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보자] #6033 비바사론(鞞婆沙論) 9권
비바사론(鞞婆沙論) 9권
비바사론 제9권시타반니 지음
승가발징 한역32) 사성제처 ②부처님의 계경에 따르면 “마땅히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고, 아비담(阿毘曇)의 설명에 따르면 “만약 지혜로써 관한다면 모든 법을 알게 된다”고 하였는데, 왜 부처님은 유독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이에 대한 해답은 관하는 때[觀視]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두 종류의 때를 말하게 된다. 즉 관하는 때와 분별하는 때[分別時]가 그것이다. 관하는 때란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신 “마땅히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는 것이고 분별하는 때는 아비담에서 말한 “지혜로써 모든 법을 알게 된다”라는 것이다.또한 두 가지 수순(隨順)이 있으니, 관수순(觀隨順)과 분별수순(分別隨順)이다. 가령 관수순은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신 “마땅히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는 것이고, 분별수순은 아비담에서 말한 “지혜로써 모든 법을 알게 된다”라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한결같은 무루식(無漏識)인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마땅히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고 유루ㆍ무루지인 때문에 아비담에서는 ‘지혜로써 모든 법을 알게 된다’라고 말하였다. 유루ㆍ무루의 경우와 같이 쟁(諍)ㆍ무쟁(無諍)과 세간(世間)ㆍ출세간(出世間)의 경우와 세간에 머무는 것ㆍ생사를 여의는 것 등 이와 같은 모든 경우를 곧 다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속의 수법(受法)을 알기 때문에 여기서 두 종류의 지(知)를 말한다. 즉 세속의 수법을 아는 것과 최고의 수법[第一義數]를 아는 것, 두 종류가 그것이다. 세속의 수법을 아는 것의 경우 이와 같은 것이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신 ‘마땅히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최고의 수법을 아는 것의 경우 아비담에서 말한 ‘지혜로써 모든 법을 알게 된다’라는 것이다. 어떻게 세속의 수법이 ‘마땅히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말씀임을 알게 되는가? 고의 과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곧 집제를 끊는 것이 결(結)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세속의 수법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최고의 수법인가? 모든 공덕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결을 소멸하고 증과(證果)를 이루어 능히 모든 세간의 근본을 제거하는 것이 수도이다”라고 하였다.존자 바사(婆奢)는 말하기를 “부처님은 ‘마땅히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셨고, 아비담에서는 ‘지혜로써 모든 법을 알게 된다’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부처님은 ‘마땅히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셨을까?이에 대한 해답은 생사의 뿌리를 끊기 위해서 부처님은 ‘마땅히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즉 신견(身見)은 예순두 가지 편견의 뿌리이며 예순두 가지의 편견은 번뇌의 뿌리이고 번뇌는 행동의 뿌리이며 행동은 보응(報應)의 뿌리이다. 의보(依報)는 모든 생사윤회에 존재하는 것이며, 의보가 의보로 되고 나면 생사윤회 가운데 그 근거가 되어 거기에 문득 선법(善法)과 악법(惡法)과 무기법(無記法)이 존재하게 된다. 이 생사윤회의 뿌리는 어떻게 끊어야 하는가? 오직 생사가 고통인 것을 아는 것만이 생사의 뿌리를 끊는 길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고제를 알게 되면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아니한다. 만약 그 수행하는 사람이 고제를 알고 나서는 아직 집제를 끊지 못하였을 경우 거기서 고가 일어나며 고가 일어나면 마음속으로 묻기론 ‘이 오음(五陰)은 항상한 것인가, 항상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묻게 되고, 거기서 ‘항상하나니, 한시도 머물지 않는다’고 말해 주면 ‘이는 즐거운 것인가, 고통인가?’라고 다시 마음속에 물어 본다. 거기서 ‘고통이다’라는 해답을 얻게 되면 ‘마치 뜨거운 무쇠덩이와 같은 것인데 이것이 청정한 것인가, 더러운 것인가?’를 다시 스스로 물어 보고 그것이 더럽기가 똥 같은 것이란 해답을 얻게 된다.그리하여 다시 이 가운데서 ‘자아는 존재하는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가?’를 스스로 묻고 거기서 아니라는 해답이 나오면 중생도 중생이 아니고 목숨도 목숨이 아니며 사람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음(陰)의 내부가 공허하매 자체 작용도 없고 타율적인 자용도 없으며 감각도 없고 타율적인 감각도 없으며 행(行)이 모여들어도 공하여 청정함을 알게 된다. 수행하는 사람이 고제를 알게 되면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5음에 대한 집작을 끊기 위해서 부처님은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본제(本際)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은 5음으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으며 5음 속에서 어리석어져 문득 5음에 애착을 갖게 되고 아까워한다. 비유하면 마치 저 어린아이들이 부모가 손을 잡아 주면 문득 부모를 껴안는 것과 같다.이와 같이 그 본제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중생들이 5음으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5음 속에서 어리석어져 도리어 5음에 애착을 갖게 되고 아까워하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중생들이 5음을 이용하지 않도록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음이 고통임을 알게 되면 5음 속에서 다시 애착을 느끼지 않게 된다. 이것이 5음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유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본제를 알지 못하기에 중생들은 이와 같이 5음에서 나[我]를 헤아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중생을 헤아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모임의 모습[聚相]을 헤아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자별을 헤아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인간의 존재를 헤아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운명을 헤아리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나를 헤아리는 생각과 중생을 헤아리는 생각과 모임의 모습을 헤아리는 생각과 다른 사람과의 차별을 헤아리는 생각과 인간의 존재를 헤아리는 생각과 운명을 헤아리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제지해야만 비로소 전도되지 않은 법에 대한 생각 속에 들어가게 되는가? 오직 그것이 고통임을 아는 것만이 유일한 길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본제를 알지 못하기에 이 중생들은 5음에서 항상한 그 무엇이 있다고 헤아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5음이 즐겁다는 생각, 5음이 청정하다는 생각, 5음이 내 것[我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항상한 것이 있다고 헤아리는 생각과 즐겁다는 생각, 청정하다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제거하여야만 비로소 전도되지 않은 법의 생각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오직 5음이 고통임을 알아야만 이것으로 전도된 생각을 끊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고제(苦諦)를 알게 되면 그 이치[義]로써 불법 가운데의 법은 안에 들어가게 되고 불법 가운데에 들어가게 된다. 불법 가운데 들어가면 법에 대하여 막힘이 없고 자유자재한 경지를 이른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고제를 알게 되면 다른 스승을 따르지 아니하고, 다른 복전(福田)을 찾지 아니하게 된다. 그렁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고제를 알게 되면 불법 가운데 머물러 마치 당(幢)을 달아 세우는 대가 땅 속에 깊숙이 들어간 것과 같이 흔들리지 아니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고제를 알게 되면 일찍이 행하던 인연을 버리고 일찍이 행하지 못하였던 인연을 얻게 되고 같은 행[同行]을 버리고 나서 같지 아니한 행[不同行]을 얻게 되고 공통된 행[共行]을 버리고 독자적인 행[不共行]을 얻게 되며 세간의 행[世行]을 버리고 세간을 벗어난 행[出世行]을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고제를 알게 되면 지니고 있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며 지니고 있던 경계를 버리고 새로운 경계를 얻게 되고 지니고 있던 성품을 버리고 새로운 성품을 얻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고제를 알게 되면 오인 종류(五人種類)를 버리고 팔인 종류(八人種類)를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이 고제를 알게 되면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의 악행(惡行)과 사견(邪見)과 뒤바뀐 산란한 마음과 그 마음의 수법으로 생기는 법이 무엇으로부터 찾아와 머물게 되었는가?를 물어 보면 오직 그것이 고통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고통이라 하는 것은 그 본질이 불로 태우는 것과 같고 독해(毒害)를 입는 것과 같으며 칼로 자르는 것과 같고 약탈당하고 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으며 변방[邊]의 도적들의 성(城)과 같기에 그것이 결(結)을 이루면 침해를 받는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고제를 알게 되면 곧 집제(集諦)를 끊게 된다고 하는 것은 한결같이 미래의 세계에서의 애착을 끊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집제(集諦:習諦)라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해답과 같이 애착심을 말하는 것이니, 이 가운데서 모든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집제만 끊는 것이 아니라 고통도 역시 끊어지게 하고자 하신 것이며 앞의 해답에서 말한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신 말씀은 이 가운데서 그 모두에 대한 해답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두 가지 논의 가운데 이 논리가 해답에 해당된다.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집제를 끊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원인을 끊게 되면 결과도 역시 끊어지고 원인에서 벗어나면 결과에서도 벗어나며 원인을 버리면 결과도 역시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마땅히 집제를 끊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집제를 끊을 때는 두 가지 원인이 함께 뽑혀진다. 얽매게 하는 두 가지 인연이 바로 흩어지며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까지의 번뇌가 뽑아진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음속에 집제가 일어나면 두루 삼계에 고통이 된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고통을 받지 아니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집제를 끊어야 한다. 