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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보자] #5990 불지경론(佛地經論) 6권

Kay/케이 2025. 5. 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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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경론(佛地經論) 6

 

불지경론 제6권

친광 지음현장 한역
이미령 번역


 또 세계가 모든 중생들을 광대하게 수용하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도 모든 부처님의 대중 모임을 나타내 보여서 커다란 법의 비를 내려 중생들로 하여금 커다란 법의 즐거움을 받게 한다.
 여기에서는 수용인상(受用因相)을 나타내 보인다.
기세간이 유정의 업의 증상력을 따르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공상종자가 갖가지 공상의 자량(資糧) 도구를 변생(變生)하여 유정으로 하여금 광대하게 수용하게 하듯이, 여래의 묘관찰지도 평등지를 도와 증상연이 되어서 경지(鏡智)가 정식(淨識)에 상응하도록 촉발하여 수용신을 나타냄으로서 갖가지 무리들이 모임의 위덕이 치성하고 커다란 법의 비를 내려서 지상(地上)의 대보살들로 하여금 큰 법의 즐거움을 받게 한다.또한 여래의 성소작지를 도와 증상연이 되어서 경지가 정식에 상응하도록 촉발하여 변화신을 나타냄으로서 갖가지 무리들이 모임의 위덕이 치성하고 바른 법의 비를 내려서 지전(地前)의 교화되어야 할 유정들로 하여금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게 한다.
 세계 속에서 다섯 갈래[五趣], 이른바 지옥과 아귀와 방생과 사람의 갈래와 천상의 갈래를 능히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래의 관찰지 상에서도 가없는 인과로 다섯 갈래의 차별을 모두 갖추어 나타낸다.
 여기에서는 차별인상(差別因相)을 나타내 보인다.
마치 세계 속에서 유정의 업의 증상력을 따르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불공상(不共相) 종자가 변생하여 갖가지 다섯 갈래의 인과의 차별을 얻을 수 있듯이, 여래의 묘관찰지도 다섯 갈래의 인과를 경계로 삼기 때문에 그 다섯 갈래를 변사(變似)하여 인과의 두 가지 상의 차별을 나타낸다. 그러나 모든 아수라 종류는 일정하지 않아서 다섯 갈래에 태어나지 않으니, 천상이기도 하고 귀신이기도 하고 혹은 또 방생(축생)이기도 하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지 않는다.다섯 갈래의 인(因)이란 이른바 중유신(中有身)이 다섯 갈래를 방편으로 삼기 때문이니, 갈래[趣]란 나아갈 바[所趣]이며, 중유(中有)는 능히 나아감[能趣]이기 때문에 갈래에는 포섭되지 않는다.생류(生類)에 대해서 별도로 네 가지 생[四生]1)을 건립하였으니, 그러므로 중유 또한 생류에 포섭되는 바이다. 어떤 사람은 중유가 방편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갈래 중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한 인(因)은 업과 번뇌 등이고 과(果)는 다섯 갈래이다.
 세계 속에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 상에서도 가없는 인과의 삼계의 차별을 구족하여 현현한다.
 여기에서는 계차별인상(界差別因相)을 나타내 보였다.
마치 세계 속에서 유정의 업의 증상력에 따라 아뢰야식의 공상과 불공상의 종자가 변생하여 삼계의 인과의 차별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세계는 정(情)과 비정(非情)을 모두 말하니, 이른바 유정세계와 기세계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속에는 무색계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니, 무색계는 오직 선정으로부터 생겨난 색일 뿐 업으로 생겨난 색이 아니어서 방처(方處)가 없기 때문이다.세계 속에서 그 응하는 바에 따라 삼계를 세우니, 이른바 기세계 중에는 욕계와 색계와 정비정계(情非情界)가 있을 뿐이고 유정계 중에도 세 가지가 모두 있다. 오직 유정계는 기세계와 유정 및 비정계를 통하여 교류되는데, 유정세계는 오로지 유정계만을 임지(任持)하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여래의 묘관찰지는 삼계의 인과를 경계로 삼기 때문에 그것을 변사하여 삼계 인과의 두 가지 상의 차별이 나타난 것이지 삼계의 인과에 의해 앞에서와 같은 두 가지 분별을 생하는 것은 아니다.여기서의 뜻을 말한다면, 묘관찰지는 능히 모든 경계를 보편적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두루 모든 계(界)의 갈래에 태어나는 번뇌의 업 등에 감응된 모든 행의 성숙이 섭수하는 심ㆍ심법 등의 인과의 상이 나타난다.말하자면 모든 여래의 대원경지가 증상(增上)하여 생겨난 묘관찰지는 비록 소취와 능취의 집착이 없고 모든 번뇌와 소지의 두 가지 장애의 티끌을 멀리 여의었지만 모든 인과 등의 일을 관찰하고 능히 설하기 때문이다. 마치 깨끗하고 원만한 거울에 온갖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처럼 모든 경계의 상이 모두 그 속에 나타난다.그렇지만 경지(鏡智)에는 차별의 허물이 없다. 대원경지는 모든 것에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비록 능히 모든 영상을 현현해서 운(運)에 맡겨 구르는 까닭에 분별함이 없다. 이 지혜(묘관찰지)도 능히 일체 경계의 상을 나타내지만 분별함이 있다. 만약 분별함이 없다면 곧 인과 등의 일을 관할 수 없을 것이며, 모인 대중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의심을 끊게 하는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니, 이 문장에서 반드시 증명된다.
무루심 등도 또한 상분(相分)이 있다. 여래지(如來智) 상에서 다섯 갈래와 삼계의 가없는 인과가 낱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어떤 사람은 “여래지는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모든 경계의 상이 그 속에 나타난다고 하여도 이 경계의 상은 지혜가 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다만 중생심 등이 모든 법의 영상을 변현한 것이다”라고 말한다.하지만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영상이 만약 중생심이 변한 것이라면 어떻게 부처님의 지혜 위에서 현현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인(因)이 그와는 다른 마음을 생할 수 없으니 올바른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나머지 마음의 상 또한 반드시 그러하다.그런데 이 경계의 상은 여래의 무루심이 변현한 것이니, 밝은 거울 속에 똥이나 오물의 영상이 비록 부정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심(心)과 심법(心法)이 경계의 법[境法]을 반연하는 것도 그러하다.만약 다른 경계를 반연한다면 붙박이 등불이 고정되어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과는 같지 않고, 다만 맑은 거울의 성품이 본래 깨끗한 것과 같기 때문에 경계의 상을 변사(變似)하여 능히 그것을 연려(緣慮)2) 한다. 만약 모든 경계의 상이 심상(心上)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비록 그가 힘이 있어서 심과 심소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해도 5근(根) 등과 같이 소연(所緣)이라 불리지 않으니, 다른 곳에서 설한 것과 같다.무분별지 또한 반드시 그러하니, 반연된 진여[所緣眞如]가 지체(智體)를 여의지 않으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후득속지(後得俗智)가 비록 진여를 여의지 않아도 분별함이 있기 때문에 진여의 본체를 증득하지 않는데, 다만 스스로 변하여 진상(眞相)을 만들어 내어서 반연하기 때문이니 논란할 수 없다. 모든 이생(異生)의 마음이 반연하는 무루의 마음 위에 존재하는 모든 무루의 경계상이 비록 무루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유루이듯이 이 또한 응당 그러하다.유식의 도리도 당연히 이와 같아서 마음이 변한 상이 비록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본체가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색 등이 있는 것이 심과 심법이 유식(唯識)을 이루지 않는 것과 같으니, 만약 그것들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다만 식을 여의지 않는다. 유식이라는 것은 심과 심법이 또한 저 색 등의 온갖 상을 여의지 않는 것인데, 명칭에 응해서 오직 경계뿐이라고 하면 문득 커다란 허물을 이루게 된다.
