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보자] #5952 불성론(佛性論) 4권
불성론(佛性論) 4권
불성론 제4권
천진보살 지음
진제 한역
송성수 번역
4. 변상분 ⑧
9) 무변이품(無變異品)
다시 무변이(無變異)의 의미를 마땅히 알라. 나누면 여섯 가지 의미가 있고, 합하면 세 가지가 된다.
나누면 여섯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란, 첫째 과거세나 미래세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고, 둘째 더러움과 깨끗함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고, 셋째 생기는 데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고, 넷째 유전하는 데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고, 다섯째 의지하거나 머무는 데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여섯째 소멸하는 데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과거세나 미래세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란, 부처님이 해지(海智)보살을 위해 설(說)하신 것과 같은 것이니, 해절경(解節經)의 게송(偈頌)에 이렇게 말하였다.
객진(客塵)과 상응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의 덕(德)이 있기 때문에
과거세와 같이 미래세도 그러하나니
이것이 변하고 달라짐이 없는 모양이네
다시 부정한 지위(不淨位) 가운데 아홉 종류의 객진(客塵)이 있는데, 이 객진이 염오되었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청정한 지위(淨位) 가운데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네 가지 덕과 여래의 항하사(恒沙) 공덕이 항상 상응(相應)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래의 성품은 과거세ㆍ미래세에 변하고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만약에 일체의 번뇌객진을 요약하여 설하면, 모두 아홉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수면(隨眠)인 탐욕 번뇌이고, 둘째는 수면인 진심(瞋)이고, 셋째는 수면인 우치(痴)이고, 넷째는 탐욕ㆍ진심ㆍ우치 등이 가장 중한 최상의 마음 의 번뇌이고, 다섯째는 무명(無明)이 머무는 지위이고, 여섯째는 진리를 보아야 멸해지는 것이고, 일곱째는 수행해야만 소멸되어지는 것이고, 여덟째는 부정한 지위이고, 아홉째는 청정(淸淨)한 지위(地位)의 번뇌이다.만약에 번뇌가 세간의 욕심을 여의는 중생의 상속 가운데 있다면, 부동업의 증장이 그것을 원인으로 삼아 능히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고 출세간의 무분별지가 소멸하는 것이 되니 이것을 이름하여 탐욕ㆍ진심ㆍ우치 등 세 가지 독(三毒)이라 한다.≪해석≫ 이른바 번뇌가 존재하는 데에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그 체(體)가 있기 때문에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고, 둘째 체는 없지만 원인에 근거하기 때문에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체가 존재하는 것이란, 곧 진리를 보는 것이니, 이는 번뇌가 아직 대치(對治)의 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원인에 근거하여 있다고 하는 것은 곧 사유하는 것이니, 이는 번뇌가 이미 그 대처 방법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유 작용은 진리를 보는 것으로써 원인을 삼으니, 사유가 비록 없어졌다 해도 진리를 보는 그것이 있어서 사유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유는 반드시 진리 보는 것으로 의거하여 생겨난다. 그러므로 사유의 원인을 제거하더라도 만약 그 근본인 견제(見諦)의 번뇌가 있다면, 뒤에 다시 사유의 번뇌를 생기게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사유의 원인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그리고 부동업 증장의 원인이란, 첫째 사유가 능히 없을 성립시키고, 둘째 진리를 보는 것이 결과를 얻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유를 모두 끊으면 업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고, 진리 보는 것을 모두 끊으면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동업이 증장의 원인이라고 설하는 것이다.능히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출세간의 무분별지로 소멸되는 것이라고 한다란, 두 가지의 소멸이 있으니, 첫째는 성질이 멸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치하는 도(對道)로써 멸하는 것이다. 첫째의 성질이 멸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찰나 찰나에 멸하는 것과, 서로 어긋나서 멸하는 것이다. 서로 어긋나서 멸하는 것에는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등한 종류로서의 서로 어긋나는 것으로, 탐욕이 성내는 마음과 서로 어긋나는 것과 같고, 둘째는 동등하지 않는 종류로서의 서로 어긋나는 것이니, 바른 생각이 탐욕ㆍ진심 등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이것을 성질이 멸하는 것이라 한다.둘째의 대치하는 도로써 멸하는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전체를 멸하는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멸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도란 것은 진여(眞如)를 관하여 삼계(三界)의 번뇌를 멸하는 그러한 것이고, 둘째 개별적 도란 이를테면, 부정관(不淨觀) 따위가 능히 탐욕ㆍ진심ㆍ우치 따위의 번뇌를 멸하기도 하고, 한편 고제(苦諦)를 관(觀)함으로써 괴로움의 진리의 번뇌는 멸하되 집제(集諦)의 번뇌를 멸하지는 못하는 그러한 것이니, 이 때문에 수면인 탐욕ㆍ진심ㆍ우치 따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 넷째의 세 가지 독이 가장 중한 최상의 마음의 번뇌라고 하는 것은, 그 모든 번뇌의 존재가 탐욕스런 중생이 상속하는 가운데서 죄와 복 두 가지 행이 커지고 자라나는 원인이 되어서 욕계에만 태어나고 이는 부정관(不淨觀)등을 닦음으로써 없어지는 것으로, 이것을 이름하여 탐욕ㆍ진심ㆍ우치가 매우 중한 최상의 마음 번뇌라 한다.다음 다섯째의 무명이 머무는 지위의 번뇌란, 아라한(阿羅漢)이 상속하는 가운데 유전하지 않는 업이 생기는 원인이 되어, 능히 뜻대로 나는 몸(意所生身)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로, 이는 여래의 보리(菩提)에 의해 없어질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을 이름하여 무명이 머무는 지위의 번뇌라 한다. 이 때문에 아라한은 진리에 관한 시각에 근거하고 진리를 세워 모든 번뇌를 없앨 수 있지만, 이 무명이 머무는 지위는 진리관을 세우고 능히 없앨 수 있는 지위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아라한이 상속하는 가운데 존재하여 유전없는 업의 생기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유전 없는 업이 생기는 원인이란, 그 유전에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삼계(三界)의 생사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는 물러나 잃어버리는 것, 혹은 욕계에서 색계로 가거나 혹은 색계의 윤회에서 욕계로 떨어지는 것과 같으니, 곧 생사를 따라 한 곳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유전(流)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공덕의 선근을 벗어나 계정혜를 잃는 것으로, 비유하면 터진 방죽에는 물이 머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세가지 윤회가 없기 때문에 무류(無流) 라고 한다.업이란, 뜻(意)을 일으키는 것으로 의미를 삼으니, 이 의업이 능히 네 가지 생사를 생기게 한다. 여래의 보리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란, 여래의 보리는 비안립제관(非安立諦觀)이니, 이것을 여래의 보리라 한다. 이 도로 인하여 이 번뇌를 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무명이 머무는 지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 여섯째의 진리를 봄으로써 번뇌를 멸하는 자란, 두 종류의 배우는 사람으로서 첫째 범부이고 둘째 성인이다. 이 번뇌는 도를 배우는 범부의 상속가운데에서 무시이래로 아직 일찍이 이법을 보지 못하였으나 최초의 성인의 도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므로, 이를 이름하여 진리를 보는 것이라 한다.≪해석≫ 도를 배우는 범부의 상속 가운데란 것은 만약에 소승(小乘)의 경우라면, 난ㆍ정ㆍ인ㆍ세 (亂頂忍世)의 법인의 네 가지 진리가 바로 도를 배우는 범부의 지위라서 진리를 보는 그 번뇌를 아직 멸할 수 없기 때문에 상속하는 가운데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시이래로 보지 못했다는 것은, 무시이래로 이 도(道)에 이르기까지 안립된 성인의 도를 일찍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찍 볼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최초의 출세간의 성도에 의해 파괴된다고 하는 것은, 고법인(苦法忍)을 처음 생각하는 도(道)로부터 번뇌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견제(見諦)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후는 모두 사유(思惟)평등관에 속하는 것으로, 영리한 사람도 있고 우둔한 사람도 있느니라. 만약에 영리한 사람이라면, 한 생각으로 네 가지 진리를 평등히 관찰하여 여든 여덟 가지 의혹을 한꺼번에 다 끊을 수 있는 것으로, 모두 견제(見諦)라고 한다. 만약에 우둔한 근기의 사람이라면, 그 차례대로 관찰하기 때문에 처음 생각에 괴로움의 진리는 관찰하지만, 나머지 세 진리는 보지 못하니, 괴로움 이하의 네 진리만을 끊더라도 진리를 보는 것이라 하겠고, 그 나머지 끊지 못한 것은 다 사유(思惟)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을 일러 진리를 보아야만 의혹을 끊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대승(大乘)의 경우라면, 십신(十信) 등 모든 지위이다. 성인이란 곧 초지(初地) 이상의 지위이다.다음, 일곱째의 수행으로 소멸되는 번뇌란, 도를 배우는 성인의 상속가운데 있는 것이다. 예전에 이미 일찍이 출세간인 성인의 도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니, 이것을 수행으로 소멸되는 번뇌라고 한다.
