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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보자] #4481 법원주림(法苑珠林) 38권

Kay/케이 2024. 7. 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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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38

 

 

법원주림 제38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35. 경탑편 ②

(6) 고탑부(故塔部)
『상법결의경(像法決疑經)』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이 말은 효험이 있다 할 것이다.
“새 것을 만드는 것은 묵은 것을 수리하는 것만 못하고, 복을 짓는 것은 화를 피하는 것만 못하다.”
간혹 마을에 탑이나 묵은 절이나 법당이 다 헐고 집들이 무너져 있다. 삿자리 문짝과 다북대 지게는 연기와 먼지를 막지 못하고, 항아리 창과 띠풀 지붕은 서리와 이슬을 가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과 담을 다 헐어 똥물이 섬돌에 차고, 길에는 사람의 자취가 끊어졌다. 그러나 스님들은 떠돌아다니면서 고치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아 그것들은 날로 허물어져 가니, 그 짓는 허물은 잠깐도 쉬지 않는다. 어둔 밤의 등불이란 말은 본래 들은 적이 없고, 한낮의 번기와 꽃은 원래 보지 못하였다. 법당에는 범패(梵唄) 소리가 끊어졌고, 향로에는 해단(海檀) 냄새가 멈추었다. 드디어는 악귀로 하여금 영(靈)을 본받고, 선신(善神)으로 하여금 호위를 버리게 한다. 가람(伽藍)이 든든하지 못함은 바로 스님들이 게으르기 때문이요, 불법이 쇠잔한 것도 속인들의 공경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을 걱정하지 않고 또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또 『보량경(寶梁經)』에서 말하였다.
“한 현자(賢者)가 있었는데, 그는 얼굴에 국왕이 될 무늬가 있었다. 관상쟁이가 그것을 보고 그에게 딸을 주었다. 그 뒤에 그 현자는 절에 들어가 가람을 맡았는데 교만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국왕의 무늬를 잃고 큰 지옥에 떨어졌다.”
또 『살차경(薩遮經)』에서 말하였다.
“탑과 절과 불상이 방해가 된다 하여 그것을 다른 곳에 옮기는 사람은 악한 중생들 속에 들어가 상품(上品)으로 다스려진다.”

또 『십륜경(十倫經)』에서 말하였다.
“절을 부수거나 비구를 죽이면 그는 목숨을 마칠 때 뼈마디가 모두 아프며, 여러 날 말을 못하다가 죽은 뒤에는 아비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다 받는다.”
또 삼천위의(三千威儀)에서 말하였다.
“탑 위를 쓰는[掃] 데에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첫째 신을 신고 탑 위에 올라가서는 안 되고, 둘째 부처를 등지고 탑을 쓸어서는 안 되고, 셋째 위의 좋은 흙을 밑으로 버려서는 안 되고, 넷째 불상 위의 묵은 꽃을 내려서는 안 되고, 다섯째 아침을 먹은 뒤에는 손을 씻고 깨끗한 수건으로 불상을 다시 닦는 것이다.
또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첫째 먼저 땅에 물을 뿌리고, 둘째 땅을 고르게 하며, 셋째 마르기를 기다리고, 넷째 거꾸로 쓸지 말며, 다섯째 바람을 거슬러 쓸지 않는 것이다.
또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첫째 좋은 흙을 버리지 않고, 둘째 제 손으로 풀을 주우며 셋째 중간 흙을 밑에다 두고, 넷째 사방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다섯째 탑 앞의 6보(步)쯤까지 깨끗이 하는 것이다. [일이 바쁠 때는 6보로 한정하지만 한가할 때는 많이 쓸수록 더욱 좋다.]”
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청정한 마음으로 승가에 공양하고 불탑을 소제하면 그는 목숨을 마치고 나서 의조천(意躁天)에 태어난다. 그리하여 몸에는 뼈와 살이 없고 더러운 때도 없으며 향기는 1백 유순까지 풍기고 몸은 깨끗하기가 거울과 같다.
또 『정법념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복밭을 알아 불탑이나 혹은 승방이 풍우에 무너진 것을 보고 복덕을 지을 마음으로, 그것을 바르고 꾸미고 수리하거나 또 남을 시켜 묵은 탑을 수리하게 하면, 그는 목숨을 마치고 백신천(白身天)에 태어난다. 그리하여 그 몸은 곱고 희며, 산호림(珊瑚林)에 들어가 여러 천녀들과 5욕(欲)으로 즐기며, 그 업이 다해 다시 인간에 태어나더라도 그 몸은 곱고 희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한 염부제만한 선반을 소제하더라도
그것은 한 손바닥만한 불탑을 소제하는 것보다 못하다.”[『성론(成論)』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또 『찬집백연경(撰集百緣經)』에서 말하였다.
“땅을 쓸면 다섯 가지 공덕을 얻는다. 첫째 제 마음의 때를 제거하고, 둘째 남의 때를 제거하며, 셋째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넷째 마음을 항복받으며, 다섯째 공덕을 증진시켜 좋은 곳에 날 수 있다.”
또 『무구청정녀문경(無垢淸淨女問經)』에서 말하였다.
“땅을 쓸면 다섯 가지 공덕을 얻는다. 첫째 제 마음이 청정하고 남이 보고 청정한 마음을 내고, 둘째 남의 사랑을 받으며, 셋째 하늘이 기뻐하고, 넷째 단정한 마음을 모으며, 다섯째 목숨을 마치고 좋은 길인 천상에 나는 것이다.”
또 『사미위의경(沙彌威儀經)』에서 말하였다.
“땅을 쓰는 데에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첫째 사람을 등지지 않으며, 둘째 거슬러 쓸지 않으며, 셋째 깨끗하게 하고, 넷째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다섯째 삼태기에 담아 버리는 것이다.”
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불탑을 쓸 때에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첫째 물을 땅에 뿌리고, 둘째 기와 조각과 돌을 제거하며, 셋째 그 땅을 고르게 하고, 넷째 단정한 마음으로 땅을 쓸며, 다섯째 더러운 것을 제거하여 땅이 깨끗해진 뒤에는 능력에 따라 한 가지의 향과 꽃을 땅에 뿌리는 것이다.”
이렇게 공양하면 무량한 복을 얻는다.
그러므로 『화엄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꽃을 뿌려 깨끗한 광명을 장엄하고
묘한 꽃으로 장엄하여 장막 삼으며
갖가지 꽃을 뿌려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의 부처님께 공양할지어다.

