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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보자] #6076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 13권

Kay/케이 2025. 5. 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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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 13

 

사리불아비담론 제13권

담마야사
담마굴다 등 한역

6) 염처품(念處品)한 길[一道]1)을 가는 중생은 청정하여서 근심과 슬픔을 멀리 떠나고 괴로움과 고뇌를 멸진하고 열반을 증득한다. 그리고 심성(心性)을 가리고 있는 다섯 덮개[五蓋]2)를 단절하고 제거하여 사념처(四念處)를 닦는다.어떤 것을 한 길이라고 하는가. 홀로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거처하며 정진하고 노력하는 것을 즐기며, 여러 업을 즐기지 않고 업 아닌 것도 즐기지 않고, 의미 없는 말을 하지 않고 의미 없는 말을 즐기지 않고, 수면에 빠지지 않고 수면을 즐기지 않고, 모여 말하는 것을 하지 않고 모여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의지하는 것을 즐기지 않고, 방일하지 않고 방일함을 즐기지 않고, 가까이 하지 않고 가까이함을 즐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길을 나오게 하고 바로 나오게 하고 일으키고 바로 일으키고 부딪치고 증득하는 것이니, 이를 한 길이라고 한다.다시 홀로 멀리 떠나 악을 버리고 멀리 떠나 더러운 것에 섞이지 않고 여러 애욕과 악을 떠난다. 이와 같이 길을 나오게 하고 바로 나오게 하고 일으키고 바로 일으키고 부딪치고 증득하는 것이니, 이를 한 길이라고 한다.
다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와 함께 하지 않고 장애와 덮개와 속박의 악행과 함께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길을 나오게 하고 바로 나오게 하고 일으키고 바로 일으키고 부딪치고 증득하는 것이니, 이를 한 길이라고 한다.다시 홀로 방일하지 않아서 정진력과 염(念)과 지혜를 갖추어 멀리 떠남의 수행을 닦는다. 이와 같이 길을 나오게 하고 바로 나오게 하고 일으키고 바로 일으키고 부딪치고 증득하는 것이니, 이를 한 길이라고 한다.다시 홀로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거처하니, 혹은 광야 또는 빈 곳ㆍ산의 계곡ㆍ절벽ㆍ동굴ㆍ노지(露地)ㆍ풀로 만든 자리를 가까이하여 그 곳에 앉는다. 그리고 숲 속 또는 무덤 사이 또는 물가에 거처하며 마을을 멀리 떠난다. 이와 같이 길을 나오게 하고 바로 나오게 하고 일으키고 바로 일으키고 부딪치고 증득하는 것이니, 이를 한 길이라고 한다.다시 마음이 홀로 머물고 바로 머물고바로 멈추어 하나로 정에 드니, 이를 한 길이라고 한다.
다시 오로지 유연하고 부드럽게 조복하여 청정하니, 이를 한 길이라고 한다.다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 및 장애와 개(蓋)와 속박의 악행을 다하니, 이를 한 길이라고 한다.
다시 애욕을 떠나고 고요하게 바른 사유를 닦고 악을 멸하여 열반을 얻으니, 이를 한 길이라고 한다.무엇을 길이라고 하는가. 한 가지 길과 나아가 열한 가지 길이 있으니, 이를 길이라고 한다. 이러한 길, 이러한 교량, 이러한 인(因), 이러한 문, 이러한 뿌리, 이러한 생기(生起), 이러한 뛰어남, 그리고 이러한 무애해(無碍解)를 나오게 하고 바로 나오게 하고 일으키고 바로 일으키게 하여 선한 법을 화합시키고 성취한다. 이를 이름하여 길이라고 한다.무엇을 중생의 청정함이라고 하는가. 중생이란 다섯 취(趣)의 생존을 말한다. 이 중에서도 인간과 천신을 위주로 한 까닭에 사념처에 친근하여 수행하고, 많이 배우면 계율의 청정과 마음의 청정과 견해의 청정을 얻는다고 말하고, 아울러 의혹을 건너는 청정과 길과 길 아닌 것을 알고 보는 청정과 길로 나아가는 지견(智見)의 청정이 있어서 결국 지견의 청정을 얻게 된다고 수기(授記)한다. 이와 같이 하여 청정하지 못한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하게 하고 더럽고 때 있는 중생으로 하여금 더러움과 때를 없애게 한다. 이것을 중생의 청정함이라고 한다.무엇을 근심과 슬픔을 멀리 떠남이라고 하는가. 어떤 것이 근심인가. 중생이 여러 가지 괴로움 법에 부딪쳐 근심과 거듭된 근심이 있으며, 안으로 뜨거움에 시달려 안으로 마음에 뜨거움이 있다. 이를 근심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슬픔인가. 중생이 근심에 묶이어 핍박받고 근심의 화살을 지니고 근심과 고뇌로 마음이 혼란하고 탄식하고 흐느껴 울고 추억에 잠기고 뒤섞인 말을 하며 혹은 스스로를 두들기며 혼란한 말을 내뱉는다. 이를 슬픔이라고 한다.사념처에 친근하여 수행하고 배우면 근심과 슬픔을 멀리 떠나게 된다. 이를 근심과 슬픔을 멀리 떠남이라고 한다.
무엇을 괴로움과 고뇌를 멸진한다고 하는가. 괴로움이란 몸으로 느껴지는 괴로움으로서 안촉의 고수와나아가 신촉의 고수이니, 이를 괴로움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고뇌인가. 마음으로 느껴지는 괴로움으로서 의촉의 고수이니, 이를 고뇌라고 한다.
사념처에 친근하여 수행하고 배워서 고뇌를 멸하니, 이를 괴로움과 고뇌의 멸함이라고 한다.무엇을 열반의 증득이라고 하는가. 열반이란 사문(沙門)의 사과(四果)이다. 사념처에 친근하여 수행하고 배워서 사문의 사과를 얻으니, 이를 열반의 증득이라고 한다.
무엇을 오개(五蓋)의 단절이라고 하는가. 오개를 멸하는 것이니, 이를 오개의 단절이라고 한다.무엇을 사념처의 닦음이라고 하는가.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이니, 열심히 정진하고 마땅히 바른 지혜와 염(念)을 갖추어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다. 그리고 밖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이니, 열심히 정진하고 마땅히 바른 지혜와 염을 갖추어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다. 그리고 안과 밖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이니, 열심히 정진하고 마땅히 바른 지혜와 염을 갖추어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다. 수(受)와 심(心)과 법(法)도 역시 그와 같다.어떤 것이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몸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색신(色身)으로서 부모를 인연으로 하며, 음식으로 성장하고 양육되는 것이며, 의복으로 조절하고 기름을 발라 그 몸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며, 결국 무상하여 부서지고 변하고 달라지는 법이다. 이를 이름하여 몸이라고 한다.
다시 몸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색신이니, 이를 몸이라고 한다.
다시 땅의 몸ㆍ물의 몸ㆍ불의 몸ㆍ바람의 몸이니, 이를 몸이라고 한다.
