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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보자] #5639 불설인본욕생경(佛說人本欲生經)

Kay/케이 2025. 2. 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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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인본욕생경(佛說人本欲生經)

 

불설인본욕생경(佛說人本欲生經) 서문『인본욕생경(人本欲生經)』이란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조찰[照]하여 사성제(四聖諦)의 체제로 꾸민 것이니, 본(本)은 무명[癡]이요, 욕(欲)은 애(愛)요, 생(生)은 생사(生死)이다. 열두 가지에서 이 셋만을 간략히 들어 제목(題目)으로 삼으셨으니, 인간[人]이란 모두가 생사의 흐름에서 삼세(三世)에 얽매이고[浪滯], 구지(九止)에 헤매고[飄縈], 팔박(八縛)에 시달리는[稠繇] 주체이기 때문이다. 십이인연(十二因緣)은 구지(九止)의 첫 단계인 인간(人間)과 하늘무리[天]의 몫이요, 사제(四諦)로 비출 곳[所鑒]은 구지(九止)요, 팔해(八解)로 바로잡을 것은 팔사(八邪)이니, 사(邪)가 바로잡아지면 편안[恬]치 않은 곳이 없고, 지(止)를 비추면 유쾌하지[愉] 않을 때가 없다.유쾌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능히 훤히 비추고[洞照], 곁으로도 통했으며[傍通], 편안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능히 신비롭게 변화하고, 상황에 맞추어 응[應會]하나니, 신비롭게 변화하고 상황에 맞추어 응하면 서두르지 않아도 빠르고, 훤히 비추고[洞照], 곁으로도 통하면 말하지 않아도 감화된다. 말하지 않아도 다스려지기 때문에 버려야 할 사람이 없고, 서두르지 않아도 빠르기 때문에 버려야 할 물건이 없나니, 버려야 할 물건이 없고, 버려야 할 사람이 없다면 이야말로 선지(禪智)의 시초[由]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시기를 “도(道)는 선지(禪智)에서 생겨서 열반(涅槃)으로 가까워지게 한다.” 하셨으니, 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실로 가까이하고 귀의해야 할 금쪽같은 말씀이다.이 경은 안세고삼장(安世高三藏)께서 번역하신 것 같은데 어법은 예스러우시나 문장이 자상[纖悉]하시고, 이치는 오묘하시나 이론이 완곡(婉曲:간곡)하시니, 내당[幽堂]의 아름다움만 보고, 정원[闕庭]의 풍요로움을 지나쳐버리는 이도 없지 않을 것이다.내가 늘 이 경을 손에 잡으면 쉽사리 놓지 못했었으니, 즐기어 음미했던 것은 삼관(三觀)의 묘함이요, 머릿속에 길이 간직하려던 것은 상념을 끊으라는 말씀[想滅之辭]이었다. 이제 감히 여가를 이용하여 주(註)를 내는데 같은 논리가 중복된 것은 거듭 풀이하지 않는다.불설인본욕생경(佛說人本欲生經)후한(後漢) 안식삼장(安息三藏) 안세고(安世高) 한역
김월운 번역이와 같이 들었다.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류국(拘類國)에 계실 적에 그 나라 수도[法治處]로 가셨다.[아난(阿難)께서 자신이 성교(聖敎)를 들으시던 곳을 기억해 내신 것이다. 법치처(法治處)는 곧 왕성(王城)이다.]그때 현자(賢者) 아난이 한적한 곳에 홀로 앉았다가 홀연히 생각하기를 ‘이 뜻의 생겨남[意生 : 緣生]은 미증유(未曾有)하며, 이 뜻은 곧 미묘함의 근본이며, 생사 또한 미묘하고, 중간[中] 또한 미묘하건만 오히려 분명해서 나타나기 쉽도다[易現]’ 하였다.[‘나타나다[現]’라 함은 현(見), 즉 ‘보이다.’라고 해야 하고, ‘이 뜻은 미묘함의 근본이다[是意微妙本].’라고 해야 하거늘 문구가 도치[句倒]되었다.]그때 현자 아난은 날이 밝자,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처소로 갔다. 부처님 처소에 이르자 부처님의 발에 절하고, 한 쪽에 서서 이렇게 아뢰었다.
“제가 고요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홀연히 생각하기를 이 뜻의 생겨남[意生]이 미증유(未曾有)하며, 이 뜻은 곧 미묘함의 근본이며[근본[本]이란 어리석음이니,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은 사성제(四聖諦)의 비춤을 받은 사람이다.], 생사(生死) 또한 미묘하며[생사는 가장 말단이지만 미세하고도 밝은 진리[諦]는 그 말단[末]까지 비춘다.], 중간[中]도 미묘하건만[중간(中間)이란 근본과 지말(支末)의 중간이니, 구용제(九用諦)로 비추어보면 역시 매우 미묘하다.], 다만 분명해서 쉽게 나타난다[易現]고 하였나이다.”[현(現)은 현(見)으로 고쳐야 한다. 말하자면 사제(四諦)로써 십일인연(十一因緣)을 관찰하면 요요(了了)하고도 분명(分明)해서 알아보기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무나 분명해서 알아보기 쉽다고 말하지 말라. 깊고도 미묘하나니, 아난아, 근본이 있어 생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라. 아난아, 근본인연을 좇아 생사하는 것을 만일 어떤 이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면, 마치 세간의 베틀이 밟거나 당기는 대로 북[梭]이 오가는 것과 같으니라.[어리석음을 좇는 이에게 이 생사가 있다는 것이 지극히 깊고, 지극히 미묘하거늘 어찌 알기 쉽다고 하는가. 어리석음[癡]이 생긴 이래, 겁(劫)을 지내고 몸을 바꾸면서 유유(悠悠)히 지낸 비구(比丘)는 그 도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되돌아보건대 손에 잡은 듯이 아는 이는 만에 하나도 없거늘 어찌 분명하다 하는가.]금생에서 후생으로 이르고, 후생에서 금생으로 이르는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更苦] 세간에 사노라 세간을 벗어나지 못하였느니라.[이는 생사의 고통이 곧 고제(苦諦)라는 취지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죽으면 바로 후생(後生)이니, 생사란 마치 밤낮과 같거늘 어리석은 이는 태어나면 고마워하고, 죽으면 찡그리며 괴로워한다.]이러한 인연으로 아난아 분명히 알라. 깊고도 미묘한 것은 근본이 있기 때문에 생사(生死)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밝히는 일 또한 미묘하다는 것이니라.[태어남을 인하여 죽음이 있나니, 그러므로 인연(因緣)이라 하고, 금세(今世)에서 후세(後世)로 이어지면서 생사를 거듭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更苦] 하고, 삼세(三世)를 환하게 비추기 때문에 미묘(微妙)라 하셨다. 이상으로써 고제(苦諦)의 법문이 끝난다.]만일 어떤 이가 묻되 늙고 죽음[老死]의 인연이 있는가 하거든 이런 물음에는 얼른 대답하되 인연이 있다 하라. 아난이여, 무슨 인연으로 늙고 죽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태어남[生] 때문이라 하라.[죽음[死]은 태어남[生]을 인해서 있고, 생(生)을 훈습[習]시키는 법은 열이 있으니, 위는 괴로움의 실체를 알리셨고, 여기서부터는 그 습을 추궁하셨다.]만일 어떤 이가 묻되 태어남[生]의 인연(緣)이 있는가 하거든 이런 물음에는[태어남[生]의 인연(緣)이 있는가.’ 함은 생(生)에도 인(因)이 있는가 하고 물은 것이다.] 얼른 대답하되 인연이 있다 하라. 무슨 인연으로 생(生)하는가 하거든 유(有) 때문에 생한다 하라.[생(生)은 삼유(三有)를 인(因)한다.]만일 어떤 이가 묻되 유(有)의 인연[緣]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유의 인연이 있다 하라. 무슨 인연으로 유가 있는가하거든 대답하되 수(受)의 인연으로 유(有)가 있다 하라.[네 가지 수[四受]를 인하여 세 가지 유[三有]가 있다.]만일 어떤 이가 묻되 인연이 있어 수(受 : 取)가 있는가 하거든 대답하되 인연이 있어 수가 있다 하라. 무슨 인연으로 수가 있는가 하거든 대답하되 애구(愛求)의 인연으로 수가 있다 하라. [말하자면 전생 몸[前身]으로부터 여덟 가지 애[八愛]를 훈습(薰習)했기 때문에 중음(中陰)에 네 가지 수[四受]가 있다. 네 가지 수를 다 누리면 바로 금생 몸[今身]이니, 이미 두 생[二世]이 밝혀졌으니, 그와 어울리기[與]를 생략하고, 그치라. 일상적인 습제(習諦)의 풀이는 끝났다. 십이인연(十二因緣)에 삼세(三世)가 구족하거늘 어리석은 사람들은 금생과 내생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법칙에 마음을 써서 모두가 윤회(輪迴)를 알고, 사제(四諦)를 깨닫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교계[計挍]로써 본말(本末)을 교계하거니와 본말이 약(藥)이 된다 하노니, 약이라 함은 곧 사성제(四聖諦)이다.]그러하니라. 아난아, 애구(愛求)의 인연으로 수(受)가 있고, 수의 인연으로 유(有)가 있고, 유의 인연으로 생(生)이 있고, 생의 인연으로 노사우비고(老死憂悲苦) 등, 뜻에 맞지 않는 번뇌[不可意惱]가 생기나니, 이렇듯이 구족(具足)하고도 으뜸가는[最] 고통의 무더기[苦陰]가 생기느니라.[이들 다섯 가지 사안[五事]이 차례차례 인(因)이 되어 주는 것을 습(習)이라 하고, 이 다섯 사안[五事]이 고통인 줄 아는 것이 곧 고제(苦諦)이다. 애별리고(愛別離苦)는 태(胎)에 드는 고통에 속하고, 생로(生老)와 비뇌(悲惱)는 진짜 고통의 무더기[苦藪]이다.]아난아, 이 습(習)이 생긴 이후로는,[문구[句]가 도치(倒置)되었으니, 바르게 말하면 “습(習)을 좇아 고(苦)가 생겼다.”고 해야 한다.] 아난아, 생(生)의 인연으로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노니, 이것을 좇아 저것이 이루어진다 하였느니라.[그러므로 성현[聖]의 말씀을 좇아야 하나니, 어리석음을 좇아 행을 쌓아서 공[德]이 이루어지면 노사(老死)가 생기느니라.]아난아, 이런 사유로 분명한 것은 생(生)의 인연으로 노사(老死)가 있는 것이니라.[분명(分明)하다 함은 체실(諦實)하고도 요요(了了)하게 습(習)을 알았다는 뜻이다. 인연(因緣)이라고 한 것은 모두가 습(習)을 가리킨다. 머지않아 거슬러 다하는 법[反盡]을 설하시려고, 다시 습(習)을 몰아다가 하나로 모으셨다.]아난아, 만일 태어남[生]이 없다면 물고기[魚]나 물고기의 종자[魚種]도 없을 것이요, 날짐승[飛鳥]이나 날짐승의 종자[飛鳥種]도 없을 것이요, 모기⋅등에[蚊虻]나 모기⋅등에의 종자[蚊虻種]도 없을 것이요, 용(龍)이나 용의 종자[龍種]도 없을 것이요, 신(神)이나 신의 종자[神種]도 없을 것이요, 귀(鬼)나 귀의 종자[鬼種]도 없을 것이요, 사람[人]이나 사람의 종자[人種] 등, 각각의 종자가 모두 없을 것이니라.[만일 진제(盡諦)를 깨달아서, 태어나는 이가 없어지면 어찌 오도(五道)가 생길 수 있으랴.]만일 어떤 이가 스스로 태어나지도 않고, 또한 태어나게 해 주는 이도 없어서,[진제(盡諦)인 진여심(眞如心)을 알면 태어남[生]도 없을 것이며, 또한 태어나게 하는 이도 없으리라.] 어디에도 아난아, 태어남[生]이 없더라도(없는데도) 노사(老死)가 있을 수 있겠느냐?”[태어남[生]이 없으면 죽음[死]도 없다 하시니, 참으로 거룩하시어라.]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하지 못하나이다.”[태어남이 없으면 죽음도 없다는 이 말씀은 참으로 거룩하다.]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러한 인연으로, 마땅히 알라.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因)으로 삼고, 이를 연(緣)으로 삼아, 노사(老死)는 생(生) 때문에 있고, 생의 인연으로, 아난아, 다시 노사가 있느니라.[이 인연을 좇는다[從是因緣] 함은 이 인연을 좇아 출발[發也]하고, 태어난다[生也]는 뜻이다. 무(無)의 이치를 이해하여 태어나지 않으면 노사(老死)의 고통도 없어지겠지만 무생(無生)의 도리를 요달(了達)치 못하는 이는 네 가지 습을 따라 생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苦)가 있다. 이 네 가지 습[四習]과 그 그침[止]은 애(愛)를 등지고 돌아서는 애환장(愛還章)에서부터 달라진다. 여기서부터 결구(結句)는 모두 반복(反覆)으로 곱씹어서 성립시킨다.]아난아, 생의 인연으로, 노사가 있느니라.[거듭 맺으셨다.]
