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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보자] #5951 불성론(佛性論) 3권

Kay/케이 2025. 5. 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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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론(佛性論) 3

 

 


불성론 제3권

천진보살 지음
진제 한역
송성수 번역

4. 변상분 ④

5) 총섭품(總攝品)
다시, 전체를 포괄하는 이치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포괄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원인으로 포괄하는 것이고, 둘째는 결과로 포괄하는 것이다. 원인으로 포괄하는 것이란, 이 여래의 청정한 성품에 네 가지 원인이 있으니, 세 가지 법과 세 가지 비유와 비슷하기 때문에 바다를 가지고 비유를 삼은 것이다.세 가지 법이란, 첫째 법신의 청정한 원인(法身清淨因)이고, 둘째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이 생겨나는 원인(佛智德生因)이고, 셋째 부처님의 은혜와 공덕의 원인(佛恩德因)이다.
법신의 청정한 원인이란, 대승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이 생겨나는 원인이란, 반야(般若)와 선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은혜와 공덕의 원인이란, 보살의 대비(大悲)를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대승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을 닦아 익히는 것은 그릇(器)과 비슷하여 이 가운데 한량없는 선정과 지혜가 있어서 큰 보배가 두루 가득하기 때문에 그릇과 서로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야와 선정을 닦아 익힘은 보배와 서로 비슷한 것이란, 반야는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고 선정은 불가사의한 공덕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야는 청정한 보배와 같고, 선정은 여의주(如意寶)와 같은 것이다.보살의 대비를 닦아 익히는 것은 청정한 물과 같아서 일체 세간의 중생들에게 윤택하고 매끄러운 한 가지 맛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큰 바다가 오직 짠 맛 한 가지인 것처럼, 보살의 대비가 모든 중생들을 윤택하게 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때문에 이 세 가지 법이 성불하려고 수행하는 지위(因地)에서 의지의 주체와 객체가 되니,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것이라고 하고 여래의 법 바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원인의 포섭인 것이다.다음은, 결과로 포괄하는 것이란, 여래의 법신에 세 가지 법이 있으니 세 가지 비유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포괄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마치 해(日)에 세 가지가 있는 것과 같다.. 첫째는 해의 체이고, 둘째는 광명이고, 셋째는 밝음이다. 이것이 세 가지 몸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법이란 첫째는 신통(神通)이고, 둘째는 유전을 없애는 것이고, 셋째는 청정함을 나타내는 것이다.첫째의 신통은 비유하면, 해에 밝음이 있어서 능히 자기 경계를 막는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제거할 수 있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해가 밝은 것과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둘째 유전을 없애는 것이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말하는 것이니, 능히 업과 번뇌를 태워 없애는 것을 기능을 하기 때문에, 햇빛과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없애는 것이란 이 참된 지혜가 바로 의혹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고, 없앰과 동시에 다하는 것이란, 의혹이 다 없어지는 그 때를 해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다한다고 일컫는 것이다.
셋째 청정함을 나타내는 것이란, 이를테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의 경계를 전의(轉依:염오식에서 청정식으로 바뀌는 것)라 하니, 지극히 청정하고 때가 없고 맑고 고요하기 때문에 일륜과 서로 비슷한 것이다. 청정한 것이란, 해탈의 장애가 없기 때문이고, 번뇌가 없는 것이란, 일체 지혜의 장애가 없기 때문이고, 맑고도 고요한 것이란 객진번뇌(客塵)가 더럽힐 수 없는 그 본래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다.전의(轉依)란, 성문ㆍ독각ㆍ보살 등 세 사람들의 의지하는 법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또 네 가지 모습(相)이 있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생기게 하는 의지처이고, 둘째는 소멸케 하는 의지처이고, 셋째는 잘 숙고하고 사량한 결과이고, 넷째는 법계의 청정한 모양이다.첫째의 생기게 하는 의지처란, 부처님의 무분별도를 상속하고 의지하는 것이니, 만약 이 법에 의지하지 않으면, 무분별도가 생겨날 수 없다. 이 법에 의지하고 인연하기 때문에 이 법을 도가 생겨나는 의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의 소멸케 하는 의지처란, 일체의 의혹과 습기가 궁극적으로 없어져 다시 나지 않는 것은 그 의지하는 데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전의(轉依)법을 의지하지 않고서도 궁극적으로 의혹을 없앨 수 있다면, 이는 성문ㆍ독각들도 부처님이 의혹을 없애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이 법이 궁극적으로 그 의혹이 의지하는 바를 없애는 것이라고 알라.셋째의 잘 숙고하고 사량한 결과란, 올바르게 통달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공경하고, 끊임도 없고 남김도 없이 아는 바의 진여를 닦아 익히는 그것이 바로 전의(轉依)의 결과이다. 만약에 도(道)속에 있다면, 그 전의가 원인이 되고, 도의 뒤(道後)에 있다면 곧 결과가 되나니, 만약에 그 전의가 잘 숙고하고 사량한 결과가 아니라면, 모든 부처님의 자성(自性)은 마땅히 다시 숙고하고 사량하고 다시 소멸케 하고 다시 청정케 해야 할 것이니,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은 전의가 잘 숙고하고 사량한 결과라는 것을 알라.
넷째 법계의 청정한 모습이란, 일체의 허망한 생각이 여기서 다 없어지기 때문에, 이 법계가 사량(思量)을 벗어나고 언어(言語)가 나타내는 것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계는 청정한 것으로써 모양을 삼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음이 작용하는 장소가 없어지고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바야흐로 이것은 무소득의 진여의 이치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다시 여래의 전의(轉依)에 여덟 가지 법이 포함되어 있음을 마땅히 알라. 여덟 가지 법이란, 첫째 사량(思量)할 수 없는 것이고, 둘째 둘이 없는 것이고, 셋째 분별이 없는 것이고, 넷째 청정한 것이고, 다섯째 명확히 아는 원인이고, 여섯째 대치(對治)하는 것이고, 일곱째 욕심을 여읜 (離欲) 것이고, 여덟째 욕심을 여의는 원인(離欲因)이다.이 여덟 가지를 합한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욕심을 여읜 것으로 멸제(滅諦)이고, 둘째는 욕심을 여읜 원인이니 이는 도제(道諦)이다. 앞의 사량(思量)할 수 없는 것 등의 세 구절은 멸제(滅諦)에 섭수하는 것에 속하고, 그 다음의 청정(淸淨)한 것 등의 세 구절은 도제에 섭수되는 것에 속한다.
그리고, 처음에 욕심을 여읨에 세 구절이 있으니, 첫째 사량을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있고 없는 것 등의 네 구절에 대하여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의 사량(思量)으로서는 통달할 수 없기 때문이고, 일체 중생의 언어(言語)ㆍ명구(名句)와 자모(味) 등으로는 설명하거나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성인의 무분별지로만 증명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다르지 않은 것이란, 경(經)에서 설한 것처럼, “사리불(舍利弗)이여,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두 가지 법이 없고 분별하는 법도 없느니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둘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와 업 이것을 둘이라 하는 것이니, 여래의 법신은 이러한 두 가지 법이 없기 때문에 두 가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셋째 분별이 없는 것이니, 분별이란, 번뇌와 업의 습기로 인한 바르지 못한 생각이다. 바르지 못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를 일으키고 자성(自性)을 통달함으로써 두 가지를 없애는 것인 만큼, 이 두 가지와 분별은 서로 상응하지 않고 같이 다니지도 않는 것이다.
