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보자] #6030 비바사론(鞞婆沙論) 6권
비바사론(鞞婆沙論) 6권
비바사론 제6권시타반니 지음
승가발징 한역18) 십이입처(十二入處)십이입(十二入)이라 하는 것은 안입(眼入)과 색입(色入)ㆍ이입(耳入)과 성입(聲入)ㆍ비입(鼻入)과 향입(香入)ㆍ설입(舌入)과 미입(味入)ㆍ신입(身入)과 세활입(細滑入)ㆍ의입(意入)과 법입(法入)을 말한다.【문】무엇 때문에 경을 지은 사람은 12입에 근거하여 논을 지었는가?【답】그것은 경을 지은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의도대로 이와 같이 경을 지었지만 이것은 법과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12입에 근거하여 논을 지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때 경에 대해 조금도 가필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문】무엇 때문에 경을 지은 사람은 가필한 적이 없는가?【답】이것은 부처님의 계경에 있는 일이다. 그 계경에, 어떤 생문범지(生聞梵志)가 있었는데 그는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나서 어슬렁거리며 거닐다가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부처님과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인사를 나누고 한쪽에 앉아 있다가, 그 생문범지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씨(瞿曇氏)여, 내가 조금 물어 볼 말이 있는데 내가 묻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지여, 그대가 묻고 싶은 대로 물어 보아라.”“구담씨여, 온갖 것을 일체(一切)라 하는데 구담씨 교리에는 일체가 몇 곳이나 있습니까?
구담씨여, 어떤 것이 일체이며 그 일체는 시설되어 있는 대로 시설된 것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 범지여, 십이입(十二入)이 있다. 눈[眼]에서부터 법(法)에 이르기까지의 입(入)이 그것이다. 이것이 너희들 범지가 말하는 일체다. 이와 같이 부처는 일체가 건립되어 있는 그대로 건립하는 것이다.”이때 만약 범지가 생각하기를 ‘일체(一切)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사문(沙門)인 구담씨가 시설한 것이다. 나는 이 일체라는 관념을 버리고 다시 다른 일체를 시설하겠다’라고 하여, 이렇게 대답해 주어도 그가 몇 차례나 질문하고도 이해하지 못하여 더욱 의심을 내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것은 그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문】어떤 것에서는 일체를 십팔계(十八界)라 하기도 하고, 어떤 것에서는 일체를 오음(五陰)과 무위(無爲)라 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일체를 사성제(四聖諦:四諦) 및 허공이라고도 하니, 이는 택멸(擇滅:數緣盡)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서는 일체를 이름과 색이라고 한다. 이렇게 대답해 주더라도, 그가 몇 차례나 질문하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 의심을 내었다면, 이는 그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닌 것인가?【답】그것은 그렇지 아니하다.【문】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이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답】이것은 제거하는 이치를 말한 것이며 제거하는 오미(五味)를 말한 것이 아니다. 즉 이것은 제거하는 시설의 이치를 말한 것이지 제거하는 5미를 설한 것이 아니다. 즉 모든 법성(法性)은 저 12입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12입의 이치를 버리고 다시 다른 이치를 건립하겠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끝내 아무것도 건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는 제거하는 이치를 말한 것이고 제거하는 맛을 말한 것이 아니며, 제거하는 시설의 이치를 말한 것이고 제거하는 5미를 말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12입은 묘한 설법이고 통쾌한 설법이고 가장 좋은 설법이고 가장 높은 설법이다”라고 하였다.【문】무슨 까닭으로 이 12입이 묘한 설법이고 통쾌한 설법이고 가장 좋은 설법이고 가장 높은 설법 이라 하는가?【답】이 입(入)이라 하는 것은 복잡하게 설명되는 것이 아니면서도 모든 법이 포함되어 있다. 십팔계(十八界)라 하는 것은 비록 모든 법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만 복잡하게 설명되는 이론이다. 즉 하나의 마음에 일곱 가지 마음의 경계를 건립하는 것이 그 예다. 또 오음(五陰)이라 하는 것은 비록 복잡하게 설명되지는 아니한다 하더라도 그것에는 모든 법이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다. 즉 유위(有爲)의 법만이 포함되어 있고 무위(無爲)의 법은 포함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12입은 중도(中道)의 설법이며, 또한 모든 법이 포함되어 있다. 18계라 하는 것은 비록 모든 법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광범위한 설법일 따름이다. 또 오음(五陰)은 모든 법이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며 또한 중심 되는 설법도 아니다. 그러나 이 12입은 중심 되는 설법이면서 모든 법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설명하는 사람이 이 12입을 묘한 설법이며 통쾌한 설법이며 가장 좋은 설법이며 높은 설법이라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논을 지은 것이다.모든 법을 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마땅히 12입에 의거하여 관해야 한다. 12입에 의거하여 관하게 되면 12입의 법이 생겨나서 열두 가지 이치의 형상(形像)이 나타나고 또한 밝혀질 것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열두 개의 거울을 영롱하게 갈고 닦고 하면 스스로 그의 형상을 비추어 보게 되며 그 모든 열두 개의 거울 속에서 그의 상(像)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하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12입에 의거하여 관해야 하며 12입에 의거하여 관하게 되면 열두 가지 법이 생겨나고 열두 가지 이치가 나타나고 밝혀질 것이다.이 입(入)은 하나의 바탕, 하나의 이치를 지니고 있다. 다만 그 행(行)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등(差等)이 있을 따름이다. 비유하면 마치 열두 사람이 같은 한 집에서 있으나 단지 그들의 행동은 각각 다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12입에도 비록 하나의 바탕[身] 하나의 이치를 얻을 수 있으나 단지 그 행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입의 성품이다.
이미 종류와 모습과 본래의 성품을 설명하였으니, 마땅히 그 행(行)도 설명하여야 한다.【문】무엇 때문에 입이라 말하며 입에 어떤 이치가 있는가?【답】드나드는 문(門) 이것이 입(入)의 이치이다. 또한 드나드는 길[道]ㆍ갈무리ㆍ창고ㆍ칼날ㆍ베틀ㆍ밭ㆍ샘ㆍ흐름ㆍ바다ㆍ꿀[白淸]이 입(入)의 이치이다.이 가운데 드나드는 문이 입의 이치라 하는 것은 마치 마을과 성과 나라에 재 물을 옮길 수 있게 되면 임금이나 벼슬아치들의 생활이 풍부해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입을 의거하고 연해서 심(心)ㆍ심소법(心所法)을 얻을 수 있다. 즉 중생들을 길러 내는[長養] 작용을 한다. 이것이 드나드는 문이 입의 이치가 된다는 것이다. 다음 드나드는 길[輪道]이 입의 이치가 된다고 하는 것도 역시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다음 갈무리하는 것이 입의 이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갈무리한 창고 속에 금은ㆍ유리(琉璃)ㆍ마니보주(摩尼寶珠)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입을 의거하고 연하여 심ㆍ심소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중생들을 길러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갈무리하는 것이 입의 이치가 된다는 것이다.다음 창고란 뜻이 입의 이치라 하는 것은 마치 창고 속에 음식을 갖출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중생들을 길러 내는 역할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입을 의거하고 연하여 심ㆍ심소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중생들을 길러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창고가 입의 이치가 된다는 것이다.다음 칼날이 입의 이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칼날 아래에서 백천의 중생들이 그의 목숨을 끊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입에 의거하고 연하여 그 가운데서 중생들은 무상하게 멸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칼날이 입의 이치가 된다는 것이다.다음 베를[機]이 입의 이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베틀로 연하여 옷감을 짜며 날줄과 씨줄이 마련되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12입을 의거하고 연하여 심ㆍ심소법이 건립되는 것이니, 이것을 두고 베틀이 입의 이치가 된다는 것이다.다음 밭이 입의 이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밭 가운데 온갖 곡식이 생겨나는 것처럼 중생들을 길러 내는 역할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입에 의거하고 연하여 심ㆍ심소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중생을 길러 내는 역할을 말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밭이 입의 이치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다음 샘[泉]이 입의 이치가 된다는 것은 저 계경(契經)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경전에 보면 어떤 천신(天神)이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 가서 게송으로 물었다.시냇물은 무엇 따라 굴러가는가.
무엇이 굴러가고 무엇이 굴러가지 아니하는가.
어느 곳이 괴롭고 즐거운 곳이며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인가.이에 부처님도 게송으로 대답하셨다.눈과 귀와 코
혀와 몸과 생각
시냇물 이를 따라 굴러간다네.
이것이 굴러가고 굴러가지 않음
이것이 고통이요 즐거움이며
남김없이 소멸하는 일이다.이것을 두고 바다가 입의 이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다음 흐름[流]이 입의 이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계경의 내용에 따르면, 어떤 천신(天神)이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와 게송으로 물었다.흐름에 모든 것 흘러가네.
무엇으로 흐름을 제지하겠는가.
흐름을 막는다고 하지만
무엇으로 흐름을 막겠는가.이에 부처님도 게송으로 대답하셨다.세상의 모든 흐름은
일념(一念)으로 흐름을 제지하네.
내가 말하는 흐름을 막는다는 것은
지혜로써 흐름을 막는다네.이것을 두고 흐름이 입(入)의 이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다음 바다가 입의 이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계경에 따르면, 비구의 바다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로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이 성인의 법 속에 있는 바다가 아니라 물이 크게 괴어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눈은 입(入)의 큰 바다라
저 색이 파도가 되네.
만약 색이 파도라 인정한다면
그는 눈의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리.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곳
간사한 도깨비 나찰(羅刹)이 지킨다.눈의 경우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도 또한 그렇다.생각[意]도 입(入)의 큰 바다라
거기에는 법이 파도가 되네.
