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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73 불교(개원석교록 7권 15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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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715

 

지승 지음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으며 구족계를 받은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스승과 문도들이 뜻을 맺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법을 널리 펴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열 사람이 함께 서약하여 국경을 넘어가는 길에 가비시국(迦臂施國)을 경유하다가 그 곳에 머물러 한 해를 보냈다. 그 곳의 국왕은 그들의 스승을 돈독히 초청하여 법주(法主 : 법을 설하는 우두머리)로 삼아 받들었으므로 그 도움과 이익이 자못 컸다.

그리하여 다시 순례의 길을 떠나 곧 대설산(大雪山)의 서쪽 기슭을 넘게 되었다. 본래 그곳은 지극히 험준하고 가파른 곳이었다. 염달국(厭達國)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그 곳에 멈추어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은 들판은 넓은데다 백성들은 적어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 줄 사람이 없었다. 사나굴다는 마침내 구족계를 버리고 온 정성을 다해 그들을 공양하고 시봉하면서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의 도움으로 다행히 재앙과 횡액을 면할 수가 있었다.

또 갈라반타(渴囉槃陁)와 우전국(于闐國) 등을 지나오면서 여러 번 여름의 장마와 추운 겨울의 눈을 만나 잠시 멈추어 살았다. 그러나 이미 법을 널리 펼칠 대상도 없었으므로 임시로 거처하면서 오래 있지 않았다.

또 토곡혼국(吐谷渾國)에 도달하여 곧 선주(鄯州) 땅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때가 곧 서위(西魏)의 끝[] 원년(556)이었다. 비록 힘들고 위험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마음은 더욱 고무되어 내친김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도반 열 사람 가운데 겨우 네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북주(北周) 명제(明帝) 무성(武成) (559)에 비로소 장안(長安)에 이르러 초당사(草堂寺)에 머물게 되었다.

스승과 문도들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교화하여 이미 이곳에 온 마음의 결실을 얻었다. 그러나 다시 계단(戒壇)에 올라가서 재차 구족계를 받고 정성을 쏟아 더욱더 도에 정진하였다. 이곳에 온 이래로 도성[京華]의 지리에도 익숙해지고 수나라 말도 점점 의사를 통하게 되었다. 이름과 소문이 차차 멀리 퍼져서 당시 사람들의 흠앙을 받았으며, 황제의 초청을 받아 궁중의 후원(後園)에 들어가 함께 불법을 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별한 예우로 공양을 받았는데 모두 궁중에 있는 음식으로 공양하였다. 생각으로는 불법이 두루 통하게 하려 하였지만 스스로 이를 펼칠 길이 없어 사정을 갖추어 이를 상소하였다. 그러자 곧 특별히 칙명을 내려 그들을 위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그 안에서 거주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그 후로는 새로운 경을 번역하고 먼저 번역한 경에서 빠진 글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이미 널리 편안하지 않은 타관살이에 억매인 몸이 되어 있었다.

때마침 초왕(礁王) 우문검(宇文儉)이 촉()을 다스리게 되어 다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므로 그곳으로 가서 3년 동안 익주(益州)의 승주(僧主) 일을 맡아 보며 용연사(龍淵寺)에 머물렀다.

건덕(建德) 연간(572~577)에 불교의 시운이 땅에 떨어져 법을 펼치지 못하게 되었고, 5부 대중이 한꺼번에 속인의 옷을 입게 되었다. 이때 무제(武帝)가 명을 내려 뒤따라 경성(京城)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듭 벼슬과 녹을 더해 주며 유가(儒家)의 예를 따르도록 핍박하였다. 그러나 지조를 꼿꼿하게 굽히지 않고 죽어도 불법을 지키겠다며 두려워함이 없었다. 무제는 그 곧고 진실한 지조를 딱하게 생각하면서 놓아 주며 돌아가게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감주(甘州)로 나와서 북쪽으로 돌궐(突厥)을 경유하게 되었다. 마침 중도에서 타발가한(他鉢可汗)을 만났는데, 은근하게 거듭 머물기를 청하므로 따라갔더니 그는 다시 말하였다.

()나라에는 성괴(成壞)가 있어 스님들을 오고 가게 하며 수고롭게 하였으나, 여기에는 흥망(興亡)이 없으니 부디 뜻을 편히 가지시고 머무르십시오. 공양을 풍부하게 해 드리면서 마음에 맞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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