다시 코끼리를 타는 병사들의 무리, 말을 타는 병사들의 무리, 수레를 타는 병사들의 무리, 그리고 보병의 무리가 있으니, 이를 몸이라고 한다.다시 육식(六識)의 몸ㆍ육촉의 몸ㆍ육수(六受)의 몸ㆍ육상(六想)의 몸ㆍ육사(六思)의 몸ㆍ육애(六愛)의 몸ㆍ육심(六尋)의 몸ㆍ육사(六伺)의 몸이 있으니, 이를 몸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사대로 이루어진 안의 색신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서, 또는 사대로 이루어진 안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 중의 일부에 대해서 무상하다고 사유하고 무상하다고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으며 관찰하여 정(定)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로 이루어진 안의 색신으로서의 몸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서 또는 사대로 이루어진 안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서 그것이 괴로움ㆍ근심ㆍ종기ㆍ화살ㆍ탐욕의 맛ㆍ병(病)ㆍ의지의 연[依緣]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수 있는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無我)임을 사유한다. 또한 그 연(緣)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끼니,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명색을 연으로 하여 육처가 있고, 나아가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로 이루어진 안의 색신으로서의 몸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서, 또는 사대로 이루어진 안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서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끼니, 곧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나아가 명색이 멸하므로 육처가 멸하고 나아가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가는 즐거움이 있을 때 가는 즐거움이 있다고 알고, 나아가 눕는 즐거움이 있을 때 눕는 즐거움이 있다고 알고, 또한 몸이 머무는 즐거움을 여실히 알고, 나아가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가고 오고 굽히고 펴고 회전하는 것을 바르게 알아 행하고, 나아가 잠자고 깨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을 바르게 알아 행하고, 나아가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숨을 길게 내쉴 때는 길게 내쉰다고 알고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고 알고, 짧게 내쉴 때는 짧게 내쉰다고 알고, 짧게 들이쉴 때는 짧게 들이쉰다고 알고 있으니, 마치 선사(旋師)가 줄을 당길 때에 길게 당길 때는 길다는 것을 알고, 짧게 당길 때는 짧다고 아는 것과 같다. 나아가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정수리에서 발 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발끝에서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부정한 것을 본다. 곧 몸에는 머리카락ㆍ털ㆍ손톱ㆍ치아ㆍ겉피부ㆍ속피부ㆍ피ㆍ살ㆍ근육ㆍ혈맥ㆍ지라ㆍ콩팥ㆍ염통ㆍ간ㆍ크고 작은 더러운 곳ㆍ차 있는 변(便)ㆍ큰 눈물ㆍ침ㆍ고름ㆍ지방ㆍ뇌ㆍ막(膜)ㆍ작은 눈물ㆍ땀ㆍ골수ㆍ뼈 등이 있다고 관찰한다. 마치 눈이 맑은 사람이 문이 둘 달린 곳간에 여러 가지 곡식, 곧 호마(胡麻)ㆍ대두ㆍ소두ㆍ비두(豍豆)ㆍ보리ㆍ밀 등이 있음을 관찰하여 보는 것과 같다.이와 같이 비구가 정수리에서 발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발끝에서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몸 안에 여러 가지 부정한 것이 갖추어져 있음을 본다. 나아가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몸의 여러 가지 대종(大種), 곧 이 몸에는 오직 지대ㆍ수대ㆍ화대ㆍ풍대가 있다고 관찰한다. 마치 솜씨 좋은 소 잡는 사람이나 소 잡는 사람의 제자가 소를 잡되, 네 덩어리를 만들매 낮아서 보아도, 서서 보아도, 가면서 보아도, 머물면서 보아도 단지 네 덩어리만을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가 여러 대종, 곧 이 몸에는 오직 지대ㆍ수대ㆍ화대ㆍ풍대가 있다고 관찰한다. 아울러 이 여러 대종은 다니 물과 불에 의지하여 서로 상위한 것을 일으키고 음식에 의해 성장하고 양육되나 약하고 열등하고 무력하고 굳건하지 못하고 강하지 못하여 생각생각에 변하여 머물지 못함을 관찰한다. 나아가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몸은 먹는 것3)으로 머물고 먹는 것에서 집기하고 먹는 것에 연하여 머문다는 것을 체득하여 먹는 것이 없으면 머무는 것도 없다고 관찰한다. 마치 불이 땔감을 연하여야 타오를 수 있고 땔감이 없으면 곧 멸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가 몸은 먹는 것으로 머물고 먹는 것에서 집기하고 먹는 것에 연하여 머문다는 것을 체득하여 먹는 것이 없으면 머물지 못한다라고 관찰한다. 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몸에서 집기한 괴로움을 관찰하니
그 모두가 먹는 것을 연한다.
만약 능히 먹는 것을 제거하고 멸한다면
곧 여러 괴로움이란 없어진다.
이와 같이 먹는 것은 환난이니
이것으로 괴로움이 이루어짐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비구가 먹는 것을 멸해 버리면
반드시 열반을 증득함이 정해진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몸에 대해 진공(盡空)과 구공(俱空)을 관찰하여 염(念)으로써 완전히 알고 요해하여 행하고, 나아가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이 몸은 종기이고 부스럼이며, 이 몸에는 부스럼의 진액이 흘러나오는 아홉 문이 있는데 진액이 흘러나오는 곳은 모두가 부정하다고 관찰한다. 나아가 마하가섭이 말한 바와 같다. 곧 “사대로 이루어진 색신은 결국 쇠약해지고 서로 어긋나고 진액이 흘러나오고 나아가 수명이 짧아 그 끝을 재촉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아가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 하여 안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나머지 모든 행(行)의 작용에 대해,곧 사대로 이루어진 안의 색신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 또는 사대로 이루어진 안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어떤 것이 안의 몸인가. 몸에서 취하여진 것으로 안의 것을 연하여 생한 것 또는 자신의 성품을 지닌 것 또는 자신에게 포섭되는 것이니, 이를 안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관찰인가. 여실(如實)한 사람이 미묘하게 관찰하고 바르게 사유하여 연을 관찰하고 요해하는 것이니, 이를 관찰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행위인가. 이와 같은 미묘한 관찰을 성취하여 법에 어긋나지 않으며 보호하며 유지하는 행위 또는 미묘한 행위이니, 이를 행위라고 한다.
어떤 것이 열심히 정진하는 것인가. 여실한 사람이 법에 순응하여 많이 행하고 정진하는 것이니, 이를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라고 한다.다시 몸과 마음의 일으킴ㆍ드러냄ㆍ넘어섬,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바른 지혜인가. 여실한 사람이 해탈의 방편을 알고 보는 것이니, 이를 바른 지혜라고 한다.어떤 것이 염을 갖추는 것인가. 여실한 사람이 기억하여 생각하고 미묘하게 생각하고 연에 대해 생각하며 머물러 잊지 않고 상속하며, 염을 잃지 않고 염을 모으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을 갖추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세상인가. 두 종류의 세상이 있으니, 중생의 세상과 행(行)의 세상이다. 다섯 취(趣)에서 생을 받는 이것을 중생의 세상이라 하고, 오취온을 행의 세상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탐욕인가. 탐욕의 선하지 않은 근이니, 이를 탐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근심인가. 의촉의 고수(苦受)이니, 이를 근심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제거한다는 것인가. 덮인 것을 뒤집고 벗어나 단절하고 뱉어 내는 것이니, 이를 제거한다라고 한다.어떤 것이 밖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사대로 이루어진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 또는 사대로 이루어진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끼며,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하는 것이니, 이를 밖의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로 이루어진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 또한 사대로 이루어진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괴로움ㆍ아픔ㆍ종기ㆍ화살ㆍ애착의 맛ㆍ병ㆍ의지의 연[依緣]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관찰하여 연(緣)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색을 연으로 하니, 육처에서 이에 이르는 것을 이름하여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로 이루어진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 또한 사대로 이루어진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나아가 명색이 멸하면 육처가 멸한다(이하 생략). 이를 밖의 몸에 대해 관찰하는 몸의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나머지 모든 행(行)의 작용에 대해, 곧 사대로 이루어진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 또한 사대로 이루어진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어떤 것이 밖의 몸인가. 몸에서 취하여진 것이 아니며, 안의 것을 연하여 생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성품을 지니지 않고 자기에게 포섭되지 않는 것이니, 이를 밖이라고 한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어떤 것이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사대로 이루어진 안과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 또한 사대로 이루어진 안과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 무상함을 관찰하여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로 이루어진 안과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 또한 사대로 이루어진 안과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 괴로움ㆍ아픔ㆍ종기ㆍ화살ㆍ애착의 맛ㆍ병ㆍ의지의 연[依緣]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관찰하여 연(緣)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촉을 연으로 하여 수가 있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로 이루어진 안과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 또한 사대로 이루어진 안과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나아가 명색이 멸하면 육처가 멸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무덤 사이에 버려져 있는 죽은 시체를 보되, 그 시체는 버려진 지 1일에서 3일이 되는 것임을 본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무덤 사이에 버려져 있는 죽은 시체를 보되, 그 시체는 1일에서 3일이 되는 것이며, 곪아 부풀어 오르고4) 푸르게 변한 것5)을 본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무덤 사이에 버려져 있는 죽은 시체를 보되, 그 시체는 1일에서 3일이 되는 것이며, 까마귀ㆍ새ㆍ호랑이ㆍ이리 및 이런저런 여러 가지 짐승이 물어뜯은 것6)을 본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죽은 시체를 보되, 뼈와 관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나 푸르고 붉게 문드러지고 부서져 있으며, 고름과 피로 깨끗하지 못하며 냄새가 더럽고 나쁜 것을 본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죽은 시체를 보되, 뼈와 관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피묻은 피부로 덮여 있으며 힘줄과 혈맥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을 본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죽은 시체를 보되, 뼈와 관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나 피묻은 살점들이 이미 떨어지고 힘줄과 혈맥만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을 본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죽은 시체를 보되, 뼈와 관절이 끊어지고 부서졌으나 제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 것을 본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죽은 시체를 보되, 뼈와 관절이 끊어지고 부서져 제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다리ㆍ종아리ㆍ넓적다리ㆍ지라ㆍ볼기ㆍ척수ㆍ갈비ㆍ손ㆍ발ㆍ어깨ㆍ팔ㆍ정수리의 해골 등 여러 뼈들이 각자 장소를 달리하고 있는 것을 본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죽은 시체를 보되, 뼈와 관절이 오래 되어 흰색은 조개와 같고, 푸른색은 집비둘기가 썩어 부서진 것과 같음을 본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죽은 시체를 보되, 불덩어리 위에 놓이어 머리카락ㆍ털ㆍ피부ㆍ피ㆍ살점ㆍ힘줄ㆍ혈맥ㆍ골수가 타고, 그 모든 머리카락ㆍ털로부터 골수에 이르리까지가 점점 소멸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 법을 관찰하여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 그리고 각 방향의 사이, 그리고 위와 아래의 장소에 이 법들이 머무르나, 이 법들은 본래 없다가 생긴 것이며, 생하였다가 멸(滅)로 돌아간다고 관찰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나머지 모든 행의 작용, 곧 사대로 이루어진 안과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모든 법에 대해, 또한 사대로 이루어진 안과 밖의 색신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에 대해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어떤 것이 안과 밖의 몸인가. 몸에서 취하여진 것 또는 취하여지지 않은 것이니, 이를 안과 밖의 몸이라고 한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의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비구가 몸의 법이 연(緣)에서 일어나는 행(行)임을 관찰하고 또한 몸의 법이 연에서 멸하는 행임을 관찰한다. 비구가 이와 같이 몸의 법이 연에서 일어나고 연에서 멸하는 행임을 관찰하여 ‘몸이 있다’라는 염(念)을 안에서 일으키니, 이것은 지혜에 의한 것이고 밝은 식별에 의한 것이지, 몸에 의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의지하는 것이 없는 행을 하여 세상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에게 안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행위가 있으니, 열심히 정진하고 바른 지혜와 염을 갖추어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다. 또한 밖의 몸 그리고 안과 밖의 몸도 역시 그와 같다.어떤 것이 수(受)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인가. 수는 안촉의 수로부터 의촉의 수에 이르기까지이니, 이를 수라고 한다.