 세계 속에 소미로(蘇迷盧)3) 등의 대보산왕(大寶山王)이 현현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래의 관찰지 상에서도 모든 불보살의 위신력이 이끄는 광대하고 깊고 깊은 가르침[敎法]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우대법우인상(雨大法雨因相)을 나타내 보였다.
마치 기세간이 모든 중생들의 업의 증상력을 말미암아 모든 보배산을 일으키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도 모든 유정들이 감응한 정법의 업의 증상력을 말미암아 불보살의 위신력이 이끄는 깊고 큰 가르침을 일으킨다.이 가르침은 모든 불보살의 자재한 위신력을 나타내 보이고 또한 능히 그 위신력을 이끌어 일으키는데, 이 때문에 모든 불보살의 위신력이 이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래의 묘관찰지가 능히 대원경지에 상응하는 식(識) 위에 가르침의 영상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혹은 스스로 능히 가르침의 영상을 나타낼 수 있으니, 이것을 말미암아 선근의 성숙을 반연하게 되어서 교화될 유정의 자심(自心)이 변현한다.
 세계 속에는 광대하고 깊고 깊어서 기울거나 움직일 수 없는 큰 바다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래의 관찰지 상에서도 모든 천상이나 악마나 외도의 이론(異論)에 의해서 기울거나 흔들리지 않는 깊고 깊은 법계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항복원적인상(降伏怨敵因相)을 나타내 보였다.
마치 기세간이 모든 중생들의 업의 증상력을 말미암아 온갖 큰 바다를 일으키되 기울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는 모든 중생들이 정법의 업의 증상력에 감응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법계의 가르침을 일으키되 기울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는다.법계는 바로 공(空)과 무상(無相)의 이치이니, 법계의 이치를 설하는 것을 법계의 가르침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외도들은 다 여러 견해에 의지하여 있는데, 법계의 공한 이치는 여러 견해를 대치하고 여러 견해의 갈래를 여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의 가르침을 능히 헤아릴 수 없고 앞서의 위신력의 가르침을 능히 기울게 하거나 움직일 수도 없다.위신력이 높고 넓기 때문에 보배산에 비유되고, 이 법계의 가르침은 법계가 깊고 깊기 때문에 큰 바다에 비유된다.
묘관찰지는 바로 능히 모든 경계의 인(因)을 비추어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능히 모든 법의 가르침을 일으켜 설할 수 있다. 간략하게 “뛰어나다”라고 말한 것은 계경에서 “불세존을 이름하여 커다란 지혜의 태양이라고 하니, 두루 능히 일체법을 밝게 비추기 때문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세계는 대륜산(大輪山)과 소륜산(小輪山)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는 어리석지 않은 모든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서는 단일체의인상(斷一切疑因相)을 나타내 보였다.
가령 기세계는 하나의 묘고산과 일곱 개의 큰 금산(金山)과 여덟 개의 큰 바다와 네 개의 큰 섬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밖에서 소륜산이 둘러 감싸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씩 모여서 천(千)이 된다.다시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밖에서 다음의 윤산(輪山)이 둘러 감싸고 있으니, 그것을 소천계(小千界)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씩 모여서 천이 된다. 또다시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밖에서 다음의 윤산이 둘러 감싸고 있으니, 그것을 중천계(中千界)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씩 모여서 천이 된다. 전체적으로 그것들을 밖에서 대륜산이 둘러 감싸고 있는데 커다란 풍륜(風輪)이 그 아래를 총지(總持)하고 있으니, 이것을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것을 “대륜산과 소륜산이 둘러 감싸고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여래의 묘관찰지도 모든 자상과 공상을 두루 알아서 세간의 온갖 의혹을 끊는다. 자상과 공상의 어리석음은 바로 의혹의 인(因)인데, 자상과 공상을 알아서 이런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의혹이 없고 능히 다른 이의 의심도 끊게 해준다. 대원경지는 영원히 두 가지 장애를 끊어서 모든 자상과 공상에 대해 어리석지 않으니, 능히 이런 지혜를 낳고 이 지혜를 거두고 보호하기 때문에 ‘감싼다’고 이름한다.경지(鏡智)가 비록 능히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안다고 하여도 분별함이 없기 때문에 능히 다른 사람을 위해 법을 설하여 의혹을 끊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지혜(묘관찰지)는 능히 분별함이 있기 때문에 능히 모든 이들을 위해 법을 설하여 의혹을 끊게 해준다.또 이 지체(智體)는 능히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알아서 두 종류의 행상(行相)이 감싸는 바가 되는데, 자상의 행상은 소륜산과 같고 공상의 행상은 대륜산과 같다. 대원경지가 능히 총지하는 것은 마치 풍륜이 아래를 총지하는 것과 같다. 여래의 깨끗한 지혜는 현량(現量)에 포섭되는 것인데, 어떻게 능히 모든 법의 공상을 알 수 있는가? 만약 공상의 경계가 현량이 아는 바라면 어떻게 두 양(量)이 두 상(相)에 의지하여 서겠는가?어떤 사람은 “두 양은 산심위(散心位)에 있으면서 두 상에 의지하여 서니 정심위(定心位)4)를 말하지 않는다. 만약 정심에 있으면서 일체상을 반연한다면 모두가 현량에 포섭된다”고 말한다.어떤 사람은 “정심은 오직 자상을 반연하지만, 그러나 공상의 방편에 이끌리는 바를 말미암아 모든 공상을 반연한다. 드러나는 이치라는 것은 방편의 측면에서 설한다면 공상을 안다고 이름하고, 이와 같지 않은 것은 자상을 안다고 이름한다. 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진여란 공하고 무아인 모든 법의 공상이라고 이름하거나 혹은 진여란 2공(空)이 드러난 바이니 이것은 공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참다운 뜻에서 말한다면, 저 『인명론』에서 세우는 자상과 공상은 이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거기(인명론)에서는 일체법 상에서 참다운 뜻을 모두 자상이라고 이름한다고 하는데, 모든 법에서 자상과 공상이 각각 자기의 본체에 부합하며 다른 것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분별심으로 한 종류의 능전(能詮)과 소전(所詮)을 세운다면 모든 법에 통해 있으니, 마치 실이 꽃을 꿰는 것과 같아서 이것을 공상이라고 이름한다.이것은 요컨대 산심의 분별이 거짓으로 세운 것이니 비량(比量)의 경계이고, 모든 정심은 이런 분별을 여의고 있어서 모두 현량이라고 이름한다. 비록 모든 법을 반연하더라도 또한 무상(無常) 등 하나하나의 법은 각각 개별적으로 있기 때문에 자상이라고 이름한다.진여가 비록 공상이 나타내는 바라 하더라도 이는 모든 법 스스로의 참다운 성품이라서 스스로 상이 있기 때문에 또한 공상이 아니다. 그것은 일체법과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므로 공상이라고 이름할 수 없으니, 자상 또한 모든 공상과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논에서는 모든 법 위에 있는 참다운 뜻을 모두 자상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고, 이 경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묘생이여, 성소작지(成所作智)란 것은。
