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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29 불교 도세품경(度世品經) 2권

by Kay/케이 2024.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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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도세품경(度世品經) 2

 

 

도세품경 제2권

서진 축법호 한역
송성수 번역


보지(普智)보살이 다시 보현(普賢)보살에게 물었다.
“무엇을 건립(建立)한다 하고, 무엇을 즐거이 믿는다[樂信] 하며, 무엇을 깊이 들어간다[深入] 하고, 무엇을 의지한다[依怙] 하며, 무엇을 뜻이 용맹하다[意勇] 하고, 무엇을 모든 의심[諸疑]을 끊는다 하며, 무엇을 불가사의[無思議]라 하고, 무엇을 참된 이치[眞諦]를 해설한다 하며, 무엇을 보응(報應)을 환히 안다 하고, 무엇을 정의(定意)라 합니까?
무엇을 어떻게 존재하는가[何所有]라 하고, 무엇을 해탈(解脫)이라 하며, 무엇을 신통(神通)이라 하고, 무엇을 통달한다 하며, 무엇을 해탈한다 하고, 무엇을 동산[園囿]이라 하며, 무엇을 궁전(宮殿)이라 하고, 무엇을 유관(遊觀)이라 하며, 무엇을 장엄(莊嚴)이라 하고, 무엇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心不動]고 합니까?
무엇을 성품에 버리는 바가 없다[性無所捨] 하고, 무엇을 지혜를 관한다[觀慧] 하며, 무엇을 법을 강설한다[講法]하고, 무엇을 청정한 원[淨願]이라 하며, 무엇을 인(印)이라 하고, 무엇을 지혜의 광명[慧光]이라 하며, 무엇을 무색을 행한다[行無色]하고, 무엇을 법의 마음이 없다[無法心]고 하며, 무엇을 마음이 산과 같다[心如山] 하고, 무엇을 바다[海]와 같다고 합니까?”
보현이 말하였다.
“잘 물었습니다. 보살이 마음을 건립(建立)하는 데에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언제나 뜻을 부처님께 두고, 항상 경법(經法)을 생각하며, 중생을 권유하고 교화하여 부처님의 도에 머무르게 하고, 편안한 사업을 권하며, 바른 행을 닦아 세우고, 서원을 수순하면서 즐기며, 언제나 위의를 생각하고, 때에 따라 유관[遊]하며, 선의 근본을 널리 펴고, 지혜의 뜻을 건립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 마음을 건립하는 열 가지의 일입니다.
이게 게송으로 말합니다.

한마음으로 항상 부처님을 염(念)하고
오로지 경전을 생각하며
중생에게 도(道)에 들도록 권유하고
그로써 지은 업을 보이네.

바른 법을 닦도록 찬탄하고 도우면서
항상 소원을 잃지 않게 하며
위의와 예절을 두루 갖추게 하여
선의 근본[善本]으로 성스런 지혜를 이루네.

보살이 즐거이 믿는[樂信]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보살은
‘장차 오는 세상에 여래ㆍ정진(正眞)께서 세간에 출현하시면 나는 반드시 모두 뵐 것이며, 모든 부처님을 뵌 뒤에는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면서 위없는 데에 뜻을 둘 것이며, 이 모든 정각(正覺)께 머리 조아려 스스로 귀의하면서 마땅히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마음을 냅니다.
이런 가르침으로 인해 보살의 지위로 돌아가 모든 보살들과 같이 가르침을 받들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손하고 조심하면서 들은 그대로 곧 수행합니다.
그때 보살은 다시 ‘나로 하여금 모든 부처님 세존과 모든 개사(開士:보살)를 여의지 않게 하고 생사로 치달리는 재난을 제거시키며 한량없는 겁 동안 보살의 행을 닦게 해주십시오’라고 생각합니다.
또 마음속으로, ‘옛날 아직 위없는 도의 뜻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에는 아직 법 그릇[法器]이 되지 못하였는지라, 그 깊은 법을 두려워하였고 또한 세간이 비방하는 나쁜 이름도 두려워하였으며, 또 생사와 악도(惡道)가 모이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나는 이것을 여읨으로써 영원히 그것과 합치지 않으며 그런 일을 멀리함으로써 태어나는 처소마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道心]을 떠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또한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영원히 모든 재난이 없을 것이며, 항상 번뇌[塵垢]를 여의어 더러움[穢濁]을 영원히 소멸시키며 들고 나는 데에 있어서 홀로 가며 뭇 악마를 항복시키고 모든 외도(外道)를 조복시키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마음속으로 ‘나는 마땅히 모든 중생 세계를 권유하고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율(律)의 가르침에 따르게 하며 뜻을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의 마음에 두게 하며 보살행을 닦아 부처님이 되었을 때에는 곧 높은 성인의 미묘한 도의 가르침에 따르게 할 것이니, 나는 마땅히 머리 조아려 받들어 공경하고 스스로 귀의하며 수명이 다할 때까지 한량없이 기뻐합니다.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에는 마땅히 수없는 탑묘(塔廟)와 절을 일으켜 사리(舍利)를 공양하고 섬기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펴고 경전을 널리 퍼지게 하여 위없는 뜻이 오래도록 영원히 존속할 수 있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마음속으로 ‘나는 반드시 끝없는 세계를 장엄하여 모든 부처님 국토가 맑고 화평하고 부드러우면서 갖가지의 차이가 있되 평등하고 청정하게 할 것이며, 나는 마땅히 수없는 부처님의 국토를 감동하여 모두 다
뜻을 일으키게 하고 큰 광명을 놓아 시방을 비추며 신족(神足)의 변화로 두루하지 않음이 없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마음속으로 ‘내가 성불한 뒤에는 마땅히 중생의 온갖 의심을 결단하고 그 지성(志性)을 교화하면서 언제나 맑고 온화하게 하며 그 뜻을 고요히 하면서 6진에 대한 탐욕[塵欲]을 소멸하고 모든 나쁜 문을 막으며 영원히 안락한 문을 열고 어두운 데를 없애 버리며 크게 빛나는 광명을 떨치면서 악마의 업을 덜어 버리고 가장 길상(吉祥)한 데에 이르러야 하며 이 공훈으로 중생에게 널리 펴 보이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마음속으로, ‘나는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뵙되, 위험과 액난이 있을 때에 받들어 뵈려고 생각하면 반드시 원하는 대로 되어서 정각을 뵙게 되고 어기거나 멀어지지도 않고 바로 눈앞에서 여래를 뵈어야 합니다. 설법하실 때에는 여래는 마치 영서화(靈瑞華:우담바라)가 오래도록 있는 것이 드문 것처럼,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에 한 번 나오실 뿐이어서 뵙기 어려우니, 청정한 마음을 내어 온갖 옳지 않은 생각은 버리고 그 뜻이 질박하고 정직하면서 아첨하지 않는 마음을 내야 한다’고 합니다.
또 마음속으로, ‘나는 위없고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어 으뜸가는 정각이 되어 모든 부처님 국토에서 불사(佛事)를 베풀어 짓고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각각 부처님 몸을 나타낼 것이며, 큰 법의 북을 치고 법의 단 이슬[甘露]을 내리며, 끝없는 법을 베풀되 청정하고 두려움이 없으면서 사자후(師子吼)를 외치며, 끝없는 서원을 세우고 법계에 머물러 경의 도[經道]를 널리 펴면서 한 겁도 쉬지 않으면서, 고달파하지도 않고 끝없이 말하면서 마음도 게으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 건립하는 열 가지 일이니 이에 게송으로 말합니다.

모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고
중생을 권유하며 인도하여
깊고 미묘한 법을 보이면서
위없는 도를 이루게 하네.

언제나 부처님 뵙기를 원하고
받들어 섬기면서 스스로 귀명하며
말씀하신 법을 듣고 받아서
일심으로 받들어 행하네.

세 가지 악취[三惡趣]를 끊기 위해
안락한 문을 열어 젖히며
그윽하고 어두운 데를 위하여
큰 광명 나타내 보이네.


경법(經法)을 널리 퍼뜨려 보시하고
모든 때와 티끌[垢塵]을 소멸시키며
크게 사자후를 외치면서
비오듯 감로(甘露)를 내리네.