어떤 것이 안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모든 안의 수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의 수에 대해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끼는 것이니,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안의 수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의 수에 대해 괴로움ㆍ근심ㆍ종기ㆍ화살ㆍ맛ㆍ병ㆍ의지의 연[依緣]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ㆍ그리고 무아임을 사유하여, 연(緣)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촉을 연으로 하여 수가 있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안의 수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의 수에 대해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나아가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한다(이하 생략). 이를 안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나머지 여러 행의 작용, 곧 모든 안의 수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의 수에 대해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무엇을 안의 수라고 하는가. 안은 안의 것 또는 연(緣)인 것 또는 자신의 성품을 지니는 것 또는 자기에게 속하는 것이니, 이를 안이라고 한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의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어떤 것이 비구가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모든 밖의 수에 대해 또는 일부의 밖의 수에 대해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밖의 수에 대해, 또는 일부의 밖의 수에 대해 괴로움ㆍ근심ㆍ종기ㆍ화살ㆍ맛ㆍ병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사유하여, 연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촉을 연하여 수가 있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밖의 수에 대해, 또는 일부의 밖의 수에 대해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나아가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아울러 나머지 여러 행의 작용, 곧 모든 밖의 수 또는 일부의 밖의 수에 대해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하는 행위라고 한다.어떤 것이 밖의 수인가. 현행하는 수 중에 취하여지지 않은 것이니, 밖의 것 또는 안의 것이 아닌 것 또는 연이 아닌 것 또는 자신의 성품을 지니지 않은 것 또는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밖이라고 한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의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어떤 것이 안과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안과 밖의 모든 수에 대해, 또는 안과 밖의 일부의 수에 대해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안과 밖의 수에 대해, 또는 안과 밖의 일부의 수에 대해 괴로움ㆍ근심ㆍ종기ㆍ화살ㆍ맛ㆍ병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사유하여, 연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촉을 연하여 수가 있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밖의 수에 대해, 또는 안과 밖의 일부의 수에 대해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고, 나아가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낙수(樂受)를 느끼면 ‘나는 즐거움을 느낀다’라고 알고, 고수 또는 불고불락수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 그리고 염착된 낙수를 느끼면 ‘나는 염착된 즐거움을 느낀다’라고 알고, 무염(無染)의 낙수를 느끼면 ‘나는 무염의 즐거움을 느낀다’라고 알고, 고수 또는 불고불락수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나머지 여러 행의 작용, 곧 안과 밖의 모든 수 또는 안과 밖의 일부의 수에 대해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수에 대해 수를 관하는 행위라고 한다.
어떤 것이 안과 밖의 수인가. 취하여진 것 또는 취하여지지 않은 것이니, 이를 안과 밖이라고 한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의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이와 같이 비구가 수의 법이 연에서 일어나는 행임을 관찰하고, 또한 수의 법이 연에서 멸하는 행임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비구가 수의 법이 연에서 일어나고 멸하는 행임을 관찰하여 ‘수가 있다’는 염을 안에서 일으키니, 이것은 지혜에 의한 것이고 밝은 식별에 의한 것이지, 수에 의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의지하는 것이 없는 행을 하여 세상에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에게 안의 수에 대해 수를 관찰하는 행위가 있으니, 열심히 정진하고 바른 지혜와 정념(正念)을 갖추어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다. 또한 밖의 수 그리고 안과 밖의 수도 역시 그와 같다.어떤 것이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어떤 것이 마음인가. 마음ㆍ뜻ㆍ식별ㆍ육식신(六識身)ㆍ칠식계(七識界)이니, 이를 마음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안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모든 안의 마음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의 마음에 대해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모든 안의 마음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의 마음에 대해 괴로움ㆍ근심ㆍ종기ㆍ화살ㆍ맛ㆍ병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ㆍ그리고 무아임을 사유하여, 연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으로 하여 식이 있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안의 마음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의 마음에 대해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한다. 이를 이름하여 비구가 안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나머지 여러 법의 작용, 곧 모든 안의 마음 또는 일부의 안의 마음에 대해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를 한다.