 성소작지는 여래의 화신을 이룬다는 걸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기에 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신화(身化)요, 둘째는 어화(語化)요, 셋째는 의화(意化)이다.첫 번째 신화에 다시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현신통화(現神通化)이고, 둘째는 현수생화(現受生化)이고, 셋째는 현업과화(現業果化)이다.두 번째 어화에도 또한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경위어화(慶慰語化)이고, 둘째는 방편어화(方便語化)이고, 셋째는 변양어화(辯揚語化)이다.세 번째 의화에 또한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결택의화(決擇意化)이고, 둘째는 조작의화(造作意化)이고, 셋째는 발기의화(發起意化)이고, 넷째는 수령의화(受領意化)이다.성소작지는 능히 이와 같은 세 가지 화업(化業)의 작용을 일으키니, 이렇게 세 가지 업을 변화한 것이 바로 화신(化身)이다. 마땅히 알아라. 이것은 용(用)으로써 체를 드러내는 것일 뿐 이 세 가지 업이 바로 지혜의 체는 아니다. 다만 이 지혜 위에 나타난 상분(相分)일 뿐이다. 성소작지의 증상연력(增上緣力)은 대원경지에 상응하는 정식(淨識)을 격발하여 이와 같이 세 가지 업의 변화 작용을 나타내고 스스로도 또한 능히 나타낼 수 있다.마땅히 알아라. 네 가지 지혜의 하나하나는 능히 온갖 작용을 일으킨다. 억지로 말한다면, 대개 평등지는 수용신을 일으키고, 성소작지는 변화신을 일으키며, 묘관찰지는 모든 자상과 공상과 다라니문과 삼마지 등을 관찰하며, 대원경지는 능히 모든 법의 영상을 나타낸다. 하나하나의 감관[根]이 모든 경계를 취하지만 강제 작용[强用]이 없지 않듯이 이것 또한 그러하다. 여기에서 경문(經文)으로 반드시 증명된다.세 가지 업의 심과 심법 등에 모두 변화가 있다. 여래지(如來智) 상에서 이런 거친 상의 심과 심법 등의 모든 공덕을 나타내서 모든 하지(下地)로 하여금 능히 환히 알게 함을 나타내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2승(乘)과 이생(異生)이 어떻게 능히 알겠는가? 여래의 모든 심과 심법 등의 공덕에는 차별이 있는데, 어떻게 여래께서 오래 전에 부처를 이루고서 다시 능히 탐욕이나 성냄 등의 갖가지 화신을 나타낼 수 있다는 말인가? 다른 경에서도 또한 무량한 종류로 변화하여 모두 마음이 있게 한다고 설한다.또 화신은 또한 유심이라고도 이름하고 무심이라고도 이름한다고 설한다. 다른 것에 의지하는 마음이 있으면 스스로 마음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화심(化心) 등은 참다운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나지만, 다만 참다운 마음 위에서 상분은 흡사 연려 등의 작용[用]이 있는 듯하다.마치 거울 속에서 불[火]은 별개의 자기 실체가 없지만 온갖 연을 따라 생하는 것처럼, 다른 마음 등이 다른 곳에서 비록 화심(化心) 등이 없어 참다운 작용[實用]이 없다고 말하지만 여실한 마음 등과 변화색 등은 참다운 작용이 있는 것과 같다. 여실한 색 등이기 때문에 치우치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화심(化心) 등을 말미암아 거친 상이 현현하는 것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원숭이에 이르기까지 여래의 마음을 안다. 만약 부처님의 참다운 마음[實心]이라면 모든 대보살 또한 능히 요달하지 못한다.
 모든 중생들이 부지런히 힘쓰는 몸의 업[身業]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갖가지 이익되는 일을 찾아서 농사일을 하거나 왕 등을 섬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부지런히 몸을 변화하는 업이다.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갖가지 공교로운 일을 나타내 보여서 재주가 많고 오만한 여러 중생을 꺾고 항복받나니, 이 선교방편의 힘으로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성스러운 가르침으로 들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하게 한다.
 여기에서는 신통변화를 나투어서 몸을 변화하는 업의 모양을 나타내 보인다. 마음을 참으로 용맹하게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라고 이름한다. 선한 성품 중에서 정진을 겸하여 취하며 나머지는 다만 작의(作意)이다. 이를 말미암아 몸의 업을 발기하여 부지런히 매진함으로써 인(因)으로 나아가 이름을 삼는 것이다.
이 몸의 업을 말미암아 세간의 유정은 세 가지 올바른 일을 짓는다.
‘등’이란 그 나머지 여러 가지 일을 모두 취한다는 의미이다.성소작지는 정진과 상응하여 몸을 변화하는 업을 일으킨다. 이 변화하는 업을 말미암아 보살이 되었을 때 여러 도예가 등의 온갖 공교로운 일을 나타내 보인다. 이것은 바로 지혜 위에 신업(身業)의 상을 나타냄으로서 기술이나 오만함을 꺾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의 선교방편을 나타냄이 바로 자비와 지혜[悲慧]가 평등해서 운용하는 길에 먼저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니, 처음에는 믿음을 낳게 하기 때문에 중생을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도록 이끌어 들인다고 하는 것이다.마치 신통력을 나투어서 가섭 등을 교화하는 것처럼 차례로 순조롭게 길들여서 감능(堪能)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성숙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이끌어서 모든 선근을 기르기 때문에 나중에는 삼계의 악한 갈래를 해탈케 하는 것이니, 성품이 있든[有性] 성품이 없든[無性] 그 차례대로라서 해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교화하는 힘을 말미암아 종자의 성품이 있는[有種性] 자는 성도(聖道)에 태어나서 삼계를 해탈하게 하며, 종자의 성품이 없는[無種性] 자는 세간의 선을 닦아서 항상 선한 갈래에 태어나게 한다. 그 선근을 염(念)하여 정법을 설해서 삼계를 벗어나게 하니, 빛을 놓아서 괴로움을 쉬게 하고 선한 갈래[善趣]에 안립하게 한다.또 그들로 하여금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지혜의 차제삼구(次第三句)를 내게 하며, 또 그들로 하여금 순해탈분(順解脫分)과 순결택분(順決擇分)과 성도(聖道)에 태어나게 하는 차제삼구를 내게 하며, 또 그들로 하여금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의 차제삼구에 들게 한다. 이와 같은 것은 성스러운 가르침의 차별상에 따라서 설한 것을 해석한 것이니, 뒤에도 이와 같다.
