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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02 불교(개원석교록 8권 19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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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819

 

지승 지음

 

이때 도인ㆍ속인 할 것 없이 그들이 머문 곳을 찾아 달려가는 바람에 수레와 말소리가 요란하였고, 수십만의 군중들이 마치 부처님께서 하생(下生)하신 것을 만난 듯하였다. 곧 도성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사람과 동물들이 에워싸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여 나아갈 수 없었어, 마침내 별관(別館)에 멈추었다. 밤새도록 사람들의 접근을 금하고 길을 차단하고 살피면서 길 가에 머물렀다. 옛 성()의 서남쪽 길을 따라 장안의 주작가(朱雀街)에 이르렀는데, 도정역(都亭驛) 20여 리를 스님을 친견하기 위하여 줄지어선 군중들이 한결같이 절을 하였기 때문에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때 황제는 낙양(洛陽)으로 행차하였기에 현장은 곧 모시고 있던 모든 경전과 불상을 홍복사(弘福寺)로 보냈다.

이때 수도[京邑]의 대중 스님들은 다투어 깃발과 휘장을 줄지어 내걸고 장엄하게 운반을 도왔다. 4부 대중이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이 처음 도착하였을 때보다 배나 많았다.

이때를 맞아 다시 상서로운 구름이 해[]의 북쪽에 나타났으며, 그 둥근 모습이 마치 일산과 같았다. 분홍빛과 흰빛이 서로 비추면서 불상 위에 이르러 뚜렷하게 둥근 수레바퀴 모양의 광명을 발하였다. 이것은 이미 해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일광이 아니었으므로 이 모습을 보고 모두 감탄하며 우러러보았다. 광명이 오시(午時)에서 해질 때까지 비추었는데, 불상이 홍복사에 안치된 후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그리하여 5일 동안 사민(四民:士農工商)은 생업을 멈추고 7부 대중19)은 귀의하여 법을 받들게 하였다. 이 기간 동안 더욱 높이 우러러 본 일은 예전부터 그 예가 거의 없는 일이었다.

현장은 황제를 알현하여 낙양궁(洛陽宮)의 의란전(儀鸞殿)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는 황제의 각별한 위문(慰問)을 받고 면전에서 황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황제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궁궐의 문을 닫는 북이 울린[閉鼓] 후에 그쳤다. 황제는 융족(戎族)이 병사를 일으켜 요하 지방을 침범한 죄를 묻고자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려 하면서 동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병고로 간곡하게 사양하였으므로 황제의 청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에 앞서 중인도의 보리사(菩提寺) 스님 세 분이 경전을 보내왔는데, 경이 처음 도착하자 칙명을 내려 경성(京城) 사찰에 두루 재()를 마련하게 하고, 이어 홍복사(弘福寺)에서 대화엄경(大華嚴經)등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 후 오래지 않아 현장에 관한 소식이 다시 전해 오게 되자, 곧 명하여 잠시 동안 번역을 중단하게 하고 현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번역하게 하였다.

먼저 낙양궁에서 황제를 뵈올 적에 아무 꺼림 없이 생각을 깊이 주고받고 번역을 위해 현명한 사람을 찾아 발탁하기를 진언하였다. 황제는 말하였다.

법사는 당나라 말과 범어(梵語)를 모두 아름답게 구사하고 말과 이치가 화통하고 민첩하니, 장차 무리들이 한갖 치우치고 고루한 것을 들추어내게 되면 끝내 성전(聖典)을 이지러지게 할까 두렵습니다.”

현장이 대답하였다.

예전에 두 진나라[二秦]에서 번역한 문도들은 3천이나 되었습니다. 비록 다시 번역하여 전하면서도 오히려 후대(後代)들이 견문이 없는지라 의심을 품고 믿음을 어길까 두려워하였습니다. 만일 현명한 이들을 발탁하여 함께 현오한 법을 받들지 않는다면, 어찌 편협(偏狹)한 사람이 망령되이 조정의 위임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몇 번 또 간곡하게 청하자, 마침내 허락을 내렸다. 그리고 황제는 말하였다.

법사가 길을 떠난 후에 짐()은 목태후(穆太后)를 위하여 서경(西京)에 홍복사(弘福寺)를 지었습니다. 거기서 번역하게 하면서 필요한 사람과 물자와 관리의 조력 등을 다 같이 방현령(房玄齡)과 상의하고 헤아려 힘써 넉넉하게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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