집제를 끊게 되면 다시는 두루 삼계에서 고통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집제 가운데의 삼계에는 번뇌에 젖은 중(中)ㆍ상(上)의 과보가 있다. 이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삼계에서 과보를 받지 아니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집제를 끊어야 한다. 집제를 끊게 되면 삼계에서 과보를 받지 아니하게 된다’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집제로부터 흐름[流]이 일어나며 삼계의 고통은 샘과 같아서 굴속에서 나오는 물이 밖으로 넘치게 된다. 지혜 있는 사람은 말하기를 ‘물이 밖으로 나오지 아니하게 하려면 마땅히 그 근원을 막아야 한다. 근원을 막게 되면 물은 곧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저 집제 속에서 넘쳐 나온 흐름이 삼계에 두루한 고통이 되기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고통을 받지 아니하고자 한다면 집제를 끊어야 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집제를 끊게 되면 다시는 흐름이 삼계의 고통이 되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5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마땅히 집제를 끊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올라갈 경우 지혜 있는 사람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여보시오. 만약 몸을 무겁지 않게 하려면 속히 맡은 짐을 버리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맡은 짐을 버리고 나면 무거운 것은 아래로 떨어져 내릴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중생들도 5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생사의 길을 밟고 가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이여, 만약 무거운 5음이라는 짐을 지고 싶지 않다면 마땅히 집제를 끊어야 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집제를 끊게 되면 5음이라는 짐은 떨어져 내리고 다시는 성취되지 않는다. 이것이 무거운 5음의 짐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마땅히 집제를 끊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이다”라고 하였다.다음 멸제(滅諦)를 증득한다고 하는 것은 아비담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무루의 법[無漏法]에서 증득을 이룬다”라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멸제로 증득을 이룬다고 말씀하셨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해탈하면 상(相)에 얽매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원인은 결과에 미치게 되지만 결과 가운데 원인은 없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원인도 함께 일어난 원인이 아니고 결과도 함께 얻는 결과가 아니며 인연도 함께 하는 인연이 아니고 지어진 것도 함께 지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문(沙門)이었으나 과보는 사문이 아니며, 범중(梵衆:淸淨 大衆)이었으나 과보는 범중이 아니며, 청정행을 닦았지만 과보는 청정행이 아니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늘 항상하고 변하고 바뀌어지지 아니하여 생사의 윤회를 벗어난 경지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한맛을 지닌 특이한 도과(道果)며 모든 색이 청정한 까닭에 무상(無上)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괴로움[三苦]에서 벗어나 네 가지 공덕[四德:常ㆍ樂ㆍ我ㆍ淨]을 이루고 5음을 버린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멸제(滅諦)에서 증험(證驗)을 짓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다음 도제(道諦)를 사유(思惟)한다고 하는 것은 아비담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거룩한 무루법을 깊이 생각한다”라고 하였는데 왜 부처님은 ‘도제를 사유한다’라고 말씀하셨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사유(思惟)라고 하는 것에 두 가지 구별이 있다. 즉 득사유(得思惟)와 복사유(服思惟)가 그것이다. 세속의 도에서는 비록 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네 가지를 사유하여야 한다. 즉 득사유(得思惟)ㆍ복사유(服思惟)ㆍ단사유(斷思惟)ㆍ사사유(捨思惟)가 그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도제를 사유한다고 하는 것은 선(善)이고 선과(善果)를 얻고자 함이다. 도(道)는 선과이며, 신애(信愛)이고 신애의 과보이며, 의요(意樂)이고 의요의 과보이며, 의욕(意欲)이고 의촉의 과보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도(邪道)가 아니고 오로지 열반으로 향하는 길인가를 따져보고 바로잡는 일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성문(聲聞)은 성문의 과보를 얻고 범중(梵衆)은 범중의 과보를 얻고 범행(梵行)은 범행의 과보를 얻는 함께 하는 과보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안온하고 즐겁게 열반으로 나아가는 일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탐내지 않는 것으로 탐욕을 제거하고 노여워하지 않는 것으로 노여움을 제거하고 어리석지 않는 것으로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유는 능히 번뇌를 소멸하고 허물고 타파할 수 있다. 이 세속의 도에는 비곡 사유가 있다 하더라도 다만 수(受)를 늘려서 유(有)를 기르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유는 능히 유(有)의 상속을 끊고 생사윤회를 끊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세속의 도에는 사유(思惟)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유(有)가 상속하여 생ㆍ노ㆍ사에 윤회하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유는 몸에 대한 집착[身見]의 종자가 아니며 전도(顚倒)된 견해의 종자가 아니며 애착심의 종자가 아니며 번뇌[使]의 종자가 아니며 탐욕이 있는 곳이 아니며 노여움이 있는 곳이 아니며 어리석음이 있는 곳이 아니며 더러운 것이 섞인 깃이 아니며 독약이 섞인 곳이 아니며 탁한 것이 섞인 곳이 아니며 유(有)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고제(苦諦)ㆍ집제(集諦)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생각을 말한 것이다. 세속의 도리에는 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신견(身見)의 종자가 되고 전도된 견해의 증자가 되고 애착의 종자가 되고 번뇌[使]의 종자가 되고 탐욕이 있는 곳이며 노여움이 있는 곳이며 어리석음이 있는 곳이며 더러운 것이 섞인 곳이고 독약이 섞인 곳이고 탁한 것이 섞인 곳이며 유(有)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고제ㆍ집제에 떨어지는 생각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유(思惟)는 고통이 다하여 도로 나아가고 번뇌가 다하여 도로 나아가고 탐욕이 다하여 도로 나아가고 생사의 윤회가 다하여 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세속의 도에는 비록 사유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고통이 모여들어 나아가는 길이며 번뇌가 모여서 나아가는 길이며 탐욕이 모여서 나아가는 길이며 생사윤회가 거듭되면서 나아가는 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도제를 사유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는 세속의 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어떤 설명에 따르면 “이는 열여섯 가지의 성인의 행을 말한 것이다. 열여섯 가지의 성인의 행(行)이라 하는 것은 무상행(無常行)ㆍ고행(苦行)ㆍ공행(空行)ㆍ비아행(非我行)ㆍ인행(因行)ㆍ습행(習行)ㆍ유행(有行)ㆍ연행(緣行)ㆍ진행(盡行)ㆍ지행(止行)ㆍ묘행(妙行)ㆍ이행(離行)ㆍ도행(道行)ㆍ정행(正行)ㆍ취행(趣行)ㆍ출요행(出要行)을 말한다”라고 하였다.【문】이 열여섯 가지의 수행에 어떤 성품이 있는가?【답】일설(一說)에 의하면 지혜의 성품이 있다고 하였다. 지혜의 성품이라 하는 것은 이 지혜는 행(行)이니 능행(能行)이고 타소행(他所行)이다. 저 상응법(相應法)이 능행이고 타소행이라 하나 이는 행이 아니다. 그 성품이 지혜가 아닌 때문이다. 저 공유법(共有行)에 타소행이 있다고 하나 능행이 아니고 그 연(緣)이 함께 하지 않으므로 이 역시 행이 아니다. 그 성품이 지혜가 아닌 까닭에서이다.또 다르게 설명하면 심(心)과 심법(心法)의 성품을 예로 드니, 그가 말하는 심ㆍ심법의 성품이란 저 지혜의 행은 능행이고 타소행이다. 저 상응법이 능행이고 타소행이라 하나 이는 행이 아니다. 그 성품이 지혜가 아닌 때문이다. 저 공유법에 타소행이 있다하나 능행이 없고 그 연(緣)이 함께 하지 않으므로 이 역시 행이 아니다. 그 성품 자체가 지혜가 아닌 까닭에서이다. 첫 번째 설과 같이 두 번째 설도 그러하며 이와 같이 알에서 설명한 것처럼 지혜의 특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문】이름은 열여섯 가지 행상(行相)이지만 실제로 그 종류는 몇 가지인가?【답】일설에 의하면 이름은 열여섯 가지라도 행상의 종류는 일곱 가지라 한다. 즉 고의 행상은 이름도 네 종류며 종류도 네 가지다. 습제의 행상이라 하는 것은 이름은 네 가지라도 행상의 종류는 한 가지뿐이다. 또한 진제의 행상도 그 행은 네 가지로 표현되나 종류는 한 가지며 도제의 행상도 그 행상은 네 가지지만 종류는 한 가지다. 그런 까닭에 행상의 이름은 열여섯 가지라도 행상은 일곱 종류로 구분된다.【문】왜 고제(苦諦)의 행상은 이름도 네 가지며 실제로 그 행상도 네 가지인가?【답】이것은 전도를 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전도에 이름이 네 가지며 그 종류도 네 가지며 그 대치(對治)도 역시 네 가지 이름과 네 가지 종류가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설명한다면 이름도 열여섯 가지며 종류도 열여섯 가지로 구분되고 이름과 같이 종류도 같아진다. 이와 같이 이름의 수효도 여러 가지며 이름의 모습ㆍ종류의 모습에서 이름이 다르면 종류도 다르고 이름을 구별하면 종류도 구별되며 이름을 알게 되면 종류도 알게 된다. 이처럼 알아야 하리라. 이것이 모든 행상의 성품이다. 이미 종류와 모습과 바탕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성품을 설명하였으니, 마땅히 그 행상도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문】무엇 때문에 무상행(無常行)이라 말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마지막 행인 출요행(出要行)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말하게 되는가?【답】무상행(無常行)이라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즉 시사(時事)와 연사(緣事)가 그것이다. 시(時)란 것은, 특정한 시간에 이루어진 일은 다른 시간대에는 다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고, 연(緣)이란, 제법의 성품이 본래 무력(無力)이기에 인과 연을 추종하는 것이다.
다음 고행(苦行)이라 하는 것은 마치 등장의 병으로 근심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다음 공행(空行)이라 하는 것은 내부에 식용이 없고 작용을 시키는 일도 없으며 느낌도 없고 느끼게 하는 것도 없는 것을 말한다.
다음 비아행(非我行)이라 하는 것은 자유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 인행(因行)이라 하는 것은 종자(種子)의 법이기 때문이다.
다음 습행(習行)이라 하는 것은 미래에 다가오기 때문이다.