 또 마치 중생이 신업(身業)을 수용하고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갖가지 색 등의 경계를 수용하는 것과 같으니, 이처럼 여래의 성소작지도 몸을 화현하는 업을 받고 이를 말미암아 여래도 모든 중생들이 갖가지로 태어나는 곳에 가서 똑같은 생을 받지만 존경받는 지위에 머무심을 나타낸다. 그렇게 같은 부류의 생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일체 다른 부류의 중생을 거두고 항복받나니, 이 선교방편의 힘으로 인하여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생을 받는 화현(化現)과 화신의 업[化身業]의 상이다. 세간 유정이 태어나는 온갖 곳에서 모든 감관[根]이 색 등의 경계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수용신(受用身)이라고 이름하며, 운전(運轉)하는 것이 있으므로 신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성소작지는 태어나는 모든 곳에서 동시에 생을 나투어 경계를 수용하니, 이른바 천상과 인간 가운데 태어나는 모든 곳에 화신을 나투어서 같은 종류의 중생인 거사나 찰제리(刹帝利)나 바라문을 나타내어 모든 아래의 중생들을 조복시켜 이익과 즐거움을 얻게 한다. 이것 또한 지혜 위에 신업의 상이 나타난 것이라서 경지(鏡智)를 촉발하거나 혹은 스스로 현현한다. 다른 예도 반드시 그러하다.
 또 마치 중생이 신업(身業)을 이해해 받아들이고 이를 말미암아 중생은 자신이 지은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몸이 변화하는 업을 받아들이고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본사(本事)와 본생(本生)의 닦기 어려운 모든 행을 받아들임을 나타내 보이나니, 이 선교방편의 힘을 말미암아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고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업의 과보의 화현과 화신의 업의 상이다. 몸이란 바로 업이기 때문에 신업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먼저 지은 업의 과보이기 때문에 과(果)에서 인(因)의 명칭을 말하는 것이다. 혹은 몸이 먼저 지은 업의 과보를 받을 때에 운전하는 용(用)이 있기 때문에 몸의 업이라고 이름한다.이 몸의 업이 먼저 지은 업의 사랑할 만하거나 사랑할 만하지 않은 과보를 받아들임을 말미암아서 성소작지는 화신(化身)을 현사(現似)하여 화업(化業)을 받아들인다.이 업을 말미암아 일체 본사와 본생의 닦기 어려운 모든 행을 받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데, 지난 세상에 상응하는 나머지 모든 일을 본사라고 이름하고, 먼저 세상에서 갖가지로 생을 받은 것을 본생이라고 이름한다.비습반달라(毘濕飯怛囉) 등 일체 본생의 일은 이 본생에 의거한다. 먼저 닦은 갖가지 고행을 닦기 어려운 행이라고 이름하고, 혹은 금생에 변화신에 의지하여 먼저 고행을 닦은 뒤에 그 행을 버리고 닦은 곳에서 행하다가 바야흐로 보리를 얻는 것을 닦기 어려운 행이라고도 이름한다.이른바 모든 중생들은 고행을 닦기를 계교(計較)해서 악을 멈추고 선을 일으키고서야 바야흐로 보리를 얻는데,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 먼저 그들과 똑같이 여러 고행을 닦는 것을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지계만으로 청정함을 얻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요컨대 선정과 지혜를 말미암아 바야흐로 청정함을 얻기 때문에 고행을 버리고 닦는 곳에서 행하다가 바야흐로 보리를 얻는다.계경에서 말하기를, “여래께서 과거 세상의 가섭불 때에 비난의 말씀을 하시기를 ‘어떤 곳의 사문은 머리와 수염을 깎은 자로서 큰 보리와 위없는 보리는 지극히 얻기 어렵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는 이 악업을 말미암아 지금 이와 같은 난행의 괴로운 과보를 받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이 말은 또한 악행을 멈추게 하기 위해 화신으로 현현하여 지은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일생 동안 보살이 일찍이 한량없는 여래를 가까이 모시고 여러 선의 근본을 심었는데, 성품이 과거세의 생활을 기억하여 이와 같이 입으로 짓는 무거운 악행을 다시 일으키는데 매이겠는가? 마땅히 알아라. 이것은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고자 하여 말한 것이니, 이렇게 말한 것을 듣고 제도를 얻었다면 부처님의 처소에서 이 말을 여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마치 중생의 경축하고 위로하는 말의 업과 같아서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점차적으로 말하여 서로서로 경축하고 위로하는데,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경축하는 말로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갖가지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 법을 선양한다. 문의(文義)가 교묘해서 지혜가 적은 중생이 처음 듣고도 숭상하며 믿나니, 이는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써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경축하고 위로하는 말의 교화와 교화의 어업(語業)의 상(相)이다. 경축하고 위로한다는 것은 바로 희열의 차별적인 말이 능히 저것을 낳기 때문에 경축하고 위로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 말을 듣고서 점점 더 커다란 환희를 내기 때문이다. 이른바 모든 유정들은 말과 마음의 증상력을 발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각각 별개의 식 위에서 어업의 상이 나타남을 증상연으로 삼으며, 나머지 식으로 하여금 어업의 상을 변사(變似)하게 하여 각각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기쁘게 한다.성소작지가 어업을 화작하는 것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미묘한 소리를 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니, 이른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환희를 내기 때문이다.