다음, 여덟째의 이른바 부정한 지위의 번뇌란, 아직 궁극적 행위에 있지 않은 보살의 상속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살의 칠지(七地)에 장애를 일으키나니라. 이는 무상(無相), 무공용(無功用)으로 장애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해석≫ 칠지란 것은 곧 앞의 칠지 이하이고, 무상, 무공용의 도라는 것은 곧 팔지(八地) 이상이니, 상이 없는 것은 바로 진여(眞如)의 경지이고, 공용이 없는 것은 바로 저절로 나아가는 도이,. 이것을 이름하여 부정한 지위의 번뇌라 한다.
다음, 아홉째의 이른바 청정한 지위의 번뇌란, 이 번뇌가 구경의 행위(究竟行)에 있는 보살이 상속하는 가운데 존재하여 능히 팔지(八地) 이상의 세 지위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금강(金剛)같은 선정과 지혜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다. 구경(究竟)이란 것은, 팔지 이상으로서 그 보는 경계가 다 두루하며 다시 개별적 경계도 보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구경이라 한다. 다만 방편에 있어 얕거나 깊음이 있고 모든 계위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번뇌를 분별하면 이 아홉 종류가 있는 것이다.이 번뇌에 근거하여 중생을 분류한다면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범부이고, 둘째는 아라한(阿羅漢)이고, 셋째는 유학(有學)이고, 넷째는 보살이다. 이 네 종류의 중생은 다 유전없는 경계에 의지하고 네 가지 번뇌로 말미암아 부정(不淨)한 것이다. 첫번째의 중생은 네 가지 번뇌로 말미암아 부정하고, 두번째의 중생은 한 가지 번뇌로 말미암아 부정하고, 세번째의 중생은 두 가지 번뇌로 말미암아 부정하고, 네 번째의 중생은 두 가지 번뇌로 말미암아 부정하다. 첫번째의 범부가 네 가지번뇌에 근거하는 것이란, 앞의 세 가지는 수면인 탐ㆍ진ㆍ치 등의 번뇌이고 뒤의 하나는 최상의 마음의 번뇌이니, 이 네 가지로 말미암아 부정한 것이다. 두번째의 한 가지 번뇌에 근거하는 것이란, 곧 아라한이 무명이 머무는 지위로 인하여 그 때문에 부정한 것이다. 세번째의 두 가지 번뇌에 근거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진리를 보거나 사유(思惟)하는 곧 배움이 있는 성인과, 범부로서 도를 배우는 자이니, 범부는 진리를 보는 그 번뇌 때문에 부정하고 배움이 있는 성인은 사유하는 그 번뇌 때문에 부정한 것이다. 이것을 일러 두 가지 번뇌로 말미암아 의혹하는 것이라 한다. 네번째의 두 가지 번뇌에 근거하는 것이란, 청정과 부정을 말하는 것이니, 곧 초지(初地)로부터 그 이상 칠지(七地)까지의 보살은 부정한 지위의 번뇌때문에 부정하고, 팔지(八地)로부터 그 이상 삼지(三地)까지의 보살은 청정한 지위의 번뇌 때문에 부정한 것이다. 이것을 일러 두 가지 번뇌로 인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부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다시 이 아홉 가지 번뇌를 나타내기 위해 아홉 가지 비유를 든다면, 첫째 탐욕의 번뇌를 나타내기 위해 연꽃에서 화생하는 부처님의 비유를 드니, 마치 연꽃이 처음으로 피어날 적엔 매우 아끼고 좋아할만 하다가도 뒤에 가서 시들고 초라해지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처럼, 탐욕도 또한 그러하다. 처음에 대상(塵)을 의지하여 생겼다가 뒤에 대상에 의해 무너지나니, 이 때문에 꽃을 가지고 탐욕에 비유하는 것인데, 그 꽃이 무너질 때에 화생한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는 것은 마치 탐욕이 법신(法身)을 덮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 진심(瞋)의 번뇌를 나타내기 위해 벌(蜂)로써 비유로 삼으니, 마치 벌이 남을 만나면 독(毒)을 내어 사람을 쏘는 것처럼 성내는 것도 이와 같다. 만약마음에 성냄을 일으키면, 곧 스스로를 해치고 다시 남을 해칠 수 있으니, 단맛이 있는 꿀을 곧 법신에 비유하는 것은 그 법신이 진심에 덮혔기 때문이다. 셋째 무명(無明)의 번뇌를 나타내기 위해 껍질 속의 멥쌀(粳)를 비유로 든다. 마치 흰 멥쌀이 겨(糖)에 덮혀 있기 때문에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법신도 또한 그와 같다. 무명의 껍질에 덮혔기 때문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상심(上心)의 세 가지 번뇌를 나타내기 위하여 금(金)이 부정한 곳에 떨어진 비유를 든다. 마치 정결한 금 보배가 더러운 똥에 묻혀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처럼, 욕심을 여읜 사람도 또한 그와 같다. 상심(上心)의 번뇌가 그 뜻을 어기기 때문에 이 비유를 설하는 것이니, 본래 청정한 법신이 상심(上心)의 번뇌로 덮혔기 때문이다.다섯째 무명이 머무는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빈궁한 여인의 보배 창고(寶藏)의 비유를 든다. 마치 빈궁한 여인의 집 땅 속에 금 보배의 창고가 있는데, 그것이 땅에 묻혀 있기 때문에 빈곤의 고통을 받는 것처럼, 2승(乘)들도 또한 그렇다. 무명에 덮혀서 불과(佛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네 가지 생사의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여섯째 견제(見諦)의 번뇌를 나타내기 위해 맹고(菴羅果)나무 종자의 비유를 든다. 마치 맹고와 종자가 싹(芽)을 낼 때에는, 반드시 그 껍질을 깨뜨린 연후에 싹이 나올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껍질은 견제(見諦)에 비유하고, 싹은 법신에 비유한 것이니, 진리를 보는 것도 또한 그렇다 .처음 진리를 볼 때에는, 곧 이러한 번뇌를 깨뜨린 뒤에라야 법신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곱째 사유의 번뇌를 나타내기 위해 해진 비단으로 금 보배를 싸는 비유를 든다. 마치 떨어진 옷을 입을 수 없는 것처럼, 신견(身見)에 대한 진실은 이미 이전에 파괴되어 이것을 다루는 성인의 도를 자주자주 익히기 때문에 사유번뇌가 다시 세력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저 떨어진 옷에 싸인 금 보배가 마치 법신이 사유의 번뇌에 장애되는 것과 같은 것을 비유하는 것이다.여덟째 부정한 지위의 번뇌를 나타내기 위하여 빈궁한 여인이 왕자를 임신한 예를 든다. 마치 전륜성왕의 아들이 빈궁한 여인의 뱃속에 있을 때, 그 태가 더럽혀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칠지(七地)이전의 번뇌도 그와 같아서, 비록 번뇌라고 하지만, 세 가지 덕이 있다. 첫째 더럽고 탁하지 않은 지혜와 자비가 함양(含養)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과실(過失)이 없어서 자타(自他)를 다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이고, 셋째 한량없는 공덕이 능히 불법과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만약에 번뇌를 기른다면, 곧 범부가 되어 불법을 성숙케 할 수 없고, 만약에 번뇌를 끊는다면, 곧 2승(乘)이 되어, 중생을 성숙케 할 수 없다. 아홉째 청정한 지위의 번뇌를 나타내기 위하여 틀 속의 금상(金像)비유를 든다. 마치 주조된 금상이 아직 틀을 열지 않았을 때, 상이 이미 성숙되어 물 등의 여러 물질이 파괴할 수 없고 오직 도끼 등으로만 파괴할 수 있는 것처럼, 팔지(八地) 이상의 번뇌도 또한 이와 같으니, 금강(金剛)의 마음만이 그 끝까지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세 가지 자성(自性)에 근거하여 마음의 청정한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그 이름을 여래장이라 하고, 또 이 때문에 연꽃 등 아홉 가지 비유를 설하는 것이다.세 가지 자성이란, 첫째가 법신이고, 둘째가 있는 그대로의 진리(如如)이고, 셋째가 불성이다. 이 아홉 가지 비유를 합하여 세 가지로 한다면, 맨 처음의 세 가지 비유는 법신이고, 그 다음의 한 가지 비유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이고, 뒤의 다섯 가지 비유는 불성이다. 어째서 이와 같다고 하는가?