다음 유행(有行)이라 하는 것은 폭류(瀑流)이기 때문이다.
다음 연행(緣行)이라 하는 깃은 변화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흙덩어리를 손으로 옮겨 물과 합하게 하면 문득 기왓장이나 그릇을 이루는 것과 같나니, 역시 그런 것이다.
다음 진행(盡行)이라 하는 것은 5음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다음 지행(止行)이라 하는 것은 세 가지 불길[三火:탐ㆍ진ㆍ치]이 멎기 때문이다.
다음 묘행(妙行)이라 하는 것은 묘한 소원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다음 이행(離行)이라 하는 것은 이미 번뇌를 떠났으니, 다시 번뇌에서 떠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도행(道行)이라고 하는 것은 악도(惡道)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다음 정행(正行)이라 하는 것은 부정(不正)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다음 취행(趣行)이라 하는 것은 열반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다음 출요행(出要行)이라 하는 것은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또한 무상(無常)이라 하는 것은 마지막 구경(究竟)의 경지가 아닌 곳에 머물기 때문이며, 고행이라 하는 것은 힘들고 무거운 짐을 지기 때문이며, 공행(空行)이라 하는 것은 내 것이라는 편견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비아행(非我行)이라 하는 것은 ‘이것이 나’라고 하는 견해를 제거하기 때문이며, 또 인행(因行)이라 하는 것은 그 업이 미래에 다가오기 때문이며, 습행이라 하는 것은 인연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유행(有行)이라 하는 것은 얻을 수 있기 때문이고, 연행(緣行)이라 하는 것은 인연하는 곳을 따라가기 때문이며, 진행(盡行:滅行)이라 하는 것은 생사가 다하게 되기 때문이다.또한 지행(止行)이라 하는 것은 고통의 불길이 멎기 때문이며, 묘행(妙行)이라 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행(離行)이라 하는 것은 생사윤회를 벗어나기 때문이고, 도행(道行)이라 하는 것은 도를 구하기 때문이며, 정행(正行)이라 하는 것은 바른 경지에 머물기 때문이고, 취행(趣行)이라 하는 것은 성(城)으로 나아가 자리를 옮기지 아니하기 때문이며, 출요행이라 하는 것은 안온해지기 때문이다.【문】고제(苦諦)의 경우 무상행ㆍ고행ㆍ공행ㆍ비아행의 네 가지 행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왜 이것을 고제라 설명하고 무상제(無常諦)ㆍ공제(空諦)ㆍ비아제(非我諦)라고는 말하지 않는가?【답】이 행은 구원행(久遠行)으로서 이 행을 빗대어 과거의 삼야삼불(三耶三佛)은 고제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고행(苦行)이라 하는 것은 곧바로 고제(苦諦)에 떨어지는 것이며 다른 것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무상행(無常行)의 경우는 함께 삼제(三諦)에 떨어지며 공행(空行)과 비아행(非我行)은 함께 모든 법 가운데 떨어진다. 그러나 이 공행만은 모두가 같이 고제에 떨어지며 다른 진리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고제(苦諦)라 말하며 다른 것은 제라고 말하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고행은 지혜 있는 이건 어리석은 범부이건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고 이 법으로 외부의 법에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각(覺)과 소각(所覺), 행(行)과 소행(所行), 연(緣)과 소연(所緣), 근(根)과 위근(爲根)을 끊고자 하는 뜻으로 부처님은 계경에서 ‘고지(苦智)에 소연하는 바가 고제다’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행상(行相)이 자라나면 유를 버리고 능히 생사의 윤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아이에게 아주 맛있는 음식을 주면서도 만약 아이에게 아주 맛이 쓰다고 말해 준다면 그 아이는 곧 그 음식을 먹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제의 행상이 자라나면 유(有)를 버리고 능히 생사윤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고제(苦諦)를 설법하셨고, 무상제ㆍ공제ㆍ비아제를 말씀하시지 아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문】집제(集諦)의 경우 그 가운데 네 가지 행상이 있다. 즉 인행(因行)ㆍ습행(習行)ㆍ유행(有行)ㆍ연행(緣行)이 그것인데 부처님은 왜 집제(集諦:習諦)라고만 말씀하시고 인제(因諦)ㆍ유제(有諦)ㆍ연제(緣諦)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는가?【답】이 행상은 구원행으로서 이 행상을 과거의 삼야삼불(三耶三佛)은 집제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각(覺)과 소각(所覺), 행(行)과 소행(所行), 연(緣)과 소연(所緣), 근(根)과 위근(爲根)을 끊고자 하는 뜻에서 습지(習智)가 소연하는 바가 집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집제라고 말씀하시고 인제(因諦)ㆍ유제(有諦)ㆍ연제(緣諦)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라고 하였다.【문】멸제(滅諦)의 경우에도 거기에는 진행(盡行)ㆍ지행(止行)ㆍ묘행(妙行)ㆍ이행(離行)의 네 가지 행이 있는데, 왜 부처님은 이것을 멸제라고만 말씀하시고 지제(止諦)ㆍ묘제(妙諦)ㆍ이제(離諦)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는가?【답】이 행은 구원행(久遠行)으로서 이 행을 과거의 삼야삼불(三耶三佛)은 멸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각과 소각, 행과 소행, 연과 소연, 근과 위근을 끊고자 하는 뜻에서 계경에서 진지(盡智)가 소연하는 바가 진제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멸제라 말씀하시고 지제(止諦)ㆍ묘제(妙諦)ㆍ이제(離諦)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라고 하였다.【문】도제(道諦)의 경우에도 도행(道行)ㆍ취행(趣行)ㆍ정행(正行)ㆍ출요행(出要行) 등 네 가지 행이 있는데 왜 부처님은 도제라고만 말씀하시고 취제(趣諦)ㆍ정제(正諦)ㆍ출요제(出要諦)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는가?【답】이 행도 구원행으로서 이 행을 과거의 삼야삼불은 도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각과 소각, 행과 소행, 연과 소연, 근과 위근을 끊고자 하는 뜻에서 계경에서 도지(道智)에 소연하는 바가 도제(道諦)라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도제라 말씀하시고 정제(正諦)ㆍ취제(趣諦)ㆍ출요제(出要諦)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열반은 형상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문】왜 열반은 형상이 없다고 말하는가?【답】성인이 깨달아 터득하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고 말한다. 성인이 깨닫고 터득한 그 자재신(自在身)으로 증득하였기에 이를 중생들에게 논의하지 못한다. 그것을 말하였기 때문에 성인이 깨닫고 터득한 것이라 하며 그런 까닭에 형상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색을 떠난 경계이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색이란 네 가지 색을 말하는 것으로 네 가지 색이란 찰리족(刹利族)ㆍ범지(梵志)ㆍ거사(居士)ㆍ공사(工師)를 말한다. 또한 네 가지 색이란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흰 빛깔을 말하는데 열반 가운데는 그 어느 한 빛깔도 없다. 이는 모든 색에서 벗어난 것으로 그런 까닭에 형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찰리족(刹利族)이 도를 닦아 그가 도과를 얻거나 또는 바라문ㆍ거사(居士)ㆍ기술자가 도를 닦아 그들도 도과를 얻었을 경우, 이는 모든 색을 떠난 도과를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절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도 아니며 색에 근거하지도 아니하는 까닭에 형상이 없다고 말한다. 색법에 비록 형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형상이라기보다 심(心)ㆍ심수법(心數法)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근거하는 형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정한 형상이 아니다. 저 열반이라 하는 것도 역시 색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며 형상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칭송ㆍ찬탄한 까닭에 형상이 없다고 말하였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에게 많은 공덕이 있을 경우 이것을 설명하는 사람은 이 사람의 공덕이 많기 때문에 모두 다 설명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열반에도 한량없는 공덕이 있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곳에 두루한 공덕이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마니보주(摩尼寶珠)의 광명은 모든 곳을 두루 비추기 때문에 그것을 형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열반도 그 공덕이 모든 곳에 두루하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유위법에는 원인도 있고 결과도 있으나 열반이라 하는 것은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유위법(有爲法)에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를 말하게 되고 결과가 있기 때문에 원인을 말하게 되지만 열반이라 하는 것은 원인 때문에 결과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결과 때문에 원인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형상이 없다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또 열반이라 하는 것은 어떤 품계(品階)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문】왜 열반은 품계가 아닌가?【답】모든 품계가 단절된 경지인 까닭에 열반은 품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유위법(有爲法)에서는 혹 다섯 가지 혹 네 가지 품계를 만들어 법을 영구히 머물게 한다. 그 모든 유위법에는 그 법을 생산하는 다섯 가지의 일이 있다. 그리하여 그 법 가운데 태어나서 그 법 가운데 머물다가 그 법에서 늙고 그 법에서 죽게 된다.법으로 하여금 무상(無常)에 머물게 하려 할 경우 그 모든 유위법에는 각각 모두 이미 저 법을 생산하는 네 가지 일이 있다. 생(生)ㆍ노(老)ㆍ무상(無常)에서처럼 유위법에서는 품계가 만들어지지만 열반의 세계는 이와 같지 아니하다. 그런 까닭에 열반은 품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열반을 애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문】꽤 열반을 애착으로 설명하는가?【답】성인은 생사를 애착하지 아니한다. 열반은 생사를 벗어나기 때문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은 윤회를 애착하지 아니한다. 열반의 세계는 윤회를 벗어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은 5음을 애착하지 아니한다. 열반은 5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은 태어나는 것을 애착하지 아니한다. 열반은 태어나는 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은 늙고 죽는 일을 애착하지 아니한다. 열반은 늙고 죽는 일을 떠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은 열반을 애요(愛樂)한다. 그런 까닭에 열반을 애요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경의 설명에 따르면 계율과 해탈, 이것이 애요이다. 그 모든 것은 열반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열반을 애요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열반은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문】왜 열반은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답】유위법에서는 과보가 되기 매은에 익히게 된다. 그러나 열반의 세계에는 과보가 없다.【문】무엇 때문에 광명에 조복하는 행상을 말하는가?【답】지혜로 얻기 때문이다. 광명이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를 말한다. 이것을 연(緣)으로 하여 그에게서 인혜(忍慧)와 지혜(智慧)가 생긴다. 그런 까닭에 지혜를 빌미로 하여 성취한다고 말한 것이다. 또 열반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문】왜 열반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가?【답】법은 생각[意]에서 생기기에 이를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열반은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유위법에는 결과가 있기 때문에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열반에는 과보가 없기 때문에 사유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문】만약 열반이 생자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게송의 내용과는 어떻게 서로 통할 수 있는가?나무 밑에서 고요히 사유하니
그 생각이 열반에 들어갔네.
