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보자] #4435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상권
통합대장경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상권
법계도기총수록1) 상권의 1
찬자 미상
김호성 번역
【본문(本文)】2) 『일승법계도』3) 시(詩)와 하나의 인(印)을 합한 것이니, 54각(角)이고 210자(字)이다.
위대한 성인의 가르침은 모남이 없어서 근기에 응하고 병에 따름이 하나가 아닌데, 미혹한 자는 자취만을 집착하여 체(體)를 잃어버리는 줄을 알지 못하니 부지런히 종(宗)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그럴 날이 없다. 그러므로 이치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거하여 간략하게 ‘반시(盤詩)’4)를 지으니,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는 이름이 없는 참된 근원[眞源]으로 돌아가길 바라노라.
시를 읽는 방법은 마땅히 가운데의 ‘법(法)’자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돌고 굽히며 굽어져서 ‘불(佛)’자에 이르러 마치게 되니, ‘인의 길[印道]’을 따르면서 읽어야 한다.
法性圓融無二相。諸法不動本來寂。無名無相絕一切。證智所知非餘境。真性甚深極㣲妙。不守自性隨緣成。一中一切多中一。一即一切多即一。一微塵中含十方。一切塵中亦如是。無量遠刧即一念。一念即是無量劫。九世十世互相即。仍不雜亂隔別成。初發心時便正覺。生死涅槃相共和。理事冥然無分別。十佛普賢大人境。能仁海印三昧中繁出如意不思議。雨寶益生滿虛空。眾生隨器得利益。是故行者還本際。叵識妄想必不得。無緣善巧捉如意。歸家隨分得資糧。以陁羅尼無盡寶。莊嚴法界實寶殿。窮坐實際中道床。舊來不動名為佛。
【본문】 『일승법계도』……2백10자이다.5)
『대기(大記)』6) 이러한 일승법계도 등으로 지엄(智儼: 儼師, 602-668)의 5중해인(重海印)8)에 분배하면, 이른바 일승법계(一乘法界)는 망상해인(忘像海印)에 배대되고『기(記)』에서는 첫째 폭을 부정하면서 ‘이는 해석에 해당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9) ‘도(圖)’ 한 글자는 현상해인(現像海印)에 배대되니, 이른바 ‘도’는 형상[像]이다. 경에 이르기를, “곧 그 형상과 같이 신통력을 나타낸다”고 하였으며, 법장[藏師]이 해석하기를, “그 염하는 바와 같아서 위의 1백 24가지 질문과 아래로 제6 회상 이래로 설한 바 법문에 이르기까지10) 이 질문에 답하는 자가 모두 여래의 법계신 가운데서 원명(圓明)하지 않음이 없어서 몰록 그 형상을 나타낸다”(운운)라고 하였다. 아래 경에서는 “청정한 법신 중에는 어떠한 상(像)도 나타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이상)라고 하였는데, 이 글은 ‘안으로 깨침[內證]’과 ‘밖으로 교화함[外化]’에 통한다. 여기서는 안으로 깨침을 기준으로 하여 배대한 것이다.
‘합시일인(合詩一印)’은 부처님의 외향11)해인(外餉海印)에 배대한 것이니, 이른바 시(詩)는 보현의 기틀을 나타내는 것이고, 인(印)은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마음[外向心]’을 나타내는 것이다.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마음의 인(印)이 보현의 큰 기틀의 ‘안으로 향하는 마음[內向心]’ 맨 앞[頭]에 그윽이 계합하기 때문이다.
‘54각(角)’은 보현입정관해인(普賢入定觀海印)에 배대되니, 이른바 보현의 내증(內證)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만일 불보현문(佛普賢門)을 기준으로 하면 보현의 입정(入定)은 다만 외향심인(外向心印)을 궁극적으로 증득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에 첫째와 둘째의 해인12)을 통틀어서 증득하는 것이니, 보현이 안으로 향하면 곧 십불(十佛)이고, 십불이 밖으로 향하면 곧 보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만일 ‘기틀[機]에 나아가 구분 짓는 문’을 기준으로 하면 불외향에는 오직 증분(證分) 하나뿐이니, 아직 원만하지 못하기13) 때문이다. 지금은 뒤의 뜻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이 정장정(淨藏定)14) 중의 5교(敎)15)와 나아가 무량승(無量乘)의 ‘근기와 성품의 설고 익음[根性生熟]’ 및 법계 모든 법의 두각(頭角)이 몰록 나타나기 때문이다.
‘210자’는 보현이 정에서 나와 마음 가운데 있음과 어언해인을 나타냄에 배대하니, 이른바 이 해인에서 5주인과(周因果)16) 등의 법을 나누어 보여 문자ㆍ언어를 시설하기 때문이다.
신림(神琳)17)의 뜻은18) ‘일승법계도’란 법계의 법은 소증(所證)이며, 금일 나의 마음은 능증(能證)이니, 곧 이 능소를 얻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일(一)이며, 능히 닦는 사람의 수행 위계[行位]를 ‘승(乘)’이라 이름하고, 이와 같은 부동의 궤칙의 분제가 이루어지므로 ‘법계’라 하는 것이다. 법계 법의 본위(本位)는 곧 우리 5척의 몸[五尺身]이니, 이 뜻을 보이고자 전(全)법계 한 몸의 형상[像]을 그리기 때문에 ‘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도인 가운데 ‘반(盤)’은 삼승인 것이니, 이른바 일승의 평등한 가르침[平道敎]19)
중의 머무름 없는[無住] 본체를 등지고, 일념의 ‘생하지도 않고 둘도 아닌[不生不二]’ 곳에 집착[盤蟄]하며,20) 나아가 하나의 모습[一相]ㆍ하나의 자취[一跡] 중의 보불(報佛)의 과(果)에 집착하기 때문이다.21)
‘회(廻)’는 소승이니, 이른바 법공진여(法空眞如)가 있는 줄 알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인공(人空)의 이치에 집착함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굴(屈)은 인천(人天)이니, 이른바 출세간[出世]의 행덕(行德)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5계(戒)ㆍ8계의 인천의 업에 굴집(屈執)하기 때문이다. 곡(曲)은 3도(途: 3악도)이니, 이른바 인천의 행업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사견에 집착[曲執]하여 3도(途)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삼승 3도의 모양[相]을 그려 다하므로 ‘전법계(全法界) 한 몸의 형상을 그려 짓는다[畫作]’고 하는 것이다.
『법융대덕기(法融大德記)』22) ‘일승법계도’에 2중(重)의 가려내고 취함[簡取]이 있다. 첫째는 교분은 가려내고 오직 증분만 취함이니, 이른바 일승의 법은 증(證)ㆍ교(敎)에 통하지만 계(界)라고 말한 것은 교분을 가려낸 것이니, 증분은 일승법의 궁극적인 경지[究竟際]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오직 삼승을 가려내고 일승의 증ㆍ교 두 분(分)을 통틀어 취함[通取]이니, 이른바 일승으로써 삼승을 가려내기 때문이다. 이 일승의 일(一)과 이 아래의 ‘시종(始終)을 떠난 하나의 붉은 인[一朱印]’은 지엄의 본말상생문 중의 일자인(一字印)과 아울러 한 뜻인 것이다. 대경(大經)의 첫머리에서 일자인을 살핀 것은 ‘1부(部)의 처음부터 끝까지 설해진 문문구구가 오직 일(一)을 나타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또한 『오권소(五卷疏)』23)에서는 ‘삿됨에 대하여 올바름을 나타내는[對邪現正]’ 곳에서 일자인을 살핀 것은 모든 법 가운데 만일 두 가지 견해[二解]를 낸다면 이는 삿됨[邪]이며, ‘법이 하나임’을 안다면 곧 이 바름[正]인 것이다. 이른바 만일 보살이 한 번의 성내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60문(門)24)의 보행(普行)이 백만 장애를 이룰 것이니, 진실로 성내는 마음은 ‘나와 남이 다르다고 집착하는[自他別執]’ 가운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두 가지 견해를 낸다면 이는 삿됨이다’라고 한 것이다. 만일 보살이 동체대비를 일으킨다면 백만 가지 장애 문25)이 60보행을 이루니, 이른바 3세간의 법이 바로 자기의 몸과 마음임을 보고 동체대비를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법이 이 하나임을 안다면 곧 이 바름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 『입법계품초(入法界品抄)』26)에서 일자인을 살핀 것은, 만일 모든 법이 둘이고 셋이라고 본다면 곧 8가지 근본죄(根本罪)를 범하여 일승법계에 들어가지 못하나, 만일 모든 법에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않으면 곧 일승법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도 또한 그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둘을 설명하는 것도 셋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니, 다만 요컨대 일(一)을 나타내기 때문일 뿐이다.27)
이른바 일(一)이라는 것은, 능소가 없는 가운데서 우선 억지로 나누어서 능관(能觀)의 일이 있고 소관(所觀)의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만일 자기의 몸과 마음이 모든 법을 총섭(摠攝)함을 환히 알아 옆이 없고[無側] 남김도 없어[無有] 능소가 끊어지면 능관의 일이 되고, 곧 이 몸과 마음이 머무르는 곳은 소관의 일이 되는 것이다.
【문】 이 일 가운데 어떻게 들어가는가?
【답】 지관(止觀)을 닦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지관인가?
【답】 만일 일승에 의지하여 지관을 닦는다면, 6상의 도장[印]으로 10보법(普法)을 인(印)쳐서 각각의 지위[位]를 움직이지 않고 융섭하여서 하나가 되어 환하게 분명한 것이 관(觀)이니, 마치 도장이 사물을 인치는 것처럼 들지도[擧] 않고 구르지도[轉] 않으니 이와 같은 관지(觀智)가 법에 칭합하여 능(能)을 여의고 소(所)를 끊어 하나여서 분별이 없어[一無分別] 움직이지 않는 것이 지(止)이다. 승(乘)은 위의 한 곳[一處]28)에서 능히 결정코 믿는 것을 승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이 믿지 않는 것은 승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만일 삼승이라면 진여의 법을 듣고 능히 몰록 믿지 못하고 점차로 믿기 때문에 10신(信)이 있으며, 몰록 이해하지 못하고 점차로 이해하기 때문에 10해(解)29)가 있으며, 나아가30) 몰록 증득하지 못하고 점차로 증득하기 때문에 10증(證)이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이 점차로 불과에 이르기 때문에 ‘승’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여실한 도[如實道]를 타고 와서 정각을 이룬다’는 것이 바로 그 뜻인 것이다. 만일 일승이라면 위의 한 곳에서 만약 원만한 믿음을 일으킨다면 곧 이 원만한 증득이므로 승이라 이름하는 것이니,31) ‘하나가 옮겨가면[運] 일체가 옮겨간다’는 것이 곧 이 뜻인 것이다. 법은 바로 나의 몸과 마음이며, 계(界)는 곧 이 몸과 마음이 ‘통괄적으로 포섭하여 상대함을 끊어[統包絶待]’ 전후제가 끊어지니 곧 법의 구경변제의 뜻이다. 도(圖)는 상(像)이니, 마치 코끼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코끼리의 형상을 그려서 보여주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행자(行者)가 자기의 몸과 마음이 바로 법계불(法界佛)32)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법계불의 형상을 그려서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입법계품초』33) 이제 법계에 들어가 상응하는 바를 따라 법의 영역[分齊]을 이루되 먼저 그 허물을 떠나야 한다. 처음 발심한 보살[初發心菩薩]이 대승에 나아감에 8근본죄(根本罪)34)가 있어서 모든 선근을 태워버리고 악취에 떨어지며 안온한 곳을 떠나서 인천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또 대승 경계의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것이다.35)
한 번 오탁악세에 태어나 어느 정도 선근이 있어서 선지식을 가까이 하여 깊은 법으로 돌아가서 위없는 마음을 발하며, 매우 깊은 법을 듣고 독송하며 수지하여 지혜가 적은 사람을 위하여 독송하고 해설하면 다른 사람이
듣고서 놀라고 의심하며 두려워하여 보리심에서 물러남을 일으키고 성문승을 즐겨하니,36) 이것이 첫 번째 무거운 죄[第一重罪]이다.
오직 모름지기 근기를 알고 마음을 요달하여 차례로 설하되 옅은 곳에서 깊은 곳에 이르러야 하니,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대가 어떻게 대승심을 발할 수 있겠는가? 일찍 성문ㆍ연각을 향하여서 열반에 들어감만 같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두 번째의 무거운 죄[第二重罪]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그대가 어떻게 계(戒)와 위의(威儀)를 배울 수 있겠는가? 마땅히 대승심을 속히 발하고 대승경전을 수지하고 독송하면 몸ㆍ입ㆍ뜻의 업이 마땅히 청정함을 얻으며 역시 악한 과보를 받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세 번째의 무거운 죄[第三重罪]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대는 성문의 경전을 독송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마땅히 성문의 경전을 덮어라. 성문의 법 가운데서는 결사(結使)의 번뇌를 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청정하고 깊은 대승의 경전을 듣고 지니면 이는 능히 악을 멸하고 깨달음[菩提]의 선을 낼 수 있다”37)라고 말하여 믿고 받아 지니는 자가 있다면, 두 사람38)은 다 네 번째의 무거운 죄[第四重罪]를 얻게 된다.
또한 이익을 구하기 위해 대승법을 설하여 대승을 설해 이익 얻음을 보고 미워하며 훼손하고 가벼이 여기며 질투하면, 이것이 다섯 번째 무거운 죄[第五重罪]이다.
또한 이익을 구하기 위하여, “나는 깊은 법을 이해한다”라 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어서 얻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등지고 어긋나는 것, 이것이 여섯 번째 무거운 죄[第六重罪]이다.
또한 전다라(旃陀羅)39)의 행을 짓는 것이니, 다른 선한 비구의 물건과 3보의 물건을 취하여 높은 관리와 대왕에게 주어서 왕과 관리의 힘에 의지하여 선한 비구를 가벼이 여기며 화내고 미워하며 질투하는 것, 이것이 일곱 번째의 무거운 죄[第七重罪]이다.
또한 악행을 짓고 스스로 왕과 관리의 뛰어난 힘과 재시(財施)를 믿고서 선한 비구를 가벼이 여기고 놀리며 욕하고 싸워 어지럽게 하며, 비법(非法)으로 설법하여 올바른 경률을 버리고 법에 어긋나게 제정하며, 선을 행하는 비구 및 좌선이나 경전을 독송하는 비구들에 대하여 번뇌가 없는 데서 번뇌를 낳고 이미 번뇌가 늘어났다40)고 말하는 것, 이것이 여덟 번째의 무거운 죄[第八重罪]이다.
만약 이미 범한 자는 마땅히 허공장(虛空藏)보살41)을 의지하여 죄를 참회하여 멸해야 할 것이다. 초발심 보살이 만약 대법(大法)을 널리 유통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려는 자는 먼저 앞에서 말한 허물42)을 여의고 그 다음에 제9지(地)43) 법사의 법문에 의지하면 곧 법계에 응할 것이다.
『진수대덕기(眞秀大德記)』44) 일(一)이란 ‘타가 없다[無他]’는 뜻이다. 삼승에서는 ‘성품[性]이 하나’라고 하고, 일승에서는 ‘연(緣)이 하나’라고 한다. ‘연이 하나’라는 것은 이 중도 및 진여[如]를 기준으로 함을 따르는 것이다. 이는 「십회향품」45)에 나오는 1백 구절의 여(如)이니, 이른바 해의 여[日如]ㆍ
달의 여[月如] 등이다. 비록 곧 이 여(如)이나 해의 이름[日名]ㆍ해의 모습[日相], 달의 이름ㆍ달의 모습이 있어서 이름과 모습이 없지 않다. 그러나 보현의 증득[證]을 기준으로 하면 이러한 이름과 모습이 없으니, 다만 삼승을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이름과 모습에 의지하였을 뿐이니, 이는 보현의 교분을 기준으로 하여 분별한 것이다.
【문】 ‘이 중도를 기준으로 함’을 따르는 것이 이미 매우 깊은데, 다시 어떤 뜻을 기준으로 하여 보현의 증득으로 삼는가?
【답】 ‘이 중도 및 진여를 기준으로 함’을 따른다는 것은, 삼승교용(三乘敎用)의 해의 이름ㆍ해의 모습 등에 의지하기 때문에 ‘교와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증분이란 언어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름을 끊은 것이고, 마음이 행하는 곳이 멸하였기 때문에 모습을 떠난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곳은 유마거사[淨名]46)의 침묵과 어떻게 다른가?
【답】 정명의 침묵은 이름과 모습이 전도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과 모습을 떠나야 바야흐로 침묵이 되는 것이며, 아홉 회상[九會]47)의 부처님의 침묵은 이름과 모습 중의 침묵이므로 매우 다른 것이다. 이른바 이름과 모습을 버리지 않는 것이 곧 이 이름과 모습 중의 침묵이니, ‘허공이 도무지 아무 물건도 없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이는 보현의 증분을 기준으로 해서 분별한 것일 뿐이다.
【문】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행하는 곳이 멸한 것’도 또한 지극히 깊은데, 다시 어떤 뜻을 기준으로 하여 10불(佛)의 경계로 삼는 것인가?
【답】 앞에서는 비록 침묵이라 하더라도 이름과 모습 중의 침묵이지만, 만일 과분(果分)이라면 맨 처음부터[初初] 이름과 모습을 보지 않는 곳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곳48)에는 법(法)도 없고 물(物)도 없는가?
【답】 앞의 위(位) 중에서 논한 법과 같아서 맨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문】 그렇다면 이 가운데 실제로 법이 없는가?
【답】 갖추고 있다.
【문】 어떤 사물이 있는가?
【답】 이는 옛 스님[古德]이 말한 바 ‘정을 돌이켜 보는 곳[反情見處]’인 것이다.49)
‘승(乘)’은 ‘실어 나른다[運載]’는 뜻이다.
【문】 위의 ‘일(一)’ 자 중에 이미 3가지의 뜻50)이 있었는데, 승도 역시 그러한가?
【답】 그렇다. ‘과(果)와 다른 인(因)’으로부터 ‘인과 다른 과’에 이르는 것이 삼승에서의 승(乘)의 뜻이다. 지금은 ‘인이 곧 과’인 뜻을 기준으로 하여 ‘운재’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현의 교분인 것이다. 인과의 이름과 모습을 등지고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행하는 곳이 멸한[言語道斷心行處滅]’ 뜻을 기준으로 하면 보현 증분의 운재(運載)의 뜻이 된다.51) 성해(性海)52)의 과분(果分)은 곧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부사의승(不思議乘)’이라 하는 것이니, 이는 부동(不動)을 기준으로 하여 승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법(法)에 3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스스로의 체[自體]를 법이라 이름한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소[牛]의 자체 밖에 말[馬]이 있고 말의 자체 밖에 소가 있는 것’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이 법 옆[側]에 저 법[彼法]이 없으며 저 법 옆에 이 법[此法]이 없기 때문에 ‘자체’라고 하는 것이다.53) 둘째, 의식[意]에 상대함을 법이라 이름한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제6 의식이 대(對)하는 바를 법진(法塵)이라 이름하며,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다함 없는[無塵] 의식이 대하는 바를 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셋째는 궤칙(軌則)54)의 뜻임을 가히 알 것이다.
‘계(界)’ 역시 3가지 뜻이 있다. 첫째, 성품이 다르다는 뜻이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선(善)ㆍ악(惡)ㆍ무기(無記)의 3가지 성품이 각각 다르기 때문인 것이며,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3가지 성품 가운데서 ‘듦에 따라 온전히 다하여[隨擧全盡]’ 각기 서로 무측(無側)55)이니, 그러므로 ‘성품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인(因)의 뜻이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오직 안식(眼識)을 생함을 안식의 명언종자(名言種子)라 이름하며,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6식(識)을 통틀어 생하는 것[通生]을 안식의 명언종자라 하는 것이다. 셋째는, ‘지닌다[持]’는 뜻이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과와 다른 인’이 ‘인과 다른 과’를 지니는 것이며,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과를 온전히 하는 인’이 ‘인을 온전히 하는56) 과’를 지니기 때문에 ‘지닌다’라고 하는 것이다.
‘도(圖)’는 해인의 상(像)에 의지하여 ‘일승ㆍ삼승의 가르침과 근기의 욕망[根欲]’을 나타낸다. 이른바 붉은 인[朱印]의 전후 차별은 삼승의 가르침이며 붉은 인의 원만함[圓]57)은 일승의 가르침인 것이고, 인(印)의 전후 차별 가운데 글자는 삼승 근기의 욕망이며 인(印)의 원만함 가운데 글자는 일승의 근기(根器)인 것이다.58)
『법융덕기(法融德記)』 ‘합시일인(合時一印)’은 한 줄의 붉은 선[一道朱畫]이 모든 검은 글자와 합하여야 바야흐로 원만한 인[圓印]을 이루기 때문에 ‘합시’라고 한다.
【문】 검은 글자를 쓴 뒤에 붉은 선을 그리는가, 붉은 선을 그린 뒤에 검은 글자를 쓰는가?
【답】 둘 다 옳다. 먼저 글자를 쓰고 뒤에 선을 그리는 것은 이치[理]로써 현실[事]을 따르는 뜻이며, 먼저 선을 그리고 뒤에 글자를 쓰는 것은 사로써 이를 따르는 뜻이다. 지엄이 비록 73가지의 인(印)을 지었으나 다만 그 1인(印)의 뜻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의상 화상[相和尙]이 깊이 스승의 뜻을 얻었기 때문에 오직 이 하나의 근본인(根本印)을 지은 것이다.
『진수덕기(眞秀德記)』 시(詩)란 도문(圖文)에 7언 30구가 있으므로 ‘시’라고 말하였을 뿐이지, 운(韻)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59)
‘1인(印)’은 하나의 대연기(大緣起)를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60)
『대기(大記)』 ‘54각’은 아래 본문에서 “무엇 때문에 인문(印文)은 오직 한 길[一道]만 있는가? 답하기를, 여래의 1음(音)을 표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성기품(性起品)」의 10가지 음성[十種音]61)을 가지고 5승의 근기에 차례대로 배대하면 곧 50이니, 이는 능히 응신(應身)의 부처님이 4섭(攝)과 4무량(無量)을 갖춘 것이기 때문에 4각(角)이라 말하는 것이다.
『진수기』 ‘54각’은 사람의 선지식[人知識]을 표방하는 것이다. 이른바 55선지식62)이지만 처음과 뒤의 두 문수를 합하였기 때문에
오직 54이며, 처음과 뒤를 합하여 거론하고 중간을 통틀어 취하여 하나의 원만한 지혜[圓智]가 되며, 보현 선지식은 증득할 바[所證]의 이치[理]이니 법계의 모든 법이 이지(理智)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210자’는 법의 선지식[法知識]이다. 이른바 「이세간품」63)에서 보혜(普惠)가 2백 구절의 물음을 구름같이 일으키고 보현이 2천 구절의 답을 병으로 쏟아 붓듯이 하였으니, 한 구절의 물음마다 모두 10구절로써 답하였기 때문에 10이라고 한 것이다.
『대기』 ‘210자’는 5주인과(周因果)에서 첫째의 인과를 제외하고 뒤의 4주[周]에서 과를 가려내고[簡] 인을 취하며, 4주의 인에 각기 50위(位)가 있으므로 2백을 이루는 것이고, 그 4주 중에 있는 과위(果位)를 합하여 넷을 하나로 하고 이러한 과가 바로 십불(十佛)의 과(果)와 같음을 나타내고자 한 까닭에 10이라 말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첫째의 인과를 제외하는가?
【답】 다만 믿는 바[所信]일 뿐이며, 행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과위를 합하여 하나로 하는가?
【답】 인위(因位)에 이미 차별과 평등이 있으니 언표의 모습[詮相]이 다르기 때문이며, 과보 역시 마땅히 그렇다. 그러나 십불의 과와 같음을 나타내고자 한 까닭에 모두 하나로 한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이 해인 중에 나타나는 3세간의 10문 10법인 것이다. 이른바 아래 본문64)의 10전유(錢喩)와 10보법(普法)이 20이 되고, 20이 각기 10현(玄)을 논하므로 합하여 2백이 되며, 본래의 10현을 아우르므로 ‘210’이라 말하는 것이다.
또 이 인은 총(總)이 되고, 73인은 별(別)이 된다. 별인(別印) 가운데 나아가 70인을 가지고 3제(際)를 순력하니, 1제(際)에 인(印)치는 것이 각각 70이므로 합하여 210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210인을 합하여 하나의 해인삼매의 총상인(總相印)을 이루는 것이다.65)
7언 30구절은 앞의 법(法)과 비유가 각각 10이며, 아울러 본래의 10현을 합하여 30이 되는 것이다. 이 30구절이 경의 제목 7자66)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7언(言)으로써 시를 지은 것이다.67) 그러므로 법계의 법이 비록 다함없다고 하지만 210자를 벗어나지 않으니, 총체적으로 이는 곧 30구절을 이루며, 또한 총체적으로 이것은 7글자를 벗어나지 않으며, 또한 총체적으로 이것은 이지(理智)를 벗어나지 않고, 또한 총체적으로 이것은 하나의 가장 청정한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승법계도』라고 제목하는 것이다.68)
『청량소(淸凉疏)』69) 총체적으로 제목을 해석하는 것[總釋題名]70) 중에 ‘여섯째, 말아 거두어들여서 모습을 다한다[卷攝相盡]’71)는 것은, 이른바 뒤[後]로부터 점차 말아서[卷] 나아가 9회를 벗어나지 않고, 9회는 초회(初會)를 떠나지 않으며,
초회는 총체적인 제목72)을 떠나지 않으며, 총체적인 제목은 이지(理智)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치[理]가 아니면 지혜[智]가 아니기 때문에 이치 밖에 지혜가 없고, 지혜가 아니면 이치가 아니기 때문에 지혜 밖에 이치가 없으니, 곧 이치와 지혜는 둘이 아니다. 또한 지혜를 거두어서 이치를 따르니 체(體)를 떠나서는 용(用)이 없으며, 용을 섭수하여 체로 돌아가니 체의 성품을 스스로 떠나기 때문에 체는 곧 체가 아닌 것이다. 본래 청정하나 억지로 이름하여 청정법계라 하니, 이러한 까닭에 극히 무진(無盡)으로부터 나아가 한 글자나 글자 없음까지도 모두 다 화엄 성해(性海)를 섭수하여 남음이 없는 것이다.
【본문】 위대한 성인의 훌륭한 가르침……병에 따름이 하나가 아니거늘.
『법융기(法融記)』 위대한 성인이라고 한 것은 모든 가르침 중에서 이제 이 교주(敎主)73)가 가장 존승(尊勝)하기 때문이다.
【문】 아래 4교74) 중에서는 교화의 주체[能化]와 교화의 대상[所化]이 모두 미치지 못하는가?
【답】 그렇다.
【문】 삼승의 능화 3신(身)은 다만 일승 10신의 큰 작용[大用]일 뿐인데, 어찌하여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답】 이미 ‘다만 10신의 작용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문】 십불은 곧 자수용불(自受用佛)이니, 곧 나무75) 아래의 부처님이거늘 어찌하여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답】 만일 이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미친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가르침의 품류[敎品]를 분별하고자 하여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청량소』 ‘가르침이 일어나는 인연[敎起因緣]’76) 중에 “지금 이 경을 설함에 부처님은 진(眞)이 되고 응(應)이 되며 하나[一]가 되고 많음[多]이 된다. 만일 진77)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석가가 사바세계에 머물면서 인천(人天)이 동일하게 본다’고 하는가? 만일 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비로자나가 연화장에 거처하는데 대보살의 견해로 부처님 법신을 본다’고 말하는가? 만일 하나라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여러 곳에서 따로 따로 나타나는가? 만약 다르다고 한다면, 왜 다시 ‘몸을 나누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그러므로 이 경의 부처님은 모두 앞에서 설한 바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이니, 곧 법계의 다함 없는 신운(身雲)으로 진과 응이 서로 융섭하고[相融] 일과 다가 걸림 없는[無礙] 것이다(운운).78) 먼저 10신(身)을 밝히고, 뒤에 걸림 없음을 드러낸다.
‘10신’은 자체에 2가지 뜻이 있다. 첫째 3세간79)을 융섭하여 10신으로 삼음80)을 기준으로 하면, 첫째는 중생신(衆生身)이고, 둘째는 국토신(國土身)며, 셋째는 업보신(業報身)이고, 넷째는 성문신(聲聞身)이며, 다섯째는 연각신(緣覺身)이고, 여섯째는 보살신(菩薩身)이며, 일곱째는 여래신(如來身)이고, 여덟째는 지신(智身)이며, 아홉째는 법신(法身)이고, 열째는 허공신(虛空身)이다. 둘째는 부처님도 스스로 10신81)이 있으니, 첫째는 보리신(菩提身)이고,
둘째는 원신(願身)이며, 셋째는 화신(化身)이고, 넷째는 역지신(力持身)이며, 다섯째는 상호장엄신(相好莊嚴身)이고, 여섯째는 위세신(威勢身)이며, 일곱째는 의생신(意生身)이고, 여덟째는 복덕신(福德身)이며, 아홉째는 법신(法身)이고, 열째는 지신(智身)이다(운운).82)
이른바 ‘무애(無礙)’라는 것에는 간략히 10가지83) 뜻이 있다. 첫째는 용주무애(用周無礙)이고……열째는 원통무애(圓通無礙)이다.84) 이른바 이 불신이 이치[理]에 즉(卽)85)하고 현상[事]에 즉하며, 하나[一]에 즉하고 많음[多]에 즉하며, 의보[依]에 즉하고 정보[正]에 즉하며, 사람[人]에 즉하고 법(法)에 즉하며, 이것[此]에 즉하고 저것[彼]에 즉하며, 정(情)에 즉하고 비정(非情)에 즉하며, 깊음[深]에 즉하고 넓음[廣]에 즉하며, 인(因)에 즉하고 과(果)에 즉하며, 3신(身)에 즉하고 10신86)에 즉하니, 걸림 없는 법계의 신운(身雲)과 동일하다.87)
『법융기』 ‘훌륭한 가르침[善敎]’이란,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이 세상[此生]과 저 세상[他世]에서 수순하여 이익케 하는 것이 선(善)이고,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거스르고 손상하는 것은 악(惡)이며, 이 둘 중에서 가히 기별(記別)할 것이 없는 것이 무기(無記)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다만 이 선일 뿐이다. 무엇인가? 이른바 지엄이 말하기를, “원통(圓通)의 이치는 선하지 않음이 없음에 처하여 연(緣)을 접촉하면 이에 수순하여 물(物)을 가리지 않고 베푸는 것이다”88)(이상)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승은 오직 한결같이 선(善)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기(無記)와 악(惡)도 다만 한결같이 선(善)일 뿐인가?
【답】 그러하다.
【문】 그렇다면 악을 드는[擧]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은가?
【답】 그러하다. 그러나 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듦에 따라 옆이 없다[隨擧無側]’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이다.
‘모남이 없다[無方]’는 것은, 만일 삼승이라면 하나 둘, 나아가 한량없음[無量]을 말함에 따르니, 이는 모남이 없는 것이 아니거늘 어째서 그런가? 삼승의 가르침은 개별적인 근기를 따라 설하기 때문에 모남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일승의 가르침은 4제(諦)ㆍ12인연[緣]ㆍ6바라밀[度] 등을 설함에 따라 해인 구경의 제(際)에 통철하여 자재하게 설하기 때문에 ‘모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근기에 응하고 병에 따름이 하나가 아니다’는 것은, 마치 소의(小醫)는 각각 따로 약을 주지만 대의왕(大醫王)이라면 두루 천하의 갖가지 물건을 모아서 한 덩어리의 약을 만들어서 병이 어떻게 다른 지도 묻지 않고 평등하게 두루 시여하되 치료하지 못할 병이 없는 것과 같다. 일승의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두루 모든 가르침의 근기의 병에 응하여 오직 한 종류의 해인정(海印定)89)의 법으로써 근기에 딱 맞게 설하되 성문의 사람 중에서는 온전한 해인[全海印] 4제의 법90)을 주고, 독각의 사람 가운데서는 온전한 해인 연생(緣生)의 법을 주며, 보살의 사람 가운데서는 온전한 해인 6도(度)의 법을 주고, 나아가 숙교(熟敎)91)와 돈교(頓敎)의 사람 중에도 역시 온전히 온전히 줄 뿐이다.92)
『대기』 아래 4교의 사람은 모두 병기(病機)이나 원기(圓機)는 그렇지 않다. 또 원교의 근기에도 큰 병이 있으니, 한번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곧 백천(百千) 가지의 장애문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진수기』 ‘위대한 성인[大聖]’이라는 것은, 아래 삼승의 작은 성인[小聖]과 대비하여 ‘위대한 성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선교(善敎)란 문지(文持)의 가르침이다. 이 문지의 가르침이 해인정 전체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한번 물[水]을 부르는 말 가운데 불ㆍ나무 등의 법이 모두 함께 오는 것이다. 한 마디 말 가운데 모든 법이 함께 오므로 ‘가르침의 구족[敎具足]’이라 하는 것이다. 이 물이라는 말 가운데는 물은 습하다는 뜻이 있고, 물은 습하다는 뜻 중에는 불의 뜨거움[熱] 등 법계의 모든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뜻의 구족[義具足]’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뜻이 물이라는 말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의 대연기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다.
【문】 불을 쓰고자 하는 때에 ‘물을 부르는 말 가운데에 이르는 바의 불’을 쓰는가?
【답】 이는 다만 물을 연하기[水緣] 때문이니, 만일 불을 쓰는 때라면 불이라는 말 가운데 와서 이르는 불을 쓰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물에 와서 이르는 가운데의 불[水來中火]’은 ‘불에 와서 이르는 가운데의 불[火來中火]’과 다른가?
【답】 이르기[旨] 때문에 동일하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다시 ‘불에 온다[火來]’는 말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가?
【답】 이미 불이 필요한 곳이라면 불이라는 말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문】 만일 ‘불에 와서 이르는 가운데의 불’이라야 바야흐로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물에 와서 이르는 가운데의 불’은 실제의 불이 아닌 것인가?
【답】 이는 실제의 불이다. 그러나 이는 물을 이루는 불이므로 ‘불 가운데의 불’과 별도의 문을 이루는 것이다.
‘모남이 없어서 근기에 응한다’는 것은, 위와 같은 선교는 법계에 칭합(稱合)하여 별도로 취하고 버리는 방소(方所)가 없기 때문에 ‘모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이른바 다함 없는 원만한 총상(總相)의 가르침이어서 보현의 기틀에 응(應)함이다.
‘병에 따름이 하나가 아니다’는 것은 아래의 4교이다.
