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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87 불교(개원석교록 8권 4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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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84

 

지승 지음

 

파파는 법을 전파하고 교화하겠다는 서원으로 그 어려움과 위험을 꺼리지 않고 멀리 총하(葱河)를 건너 중국에 왔다. 그가 경유한 길은 4만여 리에 걸친 먼 길인데도 몸소 범어로 된 원본 경전을 가지고 와서 그 모두가 번역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뛰어난 인재는 말을 못하여 윤음(綸音:임금의 敎旨)을 펴지 못하니, 본래의 뜻은 허물어지고 아름다운 마음은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 후에 병이 들어 스스로 낫지 못할 병임을 알고 옷과 공양구를 나누어 주었다. 온갖 청정한 업을 짓고 단정하게 앉아서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황제에게 글을 올려 몸을 보시하겠다고 하자, 황제는 명을 내려 특별히 이를 허락하였다. 얼마 뒤 그는 승광사(勝光寺)에서 입적하였으니, 그때 나이 69세였다. 동궁(東宮)은 명을 내려 20인의 사람을 보내 시신을 앉은 자세로 가마에 태워 장지로 보냈다. 다비[闍維]를 마치고 사문 현모(玄謨)가 남은 뼈를 수습하여 그를 위하여 승광사에 탑을 세웠는데, 혜승(慧乘)스님의 탑 동쪽에 서 있다. 이때가 곧 정관(貞觀) 7(633) 46일이었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애통해 하면서 법륜(法輪)이 구르는 것을 멈추었다고 하였다. 중생을 인도할 이가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내전록(內典錄)에는 이때에 크게 범문(梵文)을 수집하여 그 일을 널리 후대에 전하여 윤택하게 하려 한 것인데, 한스럽게도 당()나라 말로 번역하여 널리 교화 할 장인이 실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로써 범문의 보배가 널리 유포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10년 동안 번역이 3부만의 공헌에 그쳤으니 몹시 슬퍼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그 서문(序文)의 사실을 상고하여 밝히건대 번역한 때의 연월은 3(629) 3월에 번역을 시작하여 7(633) 봄에 그 공이 끝났다고 되어 있다. 속고승전(續高僧傳)에서는 6(632)에 끝마쳤다고 하였다. 이렇게 전해진 기록들은 모두 일정하지 않아서 스스로 모순을 이루고 있었다.

(2) 석법림(釋法琳)

파사론(破邪論)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내전록(內典錄)에 보인다.

변정론(辯正論) 8내전록에 보인다.

이상은 210권이며, 그 책이 현재 있다.

사문 석법림은 성()이 진()씨이며, 원래는 영천(潁川) 사람인데 그의 먼 조상이 벼슬을 따라 양양(襄陽)에 살게 되었다. 어릴 적에 출가하여 유교와 불교의 전적을 두루 공부하여 사의(詞義 : 글의 뜻)에 널리 통달하였다. 금릉(金陵)과 초영(楚郢)에서는 도()를 좇아 학문에 들어가는 길을 물었고, 문원(文苑 : 문인들의 모임)과 재림(才林)은 찾아가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의 뜻은 강기(綱紀)의 굳센 데 있어 들뜨거나 사치스런 일은 하지도 않았고, 들에서 살면서 나무 열매를 먹고 청계(靑溪) 등의 산에서 낮에는 불경의 가르침을 받고 밤이 되면 속전(俗典)을 읊고 보았다. 그러므로 내외 전적의 문장이나 뜻과 유문(遺文 : 남긴 글)의 종횡으로 귀취한 바를 정확하게 알아 그의 포부를 모두 폈다. 풍운(風韻)은 조용하고 품위 있었으며 덕을 숨기고 몸을 감추되, 기질을 드날렸고 풍신은 날면서 바야흐로 신묘한 계략을 펼쳤다.

()나라 말엽에 난리를 만나 관중(關中)에 들어가서 풍화를 관찰하였고, 8(八水)4)를 이리저리 떠돌고, 3(三秦)5)을 돌아보았으며, 늘 괴리(槐里)6)와 선종(仙宗)으로써 서로 그 이름과 속내[名實]를 살폈다.

예전 형초(荊楚)에 있을 때는 그 글을 대략만을 알아서 비밀한 법과 기이한 장구(章句)를 아직 통괄하여 찾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스스로 그 형상과 복장을 같이하지 않는 이에게는 그의 본래의 마음을 말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 종지(宗旨)를 체득하여 스승이 되었고 마음의 산란함을 고요하게 하였다. 후에는 이에 임시방편으로 법복(法服)을 버리고 여러 해 동안 머리를 기르고서 밖으로는 유교를 통솔하고 안으로는 신선의 기술을 희구하였다. 마침내 의녕(義寧) 초년(617)에는 거짓으로 두건(頭巾)과 베옷[褐衣]을 입고 그들을 따라 관()에도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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