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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보자] #5202 불설문수사리현보장경(佛說文殊師利現寶藏經) 하권

Kay/케이 2024. 12. 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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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문수사리현보장경(佛說文殊師利現寶藏經) 하권

 

불설문수사리현보장경하권

서진 월지 축법호 한역
김달진 번역

“이에 천마(天魔) 파순(波旬)이,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마련한 그 공양 음식을 방해하려고 생각하여 변화로 4만 비구를 만들어 해지고 떨어지고 찢어진 옷을 입은 채 더럽고 냄새나는 몸으로 깨진 발우를 잡고 서 있게 하였으며, 가슴과 등을 모두 드러내고 얼굴이 추악한데다가 절름발이, 곱사등이 모양을 하고서 초조한 마음을 품은 채 대중 속에 앉아 모두 발우를 잡고 갖가지 공양을 받게 하였으나 그 발우의 밥이 역시 줄거나 다하지 않았으므로 파순이 만들어 낸 비구들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발우의 밥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문수사리가 다시 위신(威神)의 변화를 나타내어 여러 만들어 낸 비구들의 발우 밥을 항상 가득하게 하였는데, 그 형체 있는 음식[搏食]이 입에 들어가서는 목이 메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밥을 떠서 입에 올리면 그 손이 입과 나란히 되어서는 멈추었다. 그리고 땅에 쓰러져 스스로 안정할 수 없었다.이에 문수사리가 천마 파순에게 물었습니다.
‘이 비구들은 어째서 먹지 않는가?’
파순은 대답했습니다.
‘이제 여러 비구들이 장차 죽으려 합니다. 혹시 독을 섞은 음식을 주지 않으셨습니까!’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독 없는 사람이 어찌 독을 행하겠으며, 내 자신 더러움이 없는데 어찌 더러운 독을 남에게 주겠는가!음욕과 분노와 우치가 있으면 이것이 바로 독이 되니, 보살이 지녀온 법품(法品)과 계율은 이러한 많은 독이 없다. 이른바 독은 슬기가 없고 은애(恩愛)의 집착으로 이것이 내 것이라든가 내 것이 아니라는 소견을 내며, 죄(罪)와 복(福)과 명색(名色)을 인연하여 행하는 것이 평등하지 못한지라, 인연을 짓는 것이 나와 남에 있다고 보므로 모든 덮임과 느낌[受]에 머물러서 그 몸을 탐내고 집착하며, 갖가지 생각과 감관이 있어서 삼계(三界)에 머물러 잡음[取]이 있고 받음이 있고 갑작스러움이 있고 사나움이 있고 가는 것이 있고 오는 것이 있다.몸을 탐내어 수명(壽命)이 있다고 하매 거리끼고, 자기 생각이 청정하다고 하매 집착하며, 성냄에 가려서 12인연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쟁송(諍訟)하는 모든 소견 때문에 자기 소견을 끊지 못하며, 생각함이 있고 아는 것이 있다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청정하다는 생각과 청정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분수(分數)의 일을 일으키니, 이것을 있고 없음과 모든 업과 모든 은애(恩愛)를 충분히 관함이라고 하며, 이것이 내 것이라서 행할 바가 없다고 하여 공에 빠질까 두려우며, 두 가지 생각을 벗어나려 함으로써 그 상(想) 없는 것을 상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원(願) 없는 것을 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얻을 것 없는 것을 얻을 것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행할 것 없는 것을 행할 것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두 가지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함으로써 보살의 법품(法品)에 대하여 법품이 아니란 생각을 하고, 삿된 소견의 행을 위해 바른 법을 관한다는 생각을 하고, 악지식(惡知識)에 대하여 선우(善友)라는 생각을 하며, 부처님의 행을 어지럽히고 바른 법을 비방하여 스스로가 훌륭한 체하면서도 구호하는 일이 없으며, 투쟁과 욕설을 일삼아 성실한 말을 허망한 말이란 생각을 하고, 허위와 사기에 대하여 성실이라는 생각을 하고, 모든 음욕을 범하면서 머무른다는 생각을 하고, 모든 유위(有爲)에 대하여 안온하다는 생각을 하고, 생사에 대하여 소견을 일으켜 집착하면서 열반을 나타내는 생각을 갖는다.’문수사리는 다시 말했습니다.
‘파순이여, 이러한 상법(像法)의 행위가 바로 독이다. 부처님 교법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 감로(甘露)의 가르침이 불교의 첫째이며, 안온한 가르침이 불교의 둘째이며, 방일(放逸)함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셋째이며, 원한(怨恨)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넷째이며, 느낌과 집착함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다섯째이다.바른 법장(法藏)의 가르침이 불교의 여섯째이며, 쟁송(諍訟)함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일곱째며, 일어날 것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여덟째이며, 남이나 나에 대한 집착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아홉째이며, 비방하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째이다.구제하여 옹호할 것을 생각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한째이며, 고요하고도 담담하여 아무런 생각을 내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두째이며, 청정으로써 청정을 되찾아 담박하여서 그렇게 여길 것 없다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셋째이며, 바른 것으로써 평등의 밝음을 가져오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넷째이며, 성내지 않고서 잘 성립시키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다섯째이다.높고도 높아서 모든 착한 근본을 쌓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여섯째이며, 이미 해탈하고도 다시 해탈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일곱째이며, 모든 외도를 교화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여덟째이며, 일체 욕심이 지혜로운 자에게는 없으니 이 가르침이 곧 불교의 열아홉째이며, 시종(始終)과 생사가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무째이다.뜻을 안정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두째이며(본래 스물한째의 법은 없음), 뜻을 그치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셋째이며, 평등하게 끊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넷째이며, 일체 악법을 짓지 않는 신족(神足)의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다섯째이다.몸과 뜻이 고요하여 두 가지 감관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여섯째이며, 중생들의 신심을 위해 가장 힘껏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일곱째이며, 일체 번뇌를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음이 없이 모든 이치를 깨닫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여덟째이며, 널리 본체를 환히 깨달아서 도를 풀이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아홉째이며, 행하는 바 허물이 없고 고요하다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째이다.부드러워서 싸움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한째이며, 해탈을 부르는 진리의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두째이며, 성내는 말씨가 없는 슬기로운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셋째이며, 법의 이치에 따라 분리(分離)가 없고 덧없고 괴롭고 공하고 슬퍼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넷째이며, 칭찬하거나 꾸짖거나 나[我]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다섯째이다.모든 외도를 항복 받아 고요하게 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여섯째이며, 무위의 마음으로 바라밀(波羅蜜)에 이르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일곱째이며, 저 언덕에 이르러 훌륭한 방편을 내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여덟째이며, 자비로써 중생을 옹호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아홉째이며, 가엾이 여겨 해치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째이다.모든 존재[有]를 벗어나 공덕의 갑옷을 입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한째이며, 즐겨 함도 없고 조작함도 없고 말하는 것도 없으면서 가엾이 여기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두째이며, 할 일을 이미 끝내고서 지혜를 일으키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셋째이며, 훌륭한 체하는 생각을 없애고서 삼보(三寶)를 끊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넷째이며, 보살의 뜻을 내어 일체를 안락하고 청정하게 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다섯째이니, 모든 존재[有]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이 말씀을 설하실 때에 그 여러 천자들과 천마 파순을 따라온 5백 천자들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어서 함께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이와 같이 불법의 가르침을 받들어야 하겠습니다.’그때 부처님께서 곧 웃으시기에 현자 아난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웃으십니까? 이미 웃으심에는 마땅히 뜻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네가 이 여러 변화로 된 비구를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
아난은 대답했습니다.