『지귀장(旨歸章)』93) 무릇 원통을 주로 가르쳐서 티끌 같은 국토에서 허공을 다하고 제망의 구슬이 방광(方廣)하여 터럭 끝에서 법계를 잡으니, 걸림 없이 용융(鎔融)함은 노사나불의 묘한 경지이며, 한계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은 보현안(普賢眼)의 현감(玄鑑)이다. 넓디넓고 미묘한 말씀은 실로 그 취지를 찾을 수 없고, 넓고 깊은 법의 바다는 종(宗)의 근원에서 더욱더 꿰뚫어 헤아려진다.
그러므로 이제 간략히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러한 10가지 뜻을 열고 그 기요(機要)를 간추려서 ‘지귀(旨歸)’라 일컫는 것이니, 여러 진리를 찾는 선비가 그 이치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첫째, 경을 설하는 곳[說經處]이다.
무릇 원만한 가르침이 일어남에 반드시 티끌 같은 세계를 두루 헤아려서 이미 법계를 다한 말이 되니, 어찌 가히 그 장소의 다름을 분별하겠는가?
이제 좁은 데서부터 넓은 데에 이르게 하여 간략히 10처(處)를 연다. 첫째는 이 염부제이며, 둘째는 백억에 두루한 것이고, 셋째는 시방에 다하는 것이며, 넷째는 티끌 같은 길에 두루한 것이고, 다섯째는 다른 세계[異界]에 통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개별적인 티끌을 말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화장세계로 돌아감이며, 여덟째는 거듭 국토를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아홉째는 제망(帝網)과 같음이며, 열째는 다른 부처님과 같은 것이다…….94)
둘째는, 경을 연설하는 때[演經時]이다.
무릇 항상(恒常)한 설은 전후제(前後際)에 끝이 없으니, 하물며 일념과 다겁[念劫]이 원융한데 어찌 가히 그 시분(時分)을 분별하겠는가? 이제 간략히 짧게 닦는 영역을 들어서 열 가지로 꼽으면 첫째는 오직 일념이며, 둘째는 7일을 다하는 것이고, 셋째는 삼제(三際)에 두루한 것이며, 넷째는 동류(同類)를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다섯째는 다른 겁[異劫]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며, 여섯째는 일념이 다겁을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일곱째는 거듭 거두어들이는 것이며, 여덟째는 다른 세계의 시간이며, 아홉째는 그것의 상입(相入)이고, 열째는 근본이 지말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95)
셋째는 경을 설하는 부처님[說經佛]이다.
【문】 이 경을 설하는 부처님인 노사나의 몸이 이미 앞과 같이 다함 없는 시간과 장소에 있다면, 그 부처님은 1신(身)인가, 다신(多身)인가?…….96)
이제 이 뜻을 나타내서 간략히 10가지[十重]로 변별하니, 첫째는 용이 두루하여 걸림 없는 것[用周無礙]이고, 둘째는 상이 편만하여 걸림 없는 것[相遍無礙]이며, 셋째는 적용이 무애한 것[寂用無礙]이고, 넷째는 의지하여 일어남에 걸림 없는 것[依起無礙]이며, 다섯째는 진과 응이 걸림 없는 것[眞應無礙]이고, 여섯째는 분원이 걸림 없는 것[分圓無礙]이며, 일곱째는 인과가 걸림 없는 것[因果無礙]이고, 여덟째는 의정이 걸림 없는 것[依正無礙]이며, 아홉째는 그윽이 들어감에 걸림 없는 것[潛入無礙]이고, 열째는 원만하게 통함에 걸림 없는 것[圓通無礙]이다.97)
넷째, 경을 설할 때의 대중[說經衆]이다.
무릇 중해(衆海)가 번잡하고 넓으니 어찌 티끌을 헤아려 능히 알 수 있으리오? 이제 대강(大綱)을 통틀어서 간략히 하면 역시 10위(位)를 나타낸다. 첫째는 과덕중(果德衆)이며, 둘째는 상수중(常隨衆)이고, 셋째는 엄회중(嚴會衆)이며, 넷째는 공양중(供養衆)이고, 다섯째는 기특중(奇特衆)이며, 여섯째는 영향중(影響衆)이고, 일곱째는 표법중(表法衆)이며, 여덟째는 증법중(證法衆)이고, 아홉째는 소익중(所益衆)이며, 열째는 현법중(現法衆)이다.98)
다섯째, 경을 설하는 의식[說經儀]이다.
무릇 무한한 대비는 중생계에 두루하여 모든 중생[万品]에 교화를 베품에 의식(儀式)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이제 통별(通別)에 나아가서 각각 10가지 예를 든다. 통틀어서 논하건대, 혹은 음성으로써 하며, 혹은 묘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며, 혹은 기이한 향(香)으로써 하며, 혹은 상미(上味)로써 하며, 혹은 묘하게 접촉함으로써 하며, 혹은 법경(法境)으로써 하며, 혹은 안의 6근[內六根]이며, 혹은 4가지 위의(威儀), 혹은 제자들의 인물, 혹은 일체의 짓는 바가 모두 중생[物]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따로 언성(言聲)을 나타내건대 역시 10가지 예가 있다. 첫째는 여래의 어업(語業)이 원음(圓音)을 스스로 설하는 것이며, 둘째는 여래의 모공에서 소리를 내어 법을 설하는 것이고, 셋째는 여래의 광명이 음성을 펴서 법을 연설하는 것이며, 넷째는 보살의 구업으로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보살의 모공으로 소리를 내서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보살의 광명으로 역시 소리를 내서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찰해(刹海)가 소리를 내서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모든 중생이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고, 아홉째는 삼세(三世)의 음성으로 법을 설하는 것이며, 열째는 일체 법으로 모두 소리를 내서 법을 설하는 것이다.99)
여섯째, 경의 가르침을 보임[示經敎]이다.
원교의 미묘한 말씀은 반드시 법계에 다하나니 이미 여래의 다함 없는 변재의 힘을 다하여 각기 허공ㆍ터럭 끝ㆍ찰해에 두루하고, 다시 각각 미래제에 다하는 것이니 단박에 설하고 언제나 설함이라. 시간과 장소가 가없으니 이와 같은 가르침을 어찌 그 부질(部秩)을 한계 지을 수 있으리오. 여기서는 경의 본문에 준해서 분석하여 10가지 종류로 삼으니, 첫째는 이설경(異說經)이며,100) 둘째는 동설경(同說經)이고, 셋째는 보안경(普眼經)101)이며, 넷째는 상본경(上本經)이고, 다섯째는 중본경(中本經)이며, 여섯째는 하본경(下本經)이고, 일곱째는 약본경(略本經)이며, 여덟째는 주반경(主伴經)이고, 아홉째는 권속경(眷屬經)이며, 열째는 원만경(圓滿經)이다.102)
일곱째, 경의 뜻을 나타냄[現經義]이다.
무릇 뜻의 바다는 넓고 깊으며 진리의 근원은 아득히 넓으나 간략히 두 종류로 열어서 각기 10門으로 분별하면, 먼저 표방하는 법을 밝히는 것이니 넓고 크며 끝이 없어서 한데 모아 열 가지 짝[十對]으로 삼아 통괄적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첫째는 가르침과 뜻이 하나의 짝이 되며[敎義一對], 둘째는 이치와 현상이 하나의 짝이 되고[理事一對], 셋째는 대상과 지혜가 하나의 짝이 되며[境智一對], 넷째는 행동과 지위가 하나의 짝이 되고[行位一對], 다섯째는 인과 과가 하나의 짝이 되며[因果一對], 여섯째는 의보와 정보가 하나의 짝이 되고[依正一對], 일곱째는 체와 용이 하나의 짝이 되며[體用一對], 여덟째는 사람과 법이 하나의 짝이 되고[人法一對], 아홉째는 역과 순이 하나의 짝이 되며[逆順一對], 열째는 응과 감이 하나의 짝이 되는 것[應感一對]이다.
다음으로 나타내는 이치를 밝힌다는 것은, 교묘한 변재가 자재하여 형세의 변화가 매우 많으나 역시 10가지 예를 들어 걸림 없음을 나타낸다. 첫째는 성상에 걸림이 없는 것이고[性相無礙], 둘째는 넓음과 좁음에 걸림이 없는 것이며[廣狹無礙], 셋째는 일다에 걸림이 없는 것이고[一多無礙], 넷째는 상입에 걸림이 없는 것이며[相入無礙], 다섯째는 상시에 걸림이 없는 것이고[相是無礙], 여섯째는 숨음과 나타남에 걸림이 없는 것이며[隱現無礙], 일곱째는 미세에 걸림이 없는 것이고[微細無礙], 여덟째는 제망에 걸림이 없는 것이며[帝網無礙], 아홉째는 10세에 걸림이 없는 것이고[十世無礙], 열째는 주반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主伴無礙].103)
여덟째, 경의 뜻을 해석함[釋經意]이다.
무릇 법상(法相)이 원융하나 실로 소인(所因)이 있으니, 인연이 한량없으나 간략히 10가지로 분별한다. 첫째는 ‘모든 법에 정해진 상이 없음’을 밝히기 위함이며, 둘째는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환사(幻事)와 같기 때문이며, 넷째는 꿈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뛰어난 신통력[勝通力]이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깊은 선정의 작용[深定用]이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해탈의 힘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인(因)이 무한하기 때문이며, 아홉째는 연기(緣起)여서 서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열째는 법성이 융통하기 때문이다.104)
아홉째, 경의 이익을 밝힘[明經益]이다.
무릇 믿음으로써 취입(趣入)하는 것이 이 보현의 법이다. 원통의 돈익(頓益)이 광대하여 끝이 없으나 간략히 경의 본문을 거두어들여서 그 10가지를 나타낸다. 첫째는 보고 듣는 이익이며, 둘째는 발심의 이익이고, 셋째는 행을 일으키는 이익이며, 넷째는 지위를 거두어들이는 이익이고, 다섯째는 속히 증득하는 이익이며, 여섯째는 장애를 멸하는 이익이고, 일곱째는 이로움을 더하는105) 이익이며, 여덟째는 나아가 닦는 이익이고,
아홉째는 단박에 얻는 이익이며, 열째는 성품에 계합하는 이익이다.106)
열째, 경의 원만함을 나타냄[現經圓]이다.
무릇 법계는 원통하여 연(緣)에 계합하지 않음이 없다. 이른바 위의 아홉 문(門)이 나타낸 바의 법은 모두 합쳐져 하나의 대연기법(大緣起法)이 되니, 한 곳이 있음을 따라 곧 일체가 있게 되니, 걸림 없이 원융하고 다함없이 자재하다. 만일 뜻에 따라 나누면 역시 10문이 있다. 첫째는 장소가 원만함이며, 둘째는 시간이 원만함이고, 셋째는 부처님이 원만함이며, 넷째는 대중이 원만함이고, 다섯째는 의식이 원만함이며, 여섯째는 교(敎)가 원만함이고, 일곱째는 의(義)의 원만함이며, 여덟째는 의(意)의 원만함이고, 아홉째는 이익이 원만함이며, 열째는 두루함이 원만함이다. 동일하게 걸림 없는 대연기이기 때문이며, 자재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부사의(不思議)이기 때문이니, 이는 이른바 화엄의 다함없는 법의 바다[法海]가 법계를 끝까지 다하고 허공계를 초월한 것이라서 오직 보현의 지혜[智]라야 비로소 그 바닥을 궁구할 수 있는 것이다.107)
【본문】 미혹한 자는……종(宗)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그럴 날이 없다.
『법기』 ‘미혹한 자’라는 것은 아래 4교(敎)의 사람이니, 일승의 무주(無住) 본법(本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취만을 집착하여[守跡] 체를 잃어버린 줄 알지 못하니’라는 것은, 비유하면 사냥꾼이 헛되이 토끼108)의 자취만을 지키고 있어서 토끼의 몸이 멀리 있음을 알지 못함과 같다. 이와 같이 삼승의 사람은 3무수겁(無數劫)토록 설함과 같이 행을 닦지만 얻는 과보는 다만 자취뿐이니 지킴[守]을 궁극적인 경지로 삼아서 그 일승의 진실한 체를 잃어버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종(宗)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그럴 날이 없다’는 것은 무량억(無量億) 나유타겁(那由他劫)에 걸쳐서 6바라밀을 행하여 갖가지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아 익히기 때문에 ‘부지런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승의 집으로 돌아갈 날이 없으므로 ‘종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그럴 날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본문】 이치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거하여……이름이 없는 진원(眞源).
『법기』 ‘이치[理]에 의지하고 가르침[敎]에 의거하여’라는 것은, 이(理)는 망상해인(忘像海印)109)이니 이른바 부처님이 마음 가운데서 3세간을 증득하나 부처님이 증득한 마음은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 교는 현상해인(現像海印)110)이니, 이른바 부처님이 증득한 바 3세간의 법이 각각의 지위[位]를 움직이지 않아 성품이 중도(中道)에 있어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망상(忘像)의 이치에 의지하여 한 줄의 붉은 획을 이끌고, 현상(現像)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많은 검은 글자를 나열해서 원만한 인[圓印]을 만드는 것이다.
‘간략히 반시(盤詩)를 지어서’라는 것은, 검은 글자는 붉은 획에 서리고, 붉은 획은 검은 글자에 서리므로 반(盤)이라 하는 것이다. 검은 글자가 붉은 획에 서리는 것은 곧 현상[事]이 이치[理]에 변만한 것이며, 붉은 획이 검은 글자에 서리는 것은 곧 이치가 현상에 변만한 것이다.
『대기』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로 하여금 이름이 없는 진원으로 돌아가길 바라노라’는 것은, 외화(外化)는 이름과 모습[名相]의 제(際)가 있으므로 아울러 이름에 집착함이 되지만, 곧바로 내증(內證)을 기준으로 하면 ‘이름이 없는 참된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는 다만 아래 4교이다. ‘이름이 없는 진원’이라는 것은, 만약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내증과 외화가 하나여서 분별이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111)에서 ‘만일 이치를 기준으로 하면 증득[證]과 가르침[敎]의 양 법이 예로부터 중도이며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우선 증득의 대상[所證]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의 증득은 증분(證分)이라 하고, 보살의 증득은 교분(敎分)이라 이름한 것일 뿐이다.
【문】 자취를 지키던 사람이 진원으로 돌아갈 때에 앞에서 지키던 가르침의 자취를 버린 뒤에 돌아가는가, 지키던 바의 자취가 곧 돌아갈 바의 근원인가?
【답】 후자와 같다.112)
【문】 만약 그렇다면 연기의 실체를 이해하는 일승의 사람도 역시 4제(諦)ㆍ연생(緣生) 등을 이해하는가?
【답】 그 제(諦)ㆍ연(緣)의 이름을 움직이지 않고 곧 이 다함 없는 원통(圓通)의 법임을 본다.
【문】 만약 그렇다면 자취를 지키던 사람도 역시 다함 없는 원통의 법을 이해하는가?
【답】 나[我]를 기준으로 한다면 타(他)가 아니지만, 그113)를 기준으로 하면 열지114) 않는 것이다.115)
【본문】 중앙의 법(法)에서 시작하여……인도(印道)를 따르면서 읽어야 한다.
『법기』 ‘중앙의 법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돌고[盤廻] 굴곡을 이루다가 불(佛)에 이르러 마친다’는 것에서, 구불구불 돈다는 것은 곧바로 인(印)이 원만함을 보는 것이고, 굴곡은 곧 모든 뿔은 굽었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문】 만일 인도(印道)를 기준으로 하면 곧 처음과 끝116)을 떠나는데, 무슨 까닭에 글자를 기준으로 하여 ‘법’에서 시작하여 ‘불’에서 끝나는가?
【답】 만일 곧바로 이(理)를 기준으로 하면 비록 처음과 끝이 없으나 그와 같이 처음과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법에 들어가는 방편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도를 따른다’는 것은, 만일 오직 글자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삼승별교이지만 만일 오직 인(印)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일승별교이니, 인으로써 글자를 따르고 글자로써 인을 따른다면 일승동교이고, 만일 이 셋117)을 다 갖춘다면 일승원교인 것이다. ‘인으로써 글자를 따른다’는 것은 일승이 삼승에 드리우는[垂] 것이며, ‘글자로써 인을 따른다’는 것은 삼승이 일승에 참예(參詣)하는 것이니, 위로 참예하고 아래로 드리우는 것이 아울러 동교이다.
『교분기(敎分記)』 ‘동교(同敎)라는 것은……’이라고 한 것은, 첫째는 법상(法相)이 교참(交參)함을 잡아서 일승을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마치 삼승 중에서도 역시 인다라미세(因陀羅微細) 등을 설함이 있는 것 같지만 주반(主伴)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혹은 또한 화장세계를 설하고 있으나 ‘십(十)’ 등을 설하지 않고, 혹은 일승 중에도 또한 삼승의 법상 등이 있으니, 이른바 마치 ‘10안(眼)118) 중에도 또한 5안을 갖추고 있고, 10통(通)119) 중에도
또한 6통이 있는 것’ 같으나 의리(義理)가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서는 곧 일승이 삼승에 드리우며 삼승이 일승에 참예하는 것이니, 이는 곧 양 종(宗)이 서로 접하고 연이어져 있으며 이끌어들이고 섭수하여서 근기의 욕망과 성품[根欲性]을 이루어 별교일승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대기』 도(圖)의 인문(印文)에 나아가면 많은 해석[義釋]이 있으니,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엄의 5중해인으로 배대하여 해석하는 것은, 처음의 4가지 해인은 곧 문구를 나누지 않으므로 모두 통틀어서 배대하는 것이며, 다섯째 해인은 다시 5가지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다섯째 해인이 갖춘 바 5중해인으로 모든 구절을 분배하면, 곧 첫째 증분의 4구절은 첫째와 둘째의 해인이다.
그 다음 ‘진성’ 아래 연기분의 14구절은 곧 셋째의 해인이며, 그 다음 ‘능인’ 아래 이타행의 4구절은 곧 넷째 해인이고, 그 다음 ‘그러므로 행자’ 아래 수행방편의 4구절은 곧 다섯째 해인이며, 마지막 네 구절은 수행하여 얻는 이익인 것이다.120)
처음의 4구절 중에 첫째 한 구절은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해인이며, 그 다음 한 구절은 그림자가 나타나는 해인이다.
그 다음 한 구절은 앞에서 말한 ‘법성은 두 가지 모습이 없다’는 것을 해석한 것이고, 마지막 한 구절은 앞에서 말한 ‘모든 법은 본래 적정한 것이다’를 해석한 것이다.121)
【문】 제목을 법의 입장에서는 ‘법계도’라 하고 비유의 입장에서는 ‘해인도’라 하였으니, 여기서 말하는 법성과는 어떻게 다른가?
【답】 연기분 중에 계(界)ㆍ종(種)ㆍ해(海)122)를 나누어서 각기 따로 배대하는 것은 행자의 마음을 따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증분이라면 본래 계ㆍ종ㆍ해를 나누어서 보이지 않으므로 다만 한 맛[一味]인 법계의 처소일 뿐이니, 법계ㆍ해인ㆍ법성이 동일한 양[量]이다. 그러므로 초회 중에서는 계ㆍ종ㆍ해를 나누지만, 제2회 중에서는 셋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총체적으로 ‘부처님의 국토가 불가사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인(印)에 의지하면, 만일 상근기라면 곧바로 증분에 들어가고, 중근기라면 ‘진성’ 아래의 교분(敎分)123) 중에서 능히 들어갈 수 있으며, 하근기라면 뒤의 ‘행자’ 아래의 수행방편 중에서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표훈(表訓)ㆍ진정(眞定) 등 10여 대덕이 화상이 계신 곳에서 이 인(印)을 배울 때에 여쭈었다. ‘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곧 이 법신 자체’라는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에 화상이 곧 4구게(句偈)로써 대답하셨다.
모든 연의 근본은 나[我]이며
일체 법의 근원은 마음[心]이니
크고 중요한 종지를 말씀하시는 분이
진실한 선지식이다.124)
이어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 할 뿐이다”라고 하셨다.
표훈125) 대덕이 5관석(觀釋)을 지었으니,126) 첫째는 실상관(實相觀)이고, 둘째는 무주관(無住觀)이며,
셋째는 성기관(性起觀)이고, 넷째는 연기관(緣起觀)이며, 다섯째는 인연관(因緣觀)이다. 첫째 관(觀)은 ‘법의 근원이 되는 마음’과 ‘크고 중요한 종지[大要宗]’이며, 뒤의 네 가지 관은 ‘근본이 되는 나’인 것이다. 설함을 인연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송(頌)하였다.127)
‘나는 모든 연(緣)으로 이루어진 바 법이며 모든 연은 나[我]로써 연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은 인연관이며, ‘연으로 나를 이루므로 나는 체(體)가 없으며 나로써 연을 이루므로 연은 성품이 없다[無性]’라는 것은 연기관이고, ‘모든 법의 유무(有無)가 원래 하나이니 유무의 모든 법이 본래 둘이 아니다[無二]’라는 것은 성기관이며, ‘유(有)인 때에 유가 아니어서 도로 무(無)와 같고 무인 때에 무가 아니어서 도로 유와 같은 것이다’라는 것은 무주관이고, ‘모든 법이 본래 옮기거나 움직이지[移動] 않아서 능관의 마음도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것은 실상관이다. 이러한 5관(觀)을 지어서 화상에게 드렸더니, 화상께서 “그렇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5관으로써 30구절에 준하면, 곧 증분의 4구는 실상관이며, 다음의 14구는 무주관이고, 다음 4구는 성기관과 연기관이며, 나머지 구는 모두 연기관과 인연관이다.128)
진정(眞定) 대덕은 3문석(門釋)을 지었는데, 첫째는 이사구덕문(理事具德門)이고, 둘째는 사융현리문(事融現理門)이며, 셋째는 수행증장문(修行增長門)이다.
이러한 3문에 표훈 대덕이 부동건립문(不動建立門)을 추가하여 4문(門)으로 삼았으니, 이로써 30구에 준해 보면 증분의 4구는 부동건립문이며, 다음의 14구는 이사구덕문 및 사융현리문이고, 나머지 구절은 모두 수행증장문인 것이다.
이른바 14구 가운데 처음 4구는 이사구덕문이니, 이 중에 첫째 한 구절은 무주(無住)의 체(體)이기 때문에 이(理)이고, 그 다음 한 구절은 무주의 상(相)이기 때문에 사(事)이며, 뒤의 2구는 무주의 용(用)인 것이다. ‘구덕(具德)’이란 진성의 이(理) 가운데 6도(道)의 인과ㆍ소승의 인과, 나아가 원교의 인과 등 보현의 22위(位)를 갖추고 있으니, 22위 가운데 진성의 체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뒤의 10구절은 곧 사융현리문이니, 이른바 ‘한 티끌이 시방을 용융하여 포함하는 도리’가 현전(現前)하기 때문이다. 수행증장문이란 만약 여러 구절을 분배하면, 비록 이타의 4구에 속하겠지만 여기서의 뜻은 처음에 증분으로부터 혹은 징문하고 혹은 해석하니, ‘자기의 몸이 곧 이 법성임’을 알게 할 따름이다.129)
또한 4만(滿)의 뜻으로 분과하면, 증분의 4구절은 행실만(行實滿)의 뜻이고, ‘진성심심’ 아래는 증만(證滿)의 뜻이며, ‘초발심시’ 아래는 법만(法滿)의 뜻이고, ‘시고행자’ 아래는 인만(人滿)의 뜻이다.130)
이러한 말은 역시 표훈 대덕의 뜻이니, 상원(上元) 원년(元年: 131)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설한 것이다.
행만이란 다만 행이 가득 하면 이 증분이기 때문이다. 증만이란 증분만족의 법이니, 바야흐로 ‘일중일체(一中一切)・일즉일체(一卽一切)’ 등 걸림 없이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다. 법만이란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初發心時便成正覺]’라는 것이니, 법을 만족하여 비로소 이룸을 얻기 때문이다. 인만이란 범부의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곧 불(佛)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印) 가운데 이 4가지 뜻으로 문장을 나누며, 또한 1부(部)132)의 대경(大經) 중에서도 이 4가지 뜻으로 나눈다. 이른바 행만이란 1부의 시종(始終)이 다만 이 십불의 내증인 것이며, 증만이란 1부의 시종이 일다(一多)ㆍ대소(大小)가 무장애인 뜻이다. 법만이란 1부의 시종이 오직 초발심이 곧 법을 만족하여 정각(正覺)을 이루는 뜻이며, 인만이란 1부의 시종이 곧 ‘이 범부의 몸이 바로 자체불’인 뜻이다.
인(印)에서는 여러 구절로 분배되고, 경에서도 역시 처음과 끝을 통틀어 배분하는 것이니, 자재로운 과(科)인 것이다.
『십구장(十句章)』133) 열째,134) ‘과문(科文)을 건너뛰어서 뜻을 이룸이 자재하다’는 것은 초회(初會)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모든 회처(會處)라면 법의 문구 등이 이러한 처음에 있어서 자재롭게 능히 이루는 것이니, 초회의 뜻과 같은 것이며 나머지도 역시 그러하니, 준하여 알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떠한가? 초회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도리천회(忉利天會)135)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법을 설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10주(住)의 법이라고 대답할 것이니, 이러한 언설(言說)들이 어긋나지 않게 능히 뜻을 이루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초회를 논하는 때에 모든 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능히 모든 회를 거두어들이며, 초회와 같아서 나머지 회(會)도 그러하니, 이 근본을 기준으로 함에 따라서 능히 전후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본문】 법성은 원융하여……다른 경계가 아니다.
『법기』 “어떤 것이 법인가?”
“인분(因分)136)의 언표를 빌어서 억지로 가리킨다면, 그대의 몸과 마음이 곧 그것이다.”
“어떤 것이 성품인가?”
“원융한 것이 곧 그것이다.”
“어떤 것이 원융한 것인가?”
“두 가지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인 까닭에 둘이 없는 것인가, 둘이면서 둘이 없는 것인가?”
“하나인 것이 아니므로 둘이 없는 것이니, 그 두 가지 모습에 즉하여 곧바로 ‘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모든 법인가?”
“법성이 그것이다.”
“무엇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가?”
“원융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본래 적정한 것인가?”
“두 가지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본래 적정한 곳을 가히 이름할 수 있겠는가?”
“가히 이름할 수 없으니,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이름이 없는 것인가?”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모습이 없는가?”
“모든 것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가운데에는 닦음과 증득[修證]도 끊어졌는가?”
“끊어졌다.”
“실로 닦음과 증득이 없는 것인가?”
“실로 없는 것이지만,
성인 역시 닦고 증득한다.”
“요컨대 닦음과 증득을 필요로 한다면, 어떻게 닦고 증득하는가?”
“만약 가히 가르칠 수 있다면 이는 교분(敎分)이기 때문이니, 오직 대장부의 훌륭한 용심처(用心處)이지 나머지 다른 경계가 아니다.”
“이 증분 중에 일체 모든 법이 갖추어져 있는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가?”
“갖추어져 있다.”
“만약 그렇다면 역시 두루 분별하는[遍計] 비법(非法)도 갖추고 있는 것인가?”
“어찌 갖추고 있겠는가?”
“그렇다면 갖추고 있지 못한가?”
“어찌 갖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한 물건도 보법(普法) 아닌 것이 있지 않으니 어찌 갖출 수 있으며, 변계의 비법을 움직이지 않고 곧 법을 만족하니 어찌 갖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엄 스님은 ‘1승 중에 어떤 법이 없는가? 비법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없지 않는가? 비법이 없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기(眞記)』 ‘법성이라는 것’은 미진법성(微塵法性)ㆍ수미산법성(須彌山法性)ㆍ1척법성(尺法性)ㆍ5척법성(尺法性)이니, 만약 금일의 5척법성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다면 미진법성과 수미산법성 등이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서 칭합하여 5척을 이루는 것이니, 작은 지위를 증가시키지도 않고 큰 지위를 감소시키지도 않으면서 능히 이루는 것이다.
‘원융이라는 것’은 미진의 법이 5척에 가득하고 수미산법이 5척에 계합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습이 없다’는 것은 미진이 비록 가득하고 수미산이 비록 계합하였으나 다만 오직 5척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든 법’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품은 머무르지 않는 법성이므로 화상이 “금일 5척의 몸이 움직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해서 무주(無住)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본래 적정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모습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만 5척 법성이 옆에 다른 물건[餘物]이 없으므로 ‘본래 적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일체가 다 끊어졌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맨 처음부터 이름과 모습을 보지 않는 곳’이다.
‘깨달은 지혜로 알 바이며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는 것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가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기(古記)』 표훈 대덕이 의상 스님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머무름 없음[無住]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곧 나의 범부의 5척 몸이 3제(際)에 칭합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 머무름 없음이다.”
【문】 만약 3제를 기준으로 하여 나눈다면 곧 많은 종류의 5척입니까?
【답】 이것은 연(緣)의 5척이므로 하나[一]를 필요로 하면 곧 하나이고, 많음[多]을 필요로 하면 곧 많음인 것이다.
【문】 만약 3제에 칭합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면 곧 머무름이 있는 것입니까?”
화상이 말씀하셨다.
“만약 5척의 주처(住處)를 보지 않는다면 장차 유주(有住)와 무주(無住)를 내가 마땅히 설할 것이다.
또 월유사(月瑜寺) 법회에서 신림(神琳) 대덕이 말씀하셨다.
“옛날 상원(相元) 스님이 진정(眞定) 스님에게 여쭈기를, ‘머무름이 없으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입니까, 머무름이 있으면서 머무름이 없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둘 다 모두 옳지 않다’라고 하셨다. 다시 여쭈기를,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머무름이 없는 것이라 합니까?’ 하니, 대답하시기를, ‘오직 머무르게만 하는 까닭에 머무름이 없다고 할 뿐이다’라고 하셨다. 여쭈기를, ‘머무름이 없음에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까? 머무름이 있음에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시기를, ‘또한 모두 옳지 않다’(이상)라고 하셨다.
이는 곧 묻는 것은 비록 감히 묻는 것이지만 감히 답할 수는 없는 것이며, 답은 비록 감히 답한다 하더라도 감히 물을 수는 없는 곳이다. 만약 임시로 말한다면 유위법과 같지 않아서 찰나에 머물지 않으므로 ‘머무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요, 무위법과 같지 않아서 3제에 머물지 않으므로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신림 대덕이 설법을 할 때에 대운(大雲) 법사 군(君)137)이 아뢰었다.
“연기분의 설법은 이와 같으나 증분의 설법은 어떻습니까?”
신림 대덕이 침묵하며 잠시 있다가 말하였다.
“대답해 마쳤다.”138)
운(雲) 법사 군이 알지 못하자, 신림 대덕이 말하였다.
“그대가 이 물음을 일으킬 때에 앉아 있는 상(床)과 일체 법계의 모든 법(法)이 동시에 물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옳고, 다만 그대만이 묻고 나머지 모든 법이 물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이다.”
법사 군이 아뢰었다.
“법계의 인후(咽喉)와 다함 없는 혀끝이 동시에 물음을 일으킨 것은 연기분의 물음입니까?”
신림 대덕이 말씀하셨다.
“3세간의 법이 동시에 물음을 일으키는 것은 증분의 물음이며, 침묵에 칭합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은 증분의 설함이다. 3세간의 법이 각자 스스로의 지위에 머물러서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증분의 들음[聞]인 것이다.”
【본문】 진성(眞性)이 매우 깊고……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법기』 위의 증분 중에서는 그 몸과 마음을 가리켜 곧바로 법성을 보였으니, 이름과 모습이 없으므로 중생[機]들이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법성을 바꾸어[轉] 진성이라 이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익히게139)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맹인이 비단짜기를 배우고자 하니 기술자가 ‘마땅히 모아 갖추어서 오라’고 지시하였는데, 저 맹인이 풀로 만든 끈을 가지고 오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증분은 일체를 끊었기 때문에 오직 증득[證]으로만 아는 바이나 8식(識)의 망심(妄心)으로써 증득해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능히 곧바로 증분의 처소를 가리키지 못하고 이에 아래로 한 걸음 내려와서 임시로 진성이란 이름을 지어서 보인 것이다.
‘매우 깊고[甚深]’라는 것은 진성에 들어가는 문이니, 이른바 화장세계의 매우 깊음과 미륵(彌勒) 누각의 매우 깊음이다. 화장세계가 매우 깊다는 것은 하나하나의 티끌[塵] 속에서 법계를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의 미진을 기준으로 하여 그 안과 밖을 구하나 아울러 다 얻지 못하는 것이다. 미륵 누각이 매우 깊다는 것은, 이른바
미륵이 손가락을 퉁겨 누각의 문을 열고 선재가 들어가자마자 몰록 삼세의 자기 몸[自身]과 법 및 모든 선우(善友)를 보기 때문이다.140)
‘지극히 미묘하다[極微妙]’는 것은 중도이다. 두 가지 극단[邊]을 떠나기 때문에 중도라 하는 것이 아니라 곧 모든 극단을 기준으로 하여 ‘중도’라 하는 것이다.
‘자성을 지키지 않고[不守自性]’ 등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으므로 타(他)로써 성품을 삼으며, 타가 무성(無性)임을 말미암아 자(自)로써 성품을 삼기 때문에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진기(眞記)』 【문】 진성은 위에서 말한 법성과 어떻게 다른가?
【답】 어떤 사람141)은 다르다고 하니, 이른바 법성은 진(眞)과 망(妄)에 다 통하면서 원융을 취하는 것이고, 또 정(情)과 비정(非情)에도 통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오직 진이면서 오직 또한 유정문(有情門)이니, 아래에서 ‘진성’의 단락을 해석할 때 중생의 12지(支)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실(實)을 기준으로 하여 ‘진성이 곧 이 법성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진성의 체(體)가 매우 깊고 미묘하다’는 것은 다만 자성을 두지 않고 모든 연을 거두어 잡아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논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무명의 바람이라는 연을 따라 차별적인 만법(萬法)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의 일승의 뜻이라면 연(緣) 이전에 법이 없기 때문에 먼저 진성이 있어서 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선 내가 금일에 혹은 물의 용[水用]이 되기도 하고 혹은 돌의 용[石用]이 되기도 하니, 연 가운데 법계의 모든 법이 남김없이 몰록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법 가운데 물의 이름과 물의 모습, 돌의 이름과 돌의 모습 등이 있으므로 이름과 모습이 없지 않으나 이러한 이름과 모습이 곧 이름과 모습이 없음이다. 그래서 우선 중생의 첫째 무명지(無明支)를 기준으로 하여 열 번의 관(觀)을 거치면 무명의 이름과 모습을 움직이지 않고 곧 매우 깊은 법[甚深法]이니, 취하고 버릴 것이 없으므로 ‘미묘’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름과 모습을 움직이지 않고 곧 ‘옆이 없는[無側]’ 이름과 모습을 이룬다. 만일 보현의 증득을 기준으로 한다면 옆이 없는 이름과 모습을 움직이지 않고 곧바로 이름을 떠나고 모습을 끊으며, 만일 십불의 증득을 기준으로 한다면 맨 처음부터 이름과 모습 등을 보지 않는 것이다. 무명지가 이미 그러하듯이, 나아가 노사지(老死支)도 모두 이와 같다. 이러한 까닭에 경142)에서 “일체의 모든 여래가 불법을 설한 바 없으니 마땅히 교화해야 할 바를 따라서 법을 연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설함이 없으면 증분이고 설하면 교분이다.