어떤 것이 안의 마음인가.마음 중에 취하여진 것으로서 안이란 안의 것 또는 연인 것 또는 자신의 성품을 지니는 것 또는 자기에게 속하는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안이라고 한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의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어떤 것이 비구가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모든 밖의 마음에 대해, 또는 일부의 밖의 마음에 대해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밖의 마음에 대해, 또는 일부의 밖의 마음에 대해 괴로움ㆍ근심ㆍ종기ㆍ화살ㆍ맛ㆍ병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사유하여, 연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으로 하여 식이 있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밖의 마음에 대해, 또는 일부의 밖의 마음에 대해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나머지 여러 마음의 작용, 곧 모든 밖의 마음 또는 일부의 마음에 대해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어떤 것이 밖의 마음인가. 마음에서 취하여지지 않은 것이니, 밖의 것 또는 안의 것이 아닌 것 또는 연이 아닌 것 또는 자신의 성품을 지니지 않는 것 또는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의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어떤 것이 비구가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모든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아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괴로움ㆍ근심ㆍ종기ㆍ화살ㆍ맛ㆍ병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관찰하여, 연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즉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으로 하여 식이 있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모든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애욕이 있는 마음은 여실히 애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고, 애욕이 없는 마음은 여실히 애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알고, 나아가 더 뛰어난 것이 있는 마음은 여실히 더 뛰어난 것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고, 더 뛰어난 것이 없는 마음은 여실히 더 뛰어난 것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나머지 여러 행의 작용, 곧 모든 안과 밖의 마음 또는 일부의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어떤 것이 안과 밖의 마음인가. 마음에서 취하여진 것과 취하여지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의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이와 같이 비구가 마음의 법이 연(緣)에서 일어나는 행임을 관찰하고, 또한 이와 같이 연에서 멸하는 마음의 행을 관찰한다. 비구가 연에서 일어나고 멸하는 마음의 행을 관찰하여 ‘마음이 있다’라는 염을 안에서 일으키니, 이것은 지혜에 의한 것이고 밝은 식별에 의한 것이지, 마음에 의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의지하는 것이 없는 행을 하여 세상에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 이과 같이 비구에게 안의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행위가 있으니, 열심히 정진하고 바른 지혜와 정념을 갖추어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다. 또한 밖의 마음 그리고 안과 밖의 마음도 역시 그와 같다.어떤 것이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법은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것으로서, 그 나머지 색과 비색인 것 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또는 유대(有對)인 것과 무대인 것 또는 성스러운 것과 성스럽지 않은 것이니, 이를 법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비구가 안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나머지 모든 안의 법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의 법에 대해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안의 법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의 법에 대해 괴로움ㆍ근심ㆍ종기ㆍ화살ㆍ맛ㆍ병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사유하여, 연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다. 나아가 생을 연으로 하여 늙음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및 여러 괴로움의 쌓임이 집기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안의 법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의 법에 대해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나아가 생이 멸하면 늙음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및 여러 괴로움의 쌓임이 멸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나머지 여러 행의 작용, 곧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느낌과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안의 법, 또는 일부의 안의 법에 대해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어떤 것이 안의 법인가. 법 중에 취하여진 것으로서, 안이란 안의 것 또는 연인 것 또는 자신의 성품을 지니는 것 또는 자기에게 속하는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안이라고 한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의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어떤 것이 비구가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밖의 법에 대해, 또는 일부의 법에 대해 존재하는 그대로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하는 것과 같다.이를 이름하여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밖의 법에 대해, 또는 일부의 밖의 법에 대해 존재하는 그대로 괴로움ㆍ고뇌ㆍ종기ㆍ화살ㆍ맛ㆍ근심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사유하여, 연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생을 연으로 하여 늙음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및 여러 괴로움의 쌓임이 집기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밖의 법에 대해, 또는 일부의 밖의 법에 대해 존재하는 그대로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나아가 생이 멸하면 늙음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및 여러 괴로움이 쌓이고 모인 것이 멸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여러 행의 작용, 곧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모든 나머지 밖의 법, 또는 일부의 밖의 법에 대해 존재하는 그대로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어떤 것이 밖의 법인가. 법 중에 취하여지지 않은 것으로서 밖의 것 또는 안의 것이 아닌 것 또는 연이 아닌 것 또는 자신의 성품을 지니지 않은 것 또는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밖이라고 한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의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어떤 것이 비구가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인가. 비구가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과 밖의 법에 대해 존재하는 그대로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하는 것과 같다.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안과 밖의 법에 대해,또는 일부의 안과 밖의 법에 대해 존재하는 그대로 괴로움ㆍ고뇌ㆍ종기ㆍ화살ㆍ맛ㆍ근심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연(緣)의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사유하여, 연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즉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생을 연으로 하여 늙음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및 여러 괴로움의 쌓임이 집기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또는 일부의 안과 밖의 법에 대해 존재하는 그대로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나아가 생이 멸하면 늙음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및 여러 괴로움이 쌓이고 모인 것이 멸한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자신의 안에 애욕이 있으면 여실히 ‘내 안에 애욕이 있다’라고 알고, 자신의 안에 애욕이 없으면 여실히 ‘내 안에 애욕이 없다’라고 알고, 애욕이 아직 생하지 않았으면 여실히 ‘애욕이 아직 생하지 않았다’라고 알고, 애욕이 미래에 생길 것 같으면 여실히 ‘애욕이 미래에 생길 것이다’라고 알고, 애욕이 현재에 생할 때에는 여실히 ‘마땅히 단절할 것이다’라고 알고, 애욕이 이미 단절되었을 때에는 여실히 ‘다시 생하지 않는다’라고 알며, 성냄과 어리석음과 수면과 흥분, 걱정과 의혹에 있어서도 역시 그와 같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자신의 눈이 색을 식별하여 애욕과 성냄이 존재하면 여실히 ‘내 안에 눈이 색을 식별하여 애욕과 성냄이 존재한다’라고 알고, 또한 자신의 눈이 색을 식별했지만 애욕과 성냄이 없으면 여실히 ‘내 안에 눈이 색을 식별했지만 애욕과 성냄이 없다’라고 안다. 또한 눈이 색을 식별하여 애욕과 성냄이 아직 생하지 않았으면 여실히 ‘아직 생하지 않았다’라고 안다.또한 눈이 색을 식별하여 애욕과 성냄이 미래7)에 생길 것 같으면 여실히 ‘미래에 생길 것이다’라고 안다. 또한 눈이 색을 식별하여 애욕과 성냄이 생길 때에는 여실히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이다’라고 안다. 또한 눈이 색을 식별하여 애욕과 성냄이 이미 단절하였다면 여실히 ‘다시 생하지 않는다’라고 안다.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다시 비구가 자신의 안에 염각지(念覺支)가 존재하면 여실히 ‘내 안에 염각지가 존재한다’라고 안다. 또한 자신의 안에 염각지가 없으면 여실히 ‘내 안에 염각지가 없다’라고 안다. 또한 염각지가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는 여실히 ‘아직 생기지 않았다’라고 안다. 또한 염각지가 미래에 생길 것 같으면 여실히 ‘미래에 생길 것이다’라고 안다. 또한 염각지가 이미 생하여 있을 때는 여실히 ‘구족하여 있다’라고 안다. 다른 여섯 각지를 닦는 것에 있어서도 역시 그와 같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여실히 고(苦)와 고의 집(集)과 고의 멸(滅)과 고의 멸에 이르는 도(道)를 알며, 여실히 누(漏)와 누의 집과 누의 멸과 누의 멸에 이르는 도를 안다(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모든 행을 싫어해 떠나 불사(不死)의 문[甘露界]에 든다. 이것이 곧 적정함이고 뛰어남이며, 모든 행을 멸진하고 갈애를 소멸한 열반이다(이햐 생략).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아울러 나머지 여러 행의 작용, 곧 사대의 색신에 포섭되는 법과 수와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안과 밖의 법, 또는 일부의 안과 밖의 법에 대해 존재하는 그대로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라고 한다.
어떤 것이 안과 밖의 법인가. 법 중에서 취하여진 것과 취하여지지 않은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안과 밖의 법이라고 한다. 나머지 주제에 대한 의미의 설명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이와 같이 비구가 법에 대해 연에서 일어나는 법의 행(行)을 관찰하고, 법에 대해 연에서 멸하는 법의 행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비구가 연에서 일어나고 멸하는 법의 행을 관찰하여 ‘법이 있다’라는 염(念)을 안에서 일으키니, 이것은 지혜에 의한 것이고 밝은 식별에 의한 것이지, 법에 의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의지하는 바가 없는 행위이기에 세상에서 어떤 것도 취하지 않는다.이와 같이 비구가 안의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하는 행위가 있으니, 열심히 정진하고 바른 지혜와 정념을 갖추어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다. 또한 밖의 법 그리고 안과 밖의 법에 대해서도 역시 그와 같다.여실히 사념처를 닦고 배우면 장차 이러한 희유한 일이 있게 된다.곧 모든 세상에 대해 늘 무아의 수행을 하니, 마음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며 역시 머무는 곳도 없어진다. 그러면 자아의 생각ㆍ중생의 생각ㆍ목숨의 생각ㆍ사람의 생각이 있을 수 없다. 또한 늘 제일의(第一義)의 공(空)을 수행을 하니, 최후의 마음을 얻고 더 이상 무익한 것을 짓지 않는다면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게 된다. 그리고 삼세(三世)에 걸림이 없어지니 욕계에서 해탈하고 색계와 무색계에서 해탈하며 번뇌는 멸하여 다시 생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다.봄의 마지막 달에는 절기가 극히 뜨거우니 구름이나 안개가 있을 수 없다. 질그릇에 약간의 물이 있어도 곧 급히 졸아 들어 없어진다. 이와 같이 비구가 최후의 마음을 얻고 더 이상 무익한 것을 짓지 않는다면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게 되며, 나아가 번뇌는 멸하여 다시 생하지 않는다. 이를 이름하여 괴로움의 끝이라고 한다.
바람이 맹렬한 불길을 불어대는 것과 같으니
멸할 때에 그 장소를 옮기지 않는다.
깨달음으로 명색을 부채질하여도
다할 때에는 역시 이르는 장소가 달리 없다.
공작인[工人]이 달아오른 쇠를 두드리는 것과 같으니
유성은 사라지되 형상이 없다.
도야(陶冶)하여 점점 무(無)로 돌아가면
형상을 구한다는 믿음은 얻기 어렵다.
비가 바다에 내리면
본래의 물방울이 어찌 다시 존재하겠는가.
해탈 또한 어디에 있겠는가.
공(空)한 까닭에 담연(湛然)함으로 즐거워할 뿐
몸을 보리고 상(想)을 떠나고
여러 수(受)조차 느끼는 바 없으니,
행하는 바가 다하여 적정해지면
멸함마저 역시 자연히 멸한다.