만일 어떤 이가 묻되 인연이 있어 생(生)하는가 하거든 대답하되 인연이 있어 생한다 하라. 무슨 인연으로 생하는가 하거든 유(有)의 인연 때문이다 하라.아난아, 이런 인연으로, 마땅히 알라. 유(有)가 있기 때문에 유의 인연으로 생(生)이 있느니라.[삼유(三有)의 태(胎)에 들면 다시 태어남[生]이 있나니, 십이인연(十二因緣)이 이어지면서 일생[一世]이 된다.]아난아, 만일 유(有)의 연(緣)이 없다면 어찌 물고기나 물고기의 종자, 날짐승이나 날짐승의 종자, 모기⋅등에나 모기⋅등에의 종자, 용이나 용의 종자, 신(神)이나 신의 종자, 귀(鬼)나 귀의 종자, 사람이나 사람의 종자, 그 밖의 갖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겠느냐.[진제[盡諦]를 알아서 유(有)가 없어지면 오도(五道)도 없어진다.]
만일 응당 있어야 할 것[有]이 없고, 또한 있게 할 이도 없어서, 어디에도, 아난아, 유(有)가 없어도 태어남[生]이 있을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진여의 진리[眞如諦]를 터득하면,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없고, 또한 있게 할 이도 없다 하셨다. 이미 있게 하는 이[有]가 없다는 것으로 기준[辟]을 삼아, 유(有)를 무(無)로 보게 하시고는 “가령 모든 유(有)가 어디에도 유(有)하지 않더라도 태어남[生]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아난에게 반문(反問)하셨는데 아난이 대답하기를 “없사옵니다.” 하고 여쭈었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를 출발점[發]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생(生)은 유(有) 때문에 있나니, 그러므로 아난아, 유의 인연을 좇아 생이 있느니라.[이 네 가지 습[四習]을 지은 까닭에, 생(生)은 유(有)로써 근본을 삼는다.]만일 어떤 이가 묻되 유(有)의 인연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있다 하라. 아난이여, 어떤 인연으로 유가 있는가 하거든, 대답하되 수(受)의 인연이라 하라.
유(有)의 인연이 있는 것이 이렇듯이 분명하니, 수(受)의 인연으로 유(有)가 있느니라.[네 가지 수[四受]를 인하여 세 가지 유[三有]가 있다.]
아난아, 만일 수(受)의 인연이 없고, 또한 수가 있게 할 이도 없어서, 어디에도, 아난아, 수가 없어도 유(有)가 나타날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수(受)의 연(緣)이 없으면 유(有)를 수용[受]할 길이 없다. 현(現)은 현(見), 즉 보이다로 읽어야 하니, 어디에도 수가 없더라도 유가 보일 수 있겠는가 하셨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기점[起]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수가 있게 하였나니, 아난아, 수의 인연으로 유(有)가 있고, 유의 인연으로 아난아, 수가 있느니라.[만일 무(無)를 요달[達]치 못하면, 문득 네 가지 습[四習]을 좇는다. 영유수(令有受)는 구절이 도치(倒置)되었으니, 영수유(令受有), 즉 “수(受)로 하여금 있게 하다.”로 고쳐야 한다.]아난이여, 인연이 있어 수(受)가 있는가 하고 누군가가 묻거든, 있다고 대답하라. 무슨 인연으로 수가 있는가 하거든 애구(愛求)의 인연이라고 대답하라.이런 인연으로, 아난아, 분명히 알라. 애(愛)의 인연으로 수(受)가 있느니라.[유인연아난수(有因緣阿難受)는 문구(文句)가 도치(倒置)되었으니, 유수인연(有受因緣), 즉 수(受)의 인연이 있는가라고 해야 한다. 팔애심(八愛心)은 곧 태(胎)에 드는 이야기이다.]아난아, 만일 애(愛)가 없으면 수(受)도 없고, 또한 장래의 수[當受]도 없으리라. 어디에도 아난아, 애(愛)가 없어도 수(受)가 있을 수 있겠느냐. 또한 수라는 명칭[受名]이 있을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무(無)의 도리를 깨달아, 애(愛)가 없어지면 수(受)와 그리고 장래의 수[當受]까지도 없어진다. 그리고 이를 되묻고, 되물으신 것은 그쪽 문장(文章)의 상례(常例)이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출발점[發]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因緣)으로 삼아, 애(愛)가 연이 되어 수(受)가 생기니, 애의 인연으로, 아난아, 수가 이루어지느니라.그러하니라. 아난아, 애(愛)의 인연으로 구함[求]이 있고, 구함의 인연으로 이로움[利]이 있고, 이로움의 인연으로 계교함[計]이 있고, 계교함의 인연으로 즐기려는 욕망[樂欲]이 있고, 즐기려는 욕망의 인연으로 구하러 떠남[發求以往]이 있고, (구하러 떠나는) 애착[愛]의 인연으로 버리지 않으려는 인색함[不欲捨慳]이 있고, 버리지 않으려는 인색함의 인연으로 마침내 집[家]이 있고, 집을 가진 인연으로 다시 지킴[守]이 있느니라.[알지 못하면 이것에 의하여 저것이 이루어진다고 거듭거듭 맺으셨다.]아난아, 지키려는 행[守行]을 근본으로 하여 도장(刀杖)이 있고, 도장이 있음으로 서로 다툼[鬪諍]과 욕설[言語]과 상하가 서로 속이고 능멸함[上下侵欺]과 갖가지 이간질[若干兩舌] 등, 그 종류가 많아서 한두 가지가 아닌[多非一致] 추악한 법[弊惡法]이 생기느니라.[다비폐법(多非弊法), 즉 많아서 한두 가지가 아닌 추악한 법은 지킴[守]으로부터 시작되니, 팔애(八愛)의 첫째이다.]아난아, 만일 근본[本]이 없고, 또한 지켜야 할 것도 없고, 또한 지키게 하는 이도 없어서, 어디에도 아난아, 지키는 일이 없는데도 도장(刀杖), 다툼[鬪爭], 욕설[語言], 상하가 서로 속이고 능멸함[欺侵], 갖가지 이간질[若干兩舌] 등, 그 종류가 많아서 한두 가지가 아닌[多非一致] 추악한 법[弊惡法]이 있을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멸제(滅諦)를 알아서 색(色)을 지키지 않더라도 숱한 폐악(弊惡)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고 따져서 진리를 밝히셨는데 대답하시기를 보호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지킬 일도 없다고 하셨다. 뒤의 역무(亦無) 두 글자는 구(句)를 포개신 것이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출발점[發]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도장(刀杖), 투쟁(鬪諍) 욕설[語言], 상하의 능멸[欺侵], 갖가지 이간질[若干兩舌] 등, 그 종류가 많아, 한두 가지가 아닌[多非一致] 추악한 법(弊惡法)이 생기느니라.[지킴[守]과 지키지 않음[不守], 두 이치[二理]가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건만 다시 네 습[四習]을 통틀어 하나의 지킴[守]으로 합치셨다.]아난아, 지킴[守]을 일삼는 까닭에 문득 도장(刀杖), 서로 다툼[鬪諍], 욕설[語言], 상하가 서로 속이고 능멸함[上下欺侵]과 갖가지 이간질[若干兩舌] 등, 그 종류가 많아, 한두 가지가 아닌[多非一致] 추악한 법[弊惡法]이 있게 되었느니라. 이렇듯 하도 많은 고통들은 오직 오음(五陰)의 좇던 습(習)으로 이루어졌느니라.[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이어늘 색의 실체를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킨다. 도장(刀杖)등, 한두 가지가 아닌 악은 그것이 곧 크게 괴로운 고성제[大苦苦聖諦]임을 알 수 있다. 사유십이인연경(思惟十二因緣經)에 열두 가지 사안[十二事]마다에 모두 사제(四諦)가 있다고 하셨으나 모든 습제(習諦)의 근본을 추구하면 한 두 가닥[一端]이 아니다. 십이지(十二支) 뿐만이 아니라 열여섯 가지 무[十六無]와 무루(無漏)와 습이 다한 두 지혜[習盡二慧]와 다섯 가지 사견[五邪]이 그 근본을 추궁하면, 팔애(八愛)마다에 사습(四習)이 들어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애(愛)란, 더러움의 바다[穢海]인지라. 뭇 악[衆惡]이 모여들거니, 어찌 이 여덟 가지 뿐이겠는가. 여덟 가지만 말씀하신 까닭은 거친 것[麤]만을 거론(擧論)하셨기 때문이다. 욕계(欲界)에 준동(蠢動)하는 무리들이 언제인들 음행(淫行)을 하지 않는 날이 있겠는가. 불환과(不還果)에 이르러야 비로소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다.]집[家]의 인연으로 지킴[守]이 있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르노니, 분명히 알라. 아난아, 집의 인연으로 지킴이 있느니라.[처실(妻室)이 있음으로써 중문(重門)과 순라군[擊柝] 등의 지킴이 필요하게 되었다. 진작부터 검소한 생활[棲遲高岸]을 했더라면 순라군[擊柝]이 무엇에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누군가[說者]가 말하기를 이는 최상의 말씀[上言]이라 하였다.]만일, 집의 인연[家緣]이 없으면 받아들일 일[受]도 이미 없을 것이거늘 다시 무슨 인연으로 집이 있겠느냐. 어디에도 집의 인연이 없어도 집이 있을 수 있겠느냐. 도장(刀杖), 투쟁(鬪爭), 시비[語言], 상하의 능멸함[上下相欺], 갖가지 이간질[若干兩舌] 등, 많아서 한두 가지가 아닌 악법이 생길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 색[色法]을 받아들이지[受] 않는 사람에게는 집[家]을 가질 연(緣)이 없나니, 집을 가질 연이 없거늘 무슨 지킬 일이 있기에 큰 칼[刀]을 간수해야 하는 큰 고통[苦集]이 있겠는가.]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유(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因緣)으로 삼아 지켜야 할 일[令有守]과 지키는 일[爲守]이 있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집 때문에 지킴이 있느니라.[첫머리의 종시유(從是有)는 집[家]을 가짐으로써 지키는 일[守]이 있게 되었다는 뜻이니, 그 이유는 집이란 본래 습의 뭉치[習結]이기 때문이다. 집을 인하여 지킴[守]이 생기고, 지킴은 다시 집을 인하여 생긴다 하시니, 역시 전도된 상황을 교차(交叉)로 밝히신 것이다.]버리기 어려워하는 인색함[難捨慳] 때문에 집[家]이 있게 되었나니, 이 인연으로 인하여 이것[家]이 있느니라. 아난아, 이 인연으로 분명히 알라. 버리기 어려워하는 인색함[難捨慳] 때문에 집이 있느니라.[머리속[腦]에 색욕(色欲)이 간직되어 떠나지 않기[思存不捨]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집[家]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이것을 연(緣)하여 저것이 있다 하셨다.]아난아, 만일 버리기 어려워하는 인색함[難捨慳]이 없다면 또한 얻음[受]도 없을 것이다. 이미 얻음이 없더라도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이 있을 수 있겠느냐. 아난아, 어디에도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이 이미 없어졌는데도 집[家]이 있을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미 얻음(受 : 取支)이 없다면 수를 버릴 필요조차도 없으리라. 이미 수가 없거늘 무슨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이 이미 없어졌다면 어찌 집[家]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기점[起]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집[家]을 누리게 되었나니, 아난아,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 때문에 집이 있게 되느니라.[이[是]라 함은 곧 아까워하는 마음[慳惜心]이다.]가서 받음[往受]을 인하여, 아난아, 아까워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이 인연을 좇아 저것이 생긴다 하였느니라.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 인연으로 분명히 알라. 얻음을 위해 떠났음으로 얻음[受]이 있고, 얻음[受]을 좇아 아까워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이 있느니라.