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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보자] #6001 비구니전(比丘尼傳) 2권

Kay/케이 2025. 5.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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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전(比丘尼傳) 2

 

비구니전 제2권

석보창 지음
추만호 번역


 [송(宋)]

1. 경복사(景福寺) 혜과(慧果)니전

혜과의 본래 성은 반(潘)씨로 회남(淮南) 사람이다. 늘 꼿꼿한 절개를 행하고 솜옷을 입지 않았다. 계율[毘尼]을 도타이 좋아하여 맑고 깨끗하게 계율을 행했다. 승려와 속인들이 흠모하고 부러워하여 명예가 먼 데까지 퍼졌다.
송(宋) 청주자사(靑州刺史) 북지(北地)의 부홍인(傅弘仁)이 평소 찬탄하고 귀하게 받들어 도탑게 시주를 더하였다. 영초(永初) 3년(422) [담종(曇宗)은 원가(元嘉) 7년(430)이라고 하지만, 절의 주지인 비구니 홍안(弘安)이 절을 일으킬 때 만든 차권(借券)을 보여 주는데 영초 3년이 맞다.] 집의 동쪽 방면을 할애해 정사(精舍)를 세우고, 경복사(景福寺)라 하였다. 혜과가 기강을 잘 세운 데다가 시주로 받은 물건들을 모두 승가 대중에 되돌리니 모든 일이 크게 일어나 누구나 기뻐 감복하였다.
원가 6년(429)에 서역의 사문 구나발마(求那跋摩)가 이르렀다. 혜과가 여쭈었다.
“이 땅의 비구니들 중에 앞서 계를 받았지만 아직 율장에 따라 제대로 받은 일은 없고, 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밀고 나가 참으로 우뚝 선 예는 있으나 아직 그 뒤까지는 측량할 수 없으니 이상이 없을는지요?”
이상이 없다고 대답했다. 다시 여쭈었다.
“율장의 가르침대로라면 수계를 내린 스님들[戒師]께 죄를 저지른 것이온데 어찌 이상이 없는지요?”
“비구니가 대중의 처소에서 2년 이상 배우지 않았다면 죄를 얻었다고 할 수는 있겠군.”
“그렇다면 이 나라에선 아직 제대로 된 비구니가 없는 셈인데 인도[閻浮] 땅이 아닌 곳에서는 비구니가 없겠군요?”
“율장의 제도에는 승려 열 명이 있으면 계를 주고, 변방의 경우에는 승려 다섯 명이라도 계를 줄 수 있다고 했다. 장소에 따라 바름이 있으니 불가불 법답게 할 따름이네.”
“인도에서 몇 리 정도를 변방이라 하는지요?”
“천리 밖, 산과 바다로 막히고 떨어져 있는 곳이 변방이지.”
9년(432)에 제자 혜의(慧意)와 혜개(慧鎧) 등 5인을 거느리고 승가발마(僧伽跋摩)를 좇아 다시 구족계를 받았는데 공경히 삼가서 받들어 지니기를 부처님 정수리나 마음[腦]을 사랑하듯 하였다. 나이 70여 세인 원가 10년(433년)에 돌아갔다. 제자 혜의와 혜개가 나란히 당대에 절개 있는 수행으로 알려졌다.

2. 건복사(建福寺) 법성(法盛)니전

법성의 본래 성은 섭(聶)씨로 청하(淸河) 사람이다. 조씨의 난리 때문에 금릉(金陵) 땅으로 피해 원가(元嘉) 14년(437) 건복사(建福寺)에서 출가했다. 재주ㆍ식견ㆍ지혜ㆍ이해력으로 민첩하게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었다. 늙게 되자 스스로 서울로 흘러 들어왔다. 비록 제왕의 도가 융성함과 편안함을 회복하고 여전히 옛 땅을 그리워했지만, 오직 그윽한 가르침만을 깊이 더듬었으므로 근심을 버리고 늙어가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도량사(道場寺) 우(偶)법사를 좇아 보살계를 받았다. 낮에는 오묘한 바탕을 열어 떨치고 밤에는 맑게 진리의 맛을 말하였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신령스런 분위기가 환하고 넉넉해서 늙었다 할지라도 장년보다 나았다. 항상 극락[安養]에 나기를 빌었으므로 같이 수련하는 담경(曇敬)과 담애(曇愛)에게 말했다.
“내가 몸을 세워 도를 행한 뜻은 서방 극락에 있다오.”
16년(440) 9월 27일 탑 아래에서 예불을 늦게까지 드리다가 병이 들어 점점 위독해졌다. 그달 그믐 초저녁에 선잠이 들었는데, 여래께서 허공에서 내려와 두 보살[大士]과 소승과 대승에 대해 논하더니, 갑자기 대중과 더불어 향기를 흩뿌리며 숲을 밟고 다가와 법성을 문병하였다. 광명이 온 절에 환히 비치니 모두가 보고 다 같이 찾아와 법성에게 이것이 어떤 빛인지를 여쭈었다. 법성이 자세히 설명하고는 말이 끝나자마자 임종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72세이다. 예장(豫章) 태수인 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이 본래부터 존경하던 터라서 법성을 위해 전기를 지었다고 한다.

3. 강릉(江陵) 우목사(牛牧寺) 혜옥(慧玉)니전

혜옥은 장안(長安) 사람이다. 수행을 닦기를 부지런히 하여 경과 계율을 두루 갖추었다. 늘 떠돌며 교회를 행하여 나라의 고을들을 두루 밟았고, 매양 좋은 인연을 만났으나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았다. 남쪽 형초(荊楚) 땅으로 가다가 강릉(江陵) 우목정사(牛牧精舍)에서 머물렀다. 『법화경』, 『수능엄경』 등을 염송하고 10일에 한 번씩 대중들을 이익 되게 하니 담서(郯西) 땅의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귀의하여 공경했으며, 경과 논을 두루 살피면서 일찍이 그만두거나 그친 적이 없었다.
원가(元嘉) 14년(437) 10월 고행재(苦行齋)를 7일 동안 할 때에 서원을 세우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진실로 고행재에 감응함이 있다면 몸을 공양[捨身]한 뒤에 반드시 부처님을 뵈리라. 바라건대 7일 안에 부처님의 광명을 뵈옵기를 비나이다.”
5일째 되는 날 한밤중에 절 동쪽 숲에서 신령스런 빛이 붉게 비쳤다. 곧 그 사실을 대중들에게 알리니 대중들이 모두 기뻐 공경하여 더욱 즐겁게 감복하였다. 절의 주지 법홍(法弘)은 훗날 빛이 난 곳에다 선실(禪室)을 일으켜 세웠다.
과거 혜옥이 장안의 설상서사(薛尙書寺)에 있을 때도 붉고도 흰 빛이 주위를 밝게 비치다가 10일 만에 사라졌다. 그 뒤에 육중사(六重寺) 사문이 4월 초파일에 빛이 났던 곳에서 금미륵상(金彌勒像)을 얻었는데 높이가 한 자였다고 한다.