『도신장(道身章)』143) 만약 정해진 것이 예로부터라고 한다면144) 곧 연기에 성품이 있게 되어서 자재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연기라는 것은 자성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없는 것은 머무름이 없는 것이고, 머무름이 없는 것은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며,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문】 이러한 이치가 어찌 예로부터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답】 삼승 중에서는 먼저 하나의 법을 두고 이 법이 연을 따르지만, 일승은 그렇지 않아서 연이 곧 법이니, 연 밖에 연을 따르는 법이 없는 것이다. 이미 ‘예로부터’라고 말했다면 곧 이것은 지금 연기하므로 그런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정해진 것이 옛날에도 머물렀고, 또 정해진 것이 지금에도 머물러 있다면 연기가 아니므로 ‘연기의 법은 무성(無性)으로써 진성(眞性)을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대기』 표훈 대덕의 뜻은, ‘진(眞)’은 무주의 본법이고, ‘성(性)’은 본분(本分)의 종자이다. 본분의 종자라는 것은, 만약 ‘본문의 해당 부분[文處]’을 가리키면 초회(初會)의 과지오해(果地五海)145)인 것이다. 이러한 5해(海)로써 본식의 체로 삼는 것이며, 이 본식을 기준으로 하여 뒤의 여러 회(會) 중에서 혹은 ‘종성’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행업(行業)’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원선결정(願善決定)’ 등이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른바 만일 상근기의 사람이라면 곧바로 증분에 의지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이 바로 곧 법성임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 증처(證處)는 이름과 모습을 끊었기 때문에 중하근기의 사람은 능히 믿어 얻지 못하기 때문에 ‘5해가 바로 그대의 본식의 근원’이라고 설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서 앞의 근기가 ‘자기의 몸과 마음이 곧 법성임’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진성에 의지하여야 바야흐로 비로소 본식의 뜻을 건립하는 까닭에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혹은 구분(具分)의 뇌야(賴耶)를 설하기도 하고, 혹은 일분(一分)의 생멸하는 뇌야 등을 설하지만 오직 보현의 근기만이 ‘자기의 본식이 5해의 근원’임을 얻기 때문에 ‘십불과 보현 대인의 경계[十佛普賢大人境]’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진성이 이미 이와 같이 매우 깊고 미묘하다면 무슨 뜻에서 22위(位)를 나누는가?
【답】 자성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필요로 하는 바의 지옥, 나아가 불과(佛果) 등의 연(緣)을 따라 22위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22위(位)를 ‘보(普)’자 도장[印]으로 인(印)치면 곧 모두 다 보현 자체(自體)이기 때문에 제3중 해인이 바로 이 보현 대인의 경지인 것이다.
『관석(觀釋)』 숭업(崇業) 스님146)의 『관석』 중에서 「명난품(明難品)」147)의 ‘심성(心性)은 하나이다’라는 글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법장[藏師]은 지위에 의거함을 기준으로 하여 해석하였기 때문에 부정[遮]을 세워 거듭되는 어려움을 구한 것이며, 지엄은 곧바로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갖가지 마음의 ‘습함에 지나는 바다[濕過海]’의 뜻을 해석하기 때문에 “마음은 분별이 없음으로써 하나의 성품을 삼는데, 어떻게 능히 갖가지 일[事]을 이루는가”148)라고 하였다. 이러한 질문의 뜻은 앞의 「광명각품」 가운데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법계에 칭합하여 두루하게 나타나는 것은 다만
하나의 불지(佛智)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6도인과(道因果)와 소승인과(小乘因果), 나아가 원교인과(圓敎因果) 등 보현의 22위를 열거한 것은 일승 가운데서 보현은 교분의 궤칙이 되고 십불은 증분의 궤칙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분의 궤칙을 보이고자 하는 까닭에 열거하였을 뿐이다. 불지를 얻고자 하면서 만일 한 물건을 제거한다면 반드시 전법계(全法界)의 지(智)는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요컨대 6도인과ㆍ소승인과 등으로써 보현의 아함위(阿含位)로 삼고 그 마음을 원융하게 단련하여 하나의 불지(佛智)를 이루기 때문에 불지로써 보현의 증득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을 말미암아서 물었다. “불지는 하나인데 어떻게 능히 6도, 나아가 불(佛) 등 갖가지 신심(身心)의 과보 등을 생(生)하는가?”
경149)에서 답하여 말하였다.
모든 법은 자재(自在)하지 않으니,
실(實)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네.
이러한 까닭에 일체의 법은
둘 다 모두 서로 알지 못하네.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ㆍ뜻[意]의
모든 감각기관[情根]이
이로 인하여 온갖 괴로움[衆苦]을 변화시키나,
실제로는 변화됨이 없네.
법성은 변화되는 바 없으나
나타내므로 변화가 있으며150)
거기에는 나타냄이 없으니
나타냄에 있는 바가 없네.
해석하여 말하면, ‘모든 법[諸法]’이란 것은 하나의 성품[一性] 및 갖가지 과[種種果]에 통하는 것이다.
이른바 하나는 자성이 없으므로 갖가지로써 하나를 삼고, 갖가지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로써 갖가지를 삼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선악의 갈래 가운데서 갖가지의 몸과 마음이 다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니, 스스로의 위(位)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자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엄이 말하기를 “분별이 없고 머물지 않기[無分別不住] 때문에 능히 많은 일[衆事]을 이루는 것이다”(이상)151)라고 하였다.
자재하지 않다는 것은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며, 머물지 않는다는 뜻은 움직이지 않는다[不動]는 뜻이다. 소(疏)152)에서 “지음에 주체[主]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은, 만일 그 몸과 마음에 주재(主宰)가 있어서 여러 업을 짓는 것이라면 갖가지 과를 받겠지만, 만약 몸과 마음에 주재자가 없이 업을 짓는 것이라면 허공과 같이 동작하기 때문에 갖가지 과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허공의 인(因)으로부터 쫓아 허공의 과(果)를 생하기 때문에 인과의 뜻에도 역시 걸림 없는 것이다. 소(疏)153)에서 “경문에서 ‘서로 알지 못한다[不相知]’라 한 것은 정(情)으로 아는 것을 말함이 아니며, 지금 ‘안다[知]’라고 말하는 것은 힘[力]ㆍ성품[性]ㆍ지음[作]이다”라고 한 것에서, ‘힘’은 티끌 수와 같이 많은 연(緣)의 힘이니 곧 이 중문(中門)이고, ‘성품’은 무주법성이니 곧 이 즉문(卽門)154)이며, ‘지음’은 부사의한 지음이니 중즉문(中卽門)의 과(果)이다. 일체 모든 법이 요컨대 중ㆍ즉을 갖추어야 비로소
짓는 바[所作]가 있는 것이니, 자성법의 가고 오는[去來] 뜻이 있음이 아니기 때문에 ‘중문은 허공건립문(虛空建立門)이요, 즉문은 허공동작문(虛空動作門)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엄은 “연(緣)이라는 것은 옆이 없다[無側]는 뜻이며, 옆이 없다는 것은 힘ㆍ성품ㆍ지음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옛날에 신림 대덕[林德]이 말하였다.
“「명난품」의 일심의 바다는 ‘습함에 지나는 것[過於濕]’이며 『기신론』의 일심의 바다는 ‘습함에 머무는 것[留於濕]’이니, 만일 ‘습함에 머무는 바다[濕留海]’의 입장에 서 있다면 답은 ‘뜻에 장애 되는 바가 있다’이며, 만일 ‘습함에 지나는 바다[濕過海]’의 입장에 서 있다면 답은 ‘뜻에 장애 되는 바가 없다’이다.
질응(質應) 대덕155)이 태백산[大白山]의 지오(智悟)156) 스님이 머물던 곳[藪]에서 하안거를 끝낸 다음에 대경(大經)157) 중의 “법성은 변화하는 바가 없다”라는 문장과 『공목(孔目)』 중의 “성종성(性種性)은 본유(本有)이고 습종성(習種性)은 수생(修生)이라는 것은 불법(佛法)의 즐기는 바가 아니며, 나아가 법성 밖에 수생이 일어남이 있다는 것은 연기(緣起)가 가히 증가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는 등의 문장을 얻어 보고서 신림 대덕에게 바치면서 말씀드렸다.
“이것은 습과해의 증득입니까?”
신림 대덕이 말하였다.
“그렇다. 풀이해서 말하자면, ‘연기는 가히 증가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만일 ‘증득하는 바[所證]의 이치[理]는 예로부터 있었으며 능히 증득하는[能證] 지혜[智]는 바로 지금에 비로소 일어난다’라고 말한다면, 지혜로써 이치를 증득할 때[際]에 그 아직 증하지 못한 때를 바라보면 증승(增勝)의 뜻이 있기 때문에 ‘연기는 가히 증가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지혜는 연기인 것이니, 이 가운데서는 눈ㆍ귀 등을 기준으로 하여 법성으로 삼은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위158)에서는 “눈ㆍ귀 등을 말미암기 때문에 온갖 괴로움이 변화한다”고 하고, 다음에 다시 “이는 법성이기 때문에 변화되는 바가 없다”159)고 하는가?
【답】 일체 법이 보현의 몸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눈ㆍ귀 등이 선악의 경계를 대하여 모든 업과를 일으켜서 온갖 괴로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제 일체가 보현의 몸인 줄 알기 때문에 눈ㆍ귀 등의 물(物)이 바로 곧 법성이어서 변화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만일 눈ㆍ귀 등이 법성이 아니라면 연기는 가히 증가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문】 이것이 보현의 몸인 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 경 중에서 보현이 말하기를, “이러한 구경의 삼세 평등한 청정법신을 얻으며, 다시 청정하고 위없는 색신을 얻는다”160)고 하였으니, 어찌 한 물(物)이라도 보현 아님이 있겠는가?
【문】 이러한 보현의 몸을 어떻게 봅니까?
【답】 경에서 “보현의 신상(身相)은 허공과 같으니 진(眞)에 의지하여 국토 아님에 머문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보는 것이다. 또한 무엇이
우리의 몸[吾身]인가 하면 허공이 바로 이것이며, 무엇이 허공인가 하면 우리의 몸이 바로 그것이니 무측(無側)이기 때문이다. 또 6도(道)가 곧 이 허공이고 허공이 곧 이 6도인 것이니, 다음과 같이 송(頌)한다.
허공 법계로 몸과 마음을 삼으니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생각 생각에 상속하네.
보는 바 모든 물(物)도 역시 몸과 마음이니
생각 생각마다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네.
공삼인(空三印)161)의 글에서, “마음의 성품[心性]은 세 가지162) 세간이 습과해의 마음[濕過海心]163)이 되는 것이니, 바다에 의지하여 파도를 일으키지만 하나하나의164) 파도는 모두 3세간이므로 이것이 습과해의 마음이다. 바다에 의지하여 파도165)를 일으키면 바다가 인(因)이고 파도는 과(果)이며, 파도에 의지하여 바다를 일으키면 파도는 인이고 바다166)는 과이니, 동시에 서로 인과167)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연기 속제(俗諦)의 대법(大法)168)인 것이다.
【본문】 하나 가운데 일체……많음이 곧 하나이다.
『법기』 【문】 무엇 때문에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루어진다’ 다음에 이 구절을 밝히는 것인가?
【답】 대개 연기법은 하나하나에 별도의 자성이 없어서 상호간에 타자[他]로써 자성을 삼고서야 바야흐로 능히 연(緣)을 따라 옆이 없이[無側] 일어나기 때문에 ‘자성을 지키지 않고’ 다음에 하나 가운데 일체[一中一切]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문】 만약 연기의 법이 따라 일어남[隨起]에 옆이 없다면 오직 이는 연(緣) 이전에 법이 없다는 뜻인가?
【답】 연에 나아가 논하면 연 이전에는 법이 없으나, 성품[性]에 나아가 논하면 연 이전에 법이 있으니, 무엇인가? 연에 나아가 논하는 때에는 금일(今日)의 연 가운데의 5척으로 나타나는 것이 연기의 본법(本法)이며 옆이 없이 서 있기 때문에 연 이전에 한 법도 없는 것이지만, 성품에 나아가 논하는 때에는 본래 성기(性起)의 법체(法體)가 있는 것이다.
『진기』 ‘하나 가운데 일체……’ 등 2구절은 연기의 체(體)가 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뜻을 거듭 나타내어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 1구는 인과도리문(因果道理門)이니, 이른바 하나를 얻으면 정(定)히 열[十]을 얻고, 열을 얻으면 정히 하나를 얻는 것이니, 인(因)을 얻으면 곧 과(果)를 얻는 것이고 과를 얻으면 곧 인을 얻는 것이다. 열의 연은 인이고 이루어지는 바의 일(一)은 과이니, 이러한 인과란 곧 하나의 시(時) 가운데 2위(位)가 부동이기 때문에 ‘인과도리문’이라 하는 것이다.
다음의 1구는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이니, 이른바 이것은 곧 저것이며 저것은 곧 이것이니, 걸림 없고[無礙] 옆이 없기[無側] 때문에 덕용자재문 및 위동문(位動門)이라 하는 것이다.
【문】 앞은 중문(中門)이기 때문에 유력무력문(有力無力門)이고, 이것은 즉문(卽門)이기 때문에 유체무체문(有體無體門)인데 어찌하여 용(用)이라 하는가?
【답】 이는 곧 인연의 당체(當體)가 인에 즉하고 과에 즉하는 뜻을 용이라 이름할 뿐이니, 역용(力用)의 용이 아니다.
【문】 ‘일중일체’란 열의 연이 인(因)이고 이루어지는 바의 일(一)이 과이니, 그렇다면 능소를 합하여 열 하나가 되는가?
【답】 하나의 연 가운데서 ‘타자를 바라보는[望他]’ 뜻을 기준으로 하면 능히 이루는[能成] 인이 되고, ‘대함을 끊은[絶待]’ 뜻에서는 이루는 바[所成]의 과가 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 뜻이 둘이 아니므로[無二] 열 하나가 아닌 것이다.
『대기』 ‘하나 가운데 일체’ 아래는 대연기(大緣起) 중의 인과 도리 및 덕용 자재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2구절이 있는 것이다. 숭업(崇業) 스님이 말하기를 “삼승에도 역시 이러한 뜻이 있으니, 이른바 만일 초교의 아뢰야식 중에서라면 3성(性)의 종자가 본식의 체와 같아서 무기(無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면, 본식의 체 가운데 훈습하여 이루는 뜻은 체문(體門)이고, 또 덕용 자재의 뜻이다. 3성의 종자가 능히 훈습함을 따라 달라지는 것은 역문(力門)이니 인과 도리의 뜻인 것이다. 만일 숙교 가운데라면 여래장의 체는 덕용 자재의 뜻이니, 생하거나 멸하는 것은 용이기 때문에 인과 도리의 뜻인 것이다. 만일 일승 가운데라면 법을 따라 인(因)을 변별하기 때문에 10보법(普法) 가운데 하나의 법을 듦에 따라서 체를 갖추고 용을 갖추니, 체는 곧 덕용 자재이고 용은 곧 인과 도리인 것이다.
『도신장』 【문】 서풍(西風)의 파도는 동풍(東風)의 파도가 아니며 동풍의 파도는 서풍의 파도가 아니지만, 다만 두 가지 파도의 물의 체[水體]가 둘이 아닌 뜻을 기준으로 하여 즉문이라 말할 수 있으며, 두 가지 파도를 기준으로 하면 즉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만 이 현상[事]과 저 현상의 이체(理體)가 둘이 아닌 것을 기준으로 하여 즉문이라 말할 수 있는데, 어떻게 두 가지 현상을 제거하지 않고서 상즉문(相卽門)을 논할 수 있는가?
【답】 만약 두 가지 바람[風]을 놓는다 하더라도 물에는 두 가지 파도가 없으니, 이미 두 가지 파도가 없다면 무엇으로써 무엇에 즉하겠는가? 이미 이것으로써 저것에 즉하므로 두 파도를 제거하지 않고서 상즉을 논했을 뿐이지 이체를 기준으로 해서 상즉을 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이 파도의 물은 저 파도의 물과 파도의 체는 하나이므로, 파도가 비록 다함 없으나[無盡] 체로 말하면 곧 하나라고 하는 것은 삼승의 뜻이다. 만약 이 파도가 아니면 곧 저 파도가 없고 만약 저 파도가 아니면 곧 이 파도도 없다고 한다면 이는 중문이요, 이 파도는 제 성품[自性]이 아니기 때문에 저 파도에 있고 저 파도는 제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이 파도에 있다고 한다면 이는 즉문이라는 것은 일승이다.
『고기』 입(入)・즉(卽) 중에 제가(諸家)에서 이름을 세운 것이 한 둘이 아니니, 이른바 혹은 중문ㆍ즉문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상입(相入)ㆍ상즉(相卽)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상재(相在)ㆍ상시(相是)라 하기도 하고, 상자(相資)ㆍ상섭(相攝)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상호 의지하는 역(力)ㆍ무력(無力)의 뜻이기도 하며, 상호 형탈(形奪)하는 체(體)ㆍ무체(無體)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한다.169)
또한 옛사람은 “중문은 등불의 빛이 서로 들어가는 것[相入]과 같기 때문에 다만 모든 등불의 용이 상입할 뿐이며, 즉문은 파도와 물이 서로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기 때문에 파도의 체와 물의 체가 둘170)이 아닌 상즉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본문】 하나의 미진(微塵) 가운데도……역시 그러하다.
『법기』 하나의 ‘미진’이란, 초교(初敎)에서는 극미진(極微塵)이라 하고, 숙교(熟敎)에서는 공린진(空隣塵)이라 하며, 일승에서는 총상진(總相塵)이라고 한다. 이 총상진은 작은 것을 필요로 하면 곧 작게 되고 큰 것을 필요로 하면 곧 크게 되므로, 하나의 티끌[塵] 가운데서 단박에 시방(十方)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 하교(下敎)의 ‘방분(方分)이 있는 티끌’이라는 것은 일승의 티끌과 어떻게 다른가?
【답】 일승의 티끌은 방분을 필요로 하면 곧 방분이 있고[有方分], 방분이 없음[無方分]을 필요로 하면 곧 방분이 없으니, 필요로 함에 따라 자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문】 무방분의 티끌은 다시 더 부수어지지 않는가?
【답】 또한 부수어짐을 필요로 하여 다한다. 무엇인가? 만일 그 정(情)이 이른바 헤아려지는 바[所計]의 무방분이라고 한다면 요컨대 반드시 6상(相)을 써서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기』 【문】 ‘하나의 미진 속에 시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시방계(十方界)를 거두어들여서 하나의 티끌을 이루기 때문에 시방을 포함한다고 하는가, 시방계를 거두어 잡아[攬] 하나의 티끌을 이루고 나서 새롭게 새롭게 다시 시방을 포함하는가?
【답】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다.
【문】 하나의 티끌을 이루는 때에 시방을 거두어들여 다한다면 다시 남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새롭게 새롭게 포함하겠는가?
【답】 이는 그럴 필요가 있는 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須處須]이기 때문이다.171) 하나의 티끌을 이루는 때에 시방을 필요로 하여 다하고 ‘새롭게 새롭게 포함함’을 필요로 하는 때에도 역시 뒤에 뒤에 일어남을 장애하지 않는 것이다.
『대기』 ‘하나의 미진’이란 불국토의 티끌 수만큼 많은 겁[塵數劫] 중에 익혀야 할 바[所練]를 부지런히 닦기 때문에 바야흐로 능히 시방세계를 포함하여 걸림 없이 자재하니, 이것은 사법으로서, 가장 미세한 초위(初位)인 것이다. 진정(眞定) 대덕이 말하기를, “사융현리문(事融現理門)이란 티끌이 시방을 포함하는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이지, 하나의 티끌이 민멸(泯滅)하여 융섭하여서 같은 이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도신장』 의상 스님은 “하나의 미진 속에 시방세계를 포함한다는 것은 동일하게 머무름이 없음[無住]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상원 스님[元師]172)이 여쭈었다.
“미진은 머무름이 없는 작은 것[小]이고, 시방세계는 머무름이 없는 큰 것[大]입니까?
【답】 한 가지[一量]이다.
【문】 그렇다면 어떻게 티끌은 작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 미진과 시방세계가 각기 자성이 없어서 오직 머무름이 없을 뿐이니,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고 말하는 것은 그럴 필요가 있는 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작기 때문에 작다고 하고 크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큰 줄 알지 못하고 근기 중에서 티끌이 작고 세계가 큼을 알도록 하기 때문에 우선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큰 것이라 말한 것일 뿐이지, 한결같이 티끌은 소(小)의 자성이고 세계는 대(大)의 자성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티끌은 크고 세계는 작다’고 말할 수 있으니, 도리가 가지런하여 하나인 무주 실상(無住實相)이니라.
『고기』 작게 부수면 부술수록 더욱 작아지는 티끌이 있고, 작게 부술수록 더욱 커지는 티끌이 있으며, 작게 부수더라도 여전히 본래 그대로인 티끌이 있는 것이다. 『구사론』173)의 본송(本頌)에서는 “극미(極微)ㆍ미(微)ㆍ금(金)ㆍ수(水), 토(兎)ㆍ양(羊)ㆍ우(牛)ㆍ극진(隙塵)ㆍ서캐ㆍ이ㆍ손가락 마디 등은 뒤로 갈수록 일곱 배씩 증가하는 것이다”(이상)174)라고 하였다. ‘극진’이라는 것은 창틈에서 노니는 햇빛의 티끌이니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며,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이 되면 천안(天眼)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티끌은 창극진(窓隙塵)이다. 이렇게 천안이 보는 바175)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철진(鐵塵)이 되니 초과(初果)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동진(銅塵)이 되니 제2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은진(銀塵)이 되니 제3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금진(金塵)이 되니 제4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수진(水塵)이 되니 대독각(大獨覺)이 볼 수 있는 것이고,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미진(微塵)이 되니, 34가지 염(念)으로 번뇌를 끊고[斷結] 깨달음[보리]을 얻은 부처님께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풀이해서 말하면, 이상은 모두 변계분(遍計分)에 거두어지는 바이다.
이176)를 다시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극미진이 되니 초교(初敎)의 보살이 볼 수 있는 것이며, 이를 쪼개어 칠분의 일에 이르면 사진(似塵)이 되니 자수용불(自受用佛)이 볼 수 있는 것이다. 풀이해서 말하면, 이상은 의타분(依他分)에 거두어지는 바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법진(法塵)이 되니 종교(終敎)의 부처님께서 볼 수 있는 것이며,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공진(空塵)이 되니 돈교(頓敎)의 부처님께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풀이해서 말하면, 종교 이후는 원성분(圓成分)에 거두어지는 바이니, 이 가운데 색심(色心)의 두 가지 법은 모두 진여가 이루는 바이다. 이 종교의 법진은 의식(意識)의 대상[所緣]인 것이다. 초교에서도 역시 의식의 대상을 설하지만, 종교 중에는 하나의 의식을 세우기 때문에 제일의(第一義)의 일심안(一心眼)이 볼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법진을 삼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칠분의 일에 이르면 총상진(總相塵)이 되니 보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요,
이 보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티끌은 곧 3승의 다섯 가지 눈으로는 끝내 능히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 중에는 불공(不共) 별교(別敎)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여 미진 허공(微塵虛空)을 기준으로 하여 초위(初位)로 삼는 것이다.
【문】 이 일승의 티끌은 삼승의 이(理)와 어떻게 다른가?
【답】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곧 이(理)이고, 보안(普眼)의 보는 바를 기준으로 하면 곧 가장 미세한 사법(事法)인 것이다. 이상 설한 바는 처음에 비록 『구사론』을 인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177) 논의 뜻은 아니다. 이는 신림 대덕이 융수(融秀)에게 준 뜻이니, 마음을 관(觀)함을 기준으로 하여 성스러운 가르침을 체달하여 설한 것이다.
또한 기(記)에서는 “7미(微)라는 것은 창유진(窓遊塵)ㆍ양모진(羊毛塵)ㆍ토모진(兎毛塵)ㆍ우모진(牛毛塵)ㆍ금진(金塵)ㆍ수진(水塵)ㆍ극미진(極微塵)이다”라고 하였다. 풀이해 말하면, 창유진은 창틈에서 노니는 햇빛178)이며, 양모진은 창유진을 쪼개어서 일곱 등분한 것이니 오직 양털의 끝에만 붙기 때문이다. 토모진은 양모진을 쪼개어서 일곱으로 나눴기 때문에 양모에 붙지 못하고 오직 토끼 털의 끝에만 붙는 것이다. 우모진은 토모진을 쪼개어서 일곱으로 나눴기 때문에 오직 소 배의 아래쪽 털끝에만 붙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일곱으로 나누면 금을 뚫고 나가도 금에는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일곱으로 나눈 것은 물을 투과해도 물에 젖지 않는 것이다. 이를 쪼개어서 일곱이 된 것
이 극미인 것이다. 이 하나하나179)의 티끌이 모두 증식[生子]하기 때문에 7모진(母塵)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극미진은 초교 중에서는 3무수겁(無數劫) 동안에 나누고 쪼개지며, 이 초교의 티끌을 기준으로 하면 종교 중에서는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겁 동안에 나누고 쪼개지며, 일승에 이르러서는 하나하나의 부처님 세계 진수겁(塵數劫) 중에 나누고 쪼개지는 것이니, 가장 미세한 데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승의 극미진이 되는 것이다.
【본문】 한량없이 오랜 겁……따로 떨어져서 이룬다.
『법기』 ‘한량없이 오랜 겁이 곧 일념이다’라는 것은 한 터럭을 세로로 10등분 하고, 나아가 1백 등분ㆍ1천 등분하여, 그 한 부분을 옥판(玉板) 위에 얹어놓고 날카로운 칼을 들고서 끊되, 그 날카로운 칼이 판에 이르는 때를 기준으로 하여 일념이라 하는 것이다.
『진기』 ‘10세’라는 것은 일설에는 제10세라 하니, 이른바 총상(總相)의 염(念)을 말하는 것이고, 일설에는 10세라고 하니, 이른바 총별을 합하여 들기 때문이다.
【문】 총상의 1세가 현재의 일념을 취한다는 것은 별상(別相)의 세(世)에는 오직 여덟이라는 것인가?
【답】 현재의 일념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의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면 전후가 상대(相對)하여 별상의 가운데 서기 때문에 별상의 세는 아홉이지 여덟이 아니며, 전후를 바라보지 않고 총괄적으로 포함하여 대(待)함을 끊으면 총상의 제10세인 것이다.
『대기』 【문】180) 9세가 즉입하여 10세를 이루는가? 10세를 기준으로 하여 다시 즉입을 논하는 것인가?
【답】 두 가지 뜻이 모두 가능하다. 그러므로 강장(康藏)181)이 말하기를, “그러나 이 9세가 교대하여 서로 즉입하기 때문에 하나의 총구를 이루는 것이니 총별이 합하여 10세를 이루는 것이다. 이 10세가 별이(別異)를 구족하여 동시에 현현하여 연기를 이루기 때문에 상입(相入)을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귀장원통초(旨歸章圓通鈔)』182) 삼승 중에서는 법의 고단(孤單)함을 세우기 때문에 시간이 법과 떨어져 있으니 법이 이미 유전하기 때문에 시간도 유전하는 것이다. 일승 중에서는 법의 원만함을 세우기 때문에 시간이 법과 떨어져 있으며 법이 유전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도 유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락경』183)에서는 “부처님께서 범마달왕에게 고하여 말씀하시길, ‘그대 앞에 누워있는 개는 그대의 과거 몸이요, 장차 나는 그대의 미래 부처이다’라고 하였다”(운운) 하였다. 또한 신라[羅國]184)의 승려 지통(智通)은 의상 스님의 10성(聖) 제자 중 한 사람인데, 태백산185)의 미리암(彌里庵) 토굴에 머물면서 화엄관(華嚴觀)을 닦다가 어느 날 우연히 큰 돼지가 토굴 문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지통은 평상시대로 목각존상(木刻尊像)을 예배하되 정성스러움을 다했다. 그러자 존상이 지통에게 말하였다.
“토굴 앞을 지나간 돼지는 그대의 과거의 몸이요, 나는 곧 그대가 장차 얻을[當果] 부처이다.”
지통이 이 말을 듣고서 곧 ‘삼세가 한 순간[三世一際]’이라는 이치를 깨달았다. 훗날 의상 스님을 찾아뵙고 그 일을 말씀드리니, 스님께서 그 그릇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마침내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수여하셨던 것이다(이상).
앞의 범마달왕(梵摩達王)의 일과 함께 생각하면, 비록 때에 정법과 상법의 차이가 있으며 장소 역시 중심과 주변의 다름이 있으나, 그 인연은 역시 서로 유사한 것이다(운운).
삼승 중에서 과거는 오직 개의 지위이고 현재는 오직 사람의 지위이며 미래는 오직 부처님의 지위이므로 과거의 개로부터 현재의 사람에 이르고, 현재의 사람으로부터 미래의 부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승 중에서는 법의 고단(孤單)함을 세우기 때문에
시간이 법과 떨어져 있다”고 하니, 법이 항상함이 없으면 시간도 역시 항상함이 없는 것이다. 일승 중에서는 과거의 개 가운데 사람과 부처를 갖추고 있고, 현재의 사람 중에서도 개와 부처를 갖추고 있으며, 미래의 부처 중에도 개와 사람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개로부터 현재의 사람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현재의 사람으로부터 미래의 부처에게로 이르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일승 중에서는 법의 교철(交徹)186)을 세우기 때문에 시간이 법과 떨어져 있다”고 하니, 법이 상주(常住)이기 때문에 시간 역시 상주인 것이다.
【문】 법은 비록 하나라고 하지만 서로 바라보면서 9세를 이루는 것입니까, 9세가 다른 것같이 법 역시 다른 것입니까?
【답】 뒤의 뜻과 같으니, 이른바 우선 내 몸을 기준으로 하면, 일년 중에 달로 치면 곧 일년이 12달이므로 내 몸 역시 열둘인 것이다. 한 달이 30일이므로 몸 역시 삼십인 것이고, 하루가 12시간이므로 몸 역시 열둘인 것이다. 한 시간이 8각이므로 몸 역시 여덟인 것이다. 이와 같이 1년 360일에 하루가 1백 각(刻)이므로, 몸 역시 3만 6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9세가 다른 것과 같이 법도 역시 다른 것이다.
【문】 5위(位)187)를 기준으로 하여 9세를 논하면, 그저께[昨昨日]는 과거의 과거이므로 오직 하나뿐이다. 어제[昨日]라는 것은 당체(當體)를 기준으로 하면 과거의 현재이며, 오늘[今日]을 바라보면 현재의 과거이므로 둘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것은 어제를 바라보면 과거의 미래요,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현재의 현재이며, 내일을 바라보면 미래의 과거이므로 셋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내일[明日]이라는 것은 오늘을 바라보면 현재의 미래요,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미래의 현재이므로 둘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모레[明明日]는 미래의 미래이므로 오직 하나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5위(位)라, 서로 바라보아서 논하기 때문에 9세를 이루는 것이니, 곧 법은 비록 하나라고 하지만 서로 바라보아서 논하기 때문에 역시 9세의 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9세의 다름과 같이 법도 역시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 법장[康藏]은 “시간과 법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알라”고 했던 것이다. 삼승 중에 색(色)과 심(心) 등이 법이요, 이 법 위에서 전후와 변천의 뜻을 세워서 시간을 삼기 때문에 시간은 곧 임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뜻을 논하지 않는다. 일승 중에서는 시간과 법이 서로 떠나지 않으므로 시간 역시 실(實)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다름과 같이 법도 역시 다른 것이다.
『도신장』 어느 날 밤 꿈에 과거의 아버지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이 각각 셋씩 아홉이 있으나 깨어났을 때 보면 다만 일념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요, 이러한 마음 가운데 조각으로 나누어서 아버지를 삼고 조각으로 나누어서 나를 삼고 조각으로 나누어서 아들로 삼는 것이 아니다. 총체적으로 일심에 있어서 듦에 따라 곧 아홉 사람을 다 거두어들이니, 서로 아는 바가 없으나 단절되어 아홉 사람의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니다. 또 일념 밖에 셋을 세워서 유(有)로 삼는 것이 아니고 여섯을 세워서 무(無)로 삼는 것이 아니니, 유와 무가 동일하게 일념에 처하여서 유무의 다름이 없는 것이다(이상).188) 그러므로 다만 그 무아(無我)의 보심(報心)이 온전히 아버지가 되고 온전히 나가 되며 온전히 아들이 되기 때문에 9세의 다름과 같이 법도 역시 다른 것이다.
【문】 현재의 일념이 나머지 8세의 별의(別義)를 배제하는 것은 9세 중에 치우침 없는 총의(總義)와 어떻게 다른가?
【답】 지엄 존자가 비유로써 의상 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어떤 사람의 꿈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붕 위에 올라가 있고 아들과 손자는 아래에서 기와를 나르는데 자신은 중간에 있으면서 차례로 전하여 주는 것과 같으니, 조부는 과거의 과거이므로 오직 하나의 지위이며, 아버지는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과거이므로 두 가지 지위를 갖추고 있으며, 중간의 자신은 과거의 미래이고 현재의 현재이며 미래의 과거이므로 세 가지 지위를 갖추고 있으며, 아들은 현재의 미래이며 미래의 현재이기 때문에 두 가지 지위를 갖추고 있고, 손자는 미래이므로 오직 하나의 지위인 것이다. 그 중간에 있으면서 기와를 나르는 사람은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나머지 8세를 배제하기 때문에 현재의 현재인 것이다. 꿈속의 다섯 사람을 통틀면 9세 중에 치우침이 없으니, 이 사람의 분상(分上)에는 두 가지 뜻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별의 시간이 법과 떨어져 있는 것이다.”
『도신장』189) 지엄 스님이 돌아가시기 열흘 전에 제자[學徒]들이 나아가서 여쭈었더니, 스님께서 대중에게 물으셨다.