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밝히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바르게 얻는 것이고, 둘째는 바르게 설하는 것이다. 바르게 얻는 법신이란 것은 가장 청정한 법계이니 이는 무분별지의 경계이고, 모든 부처님의 당체는 스스로 얻는 법이고, 둘째의 바르게 설하는 법신이란 것은, 청정한 법계로부터 바로 흘러나와서 진여에 따라 교화된 중생의 식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것을 바르게 설하는 법신이라 한다.바르게 설하는 법신은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깊고도 묘한 것이고, 둘째는 거칠고도 얕은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도리(道理)를 세우기 위해서이니, 첫째의 깊고도 묘한 것은 대승(大乘)의 도리를 세우기 위해서이고, 둘째의 거칠고도 얕은 것은, 2승(乘)의 사람들에게 이 도리를 설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제일의제(第一義諦)는 보살의 아주 깊은 법장(法藏)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이는 곧 진여와 세속의 두 진리를 묶어서 2승의 12부(部) 등 갖가지 법장을 세우는 것이다.≪해석≫ 첫째의 바르게 얻는 법신이란, 체(體)가 진여이니, 세간에 비유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다시 꽃 속의 불상(佛像)을 취하여 비유를 삼은 것이다. 둘째의 바르게 설하는 깊고도 묘한 법신이란 것은, 진여는 다 하나의 맛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벌(蜂)의 꿀을 취하여 비유를 삼은 것이다. 셋째의 거칠고도 얕은 바르게 설하는 법신이란 것은, 진여와 세속의 여러 가지 의미(義味)를 나타내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겨(糖) 속의 쌀을 취하여 비유를 삼은 것이다. 이 세 가지 비유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의 그 바르게 얻는 법신과 바르게 설하는 법신을 나타낸 것은 이 세 가지 법신이 두루 가득하여 일체 중생계를 남김없이 다 거두어 담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경에서 설하기를, “어떤 중생도 여래의 법신 바깥을 벗어나는 일이 없는 것이, 마치 어떤 물질도 허공 바깥을 벗어나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다음, 금이 부정한 곳에 떨어진 하나의 비유는, 마치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세 가지 뜻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금을 취하여 비유를 삼은 것이다. 첫째는 그 성품이 변하고 달라지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그 공덕이 무궁한 것이며, 셋째는 그 청정한 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성이 또한 그러하여 변하고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며, 공덕이 또한 그러하여 더하거나 덜함이 없기 때문이며, 청정함이 또한 그러하여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진여라고 하는 것이다. 이 진여는 일체 사정취(邪定聚)의 중생이나 또는 일천제 중생들에게 있어서도 본래 차별이 없다. 만약에 객진이 다 멸한 뒤에는, 이를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때문에 일체 중생도 여래장이 될 수 있지만, 여래를 감추어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 둘이 없는 청정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기를, “문수사리여, 모든 부처님은 이미 나(我)에 대한 집착을 근본적으로 벗어났도다. 이 자성이 청정하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다 청정한 것이니, 이 자성의 청정함과 중생들의 청정함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이 자성과 중생의 같음을 나타내기 위해 금 보배의 비유를 설한 것이다.그리고, 뒤의 다섯 가지로 불성을 비유한 것은 그 불성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에 머무는 불성이고, 둘째는 끌어내는 불성이다. 모든 부처님의 세 가지 몸이 이 두 가지 성품으로 인하여 성취되기 때문에 자성에 머무는 성품을 나타내기 위해서 땅 속에 있는 보배 창고의 비유를 설한 것이다. 이 자성에 머무는 불성이란, 여섯 가지 덕이 있기 때문에 보배 창고와 같다. 첫째는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이다. 불성도 또한 그러하니, 무수한 시간에 걸쳐 정근(正勤)의 마음을 일으켜 복덕과 지혜를 만족시키고 장엄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에 여의 보배(如意寶)의 창고에 비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뛰어난 원인으로 말미암아 초감되는 것이다. 둘째는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는 것이다. 불성과 번뇌가 서로 물들지 않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여의 보배가 부정한 것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셋째는 위신(威神)이 무궁한 것이다. 이것은 여섯 가지 신통(六神通) 등 공덕의 원만함을 밝히기 때문이니, 여의 보배가 또한 그러하여 뜻대로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보배 창고의 비유를 설한 것이다. 넷째는 장엄할 수 있는 것이다. 일체 세간의 공덕의 선근은 모든 곳에서 드러날 수 있으니, 여의보배도 또한 그러하여 세간의 여러 가지 장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다섯째는 가장 뛰어난 것이다. 일체 법 가운데에서 동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니, 또한 여의 보배가 모든 물건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과 같기 때문에 보배 창고를 설하여 비유로 삼은 것이다. 여섯째는 여덟 가지 세간 법 가운데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열 가지 종류의 상주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진짜 보배도 또한 그러하여 비록 태우고 때리고 갈아도 그 자성만은 고칠 수가 없기 때문에 보배 창고를 취하여 자성에 머무는 불성을 비유한 것이다. 둘째의 인출(引出) 불성이란, 초발의로부터 금강심(金剛心)에 이르기까지의 불성을 이름하여 인출(引出)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인출(引出) 불성에 모두 다섯 가지 지위가 있다. 첫째는 능히 일천제(一闡提)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둘째는 외도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셋째는 성문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넷째는 독각(獨覺)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다섯째는 보살의 무명이 머무는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법신이 번뇌의 껍질을 깨뜨림으로써 그 본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음, 여섯째의 이른바 맹고 나무(菴羅果樹)의 싹을 설하여 비유를 삼은 것은, 저 나무의 싹이 능히 겉껍질을 깨뜨리고 나올 수 있어서 큰 나무가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인출(引出) 불성을 설하는 것도 저 맹고 나무 싹이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원인에 근거하여 부처님께서 삼신의 결과를 설하신 것이다.