7) 정근품(正勤品)【문】 정근(正勤)은 몇 가지인가?【답】 네 가지이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비구가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의욕을 지니어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근면하고 출중하게 정진하고 마음을 섭수(攝受)하는 정단(正斷), 또한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서 이미 일어난 것을 반드시 미래에 단절하겠다는 의욕을 지니어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근면하고 출중하게 정진하고 마음을 섭수하는 정단, 또한 선한 법으로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일어나게 하겠다는 의욕을 지니어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근면하고 출중하게 정진하고 마음을 섭수하는 정단, 또한 선한 법으로서 이미 생한 것을 머물게 하고 구족하게 하고 닦아서 잊지 않게 하고 증대시키겠다는 의욕을 지니어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근면하고 출중하게 정진하고 마음을 포섭하는 정단이다.어떤 것이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의욕인가. 몸과 말과 뜻의 악행을 이름하여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이라고 한다. 다시 열 가지 선하지 않은 업의 길이 있으니, 이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이라고 한다. 다시 선하지 않은 것에 포섭되고 선하지 않은 근(根)에 상응하고 선하지 않은 근에서 일어난, 연이 아니며 취하여지지 않은 것이 있으니, 이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이라고 한다.다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의혹ㆍ분노ㆍ원한ㆍ혐오ㆍ망령된 성냄ㆍ질투ㆍ인색ㆍ아첨ㆍ기만ㆍ악을 숨김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자기를 높임ㆍ쟁송(諍訟)함ㆍ딱딱함ㆍ방일ㆍ아만ㆍ증상만(增上慢) 등이 있으니, 이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이라고 한다. 다시 열 가지 삿된 법이 있으니, 이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이 아직 생하지 않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아직 모이지 않은 것을 ‘나는 이들을 생하지 않게 하고 일어나지 않게 하고 모이지 않게 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있으니, 이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의욕이라고 한다.무엇을 의욕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는가. 의욕을 내고 거듭 의욕을 내고 의욕을 짓고 의욕을 일으키고 의욕을 드러내고 의욕을 넘쳐나게 하고 의욕을 얻고 의욕을 촉달(觸達)하고 의욕을 증득하는 것이니, 이를 의욕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스스로 근면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참고 힘써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고,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려 하고,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여 하는 것이니, 이를 스스로 근면하는 것이라고 한다.무엇을 출중하게 정진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몸과 마음의 분발ㆍ드러냄ㆍ넘쳐남ㆍ참음ㆍ물러서지 않음ㆍ근면히 힘씀ㆍ수행ㆍ정진 등이니, 이를 정진이라고 하며, 이러한 정진을 일으키고 바로 일으키고 바로 생하게 하고 촉달하고 증득하는 것을 이름하여 출중하게 정진하는 것이라고 한다.무엇을 마음의 섭수라고 하는가. 마음ㆍ뜻ㆍ식별ㆍ육식신(六識身)ㆍ칠식계(七識界)이니, 이를 이름하여 마음이라고 하며, 이 마음을 섭수하고 바르게 섭수하고 연(緣)으로 섭수하고 근면히 힘쓰고 바르게 근면하고 용약(踊躍)하고 환희하는 것을 이름하여 마음의 섭수라고 한다.
무엇을 바름[正]이라고 하는가. 바른 인[正因]과 바른 사유[正思惟]와 바른 방편[正方便]이니, 이를 바름이라고 한다.무엇을 끊음[斷]이라고 하는가. 악한 법을 버리고 선한 법과 희고 청정한 법을 일으키고 현재에 즐거이 행하고 앎과 봄과 지혜로써 분별하고 누(漏)를 단절하여모든 괴로움의 끝을 다하는 것이니, 이를 끊음이라고 한다.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서 이미 일어난 것을 반드시 미래에 단절하겠다는 의욕을 지니어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근면하고 출중하게 정진하고 마음을 섭수하는 정단도 역시 위와 같이 설명된다. 단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무엇을 선한 법으로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일어나게 하겠다는 의욕이라고 하는가. 몸과 말과 뜻의 선행이 있으니, 이를 선한 법이라고 한다.
나아가 무었을 끊음이라고 하는가. 악한 법을 버리고 선한 법과 희고 청정한 법을 일으키고 현세에 즐거이 행하고 앎과 봄과 지혜로써 분별하고 누를 단절하고 모든 괴로움의 끝을 다하는 것이니, 이를 끊음이라고 한다.무엇을 선한 법으로서 이미 일어난 것을 머물게 하려는 의욕이라고 하는가. 몸과 말과 뜻의 선행이 있으니, 이를 선한 법이라고 한다. 나아가 다시 열 가지 바른 법인 정견으로부터 정지(正智)까지와 그 외에 이에 따르는 바른 법들이 있으니, 이를 선한 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선한 법이 일어나고 모인 것을 ‘나는 머물게 하고 잃지 않게 하고 잊지 않게 하며 나는 궁극에 이르게 하겠다’라고 하는 이것을 이름하여 ‘선한 법으로서 이미 일어난 것을 머물게 한다’고 한다.무엇을 구족한다라고 하는가. 계율의 무리로서 아직 구족하지 못한 것을 구족하려 하고, 나아가 해탈지견(解脫知見)의 무리로서 아직 구족하지 못한 것을 구족하려 하는 것이니, 이를 구족한다라고 한다.
무엇을 닦는다고 하는가. 선한 법에 가까이하고 바로 가까이하고 의지하고 바로 의지하고 근면히 수행하고 닦고 배우는 것이니, 이를 닦는다고 한다.무엇을 잊지 않는다고 하는가. 선한 법을 잃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염(念)을 상속시켜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를 잊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을 증대시킨다고 하는가. 선한 법이 증대되고 널리 퍼지도록 의욕을 지니는 것이니, 이를 증대시킨다고 한다.나아가 무엇을 끊음이라고 하는가. 악한 법을 버리고 선한 법과 희고 청정한 법을 일으키고 현세에 즐거이 행하고 앎과 봄과 지혜로써 분별하고 여러 누를 단절하여 모든 괴로움의 끝을 다하는 것이니, 이를 끊음이라고 일컫는다.
8) 신족품(神足品)【문】 신족은 몇 가지인가?【답】 네 가지이다. 말하자면 욕정(欲定)의 단행(斷行)을 성취하는 신족을 닦는 것, 정진정(精進定), 심정(心定), 혜정(慧定)의 단행을 성취하는신족을 닦는 것이다.
어떤 것이 욕(欲)인가. 말하자면 의욕ㆍ거듭된 의욕ㆍ의욕의 지음ㆍ의욕의 분발ㆍ의욕의 드러냄ㆍ의욕의 넘쳐남ㆍ의욕의 얻음ㆍ의욕의 촉달ㆍ의욕의 요해(了解)ㆍ의욕의 증득이니, 이를 욕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정(定)인가. 마음의 머묾 또는 바로 머묾이니, 이를 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욕과 이러한 정이 있으니, 이를 욕정이라고 한다. 다시 의욕을 귀히 여기고 의욕에 지향(志向)하고 의욕에 의지하고 의욕으로 나아가고 의욕을 증대하고 의욕을 위주로 하여,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욕정이라고 한다.다시 선한 의욕을 분발시켜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하며, 선하지 않은 의욕을 분발시켜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하며, 무기의 의욕을 분발시켜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하니, 이를 이름하여 욕정이라 한다.다시 선행을 하지 않으려 할 때는, 스스로 “이것은 내가 선으로 삼는 것이 아니며 좋아하는 것이 아니며 상응하는 것이 아니며 행할 만한 것이 아니며 내가 이렇게 행할 때가 아니니, 나는 무슨 까닭으로 선행을 하지 않으려 하는가?”라고 사유한다. 그리하여 문득 의욕을 존귀하고 높은 것으로 삼아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욕정이라고 한다.다시 선한 법을 행하려 할 때는, 스스로 “이것은 내가 선으로 삼는 것이며 이는 좋아하는 것이며 이는 상응하는 것이며 이는 행할 만한 것이며 이는 내가 행할 때이니, 나는 선행을 하려 한다”라고 사유한다. 그리하여 의욕을 존귀하고 높은 것으로 삼아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욕정이라고 한다.다시 선한 의욕이 일어나지 않으니, 선한 의욕은 일어나지 않고 선하지 않은 의욕이 일어나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함께 현행한다. 그러면 곧 스스로 “이것은 내가 선으로 삼는 것이 아니며 좋아하는 것이 아니며 상응하는 것이 아니며 행할 만한 것이 아니며 내가 이렇게 행할 때가 아니니, 나는 무슨 까닭으로 선행을 하지 않으려 하며 오히려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함께 현행하는가?”라고 사유한다. 그리하여 의욕을 존귀하고 높은 것으로 삼아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욕정이라고 한다.다시 선하지 않은 의욕이 일어나지 않으니, 선하지 않은 의욕은 일어나지 않고 선한 의욕이 일어나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함께 현행하지 않는다.그러면 곧 스스로 “이것은 내가 선으로 삼는 것이 아니며 좋아하는 것이며 이는 상응하는 것이며 이는 행할 만한 것이며 이는 내가 행할 때이니, 나는 선행을 하려 하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함께 현행하지 않는다”라고 사유한다. 그리하여 의욕을 존귀하고 높은 것으로 삼아 정을 얻고 마음을 머물게 하고 바로 머물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욕정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끊음[斷]인가. 선한 법으로써 마음을 끌고 바로 끌고 조절하고 바로 조절하고 멈추고 바로 멈추고 잃지 않고 옮기지 않는 것이니, 이를 끊음이라고 한다.