“경 중에 ‘하나의 미진 가운데 시방세계가 포함되어 있다’와 ‘한량없는 겁이 곧 일념이다’ 등으로 말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대중이 말씀드렸다.
“연기법은 자성이 없으니 작은 것이 작은 데 머물지 않고 큰 것이 큰 데 머물지 않으며, 짧은 것이 짧은 데 머물지 않고 긴 것이 긴 데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그러나 아직 설었구나.”
그러자 대중들이 말씀드렸다.
“어찌하여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말 것이니, 단지 하나를 말하기 때문이다.”
【본문】 처음 발심할 때……언제나 함께 어우러져 있다.
『법기』 【문】 무엇 때문에 ‘9세와 10세가 서로 상즉한다’ 다음에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는 뜻을 설하는가?
【답】 증분(證分)의 법은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 어떤 수행인[行人]이 이것을 분간하지 못하므로 이 사람을 위하여 증분의 법성(法性)을 전(轉)하여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하나에 자성이 없으니 일체로써 성품[性]을 삼고, 하나의 티끌[塵]에 자성이 없으니 시방으로 성품을 삼으며, 무량겁(無量劫)에 자성이 없으니 일념(一念)으로 성품을 삼고, 일념에 자성이 없어서 무량겁으로 성품을 삼으니, 이와 같은 것을 ‘매우 깊은 진성(眞性)’이라 이름한다”라고 한다.
수행인이 생각하여 말한다.
“이미 진성은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증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시 가르쳐서 말한다.
“요컨대 마땅히 이 진성으로 마음을 삼아서 발(發)하나 여기에서 행인이 이와 같이 발하기 때문에 발심(發心)이 곧 만과(滿果)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열반에 머무는 때에 항상 생사(生死)에 노닐고, 생사에 노니는 때에 항상 열반에 머물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이 언제나 함께 어우러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소전장(所詮章)』190) ‘부처님 종성(種性)’의 문장에서 “세 번째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2가지 설이 있다. 첫째, 앞의 여러 가르침에서 밝힌 종성을 거두어들여서 모두 주반(主伴)을 구족하여 종(宗)을 이루는 것이니, 동교(同敎)이기 때문이며 방편을 거두어들이는 까닭이다. 둘째, 별교(別敎)에 의거하면 종성이 매우 깊고 인과가 둘이 아니니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에 통하고 3세간을 다하여 일체의 이사(理事)・해행(解行)의 모든 법문을 두루 거두어들이고 본래 만족하여 이미 성취해 마쳤기 때문이다. 대경(大經)191)에서 “보살의 종성이 매우 깊고 광대하여 법계 허공과 더불어 같다”라고 한 것은 이를 일컫는 것이다.
『진기』 ‘처음 발심할 때 문득 정각을 이룬다’라는 것은, 동교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3현(賢)192) 10지(地) 가운데 10해(解)193)의 첫째 발심주(發心住)에서 부처를 이루고[成滿], 다시 치지주(治地住)194) 등에서 부처를 이루니, 이는 밝음과 어둠의 차이가 없으나 맡겨서 나타낸 것이다. 만일 스스로의 별교[自別敎]라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즉(卽)하여 정각이라 이름할 뿐이니 10해(解)의 지위에 맡김이 없다.
‘생사와 열반은 언제나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은, 만일 지위[位]에 맡겨 말한다면 ‘적멸한 열반의 체가 연으로부터 쫓아 생사를 이루니, 생사를 이루는 때가 곧 성정열반(性淨涅槃)의 체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곧 생사와 열반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연(緣)에 있다. 무엇인가? 생사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열반을 갖추고,
열반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생사를 갖추기 때문인 것이다.
【문】 무엇이 생사(生死)이고, 무엇이 열반(涅槃)인가?
【답】 생사가 곧 그대의 몸이며, 열반이 곧 그대의 몸인 것이다.
『탐현기(探玄記)』195) 경196) 가운데 ‘초발심 보살이 곧 부처이다’라는 문장을 해석하면서, 혹은 인(因) 가운데 과(果)를 설하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해(解)가 부처님 경계와 같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이(理)를 기준으로 하여 평등이라 하기도 하는 것이다. 만일 삼승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면 역시 위와 같은 설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아래위의 문장을 살펴보건대, 일승 원교(一乘圓敎)를 기준으로 하면 시종(始終)이 서로 거두어들여[相攝] 원융무애하니, 처음[始]을 얻으면 곧 마지막[終]을 얻고 마지막을 궁구하면 바야흐로 근원인 처음인 것이다. 첫째는 다라니문의 연기가 상섭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고, 둘째는 보현의 보리심이 두루 6위(位)를 다 거두어들이기[該攝] 때문에 인(因)에 즉하여 곧 과(果)인 것이며, 셋째는 법성은 시종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발심하여 처음에 들어가는 것이 곧바로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위의 경문197)에서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루니, 지혜의 몸[慧身]을 구족하여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묘리원성관(妙理圓成觀)』198) 이제 이 뜻을 분별하건대, 간략히 4가지의 차별로 나누는 것이다. 첫째는 유인문(唯因門)이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언제나 보살이 만행(萬行)을 닦기 때문에 혹은 순수하며 혹은 잡스러워서 휴식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하나하나의 행에 구경(究竟)이 없기 때문이며, 중생계가 가히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나는 언제나 시방의 국토 중에서 보살행을 행한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허공이 다할 수 없으며 중생이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이룸이 없는 것이다. 마치 문수가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 되고 마야부인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과 같으니, 이들은 모두 인문(因門)에 머물러서 교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유과문(唯果門)이니, 과거와 미래[前後際]가 다하도록 언제나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인가? 덕상(德相)이 온전히 진실하여 시절의 운수[時數]에 떨어지지 않으니, 다함이 없는 궁극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역인역과문(亦因亦果門)이니, 이른바 발심과 정각을 이룸이 있어서 모든 때에 생각생각마다 발심하고 생각생각마다 부처를 이루기 때문이다. 넷째는 비인비과문(非因非果門)이니, 이른바 가히 발할 마음이 없으며 가히 이룰 부처가 없기 때문이며, 진실한 법계 중에는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도신장』 【문】 ‘3세간으로 부처의 몸과 마음을 삼는다’는 것은 불신(佛身)이 크고 넓기 때문에 중생 등이 부처의 몸과 마음[身心]에 있는 것인가, 중생의 업과(業果)가 곧 부처인 것인가?
【답】 두 가지 뜻이 다 가능하니,
「노사나품」에서는 “부처님의 하나의 모공(毛孔) 중에 한량없는 중생이 머물러서 각기 스스로 고락을 받되, 오고 감을 알지 못한다” 등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역시 “중생의 업과 등이 곧바로 부처이다”라는 것도 가능하다.
【문】 ‘중생의 업과가 곧 부처이다’라는 것은 예로부터 곧 부처이거늘 어떻게 ‘처음 발심하였을 때 비로소 부처를 이룬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예로부터 부처이지만 발심하였을 때 비로소 부처임을 알 뿐인 것이니, 마치 꿈속에서 달렸지만 스스로의 꿈이 곧 적정함이니 꿈을 깬 아침에 비로소 달린 것이 곧 누워 잔 것인 줄 아는 것과 같다.
『대기』 ‘처음 발심할 때[初發心時]’ 등은 22위 중에 어느 하나의 위(位)를 따라 선악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초발심으로 삼으니, 곧 변정각(便正覺)인 것이다.
【문】 ‘선한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발심을 삼아 정각인 것은 가하지만, 어떻게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초발심을 삼으며 또한 정각이겠는가?
【답】 머무름 없는 별교[無住別敎]를 기준으로 하면 22위(位)가 다 무주의 위이기 때문에 처음에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때에 후제(後際)의 불과를 거두어들임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주 별교 가운데도 또한 이와 같은 ‘발심 정각’의 뜻이 있는가?
【답】 어느 위(位)를 따라 선악의 마음을 일으키고 변정각이라는 것은 먼저는 미혹하다가 나중에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다만 본래 깨달음이므로 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생사와 열반’ 등은 22위 가운데 3도(途)ㆍ5승(乘)199) 등이 갖고 있는 모든 분단(分段)ㆍ변역(變易)과 원교 중의 분단ㆍ변역을 합하여 생사의 변(邊)으로 삼고, 그 가운데 있는 이사열반(二四涅槃)과 열 가지 열반을 합하여 열반의 변으로 삼는 것이니, 이 둘은 서로 알지 못하며 하나인 무분별이기 때문에 ‘언제나 함께 어우러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그렇다면 생사는 싫어할 바가 아닌데 무엇 때문에 지상(至相)200)은 “6도(道) 인과는 싫어함을 의지하여 벗어남을 구한다”고 하였는가?
【답】 이승 등의 여러 유정(有情)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뿐이니, 만일 보현문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모두 실자덕(實自德)이요 다시 다른 일[異事]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3도(途)의 인(因)과 10악(惡) 등의 업(業)이 닦는 바가 되는가?
【답】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그러므로 만족왕(滿足王) 선지식의 일201) 등이 실법문인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여환법문(如幻法門)’ 등이라 하였는가?
【답】 다만 삼승의 상(相)을 따라 이와 같이 말하였을 뿐이다. 또 죄복(罪福)이라 말한 것은 나와 남[我人]을 실제로 집착하는 지위[位]를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이다. 만일 이러한 집착을 떠난다면 일체의 죄와 복이 허깨비[幻] 같고 공(空)과 같으니, 이와 같은 법 중에 무슨 죄와 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환(幻)이라 하는 것이다.
『관사석만족왕법문(觀師釋滿足王法門)【문】202) 이 가르침에서 설한 바는 일체가 다 실(實)인데, 어떻게 말로써 교화하는가?
【답】 스스로의 힘으로 중생을 거두어들이면 일체가 다 실이지만, 거스르는 행이나 괴로운 일은 모름지기 ‘권화(權化)’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의 뜻을 얻으면 교화[化]도 역시 실이니, 실의 체(體)가 두루하기 때문이며 실도 역시 교화이기 때문이다.
『도신장(道身章)』203) 일승의 연(緣)은 하나의 법을 듦에 따라 나머지 다른 법을 모두 거두어들여 남음이 없어서 이 한 법의 연이 될 뿐이니, 네 가지 연(緣)204) 등 모든 연의 실(實)이 모두 일승에서 없어지는 것이다.
【문】 만약 이러한 차원이라면, 역시 ‘10악(惡)을 지어도 천상에 태어나고 10선(善)을 닦아도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답】 이러한 뜻을 얻는 데 이르면 이러한 뜻을 말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러한 뜻을 얻지 못하면 거칠게 전할 바가 아닌 것이니, 지엄 스님은 항상 깊고 옅음을 물음에 비로소 답의 뜻을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셨다(운운).
【문】 일승에서 그 같은 생명을 죽일 때는 죽이는 주체도 역시 죽고 역시 죄가 있는 것인가?
【답】 해행(解行) 이상의 자재위(自在位) 중에서는 역순(逆順)을 아울러 닦는 것이지만 견문(見聞) 이하의 열등한 범부는 능히 근기를 보지 못하고205) 함부로 중생[物]의 생명을 죽인다면 중생에 대하여 이익이 없고 역시 스스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마치 저 쥐새끼가 사자의 달리기를 본받고자 하다가 불구덩이 등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운운).
【문】 ‘3세간이 모두 부처이다’라고 한다면, 초목을 취하여 쓰는 것이 곧 부처의 몸을 해치는 것이니 죄를 얻는가?
【답】 부처의 입장에서 말하면 비록 모두 부처이나 중생의 입장에서 말하면 모두 부처가 아닌 것이니, 끊는다고 해서 죄가 있겠는가?(운운) 중생과 초목은 필요로 하는 곳의 필수품[所須]이니, 비록 내 안과 같은 것이지만 중생은 죽이면 죄가 되는 필수품[所須]이며 초목은 끊어서 취하더라도 죄가 없는 필수품인 것이다.
【본문】 이치와 현실206)이 흐릿하여[理事冥然]……대인(大人)의 경계이다.
『법기』 이 가운데 ‘이사(理事)’라는 것은, 생사는 성품이 없으므로[無性] 열반으로써 성품을 삼고 열반은 성품이 없어서 생사로써 성품을 삼는 것이니, 곧 생사와 열반의 성품 없음은 이(理)가 되고 성품이 없는 생사와 열반은 사(事)가 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연기는 성품이 없으며[緣起無性] 성품이 없이 연기한다[無性緣起]”라고 하였다. 연기 무성은 이(理)이고, 무성 연기는 사(事)이다. 이(理) 역시 진성의 이이며, 사(事) 역시
진성의 사이므로 ‘흐릿하여 분별이 없다’라고 하니, 이는 십불과 보현의 경계인 것이다.
『진기』 ‘이치와 현실이 흐릿하여’ 등은 총체적으로 위의 뜻을 밝히는 것이니, 위에서 나타낸 바는 비록 많은 법이 있다 하나 이치와 현실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십불과 보현의 경계’에 대해서이다.
【문】 연기분은 오직 보현의 경계인데 어찌하여 십불을 말하는가?
【답】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마음[佛外向心]과 보현의 마음이 그윽이 합하여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보현을 취(取)하고, 나누어지지 않는 뜻 가운데서 아울러 십불을 거론하는 것이다.
『대기』 【문】207) ‘이사명연’ 등은 증분과 교분의 대의를 통틀어서 맺는 것인가, 오직 교분만인가?208)
【답】 어떤 사람은 ‘통틀어 맺는 것[通結]’이라 하니, 이른바 아래 구절에서 ‘십불과 보현의 대인의 경계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오직 교분을 맺는 것’이라 하니, 이른바 증분을 맺으면서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며 나머지 경계가 아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문】 처음의 뜻209)이라면 어떤 것이 이(理)이고, 어떤 것이 사(事)인가?
【답】 증분은 이(理)이고 연기분은 사(事)이니, 곧 증・교가 무분별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210)에서 “증ㆍ교의 두 법은 예로부터[舊來] 중도이며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또한 증분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의 증득한 마음[佛證心]은 이(理)가 되고 나타나는 바 3세간의 법은 사(事)가 되는 것이다. 또 연기분 중에서는 무주의 본법은 이(理)가 되고, 22위(位)는 사(事)가 된다. 이러한 까닭에 증분의 이사무분별은 십불 대인의 경계이며, 교분의 이사무분별은 보현 대인의 경계인 것이다. 이 뜻이라면 증분은 오직 십불의 경계이고 교분 중에서는 십불을 말하지 않는 것이니, 이른바 안으로 향하면 십불이고 밖으로 향하면 보현이기211) 때문이다. 여기서는 안과 밖의 때를 통틀어 맺어서 이와 같이 말하였을 뿐이다.
둘째의 뜻은 이러하다.
【문】 이미 ‘십불 대인의 경계’라고 말했는데, 어찌하여 ‘오직 교분만을 맺는다’고 하는가?
【답】 연기분 중에도 또한 십불이 있으니, 이 교분도 역시 십불이 밖으로 향하는 문[十佛外向門]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과 보현이 상속하면서도 각기 다르다’는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212)
『간의장(簡義章)』 ‘8척(尺) 기둥의 모습[相]은 사(事)이고, 기둥의 ‘남이 없음[無生]’은 이(理)가 된다’라는 것은 삼승의 뜻이다. 만일 일승에서라면 곧 이 8척 기둥의 모습은 이(理)이고 기둥의 ‘남이 없음’은 사(事)가 된다. 또 이(理)가 평등하면 곧 사(事)도 역시 평등하고, 사(事)가 차별이면 곧 이(理)도 역시 차별인 것이다.
만약 대도(大道)를 체득하여 이해한다면 스스로의 사[自事] 이외에 어느 곳에서 이(理)를 얻을 것인가? 그러므로 지상(至相)이 말하기를, ‘깊은 종[冲宗]은 그윽한 생각[玄想]에 남아있지 않고 원만한 도는 시작하는 문(門)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 의미가 대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삼승은 평등한 일심을 설하고, 일승은 갖가지 마음을 설하니, 곧 ‘삼승은 이(理)가 평등함이고 일승은 이(理)가 차별됨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 단지 그 이름만 다를 뿐, 설명되어지는 바[所詮]는 응당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인가?
【답】 이(理)를 필요로 하면 곧 이(理)이고, 사(事)를 필요로 하면 곧 사(事)이니, 필요로 하는 바의 연(緣)이 달라지면 이사(理事)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기둥은 필요로 함을 따라 세워지기 때문에 온전한 체(體)여서 둘이 없는 것이다.
【문】 이사의 평등과 차별의 4구213)는 어떠한가?
【답】 동교의 입장이라면 4구를 지어야 하겠지만 이 별교 중에서는 4구를 짓지 않으니, ‘법은 깊고 말은 얕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의 기둥이라는 말 아래의 ‘이(理)를 필요로 하면 곧 이(理)이고 사(事)를 필요로 하면 곧 사(事)이다’라는 것은 평등과 차별을 필요로 함에 따라서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로 해서 곧 원만해지고 말을 해서 곧 이것이니[卽是], 옆이 없고[無側] 그늘도 없어서[無陰] 중도에 근거한다. 일승 원교[滿宗]를 기준으로 하면 앞도 아니며 뒤도 아니니, 일승의 그윽한 이치가 그러하다. 청컨대, 흉금을 비우고서 취하기 바란다.”
【본문】 능인(能人)의 해인……이익을 얻는다.
『법기』 ‘해인’ 가운데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구족하였으니, 이른바 3세간의 법을 섭입(攝入)하는 것은 자리이고, 3세간의 법을 나투는 것[現現]은 이타이다. 그러나 일승 가운데서는 이타가 없으니, 무엇인가? 교화되는 바[所化] 중생이 바로 자내증(自內證) 5해(海) 가운데의 중생이기 때문이며, 근기에 응(應)하여 일어나고, 능히 입히는[能被] 가르침도 자기의 해인정[自海印定]으로부터 일어난 바이기 때문이다.214)
‘빈번하게 여의를 내어[翻出如意]’라는 것은 해인정으로부터 일어나는 가르침[敎]을 여의로 삼는 것이니,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뜻에 칭합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중생의 뜻에 칭합하기 때문에 ‘여의’라 이름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전륜왕[輪王]이 갖고 있는 여의가 왕의 창고 안에 있을 때는 온갖 보배를 비 내리지 못하지만, 만약 전륜왕이 이 여의를 깃대 위에 내다 걸어두고서 빈궁한 사람들을 위하여, 온갖 보배를 비처럼 내려주시길 청하면 그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 갖가지 물건을 비 내려서 뜻과 같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물건들은 본래 여의주 안이나 윤왕의 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허공 중에서 다만 중생의 감응과 왕의 세력으로써 이 여의주가 보배를 비처럼 내려 다함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서원과, 중생이 해인의 가르침에 감응하는 것으로 중생에 응하는 것이다. 창고 안에 있을 때는 부처님의 내증(內證)을 비유하는 것이고, 깃대 위에 내다 걸어 보배를 비처럼 내리는 때는 부처님의 외화(外化)를 비유한 것이다. ‘부사의’라는 것은 부사의한 내증으로부터 일어나니, 불가설의 중생 수에 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보배를 비처럼 내려서 중생을 이익되게 함이 허공을 가득 채운다[雨寶益生滿虛空]’라는 것은, 허공이 가없으므로 세계가 가없고, 세계가 가없으므로 중생이 가없으니, 이 가이 없는 중생에게 이와 같은 가르침을 입히지 못하는 바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중생이 근기를 따라 이익을 얻는다[衆生隨器得利益]’는 것은, 이 여의(如意)의 가르침은 삼승(三乘)ㆍ오승(五乘)ㆍ무량승(無量乘) 등 일체의 중생 가운데서 각각 근기에 칭합하여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인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화엄에서 삼승의 별과(別果)를 얻는가?
【답】 없다. 이른바 이 대경 중에 무량승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이 경전이 갖추고 있는 무량승 중에서 『대품경』 등이 별과를 얻을 뿐이다.
『진기(眞記)』 【문】215) ‘해인삼매’는 자증(自證)이어서 말을 떠난 것인데 무슨 까닭에 이타(利他)의 처음216)에서 밝히는가?
【답】 이타의 연기는 별도의 자체가 없이 다만 십불(十佛)의 내증의 해인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道)에 사적으로 숨기는 것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217)
‘빈번하게……내어’ 등은 생각 생각마다 여의(如意)의 가르침을 일으켜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휴식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만 일념이 법계를 온전히 거두어들여 옆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부사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배를 비처럼 내린다[雨寶]’는 것은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여 ‘보배’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중생이 수용하는 갖가지 보물인 것이다. ‘허공을 가득 채운다[滿虛空]’는 것은 중생이 부사의한 가르침을 입으면 곧 ‘범부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법성 허공과 더불어 다만 이 한 물건이어서 본래 스스로 원만함’을 알기 때문이다.
‘근기를 따라 이익을 얻는다’는 것에서, 산왕(山王)의 보기(普機)는 총상의 가르침을 얻고 차별의 소기(小機)는 차별의 가르침을 얻으니, 각기 스스로 이익을 이루기 때문이다.
『대기』 ‘해인’은 증분과 교분에 통하기 때문에 교분에서 밝히는 것이다. 또 이 4구218)는 제4중 해인이기 때문이다.
【문】 제4중 해인219)은 정내(定內)이기 때문에 이타의 상(相)이 숨어있는데, 무슨 까닭에 이타에 배대하는 것인가?
【답】 제4중 안에 동교와 별교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곧바로 한 줄의
붉은 인[一道朱印]을 기준으로 해서 논하면 곧 차별이 없기 때문에 별교이며, 만약 굴곡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면 차별이기 때문에 곧 동교 중의 근기를 따르는[逐機] 뜻이다. 이러한 까닭에 근기를 따르는 굴곡의 붉은 인이므로 ‘여의의 가르침[如意敎]’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치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근거한다’라고 말한 것은, 제3중 해인220)을 기준으로 하면 머무름이 없는 이치[理]ㆍ머무름이 없는 가르침[敎]인 것이고, 제4중을 기준으로 하면 머무름이 없는 이치ㆍ여의(如意)의 가르침인 것이다. 이 제4중을 기준으로 하여 4구를 다시 5중해인(重海印)으로써 분배하면 처음 2구는 차례대로 처음의 두 해인에 배대되고, 그 다음 1구는 제3 해인에, 그 다음 1구는 뒤의 두 해인인 것이다. 이른바 아래 본문221)에서 이 해인을 해석하기를, “구경에 청정하며 담연(湛然) 명백(明白)하여 3종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 등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화상(和尙)의 뜻은, 이 가운데의 해인이 오직 한결같이 제4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어서 이 중에서 다시 분배한 것이다. 처음 구절은 영리해인(影離海印)이고, 다음 구는 영현해인(影現海印)이다. 그러므로 ‘빈번하게 여의를 내어’ 등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은 제3중이니 능화(能化)의 부처님이 10보법의 보배를 비처럼 내려서 보현의 근기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뒤의 구절은 제4중에서 여의교(如意敎)의 붉은 인[朱印]이 근기의 굴곡에 칭합하기 때문에 ‘중생이 근기를 따라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5중(重)에서 언설의 법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믿고 알며 행하고 증득하도록[信解行證] 하기 때문에 ‘이익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다.222)
그러나 제4중으로써 올바른 뜻을 해석한다면 ‘능인(能人)’이란 능화의 부처님이며, ‘해인’은 정장정(淨藏定)이다. ‘번출여의’란 여의교(如意敎)의 붉은 인(印)이 근기에 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보배를 비처럼 내려서 중생을 이익되게 함이 허공을 가득 채운다’는 것은 10보법을 비처럼 내려 정위(正爲) 가운데서 온전히 온전히 응하니, 이른바 한 줄의 붉은 인(印)이 원만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중생이 근기를 따라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함께 구르면서 원연(遠緣)을 이끌어 교화하는[兼轉引遠爲之] 가운데서 몫마다 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저 근기의 마땅함을 따라서 각기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니, 마치 큰 모서리[大角]에서는 크게 굽고 작은 모서리에서는 작게 굽는 것처럼, 글자를 따라서 굴곡하는 것이다.
『관석(觀釋)』 경223)의 ‘마치 맑고 밝은 거울과 같아서 그 거울 면을 따라 상(像)이 나타나지만 안팎으로 있는 바가 없으니 업의 성품도 역시 그와 같네’라는 문장을 해석하였다. “거울에 3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여래장경(如來藏鏡)ㆍ정광파리경(錠光頗梨鏡)ㆍ해인경(海印鏡)이다. 여래장경은 나타나는 상(像)과 더불어 하나의 체이기 때문에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상을 제거하고자 하면 거울도 역시 따라서 깨지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의 몸이 곧 여래장이니, 따로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업과(業果)가 여래장경 가운데의 상(像)임을 안다면 6도의 인과가 곧 나지 않는[不生] 것이지만, 거울을 얻는 때에 나타나는 상은 얼음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 숙교 가운데서는 근본과 지말이 둘이 아니어서 마치 물이 파도와 다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파도는 의지하는 주체[能依]이며 물은 의지할 대상[所依]이니, 물을 얻는 때에 파도가 쉬어야 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해인경 중에 나타나는 상(像)은, 나의 5척의 몸이 3세간을 갖추어서 별도로 머무르는 곳이 없기 때문에 ‘무주(無住)’라고 하는 것이니, 곧 이 무주를 또한 ‘부동(不動)’이라고도 한다. 이미 부동 무측의 내 몸이므로, 어느 곳으로부터 어느 곳으로 전(轉)하겠는가? 여기에서 나타나는 상이 곧바로 거울의 체(體)이기 때문에 거울을 얻는 때에 상(像)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심륜초(心輪鈔)』 【문】 처음으로 정각을 이룬 부처님의 마음을 무슨 까닭에 해인(海印)이라 이름하는가?
【답】 하나의 ‘해(海)’자로써 3세간을 인(印)치면 ‘분별된 셋’을 떠나서 합하여 ‘하나인 불’의 명백한 마음이 되는 것을 해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보현ㆍ문수 등 9회(會)의 조화(助化)224)도 없고 또한 9회의 처소도 없기 때문에 경225)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일체의 모든 여래가 불법(佛法)을 설함이 없다”고 하였으나, 기연(機緣)을 향하여 스스로 증득한 바의 법을 설하고자 하는 것이다(운운). 그러므로 경226)의 게송에서 “그 응화(應化)하는 바를 따라서 법을 연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법을 설함에 5가지가 있으니, 불설(佛說)ㆍ보살설(菩薩說)ㆍ찰설(刹說)ㆍ중생설(衆生說)ㆍ삼세일체설(三世一切說)이다.
【본문】 그러므로 행자(行者)는……자량(資糧)을 얻는다.
『법기』 ‘행자’는 곧 모든 보법(普法)을 믿고 향하는[信向] 사람이며, ‘본제(本際)’란 내증의 해인인 것이다. ‘망상을 쉬어 기필코 얻음이 없고[叵息妄想必不得]’이란 것은 두 가지 아집(我執)227)으로써 망상을 삼는 것이니, 위의 안으로 증득한 해인의 경지[際]와 같아서 무아(無我)의 사람이라야 능히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내[我]가 있다면 반드시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바닷가의 풀228)은 바닷물이 있기 때문에 마르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의식(意識)의 인아(人我)와 법아(法我)는 저 말나(末那) 및 뇌야의 바다 몸[海身]으로 말미암아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니, 왜냐하면 뇌야의 본식(本識)은 나의229) 뿌리이고, 그 말나식은 나의 줄기이며,
6식 및 전5식은 모두 두 가지 아(我)가 출입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수미산을 오르고자 하는데, 여덟 가지 바다230)를 다 말려버리면 마침내 육지에 의지해서 가서 수미산에 오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행자가 만일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점차로 8식(識)의 망상(妄想)의 바다를 쉬어서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삼승의 뜻이다. 일승 가운데서는 만일 초해(初海)231)를 밟으면 곧 모든 바다를 밟고 수미산 정상을 걷는 것이기 때문에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본제(本際)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연이 없는 선교[無緣善巧]……’에 대해서이다.
【문】 무엇 때문에 ‘망상을 쉰다’는 구절 다음에 이 구절이 있는가?
【답】 본제에 돌아가고자 하면 요컨대 망상을 쉬어야 하고, 망상을 쉬고자 하면 요컨대 모름지기 연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 무연(無緣)이란 무엇인가?
【답】 5식(識)이 5진의 경계[五塵境]를 연(緣)하는 때에 의식은 연과 같고, 그 말나는 안으로 향하여 아를 집착하고 아뢰야의 본식은 3가지 종류의 경계를 연하니, 이러한 까닭에 여의(如意)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연이 없기 때문에 성자(聖者)의 뜻을 얻을 수 있음을 ‘잘 여의를 잡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다[歸家]’는 것은 법성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량을 얻는다’는 것은 행자의 가행방편(加行方便)인 것이다.
『진기』 ‘망상을 쉰다’는 것은, 지위[位]에 맡김을 기준으로 하면 “처음의 지(智)로 끊음을 구하여도 끊을 수 없고, 중간이나 나중의 지(智)로 끊음을 구하더라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論)232)에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나중도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끊을 수 없음으로써 끊음을 삼기 때문에 끊는다는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233)에서 “처음ㆍ중간ㆍ나중에 취(取)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만일 곧바로 일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장애[障]를 듦에 체의 양[體量]이 법계와 같고, 지혜[智]를 드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지상(至相)이 말하기를, “연기의 성품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끊는 것이다. 만일 장애와 다른 지혜로써 지혜와 다른 장애를 끊으려고 한다면 망상을 쉬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얻지 못하는 것이다. 지계(持戒)도 역시 그러하다. 만일 별도로 선(善)을 취하여 능히 막는 것[能防]으로 삼고 그 불선(不善)을 취하여 막음의 대상[所防]으로 삼는다면, 이와 같이 지니는 자를 오히려 ‘계를 깨뜨리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연이 없는 선교……’는 분별이 없는 것이며, ‘여의’는 가르침[敎]이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진원(眞源)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량’은 2천 가지 도품(道品)234) 등이다.
『관석(觀釋)』 소승에서의 계(戒)는 받음도 있고 버림도 있으며, 대승에서의 계는 받음은 있으나 버림은 없으며,
일승에서의 계는 받음도 없고 버림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숙교(熟敎) 중의 가르침은 그 근본을 등지고 지말을 쫓는 사람이 스스로의 본각(本覺) 여래장(如來藏)을 알기 때문에 그 받는 바가 있으며, 본각을 얻고 나서는 항상 스스로 깨닫기 때문에 버리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일승의 계는 본래 받음과 버림[受捨]이 없어서 능소(能所)의 막음을 떠나는 것이니, 제2지(地)235)의 부처님▣▣236)로써 일승의 계(戒)를 삼으며, 일승 중에는 모든 범부 소승과 보살이 없고 오직 만족(滿足)의 불(佛)만 있기 때문이다. 10선(善) 중에서 처음의 셋은 「명호품(名號品)」의 신업(身業)이 행하는 바이고, 그 다음의 넷은 「사제품(四諦品)」의 구업(口業)이 행하는 바이며, 그 다음 셋은 「광명각품(光明覺品)」의 의업(意業)이 행하는 바이다. 이러한 3가지 업이 법계에 시현되면 일체 모든 법이 다 부처님의 3업(業)이니, 지금 이 나의 몸[吾身]이 바로 부처님 10선(善)의 감득한 바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본래 ‘미혹한 때’가 없으며 다시 ‘받을 법’도 없어서 삼세제(三世際)가 끝나도록 항상 스스로 부동(不動)이며, 또한 ‘버리는 법’도 없는 것이다. 몸 밖에 대상[境]이 없고 대상 밖에 몸이 없으니 능소(能所)의 막음을 떠나는 것이다.
『대기』 【문】 앞의 제4중(重)237) 안의 ‘이익을 얻는 기틀[機]’을 어떻게 보는가?
【답】 보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일 8회(會)의 조화(助化)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기틀’이라 말할 수 없으며, 제3중(重)에서야 바야흐로 기틀이 되는 것이다. 만일 제4중을 기준으로 한다면 위광(威光)의 선재(善財)가 다 이 정장정(淨藏定)238) 중의 ‘이익을 얻는 기틀’인 것이다. 다만 정(定) 안에서 얻는 이익을 정(定) 밖에서 설하여 보였을 뿐이다. 이 뜻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익을 얻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제5중 안에서는 소류(所流)ㆍ소목(所目)의 기틀로써 바야흐로 교화하는 대상[所化]을 삼는 것이다.
【문】 만약 위광 선재가 바로 이 정(定) 안에서 이익을 얻는 기틀이라면 오직 처음[初]과 나중[後]의 두 회(會)만 정내(定內)인가?
【답】 만일 제4중을 기준으로 하면 8회의 법이 모두 다 정(定) 안이다. 그러나 우선 위광 선재를 들어 말하였을 뿐이다. 이른바 『법계품초(法界品抄)』에서 “일승에서 선지식을 구하는 것은 오직 이 정내(定內)이기 때문에 정내의 일로써 보였을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제3중 안에서는 위광 선재 등으로써 기틀을 삼지 않는 것인가?
【답】 저 제3중은 불공(不共)의 별교(別敎)이기 때문에 다만 보현으로써 바야흐로 기틀을 삼는 것이며, 제4중에는 동교와 별교를 갖추고 있으므로 위광 선재로써 기틀을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계품초』에서 “만약 삼승의 과문(科文)에 의지한다면 5상(相) 등이 있으며, 이 때문에 견문(見聞)ㆍ해행(解行) 등의 3생(生)239)이 삼승위(三乘位)에 의지하여 일승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이 3생의 지위는 제4중 안에서는 깊고 얕음이 없고,
제5중에는 깊고 얕음이 있다. ‘행자(行者)’라고 말한 것은 제5중을 기준으로 하면 소류ㆍ소목의 기틀이며, 만일 제4중이라면 위광 선재인 것이다. 그러나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대개240) 모든 체(體)가 이러한 화엄을 향하는241) 사람이니, 모두 이 가운데의 ‘행자(行者)’이지만 위광의 선재가 수행하여 인(因)이 나타나기 때문에242) 치우쳐 드는243) 것이다. 이 ‘행자’ 등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곧 노사나의 체(體)임을 알기 때문에 ‘본제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문】 제4중(重) 안에서는 무엇으로써 본제를 삼는 것인가?
