생을 어렵다고 여기지 않으며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은 버리고 스승의 가르침만을 따르나니, 아난은 이런 일을 모두 다 갖춘 것이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지금 현재 나를 공경하고 있지만 내가 멸도한 뒤에는 반야를 공경함도 역시 이와 같아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문】반야는 곧 모든 부처님의 스승인데 아난은 무엇 때문에 그 스승을 공경하지 않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인가?
【답】아난은 비록 첫 번째 도과[初道]6)는 얻었다 하더라도 번뇌를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의 진실을 아는 것이 부처님만큼 깊이 알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야를 공경하기를 마치 나를 공경하듯 해야 한다”고 하셨다.
또 중생들은 부처님의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큰 광명을 지닌 금빛 몸을 뵙게 되면 거의 모두가 사랑하고 공경하게 된다. 반야바라밀은 미묘하고 매우 깊으면서도 형상과 빛깔이 없으므로
지혜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으나, 부처님 몸의 상호(相好)는 어리석은 이거나 지혜가 있는 이거나 간에 아무리 보아도 싫증내는 일이 없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의 몸으로써 반야에 비유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몸소 악마를 막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멸도한 뒤에도 기꺼이 반야를 수호하라”고 하셨다.
【문】한 번 부촉하셨으면 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세 번에 이르시는가?
【답】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을 깊이 사랑한 까닭에 세 번 부촉하신 것이다.
【문】만일 그렇게도 깊이 사랑하셨다면, 어찌 세 번만 하셨는가?
【답】모든 부처님의 통상법에서는 말씀이 세 번을 초과하지 않는다. 만일 세 번을 초과하여 말씀해도 따르지 않게 되면, 집금강(執金剛, Vajrapāņi) 신이 그의 지팡이[杵]7)로 그를 다스린다. 또 집금강신은 만일 세 번을 초과하여 말씀하셨는데도 따르지 않으면, 곧 그는 거역하는 사람이라 여겨서 죽이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물을 적에 세 번을 더 초과하지 않으신 것이다.
또 만일 한 번만 말하면 아직 느슨하고 세 번을 초과하게 되면 너무도 지나친 것이라 마치 범부로서 탐착하는 이와 같이 된다.
또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근기가 둔한 이는 세 번까지 말을 해야 비로소 착한 마음이 생기게 된다. 아난은 비록 근기는 영리하다 하더라도 마음은 성문(聲聞)을 향하고 있으면서 자기 한 몸만을 제도하려고 하고 있을 뿐이니, 이 때문에 세 번을 말씀하신 것이다.
부촉하는 까닭은 법이 소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너는 마땅히 제자를 교화하고 그 제자는 다시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면서 차츰차츰 서로서로 교화하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하나의 등불에서 다시 그 밖의 다른 등불을 켜면서 그 광명이 갈수록 더 많게 하는 것과 같다.
‘최후에 종자를 끊는 사람[斷種人]이 되지 말라’고 함은, 세상 사람이 아들이 있으면서 만일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면 그것을 바로 종자를 끊는다고 하는 것이니,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다.
부처님은 그런 비유로써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신상(身上)에서 반야로 하여금 단절되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문】앞의 품(品)에서 밝혔듯이, 반야바라밀은 설하여도 또한 늘어나지 않고 설하지 않아도 또한 줄어들지 않아서 마침내는 고요히 사라진 모양이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단절(斷絶)되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허공과 같거늘 그 누가 끊어 없앨 수 있단 말인가?
【답】반야바라밀은 비록 고요히 사라져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는 모양으로
마치 허공과 같아서 희론을 펼 수 없지만, 문자와 언어로 반야바라밀의 경권을 서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설하기 위한 것이니, 이 가운데서의 반야는 이 원인[因] 가운데서 그 결과[果]를 말하는 것이다.