상응하지 않는 것이란, 현행하는 번뇌가 상응하거나 공행(共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행(不行)이란, 수면(隨眠)과 번뇌는 함께 따라 현행하지 않으니, 이미 이 두 가지는 상응하지도 현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법신은 괴로움이 궁극적으로 사라져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러한가? 어느 법을 제거하여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사라짐이라 한다. 본래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사라짐이라 하는 것이니, 무상의경(無上依經)에 설하기를, “아난(阿難)이여,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법 가운데에는 심, 의, 식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해석≫ 마음이란, 곧 육식(六識)의 마음이고, 의(意)란, 아타나식(阿陀那識)이고, 식(識)이란, 아리야식(阿梨耶識)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에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중에서 이 세 가지 식이 없다면 분별이 없을 것이고, 분별이 이미 없다면 바르지 않는 생각 등도 없을 것이고, 이미 세 가지 식이 없다면 무명(無明)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법신은 바르지 않는 생각을 여의었기 때문에, 무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무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십이인연의 가지(十二有支)들이 생기는 인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승만경(勝鬘經)에 설하기를, “괴로움의 멸(苦滅)이란 법을 없애고 무너뜨리는 것을 괴로움이 멸했다고 하지 않는다. 무너뜨리는 것이란, 삼계를 깨어뜨리고 진리를 보는 유여열반을 얻는 것을 말하고, 없애는 것이란, 네 가지 종류의 생사에 관한 사유번뇌를 제거하여 무여열반을 얻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무너뜨리고 없애는 것이라고 한다. 괴로움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무시 이래로 짓지도 생기지도 않았고 모두 소멸하지도 여읜 것도 아니다. 상주하고 항상 고요하고 맑고 자성이 청정하여 모든 번뇌의 껍질에서 해탈하여 공덕이 강가의 모래알 수보다 많은 것을 서로 섭수하고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지혜를 버리지 않고 사유할 수 없는 여래의 법과 상응하는 여래법신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이러한 여래법신을 욕심을 여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둘째의 욕심을 여읜 원인이란, 이 법신을 얻기 위해 견도와 수도에 섭수되는 것을 말한다. 경계에 근거하여 무분별지에는 세 가지 뜻이 있어, 해와 비슷하다고 한다. 번뇌가 없고 청정하기 때문에 일륜과 비슷하고, 능히 모든 경계를 밝게 알기 때문에 해의 밝음과 비슷하고, 능히 오든 참된 견해에 대한 어두운 장애를 제거하기 때문에 태양빛과 비슷한 것이다.≪해석≫ 참된 견해에 대한 어두운 장애란, 이를테면 구족상(具足想)과 번뇌의 장애와 업의 장애와 과보의 장애를 말하는 것이다.
구족상(具足想)이란, 수면(隨眠)과 번뇌로써 원인을 삼고, 다섯 대경(五塵)에 대한 욕심으로써 그 대상을 삼으며, 부정한 사유로써 함께 일어나는 원인을 삼으니, 이 세가지를 갖추었기 때문에 구족상이라 하는 것이다.
이 어두운 장애는, 탐욕을 여읜 법신은 한 경계임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 여래법신은 탐욕을 여의었다는 것을 이와 같이 마땅히 보고 알아야 할 것이다.어떻게 보고 알아야 하는가? 이른바 사실 그대로 사량(思量)하되 생각(想)을 보지도 않고 경계를 보지도 않는 것이다. 경계란 분별하는 성품을 말하는 것이고, 생각이란, 남에게 의지하는 성품을 말하는 것이니, 분별과 의타, 두 가지 성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의 경계를 보고 안다고 하는 것이다.또 생각이란 사람이고, 경계란 곧 법이다. 이 사람과 법을 생각과 경계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이를 두 가지 공한 것(二空)이라 한다. 이러한 일체 법을 여래께서 모두 보고 모두 아시는 것은, 평등함에 근거하여 평등함에 진실로 있는 그대로를 통달하셨기 때문이다. 경계와 지혜가 평등하여 더하고 덜함이 없는 것을 평등한 관(觀)이라 한다. 이 관이 능히 진실한 소견에 대한 어두운 장애를 제거한다. 이것은 여래의 법신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원인(因)으로서 견도위(見道位)와 수도위(修道位)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욕심을 여의는 원인은 두 가지 닦는 것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두 가지 닦는 것이란 첫째 진리 그대로 닦는 것이고, 둘째 인식 그대로 닦는 것이다. 세간에서 알려지는 것은 다만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첫째가 사람이고, 둘째가 법이다. 만약에 이 두 가지 공함(二空)에 통달한다면, 마땅히 여실한 때를 얻으니,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 있는 그대로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끝(際)이란, 근원의 궁극적인 성품에 도달하고 법계의 근원을 궁구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끝(際)이라 하는 것이다.진리 그대로 닦는 것이란, 사람이나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과 법은 그 성품이 본래 지극히 미묘하고 적정(寂靜)하기 때문에,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있음도 여의고 없음도 여읜다. 이 적정한 모양이란 자성(自性)이 청정하며 온갖 번뇌가 본래 생기는 것이 없으므로, 이 두 가지 공함(二空)을 보는 것을 적정한 모양이라 하는 것이니, 자성이 청정한 마음을 도제(道諦)라고 하고, 의혹이 본래 생기지 않고 청정한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는 것을 멸제(滅諦)라고 한다. 이 마음은 자성의 청정함이 있는 한편, 번뇌와 의혹의 장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 법은 무류계(無流界)에서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독자(獨自)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는 한 찰나에서도 두 마음이 서로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이 두 법에 통달하기 어려운 것이니, 승만경(勝鬘經)에 설하기를, “세존이시여, 선한 마음은 찰나찰나에 사라져 머물지 않아서 모든 의혹에 더럽혀지지 않고, 악한 마음도 찰나찰나에 사라져 머물지 않아서 모든 의혹이 또한 더럽힐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번뇌가 마음에 닿지 않고 마음이 번뇌에 닿지 않으면, 어떻게 접촉하지 않은 법이 마음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을 진리 그대로 아는 것이라 한다. 