4. 건복사 도경(道瓊)니전

도경의 본래 성은 강(江)씨로 단양(丹陽) 사람이다. 나이 10여 세에 경과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고, 계를 받은 뒤로는 경ㆍ율ㆍ논 삼장에 밝게 통달하고 고행에 부지런히 힘썼다. 진(晋) 태원(太元, 376~396) 중에 황후가 그의 높은 수행을 아름답게 여기고 복을 닦을 때마다 대부분 이 절에 의지하니, 부귀한 집안의 부녀자들이 다투어 그와 더불어 노닐었다.
원가(元嘉) 8년(431) 크게 불상을 만들어 곳곳에 안치했다. 팽성사(彭城寺)의 금불상 2구와 장막, 자리, 작은 도구들, 와관사(瓦官寺)의 미륵행상 1구와 보개(寶蓋), 영락(瓔珞), 남건흥사(南建興寺)의 금불상 2구와 잡사(雜事), 번개(幡蓋), 건복사(建福寺)에 조성한 와불상과 불당, 보현행상(普賢行像), 공양도구들은 정밀하고 곱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원가 15년(438) 금무량수불상(金無量壽佛像)을 조성했는데, 그해 4월 10일 불상의 눈썹 사이에서 방광이 나와 밝게 비추어 절 안이 온통 금빛이었다. 승려와 속인들이 이야기를 전해 공경함을 닦고자 모두 와서, 신령스런 빛을 우러르고는 찬탄하고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다시 원황후(元皇后)가 물건을 보내 절 남쪽을 개척하고 선방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5. 강릉 기원사(衹洹寺) 도수(道壽)니전

도수는 어느 곳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맑고 온화하며 흔들리지 않고 고요하며 공손함과 효성스러움으로 칭송을 받았다. 어려서 오계를 받고서는 일찍이 계율을 범한 적이 없었다. 원가(元嘉, 424~453) 연중에 부친상을 당한 상처로 인하여 병을 얻었는데, 아프거나 가렵지는 않으나 누렇게 척추 뼈가 드러났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갖은 치료를 다했으나 낫지 않자, 이 때문에 서원을 세워 질병이 나으면 출가하겠다고 맹세했다.
서원을 세운 뒤로 점차 평상시와 같이 회복되자, 약속대로 세속을 떠나 기원사(衹洹寺)에서 머물렀다. 고행을 부지런히 하여 여느 무리를 뛰어넘었고 『법화경』을 3천 번이나 염송하였다. 늘 상서로운 빛이 나타났는데, 원가 16년(439) 9월 7일 한밤중에는 공중에서 보배로운 덮개가 드리워져 그 위를 덮었다고 한다.

6. 오(吳) 태현대사(太玄臺寺) 현조(玄藻)니전

현조의 본래 성은 노(路)씨로 오군(吳郡) 사람인 안구(安苟)의 딸이다[『선험기(宣驗記)』에 안구(安苟)로 되어 있다]. 나이 10여 세에 중병에 걸려 좋은 약이라면 어김없이 썼으나 날이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덜어짐이 없었다.
당시에 태현대사(太玄臺寺)의 법제(法濟)스님이 안구에게 말했다.
“아마 이 병은 업보 때문에 생긴 것이어서 약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빈도가 본 불경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위태롭고 괴로운 지경에 놓여 있을지라도 삼보에게 귀의하고 참회하여 구원하길 빈다면 모두가 구제받을 수 있다’라고. 시주께서 딸과 더불어 나란히 삿되고 속된 것을 버리고 번뇌의 더러움을 씻어 전심을 기울여 한결같이 한다면 반드시 병이 나을 것입니다.”
안구가 그럴 듯하게 여겼다.
곧 집안에 관세음재(觀世音齋)를 베풀고 마음과 뜻을 깨끗이 하여 정성을 기울이며 우러렀다. 아픈 딸을 부축하여 절하기를 전념하여 계속하니, 7일이 지난 초저녁에 문득 한 자 높이의 금상이 나타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 번이나 어루만졌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고질병이 씻은 듯이 치유되었음을 알았다.
이미 영험을 몸소 경험한 터라 마침내 출가하여 태현대사에서 머물렀다. 정성스레 부지런히 게을리하지 않고 『법화경』을 염송했다. 푸성귀를 먹고 길이 재계하기를 37년이나 하면서, 늘 마음을 쏟고 생각을 기울여 도솔천에서 살기를 서원했다. 송(宋) 원가(元嘉) 16년(439) 도읍을 벗어나 경수(經水)로 나아갔는데 죽은 곳을 알 수 없다.

