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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보자] #6002 비구니전(比丘尼傳) 3권

Kay/케이 2025. 5. 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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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전(比丘尼傳) 3

 

비구니전 제3권


석보창 지음
추만호 번역


 [제(齊)]

1. 동관(東官) 증성(曾成) 법연(法緣)니전

법연의 본래 성은 유(兪)씨로, 동관(東官) 증성(曾成) 사람이다. 송 원가(元嘉) 9년(432)에 나이 10세였고 여동생 법채(法綵)는 나이 9세로 아직 부처님의 교법을 알지 못했다. 문득 그해 2월 8일 두 명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3일이 지나 돌아와 말하였다.
“정토천궁(淨土天宮)에 올라 부처님을 뵈었더니 부처님께서 교화를 펴 주셨습니다.”
9월 15일에 이르러 또 나가서 10일이 지나 돌아왔는데, 외국 글과 말을 하고 경을 염송할 수 있었으며, 서역 사람을 보면 말도 하고 장난치면서 서로를 잘 이해하였다.
10년(433) 정월 보름에도 다시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밭갈이 하던 농부가 그들이 바람을 따라 나부끼며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부모가 근심하면서 신에게 제사하고 복을 빌었다. 그러고 나서 한 달이 지나 다시 돌아왔고, 돌아온 때에는 이미 출가하여 법복을 입고 머리카락을 들고서 돌아왔다. 자신들이 부처님과 비구니들을 뵈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전생의 인연으로 응당 우리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고는 손을 들어 머리를 어루만지자 머리카락이 저절로 떨어졌고, ‘큰아이는 법연, 작은아이는 법채(法綵)라 하라’고 법명을 지어 주셨으며 돌려보낼 무렵에 ‘정사(精舍)를 지어라. 앞으로 너희들과 같이 지내리라’라고 하였다.”
법연 등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神)의 자리를 헐어내고 수선하여 정사를 세우고는 밤낮으로 강술하고 염송하였다. 밤마다 매양 다섯 빛깔의 광명이 산봉우리로부터 흘러 내려와 등불이나 촛불을 환히 밝힌 것 같았다. 이 뒤로 행동거지가 빛나고 우아한데다 소리하는 격식이 바르고 법다워서 서울에서 불경을 소리 내어 읽는 것도 이들을 넘어설 수 없었다. 자사(刺史) 위랑(韋朗)과 공묵(孔黙)이 함께 꿇어앉아 공양하고, 그들이 이야기하고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서 매우 기이하게 공경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곳 사람들이 모두 올바른 법으로써 불법을 섬겼다. 나이 56세인 건원(建元, 479~482) 중에 죽었다.

2. 남영안사(南永安寺) 담철(曇徹)니전

담철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비구니 보요(普要)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라 남영안사(南永安寺)에서 살았다. 보요는 도가 깨끗하고 배움이 넉넉하여 당세에 널리 알려졌고, 담철은 행동거지를 조심하여 교만함이 없었으며 불법을 쉼 없이 익혔다. 불법의 오묘한 뜻을 반드시 총괄하여 파악하고자 했으므로 아직 구족계를 받기도 전에 이미 경과 논을 궁구했다.
구족계를 받은 뒤에 율장[毘尼]을 두루 익혔으며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재주가 있었고 강설하는 데 더욱 능했다. 터럭 끝만큼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해부하고 분석하여 깊고 은미한 경지를 더듬었으니, 모든 비구니들이 북쪽으로 얼굴을 두어 스승으로 모시길 청하였다. 방편에 따라 척척 응대하니 책을 짊어지고 찾아오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오후칠귀(五侯七貴)의 공신 가문과 귀족 가문의 부녀자들로부터 그 아래에 이르기까지 공경함을 닦지 않음이 없었다. 나이 63세인 제(齊) 영명(永明) 2년(484)에 죽었다.