‘즐거워하는 바의 법을 따른다.’는 것은 그 인(因)의 힘이 응하는 바에 따라 사람과 천상의 3승의 여러 차별법을 즐겨 듣는 것이다.‘글과 뜻으로 교묘함’이란 것은 이취(理趣)가 분명하고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지혜가 적은 중생이 처음 듣고도 숭상하며 믿는다’는 것은 이른바 부처님의 말씀과 음성은 60가지 덕을 갖추었으니, 여러 범부들의 어리석은 지혜가 잠깐 동안 듣더라도 오히려 믿고 이해력을 일으키겠거늘 하물며 나머지 총명한 사람의 지혜가 성소작지하는 것에 있어서겠는가.경축하고 위로한다고 하는 것은 능히 말을 나투어서 모든 교묘한 문의(文義)를 널리 설하여 온갖 유정들에게 환희심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능히 선현(善現) 등의 무리가 가피를 입으니, 부처님의 말씀과 음성이 지극히 깊고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운 법을 널리 설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지혜는 능히 다른 일체의 논자(論者)와 색류(色類)와 나아가 허공에 이르기까지 가피할 수 있어서 또한 능히 어업을 화현해 일으켜 설법하시니, 이 일이 불가사의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중생의 방편어(方便語)의 업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차례차례 가리킴을 받아 짓는 바에 전일하게 힘써서 악을 나무라고 착함을 칭찬하며 서로 부르거나 명령한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가 일으킨 방편도 말이 변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바른 학처(學處)를 세우며, 모든 방일함을 나무라며, 방일하지 않음을 칭찬하며, 또 믿음을 따라 행하는 사람과 법을 따라 행함 등을 건립한다. 이 공교로운 방편의 힘이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방편어의 교화와 교화하는 어업(語業)의 상이다. 마치 온갖 세간의 방편어의 업이 서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교시하여 친한 이와 벗을 이익되게 하며 게으른 중생에게 가행(加行)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방편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마찬가지로 여래는 대비(大悲)를 말미암아서 모든 유정들을 위해 학처를 안립하고, 모든 악을 항복시키고, 세간의 선을 닦게 하고, 성도(聖道)의 차별적인 지위를 안립하여서 정도에 들어가 삼계를 벗어나게 한다. 성소작지가 능히 교화의 말을 발해서 이런 일을 모두 이루어내니, 이른바 모든 악을 쉬게 하고 모든 선을 일으키게 하므로 이것이 바로 말의 쓰임[語用]이다.
 또 중생이 변론하여 드날리는 말의 업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차례차례 열어 보여서 요의(了義)가 아닌 곳에서 모든 논리를 편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변론의 말로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서 여래는 모든 중생들의 한량없는 의혹을 끊는다. 이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변론하여 드날리는 말의 교화와 교화하는 어업의 상이다. 성소작지는 모든 중생들의 의요(意樂)의 차별에 따라 교화하는 말의 업을 나타내서 갖가지 뜻을 설하여 모든 의혹을 끊어준다. 이른바 한 가지 소리를 내서 모든 뜻을 나타내되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류에 따라 이익을 얻게 한다.계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 가지 음성으로 모든 법을 연설하시지만 중생은 자기들의 부류에 따라서 각각 해탈을 얻는다. 어떤 이는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환희심을 내며, 어떤 이는 싫어해 여의는 마음을 내고, 어떤 이는 거듭 의심을 끊는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바로 여래의 본원이 이끄는 부사의한 힘에서 발해진 교화의 말이다. 하나의 소리가 능히 온갖 의심을 끊으니, 화신(化身)을 짓는 일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하나의 본질을 다르게 보아서 이롭고 즐거운 일을 이루게 함이다.
 또 마치 중생이 결택하는 뜻의 업[意業]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지을 수 있는 것과 지을 수 없는 것을 결택한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결택의 뜻이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중생의 8만 4천 마음의 길[心行]의 차별을 결택한다. 이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 모든 중생들을 교화함으로서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결택하는 뜻[決擇意]의 교화와 교화하는 의업(意業)의 상이다. 성소작지가 상응하는 의업은 능히 교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화의업(化意業)이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은 능히 교화 받는 중생의 8만 4천 가지 심행(心行)의 차별을 결택할 수 있다. 또는 다시 이 지(智)의 상분(相分) 중에 나타낸 변화의 의업이 흡사 능히 중생의 8만 4천 가지 심행을 결택할 수 있듯이 그들로 하여금 승의제를 환히 알아 이익을 얻게 한다.어떤 것이 8만 4천 가지 심행인가? 이른바 모든 유정들의 8만 4천 가지의 모든 구(垢)와 진(塵)과 노(勞)의 심행의 차별이니, 이것이 8만 4천 바라밀다와 다라니문과 삼마지 등을 장애한다.『현겁경(賢劫經)』에서 그 모양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과 같다. 이른바 최초의 수행법을 닦고 익히는 바라밀에서부터 최후의 부처님 몸을 나누는 바라밀다에 이르기까지 350의 하나하나가 6도피안(到波岸)을 갖추니, 이와 같이 하면 모두 2천100이 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및 그와 동등한 유정의 심행인 8천400을 대치하여 4대종(大種)5)과 여섯 가지 무의(無義)가 낳은 허물을 제거하기 위해 열 배를 하면 8만 4천이 된다. 이것을 닦고 익히기 때문에 다시 8만 4천 다라니문과 삼마지 등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간략하게 설명한 것인데, 자세하게 설명하면 헤아릴 길이 없다.
 또 마치 중생의 조작하는 의업(意業)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갖가지 모든 일으키는 업을 조작한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는 뜻을 지어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모든 중생들이 닦는 행이 행인가, 행이 아닌가, 얻음인가, 잃음인가를 관찰하여 그로 하여금 취하고 버림으로서 조작하고 대치(對治)하게 한다. 이는 공교로운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함이니라.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조작하는 뜻의 교화와 교화하는 의업의 상이다. 처소를 따라 모든 유정들이 행하는 행을 관찰해서 만약 모든 악행을 행하지 않으면 득(得)이 있고 행하면 실(失)이 있으며, 만약 모든 선행을 행하면 곧 득이 있고 행하지 않으면 실이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그들로 하여금 득을 갖고 실을 버리게 하는데, 득에서는 임지(任持)의 대치(對治)를 조작하고 실에서는 원리(遠離)의 대치를 조작한다.성소작지가 상응하는 의업은 능히 교화함을 일으키기 때문에 화의업이라고 이름한다. 비록 모든 여래가 온갖 일에 대해 공용이 없다고 할지라도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 등을 변현(變現)케 함이 흡사 조작이 있는 듯하기 때문에 조작이라고 이름한다. 혹은 다시 이 지(智)의 상분(相分) 중에 나타낸 변화의 의업이 흡사 능히 모든 유정들의 행의 득실을 관찰하는 듯해서 그들로 하여금 승의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환히 알게 한다. 또 마치 중생들의 발기한 의업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모든 업을 발기한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도 뜻을 발하여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그들에게 대치를 말씀해 주고자 하기 때문에 그들이 좋아하는 이름과 구절과 글자와 몸을 나타낸다. 이 공교로운 방편의 힘을 쓰는 까닭에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발기한 뜻의 교화와 교화하는 의업의 상이다. 성소작지가 상응하는 의업은 능히 몸과 입의 두 가지 업을 발하기 때문에 그 쓰임[用]에 나아가서 의업을 발기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혹은 이 의 업이 지혜를 말미암아 발기하기 때문에 의업을 발기한다고 이름하는데, 능히 교화함을 일으키기 때문이요, 혹은 지의 상분이 그것과 닮게 나타내기 때문이다.‘이 화의업이 그들에게 대치를 말씀해 주고자 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유정의 모든 행의 대치를 설하고자 함이다. 이 설해진 법은 이름과 구절과 글자와 몸을 자성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이름과 구절과 글자와 몸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여래는 저 유정이 즐기는 바에 따라 이름과 몸 등을 설해서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을 일으켜 대치를 낳게 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바로 여래의 성소작지의 상분 중에 나타낸 변화의 의업이 이름과 몸 등을 발한 것이니, 널리 유정의 모든 행의 대치를 설하였다. 이 힘을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마음이 변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닮게 해서 깊이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을 낳아 대치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의업을 발기한다고 이름한 것이다.