보살이 법에 깊이 들어가는[深入]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세계의 모든 과거의 일에 모두 들어가서 지성(志性)이 깊고 오묘한 부처님 법에서 노는 것이고, 모든 부처님 국토에 있을 미래의 일에서는 부처님 국토에 있어서나 모든 셀 수 있는 존재[數]에 있어서나 정각(正覺)은 둘이 아닌 것[無二]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비록 모든 국토가 현재 적연(寂然)한 데에 있다 하더라도 세간의 방속(方俗)에 대해 말하거나, 국토[境土]를 청정하게 하는 것을 모두 다 압니다.
이렇게 깊은 법으로 들어가 존재하는 세상마다 여러 가지 가르침이 있게 되는 것이고, 또 모든 중생의 죄와 복이 같지 않음을 알고 모든 보살이 행할 바도 각각 다름을 헤아리는 것이며, 또 보살은 과거의 모든 여래께서 계셨던 곳을 다 알고 있으며,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더디거나 빠른 가르침을 다 압니다.
보살은 또 현재 국토에 계신 모든 부처님의 권속과 성인 대중과 설법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법계의 허공이 끝이 없으며 시방의 여래께서도 끝이 없음을 아는 것이고, 또 세속의 법과 성문의 법과 연각승과 보살과 여래를 분별하여 아는 것이며, 이런 법에 들어가서 바라는 것도 없으며 법계에 들어간다고 강설한 것들에도 역시 들어감이 없고 또 법을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고, 모든 법의 가르침에 따라 그로써 깨우치고 교화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깊이 부처님 법에 들어가는 열 가지 일입니다.
이에 게송으로 말합니다.

과거의 세상을 알고
미래와 현재의 세상도 알며
청정한 부처님의 세계를
방속(方俗)에 따라 나타내 보이네.

사람들의 죄와 복을 분별하고
모든 보살의 행할 바도 분별하며
현재의 모든 불국토도 분별하고
모든 보살의 집회(集會)도 분별하네.

중생의 수효를 알고
설법과 허공의 한계도 알며
모든 성문을 다 통달하고
연각승과 보살도 모두 아네.


보살이 의지하는 데에 열 가지가 있으니, 이 의지로써 보살의 행을 닦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언제나 부처님을 받들고 공경하면서 날마다 귀명하고, 중생을 깨우치면서 교화하며, 모든 착한 벗을 보고서 의지하며 따르고, 항상 기뻐하면서 뭇 덕의 근본을 쌓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고, 언제나 온갖 것을 가엾이 여기면서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두루 모든 도무극(度無極)으로 들어가고, 모든 보살의 원을 완전히 갖추려 하며, 한량없이 닦아 도의 마음으로 돌아오고, 모든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었음을 분명히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의지하여 도를 이루는 열 가지 일입니다.
이에 게송으로 말합니다.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공경하고
보살의 행에 의지하여 따르며
중생들을 깨우쳐 교화하면서
좋은 벗을 공경하고 따르네.

많은 덕의 근본을 쌓고
모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며
모든 도무극에 들어가서
보살의 원을 두루 갖추네.

보살이 마음을 용맹하게 하는[意勇]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음개(陰蓋)의 죄를 소멸하여 없애고,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비록 멸도(滅度)에 드셨다 하더라도 내리신 교훈을 받들어 용맹한 마음으로 악마들을 항복받으며, 무상한 줄 환히 알아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른 법의 인연으로 외도를 조복하여 교화하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으로 중생을 기쁘게 하고, 뛸 듯이 기뻐하는 마음으로 모인 대중이 보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온갖 하늘ㆍ용ㆍ귀신ㆍ건달바[揵沓和]ㆍ아수라[阿須倫]ㆍ가루라(迦留羅)ㆍ긴나라[甄陀羅]ㆍ마후라가[摩睺勒]를 조복하고 교화하고, 모두 그 인연을 받고는 유순하게 받들어 닦으며, 법의 깊고 오묘함에 의지하여 언제나 성문과 연각의 지위를 버리고, 수없는 겁 동안 보살 일을 행하면서 게으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마음을 용맹하게 하는 열 가지 일입니다.
이에 게송으로 말합니다.

모든 음개(陰蓋)를 버리고
부처님 가신 뒤에도 남기신 교법 받들며
뭇 악마를 항복받고

스스로 몸과 목숨 아끼지 않는다네.

뭇 외도를 항복받고 교화하며
중생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므로
귀신도 모두 함께 가르침을 받고
언제나 보살행을 받든다네.

보살이 모든 의심을 끊고 잡다한 생각[沈吟]이 없게 하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보살은 마음을 일으키고 마음속으로, ‘나는 반드시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로써 중생을 구제하여 거두고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로써 깨우치도록 이끌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비록 이것을 행할 때에도 망설임이 없으니, 나아가고 물러남이 없게 하려 함에서입니다.
또 마음속으로 ‘내가 장차 시방의 정각(正覺)과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뵙게 되거든 위없는 지혜로써 모든 부처님께 공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터럭만큼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또 보살은 ‘여러 가지 광명으로 모든 부처님 국토를 구족하게 환히 비추겠으며 모든 보살들이 장차 오는 세상에서 행할 것에 대해 들으면 수없는 겁 동안 마음에 싫증내거나 게으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한량없는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으며 법계는 한량없고 끝이 없어 마치 허공과 같다고 헤아리고 제도해야 할 중생의 수효도 역시 그러한 데 대해 싫증내거나 물러나지 않습니다.
또 마음속으로 ‘보살의 행을 닦고 모든 원을 빠짐없이 갖추며 일체지(一切智)와 모든 신통의 지혜를 이루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보살행을 행할 때에 나로 하여금 도법(道法)의 광명과 부처님의 최상의 광명을 모두 체득하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즐거이 모든 법을 헤아려 모두 다 부처님 법이 되도록 하고 중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두루 알며, 셀 수 없고 다함이 없는 많은 무위법(無爲法)과 유위법(有爲法)을 분명히 알면서 평등한 깨달음[平等覺]을 이룹니다.
모든 법을 분명히 통달하여 모두 세간을 제도하고 뒤바뀐 소견과 생각을 제거하며 비록 더럽고 혼탁한 것이 있더라도 본래 다 청정하게 합니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 법을 환히 알아서 으뜸가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생각이나 뒤바뀐 생각에 한 터럭만큼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번뇌[漏]로 인해 비록 유위에 있더라도 무위를 통달하여 모든 이익과 자양을 버리고 곧 셀 수 없이 많은 본제(本際)에 능히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모든 의심을 끊는 열 가지의 일입니다.
이에 게송으로 말합니다.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을 생각하고
일심(一心)으로 지혜를 닦으며
자ㆍ비ㆍ희ㆍ호를 행하면서
모든 부처님 뵙고 받들며 공경한다네.

한량없는 미래 겁 동안에
광명을 구족하게 환히 비추며
마음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면서
부처님의 일체지를 이룬다네.

모든 법은 부처님의 법이고
또한 세간을 제도하는 법이니
더럽혀지고 뒤바뀐 소견을 버리면
부처님의 으뜸가는 정각 이룬다네.