다시 몸과 마음의 분발ㆍ드러냄ㆍ넘쳐남ㆍ참음ㆍ근면히 힘씀ㆍ나아가 물러서지 않음 등이 있으니, 이를 끊음이라고 한다.
다시 사정단(四正斷)을 닦는 것이니, 이를 끊음이라고 한다.
다시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을 버리고 선한 법을 일으키고 현세에 즐겁게 현행하고 앎과 봄과 지혜로써 분별하고 누를 단절하여 모든 괴로움의 끝을 다하는 것이니, 이를 끊음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단행(斷行)인가. 열(悅)ㆍ희(喜)ㆍ신(信)ㆍ사(捨)ㆍ염(念)ㆍ정지(正智)이니, 이를 단행이라고 한다.
다시 욕정의 단행을 성취하는 신족을 닦는 것과 욕ㆍ정진ㆍ심ㆍ혜를 제외한 나머지 부수되는 법으로서 수ㆍ상ㆍ사(思)ㆍ촉ㆍ작의ㆍ심(尋)ㆍ사(伺)ㆍ해탈ㆍ순신(順信)ㆍ열(悅)ㆍ희(喜)ㆍ심경안ㆍ신(信)ㆍ불방일ㆍ염(念)ㆍ심사(心捨)ㆍ신경안ㆍ신정진, 그리고 나머지 부수되는 색이 있으니, 이를 단행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성취인가. 욕정의 끊음 및 단행과 함께 일어나고 바로 함께 일어나고 취하여지고 바로 취하여지고 생하고 바로 생하고 구족하는 것이니, 이를 성취라고 한다.
어떤 것이 닦음인가. 욕정의 단행을 성취하는 신족에 가까이하고 바로 가까이하고 의지하고 바로 의지하고 근면히 수행하고 닦고 배우는 것이니, 이를 닦음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신(神)인가. 뜻대로 신통 부리는 것 또는 뜻대로 변화하며, 뜻대로 자재하게 여러 변화를 부린다. 이를 이름하여 신이라 한다.다시 비구가 큰 신통력이 있어서 능히 무량하게 변화하고 대지를 진동시키고 하나로써 여럿이 되고여럿으로써 하나가 된다. 그리고 가까운 사물과 먼 사물 및 장벽 높은 산 등을 뚫고 통과하여 걸림이 없음이 허공을 다니는 것과 같다. 또한 다리를 결가부좌하고 앉아 허공으로 떠오름이 새와 같고, 땅 속으로 드나듦이 물에 출몰하는 것과 같다. 또한 물 위를 다님이 땅에서와 같고 몸에서 연기와 불꽃을 내는 것이 큰 불덩어리와 같다. 또한 위엄과 덕을 갖춘 해와 달조차 손으로 문지르며, 나아가 범천에 이르기까지 몸으로 자재함을 얻으니, 이를 신이라고 한다.무엇을 족(足)이라고 하는가. 욕정의 단행이 바로 족(足)이며 입각지이며 인(因)이며 문이며 작용이며 길이며 이르는 곳이며 연(緣)이며 단서이다. 그리고 세력으로서 신통함을 일으키고 바로 일으키고 나타내고 바로 나타내고 드러내고 바로 드러내어 뜻대로 이루고 바로 뜻대로 이루니, 이를 족이라고 한다.그리고 비구가 욕정의 단행을 성취하는 신족을 수행하니, “나는 의욕에 있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겠다”라고 하여 앞뒤로 항상 생각을 갖추어 행하는 것이, 앞도 뒤와 같고 뒤도 앞과 같고 낮도 밤과 같고 밤도 낮과 같다. 그 마음은 개오(開悟)하여 덮여 씌워진 것이 없다. 명료함을 수행하여 몸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고 마음으로써 몸을 안정시키니 즐거움의 생각과 가벼움의 생각이 함께 하는 거신행(擧身行)8)이 있게 된다.어떤 것이 의욕의 낮음인가. 의욕이 게으름과 함께 상응하여 근면 정진하지 않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선함을 닫고 법을 물리치는 이것을 의욕의 낮음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게으름인가. 나태하고 흐릿하여 선한 법을 닫고 물리치는 이것을 게으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의욕이 이러한 게으름과 함께 상응하여 근면 정진하지 않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선함을 닫고 물리치는 이것을 의욕의 낮음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의욕의 높음인가. 의욕이 흥분과 함께 상응하고 고요함과 함께 상응하지 않아 어지러운 행위를 성취하는 이것을 의욕의 높음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흥분인가. 마음이 산란하여 고요하지 않은 것이니, 이를 흥분이라고 한다. 의욕이 이러한 흥분과 함께 상응하고 적정과 함께 상응하지 않아 어지러운 행위를 성취하니, 이를 이름하여 의욕의 높음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의욕의 빠짐인가. 의욕이 수면과 함께 상응하고 멸함의 염(念)과 함께 하지 않아,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고 선법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것을 의욕의 빠짐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수면(睡眠) 중의 수(睡)인가. 번뇌가 단절되지 않아 몸이 즐겁지 않고 조절되지 않고 가볍지 않고 부드럽지 않고 편안하지 않은 것이니, 이를 수라고 한다.어떤 것이 면(眠)인가. 마음이 흐릿하고 덮이고 가려진 것이니, 이를 면이라고 한다. 의욕이 이러한 수면과 함께 상응하고 멸함의 염(念)과 함께 하지 않아,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고 선법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것을 의욕의 빠짐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의욕의 흩어짐인가. 욕염(欲染)을 일으키고 욕염과 함께 상응하고 많은 애욕을 깨끗하다고 보며 환난이라고 보지 않고 밖의 다섯 애욕에 대해 마음이 산란하여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에 집착한다. 이를 이름하여 의욕의 흩어짐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욕염인가. 애욕 그 자체ㆍ애욕의 기름ㆍ애욕의 갈애ㆍ애욕의 기쁨ㆍ애욕의 가지ㆍ애욕의 그물ㆍ애욕의 지속함ㆍ애욕의 얻음ㆍ애욕의 집기ㆍ애욕에의 희망 등이니, 이를 욕염이라고 한다. 그리고 애욕을 지향하고 애욕에 오염된 것이니, 이러한 욕염과 함께 하고 욕염과 상응하고 많은 애욕을 깨끗하다고 보며 환난이라고 보지 않고 밖의 다섯 애욕에 대해 마음이 산란하여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에 대해 집착한다. 이를 이름하여 의욕의 흩어짐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앞뒤로 항상 생각을 갖춤인가. 비구가 아침에 수행하되 존재하는 그대로 사유하여 선한 법에 들고 세간을 벗어나고 열반에 들고 욕정에 상응하는 것을 떠난다. 아침에 수행한 뒤에 낮에 수행하고, 낮에 수행한 뒤에 저녁에 수행하고, 저녁에 수행한 뒤에 위로 경행하고, 위로 경행한 뒤에 아래로 경행하고, 아래로 경행한 뒤에 방에 들어가고, 방에 들어간 뒤에 첫째 밤의 시간대9)에 수행하고, 첫째 밤의 시간대에 수행한 뒤에 셋째 밤의 시간대10)에 수행하고, 셋째 밤의 시간대에 수행하되 존재하는 그대로 사유하여 선한 법에 들고 세간을 벗어나고 열반에 들고 욕정에 상응하는 것을 떠난다. 이를 이름하여 앞뒤로 항상 생각을 갖춘다고 한다.어떤 것이 앞도 뒤와 같고 뒤도 앞과 같은 것인가. 비구가 존재하는 그대로오근ㆍ오력ㆍ칠각지ㆍ사선ㆍ팔해탈ㆍ삼정11)ㆍ팔등지의 전반부를 수행하듯이, 존재하는 그대로 오근ㆍ오력ㆍ칠각지ㆍ사선ㆍ팔해탈ㆍ삼정ㆍ팔등지의 후반부를 수행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그대로 오근ㆍ오력ㆍ칠각지ㆍ사선ㆍ팔해탈ㆍ삼정ㆍ팔등지의 후반부를 수행하듯이, 존재하는 그대로 오근ㆍ오력ㆍ칠각지ㆍ사선ㆍ팔해탈ㆍ삼정ㆍ팔등지의 전반부를 수행한다. 이를 이름하여 앞도 뒤와 같고 뒤도 앞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낮도 밤과 같고 밤도 낮과 같은 것인가. 비구가 밝음의 생각을 취하여 낮의 생각을 잘 받아 지닌 뒤에 낮에 밝음의 생각을 사유하는 것과 같이 밤도 역시 그와 같다. 그리고 밤과 같이 낮도 역시 그와 같다. 이를 이름하여 낮도 밤과 같고 밤도 낮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그 마음이 개오하여 덮여 씌워진 것이 없는 것인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때와 번뇌의 때는 장애이고 덮개이고 속박이며, 선하지 않은 행위의 때도 마음의 장애이고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하고 마음을 덮어 씌운다. 이것이 마음을 덮고 이것이 속박으로 전향하게 하고 마음을 깨끗하지 않게 하고 마음을 희지 않게 하고 명료하지 않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마음을 덮고 씌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음에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때가 없고, 나아가 마음을 명료하게 한다면, 이를 그 마음이 개오하여 덮여 씌워진 것이 없다고 한다.어떤 것이 명료함을 지닌 마음의 수행인가. 비구가 지혜 및 광명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명료함을 지닌 마음을 수행하고,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명료함을 지닌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다.어떤 것이 지혜 및 광명과 함께 하는 마음인가. 세 가지 지혜가 밝게 비추니, 들음과 사유와 닦음의 지혜이다. 이를 이름하여 지혜 및 광명과 함께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에 가까이하고 바로 가까이하고 근면하게 수행하고 닦고 배우니, 이를 지혜 및 광명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명료함을 지닌 마음을 수행한다고 한다.어떤 것이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인가. 비구가 여러 가지 밝음의 모습, 곧 불빛, 해와 달의 빛, 구슬의 빛, 별빛 등을 취한다.