 또 마치 중생의 받아들이는 의업과 같으니, 이를 말미암아 중생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소작지는 받아들이는 뜻으로 교화하는 업이니, 이를 말미암아 여래는 정기(定記)ㆍ부정기(不定記)ㆍ반문기(反問記)ㆍ치기(置記)를 기별하기 때문에 그 마땅함을 따라서 과거ㆍ미래ㆍ현재 등의 뜻을 받아들인다. 이 공교로운 방편의 힘으로 모든 중생들을 이끌어서 그로 하여금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여 성숙하고 해탈케 한다.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은 받아들이는 뜻의 교화와 교화하는 의업의 상이다. 수(受)가 사(思)와 상응하여 능히 그 마음을 움직여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게 하니, 이 때문에 받아들이는 의업이라고 하였다. 성소작지의 수는 사와 상응하여 능히 교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화의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상분(相分) 속에서 교화를 나타내는 의업을 화의업이라고 이름한다.4기(記)에 대한 질문에서는 기별(記別)이 되기 때문에 그 응하는 바에 따라 모든 질문을 여실하게 환히 알고 나서 3세 등의 무량한 법의(法義)를 받아들여 여실하게 환히 알고, 하나하나의 자체(自體)를 여실하게 알고 나서는 그 응하는 바에 따라 하나하나 기별을 하는데 뒤바뀜이 없다. 4기란 첫째는 일향기(一向記)이고, 둘째는 분별기(分別記)이고, 셋째는 반문기(反問記)이고, 넷째는 묵치기(默置記)이다.일향기란 ‘모든 생한 것은 결정적으로 멸하는가? 불ㆍ법ㆍ승의 3보는 좋은 복전인가?’와 같은 물음을 말하며, 이 뜻은 결정되어 있다. 분별기란 ‘모든 멸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다시 생겨나는가? 불ㆍ법ㆍ승 3보는 오직 하나만 있는가?’와 같은 물음을 말하니, 이 뜻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반문기란 ‘보살의 10지(地)는 위인가, 아래인가? 불ㆍ법ㆍ승 3보는 훌륭한가, 천한가?’와 같은 물음을 말하니, 그대는 어떤 질문을 바라는 것인가? 묵치기란 ‘진실로 존재하는 성품인 아(我)는 선인가, 악인가? 석녀(石女)의 아이의 몸 색깔은 검은가, 흰가?’와 같은 물음을 말하니, 기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오랜 희론이기 때문이다.마땅히 알아라. 여기에서 몸과 입의 화업(化業)은 자기 몸에 상응하거나 다른 이의 몸에 상응하거나 혹은 상응하지 않기도 하지만, 뜻의 화업은 오직 자신과 타인에게만 상응한다. 이를 말미암아 세 가지 신통변화를 풀이하니, 이른바 신통(神通)이란 교(敎)ㆍ계(誡)ㆍ기(記)의 신통변화이다.이 부처님의 화업은 일체 종자[一切種]에 대해 언제나 따라붙는 것이 불가사의하고, 작용이나 수량이나 국토의 차별이 불가사의하고, 유정을 이롭게 하는 쓰임이 쉼 없이 구르는 것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모든 여래의 세 가지 화업은 유정을 성숙시키고자 함을 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제일의 방편선교(方便善巧)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계경에서 “불세존께서는 커다란 지혜의 약이라고 이름하니, 능히 모든 번뇌의 병을 없애주기 때문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이때 묘생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오직 여래만이 정법계(淨法界)에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하고 모든 보살 또한 능히 그러합니까?”
부처님께서 묘생에게 말씀하셨다.
“보살 또한 능히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느니라.”
 지금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함(受用和合一味事智)’에 의거하여 질문을 한 것이다. 앞에서는 부처님의 경지를 말하면서 여래의 청정법계의 본체만이 한 가지 맛이라고 설하였으나, 부처님의 대원경지 등의 속에서는 화합한 한 가지 맛을 수용하되 움직임도 없고 지음도 없었으니, 묘생보살은 이 일을 궁금하게 생각하였으므로 오직 여래만인가 또는 보살에게 통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겼던 것이다.또한 앞에서는 다만 다섯 가지 법이 있어서 대각지(大覺地)를 포섭한다고만 말하였지만 청정법계의 본체는 오직 한 가지 맛이다. 대원경지가 이것에 의지하고 이것을 반연해서 무분별을 낳기 때문에 또한 오직 한 가지 상[一相]이고, 평등성지는 진여를 통틀어 반연해서 두 가지 분별을 여의어서 또한 오직 한 가지 상이다. 그 나머지 두 가지 지(智)는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역시 진여에 의지하여 달리 분별함이 없어서 또한 오직 한 가지 상이다. 이와 같이 오직 부처만이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하나니, 다른 것에는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이것을 심사숙고하여 결정내리고자 이런 의문을 일으켰던 것이다.여기에서 이미 말했듯이, 정법계에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함을 증득해 알고, 나머지에서는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함이 없다. 감응하는 바를 능히 수용하고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진여 경계를 수용하기 때문에 수용이라고 이름한다. 한 가지 일을 함께하기 때문에 화(和)라고 한다. 비록 함께 한 가지 일을 한다고 하여도 혹은 다시 헤어지고 나뉠 수 있으나, 그 중에서 언제나 헤어지지 않고 나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에 다시 합(合)을 말한 것이다. 소연과 능연이 평등하고 또 평등하며 끝내 화합해서 헤어지거나 나뉘지 않기 때문이다.맛이란 것은 견실함이니, 바로 수용되고 반연되는 법계의 진여가 한 가지 맛인 것이다. 사(事)란 것은 이른바 일의 쓰임[事用]이고, 지(智)란 것은 바로 능히 수용하는 지혜[能受用智]이다. 먼저 대원경지와 평등성지를 취하고 나머지 둘을 겸하여 취하였으니, 대개 진여를 반연하기 때문이다.혹은 한 가지 맛이란 것은 능히 수용하는 지혜가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고, 사(事)란 과보이니 정법계를 반연해서 생기하기 때문이다. 혹은 능히 수용함[能受用]이란 바로 버리고 받아들임[捨受]이니,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등한 일류(一類)인 까닭에 한 가지 맛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는 과보이니, 즉 이것이 대원경지 등과 상응해서 그 힘을 말미암아 생겨나기 때문에 그것의 과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또 사(捨)를 행하여 공용(功用)의 상(相)이 없어서 일체처에서 한 가지 맛으로 구른다. 능수용지를 사지(事智)라고 이름하는데, 혹은 지(智)가 스스로 능히 자기 본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수용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자신과 남의 두 가지 분별이 없기 때문에 한 가지 맛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사란 과보이니 온갖 인연으로부터 두 가지 생각을 멀리 여의어서 항상 구르기 때문이다.‘보살도 또한 등등’이란 것은, 여기서의 뜻은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로 수용하는 것은 오직 여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모든 보살 또한 능히 이와 같다면 어찌하여 다만 다섯 가지 법이 대각지를 포섭한다고만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의 뜻은 불지(佛地)가 오직 이 다섯 가지 법에 포섭되는 것이지, 다섯 가지 법이 오직 불지만을 포섭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또한 능히 모든 보살지(菩薩地)를 포섭하기 때문이다.
