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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17 불교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 5권

by Kay/케이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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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 5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 제5권


개부의동삼사 특진시 홍려경 숙국공으로 식읍이 삼천호요,
자의를 하사 받고 사공에 추증되었으며, 시는 대감정이고
호는 대광지인 대흥선사 삼장 사문 불공 받들어 한역
이진영 번역


그 때에 대중 가운데 상희기(常希奇)라는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말씀드렸다.
“이 게송이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땅히 저 허공장보살에게 물어보면, 너를 위하여 연설해 주리라.”
상희기보살은 곧 허공장보살에게 질문하였다.
“대사여, 저는 지금 이 법문이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지 못하니, 원컨대 어진이께서는 저를 위하여 그것을 연설해 주십시오.”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그대는 저 산골짜기의 메아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아는가요?”
상희기보살이 말하였다.
“그 메아리는 어떤 소리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허공장보살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렇다면 저 산골짜기의 메아리가 몸인가요, 마음인가요, 물질인가요, 소리인가요, 또는 그 진실한 것인가요, 진실하지 않은 것인가요?”
“대사여, 메아리란 그 자체의 소리가 없고, 어떤 소리로 말미암아 나는 것이므로 진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남자여, 메아리는 곧 진실된 것이 아니고 어떤 소리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것이니, 허공에서 나는 법음의 소리도 그러합니다. 범음은 부사의한 지혜로부터 나고, 마음을 거두어 지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메아리는 그 법문의 소리를 전달하는 것일 뿐이니, 전달하는 것이 곧 법음의 소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선남자여, 그대는 인연의 화합으로 일어나는 이 깊고 깊은 이치에 대해 관찰해야 합니다. 인(因)에 의지하여 과(果)를 불러들이는가 하면, 또한 인과의 성품에는 유전(流轉)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 두 가지의 법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고 조작하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연이 능히 과를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모든 법이 본래 화합함이 없음을 깨닫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설법하시기를, ‘번뇌를 아는 것도 곧 청정함이고, 번뇌를 끊지 않는 것도 곧 스스로 청정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번뇌의 그 성품도 본래는 청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법을 시설구(施設句)라고 합니다. 저 번뇌라든가 청정함이라는 것은 다 수승한 이치의 근본 경지에 의지하여 건립(建立)되기 때문에, 수승한 이치의 근본 경지에서는 번뇌도 청정함도 다 얻을 수 없습니다. 수승한 이치의 경지가 곧 아무 것도 없는 경지이고, 그 아무 것도 없는 경지가 곧 진리의 경지이고, 그 진리의 경지가 곧 공(空)의 경지이고, 그 공의 경지가 곧 나[我]의 경지이고, 그 나의 경지가 곧 일체 법의 경지이므로, 만약 일체 법의 경지가 위없는 공의 경지이고 고요한 경지이고 아무것도 없는 경지임을 안다면, 그야말로 일체의 법에 집착함이 없어서 걸림 없는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사리자가 상희기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어떤 연유로 그대의 명호를 상희기(常希奇)라고 하는 것입니까?”
상희기보살이 대답하였다.
“대덕 사리자시여, 저는 항상 일체의 법에 희유한 마음을 내어서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나 만족스러운 욕락(欲樂)을 얻지 못하였고, 또 일체 보살의 행에 항상 희유한 마음을 내어서 모든 유정들의 마음과 행을 깨닫는 지혜에 들기를 원하였으나 그렇지 못하였고, 또 일체 번뇌의 마업(魔業)으로 하여금 틈을 엿보지 못하게끔 항상 바른 법에 희유한 마음을 내었으나 그 역시 만족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연이 있어서 상희기라는 명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장로 사리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상희보살의 변재(辯才)가 이와 같이도 명료하니, 그는 일체의 부처님 법을 더럽힌 바가 없고 설법도 아무런 집착이 없습니다.”