7. 남안사(南安寺) 혜경(慧瓊)니전

혜경의 본래 성은 종(鍾)씨로 광주(廣州) 사람이다. 높고 깨끗하게 도를 실천하여 생선이나 고기를 맛보지 않았다. 나이 80이 되도록 더욱더 부지런하기에 힘쓰고, 늘 풀옷이나 삼베옷을 입고 솜옷을 입지 않아 사찰에 기강이 되었으며, 아울러 강설까지 하였다.
본래 광릉(廣陵) 남안사(南安寺)에서 계속하여 머무르다가, 원가(元嘉) 18년(441) 송나라 강하(江夏) 왕세자(王世子)의 어머니 왕(王)씨가 땅을 시주하여 혜경이 그 땅을 닦아 절을 세우고 남영안사(南永安寺)라고 불렀다. 22년(445) 난릉소(蘭陵蕭)가 세자모 왕씨의 뜻을 이어받아 외국탑(外國塔)을 세웠다. 혜경은 원가 15년(498)에도 보리사(菩提寺)를 지었는데 당(堂)ㆍ전(殿)ㆍ방우(坊宇)를 모두 다 장엄하고 곱게 꾸몄다. 그러고는 그리로 옮겨가 머무르고 남영안사는 혜지(慧智)스님에게 보시했다.
혜경은 원가 24년(447) 맹의(孟顗)를 따라 회계(會稽)로 가다가 파강(破岡)에서 죽으며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내가 죽은 뒤에 파묻지 말고 사람을 시켜 몸을 벗기고 찢어 중생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라.”
돌아가셨지만 차마 칼을 댈 수 없어 구용현(句容縣) 거착산(擧著山) 속으로 들어가 들짐승과 날짐승으로 하여금 스스로 먹게 하였다. 10여 일이 지났는데도 엄연히 예전처럼 안색이 다르지 않았다. 마을 사람을 시켜 쌀을 시신 주변에 흩뿌리게 했는데도, 새들이 멀리 떨어진 곳의 쌀은 다 먹어 없앴으나 시신 가까이 있는 알곡은 모두 그대로 있었다.
제자 혜량(慧朗)이 서울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급히 달려가서 받들어 모시고 되돌아와 고좌사(高座寺) 앞산에 묻고 무덤 위에 탑을 일으켰다고 한다.

8. 남피(南皮) 장국사(張國寺) 보조(普照)니전

보조의 본래 성은 동(董)씨이고 이름은 서비(徐悲)로, 발해(勃海) 안릉(安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절개가 있었는데 17세에 출가하여 남피(南皮) 장국사(張國寺)에서 머물렀다. 뒤에 스승을 따라 광릉(廣陵) 건희정사(建熙精舍)로 유학을 갔는데, 진솔한 마음으로 법을 잘 받드니 모든 대중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스승 혜자(慧孜)가 돌아가신 뒤로는 경하할 일이나 조문할 일에도 나아가지 않고 고행하여 여느 무리를 뛰어넘었다. 송 원가(元嘉) 18년(441) 12월 피로가 쌓여 병이 비록 극심했으나, 정을 도타이 하고 믿음을 깊이 하여 처음부터 가진 뜻을 고치지 않았다. 애오라지 정성껏 기도하는 것을 밤낮을 가리지 않았는데, 땅에 눕지 않고 침상에서 머리를 조아려 참회하면서도 때마다 쉬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고, 『법화경』을 날마다 3권씩 염송하였다.
19년(442) 2월 중 갑자기 기절했다가 두 끼니 먹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소생하여 말했다.
“서쪽으로 길을 가던 중에 어떤 탑이 보였고 탑 속에는 어떤 스님이 있었다. 눈을 감고 사유하고 있다가 어느 곳에서 왔느냐고 깜짝 놀라기에 제대로 말씀드리고는 곧 스님에게 여쭈었다. ‘이곳은 아무 아무 절로부터 거리가 몇 리나 됩니까?’ 답했다. ‘5천만 리니라.’ 길 위에는 풀과 행인들이 있었지만 모두 다 아는 바가 아니었다. 그때 바람과 구름이 곳곳에 높이 밀려가서 장엄하고 맑게 개더니 서쪽 부분은 더욱 밝아졌다. 앞으로 나아가려 했는데 스님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되돌아오다가 활짝 잠이 깼다.”
7일 뒤에 죽으니 그때 나이가 25세였다.

9. 양군(梁郡) 축과촌사(築戈村寺) 혜목(慧木)니전

혜목의 본래 성은 부(傅)씨로, 북지(北地) 사람이다. 11세에 출가하여 혜초(慧超)스님을 스승으로 섬겨 십계를 받았고, 양군(梁郡) 축과촌사(築戈村寺)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대품반야경』을 읽으면서 날마다 두 권씩 염송했고 아울러 잡다한 경전에도 통했다.
혜목의 어머니가 늙고 병든데다가 입 안의 이는 하나도 남은 게 없어 혜목이 음식을 씹어 어머니에게 먹였기 때문에, 입이 청정하지 않아 구족계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자신의 업장을 참회했다. 문득 계단(戒壇)을 보니 하늘과 더불어 모두 황금빛을 띠었다. 머리를 들어 우러러보니 남쪽에 황금빛으로 물든 고운 옷을 입은 이가 있었다. 혜목과의 거리가 어떤 때는 가깝다가 어떤 때는 멀어지곤 했는데 혜목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너에게 계를 내렸노라.”
이내 다시 보이지 않았다. 혜목이 이런 일로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니 대부분의 기이한 감응이 모두 이와 같았다.
혜목의 형이 그가 들은 것을 알고 싶어 그를 속여 말했다.
“네가 도에 힘쓴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필경 이익된 바가 없다. 곧 머리를 길러 신랑감을 찾도록 해라.”
혜목이 듣고는 수심에 쌓여 그때 본 것을 이야기하고는 곧 구족계를 받았다. 계를 받기로 한 날 밤,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구전으로 계본(戒本)을 내려 주었는데 수계를 마치고 나서는 두 번 보는 것인지라 바로 염송하였다. 송 원가(元嘉, 424~453) 연간 시방불상(十方佛像)을 조성하고 아울러 사부계본(四部戒本) 및 갈마(羯磨)를 사부대중에게 보시했다고 한다.