법이 파도라 인정한다면
그는 생각의 바다 건너가지 못하리.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곳
간사한 도깨비 나찰이 지킨다.이것을 두고 바다가 입의 이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다음 밀랍[白淸]이 입의 이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꿀[白淸] 역시 그렇게 가볍기 때문이다. 또 외도(外道)의 책에서는 경지[地]라 부르기도 하고 작용[作]이라 부르기도 한다. 계경에 따르면 외도인 마갈단제(摩竭檀提)가 말하기를 “사문(沙門) 구담의 땅은 허물어진 땅이다. 이미 허물어졌는데 어디서 작용하겠는가?”라고 하였다.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내용 이것을 두고 드나드는 문ㆍ드나드는 길ㆍ갈무리ㆍ창고ㆍ칼날ㆍ베틀ㆍ밭ㆍ시냇물ㆍ흐름ㆍ바다ㆍ밀랍 등등이 입의 이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공통적으로 행하는 경우를 말한 것이며, 이것을 설명하고 나면 마땅히 개별적인 행을 설명하여야 한다.【문】어떤 것이 안입(眼入)인가?【답】눈으로 색을 이미 보았거나[已見) 곧 보게 되거나[當見] 지금 보고있는 것[今見]과 또 그 밖에 갖고 있는 기능을 말한다. 이미 보았다는 것은 과거를 말하며 곧 보게 된다는 것은 미래를 말하며 지금 보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입(入)을 말한다. 또 그밖에 갖고 있는 기능이라 하는 것은 혹 공(空)일 경우도 있고 혹 공이 아닐 경우도 있는 그의 안식(眼識)을 말하는 것이다.
안입(眼入)의 경우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생각의 입(入)도 역시 그렇다.【문】색입(色入)은 어떤 것인가?【답】색을 눈이 이미 보았거나 곧 보게 되거나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또 그밖에 갖고 있는 기능을 말한다. 이미 보았다는 것은 과거의 색이며 곧 보게 된다는 것은 미래의 색이며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현재의 색이다. 이밖에 갖고 있는 기능도 있다. 색입의 경우와 같이 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도 또한 그러하다.【문】무엇 때문에 색입을 말할 때 열 가지 색입(色入)을 하나의 색입으로 말하는가?【답】색입이란 하나의 이름이고 나머지 다른 것이란 두 가지 이름이다. 색입이란 같은 이름이고 나머지 다른 입(入)이란 같기도 하고 같지 아니하기도 한 이름이 있다. 열 가지 색입 그것은 같지 아니한 경우의 이름을 말한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입은 두 가지다. 안계(眼界) 이것을 색입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입이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안계(眼界), 즉 눈의 경계에는 육안(肉眼)과 천안(天眼)과 성인의 혜안(慧眼)의 세 가지 경계가 있으며 이것을 색입이라 한다. 다른 입의 경우는 세 가지가 아니다. 안계는 그런 까닭에 색입이라 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입이란 두 가지다. 안계와 안식(眼識)에 인연한 것 이것을 색입이라 한다. 나머지 나른 입은 두 가지가 아니다. 안계도 역시 안식에 인연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색입이라 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구사(瞿沙) 존자도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즉 “두 안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안식에 인연하기 때문에 다 같이 색입이라 말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입이라 하는 것은 능히 끊고 허물 수 있는 것을 색입이라 말한다. 나머지 다른 입은 끊고 허물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색입이라 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입이라 하는 것은 큰 장애물이지만 능히 버릴 수 있는 것을 색입이라 말한다. 나머지 다른 입은 큰 장애물도 아니고 버릴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색입이라 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입이라 하는 것은 방향을 가진 존재이기에 방향을 정하는 것이고 유연(由延)이란 길이가 있는 것이기에 유연을 거리의 단위로 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방향을 가진 존재라 하는 것은 방향은 색입에 소유되어 있다는 것이고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색에 기인하여 정하는 것을 말한다. 유연이란 길이는 색입에 소유되어 있는 것이고 유연을 단위로 정한다는 것은 색에 기인하여 유연이란 거리 단위를 정하는 것이다. 즉 색입이란 방향을 가진 것이고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고 유연이란 거리의 단위를 가진 것이고 유연이란 거리의 단위를 정하는 것이다. 이를 색입이라 말한다. 나머지 다른 입(入)은 방향을 가진 것이 아니고 방향이 정해지지 않는 것이고 유연이란 거리 단위를 가진 것이 아니고 유연이란 거리의 단위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색입이라 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입이라 하는 것은 스무 가지 종류나 스물한 가지 종류 이것을 색입이라 말하나 다른 입은 스무 가지 종류도 아니고 또한 스물한 가지 종류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색입이라 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입이라 하는 것은 이곳에도 머물고 저곳에도 머문다고 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색입이라 말한다. 다른 입은 이곳에도 머물고 저곳에도 머문다고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색입이라 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색입이란, 색이란 이름과 색이 갖고 있는 것, 이것을 색입이라 말한다. 나머지 다른 입의 경우에는 비록 색에 소유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오직 그것은 색이란 이름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색입이라 말하지 아니한다. 어떤 법은 색에 소유되는 것이 아닌데도 색이란 이름에 집어넣는 것이 있다. 설명에 따르면 저 식해탈(息解脫)의 경지에서는 색의 경계를 건너서서 무색(無色)도 없는 경지다. 이와 같은 색정수(色正受)는 신증(身證)하여 유행(遊行)하는 것이니 이 종류는 열한 가지 종류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는 촉입(觸入)에 속한다. 왜냐하면 사대(四大) 즉 몸의 구성 요소와 부드럽고 껄끄럽고 가볍고 무겁고 춥고 덥고 마시고 먹고 배고프고 굶주리는 것 이것을 열한 종류라 말한다. 이것은 감촉의 입[觸入]이다”라고 하였다.【문】무엇 때문에 세활입(細滑入:觸入)이라 하는가? 감촉하는 바가 있다고 해서 촉입이라 하는가? 본질적으로 촉감이 있기 때문에 촉입이라 하는가? 감촉하는 연 그것이 촉입인가? 만약 촉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촉입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지극히 미세한 촉감은 촉입이 아닐 것이다.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또 만약 본질적인 감촉을 촉입이라고 한다면 심ㆍ심소법도 본질적으로 미세하고 매끄럽지만 그것은 촉입이 아닐 것이다. 또 만약 감촉하는 연 때문에 촉입이라 한다면 마땅히 심(心)ㆍ심소법(心所法)도 미세하고 매끄러운 촉입이어야 할 것이나, 이것은 감촉하는 연이 아니고 감촉하는 작용이다.【답】감촉하는 바가 있는 것, 이것을 촉입이라 말한다.【문】그렇다면 극미(極微)는 극미라고 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답】하나의 극미를 상정(想定)하여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것을 가상(假想)한다면 많이 합쳐져 모인 것도 가상하여야 한다.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몸에 연하여 감촉되는 것은 촉입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몸에 연하여 감촉된다고 하는 것 이것을 촉이라 말하는 것이다.바수밀(婆須蜜) 존자는 설명하기를 “극미도 마땅히 감촉이라 말해야 하는가? 감촉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마땅히 감촉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다만 덩어리로 다루기에 문득 촉감상 그런 생각이 있게 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또 담마다라(曇摩多羅) 존자는 설명하기를 “여러분, 극미는 마땅히 촉감이라 말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다만 색이 무(無)와 합쳐지는 중간 단계인 까닭에 감촉상 그런 생각이 있을 뿐이니 마치 덩어리로 다루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문】물속에 비친 그림자나 거울 속에 비친 형상을 말할 때 이것이 실상인가? 실상이 아닌가? 만약 실상이라 한다면 거울 속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거울 또한 얼굴 속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나면 어떻게 다시 다른 색이 있겠는가?【답】경량부의 논사들은 이것은 실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문】무슨 까닭에 실상이 아닌가?【답】이른바 얼굴이 거울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울도 얼굴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이것을 제외하고 나면 다시 무슨 색이 있겠는가?라는 것에 대하여 아비담(阿毘曇)의 논사들은 설명하기를 “사실로 존재하는 종류와 형상, 이것은 색입(色入)이며 안식(眼識)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문】가령 얼굴이 거울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울도 얼굴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무슨 색이 있겠는가?【답】나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로 이루어지는 색이 있으며 이것은 한 종류가 아니다. 예를 들면 달의 음기에 연유하여 부싯돌로 불을 켠 다음 그릇에 연유해서 물을 떠 오는 것은 진실로 물을 쓰려는 까닭이다. 예를 들면 태양의 양기[陽]에 연하여 구슬로 부싯돌을 치게 되니, 부싯돌을 쳐서는 쇠똥에 연하여 사람들이 방편을 써서 활을 얻게 된다. 이것은 진실로 불을 쓰려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물속에 비친 그림자나 거울 속에 비친 형상에도 사실상 그 종자와 형상이 있다. 이것은 색입과 안식(眼識)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문】가령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응해 오는데 그것은 실상인가, 실상이 아닌가? 만약 그것이 실상이라 한다면 이쪽에서 소리를 지르면 곧 소리가 소멸돼야 할 것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어떤 소리가 존재하는가?【답】경량부의 논사는 사실의 소리가 아니라고 한다.【문】무슨 까닭으로 사실이 아닌가?【답】이쪽에서 지른 소리는 곧 소멸한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무슨 소리가 있겠는가? 아비담 논사들은 이것을 설명하기를 “사실상 종자와 형상이 있다. 이것은 성입(聲入)과 이식(耳識)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문】가령 이쪽에서 지른 소리는 곧 소멸하였는데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무슨 소리가 있겠는가?【답】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가 소리를 이룬다고 본다. 이것은 한 종류가 아니다. 즉 소리를 이루자면 볼ㆍ턱ㆍ목구멍의 일부분ㆍ혀ㆍ치아가 서로 연해서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문】법입(法入)은 어떤 것인가?【답】법을 의식(意識)으로 이미 알았거나 곧 알게 되거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미 알았다는 것은 과거의 법이며 곧 알게 된다는 것은 미래의 법이며 지금 알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법이다.【문】모든 십이입(十二入)의 경우 모두가 법성(法性)을 지닌 것인데, 왜 하나만 법입이라 하는가?【답】비록 그렇게 모든 12입이 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직 한곳만이 법의 처소다. 마치 18계가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직 한곳만이 법계(法界)의 처소이며 또한 십지(十智)가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직 한곳만이 법지(法智)의 처소이다. 또 칠각지(七覺支)가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직 하나만이 택법각지(擇法覺支)의 처소이다. 또 육사념(六思念)이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직 하나만이 염법(念法)의 처소다.또한 사의지(四意止)가 비록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직 하나만이 법의지(法意止)의 처소다. 또한 사변(四辯)이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직 하나의 말재주만이 법변(法辯)의 처소다. 또한 사신(四信)이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직 한 가지 믿음만이 신법(信法)의 처소다. 또한 삼보(三寶)와 삼자귀(三自歸)가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직 하나의 귀의만이 법에 귀의처이다