범부의 사람은 반야바라밀은 미묘하다는 말만 듣고 곧 애착하는 마음을 내어 반야의 모양을 취하면서 모든 법을 분별한다. 이른바 ‘이것은 착하다, 이것은 착하지 못하다. 이것은 세간이다, 이것은 열반이다’라고 하는 등이 그것이다. 분별하기 때문에 이런 법 가운데서 애착하는 마음을 내고, 애착하는 마음 때문에 투쟁하며, 투쟁하기 때문에 모든 죄업(罪業)을 일으키게 되나니, 이와 같은 사람들을 곧 반야바라밀을 소멸하게 하는 이라 한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기를 “너는 반야바라밀의 모습 그대로 하면서 문자나 언어에 집착하여 중생을 교화하지 말아야 하나니, 이것을 곧 소멸하지 않게 한다[不滅]고 하는 것이니라. 아난아, 반야가 이 세상에서 얼마간이라도 있는 한, 그 만큼의 시간 동안 부처님도 세간에 머물러 있는 줄 알지니라”고 하시니, 경에서 자세히 말씀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은근히 부촉하실 때에 그 모임에 있던 중생들이 의심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부촉하는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반야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부처님도 그때에 세상에 있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요, 모든 부처님은 법(法)을 스승으로 삼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법’이라 함은, 곧 이 반야바라밀이니, 만일 스승이 있고 어머니가 있으면 이익을 잃는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 이익은 본래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야가 세상에 있으면 부처님도 역시 세상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법보(法寶)는 불보(佛寶)를 여의지 않는다. 보살에게 32상과 80수형호가 있어도 부처님이라 하지 않으며 법보를 얻게 되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나니, 법보가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마치 사람이 부처님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나아가 해탈과 열반을 얻게 되듯이 만일 사람이 반야 가운데서 능히 믿고 행하면 역시 3승(乘)의 법으로써 열반에 드는 것이니, 이 때문에 반야가 세상에 있으면,
마치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는 것과 같아서 법을 설함에는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반야를 듣고는 받아 지니고 서사하여 지니거나 한다면, 이 사람은 언제나 부처님을 뵙는 일을 여의지 않으면서 법을 들으며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 하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문】어떤 사람이 세 가지 착하지 못한 업[三不善業]을 성취하여 중한 죄를 지었는데도 반야를 듣고 받아써서 지닌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으면서 법을 듣고 부처님을 친근히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답】이런 일에 대해서는 앞의 품(品) 가운데서 이미 대답하였다. 이른바 법을 듣는 이에게는 두 가지의 사람이 있나니, 첫째는 다만 듣기만 하고 믿거나 받아 행하지 않는 이요, 둘째는 듣는 대로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는 이다.
마치 제자가 스승의 말을 듣지도 않고 믿고 받아 행하지도 않으면, 그를 바로 듣지 않는 이라 하고, 만일 일심으로 들으면서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함으로써 세간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며 소승을 여의고 대승을 좋아하여 이와 같이 듣고 지닌다면, 그를 진정으로 듣는 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읽고 외우는 이도 또한 이와 같다.
바르게 기억하여 부처님의 뜻 그대로를 따르고 있다ㆍ없다 하는 두 가지 치우친 소견을 여의고서 중도(中道)를 행하며, 들은 그대로를 받아 지니고 그 뜻을 이해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해설하며, 공경하고 존중하면서 꽃과 향 등으로 공양하고 찬탄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미미하고 천박한 데서부터 시작하여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연설하게 되면, 그의 마음이 한층 더 두터워지고 공덕은 갈수록 많아지며 견고하여 동요되지 않게 되나니라.
스승의 설법을 듣거나 경권을 보거나간에 꽃과 향 등으로 공양하는 것이다.만일 지혜로운 이로서 반야의 공덕을 알면서 공양하는 이면 복덕이 중하겠지만, 모르는 이가 공양하면 복덕이 미미하고 천박하다. 복덕이 순수하고 두터운 이는 몸을 바꾸면 언제나 부처님 뵙는 일을 여의지 않고 법을 들으면서 모든 부처님을 친근하게 되지만, 복덕이 미미하고 천박한 이면 몸을 바꾸어도 세 가지 복의 과보를 얻는다고 말할 수는 없고 많은 죄 값을 다 치르고 나서 오래된 뒤에는 그도 역시 반드시 부처님이 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통틀어 말씀하시면서 “복덕이 순수하고 두터운 이거나 미미하고 천박한 이거나간에 점차로 모두가 시방의 부처님을 뵈옵고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며 점점
6바라밀을 두루 갖추어서 모두가 부처님이 되느니라”고 하신다.