3. 숭성사(崇聖寺) 승경(僧敬)니전

승경의 본래 성은 이(李)씨로 회계(會稽) 사람인데, 말릉(秣陵)에서 잠시 살았다. 승경이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가 재를 마련하여 와관사(瓦官寺) 승초(僧超)와 서사(西寺)의 비구니 담지(曇芝)를 불러 두 사람으로 하여금 손가락으로 배를 가리키면서 뱃속의 아이를 제자로 부르게 하였다. 어머니는 아이를 대신하여 두 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고는, 사내와 계집아이를 불문하고 반드시 출가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해산하는 날 어머니 꿈속에 어떤 신이 나타나 말하였다.
“팔관재(八關齋)를 베풀도록 하라. 그러면 순산할 것이다.”
스님과 불상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승경이 바로 태어났고 공중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건안사(建安寺)에 데리고 가서 비구니 백(白)의 제자가 되게 하라.”
어머니가 곧 그대로 따랐다.
대여섯 살이 되었을 때 남들의 불경소리나 범패소리를 들으면 바로 암송하여 기억했다. 수백 권의 경을 읽어 미묘한 깨달음이 날로 깊어가고, 푸성귀를 먹으며 자기를 닦아 맑은 풍모가 점차 드러났다. 원가(元嘉, 424~453) 중에 노군(魯郡)의 공묵(孔黙)이 광주(廣州)로 진압하러 나왔다가, 데리고 함께 갔다. 우연히 외국의 비구니 철살라(鐵薩羅) 등이 송(宋)나라 서울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모두들 풍모와 절도가 우뚝하고 기이하여 다시 따라가 수계를 받아 삶의 덧없음을 깊이 깨달았다. 이에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부처님의 유적을 둘러보려고 했으나 승려와 속인들이 막았다.
영남(嶺南)에 머문 지 30여 년에 그의 인품에 젖어들어 사나운 풍속이 고쳐졌다. 뜰과 집을 내놓고 보시하는 자들이 열세 집이나 되어 함께 조정(潮亭)에 절을 세우고 중조사(衆造寺)라 하였다. 송 명제(明帝, 465~471년)가 이 소식을 듣고 멀리서 사람을 보내 맞이하자 이곳 반우(番禹) 땅의 승려와 속인들이 크게 슬퍼하며 그리워했다.
서울로 돌아가자 숭성사(崇聖寺)에 머물도록 명을 받으니, 승려와 속인들이 그의 나아감과 머무름에 감복하였다. 단양(丹陽)의 악준(樂遵)이 공경하여 집을 희사하여 절을 세워 주니, 그 뒤 그곳으로 옮겨 가 머물렀다. 제(齊) 문혜제(文惠帝)와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이 함께 풍모와 덕을 우러러 보시하기를 빠뜨림이 없이 하였다. 나이 84세인 영명(永明) 4년(486) 2월 3일에 죽으니 종산(鍾山)의 남쪽에서 장례를 치렀다. 제자들은 비(碑)를 만들고 중서시랑(中書侍郞)인 오흥(吳興)의 심약(沈約)이 비문을 지었다.

4. 염관(鹽官) 제명사(齊明寺) 승맹(僧猛)니전

승맹의 본래 성은 잠(岑)씨로 남양(南陽) 사람인데 염관현(鹽官縣)으로 옮겨 가서 산 것이 승맹에 이르도록 5대째였다. 증조부 솔(率)은 진(晋)의 정원랑(正員郞)으로 여항(餘抗)의 수령을 지냈는데, 그의 대에 와서 도교를 섬기고 게다가 삿된 신을 믿고 공경하였으므로, 승맹이 비록 나이야 어렸지만 이를 슬퍼하여 세속을 떠날 뜻을 가졌다. 나이 12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울부짖고 통곡하면서 피를 토하며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
삼년상을 마치고 영원히 쓰러지지 않는 것[不滅性]을 찾고자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출가를 하였다. 자기를 청결하게 행하며 스승 섬기기를 공손하고 엄숙하게 했으며, 푸성귀와 거친 쌀을 먹으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로만 그쳤다. 도를 행하고 예로써 참회하면서 일찍이 피로를 느끼거나 게을리한 적이 없었고, 앞서 저지른 죄를 참회하여 말하면서 간절한 정성으로 눈물을 흘렸으니, 남들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할 수 있었다.
익주 자사(益州 刺史)인 오군(吳郡)의 장대(張岱)가 소문을 듣고 귀하게 여겨 공경하여 스승으로 섬기기를 청하였다. 송 원휘(元徽) 원년(473) 비구니 정도(淨度)가 오나라에 들어오자, 그를 거느리고 서울로 나아가 건복사(建福寺)에서 머물렀다. 뭇 경을 두루 보기를 밤낮없이 하였고, 강설하는 자리에 따라 다님을 꺼려하거나 권태로워 하는 마음이 없었다. 많이 듣고 힘써 기억하여 한 번이라도 귀를 거친 것은 반드시 기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과 율을 모두 다 연찬하여 밝았고, 감정을 맑게 하여 좌선하니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제(齊) 건원(建元) 4년(482) 어머니가 병들자, 이에 동쪽 집을 희사하여 절을로 삼고 제명사(齊明寺)라 하였다. 불전과 당우를 짓고 대와 나무를 심으니, 안팎이 맑고 깨끗하여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굶주린 이에게는 먹을 것을 보시하였고 추위에 떠는 이에게는 옷을 벗어 주었다. 언젠가 사냥꾼이 절 남쪽 가까이 왔는데, 길짐승과 날짐승이 다투어 승맹에게 의탁하였다. 매와 개가 뒤를 쫓아 거리가 지척에 이르자, 승맹이 몸과 손으로 감싸 막았다. 비록 몸은 쪼이고 깨물렸으나 의탁한 짐승들은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수십 명이 같이 살았는데 30여 년이나 되도록 한 번도 그가 성내거나 화내는 빛을 본 적이 없었다.
나이 72세인 영명(永明) 7년(489)에 죽었다. 당시에 또 비구니 승원(僧瑗)이 있었는데, 승맹의 사촌 동생이었다. 효로써 널리 알려졌고 고매한 삶을 살았으며 슬기롭게 깨달아 깊고도 맑았다.