‘이미 보았습니다.’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뒷날 다섯 가지 탁한 세간에 가서 법이 다 되려고 할 무렵에 이러한 비구들이 있어 만족함을 모르고 불선한 일을 행하면서 의복도 제대로 바르게 하지 못한 채 그 성품이 사나워서 조용하지 못할 것이다.왜냐하면 이와 같이 아난아, 그때의 비구들은 음식을 탐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없고 갖가지 비방을 일으키며, 계율을 범한 사문을 받들어 섬기려고 가사(袈裟)를 겨드랑이에 걸어서 현재 존장 비구들에게 공경하지 않을 뿐더러 서로 따라가고 오는 행위가 어지러워서 사람들에게 많은 병고가 되며, 또 사문이 되어서는 안락과 명예를 구해 공경 받을 것만을 찾고 법에 뜻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세간에 나의 법 가운데 이러한 무리들이 있어 소견 없는 사람들이 청정하지 못한 일을 행하기 때문에 모든 천신들이 다 근심하는 반면 못된 악마는 다 기뻐하리라.’아난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못된 악마가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러 정사(正士)들 스스로가 못된 악마의 일을 일으키는 것이지, 못된 악마 파순이 방해할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게으른 자에게 기회를 노리지 않고 그 어떤 비구이든 정진하고 수행하기를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하는 이가 있으면 파순은 이 정진하는 이에게 기회를 노리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아난아, 부지런히 힘껏 정진하여 게을리 하지 말라. 그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룩하지 못한 것을 이룩하고 밝은 진리를 얻어 밝지 못한 것을 제거하여 마군의 관속을 항복 받음과 동시에 여래의 가르침을 일으키며, 바른 법을 받들어 간직하여 경전의 이치에 공양하여라. 이것이 바로 나의 가르침이다.’이 말씀을 설하실 때에 5천 비구가 모두 신명(身命)을 버려 열반에 들면서, ‘우리들은 법이 어지럽게 무너지는 때를 보고 싶지 않다.’라고 하고, 허공에 앉아 몸에 불을 놓아서 스스로들 화장하였는가 하면, 수천의 천자들이 그 뼈를 공양하였으며, 2백 비구는 번뇌를 멀리 여읨과 동시에 법의 눈[法眼]이 생기고, 2백 비구는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어서 해탈하게 되며, 3만 2천 하늘들은 유순한 법의 지혜를 얻고, 제석ㆍ범천ㆍ사천왕과 여러 권속들은 다 합장(合掌)하고 가서 부처님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세존이시여, 원컨대 부처님께서 오래 머물러 널리 교수하사 저희들로 하여금 법이 어지럽게 무너져 사라지는 때를 보지 않게 하소서. 누구나 이 경전의 법을 듣는다면 끝내 게으르지 않고 뭇 번뇌도 없을 것이며, 모든 느낌에 집착하지 않아 뜻의 행함이 머무는 데가 없고 모든 마사(魔事)를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며, 나[我]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현자 사리불이여, 문수사리 동자가 나타낸 신통 변화와 경전의 법을 강설(講說)한 것이 곧 이러하였으니, 내가 그 눈으로 직접 다 보았던 것입니다.”그때 현자 대가섭(大迦葉)이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나 역시 문수사리의 신통 변화를 보았으니, 그대는 좀 들으시오.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얻으신 지 오래지 않았고, 내가 처음 수염과 머리털을 깎은 그때, 문수사리가 보영(寶英)여래의 국토로부터 이 세계에 와서 세존을 뵙고 머리 조아려 예배하려 하였으니, 그때 부처님께서는 사위(舍衛)의 기수숲 급고독원 정사에 계셨습니다.문수사리가 여름 석 달이 다 되도록 처음부터 부처님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대중 스님들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도 없고, 초청하는 모임에 있는 것을 볼 수도 없고, 계(戒)를 설하는 가운데 있지도 않았는데, 이에 문수사리가 여름 석 달을 다 지내고서 계를 설할 그때 새삼스레 대중 가운데 와서 나타나므로 내가 곧 문수사리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석 달 동안 어디에 있었으며,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문수사리는 대답했습니다.
‘가섭이여, 내가 이 사위성에 있으면서 화열(和悅)왕궁의 채녀(婇女)들 속에, 또는 음녀와 소아(小兒)들 속에서 석 달 동안을 즐겁게 지냈습니다.’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말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사람이 우리 청정한 대중 스님들과 함께 부처님을 섬기려 할까?’
내가 곧 강당에서 나와 건추(犍搥)를 두드려 문수사리를 쫓아내려고 했습니다.그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혹시 마하가섭이 건추를 두드리는 것을 보았는가, 못 보았는가?’
문수사리는 부처님께 대답했습니다.
‘이미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를 쫓아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문수사리여, 그대 자신이 경계의 신통 변화를 나타내어 가섭으로 하여금 산란한 뜻을 일으켜 그대를 향하지 않게 하여라.’
이에 문수사리가 현일체불급국토(現一切佛及國土)라는 삼매로써 그때를 맞춰 이 삼매에 들었는데, 문수사리가 이 삼매에 들자 곧 시방의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세계에 각각 다 마하가섭이 있어 그 늙은 손으로 건추를 잡고 두드려 문수사리를 쫓아내려는 광경을 나타냈습니다.그래서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엇 때문에 건추를 두드렸느냐?’
가섭은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예, 세존이시여, 문수사리가 여름 석 달이 다 되도록 전연 나타나지 않은 채 가만히 은밀한 안방에 가서 유숙했기 때문에 건추를 두드려 쫓아내려고 합니다.’그때 부처님께서 온몸으로부터 큰 빛을 내어 사방을 환히 비추시면서 나에게 타이르셨습니다.
‘가섭아, 네가 시방을 좀 보아라.’
그때 시방을 보니, 셈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마다 그 자신의 몸이 나타나 나이 늙은 내가 시방 부처님 옆에 가서 건추를 두드려 문수사리를 쫓아내려고 하는 것이며, 또 여러 부처님 옆에 각각 문수사리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부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대가섭아, 네가 어떤 문수사리를 쫓아내려고 하는가? 시방의 셈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옆에 있는 문수사리를 쫓아내려고 하는가? 이 문수사리를 어떻게 쫓아내려고 하는가?’내가 곧 부끄러워서 잡은 건추를 땅에 놓으려고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고, 신통의 힘을 다 나타내어도 건추는 땅에 떨어지려 하지 않은 채 바로 멈추어 움직이지 않으며, 이와 같이 기수숲을 비롯한 시방 불국토도 역시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세존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네 스스로가 문수사리에게 귀의한다면 곧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곧 멀리서 문수사리에게 예배하고 나자, 그때야 건추가 땅에 떨어지는지라, 이내 나아가서 부처님 발아래 머리 조아려 아뢰었습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제가 범한 허물을 용서해 주소서. 하늘 가운데 하늘이시여, 제가 이미 문수사리가 나타낸 것을 보았으니 가령 제가 문수사리가 구족한 지혜를 강설하려 해도 다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보살 경계의 행이 이렇게도 한량이 없는데 제가 지혜가 없기 때문에 건추를 두드린 것입니다.’부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의 보는 바로선 시방 불국토 가운데 문수사리가 부처님 옆에만 있는 것 같지만, 문수사리는 모든 불국토에 널리 있기 때문에 석 달 동안 나타나지 않았어도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부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가섭아, 문수사리는 이 사위성에서 5백 여인을 깨우치고 화열왕궁 안의 채녀들을 교화하여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퇴전(退轉)하지 않게 했으며, 또 5백 동자와 5백 동녀들로 하여금 퇴전하지 않는 지위에 서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얻게 하고 그 밖의 무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성문을 얻거나 천상에 나게 하였다.’내가 곧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문수사리가 무슨 법을 설하여 인민을 제도하기를 그와 같이 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스스로가 문수사리에게 물어보아라. 무슨 법을 설하여 그 사람들을 제도할 수 있었던가를.’내가 곧 문수사리에게 물었더니, 문수사리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가섭이여, 일체 사람들의 근본에 따라 설법하여 계율에 들어가게 하고, 또 희락(戱樂)으로써 뭇 사람들을 가르치되, 혹은 행동을 같이하기도 하고, 혹은 유행하면서 공양하기도 하고, 혹은 전재(錢財)로써 서로 통하기도 하고, 혹은 빈궁하거나 간탐하는 속에 들어가서 달래기도 하고, 혹은 큰 청정한 행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신통으로써 변화를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제석ㆍ범천의 빛과 모양을, 혹은 사천왕의 빛과 모양을, 혹은 전륜성왕의 빛과 모양을, 혹은 세존 같은 빛과 모양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두려워하는 빛과 모양을, 혹은 거칠거나 부드러운 빛과 모양을, 혹은 허망하거나 진실한 빛과 모양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하늘의 빛과 모양을 나타내기도 했다.왜냐하면 사람들의 그 근본 행이 여러 가지로 같지 않기 때문에 역시 갖가지 법을 설하여 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가섭이여, 이러한 무리에게 다섯 가지 법을 설하여 참된 진리에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나는 물었습니다.
‘그대는 얼마만큼의 사람을 제도 했습니까?’
그는 나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법계와 같습니다.’나는 또 물었습니다.
‘법계가 얼마나 됩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허공계와 같으니, 모든 법계와 허공계와 인종계(人種界)가 역시 그러한지라, 이 인종계와 법계와 허공계는 두 가지가 없고, 두 가지의 조작도 없습니다.’나는 또 물었습니다.
‘문수사리여, 내가 부처님 계시는 것을 보았지만, 장차 이익됨이 없지나 않을까요? 또한 사람들을 가르쳐 도탈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불법이란 공하여 사람이 없는데 그 누가 가르쳐 도탈할 이가 있겠습니까?’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가섭이여, 마치 열병(熱病)에 걸린 사람이 갖가지 터무니없는 말과 되씹는 말을 할 때에 어떤 사람이 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이 귀신병을 얻었다.≻ 하고, 곧 훌륭한 의사가 와서 병든 사람에게 탕약을 먹이자 그 병이 이내 나아서 다시 터무니없는 말과 되씹는 말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가섭의 뜻에는 어떠합니까? 어찌 귀신이나 천신이 그 사람의 몸속에서 나왔다 하겠습니까?’