보살이 불가사의[無思議]한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닦은 덕의 근본이 불가사의합니다. 온갖 소원이 그 수량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모든 법은 다 허깨비[幻化]와 같고 그로 인하여 도의 마음을 일으켜 모든 착한 업[善業]에 의지하면서 어기거나 잃는 바가 없습니다.
보살행을 닦으면서 영원히 허망한 생각이 없고 깊고 요긴한 뜻을 닦으면서 모든 법에 널리 들어가며 멸도(滅度)를 취하지 않고 도의 지혜가 구비되지 않으면 끝내 버리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보살은 도를 행하면서도 태(胎)에 들어가고 모체에서 태어나며 부지런히 고행을 쌓고 불수(佛樹:보리수) 아래로 나아가며 악마들을 항복받고 최정각(最正覺)을 이루어서 법륜(法輪)을 굴리며 멸도를 취하는 것을 나타내고 모든 불사(佛事)도 나타내며 건립하고 나타낸 바가 대애(大哀)를 버리지 않고 모든 중생을 보호하면서 본래의 서원을 어기지 않습니다.
또 그 보살은 여래의 10력(力)을 건립하고 나타내 보이고 처음 발심할 때부터 법계에 있으면서 중생을 교화하며 쉬거나 그만두는 일이 없습니다.
또 그 보살은 모두가 없는 생각[無想]으로써 많은 생각에 들어가고 또 있는 생각[有想]으로써 없는 생각에 들어가며, 생각할 바 없는 것으로써 모든 생각하는 일을 말하고, 또 모든 생각으로써 생각할 것이 없는 일을 말하며, 있는 바가 없는 것[無所有]으로써 있는 바에 들어가고 또 모든 있는 바로써 있는 바가 없는 데에 들어갑니다.
지을 바 없는 것[無所作]을 변화하여 지을 바 있는 것에 들어가고, 지을 바 있는 것을 변화하여 지을 바 없는 것에 들어가며,
얻을 바 없는 것[無所得]에서 얻을 바 있는 것을 말하고 얻을 바 있는 것에서 얻을 바 없는 것을 말하면서 모든 법은 다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또 그 보살은 도(道)에 대하여 마음이 평등하고 도가 평등함으로써 중생의 도에 대한 마음도 다름이 없는 줄 알며 마음이 뒤바뀌게 보지 않으므로 생각하는 바에도 허물이 없고 삿된 의심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보는 바가 평등합니다.
또 그 보살은 뜻을 일으키는 동안에 그 마음이 고요하여 정의 (定意)로 바르게 거두고[受] 본제(本際)에 있으면서 증득[證]을 짓지 않습니다.
유루(有漏)이면서 영원히 멸하지 않음이 없고 모든 덕을 유포하면서 모든 법을 환히 깨달으며 무루(無漏)이면서 남을 위해 연설하고 모든 번뇌가 다하여도 역시 남을 위해 선설하며 모든 번뇌가 제거되면 곧 부처님 법으로써 세속의 법에 들어갑니다.
비록 그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세속이라는 생각이 없고 도(道)와 세속이라는 생각이 없으면서 온갖 법은 모두 법신(法身)에 들어가면서도 들어가는 바가 없다고 관하며 모든 법은 둘이 아니고 또한 행할 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압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불가사의이니,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면 속히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에 이릅니다.
보살이 참된 이치[眞諦]를 해설하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부처님의 법을 연설하되 그때마다 지성스러우며 악법(惡法)을 버리고 그 절도를 잃지 않습니다.
모든 보살은 신족(神足)의 변화로써 바른 깨달음의 교법을 베풀어 펴고 방편을 따름으로써 중생의 죄와 복의 업(業)에 들어갑니다.
중생을 널리 통달하여 온갖 진로(塵勞)와 죄 되는 일을 제거시키고 중생의 뜻과 무위의 법을 모두 통달함으로써 모든 장애를 소멸시키고 고요한 업을 닦게 합니다.
또 그 보살은 마치 허공과 같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어느 곳에 들어가더라도 금계(禁戒)를 범하지 않고 하늘과 땅이 생기거나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주춤하지 않습니다.
모든 세계에 있으면서 잡다한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법의
경계에 대해 가리거나 장애받지 않으며 가는 곳마다 미묘함을 더하고 여래ㆍ지진께서 탄생하고 출가하여 마침내 멸도에 이르기까지에 대해 통달하게 됩니다.
또 법계의 보살과 모든 부처님에 들어가서 모든 부처님의 나아가고 그치는 거동을 널리 봅니다.
보살은 여러 부류의 중생들이 열반[泥洹]에 처하는 것도 모두 보며 짓는 바가 없기 때문에 원(願)에 있어서는 그것에 떨어지지 않고 빠짐없이 모이되 모든 지혜[慧智]를 통달하게 됩니다.
또 보살은 모든 법을 보면서 의지하지 않고 착한 벗을 멀리하지 않고 가까이 해야 할 때도 역시 너무 집착하지 않으며 여래의 정진에 게으르거나 쉬는 법이 없습니다.
한결같은 예의로 벗이나 원수를 평등하게 보며 덕의 근본을 쌓도록 합니다.
합하고 모이도록 이끌되 모두에게 다 똑같도록 하고 찬양과 성취가 둘이 아닌 것이 되도록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언제나 때에 따라 설명하는 열 가지의 일입니다.
보살이 지혜를 분별하는[分別慧] 데에 곧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부처님 국토를 깨달아 알고, 중생의 본원(本原)에 들어가서 쇠망과 흥성함을 알며, 뭇 사람의 마음과 행의 존재를 알고 분별하고, 뭇 사람의 모든 근(根)이 일어나고 소모되는 것을 널리 통달하며, 또 온갖 보응(報應)의 행(行)과 과(果)를 알고, 널리 성문(聲聞)에 들어가서 때에 따라 그 뜻을 분별하며, 또 연각으로 내려가 행하고, 방편으로 모든 보살의 행을 닦으며, 모두 함께 세속의 법을 따르는 것을 분별하고, 모든 부처님 법에 수순하여 들어가 지혜의 뜻을 환히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지혜를 분별하는 열 가지이니, 여기에 머무르는 보살은 속히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에 이릅니다.
보살의 삼매(三昧)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정의(定意)일 때에 시방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해 알고, 마음이 안정함으로써 중생 몸이 고요해지고 모든 법의 삼매가 고요해지며, 그 삼매의 정[三昧定]으로 시방의 부처님을 뵈면서 모든 생각을 건립하고, 그때마다 정의 마음에
삼매가 깃들게 되어 곧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몸을 움직여 옮아갈 수 있게 하며, 또한 다시 삼매에서 일어나서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정각에 두루 들어가게 하고, 삼매 정수(正受:禪定)로 중생을 깨닫도록 하여 그 지혜가 넓고 크며, 때에 따라 보살의 삼매를 깨달아 알면서 한 번 뜻을 내어 한마음의 지혜[一心慧]에 들어가고, 무위(無爲)의 마음으로 고요한 지혜를 열며, 모든 보살의 지혜를 널리 닦으면서 돈독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원과 큰 지혜로써 삼매를 환히 깨달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삼매에 대한 열 가지 일입니다.
보살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해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중생이 어떻게 존재하고, 국토도 역시 그러한 것이며, 중생을 관찰하는 데서도 역시 본래부터 없는[本無] 줄 알고, 겁소(劫燒) 때에는 하늘과 땅도 무너지며, 혹은 물의 재변(災變)으로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나서 다시 합쳐지면서 성립되고, 부처님의 정각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無所有]고 헤아리며, 여러 가지 행(行)도 역시 있는 곳이 없고, 여래의 몸은 공훈(功勳)이 한량없으며, 모든 법에서 말한 본말(本末)은 그 뜻이 각각 다르고, 설령 모든 부처님ㆍ정각께 공양한다 하여도 귀착한 바는 역시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열 가지 일입니다.
이에 게송으로 말합니다.

중생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국토도 있을 곳이 없으니
모든 상호(相好)도 그렇게 관찰해야 하며
겁소(劫燒)에는 하늘과 땅도 무너진다네.

다시 합쳐지는 것도 역시 그와 같고
부처님 몸의 약간의 품류[若干品]라도
여래는 헤아릴 수 없고
법을 선설하는 것도 약간의 품류입니다.

보살의 해탈문(解脫門)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그 몸이 모든 세계에 두루하고, 시방에서 여러 가지 형상과 수없는 색상(色傷)을 나타내며, 모든 법계(法界)로써 하나의 부처님 국토에 들어가고, 온갖 중생의 무리[衆]를 건립하며, 부처님의 장엄한 형상으로써 시방의 여러 부처님 국토에 두루하고, 있는 그대로 깨달아 알아서 모든 경계[界]에 이르며, 발심한
동안에 모든 부처님 국토에 두루하면서 모든 부처님을 다 나타내고, 한 국토에 있으면서 모든 부처님 세계로 하여금 한 몸[一身]에 제도하여 들게 하며, 부처님으로 하여금 신족(神足)으로 감동하시도록 하고, 즐거워하고 좋아함으로써 한마음을 드러내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해탈하는 문의 열 가지 일입니다.
이에 게송으로 말합니다.

그 몸은 부처님의 국토에 두루하여
여러 가지의 형상을 나타내며
모든 법은 하나의 국토에 들어가서
모든 세계를 건립합니다.

세간에 두루하게 부처님 몸 나타내고
모두가 두루함을 스스로 알며
모든 법은 하나의 몸에 들어가고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엽니다.