【답】 위광의 선재가 얻는 화장세계(華藏世界)의 과(果)와 티끌 수같이 많은 법문 등이 이것이다. ‘망상’이라고 말한 것은 소류와 소목 등에 통하니, 이른바 하교(下敎)의 사람이 자교(自敎)의 자취를 지켜서 집착하여 구경을 삼기 때문에 이 미혹한 집착을 기준으로 하여 총체적으로 망상을 삼음이니, 만일 이러한 집착을 끊으려면 요컨대 모름지기 6상(相)의 칼날을 써야 하는 것이다. 또한 숙교(熟敎) 중에서는 3아승지겁에 4상(相)이 꿈임을 깨닫고 진여가 있다고 헤아려서 이른바 구경으로 삼으며, 자취를 지키고서 머무르기 때문에 6상 가운데 이상(異相)의 도장[印]으로 인(印)치면 곧 그 끊음의 대상이 끝내는 앞의 20가지 꿈이어서, 각자의 지위[位]를 움직이지 않고서 역연(歷然)히 차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만일 일승에 들어가면 요컨대 삼승의 이른바 망상을 끊겠다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 만일 그 이른바 망상을 끊어야 한다는 망상을 쉬지 않는다면 망상을 쉬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망상을 끊겠다는 마음’을 끊어 없애어서 일어나지 않는 것, 이것을 ‘이 가운데서 망상을 쉬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또 말하기를, “이른바 망상이라는 것은 무릇 자기의 몸과 마음 밖에서 부처를 희구하고 법을 구하는 마음을 총체적으로 망상으로 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말하기를, “별교의 뜻으로써 이 문장을 해석하면 응당 ‘망상을 쉬지 않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니, 만일 망상을 쉰다면 반드시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 구절에서 이미 ‘분수에 따라 자량을 얻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동교를 기준으로 하여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니, 이는 바로 그 인연관(因緣觀)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 아래 본문244)에서 ‘행자’를 해석하기를, “행자란 일승의 보법을 견문한 이후부터……이는 별교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에 여기서는 동교라고 하는가?
【답】 이는 소목(所目)의 별교를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이니, 불공(不共)의 머무름이 없는 별교가 아니다. ‘일승의 보법을 견문한다’고 말한 것은 제5중 해인의 입장에서 정(定) 밖의 견문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선교로 여의를 잡아[善巧捉如意]’ 등이라 말한 것은, 비유하면 장님이 그 눈멂[盲]을 말미암기 때문에 ‘자신의 보배가 있는 곳’을 미혹하고 긴 세월동안 빈곤하여 멀리 타향에서 걸식하거늘, 눈을 갖춘 어떤 사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끈을 하나 가지고서 그 보배 있는 곳에 묶고, 그 한 끝을 장님의 손에 쥐어주고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그대가 만일 이 끈을 잃어버리지 않고 찾아서 가면 그대의 보배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장님이 그 말을 듣고 나서 잃어버리지 않고 찾아 가서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면, 그 보배가 있는 곳에 또한 영약(靈藥)도 있어서 그 약 기운의 힘으로 눈이 열려 밝음을 얻고 있는 바 온갖 보배를 자재하게 취(取)하여 쓰는 것과 같다. 행자(行者)도 또한 그러하여, 지혜의 눈[智眼]이 멀었기 때문에 자내증(自內證)의 법성(法性)의 보소(寶所)를 미혹하고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궁핍하여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거늘, 어떤 대성자(大聖者)가 대비의 원을 일으켜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등의 다라니 끈을 드리워서 행자의 신심(信心)의 손에 쥐어주고 진성심심(眞性甚深)의 한 끝을 저 증분(增分)의 보배 있는 곳에 묶어 두고 가르쳐서 말하였다.
“그대가 만약 잃어버리지 않고 부지런히 수행 정진한다면 반드시 곧바로 그대의 법성의 보배 집[寶宅]으로 돌아갈 것이다.”
행자가 믿고 받아서 성자의 뜻을 얻고 여의의 가르침을 잡으면 처음 발심하는 때에 문득 10안(眼)을 열어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곧바로 내증의 법성의 보배가 있는 곳에 들어가서 다함 없는 자가(自家)의 진기한 보배를 받아 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수행인[行人]이 만일 법성의 집에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면 요컨대 모름지기 다라니의 끈을 잘 잡아 지녀서 잃어버리지 말고 자량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도신장(道身章)』245)【문】 닦음과 닦지 않음이 다른 것이거늘,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모두 깨닫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답】 부처님께서 한랑없는 겁에 닦았다는 뜻은 옛날에는 없었는데 새로 얻었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끊어야 할 번뇌가 있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끊고자 한다면 번뇌가 본래 끊어야 할 바가 없음을 아는 것을 끊음이라 이름할 뿐이다. 또한 ‘법의 실(實)’은 3세간에 비추는 것으로 하나의 큰 연기[大緣起]를 삼는 것이니, 예로부터 이와 같은 것이다. ‘한량없는 겁에 닦아서 증득하여 법을 얻음’이라는 것은, 어찌 나만 깨닫고 다른 사람과 목석(木石)246)은 배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증감(增減)에 치우친 대사견(大邪見)으로 정도(正道)가 아닌 것이다.
『도신장』247) 【문】248) 어떤 글에서는 “하나를 끊으면 일체가 끊어진다”고 하고, 어떤 글에서는 “실로 끊을 바가 없다”라고 하는데,249) 전자가 옳다면 후자가 틀리는 것이며, 후자가 옳다면 전자가 틀리는 것이거늘 어떻게 회통(會通)하겠습니까?
【답】 덕의 입장에서 말하면 처음부터 장애가 없는 것이며 번뇌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다함 없는 덕을 덮고 있는 것이니, 만약 ‘실로 끊을 바가 없다’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미혹한 사람은 얻지 못하며, 만약 끊어야 할 바가 있다면 끊을 바는 무엇이겠는가? 글250)에서 “처음도 아니며 중간이나 나중도 아니니 처음ㆍ중간ㆍ나중에서 취(取)하기 때문이다”라 하니, 세 때[三時] 중에 끊는 모습을 얻지 못하지만 깨닫고 나서는 세 때에 장애가 없다. 그러므로 도리가 끊음과 끊지 않음 가운데 있지 않고 근기를 따라서 ‘끊는다’고 말하며, 또한 끊는 바가 없으나 마땅한 근기를 위하여 가르침을 찾아서 증입(證入)하고자 하니, 끊음과 끊지 않음의 걸림 없는 실상(實相)을 이와 같이 시설하는 것이다. 의상 스님[相和尙]께서 “미혹은 다만 작용[用]일 뿐이며 체(體)가 없는 것이지만, 지혜[智]는 체와 용을 갖추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251)
【문】 체(體)가 없는데 어떻게 작용이 있는가? 체는 머무름이 없는 실상이지만 미혹한 작용[迷用]이 번뇌가 되는 것이니, 미혹한 작용이 쉰다면 가히 끊어야 할 체(體)도 없는 것이다.
【문】 ‘하나를 끊으면 일체가 끊어진다’라는 것은, 이미 체가 없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니, 일체니 하는 것인가?
【답】 장애가 되는 법문을 기준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와 더불어 일체를 말하는 것이니, 하나를 장애하면 곧 모든 법문을 장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기(古記)』 대해(大海)는 독약으로 파괴되는 바가 아니며 큰 허공[大空]은 날카로운 칼에 손상되는 바가 아니어서, 연기의 3독(毒)이 3제(際)에 미쳐서 곧바로 무분별을 얻을 따름이니, 다시 쉬어서 멸하여야 비로소 끊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문】 다라니……부처라고 이름한다.
『법기』 ‘다라니’란 법계 법의 다함 없다는 뜻이다.
【문】 수많은 법이기 때문에 무진(無盡)이라 하는가, 다만 하나의 법을 기준으로 하여 또한 무진이라 말하는 것인가?
【답】 두 가지 뜻을 다 얻는다. ‘진실한 보배 궁전[實寶殿]’이란 증분을 기준으로 하면 법성의 처소이며, 연기분을 기준으로 하면 곧 화장세계의 염오를 떠난 진성(眞性)인 것이다.
【문】 만일 다라니로써 법성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는 것이라면, 증분의 처소에서는 가히 중중(重重)의 중즉(中卽)ㆍ미세(微細) 등의 뜻을 허락하는 것인가?
【답】 저 증분은 가히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뜻을 설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법은 남음이나 빠뜨림이 없이 일체를 만족하기 때문에 인다라(因陀羅) 등의 구경의 궁극이라야 이에 증분인 것이다.
【문】 화장세계의 염오를 떠난 진성은 어떤 것인가?
【답】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문[佛外向門]이 그것이다. 화장(華藏) 정토는 삼승이 함께 배우는 곳이기 때문에 삼승의 근기를 따라서 계(界)를 나누고 바다[海]를 떠나지만, 만일 자종(自宗)252)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하나의 바다일 뿐이니, 세 품(品)253)이 없는 것이다.
‘궁좌(窮坐)’는 10세(世)가 상응하여 마땅히 법계에 칭합하기 때문이며, ‘중도’는 3세간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삼는 것이니, 한 물건[一物]도 몸과 마음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로부터[舊來]’는 위의 증분 가운데 ‘본래 고요함[本來寂]’이며, 부동(不動)은 위의 증분 가운데 ‘모든 법의 부동’인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침상[床]에서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30여 역(驛)을 돌아다녔으나 깨고 난 뒤에야 바야흐로 움직이지 않고 침상에 있은 줄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도 그러하니, 본래의 ‘법성’으로부터 쫓아 30구절을 지나 다시 법성에 이르렀으니, 단지 하나여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는다[舊來不動]’라고 말한 것이다.
【문】 이러한 뜻은 숙교 중의 ‘일심을 미혹하여 6도를 유전(流轉)하다가 깨달아서 일심으로 돌아오는 뜻’과 어떻게 다른가?
【답】 저 숙교 가운데서는 20가지 꿈이 민멸하여야 바야흐로 일심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이 종(宗)254) 중에서는 몽념(夢念)을 움직이지 않고 곧 법성이기 때문에 버릴 것이 없고 별도로 돌아갈 바도 없기 때문에 매우 다른 것이다.
『진기(眞記)』 ‘다라니’란 총지(總持)이고, ‘진실한 보배 궁전’은 세계해(世界海)이다. ‘궁극적으로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는다[窮坐實際中道床]’라는 것은 일승 구경의 진원(眞源)에 철저하게 이르는 것이다.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았음을 부처라고 이름한다[舊來不動名爲佛]’에 대해서이다.
【문】 무슨 까닭에 번뇌에 계박된 유정이 예로부터 부처를 이루고 있는가?
【답】 만약 그가 아직 닦음의 연[修緣]을 일으키지 않은 때라면 ‘구래성불’이라고 이름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금일(今日) 발심의 연(緣) 가운데 법계의 모든 법이 바야흐로 몰록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혜의 연[智緣]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번뇌 등의 법255)도 역시 지혜의 연을 이루어서 일어나게 되고, 번뇌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서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금일 발심의 연을 기다려서 옆에 다른 아무것도 없이 일어나는 때에야 비로소 예로부터 이루어진 것일 뿐이니, 연(緣) 이전에 한 법도 없기 때문에 ‘예로부터’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삼승이라면 존중해야 할 정해진 근본이 있기 때문에 오직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과 같다는 뜻만을 취하여 논하는 것이나, 일승은 그렇지 않아서 존중해야 할 정해진 근본이 없어 근본과 지말[本末]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로 함을 따라서 모두 하나를 얻는 것이다.
『대기(大記)』 ‘진실한 보배 궁전’이란 혹은 ‘국토해(國土海)’라 하기도 하고, 혹은 성기과(性起果)와 3덕차별과(德差別果)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3덕(德)256)은 구경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이 성기과인 것이다.
‘궁좌실제중도상’이라는 것은 인위(因位)의 배움이 궁극적으로 과위(果位)에 이르기 때문인 것이다.
‘구래부동명위불’이라는 것은
처음에 ‘법(法)’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불(佛)’자에 이르는 것이니, 처음의 시작과 마지막의 끝남이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상께서 “가도 가도 본래 그 자리요, 이르러도 이르러도 출발한 그 자리다”라고 하신 것이 대개 이 뜻인 것이다.
『고기(古記)』 일승 중의 구래성불(舊來成佛)257)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닦지 않은 중생이 이미 성불하였다는 뜻이고, 둘째는 이미 모든 부처를 이루어서 본래 닦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6상(相)258)에 의지하여 가히 이러한 뜻을 얻는다면, 이른바 부처님은 총상(總相)이 되고 중생은 별상(別相)이 되며, 일체 중생이 부처라는 뜻에서는 가지런하므로 동상(同相)이 되고, 일체 중생이 각기 서로 이것이지 않다[不相是]는 것은 이상(異相)이 되며, 일체 중생의 연기(緣起)가 구경에는 바로 부처인 것은 성상(成相)이 되며, 일체 중생이 각기 자기 자리[自位]에 머물러서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괴상(壞相)이 되는 것이다.
『대기』 이러한 인(印)의 대의는 그 하얀 종이로써 기세간(器世間)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마치 하얀 종이는 본래 색에 물들어 있지 않으므로 검은 것[墨]을 찍으면 곧 검게 되고 붉은 것을 찍으면 곧 붉게 되는 것이다. 기세간[器界] 역시 그러하여 깨끗하고 더러움을 국집하지 않으니, 중생이 처하면 물들어 더러워지지만 현성(賢聖)이 처하면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 검은 글자로써 중생세간을 표시하는 것이니, 이른바 마치 검은 글자는 한결같이 모두 검지만 하나하나는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중생 역시 그러하여 번뇌 무명이 모두 스스로 어둡게 덮어서 갖가지로 차별되기 때문이다. 그 붉은 선[畫]으로 지정각세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마치 붉은 선이 한 줄로 끊어지지 않고 처음과 끝이 둥글게 이어져서[連環] 모든 글자를 꿰는 가운데 빛깔이 분명하니, 부처님의 지혜도 역시 그러하여 평등하고 광대하게 중생의 마음에 두루하며 10세(世)가 상응하여 원명(圓明)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인(印)에 3세간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만일 『관석(觀釋)』을 기준으로 한다면 곧 4가지 뜻이 있다.
첫째, 만약 하얀 종이를 취하면 검은 글자와 붉은 선이 모두 제거되므로 글자와 붉은 선은 종이를 떠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일 기세간을 떠나면 부처와 중생이 없기 때문에 기세간 중에 중생과 부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의 미진(微塵) 중에
3악도(惡道)가 나타나 있으니,
사람ㆍ하늘ㆍ아수라가
각기 업보를 받네.259)
하나의 미진 중에
각각 나유타(那由他)의 무수한 부처님께서
그 가운데서 법을 설하고 계심을
나타내 보이네.
하나의 티끌 중에 티끌 수같이 많은 국토가 있고
하나하나의 국토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이 계시니
하나하나의 부처님 처소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서
언제나 보리행(菩提行)을 연설하심을 나는 보았네.
또 “하나의 미진 가운데 두루 삼세 일체 부처님의 불사(佛事)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둘째, 검은 글자를 기준으로 해도 역시 그러하니, 중생 중에도 기세간과 부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의 모공(毛孔) 중에
두루 시방의 국토를 보니
그 국토가 묘하게 장엄되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모이며260)
하나하나의 모공 중에
수많은 국토가 부사의한
갖가지 모습으로 장엄되어서
일찍이 비좁거나 더러움이 없었네.
모든 국토와 모든 부처님께서
내 몸 안에 있으면서 걸림이 없으니
나는 일체 모공 중에서
나타난 부처님의 경계를 자세히 관찰하였네.
또한 “보살은 자기 마음의 생각 생각마다 항상 부처님이 있어서 정각을 이룸을 안다”고 하며, 나아가 “자기의 마음과 같이 일체 중생의 마음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두 여래가 있어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붉은 선을 기준으로 해도 역시 그러하므로 부처 중에 기세간과 중생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삼세의 모든 겁(劫)과
부처님 국토 및 모든 법과
모든 감각기관과 심(心)ㆍ심법(心法)
일체의 허망한 법이
하나의 불신(佛身) 중에
이 법이 모두 나타나네.261)
두루 시방의 모든 찰해(刹海)에 있는
모든 중생해(衆生海)가 다하도록
부처님의 지혜가 평등하여 허공과 같으니
모두 능히 모공(毛孔) 중에 나타나네.
또한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일념 중에 한량없는 세계와 무량무수(無量無數)의 청정한 중생을 나타내 보이네”라고 하였다.
넷째, 하얀 종이와 검은 글자와 붉은 선은 모두 다 온전히 서로 거두어들이므로 따로 취하여 3가지 물건이 각기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3종세간이 융통(融通)하여 서로 거두어들여서 섞여 한 덩어리가 되지만 문(門)으로 삼는 것이 각기 달라서 역연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의 인(印)은 만약 기세간의 문으로써 관하면 곧 기해인(器海印)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장세계의 모든 티끌
그 하나하나의 티끌 가운데서 법계를 본다.
두루한 광명[普光]이 부처님을 나타내는 것이
마치 구름이 모인 것 같으니
이는 여래의 국토가 자재한 것이네.
중생의 문으로써 취하면 이는 중생해인이며, 부처의 문으로써 취하면 이는 불해인(佛海印)이다. 그러므로 소(疏)에서 “중생 마음 속의 부처가 부처 마음 속의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부처 마음 속의 중생이 중생 마음 속의 부처가 설하는 법을 듣는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다만 국집하여 말하기를 ‘능인해인(能人海印)’이라고만 하는가?
【답】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이와 같아서 부처님께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망상이 다하여 마음이 맑아지는 뜻을 따라서 임시로 ‘능인해인’이라 이름할 뿐이다.
법계도기총수록 상권의 2
찬자 미상
김호성 번역
【본문(本文)】1) 장차 인문(印文)을 해석함에 두 문(門)으로 분별한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도인(圖印)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따로 도인의 모습을 해석하는 것이다.
【문】2) 무엇 때문에 도인에 의지하는가?
【답】 석가여래의 가르침[敎網]에 섭수되는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이 해인삼매(海印三昧)로부터 빈번히 나와 현현함을 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3종세간이란 첫째는 기세간(器世間)이고, 둘째는 중생세간(衆生世間)이며, 셋째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니, 지정각은 불보살이다. 3종세간이 법을 모두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논하지 않았다. 자세한 뜻은 『화엄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 따로 도인의 모습을 해석하는 것은 세 가지로 분별한다. 첫째는 인문의 모습을 해설하는 것이고, 둘째는 글자의 모양[字相]을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본문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인문의 모습을 해설한다.3)
【문】 무엇 때문에 인문에는 오직 1도(道)만 있는가?
【답】 여래의 1음(音)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4) 이른바 하나의 선교방편이다.
【문】5) 무엇 때문에 빈번하게 굴곡(屈曲)을 도는 것인가?
【답】 중생의 근기와 욕망이 같지 않음을 따르기 때문이니, 곧 이 의미는 삼승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1도(道)에 시작과 끝이 없는가?
【답】 선교는 방소가 없으며 마땅히 법계에 칭합하고 10세(世)에 상응하여 원융하고 만족함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 곧 이 뜻은 원교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4면(面)과 4각(角)이 있는가?
【답】 4섭(攝)6)과 4무량(無量)7)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의미는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도인의 모습이 이와 같은 것이다.
둘째, 글자의 모습을 밝힌다.8)
【문】 무엇 때문에 글자 중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
【답】 수행방편(修行方便)의 입장에서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문】9) 무엇 때문에 글자 가운데 많은 굴곡이 있는가?
【답】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 달라서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문】 무엇 때문에 시작과 끝의 두 글자가 중앙에 위치하는가?
【답】 원인과 결과라는 두 가지 지위는 법성가(法性家) 안의 진실한 덕용(德用)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글자의 모습이 이와 같다.
【문】 위에서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으나 1가(家)의 진실한 덕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다”고 한 것은 이유를 알지 못하겠으니, 그 뜻은 무엇인가?
【답】 이 뜻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천친론(天親論)』의 저자[主]10)에 의지하여 6상(相)의 방편으로써 뜻의 영역[義分齊]을 세우고 그 뜻에 준하면 도리를 분에 따라서 가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구(句)11)를 기준으로 해서 6상을 분별하면 아래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이제 우선 도인의 형상[印像]을 기준으로 해서 6상을 밝혀 일승과 삼승이 주체와 반려가 되어 서로 이루어 법의 분제를 나타냄을 보이는 것이다.12)12) 이른바 6상이란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이다. 총상은 근본인(根本印)이고, 별상은 나머지 굴곡이 다른 것이니, 도인(圖印)에 의지하여 저 도인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13) 동상은 도인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굴곡은 다르지만 한 가지 도인[同印]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모습을 증가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첫째 굴곡, 둘째 굴곡 등으로 굴곡이 달라지면 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성상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도인을 이루기 때문이다. 괴상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굴곡을 돌아감이 각각 서로 달라서 본래 짓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연생법(緣生法)은 6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이른바 총상은 뜻이 원교(圓敎)에 해당하고, 별상은 뜻이 삼승교에 해당하는 것이 마치 총상ㆍ별상ㆍ성상ㆍ괴상 등이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不卽不離], 하나인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어서[不一不異] 언제나 중도에 있는 것과 같다. 일승과 삼승 역시 이와 같아서 주체와 반려로서 서로 의지하여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인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비록 중생을 이익되게 하지만 오직 중도에 있으며 주체와 반려를 서로 이루어서 법을 나타냄이 이와 같으니, 일승 별교와 삼승 별교도 이러한 뜻에 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물은 의혹도 뜻은 역시 이와 같으므로 처음의 굴곡은 인(因)과 같으며 뒤의 굴곡은 과(果)와 같다. 마치 처음과 끝이 같지 않으나 오직 중앙[當中]에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인과의 뜻이 다르지만 오직 ‘스스로의 진여[自如]’에 머물 뿐이다. 삼승방편의 교문(敎門)에 의지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고 일승의 원교에 의지하므로 앞과 뒤가 없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경14)에서 “또한 모든 보살이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을 밝게 설하여 지혜의 지위[智慧地]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설함과 같다. 그러므로 논15)에서 말하기를, “‘모든 보살’이라는 것은 이른바 신(信)ㆍ행(行)ㆍ지(地)에 머무르는 것이요,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이라는 것은 출세간의 도품(道品)이고, ‘밝게[明]’라는 것은 보는 것[見]・지혜[智]・얻음[得]・증득[證]이며, ‘설한다’는 것은 그 중에서 분별하는 것이요, ‘들어간다[入]’는 것은 믿음[信]・즐거움[樂]・얻음[得]・증득[證]이며, ‘지혜의 지위[智慧地]’라는 것은 이른바 10지의 지혜이니 본분(本分) 중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근본입(根本入)이다. 경16)에서 ‘또 모든 보살이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을 밝게 설하여 지혜의 지위에 들도록 한다’라고 설함과 같다. 그러므로 이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설하기를, ‘근본입에 의지하면 아홉 가지 입(入)이 있다. 첫째는 섭입(攝入)이다. 문혜(聞慧) 가운데 모든 선근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니, 경17)에서 ‘모든 선근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사의입(思議入)이다. 사혜(思慧)가 모든 도품(道品) 중에서 지혜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니, 마치
경18)에서 ‘모든 불법을 잘 분별하고 선택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법상입(法相入)이다. 그러한 뜻 중에서 한량없이 갖가지로 알기 때문이니, 마치 경19)에서 ‘널리 모든 법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교화입(敎化入)이다. 사의(思議)하는 바를 따라서 이름이 갖추어지며 잘 법을 설하기 때문이니, 마치 경20)에서 ‘잘 결정하여 모든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증입(證入)이다. 일체 법 평등지(平等智)로 도를 볼[見道] 때에 잘 청정하기 때문이니, 마치 경21)에서 ‘분별이 없는 지혜가 청정하여 잡스럽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곧 스스로 불법을 이루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타를 역시 자리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불방일입(不放逸入)이다. 도를 닦을[修道] 때에 모든 번뇌장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니, 마치 경22)에서 ‘모든 마법(魔法)이 능히 오염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지지전입(地地轉入)이다. 출세간의 도품(道品)에서 무탐(無貪) 등의 선근이 청정하기 때문이니, 마치 경23)에서 ‘출세간법의 선근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다시 선근이 있어서 능히 출세간 도품의 인(因)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덟째는 보살진입(菩薩盡入)이다. 제10지 중에서 모든 여래의 비밀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니, 마치 경24)에서 ‘불가사의한 모든 경계를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불진입(佛盡入)이다. 일체지에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니, 마치 경25)에서 ‘나아가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의 지혜 경계를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모든 입(入)이 교량지(校量智)의 뜻의 차별이니 차례로 더욱 뛰어나지만 근본입은 아니다. 일체 설하는 10구(句) 중에는 모두 여섯 가지의 차별상문(差別相門)이 있으니, 이러한 언설의 해석에서는 마땅히 사(事)는 제외함을 알아야 한다. 사라는 것은 이른바 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이다. 여섯 가지 상은 이른바 총상ㆍ별상ㆍ동상ㆍ이상ㆍ성상ㆍ괴상이다. 총상은 근본입이며, 별상은 나머지 9입(入)의 다름이니, 본(本)에 의지하여 저 본을 원만케 하기 때문이다. 동상은 들어가기 때문이며, 이상은 모습을 더하기 때문이다. 성상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며, 괴상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니, 마치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같다. 나머지 일체 10구 역시 뜻에 따라서 유례(類例)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26)라고 하였다. 논의 글이 이와 같으니, 이 논주의 종(宗)을 세운 도리에 준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비록 원인과 결과, 신(信)ㆍ해(解)ㆍ행(行)ㆍ회향(廻向)ㆍ지(地)ㆍ불(佛)의 자위(自位)가 부동하나 전후가 없다고 하니 무엇 때문인가? 모든 법이 각기 달라서 ‘스스로 그러함’에 머물기 때문에 1여(如)와 다여(多如)의 여여(如如)한 모습으로는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27)에서 “묻기를, 어떻게 해야 불법을 깊이 믿는 것이 되는가? 답하기를,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부처님께서 알 바이며
나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이와 같다면 ‘깊이 불법을 믿는다’라고 이름할 것이다. 이것이 그러한 뜻이다.
【문】 6상은 어떤 뜻을 나타내는 것인가?
【답】 바로 연기 무분별의 이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6상의 뜻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마땅히 알아라. 비록 일부(一部) 경의 7처(處) 8회 및 품류(品類)가 같지 않으나 오직 「지품(地品)」28)에 있으니 어째서 그러한가? 이것이 근본이어서 법을 다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지품」 중에는 비록 10지가 같지 않은데 오직 초지(初地)에 있으니,29) 무엇 때문인가? 한 지위[地]를 일으키지 않고서 일체 모든 지위[諸地]의 공덕을 두루 다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지위 중에서도 비록 다분히 같지 않지만 오직 일념(一念)에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3세와 9세가 곧 일념이기 때문이며, 일체가 곧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치 일념과 같이 다념(多念) 역시 이와 같아서 하나가 곧 일체요 일념이 곧 다념 등이니, 앞을 뒤집어도 옳은 것이다.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다라니법은 주체와 반려가 서로 이루어서 한 법을 듦에 따라 일체를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만약 회(會)를 기준으로 해서 설하면 회회(會會)마다 일체를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며, 만약 품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다면 품품(品品)마다 일체를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나아가 만약 문장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다면 문문구구(文文句句)가 일체를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요, 다라니법은 법이 이와 같기 때문이니, 아래에서 설한 것과 같다.30)
【본문】31) 무엇 때문에 도인에 의지하며……불보살이다.
『진기(眞記)』 ‘무엇 때문에 도인에 의지하는가? 석가여래의 가르침[敎網]에 섭수되는……보이고자’ 등은, 석가의 가르침은 곧 깊고 얕음이 비록 다르더라도 이름과 모습이 있음을 총체적으로 취하여 말한 것이다.
【문】32) ‘3종세간이 해인삼매로부터 빈번히 나와서 나타난다’는 것에서, 3세간의 법이 빈번하게 나옴은 곧 해인의 체(體)를 여의는 것인가?
【답】 3세간의 법이 곧 해인이니 전체가 나타나서 본래 여읨이 없는 것이다.
【문】 3세간을 거두어들여서 총상의 부처로 삼는다면 곧 총상과 별상이 하나가 아니므로 4세간이 되는가?
【답】 지정각(智正覺) 중에는 ‘타자를 기다린다[待他]’는 뜻도 있고 ‘기다림을 끊었다[絶待]’는 뜻도 있으니, 이러한 두 가지 뜻을 기준으로 하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역시 네 가지 세간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뜻이 다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다만 3종세간이라 할 뿐이다.
【문】 기(器)와 중생은 마땅히 세간이라 할 수 있으나 지정각은 이미 세간을 벗어난 것인데 어찌하여 세간이라 하는 것인가?
【답】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을 때 3세간의 법이 밝고 뚜렷하게 나타나는 까닭에 세간이라 하는 것이니, 이른바 때[時]가 세(世)이며, 그 가운데[中]가 간(間)이기 때문이다.
【문】 지상(至相)은 보살로써 중생에게 합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불보살을 합하여 지정각으로 삼는가?
【답】 깨달음[覺]의 입장에서는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본문】무엇 때문에 인문(印文)에는……일승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대기(大記)』 ‘무엇 때문에 인문에는 오직 1도(道)만 있는가?’라는 것은, 네 번째 해인[第四重海印]33)의 입장에서 이러한 물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른바 ‘이미 근기와 욕망을 따라서 굴곡을 이루었다면 무엇 때문에 일도라고 말하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여래의 1음(音)’이라는 것은 「입법계품」34)에서 “나는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아나니, 여래의 1음을 모든 중생이 요달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이상)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 만약 모든 중생이 1음을 요달한다면 이는 각기 이해를 얻는 것이 아닐 것이며, 각기 이해를 얻는다면 1음을 요달하지 못함이 없음이 아닌 것이다……만약 이러한 힐난에 상대한다면 총상과 별상의 둘로써 답할 것이니, 이른바 굴곡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능히 평등하게 두루하기 때문이요, 이는 1음이기에 움직이지 않고 두루 편만하면서도 음운(音韻)을 차이나게 하므로 능히 굴곡을 이루는 것이다. 이 중에 능히 평등하게 두루함을 이루는 것은 총상이며, 음운이 다른 것은 별상이다. 별(別)은 총(總)에 즉하기 때문에 비록 중생이 각기 이해를 얻으나 1음을 요달하는 것이고, 총은 별에 즉하기 때문에 비록 1음이지만 각기 이해하는 것이다.
『진기(眞記)』 ‘여래의 1음’이라는 것은 총상의 음이다. 「입법계품」에서 “나는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아나니, 여래의 1음을……”라고 하였으니, 이 뜻은 모든 중생의 갖가지 차별된 음성 등이 곧 여래의 1음일뿐이라는 것이다.
【문】 이는 수호야신선지식(守護夜神善知識)이 1음을 증득하여 보고서 “나는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안다”라고 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모든 중생’이라 하는가? 만약 모든 중생을 본다면 어떻게 ‘나는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안다’고 말하는가?
【답】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보기 때문에 1음 중에 모든 종류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총상을 얻어서 별상과 나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니, 마치 ‘집’이라는 한 마디 말은 기둥을 맞추고 대들보를 세우는 등 모든 연(緣)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맞추고 세우는 등의 모든 연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곧 집이라는 한 마디가 어느 곳에서 일어나겠는가?
『법기(法記)』 【문】35) ‘굴곡을 돈다’는 것에서, 이미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안다면 곧 삼승이 없기 때문에 또한 인(印) 가운데 굴곡도 없어야 되는 것 아닌가?
【답】 이상(異相)이 있으므로 성품에 계합하여 움직이지 않는 굴곡이 있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삼승이 있는가?
【답】 일승의 굴곡은 온전히 인의 원만함[印圓]을 다하므로 삼승 일변도의 굴곡은 없는 것이다.
『진기』 ‘선교(善巧)는 방소가 없으며’라는 것은 치우쳐 수순하는 방소(方所)가 없는 것이니, 앞의 ‘방소가 없다’에서의 해석36)과 같다.
‘마땅히 법계에 칭합하여’라는 것은 가로로 법계를 다하기 때문이며, ‘10세에 상응한다’는 것은 세로로 3제(際)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법기』 ‘원융하고 만족한다’는 것은 마치 허공이 모든 사물을 거두어들임과 같은 것이니, 이 하나의 기둥이 열 가지 보법(普法)을 포섭하여 남음이 없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법장(普法章)」에서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선교(善巧)로 법계를 융회하고 원통 자재하여 견문을 떠나지 않는다”(이상)라고 하였으니, 일승 중에서 원통의 법을 견문하기 때문에 견문의 지위 중에서 곧 구경의 불과(佛果)를 만족하므로 ‘견문을 여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진기』 ‘뜻이 원교에 해당한다’는 것에서, 삼승의 별교와 삼승의 동교가 있으며, 일승의 동교와 일승의 별교가 있으며, 일승의 원교가 있는데, 만약 누관(樓觀)에 나아가서 논한다면 안으로 일승을 장엄하고 밖으로 삼승을 장엄하는 것이니, 문(門)은 곧 동교이다. 이른바 문이라는 것은 안과 밖을 통하기 때문이니, 안은 비록 일승이나 문 안에서는 동교일승인 것이다. 또한 이 동교를 삼승 이상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곧 별교일승이 되니, 소목(所目)을 기준으로 하면 별교가 되는 것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 소목의 삼승은 뜻이 밖에 해당되니, 이는 삼승을 장엄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별교일승이라 말하는가?
【답】 이 경전 안의 소류(所流)와 소목(所目)의 삼승에는 두 가지 뜻이 갖추어져 있다. 첫째는 저 하근기로 하여금 계교하여 아법(我法)과 같다고 여기게 하는 뜻이며, 둘째는 그로 하여금 그 스스로 얻은 법이 온전히 화엄(花嚴) 대허(大虛)임을 이해하게 하는 뜻이다. 첫 번째 뜻을 기준으로 하면 문 밖에 해당되기 때문에 삼승이며 밖을 엄식하는 것이 되고, 뒤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문 안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승이며 안을 장엄하는 것이 된다. 지금은 뒤의 뜻을 기준으로 하므로 소목이 동교일승이 되며, 나아가 또한 별교일승이라 이름할 뿐이며, 곧바로 누관의 안쪽을 기준으로 하면 자체의 별교일승인 것이다. 맨 처음부터 삼승을 보지 않으므로 ‘자체의 별교’라고 하니, 원교는 앞의 4교(敎)를 통틀어 밟은 것이다.
【문】 이는 곧 저 동교(同敎)의 일승ㆍ삼승이 화합하는 뜻과는 어떻게 다른가?