5. 화엄사(華嚴寺) 묘지(妙智)니전

묘지의 본래 성은 조(曹)씨로, 하내(河內) 사람이다. 천성이 부드럽고 밝은데다 마음을 크게 변화시키는 데로 힘쓰고, 계율을 잘 지켜 밝은 구슬을 감싸는 듯하였다. 인욕하는 데 부지런히 마음을 두어 남과 더불어 거슬림이 없었으니, 아무리 헐뜯거나 괴롭히더라도 반드시 얼굴을 부드럽게 가졌다. 한 해가 다 가도록 장막을 드리우고 날이 다하도록 근심하지 않았으며 법상(法相)에 정통하니 사람들이 다 같이 으뜸으로 섬겼다.
선당(禪堂)이 처음 지어지자 제 무황제(武皇帝, 483~493년)는 묘지를 불러 『승만경』과 『유마경』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강의함에 이르러 황제가 여러 번 몸소 행차하여 이것저것 마구 물었다. 묘지가 마치 고리로 이은 것처럼 해부하고 분석하여 처음부터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으므로, 황제가 여러 차례 훌륭하다고 칭송하였고 사부대중도 진심으로 감복하였다.
제나라 경릉 문선왕의 영역인 종산(鍾山)에는 이름나고 덕 있는 이를 묻는 곳이 있었는데, 나이 64세인 건무(建武) 2년(495)에 돌아가시자 그곳 정림사(定林寺)에 묻었다. 남제(南齊)의 시중(侍中)인 낭야왕(瑯瑘王) 윤(倫)의 처 강(江)씨는 그를 위해 돌에다 찬양하는 글과 서문을 지어 무덤 왼쪽에 세웠다.