첫째 자성에 머무는 불성에 근거하여 법신을 설하였는데, 법신에 네 가지 공덕이 있다. 이 때문에 일곱째에서 해진 비단에 싸인 진짜 금(眞金) 비유를 설한 것이다. 그 네 가지 공덕이란, 첫째는 자성이 있는 것이니, 마치 금이 본래 있는 것이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둘째는 청정한 것이니, 마치 금이 본래 청정한 것과 같다. 셋째는 일체 공덕이 의지하는 곳이 되는 것이니, 마치 금이 갖가지 귀한 물건을 가지고 올 수 있는 것과 같다. 넷째는 평등하게 얻는 것이니 이를테면, 일체 중생이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는 것이어서, 마치 금이 일정한 주인이 없고 모든 사람의 공동 소유인 것처럼 그 공력(功力)에 따라 닦는 자는 곧 얻기 때문에 법신이 마치 진금 같다고 설한 것이다. 둘째 인출불성으로 인하여 응신(應身)을 설한 것도, 그 응신에 네 가지 공덕이 있으니, 이 때문에 여덟째에 가서 빈천한 여인이 전륜성왕을 임신한 비유를 설한 것이다.네 가지 공덕이란 첫째는 의지하는 것이니, 의지하는 것이란, 삼십칠도품에 의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바르게 생기는 것이니, 얻고자 하면 마땅히 얻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아직 탐욕을 모르고 근본을 아는 것이다. 셋째는 바르게 머무는 것이니, 바르게 얻는 그것이 곧 근본을 아는 것이다. 넷째는 바르게 수용(受用)하는 것이니 곧 자기의 근본을 아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이치를 합하여 응신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마치 모태 속의 전륜왕자가 역시 네 가지 의미를 가진 것과 같으니, 첫째는 과거세의 업으로써 그 의지를 삼고, 둘째가 아직 얻지 못한 왕의 지위를 얻고자 하는 것이 처음 태어났을 때와 같고, 셋째는 왕의 지위를 바르게 얻어, 머무는 것과 같고, 넷째는 얻고 나서 잃지 않는 것이 수용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응신을 모태 속에 있는 전륜왕으로써 비유를 삼은 것이다.셋째 인출불성으로 인하여 다시 화신(化身)을 내는 것은, 그 화신이 세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모양이 있는 것이니, 물속의 달처럼 그 그림자의 모양으로써 체(體)를 삼기 때문이다. 둘째는 공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과거의 원력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셋째는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홉째에서 틀 속에 있는 불상으로써 비유를 삼는 것이다.≪해석≫ 세 가지 의미란, 첫째 그 모양이 마치 달의 그림자가 다만 비슷할 뿐이고 진실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화신(化身)도 또한 그러하여 진실한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의 공력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것이, 마치 화신이 과거에 원했던 것에서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셋째 시종(始終)을 밝히는 것이란, 마치 화신이 인연을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처음이 있고 끝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다시 세 가지 뜻으로써 이 삼신(三身)을 나타내는 것이다. 첫째는 아주 깊은 뜻으로써 법신을 나타내는 것이니, 아주 깊은 것이란, 그 체가 미세하기 때문이고, 또 이 때문에 이 법신이 다섯 가지 모양과 다섯 가지 공덕을 갖춘 것이다. 다섯 가지 모양이란, 첫째는 무위상(無為相)이니, 태어나고 늙는 등의 네 가지 모양의 과실(過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모양이니, 진제와 속제가 같지도 다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법에 근거하여 변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에 근거하여 논하는 것이다. 첫째의 법에 근거하여 변론하는 것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하는 것은, 진여는 공통하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할 수 없고, 세속의 차별 때문에 같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니, 마치 소라(螺)와 흰색에 있어서 그 소라와 색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것과 같다. 만약에 다르다고 말한다면, 소라의 흰 색을 취해 볼 적엔 마땅히 소라라는 인식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만약에 같다고 말한다면, 냄새와 맛과 감촉이 다르지 않으므로 다만 색뿐이어야 할 것이다. 둘째의 사람에 근거하여 진리와 세속을 변론하는 것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것은, 만약에 진리와 세속이 같다면, 범부로서 세속을 보는 것도 곧 진리와 통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니, 만약에 진리와 통하는 것이라면, 이는 성인이어야 할 것이다.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같지 않은 줄을 아는 것이다. 만약에 다르다고 한다면, 성인으로서 세속을 볼 때에도 진리와 통하지 못할 것이니, 만약에 진리를 통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범부가 보는 것이 성인이 보는 것이기 때문에 다를 수 없고, 그러므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것이다.세 번째는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여읜 모양이니, 여섯 종류의 중도(中道)가 있기 때문에 여섯 종류의 두 가지 치우침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여섯 종류인가? 첫째 멸할 것과 멸함에 집착하는 것이고, 둘째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함에 집착하는 것이고 셋째 집착할 것과 집착함에 집착하는 것이고, 넷째 바름과 삿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다섯째 지음이 있음과 지음이 없음에 집착하는 것이고, 여섯째 나지 않음과 같이 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첫째의 멸할 것과 멸함에 집착하는 것이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일체 법은 결국 멸할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하나의 치우침이고, 결국 다 멸하는 것을 공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또 하나의 치우침이니, 이 두 가지 치우친 집착으로 인하여 두려움을 내게 된다. 이 두 가지 치우친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모든 법은 있지 않기 때문에 멸할 수 없고, 없지 않기 때문에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 멸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것을 중도라고 하느니라.”라고 하셨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이 허공의 비유를 드신 것이다.또 이 때문에 보정경(寶頂經)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가섭(迦葉)아,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허공을 두려워하여 가슴을 치고 부르짖으면서 말하기를, ‘착한 벗이여,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이 허공을 제거해 다오. 이 허공을 제거해 다오’라고 한다면, ‘가섭아, 네 생각엔 어떠냐? 이 허공을 제거할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가섭은 사뢰었다. ‘제거할 수 없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가섭아, 만약에 이러한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이 성품의 공함을 두려워한다면, 나는 이 사람들을 제 정신이 아닌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섭아, 일체 법에서 모두 공을 설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거늘, 만약에 이 공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일체 법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만약에 일체법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이 공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문】이 경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까?
【답】일체 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근본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이 공하다는 것을 설하는 것이고, 법이 멸한 연후에 공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이 때문에 공한 성품에 두려움을 내지 않는 그것을 이름하여 멸할 것과 멸하는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는 것이라 하나니, 이는 곧 멸하는 것과 멸할 것이 아닌 그 중도를 나타내는 것이다.둘째의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함에 집착하는 두 가지 치우침이란, 분별하는 성품으로써 일으키는 색 등의 여섯 가지 대경(六塵)에 집착하여 이것을 진실한 괴로움(實苦)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의 치우침이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또 하나의 치우침이니, 이는 남에게 의지하는 성품과 분별에 집착하는 성품으로 인하여 그것에 대하여 실로 괴로움이 있다고 계탁함으로써 두려움을 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치우친 집착을 여의게 하고 중도를 나타내기 위해 부처님께서 화공을 비유로 삼아 설하시기를, “가섭아, 마치 화공이 나찰(羅刹)의 형상을 그릴 때, 그 형상이 아주 두려워할만한 것이어서 화공이 그 형상을 보고는, 스스로 겁을 내어 얼굴을 덮고서 감히 보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은 미치광이 짓을 하는 것처럼, 가섭아, 이와 같이 범부도 자기가 만든 색등의 대경(塵)으로 말미암아 생사에 유전함으로써 이러한 법에 대한 참다운도리를 통달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 비유는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색 등의 모든 대경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허망한 생각으로써 분별하여 일으키는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마치 저 화공이 스스로 분별하여 나찰의 험악한 형상을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보고 도로 겁을 내는 것처럼, 이 사람도 그러하여 스스로가 공에 대하여 두려움을 내는 것이다.≪해석≫ 맨 처음의 한 비유는 성문의 소승(小乘)에 대하여 설한 것이고, 이 두 번째의 비유는 대승(大乘)에 대하여 설한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소승의 사람들은 진여를 자주 닦아 익히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내고, 대승의 사람은 아주 자주 공를 닦아 익히기 때문에 두려움을 내지 않는 것이니, 마치 사자 새끼가 사자의 부르짖음을 듣고도 겁과 두려움을 내지 않는 것과 같다. 분별하거나 남에게 의지하는 두 가지 성품을 깨닫지 못하고서 실로 있는 것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그 더러움에 물들게 되는 것이다.셋째의 집착할 것과 집착하는 두 가지 치우침이란, 집착할 것과 집착하는 것을 분별하여 실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 부처님께서 환술하는 사람을 비유로 삼아 설하시기를, “가섭아, 마치 환술하는 사람이 모두 허수아비 형상을 만드는데, 그가 만든 호랑이 따위가 도로 환술한 사람을 잡아 먹는 것처럼, 가섭아, 이와 같이 관행하는 비구도 한 가지 경계를 관함에 따라 공한 것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실로 아무 것도 없고 허망하여 진실로 없느니라.”고 하셨다. 어떻게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읠 수 있는가? 의식(意識)에 의지함으로써 유식(唯識)의 지혜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유식의 지혜란 곧 대경의 체(塵體)가 없는 지혜이니, 이 유식의 지혜가 생긴다면, 도로 자신의 본래 의식을 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경은 체가 없기 때문에 의식이 생기지 않고 의식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유식도 저절로 없어지나니, 의식은 환술하는 사람과 같고 유식은 허수아비 호랑이와 같은 것이다. 의식으로써 능히 유식을 생기게 하기 때문에 유식의 관이 성립되면, 이 유식이 도로 의식을 멸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대상 등이 없기 때문에 의식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마치 허수아비 호랑이가 환술하는 사람을 도로 먹는 것과 같다. 제바 법사(提婆法師)가 게송을 읊어 말하기를,