【답】 하근기를 인도하고자 하여 화합하는 것은 동교이며, 자가(自家)의 실덕(實德)으로 삼고자 해서 통틀어 밟는 것은 원교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동교는 대지(大地)와 같으니 삼승의 초목을 영원토록 기르기 때문이고, 별교는 대해(大海)와 같으니 삼승의 죽은 시체가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며,
원교는 허공과 같아서 그 두 가지의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고기(古記)』 동교와 별교는 나누면 아홉 가지가 있다. 이른바 첫째, 황우거(黃牛車)는 동교이니 양거(羊車)ㆍ녹거(鹿車)와 함께 하기 때문이며, 대백우거(大白牛車)는 별교이니 삼승의 밖이기 때문이다. 둘째, 대백우거는 동교이며 왕의 상투 속에 있는 구슬은 별교이다……셋째, 법화는 동교이고 화엄은 별교이다……넷째, 제2회37)부터 「수호품(隨好品)」까지는 동교이며, 「보현행품」 이하는 별교이다38)……다섯째, 보현이 언어로써 나타냄은 문자에 떨어지기 때문에 동교이며, 보현의 안으로 증득함은 문자를 떠났고 언어를 끊었으므로 별교이다. 여섯째, 보현의 안으로 증득함은 인분(因分)이므로 동교이고 부처가 밖으로 향함은 과분(果分)이므로 별교이다. 일곱째, 부처님께서 밖으로 향함은 근기의 인연[機緣]을 향한 것이므로 동교이고, 부처님께서 안으로 향함은 곧 비록 화엄정(花嚴定: 화엄삼매) 중에서 과덕(果德)의 무리를 위하여 국토해(國土海)의 법을 보인 것이지만 인의 근기[因機]를 등지고 떠나 있으므로 별교이다. 여덟째, 부처님께서 안으로 향함은 등짐과 향함이 있으므로 동교이며, 해인정(海印定: 해인삼매) 중에서 법성을 가히 설할 수 없음은 등짐과 향함을 떠나기 때문에 별교이다. 아홉째, 위에서 밝힌 설함과 설하지 않음 등은 뛰어남과 열등함, 깊음과 얕음이 있으므로 동교이며, 이 해인정의 법성을 가히 설할 수 없는 중에서는 설함과 설하지 않음은 둘이 없으므로 분별이 없기 때문에 별교이다. 의상(義相) 스님이 “정(情)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면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은 항상 두 극단[邊]에 있는 것이지만, 만약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증득과 가르침의 두 법이 옛부터 중도이며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39)고 하신 것이 대개 이를 일컫는 것이리라. 이상은 우선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나눈 것이지만, 문의(文義)의 분제(分齊)에 의거한다면 동별(同別)이 하나가 아니니, 이른바 1부(部)에 통하여 나누면 차별의 연(緣)은 동교이며 근본의 실상은 별교이다. 만약 일생 교화의 시종(始終)에 의거한다면, 곧 수많은 특수한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여 통틀어서 제목하기 때문에 동교이며, 근기가 각기 다름을 따르므로 별교인 것이다.
『대기』 ‘4섭과 4무량’에서 이러한 4섭과 4무량의 두 쌍의 네 가지 인과로써 아래 4교(敎)40) 인과의 여덟 가지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73인(印) 중에 일자인(一字印)으로 인(印)치면 곧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여덟 가지 인과의 지위가 곧 일승의 옆이 없는[無側] 인과인 것이다. 이러한 일승의 인과를
앞의 여덟에 더하면 곧 열이 되니, 다섯 가지 인은 보살이고, 다섯 가지 과는 부처님이다. 그 네 부처님을 사방에 나누어 모시고 일승의 부처로써 중앙에 안치하며, 다섯 보살로써 나누어 모시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이러한 인과는 다만 내 마음 속에 본래 갖추고 있는 법이니, 이 중의 4방ㆍ6방ㆍ8방ㆍ10방 등은 삼승에 의지하여 나눈 것이다. 이른바 성문은 4제(諦)를 밝히기 때문에 이에 의지하여 4방을 나누고, 연각은 12지(支)를 관찰하는 것이니, 2 곱하기 6이기 때문에 이에 의지하여 6방으로 나누며, 시교와 종교 중에는 통틀어서 4섭과 4무량이 있으니 2 곱하기 4가 곧 8이기 때문에 이에 의지하여 8방으로 나누고, 동교 중에서는 그 같음 중에 별교의 10과 10의 무진(無盡)한 뜻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에 의지하여 10방을 나누는 것이다. 만약 머무름이 없는 별교를 기준으로 한다면 본래 방소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선교(善巧)는 방소가 없으며’라고 하였고, 나아가 ‘뜻이 원교(圓敎)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 시교와 종교의 두 가르침 역시 10방을 밝히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오직 8방만 말하는 것인가?
【답】 이는 8엽(葉)의 궤칙을 기준으로 해서 말할 뿐이다. 또한 시교와 종교 중에는 총체적으로 4섭 인과 등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8방으로 나눌 뿐이다.
【문】 만약 돈교 중의 인과를 아울러 취하면 곧 돈교 중에서도 역시 8방으로 나누는가?
【답】 만약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통한다. 그러나 인과는 지위이거늘 돈교 중에서는 위상(位相)이 숨어 있기 때문에 우선 제외했을 뿐이다.
【문】 어떤 것이 8엽의 궤칙인가?
【답】 이는 『비로자나경』과 『불지경』 중의 8엽이 부처를 짓는 궤칙이다.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낸다’는 것은, 일승의 원만한 인[圓印]에는 비록 각진 면[角面]이 없으나 이 인(印)이 일체법을 다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4면 4각의 모습을 갖추어서 삼승의 4방ㆍ6방ㆍ8방ㆍ10방 등을 나눔으로써 점차 일승의 방소가 없는 원만한 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약 오직 각면(角面)만 본다면 한결같이 삼승이며, 오직 원만한 인만 본다면 한결같이 일승이지만, 만약 각면에 의지하여 원만한 인을 본다면 곧 동교이다. 그러므로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낸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앞의 굴곡도 오직 굴곡만 본다면 곧 한결같이 삼승이지만, 굴곡에 의지하여 원만한 인을 본다면 역시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내는 것인가? 각면은 곧 동교이고, 앞의 굴곡은 다만 따로 삼승에 집착하는 것인가?
【답】 굴곡도 역시 1도(道)의
붉은 인[朱印]41)이 능히 따르는 덕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또한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내는 뜻이 있는 것이다.
【본문】 무엇 때문에 글자 중에서……성품이 중도에 있다.
『법기』 【문】42) ‘무엇 때문에 글자 중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 수행방편의 입장에서 인과가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는 것에서, 수행방편이라 말하는 것은 곧 일승의 수행인가, 삼승의 수행인가?
【답】 다만 이는 삼승의 수행방편일 뿐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일승에는 수행방편이 없는 것인가?
【답】 일승 중에는 인과가 없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래 본문43)에서 ‘원인과 결과의 두 지위는 법성가(法性家) 안의 진실한 덕용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다’라고 말하는가?
【답】 다만 원인은 먼저이고 결과가 나중이라고 집착하는 삼승의 사람을 위하여 인과가 동시인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뿐이다. 만약 실(實)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이 종(宗)44) 중에는 인과의 이름이 없다.
【문】 만약 그렇다면 결과를 온전히 하는 원인과 원인을 온전히 하는 결과도 역시 없는 것인가?
【답】 그렇다. 그러므로 지상(至相)은 “원인은 결과와 다르지 않은 원인이고, 결과는 원인과 다르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의 일컬음은 연(緣)에 기탁하여 나타나니, 차고 이지러짐이 그로 말미암는 것이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일승에는 옆이 없는 인과 역시 성립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문】 도인의 54각을 하나하나 온전히 다하여 인의 원만함이 이와 같다면 인을 온전히 하는 각 역시 마땅히 버려야 하는가?
【답】 만약 자종(自宗)의 입장이라면 이러한 일은 없을 것이니, 무엇을 다시 버리겠는가? 증분(證分) 중에는 원인과 결과, 증분과 교분, 일승과 삼승, 동교와 별교 등의 일이 없으며, 연기분 중에 비로소 원인과 결과, 증분과 교분, 일승과 삼승, 동교와 별교 등의 갖가지 일을 설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분에 나아가서 “원인과 결과의 두 지위가 성품이 중도에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진실로 원인과 결과를 세우지 않는다면 어찌 원인과 결과는 없다는 대사견(大邪見)을 뽑아버리지 않는가?
【답】 원인과 결과를 넘어선 곳에 서서 원인과 결과가 없다고 하는 것이니, 어찌 없다고 함을 뽑아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스님[和尙]45)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뜻을 꾸짖어 “법성 중에 인과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 법성 중에 인과가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법성이 아닐 것이니, 법성 중에는 인과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게 하였으며, 또한 ‘인과가 없다’라고 대답하게 하였다.
【문】 그렇다면 근본입 중에 열었던 9입은 근본입을 만족시키지 못하는가?
【답】 만족시킨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원인과 결과가 없다고 하는가?
【답】 그대가 집착하는 섭입(攝入)과 사의입(思議入) 등으로 능히 그러한 근본입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모든 입들이 능히 그러한 근본입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있어서는 인과가 없는 것이다. 만약 모든 입이 섭입과 사의입 등을 따라서 이해를 내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뛰어남과 열등한 인과의 지위가 있기 때문에 이는 동교이다. 만약 섭입 등이 모든 입을 따라서 이해를 냄을 기준으로 한다면 성품이 중도에 있어서 뛰어남과 열등함의 인과가 없는 것 역시 동교이다. 만약 모든 입(入)들을 제하고 다만 섭입과 사의입 등을 기준으로 한다면 곧 삼승의 별교이며, 만약 곧바로 근본입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는 일승 별교인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뜻을 기준으로 해서 도인의 뜻을 나타내고 역시 대경(大經)에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기』 ‘무엇 때문에 글자 중에 굴곡이 많은가?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나타내고자’ 등은, 실을 기준으로 하면 곧 글자 중의 굴곡이 3도(途: 3악도)와 인천(人天)에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글자는 이해를 내는 언표[詮]이기 때문에 우선 가르침의 모습이 나타내는 바를 이해함을 기준으로 해서 다만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라 말했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시작하고 끝나는 두 글자를 중앙에 안치하는가?’ 등은 ‘법(法)’자는 원인이요 ‘불(佛)’자는 결과이니 일승과 삼승에 통하는 것이다. 삼승의 전후 인과가 곧 법성의 덕용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므로 시작하고 마치는 두 글자를 한 가운데에 안치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오직 삼승의 인과를 기준으로 해서 논한 것이거늘, 어째서 인과가 일승에 통한다고 하는가?
【답】 만약 진실한 도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모든 법이 각각 ‘스스로의 진여의 지위[自如位]’에 머물러서 본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삼승의 사람은 오직 전후를 보지만 일승은 그렇지 않아서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서 자재하다. 그러므로 앞뒤의 인과를 기준으로 해서 성품이 중도에 있다는 뜻이 일승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승에 통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법성가(法性家)에 둘이 있으니, 이른바 증분의 법성과 머무름이 없는 별교의 법성이다. 실상ㆍ총상ㆍ법신ㆍ중도 등도 역시 두 가지 뜻46)에 통하는 것이다. 시설문(施設門) 중에 증분과 교분의 뜻을 나누어 보임이 있으며, 일승과 삼승의 뜻을 나누어 보임이 있으므로 ‘인과가 일승과 삼승에 통하며 법성이 증분과 교분에 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진기』 법성가는 오늘의 연(緣) 중에서 일으키는 법을 기준으로 하여 증분 및 연기분의 법성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증분과 교분을 나누지 않는 중도가 비로소 법성가이다”라고 말한다.
【본문】 위에서 ‘인과가……’ 앞뒤가 없으니,
『법기』 위에서 ‘인과가 같지 않음으로……그 뜻이 어떤가?’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질문을 하는 뜻이 앞에서는 ‘수행방편의 입장에서 인과가 같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는 또한 ‘원인과 결과의 두 지위가 법성가 안의 진실한 덕용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아직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여 이와 같이 묻는 것이다.
【문】 앞에서는 인의 모습[印相]을 마침에 다시 별다른 물음이 없었거늘,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글자의 모양[字相]을 해석하고서 다시 이러한 문답을 하는 것인가?
【답】 그 인도(印道)는 곧 자상(字相)을 따라서 그렸으니, 그러므로 자세히 자상을 해석하면 곧 인상(印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 ‘『천친론』의 저자에 의지하여 6상의 방편으로써 뜻을 세우고……’47)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네 가지 보살행을 말씀하시는 글에서 6상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니, 만약 모든 보살이 법체(法體)에 들어가고자 하면 반드시 6상으로 그 마음을 원융하게 단련하여야 비로소 가히 득입(得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의 저자는 부처님의 뜻을 얻었으므로 10입(入)을 설하는 곳에서 6상의 방편을 밝혀 삼승을 다스리는 것이니, 섭입(攝入) 등은 3현(賢)이요, 나아가 불진입(佛盡入)은 불과(佛果)이다. 이와 같이 차례로 더욱더 뛰어나다는 집착은 그러한 섭입 등의 9입(入)을 나타내서 근본입(根本入)에 칭합하면 뛰어남과 열등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말[古辭]에 “천친보살이 10입처에서 6상의 태양을 밝혀 비로소 부처님의 은혜를 갚았다”라고 하였다. 화상이 이 논의 저자의 뜻을 얻었으므로 “『천친론』의 저자에 의지하여 뜻의 영역을 세우니, 그 도리에 준하면 곧 삼승의 전후(前後) 인과가 그 성품은 중도에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6상 방편의 말을 기준으로 해서 융질(融質)48) 대덕은 “6상은 오직 교문의 시설일 뿐이니, 법체 상에서 여는 바가 없으므로 방편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화상이 말씀하시기를 “법성의 집에 들어가는 긴요한 문(門)이며, 다라니의 곳집을 여는 좋은 열쇠이다”49)라고 하였고, 법장[康藏]은 “이 방편으로 일승을 회통하며……4구와 6상이 모두 법에 들어가는 방편이 된다”(이상)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이는 능히 언표할 수 있는 교문의 방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유(思惟)50) 대덕은 말하기를 “6상은 다만 법체를 기준으로 해서 교묘한 모습으로 집성하여 방편이라 이름한 것일 뿐이니, 이외에 다시 들어갈 법체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화상은 “연으로 생겨난 모든 법은 6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51)라고 하였으며, 또한 “6상은 바로
연기의 분별함이 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며”52) 나아가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아 다라니법은 주체와 반려[主伴]가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53)라고 하였다. 강장(康藏)은 “넷째, 집성방편(集成方便)은 모든 법이 한 가지 몸이어서 교묘한 모습으로 집성하였으므로 방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지론(智論)』54)에서는 “이러한 법은 선교(善巧)로 집성하였으므로 방편이라 이름한다”(이상)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언표의 대상[所詮]인 법체를 기준으로 해서 방편으로 삼는 것임을 알 것이다.
해석해 말한다. 이상의 두 가지 설을 만약 치우쳐 집착한다면 두 가지 모두 허물이 있는 것이니, 각기 한 구석에 정체되어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도리에 의거하면 각기 의지하는 바가 있으니, 두 가지 설이 모두 옳은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마치 동교 중에서는 정히 집착하는 견해를 깨뜨리는 것이므로 다만 교문의 법에 들어가는 방편인 것이다. 만약 별교 중에서라면 곧바로 법체를 밝히는 것이므로 곧 원융한 법의 선교집성(善巧集成)의 방편인 것이다.
‘일승과 삼승의 주반(主伴)이 서로 이루어 준다’는 것에서, 머무름이 없는 별교는 주체이며, 따로 삼승에 집착하는 것은 권속이며 반려이니, 이 중에 주반의 법체를 세우는 것이므로 ‘주반의 모습을 이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래에서는 ‘주반이 서로 의지한다’고 말하는가?
【답】 주반의 법을 세우고 나서 그 따로 삼승에 집착하는 반려로 하여금 인연관(因緣觀)ㆍ연기관(緣起觀) 등의 3관(觀)55)을 익혀서 그 마음을 수련하게 하기 때문에 소류(所流) 삼승의 반려가 성기(性起)의 궁극적 경지[後際]에 이르러서는 머무름이 없는 별교의 주체와 더불어 서로 의지하며 원만하고 밝은 주반을 이룸을 얻기 때문이다.
『법기』 ‘주반이 서로 이루어서 법의 영역[法分齊]을 나타낸다’는 것은 다른 곳의 삼승은 다만 권속이며 반려가 되지 않지만, 여기서 뜻하는 바는 인(印)이 원만한 것은 곧 일승이므로 주체이고, 54각은 삼승이므로 반려라는 것이다. 여러 각(角)으로 말미암아서 인의 원만함을 이루고 인이 원만함으로 여러 각을 이루니, 그러므로 일승과 삼승이 서로 이루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각이 온전히 인의 원만함을 다한다’는 것은, 바로 나타나는 분제인 것이다.
『대기』 6상에서 총상과 별상의 둘은 법의 다함 없음[無盡]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상과 이상의 둘은 법의 걸림 없음[無礙]을 나타내는 것이고, 성상과 괴상의 둘은 법의 ‘옆이 없음[無側]’을 나타내는 것이니, 일승법의 의미는 이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따로 해석한다면 총상은 곧바로 머무름이 없는 법의 자체를 표시하는 것이고, 별상은 머무름이 없는 총상의 다함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동상은 다함 없음의 걸림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상은 걸림 없음의 어긋남이 없음[無違]을 해석하는 것이고, 성상은 어긋남이 없음의 옆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며,
괴상은 옆이 없음의 움직이지 않음[不動]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 머무름이 없는 법의 자체는 무엇인가?
【답】 법계의 법이 어우러져서 한 몸이 된 것이다.
【문】 법계의 법이 움직여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인가?
【답】 다만 움직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서 한 몸을 이룰 뿐이다. 만약 여기 한 채의 집[堂]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다면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은 각자 움직이지 않으므로 비로소 하나의 총상인 집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문】 ‘별상은……다함 없음을 나타낸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별상은 서까래 등 모든 연이 각각 차별되기 때문에 하나의 총상인 집 가운데에서 하나가 아닌 덕을 나타내므로 ‘별상은 총상의 다함 없음을 가리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서까래 등의 연 중에서 동상을 필요로 하면 2장(丈) 길이의 서까래가 20보(步)의 집에 칭합하며, 나머지 연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동상은 다함 없음의 걸림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연 중에서 이상을 필요로 하면 곧 2장 길이의 서까래가 비록 20보의 집에 칭합하나 스스로의 2장 길이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으니, 나머지 연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상은 걸림 없음의 어긋남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2장 길이의 서까래가 이러한 집을 이룸을 보는 때에 옆에 나머지 다른 연이 없기 때문에 이 하나의 서까래가 곧 옆이 없는 것이며, 나머지 연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성상은 어긋남이 없음의 옆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괴(壞)는 이루어지는 곳에서 무너지므로 ‘괴상은 옆이 없음의 움직이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오직 여섯일 뿐이며 더 많지도 않고, 더 적지도 않은가?
【답】 총상과 별상의 한 짝[對]은 상근기가 들어가는 것이며, 동상과 이상의 한 짝은 중근기가 들어가는 것이고, 성상과 괴상의 한 짝은 하근기가 들어가는 것이다. 진실로 하근기가 동상과 이상 중에서 능히 총상을 얻지 못하므로 줄어서 넷이나 다섯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비록 하근기라 할지라도 두루 성상과 괴상을 배워서 반드시 총상에 들어가기 때문에 늘어나서 일곱이나 여덟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강장이 “총상은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며 별상은 많은 덕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니, 별상은 총상에 의지하여 그러한 총상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56)라고 하였다.
【문】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한다는 것은 총총다덕(總總多德)인가, 별별다덕(別別多德)인가?
【답】 두 가지 뜻이 모두 다 가능하다. 이른바 별을 거두어 잡아서 총을 이루기 때문에 별별다덕이라 해도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 총 중에 갖추고 있는 개별적인 덕이 하나하나가 모두 온전히 총을 다했으므로 총총다덕이라 해도 역시 가능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다함 없는 총을 세웠는가?
【답】 비록 다덕이라 말하지만 ‘하나 밖의 다[一外之多]’가 아니므로 이러한 어려움은 없는 것이다.
【문】 이미 ‘총상은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하고 있으므로’라고 말하였으니,
포함되는 많은 덕이 능히 하나를 포함함과 더불어 그 의미가 각기 다르거늘 무엇 때문에 ‘하나 밖의 다’가 아니라고 하는가?
【문】 다만 그 많은 덕이 합해지는 곳을 지목하여 ‘능히 하나의 총을 포함한다’라고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 밖의 다’가 아니며 다 밖의 하나가 아니다.
‘별은 총에 의지하여 그러한 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만약 부류[類]로써 각기 6상을 나누면 곧 총상ㆍ동상ㆍ성상이 하나[一際]가 되고 별상ㆍ이상ㆍ괴상이 하나가 되니, 이미 총과 더불어 한 부류가 되었으므로 동은 동상과 총상의 뜻을 가지며, 성은 성상과 총상의 뜻을 가지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별상이 이상ㆍ괴상과 더불어 한 부류이면서 총상을 만족시키는 뜻이 있는 것인가?
【답】 만약 총상을 얻으면 반드시 별상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다만 얻지 못하는 근기 중에서 총상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여는 것이다. 별상을 열 때 총상의 뜻이 이미 나타나는 것이니, 그러므로 별상 중에 총상을 만족시키는 뜻이 있는 것이다.
【문】 만족함에 미치는 것인가,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답】 만족함에 미치는 것이다.
【문】 이는 별상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근본의 총을 만족시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미친다고 하는가?
【답】 이미 총을 나눌 때에 총을 여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별덕(別德)을 나타내는 것이니, 도리어 별로써 총을 만족시킬 때에 만족함에 미치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총 중에 별다른 모습이 있는 것인가?
【답】 없다. 왜냐 하면 본래 별다른 모습이 없는 총 중에서 여는 바이므로 비록 그 별상이 근본의 총을 만족시키는 데 미친다 해도 총 중에는 별다른 모습이 없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삼승의 차별된 세속을 없애서 평등의 진여로 돌아감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답】 일승 중에서는 분별이 온전히 무분별이며, 무분별이 온전히 분별이니 분별을 없애서 바야흐로 무분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것이다. 동상은 총상의 덕을 나타내고자 하므로 별상을 여는 것이니, 이미 별상을 열고 난 뒤에 미혹된 사람이 이르기를 “그 별상이 총상과는 완전히 다르다”라고 할까 두려워해서 그로 하여금 저 별상이 온전히 총상과 같음을 알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별상 다음에 동상을 밝히는 것이다. 동(同)에는 많은 뜻이 있으니 이른바 상동(上同)ㆍ하동(下同)ㆍ내동(內同)ㆍ외동(外同)이다. 만약 이러한 집[舍]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다면 모든 연이 총체적인 집과 같으므로 상동이요, 총체적인 집이 모든 연과 같으므로 하동이다. 상동 중에 나아가면 모든 연이 집과 같은 것은 내향동이며, 모든 연이 서로 바라봄에 집을 이루는 힘의 뜻이 가지런히 같은 것은 외향동이다.
또한 분동(分同)과 만동(滿同)의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른바 1척의 기와가 1척의 힘을 내는 것이 20보의
집[堂]과 같다는 것은 분동이며, 1척의 기와가 20보의 힘을 내는 것이 20보의 집과 같은 것은 만동이다. 이상(異相)은 그것이 능히 모든 연을 이루지만 형체와 종류가 각기 달라서 각각의 지위가 움직이지 않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 만약 진실로 다르다면 마땅히 같지 않은 것인가?
【답】 다만 다름으로 말미암아서 같은 뜻이 있음을 얻을 수 있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기와가 이미 1척이면 서까래 역시 1척이어서 본래 연(緣)의 지위를 어기고 앞에서 나란히 똑같이 집을 짓는 뜻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57)
【문】 만약 그렇다면 1척의 기와가 20보의 힘을 내어서 20보의 집과 같으며 서까래 역시 이와 같다면, 이 역시 어찌 본래 연의 지위를 잃어버림이 아니겠는가?
【답】 기와가 만약 스스로 1척의 지위를 움직여서 2장 길이의 서까래의 지위에 같게 된 연후에 20보의 힘을 내고 서까래 역시 그와 같다면 마땅히 본래의 지위를 잃어버리겠지만, 기와 스스로 본래 1척의 지위를 움직이지 아니하고 서까래 역시 2장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각기 20보의 힘을 내어서 집과 같기 때문에 비록 아울러 20보의 힘을 내더라도 기와는 2장이 아니며 서까래도 1척이 아니면서 각기 스스로의 지위에 머물고 있으므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성상(成相)은 짓지 않으면서 짓는 것을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연 등의 각 지위가 움직이지 않고서 집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앞의 동상 중에서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서로 바라보며 서로 거두어들여서 집을 이루는 힘의 뜻이 가지런하여 같다. 또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을 기준으로 하여 총을 바라보면 집은 서까래에 거느려지는 것이며, 총이 연을 바라보면 서까래가 집에 거느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망(相望)ㆍ상섭(相攝)ㆍ상대(相帶)의 뜻이 있으니, 이러한 성상 중에 하나의 연의 입장을 따르면 곧바로 총이다. 상대를 끊어서 옆이 없으며 능히 연을 이루는 외에 따로 이루는 바가 없기 때문에 상망과 상섭의 뜻을 설하지 않는 것이다. 괴상은 짓되 짓지 않음을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서까래 등 모든 연이 각기 스스로의 법에 머물러서 본래 부동인 것이다.
【문】 여기에서의 움직이지 않음과 앞에서 말한 이상 가운데 움직이지 않음은 어떻게 다른가?
【답】 앞에서 말한 이상 가운데서는 지위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기와 1척의 지위와 서까래 2장의 지위가 각기 비록 움직이지 않더라도 상망(相望)의 뜻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체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법과 법이 각각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상의 집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연에 물어 보면 기둥이 이루는 것인가, 나아가 기와가 이루는 것인가? 이와 같이 두루 힐난하면 한 물건도 저 집을 이루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은 까닭에 성상의 집이 구경인 것이다. 지으면서 짓지 않음에 즉하기 때문에 괴상이 곧 이루어지는 것이니, 멸괴(滅壞)의 괴(壞)가 아닌 것이다.
『고기』 【문】 옛 스님이 “인연(因緣)의 집은 지으면 이루어지고 짓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으며, 연기(緣起)의 집은 지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짓지 않으면 이루어진다”라고 하였으니 이 뜻은 어떤 것입니까?
【답】 동상(同相)의 집은 지음이 있는 지음이며, 성상의 집은 지음이 없는 지음이기 때문이다. 동상과 성상을 상대하여 설하면 동상은 연기가 앞에 나타나는 뜻이며, 성상은 연기가 성품이 없는 뜻이며, 성상과 괴상을 상대하여 설하면 성상은 짓지 않으면서 짓는 것이기 때문에 성품이 없으면서 연기하는 뜻이며, 괴상은 지으면서 짓지 않기 때문에 연기의 성품이 없는 뜻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주초석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들보 위의 기와에서 마치니 비로소 온전한 집을 세운다는 것은 변계(遍計)의 집이며, 도끼를 쥐고서 나무를 패고 하나하나의 때림을 따라서 온전히 집을 세우는 것은 인연의 집이고, 도끼를 나무에 떨어뜨리지 않고 나무가 도끼를 범하지 않으며 온전한 집을 세운다는 것은 연기의 집이며, 나무의 싹이 푸를 때 온전한 집을 세운다는 것은 성기(性起)의 집인 것이다. 성기에 나아가서는 나무의 씨앗을 심을 때에 온전한 집을 세운다는 것은 무주(無住)의 집이고, 종자가 곧 진여라는 것은 실상(實相)의 집인 것이다. 강장(康藏)은 ‘어떤 것이 집인가? 서까래가 집이니, 무엇 때문인가? 서까래가 온전히 홀로 능히 집을 짓기 때문이다…… 묻기를, 만약 서까래가 온전히 홀로 능히 집을 짓는다면 기와 등도 마땅히 집을 짓는 것이 아니겠는가? 답하기를, 기와 등이 있지 않을 때에는 서까래가 아니기 때문에 짓지 않는 것이다’(이상)58)라고 하였다.”
【문】 비록 기와 등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서까래는 볼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기와가 없을 때는 서까래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인가?
【답】 변계의 어려움일 뿐이다. 대경(大經)59)에서 “지혜의 바다가 넓고 가없어서 헤아리지 못함이 도리어 더욱 비방을 부르니 가히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멸이 있는 마음으로 실상의 이치를 의심하지 말라. 나의 이 보법(普法) 인연의 서까래는 스스로 하나의 서까래이니 곧 같은 종류의 나머지 서까래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1척의 기둥머리나 8척의 기둥, 나아가 기와ㆍ돌ㆍ나무를 다듬는 기술자와 기와를 굽는 기술자 등 일체 모든 법을 널리 모두 다 거두어들여서 집을 다 지은 연후에야 비로소 서까래가 되는 것이므로 그런 것이다. 옛사람이 ‘오늘 기둥을 베어내서 어제 이미 이룬 집을 짓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니, 만약 그렇다면 어제 이미 이룬 집은
기둥 없이 이루어진 것인가? 이미 ‘오늘 기둥을 베어내서 어제 이미 이룬 집을 짓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므로 어제 이미 이룬 집이 기둥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겠다”(이상)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집이 이루어짐에 비로소 기둥인 것이며, 또한 집이 이루어짐에 비로소 서까래인 것이다.
『진기』 이른바 6상이라는 것은, 이 중의 대의(大意)가 노사나불은 가장 높고 뛰어나며 우리 중생은 가장 낮다는 것이니, 사나는 총상이며 중생은 별상이다. 중생의 몸은 따로 자체가 없어서 온전히 사나의 몸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두 가지의 각기 다른 뜻을 나타내니, 他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장은 “지말은 근본에 의지하여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이 있다”60)라고 하였다. 동상이라는 것은, 중생신(衆生身)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물이 없으며 오직 이 불신(佛身)이므로 중생신이 그러한 부처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상이라는 것은, 비록 중생신이 그러한 불신을 거느리고 있으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능히 거느리는 것이니 언제나 중생인 것이다. 거느린다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같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며, 중생이라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다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장은 “거기에서 일어나는 지말이 이미 근본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 바라봄에 같음도 있고 다름도 있는 것이다”61)라고 하였다. 성상이라는 것은, 비천한 중생신이 곧바로 존귀한 불신(佛身)이며, 터럭 끝만큼도 불신과 다른 때가 없으므로 그것과 같게 하지 않는 것이다. 동상으로 관찰하는 자는 그것과 같도록 하는 것이며, 성상을 관찰하는 자는 곧바로 하나일 뿐이다. 괴상이라는 것은 법계의 차별의 법이 각기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요, 곧 이 중생신 중의 진실한 덕용이어서 성품이 중도에 있는 것이니 곧바로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존재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며, 각기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무너짐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장은 “근본을 거느리는 지말이 이미 근본에 거두어짐이 되니, 그러므로 당체(當體)가 존재함이 있고 무너짐이 있는 것이다”62)라고 하였다.
『고기』 옛날에 신림 대덕이 당나라에 들어가 융순(融順) 스님에게 나아가서 어려움을 지어 묻기를, “이미 부처를 이루었을진대 처음부터 범부의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융순 스님이 이르기를 “6상 중에 동상과 이상이 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문】 어찌하여 6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회통하지 않고 다만 특별히 동상과 이상만을 취하여 말하는 것인가?
【답】 만약 집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별은 곧 서까래 등의 모든 연이 총체적인 집과 다를 뿐이며, 그 형태의
굴곡과 장단을 보고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괴상은 다만 모든 연이 각기 자법(自法)에 머물러서 본래 짓지 않는 것임을 볼 뿐이다. 오직 동상과 이상이 하나의 연을 기준으로 함을 따라서 모든 연을 거두어서 집을 원만히 이루고 힘의 뜻이 가지런히 한 가지이니, 기둥은 곧 8척이며 서까래는 곧 2장이요 기와는 1척 남짓이다. 이러한 장단의 차별된 지위가 각기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다만 이러한 뜻을 취하여서 답한 것이다.
『육상장(六相章)』63) 하나가 곧 여럿을 갖추고 있는 것을 총상이라 이름하고, 여럿이어서 곧 하나가 아님은 별상이며, 여러 가지 종류가 스스로 동일하게 총상을 이루고, 각각의 체가 다르지만 동상을 나타낸다. 하나와 여럿의 연기는 이치가 묘하게 이루어지고 무너지며 자법(自法)에 머물러 항상 짓지 않으니, 오직 지혜의 경계이어서 현상[事]의 차원에서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방편으로 일승을 회통하는 것이다.
『대기』 ‘총상은 근본인이며 별상은 나머지 굴곡이니, 따로 인(印)에 의지하여 그러한 인을 원만케 하는 것이다’64)에서 근본인은 별상을 떠난 총상이며, ‘그러한 인을 원만케 한다’는 것은 별상을 거느린 총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총상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이른바 총은 가히 상대할 별이 없으므로 ‘별을 떠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별을 떠난 총이 이미 별을 거두어 잡아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별을 거느린다라고 말할 뿐이다. 총에 의지하여 별을 열면 분개(分開)와 만개(滿開)가 있으므로 만개의 뜻에 의지하여 ‘그러한 인을 원만케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별(別) 외에 다시 근본이 되는 총은 없을텐데 어찌하여 인에 의지함과 인을 원만히 함을 말하는 것인가?
【답】 실의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인에 의지하여 인을 원만히 함’을 말하지 않아야 하지만, 옆이 없음[無側]을 알게 하여 서로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에 우선 주체와 대상[能所]을 나누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동상은 인에 들어가기65) 때문이다’라는 것은 모든 굴곡 등 하나하나가 비록 별이지만 동일하게 원만한 인이기 때문이다. 동(同)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른바 평등하기 때문에 같으며,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것이다. ‘평등하기 때문에 같다’는 것은 6상의 범주[列門] 중에 동상이므로 모든 연이 서로 바라보아서 힘의 뜻이 가지런히 같은 것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같다는 것’은 동상의 한 가지 연이 모든 연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곧 이 총이다. ‘이상은 모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처음의 굴곡과 그 다음의 굴곡이 각기 달라서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66) 늘어남[增]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른바 내향증(內向增)과 외향증(外向增)이다. 이른바 총의 모든 연과 같으므로 서로 이것이지 않다[不相是]는 것은 내향증이요, 서로 바라보아 조화롭게 통하는 모든 연이 서로 이것이지 않다는 것은
외향증이다. ‘성상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이른바 모든 굴곡이 합하여 하나의 인을 이루기 때문이다. 모든 연이 구경인 때에 이르러서 다만 하나의 연이 곧바로 총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간략히 설한다’라고 한 것이다. ‘괴상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모든 굴곡이 각기 머물러서 본래 함이 없이 짓기 때문이니, 두루 모든 연을 불러들여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자여(自如)의 처소에 이르게 하므로 ‘널리 설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법기』 ‘총상은 근본인이며 별상은 나머지 굴곡이다’라는 것은, 총은 곧 하나가 많은 덕을 포함하는 것이며, 별은 곧 많은 덕이 하나가 아닌 것이다.