이와 같이 12입이 비록 모두 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오직 한 가지 입(入)만이 법입의 처소가 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입은 하나의 이름이나, 다른 입은 두 가지 이름이 있다. 법입은 같은 이름이나, 다른 입은 같고 같지 아니하는 두 개의 이름이 있으며 그 가운데서 같지 아니한 이름을 말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이라 하는 것은 항상 입(入)이 되며 달라지지 아니하고 태어나고 늙고 죽는 변화 속에서도 허물어지지 아니한다. 멸진열반(滅盡涅槃)이라 하는 것은 그 입의 법입(法入) 가운데 있다. 그런 까닭에 오직 하나의 법입만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유위(有爲)의 법을 봉인(封印)하였다고 가상할 때 그 안에 있는 세 가지 유위의 모습은 거기에 들어가는 입은 법입 가운데 있다. 그런 까닭에 오직 하나의 법입만을 말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유위의 법이라 하는 것은 뚜렷이 나타나고 외우고 익히는 것을 유위의 법이라 부른다. 거기에 들어가는 입은 법입 가운데 있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법입만을 말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느끼는[覺] 법 이것이 법이고 느끼지 못하는 것 이것은 아(我)이며 공삼매(空三昧)를 말한다. 거기에 들어가는 입이 법입(法入) 가운데 있다. 그런 까닭에 오직 하나의 법임만을 말하게 된다”라고 하였다【문】신견(身見)도 역시 법입 가운데 입을 삼는 것이니, 각법(覺法) 즉 법을 깨닫는 것이 곧 아자재(我自在)인데 무슨 까닭으로 신견과 연하여서는 법입을 말하지 않는가?【답】내가 각법(覺法)이라 하는 것은 여여(如如)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견은 여여한 깨달음을 얻는 길이고 공삼매(空三昧)는 공삼매와 인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법입이라 말하며 신견은 아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마치 바람이 불어 온 곳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을 풍입(風入:바람의 근원)이라 부른다. 이와 같이 법입 가운데서 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법입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많은 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법입을 말하게 된다. 법입 가운데는 많은 법이 입(入)으로 삼는 것이 있다. 즉 색법, 무색법, 볼 수 있는 법, 볼 수 없는 법, 상대가 있는 법, 상대가 없는 법, 서로 호응하는 법,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법, 근거가 되는 법, 근거가 되지 아니하는 법, 행해지는 법, 행해지지 아니하는 법, 몸에 관련된 법[身法:바탕이 되는 법), 몸에 관련이 없는 법, 함께 연하는 법, 독자적인 법 이러한 것을 많은 법이라 하며 이것을 얻을 수 있는 까닭에 하나의 법입을 말하게 된다. 부처님의 계경에 따르면 내육입(內六入)이 있으니, 먼저 안입(眼入)을 설법하시고 마지막에 의입(意入)을 설법하셨으며 외육입(外六入)에서는 먼저 색입(色入)을 설법하시고 마지막에 법입을 설법하셨다”라고 하였다.【문】무슨 까닭에 부처님은 내육입에 관해서 먼저 안입(眼入)을 설법하시고 마지막에서 의입을 설법하셨으며 외육입에 관해서는 먼저 색입을 설법하시고 마지막에 법입을 설법하셨는가?【답】그것을 순서에 따라 설법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것을 순서대로 설법하셨으니, 이처럼 차례로 순서대로 음미하여야 한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순서대로 설법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순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이와 같이 순서대로 설법하셨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이와 같이 순서대로 받아들인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육입(內六入)은 거칠고 미세한 차별로 인하여 그렇게 순서대로 설법하신 것이다. 어느 것이 가장 거친 것인가? 안입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먼저 설법하신 것이다. 또 무엇이 가장 미세한가? 의입(意入)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가장 마지막에 의입을 설법하신 것이다. 또한 외육입(外六入)에서는 어느 것이 가장 굵직한 것인가? 색입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먼저 색입을 설법하신 것이다. 또 어느 것이 가장 미세한 것인가? 법입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가장 마지막에 법입을 설법하신 것이다. 이렇게 거칠고 미세한 차별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내육입에 관해서는 먼저 안입(眼入)을 설법하셨고 마지막에 이르러 의임을 설법하셨으며 외육입에 관해서는 먼저 색입을 설법하시고 마지막에 이르러 법입을 설법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차안(此岸)이라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내육입(內六入)을 말씀하신 것이고 비구들에게 피안(彼岸)이라 말씀하신 것은 외육입을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문】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내육입을 차안(此岸)이라 말씀하시고 외육입을 피안(彼岸)이라 하셨는가?【답】가깝고 먼 법의 차이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가까운 강물은 이편 강 언덕[此岸]이며 먼 강기슭이 저편 강 언덕[彼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마음과 마음의 강물에도 근거하는 것은 가깝고 연하는 것은 멀다. 이것이 가깝고 먼 법 때문이라 하는 이유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에 아래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강물을 두고 비유한다면 내려가는 곳에 있는 것이 차안(此岸)이고 올라가는 곳에 있는 것이 피안(彼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심ㆍ심소법도 근거가 되는 것은 아래에 있고 연이 되는 것은 위에 있다. 이것을 두고 ‘법에 아래위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피안(彼岸)이라 하는 것은 번뇌가 다 소멸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을 말한다. 거기에서는 외육입(外六入)을 거두어들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내육입을 차안(此岸)이라 하시고, 외육입(外六入)을 피안(彼岸)이라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문】어떤 것이 강물[河]인가?【답】심ㆍ심소법 이것이 강물이다. 이 강물은 양쪽 언덕으로 유지되고 있다. 중생의 수효에 드는 것이나 중생의 수효에 들지 아니하는 것이나 떠내려 흘러가서 큰 바다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와 같이 심ㆍ심소법도 이 강물 안팎에서 강물 속으로 들어가면 양쪽 강 언덕으로 유지되어 떠내려 흘러간 중생들은 생사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문】무엇이 배[船]에 해당하는가?【답】성인의 도가 그것이다. 마치 강물을 건너가는 데 배나 뗏목에 의지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이 강물을 건너갈 수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성인의 도라는 배와 뗏목에 의지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이 생사윤회의 강물을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육입(六入)은 내육입임을 알아야 하며 다시 쉽게 근거할 수 있는 것은 내부의 근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문】이와 같다면 외부도 곧 알 수 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육입은 곧 내육입임을 알 수 있고 또한 쉽게 근거할 수 있는 것이 내육입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답】부처님의 계경에서 내관(內觀:마음의 내부를 관하는 일)을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입(內入)은 모든 근(根)이라는 뜻이며, 이것이 외부로 향하지 말아야 하며 외부로 향하기 전에 내부에서 내부의 몸을 생각하고 몸을 관한 후에 외부를 관하고 그 후에 안팎을 관해야 한다. 이렇게 먼저 내부를 관해야 하기 때문에 내육입을 말씀하신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제자들이 전도(顚倒)되지 아니한 관(觀)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말씀하시기를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거꾸로 관하지 말고 마땅히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관해야 한다. 본연(本緣)을 익힘으로 인하여 성팔도(聖八道:八正道)로써 번뇌를 파괴하게 된다. 이것이 전도되지 아니한 관(觀)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제자들이 불공관(不共觀)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거칠고 껄끄러운 것을 함께 관하지 말고 마치 병들고 등창나고 화살 같고 뱀 같으며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공(空)하여 무아(無我)라고 관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내육입(內六入)은 다시 쉽게 유(有)를 불태울 수 있다. 이것이 불공관(不共觀)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계경에서 내육입을 말씀하신 뜻은 내념처(內念處)에 있었다”라고 하였다.【문】무슨 이유로 부처님이 계경에서 내육입을 말씀하신 뜻이 내념처에 있었다고 하는가?【답】나[我]라는 관념 때문이다. ‘내가 존재한다. 이것은 내가 지은 것이다. 이는 나의 작용이다’라고 헤아려서 나를 애착하게 된다면 곧 애착심이 갖추어진 오래 길러 내는 내육입(內六入)이 존재하게 되는 까닭에 외육입(外六入)이 갖추어지기를 구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육입(六入)을 설법하시면서 “육입이란 내육입임을 알아야 하며 육갱락입(六更樂入)이 내입(內入)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문】육입(六入)과 육갱락입(六更樂入)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별이 없다”라고 하였다. 육입이란 안입과 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입을 말하며, 육갱락입(六更樂入)이란 것도 역시 안입(眼入)과 이ㆍ비ㆍ걸ㆍ신ㆍ의의 입이니, 그런 까닭에 차별이 없다고 한다. 이 밖에 또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즉 “차별이 있다. 가까이 있는 것이 육입(六入)이고 멀리 있는 것이 육갱락입(六更樂入)이다”라고 하였다.【문】그대의 말에 따르면 육입은 현존하는 것을 말하고 육갱입이란 과거와 미래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답】그밖에 또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즉 “육갱락입이란 가까운 입을 말하고 육입이란 먼 입을 말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문】그의 말에 따르면 “육갱입이 현존하는 것이고 육입은 과거와 미래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행(行)하는 때 굴러가는 것, 이것이 육갱락입이고 나머지 다른 것이 육입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육입에 근거하여 행하는 것이 육입이고 육갱락(六更樂)에 근거하여 행하는 것이 육갱락입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소유(所有) 즉 존재하고 있는 것, 이것이 육갱락입이고 나머지 소유[餘所有]가 육입이다. 