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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92 불교(개원석교록 8권 9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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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89

 

지승 지음

 

황제는 이 일을 듣고 마침내 죄를 가하지 않고 칙명으로 익부(益部)의 승사(僧寺)로 옮겨가 머무르게 하였다. 가는 도중에 백뢰관(百牢關) 보리사(菩提寺)에 이르렀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의 나이 69세였다.

사문 혜서(慧序)는 고통의 길을 겪고 마음을 쇠붙이도 끊을 만큼 단단히 하여, 낮이나 밤이나 함께하면서 위로하고 달래며 받들었다. 그래서 혜서의 무릎 위에서 임종하였다. 혜서는 통곡하면서 쓰러졌고, 그가 흘리는 눈물은 마치 소나기와 같았다. 모든 관()곁에 있던 도인과 속인들을 불러서 동산(東山)의 꼭대기에 장사지내고, 그 자리에 백탑(白塔)을 높이 세운 뒤 명()을 새기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길을 지나면서 바라본 사람들은 그 사실들을 알고 곧 눈물을 흘렸다.

법림이 지은 시부(詩賦)ㆍ계송(啓頌)ㆍ비표(碑表)ㆍ장뢰(章誄 : 조문)와 대승의 교법과 아울러 모든 논()ㆍ기()ㆍ전()을 합치면 30여 권이 된다. 모두 비문[金石]에 그의 자유로운 행적[風韻]을 새겨 넣었고, 화려한 비단으로 그의 문사(文思 : 문장에 담긴 사상)를 아름답게 채색하였다. 그의 기품은 우아하고 편안하였고, 아름다움이 더욱 불꽃처럼 타올랐다. 또 그는 근기에 응하면서 말하여 인도하였으며, 일할 때에도 일에 맞게 말하였다. 그 말은 궁상(宮商)15)에 어울리고 그 뜻은 현적(玄籍 : 현묘한 서적)에 꼭 들어맞았다.

그리고 진세영(秦世英)은 끝내는 미친 듯이 간특을 부리다가 주살(誅殺)을 당하였으므로 관청이나 민간에서는 그의 죽음을 괴이하게 여겼다. 후에 유진희(劉進喜)와 이중경(李仲卿)과 부혁(傅奕)은 서로 교화되어 왕래하였다. 그 때문에 그들의 유문(遺文 : 故人이 생전에 쓴 글)에 과거의 행적을 적게 되었으니, 참으로 만대(萬代)의 관할(錧轄: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만하다.

(3) 석현장(釋玄奘)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 600번경도(飜經圖)에 보인다. 부처님께서 4() 16()에서 설하신 경이다. 현경(顯慶) 5(660) 정월 1일에 옥화궁사(玉華宮寺) 옥화전(玉華殿)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용삭(龍朔) 3(663) 1020일에 끝마쳤으며, 사문 대승광(大乘光)ㆍ대승흠(大乘欽)ㆍ가상(嘉尙) 등이 받아 적었다.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 1내전록(內典錄)에 보인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요진(姚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 등이 번역한 경과 동본(同本)이다. 정관(貞觀) 22(648) 101일에 방주(坊州) 의군현(宜君縣) 옥화궁(玉華宮) 홍법대(弘法臺)에서 번역되었으며, 직중서(直中書) 두행의(杜行顗)가 받아 적었다.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1내전록에 보인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마하반야대명주경(摩訶般若大明呪經)과 같는 동본이다. 정관 23(649) 524일에 종남산(終南山) 취미궁(翠微宮)에서 번역되었으며, 사문 지인(知仁)이 받아 적었다.

대보살장경(大菩薩藏經) 20내전록에 보인다. 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었으며, 12()에 해당한다. 정관 19(645) 52일에 서경(西京) 홍복사(弘福寺) 번경원(飜經院)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92일에 마쳤으며, 사문 지증(智證)이 받아 적었고, 도선(道宣)이 문장을 증의하였다.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 10내전록에 보인다.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13()과 옛 방광십륜경(方廣十輪經)과 동본이다. 영휘(永徽) 2(651) 정월 23일에 서경(西京) 대자은사(大慈恩寺) 번경원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629일에 마쳤으며, 사문 대승광(大乘光) 등이 받아 적었다.

현무변불토공덕경(顯無邊佛土功德經) 1내전록에 보인다. 이 경은 화엄경(華嚴經)』 「수량품(壽量品)의 이역(異譯)이다. 영휘 5(654) 928일에 대자은사 번경원에서 번역되었으며, 사문 대승운(大乘雲)이 받아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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