10. 오현(吳縣) 남사(南寺) 법승(法僧)니전

법승은 어려서 출가하여 오현(吳縣) 남사(南寺)에서 살았다. 동사(東寺)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공손히 믿고 부지런히 힘쓴 것을 뭇 대중들이 다 알 정도였다. 송 원가 연간 하내(河內) 사람 사마율(司馬隆)이 비릉승(毘陵承)에게 습격받고 싸우다 죽었다. 그의 처 산(山)씨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자식마저 없는데다 나이 또한 지긋했는데 오나라에 들어와 법승에게 의탁하자 법승이 어버이를 섬기듯 대접하였다.
백여 일 뒤 산씨가 병에 걸려 3년이 지나면서부터 몹시 위독해졌다. 법승이 본래 축적한 것은 없어도 의약을 넉넉하게 공급했는데 모두가 빌어서 마련한 것으로 비와 더위를 꺼리지 않고 바람과 추위를 가리지 않아 산씨가 마침내 낫게 되자 대중들이 더욱 그를 귀하게 여겨 칭찬하였다.
그 뒤에 서울에 머물면서 선과 계율에 매진해서 선정과 지혜에 두루 통하여 그윽한 경지를 더듬으니, 권속을 가르쳐 이끄는데 엄숙하지 않아도 절로 이루어지고, 움직여 이익을 구하지 않고 조용히, 명예를 구하지 않는데도 은근히 두루 이르러서 남을 제도하지 않음이 없었다.
나이 60이 지긋하여 병을 앓을 때도 차도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므로 제자들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답하였다.
“어제 두 사문을 보았는데 이와 같이 말하더라.”
조금 지나 다시 말하였다.
“두 비구를 자세히 보니 전에 있던 이들이 아니더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가사를 착용하고서 손에 각각 꽃을 들고 병상에 서 있는데 뒤로 멀리 어떤 부처님께서 연꽃 위에 앉아 내 몸에 광명을 비추더라.”
이렇게 한 이후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법화경』을 독송하게 했다. 다음날 밤 기식이 점차 쇠미해지자 경 읽기를 그치게 하고는 자신을 위해 부처님을 부르게 하고 자신도 부처님을 불렀다. 날이 막 샐 무렵 변함없는 얼굴로 갑자기 마쳤다.

11. 영안사(永安寺) 승단(僧端)니전

승단은 광릉(廣陵)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불교를 받들어 자매가 도타이 믿었다. 출가할 것을 서원하여 시집가려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자색을 갖추었다고 고을에 알려져 부잣집에서 청혼이 들어왔으므로 어머니와 언니가 이미 받아들였다. 신랑을 맞이하기 3일 전 밤에 사찰로 숨자 절의 주지가 별실에 두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다. 아울러 『관세음경』을 요청하여 이틀 동안 염송하면서 눈물을 비처럼 쏟으며 절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3일 뒤 예배 중에 불상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
“네 신랑의 목숨이 다하였으니 너는 다만 정근하여 근심하지 말지어다.”
다음날 신랑이 소에게 받혀 죽었으므로 출가하여 계율을 굳게 지켰다. 마음을 텅 비우고 한가로이 하여 말을 못하는 것처럼 하였으나 이름과 실질을 말하고 분석하기에 이르러서는 말이 술술 흘러 나왔으며, 『대반열반경』을 5일에 한 번 염송했다.
원가(元嘉) 10년(433) 남쪽 상국(上國)에서 노닐다가 영안사(永安寺)에서 머물렀다. 뭇 일에 기강을 세워 사랑을 고르게 하고 접대하기를 똑같게 하니 모두들 기쁘게 따랐으므로 오래갈수록 더욱 공경하였다. 나이 70여 세인 원가 25년(448) 죽었다. 제자 보경(普敬)ㆍ보요(普要)는 모두 고행으로 이름을 드날렸고, 아울러 『법화경』을 염송했다.

12. 광릉(廣陵) 중사(中寺) 광정(光靜)니전

광정의 본래 성은 호(胡)씨고 이름은 도비(道婢)로 오흥(吳興) 동천(東遷)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광릉(廣陵) 중사(中寺)에서 머물렀다. 광정은 어려서는 행동에 힘쓰고 커서는 좌선을 익혔다. 달고 기름진 것을 먹지 않았으며 구족계를 받을 즈음에는 곡기를 끊고 솔[松]을 먹었다. 구족계를 받고서도 15년을 그렇게 하니 비록 마음과 인식이야 더욱더 밝아졌지만 체력은 삐쩍 말라 피로에 시달렸다. 기도를 정성스레 하여 흡족하기에 이를 때마다 매양 문득 피로로 쓰러졌는데 움직이는 데 거의 한 달이나 걸릴 정도였다. 사문 법성(法成)이 말했다.
“밥을 먹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성대한 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광정이 이 말을 듣고 다시 멥쌀밥을 먹기 시작했다. 더욱더 용맹정진하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그를 따라 좌선하여 수행하는 자가 늘 백여 명이었다.
원가(元嘉) 18년(441) 5월 질환을 앓으며 말했다.
“나는 몸을 싫어하고 괴로워한 지가 오래이다.”
이에 병을 무릅쓰고 참회하기를 입과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니 본성의 흐름이 깨끗하고 맑으며 정신과 기운이 편안하였다. 19년(442) 정월 초하루에 이르러 먹고 마시는 것을 모두 끊어 버렸다. 도솔천을 그리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계속 이어졌고, 이와 같이 끊어지지 않았다. 4월 초파일 저녁에 이르러 특이한 향기와 이채로운 모습이 허공 속에 가득하더니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13. 촉군(蜀郡) 선묘(善妙)니전