구담(瞿曇)은 선정(禪定)에 어지러움 없으니
오래지 아니하여 자취 멈추고 증득하리라.【답】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마음[心]을 이르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으로써 열반을 성취하여 증득을 이룬다. 또한 열반은 제일의라고도 하고, 지혜라 설명하기도 하고, 아라한이 얻는 과보라 설명하기도 한다.【문】왜 열반은 제일의(第一義)라괴 하는가?【답】가장 올바른 것이고 최고의 법이며 최고의 경계이고 최고의 등수(等數)이고, 최고의 이치이기 때문이다.【문】왜 열반을 지혜라 하는가?【답】지혜로 얻는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답】왜 열반을 아라한이 얻는 과보라 하는가?【답】공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열반을 아라한이 얻는 과보라 한다. 그리고 모든 세간의 청정한 공양을 모두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열반을 아라한이 얻는 과보라 부른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태어나지 아니하기 때문에 열반을 아라한이 얻는 과보라 부른다. 다시는 여러 세계, 여러 태어날 갈래[趣], 여러 생에 태어나 생사 가운데서 윤회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열반을 아라한의 과보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 열반은 가까운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계경에 따르면 “이 열다섯 가지의 법을 성취하여 지혜가 많고 견식도 높고 개침도 많아 열반 가까이에 머문다. 나는 말하나니 그들은 열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문】왜 연반을 가까운 것이라 말하는가?【답】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가깝다’고 말한다. 혹 열반을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진실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그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끊게 하기 위해서 이것은 종상(種相)을 갖춘 진실이라고 말해 준다. 이것이 진실하다고 일컫기 때문에 ‘가깝다’고 표현한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진하여 바르게 나아가고 평등한 한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경지이기 때문에 ‘가깝다’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에 ‘가깝다’고 말한다. 만약 찰리족(刹利族)이 도를 깊이 생각하여 거기서 도과(道果)를 얻거나 또는 바라문족(婆羅門族)이나 거사(居士), 기술자가 도를 깊이 생각해서 거기서 도과를 얻는다고 하디라도 이것은 평등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가깝다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한 장소가 평등하기 때문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만약 마을 안에서 도를 깊이 생각하여 거기서 도과를 얻거나 고요한 곳 나무 밑이나 적막하고 한적한 숲 속, 맨땅 위에 앉아서 도를 깊이 생각하여 그곳에서 도과를 얻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평등한 처소라 말하게 되기 때문에 가깝다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치가 가깝기 때문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다.《바수밀경(婆須蜜經)》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것이 먼 법인가? 과거와 미래의 법이 먼 법이다. 어떤 것이 가까운 법인가? 현재의 법과 무위법이 가까운 법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두고 이치가 가깝기 때문에 가깝다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까이서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는 까닭에 가깝다고 표현하였다. 즉 성인이 열반과 인연하면 거기에서 인혜(忍慧)와 지혜가 생겨 눈앞에 나타나 마치 열반의 세계가 눈앞에 있는 것[現在前]과 같아진다. 이것이 가까이서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가깝다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가깝다는 것은 현재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며 이 가운데서 열반의 경지가 일어나면 증득할 수 있다. 이것이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가깝다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버리는 일이 가까운 시일 안에 있게 되기 때문에 가깝다고 표현하였다. 가깝다는 것은 현재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며 이 세계를 떠나서 저 다른 세계로 들어가면 이것을 열반에 가깝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하나하나 말씀하신 내용과 같다. 한때 부처님은 바라내(波羅柰) 안에 계셨다.그때 부처님은 다섯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섯 비구들이여, 이 고제(苦諦)라 하는 것은 예전에는 듣지 못한 법이니, 곧 바른 사유를 할 때 지혜의 눈이 생겨나서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다. 다섯 비구들이여, 마땅히 이 고제라는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을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 지혜의 눈이 생겨나서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다.다섯 비구들이여, 나는 이미 고제라는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을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 지혜의 눈이 생겨나서 밝게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았느니라. 다섯 비구들이여, 집제(集諦)라는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을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는 지혜 눈이 생겨서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니 다섯 비구들은 마땅히 고제ㆍ집제를 끊어야 하며,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을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 지혜의 눈이 생겨서 밝게 깨닫게 된다. 다섯 비구들이여, 나는 이미 고제ㆍ집제를 끊고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을 곧 바르게 사유하였을 때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았느니라.다섯 비구들이여, 이 고통이 다하게 되면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을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니, 다섯 비구들은 그 고통이 다하게 되면 응당 증득할 것이다. 그리하여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을 바르게 사유하였을 때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되어야 하느니라. 다섯 비구들이여, 나는 이미 고통이 다하면 증득을 이루어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을 바르게 사유하는 때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았느니라.다섯 비구들이여, 이 고통이 다한 도제(道諦)도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이며 바르게 사유하는 때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니, 다섯 비구들은 응당 고통이 다한 도제를 사유하여야 하느니라. 예전에 듣지 못한 법도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다. 다섯 비구들이여, 나는 이미 고통이 다한 도제를 깊이 생각하여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을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았느니라.다섯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나의 이 사성제를 삼전(三轉)하여 십이행(十二行)이 되어도 미처 지혜의 눈이 생겨나 밝게 깨닫지 못하였다면, 다섯 비구들이여, 그런 까닭에 나는 하늘 세계와 인간 세계ㆍ악마 세계ㆍ범중(梵衆) 세계ㆍ성문(聲聞) 세계ㆍ바라문의 대중 가운데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해탈하지도 못하였으며 마음도 역시 전도(顚倒)된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생멸이 다하지 아니하였고 청정행(淸淨行)이 건립되지 아니하여 할 바를 다하지 못하였고 명(名)과 색(色)이 남아 있어 아직도 여여(如如)한 진리를 모르게 되리라. 다섯 비구들이여, 그런 까닭에 나는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겠느니라.다섯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나의 이 사성제를 삼전하여 십이행하게 되어 지혜의 눈이 생겨서 밝은 깨달음을 얻었다면 다섯 비구들이여, 그런 까닭에 나는 하늘 세계와 인간 세게ㆍ악마 세계와 범중 세계ㆍ성문 세계와 바라문의 대중 가운데서 이미 벗어나 이미 해탈을 얹고 마음이 전도되지 아니하였으며 생멸이 이미 다하고 청절행이 이미 건립되었으며 할 바를 마쳤고 명과 색이 없기에 이미 진여(眞如)를 증득하였다고 하리라. 다섯 비구들이여, 나는 스스로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깨달았느니라’이 법을 설하셨을 때, 존자 구린(拘隣)은 경계를 멀리하고 때 묻은 세계를 벗어나서 모든 법에서 법안(法眼)이 생겼으며 또한 8만의 하늘나라 사람들도 육진(六塵)을 멀리하고 때 묻은 마음에서 벗어나 모든 법문에서 법안이 생기게 되었다.그때 부처님께서 손자 구린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 구린은 법을 알았는가? 아직 알지 못하는가?‘라고 하시니 구린이 대답하기를 ‘이미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미 알았습니다. 선서(善逝)이시여’라고 하였다. 구린이 이미 법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아야구린(阿若拘隣)이라 부른다. 이 법을 들었을 때 지신(地神)이 소리 지르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이 외치기를 ‘여기에 부처님께서 선인(仙人)이 머무는 녹야원(鹿野苑) 안에서 법륜(法輪)을 굴리셨다. 이 법의 수레바퀴는 사문(沙門)ㆍ 바라문ㆍ하늘 세계ㆍ인간 세계ㆍ악마 세계ㆍ범중 세계 및 그 밖의 다른 세간에서 본래 아직 굴리지 못하였던 법륜이며 모든 천신(天神)들에게 이익이 되고 아수라(阿修羅)의 힘을 줄게 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대중들이 이 지신(地神)의 소리를 들고 나니 천신과 사천왕(四天王)과 삼십이천(三十二天)의 천신들과 염천(焰天)ㆍ도솔천(兜率天)ㆍ니마라천(尼摩羅天)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천신들도 큰 음성으로 소리치며 이르기를 ‘여기 부처님께서 선인이 머무는 녹야원(鹿野苑) 안에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셨으니 이는 사문(沙門)과 바라문ㆍ하늘 세계와 인간 세계ㆍ라마 세계ㆍ범중 세계 및 다른 세간에서 본래 굴리지 못하였던 법륜이며 모는 천신들에게 이익이 되고 아수라 대중들의 힘을 줄게 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그때 곧 그 잠깐 동안에 일시에 들려 온 소리가 범천에까지 사무치면서 ‘여기 부처님께서 선인이 머무는 녹야원 안에서 법륜을 굴리셨으니 이 법륜은 사문ㆍ바라문ㆍ하늘 세계와 인간 세계ㆍ악마 세계ㆍ범중 세계 및 그 밖의 다른 세간에서 본래 굴리지 못하였던 법륜이며 모든 천신들에게 이익을 주고 아수라의 힘이 줄게하는 법이다’고 하였다.”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셨기 때문에 이 경을 전법륜경(轉法輪經)이라 부른다. 