보살의 신통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과거에 지나온 처소를 알고, 들고 나고[出入] 나아가고 물러날 것을 방편으로 환히 아는 것이고, 천이(天耳)로 알아서 구별하여 거리낌 없고 언사(言辭)와 귀취(歸趣)해야 할 것들을 다 듣게 하는 것이며, 다른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그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능히 아는 것이고, 곧 천안(天眼)의 무위(無爲) 업으로써 온갖 지나고 돌아다닌 곳을 관찰하게 하는 것이며, 큰 신족(神足)으로써 감동하고 변화하여 생각할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부류를 세워 그들이 본래 성품을 따르고 나타내 보이도록 하는 것이고, 계율에 들어가게 하여 한이 없는 모든 부처님 세계를 보고 모든 몸을 두루 보게 하는 것이며, 마음을 일으키는 잠깐 동안에 한량없는 시방의 부처님 국토를 두루 도는 것입니다.
또한 능히 장엄하여 수없는 경계와 처소를 세우게 하는 것이다. 또한 완전히 갖춘 몸의 형상을 나타내 보여 스스로 잘난 체하는 생각을 품지 않게 하는 것이며, 통혜(通慧)를 환히 알면서 끝없는 국토에서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는 으뜸가는 정각이며 마음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고, 중생의 뜻과 성품의 본말(本末)에 의거하여 교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신통에 대한 열 가지 뜻입니다.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면 여래의 위없이 바르고 참된 신통의 귀취를 얻게 되어 모든 부처님께서 방편에 따라 변화하여
시방에 나타나셔서 중생을 가르치고 한층 더 그 행(行)이 이루어지게 하여 여러 가지 뜻[義]이 빠짐없이 갖추어지게 합니다.
보살이 통달하는[通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곧 때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되 죄와 복과 중생들의 부류가 겪었던 동일하지 않은 일들을 분별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출가(出家)하게 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가려지고 막힌 중생들마다 여러 가지 동일하지 않은 뒤바뀐 행에 들어가서 소멸하고 제거하게 합니다.
금강(金剛)과 같이 성스런 지혜를 구족하고 통달하고 건립하여 그 음성은 두루하면서 불가사의하며 모든 부처님 국토에서 방편을 환히 알아 모든 네 가지의 평등한 마음을 익혀 집착하는 것에 대해 널리 들어가 노닐게 하며 태어날 곳을 알고 또한 태어날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모든 생각[想]과 느낌[痛痒:受]의 경계와 처소를 다 제거하게 합니다.
또 그 보살은 모든 법을 관찰하지도 않고 또한 관찰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모든 법에는 생각이 없으므로[無想] 똑같이 청정하다고 여기면서도 청정함도 없다고 여기며 여러 가지를 밝히고 환히 깨달아 알면서 부지런히 힘쓰며 수없는 겁 동안 경의 도[經道]를 널리 펴면서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에 평등하게 귀착하여 언제나 법계에 머무르게 합니다.
또 그 보살은 중생이 모두 본래부터 멸도(滅度)하였다 함을 환히 알면서 가업(家業)으로 쓰이지 않고 또한 짓는 바도 없으며, 생(生)이 있다는 것은 뒤바뀜[顚倒]을 따른 것임을 알면서 그 인연(因緣)과 보응(報應)의 이치를 통달하며, 어떤 인연과 방편으로 행한 본말(本末)과 일어나고 없어지는 처소를 받들고 공경해야 하는 것을 알고 중생 무리의 밝게 열리는[開明] 것과 닫히고 막히는[閉塞] 것과 해탈문[脫門]의 도리를 분별하면서 교화하며, 그 뒤바뀜과 착오가 없는 일을 압니다.
또한 번뇌의 욕심[塵欲]과 성내고 다투는 근원을 알고 또한 생사와 무위의 업을 분별하며 또 반대로 거스름과 반대로 거스름이 없는 일에 대해 분명히 알고 의지해야 할 것과 의지하지 않아야 할 것을 압니다.
또한 밝게
통달하면서 이르게 될 처소를 분별하고 그 물러나는 것과 다시 회복하는 것도 알며 그 결정에 이를 곳과 귀취할 데도 알고 또한 무너지는 것과 다시 성립된다는 것도 압니다.
또한 깨우쳐 교화할 것을 분명히 알고 중생의 근기를 알며 깨우쳐 교화한 데는 계율에 들게 하고 여러 가지 방편으로 많은 사람에게 가르쳐 주되 미혹되어 보살의 행을 잃지 않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불자여, 보살은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의 마음을 내는 까닭을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을 깨우치도록 교화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교화하고 나서 계율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되 몸이 고달파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보살로서 모든 것을 위하여 다투지 않는 까닭이며 12연기(緣起)를 환히 알면서 분별하는 것입니다.
또 그 보살은 일찍이 부처님께 기대는 일도 없고 또한 부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도 내지 않으며 법에 집착하지도 않고 다시 법을 탐내려는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부처님 국토에 집착하지도 않고 또 부처님 국토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내지도 않으며, 또한 사람에 집착하지도 않고 다시 중생을 사모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사람들을 보지도 않고 또 뭇 사람을 관찰하려는 마음을 내지도 않으며 뭇 행을 일으켜 드러내고 원한 바를 완전히 갖추며 끝없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고 부처님을 뵈려고 생각하지 않으며, 여래께서 펴신 법을 알아 기억하고 여래의 자리[座]를 얻으려고 뭇 덕의 근본을 심으며, 또한 근심하지도 않고 마음에 정각(正覺)을 좋아하면서 괴롭게 여기거나 게으르지 않습니다.
또한 법칙(法則)으로써 여래께 공양하고 마음은 나날이 더욱 힘쓰면서 감동하고 위신력을 세우며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제일의 법계를 건립하고 사유하면서 여러 가지 경법(經法)의 가르침을 나누어 판단하고 중생의 유위(有爲)의 모임에 대해 알며 또한 중생의 한절(限節)의 많고 적음을 알고 고통의 본말(本末)이 어디서부터 일어나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압니다.
또한 다하여 없어지는 만물은 모두가 고통의 근본인 줄 아니, 만일 어떤 보살이라도 이것을 능히 보면 그 수행한 바는 또한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아서 뭇 악(惡)을 버리고 그 근본을 끊으면 곧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중생을 구제하고 그 행한 것은 다 행함이 없는 것이므로 보살의 행이라고 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되 그 마음은 견고하기가 마치 수미산 같고 온갖 생각과 뒤바뀐 것을 깨달아 제거하며 넓은 지혜와 모든 통혜의 문[通慧門]을 건립하고 정각을 이루기에 이르면서 끝없고 한없는 지혜의 집[慧堂]에 들어가니, 지혜의 집이란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이므로 세 세간[三處]에서 표류하고 있는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그 근원을 없애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통달하는 열 가지의 일이니,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면 여래의 위없이 큰 지혜를 이루게 됩니다.
보살이 해탈(解脫)하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진로(塵勞)와 애욕의 근원을 제도하고, 사견(邪見)의 바르지 못한 길을 벗어나 5음(陰)이 가려 덮는 우환을 건너며, 또 형체의 4대(大)와 모든 입(入)을 구제하고, 성문이나 연각승을 초월하며, 이로 인하여 무소종생법인(無所從生法忍)을 체득하고, 모든 중생들의 국토에서 올바른 법을 일으켜 곧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보살행을 초월하게 되며, 모든 보살의 행을 찬양하고, 허망함이 없는 생각으로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며, 하나의 성스런 지혜로써 3세를 널리 알고, 평등한 신통으로 구제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해탈하는 열 가지의 일입니다.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면 중생을 교화하여 위없는 데에 이르게 합니다.
이에 게송으로 말합니다.

욕심의 진로를 건너고
사견과 모든 5음을 건너며
4대의 모든 종류를 건너고
몸을 탐내는 환난을 건너네.

그로써 성문과 연각을 초월하고
무소종생법인을 체득하며
중생과 국토와 보살의
한량없는 행을 찬양한다네.

개사(開士)로서 수행하여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며
허망한 생각을 뛰어넘고
신령하게 통달하여 삼계를 안다네.