 묘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보살이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합니까?”
부처님께서 묘생에게 이르셨다.
“무생법인을 증득한 보살이다. 그 보살이 무생법 중에서 법인의 견해를 얻었을 때 두 가지 상념[想]을 대치하니, 나와 남[自他]의 두 가지 상념을 버림을 말미암는 까닭에 평등한 마음을 얻느니라. 이로부터 모든 보살이 나와 남이 다르다는 상념을 다시는 현전하지 않아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느니라.”
 대승의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니, 아마도 공용의 가행이 있는 도[功用有加行道]에 머무는 보살이 아직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다시 어떤 보살이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는가를 묻자 무생법인을 증득한 보살이라고 답하였으니, 이른바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은 두 가지 공(空)으로 드러난 진여를 증득하여 일체법의 변계소집의 본성은 생겨남도 없고 또한 멸함도 없어서 본래 적정하고 자성이 열반임을 관함으로써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므로 2승(乘)과는 같지 않다.2승의 견도현관(見道現觀)이 다만 생공(生空)으로 드러난 진여만을 증득할 뿐 아직 법공(法空)으로 드러난 진리(眞理)를 증득하지는 못하였으니, 아직 능히 모든 법의 평등으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함을 현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지전(地前)의 보살 또한 아직 능히 증득하지 못하였고 아직 진여를 보지 못하였으니, 한 가지 맛으로 화합하는 평등성지가 아직 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어떤 사람은 초지 이상의 보살에 다시 세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초발심 보살이니, 이른바 초지에 있으면서 이미 견도(見道)6)의 정성이생(正性離生)7)에 들어 참다운 무루심이 비로소 현행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미 수행(修行)한 보살이니, 이른바 그 위의 6지(地)이다. 이미 수도(修道)8)를 얻어서 수행을 진전했기 때문이다.셋째는 불퇴전 보살이니, 이른바 그 위의 3지이다. 수도가 이미 원만해져서 모든 공용을 여읜 가행이 없는 도[無加行道]로 운(運)에 맡겨 현전함으로서 모든 번뇌가 끝내 일어나지 않아 생각마다 훌륭하게 나아가 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오직 8지 이상만을 취해서 일체법이 본래 생겨남도 없고 지금도 일어남이 없음을 관하여 상품(上品)의 인(忍)을 얻는지라 한결같이 청정해서 항상 무루를 일으켜 운(運)에 맡겨 구른다. 이것을 얻기 때문에 무생법인을 증득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계경에서 말했듯이, “8지 이상의 모든 보살의 무리는 법상(法想)을 여읜 까닭에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이 없고, 모든 법이 항상함도 항상하지 않음도 없음을 관해서 생겨남도 일어남도 없고 자타(自他)가 평등하며, 나아가 자세히 설한다”고 한 것과 같다.운에 맡겨 두 가지 상념[二想]의 대치할 수 있음을 말미암아 일체처에서 평등심을 얻으며, 여기부터 그 이상의 지위는 두 가지 생각을 떠났기 때문이며, 모든 공용이나 가행을 떠나기 때문이며, 오로지 무루이고 지극히 청정하기 때문이며, 무분별지가 이미 자재함을 얻어 운에 맡겨 구르기 때문에 바야흐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초지 보살은 비록 자타의 평등을 이미 증득하였다고 하여도 공용의 가행과 작의(作意)가 존재하여 아직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건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묘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원하오니 여래시여, 비유로써 자세하게 말씀해 주셔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깊고 깊은 뜻을 깨닫고 교화할 인연에 따라 널리 퍼뜨려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들은 뒤에 재빨리 무생법인을 얻게 하여 주소서.”
 묘생보살이 위의 뜻으로 하여금 비유의 문을 말미암아 명료하고 쉽게 볼 수 있도록 모든 보살들이 이 법을 들은 뒤에 깊고 깊은 뜻을 깨닫고 무생인을 깨닫도록 하기 때문에 다시 거듭 청하여 여쭙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묘생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삼십삼천(三十三天)이 아직 잡림(雜林)에 들지 못하면 끝내 일[事]이나 받음[受]에서 나와 내 것이 없다는 것을 화합하여 수용할 수 없지만, 만일 이 잡림에 들면 곧 분별없이 뜻에 따라 수용하느니라. 이 잡림에 이러한 공덕이 있음을 말미암아 능히 모든 천(天)으로 하여금 이 숲에 들게 하는 자는 하늘의 모든 과보를 일에서나 받음에서나 사유하는 바 없이 화합하여 수용하느니라.이처럼 보살이 만일 무생법인을 증득하지 못하면 끝내 평등한 마음과 평등한 버림[捨]을 얻지 못하여 일체 성문이나 독각과 차별이 없으니, 두 가지 상념이 있는 까닭에 능히 화합한 한 가지 맛인 사지(事智)에 머물러 수용하지 못하느니라. 만일 이미 무생법인을 증득하였다면 두 가지 상념을 버린 까닭에 평등한 마음을 얻어서 드디어 성문이나 독각과 차별되며, 평등한 마음을 말미암아 능히 버림에 머물 수 있어서 화합한 한 가지 맛인 사지를 수용하느니라.”