인식한 그대로 아는 지혜란 것은 일체의 경계를 끝까지 다 아는 것을 인식 그대로 아는 지혜라 한다. 만약 일체 중생을 보되, 그 경계와 같은 지혜에 어긋난다면, 이는 생사가 성립하는 것이고, 만약에 그 경계를 따르는 지혜에 계합한다면, 이는 열반을 얻는 것이다. 일체 여래의 법이 이런 이치이기 때문에 진리 그대로 아는 지혜라 하는 것이고, 또한 초지(初地)의 보살도 이 두 가지 지혜를 얻어서 법계에 두루 가득한 이치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의 두 법을 함께 아는 것이다.또 이 두 지혜는 스스로가 증득하는 지혜로 보는 것이니,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 때문에 다른 것을 따라서 얻지 않고, 다만 스스로가 증명해 아는 것일 뿐 남을 알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스스로 증명하여 알고 보는 것이라 한다.또 이 두 지혜는 두 가지 모양이 있으니, 첫째는 집착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걸림이 없는 것이다. 집착이 없다는 말은 중생계의 자성이 청정함을 보고 집착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대로 아는 모습이고, 걸림이 없다는 것은, 능히 한량없고 끝이 없는 경계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걸림이 없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인식대로 아는 모습이며, 또 이 두 지혜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원인으로 삼고 있는 그대로의 인식으로 결과로 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원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능히 생사와 열반의 원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식으로 결과로 삼는다는 것은, 이 이치로 말미암아 여래의 진속 등의 법을 알고 구족하여 성취하는 것이다.있는 그대로의 진리로 아는 지혜란 것은 청정한 원인이고, 있는 그대로의 인식를 아는 지혜란 것은 원만한 원인이다. 청정한 원인이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아는 지혜로 말미암아 세 가지의 의혹(三惑)이 다 없어지고, 원인이란, 있는 그대로의 인식으로 아는 지혜로 말미암아 세 가지 덕(三德)이 원만해지기 때문이다. 앞서 사량(思量)할 수 없다는 것과 둘이 없다는 것과 분별이 없다는 것 등의 이 세 가지를 이름하여 욕심을 여읜(離欲)것이라 한다. 그 다음 청정하다는 것과 명확히 안다는 것과 대치한다는 것 등의 이 세 가지를 이름하여 욕심을 여의는 원인(離欲因)이라 하는데, 이러한 것을 여래의 전의(轉依)한 법신은 여덟 가지 공덕을 포함하고 가진다고 한다.다시 여래의 전의한 법신은 일곱 가지 이름이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라. 첫째는 침몰(沈沒)이니 오취온에 빠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적정(寂靜)이니 모든 행(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버리는 것이니 모든 남아 있는 짝(伴)을 버리기 때문이다. 넷째는 벗어나는 것이니 두 가지 괴로움(二苦)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제거하는 것이니, 본식(本識)인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뽑아서 제거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제도하는 것이니, 다섯 가지 두려움(五怖畏)에서 제도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끊는 것이니, 육도(六道)윤회의 과보를 끊기 때문이다.≪해석≫ 오취온에 빠진다는 말에서 취(取)는 탐애(貪愛)를 말하는 것으로,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 탐욕에 취착하는 것이요, 둘째 견해(見)에 취착하는 것이요, 셋째 계금(戒禁)에 취착하는 것이요, 넷째 나라는 것(我語)에 취착하는 것이다.
취착하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 느낌에 취착하는 것이고, 둘째 자량을 느끼는 것이다. 취착을 받는 것이란, 그 느낌으로 인하여 애착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량을 느끼는 것은, 이 느낀 것을 탐하기 때문에 네 가지 자량에 취착하는 것이다. 네 가지 자량이란 곧 네 가지 취착이다.그리고 첫째의 탐욕에 취착하는 것이란, 욕계의 여섯 대경(六塵)을 탐하는 것이고, 둘째의 견해(見)에 취착하는 것이란, 욕계에서 계금에 취착하는 것과 상견(常見), 두 가지를 제외한, 그 나머지 네 가지 견해를 견해라 하니,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탐착하는 것을 견취라 한다.
셋째의 계취(戒取)란, 삼계(三界)에서 세간의 삿되고 바른 두 길을 선택하여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을 계(戒)라 한다. 이 계에서 금하는 것에 탐착하기 때문에 이것을 취착이라 한다.
넷째의 아어취(我語取)란, ‘아’라는 말은 자신을 인연하기 때문에 관한 것에 탐착하는 것을 자신에 관한 것을 ‘아어(我語)’라고 하고 자신에 것에 대하여 탐착하는 것을 아어취라 한다.
한편 색계(色界)는 무색계(無色界)의 선정은 자신에 대한 것으로 말미암아 성립되기 때문에 ‘아어’라고 하고, 이러한 선정에 탐착하는 것을 취착이라 한다.이 네 가지 취착 중, 앞의 두 가지는 단견(斷見)에 속하는 것이니, 단지 현재에만 집착하고 미래는 없다고 한다. 뒤의 두 가지는 상견(常見)에 속하는 것으로, 미래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또 앞의 두 가지는 재가(在家)자가 일으키는 것이요, 뒤의 두 가지는 출가(出家)자가 일으키는 집착이다.
또 앞의 두 가지는 재가자와 출가자가 다투는 원인이고, 뒤의 두 가지는 재가자와 출가자가 수행하는 원인이 된다.
또 앞의 두 가지는 욕취로써 성립되는 것이고, 견취로써 성립케 하는 것이다. 쌓임(陰)이란, 다양한 뜻이 있으니, 별도의 해석과 같다. 이제 대략 밝히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취착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범부의 오음은 취착의 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취착에서 생기는 것이니, 곧 이 오음은 취착의 결과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취음(取陰)이라 하는 것이다. 침몰이란 말은 법신에 인과(因果)가 함께 없기 때문에 침몰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취는 대치이기 때문에 침(沈)이고, 쌓임은 과보가 다하였기 때문에 몰(沒)이다. 때문에 법신은 오음이 영원이 없는 것에 근거하기 때문에 침몰이라 한다.둘째의 모든 행에 적정(寂靜)한 것이란, 모든 유위법을 행(行)이라 한다. 사상(四相)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사상(四相)이란, 첫째 생기는 것이고, 둘째 달라지는 것이고, 셋째 머무는 것이고, 넷째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유위법은 과거세에 근거하면 생상(生相)과 상응하고, 미래세에 근거하면 멸상(滅相)과 상응하고, 현재에 근거하면 이주상(異住相)과 상응한다. 행해지는 역할이 그치지 않기 때문에 행이라고 한다.
여래의 법신은 이와 같지 않다. 과거세에 근거하면 생기는 것이 없었고, 미래세에 근거하면 소멸함이 없으며, 현재에 근거하면 늙거나 병들지 않는다.