【문】 하나는 무엇이며 많은 덕은 무엇인가?
【답】 법계 법의 듦에 따라 옆이 없다는 뜻이 바로 하나이며, 이 옆이 없는 하나의 다함 없는 뜻이 바로 많은 덕이다.
【문】 옆이 없는 하나의 다함 없는 뜻을 어떻게 보는가?
【답】 우선 이 연이 하나의 집을 이룸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다면 ‘매양 하나하나의 연이 모두 집을 만족케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이른바 하나의 법을 듦에 따라서 옆이 없이 일어나서 구경에 대(待)함을 끊는다는 것이 옆이 없는 하나이며, 이러한 하나가 포함하는 별덕(別德)이 역시 각기 구절을 통괄적으로 포함하여 하나하나가 구경이므로 매양 하나하나의 연이 모두 법을 만족한다는 것은 다함 없는 덕인 것이다. 만약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문수 선지식이 지혜로써 둘이 없는 모습을 비추는 것이고, 만약 의지하는 바를 따라서 산설(散說)하면 선재가 문수를 보았을 때에 곧 삼천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선지식을 보는 것이다. 이른바 능히 비추는 지혜와 비춤의 대상이 되는 경계가 다만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의 문수를 볼 때 의지하는 삼천세계가 곧 선지식이므로 ‘곧 삼천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선지식을 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의지하는 바를 버리고서 설한다면 총체적으로 법계의 모든 법을 거두어 잡아서 하나의 문수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의 문수를 보는 때에 다만 삼천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선지식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시 단박에 법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모든 선우(善友)들을 참방(參訪)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수가 법계의 끝을 다함을 기준으로 하면 삼천세계의 티끌 수만큼 많은 선지식 하나하나도 역시 법계의 끝을 다하는 것이다.
【문】 그렇다면 하나의 문수인가, 많은 문수인가?
【답】 입장에 따라서는 하나의 문수이기도 하고, 입장에 따라서는 하나의 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수도 옳고, 많은 문수도 옳으며, 하나의 집도 옳고 많은 집 역시 옳다.
‘동상은 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54각이 동일하게 인을 원만히 하기 때문에 ‘굴곡은 다르지만 똑같은 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분동(分同)과 만동(滿同)의 뜻은 어떠한가?
【답】 나누어 다르게 할 수 없는 큰 허공[大虛]을 시방으로 나누는 것이니, 1방의 허공이 대허와 같을 때 시방의 허공이 동시에 같다는 것은 만동이며, ‘오직 1방의 같음만을 보고 나머지 방향의 같음은 보지 않는 것’은 분동인 것이다.
‘이상은 상이 늘어나기 때문이다’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수가 늘어나는 것인가, 지위가 늘어나는 것인가?
【답】 한편으로는 “첫 번째 각(角), 두 번째 각……이와 같이 헤아리기 때문에 그 수가 증가함에 따라서 지위 역시 증가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첫 번째, 두 번째……이와 같이 헤아리기 때문에 수는 증가하지만 굴곡은 증가하지 않으므로 지위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성상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집 앞에 서서 사람의 한 마디 말로써 집 안의 대중을 부르면 대중들이 모두 입으로 대답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인(印)이라는 한 마디 말로써 인을 부를 때에는 54각이 모두 곧 이 인(印)이다. 그러므로 강장은 “연이 화합을 이루는 것을 간략히 말해서 표방하여 나타내는 것이다”67)라고 하였다.
【문】 동상 중에서 ‘하나하나의 각이 원만한 인과 같다는 뜻’을 밝혔는데, 여기서는 어떤 뜻을 밝히는가?
【답】 하나의 각곡(角曲)마다 곧 이 인(印)임을 따라서 성상이 될 뿐이지, 모든 각이 인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괴상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사람의 몸에 집착하여 그 사람의 이름을 따져 물음에 어떤 한 물건도 꼭 맞게 그 사람의 이름을 받을 것이 있지 않으므로 이렇게 널리 분별하는 것이다. 54각을 차례대로 따져 물어서 어떤 한 각도 원만한 인의 이름을 받을 것이 없으므로, 강장이 “연이 흩어지면 지음이 없으니 널리 인연을 분별하는 것이다”68)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 중에서 인의 원만함은 총상이며, 원만한 인의 모든 각곡(角曲)은 별상이고, 모든 각곡의 하나하나가 가지런히 같은 인(印)인 것은 동상이고, 가지런히 같은 인이지만 움직이지 않아서 각기 다른 것은 이상이며, 움직이지 않아서 다르지만 치우치는 바가 없음은 곧 정인(正印)이니 이것은 성상이다. 곧 정인이면서 각기 스스로 머물러서 지음을 일삼지 않는 것은 괴상이다. 이러한 6상문(相門)이 바로 일승의 함께 하지 않는 방편이며, 또한 함께 하지 않는 법체(法體)인 것이다. 이러한 6상을 우선 3관(觀)에 배대하면 별상은 변계이며, 동상과 이상은 인연관이고, 성상과 괴상은 연기관이며, 근본의 총상은 성기관이니,
이는 곧 지위에 기대어서 하는 말이다. 만약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인연관ㆍ연기관ㆍ성기관의 3관에 깊고 얕음은 없는 것이다.
‘총상은 뜻이 원교에 해당하고, 별상은 뜻이 삼승교에 해당한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원교는 동교인가, 별교인가?
【답】 이는 동교이니, 이른바 인의 원만함은 원교이고 54각은 삼승이다. 그러므로 원교 및 삼승이 모두 동교이다. 왜냐 하면 인의 원만함을 떠나서는 모든 각이 없으며, 모든 각을 떠나서는 인의 원만함도 없기 때문이다.
『대기』 신림(神琳) 대덕은 이러한 곳을 의지하여 5중총별(重總別)을 세웠으니, 이른바 첫째, 별을 떠난 총은 5중해인(五重海印)의 첫 번째 해인69)이다. 둘째, 별을 거느리면서 별을 떠난 총은 또한 ‘연 중에 나타나지만 연을 떠난 총’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두 번째 해인70)이다. 셋째, 총이 곧 별이고 별이 곧 총이니 세 번째 해인71)이다. 넷째, 총이기도 하고 별이기도 한 것이 네 번째 해인72)이다. 다섯째, 총도 아니고 별도 아닌 것이 다섯 번째 해인73)이다. 이른바 별을 거두어 잡아서 총을 이루기 때문에 총이 아니며, 총에 의지하여 별을 이루기 때문에 별이 아닌 것이니, 모두 형체가 없기[形奪] 때문이다. 이러한 5중 안에서 첫째는 총이며, 그 다음은 별이다. 또한 두 번째는 총이며, 세 번째는 별 등이니 이렇게 서로 바라보아서 총별을 짓는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가 각기 총별을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첫 번째 해인을 제거하고, 두 번째 해인에서 부처님께서 마음을 증득함[佛證心]은 총이며 나타나는 3세간은 별이니, 이 별이 총보다 열등하지 않는 것이다. 이 중에는 동ㆍ이ㆍ성ㆍ괴가 없으니 이러한 총별이 다만 한 체이기 때문에 연기의 6상이 들어가야 할 진원(眞源)인 것이다. 셋째에서는 6상을 쓰는 것을 막지 않으나 이것 역시 법체이며 방편의 6상은 아니다. 넷째 이하를 기준으로 하여 인연관ㆍ연기관ㆍ성기관 등의 3관에 배대하면 세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른바 첫째 총상은 머무름이 없는 별교이고, 별상은 소류(所流)의 삼승이다. 소목(所目) 중에서는 동상과 이상은 인연관이요 성상은 연기관이며 괴상은 성기관이다. 여기서는 다스려야 할 병(病)을 기준으로 해서 별상이 될 뿐이지 능히 다스리는 6상 가운데 별상은 아닌 것이다. 둘째, 무주(無住)의 별교와 따로 집착하는 삼승을 제외하고 소목 가운데 나아가면 총상과 별상은 성기관이요, 동상과 이상은 인연관이고, 성상과 괴상은 연기관이다. 또한 이러한
3관 하나하나가 각기 6상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넷째 이하는 방편의 6상이다. 이러한 5중으로 곳곳의 문장을 해석하면 의리가 비로소 다할 것이니, 이제 이러한 문장 가운데 5중(重)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고기』 의상 스님이 총장(總章) 원년(元年, 668년) 10월 11일 청선사(淸禪寺) 반야원(般若院)에 있으면서 지엄(智儼) 스님에게 여쭈기를, “보법의 궤칙을 수지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능히 지니겠는가? 우선 옷깃을 들면 털이 가지런해지고 벼리를 들면 그물눈이 바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이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하자, 스님은 “아래로 세속의 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도의 실상이다”라고 하시고 마침내 10중총별(重總別)을 설하여 보이셨다. 지엄 스님의 행록(行錄) 중에 있는 총별에 관한 글이 곧 이것이다.
첫째, 총을 따르고 별을 어기는 것이다. 이른바 총상의 과법이 티끌 수같이 많은 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순하면 총이며, 총을 이루는 연이 다르기 때문에 어긋나면 곧 별인 것이다. 둘째, 총을 어기고 별을 수순하는 것이다. 이른바 총을 이루는 연이 스스로의 지위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어긋나면 총이요, 스스로의 지위가 움직이지 않지만 능히 이루기 때문에 수순하면 곧 별인 것이다. 셋째, 별과 같은 총이며 총과 같은 별이다. 이른바 별은 온전히 총이므로 별과 같은 총이며, 총은 온전히 별이므로 총과 같은 별인 것이다. 넷째, 별이 알지 못하는 총이고 총이 알지 못하는 별이다. 이른바 이룬 총 중에 별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별이 알지 못하는 총이며, 능히 연을 이루는 가운데 총의 모습이 없으므로 총이 알지 못하는 별인 것이다. 다섯째, 별을 떠난 총이요 총을 떠난 별이다. 이른바 총상의 과(果) 중의 연이어서 총 아님이 없으므로 별을 떠난 총이요, 총과 다름이 없는 별이기 때문에 총을 떠난 별인 것이다. 여섯째, 머무름이 없는 총이며 머무름이 없는 별이다. 이른바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자재하지 못하다는 뜻이니, 총상의 과법으로서 자신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는 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머무름이 없는 총이 티끌 수만큼 많은 연 중에서 치우침이 없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는 별인 것이다. 일곱째, 실상의 총이며 실상의 별이다. 이른바 총상의 과법(果法)이 지혜의 분별하여 요달해 앎을 떠나 있으므로 실상의 총이며, 연에 별상이 없으므로 실상의 별이니 이른바 무상(無相)이다. 여덟째, 법성(法性)의 총이며 법성의 별이니, 이른바 총상의 과법의 성품이 스스로 원통하여 연을 만나면 곧 수순하므로 법성의 총이며, 이렇게 수순하는 법이 온전히
옆이 없이 일어나므로 법성의 별인 것이다. 아홉째, 해인의 총이며 해인의 별이니, 이른바 다함 없는 법수(法數)가 원만히 밝아 단박에 나타나서 남김이 없으므로 해인의 총이라고 말하고, 단박에 나타난 법이 각기 서로 알지 못하므로 해인의 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열째, 증득(證得)의 총이며 증득의 별이니, 이른바 총상의 과법은 오직 부처님께서 증득한 곳이므로 증득의 총이라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증득 가운데서는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증득의 별이라 하는 것이다.
신림 대덕은 “이러한 10중의 총별로 법을 평정한 연후에 비로소 능히 티끌 하나, 모기 한 마리도 노사나불과 원래 한 몸임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러한 뜻에 의지하여 비로소 동시구족(同時具足)과 인다라망(因陀羅網)의 미세한 경계 등이 있는 것이다.
【문】 넷째의 총별은 다섯째와 어떻게 다른가?
【답】 넷째는 비록 서로 알지 못하지만 두 지위의 다름이 없지 않은 것이요, 다섯째는 곧 하나의 체(體) 위에서 총이라 하고, 별이라 하기 때문에 별인 것이다.
【문】 여섯째의 머무름이 없는 총별은 일곱째 실상의 총별과 어떻게 다른가?
【답】 실상에서 “지혜의 분별을 떠나면 곧 여섯째 무주의 지혜를 간별해 낸다”라고 하였으니, 여덟째 법성에 이르러야 이지(理智)를 구족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기』 ‘마치 총상ㆍ별상……언제나 중도에 있는 것과 같다’74)는 것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이른바 하나의 의미는 ‘총상’으로부터 ‘중도’에 이르러서 비로소 ‘……같이’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의미는 ‘총상ㆍ별상……’ 아래에서 ‘……와 같이’라고 하는 것이다.75) 해석해 말하면, 첫 번째 의미는 총은 별이 아니고 별은 총이 아니며, 성은 괴가 아니고 괴는 성이 아닌 등이므로 ‘즉하지도 않고 하나인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총은 온전히 별이며, 별은 온전히 총이기 때문에 ‘여의지도 않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다’라는 것은 성상과 괴상이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동상과 이상이다. 이른바 아래 가르침의 사람이 구경의 과처(果處)에 이르러서 진망(眞妄)이 동체(同體)라고 집착하므로 괴상의 인(印)으로 인(印)치면 진망이 각기 머물러서 본래 부동이기 때문에 ‘즉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성상의 인으로 인치면 진망이 진(眞)이므로 ‘여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같아지는 지위에서는 범부와 성인은 하나라거나 다르다는 병이 있기 때문에 동상으로 다스리며, 이른바 곧 본각의 해[日]와 같아서 범부와 성인이 한 몸임을 집착하기 때문에 이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범부와 성인이 각기 다르므로 ‘하나가 아니다’라 하며 동상으로 다스리고, 범부와 성인이 하나의 양(量)이므로 ‘다르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인연관ㆍ연기관 등의 3관으로 삼승의 즉함과 여읨・하나와 다름을 따로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삼승의 권속이 일승의 주인과 더불어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 반려가 되어서 원명(圓明)하고 덕을 갖춘 주반(主伴)을 이루는 것이다.
【문】 6상을 쓰면 병이 마땅히 이미 다하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반드시 다시 4구(句)76)를 쓰는 것인가?
【답】 만약 총상을 얻으면 4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별을 계교하는 사람을 위하여 4구로 설하는 것이다.
‘일승과 삼승의 주반이 서로 이룬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문】 한결같이 일승은 주체이고, 삼승은 반려인가? 혹은 이를 반대로 하여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후자와 같다”라고 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오직 한결같이 일승은 주체이며 삼승이 반려(伴侶)이니, 이른바 한결같이 근본입(根本入)을 총이라 이름하고, 9입(入)을 별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근본입의 이름으로써 별로 삼고 나머지 9입의 이름으로 총을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일승의 이름으로 총이 되고 주체가 되며 삼승의 이름으로 별(別)이 되고 반려가 되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주반이 서로 이룬다’고 하는가?
【답】 일승으로 말미암아서 삼승이 있으며 삼승으로 말미암아 일승이 있다. 그러므로 일승은 총체적으로 삼승을 포함하여 주체가 되고, 삼승은 반드시 일승에 의지하여 반려가 되기 때문에 ‘서로 이룬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승 별교와 삼승 별교도 뜻에 준하여 가히 알 수 있다’라는 것은 6상의 뜻을 활용하면 오직 동교의 문이기 때문에 일승의 별교 및 삼승의 별교를 제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세히 설하면 일승의 별교가 주체가 되고, 삼승의 별교가 권속인 반려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중도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니, 가히 준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앞에서는 원교 및 삼승이 모두 동교라고 하더니 이제 여기서는 일승 별교가 동교보다 더 깊고 삼승의 별교는 동교보다 더 얕으니, 뜻에 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법기』 ‘오직 스스로의 진여[自如]에 머문다’는 것은 삼승이 아니니, 모습[相]은 원융하지만 체(體)는 원융하지 않은 평등진여인 것이다. 체와 모습이 모두 원융함을 기준으로 하면, 무분별의 처소와 괴상 중에서는 본래 짓지 않아서 각기 스스로의 진여에 머문다는 뜻에서 말한 것이다. ‘삼승 방편의 교문(敎門)에 의지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다’는 등은, 만약 삼승 방편의 수행을 기준으로 하면 항포(行布)의 인과여서 높고 낮음이 같지 않은 것이며, 만약 일승의 진실한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인과가 원융하여 법성의 덕용이어서 다만 중도에 있으므로 ‘전후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간의장(簡義章)』 원융과 항포를 설함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삼승은 항포이고 일승은 원융이니, 마치 『일승법계도』의 본문77)에서 “삼승 방편의 교문(敎門)에 의지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으며 일승의 원교에 의지하므로 전후가 없다” 등으로 말한 것과 같다. 둘째, 이 경전에 나아가서는 외상(外相)의 동교가 둘이 있다. 첫째는 위와 같은 것이니, 허공의 그림으로 허공을 향함에 곧 체가 허공과 같아서 분수에 따라 걸림이 없는 것이요, 둘째는 아래와 같은 것이니, 아래로 땅의 그림과 흡사하여 전후가 있기 때문이다. 상동은 원융의 뜻이며, 하동은 항포의 뜻이다. 「지품(地品)」 중에서 한 마리 새의 자취가 둘에 통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78) 외상의 동교로써 항포를 삼고 자체의 별교로써 원융을 삼는 것이니, 마치 『소전장(所詮章)』에서 “모든 가르침을 안립함에 두 가지 선교(善巧) 등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요간(料簡)』79)에서, “보현의 지위에 둘이 있다”라고 하는 등이 이것이다. 넷째는 자체의 별교에 나아가면 본래의 지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은 항포이며, 걸림 없는 원융은 원융이다. 이른바 넓고 좁음[廣俠] 가운데 나눔과 나누지 않음이며, 또한 상입문(相入門)의 성품 없음[無性]과 무너지지 않음[不壞]이며, 또한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항상 오고 가는 것이며, 또한 6상 중에 세 가지 원융과 세 가지 항포 등이다.
【본문】모든 보살은……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이다.80)
『법기』 논81)에서 ‘모든 보살이라는 것은 이른바 신(信)ㆍ행(行)ㆍ지(地)에 머무르는 것이요’라고 말한 것에서, 신은 10신이요 행은 3현(賢)이며 지는 10지(地)이다. 만약 크게 나누면 ‘신ㆍ행ㆍ지’는 3현이고, ‘증득을 얻음’은 10지이다.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이란 출세간의 도품(道品)이다’라는 것에서, 부사의한 불법은 곧 부처님의 내증(內證)이다. 이른바 마치 못물에 그림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모든 상(像)을 거두어들인다는 뜻과 모든 상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어떤 한 사람이 못가에 서 있으면서 이러한 모든 상을 보고서 다른 사람에게 설하여 주는 것과 같아서, 이렇게 부처님께서 3종세간이 자기의 몸과 마음임을 증득한다는 것은 그러한 물 중에 모든 상을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으며, 자내증으로써 근기에 임하여 밖으로 향하고 10지를 나누어 보이는 것은 저 물 중에 모든 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금강장(金剛藏)보살이 삼매[定]82) 중에 부처님께서 밖으로 향하는 법을 칭합해 받고서 삼매에서 나온 이후에 근기를 위하여 설하는 것은 마치 저 한 사람이 못가에 서서 물 속의 상(像)을 보고서 다른 사람에게 설하는 것과 같으니, 이른바 만약 내증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부사의한 법일 뿐이라서 10지의 모습이 없으나 앞의 근기에는 삼승이 많으므로 부처님의
뜻은 10지를 설하게 하고자 해서 밖으로 향하는 마음 맨 앞[頭]에 10지를 나누어 보여주는 것이니, 이 뜻은 커서 가히 설할 수 없는 것이다. 금강장이 정(定)에 들어가서 그 법을 칭합해 받고 정에서 나온 이후에 설하는 바 10지는 이 설이 커도 가히 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至相)은 “지(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因)이고, 둘째는 과(果)이다. 인은 이른바 세간의 방편 행을 닦는 것이니 곧 가행지(加行地)의 영역[分齊]이며, 과는 이른바 세간을 벗어나 상을 떠나서 참으로 증득하는 것이니 곧 정증지(正證智)의 영역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출세간의 도품’이라는 것에 대해서이다.83)
【문】 무엇 때문에 세간을 벗어난 곳의 도[出世間處道]에 품이 있는가?
【답】 만약 부사의한 법을 기준으로 한다면 비록 도품이 없으나, 근기의 인연을 위하여 10지를 나누어 보이는 까닭에 도품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至相)은 말하기를, “지금 여기서의 10지는 부처님의 인위(因位)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일승과 삼승, 성문과 인천이 모두 그 중에 있어서 5승(乘)84)의 관찰 대상이 되는 것이며, 보현의 증위(證位)는 불과의 섭용(攝用)이 걸림 없이 자재하여 모두 다하는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10지의 법이 중생 가운데 최초의 문(門)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지위의 법이 매우 깊어서 가장 요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85)라고 하였다.
‘밝게[明]라는 것은 보는 것[見]・지혜[智]・얻음[得]・증득[證]이며’라는 것은 증견(證見)의 지혜로 중생의 몸과 마음이 바로 부사의한 부처님 법임을 증득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중생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가?
【답】 만약 증견의 지혜는 움직임이 없음[不動]을 기준으로 한다면, 현재 개개의 중생의 몸과 마음이 곧 부사의한 불법이며 출세간의 도품이지만 다만 범부가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문】 무엇 때문에 지상은 “앞의 둘은 관해(觀解)이고 뒤의 둘은 행해(行解)이며, 보는 것[見]은 시작[始]이고 지혜[智]는 마침[終]이며, 얻음[得]은 시작이고 증득[證]은 마침이다”86)라고 말하였는가?
【답】 이는 다만 닦음에 의지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만약 말을 빌린다면[假言], 하나하나의 부처님 세계 티끌 수만큼 많은 겁 중에서 연기 실상의 다라니를 닦는다는 것은 관해이며, 생각생각에 증득을 얻는다는 것은 행해이다.
‘설한다는 것은 그 중에서 분별하는 것이다’라는 것에 둘이 있다. 첫째, 만약 부처님의 마음[佛心]을 기준으로 한다면 비록 10지가 없더라도 이끌어 들이는 근기로 말미암아서 삼승이 많기 때문에 금강장을 가피[加]하여 10지를 설하는 것이다. 신ㆍ행ㆍ지의 보살로 하여금 지혜의 지위[智慧地]에 증득하여 들어가게[證入] 하기 때문에 뒤에 얻은 필[後得筆] 중에 10지를 나누어 보여서 설함으로 삼는 것이다. 둘째, 금강장보살이 삼매 중에서 칭합해 받은 뒤에 언설(言說)을 얻어서 설함으로 삼는 것이다. 이른바 부처님께서는 말 없음[無言]으로 설함을 삼기 때문이니, 이것이 무언의 가르침의 근본인 것이다. 금강장이 칭합해 받음도 역시 무언이지만 언교를
기다리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들어간다[入]는 것은 믿음・즐거움・얻음・증득이며’라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내가 이미 닦아 익혀 그대의 몸과 마음을 증득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다른 일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알지 못하겠는가? 다만 믿음이 없으므로 얻지 못하는 것일 뿐이며, 믿으면 능히 알 수 있으니 요컨대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자기의 몸과 마음이 부사의한 불법임을 믿기 때문에 ‘믿음’이라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서 능히 항상 지키므로 ‘즐거움’이라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믿음과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몸과 마음을 직접 증득하기 때문에 ‘얻음과 증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혜의 지위는 10지의 지혜다’라는 것은, 지상(至相)과 원사(遠師)87)가 함께 이 구절로써 근본입(根本入)을 삼고 있다.
【문】 ‘가피의 행위’의 20구절88)은 바로 설할[正說] 때에 말한 것인가, 경가(經家)가 열거한 것인가?
【답】 문장을 기준으로 하면 경가가 열거한 것이며, 뜻을 기준으로 하면 바로 설한 것이다.
【문】 만약 뜻을 기준으로 하면 바로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구업(口業)에 거두어진 것인가, 의업(意業)에 거두어진 것인가?
【답】 구업이다.
【문】 부처님께서 선정 중에 계실 때는 구업으로 일삼아 짓는 설(說)이 있지 않으니, 어떻게 구업이라 말하는가?
【답】 가르침이 일어나는 것이 구업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어나는 바의 가르침이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겠는가? 본래 설하지 않음[不說]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이는 의업이며, 만약 나타나는 모양[現相]을 기준으로 하면 방광(放光)ㆍ마정(摩頂)ㆍ집수(執手)ㆍ촉목(觸目) 등으로 법의 궤칙을 보이는 것은 신업에 거두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구업은 큰 허공[大虛]에 칭합하기 때문에 일으키는 가르침도 역시 큰 허공에 칭합하는 것이다.
‘섭입(攝入)’이라는 것은 부사의한 법을 믿고 듣는 마음 가운데 그 법이 단박에 나타나기 때문에 ‘섭’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 법에 계합하기 때문에 ‘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혜(聞慧) 중에 모든 선근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에서, 불타(佛陀) 삼장89)이 “체(體)에 칭합하는 문혜가 원종(圓宗)의 이치를 거두어들여서 이치와 상응하니 가히 귀한 것이다”(이상)라고 말하였으니, ‘체에 칭합한다’는 것은 해인(海印)의 체에 칭합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많은 묘목이 모두 대지(大地)에 의지함과 같이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선근이 해인에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음과 해인에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해인의 법이 믿는 마음 중에 분명히 단박에 나타나기 때문에 ‘문혜 중에 모든 선근을 거두어들인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의입(思議入)’이라는 것은 문혜로 듣는 바를 생각하면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니, ‘의’라는 것은 사혜(思慧) 중에 생각의 대상이 되는 법을 의언(意言)으로 관찰하여 그 모습을 요달하는 것이요, ‘입’은 위와 같은 것이다.
‘모든 도품’은 부사의한 법이다.
‘지혜의 방편’이라는 것은,
만약 법을 들을 때에 마음이 연(緣)을 밖에 두지 않고 전적으로 이 법을 의지하여 상속 사유함이 ‘방(方)’이며, 이와 같음으로 말미암아서 마음이 법에서 편안한 것이 ‘편(便)’이다.
‘분별하고 선택한다’는 것은 그 마음이 들은 법을 행하고 그 역순(逆順)을 구별하는 것이니, 이러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법에 따름을 취하는 것은 ‘선(選)’이며, 그 법에 거스름을 버리는 것은 ‘택(擇)’이다.
‘법상입(法相入)’은 생각의 대상이 되는 법이 마음에 나타나서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뜻’이라는 것은 부사의한 법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고, ‘한량없이 갖가지로 앎’은 대개 접촉하고 대면하는 것에 부사의한 불법 아님이 없으므로 앎의 대상이 되는 법이 이미 한량없고 능히 아는 지혜도 역시 한량없는 것이다.
‘교화입(敎化入)’은 앞에서 말한 섭입 중에서 저 부사의한 법을 듣고, 사의입 중에서 그 법상(法相)을 헤아리며, 법상입 중에서 저 부사의한 법이 그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다. ‘보살이 최초로 서원을 발한다’는 것은 먼저 스스로를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그 마음에 나타나는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교화입’이라 말하는 것이다.
‘사의(思議)하는 바를 따라서 이름이 갖추어지며 잘 법을 설한다’는 것은 그 사혜의 생각하는 대상이 되는 법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사의하는 바를 따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문혜의 듣는 대상이 되는 법에 맞게 이름을 세우고 교화하기 때문에 ‘이름이 갖추어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잘 결정하여 설한다’는 것은 만약 전해들은 법으로써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 잘 결정하여 설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손바닥 가운데의 구슬을 분명히 보는 것과 같아서 마음에서 법을 요달함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니, 스스로 얻는 법으로써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기 때문에 ‘잘 결정하여 설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증입(證入)’은 스스로 얻는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할 때에 스스로의 행 역시 곧 원만하기 때문이다. ‘일체 법’은 부사의한 법이며, ‘평등한 지혜’는 이 보살이 마음으로 그러한 법을 얻을 때 그 마음이 법과 더불어 가히 나눌 수 없는 것이니, 비유하면 그릇으로 못의 물을 떠 담았다가 다시 못에 물을 버림에 가히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아서,90) 이는 그릇의 물이기도 하고 못의 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평등한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불법을 이루는 것이다’에 대해서 묻는다.
【문】 무엇 때문에 증입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교화입을 해석하는가?
【답】 증입한 뒤에 비로소 이타가 바로 자리의 뜻임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다. 이른바 보살이 서원을 발하는 것은
다만 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니, 먼저 다른 사람을 제도할 때에 법이 그러하여 스스로 진여의 법을 증득하기 때문에 증입에 이른 뒤에 교화입을 해석하는 것이다.
‘불방일입(不放逸入)’은 만약 연(緣)이 머무를 때 마음에 만약 전변함[轉]이 있으면 곧 ‘방(方)’이며, 그러한 ‘방’으로 말미암아서 다른 경계에 나아가는 것이 ‘일(逸)’이다. 이러한 보살이 부사의한 불법에 의지하여 그 마음이 전변하지 않고, 또 다른 경계에도 마음이 나아가지 않으므로 ‘불방일입’이라 말한 것이다.
‘모든 마법(魔法)이 능히 오염시키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에서, 마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천마(天魔)이며, 둘째는 인마(人魔), 셋째는 음마(陰魔), 넷째는 번뇌마(煩惱魔)이다. ‘번뇌마’라는 것은 3독이 뿌리가 되어서 일어나는 번뇌이니, 이른바 수행하는 마음이 위순(違順)의 경계에 부딪혀서 혹은 화를 내고 혹은 탐내어 적정(寂靜)할 수 없음이 바로 번뇌마이다. ‘음마’는 5음(陰) 중에 넷은 마음이요 하나는 색이니, 수행할 때에 옷과 음식 등 다섯 가지 대상의 경계를 탐하여 구하는 것은 색마(色魔)요, 탐하여 구하는 마음은 심마(心魔)인 것이다. ‘인마’는 수행할 때에 부모ㆍ단월ㆍ나쁜 친구ㆍ호색(好色) 등이 모두 인마인 것이다. ‘천마’는 수행할 때에 제6천91)의 마가 곧 스스로 “이 사람이 그렇게 뛰어난 마음을 일으켜서 뛰어난 행을 닦으면 반드시 뛰어난 결과를 얻을 것이니, 나의 권속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서 이 사람을 떠나지 않아 언제나 어지럽히고자 하며, 만약 능히 어지럽히지 못하면 곧 그로 하여금 죽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들이 천마이다.
‘지지전입(地地轉入)’은, 7지(地) 이전은 비록 능히 나아가서 상(相)이 없이 닦지만, 그러나 이것은 공용(功用)이 있는 지위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행(加行)의 작의(作意)를 일으켜서 자심(自心)의 행력(行力)을 타고서 닦는 것이요, 8지 이상은 무상(無相)의 관지(觀智)가 궁극적인 것을 나타내므로 본래의 서원 및 법력(法力)을 타고서 자유자재로 나아가서 닦기 때문에 지지전입이라 말하는 것이다.
‘무탐(無貪) 등의 선근이 청정하다’는 것은 부사의한 법 가운데는 본래 3독(毒)이 없기 때문이다. 무탐(無貪) 등의 선(善)은 비롯함이 없는 때부터 있는 것이지만 지위에 기댐을 기준으로 하면 7지 이전은 공용이 있는 지위라서 마음을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므로 세 가지 선근의 청정한 뜻이 현전하지 않는 것이며, 8지의 임운(任運)의 지위에 이르러서는 세 가지 선근의 청정한 뜻이 구경에 나타나기 때문에 ‘무탐 등의 선근이 청정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선근 등이 있다’는 것은 잠재되어 있는 의심을 해결하는 것이니, 10지 가운데 하나하나의 지위가
모두 지전(地前)의 가행선근(加行善根)과 지상(地上)의 선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전의 가행을 기준으로 하면 ‘다시 선근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지상의 선근을 기준으로 하면 부사의한 불법인 것이다. 의심해서 말하기를, ‘7지 이전의 가행 선근이 8지 이상의 선근을 생하는 것인가?’라고 하니, 이러한 의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직 8지의 가행선근이 그러한 8지의 선근을 낳는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선근이 있어서 능히 출세간 도품의 인(因)이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보살진입(菩薩盡入)’ 중에 ‘여래의 비밀한 지혜’라는 것은 부사의한 불법을 기준으로 하면 비록 10중(重)이 없으나 지위에 기댐을 따라서 우선 열 가지 비밀한 지혜를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비밀한 지혜가 부사의한 법이므로 이러한 법을 얻음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여래의 비밀한 지혜에 들어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진입(佛盡入)’ 중에서 ‘일체지(一切智)에서 지혜에 들어감[入智]’이라는 것은, ‘일체지’는 부처님의 일체지와 일체종지(一切種智)요, ‘입지’는 보살지(菩薩智)이니 보살지로 말미암아서 부처님의 원만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에 보살의 지혜 역시 원만한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
【문】 보살진입 중에서 ‘여래의 비밀한 지혜에 들어간다’고 한 것과 불진입 중에서 ‘부처님의 일체지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 어떻게 다른가?
【답】 보살진입 중에서 부사의한 불법을 얻는 것은 다만 과(果)를 다하는 인위(因位)이며, 불진입 중에서 부사의한 법을 얻는 것은 인을 다하는 과위이므로 다른 것이다.
【문】 원공(遠公)이 불진입으로써 인(因) 가운데 있음을 삼는 것은 보살진입과 어떻게 다른가?