때마침 그 모임에 있던 보길상(寶吉祥)이라는 보살이 허공장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원컨대 그대가 나를 위해 여러 가지 삼마지를 연설해 준다면 그대의 연설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이에 허공장보살이 보길상보살에게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다음과 같은 삼마지(三摩地)가 있으니, 이른바 보살청정의락(菩薩淸淨意樂)이라는 삼마지는 그 모든 장애를 제거함으로써 보리에 나아가기 때문이고, 일체유정무애광명(一切有情無礙光明)이라는 삼마지는 그 일체의 유정들에게 밝은 광명을 비춰주기 때문이고, 호자타(護自他)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고뇌와 위해를 벗어나기 때문이고, 무구(無垢)라는 삼마지는 청정한 마음을 얻게 하기 때문이고, 변조(遍照)라는 삼마지는 모든 선한 법을 증장하기 때문이고, 단엄(端嚴)이라는 삼마지는 맑고도 깨끗한 성품을 얻기 때문이고, 고광(高廣)이라는 삼마지는 능히 볼 수 없는 정수리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고, 원리(遠離)라는 삼마지는 모든 번뇌를 조복하기 때문이고, 회선(廻旋)이라는 삼마지는 부처님의 오른쪽으로 돌아 진정한 도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퇴전(退轉)이라는 삼마지는 온갖 외도의 삿된 소견을 물리치기 때문이고, 작락(作樂)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법의 동산을 거닐며 쾌락을 얻기 때문이고, 도구경(到究竟)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청정한 행을 닦아 피안(彼岸)에 이르기 때문이고, 위덕(威德)이라는 삼마지는 자재로운 마음을 얻어 나약함을 벗어나기 때문이고, 입평등(入平等)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유정들에게 평등한 마음을 베풀기 때문이고, 지작업(知作業)이라는 삼마지는 짓는 업에 따라 과보를 알기 때문이고, 사자당(師子幢)이라는 삼마지는 몸의 터럭이 곤두서는 그러한 두려움을 다 멀리 여의기 때문이고, 심용건(心勇健)이라는 삼마지는 일체 번뇌의 마군들을 다 소멸시키기 때문이고,
분타리(芬陀利)라는 삼마지는 그 어떤 세간에서라도 물들지 않기 때문이고, 파도마(跛度摩)라는 삼마지는 마음의 장엄함을 갖추기 때문이고, 광장엄(光莊嚴)이라는 삼마지는 일체 불국토에 광명을 비추기 때문이고, 선작업(善作業)이라는 삼마지는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영원히 끊어버리기 때문이고, 당장엄(幢莊嚴)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부처님의 법을 밝게 비추기 때문이고, 유거(有炬)라는 삼마지는 일체 번뇌의 습기를 비추어 없애기 때문이고, 일등(日燈)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어둠을 다 제거하기 때문이고, 일선(日旋)이라는 삼마지는 일체 유정들의 마음을 관찰하기 때문이고, 공덕장(功德藏)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공덕이 법장에 수순하기 때문이고, 나라연(那羅延)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다른 논란(論難)을 다 굴복시키기 때문이고, 견고(堅固)라는 삼마지는 금강처럼 파괴되지 않는 몸을 획득하기 때문이고, 구견(具堅)이라는 삼마지는 일체 세간의 지혜를 초월하기 때문이고, 만다라(曼茶羅)라는 삼마지는 물러서지 않는 모든 신통을 얻기 때문이고, 금강장(金剛場)이라는 삼마지는 보리(菩提)의 도량에 나아가고 물러남이 있기 때문이고, 금강유(金剛喩)라는 삼마지는 온갖 번뇌의 법을 꿰뚫어 보기 때문이고, 구행(具行)이라는 삼마지는 유정들의 마음의 행을 잘 알기 때문이고, 치지(治地)라는 삼마지는 애욕의 허물을 다 멀리 여의게 하기 때문이고, 최괴(摧壞)라는 삼마지는 네 부류의 마군을 꺾어 부수기 때문이고, 일관신(日觀身)이라는 삼마지는 일체 색신(色身)의 모습을 관찰하기 때문이고, 불현(不眴)이라는 삼마지는 한 가지 법의 성품에 몰입하게 하기 때문이고,
입허공(入虛空)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정진하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고, 무쟁(無諍)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인연의 경계를 벗어나기 때문이고, 무구륜(無垢輪)이라는 삼마지는 미묘하고도 청정한 법륜(法輪)을 굴리기 때문이고, 전광(電光)이라는 삼마지는 찰나의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때문이고, 선작승연(善作勝綠)이라는 삼마지는 속히 모든 선한 법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고, 능정(能淨)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선하지 않은 법을 다 끊어버리기 때문이고, 신장엄(身莊嚴)이라는 삼마지는 대인의 상호를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고, 어장엄(語莊嚴)이라는 삼마지는 범음(梵音)으로 설법하여 유정들을 다 즐겁게 하기 때문이고, 심장엄(心莊嚴)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선한 법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무외(無畏)라는 삼마지는 물러나지 않는 마음을 더욱 굳게 하기 때문이고, 등시(等施)라는 삼마지는 어떤 유정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기 때문이고, 계적집(戒積集)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소원을 다 만족하게 하기 때문이고, 인갑주(忍甲冑)라는 삼마지는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기 때문이고, 정진견고(精進堅固)라는 삼마지는 속히 모든 신통을 얻기 때문이고, 무량장(無量藏)이라는 삼마지는 범왕(梵王)으로 하여금 능히 모든 것을 잘 거두어들이게 하기 때문이고, 무소유(無所有)라는 삼마지는 무색계(無色界)로 하여금 능히 감내하게 하기 때문이고, 고당(高幢)이라는 삼마지는 유정들에게 깔보이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고등(高燈)이라는 삼마지는 시방을 잘 관찰하기 때문이고, 혜거(慧炬)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걸림과 얽매임을 없애기 때문이고, 해인(海印)이라는 삼마지는 능히 갖가지의 업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고,
