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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3 불교(개원석교록 6권 12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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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612

 

지승 지음

 

이상은 1425권이다. 대승오음론을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는 모두 입장경(入藏經)에 있으나, 장방록(長房錄)등의 실역록(失譯錄)에는 빠져서 기재되어있지 않았다. 그 문구(文句)를 찾아보았더니 이는 시대가 오래 된 번역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양말(梁末)의 번역에 편입시키고, 양나라 때의 실원[梁代失源]이라고 하였다.

 

15) 후위(後魏) 시대

후위 원()씨는 처음에 항안(恒安)에 도읍하고 있다가 도읍을 남쪽 낙양(洛陽)으로 옮겼으며 후에 업()으로 옮겼다.또 후위라고 하였다. 처음 도무제(道武帝) 황시(皇始) 원년 병신(丙申, 396)곧 동진(東晋)의 태원(太元) 21년이다.으로부터 마지막 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靖帝) 무정(武定) 8년 경오(庚午, 550)에 이르기까지 무릇 13() 155년 동안5()는 항안에 도읍하였으며,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18(494)에 이르러 남쪽으로 천도하여 7()가 낙양에 있었으며, 마지막 1()가 업에 도읍하고 있었다.에 승려들과 속인 12인이 번역한 경()ㆍ논()ㆍ전() 등은 총 83274권이다.그 중에서 73255권은 현재 있으며, 1019권은 궐본이다.

 

후위[元魏]의 사문 석혜각(釋慧覺) 113. ()ㆍ경

사문 석담요(釋曇曜)37. 경ㆍ전()

사문 길가야(吉迦夜)519. 경ㆍ논ㆍ전집

사문 담마류지(曇摩流支)38.

사문 석법장(釋法場)11.

사문 늑나마제(勒那摩提)39.

사문 보리류지(菩提留支)30101. 경ㆍ논

사문 불타선다(佛陁扇多)1011. 경ㆍ논

바라문(婆羅門) 구담반야류지(瞿曇般若流支)1892. 경ㆍ계()ㆍ논

왕자(王子) 월바수나(月婆首那)37.

사문 비목지선(毗目智仙)55.

사문 달마보리(達磨菩提)11.

 

(1) 석혜각(釋慧覺)

현우경(賢愚經) 13권혹은 15, 또는 16, 혹은 17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현우인연경(賢愚因緣經)이라고도 한다. 도혜의 송제록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13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혜각은 담각(曇覺)이라고도 한다. 승우(僧祐)는 담각이라 하였는데, 양주(涼州) 사람이다. 그의 높은 경계는 하늘에 닿았으며, 풍신(風神)은 시원하게 깨쳤으며, 계율의 경지[戒地]가 맑게 빼어나고, 슬기로운 감식(鑑識)은 막힘없이 통하였다.

우전국(于闐國)에서 경의 범본(梵本)을 얻어 왔다. 그는 태무황제(太武皇帝) 태평진군(太平眞君) 6년 을유(乙酉, 445)에 우전국으로부터 고창국(高昌國)으로 돌아와서 사문 위덕(威德)과 함께 현우경1부를 번역하였다. 정매(靖邁)역경도기(譯經圖記)에 보인다.()나라 사문 승우(僧祐)현우경기(賢愚經記)를 살펴보면 하서(河西) 사문 담각(曇覺)ㆍ위덕(威德) 등 모두 8인이 뜻을 맺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멀리까지 가서 경전을 찾았다. 우전국(于闐國)의 대사(大寺)에서 반차우슬(般遮于瑟) 법회를 만났다. 반차우슬이란 중국말漢言로는 5년마다 모든 대중들이 한데 모인다는 뜻이다. 삼장(三藏)의 여러 학승들이 저마다 법보(法寶)를 널리 펼쳐서 경을 설하기도 하고 율을 강하기도 하여 그의 학업(學業)에 따라 가르쳤다. 그 때에 담각 등 여덟 스님들은 그 인연에 따라 나누어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다투어 범음(梵音)을 익히고 중국말로 뜻을 분석하여 정밀하게 번역하여 저마다 들은 것을 써 두었다. 고창국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모아 1부를 만든 것이다. 그들이 유사(流沙)를 넘어 양주로 이르렀는데, 그 때의 사문 석혜랑(釋慧朗)은 하서(河西) 지방의 종장(宗匠)이어서 도업(道業)이 깊고 넓었으며 방등경(方等經)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 경에서 기록한 근원이 되는 것은 비유(譬喩)에 있다고 생각된다. 비유에서 밝히는 것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기재한 것이므로 선과 악이 서로 바뀌는데 있는 것이니, 곧 어진 이賢者와 어리석은 자愚者로 분류하게 된다. 앞 시대에 전한 경전에서 이미 비유라는 제목이 많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이름을 바꾸어서 현우(賢愚)라고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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