부처님은 불안(佛眼)으로써 반야에 이와 같은 큰 이익이 있어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을 보시므로 은근하게 부촉하신 것이다.
【문】이 모든 큰 아라한들은 이미 실제(實際)를 증득하여 다시는 근심이나 기쁨이 없다. 조그마한 기쁨조차도 오히려 없거늘 하물며 큰 기쁨이겠는가?
【답】모든 큰 아라한들은 비록 삼계(三界)의 욕탐을 여의었다 하더라도 아직 온갖 지혜는 얻지 못한 까닭에 매우 깊은 모든 법 가운데서 오히려 의심하며 명확하게 모르다가 이 마하반야바라밀의 분명한 해설 때문에 그 의심이 제거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크게 기뻐한 것이다.
또 이 여러 큰 제자들은 이미 실제(實際)를 증득한 이들이니, 실제란 곧 공하고 모양이 없고 한량없으며 분별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고요히 사라진 법[寂滅法]으로써 갖가지 이름과 언어와 비유를 분별하며 널리 말씀하면서도 또한 법 성품[法性]을 깨뜨리지 않고 또 세간과도 서로 어기지 않았나니, 모든 아라한들은 이 법 가운데서 깨달았기 때문에 크게 기뻐하였다.
부처님은 이 공하고 모양이 없고 한량없으면서 고요히 사라진 법을 말씀하셨으나, 그 밖의 다른 대중들은 모두가 아직 번뇌는 다하지 못했으면서도 믿음의 힘이 깊었기 때문에 역시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 법은 우리들의 나고 죽는 괴로움을 다하게 해주면서 부처님 도를 얻게 하는구나”라고 하였나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대중들은 모두가 기뻐한 것이다.
【문】만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 반야바라밀을 부촉하셨다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아난은 대가섭(大迦葉)과 함께 3장(藏)을 결집(結集)할 때 그 가운데서는 어찌하여 설하지 않았는가?
【답】마하연(摩訶衍)은 매우 깊고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우며 행하기도 어렵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실 때에도 여러 비구들은 마하연을 들으면,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리에서 떠나갔거늘, 하물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이겠는가. 그러므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또 3장에는 정히 30만의 게송[偈]이 있고 아울러 960만의 말씀[言]으로 되어있지만,
마하연은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없이 무한하다. 마치 이 가운데서의 「반야바라밀품(般若波羅密品)』에도 2만 2천의 게송이 있고 「대반야품(大般若品)」에는 10만의 게송이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용왕과 아수라왕과 여러 천상의 궁중에는 천억만의 게송 등이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모든 하늘과 용과 신은 수명이 길고 의식의 기억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간 사람들은 수명이 짧고 의식의 기억하는 힘이 미약하여 이 작은 「반야바라밀품」조차도 오히려 읽을 수 없거늘 하물며 그보다 더 많은 것이겠는가.
그 밖의 다른 큰 보살들이 아는 바의 반야바라밀도 분량이 없고 한계도 없다. 왜냐 하면, 부처님은 비단 한 몸만으로 말씀한 것이 아니요 한량없는 세상 동안에 혹은 수없는 몸으로 변화하셨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그 하신 말씀이 한량없다.
또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에는 10만의 게송이 있고 『제불본기경(諸佛本起經)』ㆍ『보운경(寶雲經)』ㆍ『대운경(大雲經)』ㆍ『법운경(法雲經)』등에도 각각 10만씩의 게송이 있으며, 『법화경(法華經)』ㆍ『화수경(華手經)』ㆍ『대비경(大悲經)』ㆍ『방편경(方便經)』ㆍ『용왕문경(龍王門經)』ㆍ『아수라왕문경(阿修羅王問經)』 등의 여러 큰 경전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마치 큰 바다 속의 보물과 같거늘, 어떻게 3장 가운데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작은 물건은 큰 데에 들어가지만 큰 물건은 작은 데에 들어갈 수가 없다. 만일 묻고 싶거든 ‘소승은 어찌하여 마하연 가운데에 있지 않는가’라고 해야 한다. 마하연은 소승(小乘)의 법을 겸할 수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그대는 그렇게 묻지 말아야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마하가섭 같은 이는 모든 비구들을 데리고 기사굴산(耆闍崛山) 가운데서 3장을 결집하고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문수사리와 미륵 등의 모든 큰 보살들도 역시 아난과 함께 이 마하연을 결집하였다”고 한다.