무량선(無量旋)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악한 소견을 끊어 버리기 때문이고, 공성(空性)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상(相)과 견해를 여의기 때문이고, 무상(無相)이라는 삼마지는 헤아려 생각하는 모든 분별을 끊기 때문이고, 무원(無願)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서원의 모습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고, 부동(不動)이라는 삼마지는 동요하는 일체의 뜻을 없애기 때문이고, 구족음(具足音)이라는 삼마지는 항상 걸림 없는 변재를 얻기 때문이고, 변지(遍持)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법을 들은 그대로 받아 지니기 때문이고, 정념(淨念)이라는 삼마지는 청정한 모든 부처님의 법을 받아 지니기 때문이고, 무진(無盡)이라는 삼마지는 유정들로 하여금 다함이 없는 환희심을 내게 하기 때문이고, 보엄(寶嚴)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유정들로 하여금 보배로운 손[寶手]을 얻게 하기 때문이고, 수거(隨去)라는 삼마지는 유정들의 근기에 따라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기 때문이고, 지소취(知所趣)라는 삼마지는 유정들로 하여금 그 각자의 나아갈 곳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고, 의입(意入)이라는 삼마지는 유정들의 마음을 다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고, 법운(法雲)이라는 삼마지는 그 수승한 지혜로 법의 비를 내리기 때문이고, 염불(念佛)이라는 삼마지는 감로(甘露)의 청정한 법을 증득하기 때문에, 염법(念法)이라는 삼마지는 욕심을 여읜 일체의 선한 법을 증득하기 때문이고, 염승(念僧)이라는 삼마지는 모든 부처님의 법에 물러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염사(念捨)라는 삼마지는 모든 물자를 다 보시하기 때문이고, 염계(念戒)라는 삼마지는 모든 부처님의 법의 근본을 건립(建立)하기 때문이고, 염천(念天)이라는 삼마지는 청정한 법에 허물이 있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입법계(入法界)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법을 알아 그 법계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허공성(虛空性)이라는 삼마지는 일체의 법으로 하여금 다 걸림이 없게 하기 때문이고, 무생성(無生性)이라는 삼마지는 무생법인을 얻기 때문이고, 유불류(類不類)라는 삼마지는 차별된 문구(文句)를 뛰어난 지혜로써 능히 다 간직하기 때문이고, 묘설무구인(妙說無垢印)이라는 삼마지는 보살이 이 삼마지를 얻음으로써 한 찰나 사이에 능히 지혜로써 큰 보리를 증득하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이러한 여든 세 가지의 삼마지문(三摩地門)이 있는가 하면 그 낱낱의 삼마지문마다 5백의 삼마지문이 있으며, 또 이와 같은 종류의 삼마지문까지 합하면 4만의 삼마지문이 있습니다. 거기에 청정한 삼마지와 번뇌로 물든 삼마지를 합해 8만의 삼마지문이 있고, 다시 그 다함이 없는 지혜를 얻기 위한 전후 중간의 삼마지문이 각각 5백 가지가 있어서 이 모든 청정한 삼마지와 번뇌로 물든 삼마지를 합해 8만 4천의 삼마지문이 있습니다. 이러한 8만 4천의 삼마지문은 유정들을 위한 오타남(鄔馱南)으로서 유정들의 8만 4천 가지 마음의 행에 따라 그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체 부처님의 지혜는 일체 유정들의 마음의 행에 들어가 널리 설하는 법장이므로, 그 법장은 한량없고 그지없고 부사의한 것이어서 백천 겁에 걸쳐서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말씀드린 삼마지문은 그 조그마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허공장보살이 이 법을 설할 때에, 그 모임에 있던 1만 6천 명의 보살들이 삼마지문으로 말미암아 무생법인을 얻었고 8만 4천의 천인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 허공장보살을 칭찬하셨다.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선남자여, 이러한 삼마지의 공덕 법문을 쾌히 널리 설하여서 여래의 미묘하고도 수승한 지혜를 잘 나타내었으니, 이 법문이야말로 네 자신이 증득한 것이지 다른 힘으로 말미암아 깨달은 것이 아니로다.”
보길상(寶吉祥)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허공장보살이 어떤 인연이 있기에 여래의 처소에서 이러한 온갖 보배를 빗물처럼 내리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보길상보살에게 대답하셨다.
“선남자여, 내가 기억하건대, 과거의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겁(劫)의 때에 세간에 출현하신 부처께서 계셨으니, 그 명호는 무구염무량광왕(無垢炎無量光王) 여래ㆍ응공ㆍ정변지ㆍ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조어장부ㆍ천인사ㆍ불세존이셨고, 그 세계의 명칭은 미거라(彌佉羅)이고 겁의 명칭은 공덕광(功德光)이었느니라. 선남자여, 그 미거라세계는 국토가 안락하고 인민들이 번성함은 물론, 7보로 이루어진 땅은 마치 손바닥처럼 평평하고 또 가지율다(迦止栗多)라는 새의 털 솜처럼 깨끗하고 부드러워서 걸어다니거나 몸에 닿을 때마다 수승한 쾌락을 느끼게 되느니라. 다시 염부단(閻浮檀)의 금이 그 땅 위에 덮여 있고 온갖 보배로 장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덟 방향의 길가에는 보배 나무가 줄지어 있으니, 마치 타화천(他化天)1)과 같아서 수용(受用)하는 이마다 그 뜻에 알맞고, 그 많은 천인들도 다 궁전과 누각에 거처하면서 생각한 대로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느니라.
선남자여, 그 뿐인가 하면 또한 저 무구염무량광왕여래에게는 60나유타(那由他)의 보살 대중이 있었느니라. 그 당시의 전륜성왕으로 복보장엄(福報莊嚴)이라는 왕이 있어서 7보를 구족하였는데, 그 왕의 국성(國城)은 남섬부주(南贍部洲)의 궁전처럼
동ㆍ서ㆍ남ㆍ북으로 사방의 넓이가 각각 4유선나(瑜繕那)에 이르렀으며 중간중간이 7보로 장엄되어 있었고, 또한 5백의 동산이 있어서 그 장엄함을 서로 비추었느니라. 거기에 또 복보장엄왕이 거느린 8만 4천의 채녀들은 모두 단정 미묘하였고, 4만의 아들들은 다 뛰어난 용맹과 단엄한 모습을 갖추었느니라. 그 가운데 두 보녀(寶女)가 있었으니, 바로 길상위(吉祥威)와 길상광(吉祥光)이었느니라. 왕이 그 채녀와 왕자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여 저 애장엄(愛莊嚴)이란 동산에 나아가서 노래와 춤으로 스스로 즐기니, 두 보녀가 품속에서 각각 아들을 화생(化生)시켰느니라. 그들의 용모의 단정함과 색상(色相)의 광명은 견줄 데가 없었으니, 이것은 그들이 전생에 심은 선근으로 원력을 세워서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희구하였기 때문이었느니라. 그 화생한 한 아들의 이름은 사자(師子)이고, 다른 한 아들의 이름은 사자용보(師子勇步)였는데, 이 두 아들은 화생하자마자 곧 다함께 부왕(父王)을 향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느니라.