[연인[好仇 : 戀人]을 연모(戀慕)함이 지나치게 간절했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얻으러 떠남[往受]을 인하여 버리기 어려워함이 생긴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씀하시기를 얻으러 떠남[往受]을 인하여, 이 인색함[慳]이 생긴다고 하셨다.]아난아, 만일 얻으러 떠남[發受]이 없다면 어찌 얻음[受]이 있을 것이며, 또한 무슨 인연으로 얻으러 떠나겠는가. 어디에도, 아난아. 얻음도 떠남도 모두 없어도 아까워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이 생기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얻으러 떠남[發往]이 없다는 도리를 알면 얻음[受]과 그리로 가는 일이 모두 없을 것이다. 어디에도 얻으러 떠나지 않았거니, 어찌 인색하고, 아까워하는 마음[慳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애초에 출발[上]조차 하지 않았으리라.]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기점[起]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은 얻으러 떠남[發往受] 때문이요, 얻으러 떠나는 인연이 있는 까닭에 아난아, 다시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이 있느니라.[찾아떠남을 인하여 다시 습(習)이 이루어져서 마침내 버리지 못하기에 이른다.]아난아, 욕탐(欲貪)의 인연으로, 찾아 떠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르노니, 아난아, 이 인연을 좇아 분명히 알라. 욕탐의 인연으로 찾아 떠나게 되느니라.[음탐(淫貪)이 안으로 채워지면, 겉으로 넘쳐 나와 끝내 그쪽으로 치닫는다.]아난아, 만일 욕탐(欲貪)이 없다면 이미 연(緣)도 없어졌거늘 다시 무슨 인연으로 욕탐이 생길 수 있겠느냐. 어디에도 아난아, 욕탐이 없어도 찾아 떠남[發往]이 있을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어떤 수행인이 음욕(淫欲)의 인연이 원래 없는 것임을 안다면, 어찌 다시 음탐(淫貪)을 일으킬 계교를 하겠는가. 어디에도 탐심(貪心)이 없다면 어찌 얻으러 떠남[往受]이 있겠는가. 무릇 위에서 없다[無有]고 하신 것은 모두가 그 인(因)이 없다는 것을 밝히신 말씀이요, ‘일체(一切)’ 이하는 인(因)과 연(緣)이 모두 없다는 말씀이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출발점[發]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찾아 떠남[發]을 인하여 욕탐(欲貪)이 있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욕탐을 좇아 찾아 떠나거나,[영발위유욕탐(令發爲有欲貪)은 문구가 도치[句倒]되었다.] 이미 떠났느니라.찾아떠남[發往]으로써 욕탐(欲貪)이 있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노니, 이 인연을 좇아 분명히 알라. 찾아 떠났기 때문에 욕탐이 있느니라.[이 찾아 떠나다[發往]는 꼭 만나고자 계교(計較)해서 떠나려는 길이다. 『음지입경陰持入經』에서는 가게 되기를 원하는 모습[願得往相]이라 했으니, 곧 셋째 계교이다. 고설(故說)이라 함은, 그러므로 위에서 말하기를 계교[計]를 인하여 탐이 생긴다[因計生貪]고 하신 것을 지칭하신다.]아난아, 만일 찾아떠남[發往]도 없고, 또한 찾아 떠나가게 하는 이도 없어서 어디에도 아난아, 떠나는 일이 없어도 탐욕이 생길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가령 무(無)의 도리를 알아서 머무를 요인이 없어졌더라도 또한 탐욕에 머무를 생각이 날 수 있겠느냐 하셨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씨앗[有]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탐욕(貪欲)은 찾아 떠난[發往] 때문이요, 찾아 떠난 인연으로 다시 욕탐(欲貪)이 있느니라.[무(無)의 이치를 알면 위와 같이 되겠지만 만일 알지 못하면 위와 같이 습(習)을 이룬다. 모든 결구(結句)의 반복(反復)에는 모두 발왕(發往), 두 글자가 빠졌다.]아난아, 이로움[利] 때문에 찾아 떠남[發往]이 있느니라. 이런 까닭에 말하노니, 이 인연으로 분명히 알라. 이로움의 인연을 좇아 찾아 떠나게 되느니라.[이익을 좋아함이 심하면 찾아갈 생각이 머리에 남는다. 시(是)는 위에서 말한 시(是)니, 이익이 곧 찾아떠남[往]의 연(緣)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아난아, 만일 이로움이 없다면 또한 구하러 떠나는 일도 없을 것이거늘 다시 무슨 인연으로 구함이 있는가. 어디에도 아난아, 이미 이로움이 없어도 찾아 떠남[發往]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미 이익을 알줄 알았더라면 구해야 할 이익도 없을 것이어늘 다시 무슨 이익이 있어 구할 연(緣)이 되겠는가. 어디에도 이로움이 없거늘 어찌 찾아떠남이 있을 수 있겠는가.]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유(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찾아 떠나감[發往]은 이익이 있기 때문이요, 이익 때문에 다시 구하러 떠남[發求]이 있느니라.
구하는 인연 때문에 이익이 있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노니, 이 인연을 좇아 분명히 알라. 구하게 하는 인연은 이로움이니라.[이 팔애장[八愛章]에서 혹은 고설(故說)이라 하고, 혹은 시설(是說)이라 하였으나 뜻은 다르지 않으니, 위 문장에 이미 갖추어진 사실을 이 두 방식으로 풀이했기 때문에 고운(故云)과 시고(是故)를 문장의 맨 첫머리에 놓으셨다.]아난아, 만일 구해야 할 인연이 없다면, 또 무슨 인연으로 구할 것이며. 또한 무슨 인연으로 구하겠는가. 어디에도 아난아 구하는 일이 없는데도 이익을 보는 일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구하는 일이 본래 그 요인조차 없다면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어디에도 구하는 일이 없다면 이익을 볼 수 있겠는가 하셨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존재[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이로움[利]이 있는 것은 구했기 때문이요, 구하는 까닭에, 아난아, 다시 이로움이 있느니라.[혹은 찾아떠남[發]이라 하고, 혹은 생함[生]이라 하고, 혹은 기점[起]이라 하고, 혹은 존재[有]라 하셨으나 뜻은 같은데 글만 다르다.]사랑함[愛]을 좇기 때문에 구함[求]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노니, 이를 좇아 분명히 알라. 사랑함을 인하여 구함[求]이 있느니라.[사랑하는 마음[愛心]이 안[內]에는 없으나 구하노라면 생긴다.]아난아, 만일 애(愛)가 없으면 또한 구함[求]도 없을 것이요, 또한 구하는 인연이 없으면 애도 없을 것이다. 어디에도, 아난아, 애가 없더라도 구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인연법을 설하신 여러 대목[章]에서 오직 이 한 대목[一說]만이 위의 애수장(愛受章)과 다르니, 卽 약무유애(若無有愛) 밑에 무유애(無有愛)를 두 번 말씀하신 것이다. 다른 데서는 일체(一切) 위에는 인(因)을 말씀하시고, 일체 밑에는 인(因)과 연(緣)을 말씀하셨었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존재[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사랑함[愛]이 있기 때문에 구함[求]이 있고, 구함이 있기 때문에 다시 사랑함이 있게 되느니라.[사랑함[愛]이 불어나서 여덟이 되었다.]아난아, 위에서 말하기를 욕애(欲愛)와 그리고 유애(有愛), 이 두 가지는 모두 통(痛)에서 만난다 하였거니와,[이는 애(愛)의 근본을 추궁하시는 문장의 끝이다. 욕애(欲愛)와 색애(色愛) 외에 다시 애(愛)가 있어 하나가 아니다. 경(經)에 이르시기를 마음에 가합(可合)해 하는 것이 욕(欲)이라 하셨다. 이 두 애[兩愛]는 통(痛)으로써 근본[本]을 삼고, 습[習]을 삼고, 인연(因緣)을 삼아 견해[解]를 내되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 서로 만나다[相會] 함은 서로 인한다는 뜻이다.]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묻되 통(痛)의 인연(因緣)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있다 하라. 어떤 인연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경(更)의 인연으로 있다 하라. 이러한 인연으로, 아난아, 마땅히 알라 경(更)의 인연으로 통(痛)이 있느니라.[질문을 던져 대답케 하셨으니, 여섯 가지 경[六更]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통[三痛]이 그로 말미암아 생긴다 하셨다.]아난아, 만일 눈[眼]이 경촉(更觸)하지 않고, 또한 경촉하는 이도 없고, 또한 눈이 스스로 경촉하지도 않아서, 어디에도, 아난아, 눈이 경촉하지 않더라도 눈이 홀로 경촉[更觸]하는 일이 있겠느냐. 또한 눈 자체의 인연으로 즐거움[樂]이나 괴로움[苦]이나 혹은 불고불락(不樂不苦)이 생길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눈의 지각[眼知]이 경촉(更觸)하지 않고, 또한 눈의 경촉이 되어 주는 이도 없다면 어디에도[一復] 경촉이 생길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눈[普眼]이 이미 경촉하지 못한다면 어찌 눈이 경촉하는 인연으로 세 통각(痛覺 : 感覺)이 생긴다고 하겠느냐.” 하셨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존재[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눈[眼]이 통(痛)을 경촉(更觸)케 하고, 눈이 경촉하는 인연으로, 아난아, 눈이 통(痛)을 감지(感知)케 하나니, 귀[耳]도 그렇고, 코[鼻]도 그렇고, 혀[舌]도 그렇고, 몸[身]도 그러하니라.아난아, 만일 마음이 경촉하지도 않고, 또한 경촉할 상대도 없고, 또한 마음으로 경촉할 인연도 없어서, 어디에도 아난아, 마음이 경촉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경촉이 인연(因緣)을 찾아가서 통수(痛受)가 생기게 할 수 있겠느냐. 생긴다면 그것은 즐거운 통각[樂痛]이겠느냐. 괴로운 통각[苦痛]이겠느냐. 불고불락의 통각[不苦不樂痛]이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존재[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통(痛)의 인연으로 경촉(更觸)이 있고, 경촉(更觸)의 인연으로 아난아, 다시 통(痛)이 있느니라.[경촉(更觸)에 세 통[三痛]이 있다는 것을, 아난을 불러 거듭 맺어 보이시니, 지난날의 전도상[於比倒相]을 분명하게 맺어 말씀해 주셨다.]만일 어떤 이가 묻되 무엇인가의 인연이 있어 경촉(更觸)이 생기는가 하거든, ‘있다.’고 대답하라. 어떤 것이 경촉의 인연인가 하거든 명자(名字)가 그 인연이라 하라. 이로써 아난아, 분명히 알라. 명자의 인연을 좇음으로 인하여 경촉이 있느니라.[경촉(更觸)의 근본은 의당 육입(六入)이어야 하거늘 지금 명자(名字)라 하신 까닭은 육입(六入) 그대로가 육경(六更)으로 나타났고, 육경 그대로가 육정(六情)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명색(名色)에서 나왔다고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혹은 출경(出經 : 역경)할 때에 순서를 잃었을 것도 같다.]만일 곳곳마다[從所處]의 유정[有]이 곳곳마다에서 응하여 누리[應受]면 명신취(名身聚)가 이루어지느니라.[문구가 도치[句倒]되었으니, 간곳마다[在所處]에 있는 네 가지 몸[四身]이라 해야 한다. 간곳마다[所處]라 함은 곧 삼유(三有:三界)이다. 머지않아 무색계[無色]의 법을 말씀하시려고 응하여 누림[應受]과 유(有)를 말씀하셨으니, 누림[受]이 있고, 유(有)가 있으면 곧 명색(名色)이라 이름한다.]
