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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38 불교(개원석교록 6권 7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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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67

 

지승 지음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 2권또한 바로 문수문경(文殊問經)이라고도 한다. 천감(天監) 17(518)에 점운관(占雲館)에서 번역하였다. 원담윤(袁曇允)이 붓으로 받아쓰고, 광택사(光宅寺) 사문 법운(法雲)이 자세하게 교정하였다.

보살장경(菩薩藏經) 1

해탈도론(解脫道論) 12권또한 13권이라고도 한다. 천감 14(515)에 점운관에서 번역하였다.

아육왕경(阿育王經) 10권혹은 대()자가 위에 붙기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西晋) 안법흠(安法欽)이 번역한 육왕전(育王傳)과 동본이역(同本異譯)이다. 천감 11(512) 620일에 양도(楊都)의 수광전(壽光殿)에서 번역되었다.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은 1032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장방록속고승전에 모두 보이는데, 모두 부수(部數)와 이름을 자세하게 나열하지는 않았다.

 

사문 승가바라는 중국말로는 중개(衆鎧) 또는 승양(僧養)이라 부르며, 부남국(扶南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게 깨달아서, 일찍이 불법과 인연이 있었다. 비록 경론을 갖추어 탐구하였지만 대법(對法 : 아비달마)도 두루 익혔다.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도리를 깨달은 경지는 점점 유포되어 해남(海南)까지 명성이 퍼졌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에는 율장(律藏)에 두루 정통하였고, 뜻은 방편을 관하는데 힘썼으며, 즐거이 중생 교화하는 일을 받들어 했다.

()나라에서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소문을 듣고 뱃길을 따라 제나라 서울에 이르러 정관사(正觀寺)에 머무르면서 천축 사문 구나발타(求那跋陁)의 제자가 되었다. 다시 구나발타로부터 방등경(方等經)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여름 한 철이 지나기 전에 널리 섭렵하여 거의 통달하였고, 이어 여러 나라의 글자와 말도 이해하게 되었다.

제나라가 패망하고 도의 가르침도 무너지자, 승가바라는 고요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외부 사람과 사귀는 일을 끊고 한적한 방에 머물면서 마음을 정양하며 공부만을 하였다.

대량(大梁)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뛰어난 이들을 찾고 모았는데 천감(天監) 5(506)에 왕의 부름을 받아 양()의 서울 수광전(壽光殿)과 화림원(華林園)과 정관사(正觀寺)와 점운관(占雲館)과 부남관(扶南館) 등 다섯 곳에서 경을 번역하였다.

곧 천감 5년 병술(丙戌, 506)에서부터 보통(普通) 원년 경자(庚子, 520)에 이르기까지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10부를 번역하였다.그 범본(梵本)들은 모두 만다라선(曼陁羅仙)이 가져 온 것이다. 장방록등의 목록에서는 승가바라는 다시 육왕전(育王傳) 5권을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으나 그렇지 않다. 앞의 육왕경(育王經)이 바로 이 육왕전이다. 그러므로 거듭 싣는 것은 옳지 않다.

처음 경을 번역한 날에는 무제(武帝)가 수광전의 법좌(法座)에 몸소 참석하여 그 글을 받아썼다. 그런 뒤에야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맡겨 그 경본을 다 번역하게 하였다. 칙명으로 사문 보창(寶唱)ㆍ혜초(慧超)ㆍ승지(僧智)ㆍ법운(法雲)과 원담윤(袁曇允) 등에게 상대(相對)하게 하여 주소(注疎)를 내게 하였다. 그 내용을 꾸미는 데에도 차례가 있었고 번역의 근본 취지를 빠뜨리지 않았다. 천자(天子)가 아주 융숭하게 예로써 대접하였으며, 이들을 인접(引接)하여 가승(家僧)으로 삼고, 담당 관리에게 물품을 공급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도인이나 속인들이 이들을 달리 보게 되었다.

승가바라는 사재(私財)를 모으지 않았고, 그에게 보시한 물건으로는 머무를 절을 세웠다.

태위(太尉) 임천왕(臨川王) ()은 대접과 예우가 매우 융숭하였다. 보통 5(524)에 병이 나서 정관사(正觀寺)에서 입적하였으니, 그 때의 나이는 6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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