나는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탕약을 마셨기 때문에 그 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가섭이여, 그 의사가 저 사람에게 많은 이익이 있었을까요?’
나는 대답했습니다.
‘예, 그러합니다.’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가섭이여, 세간 사람들이 속이고 거짓부리기를 좋아하는 그것이 곧 열병이 되어 탐착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나[我] 없는 것을 나 있다고 생각하여 생사에 흘러 떨어지는지라, 이 때문에 여러 불세존께서는 대자대비를 구족하신 행이 있어 세간에 출현하사 두 가지 일과 모든 생각하는 행을 끊기 위해 훌륭한 방편의 법으로써 법문에 들어가게 하되,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을 제거하고, 또 속이거나 거짓부리는 것을 끊으시며, 여러 사람들을 위해 설법함에 있어서도 일체 생각을 제거해 다시 나라든가 남이라는 생각에 들어가기를 좋아하지 않고서 바라밀을 얻어 무위(無爲)를 이룩하게 하십니다.가섭의 뜻에는 어떠합니까? 저 어찌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수명이라든가 열반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가섭이여, 이 이치를 받아야 합니다. 왜 부처님인가 하면 그 깨달음이 항상 바른 이치를 나타냄은 무엇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고, 계율을 쓰지도 않기 때문이며, 또 깨달음이 집착을 벗어나 번뇌가 없기 때문입니다.’가섭은 말했습니다.
‘매우 미치기 어렵습니다. 보살의 부지런한 행이 이와 같이 중생을 옹호하고 일체를 구제하여 공덕의 갑옷을 버리지 않으며, 또 집착하는 바 없고, 싸우거나 어지럽지도 않아서 청정한 그대로 무위에 이르러 중생들 때문에 공덕의 갑옷을 입는 것이겠습니까?’
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섭이여. 이 때문에 보살이 큰 공덕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가섭은 또 청하였습니다.
‘원컨대 문수사리께서 모든 보살의 공덕 갑옷을 말씀해 주십시오.’
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보살은 서른두 가지 공덕 갑옷의 행이 있는지라. 보살이 이 공덕 갑옷을 입고서 가고 오고 돌아다닙니다.’‘어떤 것을 서른두 가지라 하겠습니까?’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가섭이여, 첫째는 보살이 한량없는 생사에 들어가는 공덕 갑옷이니 처음과 끝까지 옹호하되 행위가 자연스러운 상(相)이며, 둘째는 무수한 사람들을 제도하는 공덕 갑옷이니 나[我]라는 상이 없음이며, 셋째는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는 공덕 갑옷이니 다 법의 몸[法身]을 위하는 상이며, 넷째는 모든 것을 거스르는 공덕 갑옷이니 부르는 소리에 대한 메아리와 같은 상이며, 다섯째는 일체 부처님을 옹호하는 공덕 갑옷이니 법계의 평등한 상입니다.여섯째는 일체 마군을 항복 받는 공덕 갑옷이니 모든 번뇌를 청정하게 하는 상이며, 일곱째는 바른 법으로써 모든 외도를 교화하는 공덕 갑옷이니, 있거나 없거나 12인연의 근본 없음을 깨달아 들어가게 하는 상이며, 여덟째는 일체 가진 것을 보시하되 아끼지 않는 공덕 갑옷이니 일체 글귀 속에 들어가서 함께 서로가 닦아 즐겨 하기를 원하는 상이며, 아홉째는 일체 중생들을 위해 계율ㆍ인욕의 공덕을 쌓는 공덕 갑옷이니 그러면서도 조작하는 상이 없음이며, 열째는 널리 두루 이르는 공덕 갑옷이니 그러면서도 이르는 상이 없음입니다.열한째는 크게 정진하는 힘의 공덕 갑옷이니 몸과 뜻이 텅 비어서 고요한 상이며, 열두째는 일체 선정을 위해 법의 몸으로 바른 삼매에 드는 공덕 갑옷이니 일체 집착하는 상을 제거함이며, 열셋째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지혜바라밀의 공덕 갑옷이니 슬기롭지 못한 모든 은애(恩愛)를 청정하게 하는 상이며, 열넷째는 크고 훌륭한 방편의 공덕 갑옷이니 널리 일체 행을 나타내는 상이며, 열다섯째는 대자(大慈)를 행하는 공덕 갑옷이니 상해(傷害)함이 없는 상입니다.열여섯째는 5도(道)를 보되 허공처럼 보는 상이며, 열일곱째는 크게 기뻐하는 공덕 갑옷이니 만족함이 없는 상이며, 열여덟째는 크게 옹호하는 공덕 갑옷이니 괴로움과 즐거움에 흔들리지 않는 상이며, 열아홉째는 모든 원(願)을 구족하는 공덕 갑옷이니 해탈을 관하되 마치 손바닥 보듯 의심할 바 없는 상이며, 스무째는 일체 덮임[蓋]을 생각하지 않는 공덕 갑옷이니 모든 어두움에 자취[跡]가 없는 상입니다.스물한째는 4대(大)와 5온[五陰] 때문에 일으키는 공덕 갑옷이니 환(幻)과 같은 법의 변화로 좋고 묘함을 나타내는 상이며, 스물두째는 네 가지 공양을 독사처럼 보는 공덕 갑옷이니 법계는 평등하다는 상이며, 스물셋째는 모든 느낌은 허공이 모인 것처럼 여기는 공덕 갑옷이니 몸에 대해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상이며, 스물넷째는 삼계의 모든 공덕 갑옷이니 어떤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상이며, 스물다섯째는 모든 존재를 잘 받아들이는 공덕 갑옷이니 일어남이 없는 상입니다.스물여섯째는 크게 용맹한 공덕 갑옷이니 퇴전(退轉)하지 않는 상이며, 스물일곱째는 크게 통달하는 공덕 갑옷이니 일체 사람들의 행에 따라 약(藥)을 베푸는 상이며, 스물여덟째는 큰 길잡이[導師]로서의 공덕 갑옷이니 3도(道)에 나타내 보이는 상이며, 스물아홉째는 삼보의 교법을 끊지 않는 공덕 갑옷이니 모든 부처님의 슬기로운 교화를 다 나타내어 이치를 널리 보이는 상이며, 서른째는 일체 법에 받는 것도 없고 내는 것도 없는 공덕 갑옷이니 법의 지혜[法忍]를 일으키지 않는 상입니다.서른한째는 흔들리지 않는 지위에 머무는 공덕 갑옷이니 모든 것을 항복 받아 제자와 연각보다 뛰어난 상이며, 서른두째는 도량을 장엄하는 공덕 갑옷이니 전이한 마음으로 평등한 지혜를 행하여 일체 법을 지닌 대로 바르게 깨닫는 상입니다.가섭이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행하는 서른두 가지 큰 공덕 갑옷이니, 만약 이 서른두 가지 공덕 갑옷을 믿어 받는 이가 있다면, 그는 4대(大)를 다르게 할지언정 그 보살만은 끝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가섭은 또 물었습니다.
‘문수사리여, 여러 제자들이 이 공덕 갑옷 가운데 한 가지도 있는 이가 없습니까?’
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가섭이여, 여러 제자들이 큰 공덕 갑옷을 입을 수 없으니, 가섭의 뜻에는 어떠합니까? 그 용맹스런 큰 힘 있는 사람이 입는 갑옷을 하열하고 불초(不肖)한 사람도 이 갑옷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가섭은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문수사리는 또 말했습니다.
‘가섭이여, 보살이 입는 큰 공덕의 갑옷을 일체 제자와 연각이 입을 수 없습니다.’
이 보살의 공덕 갑옷을 설할 때에 3만 2천의 하늘, 사람들이 다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었습니다.”가섭은 사리불에게 계속 말하였다.
“현자여, 문수사리 동자가 신통 변화를 설법으로써 나타냄이 곧 이러하였으니, 이 모든 것은 내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그때 현자 빈누문타니자(邠耨文陀尼子)가 또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나 역시 문수사리가 나타내는 그 변화를 보았습니다. 기억하건대 옛날 부처님께서 유야리(維耶離)에서 유행하실 때에 6만 비구 대중과 더불어 부처님을 둘러싸 공양하였습니다.이때 내가 삼매에 들어 모든 이도(異道)를 관찰한 끝에 제도 받아야 할 무수한 백천 사람들을 보고 내가 곧 이도들의 처소에 가서 설법했으나 그들이 내가 강하는 것을 듣고서 잘 받아 행하지 않고 생각하여 뜻에 간직하지 않을 뿐더러 도로 비방하고 비웃고 욕하고 성내는지라, 거기에 석 달 머무는 동안 한 사람도 가르쳐 깨우치지 못한 채 싫증이 나서 그대로 버리고 물러났습니다.그때 문수사리가 외도 5백 인을 화작(化作)하고는 스스로 스승이 되어 그 5백 권속들을 때리고 함께 살차니건불(薩遮尼犍弗) 처소에 나아가 엎드려 예배하고 한쪽에 서서 말했습니다.