아난아, 만일 곳곳마다의 유(有)가 곳곳마다에서 응하여 누릴 수[應受]가 없어도 명자(名字)가 있을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어떤 이가 수(受)와 유(有)가 모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어찌 경촉(更觸)이 명자(名字)를 인하여 생기는 일이 있겠는가.]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곳곳마다의 유(有)가 곳곳마다에서 응하여 누림[應受]이 없고, 명신(名身)이 있을 수 없어도 상대하여 경촉(更觸)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반복해서 밝히셨으니, 위 구절에는 ‘이르시기를 어찌 경촉(更觸)이 명자(名字)를 인해서 생기는 일이 있겠느냐.’ 하셨고, 여기서는 이르시기를 ‘어찌 명자가 경촉에게 인(因)이 되어주는 일이 있겠느냐 .’하셨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도 아난아, 명자(名字)와 그리고 색신(色身)이 없어도 경촉[更]이 있을 수 있겠느냐. 또한 그를 좇아 생길 경촉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위 세 대목에서는 반문(反問)하시고, 이 한 물음에서는 ‘어디에도 명색(名色)이 없거늘 경촉[更]이 어디로 좇아 생기겠느냐.’ 하셨으니, 대체로 천축의 말[天竺言]이 원래 이렇게 순박[質]한지라 지나치게 상세하다고 탓하지 말라.]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출발점[發]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因緣)으로 삼아, 경촉(更觸)으로부터 명자(名字)가 생기게 되었거니와 명자의 인연으로, 아난아, 다시 경촉이 있느니라.[위 여러 곳에서 처음에는 ‘이 인연으로 이것이 있다[是因緣是有].’ 하시고, 다음에는 ‘이것이 없으면 취할 것도 없다[無是則無取].’ 하시고, 뒤에는 ‘찾아 떠나고 익힌 인연[發習因緣]이라.’ 하신 까닭은 바로 위 구절의 ‘이것을 좇아 저것이 있다[從是有是].’ 하신 말씀을 성립(成立)시키기 위했기 때문에 문세(文勢)가 모두 이렇다.]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묻되 명자(名字)의 인연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있다 하라. 어떤 것이 명자의 인연인가 하거든 대답하되 식(識)의 인연으로 있다 하라. 이런 인연으로, 아난아, 분명히 알라. 식의 인연으로 명자가 있느니라.[중음(中陰)의 음식(淫識)이 태(胎)에 들면 바로 오음(五陰)이 생긴다.]
아난아, 만일 식(識)이 어머니의 배에 들지 못하더라도 명색(名色)이 정(精)을 따라 머물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가령 중음(中陰)의 음식(淫識)이 없더라도 정(精)이 홀로 가서 태(胎)에 의지해 머물러서 명색(名色)이 이루어질 수가 있겠느냐 하셨다. 명색 이후로 유(有)까지는 중세(中世)요, 식(識) 이전은 전세(前世)니, 삼세(三世)에 걸쳐 십이지(十二支)가 이루어진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식(識)이 어머니의 배에 들었으나 머무르지 못하더라도 명자(名字)가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아난이 여쭙되 모르겠사옵니다[不識] 하였다.아난아, 만일 본래 남아(男兒)였거나, 또는 여아(女兒)였다가 어느덧 무너졌거나 죽어서 형체가 없어졌더라도 명자(名字)가 자라나서 할 일을 다 할 수 있겠느냐. 아난이 여쭙되 없사옵니다.”하였다.[만일 중음(中陰)이 정(精)을 따라 태(胎)에 들어갔더라도 한 두 이레 만에 죽었다면 어찌 이 몸[身]이 있을 수 있겠느냐. 혹 남녀의 근[性根]이나 목숨[命根]이 이루어졌더라도 한 순간 떨어져서 태(胎)가 상했다면 어찌 오음의 몸[五陰身]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하셨다. 모태(母胎)에 드는 瞬間을 음식(淫識)이라 하고, 한두 이레[一二七日]를 지나서 남녀의 근(根)이 나누어지면 이때부터를 명자(名字)가 形成된다고 한다.]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존재[有]로 삼고, 시작[起]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명자(名字)는 식(識)을 좇아 생기고, 식의 인연으로 아난아, 다시 명자가 있느니라.[매양, 결구(結句)에 이르러 거듭 첩[輒重]하신 까닭은 명색(名色)에 의하여 식(識)이 생기고, 식(識)을 연(緣)하여 명색(名色)이 생긴다는 것을 곱씹어 말씀하시기 위함이다.]아난아, 누군가가 묻되 식(識)의 인연(因緣)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있다 하라. 무슨 인연으로 식이 있는가 하거든 명자(名字)의 인연으로 식이 있다 하라. 아난아, 이러한 인연으로 분명히 알라. 명자의 인연으로 식이 있느니라.[식지(識支 : 惟識)의 근본[本]을 밝힌 것이다. 식지의 근본은 의당 행지(行支)이어야 하거늘 지금 명자(名字)라 한 까닭은, 오대(五大)를 식(識)이라 하고, 육대(六大)를 어리석음[癡]이라 하는데 육대(六大)의 어리석은 마음[癡心]으로 음행(淫行)을 행(行)하면 음행하는 동안의 심식(心識)이 모두가 육대(六大)에서 나왔기 때문에 명자(名字)라 하느니라.]아난아, 만일 식(識)에 명자(名字)가 머무르지 못하거나 식에 머물렀더라도 무럭무럭 자라지도 못했어도 능히 생⋅노⋅사 등의 괴로운 습[苦習]을 이룰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문장을 살피건대 총명한 또래[上乘]의 망식(望識)이 태(胎)에 들어 명자(名字)의 지위[身]를 차지한지 혹은 칠일, 혹은 삼칠일 만에 근(根)이 이루어지자 모태(母胎)가 손상되었더라도 여전히 자라나서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만일 그렇더라도 위 말씀들을 완벽하게 끝낸 것은 아니다. 또 여기서 ‘명자가 없다’[無名字]한 것은 죽었다[無常]는 말이지, 고제(苦諦)가 다했다는 말씀은 아니다. 지금 행(行)이 빠졌고, 문장 또한 어지러우니, 아마도 경을 번역[出經]할 때에 교정[皮缺]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런대로 회통(會通)한다면 어리석음[癡]이 없어지면 망행(望行)이나 망식(望識)도 없어진다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대저 모든 어두움[萬冥]은 어리석음에서 생기고, 모든 밝음[萬照]은 지혜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이 경은 어리석음으로 근본을 삼으시고, 지혜[諦]로써 대안[對案]을 삼으셨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태어남[致]으로 삼고,[치(致)는 태어남[生]이니, 육대(六大)로부터 망식(望識)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망식(望識)은 육대(六大)로 이루어졌다.] 이를 습(習)으로 삼고,[치(癡)를 훈습하여 식(識)을 이룬다.] 이를 인과 연으로 삼아,[어리석음을 인하여 식의 연[識緣]이 생긴다. 위의 스무 가지 사안[二十事]에서 열여덟 가지 사안[十八]이 모두 그렇다.] 식(識) 때문에 명자(名字)가 있고, 명자의 인연으로 다시 식이 있느니라.[열두 가지 사안[十二事]이 여기에서 끝났다.]그러하니라. 식(識)의 인연으로 명자(名字)가 있고, 명자의 인연으로 식이 있거니와 여기서 모두 그치노니, 명자의 풀이[說名]도 여기서 그치고, 대답하게 함[對]도 여기서 그치노라.
다툼의 싹수[諍本]가 나타나거든 지혜로운 이를 좇을지언정 받아들이지 말라.[명자(名字)의 풀이를 반복하시고는 맺으시기를 여기서 그치라[止是] 하신 까닭은 열두 가지 사안[十二事]의 풀이가 이 명자(名字)를 설하신 곳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대답도 여기서 그치라[對止是] 하심은 위 여러 곳에서 이르시기를 만일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 하셨던 일들이다. 다툼의 근본[諍本]이 엿보이다 함은 세 가지 삿된 소견[三耶見]이니, 삿된 소견에 떨어지면 정관(正觀)을 잃기 때문이다. 정관이란 네 가지 지혜[四慧]이다. 현(現)은 현(見), 즉 “엿보이다.”로 고쳐야 한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다툼의 근본[諍本]이 보이거든 지혜로운 이를 좇을지언정 받아들이지 말라 하셨다.]아난아, 몇 가지 인연으로 통(痛)을 계교하여 신(身)이라고 여기느냐. 아난이 여쭈었다. 이 법은 본래 부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이 법은 정히 본래의 부처님이시옵기에 근본이신 부처님께 스스로 귀의하오니,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 설해 주시와 저희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그 말씀을 분명히 이해[解利]하게 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아난아, 착하고도 착하도다.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현자(賢者) 아난이 화답하고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부처님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혹 어떤 이는 통(痛)을 신(身)이라 여기고,[세 경[三更 : 三觸]을 잃을까 근심하다가 어리석게도 신(身)이라고 여기는 허물에 빠졌다.] 혹, 어떤 이는 통(痛)을 신(身)이라 계교하지 않고, 다만 신(身)의 경법(更法)과 통법(痛法)만으로써 신(身)이라 여기며,[단위(但爲) 이상은 통(痛)이 없다고 하셨다. 여기서 신경통법(身更痛法)이라 한 것이 누분포(漏分布)에서 삼통(三痛)은 신경지(身更知)라 하신 것과 같다. 위에서는 삼통 모두가 경지(更知)한다 했으니, 신경(身更)이 다르다.]혹 어떤 이는 신(身)이 곧 통(痛)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그렇게 보지 않고, 또한 통법(痛法)도 아니니, 통법을 신이라고 계교하지도 않고, 다만 신만으로써 신이라 여기느니라.[단위(但爲)이상은 亦是 위 두 가지 사안[事]이 없다고 하셨다. 