6. 건복사(建福寺) 지승(智勝)니전

지승의 본래 성은 서(徐)씨로 장안(長安) 사람인데, 회계(會稽)로 잠시 옮겨 갔다가 3대째 살았다. 여섯 살 때에 할머니를 딸 서울로 나아가 와관사(瓦官寺)를 노니는데, 승방[招提]이 가지런하고 우뚝하며 보배로운 장식들이 엄숙하고 화려한 것을 보고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 깎기를 기원했다. 할머니가 연유를 묻자 이러한 생각을 자세하게 말했으나 그가 아직 어리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송(宋) 말엽에 어려움이 많아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당시의 일들이 어지러워 숨어 산 지 여러 해가 흘렀다.
나이 바야흐로 20세에 출가하여 건복사(建福寺)에 머물렀다. 세속을 넘어선 어려운 규범들을 홀로 행하는데 짝할 무리가 없었으며, 『대열반경』을 한 번 듣자마자 알았고, 그 뒤 율장을 연찬하매 두 번을 애쓰지 않았다. 총지(摠持)의 명예에 모두가 눈을 다시 뜨고 보아야 할 정도였고 스스로 수십 권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말은 요점이 있었고 뜻은 먼 데까지 미쳤으며 의리는 감추어졌으나 이치는 미묘하게 드러났으니, 검은 것을 만나도 물들지 않고 갈아도 갈리지 않는 격이었다.
대명(大明, 457~464년) 중에 어떤 남자가 속여서 껴안으려 하자 바르게 하여 따르지 않았다. 지승은 깊은 연못처럼 뜻을 고요하게 하여 우아한 몸가짐으로 벽에 서서 얼굴색을 바로 하고 대중에게 알리니, 대중이 관에 이 일을 넘겼다. 계율을 청정하게 지킨 것이 밝은 구슬을 감싸는 듯하였다. 당시에 장엄사(莊嚴寺) 담빈(曇斌)법사의 제자 승종(僧宗)과 현취(玄趣)가 함께 불전에 나아가 갈무리한 것을 뒤지고 도적질하였다. 이에 보살의 영락(瓔珞)과 칠보로 조각한 세숫대야[七寶澡罐]와 담빈법사의 옷과 그릇 등을 잃었고, 집 안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대비해 놓은 것이 없어 근심하고 개탄하면서 강의를 중지하고 3일간 방문을 닫은 뒤에, 지승이 사부대중에게 10일 안으로 제대로 갖출 것을 명하였으니, 덕으로 감화시키는 행위가 모두 이와 같았다.
제(齊) 문혜제(文惠帝)가 소문을 듣고 평소에 대접하려고 불렀다. 매양 맞아들여 궁에 들어가서 뭇 경을 강설하게 할 때마다 사도(司徒)인 경릉 문선왕이 더욱 높이 공경하였다. 지승은 뜻이 곧아 남금(南金)1)과 같았고 마음이 밝아 눈[雪]과 견줄 만해서, 비구니 대중들을 잘 훈계하니 참으로 대중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를 절의 주지로 임명하니 온 대중이 사랑으로 공경하기를 존엄하신 부처님을 받드는 것과 같이 하였다. 정림사(定林寺) 승원(僧遠)법사로부터 보살계를 받았을 때, 앉은 자리 옆에 항상 향로를 두었다. 지승이 이에 향을 집어 들자 승원법사가 그것을 중지하게 하고 말하였다.
“불을 붙이지 않은 지 이틀이나 되었는데도 그곳에 둔 향 내음이 다시 어리고 연기가 퍼지는구나.”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드러나는 감응이 이와 같음에 모두를 탄복하였다.
영명(永明, 483~493년) 중에 성승재(聖僧齋)를 지냈는데 마음을 잡고 생각에 젖어들 무렵, 갑자기 공중에서 손가락을 튀기는 소리가 나서 합장하고 귀 기울이며 들었다. 지승이 절에 머문 지 30년 동안 한 번도 재회(齋會)에 나아가 귀족들과 같이 노닌 적이 없었고, 매양 한가하고 고요한 것을 중히 여겼으며 생각을 사유의 세계에 두었으므로, 아름다운 향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문혜제가 특별히 공양을 더하여 날과 달을 가득 채우고 불당과 승방을 지어 주었으니 온 절이 무척 아름다웠다. 지승이 옷과 그릇을 희사하여 송(宋)나라와 제(齊)나라의 일곱 황제들을 위해서 섭산사(攝山寺)에 석상(石像)을 만들었다. 영명 10년(492)에 병을 앓다가 문득 하늘의 천제[金車玉字]가 모두 와서 영접하는 것을 보았다. 4월 5일에 이르러 뭇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에 떠나리라.”
제자들이 모두 울자 옷을 열어 가슴을 내보이니, 가슴에 초서(草書)로 불자(佛字)가 쓰여 있었는데, 글자의 체가 선명하게 하얗고 모습은 밝고 윤기가 있었다. 8일 한낮에 죽으니 나이 66세 때의 종산(鍾山)에 묻었다. 문혜제(文惠帝)가 그에게 탕약을 공급하였으며 장례에 필요한 모든 것도 다 관(官)에서 마련해 주었다.