의식은 세 존재(三有)의 근본으로
모든 대경(塵)은 그 원인이라
만약에 대상에 체가 없음을 본다면
여러 존재는 자연히 없어질 것이네
넷째의 삿되고 바른 두 가지 치우침이란, 바른 것은 통달위 가운데에서 진실히 관행(觀行)하여 분별하는 것을 바른 것이라 하고, 아직 통달하기 이전에 분별하는 것을 삿된 것이라 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없애기 위해 두 나무를 가지고 불을 붙이는 것으로 그 비유를 삼는 것이다. 경에서 설하기를, “가섭아, 마치 두 나무가 서로 마찰하면, 불을 붙일 수 있으니, 불이 붙을 적에 도로 그 자체의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이와 같이 바른 모양으로 진실히 관행하여 삿된 것을 다루어서 성스러운 지혜의 뿌리가 생기고, 지혜의 뿌리가 생길 때에는 다시 삿되고 바른 두 가지 분별을 제거하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셨으니, 이는 마치 불이 붙어서 두 나무를 다시 태울 때에, 두 나무가 만약 다 타면, 그 불이 역시 의지할 데가 없는 것처럼, 삿되고 바른 것, 이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중도라고 말하는 것이다.다섯째의 지음이 있고 지음이 없는 두 가지 치우침이란, 지음이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집착하여 말하기를 “지혜를 닦으려면 반드시 먼저 뜻을 품은 연후에야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지음이 없는 것이란, 어떤 사람이 집착하여 말하기를, “지혜란 하는 일도 없고 능력도 없나니, 왜냐하면 이해(解)와 번뇌가 상대하기 때문이니, 이해가 생기기 때문에 자연히 번뇌가 사라지는 것이고 이해가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란 하는 일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게 하기 위해 기름등(油燈)으로 비유를 삼는 것이니, 경에 설하시기를, “가섭아, 마치 등불을 켤 때에, 등불 빛이 이미 있으면 어두움이 곧 없어지는 것처럼, 저 등불 빛이 비록 의도하여 어두움을 멸하고 어두움이 나로 말미암아 멸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반드시 빛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이 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등불 빛이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하는 일과 능력이 없지 않은 것처럼, 지혜도 또한 그러하여 ‘내가 능히 번뇌를 멸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지혜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번뇌가 제거되고 멸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지혜가 그 하는 일과 능력이 없지 않는 줄을 알라.”고 하셨다.만약에 작정하여 ‘내가 능히 번뇌를 없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증익(增益)이라고 하니, 곧 지음이 있는 치우침이고, 만약에 ‘지혜가 일어날 때에 무명(無明)이 저절로 없어지고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손감(損減)이라고 하니, 곧 지음이 없는 치우침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없애기 위해 ‘지혜가 생기는 것은 작의(作意)하는 것도 아니고 작의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익하지 않고 짓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손감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여섯째의 불생(不生)과 동생(同生)의 두 가지 치우침이란, 첫째 불생의 집착이란, 비유하면 마치 범부의 상속 중에는 번뇌가 항상 일어나 아직 일찍이 도가 생기지 않는 것과 같이, 번뇌가 장애하기 때문이니, 미래도 또한 그러하다. 이 때문에 영원히 해탈하지 못한다고 알라. 이것이 하나의 치우침이고, 둘째 동생(同生)이라는 것은, 지혜와 모든 번뇌는 무시이래 오랫동안 본래 있어 왔던 것이다. 만약에 대치(對治)하는 도가 번뇌와 함께 생긴다면, 번뇌를 능히 멸할 수 있고, 만약 대치도가 처음 생겨 이 도의 힘이 약하면, 번뇌를 멸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영원히 해탈하지 못하는 줄을 알라. 이 두 가지 극단을 없애기 위하여,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두 번째 등불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가섭아, 마치 험하고 어두운 산 바위나 묘당(廟堂), 방사(房舍)에 수 천년동안 어두움이 있어도 아직 일찍이 등불을 켜서 비추는 사람이 없었는데, 설령 어떤 사람이 그 속에 등불을 켠다면 등불이 켜질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대답하여 사뢰기를, “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섭아, 이 속의 모든 어두움이 생각하고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머문 지가 이미 오래이기 때문에 나는 이제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 어두움들이 이러한 생각을 능히 행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하면, 빛이 있게되면, 어두움이 떠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섭아, 이와 같이 번뇌와 업도 무수한 겁(劫)으로부터 중생들의 상속 가운데 있는 것이다. 만약에 한 찰나에라도 바른 생각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오랜 겁의 번뇌가 모두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가섭아, 이 등불의 빛은 비유하면 곧 성인의 무분별지이다. 캄캄한 어 어두움은 곧 중생들의 번뇌와 업에 비유한 것이다.”라고.이 등불의 비유로 말미암아 도가 생기지 않는다는 집착을 깨뜨린 것이니, 왜냐하면 도는 인연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인연이 모이지 않으면, 도가 생길 수 없고, 인연이 갖춰지면 도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니, 마치 등불을 켠 뒤에라야 바야흐로 어두움이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고, 어두움이 없어지는 비유는 동시에 생긴다는 집착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어두운 쪽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전도(無顛倒)의 경계이기 때문에, 결백과 청정은 가장 강한 것으로 진실한 경계로서 전도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여섯 종류의 두 가지 극단을 없애고 여섯 종류의 중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다음은 장애를 여읜 모양이 그 넷째이니, 장애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번뇌의 장애이니, 이 장애를 여읠 수 있어야 혜해탈의 아라한(阿羅漢)이 될 수 있다. 둘째 선정의 장애이니, 이 장애를 없앰으로써 혜해탈과 심해탈을 얻은 아라한과 독각(獨覺)이 될 수 있다. 셋째 일체 지혜의 장애이니, 이 장애는 보살도로써 깨뜨릴 수 있으니, 이 장애를 여의여야 정각(正覺)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의 법신은 이 세 지위에 있어서 비록 세 가지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다.다섯번째 법신계의 청정한 상이란, 모두 네 가지 비유가 있고, 비유마다 네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의 네 가지 뜻이란, 법신이 바뀌지 않는 것이 금과 같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如如)의 청정함이 물과 같고, 제일의제가 상이 없는 것이 허공과 같고, 큰 반열반(般涅槃)이 나타나는 것이 깨달음과 같다. 두 번째의 네 가지 뜻이란, 신통이 바뀌는 것이 금과 같고, 자비의 윤택함이 물과 같고, 자성(自性)이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 허공과 같고, 반야(般若)의 지혜 청정함이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며, 세 번째의 네 가지 뜻이란, 근본적으로 청정하기 때문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 금과 같고, 뛰어난 도로 씻는 것이 물과 같고, 해탈에 더러움이 없는 것이 허공과 같고, 과체(果體)가 나타나는 것이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네 번째의 네 가지 뜻이란, 즐거운 성품의 이익됨이 금과 같고, 청정한 체(體)가 맑고 깨끗한 것이 물과 같고, 항상하는 공덕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허공과 같고, 나(我)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다.【문】이 다섯 가지 모양이 각각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답】처음의 무위상이란? 종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의 법신은 무위로써 그 종류의 모양을 삼기 때문이다. 둘째의 다름이 없는 것이란, 모양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여래의 모양을 밝힌 것이니, 여래의 모양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것으로 상을 삼기 때문이다. 셋째의 두 가지 극단을 여읜 모양이란, 발과 발등(跋)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발이란 곧 보살의 일체 성스러운 도(聖道)이고, 발등이란 그 성스러운 도가 의지하는 곳이다. 두 가지 극단을 여의고 능히 중도의 이치에 의지하여 법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의 일체 장애를 여읜 모양이란, 법신의 공덕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모든 번뇌가 없어서 지혜의 장애를 아주 건넜기 때문이다. 다섯째의 청정한 법신의 모양이란, 그 법신의 과(果)를 나타낸 것이니, 때(垢)가 없어서 맑고도 고요하기 때문이다.다시 다섯 가지 상의 순서의 뜻을 마땅히 알라. 처음의 무위상이란, 상주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두 번째의 차이가 없는 상이란, 진실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 번째의 두 가지 극단을 여의는 상이란, 대치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네 번째의 모든 장애를 여의는 상이란, 해탈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섯 번째의 법계청정이란, 자성청정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이 생기니, 또한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얻을 수 있다.