과거에 지은 선업이 다 남아 있고
여래께 공양한 공덕도 있을뿐더러
보리를 좋아하여 버리지 않으므로
견고한 배움 역시 잊지 않습니다.

보시와 계율을 어기지 않는 한편
인욕의 부드러운 행도 성취하고
은혜를 알아 선한 업으로써 보은하며
정진하여 보리의 원을 버리지 않습니다.

일심으로 선정에 들어 해탈하되
선정과 지혜를 구족하여 미혹되지 않고
지혜의 업을 닦아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속히 저 보리를 증득하게 됩니다.

모든 번뇌에 물들지 않음으로
태(胎)를 받아 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저 연꽃 위에 태어나니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습니다.

동방에 의왕(醫王)이라는 부처님께서 계시니
저희들이 그곳으로 가 법을 구할 것입니다.
이 무구(無垢)부처님을 가까이 공양하여서
3세(世)에 걸림 없는 지혜를 성취하려 합니다.

부왕께서도 함께 저 부처님의 처소에 가서
받들어 예배하고 법을 들어서 닦아야 하니

여래께서 출현하심을 만나보기 어려운 것은
우담발화(優曇鉢華)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자마자 곧 환희심을 내어 그의 처자와 시종 그리고 일천 구지(俱胝)의 권속들을 데리고 저 여래의 처소에 나아가 마음을 다해 예배한 뒤에, 미묘한 꽃과 바르는 향을 뿌려서 공양하고는 다시 오른편으로 돈 다음 단정한 몸으로 합장하고 부처님 앞에 머물렀느니라. 그 때를 같이하여 사자와 사자용보(師子勇步)도 역시 부처님 앞에 엎드려 예배하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느니라.

바른 법을 구해 유정을 이롭게 하려고
이제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원컨대 어두운 세상의 등불이 되어
유정들의 마음을 다 깨우쳐 주소서.

저희들은 높은 지위만을 믿어
저 다섯 가지 욕심에 얽매이고
부처님을 가까이 하지 않아
공양과 법문을 저버렸으니

원컨대 세존이시여,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장 수승한 보리의 도를 널리 설하시어
일체의 유정들이 이 설법을 들음으로써
다 불승(佛乘)에 물러나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자 무구 부처님께서는 80다라수(多羅樹) 높이의 허공으로 솟아올라 역시 게송으로 대답하셨느니라.

왕이여, 이제 나의 수승한 법을 듣고
들은 그대로 수행해야 하느니라.

욕심은 덧없고 생명은 지키기 어려워
마치 몸은 아침 이슬이나 물거품과 같고
애욕의 즐거움은 꿈이나 유희와 같으니
어떤 지혜로운 자가 탐욕을 부리겠는가?

애욕에 물든 자는 만족함이 없이
더욱 더 애욕에 목마르니 범부는
경계까지 다다라 쉼이 없느니라.
지혜로운 자만이 만족함을 아네.

5온(蘊)은 허깨비처럼 견고하지 않고
세간에 대한 관찰을 미혹시키느니라.
모든 경계는 저 독사와 같기도 하고
여섯 감관은 텅 빈 마을과 같으니라.

왕의 지위도 국토도 처자도 권속도
그 모든 것이 다 덧없는 것이지만
오직 보시ㆍ계율ㆍ정진ㆍ선정만은
현세나 내세에 반려(伴侶)가 되느니라.


왕이 만약 나의 신통과 위덕의 힘과
단엄한 상호와 구족한 변재를 보고서
다음 세상에 이러한 업을 누리려거든
마땅히 위없는 보리의 마음을 내야 하네.

복보(福報)대왕은 이 법을 듣고 나서, 70구지(俱胝)의 처자와 시종 그리고 모든 권속들과 더불어 다 위없는 보리의 마음을 내어 부처님께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느니라.

저희들은 이미 수승한 마음을 내어
널리 유정들을 제도하고자 하옵니다.
맹세코 보리의 행을 닦겠사오니
원컨대 성불하게 하여 주옵소서.