가령 비구의 발우라고 말할 때 그 본질은 발우(鉢盂)지만 이것은 비구가 쓰는 용도에 따라간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비구의 발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유되어 있는 것이 육갱락입이고 또 다른 것이 육입이다”라고 하였다.다라난제(陀羅難提) 존자는 설명하기를 “성입(性入)이 육입이며 행입(行入)에 육갱락입이다. 가령 쇠발우라고 말할 때 그 성품은 무쇠이나, 그것이 우유를 따르는 것에 쓰여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 무쇠 우유발우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입이 육입이고 행입이 육갱락입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계경에서 두 가지 입(入)을 말씀하셨다. 무상천(無想天)의 중생의 입과 유상무상천(有想無想天:非想非非想天)의 중생들의 입이 그것이다.【문】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무상천의 중생과 유정천(有頂天)의 중생 등 두 중생들의 입을 말씀하셨는가?【답】다른 경지에서는 입에 두 가지 이름이 있다. 하나는 식(識)이 머무는 곳을 입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중생들이 사는 곳을 입이라 한다. 두 가지 입 가운데서 두 가지 이름을 짓고자 하신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비록 중생들이 사는 곳이 있다 하더라도 그 명칭에는 ‘인식이 머문다’는 표현은 없다. 이것을 두고 두 가지 이름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두 가지 입 즉 무상천의 중생들의 입과 유정천의 중생들의 입을 말씀하신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계경에서 중생들이 사는 곳과 식이 머무는 곳을 평등하게 같이 상정(想定)하신 후 중생들이 사는 곳은 식이 머무는 세계에 포섭되지 않기에 지기에 두 가지 입을 건립하신 것이다. 즉 무상천의 중생의 입과 유정천의 입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많은 수명을 누리기 때문이다. 모든 범부들에게는 그러한 수명이 없으며 무상천의 경우에도 모든 곳에 그러한 수명을 누리는 중생은 없다. 유정천(有頂天)의 경우 이것을 많은 수명을 누리는 곳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무상천의 중생들의 입(入)과 유정천의 중생들의 입 등 두 가지 세계의 입을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외도의 생각을 끊기 위해서다. 외도들은 두 가지 입 가운데에 의해탈(意解脫)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에 부처님은 그것은 생사의 윤회지 해탈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을 두고 외도들의 생각을 끊은 일이라 말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무상천의 중생의 입과 유정천(有頂天)의 입 등 두 가지 입을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행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외도들은 이입 가운데에 무행해탈(無行解脫)이 있다고 헤아리고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시기를 “이 가운데서 다시 여러 세계 여러 태어날 곳 여러 생으로 다니면서 생사 가운데서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고 말씀하였다. 이것을 행법(行法)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무상천의 중생과 유정천의 중생 등의 이입(二入)을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퇴전법(退轉法)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외도들은 이입(二入) 가운데 불퇴전(不退轉)의 해탈이 있다고 헤아리고 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설법하시기를 ‘이 가운데서 다시 물러서서 여러 세계 여러 태어날 곳 여러 생으로 다니면서 생사의 바다에서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고 하셨다. 이것을 퇴전법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무상천의 중생과 유정천의 중생을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이것을 부처님의 계경에서 보면 존자 사리불(舍利弗)이 부처님 계신 곳에 찾아가서 말하기를 “부처님이시여, 이는 위없이 뛰어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부처님이 건립하신 입(入)을 말한 것인데 그것은 부처님의 무여지(無餘地)ㆍ무여분별(無餘分別)ㆍ무무상지(無無上智)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 여지(餘智)라고 하는 것은 사문(沙門)이나 바라문의 등각(等覺)을 말한 것이다.【문】그 곳에서 일체(一切)라 한 것은 십이입을 말한 것인데 존자 사리불은 일체지(一切智)를 얻은 사람이 아니며 일체견(一切見)을 이룬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그 곳에서 일체를 12입이라 말하였는가?【답】부처님의 설법에 남김이 없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가령 부처님이 계경에서 열한 가지의 입을 설법하신 뒤에 법입(法入)을 설법하실 경우 존자 사리불의 생각에는 결정코 여러 법문에서는 아직 설법하시지도 아니하시고 표현하시지도 아니하신 법문이라 생각하고 그 일체란 것이 곧 이 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된 것 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묘원(妙願)과 지혜와 관(觀)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얼굴 모습으로 알게 되었다. 부처님의 계경에 따르면 그곳에서 일제라 한 것은 12입을 말한 것인데 존자 사리불은 허물어짐이 없는 믿음을 얻었고 그곳에서의 부처님이 설법하신 말씀에 지극한 신심을 내었다. 그런 까닭에 그곳에서 일체라 하신 것이 12입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두고 얼굴 모습으로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문】어찌하여 존자 사리불이 얼굴 모습으로 알게 되었고 뚜렷이 현실로 안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답】현실로도 역시 알았다. 존자 사리불은 12입으로 인하여 역시 일체법을 알게 되었다.【문】만약 존자 사리불이 12입으로 인하여 일체법도 알게 되었다면 부처님과 사리불 사이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답】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며 진지(盡知)이시다. 존자 사리불은 비록 일체지를 얻었다 하더라도 진지는 아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존자 사리불은 12입을 총체적으로 안 까닭에 모든 법을 알게 되었지만 하나하나의 모습을 안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총체적인 모습도 알았고 또한 하나하나의 모습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말은 내입(內入)이 있음을 아셨다. 즉 존자 사리불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알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법하신 것처럼 사리불이 어떻게 이 묘한 사자후(獅子吼)의 설법을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떠한 사문(沙門)ㆍ바라문(婆羅門)도 부처님과 평등한 등각을 이룬 사람은 없었는데 하물며 부처님보다 나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사리불 존자는 부처님께 아뢰기를 ‘몸소 부처님으로부터 들었고 몸소 스스로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그대로 받아 간직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난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나니, 두 분의 부처님이 세상에 함께 나왔다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답】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십팔계(十八界)를 설법하시고 또 어찌하여 십이입(十二入)을 설법하셨는가?【답】부처님은 일체법 가운데서 무지(無智)한 사람도 교화하시고 혹 일체법 가운데서 무지한 사람이 아닌 사람도 교화하셨다. 즉 일체법 가운데서 무지한 사람을 위해서는 18계를 설법하시고 일체법 가운데서 무지하지 아니한 사람을 위해서는 12입을 설법하신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대강은 혹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도 있고 근기가 둔한 사람도 있다. 날카로운 사람에게는 12입을 설법하시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해서는 18계를 설법하셨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인(因)이 강력하거나, 또는 연(緣)이 많은 사람을 교화하신다. 그리하여 인이 강력한 사람에게는 12입을 설법하시고 연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는 18계를 설법하셨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내력(內力)이 많거나 외력(外力)이 많은 사람을 교화하신다. 그리하여 내력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는 12입을 설법하시고 외력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는 18계를 설법하셨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사유로써 그 신(身)을 길러 내는 사람과 남에게 배워야 하는 사람을 교화시켰다. 사유로써 그 신(身)을 길러 내는 사람에게는 12입을 설법하시고 다른 사람에게서 듣고 아는 사람을 위해서는 18계를 설법하셨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교화하신 사람들 중에는 처음 지혜를 발명(發明)한 사람도 있었고 혹 분별로써 알게 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 지혜를 발명한 사람을 위해서는 12입을 설법하시고 분별로써 알게 되는 사람을 위해서는 18계를 설법하셨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경계에 관해서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위하여 18계를 설법하시고 입(入)에 관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위하여 12입을 설법하셨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품에 의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위하여 성품은 곧 경계란 뜻이라고 설명하시고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12입을 설법하시면서 드나드는 문[輸門]이 곧 입(入)의 이치임을 말씀하셨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교화하기 위해 중생에게 18계를 설법하시는 경우도 있고 교화하기 위해 중생에게 12입을 설법하시는 경우도 있었다.
12입처(十二入處)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19) 오음처(五陰處)5음(五陰)이라 하는 것은 색음(色陰)과 통음(痛陰:受陰)과 상음(想陰)과 행음(行陰)과 식음(識陰)을 말하는 것이다.【문】어떤 것이 색음(色陰)인가?【답】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것이 색음인가? 모든 존재하는 색,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를 막론하고 내부의 색이든 외부의 색이든 크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악한 것이건 묘한 것이건 먼 것이건 가까운 것이건 그 모든 색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나는 그 색이 아니며 색도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진실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것 이것을 색음이라 말한다”라고 하였다.또 다른 계경에서 설명하기를 “어떤 것이 색음인가? 모든 소유색(所有色) 모든 사대(四大) 및 사대의 소조색(所造色)을 색음이라 한다”고 하였다.