보살의 동산[苑囿]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생사(生死)를 좋아하여 일찍이 싫어하는 일이 없으니 중생을 교화하기 좋아하면서 성품에 집착이 없기 때문이고, 온갖 생각[想]의 자리[地]에 처하니 큰 행[大行]을 여쭙고 받기 때문이며, 언제나 기뻐하면서 모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니 자기 처소에 머무르기 때문이고, 뜻이 모든 악마의 채녀(婇女)가 있는 궁전에 있으니 궁전의 대각(臺閣)을 다 항복받아 교화하기 때문이며, 설법한 것을 공경하고 법에 대해 들은 대로 사유하여 뜻을 아니 관찰하면서 귀착하기 때문이고, 6도무극과 4(恩)으로 거두는[攝] 행과 37도품(道品)의 지혜의 법이 보살의 동산이 되니 이것이 자기 자신의 엄부(嚴父)이기 때문입니다.
여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18불공법(不共法)에 머물되 그 요점을 들어 말하면 온갖 부처님의 법이 바로 보살의 동산인 것이니 일찍이 다른 기이한 법을 생각한 일이 없기 때문이고, 모든 보살이 나타내는 변화와 즐거움을 건립한 것이 보살의 동산이니 법륜(法輪)을 굴리기 때문이며, 스스로 큰 계율[大律]이 없으면서도 행을 조심하여 어기거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니 온갖 발심(發心)으로 정각을 잃지 않기 때문이고, 널리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보살의 동산이나 그 법신(法身)은 모든 시방에 두루하고 모든 부처님 세계와 보살의 행은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동산입니다.
보살의 궁전(宮殿)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보살의 궁전을 좋아하면서 마음에 미혹되지 않고 열 가지 좋은 장구[善章句]로 공덕과 지혜 업을 쌓기 좋아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궁전입니다. 욕계에 있는 중생들의 부류를 교화하면서 네 가지의 범행[四梵行]인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를 닦으니, 보살은 이로 말미암아 색계(色界)의 중생을 가르칩니다. 정거천(淨居天)의 모든 하늘 궁전에 머무니, 보살은 이로 말미암아 온갖 진로와 모든 더러움을 소멸합니다.
욕심 없는 색천[無欲色天]에 이르니, 그 궁전에 이르러서 큰 재난[大難]과 중생들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물러나지 않게 합니다. 혹은 때로는 어지럽고 더러운[雜穢]
경계에 나기도 하니, 보살은 이로써 그 처소를 즐거이 받으면서 온갖 탐욕 있는 중생들을 구제합니다. 보살에게 쾌락이 있으면서 후궁(後宮)의 채녀(婇女)나 남녀로 나타나는 것은 전생에 일찍이 일으켰던 복의 행과 같기 때문이니, 이로 말미암아 4방(方)과 4역(域)의 모든 제석ㆍ범왕ㆍ사천왕을 교화합니다.
보살은 이로 말미암아 흉악하고 위험한 사람이나 항상 있다고 헤아리는 사람을 권유하고 교화하여 산란한 뜻을 버리게 하니, 모든 보살의 업에 처하면서 교화함을 생각하는 것이 더욱 자라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내달으면서 신통에 유희하니, 보살은 언제나 일심(一心)과 해탈문[脫門]과 삼매정수(三昧正受)의 지혜로써 교화하면서 그들을 즐겁게 합니다. 일체지의 위없이 바르고 참된 모든 부처님의 법전[典]으로써 뭇 거리낌을 끊고 온갖 법을 보시하면서 자재함을 얻으니, 나라의 왕이나 높고 뛰어난 이가 되어서 자유자재합니다. 보살은 이 여래의 10력(力)을 좋아하니, 이로써 노닐고 거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궁전입니다.
보살에게는 열 가지 유관(遊觀)이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뜻은 스스로 모든 장구(章句)를 관찰하기를 기뻐하며 밟아온 자취의 행이 선권방편(善權方便)임을 뜻으로 관찰합니다. 그는 곧 부처님의 발아래 머물게 되어 법을 듣고 여쭐 수 있게 됩니다. 시방에 마음이 두루하게 되어 모든 보살을 공경합니다. 신족의 변화로 한이 없는 문을 나타내어 몸과 뜻이 미혹된 중생을 교화합니다.
정의(定意)와 삼매문(三昧門)을 똑같이 받들어 모든 정의문(定意門)에 널리 들어갈 수 있습니다. 총지(總持)로써 온갖 듣는 것마다 모두 능히 받아 지니되 갑자기 잊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이 모두의 요의[總要]로써 중생을 위하여 연설하여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변재(辯才)를 즐기면서 한 장구[一章句]로써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아름다운 언사로 담설하는 일을 찬양하되 언사를 끊을 수 있는 이가 없게 됩니다. 으뜸가는 바른 깨달음에 뜻을 두면서 중생을 위하여 여러 가지의 몸의
형상을 나타내 보입니다. 한없이 많은 방편[品門]으로 법륜을 굴려서 모든 이학(異學)들을 교화하여 법을 묻고 받을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유관입니다.
보살이 청정하게 장엄하는[嚴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그 힘[力]이 선명하니 홀로 걸을 수 있고, 두려움이 없이[無畏] 청정하니 그보다 초월할 수 있는 이가 없으며, 그 뜻[義]이 깨끗하니 말과 뜻을 펼치되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말한 일에 대해 방해받거나 그만두게 할 수 없고, 그 법(法)이 청정하며 8만 4천의 법장(法藏)을 능히 펼치되 경의 말씀이 맑게 어우러져 한 뜻도 잊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이 미묘하여 모든 보살이 서원한 것을 버리지 않으며, 그 행(行)이 선명하고 깨끗해서 성현의 바르고 청아한 교훈을 모두 널리 펼치고, 국토를 장엄하니 한 음성으로 시방에 널리 알리며, 하나의 국토같이 이미 장소가 청정하여 모든 부처님 국토에 두루 도의 구름을 일으켜 법의 단 이슬을 내리고, 바른 교법을 건립하여 모든 유위의 허망한 생각과 멋대로 내닫는 행을 제거하며, 게으름이 없이 청정하니 하나의 체(體)로 중생의 몸[身]을 나타내어 모든 것을 가르쳐 주되 부지런히 힘써 게으르지 않고, 모든 신통과 민첩한 지혜를 얻기에 밤낮으로 힘쓰면서 게으르지 않으니 수많은 힘과 두려움 없는 형상을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청정함이니,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면 모든 부처님의 청정하게 장엄하심을 널리 얻습니다.
보살의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心不動]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가진 것을 모두 보시하되 아깝게 여기지 않고 보시한 이는 모두 청정하여 마음이 동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깊은 법을 사유하고 분명히 관찰하면서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공경하고 섬기면서 스스로 귀의합니다. 오직 무량한 자비로 중생을 생각하는 것에 힘쓰되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날아다니거나 숨 쉬는 사람과 생물의 무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 법을 구하되 게으르거나 그만두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이 보살의 업을 행하도록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가까이하지 않고
멀리하지도 않습니다. 보살행을 하되 물러나는 일도 없고 막는 것도 없으면서 여는 것도 없습니다.
또 보살이 본래 낸 신심(信心)으로 수행하여 그 행이 한량없이 청정합니다. 청정한 이는 때[垢]를 여의고 밝게 알면서 은근히 수행하여 모든 부처님을 받들고 공경합니다. 탐착하고 있는 몸을 버리면서 그리워하거나 좋아함이 없는 마음을 반려로 삼아 크게 뛰노는 최상의 기쁨에 이르며 돈독한 믿음을 길잡이로 삼아 일체지(一切智)에 돌아갑니다. 그 장구(章句)에 따라 모든 보살의 가르침을 마지막까지 성취하여 수행하고 가르쳐 줍니다. 그 들은 대로 믿고 비방하거나 한탄하거나 연연해하는 업이 없어 그 마음이 동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열 가지 일이니, 여기에 능히 머무르면 곧 모든 신통과 민첩한 지혜를 알고 이르게 됩니다.