존자 담마다라(曇摩多羅)는 설명하기를 “내가 부처님께서 여기서 설법하신 법문을 보니, 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내용이 사실과 어긋나지 아니하고 비유도 틀리지 아니한데 여기서 말한 것은 내용이 서로 어긋나며 순서가 맞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말씀과 같지 아니하며 벽지불(辟支佛)이나 성문(聲聞)의 법과도 같지 않은데도 아라한의 경지 위에서 세 번이나 미지근(未知根)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아라한의 경지 위에다 세 번이나 미지근을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나는 이 같은 설명을 폐기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그러나 여기서 말한 것은 부처님께서 3아승지겁을 수행하여 이루신 도를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또한 다른 증거도 있다. 다섯 비구가 8만 천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하는 것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이 경의 설법과는 내용이 서로 어긋나며 순서가 맞지 않고 부처님의 경지와도 같지 아니하며 벽지불이나 성문의 경지와도 같지 않은데도 아라한의 경지 위에다 세 번이나 미지근을 말하고 있다.어떻게 아라한의 경지 위에다 세 번이나 미지근을 말할 수 있을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비구들이여, 이 고제는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이나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는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미지근(未知根)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다섯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이 고제는 예전에 들지 못한 법이나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는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된다’라는 말씀은 이지근(已知根)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다섯 비구들이여, 나는 이미 고제라는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을 알고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되었느니라’라는 말씀은 무지근(無知根)을 말씀하신 것이다.이와 같이 하여 도제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이 세 번이나 미지근을 설하는데 어떻게 이와 같은 것이 아라한의 경지 위에서 세 번씩이나 미지근이 나타난다고 하는가? 이와 같이 여기서 말한 내용은 서로 어긋나며 순서가 맞지 않고 부처님의 경지와도 같지 아니하고 벽지불의 경지와도 같지 아니하며 성문의 경지와도 같지 아니하기에 이같이 논을 지었다.그래도 굽히지 않고 고쳐야 한다고 한다면 경문은 이러해야 한다. 즉 “다섯 비구들이여, 이 고통이 모이는 집제(集諦)와 이 고통이 소멸하는 멸제(滅諦)와 이 고통이 소멸하여 생기는 도제(道諦)는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이니, 곧 바르게 사유하면 그때 지혜의 눈이 생겨서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다. 다섯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그 고통은 마땅히 끊어야 하며 모여드는 집제가 소멸하면 등득을 이룰지니 도제를 사유할지어다. 이는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이나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는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다섯 비구들이여, 나는 이미 고제ㆍ집제가 끊어져 소멸하였음을 알고 이미 증득하였으며 이미 도제를 깊이 생각하였고 예전에 듣지 못한 법도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는 지혜의 눈이 생겨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았느니라”라고 하여야 할지니, 이러해야만 그 경전이 바로 될 것이다.마땅히 그렇게 표현하고 나서야 거기에 문득 3전(三轉)과 12행(十二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경우, 이 계경은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며 여러 대논사(大論師)들도 지혜가 있고 힘이 강한 사람은 경전의 내용을 고치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존자 담마다라가 경전의 내용을 고겼겠는가.【문】만약 이 경전을 고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내용은 서로 어긋나며 순서가 없고 부처님의 경지와도 같지 아니하고 벽지불이나 성문과도 같지 아니하여 아라한의 경지 위에서 세 번 통과하며 미지근(未知根)을 말하게 되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아라한의 경지 위를 세 번 통과하여 미지근이 눈앞에 나타나는가?【답】이는 두 가지 시기[時]를 설명한 것이니, 설법하는 시기와 관하는 시기이다. 가령 설법하는 시기의 경우에는 이와 같이 부처님이 계경에서 설법하시게 된다. 그러나 관하는 시기의 경우에는 이와 같이 담마다라가 말한 내용과 같게 된다. 이와 길이 풀이하고 나면 두 가지가 모두 좋은 견해다. 존자 승가바수(僧迦婆修)는 설명하기를 “이 경전 가운데서는 미지근(未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무지근(無知根)은 말하지 아니하였나”라고 하였다.【문】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이것은 어떤 것을 말한 것인가?【답】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문혜(聞慧)와 사혜(思慧)다.【문】이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다섯 비구들이여, 나의 이 사제(四諦)를 삼전하여 십이행한다면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되나니, 다섯 비구들이여, 나는 스스로 위없는 지극한 진실을 깨달았으며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等正覺]을 얻었다”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부처님이 문혜와 사혜로 위없는 지극리 진실한 등정각을 깨달을 수 있는가?【답】보살은 문혜와 사혜로써 극관법(極觀法)라 극생법(極生法)을 밝히게 된다. 이로써 법에 있어서 어리석음을 없애게 된다. 즉 이것은 보살이 위없이 지극히 진실한 등정각의 경지에서 여여한 등정각을 관하고 진여를 관하여 일을 마치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물에 젖은 가죽으로 얼굴을 덮고 있다가 그것을 벗어버리고 바라(婆羅:엷은 비단)로 얼굴을 가리는 것과 같다. 즉 장애물이 작아지면 얼굴 모양이 뚜렷해지는 것이다.이와 같이 보살은 문혜와 사혜로 극관법과 극생법을 자근서 법에 있어서 어리석음을 없애게 된다. 이것이 보살이 위없이 지극히 진실한 등정각에서 여여한 등정각을 관하고 진여를 관하여 일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경에서 말한 “다섯 비구들이여, 나의 이 사제의 경우 3전 12행으로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문】이와 같이 된다면 마땅히 십이전(十二轉)하여 사십팔행(四十八行)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가령 경에서 “다섯 비구들이여, 이 고제(苦諦)는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이나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는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된다”라고 말한 이것은 일전(一轉)으로 네 가지 행(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또한 “다섯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이지만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는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되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두 번째로 굴리신 법륜이며 여기에도 네 가지 행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다섯 비구들이여, 나는 이미 고제는 예전에 듣지 못한 법이지만 곧 바르게 사유하는 때는 지혜의 눈이 생겨 밝게 깨닫게 되는 것을 알았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세 번째로 굴리신 법륜이며 여기에도 네 가지의 행이 있다. 이것은 고제(苦諦)에 관하여 세 번 법륜을 굴리시면서 열두 가지의 행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고제의 경우와 같이 도제(道諦)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과와 같이 되는데 이럴게 되면 십이전(十二轉)하여 사십팔행(四十八行)이 존재하게 되는데 부처님은 왜 사제(四諦)를 삼전(三轉)하여 십이행(十二行)을 이룬다고 하셨는가?【답】삼전(三轉)하여 열두 가지의 법이 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세 번 굴려 열두 가지의 행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며 그 하나하나의 진리를 관하는 까닭에 부처님은 4제를 삼전하여 12행이 된다고 말씀하셨다.다른 경전의 경우에는 비구들에게 설법하시기를 “일곱 곳에서 세 가지 이치를 잘 관하면 빠르게 이 법 가운데서 누진통(漏盡通)을 얻게 된다”고 하셨으나, 일곱 곳에만 선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서른다섯 곳에 선법이 있어야 하며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 선법이 있어야 하지만 그 수많은 법이 오직 일곱 가지 법으로 요약되며 일곱 가지를 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의 음(陰)을 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일곱 곳의 선법 가운데 세 종류의 이치를 관하면 빠른 시일 안에 이 법 가운데서 누진통의 경지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또 다른 경전의 경우에도 일곱 번 왕래하는 수다원의 경우가 있으나, 오직 법이 일곱 가지의 환유(還有)와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의 세계가 요약하면 일곱 종류에 지나지 않나니 그래서 부처님은 일곱 가지에 국한하고 궁극적으로 일곱 가지의 유의 세계로 되돌아와서 수다원(須陀洹)을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또 다른 경전의 경우 설법하시매 즉 안(眼)과 색 두 가지를 말했으니 이(耳)와 성(聖)ㆍ비(鼻)와 향(香)ㆍ설(舌)과 미(味), 신(身)과 세활(細滑), 의(意)와 법(法)이 있기에 마땅히 하나의 두 가지가 아닌 여섯 종류의 두 가지를 말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법을 두 가지로 나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육입(六入)의 하나하나를 관하기 때문이고 안과 색이기 때문이고 의와 법이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이 4제(諦)의 경우도 법륜을 세 번 굴려 열두 가지 행을 이루기 때문에 4제가 모두 세 번 회전하여 열두 가지의 행을 넘어서지 아니하며 그 사이에 하나하나의 진리를 관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4제는 3전 12행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 눈이 생긴다[生眼]고 하는 것은 진리를 보기 때문이며, 지혜가 생긴다[生智]고 하는 것은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며, 밝음이 생긴다[生明]고 하는 것은 거울처럼 비추어 보기 때문이며, 깨달음이 생긴다[生覺]고 하는 것은 끝까지 깨진다는 것이다.또한 눈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고법인(苦法忍)을 말한 것이며, 지혜가 생긴다고 하는 것은 고법지(苦法智)를 말한 것이며, 밝음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고미지인(苦未知忍)을 말한 것이며, 깨달음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고미지지(苦未知智)를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도제(道諦)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렇다.