선묘의 본래 성은 구양(歐陽)씨로 번현(繁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했다.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이라 성내거나 기뻐하는 일이 드물었고, 좋은 옷을 입으려 하거나 맛난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여동생은 청상과부가 되어 의탁할 곳이 없어서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그의 방에 의탁했는데 선묘가 살아서는 부처님을 뵐 수 없음을 개탄하고, 이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흑흑 흐느껴 울어 슬픔을 그치지 않는 것을 늘 들었다.
함께 산 지 4, 5년이 되도록 한 번도 식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동생이 밥을 지어 선묘를 불러 함께 먹자고 하니 선묘가 말했다.
“어느 곳에 가서 먹고 왔다.”
“몸이 좋지 않아 먹을 수가 없나 보구나.”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를 하니 동생이 부끄러워 한을 품고는 언니에게 말하였다.
“복이 없어 남편은 죽고 일가붙이 하나 없어 어린 것을 데리고 언니에게 의지했더니 아이가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것이 많아 언니가 보기 싫어서 함께 먹으려 하지 않는구나.”
눈물을 흘리며 말을 하고 나서는 떠나가려 하였다. 선묘가 그 손을 잡고 타일렀다.
“네가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다행히 밖에서 남에게 공양을 받으니 어찌 꼭 우리 집안의 먹을거리를 축낼 필요가 있겠느냐? 너는 다만 편안히 살았으면 한다. 나는 머지않아 먼 곳으로 떠나갈 것이다. 너는 마땅히 집을 지키고 삼가 떠나지 말도록 해라.”
동생이 이 말을 듣고 떠나지 않았다. 선묘가 이에 스스로 길쌈하여 베를 짜고 몇 섬의 기름을 사다가 질그릇 항아리에 가득 채워 뜰 한가운데 두고는 동생에게 말했다.
“공덕을 지으려 하니 삼가 치우지 말도록 해라.”
4월 초파일 한밤중에 베로 자신을 감싸고 몸을 불살랐다. 불이 이마에까지 이르자 동생에게 명하여 유나(維那:사찰의 소임자)를 불러 경쇠를 치게 했다.
“나는 이제 목숨을 버려 사신공양을 올리니 뭇 비구니들에게 두루 알려 속히 와서 작별 인사를 함께 나누어야 하겠다.”
뭇 비구니들이 놀라 이르렀을 때에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 비구니들에게 말했다.
“각각 부지런히 정진하라. 나고 죽음은 두려우니라. 마땅히 벗어나기를 구해 삼가 윤회하지 말지어다. 내가 이 몸을 버리기까지 공양한 지가 27번이나 되었거늘, 이 한 몸이 마땅히 초과(初果:豫流果)를 얻는 데 그쳤노라.”[그곳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원가(元嘉) 17년(440)에 몸을 살랐다고도 한다. 효건(孝建, 454~456) 때라고도 하고, 대명(457~464년) 때라고도 말한다. 그러므로 다 갖추어 적는다.]

14. 광릉 승과(僧果)니전

승과의 본래 성은 조(趙)씨고 이름은 법우(法祐)로, 급군(汲郡) 수무(修武) 사람이다. 전생의 인연으로 참다운 믿음이 순수하고 독실한 것이 절로 그러했다. 젖을 빨 때에도 알맞은 양을 넘어서지 않아 부모님께서 아름답고 기이하게 여겼다. 성인이 되자 마음은 불법에 이르기를 애오라지 기원하였지만 세속 인연의 장애로 어긋남이 있었다.
나이 27세에 바야흐로 출가하게 되어 광릉(廣陵)의 비구니 혜총(慧聰)을 스승으로 섬겼다. 승과는 계율의 행실이 굳세고 밝으며, 선의 수행이 맑고 깨끗했다. 선정에 들 때마다 문득 새벽까지 이르러서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경계가 맑았으나 겉모습은 비쩍 마른 나무와 같았으므로 얕은 경지의 무리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원가(元嘉) 6년(429) 외국의 선박 주인[船主] 난제(難提)가 사자국(師子國)에서 비구니를 싣고 송(宋)나라 서울에 와서 경복사(景福寺)에서 머물렀다. 얼마 뒤에 난제가 승과에게 물었다.
“이 나라에는 먼저 온 외국의 비구니가 있는지요?”
아직 없다고 대답하자 또 물었다.
“앞서 여러 비구니들이 수계를 받았을 터인데 어떻게 수계 내릴 두 스님을 얻었습니까?”
대답했다.
“다만 큰스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과거 전생으로부터의 인연[本事]을 얻은 자라야 수계를 받을 수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은근하고 두터운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은 방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크게 도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공경히 계를 받으므로, 5백 여인이 도를 사랑하여 화상이 된 경우와 같은 것이 그 높은 예입니다.”
승과가 비록 답은 했으나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 이 일로써 삼장(三藏) 스님에게 자문을 얻으니 삼장 스님도 그와 이해를 같이 했다. 또 물었다.
“거듭 받을 수는 없습니까?”
대답했다.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구분한 것은 미약함으로부터 지극한 것이 드러나도록 한 것이니, 다시 받는다면 더욱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10년(433)에 선박주인 난제가 이르렀는데 다시 사자국 철살라(鐵薩羅) 등 11명의 비구니와 함께 왔다. 앞서 먼저 와 있던 비구니들은 이미 송(宋) 나라 언어에 밝았는데, 승가발마(僧伽跋摩)를 남림사(南林寺) 수계단에 초청하여 차례대로 300여 명이 다시 수계하도록 했다.
18년(440) 나이 34세 때에 하루가 다 지나도록 좌선하고 있었는데 유나(維那)가 짐짓 만져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 놀라 사관(寺官)에게 알려 그와 함께 보자 승과의 몸은 싸늘하고 살은 딱딱했으며 기식이 미약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둘이 마주 들고 막 옮기려고 하는데 문득 스스로 눈을 뜨고 웃으며 말하는 것이 보통 때와 같았다. 이에 어리석은 이들이 놀라 엎드렸다. 마친 것은 알지 못한다.

15. 산양 동향(山陽東鄕) 죽림사(竹林寺) 정칭(靜稱)니전

정칭의 본래 성은 유(劉)씨고, 이름은 승(勝)으로 초군(譙郡) 사람이다. 계율을 닦는 일에 힘쓰고 고행을 정밀히 하였으며, 불경 45만 자를 염송했다. 절 옆은 산림이므로 번잡하거나 시끄럽지 않았고, 선(禪)의 고요함 속에서 마음이 노닐어 길이 속세의 수고로움을 끊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소를 잃고 끊임없이 찾다가 밤에 산속에 이르러 절의 숲에서 불빛이 확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에 이르자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어떤 호랑이가 정칭을 따라다녔다. 저지르고도 실수로 때맞추어 참회하지 않으면 호랑이가 즉시 크게 노하였고, 죄를 참회하면 곧 기뻐하였다.
정칭이 뒤에 잠시 산을 벗어나 길을 가다가 우연히 북쪽 지방의 여인을 만났는데, 갑자기 인사를 나누었는데 옛날부터 아는 사이인 것처럼 기뻐하였다. 그 여인의 성은 구(仇)씨로 이름은 문강(文姜)인데, 본래 박평(博平) 사람이다. 불법을 좋아하는 성품인데다 남쪽 나라가 부유하고 국경 관문의 길이 열렸다는 소문을 듣고 의탁하여 피신하려고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마침내 출가하여 함께 고행하면서 절개를 지켰다. 두 사람은 식량에 의존하지 않고 마(麻)나 삽주 풀을 먹을 따름이다. 명성이 오랑캐의 수도에까지 퍼져 오랑캐들이 성인이라 부르면서 멀리서 사람을 보내 맞이하려 했으나, 두 사람이 변경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명성 있는 자취를 더럽히고 행동과 언행을 위태롭게 하여 비굴하게 처신했다. 또한 오랑캐 군주가 그들을 위하여 성대한 상을 차려 주었는데, 둘 다 나온 것을 다 먹으니 이로 인하여 그들을 가볍게 보고 다시는 붙잡아 만류하지 않았다. 정칭은 문강과 더불어 다시 본사로 돌아갔다. 정칭은 나이 93세에 병 없이 죽었다.

