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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13 불교(개원석교록 8권 30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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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830

 

지승 지음

 

이상 112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아지구다는 당나라 말로는 무극고[無極高]라 부르며, 중인도 사람이다. 학문은 대승[滿字]을 궁구하고 행동은 둥근 구슬[圓珠]처럼 깨끗하였다. 오명(五明)을 정밀하게 단련하고, 삼장(三藏)을 미묘하게 통달하였다. 게다가 보살[大士]로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고향과 나라를 미련없이 버렸다. 불교를 널리 유포하기 위하여 어려움과 위험을 두려워함이 없었다. 마침내 서쪽으로 설령(雪嶺)을 넘고 동쪽으로 사하(沙河)를 건너 여러 해 동안 어려움을 겪으면서 황제가 있는 대궐까지 왔다.

천황(天皇) 영휘(永徽) 3년 임자(壬子, 652) 정월에 범본(梵本)을 많이 가지고 장안(長安)으로 왔는데, 칙명으로 범본(梵本)을 자은사(慈恩寺)에 안전하게 두었다[安置]. 사문 대승종(大乘琮) 16인과 영공(英公)ㆍ악공(鄂公) 12인이 무극고를 청하여 혜일사(慧日寺)의 부도원(浮圖院)에서 다라니(陁羅尼)를 세워 널리 모아 단()을 모았는데, 단에 필요한 물자는 모두 나라에서 공급하였다. 법이 성취한 날에는 영험하고 기이한 상서가 자주 내렸다. 경도에 있는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가 만나기 어려운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사문 현개(玄揩) 등이 간절히 청하여 그 범본을 번역하였다. 후에 영휘(永徽) 4년 계축(癸丑, 653)으로부터 5년 갑인(甲寅, 654)에 이르기까지 혜일사에서 금강대도량경(金剛大道場經)에서 중요한 다라니를 추려 뽑아 번역하여 12권을 모아 만들었다. 사문 현개 등이 붓으로 받아 적었다.

그때 중인도 대보리사(大菩提寺) 스님 아난률목차(阿難律木叉)와 가섭(迦葉) 등이 경행사(經行寺)에서 공덕천법(功德天法)을 번역하여 이 다라니집경10권 안에 편입하여 넣었으나 따로 기록하지 않는다.

(10) 석현운(釋玄惲)

제경요집(諸經要集) 20권현경(顯慶) 연간(656~660)에 서명사(西明寺)에서 지었다.

이상 120권은 그 책이 현재 있다.

사문 석현운은 본래 이름은 세도(世道)이며, 율학(律學)에 명예가 높이 드러난 스님이다. 옛 현량(賢良)한 이들은 사모하고 중히 여기면서 글 짓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며, 아울러 여러 경[衆經]에 초소(鈔疏)와 주해(注解)를 달았다. 처음에는 서명사(西明寺)에서 살았는데, 대덕(大德)으로 천거되어 불러 갔다.

현경(顯慶) 연간(656~660)에 일체경(一切經)을 읽으면서 그 가운데서 요긴한 대목을 베껴 1부를 편찬하였으니, 그 이름을 제경요집(諸經要集)이라 하였다. 그 밖의 사실은 내전록(內典錄)에 기재되어 있는 것과 같다.

(11) 석언종(釋彦悰)

집사문불배속의(集沙門不拜俗議) 6내전록에 보인다.

이상 16권은 그 책이 현재 있다.

사문 석언종은 학식과 도량이 모두 민첩하고 여러 경에 널리 밝았으며, 문장을 잘 엮었으며 더욱 저술에 교묘하였다.

천황(天皇)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 662)에 조칙으로 군왕(君王)과 양친(兩親)에게 절[]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행여 나라의 풍속과 교화[風化]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 많은 관리들에게 두루 의논하게 하였다. 그때 사문 도선(道宣) 등이 함께 상소를 올려 조정의 의견을 들었다. 이는 이단(異端)이라는 대중들의 의론을 소속 관아에 올려 보냈다. 그래서 황제는 친히 보고 나서 칙명을 내려 그만두게 하였다.

석언종은 후대에 그런 사실을 듣지 못한 이가 있을까 염려하였다. 그 때문에 이런 사실과 아울러 전대(前代)에 있었던 일과 선현(先賢)들의 문답을 찬집하여 집사문불배속의(集沙門不拜俗議)라 하였다. 이것을 후대에 전하여 영원히 본보기로 삼게 하고, 법성(法城)을 지키는 담장과 해자[牆壍]가 되게 하여 현묘한 도풍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아울러 대당경사사록(大唐京師寺錄)도 지었는데 그 당시에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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