또 경의 말씀처럼 “구린아, 법을 알았는가?“라고 하시니, 구린이 대답하기를 “이미 알았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미 알았습니다. 부처님이시여”라고 하였다.【문】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존자 구린에게 알았는가라고 물어 보셨는가?【답】구린으로 하여금 전생의 서원(誓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관계를 설명한다면, 보살이 전생에 그 이름이 인욕 선인(忍辱仙人)이었다. 그는 산림(山林) 속에 머물면서 사유하여 인욕을 행하고 있었다. 그때 한 임금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가람부(迦藍浮)라 하였다. 어느 날 그 임금은 여러 부인과 가족을 거느리고 그들에 에워싸여서 그 산림에 이르렀으며 그 일행에는 남자는 없었고 순전히 부인들과 더불어 오욕(五慾)의 즐거움을 스스로 즐기다가 그 오락이 끝나자 임금은 극도로 피곤하여 자리에 누웠다.여러 부인들은 임금이 이미 잠든 것을 알고 임금을 버리고 꽃을 찾아 그 산 속에 노닐다가 멀리 한 곳에 보살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보살은 얼굴 모습이 단정하고 마치 해나 달과 같아서 숲을 비추면서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이 보살을 보고 나서 부인들은 곧 보살이 있는 곳을 찾아가 머리와 얼굴이 땅에 닿게 보살의 발 아래에 절을 하고 나서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이에 보살은 이들을 위하여 설법하기를 “애욕(愛慾)은 더러운 것이다. 여기 있는 여러 누이들이여, 애욕이란 더럽고 냄새 나는 곳이고 싫어해야 할 대상이며 이 애욕으로 인하여 노여움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한량없는 괴로움이 생긴다”라고 하면서 이와 같이 애욕이 더럽다는 것을 자세히 설법하였다.그때 가람부왕이 잠에서 깨어나 여러 부인들이 보이지 아니하자 그는 ‘쯧쯧, 이것은 재앙이로다. 누가 여러 부인들을 거느리고 갔을까?’라고 생각하고, 칼을 들고 산 속을 찾아다니다가 멀리 그들이 보살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그는 ‘이 큰 귀신이 데려 갔구나’라고 생각하고 오랫동안 보살을 보니 얼굴 모습이 단정하였고 여러 부인들은 보살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보고 나서 그는 지극히 노여움이 생겨서 곧 보살이 있는 곳에 이르러 보살에게 물었다.
“선인(仙人)은 유상무상(有想無想)의 경지를 얻었는가?”보살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대왕이시여.”왕이 물었다.
“그렇다면 선인은 불용처(不用處)ㆍ식처(識處)ㆍ공처(空處)의 경지를 얻었는가?”보살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대왕이시여.”“그렇다면 선인은 사선(四禪)ㆍ삼선(三禪)ㆍ이선(二禪)ㆍ초선(初禪)의 경지를 얻었는가?”“아닙니다. 대왕이시여.”이에 왕은 생각했다.
‘쯧쯧, 이것도 재앙이구나! 아직 번뇌[結]도 버리지 못한 사람이 나의 부인들을 만나고 있구나.’
그리고 왕이 보살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 텅 비고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한 공덕도 얻지 못하였는가?”보살이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나는 인욕(忍辱)을 수행하고 있습니다.”이에 왕은 생각하였다.
‘이 사람은 내가 성이 난 것을 보고 참는 수행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부드러운 말로 하여서는 안 되겠다. 이 사람의 참는 수행을 시험해 보자.’
그리고는 왕은 보살을 향해서 말하기를 “선인이 만약 참는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오른손을 뻗어 보라. 내가 그대가 어떻게 참는지 봐야 하겠다.”라고 하였다. 보살은 노여운 생각이 없었기에 곧 오른팔을 뻗었고 왕은 자비한 마음이 없어서 후세의 받을 과보에 대한 생각이 없이 지극히 악독한 마음이 일어나서 날카로운 칼로 손을 잘라 발밑에 던졌다. 이와 같이 하여 왼손과 두 발과 귀ㆍ코를 자르고 난 다음 말했다.
“선인은 무엇이 소원인가?”보살이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다만 피로한 생각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대가 나의 몸을 깨알처럼 부순다고 하더라도 나는 끝내 참는 수행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며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듯 할 것이니, 오직 대왕께서는 나의 서원(誓願)을 들어 주시고 그대는 나의 허물없는 몸을 취하여 날카로운 칼로 일곱 토막으로 나누시오. 그렇게 하면 내가 처음 불법을 얻자마자 큰 자비심을 일으켜 일곱 종류의 도를 사유케 하여 그대의 일곱 가지 결사(結使)를 끊어 줄 것이오.”
왕은 악한 일을 하고 나서 그곳을 떠나 되돌아갔다.그때 그 산 속에는 또 다른 선인(仙人)이 그 근처 산에 있었다. 그는 가람부왕이 인욕 선인(忍辱仙人)에게 악행을 가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그 인욕 선인이 있는 곳을 찾아와서 물었다.
“선인께서는 몸의 고통이 지극히 근심되지 아니합니까?”이에 인욕선인이 대답했다
“나는 고통이 없습니다.”다시 그 선인이 물었다.
“발이 있으므로 걸어다니게 되고 손이 있으므로 주고받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대는 손과 발이 없고 귀와 코가 없이 일곱 토막을 낸 나머지 몸으로 어떻게 고통이 없다고 말합니까?”“몸이 허물어진 것으로 그것을 고통이라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허물어져야 그것이 곧 고통입니다. 즉 지옥ㆍ축생ㆍ아귀 등 악한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 고통인 것입니다. 또한 그대들에게 만야 나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상처난 곳을 보시오. 피가 청정한 것이 마치 우유와 같이 흘러나오지 않습니까?”“그대는 곤욕을 당할 때 어떤 생각을 닦았습니까?”“그 왕이 날카로운 칼로 내 몸의 사지(四肢) 관절을 자를 때 나는 모든 중생에 대한 큰 자비심을 닦았습니다.”“훌륭하고도 훌륭하십니다. 큰 행을 닦고 익혔습니다. 그대는 이 수행으로 인하여 모든 세간 사람들에게 큰 이익을 주었습니다.”그 선인은 도살을 위로한 다음 그가 머무는 곳으로 곧 되돌아갔다. 그 선인이 돌아간 지 오래지 아니하여 사천왕(四天王)이 지극히 큰 얼음ㆍ우박ㆍ바람과 비를 일으키고 나서 인욕 선인이 있는 곳에 이르러 인욕 선인을 향하여 말하였다.
“선인이시여, 곧 우리들에게 명령하여 주십시오. 우리들이 곧 저 가람부왕과 그의 처자ㆍ권속ㆍ국토ㆍ백성을 파괴하겠습니다.”이 말을 듣자 인욕선인이 몸의 털이 곤두서서 말하였다.
“나의 손ㆍ발ㆍ귀ㆍ코를 자르고 나의 몸을 일곱 토막으로 끊었다고 해서 나는 그에게 털끝만큼도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그의 나라의 백성들이야 나에게 대하여 허물이 없는데도 그들에게 때를 가하려 하겠는가?”이에 사천왕이 말하였다.