‘제가 대사의 공명이 멀리 떨침을 들었기에 이제 일부러 다른 대국으로부터 유야리에 왔습니다. 이제는 대사가 바로 저희들의 세존이신 만큼, 원컨대 화상의 교훈을 받기 위해 그 명령을 받들되 마치 구담(瞿曇)을 뵙듯이 하겠으니, 저희들은 아직 큰 사문께서 유순한 묘법을 설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그때 심나형자(審裸形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구나, 좋구나. 그대는 오래지 않아서 곧 나의 법률의 행을 요달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극한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이에 심나형자는 스스로 그의 대중들에게 고했습니다.
‘너희들은 이 5백 학지(學志)와 함께 즐거이 화합하여 행동을 같이하되 서로가 법화(法化)를 받고 경전의 이치를 공동으로 배워야 하며, 설령 이 5백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너희들은 자세히 받아서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그때 문수사리가 5백 학지들을 데리고 한데 모여 점차 그 행을 나타내매, 그 참된 공덕과 계행이 드디어 본래보다 뛰어나서 두루 스스로 나타내는지라, 그 중에 삼보를 찬탄하여 말하기도 하고, 혹은 또 심나형자의 바른 덕의 행을 읊어 칭찬하기도 하여 이 인연을 제외하고, 다른 강(講)하던 것은 모두 중지하였습니다.그때 외도 사람들과 다른 날 다시 만나서 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들로서 그대 같은 이가 경전을 풍송(諷誦)하고 강의한 그 말씀을 관찰해 본다면, 사문 구담이야말로 진실한 덕이 있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크고 호귀(豪貴)한 집에 태어나 종성(種姓)이 구족하고 부모와 후예가 청정한 제왕으로서 전륜(轉輪)의 성종이며, 한 가지 상(相)에 백 가지 복과 공덕이 있기 때문이다.내가 듣건대 처음 출생하실 때에 제석ㆍ범천이 받들어 공경하고 온 천지가 진동하여 삼천대천세계에 수취(受取)할 이가 없었으며, 땅에 떨어지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시면서 손을 들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상천하에 가장 높으니 마땅히 중생들을 위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끊으리라.≻라고 하셨다.그리고 용왕이 물을 토해내어 제석ㆍ범왕이 함께 목욕하고 모든 하늘과 인민들이 기악(伎樂)을 두드리는지라 큰 광명을 놓아 뭇 나쁜 갈래[惡道]를 쉬게 하고 일체 감관이 다 구족하여 그 구족하지 못한 중생들로 하여금 다 번뇌를 버리고 안온하게 함으로써 관상쟁이 범지(梵志)가 미리 서응(瑞應)을 말하기를, ≺만약 재가(在家)한다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한다면 곧 부처가 되어 법왕(法王)으로서 법 바퀴를 굴리리라≻고 하였다.그 뒤에 나라와 왕위를 버리고는 보리수 밑에서 억백천 마군과 관속들을 항복 받고 바로 깨달음을 이룩하여 곧 법 바퀴를 굴리시매 그 누구도 당할 이가 없었으며, 여러 사문ㆍ범지와 하늘ㆍ용ㆍ귀신ㆍ범천과 세간 인민들을 위해 경전을 설하여 강의하시매 처음과 중간도 훌륭하고 그 마지막도 역시 훌륭하셨다.이른바 처음도 훌륭함이란 몸의 행이 착하고 입의 말씨가 착하고 마음의 생각이 착함이며, 중간도 훌륭함이란 그 뜻이 매우 참되고 계행을 구족하여 뭇 지혜를 초월함이며, 마지막도 훌륭함이란 공하고 상(相)없고 원(願) 없는 해탈의 법문을 얻음이다.또 처음도 훌륭함이란 고요함을 믿어 방일하지 않음이며, 중간도 훌륭함이란 뜻이 안정되어 한결같이 평등함이며, 마지막도 훌륭함이란 바로 지혜를 봄으로써 슬기를 깨달음이다. 또 처음도 훌륭함이란 부처님에 대해 신심을 무너뜨리지 않게 함이며, 중간도 훌륭함이란 법에 대해 청정함을 어지럽히지 않게 함이며, 마지막도 훌륭함이란 대중 스님들에 대해 신심을 없애지 않게 함이다.또 처음도 훌륭함이란 다른 음성을 따르지 않음이며, 중간도 훌륭함이란 적정(寂靜)함을 염함이며, 마지막도 훌륭함이란 성현을 평등하게 보게 함이여, 또 처음도 훌륭함이란 괴로움을 끊고 쌓임을 제거함이며, 중간도 훌륭함이란 여덟 가지 길을 받들어 행함이며, 마지막도 훌륭함이란 사라짐의 진리를 극진히 하여 취증(取證)함이니, 이상은 여러 제자들을 위해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하신 것이다.’문수사리는 이어 말했습니다.
‘여러 보살들을 위해 처음도 훌륭함이란 큰 도의 뜻[道意]을 따르게 함이며, 중간도 훌륭함이란 작은 도의 뜻을 좋아하지 않게 함이며, 마지막도 훌륭함이란 일체의 지혜를 권조(勸助)함이다.또 처음도 훌륭함이란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뜻의 대자(大慈)를 내게 함이며, 중간도 훌륭함이란 일체 사람들 때문에 대비(大悲)를 싫어하지 않게 함이며, 마지막도 훌륭함이란 평등한 뜻의 행을 즐겁게 옹호하게 함이다.또 처음도 훌륭함이란 모든 계율을 범한 자를 거두어 주기 위해 그 잘난 체하여 수행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아가 바른 이치를 받들게 하고, 그 성품 어지러운 자로 하여금 평등한 행을 얻어 삿되거나 나쁜 지혜를 제거하게 함이며, 중간도 훌륭함이란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말함이며, 마지막도 훌륭함이란 6바라밀을 이어받음으로써 일체의 지혜를 관하게 함이다.또 처음도 훌륭함이란 4은(恩)을 행하여 뭇 사람들을 가르쳐서 포섭함이며, 중간도 훌륭함이란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서 법을 구호함이며, 마지막도 훌륭함이란 모든 어두움과 사라짐에 떨어지지 않게 함이다.또 처음도 훌륭함이란 마음 가지기를 땅처럼 하여 보살행을 받들되 회합이 없음이며, 중간도 훌륭함이란 지혜에 흔들리지 않아 퇴전하지 않는 지위에 서는 것이며, 마지막도 훌륭함이란 마음이 집착된 바 없이 한 생만 지나면 부처님에 후보되는 지위[一生補處]를 얻게 함이니, 이상은 모든 보살들을 위해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하신 것이다.’이와 같이 문수사리가 여러 외도들을 위해 알맞게 설법하여 5백 사람들로 하여금 번뇌를 멀리 여의고 법의 눈을 얻게 하며, 8천 사람들로 하여금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게 하였는데, 그때 5백의 만들어 낸 사람들이 곧 땅에 엎드려 다섯 가지 마음으로 스스로 귀의하면서 음성을 높여 말하기를, ‘부처님께 귀의하고 깨달은 이에게 귀명합니다.’라고 함으로써 여러 사람들도 다시 만들어 낸 사람들을 본받아 곧 땅에 엎드려 다섯 가지 마음으로 스스로 귀의하여 말하기를, ‘부처님께 귀의하고 깨달은 이께 귀명합니다.’라고 하며, 제석천은 곧 꽃을 뿌려 말하기를, ‘그대들은 이 꽃을 가지고 세존께 공양하여라.’라고 하였습니다.이에 문수사리가 대중들과 권속들과 함께 둘러싸고서 가리라(迦梨羅) 강당에 나아가 부처님 처소에 이르러 엎드려 예배한 다음 한쪽에 물러서 있으며, 여러 외도와 그의 많은 제자가 이 꽃들을 가지고 부처님께 올림과 동시에 세 번 부처님을 돌고는 한쪽에 물러서 있는데 5백의 만들어 낸 사람들이 문수사리의 덕을 이어받아서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부처님을 보려고 하지 않음은 여래가 바로 법의 몸[法身]이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법을 들으려고 하지 않음은 그 법이란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저희들이 또 여러 스님들의 공덕을 쓰지 않음은 세존과 현성(賢聖)들은 회합하는 행이 없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또 부처님의 공덕을 쓰지 않음은 그 법계란 것이 덕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또 세존의 미묘하신 거느림[御]을 쓰지 않음은 일체 법이 아주 고요하여 거느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저희들이 여래 토지(土地)의 이치를 쓰지 않음은 그 해탈하는 것은 이미 꽃과 잎이 열매를 여의기 때문이며, 저희들이 또 괴로움의 이치를 알려고 하지 않음은 그 원(願)에 두 가지가 없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습기[習]를 끊으려고 하지 않음은 일체 법이 본래 습기가 없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도를 행하려고 하지 않음은 그 도가 행이거나 행이 아님을 여의었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끝까지 증득하려고 하지 않음은 모든 법이 모두 아주 고요하기 때문이며, 또한 머무는 뜻을 쓰지 않음은 일체 법의 머묾이 머무는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평등을 쓰지 않음은 덕이거나 덕이 아님을 끊고서 덧없는 생사를 위해 뭇 행을 