선남자여, 그 때에 복보장엄왕은 저 부처님께 이러한 게송으로 맹세하고 나서 다시 그의 권속들과 함께 공경히 합장하고 엎드려 예배한 후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느니라.
“세존이시여, 원컨대 자비로운 마음으로 저희들의 공양을 받아 주소서.”
때마침 세존께서는 그들을 가엾이 여겨 그 청을 받아 들이셨느니라. 복보장엄왕이 곧 갖가지의 의복ㆍ음식ㆍ침구ㆍ약품과 그 밖의 수승하고도 오묘한 허물이 없는 재보로써 8만 4천의 세월에 걸쳐 공양하니, 이 공덕으로 말미암아 사자와 사자용보를 비롯해 2만의 왕자들이 다 청정한 신심을 내어 세간의 영화와 지위를 버리고 저 부처님의 법에 따라 출가하여 도를 닦았느니라. 두 왕자들은 그 보리의 법에 대해 부지런히 정진함으로써 오래지 않아 다섯 가지의 신통을 얻는가 하면 뜻한 대로 되는 신통[如意通]의 힘과 본원(本願)의 힘을 얻어서 일체의 불국토에 불사를 일으키고 유정들에게 널리 묘한 법을 설하여 무량무수 아승기(阿僧祇) 겁의 유정들로 하여금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에 편히 머물게 하였느니라.
선남자여, 그 복보장엄왕은 8만 4천의 세월이 지나자 다시 법을 듣기 위해 무구염무량광왕여래의 처소에 나아갔는데, 두 왕자가 출가하여 도를 닦는 것을 보고는 문득 생각하길, ‘이 아이들은 출가하여 지금까지 무엇을 얻었는가?
내가 8만 4천의 세월 동안 온갖 재보로 공양한 그 공덕조차 모르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느니라. 선남자여, 그 때에 무구염무량광왕여래께서는 왕의 속마음을 아시고 곧 사자용보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선남자여, 너는 이제 지혜의 신통과 공덕의 신통과 위신력의 신통을 보여주되, 이 대중의 모든 위광(威光)과 일체 궁전의 광명을 덮어버리는 동시에 보리의 모습을 나타내어서 온 대중들로 하여금 희유한 마음을 내게 하여라. 그리고 그 바른 소견으로 온갖 삿된 논의를 항복 받고, 큰 법의 횃불을 켜서 모든 번뇌를 그치게 하며 보살의 자재로운 신통에 거닐어야 하리라.”
이 말씀을 들은 사자용보보살이 곧 손을 들어 큰 허공을 어루만지자 삼천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다시 손을 들어 허공을 어루만지자 그 허공으로부터 백천 구지의 하늘 음악이 연주하지 않아도 스스로 울려서 고운 소리를 냈느니라. 또 다시 손을 들어 허공을 어루만지자 이제까지 보도 듣도 못한 그 미묘하고 한량없는 꽃들이 허공에서 빗물처럼 내렸는데, 그 하늘 꽃의 부드럽기가 마치 가지율다(迦止栗多)라는 새의 털 솜과 같아서 손에 닿을 때마다 수승한 쾌락을 느끼게 하였고, 그 밖의 갖가지 보배와 가루 향ㆍ바르는 향ㆍ비단 일산ㆍ당번ㆍ의복ㆍ음식 따위의 일체 장엄거리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쌓임으로써 모임의 대중들이 이것을 보고 다 전에 없던 환희심을 내었느니라. 그 때에 무구염무량광왕여래께서 복보장엄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내리는 저 크나큰 보시의 보배 수량이 얼마나 많은지 왕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왕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느니라.
“세존이시여, 이 빗물처럼 내리는 보시의 보배야말로 마치 허공과 같아서 그 수량을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대왕이여, 이것은 사자용보보살이 신통한 지혜의 힘으로 한 찰나 사이에 이러한 보배를 빗물처럼 내려서 항하사 수의 세계에 가득하게 함으로써,
일체의 유정들이 뜻한 대로 다 만족하여 환희심을 내게 하는 것이오.”
선남자여, 그 때에 이 지상에 머물던 천인들까지 다음과 같이 외쳤느니라.
“이 보살은 미래세에 반드시 허공의 창고를 성취하여서, 유정들이 구하는 대로 다 이러한 보배를 빗물처럼 내려 주리라.”
이와 같이 사대천왕을 비롯해 33천(天)의 여러 천왕들과 야마천(夜摩天)ㆍ도사다천(覩史多天 : 도솔천)ㆍ낙변화천(樂變化天)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ㆍ대범천왕(大梵天王)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외쳤느니라.
뿐만 아니라 그 때에 저 무구염무량광왕여래께서도 사자용보보살에게 앞으로 허공의 창고를 성취할 것이라고 인가하셨고, 이에 따라 그 항하사 수의 부처님들이 한꺼번에 같은 소리로 인가하셨노라. 선남자여, 마침내 복보장엄왕도 사자용보보살의 이러한 신통 변화를 보고는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느니라.
“세존이시여, 보살의 신통과 복덕의 힘이 이와 같이 부사의한 것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리고서 왕은 곧 왕자 승혜(勝慧)에게 왕위를 물려 준 다음 스스로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저 부처님의 법을 따라 출가하여 도를 닦았는데, 스스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느니라.
‘출가한 자는 몸ㆍ입ㆍ뜻이 다 청정하기 때문에 보시로써 유정들의 몸ㆍ입ㆍ뜻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고, 출가한 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보시로써 유정들의 부족함을 구제하려는 것이고, 출가한 자는 견실한 과(果)를 얻기 때문에 보시로써 유정들의 위태로움을 제거하려는 것이고, 출가한 자는 남이 거두어주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보시로써 자신이 유정들을 거두어주는 것이고, 출가한 자는 일체의 견해를 여의기 때문에
보시로써 유정들의 몸의 견해를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고, 출가한 자는 고요한 지혜로 모든 것을 두루 알기 때문에 보시로써 유정들을 어린아이처럼 거두어 환희심을 내게 하려는 것이리라.’
왕은 한적한 곳에 고요히 앉아 방일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도를 닦았는데, 그 후 5신통을 얻었느니라.
선남자여,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그 때의 복보장엄왕은 바로 구류손(拘留孫)여래이시고 그 때의 사자보살은 바로 나 자신이었으며 사자용보보살은 바로 허공장보살이었으니, 이 허공장보살은 한량없는 백천 구지의 그 많은 겁에 이르도록 허공의 창고로부터 항상 쉼 없이 보배를 빗물처럼 내리게 하였느니라. 그리고 또 그 때의 승혜(勝慧)왕자는 곧 지금의 자씨(慈氏)보살이었으니, 선남자여, 그 누구라도 청정한 뜻으로 전생에 많은 선근(善根)을 심어 법의 가르침을 듣게 되면, 마땅히 유정들을 위해 의지할 바를 마련하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허공장보살의 전생의 인연을 말씀하시자, 그 때에 20만 명의 사람들이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다.
그 때에 대허공장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의 세간을 벗어나는 도[出世間道]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세간을 벗어나는 도라는 것은, 6바라밀(波羅蜜)ㆍ37보리(菩提)의 법ㆍ사마타(奢摩他)ㆍ비바사나(毘婆舍那)ㆍ4섭법(攝法)ㆍ4무량심(無量心)ㆍ4선(禪)ㆍ4무색정(無色定)2)ㆍ5신통(神通)3)이 그것이니라.
그리고 선남자여, 세간이란 5온(蘊)을 이르는 것이니라. 보살이 보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지혜의 방편으로 물질의 덧없음을 알아 보시를 행하고,