또 『백연경(百緣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여러 비구들과 함께 항하강가에 가서 어떤 옛 탑이 다 퇴락한 것을 보았다. 비구들이 부처님께 물었다.
‘이것은 어떤 탑이기에 이처럼 퇴락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현겁(賢劫)에 바라나국(波羅柰國)의 범마달왕(梵摩達王)은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아들이 없어 신(神)에게 기도하여 아들을 구했으나 끝내 얻지 못했다. 그 때 그 나라의 어떤 못에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 꽃받침 속에 한 아이가 가부좌하고 앉았는데, 32상과 80종호가 있었고, 입에서는 우담발라꽃 향기가 났으며, 온몸의 털구멍에서는 전단향의 냄새가 났다. 왕과 왕비는 이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여 아이를 안고 돌아와 궁중에서 길렀다. 아이는 차츰 자라 걸을 때에는 그 다니는 곳을 따라 연꽃이 발을 받쳤으므로 그로 인해 아이 이름을 전단향(栴檀香)이라 했다. 그 뒤에 전단향은 인생의 덧없음을 깨치고 벽지불이 되어 허공에 올라가 18종류의 변화를 부리고 곧 열반에 들었다. 왕은 그의 사리를 거두어 탑을 세워 공양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탑이니라.’
비구들이 부처님께 물었다.
‘그는 전생에 어떤 복을 심어 이런 과보를 받았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과거 구루손부처님[拘樓孫佛] 때에 어떤 장자가 있었다. 그는 여색(女色)을 매우 좋아하여 어떤 음탕한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탐착했으나 줄 만한 재물이 없었다. 그리하여 탑 안에 들어가 꽃을 훔쳐 그녀에게 주고 한 밤을 같이 지냈다. 새벽이 되자 그 몸에 악창이 생겨 고통이 말할 수 없었다. 의사를 불러 고치려 할 때 의사가 말했다.
≺우두전단(牛頭栴檀)을 바르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장자는 곧 집을 팔아 60만 금을 얻어 그것으로 여섯 냥쭝의 향을 사서 부스럼에 바르려 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하고 의사에게 말했다.
≺나의 이 병은 마음에서 난 병입니다.≻
그리고는 곧 그 우두전단을 사서 가루로 만들어 가지고 그 탑에 들어가 발원했다.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온갖 고행을 닦으면서 중생들의 액난을 구제하려고 맹세하셨습니다. 지금 나는 1생의 분수를 따를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가엾이 여겨 이 병을 고쳐 주소서.≻
이렇게 서원한 뒤에 그 향을 탑에 바르고 꽃을 사서 지심으로 공양하면서 빌고 참회했다. 그러자 그 병이 곧 낫고 온몸의 털구멍에서 전단향의 냄새가 났다. 그는 이 냄새를 맡고
기뻐하여 예배하고 다시 발원한 뒤에 거기를 떠났다. 이 공덕의 인연으로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과 인간에서 항상 쾌락을 누렸으며, 그가 다니는 곳을 따라 연꽃이 그 발을 받치고 온몸의 털구멍에서는 항상 향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을 배워야 하느니라.’”
또 『소법멸진경(小法滅盡經)』에서 말하였다.
“이 뒤에 겁화(劫火)가 일어날 때에도 일찍이 지은 가람은 그 불에 타지 않고, 나아가서는 금강계(金剛界)의 상대(上臺)가 되느니라.”
또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5백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각각 전생에 행한 행과 지은 공덕과 지금 나를 만나 도를 얻은 인연을 말해 보아라.’
그 때 바갈다리(婆竭多梨)라는 아라한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기억합니다. 과거 무수한 겁(劫) 이전에 정광(定光)이라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그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그 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우고 공양했습니다.
법이 멸하려 할 때 어떤 가난한 사람이 살아갈 길이 없어 섶을 파는 것으로 업을 삼았습니다. 그가 늪에 나가 섶을 캐다가 늪 속에 있는 어떤 굉장한 탑사(塔寺)를 멀리서 보았습니다. 곧 그 탑 곁에 가서 불상을 보고 기뻐하면서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여우와 이리 등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들이 사는 곳으로서 가시덤불과 수목과 더러운 것들이 그 안에 가득 찼으며, 인적은 아주 끊어져 공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슬퍼하면서도 여래의 신령스런 덕은 몰랐습니다. 그저 기뻐하기만 하면서 초목을 베어 내고 더러운 것을 다 소제했습니다. 소제를 마치고 기뻐하면서 여덟 번 돌아 예배한 뒤에 거기서 떠났습니다.
이 공덕의 인연으로 그는 목숨을 마치고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났습니다. 온갖 보배로 된 궁전은 광명이 번쩍거려 여러 하늘 중에서
가장 뛰어남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천상의 수명을 마친 뒤에는 1백 번이나 전륜왕이 되었는데 7보가 저절로 생겨 4천하를 다스렸습니다. 거기서 목숨을 마친 뒤에는 항상 국왕이나 큰 성씨나 장자의 집에 태어나 재보가 무량하며 얼굴이 단정하고 절묘하기 짝이 없어 누구나 보고는 기뻐하고 애경했습니다. 어디로 가려 할 때는 길이 저절로 깨끗해지고 허공에서는 온갖 꽃을 내려 뿌렸습니다.’
바갈다리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옛날에 가난했던 사람이 바로 지금 저의 몸입니다. 옛날 그 탑을 소제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곳마다 모두 자재하였고, 1아승기 90겁 동안 악도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천상과 인간에서 부귀하고 번영하며 향락이 저절로 생기고 쾌락이 무궁했습니다. 지금은 최후의 몸으로 석가부처님을 만나 부귀를 다 버리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어 3명(明) 6통(通)과 8해탈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만일 누구나 3보에 대해 털끝만한 조그만 선을 짓더라도 그 나는 곳에서 받는 과보는 커서 무궁한 것입니다.’”
또 『비유경』에서 말하였다.
“기타(衹陀) 태자가 옛날 비바시부처님 때에 남종과 여종 한 사람씩을 보시하고 탑을 소제하게 했다. 이 공덕의 인연으로 세상마다 항상 7보로 된 궁전을 얻고 문 양쪽에는 금은이 저절로 생기며 남녀들이 받든 보발(寶鉢)에는 7보가 가득하여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았다. 밤에는 자연히 하늘 군사 5백 기(騎)가 와서 그 집을 호위하였으므로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전륜왕 7보(寶)란, 첫째 금륜보(金輪寶)요, 둘째 백상보(白象寶)요, 셋째 감마보(紺馬寶)요, 넷째 신주보(神珠寶)요, 다섯째 옥녀보(玉女寶)요, 여섯째 주장신보(主藏臣寶)요, 일곱째 주병신보(主兵神寶)이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사위국의 어떤 장자가
절을 짓고 죽은 뒤에 도리천(忉利天)에 났다. 그 부인은 밤낮 남편을 사모하여 몹시 근심하고 괴로워했다. 그 남편을 추모하였기 때문에 남편이 세운 절을 소제하고 수리했다. 남편이 천상에서 내려다보고 곧 내려와 그녀를 문안하고 위로하며 말했다.
‘그대는 나를 사모하기 때문에 매우 괴로워하는가?’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남편이 답하였다.
‘나는 바로 당신 남편이오. 절을 지은 공덕의 인연으로 천상에 태어났소. 당신이 나를 생각하고 절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온 것이오.’
아내가 말했다.
‘좀 가까이 오십시오.’
남편이 말했다.
‘사람 몸에서는 더러운 냄새가 나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소. 당신이 다시 내 아내가 되고 싶거든 부지런히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하고 절을 수리하고 소제하면서 내가 사는 하늘에 나기를 원하시오. 내 하늘에 나면 나는 반드시 다시 당신을 내 아내로 삼을 것이오.’
아내는 남편의 말대로 온갖 공덕을 지으면서 천상에 나기를 발원했다.
그 뒤에 그녀는 목숨을 마치고 천사에 태어나서 다시 부부가 되었다. 그들은 부처님께로 갔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자 그들은 모두 수다원이 되었다. 그리고 천상으로 돌아갔다.”
또 『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에서 말하였다.
“옛날 사위성의 어떤 부부에게 아들이 없었다. 그들은 정진하며 3보를 믿고 공경했다. 아내가 일찍 죽었으나 불법을 믿고 공경했기 때문에 도리천에 태어나서 천녀가 되었다. 얼굴이 단정하여 천상에서는 그 짝이 드물었다. 천녀는 생각했다.
‘나는 극히 단정하다. 지금 이 세간에 누가 내 남편이 될 수 있을까?’
그녀는 곧 천안(天眼)으로 본래 남편을 보았다. 그는 이미 출가했고 또 늙었으며 눈도 어두웠으나 오로지 믿음으로 항상 탑을 소제하는 선업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탑을 소제함으로써 반드시 천상에 날 것을 알았다. 그녀는 곧 내려와 광명을 번쩍이면서 그 남편 앞에 서 있었다.
비구(남편)가 이것을 보고 그 인연을 묻자 천녀가 답하였다.
‘나는 당신 아내로 지금은 천녀가 되었습니다. 내가 보매 천상에는 내 남편 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정진하여 항상 탑을 소제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천상에 날 것입니다. 만일 천상에 나게 되면 한 곳에 모여 다시 내 남편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사정으로 지금 와서 내 진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심정을 이야기하고 천상으로 돌아갔다.
그 남편 비구는 이 사실을 안 뒤로 더욱 정진하여 탑을 수리함으로써 자꾸 공덕을 쌓아 제4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게 되었다. 천녀는 그 남편을 생각하고 다시 내려와 말했다.
‘당신의 복이 매우 훌륭하여 도솔천에 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다시 당신을 남편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돌아갔다.
비구는 이 말을 듣고 더욱 정진하여 드디어 아라한이 되어 3명(明)ㆍ6통(通)과 8해탈을 갖추었다.”
또 『백연경(百緣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비라성(迦毘羅城)의 어떤 장자는 재보가 무량하였다. 그 아내가 아들을 낳았는데, 단정하고 절묘하여 보는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우러렀다. 아이는 차츰 장성하여 부처님을 만나 아라한이 되었다.
그 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91겁 전에 비바시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다. 반두말제왕(槃頭末帝王)은 그 사리를 거두어 4보의 탑을 세워 공양했다. 그 뒤에 탑이 조금 허물어졌다. 어떤 아이가 탑에 들어가 이 깨어진 곳을 보고는 환한 얼굴과 기뻐하는 표정으로 여러 사람을 불러 함께 그 탑을 수리하고 발원한 뒤에 거기서 떠났다.
그는 이 공덕의 인연으로 91겁 동안 지옥ㆍ축생ㆍ아귀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이나 인간에 나서 무궁한 쾌락을 누리면서 천상과 인간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나를 만나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고 출가하여 도를 얻었다.’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봉행했다.”
게송을 읊는다.

후세에 남긴 몸의 8만의 탑은
보배 장식에 높이는 1백 장(丈)인데
의봉(儀鳳)은 신령스런 까마귀와 다르고
금반(金盤)은 신전의 손바닥을 대신하네.

첩첩이 포갠 두공[栱], 조각(彫角)을 떠받들고
아득히 높은 추녀, 나무 그물에 걸렸으며
보배의 땅은 못물 밑의 모래 같고
풍경 소리 쌓고 쌓인 메아리 같네.

조각은 천 가지의 변화를 내고
단청(丹靑)은 만 가지의 형상 그리며
연기와 노을은 때때로 나타났다 숨었다 하고
신선들은 잠깐 동안 왔다갔다하여라.

새벽 안개는 절반쯤의 층계에서 생기고
나는 번기[幡]는 저 구름 위에 닿네.
떠 있는 무지개도 감히 쉬지 못하거늘
나는 곤계[鵾]인들 어찌 능히 쳐다보리.

성인의 그 변화는 다함 없는 상서이거니
그 복을 감응함이 어찌 두세 가지이랴.
원하노니 그 배 꼬리나마 빌려 준다면
저쪽 언덕을 그 누가 광막하다 할 것인가.

감응연(感應緣)[간략하게 스물한 가지 증험만 인용한다.]

서진(西晋)의 회계(會稽) 무현(鄮縣)의 탑
동진(東晋)의 금릉(金陵) 장간(長干)의 탑
석조(石趙)의 청주(靑州) 동성(東城)의 탑1)
요진(姚秦)의 하동(河東) 포판(蒲阪)의 탑
주(周)의 기주(岐州) 기산(岐山) 남쪽의 탑
주(周)의 과주(瓜州) 성동(城東)의 고탑(古塔)
주(周)의 사주성(沙州城) 안의 대승사(大乘寺)의 탑
주(周)의 낙주(洛州) 고도(姑都) 서쪽의 탑
주(周)의 양주(凉州) 고장(姑藏)의 고탑

주(周)의 감주(甘州) 산단현(刪丹縣)의 고탑
주(周)의 진주(晋州) 곽산(霍山) 남쪽의 탑
제(齊)의 대주(代州) 성동(城東)의 고탑
수(隋)의 익주(益州) 복감사(福感寺)의 탑
수(隋)의 익주(益州) 진원현(晋源縣)의 탑
수(隋)의 정주(鄭州) 초화사(超化寺)의 탑
수(隋)의 회주(懷州) 묘락사(妙樂寺)의 탑
수(隋)의 병주(幷州) 정명사(淨明寺)의 탑2)
수(隋)의 병주(幷州) 유사현(楡社縣)의 탑
수(隋)의 위주(魏州) 임황현(臨黃縣)의 탑
신주(神州)의 산천과 해동(海東)의 탑을 합쳐 밝힘
서역(西域)에서 만든 탑을 섞어 밝힘

이상의 21탑은 모두 여래께서 세상에 계시어 교화하고 걸식하실 때, 아이가 모래로 장난하면서 밀가루를 만들었는데, 전생의 복이 가만히 통해 흙밀가루를 부처님께 드린 것에 따른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이의 선심에 감동하여 그것을 받아 땅에 바르고는 아이에게 수기를 주셨다.
“내가 멸도한 지 1백 년이 되면 아육(阿育)이라는 왕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그는 철륜왕(鐵輪王)이 되어 염부제의 왕이 되고, 일체의 귀신을 다스려 다 신하로 만들 것이다. 또 공중과 지하 40리 안에 있는 귀신들을 시켜 앞의 8탑을 열어 사리를 내고, 그들을 시켜 하루 동안에 1억 집에 한 탑을 보시하여 모두 8만 4천 탑이 되게 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위의 경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다 적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이 신주(神州)는 곧 동경(東境)이다. 그러므로 이 중국 땅[漢地]에는 모든 전적에 의해 찾아보면 20탑이 있으니, 이것들은 다 아육왕이 만든 것이다.
만일 다시 자세히 말하면 불법이 동으로 흘러 들어온 뒤로 승속(僧俗)이 만들어 감통(感通)한 것에 백천의 탑이 있다. 우선 이야기하면 아육왕의 21탑 중에서 중요한 증험을 따라 함께 보고들은 것에서 대충 21조(條)를 적는다. 이 이외에 다 적지 않은 것은 광전(廣傳)에 있는 것과 같다.