이룩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또 신족(神足)을 쓰지 않음은 망설이는 행동이 없는 동시에 의심이 없고 오가거나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모든 근(根)을 쓰지 않음은 그 근을 믿음으로써 올바름을 잃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힘을 쓰지 않음은 일체의 만물이 모두 힘이 없어 여위고도 약하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또 깨닫는 뜻[覺意]을 쓰지 않음은 모든 유(有)가 아주 공하여 깨달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저희들이 또 도를 쓰지 않음은 수(數)도 없고 세간도 없고 구할 것도 없어 이로움이 아니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또 적멸(寂滅)을 쓰지도 않고 또한 담박하지도 않고, 저희들이 또 세간을 제도하는 지혜의 견(見)을 갖지도 않고, 저희들이 또 이치를 알려고 하지도 않으니, 이와 같이 함은 항상 해탈의 이치를 가짐으로써 법계에 얽매임이 없기 때문이며, 저희들이 또 사문(沙門)의 이치를 쓰지 않음은 고요한 뜻이란 여섯 가지 거리낌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저희들이 또 범지의 빛과 형상을 끊지 않음은 이러한 것을 범지로 여겨 비방을 끊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또 비구를 쓰지 않음은 그 자연이란 파괴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저희들이 또 모든 바라밀을 쓰지 않음은 이러한 6입(入)이란 모두 아무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또 지족(止足)을 쓰지 않음은 어떠한 행을 하여도 지족이 없기 때문입니다.저희들은 또 하고자 하는 것도 없고, 저희들은 만족하게 여기는 것도 없으며, 모든 법에 느낄 것이 없으며, 또 말에 있어서 아무런 말이 없으며, 몸도 없고 뜻도 없고 말 자체도 없기 때문이고, 저희들은 또 머묾이 없지도 않으니 이와 같이 함은 삼계가 다 평등하기 때문이며, 저희들은 또 수습[習]하는 것이 없지도 않으니 즐거움도 없고 평등한 소견도 없기 때문이며, 저희들은 또 한거(閑居)가 없으니, 일체 삼계에 한거를 행할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저희들이 또 공을 행하지도 않고 행할 것도 없음은 모든 행하는 일이 모두 공이기 때문이며, 저희들은 또 걸식하지 않으니 모든 생각을 제거하기 때문이며, 저희들은 또 생사의 두려움이 없으니 모든 것을 진리 그대로 평등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은 또 음욕ㆍ분노ㆍ우치가 없고 비방함도 없으니 생각이 있지도 않고 생각이 없지도 않기 때문이며, 저희들은 또 번뇌의 행을 끊지 않고 모든 것에 집착함이 없어 자연 그대로 응하기 때문입니다.저희들은 또 몸의 존재를 갖지 않고 몸으로부터 어떤 생각을 내지도 않으니, 몸이 곧 몸이 아니기 때문이며, 저희들은 또 과거를 관하여 보지 않고 보는 것이 있지도 않으니 그 출발된 상(相)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저희들이 또 모든 결함과 더러움을 제거하지 않음은 덧없음과 괴로움과 즐거움과 청정함과 나를 모두 평등하게 하여 저절로 해탈하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또 번뇌의 물[使水]을 건너지 않음은 이와 같이 하여 저희들은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보지 않기 때문이며, 저희들은 또 다른 이를 끊지도 않고 평등하게 제도할 것을 구하지도 않으니 말 없는 그 해탈이란 생각도 없기 때문입니다.저희들이 또 처소를 느끼지 않아 일으키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음은 그 본제(本際)에 이르고자 기주(起住)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또한 주저함을 제거하지 않음은 그 고요한 뜻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고, 저희들이 또 바른 마음과 질투가 없지 않음은 믿음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저희들은 또 언설(言說)을 끊으려 하지 않으니, 과거를 벗어나므로 아무런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무위의 경계를 건너려 하지 않음은 바로 이 일체 법이 모두 고요하여 무위이기 때문입니다.’이 말을 설할 적에 2백 비구는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어 번뇌가 다하고 뜻을 깨달았으며, 2백 비구는 자리로부터 일어나서 4선(禪)을 얻었으므로 다른 곳으로 피하여 가면서 최후에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체 세간이 다 어지러움은 이러한 법을 강설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야말로 본래 부드러워서 강하는 것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설한 법은 율행(律行)에 들어가지 않고 또 세존께서 교화하시는 것이 아니다.’이에 빈누문타니자가 문수사리에게 말했습니다.
‘이 2백 비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피하면서 말하기를, ≺이 법을 강설함은 일체 세간을 어지럽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합니다.’문수사리는 대답했습니다.
‘빈누여, 이 법을 강설하는 것이 일체 세간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런 까닭이 있으니, 왜냐하면 빈누여, 세간의 근본이란 이른바 몸의 5온[陰]과 4대(大)와 6입(入)에 집착하는지라, 생사를 두려워하여 원을 세워 무위를 구하지만 생사 때문에 수취(受取)하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무위에 유순하지 못해서 근심하듯 하므로 생사 가운데 즐거울 것이 없고 열반도 없습니다.그 두려워하지 않는 지혜라야 어지러울 것이 없고 4제(諦)에 머묾이 없을 것이니, 만약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곧 미혹하고 어지럽기 마련이며, 또 공의 진리에 머묾이 없어야 네 가지 일에도 머묾이 없어 도(道)에 대한 쟁란(諍亂)이 없을 것이니 만약 경전에 집착하여 도를 얻고자 한다면 곧 두 가지가 되고, 두 가지가 있으면 어지럽기 마련이다.여기에 평등이란 것이 일체 법의 바른 것인 만큼 가령 두 가지가 없으면 두 가지가 없음으로 해서 쟁란이 없고 행이 있으며, 내 것을 구한다면 훌륭한 체하는 교만이 있고, 이미 교만이 있으면 쟁란하게 된다. 가령 집착하는 것이 없으면 조작하는 것이 없어서 바른 조작도 없고 삿된 조작도 없고,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조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제도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제도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닐 것이니, 이것이 바로 쟁란이 없음이고, 쟁란이 없음으로 해서 두 가지가 없는 것입니다.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간과 쟁란하지 않는데, 세간이 나와 쟁란하는구나’라고 하셨으니, 왜냐하면 여래는 쟁란의 근본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쟁란의 근본이란 어느 것이 진실하고 믿음직한 것이고 어느 것이 사기(詐欺)냐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하고 믿음직한 말인들 무슨 말이 있겠으며, 사기의 말인들 무슨 말이 있겠느냐. 그 있고 없음이 평등하면 치우침과 삿됨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 ‘무슨 말이 있겠느냐’라고 하심은 곧 청정함이 있음을 이르는 것입니다.그때 문수사리가 도망가는 2백 비구 앞에서 중도에 큰 불을 조화로 일으켜 저 불토를 두루 가득하게 하니, 여러 비구들이 길을 건너가려다가 모두 가득한 불을 보고 불을 뛰어넘을 수 없었으며, 신족(神足)으로 허공을 날아 지나가려 해도 공중에는 두루 덮인 쇠그물[鐵網]이 있었고, 또 큰물이 시방에 두루한 것을 보았으므로 두려워 옷과 털이 꼿꼿이 설 정도였다.마침 기수숲[祇樹] 길가에 두루 깔린 푸른 연꽃ㆍ흰 연꽃ㆍ누런 연꽃ㆍ붉은 연꽃을 멀리서 보고, 거기에 또 뭇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서 곧 스스로 발걸음을 돌려 부처님 처소에 이르러 법을 받아 듣기 위해 기수숲에 들어가 가리라(迦梨羅) 강당에 나아가서 부처님께 엎드려 예배한 다음 한쪽에 물러나 섰습니다.빈누가 물었습니다.
‘이 여러 비구 뭇 어진 이들은 어느 곳을 가다가 어디에서 여기에 왔는가?’
비구들은 대답했습니다.