보살이 마음에 버리는 바가 없는[心無所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부처님의 으뜸가는 정각의 도를 이루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다고 하고, 중생을 교화하여 법의 율[法律]에 따라 버리는 바가 없으면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으며, 모든 착한 벗을 따르면서 의지하여 스스로 귀의하여 거스르거나 멀리하지 않고, 널리 부처님의 국토에 나아가 여래ㆍ지진께 머리 조아려 예배하되 예절을 버리지 않으며, 언제나 모든 공훈(功勳)의 법을 구하고 대승을 버리지 않아 감히 부처님 세존을 만나 뵙게 되고, 청정하게 범행(梵行)을 닦아 금계(禁戒)를 받들어 수호하고 끝내 훼손하거나 범하지 않으며, 모든 보살을 따라 부지런히 도업을 닦으면서 게으르거나 포기하지 않고, 여래께서 가르쳐 주신 뜻을 앙모하여 구하고 그때마다 지니면서 묻고 잊지 않으며, 모든 보살이 본래 행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익히고, 모두 기억하고 사유하면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달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마음에 버리는 바가 없는 열 가지 일입니다.
보살이 지혜를 관하는[觀慧]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법을 관하여 장구(章句)를 분별하면서 그때마다 펼쳐 설하고, 3세에 많은
덕의 근본을 살피면서 설법하며, 모든 보살이 행해야 할 본제(本際)를 보고 그들을 깨우치고 교화하고, 모든 법의 문[法門]을 우러르며 그 근원을 통달하며,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세우신 업(業)을 보고 뭇 총지(總持)를 관하고, 은혜로운 법문으로 인해 귀의하게 하며, 또한 밝은 지혜로써 세간을 두루 살피고, 모든 법계를 보고 지혜를 따르면서 들어가며, 시방의 지혜가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보아 앎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보고, 성스러운 광명[聖明]이 한량없는 세계에 처해 있음을 환히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지혜를 관하는 열 가지입니다.
보살이 법을 강설하는[講法]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법은 다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며 모든 뜻[一切義]으로 불리는 것은 다 귀취(歸趣)하게 함으로써 뜻하는 행을 쌓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다 허깨비[幻化]와 같다고 연설하며, 또 모든 법은 본래부터 공하다고 널리 말하고, 모든 경(經)은 사이가 비고 없어서 끝이 없다고 논의(論議)하며, 갖고 있는 업에 조금도 집착함이 없다고 하고, 또 모든 법은 마치 금강과 같이 강하고 모든 이치는 여래만이 통달하셨다고 연설하며, 또 뭇 업[衆業]은 고요하고 담박하다고 연설하고, 또 모든 법은 생기는 바가 없다고 연설하며, 온갖 법은 똑같으며 본래부터 청정하다고 연설하고,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合成]은 없다고 강설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법을 강설하는 열 가지 일입니다.
보살이 청정한[淸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성품은 본래부터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으므로 의심하고 주저하는 번뇌[結]를 제거하여 선명하게 하는 것과, 모든 잡다한 생각[沈吟]과 예순두 가지의 사견을 버리는 것과, 행함에 위의(威儀)가 있도록 예절을 닦는 것과, 넓은 지혜와 모든 신통의 민첩한 지혜를 좋아하는 것과, 분별하는 변재(辯才)는 높고 뛰어나 청정하고 용맹하면서 밝아서 네 가지 두려움이 없는 것[四無所畏]과, 보살행을 수행하면서 온갖 노닐고 거처하는 데에 어떤 결점[瑕疵]도 없는 것과, 모든 보살에게 원마다 닦고 익히기를 권하는 것과, 행함에 더러움이 없으며 백 가지 공훈(功勳)의
상(相)과 서른두 가지 대사(大士)의 업이 생긴다는 것과,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여 깨끗한 법[淸白法]으로 돌아가는 것과, 온갖 덕이 본래부터 청정함[本淨]을 장엄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청정함입니다.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면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청정함을 이루게 됩니다.
보살의 인(印)에 열 가지가 있으니, 보살대사(菩薩大士)는 이러한 인에 의해 보살의 지혜를 갖추면서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속히 이루어 으뜸가는 정각[最正覺]이 되게 합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세상만사가 다 고통이고 고통 위에 고통이 더해지고[苦復苦] 번뇌에 다시 번뇌가 쌓이는 것[惱復惱]과 사랑하는 이끼리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과 원수끼리 만나는 괴로움[怨會之苦]에 대해 모두 다 알며, 비록 이런 고난을 만난다 하더라도 부지런히 부처님 법을 구하면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또 거스르거나 버리지도 않으니 보살의 행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또한 부끄러워하거나 본래의 서원을 버리지도 않으며 큰 지혜를 버리지도 않고 모든 것에 민첩하고 통달하면서 마음에 부처님 도업(道業)의 요목을 거스르지도 않습니다.
어리석은 범부는 자기의 진로(塵勞)와 은애(恩愛)에 연연하여 불선(不善)의 근본을 닦아 보살에게 욕을 하고 헐뜯고 업신여기며 거친 언사를 쓰고 기와나 돌로 때리거나 던지며 칼과 몽둥이로 해치기도 하니, 보살은 이런 일을 만난다 해도 부처님 법을 구하면서 보살로서의 행을 싫증내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인욕을 행하면서 어질고 온화한 생각을 많이 품으며 경전의 가르침을 따르고 또 인욕에 힘쓰면서 바른 행을 완전히 갖춥니다.
또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깊고 묘한 법을 널리 펴면서 일체지(一切智)에 머물러 지혜에 들어가서 모든 곳에 태어나 사람들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기뻐하고 법을 좋아하게 합니다.
또 보살은 그 몸의 지혜를 관하면서 어질고 화평한 성품에 이르고 넓은 지혜의 마음을 일으켜, ‘나는 반드시 부처님의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의 으뜸가는 정각을 이루어서 중생들이 5취(趣)의 재난에 내달리고 돌아다니면서 근심하고 괴로워하고 한탄하는 것을 관찰하여 그들로 하여금 도의 마음을 일으키고 즐겁게 하면서 크게 돈독한 믿음을 더하게 하리라’ 하며,
이와 같이 기뻐하면서 견고하게 정진합니다.
또 보살은 여래의 끝없는 지혜에 들어가서 경계를 뛰어넘지 않고 여래의 성스러운 광명으로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널리 펴신 경전을 헤아릴 수 없이 들으며, 또한 모든 문자에 대하여 끝이 없고 한이 없는 부처님의 지혜로 더하거나 덜함[增感]을 내지 않으면서 모든 뜻을 분별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범하지 않습니다.
또 보살은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좋아하고 깊은 뜻을 기뻐하면서 미묘하고 끝없는 지혜에 이르며 여러 가지로써 위없는 도를 숭상하고 은근하게 연모하면서 거스르거나 멀리하는 일이 없으므로 온갖 악마들과 그의 관속과 모든 이학(異學)과 그 밖의 모든 원수나 적이 감히 그 앞을 범접함이 없고 일체지의 마음을 포기하거나 버리는 일이 없으니 보살의 이와 같은 행으로 이롭게 하며 끝내 물러나지 않습니다.
또 보살은 도를 수행할 때에 두려워하지 않고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통혜(通慧)의 마음을 일으켜 일체지를 닦으면서 그것으로써 우두머리로 삼고 모든 부처님 광명의 환한 빛을 얻으며 도의 뜻[義]을 버리지 않고 착한 벗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또 그 보살은 족성자(族姓子)나 족성녀(族姓女)가 대승(大乘)에 뜻을 두어 배우는 것을 보면 그로 하여금 부지런히 수행하면서 모든 부처님 법을 앙모하게 하고 덕의 근본을 세우도록 권하며 일체지를 받아들이면서 쉬거나 그만두는 일이 없게 합니다.
또 그 보살은 그가 노닐고 거처하는 데서 마음에 중생들을 평등하게 여기고 또한 평등하고 바른 지혜를 지니며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경전을 널리 펴고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도에 두루 이르며 불퇴전(不退轉)에 나아가면서 큰 자비를 일으킵니다.
또 그 보살은 모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을 헤아리되 동일하게 사유하며 모든 덕의 근본으로써 모든 부처님께 받들어 여쭙되 일찍이 끊어진 일이 없으면서 모든 예민한 지혜를 관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의 인(印)이니 이 인으로써 빠르게 정각을 이루면서 위없는 법의 인을 새깁니다.