16. 오(吳) 태현대사(太玄臺寺) 법상(法相)니전

법상의 본래 성은 후(侯)씨로, 돈황(燉煌)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맑고 곧으며 재주와 식견이 몹시 빼어났다. 뜻이 도탑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굶는 일이 빈번하였으나 학업을 폐한 일이 없다. 가난함을 맑고 편안하게 여겨 영달하는 것으로 그 마음을 옮기지 않았다. 부(傅)씨에게 시집갔으나 집안에 변고가 많이 일어나고 부견(符堅)에게 패하여 권속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출가하여 계율을 지키면서 믿고 이해하는 것이 더욱 깊어졌고, 늘 옷과 음식을 덜어 좋은 것은 비구니 혜숙(慧宿)에게 보시하였다. 절에 있는 중이 간하였다.
“혜숙은 본바탕이 거칠어 법문을 말한 적이 없고, 경과 계율에도 일찍이 마음에 둔 적이 없어서, 선정을 배우려 해도 스승으로서의 모범이 없습니다. 애오라지 완고하고 졸렬하며 눌변이어서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거늘, 어찌하여 좋은 밭에 씨를 뿌리지 않고 이와 같은 하찮은 복을 닦는지요?”
법상이 대답했다.
“밭이 훌륭한지 형편없는지는 성인이라야만 아는 것이다. 나는 보통사람이니 무엇을 취하고 버려야 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보시를 할 수 있으면 하는 것뿐이니 그런 뜻을 일으킨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혜숙이 그 뒤에 선재(禪齋)를 7일 동안 마련했는데 3일 밤에 이르러 대중과 함께 앉아 있다가 대중들이 일어서는데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중들이 함께 살펴보니 돌과 나무같이 딱딱하여 건드려 보아도 움직이지 않으므로 모두가 죽었다고 하였다. 3일 뒤에 일어났고 일어난 뒤에도 보통 때와 같아서 대중들이 바야흐로 그를 기이하게 여기니, 그때서야 비로소 법상이 깊이 보고 잘 이끌어 비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것이 그 앞뒤로도 한둘이 아니다. 법상이 늙어서도 행동거지가 더욱 도타웠으며 나이 90여 세인 원가(元嘉) 말년(453)에 죽었다.

17. 동청원사(東靑園寺) 업수(業首)니전

업수의 본래 성은 장(張)씨로, 팽성(彭城) 사람이다. 풍채와 거동이 우뚝하고 가지런하여 계율의 행실이 맑고 깨끗했다. 깊이 대승(大乘)을 이해하여 미묘한 도리를 잘 이끌어 내었으며 좌선과 염송을 더욱 좋아하여 잠시라도 게으름이 없었다. 송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가 평소 기이하게 여겨 공경하였으며, 문제(文帝)는 어릴 적에 그를 좇아 삼귀(三歸)를 받았는데, 영안사(永安寺)에 머무르니 시주가 계속하여 이어졌다.
원가(元嘉) 2년(425) 왕경심(王景深)의 어머니 범(范)씨가 왕탄(王坦)의 옛 사당 자리를 업수에게 보시하여 절을 일으켜 세우고 청원(靑園)이라 했다. 재(齋) 지내는 것이 엄숙하고 제자들이 풍도와 규범을 매우 갖추고 있었으므로 반귀비(潘貴妃)가 찬탄하였다.
“비구니 업수가 불법을 크게 떨친 것이 심히 공경하고 중히 여길 만하다.”
원가 15년(437) 업수가 다시 절을 넓혀 서쪽에 불전을 창립하고, 다시 절 북쪽을 개척하여 승방을 세우고는 필요한 것을 공급하니 사찰이 크게 일어났다. 대중이 200인이고 불사[法事]가 끊어지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따라 우러르는 이들이 더욱더 많아져서 여러 차례 늙었다고 물러나려 했으나 대중들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 90세인 대명(大明) 6년(462)에 죽었다.
당시에 정애(淨哀)ㆍ보영(寶英)ㆍ법림(法林)이 함께 청결함으로써 몸을 일으켜 세우고 명성을 전국에 떨쳤다. 정애는 오래도록 좌선하고 염송했으며 일에 임하여 맑게 잘하다가 태시(泰始) 5년(469)에 죽었다. 보영은 5층탑을 세웠고, 이치를 더듬는 데 부지런하고 푸성귀만 먹고 정진하다가 태시 6년(470)에 죽었다. 법림은 경과 율을 두루 보아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다가 원휘(元徽) 원년(473)에 죽었다. 또 제자 담인(曇寅)은 선과 율을 아울러 통했고 영화로움을 간결하게 끊어 버려서 조정이나 저자거리의 일에 관여하지 않다가 원휘 6년(478)에 죽었다.