다시 다섯 가지 모양의 순서란, 첫째의 것은 자성(自性)이기 때문에 무위라고 하고, 둘째의 것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고, 셋째의 것은 성스러운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에 두 가지 극단을 여의었다고 말하고, 넷째의 것은 자성이 청정하기 때문에 일체 장애를 여의었다고 말하고, 다섯째의 것은 궁극적 성취이기 때문에 법계청정이라고 말하니, 이것을 다섯 가지 모양이라고 한다.다시 이른바 다섯 가지 특징이란, 첫째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고, 둘째는 셀 수 없는 것이고, 셋째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넷째는 견줄 것이 없는 것이며, 다섯째는 궁극적 청정이다. 첫째의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시간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용(功用)이 크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것이고, 셋째는 남거나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것이고, 네 번째는 중간이 없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사리불(舍利弗)에게 질문하신 것과 같으니,
“‘사리불아, 너는 여래의 공덕을 헤아려 통달할 수 있겠느냐?’ 사리불이 사뢰기를, ‘그럴 수 없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또 물으시기를, ‘너는 어떻게 여래의 공덕을 믿을 수 있었느냐?’ 사리불이 사뢰기를, ‘저는 이제 성문(聲聞)을 의지하여 여래의 계율 등의 공덕을 관하여 보건대 희유(希有)한 생각을 내지 않는 데가 없는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하늘의 동산의 길을 다니면서 보배로 장엄된 나무들을 보고 희유한 마음을 내는 것처럼 저도 이제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또 마치 어떤 사람이 큰 성(城) 밖에 있으면서 저 모든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가련하게 여겨지지 않는 곳이 없어서 생각하기를, 이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가 가련 하구나 라고, 하는 것처럼, 저도 그와 같이 성문을 의지하기 때문에 능히 여래의 계율 등 공덕을 보고서 희유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는 것은 믿어 알기 때문이옵니다.’”라고 하였다.그리고 둘째의 셀 수 없는 것이란, 이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하나라고 하겠는가?, 많다고 하겠는가?. 그 수가 무궁하여 항하사(恒沙) 수보다 더 많으니, 마선행경(馬先行經)의 게송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만약 사람이 천 개의 머리가 있고
그 머리마다 백 개의 입이 있고
그 입마다 백 가지로 말하는 혀가 있고
그 혀마다 백 가지의 말을 하더라도
십력(十力) 등의 일부분도
겁(劫)이 끝나도록 다 말하지 못하리라.
셋째의 생각할 수 없는 것이란,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의 견줄 이가 없다는 것은, 성문ㆍ독각ㆍ보살 등 삼승(三乘)등과 함께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째의 지극한 청정이란, 무명(無明)이 머무는 지위를 아주 멸하여 남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법신의 다섯 가지 공덕이라 한다.다시 응신(應身)이란 것은, 역량과 작용이 광대하기 때문에 이 응신은 본래 세 가지 특징이 있으니, 첫째는 큰 반야(般若)이고, 둘째는 큰 선정이고, 셋째는 큰 자비이다. 큰 반야란, 분별이 없는 성인의 지혜가 바로 그 체상(體相)이고, 큰 선정이란, 관심을 기울이는 것(作意)이 없는 것이 바로 그 체상이니, 출입의 의사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큰 자비란 뽑아 낼 수도 있고 구제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그 체상이다. 중생들의 뜻을 원만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세 가지를 필요로 하니, 첫째 법락을 위해서이고, 둘째 육신통을 위해서이고, 셋째 구제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대비는 삼악도(三惡道)의 고통에서 빼내어 사람ㆍ하늘의 크게 안정된 곳에 편안히 있게 하고, 능히 육신통을 나타내어 반야를 믿고 좋아하게 하고 법의 즐거움을 받게 하기 위해 능히 해탈을 성숙케 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응신이라 한다.다시 화신(化身)이란 것은, 대비를 근본으로 삼고, 선정으로 변화를 삼으며, 반야로써 다섯 종류의 능력을 있게 하는 것이다. 첫째 싫거나 두려움을 생기게 하는 것이고, 둘째 성인의 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고, 셋째 예전의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것이고, 넷째 큰 법을 믿고 좋아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 큰 보리의 수기(菩授記)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큰 법으로 인지(因地) 가운데 있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如如)를 훈습해 닦아 본원(本願)을 안립하고 이 본원으로 말미암아 도후(道後)에 이르를 때에는, 세 가지 몸을 따라 능히 중생들에게 이익되게 하는 일을 하신다.이 때문에 오탁(五濁) 세간에 출현하시는데 그 일이 열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본생(本生)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고, 두번째는 도솔천(兜率天)에 현생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도솔천으로부터 내려와서 중음(中陰)에 처하는 것이고, 네번째는 모태에 들어가는 일이고, 다섯 번째는 모태에서 나오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기능(技能)을 배우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동자로서 유희하는 것이고, 여덟 번째는 출가하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고행하는 것이고, 열 번째는 보리수(菩提樹)에 나아가는 일이고, 열한번째는 마군(魔軍)을 깨뜨리는 일이고, 열두번째는 성불하는 일이고, 열세번째는 전법륜하는 것이고, 열네번째는 반열반(般涅槃)하는 것이다.이 열 네 가지 일은 오탁악세에 출현하여 중생 모두에게 이르는 것이다. 이 열네 가지는 다섯가지로 인연을 삼는다. 첫째 무상, 고, 무아, 공, 열반적정을 설하기 위한 것이다. 이 바르게 설해진 음성으로 말미암아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세 가지 세계(三有) 에서 두려움을 생기게 하고, 둘째 두려움을 내고나서 이승(二乘)의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게 한다. 셋째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서 궁극적 열반의 마음을 내는 것은, 이러한 증상만의 마음을 깨뜨리기 위하여 대승의 법화(法花) 등 진실한 법의 가르침을 설하시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그 본래의 집착을 버리고서 자비와 반야의 방편을 섭수하여 가지게 한다. 넷째 섭수한 후에는, 무상승(無上乘) 가운데에서 성숙하게 한다. 다섯째 성숙하고 나면 그 무상보리도의 수기를 주시나니, 이러한 것을 이름하여 화신의 일이라 한다.다시 이 세 가지 몸에 의지하되 각각의 몸을 따라 각각 한 가지의 덕이 있으니, 법신은 미세하기 때문에 깊고 깊은 것이 바로 그 덕이고, 응신은 위신(威神)이 구족하기 때문에 광대(廣大)한 것이 바로 그 덕이고, 화신은 능히 범부 등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에 화선(和善)한 것이 바로 그 덕이다. 또 이 세 가지 몸이란, 항상 세간의 이익되는 일들을 생기게 하기 때문에 상주(常住)하는 것이라고 말하느니라. 상주란 것은 열 가지 인연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열 가지란, 첫째는 인연이 끝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중생계가 끝이 없는 것이고, 세 번째는 대자비가 끝이 없는 것이고, 네 번째는 여의족(如意足)이 끝이 없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무분별지가 끝이 없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항상 선정에 들어있어 산란하지 않은 것이고, 일곱 번째는 안락하고 청량(淸凉)한 것이고, 여덟 번째는 세간에서 행위하더라도 여덟 가지 법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감로(甘露)법으로 고요하여 죽음의 마구니(死魔)를 아주 여의었고, 열 번째는 본래 성품이 법과 같아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이다.첫째 인연이 끝이 없기 때문에, 항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량한 겁이래로 신명과 재산을 버리고 정법을 섭수한다. 정법이 이미 무변, 무궁, 무진이고, 다시 무궁의 원인으로써 무궁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결과가 곧 세 가지 몸이기 때문에 이 상주함을 얻는 것이다. 둘째 중생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란, 처음 발심할 때에 네 가지 넓은 원(四弘誓)을 세우고 열 가지 다함이 없는 큰 소원(十無盡大願)을 일으키되, ‘만약 중생이 다하지 않는다면 나의 서원도 다함이 없고, 중생이 만약 다한다면 나의 서원도 곧 다하리라.’고 하는 것이니, 그 중생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화신(化身)은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교화하고 이끄는 일이 다함이 없는 것이다. 셋째 대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란, 만약 보살로서 대비심의 일부를 가진 이도 오히려 중생들을 항상 구할 수 있어서 그 마음이 제한없이 오래도록 생사에 머물고 열반에 들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모든 덕이 원만하시고 항상 대비가 있는 여래께서 구제하고 벗어나게 하는 항상하는 은혜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상주라고 하는 것이다. 넷째 사여의족(如意足)이 그지 없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란, 세간에서 사신족(神足)을 얻은 자도 그 수명이 사십소겁 동안을 머물 수 있는데, 하물며 여래께서는 대신족을 가지신 스승이신데, 그 수명이 어찌 억백천겁 동안 자재하게 머무시어 중생들을 널리 교화할 수 없겠는가? 이 때문에 상주라고 말하는 것이다.다섯째 무분별지가 끝이 없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집착을 아주 여의고서 한결같이 제일의제(第一義諦)와 상응(相應)하여 움직이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는 것이니, 때문에 이것이 상주라고 알라. 여섯째 항상 선정에 있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란, 세간 사람으로서 선정을 얻은 자도 오히려 물에 빠지고, 불에 타거나 칼ㆍ화살에 상해를 입지 않는데, 하물며 여래께서는 항상 선정에 계시는데, 어찌 무너질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상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곱째 안락하고 청량하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란, 안락은 곧 금강(金剛)의 마음이 능히 무명(無明)이 머무는 지위의 최후의 생각인 무상과 괴로움를 제거하여, 그 괴로움가 없기 때문에 안락이라 하고, 불과(佛果)를 나타내고 이루기 때문에 청량이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해탈하는 길이기 때문에j 상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덟째 세간에서 행위하되, 여덟 가지 법에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란, 부처님의 몸은 비록 도전(道前)에 있어서 생사와 상응하더라도 그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은 망상의 인연이 없기 때문에 상주라는 것이다. 