견(見)은 뒤의 해석(解釋章)에는 깨닫지 못하다[不覺]로 되었고, 뒤의 세 가지 사안[三事]을 묻고 대답하실 때에는 또 보다[見也]로 되었으니, 깨닫다[覺]와 보다[見]는 뜻은 같지만 쓰임새[有爲]는 다르다. 불(不)은 그렇게 알지 않았다는 뜻이니, 바르게 깨달았다는 말이다. 『누분포경(漏分布經)』에 이르시기를 세 통[三痛]은 마음[心]과 경(更)과 지(知)라 하신 것과 그 사안이 비슷하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의당 말하기를 세 통[三痛]의 각지(覺知)가 신(身)을 말미암아 생긴다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말하기를 세 통[三痛]의 경촉(更觸)이 신(身)을 말미암아 생긴다 하신 것은 여섯 감각[六覺]과 여섯 경촉[六更]의 사례이다. 이 아래에도 종종 세 통의 병폐[三痛病]를 말씀하셨으나 그 문장이 빠지고, 뒤섞였으니, 지혜가 얕은 이들이 이 세 가지 사안의 중복(重複)된 논리를 차례대로 해설[解]하기는 어려울 것이다.]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가 통(痛)을 계교하여 신(身)이라 여긴다하거든,[통(痛)을 말미암아 식신[身]을 찾는 공부니, 이는 뒤 도혜장(道慧章)의 통을 푸는 논리[解痛文]이다. 그러나 그 차례를 거슬러 꾸미면 그것은 곧 통병(痛病)이 된다.] 이렇게 말하라.[이 문장의 뜻은 위의 痛을 계교하여 身이라고 여기는 이[計痛爲身者]를 집착한 사람으로 가정[辟:假定]한 것이다. 아래 색(色)을 거듭 풀이하는 장[色重解章]에서는 빈주(賓主)의 격식, 즉 문답의 형식을 쓰지 않았다.]현자(賢者)여, 이 통(痛)에는 세 또래[三輩]가 있나니, 낙통(樂痛)과 고통(苦痛)과 불고불낙통(不苦不樂痛)이다. 현자여, 그대는 이 세 가지 통에서 어느 통을 신(身)이라 여기는가 하라.아난아, 낙통(樂痛)이요 할 때에는 이때에 두 통[二痛]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니, 고(苦)와 불고불낙(不苦不樂)이니라. 아난아, 이때엔 다만 낙경(樂更)뿐이려니와 낙통(樂痛)은 항상하지 않고, 괴롭고, 사라지는 법이니라. 아난아, 낙통이 이미 사라져서 신(身)을 떠난 뒤에는 신이라는 계교조차 필요치 않느니라.[장차 몸 없는 도리[無身]를 밝히시려고, 짐짓 이르시기를 통(痛)은 셋이로되 신(身)은 하나뿐이니, 어느 것으로 신이라 하겠느냐 하셨다. 낙통(樂痛)이 신이요 한다면 바야흐로 낙경(樂境)을 즐길 때엔 고(苦)와 불락불고(不樂不苦)는 없으리라. 痛이 셋이어야 하거늘 지금에는 樂痛 하나뿐이라 하니 身 아님[非身]이 더욱 분명하다. 또 흐느껴 우는 이[熙譃]로 하여금 영원함[常]을 관찰(觀察)케 하고, 썩은 시신(屍身)을 진리[諦]로써 관하게 하니, 신(身) 아님이 더욱 분명하다.]분명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때에 괴로운 통(痛)의 편(便)이 되면 두 통[兩痛]은 이미 사라졌으리니, 즐거움과 또한 괴로움뿐이니라. 이때엔 다만 괴로운 경촉(更觸)이 괴로움을 느낌[痛]뿐이거니와 아난아, 이 느낌은 항상치 않고, 괴롭고, 다함이 있는 법이니라. 아난아, 괴로운 느낌[苦痛]이 다한 뒤에는 신(身)이 더 이상 경촉해서 알지[更知] 못하느니라.아난아, 이때에[낙통(樂痛)과 이론이 같으므로 달리 풀이하지 않는다. 이 대목[此中]의 낙역고(樂亦苦)는 고(苦) 위에 세 글자[三個字]가 빠졌으니, 의당 낙역불락불고(樂亦不樂不苦)라 해야 하고, 편자(便字)는 문맥(文脈)에 따라 경(更)으로 보아야 한다.] 고(苦)도 아니며 낙(樂)도 아닌지라. 어떠한 통(痛)도 경촉(更觸)하지 않는다. 이때에 두 통[二痛]은 이미 멸했으니, 통과 그리고 괴로움이리라. 이때엔 다만 고도 낙도 아닌 경촉[不苦不樂更]만이 통수(痛受)하려니와 아난아, 불고불락의 통법(痛法)이란 항상치 않고, 괴롭고, 다함이 있는 법이니라. 아난아, 통법이 다한 뒤에는 신(身)이라 할 것도 없거늘 공연한 계교(計較)만 있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역시 위 두 이치[二義]와 같되 아래의 불자(不字)는 군 것[長]이다. 중간의 통역고(痛亦苦)는 낙역고(樂亦苦),즉 즐거움 또한 고(苦)라 해야 한다. 지나치게 즐거워하지 않고,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않으면 중품중(中品中)의 수행인(修行人)은 된다.] 무상법[非常法]인 통(痛)을 신(身)으로 보리라고 계교하며,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항상, 세 통[三痛]을 관찰하여 신(身)이라는 견해를 계교한다.]낙통과 고통이 모두 사라진 것[放散樂苦痛]으로써 자신의 신[識身]이라고 계교하거니와, 이러한 인연으로 아난아, 통(痛 : 覺)으로써 신(身)이라고 계교하거나 신(身)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하느니라.[밝은 지혜로 관찰하는 힘을 얻으면 세 통[三痛]과 모두 사라진 방산(放散)의 인연이 영원히 멈춰서 통을 신(身)이라고 여기는 생각이 영원히 없어진다.]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통(痛)을 신(身)이라고 계교하지 않고, 다만 경법(更法)과 통법(痛法)만으로 신(身)이라 여긴다 하거든,[단위(但爲) 이상은 통(痛)이 없다고 칭(稱)하셨다. 단운신경통(但云身更痛)은 신(身)이 세 통[三痛]에 두루하면서 신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니, 『누분포경(漏分布經)』에 삼통신경지(三痛身更知)라 하신 것이 곧 이것이다.]얼른 대답하되 현자(賢者)여, 만일, 통(痛)이 경촉(更觸)하는 일이 없다면 또한 경촉(更觸)할 대상을 볼 수도 없을 것이거늘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라.[위에서 경(更)과 통(痛)으로 신(身)이라고 계교할 때에는 부처님께서 분부하시기를 “그대들이여 ‘통(痛)으로도 신(身)이라고 계교할 수 없거늘 어떻게 신의 경촉[身更]으로 신을 닦을 수(신이라 여길 수) 있겠는가.’ 하라.” 하셨고, 위에서 통(痛)과 경(更)이 신(身)이라고 칭(稱)해야 할 자리에서는 도리어 ‘경법(身更法)이라’. 하셨고, 신경법(身更法)이라 해야 할 자리에는 경(更)이 생략되었고. 두 가지로는 볼 수 없을[二不見] 때에는 ‘완전히 단멸(斷滅)인 것 같다[似盡滅].’ 하셨고. 누군가가 설문(設問)을 하거든 “신(身)이라고 계교할 수도 없거늘 어찌 이 법이 경촉(更觸)할 수 있겠느냐. 하라” 하셨다.]아난아, 이때에 어떤 비구가 생각하기를 통은 신(身)이 아니라고 여기고, 신이 아니라고 계하면서도 법(法)을 경(更)하거나 통(痛)할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미 통(痛)과 경(更)이 없으면 신(身)을 닦을 연(緣)이 없다고 대답하라 하시더니, 이제는 그것으로 아난에게 따져물으셨다. 불통위견계(不痛爲見計), 즉 통(痛)으로써 신(身)이라고 보거나 계교하지 않는다 함은 제이가(第二家)의 신(身)ㆍ경(更)ㆍ통(痛)에는 제일가(第一家)의 통(痛)으로 신이라고 계교한 것이 없다는 말씀이니, 둘과 셋에 모두 없으면 항상치 않은 법[非常]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곧장 어찌[寧應]라 하신 까닭은 이 두 가지 사안이 모두 위 세 통[三痛]에 의했기 때문에 ‘어찌.’라 하였으니, 어찌[寧應]란 두 통[兩痛]이 이미 사라졌는데 어떻게 신(身)만이 홀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시다. 우아한 진리[雅理]는 겹겹이 나열되었으니, 그 이론[義]이 홀로 성립되지는 않는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 인연으로 어느 누구라도 통(痛)은 신(身)이라고 계교하지 말고, 다만 경(更)과 통(痛)만으로 신이라고 여겨야 하느니라.[단위(但爲) 이상은 역시 칭(稱)이요, 반칭(反稱)은 결구(結句)이다.]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통(痛)을 신(身)이라 계교하지 않고, 또한 통을 신이 아니라고 보지도 않으며,[장차 셋째[第三]를 말씀하시기 위하여 첫째 것[第一]이 없다고 하셨다.] 신(身)의 경통(更痛)도 아니며, 또한 통법(痛法)으로도 신이라고 여기거나 계교하지도 않고,[둘째 것[第二]도 없다 하셨다.] 다만 계교하기를 나는 각지(覺知)하지 않는 신[是身]으로써 신[是身])이라 여긴다 하거든[각(覺)은 보다[見]의 뜻이니, 세 통[三痛]을 신(身)이라고 여기는 주체를 일러서 각지하지 않는 각[不覺覺]이라 한다.] 얼른 대답하되 현자(賢者)들이여, 스스로를 신(身)이라 계교하고,[각지(覺知)뿐이라고 계교하니, 각지[覺]가 곧 신(身)이라는 것이다.] 경(更)과 통(痛)이 없다면,[문구가 도치[句倒]되었으니, 둘째 것[第二]이 없다.]어떻게 신(身)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라.[이 말씀에는 스스로 각지하는 신[自覺身]으로써 신이라 여김[爲身]과 경과 통의 법이 없는 법[不更痛法]으로써 신이라 여김[爲身]과 또 통각이 없는 것不痛[]으로써 신이라 여김[計身]등 세 종류의 명칭이 병렬(竝列)되었거늘 어찌 각지하는 신[覺身] 하나만으로써 身이라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위 세 통[三痛]에서 어느 통(痛)을 신(身)이라 하겠는가. 만일 어느 하나라면 나머지 둘은 사라졌을 것이거늘 어떻게 한꺼번에 다 열거할[並稱] 수 있겠는가 하라 하셨다.]이때에 어떤 비구가 통(痛)으로써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경과 통[更痛]으로도 신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경과 통의 법[更痛法]으로도 신이라고 여기거나 보지 않고,[둘이 없으니, 첫째[第一]와 둘째[第二]이다.] 다만 각지하지 않는 것만을 신(身)이라 하거니와 이렇게 신을 관하는 것이 신에 부합될 수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말하자면, 세 가지 사안[三事]이 모두 나열[並列]되어야 하거늘 어찌 신(身)만이 홀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셨다. 위에서는 설문(設問)에 대답케 하시더니, 여기서는 아난에게 직접 물으셨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러한 인연으로, 통 없는 [無有痛]것으로써 신(身)이라고 여기지도 말고, 또한 신과 경과 통[身更痛]으로써 신이라고 여기지도 말고, 또한 신과 경과 통의 법[身更痛法]으로써 신이라고 여기지도 말고, 또한 각지하지 않는 실체[不覺身]로써 신이라고 여기지도 말지니라.