18. 경복사(景福寺) 법변(法辯)니전

법변은 단양(丹陽)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경복사(景福寺) 혜과(慧果)의 제자가 되었다. 충직하고 근실하며 맑고 삼가 평소부터 검소하였다. 떨어진 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었으며 매운 것과 오신채[薰辛]를 먹지 않았다. 고상하고 간결하다는 명예가 일찍부터 서울에 가득했다. 양주자사(楊州刺史) 낭야왕(瑯琊王) 욱(郁)은 몹시 공경하여 예로 대했다.
뒤에 도림사(道林寺) 외국 사문 강량야사(畺良耶舍)를 좇아 좌선의 관법을 여쭈었다. 법과 같이 수행하여 지극히 정밀한 이해에 통하였다. 매양 대중의 자리에 참여하여서는 항상 조는 듯했다. 언젠가 재당(齋堂)에서 대중들이 흩어졌는데 일어서지 않자 유나(維那)가 놀라 건드렸는데 나무와 돌 같았다. 달려 나가 이를 알리자 모두 와서 보았는데, 잠깐 사이에 선정으로부터 나와 말하는 것이 보통 때와 같았으니 대중들이 모두 흠앙하고 감복하여 더욱더 높이 우러르고 중히 여겼다. 대명(大明) 7년(463)에 돌아가니, 나이 60여 세의 일이다.
이보다 이틀 앞서 상정림사(上定林寺) 초법사(超法師)가 꿈속에서 장엄하고 아름다운 어떤 궁성을 보았다. 의복과 장신구의 빛남은 세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남녀의 꾸미개로 그 안이 충만하였다. 오직 성주(城主)만이 보이질 않아서 곧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경복사 법변이 이곳에 태어날 터인데, 내일이면 옵니다.”
법변은 죽던 날에 몸이 흔들리는 것을 깨닫고서 사람을 보내 대중에게 알려, 모든 이들이 모이자 스스로 이야기를 꺼냈다.
“어떤 이상한 사람이 나의 주위로 다가왔는데, 보였다 사라졌다 하여 그림자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하구나.”
말을 마치자마자 앉은 채 숨이 끊어졌다.
그 뒤에 다시 도조(道照)와 승변(僧辯) 또한 정진으로 그 이름이 알려졌다. 도조의 본래 성은 양(楊)시로 북쪽 지역의 서(徐) 땅 사람이다. 나물만 먹고 경을 염송하여 임하왕(臨賀王)으로부터 공양을 받았다.

19. 강릉 삼층사(三層寺) 도종(道綜)니전

도종은 어느 곳 사람인지 자세하지는 않고, 강릉(江陵) 삼층사(三層寺)에서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출중(出衆)해야 된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고, 커서도 남과 같다고 하여 더럽게 여기질 않았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대로 그 도리를 좇아 도리대로 통할 따름이었다. 자취가 비록 이리저리 뒤섞여 있으나 남몰래 제도한 바가 넓었다.
송 대명(大明) 7년(463) 3월 15일 밤 스스로를 기름에 불사르자 이마까지 활활 타올라서 귀와 눈이 일그러졌는데도 염송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찬탄하고 마귀들도 함께 놀라워했다.
온 누리에 풍도가 널리 알려지자 모든 이들이 보리심을 일으켰다. 송 징사(徵士) 유규(劉虯)가 평소 으뜸으로 섬겨 공경하였으므로 그를 위하여 게송을 지어 칭송하였다고 한다.

20. 죽원사(竹園寺) 혜준(慧濬)니전

혜준의 본래 성은 진(陳)씨로,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오성으로 정진하여 같은 또래들을 넘어섰다. 새벽에 문득 향을 사르면서 명상에 잠겼으며 공경히 예불을 올리노라면 때가 한참이나 지나도록 몰랐고, 점심때에는 채소 한 가지만 먹었고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았다. 비록 집에 있더라도 세속을 벗어난 것과 같았으므로 부모가 그 뜻을 떨쳐낼 수가 없었고, 나이 18세에 이르러 도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불경이나 그 밖의 경전이라도 눈을 거친 것은 반드시 암송하였으며 좌선에 깊이 들어가면 그 관법의 비밀함에 반드시 들어가지 않음이 없었다. 조용하면서도 다툼이 없고 화락하면서도 절도가 있었으며 허물없이 오래 사귄 친구들에게도 일찍이 허튼소리를 한 적이 없다.
송 태재 강하왕(江夏王) 의공(義恭)이 평소 추앙하여 공경하였으므로 늘 옷과 약을 공급하여 사계절 내내 빠뜨림이 없었다. 사사롭게 재물을 저축하지 않고 모두를 절을 운영하는 데 썼으므로 죽원사(竹園寺)가 이루어져 세워진 것은 혜준의 공이다. 선미(禪味)를 즐거워하여 늙어도 조금도 쇠약하지 않았다. 72세인 송 대명(大明) 8년(464)에 명을 마쳐 부산(傅山)에 묻었다.
같은 절에 비구니 화(化)가 있었는데 총명하고 영특하며 탁월하게 빼어나 경과 율을 많이 염송하였으며, 나물만 먹고 고행하는 절개가 있었으므로 혜준과 더불어 이름이 나란히 났다.