이러한 여러 광명의 모습을 취한 뒤에 나무 밑이나 노지에서 광명을 사유하고 광명을 알고 광명을 요해하고 광명을 느낀다. 이러한 여실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 또는 지혜의 생각을 이름하여 광명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생각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머물고 함께 멸하는 것을 이름하여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에 가까이하고 바르게 가까이하고 근면하게 수행하고 닦고 배우는 것을 이름하여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명료함을 지닌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나무 밑이나 노지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두루 요해하는 것을 수행하여 명료함을 지닌 마음이 뛰어나게 됐을 때 이러한 진실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 또는 앎의 생각을 이름하여 밝음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생각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머물고 함께 멸하는 것을 이름하여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에 가까이하고 바르게 가까이하고 근면하게 수행하고 닦고 배우는 것을 이름하여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명료함을 지닌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한 그루의 나무 및 또는 둘셋이나 더 나아가 열 그루의 나무 밑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두루 요해하는 것을 수행하여 명료함을 지닌 마음이 뛰어나게 됐을 때……(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명료함을 지닌 마음을 수행한다고 한다.다시 비구가 한 곳의 정원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두루 요해하는 것을 수행하여……(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명료함을 지닌 마음을 수행한다고 한다.다시 비구가 한 곳의 정원 또는 둘셋이나 더 나아가 열 곳의 정원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두루 요해하는 것을 수행하여……(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명료함을 지닌 마음을 수행한다고 한다.다시 비구가 하나의 취락 또는 둘셋이나 더 나아가 열 곳의 취락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두루 요해하는 것을 수행하여……(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명료함을 지닌 마음을 수행한다고 한다.다시 비구가 더 나아가 물과 육지로 둘러싸인 곳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두루 요해하는 것을 수행하여……(이하 생략)……. 이를 이름하여 밝음의 생각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명료함을 지닌 마음을 수행한다고 한다.어떤 것이 비구가 몸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고 마음으로써 몸을 안정시키는 것인가. 비구가 몸과 마음으로써 올리고 바로 올리고 들고 바로 드니, 마치 사람이 그릇을 가지고 걸식을 하는데 그 그릇들을 연결시켜 풍성하게 하되 바로 풍성하게 하고 들되 바로 드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과 마음으로써 올리고 바로 올리고 들고 바로 드는 것이다.어떤 것이 비구가 몸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인가. 비구가 몸의 무상함을 사유하고 무상함을 알고 무상함을 요해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몸의 즐거움ㆍ몸의 조절ㆍ몸의 가벼움ㆍ몸의 부드러움ㆍ몸의 경안 등이 있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몸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몸의 괴로움ㆍ고뇌ㆍ종기ㆍ화살ㆍ맛ㆍ근심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음ㆍ충족되지 못함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관찰하여, 연(緣)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명색을 연으로 하여 육처가 있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몸의 즐거움ㆍ몸의 조절ㆍ몸의 가벼움ㆍ몸의 부드러움ㆍ몸의 경안 등이 있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몸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몸의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나아가 명색이 멸하면 육처가 멸한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몸의 즐거움ㆍ몸의 조절ㆍ몸의 가벼움ㆍ몸의 부드러움ㆍ몸의 경안 등이 있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몸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아는 것을 행하고 즐거운 것을 행하고, 아는 것에 머물고 즐거움에 머물고, 아는 것에 앉고 즐거움에 앉고, 아는 것을 취하고 즐거움을 취한다. 이와 같이 몸이 즐거움에 머무르되 여실히 즐겁게 머묾을 안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몸의 즐거움ㆍ몸의 조절ㆍ몸의 가벼움ㆍ몸의 부드러움ㆍ몸의 경안이 있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몸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시체가 불덩어리 위에서 탈 때 머리카락ㆍ털ㆍ피부ㆍ피ㆍ살점ㆍ힘줄ㆍ혈맥ㆍ골수 등이 점점 소멸하는 것을 보되,이 법들이 동ㆍ서ㆍ남ㆍ북과 그 사이[四維] 및 위와 아래 어디에도 이르지 않고, 또한 다른 곳에 이르지도 않으며 단지 잠시 머묾을 본다. 이 법은 본래 없다가 생긴 것이며, 존재한 뒤에 돌아가 멸함을 본다. 몸이 이러한 법임을 관찰하되,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몸의 즐거움ㆍ몸의 조절ㆍ몸의 가벼움ㆍ몸의 부드러움ㆍ몸의 경안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몸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이 장의 제34과에 다시 설명이 있다. 스스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데 일지도(一支道)를 설명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어떤 것이 비구가 마음으로써 몸을 안정시키는 것인가. 비구가 마음의 무상함을 사유하고 마음의 무상함을 알고 마음의 무상함을 요해하고 마음의 무상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마음의 즐거움ㆍ마음의 조절ㆍ마음의 가벼움ㆍ마음의 부드러움ㆍ마음의 경안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마음으로써 몸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마음의 괴로움ㆍ고뇌ㆍ종기ㆍ화살ㆍ맛ㆍ근심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음ㆍ충족되지 않음ㆍ부서질 것ㆍ괴로움ㆍ빈 것, 그리고 무아임을 관찰하여, 연을 사유하고 연을 알고 연을 요해하고 연을 느낀다. 곧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으로 하여 식이 있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마음의 즐거움ㆍ마음의 조절ㆍ마음의 가벼움ㆍ마음의 부드러움ㆍ마음의 경안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마음으로써 몸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마음의 멸함을 사유하고 멸함을 알고 멸함을 요해하고 멸함을 느낀다. 곧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한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르게 머무니, 마음의 즐거움ㆍ마음의 조절ㆍ마음의 가벼움ㆍ마음의 부드러움ㆍ마음의 경안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마음으로써 몸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애욕이 있는 마음은 여실히 애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고, 애욕이 없는 마음은 여실히 애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알고, 나아가 뛰어난 것이 있는 마음과 뛰어난 것이 없는 마음을 여실히 안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마음의 즐거움ㆍ마음의 조절ㆍ마음의 가벼움ㆍ마음의 부드러움ㆍ마음의 경안을 얻는다.이를 이름하여 마음으로써 몸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즐거움의 생각과 기억의 생각을 지닌 상신행(上信行)인가.