“만약 악한 보복을 행하고자 하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시름과 슬픔 속에서 이 산림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인욕 선인이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그 가람부왕이란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런 악한 행동을 하였는지 근심이 되고 염려가 될 따름이다. 즉 그는 곧 지옥의 지극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보살은 다음 세상의 몸으로 바뀌게 되면 마침내 악마를 항복시켜 위없는 가장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존사 구린(拘隣)을 위하여 설법하게 될 것이다.”그래서 존자 구린이 육진(六塵)을 멀리하고 때 묻은 세계를 벗어나 제법(諸法)의 법안(法眼)이 생기게 되자 그에게 말해 주기를 “구린아, 예전 일을 말해 주마. 예선에 나의 손과 발과 귀와 코를 자르고 몸을 잘라 일곱 토막을 냈을 때 나는 서원하기를 ‘그대가 허물없는 사람을 취하여 몸을 일곱 토막을 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불법을 얻었고 오래지 아니하여 큰 자비심을 얻어 일곱 가지 도를 닦아 그대의 일곱 가지 결사(結使:번뇌)를 끊어 주겠다’라고 하였다. 이 예전에 한 서원이 지금의 과보가 되었겠느냐?”라고 하시니, 존자 구린은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며 대답하기를 “진정 과보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진정 과보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라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이 예전의 서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구린에게 “이제 법을 알았는가?”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만약 존자 구린이 견도(見道)의 법을 얻는다면 그때 부처님께서는 미래의 세계에서 어느 것이 많은가를 관하게 할 것이다. 즉 내가 3아승지겁에 닦은 공덕이 많은가? 구린이 받을 미래의 세계의 십팔계(十八界)ㆍ십이입(十二入)ㆍ오음(五陰)이 많은가를 관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구린이 받을 한 번의 아비지옥의 18계ㆍ12입ㆍ5음의 과보가 많더라도 부처님이 닦은 3아승지겁의 한 때에 닦은 공덕이 더 많은 것을 관하시고는 생각하시기를 ‘나의 3아승지겁에 걸친 고행은 다른 일을 하지 아니하고 다만 구린이 그러한 고통받는 곳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 3아승지겁의 고행의 결과 그 소원이 이미 다 이루어졌다’라고 하신 것이다.또 관하시기를 ‘구린 비구는 마땅히 모든 중생들을 해칠 것이며 모든 중생들도 곧 구린을 해칠 것이며 구린 비구는 모든 중생들을 잡아먹을 것이며 모든 중생들도 구린을 잡아먹을 것이고 구린 비구는 모든 중생들을 속박할 것이며 모든 중생들도 구린을 속박할 것이다. 내가 만약 3아승지겁에 걸친 고행만으로 다른 일을 짓지 아니하여 오직 구린을 그 고난받는 곳에 벗어나게만 한다면 나의 3아승지겁에 걸친 과보와 소원은 이미 끝난 것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이것이 부처님이 바라내(波羅奈)의 선인이 머무는 녹야원 안에서 굴리신 법륜인 것이다.【문】법륜을 굴리시는 곳은 모든 부처님에게 장소가 정해진 것인가, 정해지지 아니한 것인가? 만약 정해진 장소가 있다면《정광여래경(定光如來經)》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그 경에서 말하기를 “정광여래는 집착한 곳이 없는 평등한 깨달음으로 등왕성(燈王城)ㆍ아리나산(阿梨那山)에서 법륜을 굴리셨다”고 하였다. 또 만약 장소가 정해지지 아니하였다면 존자 법실(法實)의 게송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그는 게송에서 말했다.이곳은 과거의 부처님이
제일 처음 설법한 곳이다.그는 이렇게 논서를 지었다.【답】법륜을 굴린 곳은 정해지지 아니하였다.【문】그렇다면《정광여래경》과는 잘 상통되겠지만 존자 법실의 게송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답】이것은 서로 상통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경전이 아니며 비니(毘尼)도 아니며 아비담도 아니다. 다만 그 게송을 지은 사람이 구절의 내용을 경전과 부합시키려 하였을 따름이다. 이와는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항상 정해진 자리가 있다”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은 늘 정해진 자리에 처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는 금강(金剛)의 자리에 처하시고, 두 번째는 법륜을 굴리실 자리에 처하시고, 세 번째는 하늘 위에서 내려온 자리에 처하시는 것이다.【문】어떻게 금강의 자리에 처하신다는 것이 정해진 자리임을 아는가?【답】경전에 이에 관한 설명이 있으니, “과거 시대에 정생왕(頂生王)이라는 임금이 있었는데 과는 사방천하를 거느리고 자유자재한 경지를 얻어서 네 종류의 군대와 더불어 하늘 위에 이르고자 하였다. 그때 수레바퀴를 허공에 머물게 하고나니 모든 네 종류의 군대들도 역시 허공에 머물게 되었다. 군대가 허공에 머물게 되니 정생왕은 문득 두려운 마음이 생겨 몸의 털이 곤두섰다.이에 왕은 생각하기를 ‘장차 나라도 잃어버리고 목숨도 일찍 죽게 되지는 않을까? 모든 천신(天神)들이 나를 만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라고 하였다.이에 그 곳 공중의 천신이 정생왕을 위로하며 말했다.
‘대왕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대왕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요, 목숨이 짧아지지도 아니할 것이요, 모든 천신들이 정생왕을 만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이 아닙니다.’이에 왕이 물었다.
‘천신이여, 나에게 만약 이것이 재앙과 근심이 되지 아니한다면 무엇 때문에 수레바퀴가 공중에 머무는 것입니까?’천신이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이곳은 모든 항하의 모래처럼 수많은 부처가 집착하는 곳이 없는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악마를 항복 받는 곳이며 관속(官屬)들도 이미 위없는 가장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곳은 모든 중생들이 아무도 이곳을 지나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수레바퀴가 공중에 머문 것입니다.’이에 정생왕은 도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서 곧 그곳에 불탑(佛塔)을 세우고 지극히 큰 공양을 올린 다음 다시 다른 곳으로부터 하늘 위로 날아 올라가서 제석천왕(帝釋天王)과 함께 자리를 나누어 앉았으며 제석천왕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짐짓 남아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경으로 금강의 자리와 처소는 영원히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문】어떻게 법륜을 굴리는 장소는 항상 정해져 있음을 알게 되는가?【답】그것은 법실(法實) 존자의 게송에 읊은 내용과 같다.【문】만약 그렇다면 존자 법실의 게송의 내용과는 잘 상통될 수 있지만, 경에서 말한 정광여래(定光如來)는 집착하는 곳이 없는 등정각을 이루어 등왕성(燈王城)ㆍ아리나산(阿梨羅山)에서 법륜을 굴리셨다는 말과는 어떻게 상통되는가?【답】그 등왕성이라 하는 곳은 곧 지금의 바라내성(波羅奈城)이며 아리나산이라 하는 곳은 곧 지금의 선인이 머무는 녹야원(鹿野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으로 모든 삼야삼불(三耶三佛)이 법륜을 굴리시는 곳은 항상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문】어떻게 하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곳이 항상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답】경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과거의 시대에 수많은 비구들이 함께 그곳에 머물렀다가 조금 할 일이 있어 그곳에서 비록 다른 곳으로 노닐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곳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비구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다른 이학(異學:외도)들이 그곳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그때 수많은 비구들은 뒤늦게 본래 있던 자리에 돌아와서 이학들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우리의 처소다”라고 하였으나 이학들도 역시 “이곳은 우리가 사는 곳이다”라고 하여 그들은 곧 크게 싸우고 다투게 되었다. 비구들은 다투는 일이 싫어져서 이학들에게 말하기를 “곧 함께 진리의 말을 지어 그 말 속에 진리가 있는 사람이 곧 이곳을 얻도록 하자”라고 하니, 이학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자”라고 하였다. 이에 이학들은 정성껏 진리가 담긴 말을 지었으나 성취하지 못하였다.이에 비구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정성으로 말하는 진리를 들어 보아라”라고 하였다. 그곳에는 사자당(師子幢)이 있었는데 모든 비구들이 한 목소리로 정성어린 진리의 말을 소리쳤다.
“이 진실한 말로써 만약 이곳이 모든 항하의 모래처럼 수많은 등정각을 얻은 부처님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천신들을 위하여 설법을 끝내고 처음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곳이 이곳이라면 이 진리의 말로써 저 사자당에 현실로 변화가 있게 하여 주소서.”그러자 그때 사자당의 사자가 지극히 큰 소리로 천지가 진동하도록 울부짖으니 모든 이학들이 이 소리를 듣고 놀라고 무서워서 곧 그곳을 버리고 달아나 그곳에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그때 사자의 입은 지극히 커서 입에서 꽃을 토해 내니 꽃이 그곳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모든 등정각을 얻은 부처님이 하늘 위에서 내려오시는 곳은 항상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로써 모든 등정각을 얻은 부처님의 자리는 세 곳, 즉 금강의 자리가 마련된 곳과 법륜을 굴리시는 자리와 하늘 위에서 내려오시는 자리가 항상 정해져 있음을 알게 된다.【문】앞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지신(地神)이 소리쳤다고 하였는데 그때 모든 큰 천신(天神)들도 역시 부처님의 사리 가까운 곳에 모여 있었으니, 예를 들면 사천왕(四天王)과 제석천왕(帝釋天王) 및 대범천왕(大梵天王)ㆍ수다회천왕(首陀會天王) 및 다른 지극히 묘한 천룡(天龍)ㆍ귀신들까지 부처님의 자리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여러 지신(地神)들이 앉아 있던 곳은 부처님의 자리에서 먼 곳이며 부처님 가까이에 있지 아니하였는데 왜 지신(地神)이 먼저 소리쳤는가?【답】이 지신들은 저 모든 천신들의 심부름꾼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먼저 소리친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신이라는 것은 항상 정해져 있는 신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먼저 소리친 것이다. 비유하면 큰 모임을 열어 굉장한 놀이와 음악을 할 때 늘 정해진 자리에 있지 아니하는 사람이 먼저 소리치고 웃게 되며 자리가 정해진 사람들은 그 다음에 놀이를 배우며 웃게 된다. 이와 같이 지신들도 늘 정해진 존재가 아닌 까닭에 먼저 소리친 것이고 다른 모든 천신들은 늘 자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나중에 소리친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라기를 “지신은 늘 보살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소리친 것이다. 그 내용을 설명한다면 부처님이 보살로서 도솔천(兜率天)에서의 일생을 마치시고 염부제주(閻浮提洲)의 가라위국(迦羅衛國)에 태어나실 때 어지럽지 아니하게 어머니의 태에 들어가셨다. 