물질의 괴로움과 물질의 나 없음과 물질의 고요함과 물질의 공함과 물질의 상(相) 없음과, 물질의 원(願) 없음과 물질의 지음 없음과 물질의 나지 않음과 물질의 일어나지 않음과 물질의 인연의 일어남과, 물질의 모든 것을 멀리 여읨과 물질의 집착 없음과 물질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없음과 물질의 발기(發起)하지 않음과 물질의 허깨비 같음과, 물질의 꿈 같음과 물질의 아지랑이 같음과 물 속의 달 같음과 산골의 메아리 같음과 그림자 같음과 물질의 풀ㆍ나무ㆍ기와ㆍ자갈 같음을 알아서 보시를 행해야 하느니라.
또 보살이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할 때에는 물질의 진여(眞如)를 앎으로써 곧 보시의 진여를 알고, 보시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알고,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앎으로써 곧 보리의 진여를 얻고, 보리의 진여를 얻어 앎으로써 곧 유정의 진여를 알고, 유정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나의 진여를 알고, 나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일체 법의 진여를 알고, 일체 법의 진여를 앎으로써 진여가 아닌 것과 진여의 허망하지 않음과 진여의 차별 없음을 다 알고 보시를 행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이와 같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에 대해서도 그 덧없음을 알아서 보시를 행하고, 이와 같이 의식의 나 없음과 의식의 고요함과 의식의 공함과 의식의 상(相) 없음과 의식의 원(願)없음과 의식의 지음 없음과 의식의 나지 않음과 의식의 일어남 없음과 의식의 인연의 일어남과 의식의 모든 것을 멀리 여읨과 의식의 집착 없음과 의식의 아뢰야식 없음과 의식의 발기하지 않음과 의식의 허깨비 같음과 의식의 꿈 같음과 의식의 아지랑이 같음과 물 속의 달 같음과 산골의 메아리 같음과 그림자 같음과 의식의 형상 없음을 알아서 보시를 행해야 하느니라.
또 보살이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할 때에는 의식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보시의 진여를 알고, 보시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알고,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앎으로써 곧 보리의 진여를 얻고, 보리의 진여를 얻어 앎으로써 곧 유정의 진여를 알고, 유정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나의 진여를 알고, 나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일체 법의 진여를 알고, 일체 법의 진여를 앎으로써 진여가 아닌 것과 진여의 허망하지 않음과 진여의 차별 없음을 다 알고 보시를 행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그 물질의 덧없음을 알아서 계율을 수행하고 내지 물질이 풀ㆍ나무ㆍ기와ㆍ자갈과 같음을 알아서 계율을 수행해야 하느니라. 또 보살이 이와 같이 계율을 수행할 때에 그 물질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계율의 진여를 알고, 계율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알고,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앎으로써 곧 보리의 진여를 얻고, 보리의 진리를 얻어 앎으로써 곧 유정의 진여를 알고, 유정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나의 진여를 알고, 나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일체 법의 진여를 알고, 일체 법의 진여를 앎으로써 진여가 아닌 것과 진여의 허망하지 않음과 진여의 차별 없음을 다 알고 계율을 행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이와 같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에 대해서도 그 덧없음을 알아서 계율을 행하고, 이와 같이 내지 의식의 형상 없음을 알아서 계율을 행해야 하느니라. 또 보살이 이와 같이 계율을 행할 때에 그 의식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계율의 진여를 알고, 계율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알고,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앎으로써 곧 보리의 진여를 얻고, 보리의 진여를 얻어 앎으로써 곧 유정의 진여를 알고, 유정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나의 진여를 알고, 나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일체 법의 진여를 알고, 일체 법의 진여를 앎으로써 진여가 아닌 것과 진여의 허망하지 않음과 진여의 차별 없음을 다 알고 계율을 행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물질의 덧없음을 알아서 인욕ㆍ정진ㆍ선정ㆍ반야를 행하고 내지 그 물질이 풀ㆍ나무ㆍ기와ㆍ자갈과 같음을 알아서 반야를 행해야 하느니라. 또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를 행할 때에 그 물질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반야의 진여를 알고, 반야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알고,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앎으로써 곧 보리의 진여를 얻고, 보리의 진여를 얻어 앎으로써 곧 유정의 진여를 알고, 유정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나의 진여를 알고, 나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일체 법의 진여를 알고, 일체 법의 진여를 앎으로써 진여가 아닌 것과 진여의 허망하지 않음과 진여의 차별 없음을 다 알고 반야를 행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이와 같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에 대해서도 그 덧없음을 알아서 반야를 행하고, 이와 같이 내지 의식의 형상 없음을 알아서 반야를 행해야 하느니라. 또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를 행할 때에 그 의식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반야의 진여를 알고, 반야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알고,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앎으로써 곧 보리의 진여를 얻고, 보리의 진여를 얻어 앎으로써 곧 유정의 진여를 알고, 유정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나의 진여를 알고, 나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일체 법의 진여를 알고, 일체 법의 진여를 앎으로써 진여가 아닌 것과 진여의 허망하지 않음과