항상 편안하게 머물고 생겨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하고, 소멸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맑다고 하는 것이다. 과거세에 근거하여 다시 생기지 않았던 것은, 의생신(意生身)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미래세에 근거하여 다시 죽지 않을 것은 이미 생각할 수 없는 물러섬과 떨어짐(不可思惟退墮)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과거세와 미래세에 근거하여 손상되거나 더럽혀지지 않는 것은 이미 무명(無明)이 머무는 자리의 번뇌의 병을 벗어났기 때문이다.셋째의 모든 남은 것을 버리는 것이란, 모든 남은 것이란, 곧 2승(乘)의 사람에게 세 가지 남은 것이 있는 것이라, 첫째는 번뇌가 남은 것이니, 무명이 머무는 계위를 말하는 것이고, 둘째는 업이 남은 것이니, 무루업을 말하고, 셋째는 과보가 남은 것이니, 의생신(意生身)을 말한다.첫째 남은 번뇌는 마땅히 없애야 하고, 둘째 남은 도(道)는 마땅히 닦아야 하고, 셋째 남아있는 허망한 것은 마땅히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이미 허망한 것을 여의셨기 때문에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2승(乘)은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남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여래의 전의(轉依)하신 법신은 이미 네 가지 생사를 건너셨고, 일체의 번뇌와 허망한 것을 다 없애셨고, 일체의 도를 이미 닦았고, 생사를 버리고 도제(眞諦)를 버렸기 때문이고, 이 2 승에게는 이러한 네 가지 덕이 없기 때문이다. 법신만이 홀로 이 네 가지 덕의 원만함에 머물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모든 남아 있는 것을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넷째의 두 가지 괴로움(二苦)을 벗어나 건너는 것이란, 괴로움은 어긋나고 거슬린다는 뜻이다. 그 어긋나고 거슬리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인(聖人)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는 성인에 대한 원수로서 능히 성인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인의 뜻에 어긋나고 거슬리는 것이니, 이는 성인으로서 능히 제거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이란, 첫째는 범부의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두 가지 느낌이 그것이고, 둘째는 성인으로서의 행고(行苦)이니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느낌이 그것이다.
또 두 가지 괴로움이란, 첫째는 몸의 괴로움이고, 둘째는 마음의 괴로움이다.
또 두 가지 괴로움이란, 첫째는 정신적인 괴로움이고, 둘째는 물질적 괴로움이다.
또 두 가지 괴로움이란, 첫째는 2승(乘) 경계 안에 있는 괴로움이고, 둘째는 보살 경계 바깥의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법신의 지위에서는 2승의 거친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벗어남(過)이라 한다. 보살의 네 가지 생사의 세밀한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건넘(渡)이라 하나니, 이것이 이른바 두 괴로움을 벗어나 건너는 것이다.다섯째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뽑아서 제거하는 것이란, 아리야식은 의지해 숨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생사의 근본이어서 능히 네 가지 지말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지말이란, 번뇌에 두 가지가 있고, 업에 한 가지가 있으며, 과보에 한 가지가 있다.
처음에 번뇌의 근본에 두 가지란, 첫째 모든 견해(見)는 무명(無明)으로써 근본을 삼으니,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을 그 대치(對治)하는 길로 삼는다. 둘째 모든 견해를 떠난 그 밖의 일체 번뇌는 탐애(貪愛)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으니, 이것은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을 그 그 대치하는 길로 삼는다.다음에 업의 근본에 한 가지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범부의 성품으로써 그 근본을 삼는 것이니, 범부의 성품 그것이 바로 신견(身見)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과보의 근본으로서 한 가지란, 일체 생사의 과보는 아리야식(阿梨耶識)에 의지하여 근본을 삼기 때문이다. 아직 이 식(識)을 여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과보가 끊어지지 않고 법신 중의 두 가지 길에 근거하여 현재세와 미래세가 다 없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뽑아 제거한다고 하는 것이다. 두 가지 길이란, 첫째는 분별없는 지혜로써 현재의 허망함을 뽑아 제거하여 능히 법신을 청정케 하는 것으로, 진지(盡智)라고 한다. 둘째는 무분별의 나중의 지혜로써 미래의 허망함을 아주 일어날 수 없게 하여 법신을 원만케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무생지(無生智)이다. 뽑는 것이란, 청정케 하여 현재의 의혹을 없애는 것이다. 제거하는 것이란, 원만케 하여 미래의 의혹을 끊는 것이니, 이 때문에 뽑아서 제거하는 것이라고 한다.여섯째의 다섯 가지 두려움을 제도하는 것이란 첫째 스스로의 책망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둘째 남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셋째 처벌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넷째 나쁜 업도(惡道)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다섯째 많이 사람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첫째의 스스로의 책망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사람이 죄악들을 범했을 경우 밤낮으로 겁내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의 남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이미 스스로 죄악을 범했으면, 항상 다른 사람이나 또는 어두움 속의 천신(天神)이 볼까봐 염려되어 두려움을 품는 것이다. 셋째의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스스로 죄악을 저지른 자는 언제나 국왕의 다스림이 있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넷째의 나쁜 업도를 두려워하는 것이란, 이미 죄악을 저질렀다면, 저절로 그 죄악에 따라 나쁜 업도에 태어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다섯째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세 가지 업(三業)이 청정하지 못한 데다가 아는 것도 깊지 않아서 항상 덕이 있는 대중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건 이미 법의 몸을 증득하여 보았다면, 그는 이 다섯 가지 두려움을 여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법신은 다섯 가지 두려움을 제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일곱째 육도의 과보를 끊는 것이란, 그 ‘도(道)’의 의미가 많으나, 대략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행처(行處)이기 때문에 도라고 한다.
오음(五陰)이 소행처(所行處)가 되고, 삼세(三世)가 능행(能行)이다. 또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괴로움이 돌아다니는 곳이기 때문에 이것을 길이라 한다. 둘째 여섯 가지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기 때문에 길이라 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처럼 다섯 가지 길과 그 나머지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또한 이와 같이 같고 다른 종류를 어떻게 길이라고 하는가?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중생들이 윤회 전전하는 곳이고, 둘째는 업이 행해지는 곳이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뜻에서 길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여래의 법신에는 다시 이 러한 길이 없는 것이다. 만약에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면, 그 업은 다 되어도 중생으로서의 윤회 전전하는 과(果)가 다하지 않고,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면, 인과(因果)의 두 가지가 모두 다하였기 때문에 여섯 갈래의 길을 끊어 없앤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어느 곳에서나 여래의 법신을 설하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이 일곱 가지 이름과 상응하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니, . 이것을 이름하여 끝이라 한다.다시 법신의 모습을 설한다면, 모든 괴로움이 고요히 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법신의 모습이 모든 괴로움의 인연을 고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법신의 작용을 설한다면, 작용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물러나거나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작용이라 한다. 둘째는 편안하고도 즐겁기 때문에 작용이라 하는 것이다. 중생으로서는 생사 속에 있거나 또는 꿈 속에서도 다 일찍 보지 못하지만, 만약에 바른 행을 한 사람으로서 이 법을 보기를 구한다면, 보게 될 그 때에 가서는 곧 물러나거나 떨어지지 않고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이 때문에 편안함과 즐거움으로써 그 맛을 삼는 것이다.