아홉째 감로(甘露)가 고요하여 생사의 마구니(四魔)를 아주 여의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란, 감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길이 신선이 되어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다. 금강의 마음이 능히 무명의 최후 생각인 번뇌를 제거하기 때문에 불과(佛果)를 얻어 항상 안락하고, 항상 안락하기 때문에 고요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생사의 마구니를 아주 여의고, 생사의 마를 여의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상주하는 법이다. 열째 본래의 성품에 생멸이 없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란, 법신은 본래 없던 것이 지금 있거나 본래 있던 것이 지금 없어진 것이 아니다. 비록 삼세를 다니더라도 삼세의 법이 아니니, 왜 그런가? 이 법신은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에 와서 처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삼세의 법을 벗어난 것이므로 이 때문에 상주라고 말하는 것이다.【문】부처님이 대승(大乘)의 모든 경을 설하심에 있어서 한결같이 다 모든 법의 공함을 나타내어 구름과 꿈과 환영과 같음을 말씀하셨다. 번뇌가 장애하기 때문에 구름으로써 비유를 삼고, 일체의 업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꿈으로써 비유를 삼고, 일체 오음(五陰)의 과보가 번뇌의 업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환영으로써 비유를 삼으셨다. 앞서 이 경을 설하여 이러한 뜻을 나타내셨는데, 어떻게 다시 일체 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고 설하십니까?【답】이미 처음에 다섯 가지 공덕으로써 다섯 가지 과실(過失)을 제거하는 것을 설하여 불성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과 같은 것이니, 이 때문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이 아홉 가지 비유는 불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여기에는 다섯 가지 뜻이 있음을 마땅히 알라. 다섯 가지 뜻이란, 첫째는 진실로 있는 것이고, 둘째는 방편에 의지하면 볼 수 있는 것이고, 세 번째는 보고 나면 공덕이 무궁한 것이고, 네 번째는 처음이 없는 것과 상응하지 않는 것과 상응하는 것의 껍질(穀)이다. 해석하자면, 처음이 없는 것이란, 번뇌와 업과 과보가 모두 다 처음이 없기 때문에 처음이 없는 것이라 한다. 상응하지 않는 것이란, 이 세 가지로 말미암아 법신과 어긋나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상응하는 것이란, 법신에 의지하여 이 세 가지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상응하는 것이라 한다. 껍질이란, 이 세 가지가 능히 법신을 감추기 때문에 껍질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처음이 없는 것과 상응과 착한 성품을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해석하자면, 처음이 없는 것이란, 그 성품으로써 반야와 대비와 선정을 얻는 법신이 모두 본래부터 있었기 때문에 처음이 없는 것이라 하고, 상응하는 것이란, 체(體)와 용(用)이 언제나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처음이 없는 때로부터 선한 성품에 상응하는 것으로써 법을 삼는 것이다. 법신의 자성(自性)이 변함이 없는 것은 반야로 말미암아 그러하고, 법신의 자성이 위덕(威德)이 있는 것은 선정으로 말미암아 그러하고, 법신의 자성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대비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다. 때문에 선한 성품을 일컬어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아홉 가지 비유로 과거세나 미래세에 변하여 달라짐이 없다는 뜻을 음을 해석하여 끝마쳤다. 둘째 더러움과 깨끗함이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것이란, 법신은 생사와 음, 계, 입(陰界入) 등에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에 더러움이 없다고 말하고, 지수(智數)가 조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청정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 생기는 것에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것이란, 법신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으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때문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을 논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 늙음에 있어 변하고 달라짐이 없는 것이란, 법신은 변하거나 바뀌지 않기 때문에 또 고쳐지고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늙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다섯째 의지하고 머무는 것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란 만약에 법이 의지하는 것이 있거나 머무는 것이 있다면, 곧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있다. 그러나 법신은 다른 것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의지하는 것이 없고 적실히 존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머무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섯째 사라짐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란, 법신은 상주하는 것으로,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사라짐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변하고 달라짐이 없는 여섯 가지의 구별된 뜻의 궁극적 의미라고 하는 것이다.다시 이 여섯 가지를 합하여 세 가지로 한다면, 첫째는 앞과 뒤가 다 고요한 것이니, 이를테면 과거세나 미래세의 차이가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유전(流)이 없는 것이니, 더러움과 깨끗함에 차이가 없는 것이다. 셋째는 무위이니, 생, 주, 멸 등의 네가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변하고 달라짐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체 허망한 생각의 모든 법은 세 가지로 변하고 달라지니, 첫 번째는 과보가 다 되기 때문에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 있으니 과보가 다 되기 때문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대치(對治)하여 파괴하기 때문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고, 세 번째는 찰나에 생각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다. 법신이 그렇지 않은 것은 이 세 가지 과실(過失)을 여의었기 때문이니, 첫째는 앞과 뒤가 고요하기 때문에 과보가 다 되어,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고, 두번째는 유전이 없기 때문에, 대치하여 깨뜨림으로써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고, 세 번째는 유위법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들이 무너져도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한다.
4. 변상분 ⑨
10) 무차별품(無差別品)
다시 무차별의 뜻을 마땅히 알라. 무차별이라는 것은, 이 여래의 성품이 이미 지극히 청정한 지위에 도달한 것이다. 광의로 말하면, 이 유전없는 경계에서 여래의 성품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에 네 가지 뜻이 있고, 이 네 가지 뜻으로 인하여 네 가지 이름을 세우고, 네 가지 사람에 근거하여 네 가지 특징을 나타내니, 네 가지 뜻이란, 첫째는 일체 불법은 앞뒤가 서로 떠나지 않고, 둘째는 모든 곳이 다 있는 그대로이고, 셋째는 망상과 전도된 법이 없고, 넷째는 본래의 성품이 고요한 것이다.≪해석≫ 일체 불법은 앞뒤가 서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승만경(勝鬘經)에 설한 것과 같으니, “세존이시여, 여래장(如來藏)이 공하지 않은 것으로, 항하사(恒沙) 보다도 많은, 서로 떠나지 않고 지혜를 버리지 않고 생각할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있다.” 고 하였으니, 여래장은 여래의 공덕으로 말미암아 공하지 않음을 알라.공하지 않다는 것은 곧 부처님이 갖추신 일체 공덕을 밝히기 때문이며, 이 성품이 일체 처소에서 다 그러한 것이란, 일체 법은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무상의경(無上依經)에 설한 것과 같으니, “일체 중생은 음, 계, 입 (陰界入)이 있어서 그 뛰어나고 그렇지 못한 종류가 안팎으로 나타난다. 무시이래로 상속하여 유전하고 법답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지극이 밝은 묘선이다.”라고 하셨다. 이러한 의미이기 때문에, 모든 처소가 다 그러한 줄을 아는 것이다.다음 망상과 전도된 법이 아니라는 것은, 해절경(解節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부처님이 무진의(無盡意) 보살에게 설하기를, “선남자여, 여래의 성품은 참된 진리이니,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거나 세간에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성상(性相)이 항상 그러한 것은 허망한 법이 아니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셨다. 이 경으로 말미암아 망상과 전도된 법이 없는 것을 참된 진리(真實諦)라고 하는 줄을 아는 것이다. 본래의 성품이 고요하다는 것은, 문수사리변행경(文殊舍利遍行經)에 설한 것과 같으니, 부처님이 문수사리에게 설하시기를, “모든 부처님 여래의 본래 성품은 스스로 반열반(般涅槃)이어서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느니라.”라고 하셨으니, 이런 의미로써 본래 자성이 적정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다시 네 가지 이름을 세우는 것이란, 첫째는 불법이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에 그 이름을 법신(法身)이라 하고, 둘째는 불성이 일체 처소에 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여래라 하고, 셋째는 허망함과 전도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진리라고 하고, 넷째는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반열반이라 하는 것이니, 이 네 가지 뜻과 네 가지 이름이 여래의 성품에서 아무런 차별이 없기 때문에 차별없는 모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네 가지 사람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란, 첫째는 신견(身見)을 가진 중생의 경계가 아니다. 이 진실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삿된 집착을 대치하기 때문에 신견의 사람을 위하여 법신을 말하는 것이다.【문】어떻게 이 사람에 대하여 진여를 가지고 법신이라고 하는가?