【답】 건립(建立)을 기준으로 하면 보살진입은 제10지에 세우는 것이고, 불진입은 부처님의 과위에 세우는 것이니, 불진입으로 인 중의 과를 삼는 것은 신(信)ㆍ행(行)ㆍ지(地)의 보살이 부사의한 불법을 얻기 때문에 인 중의 과로 삼아서 ‘부처님의 과덕을 얻는 것이지 불진입이 인(因)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입(入)이 교량(挍量)……된다’는 것에서, 이러한 ‘모든 입’으로부터 ‘차별’에 이르는 것92)이 교량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혜원[遠公]의 뜻이며, ‘모든 입’으로부터 ‘점점 뛰어나게 됨[轉勝]’에 이르는 것93)이 교량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법장[藏師]의 뜻이다. 혜원의 뜻은 3현10지의 차례대로 점점 뛰어나게 되는 지위가 바로 기탁하는 바[所寄]가 되므로 불식해야 할 대상[所拂]이라는 것이며, 9입의 차별은 근본입 중에서 덕의 뜻이 차별되기 때문에
불식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법장의 뜻94)은 3현10지가 온전히 부사의한 불법의 지위이며 섭입 등의 9입도 역시 온전히 부사의한 불법이므로 9입의 차별과 3현10지의 점점 뛰어나게 됨을 모두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지혜의 뜻이 차별되는 9입과 차례로 점점 뛰어나게 되는 3현10지가 모두 불식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교량하되 버리지 않는 것이고, 그 삼승 가운데 항포(行布)의 차례ㆍ차별ㆍ전승(轉勝)ㆍ결정 등은 모두 버릴 바라는 것이다.
【문】 이미 온전히 부사의한 법의 3현10지라면 마땅히 뛰어남과 열등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점점 뛰어나게 됨이 있다고 하는가?
【답】 비록 정(情)으로 헤아린 뛰어남과 열등함은 없으나 또한 연기의 뛰어남과 열등함은 있는 것이다.
【문】 연기의 뛰어남과 열등함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병 중에 큰 허공을 포함하고 있고 옹기 중에도 역시 그러하지만, 큰 허공을 포함한 병은 어린 아이가 능히 들 수 있으나 대공을 포함하는 옹기는 어린 아이가 쉽게 들어올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10신(信)의 지위 중에 법계를 거두어들여서 다하고 10주 등의 지위도 역시 법계를 거두어들이지만, 비록 법계를 거두어들이는 뜻은 같으나 지위의 다름을 따르기 때문에 법계를 거두어들이는 10신은 열등한 것이고 법계를 거두어들이는 10주 등은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연기의 차별은 불식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신위(信位)에서 성불하는 뜻을 기준으로 하면 순범(順梵)과 행장(行將)의 두 대덕95)이 원만불(圓滿佛)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은 수분불(隨分佛)을 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신림 대덕[林德]은 이러한 두 가지 뜻을 거론하여 상원(相元)에게 물었는데, 상원이 말하기를 “모두 화상의 뜻이 아니니 곧 10신의 한 지위로 10주 등을 형용하는 것은 문이 다르기 때문에 수분불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법계를 거두어들여서 구경에 옆이 없으므로[無側] 원만불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승은 어떠한 한 지위를 따라서 부처를 이룰 때에 분(分)・만(滿)의 두 가지 뜻을 갖추는 것이다”(이상)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법장의 뜻은 9입 중의 입은 근본입의 입이며, 9입 중 섭(攝) 등의 아홉은 근본입 중의 지혜지(智惠地)이므로 모두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언설의 해석’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혜원은 “이러한 9입의 언설 가운데 6상으로써 해석한 뜻을 마땅히 알 것이니라”고 하였다. 법장의 두 가지 해석은 소(疏)96)와 같다.
‘사(事)는 제(除)하는데, 사라는 것은 이른바 음(陰)ㆍ계(界) 등이다’라는 것에서, 이러한 뜻은
실로 가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림 대덕이 대승경공(大乘冏公)에게 물었더니, 경(冏)이 말하기를 “음ㆍ계ㆍ입에서는 6상이 필요한즉 원융하여 어렵지 않지만 ‘제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3과(科)와 백법(百法)을 말함에 6상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음ㆍ계ㆍ입을 제외하면 어느 곳에서 6상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스님은 말하기를 “6상은 삼승을 인용할 때에 쓰이는 방편이다. 그러나 그 집착하는 바 체성(體性)이 각기 다르니 3과의 법에 대하여 6상을 쓰면 그 법이 잡란(雜亂)하여 이익을 얻지 못하므로 ‘사는 제한다’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융순(融順) 화상은 말하기를 “요컨대 6상의 언설로써 『화엄경』을 설하는 것이지만, 만약 3과와 백법으로 설하면 곧 삼승이므로 ‘사는 제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소(藏疏)』97) 가피의 행위[伽所爲]를 해석하는 중에 20구절의 글을 두 가지 이로움에 의지하여 나누면, 처음 10구절은 타(他)와 함께 하는 자리(自利)이고, 뒤의 10구절은 자리와 함께 하는 타인 것이다…….
앞 가운데서 논주(論主)98)는 네 가지 범주[四門]를 지어서 해석하고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해석하여 근본을 나타내는 것이다……넷째는 근본과 지말이 걸림 없는 것이다.
첫째 중에서 총체적으로 10지의 법[地法]을 논하면 연기에 여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모든 보살은 신ㆍ행ㆍ지이다’라는 것은 미치는 바[所被]의 근기를 드는 것이니, 이른바 지전(地前)의 보살은 진여를 증득하지 못하고 다만 신심(信心)에 의지하여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둘째,99)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은 출세간의 도품이다’라는 것은 얻는 바 법이다. 그러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인(因)을 기준으로 하면 이른바 10지 법의 체(體)는 출세간의 무류(無流)의 법이니,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짐을 ‘부사의’라 이름하며, 통틀어서 불과를 낳기 때문에 ‘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아래 본문에서 ‘위대한 성인의 도는 그러한 인(因)이기 때문이니, 10위(位)의 품류가 차별됨을 품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둘째, 과(果)를 기준으로 하면 이른바 부처님께서 얻는 법이기 때문에 ‘불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아래의 지위가 의도할 바가 아니므로 ‘부사의’라 이름하는 것이고, 지상(地上)의 보살로 하여금 이 법을 나누어 증득하는[分證] 것을 ‘출세간의 도품’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지위의 지혜[地智]가 노니는 바를 ‘도’라 하고 분증이어서 원만하지 못하므로 ‘품’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셋째,100) ‘밝게[明]’라는 것은 처음 바라봄을 ‘본다[見]’라고 이름하고, 자세히 비추는 것을 ‘지혜[智]’라 이름하며, 지혜로써 비추어 보는 것이지 헤아리는 것이 아니므로 ‘얻음[得]’이라 이름하고, 그윽하고도 신령스럽게 계합하므로 다시 ‘증득[證]’이라 이름하는 것이다……넷째, ‘설한다는 것은 그 가운데 분별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이러한 증득하는 주체와 증득의 대상이 되는 법 중에 10위의차별을 나누어서
해석하여 지행(智行)의 우열(優劣)과 공혜(功惠)의 같고 다름을 밝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들어간다[入]는 것은 믿음[信]・즐거움[樂]・얻음[得]・증득[證]이다’라는 것은 이른바 지전(地前)에서는 믿음과 즐거움에 멀리 ‘들어간다’는 뜻이 있으며 지상(地上)에서는 증득과 얻음에 서로 들어감[交入]을 현성(現成)하는 것이다. 통틀어서 입의 뜻을 논하면 반드시 여기서부터 저기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과 마침을 갖추는 것이니, 역시 믿음은 처음이고 즐거움은 마침이요, 얻음은 시작이고 증득은 마침인 것이다. 여섯째, ‘지혜의 지위[智惠地]’라는 것은 이른바 10지의 지혜이니 본분(本分)101) 중에 설하는 것과 같다. 이른바 이렇게 이치를 증득하는 성스러운 지혜에는 불과(佛果) 등을 생성하고 주지(住持)하는 작용이 있으므로 ‘지(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처음에 환희지(歡喜地)로부터 마지막 법운지(法雲地)까지는 본분 중에 나타나 있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 뜻이 걸림 없이 융합하여 가르침과 뜻에 통하고, 증득[證]과 헤아림[比]에 통하며, 대상[境]과 지혜[智]에 통하고, 사람[人]과 법(法)에 통하며, 원인[因]과 결과[果]에 통하여서 걸림 없이 융통하여 총체적으로 한 덩어리가 되니, 10지의 법이라 이름한다. 뒤에 펼쳐지는 갖가지 차별 역시 모두 이러한 총구(總句) 중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근본입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 근본에 의지하여 지말을 여는 것이다. 아홉 구절을 나누어서 이루니, 이 중에 네 가지 지위가 있다. 이른바 원락위(願樂位)ㆍ견위(見位)ㆍ수위(修位)ㆍ구경위(究竟位)이다. 처음의 네 구절은 앞의 지전(地前)의 원락위에 부치는 것이며, 그 다음 한 구절은 초지에 부치는 것이며, 그 다음 세 구절은 수위에 부치는 것이며, 마지막 한 구절은 구경위를 밝히는 것이다.
【문】 여기는 바로 10지의 법을 설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지전과 불과도 설하는가?
【답】 10지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앞에는 아래를 일으키는 공(功)이 있고 뒤에는 위를 이루는 뜻[義]이 있기 때문이다.102) 또 이렇게도 해석한다. 10지의 증지(證智)로 말미암아서 아함(阿含)103)의 빛을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전은 이러한 10지의 아함에 분섭(分攝)되는 것이며, 이러한 지위의 지혜가 과해(果海)에 의지하여 이루어짐을 말미암기 때문에 불과가 있으니, 위의 ‘부사의한 불법’과 아래의 ‘새의 자취가 의지하는 바 허공 등’이 모두 그러한 일이다.
처음의 네 구절 중에서 첫째 구절은 문혜를 기준으로 하여 선근을 닦는 것이니 ‘모든 것을 거두어 들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 구절은 사혜의 시작을 밝혀서 도리를 간택하는 것이니, 논 중에 ‘지혜 방편’은 ‘잘 분별한다’는 것을 해석한 것이며, ‘도품’은 ‘불법’을 해석한 것이다. 셋째 구절은 사혜의 마침이다. 이른바 생각함으로 인하여 널리 아는 것이니, ‘그러한 뜻’은 ‘모든 법’을 해석하는 것이며, ‘갖가지 앎’은 ‘널리 앎’을 해석한 것이다. 넷째 구절은 수혜(修慧)를 밝히는 것이니 의심할 바 없이 가르침을 세워서 가히 믿을 만하므로 ‘결정설(決定說)’이라 말한다. 이른바 닦음[修]은 두 가지 이로움에 다 통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이타를 드는 것은
보살이 다른 사람을 교화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불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리의 거둠에 들어가는 것이다. 논 중에 ‘사의(思議)하는 바를 따른다’는 것은 사혜(思慧)가 생각할 바이며, ‘이름이 갖추어진다’라는 것은 문혜(聞慧)가 지니는 바이기 때문에 ‘결정설’인 것이다. 이상은 믿음과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 아래부터는 얻음과 증득을 분별하는 것이다. 다섯째 구절은 지위를 보는 것[見位]이다……논 중에 ‘일체법의 평등한 지혜’라는 것은 ‘무분별의 지혜’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른바 초지에서 올바로 진여를 증득하여 주관과 객관의 두 가지 모습이 없기 때문에 ‘평등’이라 말하는 것이다. ‘견도(見道)의 때에 잘 청정하다’라는 것은 ‘잘 청정하여 잡스럽지 않다’를 해석하는 것이니, 이른바 두 가지 아(我)의 분별과 수면(隨眠)을 떠나는 것이다. 여섯째 구절은 수도위(修道位) 중에서 지지(地地)가 달라짐에 따라서 하나의 무명을 끊기 때문이며, 번뇌장에서도 영원히 굴복하고 떠나기 때문에 ‘세간의 법이 잡스럽지 않음을 불방일입(不放逸入)이라 이름한다’라고 하는 것을 밝히니, 마법은 세간의 법이다. 일곱째 구절은 수위(修位) 중에서 지행(智行)이 더욱 전진하는 것을 ‘지지전입(地地轉入)’이라 이름함을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무류의 선근이 영원히 세 가지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을 모두 떠나버리는 것이다. ‘무탐(無貪) 등의 선근’이라는 것은 무진(無瞋)과 무치(無癡)를 가지런히 취하는 것이다. ‘다시 선근이 있어서 능히 출세간 도품의 인(因)이 된다’라는 것은 모든 지위 중의 가행선근이다. 여덟째 구절은, 10지의 배움이 다하는 것을 ‘보살진입’이라 이름하니, 아래 대진분(大盡分) 중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다. 제10지의 보살이 여래의 열 가지 비밀한 지혜에 들어가는 것이 비밀스럽고 은밀하며 깊어서 가히 헤아려 알기 어려우므로 ‘부사의’라 이름하는 것이다. 아홉째 구절은 구경위이니, 인행의 도[因道]가 이미 원만하여 불과가 이렇게 수승하니 궁극적인 과가 원만함을 ‘불진입’이라 이름함을 밝히는 것이다. 논 중의 ‘입지(入智)’는 ‘얻음[得]’이라는 글자를 해석하는 것이다.
셋째, 지말을 모아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른바 ‘이러한 모든 입’은 위의 9입(入)을 거듭 거론한 것이고, ‘교량 등이 된다’는 것은 그 분별이 없는 분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지전ㆍ지상과 나아가 불지(佛地)에 부쳐서 지위의 지혜의 차별을 교량하여 차례로 점점 뛰어난 모습이 되는 것이지, 근본입 중에서 또한 이와 같은 항포(行布)의 차례ㆍ결정ㆍ차별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말을 원융하여 근본으로 돌아가서 둘이 아님을 나타내니, 앞104)에서는 근본에 의지하여 지말을 일으켜서 분별이 없는 분별을 밝히는 것이고, 여기서는 지말을 모아서 근본으로 돌아가 다르면서 다름이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넷째, 근본과 지말이 걸림 없는 것이니, 이른바 6상의
총별이 걸림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6상의 뜻을 해석함에 여섯 가지 범주[六門]를 짓는다. 첫째, 가르침이 일어난 뜻을 밝히는 것이다. 이른바 정히 집착하는 견해를 깨뜨려서 연기의 원융한 법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가 나타나면 모든 혹장(惑障)은 하나가 멸(滅)하면 일체가 멸하고, 일체 행(行)의 지위는 하나가 이루어지면 일체가 이루어지는 등이다. 둘째, 종류는 스스로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不自不他] 등의 4구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不有不無] 등의 4구 및 불생(不生) 등의 8불(不)과 10불(不) 등이 모두 현상[事]을 모아서 이치[理]에 들어가는 것이다.105) 이러한 부류는 다만 그것들이 이치에 들어가서 하나의 적정함에 수순하는 것일 뿐이요, 이제 여기서 이치에 들어가는 것은 저 현상을 원만히 융합하여 상즉상입(相卽相入)하게 해서 보현의 법을 이루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셋째, 출전[所出]을 밝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아래 경의 넷째 대원(大願)106) 중에서 경가(經家) 스스로 설하는 것이지, 논주의 의도대로 지은 것이 아니다. 넷째, 건립을 밝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오직 여섯이며, 더 많지도 않고 더 적지도 않은가? 이른바 대개 모든 연기법은 요컨대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첫 번째 지말은 근본에 대해서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이 있는 것이며, 두 번째 저 일어나는 지말은 이미 근본을 띠고 있는 것이므로 서로 바라보아서[相望] 같음[同]이 있고 다름[異]도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저 근본을 띠고 있는 지말이 이미 근본에 거두어짐이 되는 것이므로 당체(當體)에 존재함[存]과 무너짐[壞]이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세 가지를 갖추지 않으면 연기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며, 셋 중에 각기 둘이 있으므로 다만 여섯이 있을 뿐이다.
다섯째, 문답하여 결택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역(逆)이니, 이른바 총도 아니고 별도 아닌[非摠非別] 등이 각각 서로 존재를 부정하여[形奪] 모든 상(相)이 다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순(順)이니, 이른바 역시 총이며 역시 별이기도 하다[亦摠亦別]는 등이 각각 순조롭게 서로 성취하는 등이므로 이렇게 사유하여 이를 지은 것이다.
여섯째,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니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법을 기준으로 하여 수(數)를 드는 것이니, 이른바 설하는 법 중에 여섯 가지 상(相)이 있는 등이다. 두 번째, 가르침과 뜻을 분별하여 정하는 것이니, ‘이러한 언설로 해석하는 것’은 가르침을 정하는 것이다. 이른바 이 중에 이러한 6상의 언설을 안배하여 경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이렇게도 해석한다. 이 중에서 6상을 해석하는 것이 이 경의 본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논주의 해석하는 뜻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사(事)를 제하는 것이니, 이른바 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이다’라는 것은, 이는 그 뜻을 분별하여 정하는 것이다. 이른바 도리(道理)를 기준으로 하여 융통함을 설하는 것이지 음(陰) 등의 사상(事相) 중에서 분별하는 것이 아니므로 제거하여 가려내는 것이다.
세 번째, 이름을 열거하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모습[相]을 해석하는 중에서, 별상 안에서 ‘별(別)은 근본에 의지한다’는 것은 총에 의지하여 별을 여는 것을 밝히는 것이며, ‘그러한 근본을 원만케 한다’는 것은 도리어 능히 총을 이루는 것이다. 이른바 반드시 근본에 의지하는 별이라야 비로소 능히 근본을 원만히 하기 때문이다. ‘모습을 더한다’는 것은 앞의 9입(入)이 점차 증가되는 모습이니 다름107)을 나타내는 것이고, 연이 화합을 이룸은 간략한 말로 표방하여 나타내는 것이며, 연이 흩어지면 지음이 없다는 것은 널리 인연을 분별하는 것이다.108) ‘마치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것은 비유를 들어서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마치 백억의 4천하(天下)가 하나의 사바세계를 합성하는 것과 같아서 간략한 말로 표방하여 나타내면 ‘이룸[成]’이 되는 것이요, 만약 분별하여 널리 백억의 차별을 설하면 하나의 사바세계로 하여금 의지하여 머무르게 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무너짐[壞]’이 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나머지 일체’라는 것은 모든 곳에서도 이런 유(類)에 준거하여 알아야 함을 권장한 것이다.
『고기』『장소(藏疏)』에서 “논주가 네 가지 범주[四門]를 지어서 해석하였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러한 4문의 이름이 비록 소주(疏主)109) 스스로 지은 것이지만, 저 논 중에 본래 그러한 뜻을 갖추고 있으므로 ‘논주가 4문을 지었다’라고 했던 것이다.
【문】 이러한 4문은 모두 일승인가, 혹은 삼승인가?
【답】 일설에는 “4문이 모두 일승이니 어째서인가? 첫째 문은 가르침과 뜻에 통하고, 나아가 원인과 결과에 통하며 혼연(混然)히 통하여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열 가지 보법(普法)을 기준으로 해서 제2문을 이름하면, 다름이 없는 다름인 것이다. 제3문은 다르면서 다름이 없는 것이며, 제4문은 총과 별이 걸림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처음과 마지막의 두 문은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 제2는 근본입에 의지하여 9입의 지말을 여는 것이니, 삼승과 같아서 일심(一心)의 근본에 의지하여 흘러 6도(道)를 이루는 것이다. 제3은 9입의 지말을 모아서 근본입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역시 삼승이 6도의 차별을 모아서 평등한 일심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 문이 모두 삼승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처음의 하나는 일승이고, 그 다음 둘은 삼승이니, 역시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제4문은 비록 6상을 밝히고 있으나 6상의 가르침이 일어나는 뜻에 ‘정히 집착된 견해[定執見]를 깨뜨려서 연기를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미 ‘집착을 깨뜨린 뒤에 덕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는 수상문(修相門)의 원융한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첫째 문(門)인 총체적으로 해석하여 근본을 나타내는 일승에 상대하기 때문에 삼승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논의 저자가 앞의 세 문에서 6상(相)을 밝히지 않고 제4문에 이르러서
6상을 논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 문장 모습이 현저하게 드러남을 기준으로 하면 곧 앞의 셋은 삼승이요 뒤의 하나는 일승인 것이다. 그러나 제4문에서 6상을 밝힐 때에 앞의 세 문의 본말론(本末論)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제4문을 기준으로 하여 본다면 앞의 세 문이 모두 또한 일승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여기서 ‘네 번째 근본과 지말이 걸림 없다’는 것은 그 뜻이 무엇인가?
【답】 일설에는 “제8회110)의 소(疏)에서 말하기를 ‘본회(本會)를 펼치면 말회(末會)가 되고 말회를 거두어 말면 본회가 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여기서도 그와 같아서 근본의 총을 열어 9입(入)의 지말을 이루고, 9입의 지말을 모아서 근본의 총을 이루는 것이다. 일설에는 “일승 중에는 정해진 근본과 지말이 없기 때문에 하나를 들어서 주(主)를 삼으면 나머지는 곧 반(伴)이 되니, 그러므로 10입(入) 중에서 듦에 따라 근본을 삼으면 나머지는 곧 지말이 되는 것이다”111)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근본은 스스로 언제나 근본이며 지말 역시 스스로 항상 지말이라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한결같이 근본입을 총이라 이름하나 나머지 9입은 총이라 이름하지 않고, 한결같이 나머지 9입을 별이라 이름하나, 근본입으로써 별을 삼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근본과 지말에 걸림이 없음을 이루는가?
【답】 총에 의지하여 별을 열 때에 만약 근본의 총을 깨뜨려서 9입의 지말을 이루면 곧 별이 총을 장애하는 것이며, 별을 모아서 총을 이룰 때도 역시 그와 같으니 만약 그렇다면 총이 별을 장애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별을 이루고 별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총을 이루기 때문에 근본은 곧 언제나 근본이며 지말은 언제나 지말이어서 능히 걸림이 없음을 이루는 것이다.
【문】 『육상장(六相章)』112)에서는 “서까래[椽]가 곧 집[舍]이므로 총상이라 이름하며, 집이 곧 서까래이므로 별상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글에 의지하면 가히 근본이 도리어 지말이 되고, 지말이 도리어 근본이 되는 것인가?
【답】 일승 중에서는 만약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거니와 이루어진다면 시작과 마침을 떠나기 때문에 비록 ‘서까래가 곧 집이다’라고 하더라도 이미 집일 때는 시작과 마침을 떠나기 때문에 먼저 별(別)의 서까래가 있어서 뒤에 집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본이 도리어 지말이 되고 지말이 도리어 근본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문】 서까래는 별의 연[別緣]이거늘 이미 ‘서까래가 곧 집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역시 섭입(攝入) 등의 별이 총이 되는 뜻이 있으므로 역시 가히 ‘지말이 도리어 근본이 되는 뜻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그렇지 않은가?
【답】 섭입 등이
총이 되는 뜻은 곧 근본입이기 때문에 다만 총의 이름으로써 총을 삼는 것이지, 별의 이름으로써 총을 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섭입 등이 만약 총이 된다면 다만 ‘근본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고기』 근본입의 대허(大虛) 중에도 여덟 가지 어려움이 있다. 만약 이러한 여덟 가지 어려움을 알 수 있다면 비록 그 근본이 되는 소[本疏]를 보지 못하더라도 가히 『지론(地論)』의 미묘한 뜻[妙旨]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거니와, 만약 이러한 여덟 가지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열 명[家], 스무 명의 ‘소’를 얻었다 하더라도 가히 『지론』의 뜻을 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첫째는 이러한 대허(大虛) 중에 비록 총과 별의 상(相)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히 총과 별을 나누는 뜻은 있는 것이니, 이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른바 위에서 말한 5중총별(重總別)에서 처음 세 가지[重]를 기준으로 하여 보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비록 여러 가르침의 행위(行位)가 없으나 가히 여러 가르침의 행위를 나눌 수 있으니, 역시 알기 어려운 것이다. 소류(所流) 삼승의 9입처(入處)에서 보는 것이다. 셋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서는 비록 무상(無常)하고 무상하지만 항상함이 있는 지혜[有常智]가 장애를 끊음과 항상함이 없는 지혜[無常智]가 장애를 끊음은 역시 알기 어려운 것이니, ‘다시 선근이 있다’ 등의 문장을 기준으로 하면 알 것이다. 만약 품(品)과 회(會)를 기준으로 하면 이는 차별과 평등의 2주인과(周因果)113)와 수생(修生)과 본유(本有)의 두 가지 지혜이다. 넷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유상(有常)과 무상(無常)의 지혜가 합하여 하나의 무류지(無流智)를 이루는 것이니, 역시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른바 초회(初會)의 40류(類)114)의 법체(法體)와 법계회(法界會)의 신중(神衆)115)은 유위(有爲)이며, 보현과 문수 등 동생(同生)116)의 무리는 무위(無爲)이니, 이러한 유위와 무위가 합하여 법신 비로자나의 자체지(自體智)를 이루는 것이다. 다섯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이 있어서 합하여 법체를 이루니, 역시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머무름이 없는 별교문(別敎門) 중에 깊고 얕은 3관의 생멸과 증분 가운데에 태어남이 없는 불법의 불생멸이 없는 것이다. 여섯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움직이지 않는 근본 무명이 곧 만족한 법체인 것 역시 알기 어려우니, 종교(終敎)의 근본ㆍ지말 등의 무명에서 ‘보자인(普字印)’으로 인정(印定)하여 아는 것이다. 일곱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불진입(佛盡入)에서의 발심과
섭입의 지위에서 부처를 이룸 역시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모든 입(入)을 기준으로 하면 ‘교량지(校量智)의 뜻과 차별이 된다’는 등의 문장을 알 수 있다. 여덟째는 이러한 대허 중에 지옥의 지위에서 발심하는 사람은 없으며 지옥 중에서 발심하여 성불하는 것 역시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언설에 의지하여 해석하는 것이니, 마땅히 알아라’는 글에서 알 수 있다.
【본문】모든 법이 각기 다르니……모든 지위의 공덕.
『법기』 “모든 법이 각기 달라서 스스로의 진여에 머물기 때문에 1여(如)와 다여(多如)의 여여(如如)한 모습을 가히 얻지 못한다”는 것은 54각을 기준으로 해서 ‘여여’라고 하였으나 가히 나눌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첫째 각(角)의 여(如)이며, 이것이 둘째 각의 여 등이기 때문에 ‘모습을 가히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1각(角)을 기준으로 하는 때에 곧 54각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여’라고 말하는 것이며, 제2각을 기준으로 해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마침내 앞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니, 위에서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지만 1가(家)의 진실한 덕의 성품이 중도에 있다”라고 말하였는데, 말미암는 바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대기』 ‘그러므로 경117)에서, 묻기를, 어떻게 해야 깊이 불법을 믿는 것입니까? 답하기를, 모든 법은 오직 부처님께서 알 바이며 나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라고 말한 것 등은 『승만경』을 인용하여 위를 증명하며 스스로 겸손한 것이다. 이른바 앞118)에서는 ‘이러한 뜻을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천친론』의 저자에 의지하여……분수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뜻으로는 ‘오직 부처님께서 알 바이며 내 스스로는 알 바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에 의지하여 분수에 따라서 이러한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 중의 ‘우러러 미루는 지혜’를 인용하여서 증거로 삼은 것이다. 저 경에서 ‘심심법지(甚深法智)를 이룬다’고 말한 것은 첫 번째 사람을 위해서이며, ‘수순법지(隨順法智)를 이룬다’는 것은 두 번째 사람을 위해서이며, ‘여래에게 우러러 미루는 것이지 나의 경계는 아니다’는 것은 세 번째 사람을 위해서이다. 해석에 말하면 첫째는 증지이고, 그 다음은 3현(賢)이고, 마지막은 10신(信)이다.
『법기』 ‘7처8회와 품류(品類)가 같지 않지만 오직 「지품(地品)」119)에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근본으로 법을 얻어서 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실담장(悉曇章)」에서 “일체 모든 글자는 초장(初章)이 근본이 된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세간・출세간의 일체 모든 법은 10지가 근본이 되므로 ‘법을 거두어들여서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고기』 【문】120) 일승의 10지는 어떻게 보는 것인가?
【답】 부석산의 40일 법회에서 화상(和尙)이 “일승의 10지는 횡(橫)이며 수(竪)이다”라고 하자, 상원(相元)과 지통(智通) 등이 “이미 화상의 뜻을 얻었다”라고 말하고,
그 법회가 마침에 이르러서는 각기 그 얻은 바를 바쳤더니, 화상이 “모두 얻지 못했다. 일승의 10지란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의 마음에 의지하여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뒤에 신림 대덕이 해석하여 말하기를, “초회의 10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빛깔[色]을 보고서 본다고 하는 것과 같으며, 「광명각품」 이하의 10지는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듣지 못하는 사람이 소리[聲]를 듣고서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른바 초회의 근본에 의지하여 뒤의 「광명각품」의 10지를 일으킨 것이니, 수생(修生)의 10지・불과(佛果)의 10지・본유(本有)의 10지・이세간(離世間)의 10지・입법계(入法界)의 10지이다.
【문】 일승의 다함없는 10지는 어떻게 보겠는가?
【답】 삼승 중에서는 3천세계[三千界]에 의지하여 법을 밝히며, 일승의 수문(隨門) 중에서도 역시 계(界)에 의지하여 법을 밝히는 것이고, 스스로의 별교 중에서는 종(種)에 의지하여 법을 밝히는 것이다. ‘삼승의 10지’에서 초지(初地)는 백엽의 연꽃에 의지하여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중밀(仲密)・증편(證遍)・만진(滿眞)의 타수용신(他受用身)이 의지하는 바이며, 역시 응신(應身)이다. 그 백엽 가운데 하나의 잎은 온전히 통괄하는 것이 곧 정토의 교화인 것이다. 또한 하나하나의 잎 중에 각기 백억의 석가가 있으니, 곧 예토의 교화인 것이다. 2지(地)는 곧 천엽의 연꽃에 의지하여 밝히는 것이니, 앞에 준하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제10지는 무수한 잎의 연꽃에 의지하여 밝히는 것이니, 역시 앞에 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삼승 중의 연꽃’은 10지 보살이 의지하여 머무는 바이고, ‘일승의 연꽃’은 10지의 체(體)이다. ‘일승의 수문 중에 계(界)에 의지하여 법을 분별한다’는 것은 삼승과 같지만, 다만 6상(相)으로써 이루기 때문에 다를 뿐이다. ‘종에 의지하여 분별한다’고 말하는 것은 초회 중에는 모두 56중(重)의 10지가 있으니, 이른바 교분의 1중과 증분의 55중이다. ‘교분의 일중’이라 말하는 것은 세계해(世界海) 중에 10불가설불찰진수(不可說佛刹塵數)의 향수해(香水海)가 있는데, 가장 중앙의 바다에서 큰 연꽃이 나오고, 이 연꽃 위에 세계종(世界種)이 있다. 이러한 하나의 종(種) 중에 20중의 세계가 있으니, 이러한 20중이 곧 10지이다. 10지에 각기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이 있으므로 20중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종에 이미 10지가 있고, 나머지
하나하나의 종에 모두 10지가 있기 때문에 10불가설세계진수의 10지가 있으니, 그러므로 ‘다함없는 10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1중(重)일 뿐이지만, 만약 나아가서 보면 곧 중중무진의 10지가 있으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증분의 10지(地)’라고 말하는 것은 5해(海) 10지(智)를 기준으로 하여 보는 것이다. 이른바 바다로써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에 50해가 있으니 곧 5중(重)의 10지(地)인 것이고, 지혜로써 바다에 들어가기 때문에 5백 지(智)가 있으니 곧 50중의 10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증분 중에 모두 55중의 10지가 있으니, 이는 하나의 행문(行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약 나아가서 본다면 곧 중중무진(重重無盡)의 10지가 있으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문】 삼승은 환희지・이구지 등으로 10지를 삼는데, 일승 중에서는 어떻게 이름하는가?
【답】 동교의 수문(隨門) 중에는 삼승과 같으나, 만약 별교 중에서라면 세계의 이름・바다의 이름・지혜의 이름 등이 모두 10지의 이름인 것이다. 원교문(圓敎門) 중에는 환희 등의 이름과 세계 등의 이름이 모두 10지의 이름이니, 이른바 삼승 중에는 오직 이름만 있을 뿐 실다운 법체가 없으며, 원교 중에는 법체를 갖추고 있으므로 10지를 삼는 것이다. 또한 ‘삼승과 초교(初敎)의 10지’라는 것은 수위(竪位)이니, 이른바 10신(信)과 10주(住)로부터 점차 불과(佛果)에 이르기 때문이다. ‘숙교(熟敎)121)의 10지’는 횡위(橫位)이니, 이른바 하나의 여래장 체(體) 중에서 나누어 세운[分立] 바이기 때문이다. 일승 중에는 횡과 수를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횡으로는 허공 법계를 포함하고, 수로는 9세와 10세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10신・10주 등이 모두 10지(地)를 쫓아서 일어나므로 법장[藏師]은 “10지는 앞의 지전(地前)을 거두어들이고 위로 불과를 섭수한다. 회회(會會)마다 본분(本分)에서 모두 ‘바다가 있다’고 하였으니, 모두 10지로써 근본을 삼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화상(和上)의 뜻도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법기』 ‘한 지위[地]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널리 일체 모든 지위의 공덕을 거두어들인다’122)라는 것은, 여기서 올바로 연기법을 밝히기 때문에 ‘하나가 일체를 거두어들인다[一攝一切]’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연기의 만족하고 옆이 없는 법’을 기준으로 하면 곧 그 한마디로 이미 충분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널리 얻는다’123)라고 거듭 말하는 것인가?
【답】 실제[實]로는 이와 같아서 다만 한 지위[一地]를 말하면 족하지만 필요에 따라서 말한 것일 뿐이다.
『고기』 지상(至相)이 경을 해석하는 중에 ‘한 지위에 있으면서 널리 일체 모든 지위를 거두어들인다’는 문장에서 말하기를, “행상의 차례에 나아가서 마침내 궁극적이고 진실한 자체에 이르러 논하면 간략히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작[始]이 있으므로 능히 뒤[後]를 낳는 것이니, 마지막에 마침내 만족(滿足)하므로 ‘거두어들인다[攝]’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비록 처음의 시작이지만 능히 모든 지위에서 행할 수 있고, 행하는 모든 법이 허식[姝]이 없으므로 ‘거두어들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루어지는 행은 다만 자분 중에 있어서 상하의 우열이 단지 ‘밝고 어두움[明昧]’으로써 다를 뿐이다. 셋째는 다만 처음의 시작에서 곧 일체 모든 지위의 공덕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거두어들인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넷째는 처음과 뒤이기 때문에 ‘거두어들인다’라고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처음의 시작이 곧바로 마침이기 때문에 ‘거두어들인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124)라고 하였다(이상).
해석해 말한다. 일설에는 “처음의 둘은 시교(始敎)와 종교(終敎)이며, 뒤의 둘은 일승이다. 일승의 둘 중에도 첫째는 연기분이며 둘째는 과분이다”라고 하였고, 또 일설에는 “첫째는 중문(中門)이고, 둘째는 즉문(卽門)이다”125)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