다시 법신의 일을 설하자면, 그 일은 무상(無相)으로써 일을 삼으니, 오음(五陰)의 상이 그 가운데에 모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희론(戱論)이 없는 것으로써 일을 삼으니, 희론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탐애(貪愛)이고, 둘째는 아만(我慢)이고, 셋째는 모든 사견(見)이다. 이 세 가지 희론을 여래께서 이미 다 없애셨기 때문에 이 희론들이 없는 것으로써 일을 삼는 것이다.그리고, 희론이란,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참다운 이치와 어긋나는 것이고, 둘째는 헛되게 세간을 속이는 것이고, 셋째는 해탈을 장애하고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첫째는 바른 경계와 어긋나는 것이고, 그 다음의 것은 바른 행과 어긋나는 것이고, 나중의 것은 바르게 얻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니, 이 세 가지 뜻을 합하여 희론이라 한다.또 희론에 아홉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 전체로서의 나(我)를 계탁하는 것이고, 둘째 이것이 나라고 지적하여 계탁하는 것이고, 셋째 나는 응당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고, 넷째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고 다섯째 나는 색계(有色)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고, 여섯째 나는 무색계(無色)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고, 일곱째 나는 유상(有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 것이고, 여덟째 무상(無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고, 아홉째 나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다.첫째의 전체로서의 나(我)를 계탁하는 것이란, 오음(五陰)에 대하여 전체로서의 내가 있다고 집착하여 여의어야 할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다만 부질없는 집착이기 때문이다.
둘째의 이것이 나라는 것은 현세의 오음에 대하여 그 한 가지 음을 취하면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란, 적시하고 구별한다는 뜻이니, 결정코 이것은 두 가지 곳에 있으니, 하나는 결정코 현재의 존재(有)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바로 한 가지 음에 대한 집착에 있으니, 이 때문에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의 나는 응당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일체의 견해(見)는 유무(有無) 두 가지 견해를 벗어나지 않는다. 있다는 견해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상견(常見)을 고집하는 것이다. 없다는 견해에 또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사견(邪見)으로, 이른바 일체는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고 하면서 한꺼번에 삼세(三世)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으로, 현세만이 있고 미래세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넷째의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이 계탁은 단견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다섯째의 나는 색계(有色)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욕계와 색계 두 세계에서 물질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 집착은 상견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여섯째의 나는 무색계(無色)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무색계에서 느낌과 마음과 법을 계탁하여 나라고 하는 것이다. 물질이 무너지고 없어지는 것을 관하면서도 이 세 가지 법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상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일곱째의 나는 유상(有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삼계에서 무상천과 비상비비상처천을 제외한, 그 나머지 모든 곳에서 유상(有想)을 나라고 계탁하는 것이다. 이 또한 상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여덟째의 무상(無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무상(無想)과또는 초목(草木) 등을 계탁하여 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상으로써 마음을 삼기 때문이니, 상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아홉째의 나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이는 최상의 곳(有頂處)을 계탁하여 나라고 하는 것이니, 상(想)을 관함으로써 얽매이게 되고 열반을 계탁함으로써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상(想)을 제거하지 않으면 해탈할 길이 없는 것은 얽매임이 있기 때문이고 만약에 상(想)을 아울러 제거한다면, 다시 나를 잃고 열반의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와 상(想)이 서로 떠날 수 없고, 버릴 수도 없고, 버리지 않는 것은 얽매임이 있기 때문이다. 상(想)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에 비상(非想)이라고 말하지만, 나를 잃을까봐 두려워하여 감히 상(想)을 아울러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비상(非非想)이라고 한다. 이 산란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열반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이름하여 희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법신을 관찰하여 증득하면 일체의 희론은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외도의 반문≫ 법신에 대하여 무엇으로써 이러한 상(相) 등의 의미를 세우는가? 그대가 내세우는 것 그대로라면, 법신은 결코 없는 것이니, 집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대상으로서 육식(六識)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마치 토끼 뿔과 같이 결정코 없는 것이다. 토끼 뿔을 육식으로써 얻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법신도 역시 그러하니, 때문에 법신은 결코 없는 것인데, 어째서 모든 뜻을 내세우는가?≪답≫ 그대가 육식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신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방편으로 말미암아 능히 열반을 증득(證)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른 행에 맞는 것을 방편이라 하고, 이 방편으로 말미암아 알 수도 있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니, 마치 타심통(他心通)으로 말미암아 출세간의 성스러운 마음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해석≫ 타심통이란, 세 가지 인연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그 두 가지는 방편이니, 첫째는 정도(正道)의 방편이고, 둘째는 천이(天耳)와 또는 천안(天眼)으로 인한 방편이다. 천이로써 듣고 깨달아서 음성을 관(觀)하니 이 음성으로 말미암아 남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천안에 의지하는 것이란, 다른 사람의 육체의 심장 안에 있는 구멍속에 물이 있는 것을 볼 때에, 물의 모습이 만약 검으면, 어리석은 것을 알고, 누런 빛이라면 탐욕스러운 줄을 알고, 붉으면 성내는 줄을 알고, 푸르거나 흰 빛이 나면 선한 줄을 알고, 희미하게 맑은 빛을 볼 때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무기(無記)인 줄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은 천이와 천안을 방편으로 남의 마음을 견주어 아는 것이다.다음 정도의 방편이란, 만약에 타심통을 얻으려면, 반드시 자신의 마음부터 먼저 관하는 행(觀行)을 닦되 현재의 마음으로써 현재세를 관하지 않는 것은 그 마음 자체가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마음으로써 능히 과거의 마음을 관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서 관하기 때문이다. 먼 데로부터 가까운 데에 이르러 차례로 뒤를 향하되 맨 처음엔 한량없는 생각을 관하다가 이와 같이 점점 한 찰나에 이르고 내지 한 찰나도 소멸하여 자신의 마음을 관하는 가운데에서 자유로움을 얻는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취하여 자신의 경계로 삼아서 관행을 닦는다. 처음 관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원심을 세우고 기간을 정해야 할 것이다. 먼저 앞 사람의 몸을 가상(假想)하여 관하는데 그 몸 모양이 갖추고 있는 것을 낱낱이 분석하여 피부ㆍ살ㆍ뼈 세 가지 모양을 모두 다 제외한다. 다만 남아있는 마음만을 세밀히 닦아 익혀 앞 사람의 마음을 인연하여 그 예리하고 둔함과 멀고 가까움과 넉넉하고 좁은 것에 따라 스스로 통찰하는 것이다. 저 대상과 같이, 나는 여러 종류의 모든 마음을 다 볼 수 있다. 때문에 다른 성인의 마음과 같은 것이 비록 육근(六根)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해도 또한 볼 수 있는 것은, 여래의 법신도 그러하여 비록 육식(六識)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방편의 바른 행으로 말미암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있는 것으로, 없는 것과 동일한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알라.또한 다른 뜻이 있으니, 법신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왜냐하면 만약에 법신이 없는 것이라면, 모든 바른 행이 다 소용이 없으리니, 바른 견해를 먼저 갖추고 계율ㆍ선정ㆍ지혜 등의 선한 법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바른 행을 닦는 그것이 헛되어 결과가 없지 않는 것으로, 이 바른 행으로 말미암아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신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법신은 결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른 행이 오음(五陰)과 십이처 등을 멸진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에, 그 바른 행은 결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열반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오음등이 없는 것이 열반이라면, 과거ㆍ마래의 두 세상의 음(陰)등이 모두 없어야 열반일 것이다. 이 두 세상이 음 등없는 곳이라면, 음이 없는 곳을 취하여 열반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라.또 만약에 그대가 이것을 취하여 열반이라고 한다면, 미치광이와 술취한 사람들도 열반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때문에 음 등이 없는 곳에 열반이 없음을 알라. 또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현세의 오음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없는 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법이 현재 존재하는 한다면, 이는 없는 것이 아니어서 서로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만약에 법이 이미 없다면 현재가 아니고, 만약에 현재 존재한다면 없는 것이 아니니, 그 있고 없음이 한꺼번에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현재의 음에 의지하여 성스러운 도(聖道)를 닦을 때에는, 마땅히 열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聖道)를 현재의 다섯 가지 쌓임에 의지하여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이 때 현세의 오음은 실제 있는 것이고 아직 없는 것이 아니니 여기서는 영원히 열반을 얻는다는 뜻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가? 