진여의 차별 없음을 다 알고 반야를 행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그 물질의 덧없음을 알아서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신념처(身念處)를 닦으며 내지 그 물질이 풀ㆍ나무ㆍ기와ㆍ자갈과 같음을 알아서 신념처를 닦아야 하느니라. 또 보살이 이와 같이 신념처를 닦을 때에 그 물질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몸의 진여를 알고, 몸의 진여를 앎으로써 내지 일체 법의 진여를 알고, 일체 법의 진여를 앎으로써 진여가 아닌 것과 진여의 허망하지 않음과 진여의 차별 없음을 다 알고, 신념처를 닦음에 있어 그 몸의 수행이 진여와 함께 어긋나지 않게 되니, 이것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이와 같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에 대해서도 그 덧없음을 알아서 신념처를 닦고, 이와 같이 내지 의식의 형상 없음을 알아서 신념처를 닦아야 하느니라. 또 보살이 이와 같이 신념처를 닦을 때에 그 의식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몸에 대한 생각의 진여를 알고, 몸에 대한 생각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알고, 진여에 회향하는 것을 앎으로써 곧 보리의 진여를 얻고, 보리의 진여를 얻어 앎으로써 곧 유정의 진여를 알고, 유정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나의 진여를 알고, 나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일체 법의 진여를 알고, 일체 법의 진여를 앎으로써 진여가 아닌 것과 진여의 허망하지 않음과 진여의 차별 없음을 다 알고 몸에 대한 생각을 닦게 되느니라. 수념처(受念處)ㆍ심념처(心念處)ㆍ법념처(法念處)를 닦음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진여와 함께 어긋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이와 같이 그 물질의 덧없음을 앎으로써 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37보리의 법ㆍ8정도[八聖道]ㆍ사마타(奢摩他)ㆍ비바사나(毘婆舍那)ㆍ4섭법(攝法)ㆍ4무량심(無量心)ㆍ4선(禪)ㆍ4무색정(無色定)ㆍ5신통(神通)에 있어서도 다 그와 같이 물질의 괴로움과 물질의 나없음과 물질의 고요함과 물질의 공함과 물질의 상(相) 없음과 물질의 원(願) 없음과 물질의 지음 없음과 물질의 나지 않음과 물질의 일어나지 않음과 물질의 인연의 일어남과 물질의 모든 것을 멀리 여읨을 알고 내지 물질이 풀ㆍ나무ㆍ기와ㆍ
자갈과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이와 같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에 대해서도 그 덧없음을 알아서 신통의 지혜를 이끌고, 내지 의식의 형상 없음을 알아서 신통의 지혜를 이끌어야 하느니라. 말하자면 5온(蘊)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신통의 진여를 알고, 신통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일체 법의 진여를 알고, 일체 법의 진여를 앎으로써 곧 진여가 아닌 것과 진여의 허망하지 않음과 진여의 차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니, 신통의 지혜를 이끄는 것도 그러하니라. 이것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이니라.
선남자여, 어찌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이 도를 보살의 도라고 하는가 하면, 물질의 진여를 알아 그 물질이 파괴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고, 단견(斷見]도 상견(常見)도 아니어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이 제 성품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진여를 알기 때문에 내지 그 의식이 파괴되지 않고, 단견도 상견도 아닌 바른 견해로 인연 따라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이 제 성품이 없음을 알아서 세간의 5온을 초월하여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어느 세계에도 물들지 않기 때문에 5취(趣)에 몸을 받는 유정들을 위하니, 이것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라고 하느니라.
다시 말하면, 이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는 바로 진여의 도이고 동시에 그 진여의 도는 세간을 파괴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덧없는 상(相)이기 때문에 세간을 파괴하지 않으며, 괴로움의 상이고 나없음의 상이고 고요한 상이고 공한 상이고 형상이 없는 상이고 원이 없는 상이고 내지 진여 그대로의 상이기 때문에 세간을 파괴하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세간을 벗어나는 이 보살의 도는 바로 청정한 도이기 때문에 보살이 만약에 청정한 도에 머문다면 곧 악한 도에 헤매는 저 유정들을 위해 큰 광명을 일으키니, 이 광명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역시 세간을 벗어나는 도라고 하느니라. 이 도를 가장 수승한 도라고 하는 것은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 도를 가장 청정한 도라고 하는 것은 일체의 선하지 않은 마음을 여의기 때문이고, 이 도를 가장 뛰어난 도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의 정수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 도를 위없는 도라고 하는 것은 생사의 거친 물줄기를 건널 수 있기 때문이고, 이 도를 비교할 수 없는 도라고 하는 것은 일체의 편견과 외도를 초월하기 때문이고, 이 도를 비할 바 없는 도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도의 법도
이 도의 법과 같은 종류가 없기 때문이고, 이 도를 견줄 바 없는 평등한 도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부처님의 도를 다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 도를 안온한 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마군과 원수를 다 굴복시키기 때문이고, 이 도를 걸림 없는 도라고 하는 것은 뜻한 대로 신통의 지혜로써 유희하기 때문이고, 이 도를 어둠이 없는 도라고 하는 것은 지혜의 광명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이 도를 바르고 평등한 도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첨곡(諂曲)이 없기 때문이고, 이 도를 올곧은 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삿됨을 여의기 때문이고, 이 도를 평등한 도라고 하는 것은 유정들에게 평등한 마음을 베풀기 때문이고, 이 도를 크나큰 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유정을 포용하기 때문이고, 이 도를 널리 관대한 도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괴롭히지 않기 때문이고, 이 도를 나[生]는 도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이 없기 때문이고, 이 도를 복덕의 자량(資量)이라고 하는 것은 보시바라밀다이기 때문이고, 이 도를 타오르는 번뇌가 없는 도라고 하는 것은 계율바라밀이기 때문이고, 이 도를 두려움이 없는 도라고 하는 것은 인욕바라밀다이기 때문이고, 이 도를 물러나지 않는 도라고 하는 것은 정진바라밀다이기 때문이고, 이 도를 모든 경계를 벗어난 도라고 하는 것은 선정바라밀다이기 때문이고, 이 도를 허공과 같은 도라고 하는 것은 지혜 바라밀이기 때문이고, 이 도를 지혜에 수순하는 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고, 이 도를 항상 만족의 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선한 법을 모으기 때문이고, 이 도를 법륜(法輪)에 수순하는 도라고 하는 것은 들은 것을 잊지 않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가 이처럼 비할 바 없이 수승하고 청정하다.