그러하니라. 아난아, 모든 통을 신이라고 여긴 뒤에 통[痛見]을 신이라고 볼지니라.[사안으로 보아 어디에도 신(身)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아난아, 몇 가지 인연으로,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통(痛)으로써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보지 않는 실체[不見身]로써 신(身)이라고 여기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법은 본래 부처님으로부터 나왔고, 분부[敎令] 역시 부처님에게서 나오셨으니,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 설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이 말씀을 받자옵고 잘 이해[解利]할 수 있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아난아, 잘 듣고, 잘 받아들이고, 자세히 받아들이고, 거듭 잘 받아들이고, 기억하라. 이 법을 말해 주리라.부처님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비구는 통(痛)을 신(身)이라고 작심하지도 않고, 또한 통을 신이라고 보지도 않으며,[수행자가 네 가지가 무상함을 아는 지혜[四非常解]와 진제의 지혜[盡諦慧]를 얻으면 세 가지 통[三痛]에 신(身)이 있다고 계교하지 않는다. 이미 세 가지 통(痛)을 계교하지 않게 되면 통을 신이라고 여기는 견해에 맛들여서 몸이란 생각[身想]에 집착되지 않는다.]또한 경촉[身更]으로 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경과 통법[身痛法)으로 신이라고 계교하지 않으며,[통(痛)과 법(法)이 나뉘어졌는지라. 통과 법은 의당 합쳐야 한다. 또한 위의 삼통(三痛)은 단순히 신경지(身更知)였으나 심경지(心更知)로써 대조[望]하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견의 신[身見]으로써 신(身)이라고 여기지도 않으며,[견(見)은 각(覺)의 뜻이니, 위에서는 신경(身更)이라 하셨는데 지금은 신견 즉 신각(身覺)이라 하신 점이 다를 뿐이다.] 또 어떤 이는 신(身)이 있다고 해도 좇지 않고, 또한 견(見)이 곧 신이라 해도 좇지 않느니라.이미 이렇게 보면 다시는 세간의 업을 짓지 않고, 다시는 세간의 보를 받지 않게 되느니라.[신(身)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위에서 통(痛)에 신이 있다고 계교하였거니와 세 가지 사안[三事]에서 두 가지를 더듬어보았는데 이미 절반이상이 없기 때문에 다시 세간에 이르지 않는다. 치(致)는 이르다[至]의 뜻이다.]이미 세간의 보를 받아 누리지 않게 되었다면 더 이상 근심할 일이 없고, 이미 근심할 일이 없다면 문득 걸림 없이 세상을 거닐면서 생⋅노⋅병⋅사가 이미 다했음과 근심과 걱정이 이미 끝났음을 스스로 알게 되느니라.[세 통[三痛]의 신(身)이 다하면, 다시는 열한 번째 고통도 받지 않게 된다.]수행이 이미 만족해지고, 해야 할 일을 이미 끝내고는 다시 이 세간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불계통위신(不計痛爲身 : 痛을 身이라고 계교하지 않는 공부)을 자신의 방편으로 삼으리라하고, 또한 보지 않는 것[不見]으로써 신이라 여기리라하느니라.[제(齊)는 이르다[至]의 뜻이니, 이 신(身)의 최후, 마지막 몸[竟身]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몸이 여기서 끝나, 다시는 경촉(更觸)하는 몸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不還世間] 하셨다.]아난아, 몇 가지 인연으로,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색(色)을 신(身)이라 여기느냐. 아난이 여쭈었다. 이 법은 본래 부처님에게서 나왔고, 분부[敎令] 역시 부처님에게서 나오셨으니,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 설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잘 받자옵고 그 뜻을 잘 이해[解利]할 수 있겠나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좋다. 아난아, 잘 듣고, 잘 받아들이고, 자세히 받아들이고, 거듭 잘 받아들이고, 기억하라. 이 법을 말해 주리라.부처님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행[少色行]으로써 신(身)이라 여기며,[신(身)을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그 대견한 일[慇勤]이 아니겠는가.]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행[少色行]을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둘째 수승함[二勝]에 오르기 위해 첫째 것[第一]을 없다고 하셨다.] 또한 색무유량행(色無有量行)을 신(身)이라 여기고, 다만 소불색행(少不色行)을 신이라고 여기며, [단위이자(但爲二字)는 의당 색무량(色無量) 위로 옮겨야 하고, 불위소불색(不爲少不色)은 중등(重騰 : 衍)이다. 무량(無量)이라 함은 내외의 색[內外色]을 탐냄이 간절하다는 뜻이다.]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소색(少色)도 아니요, 무유량색(無有量色)도 아니고,[제일(第一)과 제이(第二)가 없어지고 제삼(第三)에 이른다는 구절이 빠졌다.] 또한 불색소행(不色少行)을 신(身)이라 여기며,[불색소(不色小)는 제일가(第一家)의 주장을 뒤집으신 것이다. 안으로 조그만치의 탐냄도 없으면 밖으로 조금쯤은 드러난다.]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소행[少色]이나, 또는 색무유량[無有量色行]이나, 또는 불색소행(無有少色行)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위 세 가지가 모두 없다.] 다만 불색무유량행(不色無有量行)으로써 신(身)이라 여기느니라.[둘째 것[第二]을 뒤집은 것이다. 안[內]으로 불색무유량(不色無有量)이 되면 겉모습이 근엄해[慇勤]진다.]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行]으로써 신(身)이라 여기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在]로 삼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行]으로 신이라 여기고는, 자신이 죽어 뭉그러진 뒤에 다시 자신의 모습과 형상을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상대[不爲是對]하지도 않으리라 하고, 수행으로 상대함[對]도 그렇게 할 것이며, 성취함[致]도 그렇게 하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현재(現在)라 함은 곧 소색행(少色行)을 탐하는 과정이다. 소색행을 탐내면서 수행을 시작한 이는 몸[身]이 비록 죽어서 없어졌더라도 몸을 지속시키려는 생각이 그림자[想像]처럼 남아있나니, 어리석음에 얽매인 수행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무리들과 짝이 되어서 어리석음과 함께하거나 이 몸[身]의 요인을 만들어 되돌아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대하다[對] 함은 짝하다[匹也], 함께 하다[俱也]의 뜻이요, 제시(齊是)는 이르다[至]의 뜻이니, 죽어도 무상(無常)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말라는 것이다.]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色少行]으로써 신(身)이라 여기는 공부를 스스로의 방편(方便)으로 삼아 그것을 지으리라고 계교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色少行)으로 신(身)이라고 여기는 공부로 스스로의 방편으로 삼으리라고 계교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행으로 신이라고 여기리라하여 마침내 결(結)과 사(使)를 이루느니라.[스스로 방편을 계교하다[自計方便] 함은 방편으로 색(色)을 탐하여 목숨[命]이 다할 때까지 끊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방어[坊閑]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므로 身結과 身使가 이루어졌다. 지난날 스스로 방편을 계교할 때에 처리[過下]를 했더라면 오늘날 어찌 한 가닥의 길[一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여기는 병통[病]을 말씀하시는 대목인데 도리어 행도(行道)라 하신 까닭은 도(道)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行]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다만 색의 무유량[色無有量]만을 신이라 여기리라고 계교하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是]를 삼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을 신(身)이라고 계교하고는, 자신이 죽어 뭉그러진 뒤에 다시 자신의 모습과 형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상대[不爲是對]하지도 않고, 수행으로 상대함[對]도 그렇게 하고, 성취함[致]도 그렇게 하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자기의 신(身)은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이어야 한다고 계교하고는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을 신(身)이라 여기리라 하다가 사(使)와 결(結)을 맺느니라.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이나 또는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 계교하지 않고, 다만 소색(少色)으로써 신이라고 계교하리라 하여 현재의 자리[現在]로 여기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의 소량[不色少]을 신(身)이라 여기고는, 자신이 죽어 뭉그러진 뒤에 자신의 모습과 형상을 다시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상대[不爲是對]하지도 않으리라 하고, 수행으로 상대함[行對]도 그렇게 할 것이며, 성취함[致]도 그렇게 하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소량[少]으로 신(身)을 이루리라고 스스로 계교하고는,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소량[少]으로 (身이라) 호리라 하여, 사(使)와 결(結)을 이루느니라.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色少]이나 또는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이나 또는 무유색의 소량[無有色少]으로 신이라 여기지 않고, 오직 무유색의 무유량[無有色無有量]으로 신[行身]을 내릴 곳으로 여기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在]를 삼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色少量]이나, 또한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이나, 또한 불색의 소량[無有色少]으로 신이라 여기지 않고, 오직 불색[無有色]의 무유량[無有量]으로써 태어날만한 곳이라는 계교를 하다가 죽어 뭉그러졌다가 다시 자신의 모습과 형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상대[對]하지도 않을 것이며, 수행으로 상대함[行對]도 그렇게 할 것이며, 성취함[致]도 그렇게 하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스스로 계교하여 신(身)을 이루리라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불색(不色 : 不色無有量)으로 (신을 이루리라) 하여, 사(使)와 결(結)을 이루기에 이르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스스로가 신(身)을 이루리라고 계교하여 신을 이루느니라.
아난아, 몇 가지 인연으로,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色不行]으로 신(身)이라 여기느냐. 아난이 여쭈었다. 이 법은 본래 부처님에게서 나왔고, 분부[敎令] 역시 부처님에게서 나오셨으니,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 설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잘 받자옵고 그 뜻을 잘 이해[解利]할 수 있겠나이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아난아, 잘 듣고, 잘 받아들이고, 자세히 받아들이고, 거듭 잘 받아들이고 기억하라. 이 법을 말해 주리라. 현자(賢者) 아난이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부처님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色]으로써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사대(四大)에 신[身相]이 있다는 것을 통틀어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색을 신(身)이라고 계교하지도 않으며,[소색(少色)이라 해야 할 것인데 소(少)자가 빠졌다. 말하자면 도를 아는 행자는 조그만치의 색(色)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서 신(身)이라는 집착에 걸리지 않는다.] 또한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도 (신이라 여기지) 않으며,[양이 많으면 사대[四大]에 집착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많은 색[多色] 탐내는 마음을 쉬라 하셨다.]또한 색의 소량[色少]으로도 (신이라 여기지) 않으며,[‘위(爲)’자 밑에 ‘무(無)’자가 빠졌으니, 무색 의소[無色少]는 첫째 것[第121-15항]을 뒤집었으며, 또한 그 결(結)을 쉬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십보경(十報經)에 이르시기를 내심(內心)에 소량의 색[少色]도 없으면 밖으로 보기에 조금 더 단정(端正)해진다 하였다.] 또한 색의 무유량(無有量)으로 신(身)이라고 계교하지 않느니라.[“위(爲)”자 밑에 역시 “불(不)”자가 빠졌으니, 이는 둘째 것[第二]을 뒤집는 뜻이며, 또한 행제(行諦)가 끝났다는 말씀이다. 『십보경(十報經)』에 이르시기를 안으로 단정한 색[端正色]을 생각하거나 찾아가지 않으면 겉으로 색을 보아도 단정한 것을 찾아가지 않게 된다 하셨다.]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행[色少行]으로써 신(身)이라고 여기지 않고, 또한 신이라고 계교하지도 않으리라 하여,[도(道)와 같이 도를 행하는 것이 행제(行諦)이다. 이 지혜를 얻은 이는 조그만치라도 사대(四大)의 색(色)에 집착할 생각을 잊었다.]