그대가 계탁하여 말하기를, 현세의 오음이 없는 곳을 열반이라고 하고, 현재에서 오음에 의지하여 여덟까지 성스러운 도를 닦아서 열반을 얻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대가 현세에 오음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 때의 번뇌는 현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또한 그렇지 않다. 또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여덟가지 성스러운 도를 닦을 때, 오음이 현재한다면, 모든 번뇌는 현재하지 않는다. 이때의 번뇌는 생길 수 없기 때문에 팔정도를 통해 증명할 수 있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현세에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다.왜냐하면 번뇌가 과거의 것이고 현재세가 아니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 소용이 없다. 성스러운 도를 닦을 때에, 이 모든 번뇌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의 견해는 상응하지 않는 것은 현세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역류(逆流)를 따라서 처음 수행할 때에, 번뇌가 이미 상응되지 않고 이 상응하지 않는 것은 곧 현세가 아니다. 이것은 곧 네가 계탁하는 열반이다. 만약에 이것을 열반이라고 집착한다면, 성스러운 도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 이미 의혹을 없앴어야 할 것이고, 이미 열반을 얻었기 때문에 뒤늦게 성스러운 도를 닦는 것은 다시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가 능히 모든 의혹을 없앤다거나 열반을 얻는다는 이러한 이치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번뇌가 없는 곳을 열반이라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라. 또 만약에 그대가 설하기를, “성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탐욕 등이 다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길상경(吉祥經)의 게송(偈頌)에 설한 것과 같다.
다 없어짐과 욕심을 여읨으로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 것과 미묘함
어떤 사람이건 이 경으로 본다면
성불하여 적멸을 얻을 것이다.
법으로써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이 없고
만약에 증득한다면 근심이 없으니
이것은 참된 묘법의 보배이다.
이 뜻으로 말미암아 길상(吉祥)인 것이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탐욕 등의 모든 번뇌가 현세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없어진 것이라는 이 세 가지 이치로 말미암아 멸제(滅諦)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넷째의 과(第四果)가 이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경에서 설하시기를, “어떤 것을 아라한의 과(阿羅漢果)라 하는가 하면, 삼계(三界)의 번뇌가 멸진한 것을 아라한과라 한다”고 하셨다. 다만 탐욕 등이 없어진 그것만으로 과라고 한다면, 그 과는 실상 이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바로 출세간의 과보인 사음계(四陰戒) 등과 오신(五身)을 아라한과라 하는 것이다. 다만 이 번뇌가 멸진함으로써 아라한의 과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과 가운데에 이 인(因)의 이름을 설하는 것이고, 열반도 그러하여 열반으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를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인 가운데 과의 이름을 설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대가,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로 말미암아 열반을 얻고, 도는 공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다시, 법신이 머무는 시간이 짧고 촉박하고 유위법상이며 작용을 얻을 수 없다는, 이것이 세 가지 잘못(過失)이니 곧 그대의 이치가 무너지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탐욕 등의 번뇌가 없어진 것을 법신이라 한다”고 하면, 이는 그대가 내세운 이치 가운데 세 가지 잘못이 있는 것이다.첫째는 머무는 시간이 짧고 촉박한 것이니, 모든 법이 찰나찰나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멸진이라고 한다. 멸진하기 때문에 잠시도 머물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어떻게 이 멸진의 이치를 세워서 법신이라 하는가? 짧고 촉박한 시간 때문에 법신이 항상하다는 이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둘째는 유위법상의 잘못이란, 만약에 이 멸진이 법신이라면, 법신은 바로 유위법상일 것이다. 법신이 만약 이 유위법상이라면, 이러한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셋째는 작용으로 얻는 못하는 과실이란, 이 일체 법이 인연을 의지해 없어지는 것이 자성이다. 왜냐하면 사라지는 것으로 근본을 삼기 때문에, 만약에 없어지는 것이 작용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면 법신도 또한 작용으로 인하여 얻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미 작용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면, 수면(隨眠)에 빠진 자와 미친 이와 술취한 자들도 다 열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대의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다시 만약 멸진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는 유위의 모든 법과 상응(相應)할 것이다. 멸에는 동일하게 변동되고 괴로운 두 가지 법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유위법이란, 탐욕 등의 번뇌의 불길이 타오르기 때문에, 항상 산란하고 변하며 머물지 않아, 생노사 등이 무너뜨리는 바가 된다. 이 때문에 항상 고통스러운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비구여, 생노사 등은 유위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위법은 항상 불타고 항상 괴롭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 죽음이란, 곧 멸진하는 것이고, 이 멸진하는 것이란, 곧 유위이다. 만약에 유위라면, 그대가 세운 법신은 상주함을 얻을 수 없고 상주할 수 없다면 그대의 뜻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대의 이치는 가장 적정(寂靜)한 것을 계탁하여 변화하는 것이라 하고, 가장 안락한 것을 고통이라 하니 이 때문에 그렇지 않는 것이다.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 한번 없어지는 것으로부터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앞의 모든 잘못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한 영원히 멸진한 것이란, 생사가 멸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 이치가 옳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한 바 그대로 한번 멸하면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닌 이러한 법은 없으니, 내가 이제 그대의 뜻을 따라 나 역시 이 멸진이 있기를 원한다고 말하더라도, 만약에 이 멸진 하는 것이 있다면, 마침내 앞의 모든 잘못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또 도가 없어진 뒤에도 번뇌는 다시 생기지 않는다. 만약에 아주 없어지는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는 도가 없어짐으로 해서 열반인 것이다. 또 그대가 말하기를, “능히 멸진을 열반이라 한다.”고 하면, 이는 아무런 분별없이 없앨 수 있는 그것을 곧 열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도는 바른 것을 사용함으로써 없앨 수 있을 뿐이니, 그 도체(道體)가 번뇌를 없앨 수는 있는 것이지만,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번뇌가 생기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두 가지 잘못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번뇌가 생기지 않는 것이 멸진과 같은 체(體)라면, 이는 앞서 언급한 사멸 등의 다섯 가지 잘못과 같기 때문이다. 이 생기지 않는 것을 도전(道前=實道를 얻기 이전)에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도후(道後)에 있다고 할 것인가? 만약 도전에 있다면 그 도를 닦지 않았을 때에도 이미 얻어야 하리니 도를 닦는 것이 소용이 없겠고, 만약 도후에 있다면 미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세(三世)를 벗어나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또 그대가 생기지 않음을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번뇌가 있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가? 번뇌가 없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가? 만약에 번뇌가 있다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유무(有無), 두 가지 법이 동시에 같은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갈 때에는 머물지 못하고 머물 때에는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두 가지 법은 서로 상위하여 가거나 머무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번뇌가 있을 때에는 성립될 수 없으니,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만약에 번뇌가 없는데도 생기지 않는 것이 성립된다면, 이 때는 번뇌가 이미 없는데 무엇에 근거하여 생기는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비유하면, 이는 마치 ‘석녀(石女)인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음을 알라.다시, 그대가 번뇌는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이 번뇌라는 것을 있다고 하겠는가? 이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 것이 있는 것이라면, 네 가지 원소(四大)와 같이 실제 법이 있는 것이고, 임시로 명칭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도 있는 것이지만, 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마치 허공의 꽃과 토끼의 뿔 같은 것이어서 그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만약에 이것이 있는 것이라 한다면, 곧 네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것이다. 네 가지 인연으로 성립되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으니, 이러한 의미에 의해 유위와 무위의 차별이 없게 되는 것이다.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 것이 있지만 네 가지 인연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곧 삿된 소견을 가진 외도들이 자성과 극미와 때와 방위에 집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에 있지 않은 것이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만 명칭만이 있을 뿐이니, 곧 ‘토끼 뿔은 날카롭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에 그렇다면 앞에서 논파한 것과 같이 도를 닦는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외도의 반문≫ 만약에 무생(無生)을 가지고 열반이라 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부처님이 설하시기를, “생기는 것이 없이 다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하셨는가?