보살이 만약 이 청정한 도에 머무르면 큰 갑옷를 입고 대승(大乘)을 성취하여서 이 대승으로 말미암아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느니라. 그 큰 갑옷을 입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보살이 제도 받지 못한 자를 위해 제도의 큰 갑옷을 입는 것은 유정을 건너게 할 수 있는 큰 배[船]를 잘 운행하기 때문이고, 해탈하지 못한 자를 위해 해탈의 큰 갑옷을 입는 것은 번뇌에 속박된 모든 견해를 없애기 때문이고, 안락하지 못한 자를 위해 안락의 큰 갑옷을 입는 것은 공포에 사로잡힌 유정들을 다 거두어 주기 때문이고, 열반에 이르지 못한 자를 위해 열반에 이르게 하는 큰 갑옷을 입는 것은 전도된 자들로 하여금 바른 도를 얻게 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유정들을 해탈시키는 갑옷을 입는 것은
나라든가 유정이라든가 수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고, 법을 받아 지니는 갑옷을 입는 것은 그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기 때문이고, 모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갑옷을 입는 것은 더욱 선근을 구족히 닦기 때문이고, 상호(相好)를 장엄하는 갑옷을 입는 것은 갖가지 복덕의 자량(資量)을 쌓기 때문이고, 모든 마군과 외도를 굴복시키는 갑옷을 입는 것은 신통의 힘을 얻기 때문이고, 일체의 유정으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게 하는 갑옷을 입는 것은 4무애지(無礙智)를 얻기 때문이고,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구하는 갑옷을 입는 것은 다라니(陀羅尼)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고, 일체 유정들의 마음을 관찰하는 갑옷을 입는 것은 신통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고, 일체 유정들의 근기와 그 처음과 끝이 있는 지혜를 알기 위한 갑옷을 입는 것은 방편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고, 10력(力)을 만족하는 갑옷을 입는 것은 지혜의 힘을 쌓기 때문이고, 두려움 없는 갑옷을 입는 것은 어떠한 처소에서라도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고, 18불공법(不共法)을 만족하는 갑옷을 입는 것은 일체의 선한 법을 닦아서 선하지 않은 법을 끊기 때문이고, 일체의 법을 들어도 놀라거나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갑옷을 입는 것은 그 일체의 법이 허깨비와 꿈과 광명의 그림자와 산골의 메아리와 물 속의 달과 같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고, 큰 자비의 갑옷을 입는 것은 모든 유정이 본래 다 열반을 성취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고, 뛰어난 방편의 갑옷을 입는 것은 공(空)하고 무상(無相)하고 무원(無願)하고 지음이 없는 법을 듣고서 생사에 머무는 방편을 나타내기 때문이고, 과거 부처님께서 가지(加持)하신 그 흔들리지 않는 갑옷을 입는 것은 결정된 계위를 벗어나 일체 법의 나지 않음과 일체 행의 사라지지 않음을 듣고서 과증(果證)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대승을 성취하는 갑옷이니, 보살이 이 스무 가지의 갑옷을 입어야만 대승에 올라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느니라.
다시 말하면, 저 대승을 성취함에 있어서 4섭법(攝法)으로 법륜(法輪)을 삼는 것은 모든
유정들을 능히 잘 거두어들이기 때문이고, 청정한 10선업(善業)으로 법륜의 바큇살[輻]을 삼는 것은 모든 바른 행을 능히 잘 통달하기 때문이고, 청정한 마음과 선한 근기로 법륜의 굴대[軸]를 삼는 것은 깊고 깊은 행의 근본을 능히 잘 짓기 때문이고, 크나큰 인연으로 일어난 지혜로 법륜의 통[轂]을 삼는 것은 유정들의 선한 업을 능히 잘 싣기 때문이고, 큰 자비심으로 법륜의 바퀴테[輞]를 삼는 것은 법보(法寶)의 나머지를 거두어 장엄하기 때문이고, 견고한 힘으로 밧줄을 삼는 것은 가장 수승한 공덕을 잃지 않기 때문이고, 과거의 서원과 뛰어난 지혜로 법륜의 나아감을 삼는 것은 큰 자비심의 방편을 능히 잘 운행하기 때문이고, 사마타(奢摩他)로 법륜의 끌채[轅]를 삼는 것은 4성제(聖諦)를 두루 잘 알기 때문이니라. 또 한없는 보시로 자량(資糧)을 희사하기 때문이고, 뜻대로 다니는 신통으로 모든 불국토를 거닐기 때문이고, 바른 생각의 끈으로 보리심을 잡아매어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니라.
또한 대승이란 어떤 것인가? 일체의 유정들을 널리 포용하는 동시에 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을 끊고 온갖 외도를 제어하고 마군을 무찔러서 광명의 지혜를 밝히는 것은 일체의 보살들이 닦아야 할 구경(究竟)의 지위에 능히 이르게 하기 때문이고, 범천(梵天)ㆍ제석천(帝釋天)을 비롯한 모든 천인들로부터 찬탄과 존경을 받기 때문이고, 사자처럼 안온한 곳에 자리잡아 일체의 법을 설하기 때문이고, 그 미묘한 색상(色相)을 나타냄으로써 보는 이마다 싫증이 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금강의 쇠사슬처럼 뜻이 견고하여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고, 보리의 마음을 길잡이로 삼아 그 수행과 원력에 따라 공덕을 만족하게 하기 때문이고, 청정한 천안(天眼)으로 항상 관찰하기 때문이고, 청정한 광명으로 시방을 비추기 때문이고, 항상 청정한 각지화(覺支花)를 빗물처럼 내리게 하기 때문이고, 항상 걸림 없는 법음(法音)을 울리게 하기 때문이고, 바른 이치로 걸맞는 법을 잘 설하기 때문이고, 모든 종류의 유정들을 잘 교화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보살들을 권속으로 삼기 때문이고, 한량없는 공덕을 장엄하기 때문이고, 일체지(一切智)를 내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이 보살이 저 스무 가지의 청정한 갑옷을 입어야만, 대승에 올라 세간을 벗어나는 보살의 도에 머무르고 많은 불사를 일으켜서 유정들을 편히 세울 수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대승의 큰 갑옷의 장엄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7만 2천의 천인과 사람들이 다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보리의 마음을 내었고, 3만 2천의 보살들은 세간을 벗어나는 그 청정한 도로 말미암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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