서진(西晉)의 회계(會稽) 무현(鄮縣)의 탑
처음 서진의 회계 무현의 탑은 지금 월주(越州)의 동쪽 370리에 있다. 무현의 경계는 동쪽으로 40리 밖에 바다가 있는데, 무현의 동남 70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오촌(吳村)이 25리이다.
앞의 전기(傳記)에서 말하였다.
“진(晋)나라 태강(太康) 2년에 병주(幷州)의 이석(離石) 사람 유살하(劉薩何)는 사냥하는 집에 태어나 사냥을 업으로 삼았다. 그가 병으로 죽었다가 깨어나 말하였다. 죽었을 때 어떤 호승(胡僧)이 살하에게 말하였다.
‘너는 죄가 중해 지옥에 들어감이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너의 무식을 가엾게 여겨 우선 놓아 보낸다. 지금 낙하(洛下)의 제성(齊城)ㆍ단양(丹陽)ㆍ회계(會稽)에는 모두 고탑과 강에 뜬 석상(石像)이 있다. 그것은 다 아육왕이 만든 것이니, 부지런히 예배하고 참회하면 그 고통을 면할 것이다.’
그는 다시 깨어난 뒤에 사냥하던 습관을 고치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이름도 고쳐 혜달(慧達)이라 했다. 그가 호승의 말대로 회계로 가서 바다와 산천 곳곳으로 다니면서 그것을 찾았으나 그 단서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갑갑하고 번민하면서 갈 바를 알지 못하다가, 밤중에 갑자기 땅 밑에서 나는 종소리를 들었다. 곧 그 거처를 옮기고 나무를 베어 절로 삼았다. 3일 만에 갑자기 보탑과 사리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그 탑의 형상은 청색으로서 돌 같으면서도 돌이 아니었다. 높이는 1척 4촌이요 주위는 7촌이며, 5층이 노반(露盤)이 있었다. 모두 서역(西域)의 우전왕(于闐王)이 만든 것 같았다. 남쪽의 창을 열면 사방은 천금(天金)으로 되었고, 안에는 동경(銅磬)을 걸었는데, 늘 있던 그 종소리는 이 경쇠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탑신(塔身)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제불ㆍ보살ㆍ금강ㆍ성승(聖僧)과 잡류(雜類) 등의 상이었다. 이 상들은 극히 미세하여 눈을 깜박거리고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백천의 상이 나타났으며, 얼굴과 눈과 손발이 다 갖추어져 있었으니, 가히 신공(神功)의 성적(聖迹)이요, 사람의 지혜로 미칠 바가 아니었다. 지금은 목탑(木塔) 안에 있는데 8왕일(王日)에 그것을 수레에 싣고 읍리(邑里)를 돌면 보는 사람들이 모두 내려와 예배하면서 부처님을 생각하고 선심을 내어 1생 동안 재계(齋戒)한다. 그 사리는 목탑 밑바닥에 있고, 그 탑 왼쪽에는 많은 고적이 있다. 탑 곁의 제기현(諸曁縣)은 월(越)나라 옛 도읍의 땅이다. 구장(句章)ㆍ근무(勤鄮)ㆍ염(剡) 등 4현에는 옛 월나라의 섬이 있는데, 그 주위는 3리이다.”
『지기(地記)』에서 말하였다.
“월나라 중엽에 이곳에 도읍을 두었는데 이궁(離宮)과 별관(別館)의 터가 지금도 있다. 섬돌 곁에는 많은 예장(豫章)이 간격을 맞추어 우거진 것이 사랑스럽다.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그믐과 초하루에 종과 경쇠 소리가 지금도 들려 백성들이 정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는데, 그 자취가 매우 많다.”
『여지(輿志)』에서 말하였다.
“아육왕(阿育王)은 석가의 제자인데 귀신을 잘 부려 하루 밤낮에 천하에 8만 4천의 불골(佛骨)의 보탑(寶塔)을 조성하였는데, 모두 땅에서 솟아 나왔다.”

동진(東晋)의 금릉(金陵) 장간(長干)의 탑
진(晋)나라 사문 축혜달(竺慧達)은 말하였다.
“동방에 두 탑이 있으니, 하나는 여기 있고, 하나는 팽성(彭城)에 있다. 지금 말릉(袜陵)의
장간(長干)에 또 하나가 있다 하니, 그러면 셋이 된다. 지금 경으로써 증험하면 1억의 집에 한 탑을 세웠다 하니, 이것을 계산하면 동하(東夏)에 탑이 많은 것을 의심할 것이 없다. 또 보면 양월(楊越)에 두 탑이 있지만 널리 9역(域)을 통괄하므로 일부러 숨긴 것이다.”
『회계기(會稽記)』에서 말하였다.
“동진(東晋)의 승상(丞相) 왕도(王導)는 말하였다.
‘처음에 강을 건널 때 신채(神采)가 비범한 어떤 도인이 바다에서 온다 하면서 옛날 아육왕과 함께 무현(鄮縣)에서 놀다가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내려 탑을 세워 거기 넣었다. 아육왕은 진인(眞人)들과 함께 탑을 받들고 허공을 날아 바다로 들어갔다. 제자들이 그를 붙들고 이별하다가 한꺼번에 땅에 떨어져 오석(烏石)으로 화했는데 그 돌은 사람 형상 같았으며, 그 탑은 철위산(鐵圍山)에 있다.’”
저부군(褚府君)이 말했다.
“해행자(海行者)의 말에 ‘섬에서 어떤 사람이 오석(烏石)을 모아 도인의 형상을 만들었는데 제법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사람을 시켜 그것을 가지고 와서 보았더니 돌 무늬가 다 가사 모양 같았다.”

양(梁)나라 태조(太祖)가 보통(普通) 3년 만에 고적을 소중히 여겨 나무 부도(浮圖)를 세우니, 전당(殿堂)과 방랑(房廊)들이 두루 완비되어 이름을 아육왕사(阿育王寺)라 했다. 사방에는 산이 둘러 있고, 숲과 대나무가 울창하며, 사이사이에 화초가 피어 있고,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들이 서로 즐거워하니, 참으로 한가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살 만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거기에 비(碑)를 세워 그 공을 칭송하니, 그 글은 저술랑(著述郞) 고윤조(顧胤祖)가 지었다.
“이 절 동남쪽 3리의 산 위에 부처님의 오른발 발자국이 있고, 절 동북쪽 3리의 산꼭대기에는 부처님의 왼발 발자국이 있다. 이 두 발자국은 다 돌에 나타나 있는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른다. 절 북쪽 2리에 성정(聖井)이 있다. 그것은 실로 깊은 우물로서 그 안에는 뱀장어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그것을 고기[魚]보살이라 불렀다. 사람이 거기 가서 예배하면 고기가 사람의 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수(隋)나라 말년에
도적이 지나다가 거짓으로 예배하여 고기가 나왔을 때, 도적이 칼로 찔러 그 꼬리를 끊었다. 그 뒤로는 깊이 숨어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때로 지극한 마음으로 청하면서 예배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다만 물만 뿜을 뿐이었다.
처음에 어떤 스님이 탑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예배하러 왔으나, 그 장소가 황폐하고 쓸쓸하여 음식을 가지고 와서 먹기가 어려웠는데, 다리가 성하지 않은 어떤 늙은 할미가 와서 밥을 지어 주고는 곧 돌아갔다. 날마다 그렇게 하므로 괴상히 여겨 그가 간 뒤에 가만히 따라가 보았더니 그것은 그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우물의 고기가 그 할미로 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 절에는 신령스러운 일이 가끔 있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징조를 대략 적으면, 많은 성승(聖僧)이 나타나서 탑을 돌면서 도를 행하고, 저녁마다 등불을 켜면, 등불 그림자 속에 그것이 형상을 나타내어 벽을 돌아다닌다. 우선 이상으로 몇 줄 적는다. 말이 많으면 그것은 말을 허비하는 것이다.”

당(唐)나라 정관(貞觀) 19년에 민(敏) 법사는 혈도(穴道)에 살면서 도가 뛰어났으며 성적(聖迹)을 찾아 두루 순례했다. 마음이 내켜 수백 명 무리를 데리고 절에 가서 한 달 동안 경전을 강설할 때는 승속이 모두 모였다. 밤중에 어떤 사람들이 인도 승려 백여 명이 탑을 돌고 도를 행하는 것을 보고 그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니, 절의 스님들이 “이런 일은 예사로 있는 일이라 괴상해 할 것이 없다” 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4대(大) 양일(良日)에는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절에 몰려와 재를 올리고 복을 심었다. 그런데 밤중에는 항상 호승(胡僧)이 도를 행하고 경을 외우며 범패(梵唄)를 하는 등의 현상을 보았다.

당(唐)나라 영휘(永徽) 원년(元年)에 회계(會稽)의 처사(處士) 장태현(張太玄)은 절에 있으면서 예배하고 송경했다. 사문 지열(智悅)이 혼자 태현과 함께 이어진 침상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밤중에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외우는 분명한 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듣고 몸과 마음이 기쁘고 편안했다. 경은 다 외웠으나 그 상(相)이 꼭 사실과 같아서 자세히 보았더니 아무 형상도 없었다. 이것은 신(神)이 가르쳐 준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경(西京) 성내의 동남 곡지(曲池)에 있는 일엄사(日嚴寺)는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지은 것이다. 양제가 옛날 진번(晋番)에서 진(鎭)을 두고 있을 때 회해(淮海)의 경사(京寺)에는 탑은 있는데 사리를 안치하지 못했다. 이에 장간사(長干寺)의 탑 밑을 파고 사리를 끄집어내어 경사로 가지고 들어와 일엄사의 탑 밑에 묻고 그 위에 명(銘)을 써 두었다.
그 때 강남(江南)의 대덕(大德)스님 50여 인이 모두 말하였다.
“경사(京師)의 탑 밑 사리는 아육왕이 만든 탑의 사리가 아니다. 아육왕의 사리는 장간(長干)의 본사에 있다.”
그래서 승속들이 의심을 품고 그 시비를 가리지 못했다.
무덕(武德) 7년에 일엄사는 폐사가 되고 스님들은 모두 흩어져 그 사리탑을 수호할 사람이 없었다. 그 때 도선(道宣) 율사(律師)의 문도(門徒) 10인이 서시(西市)의 남쪽 장수방(長壽坊)의 숭의사(崇義寺)에 가서 그 절의 탑 밑을 파고 사리 3매(枚)를 얻었다. 그것은 백색으로서 광명이 있고 크기는 기장만했다. 또 흰 머리털 수십여 개와 온갖 보배와 유리로 된 고기(古器) 등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큰 구리함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발(螺髮)이 없었다. 또 적동색(赤銅色)인데, 지금의 이것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숭의사로 가서 불당의 서남 탑 밑에 옛날처럼 큰 돌함에 넣고 본래의 명(銘)을 그 위에 덮어 땅에 묻어 두었다.
남방 스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손톱과 머리털은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부터 의심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이 사실에 의해 생각해 보면 장간사의 부처님 뼈는 과연 제리(帝里)에 옮긴 것이다. 그러나 강남의 고탑에는 여전히 신이(神異)가 있었는데, 숭의사의 내력은 대개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 두 가지로 말하게 된 것이다. 다만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뒷사람이 그 근원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따로 소략하게 기록할 뿐이다.

