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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11 불교(개원석교록 8권 28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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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828

 

지승 지음

 

집고금불도론형(集古今佛道論衡) 4내전록에 보인다. 앞의 3권은 용삭(龍朔) 원년(661)에 서명사에서 지었고, 4권은 인덕 원년(664)에 지었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동하삼보감통록(東夏三寶感通錄) 3권또한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이라고도 한다. 내전록에 보인다. 인덕 원년(664) 여름 6월에 청관정사(淸官精舍)에서 지었다.

속고승전(續高僧傳) 30내전록에 보인다.

광홍명집(廣弘明集) 30내전록에 보인다.

이상은 881권이며, 그 책이 현재 모두 있다.

사문 석도선은 속성(俗姓)이 전()씨이며, 오흥(吳興) 사람이다. 팽조(彭祖)의 후예이다. 도선은 어려서는 교상(敎相)23)을 연구하고, 자라서는 스승을 사모하여 찾아서 관동(關東)ㆍ관서(關西)와 하남(河南)ㆍ하북(河北)을 돌아다녔다. 어진 벗[賢友]을 쫓아 찾는 데는 모진 고생을 꺼리지 않았다.

밖으로는 9(九流)24)를 꿰뚫었고, 안으로는 3(三學 : ..)에 정통하였으며, 계의 향[戒香]은 맑고 향기로웠고, 정의 물[定水]은 맑고 잔잔하였다.

도선은 법의 성을 보호하고[護法城] 지키고자 쉬임없이 저술하였다. 특히 율장(律藏)을 공부하여 계율에 맞도록 문장의 뜻을 삭제하고 보충하였다. 항상 종남산(終南山)에 있으면서 그 뜻을 견고하게 지녔다. 무릇 수찬(修撰 : 編纂)한 책은 모두 당대에 유행하였는데, 호법강요(護法綱要)는 이 목록에 실렸으며, 그 밖에 따로 수행한 문은 내전록(內典錄)에 있다.

정관(貞觀) 말년(649)에 비로소 수집(修緝)하는 일을 시작하여 사분율산보수기갈마(四分律刪補隨機羯磨)8부를 지었다. 내전록에는 다시 후속고승전(後續高僧傳)10권이 기재되어 있는데, 그 책을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5) 석현응(釋玄應)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25내전록에 보인다.

이상 125권은 현재 그 책이 있다.

사문 석현응은 대자은사(大慈恩寺)에서 경을 번역하던 사문이다. 사물을 널리 보고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여[博聞强記] 숲과 동산[林苑]의 넓은 표지[宏標]를 거울같이 밝혔다. 근본과 갈래[本支]를 궁구하고 검토하여 고금(古今)을 아우른 근본[互體]에 통달하였다. 그러므로 글의 원류를 대조하여 바로잡고[讎校] 시대를 헤아려 조사해서 교감하였다. 또한 글이 유치하고 고루하고 거칠고 헛된 것은 깎아내고, 경박하면서 근거가 없고 뒤섞인 것은 지워 없앴다. 세상에 널리 통한 풍속을 깨치어 가르침을 드러내고, 집략(集略)하여 아름다움을 더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문자(文字)의 홍도(鴻圖 : 큰 계획), 말과 소리[言音]의 본보기[龜鏡]라 할 수 있다.

정관(貞觀) 말기(649)에 칙명으로 역경에 참예하여 사물의 전말[經緯]을 정리하여 바르게 하고 사실을 기록하는데 자문하였다. 그리고 장경(藏經)을 찾아 열람하고 모아서 음의(音義)를 만들었다. 주석(注釋)을 달고 문자의 뜻을 해석(訓解)하는데 여러 전적에서 인용하였으므로 증거가 매우 확실하고 분명함을 알 수 있었다.

옛날 고제(高齊) 때의 사문 석도혜(釋道慧)가 일체경(一切經)의 음의(音義)를 달면서 글자에 의거하여 그대로 읽는 것과 반절(反切)로 읽는 것을 일찍이 추적하여 살피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교()의 뜻을 잃어버리게 하고 바른 풍속을 참으로 헷갈리게 하였다. 마땅히 지은 자가 항상 지켜야할 도리[恒倫]와는 전혀 다르게 되었다. 현응은 본래 근거되는 사실을 조사하여 밝혀서 사실대로 기록하여 쓴 것이니, 곧 만대(萬代)의 사종(師宗)이요. 또한 당대[當朝]에서는 짝을 찾기가 어려웠다. 한스러운 것은 겨우 조금만을 마쳤고 많은 일을 남긴 채, 마침내 입적하고 말았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었다.

(6) 석정매(釋靖邁)

고금역경도기(古今譯經圖記) 4

이상 14권은 그 책이 현재 있다.

사문 석정매는 간주(簡州) 사람이다. 박학하여 그의 명예가 널리 알려졌다. 대당삼장(大唐三藏)이 대장경을 번역할 때 글을 짓는 대덕[綴文大德]으로 부름을 받아서 충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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