현재의 자리[現是]로 삼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으로써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신을 내려놓을 곳[墮是身]이라고도 여기지 않다가 자신이 죽어 뭉그러진 뒤에 다시 이 신의 형상이나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현시(現是)라 함은, 지금 당장이라는 뜻이니, 지금 소량의 색[少色]을 탐내지 않는 때이다. 신(身)이 무상하게 끝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 금생의 몸으로 색에 집착할 생각이 영원히 끊어진다.] 그것을 상대[對]하지도 않고, 수행으로써 대함도 이와 같이 하리니, 이들은 원래 없는 것이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대(對)하다 함은 지금의 몸과 내생의 몸이니, 몸[身]과 의지할 곳[猗]이 없어서 이 하나에 이르렀다.]아난아,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을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신이라고 계교하지도 않으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色少]을 신(身)이라고 여기지 않으리라 하여 사(使)와 결(結)을 맺지 않느니라.[말하자면, 신 없는 상[無身之相]에 이르면 신(身)을 탐하는 칠사(七使)와 구결(九結)이 모두 없어진다는 것이다.]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으며, 또한 색의 (무유량)을로 신이라고 단정하지도 않으리라 하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在是]를 삼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또한 신(身)이라고 계교하지도 않고는 자신이 죽어 뭉그러진 뒤에 자신의 형상이나 그림자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와 상대하지도 않으리니, 이러이러한 것들은 진정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써 신(身)이라 여기지도 않고, 또한 태어날 곳[墮身]이라고 계교하지도 않다가, 아난아, 분명히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고 여기지 않으리라 하여 사와 결[使結]을 이루지 않느니라.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불색의 소량[不色少]으로 써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태어날 곳[墮身]이라는 계교를 하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是]를 삼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의 소량행[不色少]을 신(身)이라 여기지도 않고, 또한 태어날만한 곳[墮身]이라는 계교도 하지 않다가 자신이 죽어 뭉그러져서 자신의 형상이나 그림자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와 상대하지도 않고, 생각하기를 이러이러한 것들은 진정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 하여 끝내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불색의 소량행[不色少]으로 신(身)이라 여기지도 않고, 또한 태어날만한 곳[墮身]이라는 계교도 하지 않으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불색의 소량행[不色少]으로 써 (신이라 여기지) 않으리라 하여, 사(使)와 결(結)을 이루지 않느니라.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무유량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여기에 태어나지도 않으리라 하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在是]를 삼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무유량(無有量)으로 신(身)이라 여기지도 않고, 또한 거기에 태어나서 신을 이루리라는 계교도 하지 않다가 자신이 죽어 무너져서 이 몸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하더라도 이 계교를 대하지 않으리니, 이런 것들은 원래 없는 것이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무유량[不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여기에 태어나리라는 계교도 하지 않으리라 하여, 끝내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무유량[不色無有量]으로 신이라고 여기는 행을 하지 않고, 또한 사(使)와 결(結)을 이루지도 않으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무유량[不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그것으로) 신(身)을 이루리라 하지 않고, 또한 거기에 태어나리라고 하지도 않느니라.아난아, 또한 일곱 곳[七處]이 있어서 식(識)이 머물게 하고, 또한 두 곳[二受行]이 있어서 지혜를 얻게 하느니라.[삼도(三道)는 욕계(欲界)를 벌려서 다섯으로 만들고, 삼계의 하늘은 합쳐서 하나로 했다. 구신지처(九神止處)는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는 나누고, 욕계(欲界)는 합쳐서 하나로 했다. 오도(五道)를 논(論)할 때에는 윤회(輪廻)에 끄달려서 고통 받는 것이 큰 손실(損失)이기 때문에 삼악도(三惡道)는 자세히 나누고, 하늘은 통틀어 하나로 했다. 구지(九止)를 설(說)하신 이유는 교학(敎學)을 펴고, 삼관(三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무리를 중심으로 논(論)했기 때문에 인간(人間)으로부터 시작하고, 삼고(三苦 : 三惡道)는 언급하지 않았다. 만일 하나의 수[一受]만을 연다면 정(精)과 조(粗)가 뒤섞여서 관법(觀法)의 차이가 없어진다. 이수(二受)는 모두가 원만필경[滿畢]의 지위이기 때문에 해(解)라는 칭호(稱號)를 붙였다.]어떤 유색중생[有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갖가지 몸[若干身]과 갖가지 생각[若干思想]을 이루면 인간[人]이나 하늘[天]의 또래이니, 이는 첫째, 식이 머무는 곳[第一識止處]이니라.
어떤 유색중생[有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동일한 몸[一身]과 갖가지 생각[若干思想]을 이루면 장수천(長壽天)이 본래 머물렀던 범천(梵天)이니, 이는 둘째, 식이 머무는 곳[第二識止處]이니라.어떤 유색중생[有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동일한 몸[一身]과 갖가지 생각[若干思想]을 이루면 명성천(明聲天)의 무리이니, 이는 셋째, 식이 머무는 곳[第三識止處]이니라.
어떤 유색중생[有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동일한 몸[一身]과 동일한 형상[一像]과 동일한 생각[思亦一]을 이루면 변정천(遍淨天)의 또래이니, 이는 넷째, 식이 머무는 곳[第四識止處]이니라.어떤 무색중생[不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색에 의지하던 생각[色想]에서 벗어나 많은 생각[多想]이 소멸하고, 끝없는 허공[無有量空]에 이르러 공의 지혜[空慧]로 선정[受意止]을 누리면 공혜행(空慧行)이니, 이는 다섯째, 식이 머무는 곳[第五識止處]이니라.
어떤 무색중생[不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공행(空行)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한량없는 식의 세계[無有量識]에 이르러 지혜로 누리는 선정[慧受意止]을 이루면 식혜천(識慧天)의 또래니, 이는 여섯째, 식이 머무는 곳[第六識止處]이니라.어떤 무색중생[不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식혜[識慧]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무유량불용의 세계[無有量不用]에 이르러 지혜로 누리는 선정[慧意受止]을 이루면 불용종수혜천(不用從受慧天 : 감각의 지혜마저 필요치 않은 하늘)의 또래니, 이는 일곱째 식이 머무는 곳[第七識止處]이니라.아난아, 어떤 것이 또한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두 곳[二受行從得解]인가.
어떤 이가 색계의 인연[有色因緣]으로 도를 행하되 더 이상 사(思)와 상(想)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 불사상천(不思想天)이니, 이는 첫째,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곳[一受行從得解 : 第一受解處]이니라.
어떤 이가 무색계의 인연[不色因緣]으로 도를 행하되 불용처(不用處)를 완전히 벗어나서 생각이 없으나 또한 생각이 없지 않은 선정[不思想亦有思想受行止]을 이루면 불사상역유사상천(不思想亦有思想天)의 또래니, 이는 둘째, 바른 공부[受行]로 지혜를 얻는 곳[二受行 從得解]이니라.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첫째 식지처(識止處)에서 색행(色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갖가지 몸[若干身]과 갖가지 생각[若干思想]을 이루면 이는 인간[人]의 또래이거나 또 다른 한 곳[亦一處]이라 하였거니와,[색(色)은 몸[身]이며, 소유하다[有]의 뜻이니, 욕계의 몸[欲之形]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색(色)이라 하고, 욕계(欲界)의 몸[身]을 의지해서 도제(道諦)를 행하기 때문에 행도(行道)라 한다. 욕계육천(欲界六天) 이하는 그 형색[形]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갖가지 [若干]라 하였고, 마음씨 또한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갖가지 생각[若干想]이라 하였다. 벽(辟)은‘가면’ 또는 ‘또래’의 뜻이다.]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거기가) 식지처(識止處)임을 이미 알고,[욕천(欲天)과 인(人)을 알았다는 것이다. 『음지입경(陰持入經)』에서는 신(身)으로써 근본을 삼았다.] 또한 이 식지처(識止處)가 습(習)으로 (생겼음을) 알며,[습(習)은 천상(天上)이나 인간(人間)들이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줄 아는 이는 지혜롭다.] 또한 결국에는 사라질 것[沒]임을 알며,[사라진다[沒] 함은 다하다[盡]의 뜻이니, 하늘로부터 인간[人身]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모든 것이 멸한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는 뜻이다. 씻은 듯[如篾]한 것을 다했다[盡]고 한다.] 또한 즐길 만한 곳임을 알며,[『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에 번뇌의 결(結)을 매(昧)라 하시고, 천상(天上)과 인간(人間)의 몸[身]을 탐낙(貪樂)하기 때문에 즐긴다[樂] 하시고, 그런 줄 아는 것을 다함[盡]이라 하셨다.]또한 고를 느끼게 하는 것[更苦]임을 알며,[천상에서 인간[人身]에 이르기까지 이것[之]을 말미암아 고(苦)를 받거니와 한결같이 괴롭다는 것을 알면 지혜롭다.] 또한 이에 따라 출요(出要)하되 진여에 따라야 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출요(出要)는 법구경[法句]에 이르시기를 요체[要]를 얻어 생사를 다함[得要生盡]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에 이르시기를 욕(欲)을 능히 다스리고[能治], 능히 버리고[能棄], 능히 건넌다[能度] 하셨다. 진제(盡諦)에 네 가지 사안[四事]이 있는데 벗어남[出要]이 그 하나[一]이다. 무릇 여섯 가지 사안[六事]에서 모두 알았다[知] 하셨으니, 도제(道諦)를 행하는 지혜요, 여섯 가지 사안에서 모두 이것[是]이라 하셨으니, 이것이란 곧 육천(六天) 이하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유정들이 몸과 마음[身識]을 기대는 곳이다. 『칠처삼관경』에 이르시기를 한결같이 모두가 오음(五陰)의 하나임을 알아야 하나니, 음(陰)마다에 육정(六情)이 있기 때문이요, 하나하나가 모두 음(陰)임을 알아야 하나니, 음(陰)에는 습(習)이 셋이요, 넷은 음(陰)이 다해서 도를 행하는 것이라 하셨다. 또 이르시기를, 색의 맛[色味]을 알고, 또한 색에서 벗어나는 길을 아는 것, 이것이 칠처(七處)라 하셨다. 삼관(三觀)이란, 신의 색[身色]을 관하고, 오음(五陰)을 관하고 육정(六情)을 관하는 것이다. 삼관은 칠처(七處)마다 첫 자리의 음(陰)과 입(入)이니, 말하자면 도제(道諦)와 진제(盡諦)와 고출요제(苦出要諦)로서 음(陰)과 입(入)과 그리고 낙(樂)에 가려진 번뇌를 관(觀)하라는 것이다.