서경(西京) 서쪽의 부풍(扶風)의 고현(古縣)은 기산(岐山) 남쪽에 있고, 고탑(古塔)은
평원(平原) 위의 남쪽에 있으며, 아래 북쪽의 고향(高鄕)을 봉천(鳳泉)이라 한다. 주(周)나라와 위(魏)나라 이전에는 절 이름을 아육왕사(阿育王寺)라 하여 승려 5백 명이 있었다. 주(周)나라가 불법을 없애자 상우(廂宇)가 다 파괴되고 오직 양당(兩堂)만 있었다. 대업(大業) 말년에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이 성을 쌓아 외적을 막았다. 당(唐)나라 초년에 잡인들이 여기 살면서 실화(失火)로 모두 다 태워 버리고 타다 남은 시꺼먼 양당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관(貞觀) 5년에 기주(岐州)의 자사(刺史) 장량(張亮)은 본래부터 불법을 믿었으므로 이 절에 와서 예배할 때는 다만 고탑의 탑만 있고 덮개가 없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망운궁(望雲宮)에 아뢰어 탑의 덮개를 청했다. 임금이 조서를 내려 이것을 허락했다. 옛 노인들은 이렇게 전했다.
“이 탑을 한 번 닫은 지 30년이 지났다. 한 번 열어 사람들에게 보이면 승속들로 하여금 모두 선심(善心)을 내게 했다. 그러나 이것을 열면 대중이 모일까 염려하여 감히 사사로이 열지 못하다가 임금에게 아뢰어 허가를 받고 열게 되었다.”
그 깊이는 1장(丈) 남짓하고 두 개의 옛날 비(碑)가 있는데, 모두 주나라와 위나라 때 세운 것이다. 거기서 나온 사리를 승속들에게 다 보였다. 어떤 장님은 여러 해 동안 아무것도 못 보았는데 성난 눈으로 이것을 바로 보다가 눈이 갑자기 밝아졌다. 경향 각지에서 이 탑을 보러 오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만 명이었다. 사리는 높이 드러났지만 보는 사람은 다 같지 않았다. 혹은 옥과 같아서 흰빛이 안팎에 트인 것으로 보고, 혹은 녹색으로 보며, 혹은 부처님의 형상으로 보고, 혹은 보살 성승(聖僧)으로 보았다. 혹은 빨간빛으로 보고, 혹은 오색 잡색으로 보며, 혹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자가 있어 그 내력을 물어보면, 일생에 중죄를 많이 짓다가 어떤 착한 벗을 만나 철저히 참회했다고 했다. 혹 어떤 이는 머리를 태우고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어 땅에 뿌리며 지성이 간절해서야 이것을 보았다. 이렇게 갖가지로 같지 않은 것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었다.

현경(顯慶) 4년 9월에 국내의 스님 지종(智琮)과 혜변(慧辯)이 주술(呪術)을 안다 해서 사신을 따라 궁중으로 들어왔다. 이야기가 아육왕의 탑에 이르자, 이들은 말했다.
“세월이 아주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널리 알리고 수호해야 합니다.”
임금은 말했다.
“이 어찌 아이로서 흙을 보시한 아육왕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것이 가까이 있으면 8만 4천 탑 중의 한 탑일 것이다.”
지종이 말하였다.
“그 허실(虛實)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다시 내어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사리를 얻을 수 있으면 그것은 깊은 선인(善因)이다. 탑 앞에 가서 7일 동안 도를 행하면서 증험이 있기를 빌면 그것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5천 관(貫)의 돈과 5천 필의 비단을 주면서 공양에 충당해 쓰라 했다.
지종은 급사 왕장신(王長信) 등과 함께 10월 5일 아침에 서울을 출발하여 6일 깊은 밤에야 비로소 도착했다. 지종이 곧 탑 안에 들어가 오랫동안 애써 정진하여 도를 행했으나 증험이 없었다. 10일 3경(更)에 이르러서는 팔 위에 숯을 놓고 향을 태우면서 삼가 가다듬고 오로지 마음을 쏟아 다른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탑 안의 불상 밑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 그 소리를 찾아가 보았다. 서광이 환히 비치면서 탑 안에서 솟아오르고 3상(像)은 발 밑에서 각각 광명을 놓아 빨강ㆍ하양ㆍ파랑 등의 빛이 그 위를 돌다가 서까래에 이르러 합쳐져 일산을 이루었다.
지종이 기뻐 뛰면서 스님들을 불러 그것을 보라고 하려 할 때, 곧 탑 한쪽 곁이 막히면서 스님들이 합장하고 서 있었으므로, 이것은 절과 같다고 생각했다. 조금 있다가 광명 일산이 차츰 내려와 땅에서 3척쯤에 있었고 스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비로소 성인이 숨은 줄을 알았다.
중사(中使) 왕장신(王長信) 등은 다 함께 이 상서로운 현상을 보았다. 흐르는 빛은 두루 퍼져 혁혁하고 찬탄하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는데 오래되어야 비로소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에 거기 가서 사리 한 알을 얻었다. 그것은 쌀알보다 아주 크며 빛이 선명했다. 더 자세히 보다가 또 일곱 알을 얻었다. 소반의 물에 그 모두를 넣으니 한 알은 혼자 다른 일곱 알을 돌면서 각각 광명을 놓아 사람의 눈을 부시게 했다.
지종 등이 이 상서로운 상을 임금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임금은 상시(常侍) 왕군덕(王君德) 등을 시켜 비단 3천 필을 보내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몸과 같은 아육왕의 상을 만들고 남는 것으로는 고탑을 수리하라 했다. 그래서 그 상을 탑 안에 넣고, 적당한 때에는 부처님 사리를 내어 복과 지혜를 널리 폈다.
또 임금은 지종ㆍ혜변과 홍려(鴻臚)의 급명(給名) 등을 시켜 회창사(會昌寺)로 가라 했다. 이들은 처음으로 사리를 찾기 위해 20여 인과 함께 땅을 파 내려가다가 사리를 얻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은 다 그것을 보았으나 한 사람에게만은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몹시 괴로워하여 제 머리털을 쥐어뜯으면서 간절히 빌고 그 사리를 제 손바닥에 놓았다. 그러나 그 무게만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도 그 뼈사리를 보지 못할까 겁이 나서 감히 그 빛을 보지 못했다.
그 절 동쪽에 있는 운룡방(雲龍坊)의 어떤 사람은 그 칙사(勅使)가 오기 며칠 전에 그 절 탑 위에 빨간빛이 멀고 가까운 곳을 두루 비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혹은 무지개처럼 바로 하늘로 오르고, 혹은 절의 성안을 비추어 한낮 같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그 절의 스님에게 물어보았다.
스님이 의아해 하면서 말하였다.
“오래지 않아 사리가 열릴 것입니다. 이런 징조는 저 정관(貞觀) 때와 같습니다.”
그 사리의 형상은 새끼손가락과 같았다. 뼈의 길이는 2촌쯤 되는데, 안의 구멍은 방정(方正)하고 바깥 모두 그러하며, 밑은 편편하고 위는 반반하지 못하며, 안팎의 광명은 다 청정했다. 손가락 안의 구멍은 손가락을 용납할 수 있었으며, 그것을 머리에 이고 대중에게 보일 수도 있었다. 나아가 그 광명의 변화는 종잡을 수 없었다.
그 때 경향의 내외 승속들은 2백 리의 길을 이어
계속 왕래하면서 다 부처님의 공덕을 칭송했으니, 그것은 1대(代)의 빛이었다. 경사(京師)의 자은사(慈恩師)의 스님 혜만(慧滿)이 탑을 돌면서 도를 수행하다가 갑자기 기정(綺井)이 바다를 덮었는데, 그 아래에 있는 한 쌍의 눈동자에서 나오는 광명이 매우 컸다. 승속들을 모두 불러 함께 보았으나 다 그러므로 모두 겁이 나서 간담이 서늘해져 감히 다시 못 보았다.
현경(顯慶) 5년 3월에 임금의 명령으로 그 사리를 동도(東都)로 가지고 가서 궁중에게 공양하게 했다. 그 때 서역(西域)에서 또 부처님 정수리 뼈를 바쳐 경사(京師)에 이르렀다. 혹 그것을 본 사람들이, 높이는 5촌이요 너비는 4촌쯤이며 황자색(黃紫色)이라 했다. 또 그 뒤에 경사의 스님 7인이 그것을 가지고 동도(東都)로 가서 궁중에서 도를 행하였다.
임금이 명령으로 그 사리와 정수리 뼈를 내어 도를 행하는 스님에게 보이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부처님의 진신(眞身)이니 스님들은 정수리에 이고 공양하시오.”
그리고 하룻밤을 지낸 뒤에 다시 그것을 궁중으로 거두어들였다. 황후는 비단 천 필의 가치가 있는 잠옷과 휘장을 희사하여 그 사리를 위해 금관(金棺)과 은곽(銀槨)을 만들었는데, 그 조각은 극히 기묘하였다. 용삭(龍朔) 2년에 본탑(本塔)으로 돌려보냈다.
2월 15일에 경사의 스님들과 탑사(塔寺)의 스님들 및 관리 등 수천 인이 함께 사리를 내려 석실(石室)에 넣고 문을 닫고는 말하였다.
“30년 뒤의 일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리고 그 뒤에 상서로운 상이 열려 이곳을 돕기를 바랐다.