‘어진이여, 우리들은 아라한(阿羅漢)을 얻기 위해 모든 번뇌를 다 끊고 할 일을 이미 끝내 선정을 얻고 신족바라밀을 체득했는지라, 이 문수사리를 따라 법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법이 세간을 어지럽게 하는 법이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고 가는데, 마침 가는 도중에 이 불국토에 온통 불이 가득 찬 것을 보고 큰 불을 건너갈 수 없어서 일부러 되돌아와, 세존께 아라한으로서 번뇌를 모두 끊는 자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그때 부처님께서 빈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자유로이 못하고 불을 받들어 섬겨서 불을 건너려는 자라면 이는 건너갈 수 없고, 소견의 그물[見網]에 떨어져 있는 자라면 쇠그물을 넘으려 해도 넘어갈 수 없고, 애욕의 물에 빠져 헤매는 자라면 큰물을 건너려 해도 이 또한 건너갈 수 없다.왜냐하면 빈누여, 이 여러 비구들은 아직 음욕과 분노와 우치의 불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어찌 큰 불을 건너겠으며, 소견의 그물에 떨어져 있는데 어찌 쇠 그물을 넘어가겠으며, 은애(恩愛)의 물속에 빠져 있는데, 어찌 큰물을 건널 수 있겠느냐?’부처님께서는 빈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물이나 불이나 쇠그물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없고 어디로 가는 것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문수사리가 나타낸 변화이다.이와 같이 빈누여, 그 음욕ㆍ분노ㆍ우치와 모든 소견의 그물과 은애도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 없고 어디로 가는 것도 없어 모두 생각을 따라 잡된 생각이나 삿된 행이 근본이 되어서 나와 남이라는 그러한 색상(色像)을 일으키니, 나도 없고 느끼는 것도 없이 저 홀로 행하는 그러한 행이라야 어지러운 뜻을 물리치고 선정의 고요함을 이룩해 많은 공덕의 행을 쌓는다. 그리고 전일한 뜻은 얻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어 선정에 들어간 그대로 경전의 법에 염(念)을 일으켜 어떤 것이 법사(法事)이고 어떤 것이 법연(法緣)인가를 염할 것이다.그리고 이와 같이 자세히 관하되 이미 어리석음의 인연이 있으면 곧 지어감[行]을 일으키고, 이미 지어감의 인연이 있으면 곧 의식의 인연을 일으키고, 이미 의식의 인연이 있으면 곧 이름과 물질을 일으키고, 이미 이름과 물질의 인연이 있으면 곧 6입(入)을 일으키고, 이미 6입의 인연이 있으면 곧 습기[習]를 일으키고, 이미 습기의 인연이 있으면 곧 느낌[痛痒]을 일으키고, 이미 느낌의 인연이 있으면 곧 은애[恩愛]를 일으키고, 은애의 인연이 있으면 곧 잡음[受]을 일으키고, 이미 잡음의 인연이 있으면 곧 존재[有]를 일으키고, 이미 존재의 인연이 있으면 곧 나는 것을 일으키고, 이미 나는 것의 인연이 있으면 곧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근심이 있음을 관해야 한다.그 고뇌와 뜻에 맞지 않는 것이 날마다 나는 것이라 하고, 이러한 큰 고뇌가 함께 뭉친 것을 일러 어리석음을 따라 길러낸 몸이라 하는지라, 어리석음이 이미 다 되면 그 지어감이 곧 사라지고, 그 지어감이 이미 다 되면 곧 모든 의식이 사라지고, 모든 의식이 이미 다 되면 이름과 물질이 곧 사라지고, 이름과 물질이 이미 다 되면 6입이 곧 사라지고 6입이 다 되면 그 습기가 곧 사라지고, 습기가 이미 다 되면 모든 느낌이 곧 사라지고, 느낌이 이미 다 되면 은애가 곧 사라지고, 은애가 이미 다 되면 잡음[受]이 곧 사라지고, 그 잡음이 이미 다 되면 모든 존재가 곧 사라지고, 그 존재가 이미 다 되면 나는 것이 곧 사라지는 동시에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슬퍼하는 뜻에 맞지 않는 것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이러한 그 큰 고뇌가 곧 제거됨으로 해서 평등을 얻고 무위를 체득하고 회합이 없어 적막함을 얻을 것이다. 저 과거가 역시 사라지지 않아서 과거의 무명[無點]도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무명도 다하지 않고 현재의 무명이 그 생각을 쓰기 때문에 청정함과 적막함이 없으면 곧 무명이 성립되며, 그 생각함이 고요하고 밝으면 무명은 성립하지 않으니, 이미 성립함이 없으면 아주 고요한지라, 이것을 무명의 다함이라고 한다.저 고요하고 밝은 생각으로써 4대의 몸을 관한다면 이야말로 어리석은 몸이라, 마치 초목(草木)과 같아서 가령 뜻이 있고 마음이 있고 의식이 있다 할지라도 빛이 없어 볼 수도 없고 소리가 없어 말할 수도 없다. 또 마치 허수아비 옷 같아서 안도 없고 바깥도 없고 중간도 없고 얻을 것도 없을 것이니, 비구가 고요한 생각을 갖는다면 일체 법에 아무것도 일으킴이 없고 그는 곧 참된 공의 이치를 얻을 것이다.’
이 법을 설하실 때에 그 2백 비구들은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어서 번뇌를 다 끊고 해탈하게 되었다.그때 살차니건자(薩遮尼犍子)가 그의 많은 제자와 5백 권속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기수숲 가리라(迦梨羅) 강당의 부처님 처소에 나아와서 세존께 절하고 인사 말씀을 드리면서 아뢰었다.‘제가 사문 구담께서 환술과 방자[蠱道]로써 미혹을 일으켜 남의 제자를 변화시킨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이제 몸소 보았습니다. 문수사리가 나의 대중 모임을 파괴하여 사문 구담의 제자를 더 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삿된 행을 받아 가지기 위해 다시 나에게 와서 나의 교훈을 받지 않을 뿐더러 풍송(諷誦)하지도 않고 나에게 말을 하지도 않고 명령을 받아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그때 샤야말(闍耶末)이라는 도인(道人)이 대중의 모임 속에 앉아 있었으니, 이는 살차니건자와 두터운 사이라, 말하는 도중에 니건자를 보고 타일렀다.
‘그만두시오. 부처님께 청정하지 못한 뜻을 내지 마시오. 부처님의 여러 제자와 문수사리의 마음이 어지럽히는 뜻을 품었다고 할 수 없네. 그대가 이 때문에 이익 없는 이치를 얻어 언제나 안온하지 못하니, 마땅히 고통 받을 나쁜 갈래에 떨어지기 마련이오.니건자여, 좀 들어보게. 이제 비유로써 말하려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제호(醍醐)를 얻으려고 다니면서 소[酥]를 구해 물을 병속에 넣어서 그 병을 아무리 흔들어도 마침내 극도로 피로할 뿐 제호를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니건자여, 모든 외도들의 소행도 그러한지라, 비록 행이 도를 배웠다 하더라도 삿된 행을 끊을 수는 없으며, 또 마치 큰 병 속의 물로 제호를 낼 수 없는 것처럼, 여래의 훌륭하고도 묘한 법률의 행을 받들지 않고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그러하다네.또 마치 니건이여, 어떤 지혜 있는 사람이 영리하고도 명철한 슬기로써 제호를 얻고자 다니면서 소를 구해 거기에 유락(乳酪)을 병 속에 넣어 흔들어서 곧 제호를 이룩함은 유락을 사용했기 때문에 제호를 이루어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니건자여, 여래의 법에 있어서도 어떤 속인이나 출가한 사람으로서 도를 배우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법을 믿어 즐거이 정진을 행한다면 곧 현성(賢聖)들의 해탈을 빨리 얻음이 역시 유락으로부터 제호를 이룩하는 것과 같다네.또 마치 니건이여, 어떤 사람이 남의 집으로부터 백천 가지 와기(瓦器)를 빌려다 파괴하고서 그 대가로 곧 보배 그릇을 그 집주인에게 돌려준다면, 어찌 집주인이 화를 내어 꾸짖겠는가?”
니건자는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을 것이네.”그는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니건자여, 여러 외도의 제자들은 마치 와기를 일부러 파괴하고 여래의 처소에서 다시 법 보배의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으니, 성내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네.마치 니건이여, 뭇 사람의 어떤 길잡이[導師]가 훌륭한 방편이 없이 대중 장사꾼을 거느리고 나쁜 길에 나아가는데, 다른 어떤 길잡이는 훌륭한 방편이 있어 뭇 장사꾼을 모두 거느리고 나쁜 길을 벗어나 바른 길에 나아가는 것처럼, 이와 같이 니건이여, 그대들의 여러 스승은 삿된 길 때문에 도의(道義)을 깨닫지 못하고 무수한 사람을 데리고 나쁜 길에 떨어지지만, 여래ㆍ무소착(無所着)ㆍ등정각(等正覺)께선 도를 알고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에 한량없이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나쁜 길을 벗어나 바른 길에 나아가신다.’
이에 니건자 스스로가 그들의 무리를 데리고 떠나가 버렸다.그때 1만 2천 사람은 니건자와 함께 가 버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신통을 얻었는데, 세존께서는 그들의 수염과 머리털을 떨어뜨려 비구가 되게 하시고는 샤야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제 1만 2천 사람들이 살차니건자와 함께 가는 것을 보았느냐?’
사야말은 대답하였다.