아비담(阿毘曇) 가운데서는 설명하기를 “어떤 것이 색음인가? 열 가지 색입(色入) 및 법입(法入)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색을 색음이라 한다”라고 하였다.【문】이 세 종류의 설명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답】세 가지 설명에 모두 각각 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문】계경에서 말하기를 “어떤 것이 색음인가? 모든 소유색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를 막론하고 내부의 색이건 외부의 색이건 거칠고 큰 색이건 미세한 색이건 악한 것이건 묘한 것이건 먼 것이건 가까운 것이건 그 모든 색은 나의 소유가 아니며 나는 그가 아니고 그도 내가 아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진실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것이 색음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 가운데 어떤 것이 끊는다는 내용인가?【답】그 당시 저 외도들이 범천에 집착하였기에 과거와 미래의 세계에 선근의 씨앗을 뿌리지 않았다. 이에 그들의 생각을 끊고자 하였기 때문에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것이 색음인가? 모든 소유색, 과거건 미래건 현재이건 내부의 색이건 외부의 색이건 이와 같이 모든 종류의 색에 이르기까지 지혜로 진실 그대로를 관하는 것 그것이 색음이다”라고 하신 것이다.【문】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이 “어떤 것이 색음인가? 모든 존재하는 색, 저 사대(四大) 및 사대의 소조색이 색음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 가운데 무엇이 ‘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가?【답】미래를 관하신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지(一切智)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세계를 훌륭히 깨닫고 훌륭히 보느니라. 내가 열반에 옮겨진 후에 미래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4대가 소조색을 만들지 못하도록 4대를 여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들의 생각을 끊고자 하신 까닭에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것이 색음인가? 모든 존재하는 색, 저 사대 및 4대의 소조색이 색음이다”라고 하신 것이다.【문】앞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것이 색음인가? 열 가지 색입(色入) 및 법입(法入)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색을 색음이라 한다”라고 하셨는데, 이 가운데 무엇이 ‘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가?【답】그때 담마다라(曇摩摩羅) 존자가 있어서 법입(法入) 가운데 있는 색은 따로 사대종(四大種)이 있도록 하게 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문】무엇 때문에 담마다라 존자는 법입 가운데 존재하는 색은 사대종으로 하지 아니하였는가?【답】그는 말하기를 “색은 오식신(五識身)에 연하는 것이며 오식신에 연한 것 이것을 색이라 하는데 법입(法入) 가운데 존재하는 색은 5식신에 인한 것이 아니며 5식신에 연유한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색이 아니며 그런 생각을 끊고자 하였기 때문에 색음을 헤아리면서 ”어떤 것이 색음인가? 열 가지 색입(色入) 및 법임 가운데 있는 모든 색이 색음이다“라고 하였다.【문】만약 그렇다면 담마다라 존자가 한 말은 어떻게 앞뒤가 통할 수 있는가? 그는 말하기를 “색은 5식신에 인하여 5식신의 연줄이 되는 것이 색이며 법입 가운데 존재하는 색은 5식신이 아니며 5식신에 연유한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답】5식신에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6식신에 연유한 것일 따름이다. 법입 가운데 존재하는 색은 비록 5식신에 인한 것도 아니요, 5식신에 연유한 것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5식신과 6식신, 즉 의식신(意識身)에 연유한 색이기에 색이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비록 법입 가운데 있는 색이 5식신에 인한 것도 아니며 5식신에 연유한 색도 아니라 하더라도 다만 그것이 원인에 의거하고 연줄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색이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문】어떤 것이 그 근거인가?【답】사대(四大)이다.【문】통음(痛飮:受陰)은 어떤 것인가?【답】부처님의 계경에 이르기를 “통음은 어떤 것인가? 여섯 가지 몸의 감촉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계경의 말씀이고, 아비담(阿毘曇)에서도 역시 그렇게 말하였다.【문】상음(想陰)은 어떤 것인가?【답】부처님의 계경에 이르기를 “상음은 어떤 것인가? 육상신(六想身)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경전의 말씀과 같고 아비담에서도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다.【문】행음(行陰)은 어떤 것인가?【답】부처님의 계경에서 말씀하기를 “행음은 어떤 것인가? 육사신(六思身)이다”라고 하였고, 아비담(阿毘曇)에서는 말하기를 “행음은 어떤 것인가? 행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심상응행(心相應行)이 있고, 두 번째는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 있다”라고 하였다.【문】어떤 것이 심상응행인가?【답】감각하고 상상하고 생각하고 다시 쉽게 기억하고 해탈하고자 하는 염원과 정(定)과 지혜, 선근(善根)과 악근(惡根), 무기근(無記根)이 속박당하고 심부름꾼이 되고 번뇌에 감겨서 그 가운데서 알게 되고 보게 되고 관하게 되는, 이와 같은 모든 상응행 이것을 심상응행이라 말한다.【문】어떤 것이 심불상응행인가?【답】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滅盡定)ㆍ무상명근(無想命根)의 종류를 얻는 것이고, 처소(處所)를 얻는 것이고, 종자(種子)를 얻는 것이고, 의지를 얻는 것이고,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무상(無常)한 이름의 바탕과 문구의 바탕, 맛의 바탕이다. 이와 같은 모든 불상응행, 이것을 심불상응행이라 말한다.【문】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모든 심상응행과 심불상응행 가운데서 하나의 생각[思]만을 행음이라 내세웠는가?【답】이 생각을 행으로 내세웠을 때는 그 가운데서 행의 씨앗을 거두어들이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모든 심상응행ㆍ심불상응행 가운데서 하나의 생각만을 내세워서 행음이라 규정한 것이다. 가령 애착을 습(習)이라고 시설하는 경우, 그 속에 유루의 종자를 거두어들이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모든 유루의 종자에 대하여 하나의 애착만을 내세워 습제(習諦)라고 내세우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생각이라는 것을 행(行)으로 건립하였을 때 거기에는 행의 종자를 거두어들이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모든 심상응행ㆍ심불상응행 가운데서 하나의 생각만을 내세워 행음이라고 규정하신 것이다.【문】식음(識陰)은 어떤 것인가?【답】부처님은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것이 식음인가? 육식신(六識身)이 식음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계경의 말씀과 같이 아비담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음(陰)의 성품이다. 이미 본래의 종류ㆍ모습ㆍ바탕을 설명하였으니, 마땅히 그 행도 설명되어야 한다.【문】무슨 이유로 음이라 말하며 음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답】‘모여든다’ ‘뭉친다’ ‘쌓여 있다’ ‘거두어 놓다’ ‘세(世)를 시설한다’ ‘음(陰)을 시설한다’ ‘많은 말’ ‘그늘[陰]이라는 말’이 음의 뜻이다.
이 가운데서 ‘모여든다’는 것이 음의 뜻이라 하는 것은, 모든 존재하는 색, 즉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걸쳐 그 모든 색을 외길로 살펴 거두어 이미 하나의 색음으로 건립하였다. 이와 같이 식음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지두어서 건립하였다. 이것이 ‘모여든다’는 것이 음의 뜻이라는 이유다.다음 ‘뭉친다[團]’는 것이 음의 뜻이라 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유위(有爲)의 종자가 뭉쳐 합쳐진 것을 이미 5음으로 건립하였다. 이것이 ‘뭉친다’는 것이 음의 이지에 해당한다는 이유다.
다음 ‘쌓인다[積]’는 것이 음의 뜻이라는 것은, 마치 분뇨가 쌓이고 모이는 것과 같이 온갖 것이 쌓이고 보이는데, 이와 같이 음에도 온갖 것이 쌓이게 되는 것을 말한다.다음 ‘거둔다[檢]’는 것이 음의 내응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색 그것이 과거의 색이건 미래의 색이건 현재의 색이건 또 내부의 색이건 외부의 색이건 크고 거친 색이건 미세한 색이건 나쁜 색이건 묘한 색이건 먼 색이건 가까운 색이건 그 모든 색을 오로지 거두어서 이미 하나의 색음으로 건립하였으며 이는 식음(識陰)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이것이 ‘거둔다’는 것이 음의 뜻에 해당된다고 말하는 이유다.다음 세(世)를 시설하고 음을 시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색음이 삼세(三世)에 걸쳐 존재하고 식음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러하다. 이것을 두고 세(世)를 시설하고 음을 시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 ‘많은 말뜻’이 음의 뜻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은, 색에 관해서도 많은 말뜻이 있고 식음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말뜻이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문】만약 그대의 설명과 같다면 하나의 극미색에는 마땅히 색음이 없다고 하여야 하는데 그렇다면 거기에는 많은 말도 없는 것인가?【답】하나의 극미로 음을 시설할 수는 없다. 만약 음으로 시설하려면 곧 많이 모여들고 거두어들여진 것이라야 한다.아비담에서는 말하기를 “만약 ‘음’이라는 시설을 유지코자 하는 이는 저 극미는 하나의 계, 하나의 입, 하나의 음의 작은 일부라고 말할 것이다. 만약 ‘음’이라는 시설을 유지코자 하지 않는 이라면 저 극미가 바로 하나의 계(界), 하나의 입(入), 하나의 음(陰)이라고 말할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큰 곡식더미에서 한 톨의 곡식을 가지고 갔을 때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게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곡식더미를 관장하고 보호하는 사람이라면 ‘이 곡식더미 가운데 한 톨의 곡식’이라 말할 것이고, 만약 곡식더미를 관장하고 의호하는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이는 한 톨의 곡식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아비담에서 음이라는 시설을 유지코자 하는 이는 저 극미는 하나의 계, 하나의 입, 하나의 음 가운데 적은 일부라고 말할 것이다. 만약 음이라는 시설을 유지코자 하지 않는 이는, 저 극미가 바로 하나의 계, 하나의 입, 하나의 음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두고 ‘많은 말’이라 한다.음이라는 말은 ‘모인다’는 것이 음의 뜻이며, ‘뭉친다’ ‘쌓인다’ ‘거둔다’ ‘세가 시설된다’ ‘음이 시설된다’ ‘많은 말’ ‘그늘[陰]이라는 말’ 이것이 음의 뜻이다.【문】왜 부처님은 먼저 색음을 설법하시고 마지막에 식음을 설법하셨는가?【답】그 순서에 따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 순서에 따를 경우 응당 법미(法味)의 차례에 따라야 한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순서대로 설하셨으니, 가르침을 받는 사람도 역시 순서에 따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거칠고 미세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5음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거칠고 큰 것인가? 그것은 색음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먼저 색음부터 설법하셨다. 또 네 가지 무색음(無色陰)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거칠고 큰 것인가? 그것은 통음(痛陰:受陰)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먼저 수음(受陰)을 설법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문】이 수음(受陰)은 형체도 없고 처소(處所)도 없고 또한 볼 수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거칠고 미세한 것을 알 수 있는가?【답】행하는 까닭에 알게 된다. 손의 감각ㆍ발의 감각ㆍ머리의 감각, 이와 같은 감각이 행하는 까닭에 거칠고 미세한 차별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것이 가장 미세한 음인가? 식음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마지막에 식음을 설법하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먼저 색음을 설법하시고, 마지막에 식음을 설법하시기에 이른 것이다.【문】무슨 까닭으로 심소법 가운데 통음(痛陰:受陰)과 상음(想陰)만을 따로 음이라 내세웠으며 나머지 다른 심소법을 행음이라 내세웠는가?【답】부처님의 진제로 세우신 법은 다른 어떤 진리도 이를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법상(法相)을 다 알고 행을 다 안다. 즉 법이 홀로 담당할 수 있는 것은 따로 법으로 내세우고 품계(品階)를 담당할 수 있는 것은 품(品)으로 내세우신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이문(二門)ㆍ이략(二略)ㆍ이도(二度)ㆍ이거(二炬)ㆍ이광(二光)ㆍ이명(二明)을 둘이라는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가령 수음(受陰)과 상음의 경우 따로 음으로 건립한 것처럼 나머지 다른 심소법도 역시 마땅히 음으로 건립되어야 하나 나머지 심소법의 경우 이것을 하나의 행음으로 건립하였다. 그렇다면 통음ㆍ상음도 역시 행음 가운데 건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음은 혹 세 가지로 내세우기도 하고 혹 열세 가지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이문ㆍ이략ㆍ이도ㆍ이거ㆍ이광ㆍ이명의 둘이란 순자로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4선과 무색 두 경계의 근본을 말한다. 수(受)에 기인하는 것이 사선(四禪)의 근본이고 상(想)에 기인하는 것이 무색계(無色界)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受)에 기인하여 사선(四禪)에서 피로를 느끼게 되고 상(想)에 기인하여 무색계에서 피로를 느끼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 가지 법으로 인하여 중생들은 생사윤회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괴로움을 받게 되고 즐거운 감각을 탐내고 거꾸로 된 생각에 집착하게 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또 이 두 법의 소멸로써 두 가지 정(定)을 건립하나니, 무상정과 멸진정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 법은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따로 건립한 것이다. 이를 행하게 되면,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두 법은 따로 두 가지 식이 머무는 것이다. 즉 수식(受識)에 머무는 것이고 상식(想識)에 머무는 것이다. 다른 심소법은 한 가지 행식(行識)에 머문다. 그런 까닭에 모든 심소법 가운데 수음(受陰)과 상음(想陰)은 따로 음으로 건립하고 나머지 다른 심소법은 다 같이 하나의 행음으로 건립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문】무엇 때문에 행음을 말하게 되는가? 모든 5음은 작위(作爲)하는 것이 있는데 왜 행음 하나만을 내세우는가?【답】유위(有爲)의 상(想)이 이 입(入) 가운데서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음이라 말하게 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유위의 법은 상(想)에 봉인(封印)한다. 즉 세 가지 유위법의 생각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행음을 말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유위의 법을 뚜렷이 나타내고 외우고 익히기 때문에 행음이라 한다. 즉 그 가운데 모든 자위가 모두 다 들어감을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행음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유위의 법이 본연(本緣)을 익힘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즉 거기에 생기는 일은 모두가 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행음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많은 법이 모여서 합쳐지기 때문에 하나의 행음이라 말하는 것이다. 즉 많은 유(有)의 법이 이 가운데 들어가서 서로 호응하고 호응하지 아니하고 근거하고 근거하지 아니하고 운행되고 운행되지 아니하고 바탕이 되고 바탕이 되지 아니하는 것들이 함께 연하기도 하고 함께 연하지 아니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많은 법이 모이고 합쳐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행음만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문】무위법(無爲法)은 왜 음 가운데 건립하지 않는가?【답】음이 아니며 이름도 역시 음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무위법은 색도 아니며 이름도 색의 성질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색음 가운데 내세우지 아니한다. 또한 감각도 아니며 이름도 감각의 성질을 띤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수음(受陰) 가운데도 내세우지 아니한다. 또한 생각[想]도 아니며 이름도 생각의 성질을 띤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상음 가운데도 내세우지 아니한다.또한 행도 아니며 이름도 행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행음 가운데도 내세우지 아니한다. 또한 인식도 아니며 이름도 인식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식음 가운데도 내세우지 아니한다.