보살의 지혜의 광명[慧光]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보살대사는 반드시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어서 부처님의 도(道)로써 온갖 것을 비추고, 언제나 모든 부처님 평등 정각[佛平等正覺]을 뵙고 중생의 죽는 것과 나게 되는 데를 환히 알며, 온갖 경전의 법품(法品)을 밝게 알고, 보살의 마음을 일으키면서 언제나 착한 벗을 익히며, 쌓은 덕의 근본을 분별하고, 지혜로 인(印)할 바를 알면서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뵈며, 중생의 무리를 깨우쳐 교화하면서 여래의 자리[地]에 서고, 불가사의한 법문의 도의 집[道堂]을 널리 펴며, 모든 부처님을 알고 그때마다 건립하고, 모든 도무극(度無極:波羅密)을 두루 다 갖추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지혜 광명입니다.
보살이 온갖 중생과 성문과 연각에 무량(無量)을 행하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에 보살은 본제(本際)의 행을 닦되 어떤 원도 갖추지 않고 끝내 증득[證]을 취하지도 않습니다. 또 그 보살은 뭇 덕의 근본을 심고 온갖 법계(法界)에 대하여 마음을 내어 이끌면서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또 그 보살은 도를 행할 때에 모든 행은 마치 허깨비[幻化]와 같고 모든 법은 고요하여서 미혹되지 않는 것을 자세히 살피니 모든 부처님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합니다. 또 그 보살은 모든 중생이 허망한 생각으로 집착하는 것을 제거시키고 수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수행하여 큰 원을 두루 갖추면서 고달파하는 생각을 내지 않습니다.
또 그 보살은 모든 법을 받들어 행하면서 집착함이 없고 모든 법은 있는 그대로[自然]여서 고요하며 또한 멸도(滅度)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일체지의 교법을 빠짐없이 갖춥니다. 또 그 보살은 모든 허망한 생각과 원을 생각하지 않음을 알고 수없는 겁 동안 따르는 본말(本末)과 참된 이치[眞諦]의 행을 널리 폅니다.
또 그 보살은 온갖 법은 다 존재하지 않는[無所有] 줄 알며 비록 공하여 없는[空無] 줄 안다 하더라도 도의 행을 포기하지 않고 모든 부처님 법을 구합니다. 또 그 보살은
뜻을 일으키는 잠깐 동안에 널리 삼계에 들어가고 또한 3세의 이치를 다 이해하며 그 마음이 통달한 바로 중간이 멀리 끊어지면서 통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또 그 보살은 한 사람 때문에라도 생사의 재난에 있으면서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보살의 법을 행하고 뜻을 일체지에 세우며, 마치 한 사람을 위하여 모든 고달픔을 참는 것처럼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도 그와 같이 하며, 끝내 큰 도[大道]를 세워서 장차 받을 고통에서도 게으르거나 고달파하지 않습니다.
또 그 보살은 보살의 행을 갖추되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속히 취하려 하지 않고 온갖 것을 위하기 때문에 진로(塵勞)에 돌아다니면서 수없는 중생을 깨우치고 이익되게 하여 부처님의 도에 서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한량없는 행이니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면 빨리 정각을 이룹니다.
보살이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하지 않고 도의 마음[道心]을 일으키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보살은 스스로 ‘모든 악마와 악마의 하늘[魔天]들을 항복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에 겁내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마땅히 바른 법으로 모든 외도 이학(異學)들은 나에게 항복할 것이며 몸은 모든 중생의 세계를 즐겁게 하리라’ 하면서 마음에 약해지거나 졸렬하지 않습니다.
‘온갖 도무극을 두루 갖추어 빠짐없이 법계의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쌓고 한데 모아 공덕품(功德品)을 갖추며 그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에 크게 정진하고, 비록 이룩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큰 업[大業]을 위하여 마침내 보살의 행을 이루리라’ 하면서 겁내거나 마음이 약해지지 않습니다.
온갖 중생의 경계를 깨우쳐 교화하고 율(律)을 수순하면서 가르치며 시방세계는 형상이나 모습이 저마다 달라서 그들이 입은 옷도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이지만, 보살은 그 가운데에 들어가서 그들이 좋아하는 바를 따르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으뜸가는 정각을 이룹니다.
또 그 보살은 마음속으로
‘내가 일찍이 배우고 닦았던 보살행은 모두 자기로부터 나온 것이니 만일 어떤 이라도 와서 손ㆍ발ㆍ귀ㆍ코ㆍ피부ㆍ뼈ㆍ골수ㆍ 아내ㆍ아들ㆍ딸ㆍ코끼리ㆍ말ㆍ탈것ㆍ나라ㆍ읍ㆍ성곽이나 권속이나 심부름할 이들을 요구한다면 모두 다 베풀어 주리라’하고 생각하면서 사람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며, 여러 사람들이 와서 바라고 구하는 것이 있음을 보면 마음을 내는 잠깐 동안에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게하고 근심하거나 싫어하지 않으며, 그 몸은 온갖 중생을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품으며, 이미 보시하였으면 바라는 바가 없고 크게 가엾이 여김[大哀]을 으뜸으로 삼아 끝없는 자비로 돌아가되 겁을 내지 않습니다.
또 그 보살은 그 행을 따라 닦으면서 삼계에 있는 모든 부처님 법을 닦는 이나 중생이 있는 부처님 국토나 사람들이 사는 모든 세간이나 허공의 경계나 모든 법의 음성을 다 고요하게 하여 멸도(滅度)로 돌아가며 모든 법이 점차로 한 생각 동안에 평등하고 상응한 것인 줄 분명히 깨달아 분별하고 이해하며 으뜸가는 정각을 이룹니다.
모두 다 비유에 나아가서 신통을 권하여 돕고 수행하면서 증득을 짓되 생각[念]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도 없고 구별하여 다르게 하지도 않으며 여러 가지 행으로 그것을 지휘[節度]하는 것도 없고 재업(財業)도 없게 하며, 인연(因緣)을 짓는 것도 없고 다르다고 분별하지도 않고 또 분별함이 없지도 않으며 수없이 많은 법을 위하여 짓되 허물이 없습니다.
둘이 없는 지혜[無二慧]로써 모든 두 가지[諸二]를 분명히 알고, 생각이 없는 지혜[無想慧]로써 모든 생각이 있는 것을 알며, 기억이 없는 지혜[無念慧]로써 모든 기억을 알고, 약간의 것도 없는 지혜로써 약간의 것을 알며, 한이 없는 지혜로써 모든 조그마한 밝음[少明]을 알고, 세속을 건너는 지혜로써 세속의 온갖 행할 바를 환히 알며, 세간의 성스런 광명으로써 방속(方俗)과 어둠과 모든 막힌 것을 깨우쳐 교화하고 과거가 없는 지혜로써 모든 과거의 세상을 다 분별하며, 무인지(無人地)에 돌아가서 온갖 중생의 경계를 분명히 알고 모든 의지와 집착에서 벗어나 노닐고 다니면서 짓는 뭇 행[衆行]을 합쳐 모아 모든 구경의 지혜[究竟慧]를 분명히 알며
모두 다 온전히 통달한 것[究暢]을 알고 모든 통달하지 않은 것도 압니다.
순수하고 맑은 지혜로써 진로(塵勞)를 풀어 열어서 끝없는 본제(本際)를 분별하여 알고 모든 것이 다하도록 다 교화하며 법계의 첫째가는 지혜[第一智]를 깨달아 알며, 그 몸은 시방세계에 널리 나타나 수없는 음성과 언교(言敎)에 들어가서 그 한이 없는 것을 따라 펴고 가르치며, 하나의 있는 그대로의 지혜[自然慧]로써 있는 그대로가 아닌 것으로 들어가고 하나의 성스런 광명의 행[一聖明行]으로 넓게 펴고 닦으면서 여러 가지 행을 나타낸다.
모든 법은 다 얻을 수 없으므로 이 이치를 아는 이는 끝없는 데에 이름으로써 나타내 보이고 변화하고[示現變化], 나타내 보이고 변화하면서 으뜸가는 정각을 이루고 큰 지혜[大慧]에 이르러서 큰 신족[大神足]을 나타내며, 곧 보지(普智)로써 감동하면서 행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교화하니 이것이 겁내거나 약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에 겁내거나 약함이 없는 열 가지이다.
보살의 마음이 큰 산과 같은[心如大山]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에 보살은 항상 정진을 닦으면서 전일한 뜻으로 모든 신통과 예민한 지혜를 사유(思惟)합니다.
또 그 보살은 모든 법은 본래부터 청정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고 관찰하여 모든 법은 다 뒤바뀜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수행하면서 그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온갖 깨끗한 법[淸白法]이 풍성하여지는 줄 알며 여래의 한량없는 지혜의 이치를 알고 그로써 모든 깨끗한 법을 능히 받들어 행합니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평등하고 맑고 온화한 도(道)를 일으켜서 착하고 친한 벗을 따르며 그로 인하여 마음을 내어 의심의 번뇌[疑結]를 품지 않고 경전을 존경하며, 법은 다른 업(餘業)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공손하고 조심하고 겸손하고 낮추면서 순종해야 하며 온갖 가진 것은 아낌없이 보시하면서 점차로 도법(道法)을 가까이합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모든 근심과 뭇 괴로움을 참는 것이니, 가령 몸을 위태롭게 하는 우환과 생명을 잃게 할 재난이나 욕설하고 헐뜯고 칼과 몽둥이로 몸을 해치는 것을 모두 능히 참아내면서
근심을 품지 않으며 안정된 마음으로 산란하지 않으면서 성을 내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끝없는 사랑을 품고서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며 큰 덕의 갑옷[大德鎧]을 입고서 물러나지 않고 도의 뜻을 버리지 않으면서 더욱더 은근하게 끝없이 가엾이 여기는 생각을 일으키면 그 가엾이 여김은 더욱 늘어나고 넓어집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불자는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보살이 행하는 모든 법은 그로 인하여 생기고 여래ㆍ정진(正眞)을 완전히 보호하며 행하기 때문이니 모든 법을 환히 알면서 인욕하고 어질고 온화한 것으로써 뛰어난 지위[豪位]를 삼는 것입니다.
보살대사는 큰 공덕을 닦아 위신(威神)이 높고 뛰어나니 만일 천상에 있으면 모든 하늘 가운데서 존귀하고, 만일 세간에 있으면 인간 가운데에서 지위가 높으며 얼굴 형상이 단정하고 세력이 제일이면서 권속이 강성하고, 하고자 하는 대로 자유로우며, 설령 제왕이나 가장 귀한 성바지[姓]가 되어서 공훈(功勳)이 한이 없고 지혜가 넓습니다.
애욕을 좋아하지 않고 뇌물로써 얻지도 않으며 권속이 자재하면서 그로써 안온하게 되고, 오직 도법을 좋아할 뿐이며 법락(法樂)의 법을 기뻐할 따름이며 법을 그리워하면서 법을 구하고 법으로써 방[室]을 삼으며 법으로 인하여 보호를 얻고 스스로 법에 귀의하며, 법으로 인하여 제도되고 언제나 법의 뜻을 구하며 법으로써 낙(樂)을 삼으면서 경전을 사유하니 이러한 여러 모습으로써 안락하게 거처할 수 있으면 악마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어떤 보살이라도 뜻을 일으키는 동안에 중생의 나[吾我]라고 하는 경계와 악마의 경계를 제거하면서 부처님의 경계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보살은 이와 같이 정진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닦아 스스로 이와 같음을 알면서 ‘나는 지금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세워 배우면서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부끄러운 마음을 품지도 않으면서 보살행을 닦습니다. 이런 행이 있으니 나는 이제 으뜸가는 정각의 도를 이루리라. 그러므로 오는 세상에서도 수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닦으면서 그것을 저절로 알게 되고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또 이학(異學)으로서 교화하기 어렵고 치료하기 어려우며 되돌리려는 마음[反復心]이 없고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이를 보면