‘예, 세존이시여, 이미 보았습니다.’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이 1만 2천 사람들은 다 앞으로 미륵(彌勒)여래에게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사문이 되어서 첫째로 큰 모임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깊은 법을 들었기 때문이다. 살차니건자는 앞으로 미륵여래에게 제자가 되어서 지혜가 가장 높기가 마치 오늘날 나의 제일 제자 사리불처럼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불법을 사용함으로써 잘난 체하고 교만한 뜻을 일으켰으나 그런 후에는 모든 견(見)을 버리기 때문이다.’이에 샤야말 도사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뒷날 5탁악세(濁惡世)에 잘난 체하고 교만한 자가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문수사리는 대답하였다.
‘족성자(族姓子)여, 뒷날 5탁악세의 중생으로서 낮고 천한 자들이 잘난 체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4선(禪)을 갖추지 못하고서 스스로 훌륭한 체하기 때문이다. 5탁악세에 떨어질 그때엔 다시 비구를 공양하지 않음으로써 이 여러 비구들은 뜻을 안정하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제4선에 이를 수 있겠는가. 저 뒷날 세간엔 모든 결함과 어려움이 있음으로 해서 5탁악세가 되어 스스로 훌륭한 체하고 교만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족성자여, 모든 선남자는 두 가지 일이 있어서 교만을 일으키니, 이른바 두 가지란, 첫째는 스스로 지혜를 자처하기 때문에 잘난 체하고, 둘째는 의복과 음식을 공양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계율ㆍ지혜ㆍ공덕을 나타내어 곧 그 존재[有]에 떨어진다. 지혜로 자처하는 그 잘난 체만은 바로 여래의 법을 비방하는 것이어서 마땅히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질 것이다.’그는 또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잘난 체하는 뜻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대답하였다.
‘≺범부로서 그 뜻이 산란하여 안정되지 않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이르지 않는다.≻는 이런 말을 가령 듣고서 두려워하는 자라면 그는 곧 잘난 체함인 줄을 알 것이며, 범부인 사람이 ≺여래를 볼 수 있어도 아라한을 볼 수는 없다.≻라고 하는 이런 말을 가령 듣고서 두려워하는 자라면 그 역시 잘난 체함인 줄을 알 것입니다.≺범부가 중우(衆祐)를 위해서는 마땅히 보시하고 슬기로운 아라한에게는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는 이런 말을 듣고서 가령 두려워하는 자라면 그 역시 잘난 체함인 줄을 알 것이며, ≺여래가 범부를 찬탄하긴 하여도 아라한을 찬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이런 말을 듣고서 가령 두려워하는 자라면 잘난 체함인 줄을 알 것입니다.그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집착함이 없는 이다. 이른바 세간에서의 최후(最厚)일 것이고, 가령 번뇌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 있다면 이는 아직 집착되어 있는 이라, 세간의 중우(衆祐)가 아닐 것입니다.만약 여기에서 행을 짓는 것이 있다면 곧 잘난 체함이 될 것이니, 일체 법을 말로써만 느끼는 이것이 이른바 잘난 체함이다. 일체를 알지 못해 끊는 것도 없고 행하는 것도 없고 증득함을 짓는 것도 없어야만 이것이 바로 진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그는 또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지혜로써 잘난 체하는 자는 어떠한 말이 있습니까?’대답하였다.
‘싸울 것도 없고 싸우지 않을 것도 없으면 교만이라 하지 않으니, 마치 사자가 온갖 짐승의 왕으로서 한 번 부르짖을 때 일체가 다 그 음성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선남자여, 비구로서 잘난 체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일체 음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른바 음성이란 부르는 소리에 대한 메아리의 대답과 같은지라, 그 메아리는 마음과 뜻과 의식이 없고 인연의 화합 때문에 그 음성의 메아리가 나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족성자여, 마음과 뜻과 의식은 저 음성의 메아리처럼 분별하는 것이 아니니, 모든 인연에 따라 음성은 다 메아리를 응하여 퍼지는 것이고,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저 부처님의 음성도 오는 데가 없고, 외도들의 음성도 근심할 것이 없으며, 부처님의 음성에도 뭇 음성이라고 깨닫지 않고, 모든 성내거나 결함 있는 음성이라도 뭇 번뇌의 메아리를 근심하지 않는 만큼 일체 음성은 가고 오는 것과 근본 되고 종말 되는 의식이 없습니다.인(印)은 곧 즐겨 하는 것 없는 인이고, 모든 말에 있어서 높음도 낮음도 없는 인이고, 이 인은 평등을 세우는 인이고, 그 모양이 자연스러운 인이고, 한 가지 인으로써 법계에 들어가 평등하게 거느리는 인이고, 파괴함이 없는 인이고, 진리 그대로 머묾이 없는 인이고, 참되고 공한 이치의 인이고, 3세의 평등한 인이고, 생멸이 없는 인이고, 자연 그대로 나타나는 인이다. 이 인으로써 모든 법을 인하기에 즐겨 할 것도 즐거움도 없고 잘난 체할 것도 없으니, 비구가 이것을 듣고서 의심하지 않고 망설임이 없다면 그는 나[我]라는 것을 얻지 않을 것입니다.’그때 샤야말 도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하늘 가운데 하늘이시여, 제가 울염(鬱閻)이란 외도 친구로부터 이 대승(大乘) 공덕을 설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제 다시 문수사리로부터 강설하는 변재를 듣고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냅니다. 이 때문에 세존이시여, 그를 위해 알맞게 설법하셔서 저로 하여금 도품(道品)을 구족해 빨리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최정각(最正覺)을 얻어서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무수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제도하게 하소서.’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야말이여, 이제 그대를 위해 보살행을 말하겠다. 두 가지 법으로써 빨리 지혜를 얻어 대승에 이르니, 이른바 두 가지란, 첫째는 정진함이고, 둘째는 방일하지 않음이다.어떤 것이 정진이냐 하면 법재(法財)를 구하려면 모든 것을 다 보시하되 아끼지 않고 그 과보를 바라지도 않고 도의 뜻을 권조(勸助)하는 것이다.첫째, 이른바 정진이란 모든 불선한 법을 끊기 위해 뭇 어진 이들의 선한 법의 뜻과 평등한 행을 다 구족하고 방일함이 없어서 계율을 청정히 하여 모든 태어남을 원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 정진이란 몸과 뜻을 탐하지 않아 인욕하는 행을 닦고, 방일함이 없어서 해치는 마음이 없어 중생들을 구호하는 것이며, 셋째 정진이란 모든 공덕의 법을 많이 쌓고 방일함이 없어서 만족할 줄 모르면서 모든 선을 닦고 덕을 쌓아 현량(賢良)한 법으로써 도의 뜻을 권조하는 것이다.넷째 정진이란 선정을 구족하여 싫어함이 없고 방일함이 없어서 선정을 닦되 욕심이 없어 퇴전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 정진이란 넓은 지식을 많이 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고, 방일함이 없어서 항상 현성(賢聖)들의 지혜를 고요히 받는 것이며, 여섯째 정진이란 4은(恩)의 행을 닦고 훌륭한 방편의 지혜로써 방일한 자를 가르치는 것이다.일곱째 정진이란 몸과 뜻의 행을 닦고, 그 몸과 뜻이 산란하지 앉아 마음이 공적(空寂)하게 되는 것이며, 여덟째 정진이란 일체를 위해 평등하고도 인자한 뜻을 행하되 법의 이치에 정진하고 방일함이 없어서 인자한 마음을 행하되 모든 법에 집착함이 없는 것이며, 아홉째 정진이란 다른 사람과 중생들을 위해 모두 도의 뜻을 내고, 방일함이 없어서 온 세간을 마치 아지랑이와 허깨비와 같다고 관하면서도 도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열째 정진이란 수행하기를 마치 머리털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하여 진실한 진리에 들어가고, 방일함이 없어서 지혜를 증득하되 다 증득했다는 생각을 없애고 보시하되 보시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열한째 정진이란 모든 상호(相好)를 구족하여 선한 근본을 많이 쌓고 방일함이 없음에 들어가서 법신(法身)은 일어난 바가 없다고 관함이며, 열두째 정진이란 그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고 방일함이 없어서 중생들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열셋째 정진이란 37도품(道品)의 법을 장엄 청정하게 구족하여서 이미 모든 어두움을 벗어나 여래를 즐겁게 하는 보살의 훌륭한 방편을 이룩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다 정진을 따라 이룩하는 것이므로 이를 훌륭한 방편의 지혜라고 하니, 보살이 이것을 받아 이룩한다면 퇴전(退轉)하지 않는 지위를 지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서게 될 것이다.’이 말씀을 설하실 때에 샤야말보살이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어서 즐거이 허공으로 솟아올라 땅으로부터 네 길[丈] 아홉 자 거리에 서 있으니, 삼천대천세계의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그 크나큰 광명이 널리 불국토에 두루하며, 허공에선 하늘 꽃을 퍼붓고 공후(箜篌) 등의 악기가 두드리지 않아도 저절로 울렸습니다.”그때 부처님께서 곧 웃으시니, 모든 불세존께서 웃으시는 법이어서 무수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천 광명의 빛이 부처님의 입에서 나와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희고 검은 빛이 한량없는 불국토에 두루 하고는, 도로 부처님을 세 번 돌고 이마 위에서 홀연히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에 현자 아난(阿難)이 옷을 정돈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길게 꿇어앉아 합장하여 게송으로 찬탄하며 부처님께 여쭈었다.