7. 선기사(禪基寺) 승개(僧蓋)니전

승개의 본래 성은 전(田)씨로, 조국(趙國) 균인(均仁) 사람이다. 아버지 굉량(宏梁)은 천수(天水) 태수이다. 승개는 어려서 출가해서 비구니 승지(僧志)의 제자가 되었는데 팽성(彭城) 화림사(華林寺)에 머물면서 이양을 꾀한다거나 근심하여 속이 탄다거나 기리거나 헐뜯는 것을 잊었다.
영휘(永徽) 원년(650)2) 변발한 오랑캐[索虜]가 고을을 침범하므로, 같이 공부한 법진(法進)과 더불어 남쪽으로 나와 서울에 이르러 묘상니사(妙相尼寺)에서 머물렀다. 널리 경과 율을 듣고 깊이 본래의 뜻을 더듬으며 선정을 닦기를 애오라지 하였다. 낮이 부족하다고 여겼으며 추위나 더위에 아랑곳없이 옷이 바뀌지 않았고, 사계절 내내 음식에 새로운 것이 없었으며 점심때 나물 한 가지만 먹었을 뿐이다.
은(隱)과 심(審) 두 선사에게 수업을 받으니 선사들이 모두 그가 쉽게 깨우친다고 감탄하였다. 제(齊) 영명(永明, 483~493) 중에 선기사(禪基寺)로 옮기자, 널리 관법의 도리를 넓히려 하는 승려와 속인들이 자문을 받으려고 찾아와 번거롭게 들끓었다. 이에 다시 절의 왼쪽에 따로 선방을 세워 그 안에서 참선하였고, 밖으로 나와서는 사람들을 잘 이끌기를 지성으로 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齊)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 소자량(蕭子良)은 사시로 물품을 공급해 주었다. 늙었어도 지향하는 바가 조금도 쇠하지 않았고, 종일토록 마음을 맑게 텅 비웠으며 밤 내내 눈을 붙이지 않았다. 나이 64세인 영명(永明) 11년(493년)에 죽었다. 당시 절에는 또한 법연(法延)이 있었는데, 본래 성은 허(許)씨이고 고양(高陽) 사람이다. 정진하여 행업이 있었고 또한 선정(禪定)으로 널리 알려졌다.

8. 청원 동사(靑園東寺) 법전(法全)니전

법전의 본래 성은 대(戴)씨로, 단양(丹陽) 사람이다. 단정하고 깔끔하여 조용히 있기를 좋아하였고 평소 선정과 지혜를 부지런히 닦았다. 과거에 종원(宗瑗)을 따라 널리 뭇 경전을 모아 정리하였고 그 뒤에 심(審)선사와 은(隱)선사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선의 관법에 두루 노닐었다.
낮에는 글을 펼쳐 생각이 먼 곳까지 미쳤고 밤에는 미묘한 경계를 두루 관하였다. 대승의 오묘한 경전을 모두 강설할 수 있었고 삼매의 비밀한 문에서 스승이 되었다. 먹는 것은 푸성귀뿐이었고 입는 것은 한낱 몸을 가릴 뿐이었다.
가르치는 것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후학들을 장려하여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이 수행하여 얻는 공덕이 더해지니 대중이 몹시 많아졌다. 절이 넓고도 컸으나 이치를 제대로 살피기가 어려워 태시(泰始) 3년(467)에 대중들이 의논하여 두 개의 절로 나누고자 하였다. 당시에 비구니 보영(寶嬰)이 동쪽 방면에서 구하여 선방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영탑(嬰塔)을 짓고는, 처음으로 나누어 동청원사(東靑園寺)라고 하였다.
승명(昇明) 2년(478)에 보영이 죽자 전에 머물던 사람들과 새로운 사람들로 대중이 나뉘고, 인망이 아직 모이지 않았는데 이때에 법전을 절의 주지로 삼았다. 이에 모든 이들이 사랑하고 기뻐하여 터럭 끝만큼이라도 다른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이 83세인 융창(隆昌) 원년(494)에 죽었다. 당시 절에는 또한 정련(淨練)ㆍ승률(僧律)ㆍ혜형(慧形)이 모두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9. 보현사(普賢寺) 정휘(淨暉)니전

정휘의 본래 성은 양(楊)씨로, 건강(建康) 사람이다. 도에 뜻을 두어 진심으로 전념하였고, 법을 즐거워하여 간절함을 펼쳤다. 구족계를 받은 처음에 제원(濟瑗)을 따라 배움을 받았고, 정밀한 생각으로 연구하여 대승(大乘)의 오묘함을 더듬어서 십 년 뒤에 문득 뛰어난 스승이 되었다. 제나라 문혜제(文惠帝)와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이 마음에 깊이 새겨 승복하였다.
영명(永明) 8년(490) 경릉왕이 집으로 초청하여 『유마경』을 강의하였고 뒤에 절의 주지가 되었다. 20여 년 동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우러러 받들기를 부모 섬기듯 하였으니, 그를 좇아 제자가 된 이가 400여 명이나 되었다. 나이 72세인 영명 10년(492)에 죽었다. 당시 절에는 또한 승요(僧要)와 광정(光淨)이 있었는데 모두 학행으로 알려졌다.