【답】그것은 도(道)가 열반에 의지하여 번뇌가 미래에 생기지 않게 하고 현재에는 소멸하게 하려는 것이니, 원인 가운데서 결과를 설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없이 다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외도≫ 무엇 때문에 결과를 원인의 이름으로 설하고 바로 그 결과의 체(體)를 취하여 그것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가?
【답】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니 일체 법 가운데 열반보다 더 미세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만약 이 법을 얻으면, 일체의 탐욕 등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다시 생기지 않기 때문에 임시로 이 거친 명칭을 빌려 미세한 이치를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이치를 알 수 있으니, 이 때문에 경 속에서 이렇게 설하신 것이다.【문】어떻게 이 열반이 지극히 미세한 것이라고 아는가?
【답】대선(大仙)께서는 법을 설하시기를 좋아하지 않고, 분별없는 성스러운 지혜로 알기 때문이다. 대사(大師)께서 열반의 지극히 미세함을 관하시기 때문이고 중생들의 근기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관하시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마음을 적정(寂靜)에 회향하고 열반에 들어가서 법을 설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경에 설하기를, “내가 어찌 법을 설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들어가겠느냐.”고 하셨다. 그리고 분별없는 성스러운 지혜로 아는 것이란, 마건지경(摩健持經)에 설한 것과 같다. 그 경에 설하기를, “세존이시여, 만약에 열반이 있는 것이라면, 지금 저 자신이 총명하고 영리한 지혜가 있는데 어째서 볼 수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열반은 진실로 있는 것이지만, 네가 지금 분별없는 성스러운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미세하기 때문에 듣는 지혜(聞慧)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진실하기 때문에 사변적 지혜(思慧)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사변적 지혜란 진여와 세속의 이치를 쌍으로 통달하기 때문에 미묘한 이치의 무사변적 경계에 미칠 수 없다. 매우 깊기 때문에 세간에서 닦는 지혜(修慧)로써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닦는 지혜란 다만 얕은 이치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고, 아주 깊은 이치는 통달할 수 없다. 이 미세한 것을 언어(言語)로써 설할 수 없기 때문에 거친 이름을 빌어서 미묘한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고, 분별없는 성스러운 지혜에 근거하여 보기 때문에 그 미묘라고 말하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외도≫ 만약에 이 열반이 도를 닦아서 얻는 것이라면 도를 닦지 못한 사람과는 상응(相應)할 수 없을 것이다. 상응하지 않는다면 이 때문에 공유할 수 없으며, 만약에 공유할 수 없다면, 이는 곧 무상(無常)한 것이 될 것이다.【답】현재 이전의 과거를 보면 없고, 후에는 이것이 있다면, 무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이치는 없고, 과거세에도 없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아직 도를 닦지 못했을 때에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생(無生)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도는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법은 도로 인해 이르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도가 능히 생기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도를 닦지 못했을 때에는 무(無)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무생(無生)의 이치가 성립하는 것이다. 열반은 미래세가 없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고 현세에는 업의 번뇌 등이 없기 때문에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 없으며, 생겨나거나 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 등의 세 가지 잘못이 없기 때문에 항상 머물러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외도들의 이른바 ‘원인이 없기 때문에 역시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라는 것과는 같지 않다. 바른 이치는 원인을 취하여 상주하는 법으로 삼지 않으니, 열반이 원인으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 있지 않는 것과 같다. 그대가 말하기를, “극미(隣虛) 등도 원인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런 이치가 없다. 왜냐하면 열반은 유무를 여읜 것이어서 네 가지 비방(四謗)이 미치지 않고, 원인을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항상 있을 수 있는 것이다.그대는 계탁하기를, ‘지극히 작은 물질도 이미 존재(有)가 있기 때문에 원인이 없을 수가 없다’고 하지만, 이 원인 있는 그것이 곧 무상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열반에 세 가지 잘못이 없기 때문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처럼, 지극히 작은 물질들도 세 가지 잘못이 없기 때문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증명하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반이 상주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물질과 같은 모양도 아니고 다른 모양도 아니다. 지극히 작은 물질일지라도 이는 분별이 있기 때문에 증명할 이치가 없는 것이고, 열반을 이루게 되는 것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그 열반이 상주하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물질 등이 상주한다면, 이것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다시, 지극히 작은 물질들도 성취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어떤 물질이고 단독으로 모여서는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성취되지 않는 이치는 곧 사대(四大)가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모이는 것이 또한 성취되지 않는다면, 이는 서로가 거칠기 때문이거나, 또는 모두가 지극히 작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에 열반을 여읜다면, 어떤 법도 상주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열반이 실유로서 항상 머무는 것은 방편에 의지하여 해탈을 얻었기 때문이고, 수도는 헛되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열반이 있는 것은 과거세 따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상주하는 것은 물질 따위의 모양을 벗어나기 때문에 물질이 아니라고 설하고, 청량(淸凉)한 물질들의 모양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물질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설하고, 그 큰 작용은 분별없는 지혜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있다고 설하고, 또 세간을 뛰어난 위대한 정진으로 인하여 도를 성취하신 부처님만이 얻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있음을 알라. 경에서 “비구여, 이 법은 실로 있지만 생기지 않고 일어나지 않고 짓지 않고 무위법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열반은 진실로 항상 머무는 것일 줄을 알라.”고 설하신 것과 같다.. 이 법이 곧 여래의 전의(轉依)이니, 이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통틀어 포섭하는 마지막(總攝竟)이라 하고, 또는 상응(相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4. 변상분 ⑤

6) 분별품(分別品)
다시, 분별상의 의미를 마땅히 알라. 분별이란 것은 이 여래의 성품이 일체 법을 밝힘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如如)와 청정한 것이 그 공통된 모양이니, 반야경(般若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일체법이란 곧 세 가지 성품의 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란 세속의 진리가 진여이고 진여가 곧 세속의 진리로서 진속(真俗) 두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청정이란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원인속의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무구과(無垢果)의 지위를 얻지 못한 있는 그대로의 진리로, 이는 다시 더러운 때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원인과 결과가 함께 청정한 것은 이 원인 속에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것이니, 이는 무구과의 지위에 이르러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가 바로 불성의 공통된 모양이다.