만약 ‘왜 행 가운데의 음이라 내세우지 아니하느냐?’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는 행은 종류가 많기 때문이다. 종류가 많은 것은 무위(無爲)가 아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이라 하는 것은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경계에 떨어지는 것이고 무위라 하는 것은 태어나고 늙고 죽는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이라 하는 것은 흥하고 쇠하는 법이다. 원인이 있어서 유위(有爲)의 모습을 얻게 되나 무위는 흥하고 쇠하는 법이 아니며 원인 없이 무위의 모습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이란 세계를 돌고 돌며 작용을 행하고 과보를 받게 되며 인연을 알게 되나, 무위란 것은 세계를 돌고 돌며 운행을 하지 아니하며 과보를 받지 아니하고 연을 모른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이란 어떤 세계에 떨어지는 것이나, 무위는 어떤 세계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이란 음에 떨어지지만, 무위는 음에서 떠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이란 고통에 속박당하지만, 무위는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하ㆍ중ㆍ상의 차별이 있으나, 무위는 하ㆍ중ㆍ상의 차별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앞뒤를 알 수 있지만, 무위에는 앞뒤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무위는 음 가운데 내세우지 아니한다. 부처님의 계경에서는 이것에 팔만(八萬) 가지 법신이 있다고 하였다.【문】법신(法身)에는 어떤 지혜[數]가 있는가?【답】어떤 사람은 하나의 지혜를 경에서 법신이라 이름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그것이 바로 일신(一身)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1신의 지혜를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팔만 가지의 법신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또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이르기를 “계경에서 말씀한 내용은 오직 이 일법신(一法身)의 지혜를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계경에서 말씀한 의단(意斷:正斷), 신족, 5근, 10력, 7각지, 8성도는 모두 1법신의 지혜를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팔만 가지의 법신을 헤아리게 된다. 따져 보면 여덟 자가 한 구절이 되고 서른두 자가 한 게송이 된다.오백에다 일천을 곱하고
다시 오천을 더하여
오백에다 오천을 곱해도
일법신의 지혜이다.이와 같이 하여 팔만의 법신에 이르게 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말하는 까닭은 부처님은 경전에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팔만의 제도(濟度)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즉 성인의 도에서 교화를 받아 제도를 얻은 저 팔만의 제도를 이름하여 팔만 가지의 법신(法身)이라 한 것이다.【문】이 같은 법신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오음의 몸을 내세우는가?【답】그 모든 것이 오음신(五陰身) 가운데 들어가기 때문이다. 즉 탐욕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의 본질이다. 그것은 모두 색음(色陰) 가운데 들어간다. 또 욕망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에 성(性)이라 표현하였다. 그것은 모두 행음(行陰) 가운데 들어간다. 그런 까닭에 모든 팔만 가지의 법신이 모두 5음 가운데 들어간다. 이것은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밖에 5음신이라 하는 것은 계신(戒身)ㆍ혜신(慧身)ㆍ정신(定身)ㆍ해탈신(解脫身)ㆍ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이다.【문】이와 같은 다른 5음신은 무엇 때문에 5음이라 내세우는가?【답】그것도 모두 5음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계신(戒身)은 색음 가운데 의거하고 있고 나머지 신은 행음 가운데 의거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5음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5음처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20) 오성음처(五盛陰處)오성음(五盛陰)이라 하는 것은 색성음(色盛陰)ㆍ통성음(痛盛陰:受盛陰)ㆍ상성음(想盛陰)ㆍ행성음(行盛陰)ㆍ식성음(識盛陰)을 말한다.【문】어떤 것이 색성음인가?【답】색이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세계에서 탐욕[欲]이 끝없이 생기는[生生] 것이고 노여움[恚怒]과 어리석음[癡]이 끝없이 생기는 것이고 그밖에 수많은 마음의 번뇌가 끝없이 생기는 것을 색성음이라 한다.
그 가운데 탐욕이 생기는 것이 애착이고, 노여움이 끝없이 생기는 것은 성난 마음이고, 어리석음이 끝없이 생기는 것이 무명이다. 그밖에 수많은 마음의 번뇌가 끝없이 생기는 것은 그의 심상응법을 말한다. 설명하자면 이것을 두려움이 끝없이 생기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문】왜 그런가?【답】‘두렵다’는 것은 지혜가 없는 성품을 띤 것이다. 즉 중생들은 지혜가 없으면 문득 두려워한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두렵다’는 것은 몸에 대한 편견[身見]의 성품을 띤 것이다. 중생들은 ‘나’라는 존재가 존재한다고 헤아리게 되면 문득 두려워한다. 이것은 또한 입(入) 가운데서 설명한 바와 같다. 나머지 수많은 마음의 번뇌를 이와 같이 설명한다면 이것은 마땅히 ‘두려움’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문】왜 그런가?【답】‘두려움’이란 심소법(心所法)이 마음과 서로 상응하는 것[心相應]이기 때문이다.【문】이 두려움이란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답】욕계(欲界)에 존재하는 것이며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문】만약 색계와 무색계에는 두려움이 없다면 경전에서는 어찌하여 업풍(業風)이 불면 그 불꽃이 범천에까지 이른다고 하였는가? 즉 어떤 중생이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서 세간(世間)의 성패(成敗)를 본 일이 없기에 세간의 성패를 모르다가 그가 불을 보고 난 뒤에 공포스럽고 경악하여 몸의 털이 곤두섰으나 불은 그곳까지 이르지는 아니하였다고 하였는가?또 말하기를 어떤 중생이 전생에 광음천에 태어나서 세간의 성패를 보았고 세간의 성패를 알았기에 불을 본 후에 다른 중생들을 위로하면서 “모든 중생들이여, 무서워하지 말라. 모든 중생들이여, 무서워하지 말라. 이 불길은 궁극적으로 저쪽으로 가지 이쪽에 오지는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그대의 말에 따르면 색계와 무색계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경의 말과 어떻게 통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다른 아래와 같은 게송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설법을 성취한 안목 지니신
여래며 사람 가운데 사자 같은 법왕이니
세상에 비교할 사람 없도다.그때 장수천(長壽天)은
색이 미묘하다 이름난 곳인데
부처님 설법 듣고 나서는 놀라고 공포에 질려
마치 사슴이 사자 두려워하듯 하였네.만약 색계와 무색계에 두려움이 없다면 이 게송과는 어떻게 통할 수 있는가?【답】두려워한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문】두려워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답】표현에 차별이 있다. 이곳에서는 두려워한다고 하고 그곳에서는 싫어한다고 표현한다. 이것을 차별이라 한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욕계에 해당하는 말이고, 싫어한다는 것은 감계에 공통된 말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결(結)에 억눌리면 두려워한다고 하고, 선근에 장애가 생기는 것은 싫어한다고 한다”라고 하였다.존자 바수밀(婆須蜜)은 말하기를 “두려움과 싫어하는 것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결의 장애가 생기는 것이 두려워한다는 것이며 선근 때문에 장애가 되는 것이 싫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거듭 설명하기를 “악한 법 때문에 장애가 생기는 것이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착한 법 때문에 장애가 생기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라고 하고, 또 거듭 설명하기를 “지혜가 없는 성품을 지닌 것이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지혜의 성격을 띤 것이 싫어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존자 담마다라(曇摩多羅)는 설명하기를 “여러분, 악을 생각하고 잊지 아니하여 갈등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갈등이 일어난 뒤 마음이 두려워지는 것, 이것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싫어하는 마음의 차별은 이것입니다”라고 하였다.【문】두려워하는 것은 범부(凡夫)에게 있는 것인가? 성인에게 있는 것인가?【답】두려워하는 것은 범부에 해당되는 것이지, 성인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문】왜 두려움은 범부에게만 해당되고 성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가?【답】그 성인이라는 사람은 이미 두려움이 다 없어진 사람이다. 또 어떤 이는 “범부에게도 두려움이 있고 성인에게도 두려움이 있다”고 말한다.【문】성인의 경우 두려움이 이미 다 사라진 사람인데, 어느 곳에 두려움이 있는가?【답】다섯 가지 두려움이 있다.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악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먹고 살지 못하는 두려움, 나쁜 이름에 대한 두려움, 대중 가운데서의 두려움, 이 다섯 가지 두려움은 성인에게는 이미 다 없어졌으나, 나머지 다른 두려움은 성인도 다하지 않았다. 여기서 성인이라 하는 사람은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辟支佛)을 말한 것이며 부처님은 여기에 해당되지 아니한다.【문】왜 부처님은 해당되지 않는가?【답】부처님은 집착하는 곳이 없다.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두려움이 영원히 사라졌다.