10. 법음사(法音寺) 담간(曇簡)니전

담간의 본래 성은 장(張)씨로, 청하(淸河) 사람이다. 비구니 법정(法淨)의 제자가 되어 넓고도 넓은 배움의 바다에 노닐며 불법을 크게 퍼뜨렸고, 남을 앞세우고 자기는 뒤로 미루어서 널리 구제하는 데 뜻을 두었다. 제나라 건원(建元) 4년(482)에 법음정사(法音精舍)를 세웠다.
선정에 조용히 들어 삼매에 통달하였고, 덕망의 명성이 멀리까지 퍼져서 교화한 공덕이 저절로 멀리까지 나아가니, 승려와 속인이 공경하며 우러러 시주를 성대히 베풀었다. 당시에 혜명(慧明)법사란 이가 있었는데 고요하고 조용함을 깊이 사랑하였다. 그가 본래 머문 도림사(道林寺)는 영명(永明, 483~493) 때에 문헤제(文慧帝)와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이 잘 닦고 꾸민 절로, 배우는 승려들이 대부분이라서 경과 논을 강의하는 일이 잦다 보니, 오가는 시끄러움 때문에 걸핏하면 혜명법사가 떠나려고 하였으므로, 담간이 절을 시주하고 이로 인하여 백산(白山)으로 옮겨갔다.
다시 풀로 암자를 엮어 비바람을 가리고 때마다 다니면서 구걸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받았으며, 늘 땔나무를 모아다가 공덕을 경영한다고 하였다. 건무(建武) 원년(494) 2월 18일 밤 그곳에 쌓아 놓은 섶에 올라가 불을 붙이고 스스로를 태워서, 삶을 버리고 몸을 죽여 불ㆍ법ㆍ승 삼보에게 공양하였다.
가까이 있는 촌락에서 불을 보고 달려와 구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승려와 속인들이 애통해 하는 소리가 산과 골짜기를 울렸다. 곧 주변에 남은 것을 모아 무덤을 세워 주었다.

11. 법음사 정규(淨珪)니전

정규의 본래 성은 주(周)씨고 진릉(晋陵) 사람으로, 건강현(建康縣)에 잠시 옮겨 갔다가 3대째 살았다. 정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하나를 들으면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성품이 속된 것을 가까이하지 않아 일찍이 출가를 원했다. 부모도 어여삐 여겨 그의 뜻을 어기지 않았는데, 비구니 법정(法淨)의 제자가 되어 법음사(法音寺)에서 머물렀다.
덕행은 순수했고 경과 율에 널리 통했으며 삼승의 비밀스런 선의 관법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신묘한 헤아림은 깊고도 멀어서 남들이 엿볼 수 없었으며 몸을 잊고 맛을 잊어서 늘 저절로 비쩍 말랐다. 그가 정진하여 총지한 것이 세상의 법칙이 되었고, 가르쳐 이끌고 전수하여 이로운 것으로 대부분 이끌 수 있었으니, 당대의 사람들이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비구니 담간(曇簡)과 함께 법음사(法音寺)에서 쉬다가 뒤에 백산(白山)으로 옮기고, 나무 아래 깃들어 의탁하니 교화하는 공이 갈수록 커졌다. 건무(建武) 원년(494) 2월 18일 담간과 더불어 같은 날 밤에 몸을 불살랐다. 승려와 속인들이 애통하여 달려와서 목메어 울지 않음이 없었으며 그의 사리를 거두어 무덤 속에 봉하였다.