그때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차륵천자(遮勒天子)에게 명령하여 그대 차륵은 오백 명의 푸른 귀신[靑鬼]들과 함께 어머니의 태 안에 있는 보살을 늘 보호해야 하며 보살에게 부딪치거나 어지러운 일이 있게 하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이에 차륵천자는 제석천왕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곧 오백 명의 푸른 귀신에게 명령하머 곧 가라위국(迦羅衛國)으로 가서 보살을 옹호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모든 푸른 귀신들은 보살이 어머니의 태 안에 있을 때나 태어나신 후에도 늘 옹호하였다. 지금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심으로써 지신(地神)은 생각하기를 ‘이 보살이 어머니의 태 안에 있을 때와 태어나신 후에도 우리들은 늘 이분을 옹호하였다. 이는 우리들이 피로를 무릅쓰고 얻은 공덕의 과보다’라고 하고, 그가 뛸 듯이 기뻐하고 느긋해한 까닭에 먼저 소리치기를 ‘여기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신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문】이 법문을 듣고 나서 지신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 소리가 범천(梵天)에까지 사무쳤다고 하는데 왜 소리가 범천을 넘어서지는 못하였는가?【답】귀의 인식 작용[耳識]이 눈앞에 나타난 까닭에 소리가 사무치게 되는 것이다. 범천 이상의 지(地)에는 귀의 인식 작용이 앞에 나타나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범천 위까지는 사무치지 아니한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범천왕(梵天王)이 부처님께 법륜을 굴리시기를 정한 까닭에 소리가 범천에 사무친 것이다. 수다회천(首陀會天:淨居天)의 경우에는 보살에게 권청(勸請)해서 위없는 가장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였다. 즉 보살과 더불어 몸을 변화시켜 늙고 병든 사람과 죽은 사람의 모습 및 사문(沙門)의 모습을 지어 보였으니, 그 모든 수다회전(首陀會天)의 천신이 짓는 모습을 보살이 보니 늙고 병든 사람과 죽은 사문의 모습들이라 이를 보고 나서 이를 싫어하고 근심하여 출가하여 도를 배워 악마를 항복 받기에 이르렀고 관속들도 이미 위없는 가장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다.그때 수다회천의 천신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즉 ‘우리들이 보살을 위하여 몸을 변화시켜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과 사문의 모습을 지었었다. 이는 우리들이 피로를 무릅쓰고 얻은 공덕이며 이 일 때문에 보살은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게 된 것이다’라고 소리친 것이다. 그때 그 소리는 수다회천에 이르도록 사무쳤다.대범천(大梵天)의 경우에는 부처님에게 법륜을 굴려 주시기를 청하였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시니 뛸 듯이 기뻐하며 큰 소리로 외치기를 ‘여기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신다. 이것은 우리들이 피로를 무릅쓰고 얻은 공덕이며 이 공덕 때문에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시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그때 그 소리는 범천에까지만 사무치고 더 위로 넘어서지는 아니한 것이다.또 내용을 설명한다면 부처님이 사천왕을 위하여 사제(四諦)를 설법하시니, 두 사람은 알고 두 사람은 몰랐다. 그리하여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는 담라국(曇羅國)의 말로 설법하시니 그곳 말로는 고제(苦諦)를 인첩(禋倿)이라 하고 집제를 미첩(彌倿)이라 하며 멸제를 타파(陀破)라하고 도제를 타라파(陀羅破)라 불렀는데 이렇게 말하여도 고제(苦諦)를 한 사람은 알고 한 사람은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다시 미리차국(彌離車國)의 말로 설명하였으니, 그곳 말로는 고제를 마함도함(摩含兜含)이라 하고 집제를 승함마(僧含摩)라 하며 멸제를 살바다(薩婆多)라 하고 도제를 비리라(鞞梨羅)라 하였는데 이렇게 설명하니 고제를 모두 알게 되었다고 한다”라고 하였다.【문】부처님께서 사천왕을 위하여 4제를 선법하실 때 성인의 말씀에 힘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만약 힘이 있었다고 한다면 왜 두 사람에게는 범어로 실법하시고 한 사람에게는 담라국(曇羅國) 말로 또 한 사람에게는 미리차국(彌離車國)의 말로 설법하셨는가? 또 만약 힘이 없었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게송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게송에서 말했다.한 음성으로 설법하여도
널리 뜻이 통하네.
그들은 각기 생각하기를
나를 위한 가장 뛰어난 설법이라 한다네.여기서 이 게송의 내용을 풀이한다면 한 음성이라 한 것은 범음(梵音)을 말한 것이다. 모두 두루한 음[悉遍音]이라 한 것은 만약 진단(眞旦)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생각하기를 ‘부처님이 진단 말로 설법하신다’라고 할 것이고 이와 같이 타륵(陀勒)ㆍ마륵(摩勒)ㆍ파륵(波勒)ㆍ거사바(佉沙婆)ㆍ거리(佉梨) 나라의 사람들은 그곳 말로 설법하신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도거륵(兜佉勒) 나라의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생각하기를 ‘부처님이 도거륵 말로 설법하신다’라고 생각할 것이다.뜻이 통한다는 것은 탐욕에 집착한 사람은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부정(不淨)을 설법하신다’라고 생각할 것이고 노여움에 집착한 사람은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자비를 설법하신다’라고 할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연기법(緣起法)을 설하신다’라고 할 것이니, 그들은 각기 생각하기를 ‘나를 위한 가장 뛰어난 설법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렇기 대중 가운데서는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나를 위하여 그렇게 설법하셨다’라고 하여 이렇기 때문에 말할 것이다.한 음성으로 설법해도
모두 골고루 뜻이 통하여
그들은 각기 생각할 것이다.
나를 위한 가장 뛰어난 설법이다.【답】부처님의 말씀에는 힘이 없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이라 해서 귀로 색을 볼 수 없으며 눈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문】만약 힘이 없었다면 이 게송과는 어떻게 상통되는가?【답】이 게송과는 상통할 필요가 없다. 게송이라는 것은 경이 아니며 계율도 아니며 아비담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게송을 지은 사람이 문구의 내용을 이치와 합치시키려 하였을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이 게송은 부처님을 찬양한 게송일 따름이며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은 아니다.비바사(毘婆沙)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부처님은 잠이 없기에 오음(五陰)의 덮개를 제거하시기 때문에 부처님은 또한 항상 선정에 드신다. 그런 까닭에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모든 부처님은 물을 마시시도 아니하시고 음식을 먹지도 아니하시며 모든 맛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셨다”라고 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이것은 부처님에 대한 찬탄일 뿐 사실이 아니다. 이와 같은 그 게송도 부처님에 대한 찬탄이지 사실이 아니다.【문】만약 이 게송과 상통하려면 어떤 내용이 되어야 하는가?【답】부처님의 설법은 근기에 속히 감응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지극히 빨라서 한 사람을 위한 설법을 마치면 다시 한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심이 마치 동시에 설법하는 것과 같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의 말소리는 모든 음을 갖추고 있으며 각기 경계가 있어 그 경계에 응하여 모든 음을 적용시킨다. 부처님은 궁극적으로 진단의 말을 잘 알고 계시니 진단에 태어난 사람보다 뛰어나시다. 이와 같이 타륵(陀勒)ㆍ마륵(摩勒)ㆍ파륵(波勒)ㆍ거사바(佉沙婆)ㆍ거리(佉梨)ㆍ도거륵(兜佉勒)에 있어서도 부처님께서는 지극히 도거륵의 말을 잘 알고 계셔서 도거륵 안에 태어난 사람보다 뛰어나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 음성으로 설법하셔도 모두 두루 뜻이 통한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의 말씀에는 힘이 있었다”라고 하였다.【문】만약 그렇다면 이 게송과는 잘 상통되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왜 사천왕을 위하여 사제(四諦)를 설법하실 때 두 사람에게는 범어로 설법하시고 한 사람을 위해서는 담라국(曇羅國) 말로 설법하시고 또 한 사람을 위해서는 미리차국(彌離車國)의 말로 설법하셨는가?【답】상대방인 사천왕의 뜻과 소원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다. 두 사람의 천왕은 부처님이 범어로 자신을 위하여 4제를 설법하여 주시기를 원하였고 한 사람의 천왕은 담라국 말로 설법하여 주시기를 원하였고 또 한사람의 천왕은 미리차국 말로 설법하여 주시기를 원하였다. 부처님은 항상 다른 사람의 모든 착한 소원을 채워주고자 하신 까닭에 두 사람의 천왕을 위해서는 범어로 사제(四諦)를 설법하셨고 한 사람의 천왕을 위해서는 담라국 말로 설법하시고 다른 한 사람의 천왕을 위해서는 미리차국 말로 설법하신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의심을 끊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다만 범어만 잘 하시고 담라국 말이나 미리차국 말은 하실 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다른 사람의 의심을 끊기 위해서 ‘나는 모든 나라의 말을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며 그일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부처님은 중생의 교화를 위하여 혹 몸과 입을 변화시키기도 하시고 혹 변하지 아니하시기도 하셨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자기 힘으로 친구나 학인(學人)들 사이에 노니시면서 하루에 12유순(由旬)의 먼 길을 걸어가셨다. 이 내용을 설명하는 사람은 그때 곧 7만 명의 사람을 교화하여 성인의 법 가운데 들어가게 하였으나 그 모든 인연에서 몸과 입이 변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교화를 위해서 몸과 입을 변하게 하는 경우라 하는 것은 만약 그곳에서 몸과 말을 변하지 아니한다면 곧 그들을 제도할 수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사천왕을 위해서 두 사람에게는 범어로 설법하시고 한 사람에게는 담라국의 말로, 다른 한 사람에게는 미리차국의 말로 설법하신 것이다. 사제를 설법하심은 이와 같이 하셨으나 행을 관할 때는 모든 행이 근본적으로 성인의 행이다.【문】사성제(四聖諦)는 어느 것이 성품을 끊고 연을 끊지 않는가? 어느 것이 연을 끊되 성품을 끊지 않는가? 어느 것이 성품과 연을 모두 끊는가? 어느 것이 성품과 연을 모두 끊지 않는가?【답】성품을 끊는 것이지 연을 끊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고제(苦諦)ㆍ집제에 얽힌 무루연(無漏緣)이다. 이 경우에는 성품을 끊지만 연을 끊는 것은 아니다. 다음 연을 끊어도 성품은 끊지 아니하는 경우는 도제(道諦)에 얽힌 유루연(有漏緣)이다. 이 경우에는 연은 끊지만 성품을 끊는 것은 아니다. 다음 성품도 끊고 연도 끊는 경우라 하는 것은 고제와 집제에 얽힌 유루연이다. 이 경우에는 성품도 끊고 연도 끊게 된다. 다음 성품도 끊는 것이 아니고 연도 끊는 것이 아닌 경우라 하는 것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에 얽힌 무루연이다. 이 경우에는 성품도 끊는 것이 아니고 연도 끊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 사제(四諦)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