이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등 여러 경에서 설하시기를, “이 불성에서 중생을 분별한다면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 불성을 증득하여 보지 못하는 것을 범부라 하고, 둘째 능히 불성을 증득하여 보는 이를 성인이라 하고, 셋째 불성을 증득하여 보고서 이 이치의 궁극적 청정함에 이른 이는 여래라 한다.”고 하셨다.다시 이 불성을 요약하건대, 중생으로서의 일삼는 것이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전도(顛倒) 일삼는 것이고, 둘째는 무전도(無顛倒)를 일삼는 것이고, 셋째는 전도됨과 산란함이 없이 분별하는 법으로써 바른 일을 삼는 것이다. 전도란, 일체 범부이고, 무전도란 일체 유학(有學)의 성인들이다. 전도됨도, 산란함도 없음이란 도후(道後)의 법신이다. 분별하는 법으로써 바른 일을 삼는 것이란 응신(應身), 화신(化身)의 두 몸이니 이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다 대비(大悲)와 근본 원력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범부를 말하는 것으로 세 가지 전도가 있다.
생각(想)과 견해(見)와 마음을 말한다. 곧 피부와 육체와 마음 등의 세 가지 번뇌 때문이다.둘째의 무전도라는 것은, 의혹도 없고 행(行)도 없는 것이니, 두 가지 전도가 없기 때문에, 곧 일체의 보살인 유학의 성인이다. 번뇌의 전도란, 진여와 배치되고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이름하여 번뇌에 전도된 것이라 한다. 행의 전도란, 2승(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상(常) 등의 네 가지 덕을 닦아서 네 가지 전도를 뒤집고 보리(菩提)의 도를 행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것을 닦지 않고 다만 무상(無常)과 고(苦) 등 만을 닦아서 해탈의 원인을 삼기 때문에 행의 전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승(小乘)의 편협된 수행이 없어야 할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두 가지 전도를 여의기 때문에 대승(大乘)의 유학 성인을 설하는 것이다.셋째의 전도됨도 없고 산란함도 없이 분별하는 법으로써 바른 일을 삼는 것이란, 선정ㆍ해탈과 일체 지혜 등 세 가지 장애를 제거하는 것으로 법계의 맑고 청정함을 말하는 것이다. 맑기 때문에 고요하고 청정하기 때문에 더러움이 없는 것이다. 대비와 본원의 바른 일을 버리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때문에 이 성품에 근거하여 중생을 분별하는 것을 분별상이라 한다.
4. 변상분 ⑥

7) 계위품(階位品)
다음으로는 계위상(階位相)에 대한 의미를 마땅히 알라. 계위의 의미란, 갖가지 법문 가운데에서 만약 무류(無流) 법계를 분별하여 자세히 설하면, 여섯 종류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자성(自性)이고, 둘째는 원인이고, 셋째는 결과이고, 넷째는 일이고, 다섯째는 총괄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분별하는 것이다.유전없는 법계, 그 자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먼저 자성을 설하는 것이고, 이 자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믿고 즐겨하는 등의 네 가지 수승한 원인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원인으로 말미암아 상주(常住) 등 네 가지 덕의 결과를 얻는 것이다. 불성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싫어하고 염오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을 즐겨 구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자성으로 말미암아 욕심을 여읠 수 있고 욕심을 여의는 원인을 얻는 것을 총섭이라고 한다. 불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세 종류의 중생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께서 설하신 8만 4천 법문이 이 여섯 종류에 다 섭수되는 것이다.그리고 그 차례가 세 가지 계위 가운데에 있으니, 세 가지 계위란 첫째 청정하기 않은 계위이니, 이것은 중생계를 말하고, 둘째 청정한 계위이니, 보살지를 말한다. 셋째 가장 청정한 계위이니 이것은 부처님의 계위이다.
때문에 무상의경(無上依經)에 설하시기를, “아난(阿難)아, 여래의 법계는 무량하고 무변하여 모든 번뇌 내용을 은폐하는 곳으로, 생사의 흐름을 따라 육도(六道)에 떠돌고 빠져 무시이래로 윤회 전전하니, 나는 이것을 이름하여 중생계(衆生界)라고 말한다. 아난아, 이 중생계가 생사의 괴로움을 염리하여 육진(六塵)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고 8만 4천의 법문과 모든 바라밀에 섭수되는 것에 의지하여 보리도를 닦으면, 나는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말한다. 아난아, 이 중생계가 이미 모든 번뇌의 내용을 여의고 일체의 괴로움을 벗어나서 더러운 때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궁극적으로 법과 같이 청정하고 맑으며 모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보고 미묘한 상위의 지위, 일체지의 지위,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비교할 수 없는 이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 능히 이미 법왕의 대자재력을 얻으면, 나는 이것을 이름하여 여래라고 한다.”고 하셨다.
4. 변상분 ⑦

8) 변만품(遍滿品)
다시 편만상에 대하여 마땅히 알라. 편만이란, 범부ㆍ성인과 모든 여래의 무분별성이 차례로 세 가지 계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첫째는 전도의 허망함이며, 둘째는 전도가 없는 성인의 도(聖道)이고, 셋째는 네 가지 덕이 지극히 청정한 것이다. 이 세 가지가 평등하고 통달한 상으로 모두 도리에 따라 편만하기 때문이다. 마치 흙ㆍ은ㆍ금 등의 그릇(器) 속에 허공이 두루 가득하고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법계는 세 가지 계위 가운데 두루 가득함도 또한 그와 같다. 이 때문에 계위의 차례에 따라 이 두루 가득함을 설하는 것이다. 무상의경(無上依經)에서 “아난이여, 이와 같이 여래의 법계는 세 가지 계위 가운데에서 모든 곳에서 평등하며 걸림이 없고 본래 적정(寂靜)한 것이 비유하면 마치 허공을 일체의 색 종류들이 덮을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하신 말씀과 같다. 흙ㆍ은ㆍ금 그릇에 허공이 담기는 것이 평등하여 모두 걸림이 없는 이것을 이름하여 두루 가득하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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