『오음각개경(五陰殼蓋經)』에는 오음으로 다섯을 삼고, 습(習)과 다함[盡]으로 일곱을 삼고, 어두움에 처함[處昧]과 괴로움[苦]과 거기서 벗어나는 요체[出要]를 셋이라 한다 하셨으나, 문장을 보면 좀 다르지만 뜻은 대체로 같다. 『신삼경(身三經)』 중,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에만 도제(道諦)가 있고, 나머지 두 경에는 모두 칠사(七事)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행도(行道)라 했으니, 역시 도제(道諦)의 뜻이요, 모두에서 안다[知] 했으니, 안다는 것[知], 역시 도제(道諦)의 진리이다. 예컨대 지극하게 안다.[如至識知] 하셨고, 혹은 근본과 같이 알다[如本知] 하셨으니, 그 알았다[知]는 것이 도제의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알다[知]와 관하다[觀]는 그 정의(定義)가 같다. 구(九)는 구지(九支)니, 하늘의 몸[天身]으로 관행의 바탕[觀地]을 삼아, 하늘의 습[天之習]을 익힌다. 하늘의 몸[天之身]은 끝내 사라질 것임을 알고, 도를 행하여 하늘의 쾌락[天樂]에 맛들이[味樂]되 하늘 쾌락의 즐거움[天樂]에는 반드시 괴로움[苦]이 있음을 알고, 능히 하늘의 탐욕[天貪]을 끊으면 가위 살아나는 길[活道]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벗어나는 길목[出要]이라 하셨으니, 모두가 사제(四諦)의 관법(觀法)으로 구처(九處)를 관(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은미[微]하면서도 드러났고[顯], 간략[約]하면서도 구족하다 할 것이다. 『십보경(十報經)』은 음(陰)과 습(習)이 다하는 곳에서 끝났다.]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識止處)를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도를 행하는 지혜로운 이가 사성제의 관법[四諦觀]으로 인간의 몸[人身]을 관찰하고도 여전히 인간의 몸을 탐하여, 이 식지처[識止處]에 머무르기를 희망하거나 연연(戀戀)하는 일이 있겠느냐 하셨는데 대답하시기를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 하였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둘째 식지처(識止處)에서 색행(色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갖가지 몸[身]과 하나의 생각[一想]을 이루면, 이는 장수천(長壽天)이 본래 머물렀던[本第一在處], 범신천(梵身天)이라 하였거니와[비로소 초선천[一禪]에 올라 네 범천[四梵]에 태어나면 범소천(梵小天), 범무량천(梵無量天), 대범천(大梵天), 범보천(梵輔天)의 몸 모양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갖가지 몸[若干身]이라 하셨으니, 마치 인간들의 잘나고 못난 것과 같고, 마음이 순일(純一)하지 못하므로 한 생각이 아니라[非一想] 하셨다.]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이 식지처에서 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며, 또한 종당(終當)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며,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며, 또한 고(苦)를 느끼는 곳임을 알며,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도 분명하게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도를 행하던 이가 생각하기를 이 식지처(識止處)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셋째 식지처(識止處)에서 색행(色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하나의 몸[一身]과 갖가지 생각[若干想]을 이루면 이는 하늘의 무리인 명천(明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여기가 식지처(識止處)임을 이미 알고,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고, 또한 즐길 만 한 곳임을 알고, 또한 고(苦)를 느끼는 곳임을 알고,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도 분명히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그 수행자가 생각하기를 이 식지처(識止處)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선천(二禪天)으로 진입하는 행상(行相)이니, 안으로 염담(恬澹)한 덕을 길음으로 써 염지(念持)의 공이 쌓여서 이 사명천(四明天)에 태어나니, 몸의 표면에 광채가 찬란한 것은 대체로 같지만[大齊] 마음은 여전히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갖가지 생각[若干想]이라 하셨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넷째 식지처(識止處)에서 색행(色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하나의 몸[一像身]과 하나의 생각[一思想]을 이루면 이는 하늘의 무리인 변정(遍淨)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여기가 식지처(識止處)라는 것을 이미 알고, 또한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며,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며, 또한 즐길 만 한 곳임을 알며, 또한 고(苦)를 느끼게 하는 곳임을 알며,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도 분명히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도를 행하던 이가 이렇게 알면서도 생각하기를 이 식지처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물러야 할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는 제삼천(第三天)이니, 의당 정천천(淨天天)이라 해야 한다. 겉모습이 훤히 밝은 것이 네 하늘[四天]이 한결같고, 그 마음이 평온[恬豫]해서 항상 선정[禪思]에 노닐기 때문에 하나[一]라 했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다섯째 식지처(識止處)에서 무색[不色行 : 無色]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모든 색(色)에서 벗어나서 땅 같은 생각[地想]이 이미 사라지고, 끝없는 허공[無有量空]에서 공의 지혜[空慧]로 누리는 선정[受止]을 이루면 이는 하늘의 무리인 공혜천(空慧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이 식지처에서 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고,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고, 또한 이것이 고를 느끼게 하는 곳임을 알고,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을 알되 분명하게 알고서도, 아난아, 이때에 도를 행하던 이가 생각하기를 이 식지처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만한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땅[地]이라 함은 싫어하는 마음[恚心]과 없애려는 마음[滅心]이 땅 두께 같았다는 것인데 이제 그런 생각[想]이 사라지고, 구하려는 마음마저 끊어지니, 그대로가 한량없는 허공뿐이라는 것이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여섯째 식지처(識止處)에서 불색행(不色行 : 無色界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모든 공혜(空慧)를 지나 식무유량(識無有量)에 이르러 지혜로써 누리는 선정[受慧行止]을 이루면 이는 하늘의 무리인 식혜천(識慧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만일 이 식지처에서 도를 행하던 이가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며,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며,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며, 또한 이것이 고(苦)를 느끼게 하는 곳임을 알며,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도 분명히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물러야 할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공정(空定)과 식정(識定)을 마주 관찰하면 식과 공이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일곱째 식지처(識止處)에서 불색행(不色行 : 無色界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모든 식혜(識慧)를 지나 무유량불용(無有量不用)에 이르러 사수(捨受)로 누리는 선정[慧行]을 이루면 이는 불용수혜행천(不用受慧行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어떤 이가) 이 식지처(識止處)에서 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며,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며,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며, 또한 이것이 고를 느끼는 곳임을 알며,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도 알되 분명하게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識止處)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육신[色]을 싫어하여 (이 하늘에) 태어나려했었기에 (이 하늘에) 내태어나자마자 바로 (몸을) 버렸다. 종일토록 공부[觀]를 해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공부가 필요치 않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첫째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곳[第一受行從得解]에서 색의 인연[色因緣]으로 도를 행하여, 생각[想]도 없고, 느낌[受]도 없는 데 이르면 이는 하늘의 무리인 불사천(不思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여기가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곳임을 이미 알고, 또한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며,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며,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며, 또한 이것이 고를 느끼는 곳임을 알며, 또한 여기서 벗어날 길[出要]이 있음을 알되 분명히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들 수해처(受解處)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불사(不思)는 無結愛天이니, 네 아나함[四阿那含]의 넷째 하늘이다. 네 아나함[四阿那含]이 몸[身]을 사랑하여 제사선천(第四禪天)에 태어나니, 육증(六增)의 두 번째[第二]이다. 여기서부터 위로 네 하늘은 무루(無漏)의 제사선(第四禪)으로 국한[局]되었다. 선천(四禪天)의 여섯째 하늘을 애승(愛勝)이라 하는데 이는 무사천(無思天)과 같은 하늘에 있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둘째 바른 공부로 지혜[解]를 얻는 곳[第二 受行從得解]에서 불색의 인연[不色因緣]으로 도를 행하여 지혜를 쓰지 않는 경지[不用從慧]를 모두 지나, 생각이 없으나 생각을 여의지도 않은 경지[無有思想亦未離思想]에 도달하여 바른 선정[行止]을 누리면,[바야흐로 선정[定]을 누린다.] 또래로는 하늘의 무리인 생각이 없되 이해하는 하늘[無有思想解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이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곳[受行從得解]에서 도를 행여,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이미 알고,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고,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고, 또한 고를 느끼게 하는 곳임을 알고, 또한 여기서 벗어날 길[出要]이 있음도 알되 분명하게 알고서도, 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곳[受行從得解]을 구해야 할 곳이라고 여기며, 희망해야 할 곳이라고 여기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무상(無想), 즉 생각이 없다 함은 모든 법이 공(空)임을 알고 생각을 제어[制想]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상의 팔지(八止)도 모두 그렇게 알라. 이들 여덟 곳[八處]에서 습(習)을 알고, 이들 여덟 곳에서 다함[盡]을 알고, 이들 여덟 곳에서 즐거워 할 곳임[樂]을 알고, 이들 여덟 곳에서 괴로운 곳임[苦]을 알고, 이들 여덟 곳에서 벗어나는 길[要得出]이 있음을 아는 것이, 그 이론[義]이 같기 때문에 거듭 풀이하지 않았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고서도 말하기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다 하거니와, 만일 이런 결사(結使 : 惑)가 있는 이는 때로는 항상하다고도 하고, 때로는 항상하지 않다고도 하며,[바라문(婆羅門)들은 단멸(斷滅)을 항상함[常]이라고 본다.] 때로는 세간의 근본[本]이 있다고도 하고, 때로는 세간의 근본이 없다고도 하며,[근본[本]이란 요점[要]이니, 요점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한다.] 때로는 도(道)를 얻으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하고, 때로는 도를 얻으면 죽지 않는다고도 하며,[혹은 일곱 번 생사에 왕복하는 이[七返生死]를 보았기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하고, 혹은 니유선천(尼惟先天)에 이르는 이가 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한다.]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며,[혹은 세상을 건너갈 수 있다하고, 혹은 세상을 건너갈 수 없다한다.] 세상을 건넨다고도 하고, 죽는다고도 하여, 이로 인해 결(結)과 사(使)를 이루느니라.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 식이 머무를 일곱 곳[七識止處]과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두 곳[二受行從得解]에서 분명, 진리[諦]대로 지혜롭게 보고, 여기서 뜻이 열려 해탈을 얻으면 이를 일러 아라한[阿難]이 집착 없는 도를 행하여 지혜롭게 해탈을 얻었다 하느니라.[“도를 얻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곧 오사결사(五耶結使 : 五邪結使)라고 뒤집어 말씀하신 것이니, 수행자가 구지(九止)의 끝까지를 사제(四諦)로 관찰해서 잘못된 견해를 쉬면 아라한(阿羅漢)이 된다.]아난아, 또한 여덟 가지 해탈처(解脫處)가 있나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색(色)으로 색을 관(觀)하면 첫째 해탈처(解脫處)니라.[내신(內身)과 외신(外身)에 두루 집착되었기 때문에 양쪽으로 관해야 한다.]
안으로는 색을 관하지 않고, 밖으로만 색을 관하면 둘째 해탈처니라.[밖의 몸[外身]에 두루 집착한다.]서른여섯 가지 물건[三十六物]을 관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관행(觀行)을 닦으면 셋째 해탈처(解脫處)니라.[두루 자기의 몸[己身]을 집착하기 때문에 삼십육물(三十六物)로 나누어 관(觀)하라 하셨으니, 초선천[第一禪]으로부터 제사선천[四禪]까지는 모두 삼관(三觀)을 닦는다. 사람[人]과 병통[病]이 같지 않아서 자기의 몸[己身]만을 탐(貪)하거나, 외부의 물질[外色]만을 탐하거나 안팎의 것[內外]을 함께 탐하기 때문에 삼관(三觀)이 있다. 사의지관(四意止觀)도 이와 같거니와 단순히 선의 요체[禪要]만으로 논(論)한다면 역시 삼관뿐이요, 만일 차츰차츰 제하는 쪽으로 논한다면 사선(四禪)이어야 한다.]모든 색상(色想)을 이미 벗어나서,[이미 색계의 사선천(四禪天)을 벗어나서 다음의 공처(空處)로 온 것이다.] 땅 같은 생각[地想]이 사라지고,[없애려거나 싫어하는 마음[滅恚心]이 흙먼지[土塵]와 같기 때문에 땅 같다[如地]고 하셨다.] 갖가지 생각[若干想]도 일어나지 않고 무유량공(無有量空)의 지혜[空慧]를 누리어 공혜천(空慧天)의 또래를 이루면 넷째 해탈처(解脫處)니라.[사공정(四空定)은 문장[文]이 동일하기 때문에 낱낱이 풀이하지 않는다.]
공혜천(空慧天)의 모든 것에서 무유량식혜(無有量識慧)에 이르러 선정을 이루어 식혜천(識慧天)의 또래를 이루면 다섯째 해탈처(解脫處)니라.식혜(識慧)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무소유불용(無所有不用)에 이르러 지혜로운 선정을 이루어 불용무소용혜행(不用無所用慧行)의 또래를 이루면 여섯째 해탈처(解脫處)니라.
불용혜(不用慧)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무유사상역불무유사상(無有思想亦不無有思想)에 이르러 선정[竟受止]을 누리면 또래로는 사상천(思想天)의 무리 이니, 일곱째 해탈처(解脫處)니라.일체 무유사상[無有思想]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이미 사공정(四空定)이 끝나고, 다음은 멸진정[滅定:滅盡定]으로 오르려한다.] 사(思)와 상(想)이 사라지고, 또한 신(身)까지도 다했음을 각지[覺]한 뒤에 경촉이 끝난 상황[更竟]에서 선정[受止]을 누리면 이는 여덟째 해탈처[第八解脫處]니라.[마음의 흐름[心之流放]은 잠깐사이[眴息生滅之間]에 우주의 표면을 몽땅 어루만지거니와[爯撫宇宙之表] 육신에 가려졌기 때문[身之所復]에 반드시 수행[無不待行]을 가자(假資)해야 한다. 자비의 정[慈定]을 행하는 이가 마음의 알음알이[心想]와 상념(想念)과 몸의 감각[身知]을 모두 소멸해서 자신을 낮추기[屈]로는 썩은 그루터기[根株]와 같이 하고, 마음을 모으기[冥然]로는 식은 재[死灰]와 같이 하면 우뢰[雷霆]도 그의 정념[正念]을 깨뜨리지 못할 것이요, 겁화[山燋]도 그의 정려[靜慮]를 해치지 못한다. 소연(蕭然)하여 그 부피가 태허(太虛)와 같고, 염연(恬然)해서 그 교유[遊]함이 대자연[造化]과 같으므로 멸진정[滅定]이라 한다.]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 칠식지처(七識止處)와 이수행종득해탈(二修行從得解脫)과 또한 팔해탈처(八解脫處)도 이와 같이 수행하였더라도 이러한 지혜가 생긴 뒤에 다시 생각하기를 종전에 익히던 공부는 모두 멈추고[戢卻], 이미 얻은 해탈도 활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바탕[本福]으로 삼아 신의 경촉을 멈춘 선정[身更竟止]을 이루면, 이를 일러 아라한[阿難 : 阿羅漢 : 阿羅訶]이 도를 행하되 두 가닥 길에 집착됨이 없는 행[兩行]으로 해탈을 이루었다 하느니라.”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아난이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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