 삼십삼천에 있는 하나의 잡림은 여러 천상들의 복의 힘이 화합하여 감응한 바로서 모든 천상의 무리들로 하여금 이 숲에 있지 못하게 하니, 궁전 등의 사업(事業)이나 즐거움 등의 느낌[受]이 뛰어나고 하열함의 차이가 있고 나와 내 것이라는 차별의 수용이 있다.만약 이 숲에 들면 일에서나 느낌에서나 도무지 뛰어남이나 하열함이 없어서 모두가 똑같이 으뜸가고 미묘하며 나와 내 것이 없이 화합하고 수용하여 능히 평등케 한다. 화합 수용하는 까닭에 잡림이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은 모든 천상이 각기 닦은 평등하게 화합한 복업(福業)의 증상력을 말미암기 때문이다.저 모든 천상의 아뢰야식으로 하여금 이 숲을 한 곳, 한 때에 동일한 모양으로 변현하게 하는데, 이 잡림의 증상력을 말미암기 때문에 저 전식(轉識)으로 하여금 또한 똑같이 변현하게 하니, 비록 각기 수용하지만 차별이 없는 것이다.이와 같이 지전(地前) 보살과 2승(乘)은 아직 2공(空)이 드러내는 진여의 무생법인을 증득하지 못하였으니, 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할 차별의 집착이 있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차별하는 두 가지 상념을 아직 여의지 못하였고, 무루의 평등성지가 상응하는 마음의 평등한 수(受)와 사(捨)를 아직 얻지 못하였다. 혹은 다시 사를 행하기 때문에 능히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함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7지 이하의 보살은 여전히 공용이 있고 가행의 도(道)가 있으며 여전히 미세한 번뇌의 현행이 있으니 아직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아직 마음에서나 사에서나 운(運)에 맡겨 무생법인을 얻지 못하였고 묘관찰지가 상응하는 평등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능히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함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묘생이여, 비유컨대 갖가지 크고 작은 온갖 흐름이 큰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는 각각 의지하는 바가 다르니, 다른 물과 적은 물로서 물에 늘거나 줄어듦이 있는지라 그 물의 업에 따라 짓는 바가 각각 다르지만 적은 부분이 물에 사는 생명에게 의지처가 되어 준다. 그러다가 큰 바다에 들어가면 개별적으로 의지하는 바가 없어서 물의 차별이 없고, 한량이 없고, 더함과 덜함이 없고, 짓는 업이 한결같은지라 광대하게 물에 사는 생명의 의지처가 되느니라.마찬가지로 보살이 만일 여래의 청정한 법계인 큰 바다에 증득해 들지 못하면 각기 의지하는 바가 다르니, 차별된 지혜와 작은 지혜로서 지혜에 늘거나 줄어듦이 있는지라 그 지혜의 업에 따라 짓는 바가 각각 다르지만, 적은 부분이 중생의 선근이 성숙하는 의지처가 되어 준다. 그러다가 이미 여래의 청정한 법계인 큰 바다에 깨달아 들면, 의지하는 바가 차별이 없고, 지혜가 차별이 없으며, 지혜가 한량없으며, 지혜에 늘거나 줄어듦이 없어서 화합한 한 가지 맛의 사지를 수용하며, 한량없는 중생에게 선근을 성숙시키는 의지처가 되느니라.
 ‘큰 온갖 흐름’이란 이른바 긍가(殑伽) 등의 네 가지 큰 강이다. ‘작은 온갖 흐름’이란 이른바 나머지 작은 강이다. ‘큰 바다에 들기 전에는 각각 의지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은 여러 지방이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물’이란 맑거나 탁하거나 활기가 없거나 보기 좋은 물의 차별이다. ‘적은 물’이란 큰 바다를 선망하기 때문이다. ‘물에 늘거나 줄어듦이 있다’는 것은 비가 적게 오거나 많은 비가 올 때의 차별이다. ‘그 물의 업에 따라 짓는 바가 각각 다르다’는 것은 갖가지 기미(氣味)와 세력과 성숙에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적은 부분이 물에 사는 생명에게 의지처가 되어준다’는 것은 적은 숫자나 적은 양의 물에 사는 유정에게 의지처가 되어 준다는 것이다. ‘만일 큰 바다에 들어가면 각각 의지하는 바가 다르고 등등’은 앞에서 설한 것과는 모든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니, 그 모습을 알아야 한다. ‘광대하게 의지가 되어준다’는 것은 숫자로는 넓고 양으로는 큰 것에 의지하여 설하는 것이다.‘마찬가지로 보살이 만일 여래의 법계인 큰 바다를 증득해 들어가지 못하면’이란 것은 아직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법계를 증득하지 못한 것이다. ‘의지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는 것은 따로따로 여래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지혜’라는 것은 각각 별도의 승해(勝解)에 의해 닦아 이룬다는 것이다. ‘작은 지혜’라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를 선망하기 때문이다. ‘지혜에 늘거나 줄어듦이 있다’는 것은 모든 지위가 서로 바라봄에 뛰어남과 천함이 있다는 것이고, 정(定)이 서로 바라봄에 뛰어남과 천함이 있다는 것이다.‘그 지혜의 업에 따라 짓는 바가 각각 다르며’라는 것은 모든 보살의 정수(定數)의 양이 차별이 있기 때문에 짓는 바가 각각 다르니, 모든 보살의 뛰어난 이해와 세력을 따라서 유정계를 반연하여 능히 짓는 바가 있으나 이것을 지나쳐서 구르지는 않기 때문에 각각 다르다고 한다. ‘적은 부분의 중생’이라는 것은 적은 수와 적은 양의 선근이 성숙하여 의지하는 바이다. 모든 보살들의 증상력을 말미암기 때문에 분수에 따라 남의 선근을 성숙하게 하고, 모든 보살의 정(定)은 여래의 정을 선망하나 수량이 적기 때문에 모든 유정들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 또한 적다.‘만일 이미 여래의 청정한 법계인 큰 바다에 깨달아 들면’이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법계를 이미 증득하였다는 것이다. ‘의지하는 바가 차별이 없고’라는 것은 청정 진여가 의지하는 바가 된다는 것이다. 무루계 중에서 모든 부처의 다름이 있음을 세울 수 없거늘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지혜가 차별이 없다’는 것은 대원경지 등이 모두 비슷하기 때문이며, 나와 남의 분별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지혜가 한량이 없으며’라는 것은 가없는 소지경(所知境)을 환히 깨달은 것이다. ‘지혜에 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라는 것은 동등하게 청정한 것이니, 경계에 작고 많음이 없음을 두루 아는 것이다. ‘화합된 한 가지 맛의 사지(事智)를 수용한다’는 것은 평등성지 등 일체 지어진 바가 모두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량없는 중생에게 등등’은 수적으로 양적으로 모두가 한량없음이며, 복덕과 지혜가 다함없고 자량(資糧)이 모두 평등한 것이니, 법신을 얻음으로써 생사의 경계를 다하였고 모든 유정들의 선근을 무르익게 하는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앞과 뒤의 두 가지 비유에 차별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앞의 비유는 모든 보살들이 환희지나 부동지에 아직 들지 못하였거나 이미 들어갔음을 비유한 것이고, 뒤의 큰 바다의 비유는 모든 보살들이 부동지나 여래지에 아직 들지 못하였거나 이미 들어갔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두 비유가 똑같이 보살이 무생법인을 아직 얻지 못하였거나 이미 얻었음을 비유한 것이니, 앞에서는 보살의 공덕이 조밀(稠密)한 것이 잡림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고, 뒤에서는 보살의 공덕이 가없음을 큰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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