이런 무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덕의 갑옷을 입고 그 중생 안에 노닐고 머물면서 자유자재하게 되며, 흉악한 무리를 보았을 때도 싫증내지 않고 진욕(塵欲)으로 인해 나쁜 사람이라고 미워하지 않으며 물러나지도 않는 것입니다.
또 그 보살은 사람을 믿고 우러르지 않으면 큰 도의 뜻을 일으켜 ‘나는 이런 행에 의해 보살을 모으되 다른 사람이 필요 없이 장차 오는 겁에도 개사(開士)의 법을 받들어 자기의 뜻과 행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법을 갖추고 마음을 일으켜 위없이 큰 도에 있게 하며 오직 서원과 기쁜 마음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즐거이 중생을 교화하며 보살행을 믿어 스스로 지성(志性)을 청정하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성행(性行)도 청정하게 하며 깊은 경계를 알고 또한 다른 사람의 토지(土地)도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의 토지와 똑같은 경계라는 것을 분별하리라’라고 합니다.
또 그 보살은 모든 법을 보지도 않고 또한 모든 보살행도 보지 않으며 빠짐없이 갖춘 모든 개사(開士)의 뜻도 보지 않고 중생을 가르치는 뜻도 보지 않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을 받드는 법도 살피지 않고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의 법을 체득하되 이미 이루었고 지금 이루고 장차 이루게 될 이도 보지 않으며, 또한 경도(經道)를 널리 펴보지 않으면서 연설하는 이나 또 강설하는 이도 얻지 않았습니다.
보살대사는 큰 도(大道)에서 물러나지 않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불자는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보살이 태어나는 것은 모든 법을 구함으로 인하여 으뜸가는 정각을 이루기 때문이니 온갖 법을 행하되 뒤바뀐 소견을 따르지 않고 더욱더 부지런히 힘쓰면서 덕의 근본을 좇아 익히며 행한 바가 청정하면서 지혜를 두루 갖추고 한 번 마음을 일으키는 동안에 공훈과 이름과 덕이 날마다 더욱 새로워지며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또한 부끄러움도 품지 않으면서 그로 인하여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속히 이룹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마치 큰 산과도 같은 열 가지의 일입니다.
보살의 지혜가 마치 강이나 바다[慧如江海]와 같으면서 위없는 도[無上道]에 들어가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중생의 한량없는 경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그 불자 보살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 경계에 널리 노닐되 큰 궁전으로 된 성스러운 집[聖室]에 들어가서 생각 없음[無思想]을 익힙니다.
또 그 보살은 한량없는 온갖 허공 경계를 닦고 다스리는데 허공에 노닐면서도 거리낌이 없고 시방이 고요하기가 마치 물과 같고 마치 그물과 같아서 그로써 두루하고 평등합니다.
또 그 보살은 법계(法界)에 잘 들어가서 무위(無爲)에 노닐고 끊임없이 들어가되 항상 있다[有常]고 헤아리지 않으며, 들어가는 바가 끝이 없으면서 짓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으며 들어갈 바를 환히 알면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또 그는 많은 덕의 근본을 쌓으면서 스스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ㆍ세존께 귀의하며 보살 법사는 성문이나 연각이나 모든 범부에게도 역시 그 처소에서 덕의 근본을 짓고 다시 여러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니, 이런 덕의 근본으로써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실 때에 이미 이루었고 지금 이루며 장차 이룰 것이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께서 경도(經道)를 널리 펴시면서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 말씀하시고 장차 말씀하실 것이므로 그 중생들은 모두가 법을 여쭈어 받고 그런 뒤에야 도를 이루게 되어 뜻이 도를 향하고 바야흐로 도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니, 중생을 교화하되 이 모든 덕의 근본으로 이 많은 선[衆善]을 합하여 모든 중생에게 권하고 도우면서 보답을 바라지도 않으며 지금 현재 세상에 대해 고달파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또 그 보살은 낱낱이 뜻을 일으켜 과거의 세상에 들어가 수없는 겁에 노닐면서 낱낱의 겁 동안에 백억의 부처님을 뵙되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백천억 겁 동안에 투철하게 꿰뚫어 본 것은 비유할 수도 없으며, 부처님께서 출현한 세상에 들어가서 모든 비유를 뛰어넘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대중이 모인 도량에서 모든 보살과 성문을 위하여 설법하시는 것을 관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수명의 길고 짧음을 건립하는 것에도 머무르는 바가 없으니 마치
1겁 동안에 사람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것처럼 모든 겁에 있어서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일 그 겁에서 세간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에는 보살은 그것을 알고서 그 겁 동안에 마땅히 큰 도와 덕의 근본을 닦고 세우면서 도의 가르침을 권하고 깨우칠 수 없는 이에게도 그를 위하여 강설하며, 과거와 미래의 부처님의 순수하고 맑은 덕의 근본을 보고 한량없는 겁에 들어가 그 뜻을 관찰하되 싫어하거나 만족해 함이 없이 과거의 겁에 들어갑니다.
또 그 보살은 미래에 들어가되 모든 미래의 한량없는 겁수(劫數)에 노닐면서 어느 겁 동안에 부처님께서 계시고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며, 어느 겁일 때에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고 여래ㆍ지진의 많고 적으신 수효와 그 명호는 무엇이며, 어느 부처님 국토에 나오시고 그 세계 이름은 무엇이며, 교화하고 제도하여 해탈시킬 적에 어떤 중생을 좋아하며, 수명의 길고 짧음 등을 사유하고 관찰하는 것이니, 미리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겁을 보면서 괴로워하거나 게으르지 않습니다.
또 그 보살은 현재에 들어가 시방세계와 널리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관찰하고 방면(方面)과 멀고 가까운 분수(分數)를 분별하면서 모든 부처님의 본말(本末)을 사유하되,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시려고 불수(佛樹) 아래로 나아가고 풀을 구해 땅에 깔고는 나무 아래 앉아 악마의 관속의 항복을 받고 일어나 성읍(城邑)으로 들어가며, 천상에 올라가 널리 경의 뜻을 연설하면서 법륜(法輪)을 굴리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불사(佛事)를 지으며, 으뜸가는 정각을 이룬 뒤에 제석(帝釋)과 범왕(梵王)의 도움으로 그 수명을 버리고 남음 없는[無餘] 데에 이르며, 열반계[泥洹界]에 이르러 멸도(滅度)를 취하시고 나면 경(經)과 도(道)를 유포시키고 돕고 수호하면서 교화하며, 법화(法化)를 크게 일으켜서 사찰[廟寺]을 장엄하고 부처님을 그린 그림과 조성한 불상에 공양하고 탑묘를 보살핍니다.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생각하면서 낱낱이 마음을 내어 시방의 수없는 부처님의 국토에 들어가고 중생을 널리 살피면서 모두가 부처님을 뵙게 하며, 말씀하신 법을 듣고는 받아 외고 배우며
마음속에 품으면서 뜻과 행을 선택하고 거동하는 데에 이익이 있으며, 시방에 두루하여 모두 부처님께 귀의하며 부처님의 법을 잊지 않게 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법은 다 꿈 같은 것인 줄을 꿰뚫어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께 공양하고 어느 곳에 머물거나 태어나게 되거나 언제나 부처님의 곁에 있으면서 스스로 그 몸을 뵙고 여래를 받들어 공경하며,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해 탐내지도 않고 여래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세계의 대중이 모인 도량에 의지하지도 않고 또한 경전 듣기를 희망하지도 않으며, 모든 부처님께서 현재 계시는 것에 대해 만족해하지 않고 그 부처님 국토에 노닐면서 시방의 부처님을 뵙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이 하면서 희망하는 바가 없습니다.
또 그 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모든 부처님 세존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낱낱의 겁 동안에 한없는 여래를 받들어 섬기면서 귀명하되, 처음부터 현재의 생(生)까지 모두 3세 동안 공양하면서 버리지 않으며 성문이나 보살의 권속이나 여러 사람들에게도 여래께서 멸도하실 때까지 공양하게 하고, 멸도하신 뒤에는 사리(舍利)에 공양하되 끝없는 데까지 이릅니다.
가진 것을 보시하여 온갖 중생의 경계에 만족하게 하며, 주었다고 하는 마음을 버림이 불가사의하게 하고 또한 보답을 생각하지 않으며, 받는 이와 받았다고 하는 것도 보지 않는 것은,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주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공경하고 모든 중생에게 보시하는 데에 게으르지 않으니, 이와 같은 모양으로 모든 부처님께 귀명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중생을 교화하면서 법의 가르침을 받들고 지니고 경과 도를 널리 펴며 중생에게 정진하기를 권하여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의 마음을 일으키게 합니다.
또 다시 불자여,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보살은 보살이 서로 차츰차츰 금계(禁戒)와 가르침[訓誨]을 주면서 도를 받들고 청정한 법을 행하며 교화하되 계율을 따르는 것이며, 보살은 평등하게 일어나는 것에 따라 마음속으로 보살의 모든 총지문(總持門)을 연모하며, 언제나 모든 부처님 무극 대성[諸佛無極大聖]을 뵙고 모든
법사(法師)를 구하면서 공경하고 머리 조아리며 묻고 받아 읽고 외우되 일찍이 게으르거나 포기하지 않으며, 중생을 거두어 보호하면서 배운 바로 마지막까지 모든 이들을 위하여 경(經)과 도(道)를 널리 펴고 한이 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일으키며 불퇴전(不退轉)을 세워서 모든 부처님 법을 청정하게 하며, 마음으로는 넓은 지혜와 모든 통혜(通慧)의 이치를 생각하면서 모든 부처님의 법을 닦으며 수없는 겁 동안 뭇 행[衆行]을 빠짐없이 갖춥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마치 바다와 같이 최정각(最正覺)을 이루는 열 가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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