기주(岐州) 기산현(岐山縣) 화양향(華陽鄕) 왕장촌(王莊村)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성은 빙(馮)이요, 이름은 현사(玄嗣)였다. 그는 본래 성질이 거칠었고, 더욱이 불법을 믿거나 공경하지 않았다. 그의 이모가 사리를 받들고 동도(東都)에 와서 간직하려 했을 때 현사는 거기 가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모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사리 있는 곳으로 가서 예배하고 돌아왔다.
현사가 성을 내어 말하였다.
“그것에 무슨 영험이 있기에 가서 예배합니까?
만일 사리에 공덕이 있다면 우리 집에 있는 불상에도 공덕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 불상을 태우면서 말하였다.
“여기 무슨 영험이 있으랴.”
이모가 불을 껐으나 그 불상의 하반신은 벌써 탔었다. 현사는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가 사흘이 지난 뒤에 다시 살아나서 말했다.
“갑자기 어느 곳에 갔는데 거기는 지옥 같았다. 큰 새가 날아와 내 눈을 쪼고 혀를 쪼아먹었으며 큰 불구멍에 들어가 살이 타고 지져졌으므로 괴로웠다. 몸이 가려움을 느끼고 손으로 긁으면 눈썹과 머리털이 떨어지며 눈으로 대지를 보아도 정광(精光)이 전연 없었다.”
곁에 있는 친척들은 그를 보고 죄의 징조임을 알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스스로 지은 죄라 대신할 사람이 없다.”
현사는 신식(神識)이 보통 사람과 같지 않아 그저, “불이 내 심장을 태운다. 나는 도사(道士)의 말을 듣고 불법을 믿지 않았다. 부처님을 비방한 죄로 그 재앙이 지금 내 몸에 붙었다”고 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또 남에게 두들겨 맞는 듯 두려워하고 울부짖었다.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손가락을 튀기며 참회하고 살려 달라 애원하면서 밤낮으로 울부짖고 매달리며 잠깐도 쉬지 않았다.
2월 13일에는 친척들이 가엾게 여겨 스님을 청해 참회하고 불상을 조성해 주기를 간청했다. 또 그를 데리고 탑이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경향의 대덕스님이 많이 있었다. 그 때 행건(行虔) 법사가 대중을 위해 설법하고 있었는데, 배상궁(裵尙宮)과 비구니 등 수백 인과 속인 남녀들이 근 만여 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현사가 온몸을 땅에 던져 사리 앞에서 울부짖으며 스스로를 때리고 지성으로 불법을 믿지 않은 죄를 참회하고, 또 행이 깨끗한 비구니를 범한 것과 스님들을 때린 것과 스님들의 과일을 훔쳐먹은 죄를 참회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참회한 뒤에 잠은 조금 편안해졌으나 그 큰 병은 낫지 않아 1년이 못 되어 죽고 말았다.3)
보배로 그 부처님 정골(頂骨)을 바꾸려면 비단 4천 필의 값어치가 있어야 했으므로 그 수에 의거해 비단으로 샀다. 그래서 그 정골을 지금 궁중에 모시고
공양하고 있으니, 즉 나계(螺髻)와 속발(束髮)과 작은 정골이요, 큰 정골은 아직 오지 않았다.

수(隋)의 익주(益州) 복감사(福感寺)의 탑
익주(益州) 곽하(郭下) 복감사(福感寺)의 탑은 익주 곽하성(郭下城)의 서쪽에 있으니, 본래의 이름은 대석(大石)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귀신이 아육왕의 지시를 받들어 서산에서 큰 돌을 가져다 탑의 터를 만들고 사리를 그 안에 두었기 때문에 대석이라 했다”고 하였다.
수(隋)의 촉왕수(蜀王秀)가 진정(鎭井)을 만들 때 그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파 보았더니 완전한 하나의 돌이었다. 곧 우물까지 그대로 묻으려 했으나 그 끝을 볼 수 없었다. 갑자기 바람과 비가 사납게 쏟아졌다. 어떤 사람이 돌 곁을 파다가 돌 한 조각을 주우니, 이것은 예옥(瑿玉)이었다. 보배를 잘 감별하는 상인(商人)에게 물었다.
그는 말하였다.
“이것은 진짜 예옥으로서 세상에 드문 것이다.”
수(隋)나라 초년에 도선(道宣) 율사(律師)가 이 고적을 보고 그 위에 9층의 나무 부도(浮圖)를 세워 지금도 그대로 있다.
익주(益州)에 큰 가뭄이 들 때는 관리가 반드시 이 탑에 비를 빌었고, 또 빌면 반드시 감응이 있었다. 그 감응이 기특했으므로 절 이름을 복감사(福感寺)라 했다.
근자에 어떤 사람이 풍경을 훔쳐 가지고 3층까지 내려왔다. 어떤 신(神)이 두공을 들고 이 도적의 허벅지를 눌러서 안에다 넣었다. 도적은 눌린 그대로 절의 스님들을 불렀다. 스님이 그 두공을 빼내자 그는 비로소 거기서 벗어났다.
영휘(永徽) 원년에 왕안자(王顔子)라는 사람은 도적질로 유명했다. 그는 밤에 이 탑의 상륜(相輪)에 올라가 박산로(博山爐)를 훔쳐 가지고 맨 아래층까지 내려왔는데, 갑자기 두 기둥이 그를 끼워서 벗어날 수 없게 하고는 점점 조여들었다. 그리하여 아주 곤란하게 되었을 때 어떤 호승(胡僧)이 말했다.
“도적이야 하고 크게 외쳐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죽을 것이다.”
그가 그 말대로 외치자, 절의 스님이 와서 구해 주었다.
정관(貞觀) 초년에 대지가 크게 진동하여 이 탑이 흔들려 곧 넘어지게 되었다. 그 때 곽하의 무수한 사람들이 거기 와서 보았다. 갑자기 키가 그 탑만큼한
네 신(神)이 각각 그 등으로 탑의 사면을 고이자 탑이 잠깐 기울었다가 곧 무너지지 않고 바로 섰다. 이것을 본 승속들은 모두 희한한 일이라 하여 찬탄했다. 탑 위의 노반(露盤)은 원래 짧고 작기 때문에 탑이라 할 수 없었다.
그 때 어떤 큰 부자 사업가는 이런 신령한 상서를 보고 곧 3백 냥의 돈을 희사하여 여러 신도들과 함께 다시 노반을 만들었다. 노반을 다 만들어 복분(覆盆)까지 내려왔을 때, 피어나는 향기가 구름처럼 솟아올라 온 성안에 진동하다가 이레 만에야 사라졌다.

수(隋)의 익주(益州) 진원현(晋源縣)의 탑
익주(益州)의 진원탑(晋源塔)은 그 주(州)의 서쪽 1백여 리에 있다. 지금은 등천사(等泉寺)라 하지만 본래 이름은 대석(大石)이었다. 그 내력의 인연은 대강 앞의 것과 같다. 그 여러 탑을 찾아보면 그 상(相)이 같지 않으니, 그것이 어찌 거기 있는 귀신들이 좋아한 것에 따른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면 촉(蜀)의 세 탑이 다 같은 돌이다. 그 이외의 것은 일정한 표준이 없기 때문이리라.
익주(益州)의 북쪽 1백 리에 있는 낙현(洛縣)의 탑은 그 현(縣)의 성(城) 북쪽 곽하(郭下)의 보흥사(寶興寺)에 있다. 그 본래 이름은 대석사(大石寺)인데 그 내력은 앞의 것과 같다.
수(隋)나라 초년에 천축(天竺)의 스님 담마굴차(曇摩掘叉)가 멀리 동하(東夏)로 와서 아육왕의 탑에 예배하고 또 촉(蜀)의 세 탑을 받들고 가서 예배했다. 낙현 대석사의 탑에 가서 예경한 뒤에 성도(成都)로 가려고 양녀역(兩女驛)에서 잤다. 이튿날 아침에 근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그가 물었다.
“누구냐. 왜 함부로 떠드느냐?”
공중에서 답하는 소리가 있었다.
“12신왕(神王)이 본국으로부터 와서 어디 계시거나 법사님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성도의 탑을 보실 것이기 때문에 지금 서역(西域)으로 돌아가려고 스님께 하직하는 것입니다.”
그가 또 말했다.
“이미 멀리까지 전송했다면 왜 형상을 나타내지 않느냐?”
그러자 신들이 곧 얼굴을 나타내었다. 담마굴차는 사람의 얼굴을 잘 그렸으므로 그들의 얼굴을 낱낱이 다 그렸다. 신들은 이내 다 사라졌다.
굴차는 성도로 가서 대 석탑에 예배했다. 도선(道詵) 율사는 그 그림에 의해 12신상(神像)을 나무에 새겨서 장식하고 그 탑 밑에 두었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다.
익주(益州) 곽하(郭下)의 법성사(法成寺)에 사문 도탁(道卓)이 있었으니, 그는 명승(名僧)이었다.
대업(大業) 초년에 낙현사(洛縣寺)의 탑은 수리하는 사람이 없어 겨우 밑 부분만이 남아 있었다. 도탁은 4부 대중을 교화하여 나무 부도(浮屠)를 짓고 장식을 완비하였다. 탑은 용(龍)의 보호를 받으면서 서남 모퉁이의 우물 안에 있었다. 때때로 어떤 상(相)이 나타났다. 곁에 세 못이 있었는데 그 깊이를 아무도 몰랐고, 세 용이 거기 있었으므로 아무도 내려다보지 못했다.
정관(貞觀) 3년에 세 용이 서로 크게 싸워 뇌성 벽력이 치면서 물과 불이 섞여 날다가 오랜 뒤에야 고요해졌다. 그러나 탑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사람들은 용의 털을 주웠다. 길이는 3척쯤 되고 황적색(黃赤色)으로서 사랑스러웠다.

수(隋)의 정주(鄭州) 초화사(超化寺)의 탑
정주(鄭州) 초화사(超化寺)의 탑은 그 주(州)의 서남쪽 1백여 리에 있는 밀현(密縣)의 경계에 있고, 경계는 밀현의 동남 15리에 있으며, 탑은 절의 동남쪽 모퉁이에 있다. 그 북쪽은 절에 이어졌으며, 15보(步)쯤이다. 그 절의 탑의 기부(基部)는 진탕 위에 있고, 서쪽에 대여섯의 샘물이 솟아 넘쳐 내를 이루었다. 샘물 위에는 다 잣나무 기둥을 세우고 진흙 위에는 숯과 모래와 석회(石灰)를 깔아 채우고, 제일 위에는 8척의 평상 만한 큰 방석(方石)을 차례로 깔았으며, 4면의 가는 허리는 그 길이가 1척 5촌이요, 깊이도 5촌인데, 생철(生鐵)로 굳혔다.
근자에 어떤 사람이 시험삼아 돌덩이 하나를 빼었다. 그 밑에는 석회와 내지 잣나무 묶음이 있어 그 한 묶음을 빼었다. 그 길이는 3장(丈)이요 지름은 4척인데, 현재 그대로 있다. 이것이야말로 전륜왕이
탑을 표한 신공(神功)으로 한 일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기초를 다질 수 있었겠는가? 고금에 그 짝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그 위에 세운 탑은 2중(重)이요 탑 남쪽의 큰 샘물은 마구 솟아오르고 성낸 듯 물결치면서도 절대로 소리가 없었으니, 이 또한 어찌 신통 변화의 소치가 아니겠는가.
유주(幽州)의 스님 도엄(道嚴)은 성이 이(李)씨요 얼굴은 극히 괴상하고 컸다. 일찍이 수(隋)나라의 양사도량(煬四道埸)에 있다가 뒤에 속인이 되었다. 지금 나이는 105세로서 혼자 깊은 산에 살면서 해마다 7월에는 이 탑에 와서 힘을 다해 공양했다. 도엄은 그 샘물이 솟아 흐르면서도 소리가 없는 것을 괴상히 여겨, 물에 능란한 곤륜(昆崙)을 보내어 이 샘에 들어가 조사해 보라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돌기둥만이 줄지어 서 있어서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 가운데는 보탑이 있어 높이는 3척쯤 되며 홀로 공중에 우뚝 서 있었다. 사방에는 물이 둘러 있었으나 그것은 끝내 탑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 근원을 생각해 보아도 그 유래를 알 수 없었다. 그 때 사람들은 그것이 아육왕이 세운 것이라 했다. 수(隋)나라 태조 때부터 지금까지 그 절의 탑은 그대로 있다.