지혜의 힘과 길조의 광명이 있는
도사(導師)의 빛은 일곱 자[尺]의 꽃이시니
미묘한 모습 서른두 가지와
모든 종호(種好)를 구족하셨네.
마치 사자와 같이 대중 가운데에서
걸음걸이와 세력이 뛰어나신데
이제 부처님께선 무엇 때문에 웃으십니까?
원컨대 저희들을 위해 곧 해설하소서.
법을 설하심이 번개처럼 빠르고
음성이 뛰어나고 미묘하심이 사자와 같고
갈고(羯鼓)가 보배로운 음향을 울리듯이
그 음성 범천(梵天)보다도 뛰어나셨네.
부처님의 말씀 뭇 사람에게 두루하여
그 음성 삼천세계를 통하되
일체 중생에게 항상 응하는 그대로
부드럽게 들려 못 깨닫는 자 없도다.
모든 제자와 연각(緣覺)을 말하자면
그 지혜 훌륭한 광명이 없으므로
마침내 넓은 지혜와 같을 수 없고
뭇 보살들 역시 미치기 어려운지라.
이제 누가 지혜의 힘을 얻으리까.
원컨대 도사께서 법을 설해 제도하소서.
하늘ㆍ용ㆍ세간 사람들을 비롯하여
아수라까지 다 발심하였습니다.
일체의 느낌을 벗어남으로써
마음속에 아무런 집착이 없고
한량없는 행이 거리낌 없이
차별 없는 무수억보다 뛰어났으며
한량없고도 헤아릴 수 없이
평등으로써 세간을 제도하시니
이제 공하고 바른 지혜께 묻노니
무엇 때문에 기뻐 웃으십니까?
푸르고 붉고 누렇고 흰 빛깔
갖가지 광명이 매우 빛나는가 하면
그 미묘한 광명이 입으로부터 나와서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무수한 불토를 널리 비춥니다.
한량없는 백천 불국토의
갖가지 중생들 몸에 두루하되
일체 고요히 비춤으로써
보는 이마다 이익되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광명 나오려고 할 때에
모든 제자는 미칠 수 없고
전에 없었던 광명의 비춤을 얻으매
부처님 또한 연각(緣覺)의 일을 설하시네.
이제 대승의 행을 알고자 하는데
일체지이신 최상존의
그 광명의 불꽃이 이마로부터 들어가니
이젠 이르는 곳마다 더러움이 없으리.
훌륭하고 상쾌하도다.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이 받들어 섬김을 거치면서
진리를 나타내 그 이치를 설하시되
부처님께서는 한 말씀도 다름이 없으신데
이 큰 모임의 모든 의심을 끊어 주시는
정각께서 이제 무엇 때문에 웃으십니까?
부처님의 말씀 듣고는 기쁨에 넘쳐
무수한 사람들이 모두들 춤추듯 뜁니다.
부처님께서는 현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사야말 족성자가 허공에 솟아올라 땅으로부터 네 길 아홉 자 거리의 공중에 머물면서 이미 법의 지혜를 얻고 합장하며 서서 머리 조아려 나에게 예배하는 것과 백천의 하늘들이 와서 함께 공양하는 것을 보았느냐?”
아난은 대답하였다.
“예, 이미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샤야말 족성자는 이미 72억 부처님을 받들어 섬겼으며, 선을 닦고 덕을 쌓아 항상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어서 모든 불세존을 다 받들어 섬겼으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날로부터 이후에도 역시 72억 부처님들 처소에서 청정한 범행(梵行)을 세워 부처님의 바른 법을 다 보호하였다.”부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이 샤야말 족성자는 뒷날 마땅히 다섯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많은 여래를 보고서 섬겨 청정한 행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무수한 보살들을 가르친 뒤에 많은 깨달은 법을 쌓음으로써 무수한 겁(劫)을 지나고 나서는 부처가 될 것이니, 명호는 혜왕(慧王) 여래ㆍ무소착(無所着)ㆍ등정각(等正覺)ㆍ재세교수(在世敎授)ㆍ구족혜행(具足慧行)ㆍ천인사(天人師)ㆍ무상사(無上士)ㆍ도법어(道法御)ㆍ천상천하존(天上天下尊)ㆍ불천중천(佛天中天)이라 할 것이며, 그 세계의 명칭은 희견(喜見)이고, 겁(劫)의 칭호는 일보엄정(一寶嚴淨)이라 할 것이다.”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아, 그 희견이란 세계는 마치 타화자재(他化自在)의 여섯째 천상의 모든 것인 것처럼, 희견 불국토 인민들이 살고 있는 곳과 공양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 모든 인민들에겐 여섯 가지 경계의 법이 없어 그 앞에 오가는 모든 인민들이 서로가 보는 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혜왕여래를 보고는 더욱 환희심을 내기 때문에 저 세계의 명칭을 희견이라 하며, 그때 여래가 교수하는 1겁(劫) 동안에 불사를 많이 일으켜 그 정각(正覺)의 수명이 역시 1겁이므로 그 겁의 이름을 일보엄정이라 할 것이다.저 세존께서는 순수한 보살만으로 대중을 삼기 때문에 92억 보살들이 모두 퇴전(退轉)하지 않고 모든 보살이 거리낌 없는 지혜를 얻어 덕의 근본을 일으킬 것이니, 저 혜왕여래가 열반하려 할 때엔 사자과이행(師子過而行)이라는 보살이 있어 그가 마땅히 수기를 받음으로써 내가 열반한 날로부터 그 이후엔 이 사자과이행보살이 성불하여 사자과이행여래라는 명호를 얻어서 온 세간을 교수할 것이다.또 저 여래가 열반한 날로부터 이후엔 그 법이 10소겁(小劫) 동안 머물며, 저 여래의 사리를 아울러 합쳐 하나의 탑을 함께 일으키는데, 그 너비와 길이는 2천4백 리인데다가, 모두 일곱 가지 보배로써 탑을 만들어 뭇 사람들이 각각 공양할 것이다.”이에 샤야말 족성자가 허공으로부터 내려와 엎드려 예배하고 세존 앞에 멈추어 법계의 파괴됨이 없음을 설하면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중생과 법계가 평등하고
사람과 국토도 함께 평등하며
이 경계가 곧 지혜의 경계이므로
이것으로써 나에게 수기하시네.
법계와 번뇌가 평등하고
허공도 역시 평등하며
일체 법이 다 그러하므로
나 이것으로써 법에 이르렀네.
법계와 음욕과
진노(瞋怒)도 그러하고
허공계도 역시 그러하여
이것으로써 나에게 수기하시네.
생사와 무위의 국토와
법계도 다름이 없고
물도 그러하고
불과 흙도 그러하다.
5온의 경계와 18계(界)와
안식(眼識)의 모든 분수(分數)와
의식(意識)의 법 경계와
모든 분수가 다 정해진 것과
모든 유위의 경계와
무위의 경계가
두 가지가 있다고 보지 않는 법이므로
이것으로써 나에게 수기하시네.
세존께서는 5온이 없으시고
4대와 모든 느낌도 없고
이름도 없고 물질도 없고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시며
부처님께서는 음성으로써 말씀하사
나에게 수기하시되
이 모든 것이 다 적막함이므로
이것으로써 나에게 수기하시네.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의식이 없으시면서
이와 같이 나에게 수기하시나
나 또한 아무런 의식이 없으므로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네.
이 수기 진리가 되고
이러한 것이 곧 평등이어서
법계의 파괴함이 없는 그것이
바로 여래께서 머무는 것 없으심이라.
등정각이나 모든 하늘ㆍ사람이나
바른 법에 바로 서서
허공과 같이 고요하게
훌륭한 방편의 지혜를 구족하네.
그때 샤야말 족성자가 이 게송을 읊어 부처님을 찬탄하고 나서 세 번 돌고 한쪽에 물러앉으니, 이에 부처님께서는 현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전을 받아 외우고 강하여 자세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설해야 할 것이다.”아난은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 경의 명칭이 무엇이며, 어떻게 받들어 행해야 합니까?”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경의 명칭은 『문수사리소현변화항복중마화제이학봉수정법찬설경의』(文殊師利所現變化降伏衆魔化諸異學奉受正法讚說經義)라 하고, 또는 『보장』(寶藏)이라 하기도 하니, 이러한 뜻에서 받들어 간직해야 할 것이다.”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설하실 때 문수사리 동자를 비롯하여 샤야말보살과현자 아난과 모든 하늘ㆍ사람ㆍ아수라와 세간 사람들이 모두 경을 듣고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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