색성음(色盛陰)의 경우와 같이 통성음ㆍ상성음ㆍ행성음ㆍ식성음도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성음의 성품을 말한 것이며 이미 종류와 모습과 바탕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다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마땅히 그 행(行)을 설명하여야 한다.【문】무슨 까닭에 성음(盛陰)을 말하게 되며 성음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답】받아들여서 생겨나는 곳이기 때문에 성(盛)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생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받아들인 곳에서 길러 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길러 내는 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받아들인 곳에서 자라나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자라난 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한다.또한 받아들이는 곳을 찾아오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찾아온 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받아들인 곳에서 간직하게 되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간직한 것을 다시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받아들인 곳에서 평등하게 유지하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평등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받아들인 곳에서 바뀌어지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하고, 바뀌어진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받아들여서 이 가운데 달라붙게 된다. 마치 먼지나 때[垢]와 같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받아들인 것이 이 안에 거두어들여진다. 그런 까닭에 성하다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집이나 방 등 거처할 곳을 받게 되는 것과 같다. 여기에 의지하게 되면 이에 대한 애착이 생기면서 편견과 자만심과 무명과 또한 수많은 마음의 번뇌가 생기며 이것이 끝없이 생겨난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받아들인 것을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외직(外職)이 갖고 있거나 내직(內職)이 갖고 있거나 임금이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받아들인 것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 안에는 다시 무소유(無所有)인 것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대는 어디에 속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받은 것을 소유하는 데 속한다’라고 대답하라”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받아들인 곳에서 널리 건립하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하며 널리 건립된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넓다는 것은 감각을 지칭한 것이다.
이 성음은 18계 가운데 따로 건립하지 아니하며 경지[地] 가운데도 따로 건립하지 아니한다. 다만 그 내용에서 제외되는 것은 나[我]로 인하여 생기는 음은 제외되고 그밖에 얻게 되는 음은 성음이라 표현한다.
다른 음으로 인하여 내가 얻게 되는 것을 성음이라 이름하는데 만약 이 내용을 따로 건립하지 아니한다면 이 밖의 물건도 음이라 건릴할 수 얼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문】음과 성음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답】명칭이 곧 그 차별이다. 저것은 그저 음이고, 이것은 성한 음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구별이 있으나 성음은 오로지 유루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에는 오염되고 오염되지 아니한 구별이 있으나 성음은 오로지 오염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삼제(三諦)를 거두어들이지만 성음은 이제(二諦)를 거두어들인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혹 끊는 경우도 있고 끊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으나 성음은 오로지 끊어야 하는 음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받아들인 것과 혹 상응하기도 하고 상응하지 아니하기도 하나 성음은 오로지 상응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혹 결(結)과 상응할 수도 있고 상응하지 아니할 수도 있으나 성음은 오로지 결과 상응하여 결을 떠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은 혹 학(學)의 경지일 경우도 있고 혹 무학(無學)의 경지일 경우도 있고 혹 학의 경지도 아니고 무학의 경지도 아닌 경우가 있으나 성음은 오로지 학의 경지고 아니고 무학의 경지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두고 음과 성음의 차별이라 말한다.
5성음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21) 육계처(六界處)육계(六界)라 하는 것은 지계(地界)ㆍ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ㆍ공계(空界)ㆍ식계(識界)를 말한다.【문】무엇 때문에 이런 논을 지었는가?【답】이것은 부처님의 계경에 있는 논이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십팔계(十八界)를 모두 총괄하게 되면 6계를 말하게 된다.【문】무엇 매문에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신 18계를 총괄해서 6계라고 하는가?【답】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다. 부처님이 중생들을 교화하시매 혹 근기(根機)가 날카로운 사람도 있고 혹 근기가 무딘 사람도 있다.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을 위해서는 6계를 설법하시고 근기가 무딘 사람을 위해서는 18계를 설법하셨다. 날카로운 근기와 무딘 근기의 경우처럼 인력(因力)과 연력(緣力), 내부의 힘과 외부의 힘, 사유로써 그 신(身)을 기르는 경우와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알게 되는 경우 등의 차이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간략히 설명하면 6계가 되고 자세히 설명하면 18계가 된다. 간략한 경우와 자세한 경우처럼 이와 같이 분별하고 분별하지 아니하는 경우와 또 말아들이고 펼치는 경우, 고치고 고치지 아니하는 경우, 점차로 설명하고 한꺼번에 설명하는 경우 등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논을 만든 것이다.6계라 하는 것은 시계ㆍ수계ㆍ화계ㆍ풍계ㆍ공계ㆍ식계를 말하는 것인데, 이 여섯 세계는 18계 가운데 열 가지 경계가 이 속에 포함되며 일곱 가지 경계는 일부분만 이 안에 포함된다. 이 가운데 열 가지 경계는 사대(四大:地ㆍ水ㆍ火ㆍ風)와 공계(空界)에 포함된다. 열 가지 경계라 하는 것은 안계(眼界)와 색계(色界)ㆍ이계(耳界)와 성계(聲界)ㆍ비계(鼻界)와 향계(香界)ㆍ설계(舌界)와 미계(味界)ㆍ신계(身界)와 촉계(觸界)를 말한다.일곱 가지 경계의 일부분은 식계(識界)에 포함된다. 일곱 가지 마음의 경계의 일부분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구별이 있어서 유루심은 식계에 포함되지만 무루심은 식계에 포함되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일부분이라 말한 것이다. 이렇게 6계라 하는 것은 지계ㆍ수계ㆍ화계ㆍ풍계ㆍ공계ㆍ식계를 말하는 것이다.【문】어떤 것이 지계(地界)인가?【답】부처님의 계경에 이르기를 “어떤 것이 지계(地界)인가? 굳은 것[堅]이 지계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계경에서 총체적으로 지계를 설명하신 말씀이다. 어떤 것이 굳은 것인가? 여기서는 오직 굳은 것이라고만 말씀하셨으나, 그 굳은 것이란 내용에는 헤아릴 수 없는 차별이 있다. 그 내부도 다르고 외부의 모습도 다르다.외부의 모습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집ㆍ담장ㆍ벽ㆍ나무ㆍ바위ㆍ산ㆍ금은ㆍ유리ㆍ마니보주(摩尼寶珠)ㆍ수정ㆍ구슬ㆍ구리ㆍ무쇠ㆍ납ㆍ주석ㆍ백납(白鑞) 등 이와 같이 모습이 다른 것을 말하고, 내부가 다르다고 하는 것은 머리카락ㆍ털ㆍ손톱ㆍ치아ㆍ힘줄ㆍ뼈ㆍ비장(脾臟)ㆍ신장(腎臟)ㆍ심장(心臟)ㆍ간장[肝]ㆍ장(腸)ㆍ위장[胃]ㆍ배ㆍ대소변ㆍ손발의 모습이 다른 것과 그 밖의 지절(支節)이 다른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발은 지극히 단단한 것이나 손은 단단한 것이 아니다. 즉 안팎의 굳은 것에 차이가 있는데도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어떤 것이 지계인가? 굳은 것이 그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문】어떤 것이 수계(水界)인가?【답】부처님의 계경에 이르기를 “어떤 것이 수계인가? 젖은 것[濕]이 수계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부처님이 수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한 말씀이나, 어떤 것이 젖은 것인가? 여기서는 다만 젖은 것이라고만 말씀하셨으나 그 젖은 것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별이 있어서 사람의 내부에서도 그 정도가 다르고 외부의 모습도 다르다.내부에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눈ㆍ눈물ㆍ침ㆍ가래ㆍ기름ㆍ지방ㆍ골수ㆍ뇌ㆍ쓸개ㆍ고름ㆍ피ㆍ소변ㆍ지절(支節) 사이 등 이와 같은 것이 각기 다른 것을 말한다. 외부에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솟아오르는 샘물ㆍ깊은 연못ㆍ흐르는 물ㆍ잔잔히 괸 물ㆍ강물ㆍ못물ㆍ큰 바닷물에서 땅 밑의 수륜(水輪)에 이르기까지의 차이를 말한다. 즉 안팎의 젖은 것에 차이가 있으니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어떤 것이 수계인가? 젖은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문】어떤 것이 화계(火界)인가?【답】부처님의 계경에 이르기를 “어떤 것이 화계인가? 뜨거운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부처님이 화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하신 말씀이지만 어떻게 뜨거운가? 여기서는 다만 뜨겁다고만 하였으나 그 뜨거운 것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별이 있다. 사람의 내부의 뜨거운 것도 다르고 외부의 세계에서의 뜨거운 것도 다르다.내부에서 다른 것으로는 몸에 열이 나게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따뜻한 몸과 불태우는 몸, 굽는 열 등이 뜨겁다는 이름과 작용을 얻게 되고 음식을 먹고 맛보며 몸을 안온하게 하여 준다. 또 손과 발의 열도 각기 다르며 뼈마디의 열도 각기 다르다. 외부의 세계에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횃불ㆍ등불ㆍ큰 불덩이ㆍ지극히 큰 불ㆍ부싯돌에서 일어나는 불ㆍ지옥의 불ㆍ지펴서 몸을 굽는 불 등의 차이를 말한다. 즉 내부의 뜨거움은 지극히 날카로우나 외부의 불은 날카롭지 아니하다. 즉 음식물을 들어 올려 솥 안에 넣고 지극히 삶아도 색이 변하지 아니하다가 먹고 나서 뱃속에 들어간 뒤에야 색이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안팎의 뜨거운 것을 말하게 되는데 그 모든 뜨거운 것을 통틀어 “화계는 어떤 것인가? 뜨거운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문】어떤 것이 풍계(風界)인가?【답】부처님의 계경에 이르기를 “어떤 것이 풍계인가? 불어서 일어나는 것[吹起]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부처님이 풍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하신 말씀이나 어떤 것이 불어서 일어나는 것인가? 여기서는 다만 불어서 일어나는 것 이라고만 말씀하였으나, 불어서 일어나는 것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별이 있어서 신체의 내부에서도 다르고 외부 세계에서도 다르다.내부의 세계에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아래에서 일어나는 바람ㆍ위에서 일어나는 바람ㆍ뼈마디에서 일어나는 바람ㆍ뱃속에서 일어나는 바람ㆍ힘으로 일어나는 바람ㆍ등골에서 일어나는 바람ㆍ일어나는 바람ㆍ굴신(屈伸)하는 바람ㆍ천식(喘息) 바람ㆍ모든 혈맥의 바람 등 사지 골절 사이마다 각기 다른 것을 말한다. 외부의 세계에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흙먼지 바람ㆍ먼지 없는 바람ㆍ짙고 푸른 빛 따라 부는 바람ㆍ나부끼는 바람ㆍ세계의 성패(成敗)를 이루는 바람ㆍ세계의 성패를 이루지 아니하는 바람에서 풍륜(風輪)에 이르기까지의 바람의 차이를 말한다. 이 안팎에서 불어 일어나는 바람, 그 모든 것을 통틀어 “풍계는 어떤 것인가? 불어서 일어나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문】어떤 것이 공계(空界)인가?【답】부처님의 계경에 이르기를 “어떤 것이 공계인가? 색 가장자리의 색이 공계이다”라고 하였다. 색이라 한 것은 조색(造色)을 말한 것이다. 이 색과 저 색, 그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을 공계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눈의 공간ㆍ귀의 공간ㆍ코의 공간ㆍ입의 공간ㆍ목구멍의 공간 등이 있는데 음식이 왕래하는 곳은 비어 있어서 음식물이 그곳에 머물러 소화하는 곳이다. 비어 있는 곳을 내려가며 통과하는 곳이 공간이다.
