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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1 불교(개원석교록 6권 10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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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610

 

지승 지음

 

그 때에 진제(眞諦)는 행화(行化)가 멀리까지 알려졌고, 그 거동이 성현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때 백성들에게 은혜와 이익을 주는 대덕 스님을 찾자, 그 나라에서는 곧 진제를 손꼽으면서 아울러 경론을 보내며 공손하게 황제의 뜻을 받들게 하였다. 진제는 평소 마음속에 품은 것이 있었기에 기꺼이 명에 따랐다.

대동 12(546) 815일에 남해(南海)에 도달하였는데, 오던 길이 험난하여 2년 동안 도중에서 지체하다가 태청(太淸) 2(548) () 8월에야 비로소 도성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에 무제는 몸소 맞이하여 예배 공경하고 보운전(寶雲殿)에 있게 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공양하였다.

진제는 경의 가르침을 번역하여 전하고자 진()나라 때를 부러워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글을 번역해 내니 재일(齋日)을 넘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양나라 말년에는 도()가 쇠퇴하면서 오랑캐들이 난을 일으켜 불법을 능멸하였으며, 양이 무너지게 되자 널리 펼칠 기회를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걸어서 동쪽 땅으로 들어갔다.

또 부춘령(富春令) 육원철(陸元哲)에게로 가자 비로소 받들며 법의 인연을 물어 왔다. ‘역경(譯經)하여 전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머리 좋고 뛰어난 사문 보경(寶瓊) 20여 인을 초빙하여 십칠지론(十七地論)을 번역하여 마침내 5권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라에 난리가 그치지 않았으므로 측근에게 부촉해서 통역하여 전하게 하였다. 태보(太寶) 연간(550~551)에 이르러 후경(候景)의 청으로 돌아와서 대()에 있으면서 공양을 받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전쟁과 흉년이 연이어 일어났고 불법은 거의 무너졌다. 때마침 원제(元帝)가 새로이 황제가 되자 성왕의 뒤를 이어 나라가 밝아지고 평화가 오게 되었다. 마침내 금릉(金陵)의 정관사(正觀寺)에 머물면서 원선사(願禪師) 20여 인과 함께 금광명경(金光明經)을 번역하였고, 3(554) 2월 다시 예장(豫章)으로 돌아왔다.

또 신오(新吳)의 시흥(始興)으로 갔다가 다시 소태보(蕭太保)를 따라 재[]를 넘어 남강(南康)에 이르렀는데, 가는 곳마다 모두 번역을 하였으나 어수선한 환경이라서 몸을 의탁할 곳이 없었다.

진제가 양나라 때에 번역해 낸 경론(經論)은 총 11부였으며, 양나라 말년에 진()나라로 들어가서 다시 경론을 번역하였으니 뒤에 기술한 바와 같다.

장방록(長房錄)내전록(內典錄)등의 목록에는 십팔부론(十八部論)1권이 있고 역시 진제의 번역이라 하였으나, 이제 그 문구를 찾아보았더니 이 논은 진제의 번역이 아니었다. 이미 부집(部執)이 같아서 두 번 번역했다 하기가 맞지 않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는 삭제한다. 별록(別錄)에서 기술한 것과 같다. 금광명소(金光明疎)626권이 있는데, 모두 진제가 지은 것이지만 역시 여기서는 삭제한다.장방록내전록등의 목록에서는 또 천감(天監) 15(516) 말에 도현(道賢)우루빈경(優婁頻經)1권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또 바로 헌상(獻上)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자세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의록(疑錄)에 편입시키고, 여기서는 삭제하고 기재하지 않는다.

 

(8) 석혜교(釋慧皎)

고승전(高僧傳) 14권서록(序錄)1권이고 전()13권이므로 합쳐서 14권이다. 천감(天監) 18(519)에 지었다. 장방록내전록두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114권이며, 그 책은 현재 있다.

 

사문 석혜교는 씨족(氏族)은 확실하지 않으며 회계(會稽)의 상우(上虞) 사람이다. 학문이 내외(內外) 전적(典籍)에 통달하였고, 널리 경()과 율()을 가르쳤다.

가상사(嘉祥寺)에 머무르면서 봄과 여름에는 법을 널리 펼쳤고 가을과 겨울에는 저술에 종사하여 열반경(涅槃經)범망경(梵網經)의 의소(義疎)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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