수(隋)의 회주(懷州) 묘락사(妙樂寺)의 탑
회주(懷州)의 묘락사(妙樂寺) 탑은 그 주(州)의 동쪽에 있는 무척현(武陟縣)의 서쪽 7리쯤에 있다. 이 절에는 5층의 흰 부도가 있고 탑의 모서리는 15보쯤 되며, 그 곁은 모두 돌을 깐 섬돌이다. 돌 길이는 5척이요 너비는 3촌이며, 그 아래에 차례로 겹쳐 놓은 것이 극히 세밀하여 승속들이 모두 보고 놀라면서 귀신이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 아래는 그 밑을 헤아릴 수 없다.
옛 노인들의 말에 이 탑은 땅에서 솟아난 것으로서 그 밑에는 큰 물이 있다고 하지만 그 진허(眞虛)는 알 수 없다. 어떤 자사(刺史)는 그것을 승려가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사람을 시켜 그 기초 곁을 파 내려가서 샘물의 근원까지 가 보았으나 그 끝을 볼 수 없었다.

수(隋)의 위주(魏州) 임황현(臨黃縣)의 탑
위주(魏州)의 임황탑(臨黃塔)은 그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이름은 사리사(舍利寺)요 지금은 비구니가 살고 있으며, 그 기초의 탑은 지금도 있다. 3면에는
물이 있고 오직 서쪽에만 길이 트여 있다. 그 기초는 돌을 깔아 놓았고, 물 밑에서 연꽃이 나와 3면에 가득하며 그 물이 깊어 사람들이 다 들어가기를 두려워한다. 전하는 말에 “이 사리탑은 물 가운데의 공중에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앞의 정주(鄭州)의 것과 같은데, 지금은 기주대도독부(冀州大都督府)라 고쳤다.
제주(齊州) 임제현(臨濟縣) 동쪽에 벽돌탑이 있는데 지공(誌公)이 만든 것이라 하며, 사면에 돌짐승이 우뚝 서서 사람을 놀라게 한다. 주(周)나라가 불법을 없앨 때 백천 사람을 시켜 힘을 다해 끌어내려 했으나 끝내 끌어내지 못했고, 또 상한 데도 없었다. 지금도 그대로 있다.
익주(益州) 성남(城南) 공혜사(空慧寺) 안의 금장(金藏)에 굴이 있고, 거기 절이 있었다. 근자에 어떤 도사(道士)는 본래부터 그 금장이 있는 줄을 알고 거기 와서 절을 지키는 신(神)에게 빌었다. 신은 그로 하여금 굴에 들어가 두 말의 금속(金粟)을 가지라 했다. 그는 그 말대로 곧 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굴 속에는 금항아리가 줄을 지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온 절의 스님들이 다 알았지만 아무도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방주(坊州) 옥화궁사(玉華宮寺) 남쪽 20리쯤에 있는 크고 높은 재를 세상에서는 단대산(檀坮山)이라 한다. 그 위에 있는 고탑의 터는 매우 크고 웅장하며 면(面)의 모서리가 43척이다. 그 위에 벽돌 1층이 있고 4면에는 돌문이 열렸으며 돌문의 높이는 7척 남짓하고 너비는 5척 남짓하다. 그 곁에는 부서진 벽돌이 무수하다.
한 노인이 전하여 말하였다.
“옛날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여기서 사냥하다가 어떤 사문이 지팡이를 짚고 발우를 들고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왕이 그를 불렀으나 그는 내려오지 않았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붙들어 오라 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보이지 않다가 멀리서 보면 그대로 서 있었다. 왕은 명령을 내려 그가 서 있는 곳을 파게 했다. 깊이 3장(丈)쯤 파 내려가자 거기에는 지팡이와 발우만이 있을 뿐이었다. 왕은 그를 성인이라 존중하여 그 자리에 13층의 벽돌탑을 세웠다.”
왼쪽 마을의 옛 터에서는 항상 종소리가 들렸다. 용삭(龍朔) 원년에
경사(京師)에 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의 혜귀(慧貴) 법사가 이 소리를 듣고 그곳에 가 보았다. 그리하여 또 종소리를 듣고 옛 자취가 슬프고 한탄스러워 그것을 수리하려 하였다. 그러나 샘물이 없음을 한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혜귀가 또 상서로운 구름을 감득(感得)하였을 때 탑을 보호하는 선신(善神)이 말하였다.
“공사를 곧 시작하고 수고로이 의심하거나 염려하지 말라.”
또 어떤 이승(異僧)이 말하였다.
“나는 남방 정토(淨土) 보살로서 교화를 행하러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또 말하였다.
“이 탑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네 번의 시한(時限)을 지났다. 괴로움을 싫다 말고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것이다. 다만 견고히 할 뿐이요, 화려와 사치를 일삼지 말라. 그리고 3층만 올리고 그만두라.”
혜귀는 이 충고에 의해 곧 공사를 시작했다. 탑 곁에는 가마를 두었던 곳이 30여 군데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구운 벽돌이 가득 쌓인 채 그대로 있었다. 다시 탑 남쪽에 있는 냇가를 탐사해 보았다. 그곳은 옛 절터로서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고 있어서 1대(代)가 조용히 살 만한 승지였다.
수리하기 전에 때때로 들려오는 종소리는 꼭 금시 지은 절에서 때를 맞추는 종소리 같아서 세 번 길게 치는 것이 지금 대중을 상당(上堂)에 모으는 법과 같았다.
용삭(龍朔) 3년에 그 자리를 파다가 고명(古銘)을 발견했다. 그 명문에 말하였다.
“주(周)나라 보정(保定) 때에 탑이 무너졌다. 탑이 처음 이루어졌을 때는 남으로 위수(渭水)를 바라보았다.”
또 말하였다.
“탑을 세운 지 4백여 년을 지나 무너졌다.”
보정(保定)으로부터 개황(開皇) 원년까지를 계산하면 20년이 되고, 개황으로부터 용삭 초년까지는 81년이 된다. 또 명문을 검토해 보면, 4백 년 뒤에 비로소 무너졌으니, 그렇다면 이 탑은 후한(後漢) 때에 만든 것이다. 후주(後周) 때에 시문(諡文)이 없는 것은 전주(前周)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노인이 전하는 이른바 주(周) 문왕(文王)이라는 것은 어느 임금 때인지 모르겠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이 탑의 벽돌이 수만 장이어서 못난 속인들이 세운 것이 끝내 아니라는 것뿐이다.
강주(江州)의 여산(廬山)에 세 개의 돌다리가 있었다. 길이는 수십 장(丈)이요 너비는 한 자도 못 되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밑이 없었다.
진(晋)나라 함강(咸康) 때에 유량(庾亮)이
강주의 장(長)이 되어 여산에 올라 다리를 건너다가 노공(老公)의 특히 큰 집과 아주 높은 옥당(玉堂)을 보았다. 또 눈이 부시는 기이한 탑이 우뚝 솟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것을 돌다가 마침내 사람의 집이 아님을 알고는 예배하며 하직하고 돌아갔다.
당(唐)나라 정관(貞觀) 21년에 형주(荊州) 대흥국사(大興國寺)에 있는 탑의 서남쪽 기둥에 아무 까닭 없이 소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거기 가 보았더니 금동불(金銅佛)의 머리가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날마다 조금씩 나와 사흘 밤을 지나서야 그쳤는데 길이가 6촌쯤으로 입불(立佛)이었다. 승속들이 모두 이상하다 했다.
고구려(高句麗)의 요동성(遼東城) 곁에 있는 탑에 대해 노인들이 전하는 말은 이러했다.
“옛날 고려에 성왕(聖王)이 나타나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 구름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을 보고 곧 그리로 갔다. 그러자 구름 속에 어떤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가까이 가면 곧 없어졌다가 멀리서 보면 다시 보였다. 그 곁에는 3층 흙탑이 있고 탑 위는 가마솥을 엎은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다시 가서 스님을 찾아보았으나 거기에는 거친 풀 뿐이었다. 땅을 파서 깊이 1장(丈)쯤 내려가서는 지팡이와 신발을 발견하고 또 파서는 명(銘)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호서(胡書)로 쓰여 있었다. 시신(侍臣)이 그것을 알아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불탑(佛塔)입니다’고 했다. 왕이 자세히 물었다. 그러자 시신이 답하기를 ‘이것은 한(漢)나라에 있는 것으로서 그 나라에서는 포도(蒲圖)라 합니다’고 했다. 왕은 곧 신심을 내어 7층의 나무탑을 세우고 뒤에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갔을 때, 그 본말을 자세히 알았다. 지금 다시 그것을 높였는데, 본래의 탑은 다 썩어 무너졌다. 이것은 아육왕이 통치하던 염부제의 곳곳에 세운 탑이니 괴이할 것이 없는 것이다.”
왜국(倭國)은 이 염부주(閻浮州) 밖 큰 바다 가운데 있어 회계(會稽)와의 거리는 만여 리이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초년에 왜국의 관리 회승(會丞)이 여기 와서 학문하여 안팎의 일을 널리 알았는데, 정관(貞觀) 5년에 본국의 승속 7인과 함께 왜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가기 전에 서울 안의 대덕스님들이 늘 그 나라의 불법에 대한 일을 물었다.