어떤 것이 즐거움의 생각인가. 비구가 애욕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을 떠나 심(尋)이 있고 사(伺)가 있으며,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의 행을 성취한다. 그러면 몸에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이 몸을 섭진(攝盡)하니,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모자라는 곳이 없다. 마치 훌륭한 목욕 보조원 또는 훌륭한 목욕 보조원의 제자가 미세한 목욕용 콩을 가지고 풍성하게 목욕 그릇 속에 넣은 뒤에 물을 흘리며 적절히 두드리면, 두들김에 따라 거품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마른 것도 없고 축축한 곳도 없이 안팎이 조화롭고 윤택해지는 것과 같다.이와 같이 비구의 몸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이 몸을 섭진하니,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모자라는 곳이 없다. 이러한 진실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 또는 지혜의 생각을 이름하여 즐거움의 생각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몸은 미묘하게 받고 바르고 미묘하게 받고 연에 입각해 미묘하게 받으니, 어떤 몸으로 받겠는가. 뜻의 몸으로 받으니, 이를 이름하여 즐거움의 생각을 지닌 상신행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심(尋)과 사(伺)를 멸하고 안으로 깨끗한 한마음이 되어 심도 없고 사도 없는, 그리고 정에서 생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이선의 행을 성취한다. 그러면 이 몸에 정에서 생한 기쁨과 즐거움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몸을 섭진하니, 정에서 생한 기쁨과 즐거움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모자라는 곳이 없다. 마치 산으로 둘러싸인 큰 호수가 있는데, 물이 밑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동ㆍ서ㆍ남ㆍ북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호수 자체의 밑에서 솟아올라 이 물이 호수에 넘쳐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모자라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이와 같이 비구가 이 몸을 정에서 생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젖어들고 흐르게 하고 두루하고 가득 차게 하여 이 몸을 섭진하니, 정에서 생한 기쁨과 즐거움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모자라는 바가 없다. 이러한 진실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을 이름하여 즐거움의 생각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몸은 미묘하게 받고 바로 미묘하게 받고 연에 입각해 미묘하게 받느니라.어떤 몸으로 받겠는가. 뜻의 몸으로 받으니, 이를 즐거움을 지닌 상신행(上身行)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기쁨과 즐거움을 떠나 사(捨)를 행하고 염과 정지(正智)를 갖추어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니, 여러 성이니 ‘사와 염을 갖추어 즐겁게 행한다’라고 요해한 바와 같은 제삼선의 행을 성취한다. 그러면 이 몸에 무희(無喜)의 즐거움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몸을 섭진하니, 무희의 즐거움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모자라는 바가 없다.우발라 연못ㆍ파두마 연못ㆍ구모두 연못ㆍ분타리 연못 등이 있는데 우발라꽃으로부터 분타리꽃이 진흙에서 솟아올라 아직 물 밖으로 나오지 아니하면, 이 꽃은 뿌리 및 머리에 물이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뿌리에서 머리에까지 이른다. 그리하여 뿌리에서 머리에 이르기까지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모자라는 부분이 없다.이와 같이 비구가 이 몸을 무희의 즐거움으로 젖어들고 흐르게 하고 두루하고 가득 차게 하여 이 몸을 섭진하니, 젖어들고 흐르고 두루하고 가득 차서 모자라는 바가 없다. 이러한 진실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 또는 앎의 생각을 이름하여 즐거움의 생각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몸은 미묘하게 받고 바로 미묘하게 받고 연에 입각해 미묘하게 받으니, 무슨 몸으로 받겠는가. 뜻의 몸으로 받으니, 이를 즐거움의 생각을 지닌 상신행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괴로움과 즐거움을 끊고 이미 우(憂)와 희(喜)를 멸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한, 그리고 사(捨)와 염(念)이 청정한 제사선의 행을 성취한다. 그러면 이 몸을 청정심으로써 두루 요해하는 것을 수행하게 되니, 이 몸은 청정함으로써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다. 남자 또는 여인이 희고 깨끗한 옷으로 위아래를 갖추어 입으면 머리에서 발까지, 발에서 머리까지 덮이지 않은 곳이 없다.이와 같이 비구가 이 몸을 청정심으로써 두루 요해하는 것을 수행하게 되니, 이 몸은 청정함으로써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러한 진실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 또는 앎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즐거움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몸은 미묘하게 받고 바르고 미묘하게 받고 연에 입각해 미묘하게 받으니, 무슨 몸으로 받겠는가. 뜻의 몸으로 받으니, 이를 즐거움의 생각을 지닌 상신행이라고 한다.어떤 것이 가벼운 생각인가. 비구가 몸의 가벼움을 사유하고 가벼움을 알고 가벼움을 요해하고 가벼움을 느끼니, 가벼운 도라면과 같고 가벼운 겁발(劫鉢)과 같아 천이 평지에 깔려 있지만 미풍만 불어 와도 문득 땅을 떠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가 몸의 가벼움을 사유하고 가벼움을 알고 가벼움을 요해하고 가벼움을 느낀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물러 문득 정을 얻은 뒤에 땅을 떠나니, 네 마디 정도 위로 떠오른다.이러한 진실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 또는 지혜의 생각을 이름하여 가벼움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몸이 미묘하게 받고 바로 미묘하게 받고 연에 입각해 미묘하게 받으니, 무슨 몸으로 받겠는가. 뜻의 몸으로 받으니, 이를 가벼움의 생각을 지닌 상신행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이러한 정에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익히어 땅을 떠나니, 1척 정도 떠오르고, 또는 2척 정도 떠오른다. 이러한 진실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 또는 지혜의 생각을 이름하여 가벼움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생각을, 몸이 미묘하게 받고 바로 미묘하게 받고 연에 입각해 미묘하게 받으니, 무슨 몸으로 받겠는가. 뜻의 몸으로 받으니, 이를 가벼움의 생각을 지닌 상신행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이러한 정에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익히어 땅을 떠나니, 사람 반 정도의 높이로 떠오른다. 또는 사람 몸 길이의 한 배 또는 두 배, 더 나아가 일곱 배 높이로 떠오른다. 이러한 진실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 또는 지혜의 생각을 이름하여 가벼움의 생각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몸이 미묘하게 받고 바로 미묘하게 받고 연에 입각해 미묘하게 받으니, 무슨 몸으로 받겠는가. 뜻의 몸으로 받으니, 이를 가벼움의 생각을 지닌 상신행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이러한 정에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익히어 땅을 떠나니, 다라수(多羅樹) 반 정도의 높이로 떠오른다. 또는 다라수 높이의 한 배 또는 더 나아가 일곱 배 높이로 떠오른다. 이러한 진실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 또는 앎의 생각을 이름하여 가벼움의 생각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몸이 미묘하게 받고 바로 미묘하게 받고 연에 입각해 미묘하게 받으니, 무슨 몸으로 받겠는가. 뜻의 몸으로 받으니, 이를 가벼움의 생각을 지닌 상신행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이러한 정에 가까이하여 많이 닦고 익히어뜻이 욕구하는 때로 땅을 떠나 떠오르되 한계가 없으니, 멀고 가까움에 관계 없이 능히 가고 이른다. 이러한 진실된 사람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 또는 앎의 생각을 이름하여 가벼움의 생각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몸이 미묘하게 받고 바르고 미묘하게 받고 연에 입각해 미묘하게 받으니, 무슨 몸으로 받겠는가. 뜻의 몸으로 받으니, 이를 가벼움의 생각을 지닌 상신행이라고 한다.다시 비구가 이러한 즐거움의 생각 또는 가벼움의 생각에 가까이 하고 바로 가까이 하고 많이 닦고 익히어 “나는 마음을 조복하고 적정하게 하고 힘을 써서 자재로움을 얻어야 한다”라고 욕구하면, 뜻이 욕구하는 대로 여러 신족을 성취한다. 또한 이러한 즐거움의 생각 또는 가벼움의 생각에 가까이하고 바로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익히고 마음을 조복하고 적정하게 하고 힘을 써서 자재로움을 얻고 뜻이 욕구하는 대로 여러 신족의 성취함을 얻는다.이러한 무량한 여러 신족을 받아서 능히 대지를 진동하고 하나로써 여럿이 되고 여럿으로써 하나가 되고 멀거나 가까운 장벽을 걸림없이 뚫고 나가니 허공을 다니는 것과 같다. 또한 다리를 결가부좌하고 앉아 허공을 노님이 새와 같고, 땅에서 출몰함이 물에 드나드는 것과 같고, 물 위를 다님이 땅에서와 같고, 몸에서 연기와 불꽃을 방출함이 큰 불덩어리와 같다. 큰 위력과 덕이 있는 해와 달조차 손으로 능히 문지르고, 나아가 범천에 이르기까지 몸으로 자재함을 얻으니, 정품(定品)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이를 이름하여 욕정의 단행을 성취하는 신족을 닦는다고 한다. 정진정ㆍ심정ㆍ혜정의 단행을 성취하는 신족을 닦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이 널리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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