12. 집선사(集善寺) 혜서(慧緖)니전

혜서의 본래 성은 주(周)씨로, 여구(閭丘) 고평(高平) 사람이다. 사람 됨됨이가 고상하고 솔직하며 다정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그를 보면 대장부와 같아서 여인 같지 않았다. 발언하고 토론할 적에는 몹시 방정하고 곧아서 거의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일곱 살에 곧 푸성귀를 먹고 조심하여 가다듬어 지조와 절개가 용맹하였다.
18세에 출가하여 형주(荊州) 삼층사(三層寺)에 머물렀고 계율의 행실이 모두 갖추어져서 승려와 속인이 아름답게 여겼다. 당시 강릉(江陵)에 은거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서쪽 땅에서 덕망이 있었다. 혜서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마침내 나이를 잊고 의기투합하여 그를 데리고 도를 행했다. 한여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같이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익혔는데, 마음과 몸으로 부지런히 고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심유지(沈攸之)가 자사(刺史)가 되어 승려와 비구니를 널리 도태[沙簡]하였다. 혜서는 이에 하도(下都)로 피난하였다가 심유지가 패한 후 다시 서쪽으로 돌아왔다. 제나라 태위(太尉) 대사마(大司馬) 예장왕(豫章王) 소의(蕭嶷)가 송(宋) 승명(昇明, 477~488) 말 형주와 섬서를 진압하러 나왔다가 혜서가 도행(道行)이 있음을 알고 대궐로 맞아들여 다 갖추어 공양했다.
당시에 현창(玄暢)선사가 촉(蜀)에서 형주로 나오자 그에게 나아가 선법을 받고 극히 정묘한 곳까지 더듬으니, 현창이 매양 그의 전생의 습기가 얕지 않다고 칭찬했다. 혜서가 이미 선의 행법을 잘 깨닫고 아울러 푸성귀만 먹고 절개에 힘쓰니, 예장왕의 비 및 권속들이 몹시 깊게 공경히 믿어 그에게서 선법을 받았다. 매양 시주를 받으면 받는 대로 흩어 나누어 한 번도 저축하려는 뜻이 없었고, 뜻이 고상하여 도읍을 멀리해 생업문제를 가슴에 품어 본 일이 없었다. 예장왕이 도읍으로 같이 돌아가자고 요청하여 그를 위해 궁궐 동전(東田)의 동쪽에 정사를 일으켜 복전사(福田寺)라 하고, 늘 궁궐에 들어가서 도를 행했다.
영명(永明) 9년(491) 갑자기 실신하는 괴로운 병이 있다고 자칭했으나 딱히 나쁜 데는 없었다. 다만 밥 먹기를 즐겨하지 않았는데 안색이 초췌하여 절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절로 돌아가자 곧바로 나았고, 10일 안에 문득 다시 요청이 있어 들어가자 예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갔다. 모두가 그 까닭을 알지 못했는데 얼마 있지 않아 왕이 죽으니, 재앙의 연고가 서로 뒤를 이은 것이다.
무황제(武皇帝)가 동전(東田)의 교외 멀리에 다시 집선사(集善寺)를 세우고 모든 비구니를 옮겨 살게 했으며, 복전사에는 외국의 승려 아리(阿梨)를 따로 안치시켜 대궐 안에서 다시 공양하였는데, 주문을 독송하기를 잘하였다. 혜서가 집선사로 옮긴 뒤로는 다시 대궐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은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당시 안팎에서 이미 그를 중히 여겨 공경했으므로 매양 그에게 잠시라도 뒤쪽의 궁궐 안에라도 오시라고 권하였다.
축부인(竺夫人)이 선재(禪齋)를 베풀고자 하여 서신을 보내 먼저 자문을 요청하자 말했다.
“몹시 좋은 일이지요. 다만 제가 나이가 많습니다. 이번 일을 빌미로 하여 한 번 들어가 참으로 여러분들과 작별할까 합니다.”
선재를 올리고 재를 마치자 스스로 종이와 붓을 찾아 시를 지었다.

세상 사람들은 혹 몰라,
나를 할망구 주씨라 할 테지만
문득 7일 간의 선재 동안
잠시도 쉬지 않았다오.

[뒤에 다시 이별을 읊은 시가 열 글 자 더 있는데 지금은 잊었다.]
시를 짓고 나서 웃음으로 사람들을 만나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상하고 즐거이 노닐었다. 그리고 떠날 것을 갖추고 말하였다.
“이번 일을 빌미로 절을 떠나 바야흐로 길이 작별할까 합니다. 연로하여 다시는 궁궐로 들어올 수 없답니다.”
당시에 몸의 상태는 매우 건강하였으나 절을 떠난 지 한 달 남짓 병이 들었다고 말하였는데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죽었는데 이때가 영원(永元) 원년(499) 11월 20일이고, 그때 나이가 69세이다. 주사(周捨)가 그를 기리는 서문과 찬문을 지었다. 또한 비구니 덕성(德盛)이 있었는데 동지들과 덕이 잘 맞는 권속이었다. 도를 행하고 관법을 닦아 몸소 그의 뜻을 이어 받았다.

13. 전당(錢塘) 제명사(齊明寺) 초명(超明)니전

초명의 본래 성은 범(范)씨로, 전당(錢塘) 사람이다. 아버지는 젊을 때에 국자감의 학생으로 있었으며, 그의 대에 불법을 받들었다. 초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평소 높은 뜻을 품었으며, 오경을 읽고 글 뜻에 밝았으며 방정하게 예를 갖추어서 안팎에서 그를 공경했다. 나이 21세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자, 고을과 이웃에서 재혼하기를 바랐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마침내 출가하여 숭은사(崇隱寺)에 머물렀다.
신묘한 이치를 밝게 꿰뚫어 도의 식견을 맑게 깨달았다. 오현(吳縣) 북장사(北張寺)에 있는 담정(曇整)법사가 도의 행실이 고행에 정밀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좇아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에 도산(塗山)으로 가서 혜기(慧基)법사가 뭇 경을 강설하는 것을 들으며 뜻과 요점을 더듬었는데, 한 번 귀를 거친 것은 물러가서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삼오(三吳) 지방의 모든 이들이 높이 공경하였으나 이내 전당으로 돌아가 제명사(齊明寺)로 옮겨 쉬다가, 나이 60여 세인 건무(建武) 5년(498)에 죽었다. 당시에 비구니 법장(法藏)도 학행으로 그 이름을 떨쳤다.