“아육왕은, 경전의 말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1백 년 뒤에 세상에 나와 부처님의 8국(國)의 사리를 가지고 귀신들을 시켜 1억의 집을 한계로 한 불탑을 세워 모두 8만 4천 탑을 만들고 염부제에 두루 전파하였다는데, 당신 나라에는 불법이 늦게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아육왕의 탑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회승이 말하였다.
“저 나라의 문자에 말하지 않았으니 의거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령한 자취들을 살펴보면 그런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 토인(土人)들이 국토를 개발할 때 가끔 고탑(古塔)과 영반(靈盤)을 발견하고 부처님의 여러 의상(儀相)이 자주 신광(神光)을 발사하는 등 갖가지 기이한 상서가 이 아름다운 감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서역지(西域志)』에서 말하였다.
“계빈국은 불교를 숭상하여 그 도성(都城) 안에 절이 있으니 이름을 한사(漢寺)라 한다. 옛날 한사(漢使)가 거기에 갔기 때문에 부도를 세우고 돌로 쌓았는데 높이가 1백 척이다. 승속들의 정성과 공경은 보통과 다르다.
그 절에는 부처님의 정수리 뼈가 있고 또 부처님의 머리털이 있어 그 빛이 청라(靑螺)의 무늬로 되어 있다. 7보로 장식하고 금갑(金匣)에 넣어 두었다.
도성의 서북에는 왕사(王寺)가 있고, 그 절에는 석가보살의 어릴 때의 츤치(齔齒)가 있는데 길이는 1촌이다. 다음으로 그 서남에는 왕비사(王妃寺)가 있다. 그 절에는 금동(金銅) 부도가 있으며 높이는 1백 척이다. 그 부도 안에는 사리가 있어 6재일(齋日)마다 밤이면 광명을 놓아 승로반(承露盤)을 비춰 돌면서 새벽까지 간다.”
『서역지(西域志)』에서 말하였다.
“바사닉왕의 도성(都城) 동쪽 1백 리의 큰 바닷가에 큰 탑이 있고, 그 탑 안에 작은 탑이 있는데 높이가 1장(丈) 2촌이며, 온갖 보배로 장식하여 밤마다 그 광명이 큰 불덩이와 같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5백 년 뒤에 용수(龍樹)보살이
큰 바다에 들어가 용왕을 교화하여, 용왕이 이 보배탑을 용수에게 바쳤고, 용수는 그것을 받아 이 나라에 보시했다’고 했다.
왕이 곧 큰 탑을 세워서 그 위에다 덮었다. 옛날부터 소원을 비는 사람은 다 이 탑에 머리를 조아리고 향을 피우며 꽃일산을 바쳤다. 그 꽃일산은 땅에서 스스로 일어나 돌면서 차츰 위로 올라가다가, 탑이 있는 데 가서는 바로 공중에 올라 하룻밤을 지내고는 곧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서역지(西域志)』에서 말하였다.
“용수(龍樹)보살은 바라나국에서 7백 군데에 탑을 세웠다. 그 이외의 범성(凡聖)들이 세운 탑은 셀 수 없다. 용수는 바로 니련선하 위의 천여 군데에 탑을 세우고 5년에 한 번씩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
서역(西域)의 건타라성 동남쪽 7리에 작리(雀離) 부도가 있다. 그 내력은 이러하다. 즉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과 함께 이 나라를 교화하러 다니다가 성(城) 동쪽을 가리키시면서 “내가 열반에 든 지 2백 년에 가니색가(迦尼色迦) 국왕이 여기에 부도를 세운 것이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2백 년 후에 가니색가왕이 성의 동쪽에 나가 노닐다가, 네 아이가 쇠똥을 쌓아 탑을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는 3척쯤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갑자기 사라졌다. 왕은 이 아이들을 괴이하게 여기면서 곧 탑을 만들어 그 쇠똥탑을 둘러쌌다. 그러나 쇠똥탑은 자꾸 높아져 그 위를 넘어 땅에서 4백 척쯤 올라가서 멈췄다. 왕이 다시 탑 자리를 3백여 보쯤 넓히고 땅에서 나무를 얽어 비로소 그 쇠똥탑과 같게 했다. 그리고 그 위에 3백 척 높이의 쇠문설주를 세우고 땅에서 7백 척쯤 떨어진 13층의 금반(金盤)을 만들었다. 이 공사를 마친 뒤에도 그 쇠똥탑은 여전히 이 큰 탑 남쪽 3백 보쯤에 그대로 있었다.
그 때 어떤 바라문이
이것이 쇠똥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손으로 만지다가 그만 구멍을 내었다. 그리고 세월이 오래 되었으나 그 쇠똥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바라문이 향진흙으로 그 구멍을 메웠으나 채울 수가 없었다. 지금도 천궁(天宮)이 그것을 덮어 싸고 있다.
작리(雀離) 부도는 지금까지 세 번이나 천화(天火)의 재앙을 당해 국왕이 본래대로 수리했다. 부로(父老)들이 말했다.
“이 부도를 천화(天火)가 일곱 번 태우면 불법은 멸할 것이다.”
탑 안의 불사(佛事)는 모두 금옥으로 되어 있으며, 그 천변만화는 다 말할 수 없다. 아침 해가 처음 뜨면 금반이 번쩍이고, 실바람이 잠깐 불면 풍경이 딸랑거린다. 서역의 부도 중에서 이것이 제일이다.
작리 부도 남쪽 50보에 한 석탑이 있다. 그 형상은 바르고 곧으며 높이는 2장(丈)이다. 이것은 매우 신통한 변화가 있어 능히 세상 사람을 위해 길흉(吉凶)의 징조를 나타낸다. 손을 댈 때 그 사람이 길인(吉人)이면 금방울은 소리를 내어 응하고, 그 사람이 흉인(凶人)이면 아무리 흔들어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선사주지감응전(宣師住持感應傳)』에서 말하였다.
“도선(道宣) 율사가 사천왕에게 물었다.
‘세존의 사리를 화장한 뒤에 그 재는 몇 군데의 탑에 넣었으며, 하늘ㆍ사람ㆍ용ㆍ귀신 등은 각각 얼마씩 가졌습니까?’
사천왕이 답하였다.
‘사람은 8분(分), 하늘은 3분, 용은 12분을 가졌습니다. 재는 6분하여 귀신은 2분, 아수라는 3분, 역사(力士)는 1분을 가졌습니다. 당신네 하늘ㆍ사람ㆍ용ㆍ귀신 등은 부디 다투지 마십시오. 이것은 세존의 분부이십니다.’
또 물었다.
‘세존의 승가리는 어디 두었으며, 그 발우와 지팡이는 또 어디 두었습니까?’
답하였다.
‘세존의 승가리는 견질천(堅疾天)에게 부촉하여 잘 호지(護持)하게 하였고 발우와 지팡이는
빈가천(頻伽天)에게 부촉하여 어디 있든지 공양하게 하였습니다. 세존의 승가리는 먼저 기원에 보내어 12년 동안 두었고, 발우는 영취산(靈鷲山)에 15년 동안 두었으며, 지팡이는 용천(龍泉)에 40년 동안 두었습니다.’
또 물었다.
‘승가리와 발우와 지팡이 등은 무엇 때문에 그곳에 여러 해 동안 두었습니까?’
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첫째 비구니를 제도하면 내 정법을 손상시킬 것이요, 둘째 말세의 못된 비구들이 부정한 물건을 저축하기 위해 내 것은 받아 지니지 않을 것이요, 셋째 내 정법을 헐어 없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승가리 등은 6년 동안 비구승의 계단(戒壇)에 두고, 6년 동안은 비구니 계단에 두어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자≻ 하신 것입니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승가리 등을 두 군데 나누어 두라 하셨습니까?’
답하였다.
‘이 또한 말세의 못된 비구와 못된 비구니 등이 이 승가리를 지니지 않음으로써 계율을 많이 범하여 위덕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승가리를 6년 동안 계단에 두게 하시어 그들이 위덕을 지니고 하늘ㆍ사람ㆍ용ㆍ귀신 등이 부처님의 뜻을 공경하게 하신 것이요, 비구ㆍ비구니를 미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승가리를 6년 동안 비구니 계단에 두게 하신 것도 못된 비구니들로 하여금 8경법(敬法)을 수행하여 비구를 공양하면서 음탕한 뜻을 일으키지 않고 깨끗한 행을 닦아 지니게 하신 것입니다. 또 귀신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뜻을 공경해 순종하고 밤낮 여섯 때로 가람에 가서 비구니를 옹호하게 하신 것이니, 그러므로 6년 동안 두라 하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부처님의 발우를 15년 동안 영취산에 두라 하셨습니까?’
답하였다.
‘세존께서는 열반하시기 전에 영취산의 정사에 계시면서 백호(白豪)의 광명을 백천 분으로 나누어 그 1분의 광명을 말법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계를 지키거나 계를 깨뜨리거나, 내지 하늘ㆍ용ㆍ귀신들까지도 여래의 법 안에서 하나의 선이라도 생각하면
그에게는 이 광명을 주십니다.
세존께서 처음 성도하셨을 때 사천왕이 돌발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만이 쓰실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여래께서 멸도하신 뒤에는 이것을 영취산에 두었고, 또 백호 광명을 주어 모두 이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말법 시대에는 이 발우를 따르고 다른 나라 비구들에게도 음식을 주며, 또 하늘ㆍ용 등이 부처님의 뜻을 따르면 비록 비법(非法)을 짓더라도 마침내 죄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15년 동안 영취산의 정사에 두었습니까?’
답하였다.
‘처음 5년 동안 두는 것은 모든 비구들로 하여금 5음(陰)을 관(觀)하여 삼매(三昧)를 얻게 하려 함이며, 10년 동안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법을 알아 1백 가지 법문을 얻게 하며, 이후부터는 모든 나라에 유포하여 법이 멸할 때까지 계속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 지팡이를 40년 동안 용의 굴 속에 두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모든 외도를 보호하고 번뇌의 악룡을 항복받으며 결사(結使)를 쳐부수어 대승과 4제(諦)의 법륜을 깨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래께서 떠나신 뒤에 40년 동안 날아다니는 나찰이 있어서 능히 비니장(毘尼藏) 및 12부 경전을 설명하면서 거짓으로 선한 비구가 되어 계를 지키는 사람을 날마다 4백 명씩 잡아먹었습니다. 이 악을 끊기 위해 그 용의 굴을 진압했습니다. 그리하여 정법을 4백 년 동안 더 머무르게 하고, 또 상법(像法)을 1,500년 동안 더 머무르게 했으며, 다시 말법을 2만 년 동안 더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 때 대범천왕이 부처님께 와서 아뢰었다.
‘여래께서는 처음 성(城)을 넘어 병사왕국(洴沙王國)에 가시어 수신(樹神)에게 길을 물으셨습니다. 수신은 부처님을 궁전으로 청해 와서 아뢰었습니다.
≺저는 이 신(神)의 몸을 받은 지