또 아난은 중생들이 뜻하는 업(業)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 알았으니, 그 때문에 성문들 가운데서 마하연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설했었다면, 어수선하고 산란하여 하던 일도 이루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처님 법은 모두가 한 가지요 한 맛이니, 이른바 괴로움이 다하면 해탈하는 맛[苦盡解脫味]이다. 이 해탈하는 맛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맛이요, 또 하나는 온갖 중생들을 아울러 위하는 맛이다. 비록 다 같이 하나의 해탈문을 구한다 하더라도 자기만 이롭게 하는 것과 남까지 이롭게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나니, 이 때문에 대승ㆍ소승의 차별이 있게 된다. 이 두 가지 사람들을 위하여 부처님 입으로 말씀하신 법을 문자와 언어 두 가지로 나눈 것이니, 3장은 곧 성문의 법이요 마하연은 곧 대승의 법이다.
또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3장이라는 이름이 없었고 다만 수다라(修多羅)를 지니는 비구와, 비니(毘尼)를 지니는 비구와, 마다라가(摩多羅迦)8)를 지니는 비구가 있었을 뿐이었다.
‘수다라’란 이 4아함(阿含) 중의 경명(經名)이요 마하연(摩訶衍) 중의 경명이다. 수다라는 두 가지로 분류되나니, 첫째는 4아함 중의 수다라요, 둘째는 마하연의 경을 일컬어 대수다라(大修多羅)라 한다. 두 가지 분류에 들어가면서 대승이기도 하고 또한 소승이기도 한 2백 50계(戒)가 있나니, 이와 같은 것 등을 수다라라 한다.
‘비니(毘尼)’란 비구가 죄를 지으면 부처님께서 계(戒)를 결성하여, “마땅히 이것은 행해야 한다. 마땅히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일을 하면 이런 죄를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간략하게 말하자면 80부(部)가 있다.
또한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첫째는 마투라국(摩偸羅國)의 비니여서 아파타나(阿波陀那)와 본생(本生)을 포함하여 80부가 있으며, 둘째는 계빈국(罽賓國)의 비니여서 본생과 아파타나를 제하고 다만 요긴한 대목만을 추려서 10부로 만든 것이니, 80부 비바사(毘婆沙)의 해석이 있다.
이 때문에 『마하반야바라밀경』 등은 수다라 가운데에 있으되, 경이 크고 일이 특이한 것으로 보아 따로 설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집성한 3장 가운데에는 들어 있지 않다.

구마라기바(鳩摩羅耆婆, Kumārajīva) 법사는 진(秦)나라 홍시(弘始) 3년(401) 신축(辛丑) 12월 20일에 장안(長安)에 이르렀고, 4년(402) 여름에 소요원(逍遙園)에 있는 서문각(西門閣)에서 요천왕(姚天王)을 위하여 이 석론(釋論)을 펴내기 시작하여 7년(405) 12월 27일에야 끝마쳤다.
그 동안에도 겸하여 경본(經本)ㆍ선경(禪經)ㆍ계율(戒律)ㆍ백론(百論)ㆍ선법요해(禪法要解) 등을 역출한 것이 50만의 말씀에 달하고, 이 석론과 합치면 1백 50만의 말씀이나 되었다.
초품(初品)을 논하면서 34권을 한 품[一品]으로 해석하되 그것은 경본(經本)의 전부에 걸쳐 논하였으며, 2품(品) 이하는 법사가 요약하여 그 요긴한 대목만을 취하여 그 글의 뜻을 풀이하고 있다. 그 광대한 해석을 다 갖추어 싣지 못하고 이 100권만을 엮었으니, 만일 하나도 빼지 않고 다 펴냈다면 아마 이의 10배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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