【답】모든 범부의 물질 등 모든 쌓임(陰)은 이 성품이 없는데 억지로 나(我)가 있고 내것(我所)이 있다고 집착하니, 이 사람(人)과 법(法)의 두 가지 집착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다. 신견(身見)이 없어지는 그 자리가 바로 감로(甘露)의 경계이니, 믿고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래의 법계를 통달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이 경계를 본다면 신견의 집착이 없어질 것이며, 비록 또 신견을 이미 제거했거나 아직 제거하지 못했거나 이 경계는 항상 그러하니, 이 때문에 이 경계를 이름하여 진실한 몸이라 하는 것이고, 범부들이 집착하는 것은 이미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있지 않아 진실한 몸이라 할 수 없는데, 이러한 신견의 범부들을 대치하기 위해 몸이라는 명칭을 세우는 것이다.둘째는 전도된 사람을 대치하기 위해 여래라는 이름을 설하는 것이니, 전도된 사람이란, 2승(乘)의 사람들을 말한다. 여래는 상주한다고 마땅히 닦고 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뒤집히고 전도되어 무상한 생각 등을 닦으니, 왜 그런가? 이 수행이 허망한 경계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전도된 수행이라고 한다. 낙(樂)ㆍ아(我)ㆍ정(淨) 등도 또한 그러하다. 전도된 행으로 말미암아 모든 2승들은 나아가 닦아도 여래의 도과(道果)와 서로 같은 것을 얻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상(常) 등의 진여는 그 경계가 아니고, 이 진여가 무상(無常)한 것들과 같지 않음은 세간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이 진여는 진여가 아닌 것에서도 진여가 있고 진여 아님이 없는 것에서도 또한 진여이고, 2승의 진여는 진여가 아닌 것에서 진여라고 하고, 진여 아님이 없는 것에서 진여가 아니라고 한다. 어떻게 그러한가? 이 2승의 사람들은 허망한 시각에 근거하여 무상등의 모양들을 진여라고 생각한다. 이 허망한 관찰은 원인 가운데에만 있고 결과의 자리에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진여가 혹은 성립되고 혹은 무너져서, 원인에서는 성립되고 결과의 자리에서는 무너지는 것이다. 보살의 진여라는 것은, 허망함을 떠나서 참된 성품에 근거하여 그 진실함을 관찰하기 때문에, 마치 또 이러한 진여는 원인과 결과의 두 장소에서 다름이 없기 때문에 성립되고, 파괴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2승 사람들의 진여는 결정코 멸하는 것을 쫓아서 가기만 하고 오지는 않는데, 보살의 진여는 원인과 결과가 항상 있어서 가거나 오거나 다르지 않라. 원인을 버리고서 결과에 이르기 때문에 여거(如去)라고 일컫는 것이고, 결과를 따라 작용하기 때문에 여래(如來)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는 2승들의 경계가 아니고, 이 때문에 2승들을 대치하기 위해 여래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다.셋째는 산란하고 동요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대치하기 위해 그 이름을 진실한 진리(真諦)라고 하는 것이니, 진여라는 것은, 증감이 없는 법이다. 산란하고 동요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란, 처음으로 대승(大乘)을 행하는 보살로서 여래장에 미혹하는 자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하나는 모든 법의 소멸만을 믿는 자이니, 이것을 공이라 하고, 일체법이 아직 분석되지 않았을 때를 유(有)라고 하고, 분석이 끝나면 곧 공이라 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참된 법이 있는 것을 공이라 하여 ‘내가 이제 닦아야 하고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이 바로 여래장에 미혹한 것이니, 앞 사람은 없음에 집착하기 때문에 미혹하고, 뒷 사람은 있음에 고집하기 때문에 미혹하는 것이다. 여래장이란 그 도리(道理)가 어떤 모양인가? 게송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한 가지 법도 덜할 수 없고
한 가지 법도 더할 수 없으니
응당 진실 그대로를 보아야 할 것이니
진실을 본다면 해탈을 얻을 것이다.
객진으로 말미암아 공함은
법계와 서로 떠난 것이고
무상법이 공하지 않음은
법계와 서로 따르는 것이네.여래의 성품이란, 스스로가 청정하기 때문이고, 능히 더럽힐 수 있는 객진(客塵)은 그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법도 덜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여란 것은 청정한 원인과 더불어 서로가 떠나지 않고 항하사(恒沙)수 보다도 많은, 그 버리지 않는 지혜와 생각할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법도 더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법이 없다면, 이 법이 없다는 것에 근거하여 진여는 공하다고 관찰한다. 다른 법이 있기 때문에 진여가 공하지 않다고 관찰한다. 그러므로 진여는 공하기도 하고 공하지 않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이다.왜 그런가? 증감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법도 덜할 수 없기 때문에 공한 것이고 한 가지 법도 더할 수 없기 때문에 공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이와 같이 관한다면 진실한 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증감의 두 극단을아주 떠날 수 있겠지만, 처음으로 수행하는 보살은 이 여래장의 이치를 얻어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을 대치하기 위해 참된 진리를 설하는 것이니, 초지(初地)로부터 십지(十地)까지가 그 경계이다. 이러한 이치를 관하여 십지의 행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처음으로 수행하는 경계와는 관계되지 않는 것이다.넷째는 십지 보살을 대치하기 위해 열반을 설하는 것이니, 부처님 한 사람만이 열반을 얻을 수 있고 다른 모든 보살은 열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승만경(勝鬘經)에 설한 것과 같으니, “세존이시여, 열반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세존께서 여래아라하삼먁삼불타(阿羅訶三藐三佛陀)를 성취하시어 모든 한량없고 생각할 수 없는 지극히 청정한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얻으셨나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열반의 네 가지 공덕은 차별된 모양이 없는 것이다. 다시 네 가지 공덕이란, 첫째 일체 공덕이고, 둘째 한량없는 공덕이고, 셋째 불가사의한 공덕이고, 넷째 지극히 청정한 공덕이다. 열반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여래를 성취하고 이 때문에 여래는 열반과 더불어 차별이 없나니, 왜그런가? 부처님을 떠나서는 열반을 얻을 수 없고 열반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해석≫ 공덕이란, 첫째의 일체 공덕은 곧 여덟째의 부동지의 계위(不動地位)다. 이 지위는 분별도 없고 번뇌(穿漏)도 없고 중간도 없이 자연히 성취되는 것이다. 보살의 성스러운 도가 항상 상응(相應)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 여래의 그 유전없는 경계에서 모든 공덕을 다 성취하게 되는 것이며, 둘째의 한량없는 공덕은 곧 아홉째의 선혜지의 계위(善彗地位)이다. 이 계위는 무수한 선정 다라니문(陀羅尼門)의 바다이다. 능히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의 불가사의한 공덕은 곧 열째의 법운지의 계위(法雲地位)다. 이 계위는 일체 여래의 비밀 법장(法藏)이니 증득하여 보는 명료한 지혜가 여기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가사의한 공덕을 다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넷째 지극히 청정한 것이란, 모든 번뇌와 습기와 모든 지혜의 장애를 이미 다 멸했기 때문이다. 지혜의 장애까지를 다 멸했기 때문에 지극히 청정한 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열반이란, 이 네 가지 공덕과 더불어 상섭하고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만이 열반을 얻고 다른 사람은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의 성품은 이 네 가지 뜻과 네 가지 이름과 네 가지 사람과 네 가지 특징에 아무런 차별이 없기 때문에 차별없는 공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이 인연으로써 이 자성(自性) 등 열 가지 모양은 세 가지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첫째는 본래 불가사의한 경계가 있음을 나타내고, 둘째는 도리(道理)에 의지하여 수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고, 셋째는 얻고 나서 한량없는 공덕으로 하여금 지극히 원만하게 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이 때문에 이 논(論)을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