20대겁(大劫)이 지났습니다.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다 여기 오셨습니다. 이곳 저의 궁중에는 과거 모든 부처님의 네 개의 치아와 천 개의 탑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부처님께 부처님께서 옛날 동자로 있을 때의 그 츤치(齔齒) 네 개를 청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드리워 그 네 개 치아를 제게 주십시오. 저는 탑을 만들어 그것을 공양하고자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허락하시고 곧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부왕(父王)에게 가서 그 전장신(典藏臣)으로부터 나의 네 개의 치아를 가지고 오너라.≻
아난은 부처님의 분부대로 곧 그것을 가지고 왔다. 부처님께서는 수신에게 말씀하셨다.
≺치아 하나만 두고 다 너에게 주어 공양하게 하리라. 너는 탑을 만들고 또 내 경전을 베껴라. 나는 나의 네 사람의 제자를 시켜 그 탑 안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내 치아탑을 수호하게 하리라.≻
그 때 수신이 곧 7보(寶)를 가지고 세존께 와서 신력으로 한 찰나 사이에 높이 50유순의 네 탑을 만들고, 또 진주 누각과 백은(白銀)의 대(坮)를 만들었으며, 이 탑 안에 각각 대관(坮觀)을 지어 모두 8만 4천을 갖추었다. 누대의 탑이 완성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열반한 뒤에 가섭의 결집(結集)이 끝나면, 내 가르침을 베껴 대비니장(大毘尼藏)을 저 탑 안에 넣게 하라. 내가 이 탑에 있는 것이니, 너는 잘 수호하여 손실이 없게 하라. 나는 열반에 다다랐을 때 문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3대겁 동안 무수한 고행을 닦아 지금 네 치아를 얻고 탑을 세워 그것을 안치했다. 말세에 법이 멸망하려 할 때에는 그것으로 하여금 중생을 이롭게 하고 정법을 일으키게 하라고 하리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처음 성도할 때에는 강에서 목욕한 뒤에 6년 동안 고행할 때 손톱과 발톱을 깎지 않아 다 7촌쯤 길었다. 그 때 대범천왕이 내 손톱과 발톱이 긴 것을 보고 7보(寶)의 손칼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다 깎았다. 나는 그것을 부왕(父王)께 드려
잘 호지하게 하였고, 부왕이 돌아가신 뒤에는 다시 그 창고지기 신하에게 맡겨 두었다. 너는 저기 가서 그것을 가지고 오너라. 내가 쓸 데가 있다.≻
아난은 분부를 받고 거기 가서 그것을 가지고 왔다. 부처님께서는 함을 열고 그것을 꺼내어 대중에게 두루 보이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20개의 내 손톱 발톱이다. 마치 빨간 구릿빛과 같다.≻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희들, 하늘ㆍ사람ㆍ용ㆍ귀신 등은 내 손발톱을 자세히 보아라. 아마 오는 세상의 모든 악마와 외도들은 따로 비슷한 것으로 내 진짜와 바꿀 것이다. 만일 의심이 생기거든 그것을 쇠다듬잇돌에 놓고 금강추(金剛鎚)로 내리쳐 보아라. 그래서 부서지지 않으면 그것은 진짜 내 손발톱이다. 또 불로 태우고 단련하여 금색으로 변하고, 오색 광명을 놓아 유정천(有頂天)을 비추면 그것도 진짜 내 손발톱이니라.≻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와 사천왕 등에게 말씀하셨다.
≺이후 말법 시대에는 많은 못된 비구들이 염부제에 가득하여 위덕도 없고 지혜도 없을 것이다. 1,400년 뒤에 너희들은 내 손발톱 열 개를 가지고 사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되, 한 나라에서 이레씩 머물러라. 이렇게 다니다가 향산(香山) 꼭대기에 있는 아뇩달못[阿耨達池] 가운데 있는 금사주(金沙洲)에 가서는 1,500년 동안 머물러라. 나는 이 대천(大千)세계의 8백억 나라에 내 가르침을 처음으로 유포하리라. 그대 문수사리는 몸을 나누어 국왕으로 변하고, 금강제(金剛薺)보살은 몸을 나누어 대신이 되고, 금강당(金剛幢)보살은 몸을 나누어 비구가 되라. 너희 세 대사는 다 함께 내 가르침을 유포할 때 피로와 권태를 내지 말라.≻’
또 물었다.
‘한지(漢地) 사탑(寺塔)의 고적은 어떠합니까?’
답하였다.
‘지금 여러 곳의
탑사들은 대개는 옛 부처님께서 교훈을 남기신 터로서 아육왕이 표한 복지(福地)는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저 유명한 탑들은 항상 듣는 바와 같지만 이름이 없이 감춰진 것도 도처에 있습니다. 그것은 저 하서(河西) 감주(甘州) 곽중(郭中)의 사탑과 같은 것으로서 그 밑에는 옛 부처님의 사리가 있으며, 또 하주(河州) 영엄사(靈嚴寺)의 불전(佛殿) 밑에도 사리가 있습니다.
진주(秦州) 맥적(麥積) 벼랑에 있는 불전 밑의 사리는 산신(山神)이 간직하고 있는데, 이 절은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지어 이름을 영안사(靈安寺)라 했습니다. 40년이 지난 뒤에 어떤 사람이 그것을 꺼낼 것입니다. 형주(荊州) 장령사(長靈寺)의 탑은 아육왕이 지은 것으로서 그 밑의 사리는 1장(丈) 깊이의 땅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5중(重)으로 된 돌함에 부처님의 쇄신골(碎身骨)이 들어 있습니다. 익주(益州)의 3탑인 대석(大石) [지금 이름은 복감(福感)이다.]과 무서(武誓)[지금 이름은 정란(靜亂)이다.]와 낙현(駱縣)[지금 이름은 법성(法成)이다.] 등은 다 신이(神異)가 있는데 별전(別傳)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또 물었다.
‘양도(楊都)의 장간탑(長干塔)과 무현탑(鄮縣塔)을 아육왕이 지은 것이라면 그 일은 어떻습니까?’
답하였다.
‘옛날 유살하(劉薩何)가 신령스러움을 느껴 양주(楊州)의 상월성(上越城)에 가서 장간(長干)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상한 기운이 있어서 곧 그 자리를 팠다가 위의 탑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전기(傳記)에서 밝힌 것과 같습니다.’
도선(道宣) 율사가 물었다.
‘그렇다면 거기 약간(若干:절의 刹干)이 있었다는 것인데, 거기 불찰(佛刹)이 있었습니까?’
답하였다.
‘그것은 찰간(刹干)이 아닙니다. 간(干)이란 바로 땅의 긴 언덕이니, 언덕을 간이라 합니다. 탑이 긴 언덕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월(干越)을 온통 쌌다≻는 글이 있지 않습니까. 월나라 땅에는 긴 언덕이 많이 있었습니다.
임해현(臨海縣) 무현(鄮縣) 등의 탑도 아육왕이 세운 고탑입니다. 이는 현겁(賢劫)의 부처님이신 가섭부처님의 팔뼈로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땅에서 솟아난 것이니 세속의 복을 열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아라한이 철위산(鐵圍山)에 가서
조그만 탑 안에 머물렀습니다. 그 탑에는 크고 선한 신[善神]이 있었으며, 또 우물 안의 뱀장어 두 마리가 그 탑의 신(神)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 있는 돌 위의 발자국은 과거의 3불(佛)이 밟은 자리라 합니다. 옛날 주(周)나라 때에 여기에 사람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이 탑을 세운 것입니다.’
또 물었다.
‘만일 그렇다면 주(周) 목왕(穆王) 이후의 여러 왕이 탑을 세울 때에는 왜 거기에 대한 이 나라의 문헌이 드물게 보입니까?’
답하였다.
‘탑을 세우는 것은 과거의 인연 때문이며, 대개는 신령(神靈)이 세운 것인데, 보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전하는 문자가 적은 것입니다. 양웅(楊雄) 유향(劉向) 등이 책을 열람하다가 가끔 불경을 보았으니, 이것이 어찌 진(秦)나라 이전에 이미 불법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형악(衡岳) 남쪽 6백 리의 영주(永州) 북쪽에 큰 내가 있으니 동서는 5백여 리요, 남북은 1백여 리입니다. 옛날 이 내 가운데에 수십만 집의 사람이 살았습니다. 지금은 온갖 큰 나무들이 나서 큰 것은 지름이 23장(丈)이요, 그 밑에는 초목이 없어 그 깊은 숲은 사랑할 만합니다. 그 숲 속에는 큰 강이 동으로 흘러 상강(湘江)으로 들어가는데, 산골 시냇물을 따라가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남쪽의 골짝이 있어 내가 그 골짝 북쪽에서 나와 골짝으로 들어갑니다. 둥근 못 사방은 섬돌이요, 못물은 깊고 용이 있어서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항상 우레가 산골을 울립니다. 왼쪽에는 귤과 탱주, 양매(陽梅) 등 많은 산과일 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못 남쪽에 있는 아육왕의 큰 탑은 돌꽃으로 받들어져 있으며, 그 위에는 석룡(石龍)을 덮어 땅과 수평을 이루고 있습니다. 탑 동쪽 벼랑 위에 있는 비석의 전서(篆書)는 알아볼 수 있어 사닥다리로 올라가 베껴 보면 탑을 세운 유래를 알 수 있습니다.
형산(衡山) 남쪽에 대명(大明) 스님이 세운 절에도 고탑이 있습니다. 그 절은 남북이 10여 리인데 7처(處) 8회(會)의 유거정원(流渠靜院)이 곳곳에 서 있습니다.’
‘모든 신(神)들의 자재한 위력은 특히 큽니다.
저 촉천(蜀川)의 세 탑은 다 이름을 대석(大石)이라 하여 사람들이 파 보면 그 뿌리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진천(秦川) 무공(武功)의 한 탑은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이름을 육왕(育王)이라 하여 30년 만에 한 번 나타난다. 정관(貞觀) 이후로 두 번 나타났는데 상서로운 광명이 비록 뛰어나게 장하지만 그 사리는 손가락 뼈와 같고 돌확에 들어 있다≻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처럼 좁습니까?’
답하였다.
‘저 여러 귀신들도 빈부(貧富)가 일정하지 않으니 그것은 각기 과거의 업 때문입니다. 사람이 각기 다른 것처럼 천상도 그와 같아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따라 이 탑에 공양하는 것입니다.’[이하 생략]
또 물었다.
‘고산(鼓山) 죽림사(竹林寺)의 이름은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답하였다.
‘이 절은 가섭불 때 지은 것인데 주(周) 목왕(穆王)이 거기에 다시 중창한 것입니다. 목왕이 지은 불전(佛殿)과 소상(塑像)이 지금도 있습니다. 산신(山神)이 부처님께 청해 5백 아라한이 이 절에 살았고, 지금은 20성승(聖僧)이 이 절을 둘러 있습니다. 왼쪽에는 현재 5만의 5통(通) 신선이 이 절의 스님들을 공양하고 있습니다.’”[이하 생략하는데 그것은 앞의 가람의 영험기(靈驗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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