이와는 다르게 설명할 경우 “어떤 것이 공계인가? 비어 있는 가장자리의 색이 그것이다”라고 말하게 된다.이것은 비어 있는 색과 비어 있지 아니한 색을 말한 것인데 비어 있지 아니한 색[不空色]이라 하는 것은 중생의 심소를 말하며 비어 있는 색이라 하는 것은 중생의 심소가 아닌 색을 말한다. 여기서 공계라 한 것은 중생의 심소가 아닌 색의 가장자리에 마련된 공간을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와 나무 사이ㆍ잎과 잎의 사이ㆍ담장과 담장 사이ㆍ집과 집 사이ㆍ창문과 창문 사이의 중간 이것을 공(空)이라 하며 이는 중생의 심소가 아닌 색의 가장자리에 마련된 공간이다.예전 아비담(阿毘曇)에서는 설명하기를 “가죽의 성질ㆍ막의 성질ㆍ살의 성질ㆍ힘줄의 성질ㆍ뼈의 성질ㆍ골수의 성질을 띤 것은 색을 알 수 있는 곳이니, 공간도 역시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존자 바수밀은 설명하기를 “어떻게 공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계경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이 색은 중간의 빈 곳을 말하는데 여러 색에 덮여 있는 경우도 있고 덮여 있지 아니한 경우도 있다’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문】어찌하여 계경으로만 알 수 있고 현실로는 알지 못하는가?【답】현실로도 역시 알 수 있다. 즉 낮에 존재하는 밝음, 이것이 공계(空界)가 갖고 있는 것이며 밤에 존재하는 어둠 이것이 공계가 갖고 있는 것이다. 거듭 설명한다면 형체를 알 수 있는 곳에서는 공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면 밤에는 어둠이 가로막기 때문에 공간을 볼 수 없고 낮에는 밝음이 가로막기 때문에 공간을 볼 수 없는 것이다.존자 담마다라는 설명하기를 “여러분, 공계를 비록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혜 없는 곳은 아닙니다. 공계는 색이면서 색이 아니고 이곳에 머무는 것도 아니며 저곳에 머무는 것도 아니며 또한 공이 아닌 것은 모습과 소리와 세계가 바뀌어짐으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문】공(空)과 공계(空界)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답】공(空)이라는 것은 색이 아니며 공계는 색이다. 공이라는 것은 볼 수 없으나 공계는 볼 수 있다. 공이라는 것은 상대가 없으나 공계라는 것은 상대가 있다. 공이라는 것은 무위의 세계지만 공계라는 것은 유위의 세계다.【문】이 논리 가운데서는 다시 다른 논리가 생기게 된다. 만약 총이 무위의 세계라면 이 말은 아래의 경전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할 수 있는가? 경에 이르기를 “그때 부처님께서는 손을 문지르며 허공을 더듬었다. 손으로 문질러 허공을 더듬고 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손이 이 공간에 달라붙었겠느냐? 허공을 묶었겠느냐? 허공을 받아들였겠느냐?’라고 하시니,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라고 비구들이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만약 공이 무위의 세계라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손으로 무위의 세계를 문지르고 더듬었겠는가? 또 이와 같이 추리한다면 다른 경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게송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겠는가?쌓이고 모인 것도 없으며
또한 나의 소유도 없다.
허공은 생각이 없으며
떨어져 있는 그 사이로 지나가니
마치 공중을 나는 새와 같아서
발자취 찾기 어렵네.이 게송의 뜻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또 다른 계경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게송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이 허공에는 발자취 없으니
마치 외도에 사문(沙門) 없음과 같네.이것은 게송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내용은 다른 계경에도 있는데 그것과도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즉 경에 이르기를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솜씨 좋은 화가가 제자들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빛깔로 이 허공을 단장하고 물들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비구들이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왜냐하면 유일하신 부처님이시여, 이 허공은 색이 아니며 볼 수도 없고 상대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솜씨 있는 화가가 제자를 모두 동원한다 하더라도 빛깔로 이 허공을 단장하고 물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경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내용은 다른 게송에도 나와 있으니 이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사슴이 숲에 의지하듯
새가 허공을 날아가듯
법은 분별로 돌아가고
진인(眞人)은 적멸로 나아가네.이것은 게송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답】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손이 허공에 달라붙는다고 생각하느냐? 허공을 묶는다고 생각하느냐? 허공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시니 비구들이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계경에서 허공으로 허공계를 설명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이 계경에서 게송으로 설한 바와 같다.쌓이고 모이는 것도 없고
나의 소유도 없네.
허공은 생각[想] 없어
생각을 떠난 가운데 운행하니
새가 공중을 날아가듯
발자취 찾기 어렵네.이것은 부처님이 계경에서 허공을 곧 허공이라고 설법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이 계경에서 게송으로 설한 바와 같다.이 허공에는 발자취 없어
마치 외도에 사문 없는 것과 같네.이것은 부처님이 계경에서 허공계를 허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또 부처님이 계경에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솜씨 있는 화가가 제자들을 다 동원한다면 능히 빛깔로 허공을 단장하고 물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시니, 비구들이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유일하신 부처님이시여, 이 허공은 색이 아니며 볼 수 없으며 상대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솜씨 있는 화가가 제자를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빛깔로 허공을 단장하고 물들일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이 계경에서 허공계로써 허공을 설명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이 계경에서 게송으로 설한 바와 같다.사슴이 숲에 의지하듯
새가 허공을 날아가듯
법은 분별로 돌아가고
진인(眞人)은 적멸(寂滅)로 나아가네.이것은 부처님이 계경에서 허공계로써 허공을 설명하신 말씀이다.【문】저편 허공은 이곳 허공계에 연하기 때문에 머무는 것인가? 일어난 까닭에 머물게 된 것인가?【답】이 논리를 만들고 나서 만 설명에 따르면 연 때문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일어났기 때문에 머물게 된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문】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이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답】저 허공이 이 허공계에 두루 흩어져서 순서로 생기는 인연과 더불어 허공의 세계에 두루 흩어지고 다음에는 사대(四大)에 두루 흩어지고 다음에는 심소법에 흩어진다. 만약 허공계가 이러한 작용의 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러한 법이 전전(展轉)하는 것을 비방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문】식계(識界)는 어떤 것인가?【답】유루의 마음과 육식(六識)을 말한다.【문】무루법(無漏法)은 왜 육계 가운데 하나로 내세우지 않는가?【답】무루법이라 하는 것은 능히 결(結)을 소멸시키고 허물고 파괴할 수 있으나, 이 경계라 하는 것은 결이 불어나고 결을 받아들이고 길러 내는 곳이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루법이라 하는 것은 결의 상속(相續)을 끊을 수 있고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태어나고 늙고 죽는 생사의 윤회를 끊을 수 있으나 이 경계라 하는 것은 결(結:번뇌)이 끊임없이 상속하게 하고 태어나고 늙고 죽는 윤회를 거듭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루법이라 하는 것은 신견(身見)의 종자가 아니며 전도 망상의 종자도 아니며 애착의 종자도 아니고 결의 종자도 아니며 탐욕이 있는 곳도 아니며 노여움이 있는 곳도 아니며 어리석음이 있는 곳도 아니며 더러운 것이 섞인 것도 아니며 독(毒)이 섞인 것도 아니며 탁한 것이 섞인 것도 아니기에 유(有)에 머물지도 않고 고제ㆍ집제 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경계라 하는 것은 신견(身見)의 종자가 되며 전도 망상의 종자가 되며 애착의 종자가 되며 결의 종자가 되며 탐욕이 있는 곳이며 노여움이 있는 곳이며 어리석음이 있는 곳이고 더러운 것이 섞인 것이고 독약이 섞인 것이고 탁한 것이 섞인 것이니, 유(有)에 머물면서 고제ㆍ집제 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루법이라 하는 것이 고통이 다한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유(有)가 다한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탐욕이 다한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생ㆍ노ㆍ병ㆍ사가 다한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지만, 경계라 하는 것은 고통이 모인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유(有)가 모인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탐욕이 모인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생ㆍ노ㆍ병ㆍ사가 모인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무루법은 육계(六界) 가운데는 건립하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존자 바수밀은 설멸하기를 “왜 이 경계를 유루(有漏)라 말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이 경계란 것은 유루의 세계에 생기는 것이며 무루법이란 유루의 세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거듭 설명하기를 “이것은 유루에서 생기는 것이며 무루법이 유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설명하기를 “경계라 하는 것은 심소(心所)에 속하는 것이나 무루법은 심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설명하기를 “경계라 하는 것은 심소에 보응(報應)하지만 무루법은 심소에 보응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는 거듭 설명하기를 “경계란 것은 어미의 태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경계에서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가게 되지만 무루법은 어미의 태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설명하기를 “경계란 오랜 시간을 머무는 세계이지만 무루법은 오랜 시간을 머무는 세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심소에 대해 게송으로 말했다.심소(心所)와 보응(報應)
두 가지로 유루의 세계 이루어져서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가 오래 머물면서
경계를 가득 만들게 되네.【문】“성음계(盛陰界)의 음(陰)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답】“음(陰)이라는 것은 이미 세력을 이룬 것이요, 성음(盛陰)이라는 것은 세력이 전환된 것이며, 계(界)라는 것은 거듭 세력이 전환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혹자가 말하길 “음(陰)이라는 것은 유위(有爲)를 베풀어 펼친 것이요, 계(界)라는 것은 유루(有漏)를 베풀어 편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음성(陰盛)과 음계(陰界)로 차이가 있는 것이니, 자세한 내용은 6계처(界處)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