14. 법음사 담용(曇勇)니전

담용은 비구니 담간(曇簡)의 언니이다. 성품이 굳세고 곧았으므로 남을 따라 기울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늘 선과 율로써 힘쓰고 옷이나 먹을거리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법음정사(法音精舍)에서 쉬면서 깊이 덧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즐거움을 높이 여겼다. 건무(建武) 원년(494) 동생 담간을 따라 같이 백산(白山)으로 옮겼다. 영원(永元) 3년(501) 2월 15일 밤 섶을 쌓아 스스로를 불살라 부처님께 몸으로 공양하였다. 당시에 듣거나 본 이들이 모두 도의 마음을 내어 다 같이 타고 남은 것을 모아 무덤을 세웠다고 한다.

15. 섬(剡) 제흥사(齊興寺) 덕락(德樂)니전

덕락의 본래 성은 손(孫)씨로, 비릉(毘陵) 사람이다. 고조할아버지 육(毓)은 진(晋)의 예주(豫州) 자사였다. 덕락은 나면서 입 안에 이가 두 개나 났었다. 자라면서 늘 어두운 방에서 등불이나 촛불을 빌리지 않고서도 잘 보았다. 속세를 떠나기를 즐겨 바랐으므로 부모가 사랑하여 안타까워했으나 감히 막지 못했다. 8세 무렵 언니와 여동생이 함께 도의 길로 들어서 진(晋)의 비구니 능광(陵光)의 제자가 되었다. 구족계를 받은 뒤에는 나란히 서울로 유학하여 남영안사(南永安寺)에 머물렀다.
뜻을 도탑게 하고 정진하기를 부지런히 밤낮으로 하였고, 경과 율을 끝까지 더듬어서 말과 이야기가 법답고 우아하니, 송(宋) 문제(文帝, 424~453)가 좋게 여겼다. 원가(元嘉) 7년(430) 외국 사문 구나발마(求那跋摩)를 위해 송나라의 대장군이 지원사(枳園寺) 길 북쪽에 왕원사(王園寺)를 세워 옮겨와 살기를 요청하였다. 11년(434)에 사자국(師子國) 비구니 10여 명이 이르자 승가발마(僧伽跋摩)를 좇아 거듭 구족계를 받았다. 21년(444) 같은 절의 비구니 법정(法淨)과 담람(曇覽)이 공희선(孔熙先)에게 물들어 꾀를 도모하다가, 몸은 궁색해지고 법은 헐어지고 절은 무너지게 되었다. 모든 비구니가 뿔뿔이 흩어지자 덕락은 동청원사(東靑園寺)로 옮겨 가 쉬었다. 자문하여 깊이 선을 찾아 미묘한 경지를 끝까지 더듬었다.
문제가 죽자 동쪽으로 가 회계(會稽)에서 노닐다 섬(剡) 땅 백산(白山)의 조명정사(照明精舍)에서 멈추었다. 배우는 무리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조용히 교수하였으니 도가 동남 지역에서도 성대해졌다. 제(齊) 영명(永明) 5년(487) 검소하고 돈독한 신자인 진류완(陳留阮)이 살던 집을 희사하여 제흥정사(齊興精舍)를 세웠다. 덕락은 기강이 있어 모두가 기뻐 감복하여 어느 곳에서라도 풍모를 흠모하였다. 모두가 의지하기를 바랐으므로 제자들이 2백여 명이었다. 시주 받은 것을 모으지 않고 해마다 대강(大講)을 베풀어 승려나 비구니나 제한 없이 평등하게 공급하였다. 나이 81세인 영원(永元) 3년(500)에 죽었다.
섬 땅에 또한 비구니 승무(僧茂)가 있었는데, 본래 성은 왕(王)씨로 팽성(彭城) 사람이다. 한 가지 푸성귀로 줄여서 먹고 부지런히 고행하기를 일삼았다. 어버이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죽원정사(竹園精舍)의 터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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