21. 보현사(普賢寺) 보현(寶賢)니전

보현의 본래 성은 진(陳)씨로 진군(陳郡) 사람이다. 16세에 모친상을 당해 3년을 곡식을 먹지 않고 칡과 토란으로써 양식을 삼았으며 솜옷을 입지 않고 평상이나 자리에 앉지 않았다.
19세에 출가하여 건안사(建安寺)에 머물렀는데 절조 있게 행하고 정밀하게 수련하였으며 널리 선과 율에 통하였다. 송 문황제(文皇帝)가 깊이 예를 더하여 옷과 먹을 것을 공급했으며, 효무제(孝武帝)에 이르러서는 평소에 공경히 접대하여 다달이 일만 전(錢)씩 공급하였고, 명제(明帝)가 즉위하여서는 접대하기를 즐거워하여 더욱더 높이 우러렀다.
태시(泰始) 원년(465) 보현사(普賢寺)에 주지로 임명하고 다음해에는 서울의 승정(僧正)으로 임명하였다. 매우 위엄스런 풍도로서 판단을 밝게 내리는 것은 신과 같았으며, 사물의 이치를 잘 따져 억울한 일을 반드시 풀어 주었고, 아울러 성품이 바르고 굳세고 곧아 남을 기울게 하거나 흔들거나 한 바가 없다.
과거 진(晋) 흥평(興平) 중에 비구니 정검(淨撿)이 비구니의 시작이었으며, 처음으로 구족계를 큰스님으로부터 받았다. 경복사(景福寺)의 혜과(慧果)와 정음(淨音) 등은 구나발마(求那跋摩)에게 자문을 얻었다. 구나발마가 말했다.
“나라에 사부대중 가운데 이부대중이 없어 큰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을 뿐이다.”
혜과 등이 뒤에 외국의 비구니 철살라(鐵薩羅) 등이 이르자 원가(元嘉) 11년(434)에 승가발마(僧伽跋摩)를 좇아 남림사(南林寺) 수계단에서 거듭 구족계를 받았으니, 이것은 먼저 받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계율을 증장(增長)시킨 착한 일임을 말했 뿐이다. 그러나 뒤에 여러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서로 전하고 익힌 것을 성대히 여겨 법전과 제도를 삭제하거나 일그러뜨렸다.
원휘(元徽) 2년(474) 법영(法穎) 율사가 진흥사(晋興寺)에서 『십송률(十誦律)』에 대해 그날 십여 명의 비구니에게 강의하고, 이어서 강의를 마치고 계를 거듭 주려고 하였다.
보현이 이에 승국(僧局)에 사람을 보내 모두 강의하는 자리로 오라고 명령하여, 목탁을 쳐서 여러 비구니에게 명령하여 문득 다시 계율을 거듭 받지 못하게 했다. 만약 햇수를 살펴서 아직 꽉 차지 못한 자는 그 스승이 먼저 응당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참회를 마친 다음에 승국에 이르러야 하고, 승국에서는 허가하되 사람들이 검사를 받아야만 수계를 받게끔 하였다. 만약 어기거나 거절하면 곧바로 내치도록 청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 다음부터는 교만하게 다투어 나가는 것이 잠시 그치게 되었다.
자리에 있으면서 맑고 간결하며 재주가 있었고 아울러 일을 의리에 맞게 잘하였고, 대중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은혜롭게 대하였고, 엄숙하고 욕심이 거의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더욱더 높이 여겼다. 나이 77세인 승명(昇明) 원년(477)에 죽었다.

22. 보현사 법정(法淨)니전

법정은 강북(江北) 사람이다. 나이 이십에 난리를 만나 아버지를 따라 말릉(袜陵)으로 피하여 그곳에서 불교를 익혔다. 법정은 어려서 출가하여 영복사(永福寺)에 머물렀다. 계율의 행실이 맑고 깨끗하며 사리에 밝았고 생각이 깊어 정밀하게 파고들었으며 그윽한 뜻을 깊숙이 더듬었다.
보현(寶賢)과 같은 이름난 비구니와 더불어 어깨를 거의 나란히 하였으므로 송 명황제(明皇帝)가 기이하게 여겨 태시(泰始) 원년(465) 보현사(普賢寺)에 머물도록 명하고 궁궐 안으로 맞아들여 스승 겸 벗으로서 예우하였다. 다음 해에 서울의 도유나(都維那)로 임명하니 일의 처리가 공평하고 바르며 확실하여 매우 빼어났다. 방편을 따라 이끌었으므로 덕으로 교화시키는 것이 물 흐르는 것과도 같았다.
형초(荊楚) 땅의 모든 비구니와 알고 지내는 집안의 부녀자들이 멀리서도 편지와 시주를 보내 서로 알고 지내기를 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의 잘 닦여진 덕의 풍도가 모두 이와 같은 것이었고, 그에게 훈계를 받고 자문을 얻은 이들이 700인이다. 나이 65세인 원휘(元徽) 원년(473)에 죽었다.

23. 촉군 영강사(永康寺) 혜요(慧耀)니전

혜요의 본래 성은 주(周)씨로, 서평(西平)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늘 몸을 살라 불ㆍ법ㆍ승 삼보에게 공양하기를 서원했다. 태시(泰始) 말년(471)에 자사(刺史) 유량(劉亮)에게 말하자, 유량이 처음에는 허락했다. 조처사(趙處思)의 첩 왕(王)씨에게 벽돌로 쌓은 탑[甓塔]이 있었는데 혜요가 그 탑 위에서 몸 사르기를 청하자 왕씨가 허락했다.
정월 보름밤에 여러 제자들에게 기름과 베를 가지고 오라 하고 탑 있는 곳에 이르러, 몸을 꾸며 차리기를 아직 끝내지도 않았는데 유량이 서신을 보내 여러 비구니에게 알렸다.
“비구니 혜요가 몸을 사른다면 영강사(永康寺) 전체가 나란히 중죄를 받을 것이다.”
혜요가 부득이하여 여기에서 곧 그쳤다. 왕씨가 크게 성내며 말하였다.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비구니들이 기이하고 특별한 일을 보이는 것을 삿되게 여겨서 남몰래 유량의 안사람에게 뇌물을 주면서 이와 같은 일을 꾸몄다. 그렇지 않다면 한밤중의 일을 성안에서 어떻게 알겠는가?”
혜요가 말했다.
“작은마님, 번뇌로 들끓지 마시오. 몸을 버리는 것은 내 일인데 방관자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이에 절로 돌아가 곡기를 끊고 향유를 마셔서 승명(僧明) 원년(477)에 절에서 몸을 살랐다. 불이 얼굴까지 이르렀을 때도 경을 암송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여러 비구니들에게 말을 하였다.
“내 유골을 수습하면 딱 두 되가 될 것이다.”
불이 꺼진 다음에 보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몸을 사르기 한 달 전쯤에 스무 살 남짓한 호(胡)나라 승려가 왔었다. 얼굴과 모습은 단정하고 넓적다리에 검게 6치나 7치 정도의 털이 났는데 매우 가늘고 부드러웠다. 누군가가 묻자 통역하는 이가 대답해 주었다.
“예전부터 몸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털이 난 것입니다.”
그러고는 혜요에게 말했다.
“나는 바라나국(波羅奈國)에서 살았고 여기까지 오는 데 며칠이 걸렸습니다. 그대가 사신공양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은단지[銀甖]를 주려고 갖고 왔습니다.”
혜요가 바로 절하며 받았는데 절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사람을 보내 쫓아가 만류하였는데 문 밖을 나서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이 단지에다 그의 사리를 채우니 두 홉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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